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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교회강의-이상하자 1510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1. 6. 07:34

2015-11-05 23:48:25

 

        
09a,b (이상하자)―이 근호 목사 이름 : 김창길 (IP:118.91.121.36)

서울 의존교회151009a (이상하자)―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1장 15절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사도 바울이 누구한테 편지를 했다, 제가 만약에 누구한테 편지를 하게 되면 이게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죠. 사도가 편지를 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되느냐?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죠. 사도라는 직분을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을 사도로 정했죠.

 

그러면 그 사도라는 직분에 무엇이 작용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일하심이 거기에 작용하고 있을 겁니다. 바울을 통해서 일하시는 작용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 돼요. 사도가 일했느냐 예수님이 일했느냐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일했느냐 예수님이 일하고 있느냐, 사도 바울한테 물어보면 되죠.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성령 안에서 일한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성령 안에서 일하는 그런 형태, 형식은 요한복음 14장 11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과 예수 믿는 사람을 대결하는 것이 아니에요.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내가 아버지 안에서 일하고 있는 일이 너희들 눈에 내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덩그러니 너희들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 일도 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하늘에 올라갔다 그러면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되는 겁니까?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일하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는 지상에 예수님께서 행하는 일의 그 본질이 하늘의 광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하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최종 선포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죠. 쉬운 예를 들면 거리에서 깡패들이 싸우고 있다. 그런데 시민들은 겁이 나서 슬슬 피하고 그런데 용감한 청년들이 와서 그 깡패들하고 맞장 싸운다면 그러면 깡패들이 하는 말이 네가 경찰이야? 네가 군인이야? 왜 우리 싸우는데 네가 나서느냐 할 때 한 5분 지나고 나서 그 뒤에 있는 분이 “내가 보냈다! 왜?” 하고 그 지역 경찰서장이 나서게 될 때에 그러면 그 앞에 청년들이 깡패하고 싸우는 일이 청년들 본인 일이에요? 아니면 경찰서장의 일입니까? 경찰서장의 일이죠.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그때만 달랑 재림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재림이라는 그 위상에 합당한 능력으로 이 땅에 주께서 보낸 자들이 가서 일을 하죠. 그 일하는데 사도 바울 같으면 사도로 일을 하고 그리고 그 사도 외에도 성령 받은 사람은 사도는 아니지만 역시 주님의 일하시는 수준에 맞도록 주님의 일하시는 것에 부합되도록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일을 하는 겁니다.

 

제가 전에 마태복음 25장에 이 소자한테 한이 곧 나한테 한 것이라는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주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주께서 일하세요. 그런데 우리가 주께서 일하시는 것을 인정을 안 하게 되면 우리 눈에는 사람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만 일한 것으로 보이 이게 사람만 일한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겁니다.

 

사람은 일하는 것으로 보이고 주님을 찾을 때는 죄 없는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지금 주께서 벌리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사람의 일로 치워버리는 그런 오류를 험하게 됩니다.

 

아까 요한복음 14장 이야기를 다시 해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나의 아버지이여! 이야기를 했을 때 사람들은 뭐라 생각했습니까? 뭐 걸핏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들먹인다고 빙정거릴 수 있겠죠. 이 말은 뭐냐, 너나 나나 똑같은 입장인데 나도 여호와 믿어! 네가 믿는 여호와 믿는다 말이야! 그런데 너는 왜 그리 유별 나느냐? 다 같이 여호와 믿으며 말씀 지키면 되지 예수 당신은 뭐 그렇게 유별나게 하나님 하면 되는데 자꾸 내 아버지, 내 아버지 하느냐?

 

그러니까 사람들이 심지어 제자들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어요? 없어요? 믿을 수가 없죠. 서로 좋게 지나면 친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납득이 돼야 되는데 내 나름대로의 세상을 보는 한단, 메시야를 보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내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해야 돼요.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이 바로 내 아버지야!”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서로 통하는 게 있는데 예수님의 요한복음 전체 이야기를 보면 오직 자기 밖에 몰라요.

 

너희들은 모르는 나만 아는 내 아버지, 상당히 유별나죠. 똑같은 현상이 지금 이 디모데후서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에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이 예수님한테 걸림돌이 되겠습니까? 무슨 걸림돌이 되겠습니까? 뭐 거리가 멀다니 뭐 시간이 이른 아침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훼손하지는 않겠죠.

 

그것을 가지고 “순수 사유”라, 순수하기 짝이 없는 사유라는 것은 생각, 순수한 생각, 이 순수한 생각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왜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 한다는 것은 보통 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순수하지가 않다는 거죠. 순수하지 않아요. 때가 묻었다. 무슨 때가 묻었는가? 반대말은 비순수함, 비 순수 사유로 생각이 되겠죠. 비 순수 사유는 때가 묻었다. 그냥 성경적으로 하면 오염 되었다. 더럽다. 죄가 끼어있다. 비 진리다.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그렇다면 왜 비 순수 사유가 오염되었다, 더럽다고 할 수 있느냐 것이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순수 사유와 비교해 보면 되는데 순수 사유는 뭐에서 탈피 되느냐,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순수 사유를 하게 되면 진짜 여기에서 참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희망하고 있었던 겁니다.

 

특히 대표적인 것이 불교이죠. 불교가 세상 사물의 참 진리를 찾아낼 때에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때가 끼면 안경에 때가 끼면 잘 안보잖아요. 흐릿하게 보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뭐를 해야 됩니까? 거울을 깨끗이 닦아야 제대로 제 면목을 볼 수 있듯이 불교의 도 닦는 일은 날마다 때가 끼는 것을 제거해야 되겠죠.

 

그래서 8정도라고 해서 바른 생각, 바른 마음, 모두 바르게 하게 되면 이 세상의 진리가 그대로 들어온다는 겁니다. 이런 불교 신자가 전 세계에 한 서너 명 밖에 안 됩니까? 많습니까? 어떻습니까? 많죠. 많다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인간의 그러한 불교적인 노림수가 이것은 교회를 다니고 안 다니고 관계없이 누구나 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유사한 속성을 지금 뿜어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잖아요. 아이고, 사는데 바빠, 돈 버는데 바빠서 교회 못 다니겠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순수 사유에 뛰어들게 되면 복음에 대해서 잘 알 수 있겠죠. 그런 희망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이를 들면 정신도 없어요. 책을 보면 정신이 어질어질해요. 그럴 때는 이러는 거예요. 젊을 때 볼걸! 성경 보면 잠이 오고 설교 들으면 잠이 오고 젊었을 때 봤어야 되는데 젊을 때는 왜 성경을 보면 잘 보입니까?

 

젊은 혈기가 어디 성경 보는데 소비하겠어요? 돈 버는데 소비하겠어요? 젊은 혈기 가지고 돈 벌고 친구 만나고 인생을 즐기는데 소비하지 늙은이처럼 성경 보면서 도나 닦고 묵상이나 하고 그런 짓 안하죠. 그것은 한가할 때로 미뤘잖아요.

 

제가 후사 이야기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순수 사유가 인간들은 희망인데 이게 인간들은 이 순수 사유가 과연 정당하냐를 묻는 거예요. 이 순수 사유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인정하십니까? 사람들의 아이디어는 뭡니까?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면 순수한 진짜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복음을 아신다고 자부하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진짜 진리는 어떻게 압니까? 늙어서? 도 닦으면? 진짜 진리를 어떻게 알아요?

 

나라는 인간 자체가 진리를 모르는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진리를 모르면 어떻게 되겠어요? 유사 진리를 만들어서 대응을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하겠죠.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어려운 거예요. 성경에서 진리라고 할 때 그래 내가 진리야! 이러면 참 쉬운데 이미 내가 성경을 접근하는 그 순간 나는 무엇을 가지고 접근하느냐 하면 유사진리를 가지고 접근을 해요.

 

지난 한 달 전 시간에 했는데 지난 시간 11절하면서 제가 뭐라 했습니까?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를 세우심을 입었다고 할 때에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바로 이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가 되는 것이 내 구원에 유리하다는 생각을 누구나 가질 수 있겠죠. 그런데 마음 자체가 보다 더 노력해서 순수한 진리에 접근하겠다는 나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 기 때문에 그렇게 될 때에 무슨 원칙이 깨지느냐 하면 진리는 누구만 안다? 예수님만 안다는 그 진짜 진리가 욕심내는 나로 인하여 그게 가려지겠죠.

 

내 안에 세상적인 시공간적인 때가 묻어서 내가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내가 알겠다고 설쳐대는 내가 진리를 가리는 오염물질로 작용한다는 것을 제가 강의 시작부터 해 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줄여서 한 마디로 말하면 설치지 말라! 나대지 마라는 이 말입니다. 성경이 우리보고 설치지 말고 나대지 말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그것을 내가 이런 상황을 갖고 싶다고 나대지 말라 이 말입니다. 나대지 말라고 한다고 우리가 안 나댈 우리는 아니지만 성경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때 그래 내가 이것을 납득해서 이해해서 내 것으로 만들면 나는 순수 사유, 다시 말해서 진리에 보다 접근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천로역정의 길을 한 걸음 더 앞서 갈 것이라는 생각이 중보자의 존재를 치워 버리는 그러한 계기가 된다는 이야기를 제가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중보자가 쓸데없는 존재로 우리 앞에 얼쩡거리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보시면 돼요. 전 세계 모든 인간이 지금도 하루 24시간 온종일 중보자를 철거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신다고 보시면 됩니다. 깔끔 말끔하게 속 시원하게 현실 사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해답을 알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24시간 평생 동안 온 종일 생각하는 것이 중보자 필요 없다! 내가 알아서 산다! 그것으로서 이미 오염 물질로 살아가고 있어요. 성경이 있는데 뭐 지키면 되지! 이게 중보자 필요 없다는 거예요. 중보자가 왜 필요한데? 내가 알아서 잘 할 텐데 중보자가 왜 필요해? 나는 순수 사유로 접근해 나가는데 중보자가 왜 필요데? 주님, 거기 계셔요! 내가 찾아갈게! 그것 때문에 성경이 있는 게 아니냐! 이런 식으로 따지는 거예요.

 

제가 사도 바울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의 경우와 비교를 했죠.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있습니까? 아버지와 함께 있죠. 보세요! 예수님 단독자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단독자 아니잖아요. 아버지와 함께 있죠.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혼자 있기를 좋아합니까? 가을이라서? 낙엽 밟아가면서 노래 불러가면서 옷깃을 세우면서 저벅저벅 12월이 되면 서리가 내리고 낙엽은 축축하게 젖어 있는데 그것을 자부작자부작 얼음 깨 가면서 걸어가면 그게 순수 사유입니까? 그러면서 그냥 밟지 않아요.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냐? 이 우주는 무엇이냐? 네가 바로 오염 물질이야! 그런 짓 하는 네가 오염물질이야!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한테 성사 될 수 없는 일인 것을 아는 거예요. 그리고 혹시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우리들과 함께 동행하는 결과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내 쪽에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항상 이것은 날조되고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을 예수님과 비교할 때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누구와 함께 있어요? 단독자자가 아니죠. 홀로 일하지 않죠. 로마 갈 때 자기가 로마가고 싶어 간 것이 아니죠. 동행자가 보내잖아요. 에녹은 누구와 함께 있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갔죠. 벌써 하나님의 믿음의 계열에는 단독으로 하는 법이 없어요. 항상 동행자, 동반자가 있어요.

 

그런데 동행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냥 동행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이 뭐냐, 하나님의 언약대로 동행하는 겁니다. 언약대로 동행한다는 말은 우리의 소원대로 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까? 소원대로 안 되죠. 왜? 언약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대치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본인만 아는 일을 윽박지르듯이 우리 인생을 지금 완전히 코너로 몰아넣고 있는 겁니다. 성도는 그것을 즐거워하고요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겁니다. 성도는 본인을 안다고요? 저는 성도로 사자성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자성어 한다고 중국 까지 갈 필요 없어요. 요 근래 사자성어로 성도란 뭐냐, “복면가왕”이에요.

 

복면가왕과 복면가왕 되기 직전에 떨어진 사람과 차이점이 뭐냐, 복면가왕에 떨어진 사람은 가면을 벗어야 돼요. 그런데 복면가왕은 가운만 하나 걸치고 다음 주일에 다시 복면 쓰고 나옵니다. 가면을 벗지를 않아요. 우리는 이 자체가 가면이에요. 우리 자체가 가면이에요. 누가 만든 가면? 내가 가면이에요.

 

“너나 가라 하와이” “코스모스” “고추잠자리” 이런 것, 내가 만든 가면을 내가 쓰고 있는 겁니다. 주체 하나가 가면이에요. 가면 밑에 가면 있고 가면 밑에 가면이 있고 벗어도 가면 벗어도 가면 도대체 우리의 바닥을 몰라요. 우리의 끝을 몰라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전과 후로 아담이 아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에덴에서 선악과 따먹기 전에도 아담 본인이 누구인지 몰랐고 따먹은 후에도 더더구나 모르고 다만 아담이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누구냐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니고 아담이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 다시 말해서 오실 메시야만 알면 아담은 구원됩니다.

 

그런데 아담이 오실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그냥 가만히 기다렸습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경찰 서장 나타날 때 까지 청년들이 가만히 있었습니까? 아니죠. 이미 경찰 서장의 지시를 받아서 동네 길거리 깡패하고 싸우는 일을 열심히 했죠. 했지만 청년들의 본인일이에요? 아니면 본인일이 아닙니까? 본인 일이 아니라 자기는 보내심을 입었을 뿐 이죠. 자기는 보내심을 입은 자죠. 누가? 경찰서장이요.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인거예요.

 

그런데 아담이라 하는 것은 단독적으로 불교처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에 대해서 실패로 끝납니다. 아담이 아담으로 성공한 경우는 한 경우 밖에 없어요. 오실자의 표상이라는 오실분과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있지만 어쨌든 간에 메시야와 동행하는 관계 속에 그런 예수 안에 있는 관계가 된다면 비로소 아담이 아담으로서의 기능이 되는 겁니다.

 

혼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혼자서 살지 마세요. 혼자서는 안 되고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줄 분이 있어야 되고 언약대로 알려줄 그분으로 인하여 아담은 그분 안에서 아담이 되는 겁니다. 전에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나 홀로 나는 누구냐 했잖아요. 그런데 아담이 은혜를 받고 나서는 하나님의 기능 안에서 나가 되죠. 그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자기가 흙이 되는 그 기능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언약 약속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알 때 아담은 장차 올 예수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제 말은 혼자 살지 말고 동행자가 있다는 거예요. 동행자 없어요? 그러면 신자 아니에요. 동행자 있어요? 그러면 당신 일은 당신 일이 아니고 주의 일입니다. 꼭 사도가 아니라도 주의 일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주의 일은 어디에서 합니까? 그 이야기를 제가 하고 싶은 거예요. 주의 사람이 주의 일을 어디서 하느냐? 신곡 시장에서 하느냐? 대구에서 하느냐? 어디서 하느냐? 그게 디모데후서에 보면 오늘 본문에 아시아에 있죠. 그러면 사도바울이 아시아, 지금 터키죠.

 

사도 바울이 터키에서 활동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소원이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허락한 공간이겠습니까? 주님이 허락한 공간이죠. 우리가 탐을 낼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아시아에서 사도바울 활동한 게 아니죠. 사도 바울이 갖고 있는 메시야적 기능을 위하여 아시아는 필요로 했던 겁니다. 시공간이니까요. 그게 공간이니까요.

 

사도 바울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예수님은 누구 안에 있죠? 아버지 안에 있죠. 그러면 사도 바울은 누구 안에 있어요? 예수님 안에 있죠. 그러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 안에 있어요? 터키 안에 있어요? 예수님 안에 있죠. 그게 쉽게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뭐 할까요?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아프가니스탄을 가든 이태리를 가든 로마를 가던 예수 안에 있어야 될 존재가 바로 오늘날 성도입니다. 왜? 동행자 때문에 그래요. 왜? 동행자의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동행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지역을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겁니다. 목사님, 뻔히 아는 이야기를 왜 그리 강조합니까? 이렇게 하시는데 뻔히 아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강조하느냐 하면 우리가 단독자로 있으면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이것을 생각하거든요. 제가 그냥 무심코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단독자로 있으면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인생 성공”을 생각합니다. 내 인생 성공한 인생인가? 아니면 내 인생 실패한 인생인가? 제가 지금 인생 성공 실패를 언급하기 이전에 죽 강의를 해 왔잖아요. 그럴 때 여러분들이 안다고 한다 이 말이죠.

 

안다고 했는데 갑자기 불쑥 제가 인생성공, 인생 실패를 거론해 버리면 이게 바로 나의 관심사야 라고 여러분들의 24시간 주된 관심사가 인생성공, 인생실패 아닙니까? 아이고 목사님 우리를 무시하네! 저는 그런 것 없습니다. 인생 성공, 인생실패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 하신다고요? 그러면 여러분 실패했을 때 기분 좋아요? 실패했을 때 기분 나쁘면 성공을 항상 고대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뭐 예수 안에 있는데! 하면서 그렇게 초연해 하는 인간이 별로 없어요. 아이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예수 안에 있는데 뭐! 그렇게 초연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나중에 성령에 의해서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우선 진입되는 진입로는 이게 나한테 이익일까? 손해일까? 나를 성공적으로 인생을 만들까? 아니면 이것은 내 집안을 완전히 말아먹게 만드는 실패하는 계기가 될까? 이것에 대해서 조마조마하고 불안불안 그런 게 있다니까요.

 

아이고, 요즘 집사님 왜 교회에 안 나오십니까? 하면 아이고 바빠서 안 나갑니다. 바빠서 인데 그 바쁜게 뭐 때문에 바쁩니까? 이것 때문에 바쁜 거예요. 실패해서 성공한다고 바빠서 못나왔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홀로 사는 거예요. 그 홀로 사는 것을 사르트라는 실존이라 했습니다. 실존의 의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먼저 존재하는 내가 세상을 구상한다는 것이 실존이에요.

 

실존이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다는 것은 존재이고 세상을 어떤 세상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내가 내 인생 경험과 기억 속에서 나는 늘 새롭게 조립해 나간다는 것이 실존입니다. 그런데 실존이 뭐보다 앞선다? 본질보다 앞선다는 이야기이에요. 내가 만들기 나름이에요. 고르기아스라는 철학자는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은 백날 해 봐야 자기 말만 한다. 왜? 내가 하는 말 잘 못 알아듣고 자기가 하는 말을 일방적으로 해석하니까 말 해 봐야 자기 말뿐이다 따라서 진리는 없다. 더 나가서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다! 그때는 신에 대한 모독같이 느껴지지만 지금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든 교육이 모토가 뭐냐 하면 진리는 너 하기 나름이에요.

 

너한테 필요하거든 너한테 진리는 그거면 족하다! 진리는 네가 만들면 된다는 그게 바로 역사주의라는 겁니다. 역사라는 하는 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 각본대로 되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야 그것은 네가 만들어라! 내가 가면 그게 곧 나의 역사입니다. 초인사상이에요. 니체의 초인 사상이 그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불교가 그런 거예요.

 

제가 뭐 불교, 사르트라, 니체 이렇게 유식한 척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앞에 니체 사르트라 니체 다 지워버리세요. 철학자를 언급했지만 그거 다 빼버리면 딱 우리 사는 거하고 똑같아요. 그것을 논리적으로 정립했다 뿐이지 결국 성경은 그냥 사세요. 막 사세요. 예, 막 살겠습니다. 그냥 살면서 그게 전부 다 뭐냐, 자기를 위해서 사는 거예요. 뭐다? 인생 성공이냐, 실패냐, 이것이 문제로다! 그것 때문에 말씀 볼 생각도 안 하고 교회 나올 생각도 안하고 동행자? 그딴거 필요 없다! 동행자는 누가 뽑는다? 동행자는 내가 뽑을 거야! 내가 아쉬운 것, 내가 필요한 사람을 내가 선택해서 이제부터 너는 나의 동행자가 되어라! 그렇게 할 거야! 그 할 거야를 결정하잖아요. 그 결정권에 걸려든 사람이 누구이냐 하면 예수에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삼위일체이고, 뭐 이단, 귀신 섬기는 것 뭐 뻔 하죠. 그게 전부에요. 제가 디모데후서 펴놓고 무슨 이야기하는 겁니까? 인생 성공 실패 그거 하기 전에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요? 혼자 사는 이야기 안했죠? 이 세상은 아버지와 아들의 세상이에요! 끝! 이 세상은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왜? 전부 다 자기 혼자 살기 급급해서 사도 바울도 사도되기 전에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이 “맞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들의 집합체, 인간들의 역사가 만든 세상이 아니고 언약대로 약속대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위해서 물려준 세상이 이 세상입니다. 라고 나왔을 때 이미 사도는 누구 안에 산다? 예수 안에서 산다.

 

말로만 예수 안에서 살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그 모양새가 예수님과 아버지로 만들어 진 세상에서 우리는 주의 일을 하고 있다는 그러한 고백을 내 뿜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내 인생 책임자가 누구겠습니까? 주님이죠. 그러면 주님이 책임자가 되면 책임이 나에게서 벗어나게 되면 나에게 성공 실패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내 인생에 관여를 할 수 있으니까? 없습니까? 관여 못하죠.

 

그러면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주님의 성공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흔쾌히 받아들여서 감사해야죠. 뭐 공식 간단히 나오네요. 내가 나름대로의 성공을 생각해서 예수님까지 믿어가면서 힘을 빌려서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항상 성공 실패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성공해야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까? 10억? 20억? 50억? 어느 정도 돼야? 어떤 집은 소원이 뭐냐 하면 엄마! 우리도 집사자! 이게 소원입니다. 햇빛 보는 집사자! 이게 소원이에요. 그러면 그 아이들을 보기에 엄마는 얼마나 철딱서니 없어 보입니까? 햇빛 보는 집을 사면 두 번 다시 성공을 생각 안 합니까? 엄마! 이제 죽어도 좋아! 그래서 자살합니까?

 

왜 인간은 본인을 몰라요? 모를 수밖에 복면가왕 이거든요. 가면을 벗을 줄도 모르고 가면 안에 가면이 또 들어 있으니까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모를 수밖에 없죠.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를 자기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본인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한번 보세요. 개 키우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도 옛날에 개를 키워봤는데 개를 가지고 애들이 장난을 많이 치잖아요.

 

개에게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개를 약을 올려 보세요. 그러면 개가 눈이 안 보니까 꼬리를 물고 뱅뱅 돌면서 발작을 하죠. 그게 오늘날 신곡 시장의 인간들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발작하듯이 살아가요. 늘 버스를 타고 와 봅니다. 세상이 뭔지를 새삼 알기 위해서 강의를 해야 되니까 강의하기 전에 자료 얻어 갖고 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저 성공 실패 밖에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아까처럼 햇빛 드는 집을 사면 그게 성공으로 공공 끝!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공으로 끝나는 겁니까? 오늘 본문 내용은 아시아에서 이런 이야기부터 나오는 이 이야기는 한마디로서 구원 받은 자여! 여러분은 이미 성공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구원 받았어요? 그러면 성공한 겁니다. 더는 성공이 없습니다. 야곱이 재산이 많았잖아요.

 

야곱이 속여서 아버지 재산 다 받아 냈죠. 형을 속였잖아요. 그런데 삼촌이 자기를 속이려고 하다가 자기 반전으로 더 속여서 드라마도 그런 드라마가 없어요. 이것을 뮤지컬로 각본을 한번 써 봐야겠어요. 야곱이 두 아내 만나는 내용을 뮤지컬 각본을 써봐야겠어요. 아내 둘을 만나 1+1 해서 세일 기간에 아내 둘 얻어 살았으면 거기다가 삼촌의 막대한 재산 양까지 전부 다 건강한 염소, 양 챙겼잖아요. 성공했어요? 안 했어요? 성공했죠. 야곱은 스스로 그것을 자부했죠.

 

그게 바로 하나님이 돌베개 베고 잘 때에 하늘에서 문이 열리고 사다리 내려올 때에 그때에 그거라고 했죠. 사람들이 기도원에 왜 갑니까? 전부 다 막장 됐을 때 가잖아요. 막장 아닌데 기도원에 갈 리가 없잖아요. 들어가면서 막장 된 마당에 집안이 망하던지 이혼 직전이든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들이 기도 하는 기도 내용에 대해서 기도원 원장이 여러분, 기도 열심히 하시면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옵니다. 찬스다 해서 그때 하나님 앞에 하고 싶은 것 소원 아뢰세요. 라고 기도원 원장이 이야기하게 되면 전부 다 돌베개 베어야 되니까 기도원 밖에 나가서 돌 놓고 기도한다 이 말이죠.

 

갑자기 기도하니까 열심내서 하니까 도파민이 많이 생성돼서 갑자기 눈이 환해지면서 광채가 비치면서 사다리가 나타났을 때, 사다리라고 하는 것은 저장된 기억 속에서 사다리, 사다리 하니까 사다리가 지가 안 나오고 베깁니까? 사다리 나오게 되겠죠. 그러면 사다리에 천사가 만화책에서 본 천사 있잖아요. 날아왔을 때 그때 무엇을 기도 하겠어요? 축복을 기도 할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왜 새벽기도가 잘 되는 줄 알아요? 이게 밤이 어둡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아까 순수 사유라고 했죠.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때 순수 사유라고 했죠. 그런데 인위적으로 고요한 시간과 고요한 환경을 만드는 게 순수사유가 아니에요.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을 밖으로 구체화시키는 이미지화 시키는 하나의 작업에 불과한 겁니다. 그동안 우리가 많이 속아 왔거든요. 그 방법에 대해서는 일단 꿇어앉는다. 두 번째는 앞뒤로 흔든다. 세 번째는 목청 소리높이여 주라고 부른다. 주여! 주여! 부른다. 그 다음에 집사주세요. 라고 한다. 가끔 또 찬송을 부른다. 또 샛다 싶으면 주여! 하고 앞뒤로 흔들고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그렇게 하면 뭔가 내면의 열기가 뜨거워지는 것 같죠.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게 축복이라고 봤죠. 내가 다시 오게 되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했죠. 그런데 야곱이 축복이 뭐였습니까?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명이 보존되는 것, 브니엘 이게 축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 그동안 그 축복이 진짜 축복을 훼방질 했고 가려졌고 그게 오염물질이었어요.

 

내가 단독자로 살고자 하는 나의 뜻이지 정작 나의 의식이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된 주님의 계획을 그동안 우리가 철딱서니 없이 그것을 훼방질하고 온 겁니다. 그저 혼자 독립해서 성공적으로 살고 싶다고 천상천하유아독존 그 속성을 그대로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론대로 하면 하나님 만나도 안 죽는 거, 지옥 안 가는 것이 만약에 축복이면 그러면 축복을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또 이게 궁금들 하잖아요. 산다! 죽는다가 이미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 버렸어요. 여기 성공 속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오래살기” 오래살기는 죽음을 지연하기, 죽음을 지연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죠. 죽기 전에 해야 될 100가지 이런 것을 정해 놓고 죽음 직전에 그렇게 하는 모양입니다.

 

딸 시집보내야 되고 아들 장가보내야 되고 이렇게 할 게 많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미 살기, 죽음 지연하는데 실패로 이게 안 되게 한다면 자살함으로서 마감하겠다는 거예요. 인간은 지금 무엇을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느냐 하면 셰익스피어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거든요. 셰익스피어가 크게 잘못한 거예요. 세익스피어가 무슨 복음을 알겠습니까? 그저 말이나 글로 재주 피우는 것이 직업인데요. 작가들을 보면 짜증 나는 게 작가들 소설을 다 짜보면 몇줄 하면 다 나오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아름답게 미화해서 무슨 진리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그렇게들 해요.

 

성경에서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뭐냐 하면 의냐? 죄냐? 이런 겁니다. 오래 산다가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어! 이게 복음입니다. 교회에서 설교해야 될 것이 뭐냐,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의가 누구를 통해서 나타나느냐 그게 설교되어야지 여러분 죽기 싫죠? 아프죠? 안수하면 낫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래 살게 하는 것 안돼요. 그런 식으로 할 것 같으면 십자가지지 않고 병만 고치다가 하늘로 올라가야 돼요. 병만 고치고 귀신만 고치고 잘 먹고 잘 살게 하고 올라가면 돼요.

 

그런데 병고치고 귀신을 쫓는 것이 그게 기적이 아니에요. 너희들이 이딴 기적 원했잖아? 그런데 너희들이 이딴 기적을 원했기 때문에 내가 죽는다. 그게 바로 죄이기 때문에 이딴 아무 기적도 아닌 것을 기적을 원한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너한테 밀쳐서 죽는다. 잘 있어라! 가버리는 거예요. 죄라는 것을 죄다 보여 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 주는 거예요. 앉은뱅이가 낫고 귀머거리가 듣고 소경이 보고 본인들 입장에서 얼마나 기적이겠습니까? 물 위를 걷고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안에 동전이 들어있고 뭐 은행 근처에 사는 물고기입니까? 동전을 왜 품었어요? 은행 근처에 물고기 풀어놨어요? 하지만 그런데 현혹되었기 때문에 12제자들은 몽땅 다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버리고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다 도망갔잖아요. 다 내 뺐잖아요.

 

관심사가 셰익스피어에 관심 있죠.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제가 다른 말로 한다면 인생 성공할 것이냐, 실패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총각들 취직 안 된 사람들 추석 명절에 가게 되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됩니다. 없는 돈 들여서 촌에 갔더니만 앉자마자 촌에 외삼촌이라 하는 사람이 “너 아직 취직했나?” “장가는 언제 갈래?” “너 혹시 의인이야?” 이런 것을 묻는게 아니에요.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여, 의인 10명만 있으면 심판 안 할 거죠?” 라고 할 때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의에 있습니다. 그 나라 의입니다. 대체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인생을 나는지 그래도 이 세상에서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그런데 아시아 땅이 사도바울한테는 살게 하는 땅이 아니고 의를 전파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파하는 주께서 허락하신 제안된 공간일 뿐이에요. 내가 살기 위한 나의 삶의 터전이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의의 사람으로 일해야 되는 터전이죠. 살고 죽는 것이 왜 주제넘게 내가 걱정합니까? 내가 왜 걱정을 하죠? 살고 죽는 것을? 살고 죽는 것을 내가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 때가 되면 죽인다, 때가 되면 살린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산다! 죽는다는 그 자체가 잘못된 개념인 것을 우리가 이제는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알면 죽어도 살았고 살아도 산 것이고 예수님을 모르면 죄 속에서 링거 꼽고 병원에서 오래 살아도 그것은 죽은 거예요. 사도 바울이 누누이 이야기했습니다.

 

네 몸의 있는 육신에 있는 심장, 맥박 그런 것을 가지고 산다! 죽는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의 기능을 보여 주느냐 아니면 저주의 기능으로 진노의 그릇으로 사느냐 그게 너희들에게 시급한 문제라는 거예요. 그런 판단으로 이 세상을 다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두 번 다시 나 같은 인간되지 말고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안목으로 세상을 봐야 되는 거예요.

 

그런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 어떠냐? 그 다음 15절 나오죠.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것을 네가 아느냐? 아시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다 버렸다고요? 아시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게 관심 없어요. 자기가 오버마도 아니고 김정은도 아니고 뭐가 유명해서 다 버렸겠어요? 사도 바울에 대해서 그렇잖아요. 아는 사람은 알겠죠. 알고 버렸겠죠. 저 인간은 이단이야! 이렇게 했겠지만 모든 사람이 사도바울에게 관심 자체도 없잖아요.

 

제가 문제 낼게요. 여러분 가장 섭섭할 때가 언제 입니까? 여러분을 버린 사람, 두 번째 여러분을 잊은 사람, 세 번째 아예 여러분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 어느 게 제일 섭섭합니까? 직장 내에서 사내 연애하는데 자기는 김과장이고 예쁜 이대리가 앉아 있는데 자기는 그 이대리하고 결혼하고 싶은데 1번 이대리가 나를 찼다. 그게 섭섭하다. 2번 사귀다가 헤어졌다. 같은 말이지만 섭섭하다. 3번 사귀어 놓고는 전화를 잊었다. 4번은 아예 처음부터 사귄 적이 없다. 어느 것이 제일 섭섭합니까? 아예 처음부터 관심 없죠.

 

그런데 15절 보세요.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이 터키 아시아 사람들을 어떻게 봅니까? 뭐로 봅니까? 표준으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를 아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느냐로 표준을 잡으라고 나로 하여금 터키에 전도케 했다 이런 관점으로 보는 겁니다. 몇 명이 나를 알아 모시느냐 그런 것이 아니에요.

 

따라서 우리도 이런 마음을 지금 가져야 돼요. 나는 이 동네 와서 나 아는 사람이 많더라 이게 별 의미가 없어요. 이 동네에서 모른다고 할지라도 복음이 아는 사람이 있다면 감사하죠. 왜? 주께서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그런데 복음에 대해서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다면 이것은 노골적으로 마귀에 속한 사람이 있죠. 지금 그것을 소개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 15절과 16절, 16절을 봅시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지금 어떤 사람이 사랑을 받느냐 이게 문제가 아니고 사도바울이 세상을 볼 때 어떤 안목과 기준으로 보느냐를 지금 우리가 여기 이 기준에 동의를 하고 있느냐를 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보느냐 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복음을 알더라!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복음을 안다고 얼마나 나를 미워하는지 그런 복음적 안목을 가지고 평소에 살아가고 있느냐 이 말이죠. 그런 복음적 안목을 가지라고 지금 신곡시장, 신월동이면 신월동, 대구면 대구로 지금 사도바울이 말하는 아시아라는 시공간을 우리에게 지금 허락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좀 더 유명하냐. 안하냐 하는 유명하면 성공하고 유명하지 않으면 실패라고 그런 관점에서 보지마시고 주께서 그저 주신 하나님의 의만 생각하면서 사시면 됩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51009b (이상하자)―이 근호 목사

 

사도 바울의 안목에서 사느냐 죽느냐는 의미 없어요. 그리고 사도 바울이 훌륭해서 그랬잖아요? 훌륭한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은 성령 안에서 그래요. 성령 받았다는 것은 뜨겁다! 방언한다가 성령 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이 될 때 성령 안에 있는 거예요. 누구의 증인이 아니다? 자기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이 될 때 자기 행함의 증인 말고 예수님의 행하심의 결과물이 나라는 사실, 한번 결과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늘 주님의 결과물이 나라는 것을 양산해 낸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 할 때 누구도 그런 소리를 다 해요. 주님이 함께 하실 때는 주님이 보시는 기준이 나와야 되죠. 그게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의가 무엇이며 죄가 무엇이냐?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의 의에요. 이 말은 의가 없으면 야곱도 살수가 없어요. 야곱이 무슨 착할 일을 했습니까? 야곱은 무슨 의로운 일을 했습니까? 기껏해야 거짓말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면 야곱이 가진 의는 어디서 나온 거죠? 이상하잖아요. 야곱이 행한 것도 없는데 의가 어디서 나왔죠?

 

그것은 야곱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서 나왔죠. 하나님께서 야곱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바꿉니까? 이스라엘로 바꾸죠.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이스라엘은 반드시 의롭게 된다는 그 약속이 포함되어 있죠. 왜냐, 이스라엘의 언약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면 야곱이 의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야곱으로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그 그냥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출현되는 현장이 되겠습니다.

 

이스라엘을 뭐라 하느냐 하면 거룩한 언약의 나라라고 해요. 거룩한 언약의 나라를 이스라엘이 하는 이게 아니에요. 거룩한 언약의 나라라고 행하신 분이 이스라엘과 동행을 해요. 제가 아까 단독자가 아니고 동행이라 했죠. 단독이 아니고 동행, 단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잖아요. 어디 뭐 동행할 때 그냥 폼으로 참새! 짹짹! 오리! 꽥꽥! 이것만 시키면 동행 합니까?

 

동행한다는 말은 너희들이 알지도 못하는 그 생명의 길로 친히 앞서서 데려가 주시는 거예요. 데려가 주실 때 그냥 떼쓰고 몰고 가면 들어갈 수 있습니까? 중간에 바뀌어야 되겠죠. 뭔가 바뀐 심령으로 가야겠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함으로서 이스라엘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고 긍휼의 입혀 주시는 겁니다.

 

긍휼을 입혀 주려면 그 긍휼을 받은 상태가 어떤 상태이어야 하느냐 하면 패역한 상태가 되어야 돼요. 죄악 된 상태, 죄악 된 상태인데 그들 힘으로 그것이 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끊어졌는데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 패역마저도 긍휼을 입어서 이게 의로 전환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패역하려고 하면 나쁜 짓을 해야 될까요? 어떻게 해야 될까요? 패역이 패역 되려고 하려면 추가적으로 나쁜 짓 할 것 없어요. 그냥 막 사세요. 그냥 막 사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 들어가게 되면 말씀에 입각해서 볼 때 어느 누구도 패역하지 않은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자기 위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부 다 자기만을 챙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껏 패역하시고 마음껏 용서받으세요. 세일기간이라 이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을 만났던 사람 괜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 본인도 안 괜찮아요. 뭐 한번 성령 받았다고 사도 바울 네가 알아서 하면 된다?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에 보세요. 네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일한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5일째 일하게 하면서 뭐라 했던가요? 갇힌 세계에서 자족적인 삶이라고 했죠.

 

개방된 세계 아닙니다. 무슨 세계죠? 갇힌 세계이죠. 갇힌 세계에서 그 다음에? 불만? 아니에요. 자족! 여기가 좋사오니! 나는 세상의 천 날 보다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러면 시편 84편 이야기인데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는 말은 그 사람은 지금 누가 행하신 일로 인하여 자족한다는 말입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자기가 노동의 대가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노동의 결과물 안에서 자기는 너무 너무 좋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나오는 결과물이 뭐죠? 바로 우리 자신을 성전으로 삼는 것, 우리 자신을 성전을 만드는 작업 안에서 우리는 대 만족을 누리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을 성도한테는 그 나라 의 안에서 자족하는 거예요. 돈 가지고 자족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 의 안에서 자족하는 거예요. 자족이 되면 혼자 자족합니까? 아니면 우리라고 하는 교회의 집단적으로 자족하겠습니까? 집단적으로 자족하겠죠.

 

그러면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이 사도 바울에게 돈 대주고 잠자기 제공해 주면 그렇게 기쁜 겁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이 자기처럼 예수님 하는 일로 자족하는 게 기쁘겠어요? 진짜 복음 안에서 어느 쪽이 기쁘겠어요? 주님 안에서 감사하는 자가 기뻐 하겠죠. 바로 그 사람이 여기에 나오는 사람이에요. 17절에 로마에 있을 때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왜, 오내시보로가 왜 자꾸 사도 바울을 찾아옵니까? 사도 바울이 전당포를 합니까? 아니면 대출담당자입니까? 왜 찾아오는 거예요? 뭘 빼 먹을 것이 있다고 왜 찾아옵니까? 사도 바울이 인물이 좋아서 그래요?

 

사도 바울이 아픈 데가 없어, 가시가 없어 말끔한 순수 사유체라서 그러는 겁니까? 사도 바울은 가시가 있어요. 사탄이 주는 가시가 있어요. 뭐가 그렇게 사도 바울을 찾아오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사도가 사도직, 사도직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개인이 만든 적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맡겨준 그 직, 다시 말해서 계시가 흘러나오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맥주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소원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자기 집 수도꼭지에 틀면 맥주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틀면 맥주가 나오면 귀찮게 맥주 사러 마트에 안 가도 되잖아요. 만약에 콜라가 좋으면 틀면 콜라 아예 집에 수도관이 있어서 이쪽 틀면 콜라, 이쪽 틀면 펩시, 이쪽은 칠성사이다 하여튼 다 몸에 안 좋은 거예요. 개인 바를 하면 되겠죠.

 

그러면 사도 바울은 틀면 뭐가 나오겠습니까? 바로 주님의 계시가 나옵니다. 주님의 계시가 나오는 게 왜 그리 좋아요? 그것은 세상 전체가 누구의 세상이라고요? 아버지와 아들의 세상입니다. 그 세계에서 동안 몰랐던 그 창세전에 천상 회의할 때 하나님만 알고 있던 내용이 늘 틀 때 나오면 그 수도꼭지가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면 창세전에 하나님이 천상회의 했던 그 내용이 뭐냐?

 

그 내용이 바로 욥에도 나오고 선지서에도 나옵니다. 하늘의 의가 비같이 쏟아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긍휼이고 용서이고 사랑이었습니다. 왜? 그 만큼 세상에서는 긍휼과 사랑이 없이는 도저히 천국 갈 그런 형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의인이 몇 명입니까? 하나도 없죠. 아무도 의인이 없어요.

 

지금이라도 휘발유 붇고 라이터로 홀라당 태워도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님, 참 잘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뭐 무자비한 하나님, 사기꾼 하나님! 이렇게 할 필요 없어요. 참 잘 하셨어요! 이렇게 해야 돼요.

 

18절 봅시다.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의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옵소서! 보세요. 지금 사도와 오네시보로의 공통점이 뭡니까? 오직 주님의 긍휼이죠. 그만큼 독자적으로 본인들은 말씀에 의하면 패역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났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들어가잖아요.

 

주여! 그냥 두시면 나는 개판입니다. 라고 인정하고 들어간 거예요. 사도 바울이 평소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오네시보로도 그 집에서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본겁니다. 로마에 있을 때 부지런히 찾았어요. 하여튼 한국 사람들 명절이라고 하면 부지런히 놀러 가잖아요. 로마 왜 그리 부지런히 찾습니까? 놀러가려고 찾잖아요. 뭐 하나님의 의 찾고 긍휼 찾아서 가지는 않잖아요.

 

성지순례라고 하는 것은 성경 보는 것이 성지순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이 성지순례입니다. 뭐 돈 들여서 갈 필요 없어요. 그래도 가면 좋겠다만 은요.

 

디모데후서 오늘 한 것을 13절부터 18절까지 내용이 뭔가 한번 봅시다. 관점, 어떤 관점? 예수님과 아버지의 세계 그 관점을 보게 되면 오직 주님께서 준비한 것은 뭐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의다! 그 내용입니다. 복음이 작렬하는 그 세계의 그 복음이 보이십니까? 라고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본문을 가지고 교회들은 어떻게 설교를 하느냐 하면 이렇게 설교를 합니다. 특히 이 디모데전서 후서를 하면 목사들이 신이 났어요. 왜 신이 나느냐 하면 동역자 구합니다. 집 나간 동역자 찾습니다. 동역자 현상수배, 다른 말로 하면 물주 구합니다.

 

목사님, 동역자 구한다면서요? 제가 교회 청소 할게요! 속으로 “집사님, 내 뜻은 그런 취지가 아닌데 아이 돈도 안 되는데 청소해서 뭐하누?” “대충하고 집에 가세요!”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지난 시간에 동역자가 없어서 지금 주의 복음이 안 된다는 소리를 제가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제가 꽃꽂이 해 드리겠습니다.” “그거 알레르기 나오고 그거 돈으로 바꿔주지!”

 

물주 구합니다. 이게 동역자에요. 그래서 디모데전후서가 그렇게 교회에 인기가 있는 거예요. 돈 내놔라! 한마디로 이거예요.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는 그런 세상에서 동역자 좀 되세요. 돈 내놓고 낸 체 하지 말고 그냥 비켜나세요. 돈은 내가 쓸 테니까 돈 내기만 하세요. 동역자 성립 안됩니다.

 

왜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성경의 동역자가 되려면 사도바울의 동역자가 되려면 여기에 모네시보로도 있지만 또 골로새서에 보면 두기고가 있어요. 두기고는 사도 바울의 연락처에요. 그런데 에베소서 교회가 가장 오래 있었는데 에베소 교회 출신들이 사도바울에게 동역자들이 있었어요.

 

동역자라는 말을 이렇게 써 버리면 기존교회에서 하도 물주 구합니다. 라는 식으로 써서 성경에 나오는 말이라도 말을 쓰기가 꺼려지잖아요. 그래서 저는 말을 바꿨어요. “동심원” 중심이 같은 사람들끼리의 동그라미의 집합, 동그라미가 두 개 쓰게 되면 중심이 다 다르잖아요.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의 중심을 가졌는데 동그라미가 작은 동그라미와 큰 동그라미로 중심은 동일하게 옛날 아이스케키 통에 넣고 팔 때 아이스께키 두 개 줄게 한 개 주는 아스케끼 뽑기 판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아스케기 팔 때 그냥 파니까 안 팔리니까 보통 10원에 한 개를 주는데 뺑 돌려서 꼽아서 두 개짜리 나오면 두 개 주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 보면 애들이 두 개 탈려고 오는 거예요. 어떤 것은 10깨짜리도 있어요. 아스께끼판에 전체 대부분이 1개 2개짜리인데 바늘 겨우 들어 가는 곳에 적어놔요. 그런데 더 얍삽한 인간은 10개 짜리 뒤에 양철판을 입혀서 바늘이 튀어 나오게 해요. 사기도박이죠.

 

어쨌든 중심이 뱅뱅 도는 동심이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중심이라면 사도바울 동역자는 물주가 아니고 뭡니까? 나도 그리스도의 중심이다! 나도 이렇게 돌면 돼요. 돌면 사도바울과 이 사람이 이야기할 때 그냥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어디를 경유하겠습니까? 십자가를 경유해서 이야기하겠죠.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십자가를 경유하기 전에는 내가 무엇을 합니다가 되는데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주께서 나로 하여금 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피동적으로 바뀌게 돼요.

 

주께서 지금 이 형편대로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할 때 비로소 성령 받은 사람들끼리 소통 대화가 돼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세월호? 그렇게 주께서 물에 빠뜨렸습니다. 대화가 된다니까요. 그 다음에 뭡니까? 참 잘 하셨습니다가 뒤따라 와야 됩니다. 노란리본 다는 것은 주께서 못하셨습니다. 그런 뜻이잖아요. 집나간 애인 돌아온다고 나무에 리본을 단 것 같아요. 이것은 인간들이 분위기 띄우는 것 밖에 더 돼요?

 

인간의 존엄성이 인간의 기준이, 중심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은 마귀적 사고방식입니다. 주께 반발하는 겁니다.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런 뜻이에요. 신이시여! 일 똑바로 하세요! 이 말이에요. 걔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물에 빠뜨립니까? 똑바로 하세요! 그런 뜻이에요. 이것은 누구의 호소에요? 마귀의 호소에요. 주께서 하셨다! 뭐 우리는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로 끝나면 안돼요. 그것은 사도 바울의 복음이 아닙니다.

 

뭐라고 해야 돼요? 참 잘 하셨습니다. 그동안 15년 동안 걔들 키운다고 주께서 참 애 많이 쓰셨습니다. 철딱서니 없는 것, 패역한 인간을 14년 15년 16년 동안 키워준다고 참 주님! 이렇게 돼야 돼요. 인간들 참 철나려면 멀었어요.

 

다시 깔끔하게 이야기 해 보세요. 이 세상은 누구의 세상입니까? 인간 세상입니까? 주님 세상입니까? 주님 세상이잖아요. 주님 세상인데 어디서 반항합니까? 이 바닥이 어떤 바닥인데 이 영역이 누구의 영역인데 인간들이 거기서 데모를 해요? 얼마나 평소에 주님 앞에 불만이 그렇게 많았으면 꼬뜨리 하나 잡아서 그렇게 주님을 몰아세우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니까 삿대질 막 하죠. 만약에 그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옆집 아저씨로 와서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셨으니까 우리는 감사해야지 하면 돌에 맞아 죽었을꺼에요.

 

맞아 죽은 그것이 바로 네 소자한테 한 것이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을 던진 거예요. 지금 주님이 어쨌다는 거예요. 주님이 하자가 뭐에요? 긍휼을 입혀 주셨으면 됐지 뭘 더 원합니까? 애들이 추울 때 이불 차고 담요를 차잖아요. 그러면 엄마가 새벽에 일어나서 애들 걱정 돼서 담요를 덮어주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뭘 더 원해요? 그게 덮어 주는 사랑이라니까요. 대속의 사랑이 긍휼이 죄는 죄대로 있어요. 담요 덮는다고 인간이 달라지는 게 없어요.

 

그냥 죄를 용서, 덮어 주는 거예요. 그냥 도말하는 거예요. 피로 도말하는 거예요. 안이 시커멓지요. 왜 그렇게 하느냐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리스도의 공로 더하기 인간의 행함의 의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거예요.

 

덮어져도 문제에요. 불만도 우리 딸 결혼하는데 비가 왜 옵니까? 딸 결혼식을 미루지? 네가 뭔데 네 딸이 결혼식이 뭔데? 비가 왜 안와야 되는데? 오래 만에 유학간 아들 마중하는데 마침 내가 공항에 마중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내가 아프다, 왜 아픕니까? 네가 아프면 안되냐? 결혼식에 갑자기 맹장수술 받아서 문제가 된 그런 드라마도 있었잖아요.

 

시공간, 이것은 우리가 유리하다를 불리하다를 탓할 수 없는 그냥 주님이 허락한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적절한 시공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게 지금 터키, 아시아에 살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 디모데후서 이 복음은 우리에게 현실입니다. 늘 매일같이 반복되는 현실이에요.

 

동력자는 뭐라고요? 동심원이다. 동심의 중심에 뭐가 있다고요? 예수그리스도의 긍휼과 의다. 그러면 그들 간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갑니까?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뒤에 붙는 것이 그래서 주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안에서 불평불만 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에게 일체 허용되지 않습니다.

 

2장 들어갑시다. 1장 후반에 한 것은 사도바울의 안목으로 세상을 봅시다. 이거 였습니다. 사도바울의 안목으로 사느냐 죽느냐 이것은 문제꺼리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인생 실패냐, 성공이냐 문제꺼리가 안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 그게 바로 주님의 세계에서의 주안점, 주요 시안입니다. 시안이라 하는 것은 결재할 때 올릴 때 하는 시안인데 주요업무에요.

 

2장 봅시다.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여기 가르친다는 말이 있는데 가르친다다는 말이 성립이 되려면 가르치는 자 그룹이 있어야 되고 배우는 그룹이 있을 때 가르침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존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했죠. 특정 인물이 늘 가르치고 특정 인물이 늘 배우는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존재의 반대말은 뭐라 했습니까? 기능 또는 사건이라 했잖아요. 사건의 뜻이 뭡니까? 이벤트, 해프닝, 그 때 그때마다 일어나고 곧 소멸해 버리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디모데에 누가 가르친다는 그 모든 가르침은 요한일서 2장 27절에 보면 나오죠.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예수님을 경유하게 되면 내가 뭘 했다가 아니라 내는 이런 일을 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피동적으로 바뀐다고 했죠. 우리가 주어의 자리에서 목적의 자리로 이동시킨다고 제가 분명히 했죠. 여기도 마찬가지에요.

 

주께 기름부음이 우리로 하여금 가르친다고 했죠. 그러면 가르치는 분은 누구입니까? 기름부음이죠. 기름부음은 성령을 말하죠. 주의 기름, 주의 영을 말하죠. 성령께서 친히 가르친다면 성령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만희? 어느 목사? 누구에요? 없죠. 없어요.

 

성령을 대신할 사람이 없어요. 오직 성령이 친히 가르쳐요.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잖아요. 성령이 왔다는 증거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무엇을 증거하죠? 자기 자신의 기능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일을 증거한다고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성령의 특징이 뭐냐? 성령을 받은 증거가 뭐냐? 주님만 증거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만 증거하기 위해서는 그냥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뭐를 증거 못하게 해요? 내가 주인공이 되는 일은 성령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병행해서 증거케 합니다.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성령께서 가르치실 때 교제가 뭡니까? 뒤에서 본 한국교회입니까? 불편한 여정입니까? 출애굽기 속의 그리스도 그게 교제입니까? 성령이 하시는 교제가 뭡니까? 그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입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4장에 잘 나와 있죠.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벌거벗게 하신다 말이죠.

 

요한1서에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아무도”니까 어느 누구도 성령을 대신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그것도 친히 가르치시니까 분명히 우리가 정립했습니다. 여기에 동의하시죠. 성경이니까 동의하죠. 그러면 제가 질문 드립니다. 요한1서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도요한의 임무는 뭡니까? 가르치는 거잖아요. 가르칠 때 뭐라고 가르칩니까? 성령 외에는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거죠.

 

이번 겨울에 요한계시록 하거든요. 요한계시록 1장에 뭐라 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해 놓고 사도요한이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천사를 만나죠.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천사를 통해서 하잖아요. 천사가 사도바울에게 가르치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천사가 하는 말이 사도요한인 나한테는 절을 하라 했습니까? 절을 하지 마라 했습니까? 요한계시록 22장에서요.

 

사도요한이 천사한테 절하니까 천사가 그렇지! 옳지! 절해야지 내가 가르쳤으니까 이랬습니까? 나한테는 절하지 마세요! 라고 했어요. 내가 절을 받을 분이 아니고 절하실 분은 누구만 있다? 예수그리스도만 있다는 거죠. 그러면 천사가 개입될 때 천사가 친히 가르친 거예요? 주님이 친히 가르친 것이 됩니까? 주님이 친히 가르쳤기 때문에 천사가 하는 말이 나한테 절을 하지 말라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목사가 설교하면서 가르칠 때에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친히 가르친 방법 중의 하나가 목사로 하여금 가르치는 것이 포함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포함되겠죠.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그 목사가 하는 말이 내가 여러분을 가르친다고 하면 안 되고 아무도 여러분을 친히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가르치십니다. 라고 목사가 가르치는 그 가르침은 그야말로 가르침이 아니고 증인이 되는 거예요. 자신의 가르침의 활동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러분에게는 성령이 와 계십니다. 성령께서 친히 여러분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르치심을 받는 그 일도 목사가 기대한 일이 아니고 주님이 기대한 일로서 가르침을 받고 내가 가르치는 것도 여러분을 가르치고 싶어서 환장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허락하셔서 가르치는 것이니까 나보고 수고했다는 소리를 하지 마세요! 라는 식으로 설교를 해야죠.

 

더 나가서 제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여러분한테 방해만 될 뿐이죠. 그야말로 백부장처럼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그러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12년 동안 귀신이 들려서 허리가 구부러진 여인네 수로보니게 여인이죠.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의 옷자락을 그냥 막 세탁 구기듯이 한 것이 아니고 행여 들킬까 싶어서 가만히 건드렸죠. 우리교회에 모임을 보게 되면 수로보니게 여인들 마음 같아요. 왜 갑자기 되지도 않는 칭찬을 왜 하느냐 하면 아멘 소리를 안 해요. 들을 때 가만히 안 들키게 들어요. 어떤 모션이냐 반응도 애써 감추고 가만히 만졌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주님이 믿음이 좋다고 하니까 좋은 줄 알지만 이게 인간의 능력을 초월 한 겁니다. 왜냐? 남들은 다 고생 안 하잖아요. 12년 동안 귀신 안 들렸죠. 남들은 허리 안 꼬부려 졌죠? 그러면 남들과 비교해 보세요. 자기 재수가 더러운 거예요. 그러면 불만과 그 원망을 누구한테 쏟아야 됩니까? 주의 옷고름을 만지는 게 아닙니다. 몽둥이 들고 야구 방망이 들고 오면 때려죽이려고 덤벼들어야 돼요.

 

무슨 저한테 억하심정이 있어서 내 인생을 이렇게 망쳐놨습니까? 한번 따져 봅시다. 주여! 이렇게 나와야 돼요. 왜? 자기가 인생 성공이 목표이니까 자기는 실패자잖아요. 비교해서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 봐도 저주 받은 거고 욕설을 들으면서도 가만히 만졌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이것은 주님 앞에 불만이나 대들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이거든요.

 

전혀 없다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주체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12년 동안 귀신들린 것도 누구의 작품이라는 거예요? 주님 작품이라는 겁니다. 그런 몸으로 이제는 그 원천자 되는 분을 만지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죠? 맞죠? 내가 모를 줄 알고? 이렇게 만지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여인이, 물론 그런 여인이 있다고 결혼할 마음은 없지만 세상에 그런 귀한 여인이

 

이것은 믿음 좋다가 아니라 이것은 오히려 무서운 여인이에요. 남편이 술 먹고 야구방망이로 팰 때 112에 신고를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주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술을 먹게 해서 나를 개 패듯이 패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일 때 남자는 방망이를 뒤로 던져 버립니다. 뭐 이런 귀신이 다 있나! 하면서요. 이건 인간이 아니야 너는 나한테 낯선 존재야! 그렇게 하겠죠.

 

낯선 존재입니다. 아주 특이한 존재, 이상해요. 그 이상한 인간을 주께서 칭찬꺼리로 내 세웠다는 말은 너희들이 보기에 내가 목수의 아들로 보이느냐? 아니면 특이한 존재로 보이느냐? 지금 그 여인이 예수님의 증인이잖아요. 그 여인은 곧 뭡니까? 예수님의 부분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대변자가 되는 겁니다.

 

그 대변자로서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안 받으면 할 수 없고요. 특이하세요. 참 특이하세요. 돈 많이 벌어서 특이하지 마시고 사자성어로 “이상하자!” 대단히 이상하자! 뭐 기변까지 바꿀 필요 없어요. 하여튼 이상하자! 정말 이상해요.

 

어느 정도 이상해야 되느냐? 설명이 안 되는 이상하자! 내 인생이 이상해! 내가 설명이 안 돼! 네가 어떻게 죄 사함 받았는데? 이게 설명이 안 되네요. 십자가 믿어서? 그것도 아니야! 복음을 알아서? 그것도 아니야! 그냥 이상해! 이렇게 했기 때문에 주님이 찾아 온 적이 없어요. 주님이 그런 식으로 찾아온 적이 없어요. 기도 하고 금식했더니 왔더라! 그런 것도 구라고 거짓말이고 하여튼 이상해! 그래서 기껏하는 말이 창세전에 예정되었어! 그 이야기 외에는 할 수가 없어요.

 

가르친다고 할 때 너무나 일상적으로 가르친다다는 말을 인간상에서 얼마나 빈번하게 외치고 있습니까? 이 본문을 딱 보게 되면 교회라는 게 다른 게 아니다! 가르치는 한 사람 있고 가르침을 받는 여러 사람이 있으면 그게 교회라고 성급하게 해석할 만하죠. 왜? 디모데후서 2장에 있으니까 디모데야! 예! 내 아들아! 예, 너는 남을 가르쳐라! 가르침을 받는 사람도 있어야 되니까 예! 끝! 해석 끝났네요. 간단하네요.

 

3절을 봅시다. 3절이 반전이 일어나죠.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요즘 구마다 또는 중간 중간에 시에서 문화센타 많이 지어놨잖아요. 그 문화센타, 도서관이라 든 지 좋은 건물 많이 지어놨는데 평소에 그 건물에서 주로 어떤 것을 많이 하느냐 하면 인문학 강좌 같은 것을 많이 해요.

 

강사 모셔서 햄릿에 대해서 연구하고 어떤 사람은 톨스토이에 대해서 배우고 어떤 사람은 역사에 대해서 배우기도 하는데 물론 약간 저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가요교실인데 그것은 시끄러워서 문 닫아야 돼요. 가요교실, 조금 고상하면 꽃꽂이 이런 것이 활성화 되어 있어요. 활성화 되어 있는데 어떤 문화 강좌에서 “자, 여러분 오늘 새롭게 등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배운지 일주일 있으면 이 건물 무너집니다. 같이 동참할 수 있을 거죠?” 미리 이렇게 가르칩니까? 자, 우리 강좌를 배우면 공부하다가 무너져서 아비규환 됩니다. 그래도 노래교실 참석할 사람? 하면 옵니까? 안 오죠.

 

지금 사도 바울이 미리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이 복음을 듣게 되면 무엇을 함께 해야 된다? 고난인데 그 고난이 어떤 고난입니까? 인간의 고난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고난입니까? 주님의 고난이에요. 주님의 마냥 아프다? 아니에요. 주님의 고난은 괴롭다? 아니에요. 주님의 고난은 항상 눈물짓는다? 아닙니다. 주님의 고난은 이상하다에요.

 

설명될 수 없는 고난입니다. 이상하게 되면 공동체에서 배제됩니다. 배제되게 되면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남들 앞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것,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해요. 남한테 더 두려운 것은 사람들한테 미움 받는 사람, 같은 아파트 같은 빌라에 이상스럽게 어느 날부터 다른 사람이 말도 안하고 인사도 안 받아 주고 할 때 과연 내가 이 동네에서 계속 살아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심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우울증 걸리고 그래요.

 

그렇지만 어렵고 힘들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위로해 주고 도와주고 아쉬워하고 걱정해 주면 그 동네를 떠날 마음은 사실은 없는 겁니다. 어디 가서 이런 사랑을 받겠어요? 인간은 어릴 때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고 살았는데 커서도 마찬가지이고 부부가 돈 없어도 서로 사랑하면 살만 합니다. 아무리 서로 돈 있고 주부교실해도 성격 안 맞으면 갈라서기 마련이죠. 그만큼 사람은 남한테 사랑을 받을 때 살맛이 나요.

 

그러면 남한테 사랑해 준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사랑 해 주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사랑받고 싶어서 주고받기 식으로 사랑을 먼저 해 주는 겁니다. 니가 받은게 있으면 나를 사랑하겠지! 그런데 번번히 그 작전은 늘 실패로 끝나죠. 그러니 이 산다는 것이 자족할 수 없는 그런 삶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뭐냐 하면 예수의 좋은 군사와 함께 고난 받잖아요. 예수님의 뒤에 군사다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로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전쟁 중이죠. 문제는 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보이지 않는 적이라는 것은 보이는 모든 것이 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는 자가 바로 주님의 적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에요.

 

자기 집안 식구가 주님의 원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입니다. 멀리 있는 적이 적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집안 식구가 주님의 원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입니다. 보이는 적이 적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복음 때문에 나에게 뒤에서 욕을 하고 실망했다는 그 한 마디가 나로 하여금 헤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픈 것도 되고 고생스러운 것도 되는데 근원적으로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이상해요. 참 이상해요. 내가 원하지 않는 인생길을 주께서 지금 몰아가고 있는 거예요. 꼭 수단이나 아프가니스탄이나 어려운 곳에 가야 순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는 이 신곡시장에서도 순교할 수 있어요. 이 멀쩡한 서울 한 복판에서도요. 한 복판 아니고 변두리지만 여기서도언제 든 지 순교할 수 있습니다.

 

꼭 순교자가 멀리 갈 필요 없어요. 채찍 맞는다고 해서 채찍을 구해서 돌아다닐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냥 멀쩡하게 살면서도 매 삶이 순교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군사로 몰아세운 다면요.

 

그것을 복음을 다 전하고 난 뒤에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복음을 전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주부 교실에 등록을 몇 명 안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디모데야! 디모데 너 복음 전하지? 전할 때 꼭 빠뜨리지 마라!” “뭐요? 선생님?”

 

“십자가의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되는 사실을 빼 먹지 말고 전해야 돼!” “예” 누가 믿겠습니까? 자기 성공 신화를 위해서 믿고자 하는 누가 고난 못 받아서 환장한 사람입니까? “아, 미치겠어! 진짜 예수님의 고난을 받고 싶은데 그런 문화교실 없나?" 이런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없어요.

 

그 고난이 가르치는 사람에게 만 온다? 가르침 받는 사람에게만 온다? 둘 다 온다? 몇 번입니까? 이게 중요하거든요. 말씀은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말씀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말씀이 가르치는 자를 가르치게 하고 말씀이 배우는 자로 하여금 배우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고난은 그 말씀이 전하는 그 현장 자체가 고난의 계시이며 고난의 시작입니다. 그냥 멀쩡하게 빵 먹으면서 말씀을 듣는 것도 고난에 편입이 돼요.

 

고난이라는 것은 세상을 보는 사고방식의 전환입니다. 그러면 세상을 보는 사고방식의 전환이라면 그러면 성령이 오기전의 사고방식은 뭐냐? 기존 세상에서 나에게 가르쳤던 사고방식, 결국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이미 성경에서 배우기전에 우리는 이미 꾸준하게 세속적인 것을 양육 받아 왔습니다. 교육 받아 왔습니다.

 

교육 안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일자무식이라도 어느 모임이라도 다 분위기 파악해서 다 교육 받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배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뭐냐, 적 그리스도적 내용입니다. 세상 보는 사고방식, 기존의 사고방식을 답습하는 내용으로 배우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가르치는 것은 바로 고난이잖아요. 고난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이질적인 서로 다른 사고방식이 충돌될 때 고난이 발생되거든요. 그러면 고난 받으라는 말은 주님의 사고방식을 성령께서 너한테 가르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가르치는 대로 가버리면 우리는 고난 받기 싫어도 이미 두 개의 면이 서로 부딪치니까 불꽃이 튈 수밖에 없어요. 의도적으로 고난 받아서 신자 되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주님께서 연출을 하십니다.

 

그냥 막 사세요. 그러면 연출은 누가 합니까? 네가 어떤 존재인가를 다른 사고방식 층과 마주치면서 삐걱거리면서 진짜 주께서 가르치고 싶은 주님의 고난을 몸소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뻐하라! 뭘요? 환난 받은 것을 기뻐하라! 주의 이름으로 환난 받는 것을 기뻐하라! 네가 바로 성도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바울이 자기가 사도된 증거가 뭐라 했습니까? 가짜는 주님이 고난이 없지만 나에게는 주님의 고난이 있다. 왜? 내가 속한 영역이 이쪽 영역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불꽃이 고난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고난이라고 해서 빌어먹고 만날 당하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어느 영역에 속하면 집단적으로 고난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영적 세력이 그대로 이 세상을 지금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그것을 세상 신이라 하고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는 불순종의 악한 영들이라고 했어요.

 

이런 용어가 “세상신” “불순종의 악한 영들” 이런 용어가 MBC나 KBS 뉴스 시간에 전혀 먹히지 않고 있어요. 우리가 늘 보는 그런 일상에서는 먹히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듣고 있는 우리가 이상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참 이상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당부하고 싶은 것은 그것을 미리 상상은 하지 마세요.

 

상상을 하게 되면 그것은 주님이 현실적으로 하는 일을 내가 미리 대비한다는 식으로 내 행위가 가미되기 때문에 그것은 주의 일을 훼방질하는 거예요. 그냥 사시면 결과적으로 아, 이게 고난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 지금 성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고 그 고난 가운데 있으면 남들이 나를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또 복음을 가르침을 받는 그런 상황을 주께서 친히 이루어 나가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대해서 세상이 보는 안목만 알았던 저희들이 이제는 의와 죄로 보시는 주님의 안목으로 바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