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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불가능성 1508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0. 8. 07:26

2015-08-22 02:01:34 조회 : 340         
불가능성 150821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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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 (IP:175.♡.38.135) 15-09-03 16:03 
광주 강의(2015. 8. 21) 18-1

예수님이 고향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쳤는데,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막6:3).” 라고 하면서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여기에서 생각해 봅시다. 서로 아는 사이라면 배척할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배척받을 이유가 있습니까? 고향에 와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는데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예전에 목수로 있을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즉 예언된 메시아로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목수로 왔으면 동네 사람들이 배척할 이유가 없는데,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하셨어요.

이 이야기가 품은 해답은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어요. 이것은, 한 사람을 육체의 안목으로 보는 것과 다른 관점으로 볼 때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봤습니까? 육신으로 봤지요. ‘내가 나를 보듯이 너도 나와 같은 사람이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 눈에는 내가 너희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그러나 나는 너희들과 질이 다르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 동네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문제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생각할 때 육신의 안목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육신의 안목 외에 다른 안목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저 산을 옮겨 바다에 빠지게 하라.” 이것이 사람에게 지시할 내용입니까? 산을 깎아서 바다를 메우는 대규모 토목공사는 있을 수 있지만 지금 당장 산을 옮겨 바다에 빠지게 하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요구입니다.

사람에게 뭘 요구할 때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면 화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요구하는 것이 뭔가 하면 ‘너희들이 다른 사람을 보는 관점으로 나를 보지 말고 다른 관점으로 나를 봐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요구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무리한 요구입니다. 왜냐? 사람이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평소 자신이 바라보는 범위 안에 집어넣어 이해를 합니다. 사람은 거울을 보면서 자기를 생각합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나름대로 자신이 정립되어 있어요. 이것이 주관인데, 사람들이 누구를 볼 때 낸 주관으로 보고, 다시 내 주관에 맞춰 변형시켜 내가 아는 사람의 범위 안에 집어넣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사람과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든 나는 내 주관대로 봐서 그를 이해합니다
. 그러면 전체 나의 주관적 세계는 변동 없이 상처받지 않고 안정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정서적 안정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평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만약 위층에 새로 이사를 왔는데 아이들이 쿵쾅거리면서 떠든다면 안정을 되찾기 위해 위층을 방문해야지요. 아랫집에 사는 사람이라고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도 사주면서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 후 조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내 세계는 다시 예전의 안정성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세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육체대로 산다.’고 합니다.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여종 하갈을 통해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이 자식은 본처의 미움을 받아 엄마와 함께 쫓겨나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이스마엘의 문제가 표출됩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하나님이 살려줍니다. 그러면 이스마엘은 구원 받았습니까? 그리고 이 기도가 합당한 기도입니까? 절대로 합당한 기도가 아닙니다. 인간이 왜 태어났습니까? 죽으려고 태어난 거예요. 그런데 이스마엘은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 요청한 것은 “저에게 내리신 벌이 너무 과중합니다.”라고 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선 내가 살아야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대로 사는 모습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취지에 어긋납니다. 여기에 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하고, 이스마엘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는데 어느 쪽이 믿음의 조상입니까? 아브라함이죠. 이스마엘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번제로 드려라.’고 하셨고, ‘이 시험에 네게 통과했으니 너는 믿음의 조상이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으로 알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께 열심히 정성들여 간구하고 충성하고 헌신하면 반대급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는 목수다. 형제들이 있었다.’ 끝났어요. 예수의 직업이 예수를 말하고, 그의 형제가 누구누구였다는 사실을 알면 예수를 알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예수를 말하는 것은 육신으로 인간들을 보고, 나를 본 관점으로 예수님을 본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들이 나를 배척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내고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보는 관점 자체가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하갈이 살려달라고 요청할 때 하나님은 살려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옥에 갔습니다. 제가 어제도 강의를 하면서 생각한 것이 기초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것이 뭔가 하면,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면 응답 받는다고 하는데, 그 기도와 응답의 내용들이 자기 사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 사는 것에서 출발했으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신 증거는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자식을 살리려 했는데 아브라함은 자식을 죽입니다. 자식을 죽이는 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치 산을 옮겨 바다에 빠뜨리는 것처럼.

그럼 주께서 왜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가? 인간은 육적인 관점 외에는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구성되었기에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 교회 가지, ‘주님이 언제 저를 죽이십니까?’ 이 날짜, 시점을 알려고 철야 기도하는 사람은 없어요.

저희교회도 수요 기도회 합니다. 예배 형식으로 진행하는데 기도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제가 대표로 기도를 하는데, 기도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 하면 ‘다르게 살아야 사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입니다. 믿음을 알려면 믿음의 조상을 봐야지요. 내가 믿는다고 무조건 우길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기준이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아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임으로 ‘나는 아들을 죽일 정도로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지금 죽어도 당연합니다.’ 죄인 되게 하시는 모습을 보여준 거예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가 인간으로써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믿는 증거는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믿을 때 전제가 뭔가 하면, 아브라함처럼 내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죽을 죄라는 관점에서 십자가를 받아 들여야지, 그렇지 않고 ‘내가 천국에 가려고 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십자가를 믿으면 되는구나.’ 이렇게 되면 이것은 십자가를 육체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저주 받은 하갈과 이스마엘 계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용할 만한 것을 제공하신 적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라는 말씀이 있고, 4장 2절에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이런 말씀이 있고, 17장 3절에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는 말씀이 있어요.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간다’는 말씀을 보면 누구 생각이 납니까?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광야에 갔지요. 그리고 광야에서 마귀를 만났지요.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사도요한이 광야에 가니까 거기에 누가 있었습니까? 참람한 이름이 있는, 신을 저주한 이름이 있는 음녀,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세상 바벨론이 나타났잖아요.

요한계시록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 그리고 광야에서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로 무엇을 보여줍니까? 영으로 세상을 볼 때 이 세상은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세계로 보여야 되고, 거기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마귀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와 먼저 만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세상에 들어가기 전에 세상 전체를 다 파악하고 부분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볼 때 우리가 육으로 보지 않고 영으로 봐야지요.

육으로 본다는 것은 나밖에 모르는, 부분은 알지만 전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으로 보는 세상은 부분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전체를 보면서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가, 친척, 고향 사람들이 전체를 보는 안목이 없다는 겁니다. 자신이 부분이니까 예수님도 부분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은 세상 전부를 다 조망하고 이 땅에 있는데, 사람들은 세상 속에 예수님이 있으니까 예수님을 세상의 한 부분으로 보고 새피하게(새 발의 피로) 여깁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안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지요. 그러면 아는 것이 믿음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믿음이 없으니까 아는 것으로 대체합니다. 지식과 정보로 바꿉니다.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아는데, 본인은 안 믿어요. 특히 목사들이.

처음 목사가 되었을 때는 아골 골짝에도 가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본인이 믿음이 있는 것으로 여기지요. 그런데 목사의 일을 하는 중에 소유가 발생되면 그 이후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되면 자기 소유(교회)가 점점 커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이 목사는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지식을 확보해서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팔아 생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이미 자신이 소유한 것이 있는데 왜 믿지요? 소유한 것을 끝가지 지키면 되잖아요. 제가 지금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떤 아가씨가 자꾸 시집을 가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네가 시집을 가면 네 소유(남편)가 생긴다. 시집 가기 전에는 주를 위해 살겠다고 해놓고 막상 시집을 가면 남편 챙기느라 주님을 멀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유가 생기면 반드시 ‘날 죽이지 마세요.’란 요구가 달라붙습니다. 이미 가졌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네가 처녀로 살았으면 ‘주를 어떻게 기쁘게 할까’를 생각할 텐데, 시집을 가면 ‘남편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를 생각한다.”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 ‘주여, 내 남편 건드리지 마세요.’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바울은 “네가 정말 결혼하고 싶다면 결혼을 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육신의 고난이 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에 결혼 하신 분들 얼굴을 보세요. 다 환란에 시달린 얼굴이잖아요. 왜 환란이 있는가? 육신으로 아는 사람은 주님이 감당이 안 돼요. 내 소유가 있는데 어떻게 주님을 믿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내 소유가 있다는 것이 감당이 안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목이고 사도 바울의 안목입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데 내 소유가 얼마나 장애가 되는지 견디기 힘들 거란 말이죠. 그래서 ‘때가 단축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하라. 재산이 있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줄어든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시간은 이미 소유화 되었기에 자기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미래와 소망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갈수록 시간이 줄어든다면 자기의 소망과는 배치가 되지요. 그러면 현실에 대한 감각이 뚝 떨어집니다. 007 영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주인공 제임스본드가 잡혔어요. 수갑이 채워지고 선반에 묶여 있는데 쇠톱이 나타나 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 단축된 것입니다. 내가 기대한 시간보다 시간은 짧게 옵니다. 내 미래가 20년 정도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시간폭탄으로 다가와 내 시간은 빨리 줄어드는 거예요.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몰라요. 시간이 단축되었다. 너를 자르기 위해서 전기톱으로 다가오는 것이 시간인데, 시간이 너를 죽이려고 오는데 너는 어찌 그리 태평한지 ‘내 아내와 자식과 더불어 몇 년 뒤에는 집을 사고 뭘 어떻게 하고’ 이런 꿈을 꾸는데 이것은 ‘아직 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은 것처럼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라고 고린도전서는 묻습니다.

믿음은 아브라함에게서 표준을 찾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죽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죽이고 난 뒤에 아브라함이 달라진 것이 뭔가? 세상 보는 눈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내 소유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럼 누구 소유입니까? 하나님 소유지요.

하나님의 소유는 특징이 뭔가? 내 소유라면 내 뜻이 퍼부어져야겠지만 하나님의 소유는 하나님 뜻이 퍼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머슴에 지나지 않아요. “예, 주인님.”하고 시킨 대로 할 뿐이죠.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 누구한테 해당되어야 해요? 하나님의 소유인 이삭과 매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말씀대로 하옵소서.’하고 이삭을 죽이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은 것은 아브라함은 자기 소유가 없고,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임한다면 나는 하나님 말씀에 소유가 되고, 말씀에 소유가 되면 말씀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일 후에 이삭의 배필을 선택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종을 하란으로 보내지요. 터키와 이라크의 국경지역 하란으로 보냅니다. 하란에 가서 리브가를 데려오지요. 여하간 아브라함은 늙은 종을 보냅니다.

떠나면서 종이 묻습니까? ‘제가 어떻게 도련님의 배필 될 사람을 결정합니까?’ 라고 물을 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네 마음대로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해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예수님 마음대로 되는데, 우리는 그 일을 어떻게 오역하는가 하면, 내 뜻대로 되어야 된다는 억지를 부리면서 모든 사건을 해석해요.

십자가마을 홈페이지에 [행패부리는 인생]이란 글을 올렸는데, 우리 삶은 일종의 행패입니다. ‘네가 뭔데 내 인생 이렇게 힘들게 하냐?’ 행패를 부리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가 불평과 원망 속에서 하갈, 가인처럼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겁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에게 제가 이런 소리를 자꾸 하니까 우리교회 식구들은 대표 기도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입을 닫아버려요. 그러면 주께서 그 입을 반드시 벌리게 하십니다. 답답한 일이 생겨서 ‘살려주세요.’라고 부르짖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며느리 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종을 보낼 때 ‘하나님께서 순적히 만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면서 종을 보냅니다. 왜냐하면 자기 세계는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화학 실험에서 이런 것이 있습니다. 물에 어떤 용액을 넣고 열을 가하면 조금 후에 물은 다 증발해 버립니다. 그러면 첨가한 용액의 찌꺼기만 남지요. 

아브라함 인생에 하나님이 가열하니까 아브라함의 현실, 아브라함의 세계가 증발해 버렸어요. 아브라함이 보고 만지고 하지만 그것은 주님 소유의 세계지 자신의 세계는 아닙니다. 사사기에서 삼손의 수수께끼가 나옵니다. 수수께끼는 차이나는 두 개의 경험을 보여주는 겁니다. 

실제로 사자를 잡아서 죽였는데 나중에 와보니 사자의 시체에서 꿀이 나왔는데,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수수께끼를 풀 수 없어요. 이 수수께끼는 신약에 오면 예수님의 비유가 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해요. 눈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보는 것을 방해해요. 주님을 아는데 방해가 됩니다.

소경이 차라리 났다고 하십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눈 뜬 뒤에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신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이 ‘나다.’라고 하니까, 그 때 소경이 하는 말이 ‘눈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내가 소경이 된 것도 내 몸이 아니었고 눈을 뜬 지금도 내 몸이 아닌 주님 당신의 몸이었습니다. 당신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저를 소경 되게 하시고, 눈뜨게 하시는 이런 작업을 저에게 퍼부어주셨군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눈을 떴기 때문에 내 몸이라 생각해서 내 몸은 내가 관리하고 내가 알아서 나를 천국에 보내겠다고 시도합니다. 이것은 스스로 도를 닦는 것이고 불교의 기본교리입니다. 요즘은 불교, 기독교 구분도 안 됩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두 개의 경험이 수수께끼에서 만나는데 아무리 만나도 그들이 하는 모든 해석은 잡담밖에 안 됩니다. 잡담이란 말은 진리와 대비가 됩니다. 인간에게 잡담만 나온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 확립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진리 주변을 맴돌고 떠도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현대인은 떠돌이로 살아요. 정신적으로 떠돌이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정립할 기회도 방법도 없어요.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살아요. 그 증거가 입에서 잡담만 쏟아내는 거예요. 삼손 때 유일에게 진리에 접근한 것은 삼손 뿐입니다. 왜? 삼손의 수수께끼는 성신에 의해 주어진 경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사자를 죽였어요. 이것은 나실인의 일을 하나님의 신이 하신 거예요. 삼손은 잡담밖에 할 수 없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려줬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의 간청 때문에 알려줬습니다. 그들은 풀지 못했습니다. 잡담을 하는 인간들에게 잡담 수준으로 이야기를 했지요. ‘강한 것에서 단 것이 나온다.’

모든 언어를 동원해서 설명해도 그 언어가 잡담에 해당되는 언어일 뿐입니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자기의 주관을 반영하는데, 인간은 자기 주관이 정립이 안 되어 있는 떠돌이잖아요. 확고한 진리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잡다한 소리를 듣게 되니 그것을 모아도 자기 정체성 확인은 점점 멀어집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언어 자체가 없어요. 왜냐? 하나님이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죽어가는 증거로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언어가 인간을 죽이고, 죽음 속에서 언어서 뛰어나오고. 인간은 죽일 수밖에 없는 언어들을 인간들끼리 주고받고 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일가, 천척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요. 그냥 육신의 안목으로 예수님을 보고 ‘예수는 목수이고, 그 형제들을 우리가 안다.’고 했어요. 이것은 잡담입니다. 그 말이 자신에게 생명을 줍니까? 죽어가는 자기 생명을 못 살립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잡담밖에 몰라요. 나단 선지자가 와서 “자신은 양이 많은데 양 1마리 키우는 자의 양을 빼앗아 자기 손님을 대접한 자가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이 하는 말이 “그런 자는 당장 죽어야 됩니다.”라고 하니까 선지자 나단이 “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해요. 여기에 대한 다윗은 반응은 “내가 사람에게 죄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진리에 접할 때)는 반드시 시킨 대로, 아들 죽이라고 하면 죽일 정도로 ‘나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안목입니다. 영적 안목이란 신비로운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보는 주님의 시선’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십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이 나를 볼 때 어떻게 봅니까? 죄인이죠. 누구한테 죄를 지었습니까? 하나님께만 죄를 지은 죄인이지요.

인간이 이것을 어떻게 압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회개하고 반성을 해도 항상 자기 잘난 것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인데, 주님은 이것도 전부 죄로 간주하십니다. 이런 안목이 들어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과 연결된 사람은 ‘나의 소유는 없다.’고 합니다.

이혼하란 말이 아닙니다. 나의 소유가 없다고 해서 내 집에 있는 물건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냉장고에 있는 포도를 만져도 주님이 주신 열매로 만지는 겁니다. 아들의 머리를 만져도 주님의 작품을 만지는 겁니다. 모든 것을 볼 때,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감사함으로 고마움으로 보는 것이 영적 안목입니다.

10분 쉽시다.

(2015. 9. 3. 09:11 녹취 마침)
 서경수 (IP:61.♡.165.136) 15-09-11 09:39 
광주 강의(2015. 8. 21) 18-2

마가복음 6장 4절에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했는데, 선지자는 천상회의를 본 사람입니다. 지상에만 회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도 회의가 있는데, 하나님과 천사 그리고 사단이 있는데, 선지자는 그 천상회의에 참석한 사람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뿐만 아니라 신약의 사도들 역시 천상회의에 참석한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위에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는 눈을 가집니다. 세례 요한이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한꺼번에 전부를 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좋은 대학 나와서 실력이 있어서 분별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미래형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형 인간이란 말은, 지금부터 미래까지를 본다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서서 거꾸로 과거를 보는 겁니다.

수평적으로 미래 - 과거 - 현재로 보지만 사실은 미래를 위로 올려야 돼요. 그래서 위에서 아래로 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성도의 여생은 미래가 아니고 과거’라고 했어요. 그럼 미래는 어디 있는가? 미래는 우리 위에 있어요. 그래서 ‘미래에 이미 믿었다.’가 됩니다.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이런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못 믿어요. 그럼 못 믿는데 어떻게 믿음을 만드는가? 내가 나를 믿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도록 주께서 조치하십니다. 삼손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요. 자신이 원하는 여자1, 여자2, 여자3을 차지하는 일이 실패로 끝났어요.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남으로 말미암아 애초부터 내 몸은 내 관할 하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 몸을 관할하시는 분은 주님인데 내가 나의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자체가 잘못입니다.

예수님이 4절에서 ‘선지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당시에 이 용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국가적 선지자’인데, 이것은 백성들이 원하는 선지자입니다. ‘우리 이스라엘을 회복케 하옵소서.’라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선지자지요. 이 사람들은 현재에서 미래를 기다립니다. 큰바위의 얼굴을 찾는 것처럼. “오실 이가 당신이니이까?”라고 물으면서. 이것은 자기 자신이 잘 되기 위해서 미래를 기다리는 겁니다.

‘전 천년주의’라는 말 들어봤습니까? 이것은 구약에 있는 예언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현재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후 예수님이 감람산에 나타나시면 최후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문자대로 믿는 사람이 있어요.

‘문자대로 믿는다’고 하는데, 문자에 대한 의미는 누가 부여합니까? 내가 부여하지요. 그러면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쓰는 언어와 의미는 나와 함께 한 시대를 살아가는 무리 속에서 소통하는 의미의 장에서 골라낸 문자입니다. 문자를 기표와 기호로 나누는데, 기호는 의미에 관한 것이고, 기표는 의미를 담기 위해 A, B, C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개’라는 기표는 ‘ㄱ+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개’라고 하는 순간 이 개는 죽었어요. 왜 죽었습니까? 개가 지금 더워서 혀를 내밀고, 목이 말라 물을 찾는 현장성을 ‘개’라는 표현 속에는 담을 수가 없어요. 따라서 ‘개’라는 언어는 일반적 문자로 표현한 죽은 개일 뿐입니다.

개의 사정을 인간은 몰라요. 개는 내 주관에서 본 하나의 객관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꽃이 있어도 그것이 나와 상관없어요. 그러나 내가 꽃을 꽃이라고 불러줄 때 그 꽃은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어디 이런 횡포가 있습니까? 청춘 남녀가 사귈 때, 남자가 “이름이 뭡니까? 전화번호는요?” 이것을 묻는 순간 그 여자는 이미 내 영역 속의 여자가 되었어요. 나에게 필요한 여인. 내가 거절하면 군소리 말고 물러가야 하고, 내가 전화를 걸면 속히 전화를 받아야 할 그런 여인으로 이미 들어왔단 말이지요.

이것은 나의 인질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상대방 여인도 똑같이 나에게 그런 식으로 대해요. ‘남자야, 이제 너는 나의 그물망 속에 들어왔어. 내가 부르면 쫓아와야 하고, 배고프다고 하면 밥을 사줘야 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지내다가도 한 순간 기분 나쁘면 전화 수신 거부하고 작별을 합니다.

인간의 모든 말은 전부 잡담입니다. 왜? 전체는 모르고 부분만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전체가 보입니다. 전체가 보이는 지점에 서면 예전에 부분만 알았던 모든 것이 바로 마귀가 그런 장난을 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귀는 인간에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집어넣었습니다. ‘너는 무조건 살아야 한다. 이유는 묻지 마!’ 이렇게 나옵니다.

사는 방법은, 인간이 자연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때 여기서 문화가 생기고, 자연에서 문화를 뽑아내는 것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콩나물을 샀으면 콩나물 꺼풀은 벗겨내고 잔뿌리는 잘라내지요. 내게 필요한 현실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내게 필요치 않는 것은 잘라냅니다. 그 잘라낸 것 중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진짜 현실을 만들어 놓았는데 마귀의 속성을 받은 인간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따로 뽑아내기 위해 언어를 활용해서 잘라내는 작업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말씀을 해요. 그러면 인간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주님은 전체를 두고 이야기했는데, 인간은 사적으로 ‘저것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될까?’를 생각하니까 주님 말씀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일 뿐입니다. 주님이 주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그 언어 속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언어에 내가 죽임을 당하면서 우리는 주님 안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삶, 생명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주님이 우리를 가지고 생명을 만들어내는 절차에 우리가 참여된 입장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 전파에 소속되어 있고, 그 업무에 우리가 재료로 사용된 거예요.

선지자의 첫 번째 모습은, 내 나라 내 민족 살려 내라는 것입니다. 안양공부에 참석하는 분 중에 YMCA에서 봉사하시는 분이 있어요. 예전 복음을 모를 때는 자신이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복음을 알고 난 후에는 계속 이 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회의에 빠졌답니다.

북한 주민을 위해 ‘아리랑 공연’을 하고 ‘홀로 아리랑’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것은 독도를 노래한 것입니다. 독도는 어디에 속합니까? 자연에 속하지요. 가만히 있는 독도 생기 다 빼고 ‘잘 있었느냐?’ 인사는 왜 합니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독도는 그냥 가만히 있을 뿐입니다.

독도는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서로 자기 땅이라고 싸우고 있어요. 이것은 현실이 아닌 가짜 현실인데 우리는 이것을 내 중심의 유일한 현실로 봐요. 이렇게 되니 예수님은 비현실이 되는 거예요.

선지자는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현실적인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또 한 선지자는 인간들에게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비현실적 선지자가 있어요.

마가복음 6장 4절의 ‘선지자’는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왜? 인간들이 기대하는 선지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진짜 선지자가 와도 배척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진짜 선지자는 배척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왜냐? 현실과 비현실은 넘을 수 없는 단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절은 불가능성입니다.

예수님은 불가능성을 말씀하시는데 교회는 가능성을 이야기해요. 가능성을 이야기하면 이것은 절(사찰)입니다. 불가능성을 이야기해야 참된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니까 인간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안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믿는다고 하면 이것은 거짓입니다.

사랑하지 마세요.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가짜 사랑은 사랑 없는 것이 들통날까봐 자꾸 사랑하려고 애를 써요. 믿음, 소망, 사랑은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야 살아있음의 생생함이 훼손되지 않아요. 이것을 말로 표현하면 말한 당사자의 세계로 들어오기 때문에 이것은 변질이 일어납니다. 썩은 것이지요. 주님은 이런 더러운 것을 받지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살면 찬양이 되는데 찬양한다고 음정, 박자에 신경을 쓰면 이것은 자기 솜씨 자랑이지 찬양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가짜만 추구하고 나는 진짜만 이야기한다. 이 상태를 유지해라. 이것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발 네 육신대로 살아. 믿는 척하지 마. 그것은 너무 어색해. 네가 그냥 살면 내가 도와줄게.’ ‘안 믿어집니다.’ ‘그러니까 네가 믿음이 없지.’

‘막 살아도 되지요.’ 이것이 믿음 있는 자입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편한 것입니까? 이런 믿음이 있다면.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찾는 것도 주께서 이미 준비해 놓았다는 거예요. 과연 아브라함 종이 가서 리브가를 만나 데려오는데, 리브가의 오빠가 계시를 받고 하는 말이 ‘누이야, 너는 한 남자의 여인이 아니고 천만인의 어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원수의 성문을 열 것이다.’ 라고 했어요.

잔다르크도 아닌데 원수의 성문을 연다? 이것이 뭔가 하면, 미래의 뜻이 우연한 방법으로 너를 아브라함의 집안에 시집을 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네가 아브라함 집에 간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갖고 있던 약속의 일부를 네가 대를 이어서 그 속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브가의 속성 중에 원수의 성문을 여는 속성이 나오고, 그 속성이 자식으로 구체화 되면 그것은 야곱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전사, 메시아 계열로 이어져야 합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배척받는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에요. 그래서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막6:5-6).”고 했는데, 이상히 여기셨다는 말은, 다른 데와 비교해서 이쪽이 문제 있다는 것을 주께서 아셨다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점점 진짜 선지자의 모습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입견이 작용하기 때문에 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그동안 내가 알았던 예수가 일거에 다 헛된 것이 되지요.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문장들만 골라서 이것은 누가 봐도 100점짜리고 완벽하다고 인정한다면 그런 기도를 드린 내 뜻대로 됩니까? 이것 말고 아무렇게나 기도하면 응답 됩니까?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기도를 다 하세요. 그래야 육과 영의 속성이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숨기지 말고 다 하세요. 단, 이 모든 것이 박살 날 준비를 하고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 기도가 응답이 안 될 때, 그것은 주님이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할 때 장난삼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치고 ‘아멘’을 했다면 분명 이 기도는 응답이 안 되지요. 그러면 ‘이런 기도는 응답이 안 되니까 다음에 제대로 기도하면 응답 받겠지.’라는 미진한 것을 기대하는 오류가 발생돼요. 항상 기도할 때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하시고, 그것은 일체 주 앞에 거부당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해요.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거부당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에요. ‘네 힘으로는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선지자는 고향에서 배척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고, 내가 납득이 되는 그런 예수님이 아니고,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나의 가능성을 믿지 않아야 될 죄인의 입장에서 주님이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7-8절을 봅시다.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구약의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른 지파 사람들이 도와주면 살고 안 도와주면 못살아요. 지난 수련회에서 사사기 말씀을 공부하면서 1장부터 한 것이 아니고 마지막부터 했습니다. 마지막 내용은 레위인이 떠돌아다니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레위인이 떠돌면 안 돼요. 특히 에브라임 지파의 레위인은 그곳에 있어야지 다른 지역으로 가면 안 돼요. 그런데 떠돌아 다녔습니다. 이 본문 말고 다른 부분에도 레위인이 떠돌아다니는 장면이 나옵니다. 레위인 소년이 미가 집에 가서 그 가정에서 복을 빌어주는 일을 했어요.

다윗이 왕이 된 후 레위지파 사람들은 성전 공사를 위해서 교대근무를 했어요. 다윗 왕 시절에는 레위인들의 생계가 보장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왕이 있으므로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시가 내려와 제대로 굴러가니까 레위인들이 떠돌아다니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사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언약을 놓치니까 각자 자기의 소유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각 지파별로 왕이 따로 있었어요. 사사 압돈은 아들 40과 손자 30이 있어서 나귀 70필을 탔다(삿12:14)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사가 그 동네에서 왕 노릇을 했다는 말입니다.

왕 노릇 했다는 말은, 동네 사람들이 땀 흘려 수고해서 얻은 수확물로 사사 자신과 가족들이 먹고 살았다는 것인데, 마르크스의 이론에 의하면 이것은 노동력 착취입니다. 이것이 왕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모든 삶은 경제가 바탕인데, 이곳에는 착취와 착취당하는 두 계급에 의해 경제가 돌아가고, 이것을 통해 문화, 사회가 형성되고, 국가가 유지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 계급이 없어져야 이상사회가 된다고 주장했어요.

마르크스의 착각은 이것입니다. 계급이 문제라고 했는데, 계급은 없습니다. 계급은 본인이 만들어요.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에게 자아가 생기면 자아는 그냥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계급으로 포장을 합니다. 그러니까 계급은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남보다 못산다면 스스로 자신은 억눌린 계급이라고 포장을 해요. 그래서 가진 자의 집에 불을 지르고 행패를 부립니다.

노동자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자 계급을 만듭니다. 그러면 갑자기 사용자, 즉 부르조아 계급이 생깁니다. 이렇게 적을 만들어 놓고 일하다가 힘들면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으로 삼습니다. 계급을 만드는 이유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중성으로 취급해요. ‘개’라고 하면, 여기에는 암컷, 수컷 다 합쳐서 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볼 때 우리가 개를 보는 것과 같아요. 그냥 흙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있는 존재지 단독적으로 인간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전도하라고 보내면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 소유가 없으면 어떻게 삽니까? 12제자 안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이것으로 됐다는 겁니다. ‘나만 있으면 나와 너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따로 자신의 소유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어떤 성도에게 집이 3채가 있고, 승용차가 2대 있고, 땅이 10만 평이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할까요? 주님의 것이기에 감사하면 됩니다. 주께서 복음 전하라고 이런 것들을 주신 거예요. 그런데 또 다른 성도가 하는 말이 “당신은 복음을 전하는 성도이고, 당신의 재산도 복음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데, 내가 요즘 복음을 위해 살면서 경제가 좀 어려운데 매달 100만원 정도 저에게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사람에게 돈을 주면 안 됩니다. 왜냐? 그 사람은 먹을 것이 없으면 굶어 죽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나보다 일찍 이 세상을 제대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는데, 내가 돈을 줘서 그 찬스를 빼앗으면 안 됩니다. 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론은 멋진 이론이지요? 주께서 굶어 죽으라고 하는 사람을 내가 동정을 해서 내 재산을 나눠주면 그 사람은 지옥 같은 이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을 사람인데 내가 그 사람의 발목을 잡고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더 고생하게 만들었으니까 이 죄를 어떻게 감당하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돈을 구하러 왔다는 자체가 복음을 안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에요. 정말 그 사람이 복음을 안다면, 부자가 도와주려고 해도 “내가 천국 갈 기회를 당신이 왜 방해를 합니까?”라고 하면서 거절할 거예요. 그러면 사사기 20장 28절 말씀처럼 “주여, 이 사람을 도와줄까요, 말까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사기에 이런 대목이 나오지요. “베냐민 지파를 칠까요, 말까요?”라고.

이들이 처음에는 이런 기도를 안 했어요. 처음에는 무조건 베냐민 지파를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도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주신 돈으로 어려운 사람 도와주겠습니다. 그러면 30배, 300배 더 복을 주시옵소서.”

자신은 착한 일 한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아무 축복이 없어요. 그러면 이제 기도를 수정합니다. “주님, 제가 이 사람을 도와줄까요, 말까요?” 이런 식으로. 구제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이게 어떤 식이냐 하면, 구제한 후에 그 사실을 완전히 잊는 것입니다. 나중에 구제받은 사람이 찾아와서 “성도님, 그 때 감사했습니다.”라고 하면,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이렇게 될 때,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 것입니다.

구제하는 것이 죄고, 헌금하는 것이 죄입니다. 왜 그런지 이해됩니까? 예배 참석도 그렇고, 성경공부도 그렇고, 기도도 그렇고 다 죄가 됩니다. 모든 영광은 우리 주님이 받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 레위 지파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는 사람에게 없습니다. 왜냐? 본인이 귀신에 들렸는데 어떻게 귀신을 제어합니까? 위에 계신 분이 밑에 있는 귀신을 제어하지, 같은 귀신들끼리 귀신을 제어할 수는 없습니다. 12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의 지시대로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와 함께 있다는 말은 몸이 같이 붙어 다닌다는 의미가 아니고, 제자들이 일하는 기능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어요. 본인이 어떤 일을 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 모든 일도 나의 욕심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주님과 함께 있는 성도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일하는 직장에서 손을 놀리는 가운데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너무 촐랑댔구나.’라고 느낄 때, 이것이 마귀를 제어하는 현장입니다.

마귀를 제어하기 전에 나를 제어하게 하십니다. 내가 마음껏 성질을 부려 내 속에 있는 귀신이 다 튀어나오게 하면서,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현상이 일어날 때 이것이 주께서 함께 하심 때문이지, 결코 내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가 성적표를 가지고 왔는데 성적이 엉망이라 벌벌 떨면서 집에 들어갔는데, 집안에서는 손님들이 와있고,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계 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다른 일이 있기에 성적 내려간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하시는 현장입니다.

나는 성적 내려가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어떤 현장에 가면 낯선 사태가 벌어지면서 내 걱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걱정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매일 이런 상황을 맞이합니다. ‘별 일 아닌 것을 괜히 걱정했네.’ 이렇게 되지요.

야곱이 형을 만나기 전 사전에 선물도 준비하고, 그 선물이 통하지 않을 때를 대비해 또 다른 것을 준비했는데, 막상 형을 만나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창33:4). 그러니까 형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문젯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현실은 주님의 현실입니다.

내가 나의 현실이라고 여기고 관리하고 책임지려했던 울타리를 날마다 허무는 것이 마귀를 제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설 때는 걸치고 있던 훈장과 아름다운 옷을 벗어버리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나를 주님이 이 자리에 보냈습니다.’ 이렇게 나서면 마귀를 안 이길 수가 없어요.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그 현장에서 승리케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 힘으로 이겨보겠다고 갑옷을 두겹, 세겹 걸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특히 이런 현상은 상견례 할 때 많이 있어요. 우리 집안은 보통 집안이 아니라는 것을 과시하려고 온갖 치장과 언술을 동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정말 힘듭니다. 출근을 하면서 자신을 치장하고 중무장해서 가니 걸음이 가벼울 수가 없어요. 이런 자들에게는 귀신이 웃고 있습니다.

내가 무장해서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벗어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 것이고 내 것은 없음을 알고 살아가면 마귀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12제자를 파견한 것은 못난 자들을 보낸 것입니다. 왜? 그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괜히 나서서 주님을 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주신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몸으로 살면서 마치 내가 주인공인 냥 내 현실을 따로 챙겼습니다. 이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