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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강의-기이한 종속 1510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0. 7. 07:34

2015-10-02 23:47:44 조회 : 154         
기이한 종속 151002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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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19.♡.174.209) 15-10-06 10:02 

20151002a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기이한 종속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34장 27절부터 두 줄만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시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란 거죠. 이스라엘 백성은 산 아래 있고 모세만 단독으로 산 위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산 아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고 해서 거기서 진리가 나올까요? 진실이 밝혀집니까? 그들 가운데 아이큐 높은 사람도 있고 공부 많이 한 사람도 있을 건데 같은 인간들끼리 모여서 산 밑에서 백날 연구하고 인문학 강좌니 어떠니, 의학이 어떻고, 화성에 소금물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그런 게 인간의 목적이냔 말입니다. 그런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수단방법에 지나지 않지요.

그런데 이층에 올라간 시내산 위에 간 모세는, 지금 모세에게 하루 삼시 세끼를 어떻게 먹느냐, 어느 셰프를 모셔다가 밥을 어떻게 먹느냐, 물은 어떤 생수를 먹느냐, 하는 그런 게 전혀 모세가 존재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층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이것 하나밖에 없어요. ‘종속’이라는 거예요. 어디에 속했다는 철저하게 속해 있다. 인간이 어디 속하지 아니하면 미쳐버립니다. 그래서 단언하건데 세상 모든 사람은 미쳐있어요. 왜? 단독적으로 사는 식으로 평생을 살기 때문에.

교회 올 때는 주님, 주님, 부르지요. 일요일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종속 돼있어요. 나오고 난 뒤에는 해방이에요. 이제 자기 혼자밖에 없어요. 그걸 사르트르는 ‘혼자 있는 인간’이라고 했는데, 이걸 보통 ‘실존’이라고 이야기해요. 인간은 홀로 있다는 겁니다. 혼자 있는 존재가 뭘 하느냐? 날마다 선택을 하게 돼있어요. 세일하면 옷을 노란 색 할 것인가, 차를 회색 차 살 것인가, 흰색 차 살 것인가? 항상 현장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가기 전부터 마음속으로 선택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인간의 마음이란 계속 선택을 구성하고 선택을 예상하고 선택 자체를 희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모든 것이 홀로 사는 법이에요. 실존적이죠. 혼자 살면 인간은 미친 인간이에요. 마귀가 가만두질 않습니다.

학교에 아침에 출근하면 얘들 스물 댓 명 있잖아요. 교사도 미쳤고 학생들도 미쳤고 다 같이 미쳤어요. 왜냐하면 혼자 사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왜 공부하느냐? 홀로 서기 위해서 해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선택하기 위해서. 이게 시내 산 밑에서 인간들이 하는 짓이었습니다. 그렇게 선택했더니만 그 선택의 방향성이 있었습니다. 뭐냐? 나를 위한 신이 되는 것, 나를 위한 신을 섬기는 것, 곧 자기 자신을 섬기는 거죠.

사람들은 위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요. 인간이 사는 세상 위에 뭐가 일어나는지 전혀 몰라요. 전혀 모를뿐더러 거기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거기에 대해서 위층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나의 소박하고 행복한 인생을 네가 왜 훼방하느냐? 이렇게 시비 거는 용으로 이야기해요. 내가 혼자 살겠다는데 왜 당신은 종속되라고 이야기하느냐? 그게 딱 싫다는 거예요. 헌금을 해도 얼마 할까, 내가 선택하고. 교회 가는 것도 내가 선택하고. 기도할까 말까, 내가 선택하고.

종속이 돼버리면 선택할 길이 아무것도 없어요. 종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종속이 돼버리면 선택은 날아가 버려요. 선택이란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종속됐는데 무슨 선택입니까? 선택한들 먹혀들지 않잖아요. 종속되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이런 부사가 나와요. 저절로. 모든 것이 저절로 인데 누구 저절로냐 하면, 바로 나를 종속하고 있는 그분의 뜻대로 저절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겁니다. 우린 종속된 상태지요.

그래서 혼자 사는 사람들은 내가 다음 행동을 뭘 하면 되지, 하고 본인한테 묻잖아요. 그런데 저절로 된다든지 종속된 사람한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께서는 이번에 무슨 업무를 저에게 하게 하시나이까? 무슨 일거리를 주시는지 질문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혼자 있으면 질문을 안 하잖아요.

요새 현대인들의 특징이 질문이 없어졌어요. 필요한 것은 인터넷 찾아보면 되니까. 질문한다는 것은 질문하는 사람에게 종속될까 겁이 나서 스스로 알아서 찾아서 해결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은 누구로부터 종속되지 않음을 그 사람은 그걸 해방,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위층이 없다는 거예요.

어제 뉴스에 보니까 외국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텅텅 비어있는 바가지에 눈, 코, 입을 그린 것 같은 아기가 태어났어요. 의사들은 태어나자마자 죽는다 했는데 돌을 맞았습니다. 뇌가 하나도 없어요. 이게 현대인입니다. 자기 외양과 외모는 꾸미는데 안의 내용물이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꾸미느냐? 자기와 똑같이 생긴 바가지가 또 있거든요.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흉내 내기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모방이죠.

모방이 사회를 만든다. 모방하고 싶지 않으면 탈퇴하면 되고 모방하고 싶으면 거기에 등록하면 되고. 그런데 모방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그건 본인들이 알 수 없지요. 자식은 태어나면서 부모 모방하겠지요. 그래서 얘들 행동을 보면 부부 싸움에서 나온 행동이 자기들끼리 싸울 때 다 드러나요.

오늘 본문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시내 산 위에서 물도 마시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인간에게는 본인이 소중하다는 것은 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나한테 소중한 것을 내가 따로 만들면 안 돼요. 나한테 자식이 중요하니까 자식을 가져야 되겠다. 그건 빈 바가지에 남들 다 가진 자식 하나 채운 것밖에 안 돼요.

참된 성도는 이래야 돼요. 이 세상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줄 알고 살아야 돼요.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니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중요한 게 있다면 인간은 그걸 목표로 살게 될 게 분명하거든요. 그렇게 돼버리면 스스로 본인이 두뇌가 텅텅 비어있다는 자백을 한 셈이 돼버려요.

애굽 사람들 신이 열 가지나 됐잖아요. 출애굽 할 때 재앙이 열 번이죠. 열 번이 뭐냐 하면, 전부 하나 하나가 그 당시 애굽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신을 공격하는 재앙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에 사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재앙을 내렸다는 말은, 결국 애굽의 신들의 구체적인 실제 내용은 마지막 재앙에서 나타나죠. 실제 그들이 중요시한 것은 신입니까, 자기 맏아들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맏아들이에요. 그러면 아홉 가지 재앙은 뭡니까? “신들이여, 내 대를 이을 자식을 잘 보호하소서.” 그거지, 뭐.

그런데 열 번째 재앙에서 맏아들을 죽이잖아요. 부모 입장에서 안산의 세월호 학생들 부모들이 가슴 아파하느냐 하면, 늙어 죽었으면 말을 안 해요. 성인 되어 까불다가 죽으면 애통하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걔들이 보호해야 될 보호 대상이 되기 때문에 애통한 거예요. 얘가 죽었다는 말은 부모가 평생 살아도 자기 자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자괴감이 본인한테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자식 잃고 난 뒤에 나간 술값이 4억이 넘는다는. 보상금 받아야 술값도 안 돼요. 이러고도 내가 부모냐?

성경에 나온 출애굽 이야기가 옛날이야기가 아니에요. 그것도 맏아들 안 중요하다는 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식이 아예 없을 때는 우리끼리 자식 없어도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데 막상 자식이라도 낳으면 제일 중요한 것이 자식이에요. 도킨스라는 사람이 이야기했잖아요. 인간 유전자 자체가 그렇다는 거예요.

인간이 특별히 나쁜 성질이 있고, 인간성이 못 되고, 양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고 인간 본성 자체가 dna, 자기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외부의 모든 요소들은 유전자를 영구불멸의 존재로 만들기 위한 보조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인간 덩치라는 겁니다. 유전자만 자식을 통해서 퍼뜨릴 수 있다면 까짓 것 내 한 몸 아낌없이 바치리라. 이게 타고난 부모의 자식 사랑이에요. 이건 누가 가르칠 문제가 아니라 타고났다는 거예요. 남의 자식은 왜 안 되느냐? 남의 자식은 내 dna가 어니거든요. 내가 불멸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식 낳는 것밖에 없어요. 자식이 죽었다면, 자식 한 사람만 죽은 게 아닙니다. 내가 저주받은 거예요. 내가 희망이 없어진 겁니다.

자식을 낳았는데 이게 외탁을 했는데 전혀 나를 닮지 않았다. 기분 굉장히 나쁘죠. 여자 쪽 dna를 다 가졌는지. 그걸 옛날 사람들은 종달새라고 하죠. 티비에서 추석특집으로 <허삼관>이란 영화 했잖아요. 그게 남의 자식 키우는 거예요. 종달새처럼 다른 새끼를 자기 새끼로 키우는 가정 이야기입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기억나는 게 에서 이야기. <허삼관>에서 에서와 유사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제가 참 은혜 받았습니다.

자식이 자기를 키워준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가 아닌 걸 알아요. 자기 아버지는 놈팽이로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너무 한량이고 바람둥이라서 내가 낳은 자식이 한둘이냐며 자식을 무시하는 나쁜 인간이에요. 그런데 키워준 엄마, 아빠는 너무 착해요. 자식이 찾아갑니다. 걔는 고기만두가 그렇게 먹고 싶은 거예요. 분명히 지가 낳은 자식인 줄 알면서도 호적에 너 같은 자식 없다고 나가라고 했어요. 그 아들이 만두가 먹고 싶어서 한 그 말이 아직 제 머리에 남습니다. “아버지, 만두만 사주면 다시는 안 찾아올게요.” 어린 마음에 만두가 너무 먹고 싶어서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는 잘 사니까 만두만 사주면 안 찾아오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에서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제가 왜 그 이야기를 합니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 주님한테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주님은 이렇게 합니다. 네가 왜 따로 중요한 것은 선택하느냐? 더 심하게 말해서 “그런 버르장머리 어디서 배웠어?” 너는 네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야.

모세처럼 우리가 시내 산에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 저것 사주세요, 이럴 수가 없어요. 요새 유행하는 아가씨들이 남자친구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오빠, 귀신 꿈꿨어.” 그러면 경상도 오빠는 이게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꿨으면 꿨지 나와 무슨 상관인데. 경상도 상남자들, 아주 투박스럽고 차가운 남자들. 그걸 사자성어로 나쁜 남자. 우리 주님은 너무나 나쁜 남자에요. “하나님, 여기 아파요. 호 해주세요.” “이게 어디서 어린냥 하고 있어?”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질문한 것처럼, 기적이요? 우리가 왜 기적을 원하지요? 모세가 시내 산 올라갔을 때 자기는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안 먹었어요. 거기서 무슨 기적을. 어젯밤에 귀신 꿈꿨다는 그런 소리를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해요. 위층이 없어요. 현대인들은 위가 없어요. 위아래에서 위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뇌가 하나도 없는 어떤 아이처럼. 바가지에 눈 그리고 코 그린. 영국 아이에요. 현대인들은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어요. 그저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면서 흉내 내는 것, 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따로 준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소중한 것을 찾을 생각도 하지마시고 얻을 생각도 하지마세요. 하나님이 따로 챙겼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 2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말씀 할 때는 우리가 아래 있지 마시고 모세와 같이 시내 산 위에 있다고 생각합시다. 변화산 위에 있다고 생각합시다.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언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언약을 위하여 모세로 하여금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게 합니다. 이 말은 언약이 너를 살리리라. 네가 평소에 산 밑에서는 물마시고 뭘 먹어야 하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먹지 않더라도 언약이 너를 살려낼 것이다. 너는 언약을 담는 바가지만 되면 돼요. 바가지라 했는데 로마서 9장에서는 그릇이라 하지요. 긍휼의 그릇이 있고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 있다. 그걸 합치면 우리는 그릇이다. 다른 말로 하면 빈 그릇이다. 내용은 누가 채운다? 우리가 귀하다고 여기는 것,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내 자아를 채울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가 태어나면서 우리는 이미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고자 하는 그런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 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주께서는 우리가 소중한 것, 다 비워집니다. 다 부어버립니다. 채우면 부어버리고, 채우면 부어버리고. 언약이 있을 자리에 어디 엉뚱한 이물질이 끼느냐고 차버리죠.

부부 사이에서 남자들은 잘 모르는데 여자들이 제일 신경 쓰는 것이 이물질 끼는 겁니다. 낯선 여자한테 메시지 오는 게 있는지. 남자들 같으면 툭툭 털면 그만인데 여자는 그런 것에 굉장히 민감해요. 그런데 이것이 부부 관계뿐만 아니고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세포 자체가 이물질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그러한 기능을 하게 돼있습니다. 바이러스가 들어왔다, 내부에서 강력하게 저항해서 백혈구로 물리치지요. 그러면 뭘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강력하게 저항하느냐? 그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dna. 유전인자. 그러면 나는 아니에요.

암세포가 있다. 암세포는 암세포 본인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것을 전부 파괴시키지요. 그러면 암세포는 언제 죽는가? 다른 것이 다 파괴들 때 먹을 게 없으니까 같이 파괴되지요. 결국 암을 통해서 인간을 죽게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인간으로 하여금 암에 걸려 죽고 각가지 방법으로 죽고, 죽고, 죽이는 이유가 뭐냐?

성도한테는 죽어도 괜찮다는 걸 말해주고, 성도 아닌 사람한테는 까불어도 죽을 때까지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에는 언약의 바다, 언약의 세상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언약이 뭐냐? 지키면 축복이고 못 지키면 저주지요. 그러면 언약의 세계는 색깔이 둘밖에 없어요. 축복 색깔과 저주 색깔밖에 없습니다. 그걸 위층에서 시내 산 위에서 보여줘요.

그걸 시내 산 위에서 보여줌으로써 모세로 하여금 미리 경험케 하는 것은, 오늘 강의 제목이기도 한데요, 종속되게 함이에요. 종속되지 않으면 인간은 미쳐버립니다. 왜 미친다 했습니까? 모든 것을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본인이 알아서 챙겨야 돼요.

그러면 이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dna, 도킨스 이야기처럼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강력하게 반발해야 되니까 그게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 피곤한 인생입니까? 사람이 사는 게 왜 피곤한 줄 알아요? 스스로 서려고, 나만 살려고 하니까 피곤한 겁니다. 그 피곤이 결국 뭘 유발하느냐 하면, 인간을 미쳐버리고 말아요. 그게 가을철에 오는 우울증 같은 거잖아요. 왠지? 왠지 낙엽 밟고 싶어라. 왠지 오늘은 그대에서 전화하고 싶어라, 이런 것.

미쳐버린다는 말은, 불안정한 거예요. 왜 안정되지 못하는가? 종속될 대상이 없어요. 매여 사는 방법을 몰랐어요. 매여 살면 그렇게 편한데 매여 살줄 몰라요. 매여 살면 종속되면 어떻게 산다고 했습니까? 세 자로 모든 것이 ‘저절로’ 되지요. 오뉴월의 개 팔자처럼. 그냥 모든 게 저절로 흘러가고 있어요. “하나님, 내일 뭘 할까요, 모레는 뭘 할까요?”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지 말고 오늘 것만 생각해.” 왜냐하면 주님의 목줄에 내가 매여 있으니까 짖으라면 짖으면 되니까.

사람들이 자꾸 개를 욕하는데 인간은 개가 되기 전까지는 행복은 없습니다(^^). 개가 되기 전까지는 축복이란 걸 몰라요. 그럼 혼자 삶은 뭐냐? 혼자 삶은 노숙자가 딱 제격이에요. 방랑자,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최백호, 딱 그 꼴이에요. 아무리 많이 가져도 허탈하고 허무하고 기쁜 것도 몇 시간 안 가요. 그 다음에 가진 어떻게 지킬지 지키기에 급급해요. 목에 목줄해서 보이지 않는 위, 모세가 만났던 시내 산 위의 하나님한테 개 목줄로 연결되면 세상 팔자 그것보다 희한한 팔자가 없거든요.

오늘부터 개로 살아보시렵니까? 개 되는 즐거움, 정말 최곱니다. 세상에 북한이 핵을 가져도 내 마음은 평화로워라. 북한이 핵을 터뜨리든 뭘 해도 관계없어요. 안정돼있어요. 양파 재배업자가 재배면적 늘어나서 양파 값이 폭락해도 개 목줄로 하나님과 연결돼있으면 아무 걱정 없어요. “그래, 양파나 실컷 먹고 죽자.”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은 스스로 서려고, 나 혼자 서려고, 그걸 실존이라 했지요. 혼자 사는 존재는 매사가 선택해야 될 부담을 갖습니다. 그리고 선택할 때 기쁨이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 선택해놓고 후회합니다. 그때 선택을 신중해야 했는데. 미쳤지. 내가 그런 남자 좋다고. 빼도 박도 못하고 20년 동안 살고 있다. 지가 젊을 때 선택해놓고 20년 뒤에 후회하네. 울면서 후회해요.

후회 안하는 인생이 어떻겠느냐고 저한테 묻지 마세요. 후회 자체가 우리한테 없어야 될 선택한 것 때문에 이물질이 들어온 거예요. 위 속에 구정물이 들어온 거예요. 우리 몸속에 산 위의 언약이 들어와야 되는데 산 밑의 구정물이 들어온 거예요. 구정물 들어오니까 급성 간암 걸려서 죽어야지. 13층 올라가서 낫긴 낫습니다만. <용팔이> 이야기에요. 바람의 동산에서 바람이나 쐬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복수한다고 해서 복수했다고 치면 남는 게 뭔데요? 나는 나 홀로 사는 게 맞다. 그럼 개 목걸이는 언제 거는데? 개 목걸이만 걸면 그 사람은 이 땅에서 13층 아니라 15층 살아도 그건 저주밖에 없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7절의 말씀은 이겁니다. 네가 물도 안 마시고 밥도 먹지 않은 것은 언약 앞에서는 밥 먹고 물 마실 필요조차 느낄 필요 없다. 네 생존이 언약 앞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 몇 년을 더 사느냐 나이가 얼마냐,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앞에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모세를 따라 모세에 개 목줄해서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내려오는 순간이 바로 29절에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죽어났습니다. 이제 시내 산 위에 있던 언약이 산 아래 내려왔어요. 인간은 감당 못해요.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의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광채가 났는데 본인은 광채 나는지도 몰랐다는 겁니다. 모세 얼굴이 광체로 빛나지요. 그 광채는 모세에서 나온 광채일까요, 모세 손에 들고 온 그 무엇의 광채일까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지만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지만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어요. 마태복음 6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질문을 하나 할 텐데 답변을 해보세요. 마태복음 6장 29절, 예수님의 말씀인데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들풀에 피어있는 꽃과 솔로몬의 화려한 옷 중 어느 것이 더 영광스럽습니까? 관점 문제입니다. 암호 문제입니다. 솔로몬의 옷, 금으로 만든 옷이 있어요. 여기에 들풀이 있다고 합시다. 둘 중에 어느 쪽 옷을 입을 겁니까? 솔로몬의 옷을 입을 거잖아요. 그런 안목이 있잖아요. 그 안목이 왜 있느냐 하면, 내가 늘 선택한다는데 문제가 있다니까요. 우리가 늘 선택할 때 나한테 중요한 것을 기준으로 선택하게 돼있어요. 그런데 나한테 중요한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안목에 의하면 저주받을 요소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동안 선택하면 그 값으로 죽습니다. 평생 자기가 옳다고 여겼던 선택이 점점 더 암에 걸리게 만들고, 치매 걸리게 만들고 요양병원에 가게 만들고, 교통사고 나게 만들고, 간암 걸리게 만들고. 하지만 간암 걸려도 대관령 바람의 언덕에 올라가서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뽀뽀하면 되지 않겠느냐. 뽀뽀해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그 인간이 그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 인간 천국 가도 소용없겠네요? 소용없어요. 그러면 천국 못 가겠네요? 갈 수 있어요. 어떻게? 모세가 들고 온 언약을 이 땅에서 본인이 들고 가면 되잖아요. 참 쉽지요.

오늘 본문이 뭐냐 하면, 모세가 위에 올라갔단 말이죠. 시내 산 위에. 위아래 할 때 그 위. 그런데 사람들은 아래 있다고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래 있던 모세가 위에 갔기 때문에 모세나 자기나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위에는 뭐가 준비돼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정말 중요시한 것이 거기에 이미 마련돼 있어요. 그게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앞에 설 때 모세는 자기 생존을 위해서 해야 될 것이 하나도 필요 없었어요. 얼마나 마시고 먹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 언약을 들고 산에서 내려왔더니만 본인도 몰랐어요. 자신이 땅의 사람들과 현격한 차이가 나는 존재란 사실을. 그러면 이렇게 빛나니까 모세가 대단하네요? 모세가 대단하다고 강의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들고 온 언약이 중요하다고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그걸 분명히 이해했는지 테스트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6장 이야기를 한 겁니다. 들풀로 만든 옷과 솔로몬의 옷 중에 어느 것을 입겠느냐고 질문한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들풀의 꽃이 솔로몬이 입은 영광보다 낫다는 사실이 네 눈에 보이느냐고 묻습니다. 너는 그런 안목을 갖고 있느냐? 저는 아무리 봐도 솔로몬의 황금 옷이 낫던데요? 그렇게 한다면 마태복음 6장에서 주께서 이렇게 할 거예요. 네가 보물이 없구나. 마음의 창문은 눈인데 네 눈이 잘못됐다. 눈이 잘못된 것은 마음이 잘못됐다. 따라서 네 마음을 예수 내 마음으로 바꾸지 아니하면 산상설교 한 마디도 지키고 안 지키고는 나중 문제고 이해조차 안 될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심령이 가난하거든 복이 많이 받았네요. 이런 소리하면 그 사람이 기분 좋아하겠어요? 돈도 없는 데 무슨 복을 많이 받았다는 말입니까.

교인들에게 여러분, 심령 가난할래요, 부자 될래요, 하면 어느 쪽입니까? 금요일 커피 석 잔 마셔가면서 기도하면서 “주여, 심령이 가난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 찾기 힘들어요. “주여, 부자 되게 하시고 집 사 주세요.” 말도 못하는 쌍둥이 앞세워서 그런 통성기도 할 거예요. 방금 제 말 못 알아듣는 사람은 유튜브에 통성기도 치면 나옵니다. 말도 못하는 아이가 통성기도하는 거예요. 중얼거리고 찬송 부르면서. 그걸 보면서 왜 웃느냐 하면, 우리가 옛날에,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 다 그렇게 했거든요.

그렇게 할 때 안목 자체는 안 바뀌었어요. 나한테 소중한 것을 기적적으로 베풀어달라고 그것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한 거예요. 그래서 주일 날 그놈에 정성이 문제라고 했지 않습니까. 정성을 빼고 기도하세요. 자기 정성에 자기가 매료되었어요. 그러니까 기도한다는 자체가 인간은 미친 거예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기도하겠습니까. 우리교회 교인들에게 기도하느냐고 물으니까 기도 아무도 안 해요.

진짜 믿음이 좋아서 기도 안 하는지 아직 덜 답답해서 기도 안 하는지 기도하고 싶지만 복음을 들은풍월이 있어서 참고 있는지. 그건 나중에 폭발하면 진짜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튀어나옵니다. 조금씩 기도하세요. 나중에 폭발하지 마시고. 어차피 가짜인데. 어차피 해봐야 안목 안 바뀌고 마음 안 바뀌었는데 소중한 내 자식 지켜달라는 것밖에 더 있어요.

출애굽에 소중한 것이 마지막 재앙이 맏아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자기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 큰 아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시고 거기에 집중폭격을 해버렸어요. IS 진지를 러시아 폭격기가 폭격하듯이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인간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폭격했습니다. 장자가 죽었습니다. 곧 자기가 죽음입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야 돼요.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사랑하는 것을 우리한테 허락하시고 그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얼마나 폭격을 가하는지 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 언약이에요.
아브라함 언약의 결정적인 순간은 뭐냐?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자진해서 저절로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제사 제물로 바치는 그 순간입니다. 그때 나오는 유명한 대사, 그게 <다모>의 대사에도 나옵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아브라함아, 네가 네 아들 바치는 게 아프지? 장차 하나님이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허접스럽고 살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바칠 때 아버지도 아픈 거예요.

그 아버지의 안목, 아픈 마음이 바로 언약 안에 담겨있습니다. 언약이 완성 단계에 들어가면 마지막에 딱 남는 사건이 있어요. 그게 사형집행자와 사형 당하는 자, 그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인류의 모든 중심은 사형집행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확대입니다. 사형집행자는 유대인이이고, 사형 당하시는 분은 예수님이고. 거기서 형성된 십자가가 이 세상을 구성하는 핵이고 그 사건이 팽창되는 거예요. 모든 구석구석 사행집행이란 의미가 팽창된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 사형집행을 두 자로 이야기하면 이거에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속에 있으면 우리는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을 우리가 살게 돼요. 왜? 대신 살려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살려고 하지 마세요. 대신 사신 분만 있으면 우리가 백 번, 천 번 죽어도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10분 쉬고 다음 시간할 게 무슨 작업을 해야 되느냐 하면, 왜 언약이 딱딱하나 물체 덩어리, 돌 판이 되었느냐는 이 문제와 언약이 돌 판 된 그 일이 어떻게 죽어야 될 우리가 주님이 대신 어떤 식으로 살려내는지 성사될 수 있는 그 원리가 무엇인지 진짜로 지금 죽어도 천국 가는지 정말 성공적으로 성사되는 원칙이 출애굽기 34장에 언약이 돌 판 되는 원칙 안에 함유돼있습니다. 그것은 10분 쉬고 생각합시다.

 한윤범 (IP:119.♡.174.209) 15-10-06 10:04 
20151002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기이한 종속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언약의 말씀을 그냥 언약의 말씀으로 기억해서 산 밑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면 되는 데 왜 돌 판으로 사물화 된 물체로 만들어서 가지고 내려오게 하셨느냐 하는 겁니다. 그거는 저번에 출애굽기 32장 할 때도 약간 언급했습니다만 이게 종속될 때 하나님께서 왜 돌 판을 줬느냐 하면, 인간은 어디에 신에 종속 된다면 자꾸 상상을 하게 돼있어요. 그 상상한 신이라는 대상이 결국 자기 자신이 부풀어진 하나님밖에 안 돼요. 예수라고 해서 예수에 대해서 알라고 하면 자기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자기가 상상한 예수 그러니까 제2의 자기 모델로 예수라 생각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그런데 돌 판이라고 돼버리면 판때기 아닙니까? 이건 상상의 여지가 없지요. 돌 판을 만들었다는 말은,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신을 지어낸 거란 말이죠. 네가 돌 판 만들어봤어? 돌 판도 없는 것이 네가 무슨 신이냐 말이죠. 네가 신을 믿는다면 네가 신한테 받은 돌 판이 있을 게 아니냐. 그건 모세가 받았지 저는 안 받았습니다. 그럼 너는 모세한테 종속되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종속되어야 될 것을 나를 추상화하고 멋있게 만든 이상화된 그런 신에게 종속되었다고 말하지 말고 구체적인 그러한 물체나 사물에 대해서 종속하도록 돌 판을 들고 온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그 당시 사람들이 모세한테 종속되면 안 됩니까, 하는데 그러면 안 돼요. 돌 판에 종속되어야 돼요.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려우니까 묻고 답하면서 합시다. 누가 돌 판을 가져왔습니까? 산 위에서 모세가 가져왔죠. 그러면 모세가 돌 판의 내용을 다 지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모세 말 듣는다는 것이 전적으로 모세에 종속되면 안 되지요. 돌 판에 종속돼야지요. 문제는 돌 판에 대한 해석을 누가 해야 됩니까? 모세가 들고 왔으니까 해석자도 모세지요. 돌 판에게 종속되지 않으면 우리가 상상한 여호와니, 예수니, 삼위일체 전부다 거짓말이에요. 그건 우리가 지어낸 거라니까.

우리가 가만히 이불 쓰고 상상하면 하늘나라에 멋있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스카이라이프 cf에 나오는 서장훈 같이 얼마나 하나님 같습니까. 삼장법사로부터 해서 부처님, 하나님, 전부 다 똑같이 인간이 자기를 모델로 삼아서 한 이상적인 최고 초월자잖아요. 우리가 기도하면서 그런 것을 자꾸 염두에 두고 상상한다니까요.

어떤 사람은 하늘나라를 상상하기를 산타클로스, 어떤 사람은 인자하신 치킨 집 할아버지, 어떤 사람은 금복주 할아버지, 또 어떤 사람은 삼신할머니, 온갖 종류대로 입맛대로 자기가 경험한 기억된 것 중에서 괜찮은 요소를 뽑아서 상상하는데 그건 장난도 아니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 어디에 써먹겠어요. 자기 정당화 외에는 아무것에도 안 써먹는단 말이죠. 그것 말고 실제로 물체화 돼야 돼요.

노아가 비 오기 전에 기도했습니까? 방주를 만들었잖아요. 방주 안 들어가고 기도해봐야 죽습니다. 기도할 것도 없고 그냥 방주 들어가면 돼요. 방주 들어가니까 방주가 저절로 떠서 살았잖아요. 구체적이에요. 다시 말해서 언약이란 구체적이다. 상상한 게 아니고. 예배당 지어놓고 헨델의 음악 틀어놓고 스테인드글라스, 프랑스의 큰 성당, 독일에 있는 퀠른대성당 어마어마한 큰 성당, 이태리에 가면 큰 성당도 있고. 그런 성당에 들어가면 굉장히 엄숙하고 장엄하지요. 신이 나올 것 같아. 바로크 그림 그려놓고.

왜 성당을 화려하게 고딕식으로 지어놓은 이유가 뭡니까? 인간의 예술적인 것이 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그게 마치 거룩의 절정이고 그 장엄하고 그 숭고함을 인간이 마음껏 발휘한 거예요. 그래봤자 위아래에서 아래쪽이란 말이죠. 우리가 아래쪽에서 생각하는 위쪽은 위쪽이 아니에요. 진짜 위쪽에서 온 것은 돌 판이었고 방주였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거예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얼마나 구체적이에요. 그 당시 제자들에게. 그런데 그들이 먹은 것은 살과 피가 아니었고 포도주와 떡을 먹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노아가 방주 들어가 본들, 모세가 돌 판 들고 와 본들 돌 판 안의 내용과 모세가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돌 판 해석을 모세가 해서 모세가 이야기하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모세 말을 통해서 돌 판에 접근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납니다. 이 말은 돌 판에 전적으로 종속되기에 실패했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로마서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돌 판을 주시고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구원에 성공하기 위해서 준 겁니까? 실패하라고 준 거예요. 구원에 실패한 자란 인식이 구원의 성공입니다. 십계명 지키는 데 실패한 자가 될 때 안식일 지키는 데 실패하고 십일조 하는 데 실패하고, 탐내는 데 실패하고, 살인, 간음, 모든 게 성공할 게 없다는 걸 인식할 때 구원에 성공자가 되는 겁니다.

왜 성공자가 되느냐 하면, 종속을 돌 판의 내용대로 일치가 되는 그분을 이스라엘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분이 오실 메시아에요. 하나님이 율법대로 십계명대로 완성할 그분을 기다려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럼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되겠어요? 내가 아무리 십계명 지키고 율법 지켜도 나는 지킬 만한 인물이 못 됨을 그걸 자인해야 돼요. 그걸 인정해야 돼요. 그게 바로 주님이 주신 실패에 종속되는 거예요.

아까 강의 잠시 다시 해봅시다. 사람이 종속되지 아니하면 개 목줄 없으면 미쳐버린다 했지요. 왜냐하면 어디에 매인 바가 없으면 사람들은 홀로 살려고 해요. 나 혼자 살고 싶어요. 그러면 매사에 내가 나한테 물어보고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우리는 교회 다닌다 치고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선택하면 찝찝하니까 기도를 하지요. “주여, 이쪽이 맞겠습니까, 저쪽이 맞습니까? 내 아들이 울산 아가씨와 해야 결혼해야 됩니까, 서울 아가씨와 결혼해야 됩니까?” 응답받았다. 서울 아가씨로 했다.

모든 인간의 그러한 자기 선택이 모세의 실패와 더불어 동일하게 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입었던 그 광채가 산 밑에 내려와서 얼마 못 갔어요. 그것은 언약이 다른 방식으로 성취를 준비해놓고 있었습니다. 언약은 모세조차도 날아가 버려요. 율법, 십계명 또는 돌 판을 모세가 제대로 못 지켰지요. 그럼 모세 후계자가 여호수아지요. 여호수아가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다. 여호수아 다름에 사사들 나옵니다. 못 지킵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 그 다음에 다윗, 예레미야, 이사야 어느 인간도 이 십계명,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럼 못 지키면 실패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십계명, 율법은 이스라엘을 실패가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현장으로 만들어냅니다. 이게 성공이에요.

우리는 뭘 상상하느냐 하면, 안방에 돌 판이라든지 하나님 주신 보물이 있으면 안방 문만 열면 갑자기 눈부신 광채가 뻗어 나오는 거예요. 그걸 상상하는 거예요. 안방에 금덩어리 하나 모셔놓으면 다른 문 열 때는 아무렇지 않은데 그 문만 열면 왕~, 왕~, 왕~, 왕~ 이런 음악 들리면서 아무개아 이 문을 열었느냐? 어떤 도사가 와서 이 도끼가 네 도끼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주길 바라잖아요.

유대인들이 그런 메시아를 기다린 거예요. 구름 타고 메시아가 온다고 했거든요. 다니엘 7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늘 하늘을 쳐다보는 거예요. 처음에는 점으로 보이다가 점점 도인이 오는데 도포 휘날리면서 옆에 지팡이 들고 구름 위에서 오더란 말이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그런 식으로 로마를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기를 기다린 거예요.
 
왜냐하면 에스겔에 보면 다윗이 오게 돼있거든요. 다니엘 7장에서는 구름 타고 오게 돼있다고요. 둘을 결합하면 죽었던 되살아나서 다윗이 구름 타고 오면 그분이 바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메시아가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 전에 하나의 징후가 있어요. 메시아 이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된다고 말라기에 나와 있으니까.

방금 이야기한 걸 보세요. 제가 시편도 인용하고 그 다음에 에스겔 인용하고 이사야, 다니엘 인용하고 여러 가지 인용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성경이라는 언어를 돌파하는데 인간의 한계가 있어요. 저 개념에 합치되는 것이 이런 일일까? 아니면 저걸까? 성경이 돌 판이 문자로 돼 있잖아요. 문자에 합치되는 그런 상황이 우리가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어떤 사건일 수 있다고 짐작하는 겁니다.

성경을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기독교 신자, 교인도 마찬가지고 성경 말씀을 주셨잖아요. 이걸 읽는단 말이죠. 읽는 동시에 무슨 마음이 드느냐 하면, 읽고 순종해서 지켜서 복 받아야지. 영광 돌려야지. 이게 나오잖아요. 문제는 글자에 담긴 뜻을 어느 인간도 해명하거나 해석하거나 해독할 수가 없다니까요. 해석에 실패해야 돼요. 이 말은 우리가 지키는 데 실패했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두 번째 시간을 정리해봅시다. 돌 판이란 이 물체가 인격화 되는데 있어서 모세와 짝을 이뤄서 왔어요. 그런데 인격화 시키는데 모세가 실패를 합니다. 실패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세마저도 돌 판을 완성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시고 모세에게 여러 가지 세부 율법을 줘요. 돌 판에는 양쪽에 십계명밖에 없어요. 그리고 십계명을 사수하고 돌 판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부적인 규칙과 조항들이 주어진 겁니다.

돌 판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사장이 있어야 되고 제사장이 되려면 제사장 복장부터 해서 가계, 족보부터 법으로 줬어요. 그리고 제사장들은 그냥 창 들고 보초만 서는 사람이 아니고 매일 같이 제사를 드릴 사람들이고 제사에 필요한 제사법들이 있어야 되고 제사 기구들이 있거든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돌 판을 안치할 수 있는 상자 만들기와 상자를 보호할 성막 만들기도 겸하여서 법들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돌 판이 내려왔다는 말은, 모든 보조적인 법들은 돌 판을 지키기 위한 이중, 삼중의 장치가 율법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주장에 의하면 돌 판을 놓고 콘크리트 벽으로 하든지 그걸 적들로부터 사람 손대지 않도록 보호하면 지킨 거잖아요. 율법을 지킨 거잖아요. 보디가드 한 게 맞잖아요,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율법은 그런 식으로 지키는 게 아니고 매일같이 양을 잡아야 되고 매일같이 상번제 제사를 드려야 돼요. 그게 아주 희한한 일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게요. 드라마 이야기해서 천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복음을 위해서는 뭐든지 다 씁니다. 어떤 백수 남자가 여자 하나 만나서 인생 바꿔보려고 치킨 집하는 나이 많은 아줌마 꼬셔서 그 집에 들어오려고 애를 써요. 아무것도 없어요. 전직 속초 경찰관인데 이래서 들어왔어요. 자기는 마당에 텐트만 치고 자겠다는 거예요. 처음에, 처음에. 다 그렇게 들어와요. 나중에는 안방까지 기어 들어오겠다는 거예요. 처음 말과 달라요.

돌 판이 돌멩이 같으면 어느 장소에 비나 안 맞게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말씀은 뭐냐? 과연 언약이 그냥 물체로 끝날 것 같으냐고 묻는 거예요. 돌 판이 나중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거든요. 그 중간 과정을 이스라엘 역사가 돌 판과 동행하면서 사람 되는 절차를 다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그 절차, 과정이 장차 신약 시대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전혀 십자가 구경도 못하고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멀리 한반도에 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 절차가 이미 이스라엘 절차 속에 포함돼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돌 판은 물체 맞아요. 이 물체가 물체로 곱게 있는 게 아니고 자꾸 말썽을 일으킨다고. 무슨 변화가 일어나요. 자꾸 변화가 일어나서 돌 판을 처치를 못해요. 돌 판이 가만있는 게 아니에요. 돌 판이 사람을 죽인다니까요. 일을 벌여서. 아까 백수가 꼬시는 이야기는 <이브의 사랑>이란 드라마입니다.

이게 개나 소 같으면 마당에 묶여서 가만있으면 좋겠는데 이게 인간이 되어서 인간 속에 자기 의지가 있고 욕망이 있겠지요. 니체에 의하면 권력으로 향하는 욕망, 의지. 나는 홀로 사는데 필요한 나만의 영역을 기어이 확보하겠다는 의지 말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남자가 나와 결혼하면 손에 물도 안 묻히게 해줄게, 이렇게 해놓고 고무장갑 하나 사주고 끝나버리잖아요. 추석에 전 붙이는데 고스톱 치고 있지요. 약속대로 안 되거든요. 왜냐하면 사람은 개, 돼지가 아니고 인간이란 말이죠.

물체가 인격화 되면서 원래 돌 판에 들어있는 어떤 분이 장차 와서 해야 될 일을 미리 앞당겨서 이스라엘이란 현장,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 기능들을 뿜어내고 있는 거예요. 세계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퀴리 부인이 있지요. 그 사람이 왜 죽었느냐 하면 연구를 너무 많이 해서 방사선에 쪼여서 죽었거든요.

방사선이 뭡니까? 그냥 돌멩이가 아니에요. 거기서 알파파, 베타파, 감마선이 나온다고요. 이게 사람의 세포를 변질시켜서 암세포로 바뀌게 해요. 그래서 암 걸려 죽었어요. 돌이 그냥 돌이 아니라니까요. 방사선이 나오는 돌은 위험해요. 그래서 일본에서 나오는 고등어도 안 먹잖아요. 그냥 물질이 아니고 살아서 우리를 죽인다니까요. 방사선이 돌 판에서 나오는 거예요. 온 세상 사람들 다 죽었어, 이 말입니다. 왜? 위의 거룩한 분이 아래로 내려오니까 아래 있는 사람이 감당을 못하는 겁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누가 이야기한 겁니까?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고 놀래버린 거예요. 성전이 바로 언약궤가 있는 곳이잖아요. 무시무시한 것이 이스라엘 속에 드디어 잠입이 시작된 겁니다. 그들은 돌 판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자 시도했지만 사실은 그들은 하나님께 속은 거예요.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인간의 모든 죄를 다 파냅니다. 그냥 죽이지 않아요. 다 파내서 이스라엘을 텅텅 비게 만들어요. 인간의 중요한 것을 다 없애버리는 방사능 같은 그런 힘이 그 돌 판에서 뿜어 나오게 돼있습니다. 너희들 다 죽었어! 다 죽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말씀 하실 새, 제자들과 많은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 들었지요. 그들 중에 예수님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앉는 순간 그들은 다 죽은 겁니다. 아무도 살 수가 없어요. 그 말씀대로 심판할 거예요. 일점일획이라도 헛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심판할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이 종속되면 됩니다. 아무 걱정할 것 없어요. 그 말씀이 죽이시면 죽으면 돼요.

말씀이 우릴 죽일 때 반드시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죄를 지적하게 돼있습니다. 죄가 주어진다는 말은 그 배경에 이 죄를 대신해서 이 죄를 의로 바꾸는 장치를 그 바닥에 부착한 채 우리에게 죄를 지적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죄인, 죄인 할 때 복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죄를 지적하면서 그 죄를 자체적으로 해소가 되게 돼있어요. 자체적인 해소, 이것을 로마서 3장에서 화해라고 합니다. 또는 화목이라고 해요. 마지막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제일 마지막에 화목제에요. 그리고 로마서 3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써 그냥 죽은 게 아니고 화목제물로 죽었어요.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죽었다는 말은, 돌 판이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냈다고 보면 됩니다. 장터를 만든 거예요. 보통 촌에서 행사 있다고 하면, 유지 온다고 하면 마을 청년들이 청소하지요. 깨끗하게 소제하잖아요. 그 소제 작업을 할 때 장사 치우라 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중요한 것을 영접하기 위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다 소제하잖아요. 소제하는 그것을 주께서는 평생을 통해서 성령이란 비로 우리를 소제하는 거예요.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다 추방시키고 진짜 물도 안마시고 밥도 안 먹어도 상관없는 그런 소중한 것을 담기 위해서 우리는 청소를 해서 그리스도만 담아내는 그분만 보물로 담기 위한 그릇이 되는데 그걸 자비의 그릇, 긍휼의 그릇이라고 로마서 9장에서 그렇게 언급하는 겁니다.

정리해봅시다. 돌 판을 모세가 들고 왔지요.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통해서 돌 판의 본 해석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왜? 인간은 언어를 들어야 그걸 지킬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뭘 하라 하면, 예를 들어서 살인하지 말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걸 듣는 순간에 살인해서는 안 되는구나, 살인하면 죄가 되는구나. 그렇다면 살인 안 하게 되면 우리는 죄가 없지요. 의인 되지요. 복 받은 사람 맞지요. 살인했을 경우만 죄인이라고 해도 할 말 없지요. 그런 사고방식이 저주받은 사고방식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세 편에서 실패하면 모든 인간이 실패로 끝나요. 모세를 통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람 각자 마음속에 살인 안 하겠습니다. 살인하면 내가 개입니다. 저를 죽여도 좋습니다, 라고 마음은 그렇게 먹지만 사실은 살인 말라는 본래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럼 살인하지 말라는 본뜻은 뭡니까? 돌 판에 들어있는 메시아를 너희들이 죽여서는 안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언제 우리가 예수님 만난 적도 없는 예수를 죽였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게 마련이죠. 그런 질문이 요한복음 7장 20절에 나옵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당신 귀신 들렸도다. 우리가 언제 당신을 죽이려고 했는가? 예수님이, 아직 때가 안 돼서 그렇다. 때가 되면 이구동성으로 저 예수를 죽이라고 한 목소리로 외칠 때가 올 것이라는 겁니다. 원래 너희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런 족속으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패해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가 다 끝났다고 치고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자기 실패에 종속되게 살면 돼요. 오늘도 실패하자. 이게 하나의 가훈이 돼야 돼요. 가게 문 열고 손님 오면, 오늘도 실패해야 된다. “어서 오세요.” “아이고, 이 집 음식 참 맛있는데.” “맛있어요? 제가 했거든요.” 오늘도 실패다. 오늘도 교만했구나. 모든 상황이 의로 바꾸기 위한 준비 단계로 소제당한 청소당할 것이 매일같이 생겨나야 돼요. 까불어야 돼요. 까불거리며 살아야 이게 바로 내가 주님보다 나를 사랑하는 증거가 바로 여기 있구나. 자기한테 소중한 것이 생겼으면 그 다음 상대적으로 예수님은 덜 소중하게 되거든요. 얘가 갑자기 공부를 잘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일단 감사하지만 사실은 공부 잘하는 얘가 그 다음부터 예수님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새순교회에 그런 일은 없겠지만 갑자기 교인이 다섯 명 더 왔다. 그러면 교인들이 어떻습니까? 교인이 문제가 예수님이 중요하지. 그런 마음 들겠어요, 안 그러면 주께서 좋은 꿈꾸게 해서 다섯 명 와서 감사합니다. 이제 교인들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들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올 가능성이 많아요. 이러다가 우리 교회가 오백 명 될지 몰라. 오백 명은 너무 심했나. 올해 가기 전에 백 명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하게 되면 갑자기 다섯 명이 다섯 더하여 열 명 나가버리면 주님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내 것 왜 건드립니까? 분명히 실패하라 했거늘 우리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성공을 기대했습니까? 성공한 채로 고요하게 유지하기, 이게 우리 소망이잖아요. 성공된 채로 성공이 가득 찬 채로 손 안 대고 줄곧 그렇게 가기.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이것뿐이지 가져가는 것은 안 하기 그냥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또 주시고, 또 주시는 하나님.

모세가 하나님께 대들었던 이유가 뭐냐? 왜 하나님이 주신 내 백성을 이렇게 말 안 듣게 했습니까? 그것 때문에 화낸 거예요. 너희들 때문에 내가 못 살겠어. 이것 때문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어요. “하나님이여, 교인들이 복음을 안 들어서 못 살겠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그 목사한테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니 교인이야? 갑자기 니가 왜 들어가?” 인간은 성공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돌 판을 통해서 돌 판 유지하는 것, 지키는 것, 관리하는 것, 보존하는 것, 방법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한 마디로 해서 언어거든요. 율법이란 언어로 하나님 뜻에 일치, 합치, 맞추도록 마음껏 자기의 행함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 행함이 하나님 앞에 거북스럽고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정성을 다하여 나름대로 지킨다고 다 지킨 그것이 어디에 한계 있느냐 하면, 내 소중한 것에 대해서 한계를 느끼게 돼있습니다.

전에 이야기했지요.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할 때 평소에 자기가 미워한 사람이 안식일 어기면 아미 제일 먼저 나서서 돌로 쳐 죽였을 거예요. 어디 거룩한 하나님의 법을 어겨. 그런데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이 만약에 자기 자식이라면? 나, 기권. 돌 안 던질래. 어떻게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나.

여러분, 아버지가 자식을 죽여야 돼요. 그게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왜 죽여야 됩니까? 나한테 가장 소중한 제2의 자신이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돌 던지지 않으면 우리는 비어있는 그릇밖에 안 돼요.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합당치 않다 해놓고 그 뒤에 나오는 자기가 미워져야 돼요. 자기가 미워서 자기가 돌을 던져야 돼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안목을 알아야 돼요.

신명기에 나오듯이 말 안 듣는 아들이 있거든 아버지가 다루지 말고 마을 이장한테 가서 이장이 돌로 쳐 죽이도록 하라고 할 때 누가 내 대신 돌 던지라고 하겠어요. 성경에서는 말 안 듣는 자식이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말 잘 듣는 자식인데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하셨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게 바로 기이한 일이라니까. 우리가 믿는 십자가가 우리 힘으로 능력으로 아무도 믿을 수 없어요. 기이해도 너무도 기이해요. 인간의 상식에서 나올 수 없는 거예요.

누가 신자라고 할 때 항상 그거는 구라라고 생각하시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이한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잘해주면 사랑하고 못해주면 미워하는 게 인간의 마음인데 그게 아니고 사랑하는 내 자식을 돌로 쳐 죽이는 마음인데 얼마나 기이합니까? 여기에 참여해야 돼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이는 그 죽음에 저라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겠다고 나설 수 있어야 돼요. 나설 수 있으려면 착하고 멀쩡한 아무 탈 없고 고상하기 짝이 없고 착하기 짝이 없는 나를 내가 미워지는 마음이 생겨나야 돼요. 그게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안 되지요.

그러니까 본인이 그렇게 선택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러면 도 닦는 것밖에 안 되니까 그런 부질없는 짓하지 마세요. 나는 부족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지 마시고 그냥 사세요. 저절로 사시면 매사에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게 발견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굉장히 실망될 거예요. 주님이 소중하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내 자식이, 나보다 더 소중한 건 없는데.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찬송을 부르는 중에 벌써 4절쯤 되면 그 찬송을 부르는 내가 더 소중해. 예수님보다.

돌 판은 가만 놔두면서 거기서 업무가 진행됩니다. 그것은 너의 죄를 위해서 아무 이유도 없는 정말 흠 없는 양을 잡으라는 겁니다. 그걸 행하지 않으면 돌 판은 있으나마나 한 거예요. 돌 판이 있으면 반드시 효과 봐야 돼요. 뭐냐 하면, 죄 지음, 무심코 지은 죄가 돌 판이 있는 언약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것이 의로 달라지는 변화와 효과를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 중간에 들어가는 게 뭐냐 하면, 흠 없는 어린 양을 상번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돌 판 중심으로 제사가 되고 연기가 피어올라요. 누가 또 죄 지었구나. 죄 지은 자의 죄가 공중으로 날아가고 그 대신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나오지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게 바로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들이 뒷걸음질해서 노아의 하체를 덮는 거예요. 담요로 덮어주는 거예요. 수치스러운 것을 덮어줌으로 말미암아 나한테 안 보인다. 내가 덮어준 담요 예쁘네, 그것만 보이는 거예요. 이건 제가 이야기한 종속이에요. 개 목줄이에요. 우리가 덮어준 담요가 인식이 되려면 담요 없이는 발가벗은 채로 살 수밖에 없음을 우리가 스스로 기쁘게 수용해줘야 돼요. 주여, 덮어주지 아니하면 제 꼴이 엉망입니다. 그걸 인정해줘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덮어주는 사랑에 종속돼야 돼요.

그래서 돌 판을 중앙에 두는 겁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을 그 주변에 깔아놓고 돌 판에서 나왔던 담요가 이스라엘 전체를 제사법이란 이름으로 덮으면 이 나라는 거룩한 언약의 나라가 됩니다. 그게 제사장 나라, 신약으로는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되는 거죠.

끝으로 한 가지 더 하겠습니다. 덮어준다면 무엇이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개체, 개별자는 날아가 버립니다. 내 담요가 아니거든요. 우리의 담요지 나만 덮는 담요가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저는 식구가 많은 집안에 태어나서 갑질 당하면서 살아왔어요. 남자들끼리 한 방에 네 명이 들어갔어요. 네 명이 뭡니까? 삼촌 세 명, 저와 사촌까지 해서 여섯 명까지 들어오거든요. 요 하나 깔아놓고 이불 하나 던져주고 끝나는 거예요. 제일 큰 삼촌이 새벽 되면 이불 하나를 둘둘 감아버려요. 밤에 시원해. 이불 없어요. 자기는 푹 잤지(그 삼촌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나머지는 속옷 차림인데요. 벌벌 떠는데요. 추워서 서로 붙어있고.

개인용 담요, 나만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개인구원 없습니다. 개인구원을 실패로 간주하시고 반납하시기 바랍니다. 나,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것 실패입니다. 믿음 아닙니다. 그걸 내놔야 돼요. 구원받겠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힘으로 성공하겠다는 겁니다. 내놓을 때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내 구원은 이제 안중에 없어요. 예수님 하신 게 눈에 들어와요. 나는 종속되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내가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작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공장장 아닙니다. 나는 물건 나올 때 마지막 검사만 할 뿐이에요. 이것 당신 공장인가? 아니. 우리 사장님 공장이야. 이렇게 돼야지, 그래 내 공장이야. 일개 직원 주제에 그런 소리하면 안 되거든요.

네 인생 네 거야? 주님의 인생이야. 주님의 인생이고 주님의 몸이에요. 한 모퉁이 맡아서 할 뿐이에요. 얘 둘이면 둘 키우고 하나면 하나 키우고 그것만 맡았을 뿐이에요. 하나님이 무슨 복을 줘서 다섯이면 다섯 명 키우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그렇게 할 뿐이에요. 우리는 세상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내 맡은 일만 하지만 그게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을 한 몫만 맡았을 뿐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경쟁적으로 사업 벌이고, 경쟁적으로 남보다 부자 되려고 하고, 늘 이기고 싶어 하고, 내 자식이 네 자식보다 낫다. 자꾸 경쟁으로 나서지 마세요. 스트레스 받습니다. 니는 니 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맡은 일로 살면 되는 겁니다. 말은 참 쉽다. 말은 쉬운데 우린 남과 시합하지 않으면 살 재미를 못 느끼니 이게 문제가 되거든요. 옆에 집 지으면 더 큰 집 짓고 싶고, 뭐하고 싶어 하고 그런데 그것도 실패다. 그것도 실패의 현장이에요.

다시 하겠습니다. 율법이 올 때는 율법에서 방사선이 나온다. 무슨 방사선? 율법은 죄를 더하게 함이라. 죄를 더하는 데 뒤에 은혜가 장착돼있어요. 죄를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느니라. 죄가 도달되게 되면 겸하여 구원받았음이 되는데 이 구원이 나만의 담요가 아니에요. 나만 덮는 담요가 아니고 주님 주신 담요는 하나밖에 없다니까요.

고린도전서 10장 17절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주님께서 한 사람마다 쟁반에 떡을 준 게 아니고 한 떡을 떼어서 줬거든요. 그러니까 준 떡을 먹으면 내 떡이 되는 게 아니에요. 떡을 먹는 순간 소환이 된다니까요. 하나에. 떡에 떼어져 나간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어요. 하나가 확장되고 확대될 뿐이에요. 자기 자신보다 하나 됨을 아는 사람은, 내 몸이 주의 몸의 일부, 지체에 불과하다는 걸 아는 것이지 홀로 사는 것, 내 몸은 내 것이다. 내 몸은 나한테 소중한 것이야. 너한테 소중한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소중한 거지요.

그래서 술, 담배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말고, 욕하지 말고 함부로 나쁜 짓하지 말라는 것은 니 몸이 니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잖아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값으로 산 몸이 되었으니 주께 영광 돌리라는 말이, 니 몸이 아니고 너를 위함이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함부로 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전세로 들어온 주제에 아무데나 못 박고 하면 집 주인이 별로 안 좋아해요. 나중에 못 다 뽑아야 되잖아요. 남의 집을 빌려 사는데 자기 좋다고 못 다 박고 후작질 하면 주인님이 싫어하시잖아요.

내 몸이 늙어 죽은 것 맞아요. 아플 때도 있고 암에 걸릴 때도 있습니다. 암에 걸리더라도 주인이 알아서 암에 걸리게 한다면 곱게 죽을 수밖에 없어요. 할 수 없어요. 죽더라도 이렇게 나를 죽이시는 그것은 뒤에 이미 살게 하셨기 때문에 언약 안에서 한 몸이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허다한 죄를 덮어주기 위해 담요용으로 자기 아들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몸에는 뭐만 반복합니까? 십자가란 담요가 날마다 반복하게 되면 우리는 죄를 느끼고 실패를 느끼지만 그것이 우리한테 행복이 되고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것, 내일 되면 뭘 해서 실패할까요? 모레는 뭘 해서 실패할까요? 왜? 우리는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충만하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인에 매인 개처럼 차라리 종속되어서 살게 하옵소서. 홀로 살 생각을 아예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