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5. 9. 18) 19-1
마가복음 6장 7절 봅시다.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더러운 귀신’이 나옵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어떤 스승이 제자를 보낸다면 공자같은 생각을 하게 되지요.
공자의 제자들이 나서서 귀신을 쫓아냈습니까? 아니죠. 요즘 같으면 정보, 처세술, 윤리, 도덕을 가르치죠. 귀신 쫓아내는 것은 아니잖아요.
12제자가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귀신 쫓아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예수님 입장이라면 제자들에게 교훈을 가르치겠습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시키겠습니까?
인간을 나눠 봅시다. 귀신 들린 자, 그리고 귀신 안 들린 자, 또 성령 받은 자. 이 셋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자신이 귀신 안 들렸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귀신 들린 자는 극소수이며 특별한 사람만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겠지요?
귀신 들린 자에게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냈는데 목적이 무엇입니까? 귀신 안 들린 자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령 받은 자 되는 것입니까? 나중에 제자들은 사도가 되는데, 사도들은 ‘성령을 받아라.’고 하지요. 그러면 그 과정에서 귀신 들린 자에게 찾아간 12제자에게 귀신 안 들린 자의 입장에서 귀신 들린 자를 낫게 했는데, 결국 12제자마저 아직은 성령 받은 자까지는 안 된 거예요.
성령은 예수님 부활 후 오순절이 되어서 임하거든요. 성령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하나님 우편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귀신 안 들린 정상인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1) 귀신 들린 자, 2) 귀신 안 들린 자, 3) 성령 받은 자. 셋 중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2번을 지목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뭔가? [인간 + 잉여]가 하나님 뜻인데, 우리는 잉여까지 가는 것이 겁납니다. 우리는 인간들끼리 소통하고, 정상인이라는 것에서 멈추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상인은 평균적인 (보통)사람을 말합니다. 확률 분포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지요. 천재도 둔재도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평생 조용히 살고 싶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평균인입니까? 아니죠. 제가 가락교회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이 오신 후의 세상과 예수님이 안 오신 때의 세상과의 차이를 알아야 된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우리에게 성령이 왔을 때와 성령 오기 전의 차이를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나는 이 세상의 일부(모자이크의 한 조각)입니다. ‘나’란 것이 따로 없어요. 떡에 콩고물 묻듯이 뒤섞여 있을 뿐입니다. ‘내가 인간인가’ 이런 물음을 가질 필요도 없어요.
여기 오다보니까 할머니들이 평상에 누워 계셨어요. 그 할머니들도 각자 개성이 있어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노인들 무리’가 누워있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그 무리에 속하는 것을 편안하고 안전하고 큰 오류가 없는 인생이라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놓치는 것입니까? ‘잉여’부분을 놓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공자처럼 ‘가서 내 교훈을 전하라.’고 하지 않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신 겁니까? 그 당시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완전히 미친 자입니다. 미쳤다는 말은 보통 인간과는 달리 안 좋은 여분(잉여)의 것이 붙어 있어요. 도박에 빠진 사람을 도박 귀신이 붙었다고 하지요. 이 안 좋은 부분은 잘라내고 싶어요.
안 좋은 잉여의 부분을 잘라내면 평균인으로 남지요. 정상인이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상황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어요. 왜? 편하니까. 우리가 복음을 깨닫기 전에 기존교회에 다녔잖아요. 그 교회에 출석했을 때 특별한 점을 발견했습니까? 발견 못했습니다.
교회 안 다닌 나를 교회가 우수한 나로 만들어 주는 것이 대해 반길 수는 있어도, 귀신을 거론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는 것은 원치 않아요. 유별나게 튀는 것을 우리는 원치 않아요. 성적이 우수한 자로 사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이지만, 성령 받고, 귀신 쫓아내고 이런 사람으로 사는 것은 원치를 않아요.
그래서 보통 교회는 그만그만합니다. 세상에서 교양 좀 쌓다가 교회 오게 되면 교회 분위기와 대충 맞을 수가 있어요. 왜? 자신이 평소에 쌓던 교양을 교회에서도 이야기하니까. 그러기에 교양 있는 사람이 교회에 가면 대환영합니다. 그러니 교회 가도 별 탈이 없어요. 이것을 로마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걸림돌’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누가 믿었으리요?’가 됩니다. 만약 이 취지를 오늘날 교회가 그대로 살린다면 그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정상인, 평균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상한 소리를 하니 그곳에 사람이 모일 리가 없지요.
예수님의 제자 12명이 있습니다. 이들이 미친 자들입니까, 정상인들입니까? 정상인이었지요.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기존 권력을 원했지요. 인간은 세상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 들어있으면 안심이 돼요. 베드로가 예수님 만나서 하늘나라 간다고 까불었지만 예수님이 체포된 후에는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한 이유가 뭡니까? 기존의 권력 체계가 좋았고, 그 속에 머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12제자 모두가 보통사람이에요. 예수님 혼자 설쳤지 제자들은 그냥 평범하게 살기를 원했어요. 결국은 헤어질 사람이고.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면 그 교회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12년 동안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예수님 옷을 만져 나은 사람도 세상 권력이 위협하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떠날 걸요.
어쨌든 예수님이 소개하는 세계는 낯설어요. 하늘에 있는 하늘나라는 전혀 낯설지 않아요. 그런데 ‘하늘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은 낯설어도 너무 낯설어요. 세례 요한처럼 낯설어요. 그 위대한 세례 요한도 옥에 갇혔을 때 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메시아 맞습니까?”
구원 받았으면 기적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에 대해서 불평하지 마세요. 지옥 가는 사람이 뭐라고 욕하겠어요? “다 받아놓고 뭘 불평해!” 이렇게 말할 거예요. “너는 우리가 받지 못한 영생을 받아놓고 시시한 땅의 것을 가지고 불평을 해?” 이렇게 나올 거예요.
오늘 본문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기적이 뭔가? ‘파괴’입니다. 새삼스럽게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병들고 파괴되었음을 노출시키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의 특징이 있어요. 이 세상 어떤 건축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피라미드 건축은 파괴 장면입니다. 집이 무너지면 피라미드 모양이 됩니다. 피라미드는 파괴될 마지막 모습을 완성된 건축물로 보는 거예요.
우리는 귀신 들린 자는 망가진 자라고 봅니다. 우리는 정상인이고. 그런데 예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모든 인간은 애초부터 망가진 자들입니다. 파괴된 곳에 주님이 성육신으로 오신 거예요. 그 파괴된 몸, 마리아의 몸을 입으신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뭔가? 파괴성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요나의 기적입니다.
“그동안 너는 죽은 자와 살았단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 말씀하시는 예수님만 살았고 나머지는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잖아요. 이건 결국 무슨 뜻입니까? 살았다는 인간들은 새롭게 부활한 주님의 생명 앞에서 다 죽은 자들입니다. 에스겔에 나오는 바짝 마른 뼈들입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내서 그 낌새를 조금씩 알려주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의미를 눈치 채야 되는데 눈치를 못 채요.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20절에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권능을 많이 베풀었지요. 다른 말로 하면, 기적을 많이 베풀었지요. 기적은 뭐라고 했습니까? 파괴지요. 제가 과격한 말을 한 것으로 느껴집니까? 그 뒤 21절을 보세요.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떨어졌지요? 예수님은 유황불 대신 12제자를 보낸 겁니다. 이 둘의 공동점이 있어요. 둘 다 폭파작업입니다. 피라미드를 만드는 거예요. 돌무더기를 만드는 거예요. 피라미드가 바로 돌무더기잖아요. 이것은 사람 사는 용도가 아니지요. 그 안에 죽음이 있잖아요. 얼마나 복음적이에요.
이집트 제국의 역사에 트라우마를 심었습니다. 자기 몸에 있는 상처를 자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상처는 숨기고 싶어요. 상처는 숨겨놓고 정상인으로 보이려고 하지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아담은 몰라요. 자기 몸에 죽은 자의 표시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그것을 알려 주지요.
사람 속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구체화 시킨 것이 예수님 자신의 인생입니다. 우리의 삶이 저주 받은 삶이고, 파괴된 삶인데 이 상처를 주님이 받는 거예요. 제가 인생 속에 상처가 있다고 했지요? 그 상처가 뭔가? ‘잉여’입니다. 귀신 안 들린 자가 귀신 들린 자를 보면 비정상으로 보이지요? 토마스 홉스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란 말을 했어요. 인간 100명이 모이면 1(나) 대 99(남)로 싸워요.
4식구가 있으면 자신과 다른 식구들이 투쟁을 벌입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그런 식으로 싸웁니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에요. 이것이 악합니까, 귀신 들린 것이 악합니까?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하는 인간들이 자신은 정상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매순간 투쟁하며 살아갑니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살고, 남을 밟아야 내가 숨을 쉬는 이런 속성이 우리의 어느 부분에 자리 잡고 있습니까? 우리는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인자한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속마음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뿐입니다. 얼마나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지 밤에 잠을 못 이룹니다. 혹시 잠든 사이에 누가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낮에 있었던 그 초조함이 밤까지 어이진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서도 나타납니다. 인간관계가 투쟁 없는 것이 없어요.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면 서로 투쟁이 벌어집니다. 큰 동서는 부모님께 얼마 드렸고, 작은 동서는 얼마 드렸는가? 이런 투쟁은 귀신 들린 것보다 더 무서워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정상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혹부리 영감처럼 그 혹을 가져가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인간의 혹이 되어서, 혹이 왔을 때 인간이 미처 몰랐던 악마의 존재가 주님 앞에 우루루 몰려드는 현상을 가까이는 12제자, 멀리서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십니다. 세상이 지옥이란 사실을.
세상은 마귀 천지입니다. 토마스 홉스는 그것도 모르고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세상을 봤어요. 왜 투쟁하는가? 인간은 동물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왜 동물과 비슷한가? 그것은 모른다.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지요. 이게 세상 학문입니다.
왜 모르는가? 플러스 알파(잉여)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눈에 보이는 내가 나가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나 +잉여’가 나입니다. 잉여를 포함해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내셨는데, 그들이게 시킨 일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겠지요. 12제자 본인들도 자신들은 귀신 쫓아내는 자이기에 귀신 들린 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귀신 안 들린 그들이 주님을 배반했어요. 그러니 그들이 귀신 쫓아내는 것으로 좋아해야 합니까? 내가 누구인가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귀신 쫓아낸다고 해서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귀신 쫓아냈다고 자랑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지요? ‘귀신 쫓아낸 것으로 자랑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셨어요. 이 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누구와 자신을 비교해야 됩니까? 생명책에 기록된 자와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야 되겠지요? 비교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이 땅을 방문하신 취지가 드러나지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나로 하여금 내가 아는 나에게서 더 나아가 창세전까지, ‘예수 안에서 창세전에 나는 어떤 존재였는가?’ 그것까지 확대시키는 안목을 가져마 마땅하지요. 그러면 그동안 내가 나라고 규정했고, 나는 귀신 안 들린 정상인이라고 했던 그 세계 자체가 결국 우리 속에 있는 트라우마가 풍성처럼 부푼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가짜인 나에게 속는 식으로 하루하루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이 무엇입니까? 기적은 파괴입니다. 새삼스럽게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파괴된 것을 확인하는 것이 주님이 주신 진정한 기적입니다. 이처럼 파괴된 것을 알려면 그 전에 ‘응시’가 이어야 해요. 응시가 뭡니까? 주의해서 쳐다보는 것입니다. 지켜보는 거예요.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을 주께서 이미 아시지요. 아신 자를 응시해요. 응시한다는 것은 관찰하고 주목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은 다시 설명하면 이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세상은 어떠했으며, 예수님 오신 후의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내가 남을 응시하면 끝나는 거예요. ‘저 사람은 내 마음에 든다. 저 인간은 내 마음에 안 든다.’ 이것으로 끝인데, 예수님 오신 후에는 파괴가 일어나는데, 사실 파괴가 창조행위입니다.
주님은 요리사입니다. 진흙을 이겨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요리할 때는 주목을 해야 됩니다. 파괴가 이미 창조에 포함 된 것입니다. 우리는 파괴되면서 내가 최종적으로 도달 될 모습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요. 그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제자들을 통해 귀신 쫓아내는 일을 시키신 거예요.
귀신 들린 자보다 우리가 더 나은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귀신들린 자 못지않은 거예요. 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12제자 보내셔서 귀신을 쫓아낸 그것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지는 것과 같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은혜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별 쓸모가 없어 보여 ‘이것을 어디에 쓰지?’ 라는 버리려는 것을 주님은 은혜로 주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안 주십니다. 왜냐?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골라잡은 기적이기 때문에 안 돼요. 나는 나를 팽창시키려는 의도 외에는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내가 놓친 부분(잉여)을 끌어와서 온전한 나로 만듭니다.
주께서 귀신 들린 자에게 바라는 것은 귀신 안 들린 자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성령 받은 자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초로 성령 받은 자가 누구지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몸의 지체로 만드는 것이 주님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귀신 들린 자를 어떻게 성령 받는 자로 만드는가?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눴지요. 귀신 들린 자, 귀신 안 들린 자, 성령 받은 자. 대부분 사람들은 성령 받고 싶은 마음이 없고, 귀신 안 들린 자로 살면 좋겠다고 여깁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귀신 들린 자를 찾아가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셨지요. 즉 귀신 안 들린 자로 만드셨어요. 그럴 때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권능이 들어갑니다. 그러면 인간 속에 있는 상처--
왜 귀신 들린 자를 찾아가게 했는가 하면, 인간 속에 있는 상처를 확대시키려는 것입니다. 그 속에 마귀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귀신 들린 자는 어떤 의미에서 온 세상이 불순종의 영의 지배를 받는 것에 대한 대변자 역할을 하는 겁니다. 12제자가 귀신 들린 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 안 됩니다. 주님 앞으로 끌고 가야 됩니다. 왜냐? 자신의 권능이 아니고 주님의 권능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가 12제자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목적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나를 원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까? 후자지요. 그런 인간으로 만들면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게 한다면, 복음 전파하는 내가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임을 수용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욕했는데, 사실은 그들이 충분히 이해가 되어야 해요.
주기도문에 ‘용서’가 나오지요?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왜냐? 너도 용서 받아야 하는 자라는 뜻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 있어야 돼요? 용서 받아야 될 인간으로 용서해야 될 입장에 있지요. 그런데 보통 우리가 남을 용서할 때는 어떻습니까? 나는 피해자고 상대는 가해자여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는 용서하는 것처럼 하지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용서가 되면 이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용서가 아니에요. 용서하면서 용서 받아야 할 요소가 내 안에 장착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따라서 나는 내 안에 무슨 괴물이 들어 있는지 몰라요. 주께서 나에게 일을 맡기는데, 맡기는 일이 뭔가 하면, 내가 보기에 못났고, 초라한 인간들에게 보내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욕하고 싶은 그런 인간들의 요소가 내 속에도 들어있다는 것을 아시고 주님이 그 일을 나에게 맡기셨어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용서가 남을 용서하는 가운데 나에 대한 주님의 용서가 느껴집니다. 여하간 상대가 나에게 잘못 했잖아요? 그 잘못한 것을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 알파’를 몰라서 그래요.
다윗이 ‘나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주께만 범죄했다.’고 했지요. 이 말은 다윗이 자기 범위를 확대시킨 거예요. 어린아이들의 현실 구상은 자신이 경험한 정보의 총합이 현실이 됩니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요. 내가 일곱 살 때 알았던 현실은 그 때까지의 경험이 조립된 것입니다. 나에게 친절하게 해주시던 이웃집 아저씨, 삼촌들 모두가 천사처럼 생각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그들을 고향에서 만나도 역시 천사같이 보입니까? 아니죠.
왜 그렇습니까? 새로운 정보가 수입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기 전까지의 정보는 ‘나는 왕이다. 율법에 흠이 없다.’고 여겼는데, 밧세바 사건 이후에는 정보가 하늘나라까지 도달한 거예요. 이것은 ‘+알파’입니다. 내가 생각한 나에서, 내가 미처 몰랐던 주님께서 제공하신 정보까지 더해서 보니까 ‘나는 주께만 범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가 어떻게 옵니까? 하늘 쳐다본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늘나라가 나도 몰랐던 내 죄와 연관해서, 상처 난 내 모습 속에 나타난 거예요. 이 때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되는 겁니다. 누가 사기를 쳤다면 욕을 하지요. 내가 만약 그 현장에 있었다면 살기 위해서 거짓말 안 했을까요?
회사에서 구조조정 하는데 ‘친구야, 내가 사표 낼 게. 너는 회사에 남아라.’고 앞에서는 이야기해놓고 뒤로는 인사과장 찾아가서 선물을 주고 ‘제발 제 사정 좀 봐주십시오.’해서 나중에 발표에 친구는 잘리고 나는 남게 되어 ‘친구야, 미안하다. 회사 방침이 참 희한하네.’ 이런 식으로 친구를 위로하는 척하지요.
사람이 다급하면 자기 먼저 챙기지 남을 먼저 챙길 수가 없어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에요. 결국 다 적입니다. 편할 때는 친구인데,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적이 됩니다. 이런 정보까지 ‘+알파(잉여)’로 보텔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사람에게 죄 지은 것이 아니고 원천적으로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라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응시’이고, 우리를 파괴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였지요. 다윗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야를 내가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죽이신 것으로 봐요. 이게 뻔뻔한 것이 아니고 정보가 그만큼 확대된 거예요. 9세 때의 정보가 아니고, 하늘나라까지 알게 된 사람의 정보입니다. 내 손으로 우리야를 죽여야 ‘꺾으신 뼈’가 되는데, 우리야를 죽여서 다윗은 죄인으로 등장하고(귀신 들린 자로 드러나고), 그 죄인(다윗)은 꺾으신 뼈로 인하여 용서받는 것입니다.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51:8).” 이 말은, ‘내가 쓰레기인 것을 깨닫게 하셔서 즐거워하게 하소서.’ 또는 ‘내가 실패자로 확정된 것을 기뻐하게 하소서.’ 이런 뜻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알 수 있도록 힌트를 제공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런데 사랑이 들어오니까 ‘아, 나의 이것이 미움의 요소가 아니고 사랑받는 요소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순간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나를 알게 되는 힌트를 받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몰랐었는데 누가 나를 사랑해 주니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나 +알파’입니다.
반대로 해 봅시다. 누가 나를 미워합니다. 그러면 ‘네가 왜 나를 미워하는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면서 자신을 돌이켜 보니까 내 속에 남이 미워할 만한 요소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 몰랐는데. 그 전에는 내가 나의 기쁨이 되었는데 이제 남이 미워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나에 대해 슬퍼요. 이것을 성경에서는 ‘자기를 미워하라.’고 했고, ‘우는 자는 기뻐하라. 네가 복이 있다.’고 해요.
자기의 요소로 슬퍼하라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우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어요. 어떤 곳에서는 ‘슬퍼하라’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해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합니까? 장단에 맞출 필요 없어요. 나는 애초에 없기 때문에. 나는 없어요. 왜냐? 나를 삽으로 떠서 요리사 되시는 주님이 원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가져갔어요.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주특기는 주님밖에 없어요. 그것을 위해 성육신으로 오셨어요. 이렇게 보니까 결국 나는 주님의 성육신을 보여주는 소품입니다. 나를 파괴시켜 주님이 원하는 재료로 삼습니다. 그 무너짐을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또 그 무너짐으로 슬퍼하고.
무너짐으로 슬퍼하고, 돌아서서 웃고. 나를 엉망으로 파괴시킨 것에 대해서 웃으시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미워해야 하고,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왜? 우리 속에 있는 나의 상처, 결점, 원천이 내 안에서 시작되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시작이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5. 9. 24. 08:48 녹취 마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