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02a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기이한 종속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34장 27절부터 두 줄만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시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란 거죠. 이스라엘 백성은 산 아래 있고 모세만 단독으로 산 위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산 아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고 해서 거기서 진리가 나올까요? 진실이 밝혀집니까? 그들 가운데 아이큐 높은 사람도 있고 공부 많이 한 사람도 있을 건데 같은 인간들끼리 모여서 산 밑에서 백날 연구하고 인문학 강좌니 어떠니, 의학이 어떻고, 화성에 소금물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그런 게 인간의 목적이냔 말입니다. 그런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수단방법에 지나지 않지요.
그런데 이층에 올라간 시내산 위에 간 모세는, 지금 모세에게 하루 삼시 세끼를 어떻게 먹느냐, 어느 셰프를 모셔다가 밥을 어떻게 먹느냐, 물은 어떤 생수를 먹느냐, 하는 그런 게 전혀 모세가 존재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층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이것 하나밖에 없어요. ‘종속’이라는 거예요. 어디에 속했다는 철저하게 속해 있다. 인간이 어디 속하지 아니하면 미쳐버립니다. 그래서 단언하건데 세상 모든 사람은 미쳐있어요. 왜? 단독적으로 사는 식으로 평생을 살기 때문에.
교회 올 때는 주님, 주님, 부르지요. 일요일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종속 돼있어요. 나오고 난 뒤에는 해방이에요. 이제 자기 혼자밖에 없어요. 그걸 사르트르는 ‘혼자 있는 인간’이라고 했는데, 이걸 보통 ‘실존’이라고 이야기해요. 인간은 홀로 있다는 겁니다. 혼자 있는 존재가 뭘 하느냐? 날마다 선택을 하게 돼있어요. 세일하면 옷을 노란 색 할 것인가, 차를 회색 차 살 것인가, 흰색 차 살 것인가? 항상 현장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가기 전부터 마음속으로 선택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인간의 마음이란 계속 선택을 구성하고 선택을 예상하고 선택 자체를 희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모든 것이 홀로 사는 법이에요. 실존적이죠. 혼자 살면 인간은 미친 인간이에요. 마귀가 가만두질 않습니다.
학교에 아침에 출근하면 얘들 스물 댓 명 있잖아요. 교사도 미쳤고 학생들도 미쳤고 다 같이 미쳤어요. 왜냐하면 혼자 사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왜 공부하느냐? 홀로 서기 위해서 해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선택하기 위해서. 이게 시내 산 밑에서 인간들이 하는 짓이었습니다. 그렇게 선택했더니만 그 선택의 방향성이 있었습니다. 뭐냐? 나를 위한 신이 되는 것, 나를 위한 신을 섬기는 것, 곧 자기 자신을 섬기는 거죠.
사람들은 위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요. 인간이 사는 세상 위에 뭐가 일어나는지 전혀 몰라요. 전혀 모를뿐더러 거기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거기에 대해서 위층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나의 소박하고 행복한 인생을 네가 왜 훼방하느냐? 이렇게 시비 거는 용으로 이야기해요. 내가 혼자 살겠다는데 왜 당신은 종속되라고 이야기하느냐? 그게 딱 싫다는 거예요. 헌금을 해도 얼마 할까, 내가 선택하고. 교회 가는 것도 내가 선택하고. 기도할까 말까, 내가 선택하고.
종속이 돼버리면 선택할 길이 아무것도 없어요. 종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종속이 돼버리면 선택은 날아가 버려요. 선택이란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종속됐는데 무슨 선택입니까? 선택한들 먹혀들지 않잖아요. 종속되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이런 부사가 나와요. 저절로. 모든 것이 저절로 인데 누구 저절로냐 하면, 바로 나를 종속하고 있는 그분의 뜻대로 저절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겁니다. 우린 종속된 상태지요.
그래서 혼자 사는 사람들은 내가 다음 행동을 뭘 하면 되지, 하고 본인한테 묻잖아요. 그런데 저절로 된다든지 종속된 사람한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께서는 이번에 무슨 업무를 저에게 하게 하시나이까? 무슨 일거리를 주시는지 질문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혼자 있으면 질문을 안 하잖아요.
요새 현대인들의 특징이 질문이 없어졌어요. 필요한 것은 인터넷 찾아보면 되니까. 질문한다는 것은 질문하는 사람에게 종속될까 겁이 나서 스스로 알아서 찾아서 해결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은 누구로부터 종속되지 않음을 그 사람은 그걸 해방,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위층이 없다는 거예요.
어제 뉴스에 보니까 외국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텅텅 비어있는 바가지에 눈, 코, 입을 그린 것 같은 아기가 태어났어요. 의사들은 태어나자마자 죽는다 했는데 돌을 맞았습니다. 뇌가 하나도 없어요. 이게 현대인입니다. 자기 외양과 외모는 꾸미는데 안의 내용물이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꾸미느냐? 자기와 똑같이 생긴 바가지가 또 있거든요.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흉내 내기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모방이죠.
모방이 사회를 만든다. 모방하고 싶지 않으면 탈퇴하면 되고 모방하고 싶으면 거기에 등록하면 되고. 그런데 모방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그건 본인들이 알 수 없지요. 자식은 태어나면서 부모 모방하겠지요. 그래서 얘들 행동을 보면 부부 싸움에서 나온 행동이 자기들끼리 싸울 때 다 드러나요.
오늘 본문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시내 산 위에서 물도 마시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인간에게는 본인이 소중하다는 것은 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나한테 소중한 것을 내가 따로 만들면 안 돼요. 나한테 자식이 중요하니까 자식을 가져야 되겠다. 그건 빈 바가지에 남들 다 가진 자식 하나 채운 것밖에 안 돼요.
참된 성도는 이래야 돼요. 이 세상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줄 알고 살아야 돼요.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니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중요한 게 있다면 인간은 그걸 목표로 살게 될 게 분명하거든요. 그렇게 돼버리면 스스로 본인이 두뇌가 텅텅 비어있다는 자백을 한 셈이 돼버려요.
애굽 사람들 신이 열 가지나 됐잖아요. 출애굽 할 때 재앙이 열 번이죠. 열 번이 뭐냐 하면, 전부 하나 하나가 그 당시 애굽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신을 공격하는 재앙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에 사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재앙을 내렸다는 말은, 결국 애굽의 신들의 구체적인 실제 내용은 마지막 재앙에서 나타나죠. 실제 그들이 중요시한 것은 신입니까, 자기 맏아들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맏아들이에요. 그러면 아홉 가지 재앙은 뭡니까? “신들이여, 내 대를 이을 자식을 잘 보호하소서.” 그거지, 뭐.
그런데 열 번째 재앙에서 맏아들을 죽이잖아요. 부모 입장에서 안산의 세월호 학생들 부모들이 가슴 아파하느냐 하면, 늙어 죽었으면 말을 안 해요. 성인 되어 까불다가 죽으면 애통하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걔들이 보호해야 될 보호 대상이 되기 때문에 애통한 거예요. 얘가 죽었다는 말은 부모가 평생 살아도 자기 자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자괴감이 본인한테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자식 잃고 난 뒤에 나간 술값이 4억이 넘는다는. 보상금 받아야 술값도 안 돼요. 이러고도 내가 부모냐?
성경에 나온 출애굽 이야기가 옛날이야기가 아니에요. 그것도 맏아들 안 중요하다는 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식이 아예 없을 때는 우리끼리 자식 없어도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데 막상 자식이라도 낳으면 제일 중요한 것이 자식이에요. 도킨스라는 사람이 이야기했잖아요. 인간 유전자 자체가 그렇다는 거예요.
인간이 특별히 나쁜 성질이 있고, 인간성이 못 되고, 양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고 인간 본성 자체가 dna, 자기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외부의 모든 요소들은 유전자를 영구불멸의 존재로 만들기 위한 보조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인간 덩치라는 겁니다. 유전자만 자식을 통해서 퍼뜨릴 수 있다면 까짓 것 내 한 몸 아낌없이 바치리라. 이게 타고난 부모의 자식 사랑이에요. 이건 누가 가르칠 문제가 아니라 타고났다는 거예요. 남의 자식은 왜 안 되느냐? 남의 자식은 내 dna가 어니거든요. 내가 불멸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식 낳는 것밖에 없어요. 자식이 죽었다면, 자식 한 사람만 죽은 게 아닙니다. 내가 저주받은 거예요. 내가 희망이 없어진 겁니다.
자식을 낳았는데 이게 외탁을 했는데 전혀 나를 닮지 않았다. 기분 굉장히 나쁘죠. 여자 쪽 dna를 다 가졌는지. 그걸 옛날 사람들은 종달새라고 하죠. 티비에서 추석특집으로 <허삼관>이란 영화 했잖아요. 그게 남의 자식 키우는 거예요. 종달새처럼 다른 새끼를 자기 새끼로 키우는 가정 이야기입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기억나는 게 에서 이야기. <허삼관>에서 에서와 유사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제가 참 은혜 받았습니다.
자식이 자기를 키워준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가 아닌 걸 알아요. 자기 아버지는 놈팽이로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너무 한량이고 바람둥이라서 내가 낳은 자식이 한둘이냐며 자식을 무시하는 나쁜 인간이에요. 그런데 키워준 엄마, 아빠는 너무 착해요. 자식이 찾아갑니다. 걔는 고기만두가 그렇게 먹고 싶은 거예요. 분명히 지가 낳은 자식인 줄 알면서도 호적에 너 같은 자식 없다고 나가라고 했어요. 그 아들이 만두가 먹고 싶어서 한 그 말이 아직 제 머리에 남습니다. “아버지, 만두만 사주면 다시는 안 찾아올게요.” 어린 마음에 만두가 너무 먹고 싶어서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는 잘 사니까 만두만 사주면 안 찾아오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에서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제가 왜 그 이야기를 합니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 주님한테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주님은 이렇게 합니다. 네가 왜 따로 중요한 것은 선택하느냐? 더 심하게 말해서 “그런 버르장머리 어디서 배웠어?” 너는 네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야.
모세처럼 우리가 시내 산에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 저것 사주세요, 이럴 수가 없어요. 요새 유행하는 아가씨들이 남자친구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오빠, 귀신 꿈꿨어.” 그러면 경상도 오빠는 이게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꿨으면 꿨지 나와 무슨 상관인데. 경상도 상남자들, 아주 투박스럽고 차가운 남자들. 그걸 사자성어로 나쁜 남자. 우리 주님은 너무나 나쁜 남자에요. “하나님, 여기 아파요. 호 해주세요.” “이게 어디서 어린냥 하고 있어?”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질문한 것처럼, 기적이요? 우리가 왜 기적을 원하지요? 모세가 시내 산 올라갔을 때 자기는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안 먹었어요. 거기서 무슨 기적을. 어젯밤에 귀신 꿈꿨다는 그런 소리를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해요. 위층이 없어요. 현대인들은 위가 없어요. 위아래에서 위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뇌가 하나도 없는 어떤 아이처럼. 바가지에 눈 그리고 코 그린. 영국 아이에요. 현대인들은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어요. 그저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면서 흉내 내는 것, 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따로 준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소중한 것을 찾을 생각도 하지마시고 얻을 생각도 하지마세요. 하나님이 따로 챙겼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 2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말씀 할 때는 우리가 아래 있지 마시고 모세와 같이 시내 산 위에 있다고 생각합시다. 변화산 위에 있다고 생각합시다.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언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언약을 위하여 모세로 하여금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게 합니다. 이 말은 언약이 너를 살리리라. 네가 평소에 산 밑에서는 물마시고 뭘 먹어야 하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먹지 않더라도 언약이 너를 살려낼 것이다. 너는 언약을 담는 바가지만 되면 돼요. 바가지라 했는데 로마서 9장에서는 그릇이라 하지요. 긍휼의 그릇이 있고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 있다. 그걸 합치면 우리는 그릇이다. 다른 말로 하면 빈 그릇이다. 내용은 누가 채운다? 우리가 귀하다고 여기는 것,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내 자아를 채울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가 태어나면서 우리는 이미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고자 하는 그런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 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주께서는 우리가 소중한 것, 다 비워집니다. 다 부어버립니다. 채우면 부어버리고, 채우면 부어버리고. 언약이 있을 자리에 어디 엉뚱한 이물질이 끼느냐고 차버리죠.
부부 사이에서 남자들은 잘 모르는데 여자들이 제일 신경 쓰는 것이 이물질 끼는 겁니다. 낯선 여자한테 메시지 오는 게 있는지. 남자들 같으면 툭툭 털면 그만인데 여자는 그런 것에 굉장히 민감해요. 그런데 이것이 부부 관계뿐만 아니고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세포 자체가 이물질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그러한 기능을 하게 돼있습니다. 바이러스가 들어왔다, 내부에서 강력하게 저항해서 백혈구로 물리치지요. 그러면 뭘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강력하게 저항하느냐? 그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dna. 유전인자. 그러면 나는 아니에요.
암세포가 있다. 암세포는 암세포 본인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것을 전부 파괴시키지요. 그러면 암세포는 언제 죽는가? 다른 것이 다 파괴들 때 먹을 게 없으니까 같이 파괴되지요. 결국 암을 통해서 인간을 죽게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인간으로 하여금 암에 걸려 죽고 각가지 방법으로 죽고, 죽고, 죽이는 이유가 뭐냐?
성도한테는 죽어도 괜찮다는 걸 말해주고, 성도 아닌 사람한테는 까불어도 죽을 때까지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에는 언약의 바다, 언약의 세상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언약이 뭐냐? 지키면 축복이고 못 지키면 저주지요. 그러면 언약의 세계는 색깔이 둘밖에 없어요. 축복 색깔과 저주 색깔밖에 없습니다. 그걸 위층에서 시내 산 위에서 보여줘요.
그걸 시내 산 위에서 보여줌으로써 모세로 하여금 미리 경험케 하는 것은, 오늘 강의 제목이기도 한데요, 종속되게 함이에요. 종속되지 않으면 인간은 미쳐버립니다. 왜 미친다 했습니까? 모든 것을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본인이 알아서 챙겨야 돼요.
그러면 이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dna, 도킨스 이야기처럼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강력하게 반발해야 되니까 그게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 피곤한 인생입니까? 사람이 사는 게 왜 피곤한 줄 알아요? 스스로 서려고, 나만 살려고 하니까 피곤한 겁니다. 그 피곤이 결국 뭘 유발하느냐 하면, 인간을 미쳐버리고 말아요. 그게 가을철에 오는 우울증 같은 거잖아요. 왠지? 왠지 낙엽 밟고 싶어라. 왠지 오늘은 그대에서 전화하고 싶어라, 이런 것.
미쳐버린다는 말은, 불안정한 거예요. 왜 안정되지 못하는가? 종속될 대상이 없어요. 매여 사는 방법을 몰랐어요. 매여 살면 그렇게 편한데 매여 살줄 몰라요. 매여 살면 종속되면 어떻게 산다고 했습니까? 세 자로 모든 것이 ‘저절로’ 되지요. 오뉴월의 개 팔자처럼. 그냥 모든 게 저절로 흘러가고 있어요. “하나님, 내일 뭘 할까요, 모레는 뭘 할까요?”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지 말고 오늘 것만 생각해.” 왜냐하면 주님의 목줄에 내가 매여 있으니까 짖으라면 짖으면 되니까.
사람들이 자꾸 개를 욕하는데 인간은 개가 되기 전까지는 행복은 없습니다(^^). 개가 되기 전까지는 축복이란 걸 몰라요. 그럼 혼자 삶은 뭐냐? 혼자 삶은 노숙자가 딱 제격이에요. 방랑자,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최백호, 딱 그 꼴이에요. 아무리 많이 가져도 허탈하고 허무하고 기쁜 것도 몇 시간 안 가요. 그 다음에 가진 어떻게 지킬지 지키기에 급급해요. 목에 목줄해서 보이지 않는 위, 모세가 만났던 시내 산 위의 하나님한테 개 목줄로 연결되면 세상 팔자 그것보다 희한한 팔자가 없거든요.
오늘부터 개로 살아보시렵니까? 개 되는 즐거움, 정말 최곱니다. 세상에 북한이 핵을 가져도 내 마음은 평화로워라. 북한이 핵을 터뜨리든 뭘 해도 관계없어요. 안정돼있어요. 양파 재배업자가 재배면적 늘어나서 양파 값이 폭락해도 개 목줄로 하나님과 연결돼있으면 아무 걱정 없어요. “그래, 양파나 실컷 먹고 죽자.”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은 스스로 서려고, 나 혼자 서려고, 그걸 실존이라 했지요. 혼자 사는 존재는 매사가 선택해야 될 부담을 갖습니다. 그리고 선택할 때 기쁨이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 선택해놓고 후회합니다. 그때 선택을 신중해야 했는데. 미쳤지. 내가 그런 남자 좋다고. 빼도 박도 못하고 20년 동안 살고 있다. 지가 젊을 때 선택해놓고 20년 뒤에 후회하네. 울면서 후회해요.
후회 안하는 인생이 어떻겠느냐고 저한테 묻지 마세요. 후회 자체가 우리한테 없어야 될 선택한 것 때문에 이물질이 들어온 거예요. 위 속에 구정물이 들어온 거예요. 우리 몸속에 산 위의 언약이 들어와야 되는데 산 밑의 구정물이 들어온 거예요. 구정물 들어오니까 급성 간암 걸려서 죽어야지. 13층 올라가서 낫긴 낫습니다만. <용팔이> 이야기에요. 바람의 동산에서 바람이나 쐬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복수한다고 해서 복수했다고 치면 남는 게 뭔데요? 나는 나 홀로 사는 게 맞다. 그럼 개 목걸이는 언제 거는데? 개 목걸이만 걸면 그 사람은 이 땅에서 13층 아니라 15층 살아도 그건 저주밖에 없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7절의 말씀은 이겁니다. 네가 물도 안 마시고 밥도 먹지 않은 것은 언약 앞에서는 밥 먹고 물 마실 필요조차 느낄 필요 없다. 네 생존이 언약 앞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 몇 년을 더 사느냐 나이가 얼마냐,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앞에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모세를 따라 모세에 개 목줄해서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내려오는 순간이 바로 29절에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죽어났습니다. 이제 시내 산 위에 있던 언약이 산 아래 내려왔어요. 인간은 감당 못해요.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의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광채가 났는데 본인은 광채 나는지도 몰랐다는 겁니다. 모세 얼굴이 광체로 빛나지요. 그 광채는 모세에서 나온 광채일까요, 모세 손에 들고 온 그 무엇의 광채일까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지만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지만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어요. 마태복음 6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질문을 하나 할 텐데 답변을 해보세요. 마태복음 6장 29절, 예수님의 말씀인데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들풀에 피어있는 꽃과 솔로몬의 화려한 옷 중 어느 것이 더 영광스럽습니까? 관점 문제입니다. 암호 문제입니다. 솔로몬의 옷, 금으로 만든 옷이 있어요. 여기에 들풀이 있다고 합시다. 둘 중에 어느 쪽 옷을 입을 겁니까? 솔로몬의 옷을 입을 거잖아요. 그런 안목이 있잖아요. 그 안목이 왜 있느냐 하면, 내가 늘 선택한다는데 문제가 있다니까요. 우리가 늘 선택할 때 나한테 중요한 것을 기준으로 선택하게 돼있어요. 그런데 나한테 중요한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안목에 의하면 저주받을 요소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동안 선택하면 그 값으로 죽습니다. 평생 자기가 옳다고 여겼던 선택이 점점 더 암에 걸리게 만들고, 치매 걸리게 만들고 요양병원에 가게 만들고, 교통사고 나게 만들고, 간암 걸리게 만들고. 하지만 간암 걸려도 대관령 바람의 언덕에 올라가서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뽀뽀하면 되지 않겠느냐. 뽀뽀해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그 인간이 그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 인간 천국 가도 소용없겠네요? 소용없어요. 그러면 천국 못 가겠네요? 갈 수 있어요. 어떻게? 모세가 들고 온 언약을 이 땅에서 본인이 들고 가면 되잖아요. 참 쉽지요.
오늘 본문이 뭐냐 하면, 모세가 위에 올라갔단 말이죠. 시내 산 위에. 위아래 할 때 그 위. 그런데 사람들은 아래 있다고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래 있던 모세가 위에 갔기 때문에 모세나 자기나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위에는 뭐가 준비돼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정말 중요시한 것이 거기에 이미 마련돼 있어요. 그게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앞에 설 때 모세는 자기 생존을 위해서 해야 될 것이 하나도 필요 없었어요. 얼마나 마시고 먹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 언약을 들고 산에서 내려왔더니만 본인도 몰랐어요. 자신이 땅의 사람들과 현격한 차이가 나는 존재란 사실을. 그러면 이렇게 빛나니까 모세가 대단하네요? 모세가 대단하다고 강의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들고 온 언약이 중요하다고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그걸 분명히 이해했는지 테스트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6장 이야기를 한 겁니다. 들풀로 만든 옷과 솔로몬의 옷 중에 어느 것을 입겠느냐고 질문한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들풀의 꽃이 솔로몬이 입은 영광보다 낫다는 사실이 네 눈에 보이느냐고 묻습니다. 너는 그런 안목을 갖고 있느냐? 저는 아무리 봐도 솔로몬의 황금 옷이 낫던데요? 그렇게 한다면 마태복음 6장에서 주께서 이렇게 할 거예요. 네가 보물이 없구나. 마음의 창문은 눈인데 네 눈이 잘못됐다. 눈이 잘못된 것은 마음이 잘못됐다. 따라서 네 마음을 예수 내 마음으로 바꾸지 아니하면 산상설교 한 마디도 지키고 안 지키고는 나중 문제고 이해조차 안 될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심령이 가난하거든 복이 많이 받았네요. 이런 소리하면 그 사람이 기분 좋아하겠어요? 돈도 없는 데 무슨 복을 많이 받았다는 말입니까.
교인들에게 여러분, 심령 가난할래요, 부자 될래요, 하면 어느 쪽입니까? 금요일 커피 석 잔 마셔가면서 기도하면서 “주여, 심령이 가난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 찾기 힘들어요. “주여, 부자 되게 하시고 집 사 주세요.” 말도 못하는 쌍둥이 앞세워서 그런 통성기도 할 거예요. 방금 제 말 못 알아듣는 사람은 유튜브에 통성기도 치면 나옵니다. 말도 못하는 아이가 통성기도하는 거예요. 중얼거리고 찬송 부르면서. 그걸 보면서 왜 웃느냐 하면, 우리가 옛날에,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 다 그렇게 했거든요.
그렇게 할 때 안목 자체는 안 바뀌었어요. 나한테 소중한 것을 기적적으로 베풀어달라고 그것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한 거예요. 그래서 주일 날 그놈에 정성이 문제라고 했지 않습니까. 정성을 빼고 기도하세요. 자기 정성에 자기가 매료되었어요. 그러니까 기도한다는 자체가 인간은 미친 거예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기도하겠습니까. 우리교회 교인들에게 기도하느냐고 물으니까 기도 아무도 안 해요.
진짜 믿음이 좋아서 기도 안 하는지 아직 덜 답답해서 기도 안 하는지 기도하고 싶지만 복음을 들은풍월이 있어서 참고 있는지. 그건 나중에 폭발하면 진짜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튀어나옵니다. 조금씩 기도하세요. 나중에 폭발하지 마시고. 어차피 가짜인데. 어차피 해봐야 안목 안 바뀌고 마음 안 바뀌었는데 소중한 내 자식 지켜달라는 것밖에 더 있어요.
출애굽에 소중한 것이 마지막 재앙이 맏아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자기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 큰 아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시고 거기에 집중폭격을 해버렸어요. IS 진지를 러시아 폭격기가 폭격하듯이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인간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폭격했습니다. 장자가 죽었습니다. 곧 자기가 죽음입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야 돼요.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사랑하는 것을 우리한테 허락하시고 그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얼마나 폭격을 가하는지 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 언약이에요. 아브라함 언약의 결정적인 순간은 뭐냐?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자진해서 저절로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제사 제물로 바치는 그 순간입니다. 그때 나오는 유명한 대사, 그게 <다모>의 대사에도 나옵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아브라함아, 네가 네 아들 바치는 게 아프지? 장차 하나님이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허접스럽고 살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바칠 때 아버지도 아픈 거예요.
그 아버지의 안목, 아픈 마음이 바로 언약 안에 담겨있습니다. 언약이 완성 단계에 들어가면 마지막에 딱 남는 사건이 있어요. 그게 사형집행자와 사형 당하는 자, 그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인류의 모든 중심은 사형집행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확대입니다. 사형집행자는 유대인이이고, 사형 당하시는 분은 예수님이고. 거기서 형성된 십자가가 이 세상을 구성하는 핵이고 그 사건이 팽창되는 거예요. 모든 구석구석 사행집행이란 의미가 팽창된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 사형집행을 두 자로 이야기하면 이거에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속에 있으면 우리는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을 우리가 살게 돼요. 왜? 대신 살려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살려고 하지 마세요. 대신 사신 분만 있으면 우리가 백 번, 천 번 죽어도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10분 쉬고 다음 시간할 게 무슨 작업을 해야 되느냐 하면, 왜 언약이 딱딱하나 물체 덩어리, 돌 판이 되었느냐는 이 문제와 언약이 돌 판 된 그 일이 어떻게 죽어야 될 우리가 주님이 대신 어떤 식으로 살려내는지 성사될 수 있는 그 원리가 무엇인지 진짜로 지금 죽어도 천국 가는지 정말 성공적으로 성사되는 원칙이 출애굽기 34장에 언약이 돌 판 되는 원칙 안에 함유돼있습니다. 그것은 10분 쉬고 생각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