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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나+잉여

아빠와 함께 2015. 10. 15. 08:50

2015-09-19 01:50:25 조회 : 308         
나+잉여 150918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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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 (IP:175.♡.232.59) 15-09-25 07:49 
광주 강의(2015. 9. 18) 19-1

마가복음 6장 7절 봅시다.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더러운 귀신’이 나옵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어떤 스승이 제자를 보낸다면 공자같은 생각을 하게 되지요.

공자의 제자들이 나서서 귀신을 쫓아냈습니까? 아니죠. 요즘 같으면 정보, 처세술, 윤리, 도덕을 가르치죠. 귀신 쫓아내는 것은 아니잖아요.

12제자가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귀신 쫓아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예수님 입장이라면 제자들에게 교훈을 가르치겠습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시키겠습니까?

인간을 나눠 봅시다. 귀신 들린 자, 그리고 귀신 안 들린 자, 또 성령 받은 자. 이 셋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자신이 귀신 안 들렸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귀신 들린 자는 극소수이며 특별한 사람만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겠지요?

귀신 들린 자에게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냈는데 목적이 무엇입니까? 귀신 안 들린 자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령 받은 자 되는 것입니까? 나중에 제자들은 사도가 되는데, 사도들은 ‘성령을 받아라.’고 하지요. 그러면 그 과정에서 귀신 들린 자에게 찾아간 12제자에게 귀신 안 들린 자의 입장에서 귀신 들린 자를 낫게 했는데, 결국 12제자마저 아직은 성령 받은 자까지는 안 된 거예요.

성령은 예수님 부활 후 오순절이 되어서 임하거든요. 성령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하나님 우편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귀신 안 들린 정상인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1) 귀신 들린 자, 2) 귀신 안 들린 자, 3) 성령 받은 자. 셋 중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2번을 지목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뭔가? [인간 + 잉여]가 하나님 뜻인데, 우리는 잉여까지 가는 것이 겁납니다. 우리는 인간들끼리 소통하고, 정상인이라는 것에서 멈추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상인은 평균적인 (보통)사람을 말합니다. 확률 분포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지요. 천재도 둔재도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평생 조용히 살고 싶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평균인입니까? 아니죠. 제가 가락교회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이 오신 후의 세상과 예수님이 안 오신 때의 세상과의 차이를 알아야 된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우리에게 성령이 왔을 때와 성령 오기 전의 차이를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나는 이 세상의 일부(모자이크의 한 조각)입니다. ‘나’란 것이 따로 없어요. 떡에 콩고물 묻듯이 뒤섞여 있을 뿐입니다. ‘내가 인간인가’ 이런 물음을 가질 필요도 없어요.

여기 오다보니까 할머니들이 평상에 누워 계셨어요. 그 할머니들도 각자 개성이 있어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노인들 무리’가 누워있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그 무리에 속하는 것을 편안하고 안전하고 큰 오류가 없는 인생이라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놓치는 것입니까? ‘잉여’부분을 놓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공자처럼 ‘가서 내 교훈을 전하라.’고 하지 않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신 겁니까? 그 당시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완전히 미친 자입니다. 미쳤다는 말은 보통 인간과는 달리 안 좋은 여분(잉여)의 것이 붙어 있어요. 도박에 빠진 사람을 도박 귀신이 붙었다고 하지요. 이 안 좋은 부분은 잘라내고 싶어요.

안 좋은 잉여의 부분을 잘라내면 평균인으로 남지요. 정상인이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상황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어요. 왜? 편하니까. 우리가 복음을 깨닫기 전에 기존교회에 다녔잖아요. 그 교회에 출석했을 때 특별한 점을 발견했습니까? 발견 못했습니다.

교회 안 다닌 나를 교회가 우수한 나로 만들어 주는 것이 대해 반길 수는 있어도, 귀신을 거론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는 것은 원치 않아요. 유별나게 튀는 것을 우리는 원치 않아요. 성적이 우수한 자로 사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이지만, 성령 받고, 귀신 쫓아내고 이런 사람으로 사는 것은 원치를 않아요.

그래서 보통 교회는 그만그만합니다. 세상에서 교양 좀 쌓다가 교회 오게 되면 교회 분위기와 대충 맞을 수가 있어요. 왜? 자신이 평소에 쌓던 교양을 교회에서도 이야기하니까. 그러기에 교양 있는 사람이 교회에 가면 대환영합니다. 그러니 교회 가도 별 탈이 없어요. 이것을 로마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걸림돌’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누가 믿었으리요?’가 됩니다. 만약 이 취지를 오늘날 교회가 그대로 살린다면 그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정상인, 평균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상한 소리를 하니 그곳에 사람이 모일 리가 없지요.

예수님의 제자 12명이 있습니다. 이들이 미친 자들입니까, 정상인들입니까? 정상인이었지요.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기존 권력을 원했지요. 인간은 세상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 들어있으면 안심이 돼요. 베드로가 예수님 만나서 하늘나라 간다고 까불었지만 예수님이 체포된 후에는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한 이유가 뭡니까? 기존의 권력 체계가 좋았고, 그 속에 머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12제자 모두가 보통사람이에요. 예수님 혼자 설쳤지 제자들은 그냥 평범하게 살기를 원했어요. 결국은 헤어질 사람이고.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면 그 교회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12년 동안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예수님 옷을 만져 나은 사람도 세상 권력이 위협하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떠날 걸요.

어쨌든 예수님이 소개하는 세계는 낯설어요. 하늘에 있는 하늘나라는 전혀 낯설지 않아요. 그런데 ‘하늘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은 낯설어도 너무 낯설어요. 세례 요한처럼 낯설어요. 그 위대한 세례 요한도 옥에 갇혔을 때 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메시아 맞습니까?”

구원 받았으면 기적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에 대해서 불평하지 마세요. 지옥 가는 사람이 뭐라고 욕하겠어요? “다 받아놓고 뭘 불평해!” 이렇게 말할 거예요. “너는 우리가 받지 못한 영생을 받아놓고 시시한 땅의 것을 가지고 불평을 해?” 이렇게 나올 거예요.

오늘 본문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기적이 뭔가? ‘파괴’입니다. 새삼스럽게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병들고 파괴되었음을 노출시키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의 특징이 있어요. 이 세상 어떤 건축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피라미드 건축은 파괴 장면입니다. 집이 무너지면 피라미드 모양이 됩니다. 피라미드는 파괴될 마지막 모습을 완성된 건축물로 보는 거예요.

우리는 귀신 들린 자는 망가진 자라고 봅니다. 우리는 정상인이고. 그런데 예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모든 인간은 애초부터 망가진 자들입니다. 파괴된 곳에 주님이 성육신으로 오신 거예요. 그 파괴된 몸, 마리아의 몸을 입으신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뭔가? 파괴성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요나의 기적입니다.

“그동안 너는 죽은 자와 살았단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 말씀하시는 예수님만 살았고 나머지는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잖아요. 이건 결국 무슨 뜻입니까? 살았다는 인간들은 새롭게 부활한 주님의 생명 앞에서 다 죽은 자들입니다. 에스겔에 나오는 바짝 마른 뼈들입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내서 그 낌새를 조금씩 알려주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의미를 눈치 채야 되는데 눈치를 못 채요.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20절에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권능을 많이 베풀었지요. 다른 말로 하면, 기적을 많이 베풀었지요. 기적은 뭐라고 했습니까? 파괴지요. 제가 과격한 말을 한 것으로 느껴집니까? 그 뒤 21절을 보세요.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떨어졌지요? 예수님은 유황불 대신 12제자를 보낸 겁니다. 이 둘의 공동점이 있어요. 둘 다 폭파작업입니다. 피라미드를 만드는 거예요. 돌무더기를 만드는 거예요. 피라미드가 바로 돌무더기잖아요. 이것은 사람 사는 용도가 아니지요. 그 안에 죽음이 있잖아요. 얼마나 복음적이에요.

이집트 제국의 역사에 트라우마를 심었습니다. 자기 몸에 있는 상처를 자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상처는 숨기고 싶어요. 상처는 숨겨놓고 정상인으로 보이려고 하지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아담은 몰라요. 자기 몸에 죽은 자의 표시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그것을 알려 주지요.

사람 속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구체화 시킨 것이 예수님 자신의 인생입니다. 우리의 삶이 저주 받은 삶이고, 파괴된 삶인데 이 상처를 주님이 받는 거예요. 제가 인생 속에 상처가 있다고 했지요? 그 상처가 뭔가? ‘잉여’입니다. 귀신 안 들린 자가 귀신 들린 자를 보면 비정상으로 보이지요? 토마스 홉스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란 말을 했어요. 인간 100명이 모이면 1(나) 대 99(남)로 싸워요.

4식구가 있으면 자신과 다른 식구들이 투쟁을 벌입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그런 식으로 싸웁니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에요. 이것이 악합니까, 귀신 들린 것이 악합니까?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하는 인간들이 자신은 정상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매순간 투쟁하며 살아갑니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살고, 남을 밟아야 내가 숨을 쉬는 이런 속성이 우리의 어느 부분에 자리 잡고 있습니까? 우리는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인자한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속마음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뿐입니다. 얼마나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지 밤에 잠을 못 이룹니다. 혹시 잠든 사이에 누가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낮에 있었던 그 초조함이 밤까지 어이진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서도 나타납니다. 인간관계가 투쟁 없는 것이 없어요.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면 서로 투쟁이 벌어집니다. 큰 동서는 부모님께 얼마 드렸고, 작은 동서는 얼마 드렸는가? 이런 투쟁은 귀신 들린 것보다 더 무서워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정상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혹부리 영감처럼 그 혹을 가져가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인간의 혹이 되어서, 혹이 왔을 때 인간이 미처 몰랐던 악마의 존재가 주님 앞에 우루루 몰려드는 현상을 가까이는 12제자, 멀리서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십니다. 세상이 지옥이란 사실을.

세상은 마귀 천지입니다. 토마스 홉스는 그것도 모르고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세상을 봤어요. 왜 투쟁하는가? 인간은 동물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왜 동물과 비슷한가? 그것은 모른다.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지요. 이게 세상 학문입니다.

왜 모르는가? 플러스 알파(잉여)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눈에 보이는 내가 나가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나 +잉여’가 나입니다. 잉여를 포함해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내셨는데, 그들이게 시킨 일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겠지요. 12제자 본인들도 자신들은 귀신 쫓아내는 자이기에 귀신 들린 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귀신 안 들린 그들이 주님을 배반했어요. 그러니 그들이 귀신 쫓아내는 것으로 좋아해야 합니까? 내가 누구인가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귀신 쫓아낸다고 해서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귀신 쫓아냈다고 자랑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지요? ‘귀신 쫓아낸 것으로 자랑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셨어요. 이 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누구와 자신을 비교해야 됩니까? 생명책에 기록된 자와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야 되겠지요? 비교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이 땅을 방문하신 취지가 드러나지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나로 하여금 내가 아는 나에게서 더 나아가 창세전까지, ‘예수 안에서 창세전에 나는 어떤 존재였는가?’ 그것까지 확대시키는 안목을 가져마 마땅하지요. 그러면 그동안 내가 나라고 규정했고, 나는 귀신 안 들린 정상인이라고 했던 그 세계 자체가 결국 우리 속에 있는 트라우마가 풍성처럼 부푼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가짜인 나에게 속는 식으로 하루하루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이 무엇입니까? 기적은 파괴입니다. 새삼스럽게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파괴된 것을 확인하는 것이 주님이 주신 진정한 기적입니다. 이처럼 파괴된 것을 알려면 그 전에 ‘응시’가 이어야 해요. 응시가 뭡니까? 주의해서 쳐다보는 것입니다. 지켜보는 거예요.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을 주께서 이미 아시지요. 아신 자를 응시해요. 응시한다는 것은 관찰하고 주목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은 다시 설명하면 이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세상은 어떠했으며, 예수님 오신 후의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내가 남을 응시하면 끝나는 거예요. ‘저 사람은 내 마음에 든다. 저 인간은 내 마음에 안 든다.’ 이것으로 끝인데, 예수님 오신 후에는 파괴가 일어나는데, 사실 파괴가 창조행위입니다.

주님은 요리사입니다. 진흙을 이겨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요리할 때는 주목을 해야 됩니다. 파괴가 이미 창조에 포함 된 것입니다. 우리는 파괴되면서 내가 최종적으로 도달 될 모습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요. 그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제자들을 통해 귀신 쫓아내는 일을 시키신 거예요.

귀신 들린 자보다 우리가 더 나은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귀신들린 자 못지않은 거예요. 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12제자 보내셔서 귀신을 쫓아낸 그것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지는 것과 같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은혜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별 쓸모가 없어 보여 ‘이것을 어디에 쓰지?’ 라는 버리려는 것을 주님은 은혜로 주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안 주십니다. 왜냐?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골라잡은 기적이기 때문에 안 돼요. 나는 나를 팽창시키려는 의도 외에는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내가 놓친 부분(잉여)을 끌어와서 온전한 나로 만듭니다.

주께서 귀신 들린 자에게 바라는 것은 귀신 안 들린 자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성령 받은 자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초로 성령 받은 자가 누구지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몸의 지체로 만드는 것이 주님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귀신 들린 자를 어떻게 성령 받는 자로 만드는가?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눴지요. 귀신 들린 자, 귀신 안 들린 자, 성령 받은 자. 대부분 사람들은 성령 받고 싶은 마음이 없고, 귀신 안 들린 자로 살면 좋겠다고 여깁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귀신 들린 자를 찾아가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셨지요. 즉 귀신 안 들린 자로 만드셨어요. 그럴 때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권능이 들어갑니다. 그러면 인간 속에 있는 상처--

왜 귀신 들린 자를 찾아가게 했는가 하면, 인간 속에 있는 상처를 확대시키려는 것입니다. 그 속에 마귀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귀신 들린 자는 어떤 의미에서 온 세상이 불순종의 영의 지배를 받는 것에 대한 대변자 역할을 하는 겁니다. 12제자가 귀신 들린 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 안 됩니다. 주님 앞으로 끌고 가야 됩니다. 왜냐? 자신의 권능이 아니고 주님의 권능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가 12제자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목적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나를 원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까? 후자지요. 그런 인간으로 만들면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게 한다면, 복음 전파하는 내가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임을 수용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욕했는데, 사실은 그들이 충분히 이해가 되어야 해요. 

주기도문에 ‘용서’가 나오지요?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왜냐? 너도 용서 받아야 하는 자라는 뜻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 있어야 돼요? 용서 받아야 될 인간으로 용서해야 될 입장에 있지요. 그런데 보통 우리가 남을 용서할 때는 어떻습니까? 나는 피해자고 상대는 가해자여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는 용서하는 것처럼 하지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용서가 되면 이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용서가 아니에요. 용서하면서 용서 받아야 할 요소가 내 안에 장착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따라서 나는 내 안에 무슨 괴물이 들어 있는지 몰라요. 주께서 나에게 일을 맡기는데, 맡기는 일이 뭔가 하면, 내가 보기에 못났고, 초라한 인간들에게 보내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욕하고 싶은 그런 인간들의 요소가 내 속에도 들어있다는 것을 아시고 주님이 그 일을 나에게 맡기셨어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용서가 남을 용서하는 가운데 나에 대한 주님의 용서가 느껴집니다. 여하간 상대가 나에게 잘못 했잖아요? 그 잘못한 것을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 알파’를 몰라서 그래요.

다윗이 ‘나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주께만 범죄했다.’고 했지요. 이 말은 다윗이 자기 범위를 확대시킨 거예요. 어린아이들의 현실 구상은 자신이 경험한 정보의 총합이 현실이 됩니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요. 내가 일곱 살 때 알았던 현실은 그 때까지의 경험이 조립된 것입니다. 나에게 친절하게 해주시던 이웃집 아저씨, 삼촌들 모두가 천사처럼 생각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그들을 고향에서 만나도 역시 천사같이 보입니까? 아니죠.

왜 그렇습니까? 새로운 정보가 수입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기 전까지의 정보는 ‘나는 왕이다. 율법에 흠이 없다.’고 여겼는데, 밧세바 사건 이후에는 정보가 하늘나라까지 도달한 거예요. 이것은 ‘+알파’입니다. 내가 생각한 나에서, 내가 미처 몰랐던 주님께서 제공하신 정보까지 더해서 보니까 ‘나는 주께만 범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가 어떻게 옵니까? 하늘 쳐다본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늘나라가 나도 몰랐던 내 죄와 연관해서, 상처 난 내 모습 속에 나타난 거예요. 이 때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되는 겁니다. 누가 사기를 쳤다면 욕을 하지요. 내가 만약 그 현장에 있었다면 살기 위해서 거짓말 안 했을까요?

회사에서 구조조정 하는데 ‘친구야, 내가 사표 낼 게. 너는 회사에 남아라.’고 앞에서는 이야기해놓고 뒤로는 인사과장 찾아가서 선물을 주고 ‘제발 제 사정 좀 봐주십시오.’해서 나중에 발표에 친구는 잘리고 나는 남게 되어 ‘친구야, 미안하다. 회사 방침이 참 희한하네.’ 이런 식으로 친구를 위로하는 척하지요.

사람이 다급하면 자기 먼저 챙기지 남을 먼저 챙길 수가 없어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에요. 결국 다 적입니다. 편할 때는 친구인데,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적이 됩니다. 이런 정보까지 ‘+알파(잉여)’로 보텔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사람에게 죄 지은 것이 아니고 원천적으로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라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응시’이고, 우리를 파괴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였지요. 다윗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야를 내가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죽이신 것으로 봐요. 이게 뻔뻔한 것이 아니고 정보가 그만큼 확대된 거예요. 9세 때의 정보가 아니고, 하늘나라까지 알게 된 사람의 정보입니다. 내 손으로 우리야를 죽여야 ‘꺾으신 뼈’가 되는데, 우리야를 죽여서 다윗은 죄인으로 등장하고(귀신 들린 자로 드러나고), 그 죄인(다윗)은 꺾으신 뼈로 인하여 용서받는 것입니다.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51:8).” 이 말은, ‘내가 쓰레기인 것을 깨닫게 하셔서 즐거워하게 하소서.’ 또는 ‘내가 실패자로 확정된 것을 기뻐하게 하소서.’ 이런 뜻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알 수 있도록 힌트를 제공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런데 사랑이 들어오니까 ‘아, 나의 이것이 미움의 요소가 아니고 사랑받는 요소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순간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나를 알게 되는 힌트를 받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몰랐었는데 누가 나를 사랑해 주니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나 +알파’입니다.

반대로 해 봅시다. 누가 나를 미워합니다. 그러면 ‘네가 왜 나를 미워하는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면서 자신을 돌이켜 보니까 내 속에 남이 미워할 만한 요소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 몰랐는데. 그 전에는 내가 나의 기쁨이 되었는데 이제 남이 미워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나에 대해 슬퍼요. 이것을 성경에서는 ‘자기를 미워하라.’고 했고, ‘우는 자는 기뻐하라. 네가 복이 있다.’고 해요.

자기의 요소로 슬퍼하라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우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어요. 어떤 곳에서는 ‘슬퍼하라’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해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합니까? 장단에 맞출 필요 없어요. 나는 애초에 없기 때문에. 나는 없어요. 왜냐? 나를 삽으로 떠서 요리사 되시는 주님이 원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가져갔어요.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주특기는 주님밖에 없어요. 그것을 위해 성육신으로 오셨어요. 이렇게 보니까 결국 나는 주님의 성육신을 보여주는 소품입니다. 나를 파괴시켜 주님이 원하는 재료로 삼습니다. 그 무너짐을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또 그 무너짐으로 슬퍼하고.

무너짐으로 슬퍼하고, 돌아서서 웃고. 나를 엉망으로 파괴시킨 것에 대해서 웃으시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미워해야 하고,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왜? 우리 속에 있는 나의 상처, 결점, 원천이 내 안에서 시작되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시작이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5. 9. 24. 08:48 녹취 마침)
 서경수 (IP:59.♡.105.44) 15-10-10 15:35 
광주 강의(2015. 9. 18) 19-2

예수님이 오셨다. 그래서 어쩌라고?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내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셨다. 그래서? 주님이 무엇을 하시든 그분이 나의 주님이 아닌 이상은 그냥 나 밖에서 활동하는 아저씨로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갈 테니까 내 인생에 함부로 개입하지는 마세요.”하고 밀쳐내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시간에 주님의 기적은 파괴라고 했어요. 새삼스럽게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파괴된 상태를 밖으로 노출하십니다. 그러면 12제가가 가는 곳에 귀신들이 출몰하겠지요? 처음부터 귀신들이 이 세상을 마음껏 유린하고 있었어요.

이제 두 번째 시간 강의를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누가 말 한마디 한다고 해서 대자연이 바뀝니까? 안 바뀌지요. “태양아, 내일은 좀 쉬어라.”한다고 해서 내일 태양이 안 뜹니까? 아니지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먹구름아 물러가라.”고 해도 안 물러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뭡니까? 인생 헛살았네요.

내 말발이 안 먹히는데 기도는 왜 합니까? 결국 기도란 내 말발이 안 먹히니까 화가 나는데 그 화를 풀길이 없으니까 신에게 항변하는 거지요.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압니다. 알면 수긍을 해야 되는데 왜 수긍하지 못하지요? 내 원대로 안 되면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분에게 따지고 싶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따졌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답변을 들어보세요. 욥의 예를 봅시다. “이렇게 하시려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답변이 뭡니까? “네가 바다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바다에 물이 많이 있는데 왜 또 비가 내리지요? 이 세상은 하나님 마음대로 됩니다.

주님 마음대로 되는 세상인 것을 우리가 안다고 해서 내 마음이 상쾌해 집니까? 아니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은 굉장히 수상합니다. 그리고 이 수상한 세상 중에 수상한 자가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즉 나는 정상인이 아닙니다. 누가 이것을 알려주십니까? 주님이 알려주십니다.

나는 정상인이 아닙니다. 정상인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니면서 하는 행위가 정상인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에게 정상적으로 보일까요, 비정상적으로 보일까요? 비정성적으로 보입니다. 마가복음 6장 8절을 보겠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이건 정상인이 아닙니다.

9절을 봅시다.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여기에서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신발이 유명메이커인가 아니면 시장표인가?” 이런 것을 따지면 안 돼요.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화가 나지요? 화를 낼 때 사실은 하나님께 화내는 거예요. ‘나는 정상인인데 왜 나를 화나게 합니까?’라는 거지요. 우리가 화낼 때 하나님의 반응은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한다. 왜?’ 이것입니다. 이 정답을 알면 우리가 만족합니까? 아니지요. 반발하면서 인간은 법을 만들어요.

법을 왜 만드는가 하면, 나름대로 정상인 되기 위해서 본인이 법을 만듭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을 훌륭하게 치장할 수 있는 규칙들을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가수 안치환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어요. 왜 아름답습니까? 꽃은 자연이 피게 하지만 인간은 자기를 정당화하는 법을 매일 생산해 냅니다. 그러니 자신이 보기에 자신은 아름다운 거
예요.

주님의 기적은 파괴라고 했지요. 그럼 뭘 파괴해야겠어요? 우리는 법을 만들어내고 주님은 내 법을 파괴하는 거예요. 사람이 살기 힘들어서 하나님께 화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애써 만든 법칙을
주님이 무시하고 인정해 주지 않기에 화를 내는 거예요.

예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을 나열해 봅시다. 세리, 창녀, 강도, 백부장, 혈루증 걸린 여인의 공동점이 뭡니까? 자기가 만든 법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같은 강도라도 구원 받지 못한 강도는 ‘나를 구원해 주면 믿겠다.’고 했지요. 이것이 자기 법입니다. 주께서 어떤 사람을 칭찬하거나 꾸중하실 때 그 기준이 뭡니까?

사람들이 남의 법을 무시하면 ‘막 산다’고 하지요. 남의 법을 무시하면서 막 살지 말고 자기 법을 무시하면서 막 살면 됩니다. 왜냐? 내 법을 내가 지키면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정당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의 용서하심의 은혜가 소멸됩니다. 자신이 잘났는데 왜 용서가 필요합니까?

용서받은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자를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강도와 세리를 좋아하시는 이유를 알겠지요? 창기를 좋아하시는 이유를 알겠지요? 창기라고 무조건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고 용서를 감사할 줄 아는 창기를 좋아하십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바리새인들은 법을 들고 찾아왔지요. 그 때 주님이 땅에 글을 쓰셨어요. 그 후 사람들은 다 돌아갔습니다.

왜 갔습니까? 자신이 내세운 법에 자신이 맞게 될까봐 떠난 거예요. 이들은 남을 치기 위해서 법을 들고 왔다가(남을 친다는 것은 자신이 정당하다는 뜻이고) 주님의 법을 듣고 떠났지요. 순서를 보면, 자신의 법을 가지고 왔다가 주님이 법이 덮치니까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순서가 아닌 다른 순서도 있어요.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의 법이 오니까 안식일 날 침상을 들고 갔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왜 안식일 날 침상을 들고 가는가?’라고 했어요.

만약 유대인의 법에 ‘안식일에는 라면을 못 끓인다.’는 것이 있다면, 주님은 라면을 끓여 들고 갔을 거예요. 여기에서 어렵습니다. 주님은 새삼스럽게 법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든 법을 뒤집고 활용하는 것이 주의 법이에요. 법을 만드세요. 그리고 잘난 척하고, 정당화하면서 사세요.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너, 용서 받았니?” 이것을 물어요. ‘그렇게 잘났으면 너는 용서 받을 것도 없겠네?’라고 나오십니다. 용서 받을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있지요. 뭐냐? 남 간섭하는 죄를 용서 받아야 합니다. 왜 남을 간섭하는가 하면, ‘나는 그런 짓 안 한다’는 겁니다.

나는 그런 나쁜 짓을 안 하니까 충분히 남을 판단할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행세하는 거예요.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또 하나의 죄가 펼쳐진 거예요. 여기에 일괄적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성도는 이미 십자가 피로 일괄적으로 용서받은 자입니다.

주님이 용서해 주셨는데 용서 받은 성도가 왜 용서해 주셨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하겠어요? 나의 고상한 짓이 죄가 됨을 밝혀내는 상황들이 자꾸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에 의한 파괴라는 기적을 맛보게 되는 겁니다.

요나의 기적을 생각해 봅시다.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났어요. 요나의 기적은 ‘단절’을 말해요. 진짜 기적은 살아 있는 내가 얼마나 착하고 놀라운 일을 하는가가 아니고, 내가 낯선 나로 넘어가지 못하고 기존의 나를 붙들고 죽어야 돼요. 그러면 나는 죽지만 나의 신체는 남아 있겠지요? 이 신체에 대해서 진짜 나가, 내가 건너갈 수 없는 저쪽 편에 진짜 나가 준비되어 있는 거예요.

그 준비 된 나는 예수 안의 나입니다. 예수 안의 나가 나의 잉여(플러스 알파)입니다. 그 잉여분이 성령을 통해서 나에게 덮치게 됩니다. 그러면 교체 작업이 일어납니다. 내가 생각한 나와 예수 안에서 준비된 나의 교체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1) 귀신 들렸다. 안 좋아합니다. 2) 귀신 안 들렸다. 좋아하지요. 3) 성령 들렸다. 좋아합니까? 별로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왜 3)을 고집하시는가 하면, 성령이 임하면 내가 성령 받은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주님이 준비하신 나와 교체작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기존의 나는 사라지고 성령 안에서 주님이 준비하신 나로 바꾸는 작업이 성령의 일입니다.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나는 지우개 받았다.’ 소유하고, ‘나는 책을 받았다.’ 이것이 성령이 역사하신 것이다.” 이게 말이 안 됩니다. 성령은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성령이 나를 교체하십니다. 나를 없애버려요. 그러면 새로운 나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나는 주님의 작품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출생 당시 베들레헴에 2세 이하의 아이는 다 죽었어요. 엄마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부모의 잉여가 뭡니까? 나는 늙어 죽어도 내 자식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마나 손목에 사단의 정보(베리칩)를 새기면 사단의 종이 된다고 떠드는 종교단체가 있어요. 그런데 따져봅시다. 인간은 세포로 되어 있습니다. 세포 안에 DNA가 있습니다. DNA는 단백질로 만든 정보입니다.

단백질 하나가 나는 아니지요.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되지요. 정보가 교체되고 배열되면 복사를 하고, 이것이 세포가 되어서 각자 다른 정보가 함유된 각각의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다 조금씩 달라요. 정보가 다양하기에 지구상에 같은 사람은 없어요. 세상은 정보의 바다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 자체가 정보인데, 사단의 정보를 받았다고 지옥에 간다면 다 지옥 가야지요. 왜 이런 발상이 나왔을까요? 베리칩을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출발점이 뭔가 하면,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려와서 돌로 치려했지요. 그 때 예수님은 땅에 글을 쓰면서 뭐라고 하셨지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소리 듣고 다 떠났어요.

간음한 여인은 평생 처음 법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이 문구를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어두세요. 그러면 이 말씀 앞에 그 식구 각자의 법은 무효화 됩니다. 세리와 창기가 법 없이 사는 이유는, 법이 있으나 없으나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법이 있으나 없으나 죄인이고 용서 외에는 대안이 없어요. 내가 사랑받을 것이 없는데 누가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순간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동기가 되지요. 그런데 사랑은 반드시 기쁨으로 옵니다. 따라서 사랑을 받는 순간 ‘내가 사랑받을 이유가 있나?’ 하고 응시해보니까 새삼스럽게 ‘내가 이렇게 사랑받고 있구나.’를 알게 되는데 이것이 사랑의 효과입니다.

외부에서 사랑이 응시하면서 사랑을 줍니다. 그러면 못난 내가 잘난 나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못난 내가 못났다는 자체가 주님 사랑의 조건이나 소품으로 포함이 되어 있어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우리가 쓰레기라고 했지요. 원망하라고 했잖아요. 왜? 이미 우리는 죽었으니까.

세상에서 살겠다고 이상한 짓하지 말란 말이지요. 법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뭔가 하면 성경에 말씀이 나오니까 이것을 모아서 법을 만든 거예요. 그런데 그들 속에는 마귀가 들어있지요. 주님은 그 법을 도로 가져가요. 그럴 때 사람들은 ‘가져가면 안 되는데’ 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간음한 여인을 돌리 치려할 때 주님이 등장하신 것과 같아요. 우리를 정당화 할 법인데 그 법을 주님이 가져가시니까 그들은 다 도망치고 말았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로마서 8장에도 나옵니다.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이런 말씀이 평소 우리의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나를 정당화하는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법을 왜 만들었는가? 남과 차이가 남으로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나는 너와 다르다.’라고 하면서 우월적인 내가 되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죽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으면서도 죄가 무엇인지 몰라요. 죄는 법을 만드는 것이 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만들기 위해서 애써 그리스도의 의를 외면했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6장 8-9절에서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제자들이 법으로 지키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결국 이것이 뭔가 하면 정상인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정상인은 뭡니까? 정상인은 여행 갈 때 단단히 준비하고 가지요.

남이 안 하는 것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남이 한 것을 반대로 하는 것이 법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38년 된 병자를 주님이 낫게 해 주었습니다. “나았어?” “나았습니다.” “잘 가라!” 이게 법이 없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기대한 법과 반대로 한 거예요. 안식일에 침상을 들고 가는 거예요. 이게 ‘법 없음’이에요.

왜 그런가 하면, 그 병자 속에 예수님의 법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법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것이 법이 아니고,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알게 하세요. 그리고 이것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것이 주님의 법이 됩니다. 내 법이 아니고. 

교체작업입니다. 내가 나 되기 위해서 법 없이 막 살면 안 되고, 이미 법이 없음을 법 있는 형식으로 보여줄 때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를 증거케 우리로 하여금 그 작업에 나서게 하시는 겁니다. 만약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팡이 외에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줄자를 들고 ‘네 막대기는 몇 센치냐, 나는 몇 센치다.’ 이렇게 나왔을 거예요. ‘성만찬을 하라.’ 이것이 나중에 교회의 법이 되지요. 주님이 세례를 주셨습니다. 바울도 세례를 줬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세례 주는 것이 법이 되고 말았어요.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것이 빠지면 세례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마귀집단입니다.

우리 몸이 이미 주님의 몸으로 교체되었으면 교체되는 과정이 있잖아요. ‘옛날에는 이러했는데 지금은 이렇다.’ 그 절차를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내시는 것을 지금도 멈추지 않았어요. 오늘날 우리를 보냅니다. 다시 묻습니다. 세리와 창기, 강도, 백부장, 나사로 이들의 특징이 뭡니까?

본인이 나대고 싶었습니까? 아니에요. 그냥 있는데 주님이 불러냈어요. 모든 게 법이 없어요.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하면 되는가? 지시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 법이 됩니다. 주님이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면 그것이 법이 되는 거예요.

10절에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디서든지 라는 말은, 특정한 장소가 없어요. 기도원에 가야 합니까, 절에 가야 합니까? 절에 가도 은혜 받을 수 있어요.

11절에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여기에서 영접지 않을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김씨는 영접하고 최씨는 영접하지 않고 그런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어떻게 되어도 괜찮아요. 결국은 실패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가락교회 강의에서, ‘실패는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있다.’고 했어요.

과거에 실패가 있으면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되고 그것이 자기의 법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지막에 실패를 해요. 마지막에 실패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도 실패가 기정사실이기에 감사가 안 될 수가 없어요. 제가 지금 물을 마셨는데, 물을 마시는데 성공했네요? 실패해야 하는데 성공했어요. 감사한 일이지요.

이것이 잉여에요. 성공하고자 하는 것은 나에요. 그런데 그 성공한 나를 기어이 실패자로 만드는 것은 내가 미처 모르는 내가 껴안아야 될 실패자로서의 나입니다. 이 둘을 합치면 그것이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계속 진짜 내가 되는 나를 살아야 돼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순례자’라고 하는데, 순례자가 아니고 ‘쓰레기’입니다. 결국 쓰레기로 끝나니까요.

쓰레기인데 물을 마시고, 쓰레기인데 옷 입고. 제가 입은 옷은 누가 사주신 건데, 제가 깜짝 놀랐어요. 여기에 DAKS라고 되어 있어요. ‘어느 곳에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이 모두는 정해진 것이 아니잖아요. 이 말은 ‘네 인생은 네가 걱정할 대상이 아니다.’는 거예요. 

걱정을 하면 법을 만들어요. 원리, 원칙을 만드는데 그러면 우리가 바리새인이 됩니다. 그리고 뜻대로 안 되면 삐치지요.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내 잘남을 드러내기 위한 법이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 가정은 이러해야 돼. 남편은 몇 시에는 귀가해야 되고, 아들은 10시 이전에 귀가해야 되고---. 이런 법은 결국 주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집니다. 용서받을 거리로 우리는 계속 법을 만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정신 차린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11절을 봅시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법으로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떨어버린 먼지를 버리면 안 돼요. 비닐봉투에 모아서 증거로 남겨야 돼요. 이건 뭘 의미하는가 하면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아! 너희들 제가 되는 것 싫지?’ 이런 뜻입니다. ‘네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 힘들고 싫지?’ 이런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나라가 있는데 저희들이 인내해야지요.’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왜냐? 하늘나라에 가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텐데 이런 정도의 어려움은 참아야지요. 이런 마음이 잘못된 마음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비정상이고 사는 것이 힘들어요.

싫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자들 앞에 아무 이유도 없이 끌려나온 어린아이가 등장해요. 어린아이는 자기를 사랑해주면 그가 강도이든 천사든 관계없어요. 그냥 감사해요. 철없는 여자를 보면 남편이 부정부패해서 비난을 받아도 남편을 편들어요. 분명히 남편이 잘못했는데도 편드는 여자들이 있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남편이 최고야!’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은 정의도 진리도 관심 없어요. 무조건 내 남편은 내가 지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마을에는 이런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무조건 내편 들어달라고 하기에. 행여나 남편이 자살을 했다면 ‘우리 가정 우사시켰다.’고 해서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딸이 제에게 하는 소리가 “아빠는 꼭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고 해요. 저는 그 마음이 저에 대한 사랑이라고 여기고 감사하게 여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와 함께 있는 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 보기에는 예수님 말씀이 엉뚱하게 들리지요. 그래서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하여튼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과 달라도 너무 달라요.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은혜가 무엇인가? 은혜란 이질적인 것을 준다. 기적이 무엇인가?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파괴되어야 마땅한 존재인 것을 폭로시키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12제자를 데리고 병을 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것이 기적으로 보입니까?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이 ‘나는 어느 편인가?’를 알아야 될 그것이 주께서 원하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고, 귀신 쫓아내면서 점점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서 뭘 지적합니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묻고는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이건 뭐냐 하면, ‘나는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왔지 저들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뭔가 베푸는 것 같지만 사실은 ‘너희들은 나와 같이 이 세상에서 이질적인 존재다.’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것도 모르고 예수님이 고난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하시니까 ‘제가 있는 한 그런 일을 결코 없을 것입니다.’라고 나왔고,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는 과격한 말씀을 하셨지요.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 너는 이제 끝났어.’가 아니라 ‘너희와 함께 있는 내가 누구인지 너희들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아는 것은 아닙니다.

정리해봅시다. ‘나’가 있는데,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애굽)에 소속되어 있어요. 만약 누가 나를 낯설다고 하면 내가 낯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속해있는 세상과 같이 그걸 몰고 온 것이 낯선 것입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라고 하지요. 심지어 고스톱을 쳐도 지역마다 규칙이 조금씩 달라요. 

‘우리 동네는 이렇게 합니다.’라는 말은, 우리 동네에서 나는 평균인이고 정상인이라는 거예요. 이런 인간들에게 이질적인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백성으로 만드는 작업에 돌입하신 겁니다. 정신 빠짝 차려야 됩니다. 우리는 계속 정상인으로 살고 싶어요. 그런데 이질적인 주님이 우리를 가만 두지 않고 비정상인 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신병자로 살아가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나 +알파’입니다. 알파는 잉여에요. 그럼 ‘잉여를 줘야 받지?’ 라고 하는데, 현재 우리 안에 들어있어요. 숨어있지요. 트라우마처럼. 내 욕망을 내 마음대로 못해요. 사도바울이 말했잖아요. ‘나는 선하고 싶지만 내 안에 다른 내가 있다.’

내가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됩니다. 이상하지요?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내 뜻대로 되는데 자살합니까? 어떤 사람이 내 약점을 이야기한다. 자살할까요? ‘반갑다. 동지여!’ 하면서 반겨야 합니다. 우리는 내 자신에 대해 잘 몰랐는데 남이 내 약점을 알려주니까 고맙지요.

다윗의 취미가 살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야 장군을 죽였지요. 그런데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의 죽음은 자신을 위해 ‘꺾어진 뼈’로 봅니다. 다윗 때문에 죽은 자가 또 있지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일주일 만에 죽었어요. 죽은 후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웃었다. 2)슬펐다. 3)멀쩡했다. 몇 번입니까? 멀쩡했지요.

‘주께서 알아서 죽였는데 내가 왜?’ 이런 식입니다. 이미 다윗의 정보력은 일곱 살, 아홉 살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발견한 거예요. 그럼 나는 뭐냐?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죄인’이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고 상한 심령이지요. 상한 심령을 축구공으로 표시한다면 까맣지요. 까만데 까만 것을 묻히는 것이 뭐가 문제됩니까?

까만 공에 연탄재가 묻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연탄재가 묻으면 깨끗하게 씻고 싶지요. 그러면 깨끗한 축구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나의 법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알파=죄수’가 됩니다. 죄수는 뭘 해야 됩니까? 벌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이 벌은 이미 구원 받은 후의 벌이기 때문에 이것이 축복이 됩니다. 저주가 없어요.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죄수가 되어도 주께서 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용서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다른 말로 하면, ‘사랑’입니다. 그냥 ‘사랑’이라고 하면 감이 안 오는데, 죄를 거쳐서 용서를 거쳐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잘난 나를 +알파가 더해서 죄수가 되고, 죄인에게 용서가 오고, 용서받은 죄수가 주님의 자랑거리가 되고, 자랑거리로 이 땅에서 마음껏 그리스도를 증거케 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광주를 연고지로 하는 야구팀이 [기아 타이거즈]인데, 이 팀이 1회에 9대 0으로 마쳤습니다. 2회에 4번 타자 나지완이 만루에 나와 홈런을 쳤어요. 그래서 13대 0이 되었습니다. 8회까지 13대 0으로 이어지다 9회가 되어 역전을 당해서 13대 14로 졌어요.

방송을 보지 않았다면 아픔이 적어요. 나지완이 괜히 홈런을 쳐서 잔뜩 기대를 했지요.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에게 줄 것은 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일이 잘 풀립니다. 별 고민도 없어요. 갑자기 자기 인생에 대해 자신감이 생기면서 기대를 겁니다. 공부에 큰 취미가 없던 딸이 장학금을 받아 왔어요. 

처음부터 기대를 안 했으면 괜찮은데 일이 잘 풀려요.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고 합니다. 이미 주님은 벼르고 있어요. 뒤통수 칠 준비하고 있어요. ‘그래, 마음대로 좋아해라. 보이는 것 마음껏 소망해.’ 결국은 말씀대로 됩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 소망을 처음부터 우리에게 제공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기대하고 소망을 품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면 실망하게 되지요. 그리고 화가 나고 주님께 따지고. 이것은 일곱 살, 아홉 살 때의 정보입니다. 철딱서니 없는 때입니다. 그저 나밖에 없고 +알파가 너무 적어. 나중에 총 정보를 알게 되면 우리는 뭘 해도 실패자고, 뭘 해도 용서받은 자인데, ‘나 +알파’ 용서 받은 자가 평생을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증거해 온 겁니다.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자들은 좋다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실망으로 끝날 줄 그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귀신 쫓아낼 때 그들은 곧장 하늘나라에 들어갈 줄 알았지 예수님을 부인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사랑하기에, 그들을 기뻐하기에, 그 모습을 오히려 즐거워하기에 저희들이 구원을 받았사오니 우리에게 용서만 크게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