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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강의-자아의 저항 1506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0. 7. 07:15

2015-07-05 22:57:05 조회 : 134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4 - 자아의 저항 이름 : 구득영 (IP:203.223.97.152)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4 - 자아의 저항
                                                                                
                                                          15,06,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09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구약의 모세법에는 누구를 이웃으로 보느냐 하면, 안 도와주면 생존이 힘든 쪽을 말합니다. 그냥 옆집에 산다고 해서 이웃이 아닙니다. 긍휼과 자비를 요청하는 쪽이 이웃입니다.      

◈ 이웃을 사랑하라 !!

구약의 모세율법에 보면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사람은 자기를 추스리는데 급급하지 이웃까지 챙길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방어하고 지키는 투쟁을 젊었을 때만 한다든지, 아니면 나이 40 정도까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는 순간까지도 조금도 그런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사수에 대해서 말이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러니 남까지 돌볼 여유가 전혀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 당연히 먼저 자기부터 챙기고 나서 조금 여유가 있을 때, 자기 주변에 어떻게 도와줄 사람은 없는지, 그렇게 살펴보고 나서 이웃사랑을 시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사랑이 아닌데, 왜냐하면 이미 출발할 때부터 "내 것은 내가 지킨다" 라는 것이 너무나 투철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자기 이익과 배치가 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 위층에 누군가가 이사를 왔는데 아이들이 3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도 아이들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것에 대해서 좋다고 허락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뛰노는 것이 자기가 예상한 것을 벗어나게 되면, 반상회 때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그러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는, 거기에 어떤 조건이 붙어있는고 하니, "당신이 나의 것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도와드릴 용의가 되어있습니다" 라는 것이다. 즉 "당신을 도와줌으로서 내가 망가지는 것까지는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라는 것을 우리는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게 무슨 이웃사랑이냐는 것이다. 또한 이웃에 대한 동정도 아닌데, 왜냐하면 이웃을 도와주게 되면 그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또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결혼식이나 무슨 일이 있으면 일일이 다 봉투를 돌리고, 장례식에도 일일이 다 찾아가고 한다면,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분명히 저 사람은 내년에 구청장이라도 나오지 싶다" 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다면 그것이 이웃사랑인가? 아니면 표를 다지는 하나의 전략으로서, 미리 자기 영역을 확보하는 것인가? 그러니 그런 것은 이웃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라는 말이다.

◈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라는 사람이 '이기적 유전자' 라는 책을 썼는데, 즉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유전자가 그 사람을 이용하고 있다" 라고 주장했는데 말이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나는 내가 지킬 수 있는 마지노 선이다" 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그 '나' 라는 것을 해체해서 그 안에 있는 유전자를 보았다는 것이다. 

유전자는 부모로부터 반반 씩 물려받았는데, 그 유전자를 지키기 위해서 유전자가 세포를 공격하고, 그 세포가 모인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을 알려고 하면, 이렇게 거울 앞에 비치는 통일체에 멈추면 안 된다는 말이다. 더 쪼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쪼개니 그 안에 세포가 들어있고, 세포 안에 유전자가 들어있고, 그런데 그 유전자는 간섭을 받지 않는데, 자기 마음대로 인데, 마치 절대자와 같다는 말이다. 자기 속에 들어있는 또 다른 어른, 즉 자기 자신에게 갑질하는 최후의 것이 곧 유전자라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말이다.

◈ 성질대로 산다. 딩동댕 !!

"성질대로 산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다는 것이다. "집사님은 왜 성질이 그렇습니까?" 라고 하면, "나도 내 성질을 못 말려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평생을 고치려고 했지만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도킨스가 주장한 것인데,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누가 주인인고 하니, 자기가 주인이고 그 안에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가 주인이고, 그 유전자가 바깥으로 구체화를 시킨 것이 바로, 즉 세포를 가지고 "나의 유전자는 이런 모습입니다" 라고 티를 낼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신체라는 것이다.

◈ 유전자의 영원한 보존 !!

그러면 유전자가 왜 자기 마음대로 그런 짓을 하는고 하니까, 유전자는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전자의 영원한 보존' 이라는 것이다. 유전자는 계속해서 복제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영원히 자기를 보존한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이 아니고 유전자 자신을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왜 자기밖에 모르는지 그 이유가 밝혀졌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유전자가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차가 오는데 피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왜 피하는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아니라 유전자가 피하라고 두뇌에 명령을 했다는 것이다. 머리 속에는 세포가 있고, 그 안에는 각각의 유전자가 있어서, 그 유전자가 알아서 보호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생물학인데, 그야말로 막장 생물학이라는 것이다.

◈ 막장 생물학 !!

그렇다면 이런 현대 생물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과학이니까 틀렸다고 할 수는 없고 말이다. 하지만 맞다고 하기는 뭔가가 조금은 심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금이라도 치면 되는가? 그것을 그냥 맞다고 해버리면 이 세상이 너무나도 냉혹해지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자기 주먹을 자기가 마구 흔들어놓고는, 그것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 유전자 책임이라고, 즉 "부모를 잘못 만나서 그런 것을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핑계를 대면서, 그렇게 윤리와 도덕적 책임에서 무책임하게 빠져버리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인 생각들이 말이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이렇게 되면 윤리고 도덕이고 간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고 하니, 아들이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아버지를 때려놓고 뭐라고 한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이 놈의 자식이 미쳤나? 왜 그래?" 라고 하면, "이것이 다 아버지의 책임입니다. 아버지가 그런 성격을 저에게 물려주어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뭔가가 빠졌다는 것이다. 그 빠진 것이 바로 윤리와 도덕인데, 그러면 그 윤리와 도덕을 집어넣으면 되는가? 물론 임시 땜방은 되겠지만 말이다.

◈ 타이어는 옥션에서 !!

예를 들어서, 타이어가 다 낡아서 빵구가 자꾸 난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것은 빵구를 땜질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타이어 자체를 갈아야 하는데, 그러면 타이어는 어디서 갈면 되는가? '타이어 프로' 라고, 거기서 갈면 된다고 하는데, 아무튼 그런 CF가 있다는 것이다(ㅋㅋ).

(녹취 구 - 타이어는 한꺼번에 다 가는 것이 좋은데, 그럴 때는 인터넷으로 구입해서 한 짝에 만원씩 정도의 비용을 주고 카센터에서 갈면 됩니다. 그러면 가격도 싸고, 무엇보다도 가장 새 타이어를 장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타이어의 인터넷 판매는 재고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카센터에서 교체하면 생산한지 1년도 더 넘은 놈을 만날 가능성도 있다고 하는데, 타이어는 마모 정도만이 아니라, 연식도 오래 되면 안 되겠죠. 물론 타이어에 만든 날짜가 나와있지만, 그것을 일일이 따지기도 좀 그렇고 말이죠. 이상은 제가 애용하는 카센터에서 알려준 정보인데, 참 착한 카센터죠. ㅋㅋ)  

◈ 가정교육을 잘 받아야 한다 !!

흔히들 뭐라고 하는가? "가정교육을 잘 받아야 한다" 라고 하지만, 하지만 그런 가정교육이 바로 임시 땜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윤리와 도덕도 막상 무엇 앞에서는 힘없이 그냥 주저앉고 만다는 말인가? 돈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돈 앞에서는 말이다. 

오늘 아침신문을 보니, "일찍 유산을 남겼더니만 그때부터는 구박이 들어오더라" 라는 기사가 났던데, 그러니 아들이 나쁜 게 아니라 아버지가 나쁘다는 말이다. 유산을 주었다고 하면 그냥 깔끔하게 주면 되는데, 그런데 그런 유산을 주면서 뭐라고 하는가? "이제부터는 나를 돌봐라" 라고 하는 것을 은근히 노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유산을 준 것이 자식에 대한 이웃사랑인가? 아니면 자기 확대인가? 그것은 자기 확대이지 이웃사랑은 아니라는 것이다. 

◈ 만인대 만인의 투쟁 !!

그러면 왜 그렇게 자기 확대를 했는가? 그것은 바로 '게놈', 바로 그놈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ㅋㅋ). 유전자가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가 없다는 것이 바로 문제인데, 그래서 이것을 두고 '만인대 만인의 투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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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만인대 만인의 투쟁' 이란 말은 무엇인가요?
* 답변 - 동물의 세계에서는 강한 동물만이 살아남습니다. 자신의 먹이를 확보하고 짝짓기를 하려면 남을 짓밟고 또 싸워야 합니다. 홉스는 사람도 마찬가지라서 질서를 지켜주는 정부가 없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 싸워서 동물의 세계와 같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상태를 '만인(여러 사람이란 뜻)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라고 불렀습니다. - 네이버의 질문과 답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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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자기 유전자를 지키기 위해서 남의 유전자를 차버려야만 하는 투쟁인데, 그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자식들이 유산을 받으면 취직을 하겠는가? 사업을 한답시고 유산을 다 날리기 일 수인데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국가경제는 살지 몰라도, 자기 집안은 왕창 다 말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식들에게 유산을 남겨줘도 걱정인데, 그렇게 하면 당장에 "엄마, 더러워서 직장에 더 다니지 못하겠다" 라고 하면서 사업을 벌려서 말아먹는다는 것을, 그게 다 정해진 코스인데 말이다. 세상을 조금만 살아보면 그런 것을 다 안다는 것이다. 마누라가 돈을 좀 벌면, 남자들은 어떻게 하는가?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개인사업을 벌리는데, 그게 다 코스라는 말이다.

◈ 다시, '이웃을 사랑하라' !!

여기까지만 듣게 되면, 만약에 지금 이 시간이 성경공부시간이 아니라 일반 인문학 강의시간이라고 한다면, "유전자가 그렇다고 하니 우리는 그냥 각자가 만인대 만인의 투쟁으로서 서로의 유전자대로 그냥 삽시다" 라고 하면서 끝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성경은 무엇인가?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그게 하나의 율법으로서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 성경공부시간이 아니고 하면, "그래, 각자가 잘 먹고 잘 살자" 라고 하면서 헤어지면 그만인데 말이다. 그게 바로 사회에서 말하는 소위 협동, 협력, 소통, 동업 등등, 그런 것들이 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의 영원한 자기 보존이 죽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 도대체 언제까지 '가족' 이라는 말인가?

여기서 특히 문제가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제가 칠판에 큰 글씨로 적겠는데, 그것이 바로 '가족' 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까지 가족이라는 말인가? 부모가 돈이 있을 때만 부모이고 가족인데, 돈이 없으면 그냥 천덕꾸러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키스가 말한 이 '이기적 유전자' 라는 것이 그냥 한 사람의 연구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밑바닥까지 파헤친 정답이라는 것이다. 왜 가족이 분화가 되고 동업자끼리 싸우고, 그리고 왜 국가간에 서로 다투고 하느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가 왜 이렇게 돈 때문에, 즉 경제문제로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그 원인에는 분명히 나쁜 놈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해서 파헤쳐 보니, 거기에 나쁜 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냉정하게 판단을 했느냐는 말이다. 즉 "마귀가 있고 괴물에 있어서 이 사회가 나쁘다" 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자체적인 보존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래, 우리가 너무 과학만 추구하게 되면 차가워져서 안 되지. 우리는 윤리와 도덕도 배워야해" 라고 이야기를 해봤자, 하지만 그 윤리와 도덕이 어디에서 무너진다고 했는가? 돈 앞에는 그냥 와르르 무너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때만 임시적으로 땜방이고, 다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윤리고 나발이고 간에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종적인 것이 윤리와 도덕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돈이라는 말이다. 왜 돈이 최종적인고 하니, 그 돈 밑에는 "나만 살겠다" 라고 하는, 그런 자기 보존이 있다는 것이다.

◈ 아내는 남편을 사랑합니까?

서울의존교회에서 강의를 하면서 앞에 앉아있는 조금 젊은 부부에게 물었는데, 그러면 "아내는 남편을 사랑합니까? - 예. - 한 달에 수입이 30만원이 되어도 사랑합니까? - 예. - 10만원이 되어도 사랑합니까? - 예. - 그러면 마이너스가 되어도 사랑합니까? - ???"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사랑이 과연 유전자의 자기 보존을 극복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자기 보존까지 포기하는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서 과연 나올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는데,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반발하는 인간들 !!

만약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성경을 보지 않는다고 하면, "그래,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자" 라고 하면 끝나는 문제인데,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시는 하셨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없고 말이다. 사실은 능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거기에 대해서 반발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이 시간에, 즉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웃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그 이웃사랑에 담겨있는,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웃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말씀을 주셨는지, 그 내막을 살펴보는 가운데, 진짜로 하나님이 그 말씀을 주신 취지를 우리가 감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처럼 이웃사랑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즉 지하철에서 걸인에게 동전을 주면 그것이 바로 이웃사랑이 아니고, 자기 보존마저 극복하고 난 뒤에 나오는 이웃사랑이, 그게 우리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뻔히 알면서도 왜 그런 이웃사랑에 대한 율법을 주셨는지, 즉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왜 하셨느냐는 것이다. 우리 인간을 뻔히 다 아시면서 말이다. 

◈ 하나님이 누구인가?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보고 "너희들이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보내주겠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누구인가?" 라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우리의 착함이 문제가 아니라, 그 초점은 "하나님이 누구인가?" 라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희들을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만든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현재 자기 자신을 붙들고서 감히 천국을 넘보는, 즉 전혀 주제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희들 자신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그래서 도저히 천국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임을, 그것을 미처 파악도 하지 못한 상태로 있구나"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모르고, 그래서 천국에 가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전혀 파악도 하지 못한 채 어떻게 하고 있다는 말인가? 감히 천국에는 가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말씀을 지키겠다고,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 그러면 중보자가 왜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중보자가 왜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중보자가 오셨다고 하니,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감안하지 않고, 중보자를 영접한답시고, "저는 믿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천국에 갈 욕심으로 중보자를 받아 챙기려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중보자가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질책하는 그 이상으로 질책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홍해가 갈라진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것이라고 말이다. 자기가 기도해서 부자가 되고 또한 암에서 낫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아요" 라고 하는 마음가짐이 더 큰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런 우리 자신이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유도하신 주님이 훌륭하다는 말이다. 중보자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준비됐나? 준비됐지? 그러면 이제 내가 구원해줄 게"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 중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보자는 우리가 행할 수 없는 큰 기적이 행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극단적 죄인으로 몰아세워서, 그렇게 몰아세우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이웃사랑을 실현시키는 절차로서, 그렇게 참여시킨다는 것이다. 즉 "저는 못합니다" 라는 자를 이웃사랑에, 율법완성에 참여시키는 방법을 주님은 사용하신다는 말이다.

◈ 그 느낌을 아니까 !!

이렇게 말로 설명을 하려니 복잡한데,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게 굉장히 간단하고 수월하다는 것이다.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목사님의 강의나 설교는 어려운 게 하나도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는 제가 다 신기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은근히 약이 올라서 속으로 "그러면 더 어렵게 해볼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래도 어렵지 않다고 나오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분은 논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과 같은 느낌이 드니, 동의가 되고 속이 시원하다는 것이다. 물론 표현은 되지 않아도 "목사님, 바로 그것입니다. 맞습니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논리를 따져서 구원을 받아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쉽고 어려운 차원이 아니라, 그 느낌을 아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 나아만 장군과 이스라엘의 소녀 !!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인 나아만 장군이 나오는데, 자기에게 일을 시킬 종으로서 이스라엘 소녀를 하나 체포했다는 말이다. 원래 이스라엘은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갈 일이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에, 신약의 표현대로 하면 중보자가 보호하시기 때문에 말이다.

(왕하 5: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왕하 5: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이스라엘은 그러한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저주를 받은 이방나라 사람들을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체가 언약을 포기해버리니, 이스라엘이나 이방나라나 똑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힘있는 자가 승자가 되는 논리로 모든 것이 점령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기존 교회에서 장로들이 기도할 때 보면, 남북통일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을 다 구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에게도 힘을 좀 주세요" 라는 것이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힘을 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비언약이라고 이방나라가 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는데, 유대나라가 로마에 포로로 잡혀간 것도 바로 그런 이유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언약을 주셔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 여기서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저의 주장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 내적 할례 !!

그것이 바로 '내적 할례' 라는 것인데, 성경에 나오는 표현대로 하면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에 망했다" 라는 것이다. 즉 껍질은 할례를 행했는데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게 로마서 2장에 나오는데, 물론 구약성경인 예레미야서에도 나오고 말이다.

(롬 2: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듣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난처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피부는 칼로 째면 되지만, 도대체 마음은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말이다. 그런 칼은 없는데,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조금 있다가 하고, 먼저 이것부터 하겠는데 말이다.

그게 왜 되지 않는고 하니,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은 어디로 향하는고 하니, 자꾸만 신을 향해서 높아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신을 향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그렇게 신이 되는 주인공이 누구인가? 그 주체가 곧 자기 자신인데, 그래서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도를 닦고 기도하고 금식을 해도, 그것이 다 누구 좋아라고 한다는 말인가? 자기 좋아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을 두고 '의식세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들이 모든 의식세계에 속해 있는데, 그러면 그런 의식세계를 붙잡고 있는 것이 누구인고 하니, 그 의식이 바로 '나'의 의식이라는 것이다.

◈ Cogito, Ergo Sum !!

그래서 데카르트가 뭐라고 했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유명한 말을 했는데 말이다. 그러면 돌맹이는 왜 존재하는가? 데카르트에 의하면 돌맹이도 생각해야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은 돌맹이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인간에게만, 자기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에게만 해당되니,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세계를 활짝 펼친 것을 두고 현실, 혹은 세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놈의 세상이 왜 뜻대로 안 되노?" 라고 하는데, 그러니 누구의 세상이라는 말인가? 자기 세상이니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이 세상을 만드는데 무슨 일조라도 했느냐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런데 왜 이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자기가 주님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고 중심이 아니라면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생긴다고 하면, 그러면 "아이쿠, 무슨 이런 로또를 다 주십니까?" 라고 하면서 감사해야할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반대로 생각해서 이 세상이 자기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가?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이 세상을 자기가 뽑아내는 현실로 따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해석해서, 그런 자기가 원하는 현실을 진짜 현실로 여긴다는 것이다.

◈ 과연 누가 주인인가?

방송에 보면 가끔 사기를 치는 사례가 소개되는데, 다음과 같은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원래 땅 주인이 있는데, 그런데 바빠서 제대로 돌보지를 못하니, 사기꾼이 그것을 알고 자기 땅으로 그만 문서를 위조해서 팔아먹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짜 주인이 오면 어떻게 되는가?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주인이었던 시절을 벗어나서, 즉 이 세상에서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는 그냥 던져진 존재인데, 그게 유전자가 되던 게놈이 되던 말이다. 그래서 도킨스가 기독교를 향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신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이 세상을 신이 만들었다고 하면, 그러면 신은 누가 만들었는가? 기독교인들이여, 답변을 해보아라" 라고 나왔다는 것이다.

◈ 사탄이 하는 짓으로 상처를 입은 분이 곧 진짜 하나님 !!

여러분도 그게 궁금하지 싶은데, 그렇지요? 신은 누가 만들었고 하니까, 사람의 손에 의해서 죽었던 분이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즉 신은 누가 만들었느냐고 따지는 자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분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킨스가 "신은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묻는 것 자체가 헛소리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불러내는 요청의 음성이 되고 질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하는 짓들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데, 그런 모든 사탄의 짓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은 분, 그분이 바로 나타나신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말이다. 그러니 마귀가 설치고 불신자들이 설치면 설칠수록 진짜 하나님의 모습은 점점 더 확실하게 계속해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이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보니 주님이 자기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즉 "내가 부르는데 왜 나타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니가 뭔데 내가 나타나야 하는가?" 라고 하시는데, 즉 자기가 아무리 철야를 하던 무엇을 하던 간에, 주님이 나타나야 될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 인간은, 멈추지 않는 욕망의 기관차 !!

다시 해보겠는데, '의식' 이라는 것은 이미 자기가 주인공인데, 즉 '자기 의식' 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주인공이면 자꾸만 자기가 높아지는데, 어디까지 말인가? 신과 동급이 될 때까지 인간의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미 그 방향이 정해져있는데, "어떻게 하면 신과 동급이 될 것인가?" 라는 것인데, 즉 모든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으로서, 그 어떤 것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사탄은 바로 종교인들인데, 왜냐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해탈해서 살아가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보다도 더 신다운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천주교나 불교, 특히 티벳불교가 그러한데 말이다. 옛날에는 왕이 종교인이었는데, 왕과 제사장이 같은 직능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 그들은 신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관찰과 실험을 !!

그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의식을 무한대로 확대시키는 것인데, 그러면 종교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그렇게 신처럼 살아가는 자들이 있는가? 물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호킹 박사와 같은 과학자들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관찰과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이 자기가 생각한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저 우주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 말이다. 정작 자기가 죽어서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것도 모르면서 저 우주의 끝은 알아서 도대체 무엇을 하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저는 모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보는데, "아직도 아이들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라고 말이다. 쉽게 말해서,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는 것이다. 비트겐쉬타인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세상의 모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게 자기 놀이문화이지,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냥 가지고 논다는 것이다.

◈ 비트겐쉬타인 - '진리는 무슨, 그냥 노닥거리는 것이다' !!

바둑을 두고 골프를 치는 것과도 똑같은데, 자기 직업이기에 그냥 노닥거리고 있다는 말이다. 농사를 짓는 부모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자식들이 "어머니, 이미 농사를 그만 지으세요" 라고 하면,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하고 놀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업종이 그냥 노닥거리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자기 의식이 있을 때까지는 "신이 되자, 신이 되자"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포이에르바하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내일 부산강의에서 포이에르바하에 대해서 할 것인데, 즉 인간의 욕구가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 프로이드가 말하는 무의식 !!

그런데 그것이 드디어 한계를 맞이했는데, 프로이드가 나타나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의식이 아닌 무의식을 이야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의식을 이야기하면서, 의식세계는 10프로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 90프로는 무의식의 세계로서, 그게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의식이 말이다.

지금까지 몇 사람이 등장을 했는데, 먼저 도킨스는 유전자가 인간을 지배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양반은 현대사람이고, 그 이전에 초반에는 프로이드는 무의식이 지배한다고 했는데, 예를 들어서 꿈이 그런 경우이고, 또한 무심코 나오는 말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어떻게 되는가? 그 동안 무의식이 주인공이었는데, 그런데 그 무의식은 굉장히 기피하고, 그 가운데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의식 가운데 만들어서, 그것을 '나' 라고 하면서 인간들이 이 세상에 나와서 설쳐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때?"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인간은, 타인 의존적 !!

그렇게 되니까, 자기 의식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를 생각하는지가 중요하게 되는데, 즉 '타인 의존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면서 '나'의 '나' 됨을 구축하려고, 그렇게 의식적으로 시도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남을 의식한다는 것은 남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인데, 그렇게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곧 자기의 주체성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자살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가치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남편이나 자식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이제 그만 죽을란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의식이 아니고, 그런 무의식에는 관심이 없고, 무의식 중에서 남들이 인정한 것만 골라서 의식화를 시키다가보니, 그런 의식으로 자기를 꾸미다가보니 그게 실패로 끝났을 때, 그만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 어휴, 성질나 !!

예를 들어서, "이런 성질이 난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이 도킨스에 의하면 게놈인지 그놈인지 몰라도, 유전자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드에 의하면 성질이 나게 한 것은 무엇인가? 자기의 90프로를 차지하는 무의식이, 그게 주인인데 말이다. 즉 괜히 성질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을 알면서도 성질이 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의식이란 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데, 왜냐하면 남들과 더불어서 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친놈으로 여겨서 정신병원에 집어넣으니 말이다.

◈ 교육인가? 사육인가?

그렇게 남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의식이 교육을 받는데, 그래서 교육에는 반드시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즉 "니가 그렇게 살면 남들에게 인정을 받지 받지 못해. 그러니 이렇게 행동을 바꾸면 엄마와 아빠에게 인정을 받고,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고, 나중에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거야. 그러니 행동을 똑바로 해" 라고 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말이다. 말이 교육이지, 밥까지 먹여주면서 그렇게 하면 그게 곧 사육이라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교육은 무엇을 강렬하게 억누른 대가인고 하니, 자기에게 치밀어 오르는 자기의 본래 성질을 평생동안 억누른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남에게 인정을 받는, 즉 자기다운 것이란 말이다. 즉 자아의 '주체성', 혹은 '정체성(identity)' 이라는 것이다. 

◈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

우리 모임이 성경공부를 하는 모임이 아니라 인문학 강의시간이라고 하면, "그러면 각자의 성질대로, 혼자 있을 때는 무슨 짓을 해도 되지만, 바깥에 나가서는 똑바로 합시다" 라고 하면 되겠는데,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우리가 지금 억눌러서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이 모습이 과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이룰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살고 남에게 들키지 않으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자기를 억눌러 가면서까지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싫다고 하면, 그러면 지리산에 들어가서 살면 된다는 것이다. 저도 지리산의 대원사 골짜기에 가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혼자 살면 된다는 것이다. 인간극장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종종 나오는데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왜 거기서 삽니까?" 라고 하면, "돈도 싫고" 라고 하는데, 달리 말하면 남들 눈이 싫다는 것이다. 기도원에는 왜 들어가는가? 이 세상이 짜증나고 싫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피하면 주님의 말씀은 거기에 없는가? 주님은 가시지 않는 곳이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것이 산 속에 홀로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인가? 그렇게 하면 주님이 과연 구원을 해주시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지금 우리 자신 속에서 분출하는 무의식을, 그것을 성경공부를 가지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을 제가 계속해서 지금 지적하고 있는데 말이다.

◈ 어떻게 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물론 위선의 기술은 되는데, 하지만 정말 근원적인 문제를, 즉 자기 성질, 자기 유전자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하는 말씀을, 그것을 중보자 앞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시간이 40분이 되도록 성경공부를 했지만 그 해결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있기는 있는데, 제가 아직 제시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해결책에 앞서서 먼저 우리 자신부터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 현실을 말이다. 무의식이 90퍼센트인데, 그런데 우리를 그것을 애써서 누르면서 진짜 자기다운 것을 어디서 찾는고 하니,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라는 것을 가지고서 조립을 한다는 것이다. 조립을 말이다.

◈ 인간은 조립품 !!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조립품인데, 그래서 뜯어보면 남들이 평가한 것만 쓰레기처럼 수북하게 들어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부모가, 커서는 친구들이 평가한 것이 말이다. 예를 들어서, 동창회에 가서 "야, 니가 목사라도 한 잔 마셔라, 나도 장로인데 이렇게 먹잖아. 그러니 먹어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시선인가? 타인의 시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내부에서 흥정이 들어가는데, 즉 "지금까지 15년 동안 마시지 않았지만, 동창회에 와서는 한 잔만 마시자. 그것도 독일에서는 음료수라고 하는 맥주인데 말이야" 라고 말이다. 그러면 다른 쪽에서는 "그것도 안 돼" 라고, 그렇게 자기 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속에는 천사와 악마는 없는데,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의식인데, 그러니 의식은 현실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요령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라고 해도, 그게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생각한다" 라는 것이다. 어디에서 말인가? 남들이 보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생각한다는 말이다.

◈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도록 !!

다시 복습해보면, 그 의식세계는 선과 악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그 의식세계의 마지막은 자기가 신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모든 것에서 뛰어나고, 모든 것을 다 알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율법에 흠이 없다고 하던 사울이 추구하던 것이 무엇인가? 율법을 가지고서, 즉 자기의 의식을 가지고 신이 되고자 하는, 그렇게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은 티를 팍팍낸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하는 게 바로 그런 짓거리인데, 즉 말씀을 가지고 신이 되는 것, 남들 보기에 이 정도만 하면 욕을 듣지 않는 것, 그러니 그게 90퍼센트를 잘라버리라는 소리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무의식을 발견하고 난 뒤에, "내가 위선 덩어리구나. 진짜 나를 알려고 하면 무의식의 세계를 가봐야 하겠네" 라고 관심사를 바꾼다고 해도,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세계는 모르는데, 아무도 모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무의식의 세계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그렇다면 무의식의 세계에 어떻게 들어가는고 하니, 오늘 좋은 것을 배우는데 말이다. 의식세계에서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을 실패했을 때, 그게 바로 무의식의 세계에 접선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그 여자에게 옷도 사주고 나름 최선을 다해서 했는데, 그런데 그 여자가 그만 다른 남자를 만나서 시집을 가고 말았을 때는, 그만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육신의 열매가 무엇인가? 시기와 분노와 질투와 같은 것인데, 의식세계로서는 진짜 정당하게 했는데 말이다. 의식세계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모여서 살 때 필요한 것인데, 이런 의식세계가 없으면 인간은 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끔 술을 마시고 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이런 의식세계가 헛갈려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무의식 세계에서 이런 의식세계로,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목표가 신이 되는 것인데, 거기에 실패했을 경우에는 그만 분노와 질투가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무의식에 묶여있다는 것이 탄로가 나게 된다는 말이다.  

◈ 결국, 인생은 막장 드라마 !!

예를 들어서, 피부에 면도칼이 지나가면 어떻게 되는가? 자칫 잘못하면 피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우리는 의식으로 버텼는데, 윤리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버티다가 마지막으로 피부가 찢어질 때는 피가 나오는데, 그렇게 무의식이 폭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문자를 보내기 시작하는데, "너는 악녀야" 라고 하면서 막장 드라마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생전에 욕도 제대로 할 줄 모르던 사람이 욕이 입에 마구 달리고 말이다. 그런 것이 이미 무의식의 세계에 장착되어 있었는데, 그게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집도 있고 고급 자동차도 있는데, 그런데 사는 것이 허무하다고 하는 것이 곧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왜 우리 인간은 오뉴월의 개팔자가 되지 못하는가? 개는 배만 부르면 양지 바른 곳에 누워서 자는데 말이다. 왜 그렇게 안 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무의식의 세계라고 했는데 말이다.

◈ 인간은 영적 존재 !!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인간을 뭐라고 하는가? 영적 존재라고 하는데, 그래서 개나 돼지와 인간의 차이점은 하나밖에 없는데, 개나 돼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것이 아니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형상이 누구인가? 예수님인데,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은 영적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짐승의 경우에 혼은 있지만 영은 없는데, 전도서에 보면 '짐승의 혼' 이라는 표현이 나온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혼은 짐승의 일부가 아니고 전체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조금 어려운 내용이지만 말이다. 거기에 비해서 인간은 전체가 혼이 아니라 영이 된다는 것이다.

(전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 언약적 관계성 !!

그러면 여기서 영은 영혼을 말하는가? 그게 아니라, 영은 '언약적 관계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게 정말 중요한데, 우리 인간은 본의 아니게 이미 창세 전부터 미움을 받던지 혹은 사랑을 받던지, 그런 관계망 속에 이미 놓여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성경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지만 말이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러니 "죽으면 그만이지" 라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죽은 자도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죽은 자를 왜 호출하시는가? 굳이 죽은 공자와 죽은 석가모니를 왜 불러내느냐는 것이다.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들을 누가 만들었는가? 그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도 주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옥에 가야만 하는데, 한글을 만들었다고 특별하게 천국에 넣어주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언약의 내용에 한글창제가 없기에 말이다.

그러니 판사가 되었다고 해서, 국무총리 후보가 되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데, 물론 목사나 장로가 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오로지 언약대로 구원을 받는데, 즉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너희에게 구원은 없느니라" 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말이다.

◈ 다시, 나아만 장군과 문둥병 !!

그러니까 도대체 우리가 무슨 수로 하나님의 언약을 알겠는가? 우리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아만 장군에게 언약을 알게 하는 기회를 특별히 주셨는데, 그런데 그 출발점이 그리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문둥병' 이라는 말이다. 나아만 장군이 자기 몸관리를 잘못해서 걸린 것이 아니고 말이다.

(왕하 5: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그렇다면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나아만 장군과 연결을 시켜보자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렸는데, 그러면 남들이 보기에 어떠하겠는가? 상호인정인데, 즉 인간의 자아는 남들이 보는 눈으로 구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아만 장군의 경우에는 "나 같은 신분이 문둥병에 걸렸으니 하루 빨리 나아야 나답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들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게 의식적이냐는 것이다. 제가 의식과 무의식을 나누어서 그렇지, 무의식을 모를 때는 그게 현실 그 자체인데, 굳이 의식과 무의식을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가 생각하는 자체가 전부라는 말이다. 무의식이 나오니, "그것은 무의식이 아닌 의식의 일부에 불과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비되는 개념이 없으면 그냥 덜렁덜렁 살면 된다는 말이다.

◈ 공자 -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니란다' !!

언제 부처나 공자가 의식과 무의식을 구별해서 생각했는가? 그들의 주장은 "바르게 살아라. 그래야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그것이 곧 사랑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의식적이냐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왜 죽습니까?" 라고 하니, 공자는 "귀신에 관해서는 나에게 묻지 말라. 나는 모른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귀신의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로서 자기는 모른다는 말이다. 즉 "그러한 것을 몰라도 되고,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면 된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공자님, 나라가 잘 되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면, "그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역시 그것도 공자는 모른다는 말이다.

* 공자 : 부모에게 효도해라.
* 제자 : 효도를 하면요?
* 공자 : 효자가 되지.
* 제자 : 효자가 되면요?
* 공자 : 칭찬을 받겠지.
* 제자 : 칭찬을 받으면요?
* 공자 : 행복하겠지.
* 제자 : 그러면 몸이 아프고 죽으면 행복합니까?
* 공자 : 그것은 말이야?
* 제자 : 왜 몰라요?
* 공자 : 이놈아,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냐.
* 제자 : ? ? ?

남들이 보기에 인간답게 살아라 !!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바른 교육을 시킨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한 마디로 말해서 "남들이 보기에 인간답게 살아라"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가 그렇게 하다가 지쳐서 "엄마, 나는 이제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지리산에서 살 거야" 라고 한다면, 엄마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엄마, 숙제가 이렇게 힘이 들 것 같으면 나는 죽을 거야" 라고 하면, 엄마는 "부모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라고 하는데, "왜 아닌데?" 라고 하면, "니가 앞으로 부모가 되어보면 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언제인데? 15년이 지나야 돼?"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당시에는 해답이 곧 바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쉬쉬하지 말고 일일이 다 깨고 부수어 봐야 하는데, 말씀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중보자 앞에서 말이다. 그분 앞에서는 모두 다 아는 문제라는 것이다.

◈ 그분은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어요 !!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은 병을 낫고자 했는데, 적어도 자가는 장군이니 말이다. 그런데 마침 자기 집에 이스라엘 출신인 어떤 여자아이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 주인이 문둥병으로 고민을 하니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선지자가 있는데, 그분은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어요" 라고 말이다. 

사람이 몸이 아프게 되면 그것을 낫게 해준다면 체면이고 뭐고 없는데, 윤리고 도덕이고 간에 지금 자기가 죽을 판국인데 말이다. 그런 것은 모두 임시땜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그래, 그 선지자가 어디에 있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자 "우리나라에 있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람은 모든 병을 다 고칩니다" 라고 하니, "그래, 그분을 만나러 가자" 라고 해서, 선물을 가득 챙겨서 간다는 말이다. 

◈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이상 !!

그렇다면 엘리사를 만나려고 갈 때 선물을 가득 챙겨서 간다는 것은 어디서 나온 발상인가? 기존의 의식세계에서 이미 통용이 되던 원리라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면, 그만큼의 혜택을 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합당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첫 번째 순서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것이 중보자 앞에서 죄인가? 죄가 아닌가? 죄인데, 하지만 의식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의식세계에의 목적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만 잘 되면 모두 다 잘되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게 좋은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남을 이용할 만큼 이용하겠다는 것이 의식세계에서의 중심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 하지만, 마중을 나오지 않는 엘리사 !!

그래서 선물을 싸들고 찾아갔는데, 하지만 엘리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짓인데, 보통 의식세계에서는 사람이 방문을 하면 어떻게 하는가? 마중을 나와서 "누구십니까?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예, 저는 아람 나라에서 온 누구누구입니다" 라고 하고 말이다.

이 아람 나라가 어디에 있는고 하니, 그게 바로 시리아인데 말이다. 여기 사해바다가 있으면, 그 위에는 요단강을 따라서 갈릴리 호수가 있는데, 워낙 넓어서 디베랴 바다라고도 하는데 말이다. 왜 그런 호수가 생겼는고 하니, 그 위에는 헤르몬 산이 있어서, 거기서 눈이 녹아서 갈릴리 호수로 모여든다는 것이다. 그게 요단강을 통해서 사해로 흘러서 내려간다는 말이다.

이 사해바다는 지표면보다도 약 120미터 정도가 낮다고 하는데, 육지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낫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죽은 바다인데, 소금이 너무 많아서 말이다. 사람이 들어가면 지금도 뜬다고 하는데, 그런데 요즘은 바다가 너무 줄어들어서 요르단에서 걱정이 많다는 것이다.

아람 나라는 여기 위쪽에 있는데, 이스라엘이 B.C. 931년에 나라가 그만 쪼개지고 말았는데, 북쪽은 B.C. 722년에, 그리고 남쪽은 B.C. 586년에 각각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라가 망하기 전에 북쪽의 여호사밧 왕의 시대이지 싶은데, 그때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을 건너서 왔다는 것이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는 남쪽나라가 되고, 나머지는 다 북쪽이 되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나아만 장군이 직접 엘리사를 만나려고 왔는데, 그런데 엘리사는 마중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기분이 좀 나빴지 싶은데, 의식세계에서는 당연히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기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오기 전에 나아만 장군이 편지를 보내서 엘리사가 어디 있는지 이스라엘 왕에게 먼저 물었는데, 참 이때가 여호사밧이 아니고 여로보암 2세라는 말이다. 그러니 왕이 기겁을 하는데, 왜냐하면 문둥병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병을 고치겠다는 핑계를 대면서 또 쳐들어와서는 뜯어가려고 하는 수작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 우리 나라의 강물보다 깨끗하지 못하다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정말 병을 고치려고 왔다고 하면서, 엘리사가 있는 곳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런데 엘리사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장군으로 하여금 요단강 강물에 들어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강물을 보니 어떠한가? 그때 나아만 장군이 유명한 말을 하는데, "우리 나라의 강물보다 깨끗하지 못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의식세계에서는 깨끗한 물이 더러운 물보다는 병이 나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누적된, 즉 진리에 의한 축적된 상식이고 효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효과를 보았고 말이다. 

◈ 과학이 맞는가? 토끼가 맞는가?

제가 지금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즉 과학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이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만약에 발전소가 없으면 전기가 어디서 오느냐는 말이다. 전기가 있어서 밤을 낮처럼 환하게 밝힌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학이 맞는데, 달에 토끼가 있는가? 가보니까 없다는 것이다. 달에는 사람을 비롯한 동물이 살 수가 없는데, 공기가 없어서 말이다. 지구에서 보니 도끼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실제로 가보니 절구통도 없고 토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이 맞는가? 토끼가 있다는 주장이 맞는가? 과학이 맞다는 것이다. 그런 "맞다, 맞다, 맞다" 라고 하는 의식세계가 그만 요단강 앞에서, 즉 언약 앞에서 그만 퉁겨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고 싶어도, 이미 과학적으로 진리가 된 것을, 즉 "나도 뭔가를 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것도 우리 인간의 지혜와 문명의 덕분이다" 라고 우기는 순간, 그만 퉁겨 나오고 만다는 것이다.

◈ 요단강에 예수님의 피와 살이 있기에 !!

요단강에 예수님의 피와 살이 있는데, 그런데 거기서 왜 퉁겨 나오는고 하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가 새언약의 완성인데, 그것만 있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퉁겨서 나오는고 하니, 살과 피를 유발시킨 요인이 어디서 나왔는가? 인간의 의식세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메시야다" 라고 하니, 사람들이 "당신이 메시야인가?" 라고 의식적으로 묻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지 못해서 말이다. 인간은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즉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약대로 오셨는데, 하지만 반면에 인간은 언약을 지킬 수 없는 입장에 서있다는 말이다.

언약을 따라서 오신 분에게, 언약에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자들이, 그렇게 서로 '빠방' 하면서 만나게 되었으니, 비언약이 언약을 미워하고 배척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놓여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미워했다는 것, 즉 언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무참하게 짓밟혔다는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 즉 십자가라는 것이다.  

바로 그 십자가를 도로 들이대었는데, 누가 말인가?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말이다. 그러면 엘리사는 왜 마중을 나가지 않았는가? 엘리사가 등장하게 되면, 엘리사가 고친다고 나아만 장군이 오해를 한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병을 잘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엘리사는 병을 고친 적이 없는데, 엘리사를 통해서 주님이 고쳤다는 것이다.

◈ 엘리사는 라디오 !!

여러분, 라디오만 있으면 방송이 나오나요? 먼저 방송국이 있어야 하는데, 라디오만 가지고서 아무리 주파수를 맞추어도 방송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후 4시에 하는 '조영남과 최유라의 쇼'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ㅋㅋ). 어릴 때는 저는 라디오를 뜯고 싶었는데, 사람이 그 안에 들어있는가 싶어서 말이다. 순진했던 그때가 그리운데, 다들 그런 경험이 있지 싶은데 말이다.

(녹취 구 - 저는 그 비싼 전축을 실제로 뜯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트랜지스터가 아닌 진공관으로 만들어서 덩치가 꽤 컸는데 말입니다. 그 뒤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ㅋㅋ)

그러니 엘리사는 라디오인데, 왜 그런 라디오를 믿느냐는 것이다. 성전 미문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 즉 라디오가 2대라는 것이다. 그 현장에 누가 있었는가? 라디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계셨다는 것이다. 즉 주님이 낫게 하셨다는 말이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를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에게 잘 보이면 고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엘리사의 반대말이 주님이고, 주님의 반대말이 엘리사라는 것이다. 즉 엘리사를 믿으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그러니 엘리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주님을 믿는다는 말이다.

결국 엘리사는 나타나지 않고 요단강만 나타났는데, 그렇다면 주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것은 바로 나아만 장군이 배척한 그 여분의 자리에, 즉 "나는 그런 것은 의식세계에서 제외를 시켜놓았어. 나는 상대를 하지 않아" 라고 하는 그 자리에 주님이 계셨다는 것이다.

◈ 십자가 앞에서,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주체성 !!

바로 그것을 아람나라의 강보다도 더 더러운 강물에서 하셨는데,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그만 삐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삐쳤다는 것은, 나아만 장군의 주체성이 저항하고 있다는 것인데, 즉 인간의 모든 주체성은 십자가 앞에서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 저항을 극복하고 믿었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오셔야만 가능한 일인데,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주라고 한다고 해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는 주와 성령이 없는 주가 다르다는 것이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드디어, 의식세계에서 탈출 !!

그것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진짜로 기적인데, 그리고 그것 말고 다른 기적은 없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고 해도, 혹은 찢어지게 가난해도,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하면 모든 게 거기에 합류한 부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가정생활을 그렇게 하는 것도,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은 기적이고 또한 축복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자기 의식세계에서 탈출이 가능하기에 말이다. 즉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 하나님, 제가 어때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 잘난 척을 하고 남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것이 왜 문제가 되는고 하니, 남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주체가 되어버리면, 그런 버릇을 가지고 주님에게도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탄이 하는 짓인데, 즉 "하나님, 제가 어때요?"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말이다. 정작 자기가 예수님을 밟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자기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것을 가지고 폼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40일 금식을 무사히 끝냈는데, 제가 어때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40일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주님을 밟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 다시 복습을 하면 !!

다시 복습을 하면, 의식세계의 끝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신과 동급이 되는데,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에까지 이어지느냐는 말이다. 윤리의 끝은 어디인지, 거룩의 끝은 어디인지,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따라잡으려고 자체적인 경쟁이 일어나는데, 상호경쟁에서 상호투쟁이 된다는 것이다. 서로 경쟁하고 서로 투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상호투쟁에서는 결코 이웃사랑이 될 수가 없는데, 강의 처음에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 나의 나와바리를 지켜라 !!

그런 상호투쟁의 사회에서 간단한 아지트를 만드는 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것을 전문용어로 '나와바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게 건설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끼리 하는 말인데, 즉 "어디서 나의 나와바리에서 얼씬거려? 너는 너의 나와바리에 가란 말이야" 라고 말이다.

일종의 자기 영역표시인데, 그런데 따지고 보면 모두가 그러한데, 자기 나와바리를 사수하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왜 노동자들이 데모를 하는가?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서로 다툼이 있는가? 모두가 자기의 나와바리를 지키려고 그렇게 하는데, 그런 것들이 모여서 이 세상을 이루는데 말이다.

그러면 그것이 과연 주님의 나라인가? 우리가 가고자 하는 세계가 그런 곳인가? 자기의 나와바리를 경쟁하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이 지긋지긋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천국이 왔지만, 우리가 천국이 가기 이전에 이 땅에서부터 이미 의식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즉 영적 세계로, 언약의 세계로 넘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 고맙게도 문둥병에 걸림으로서 !!

그런데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나아만 장군에게 문둥병에 걸리게 하셔서, 물론 나아만 장군은 처음에는 고마운 줄을 몰랐는데, 오히려 재수가 없다고 여겼는데 말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때 문둥병자가 되지 않고 강도가 되지 않고 창기가 되지 않았다고 하면, 멀쩡한 채로 지옥으로 가서 영원한 불 가운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갈 뻔했다는 것이다. 물 한 방울을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성도가 받은 복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데, 소름이 다 돋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되어서 나아만 장군이 삐쳤는데,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부하들이 간청하기를, "여기까지 왔는데, 이왕 왔으면 한 번 해보기나 합시다. 누구처럼 성질도 참 급하네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단강에 들어가는데, 6번을 들어가도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저도 지금 손톱에 무좀이 생겨서 약을 여러 번 발랐는데,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만 바를지를 생각 중인데 말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발라보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언약이 어떻게 역사할지 모르기에 말이다. 사실은 남은 약이 아까워서 그렇지만 말이다(ㅋㅋ).

그런데 7번째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니 그만 깨끗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가 문둥병에 걸리지 않았던 과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기적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 옛날 자리로 돌아갔다가는 큰일이 날 뻔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의식의 세계에서 지금 흠이 생겼다고 하면, 그러면 소망이 무엇인가? 흠이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인데 말이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고맙다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왔는데, 그런데 막상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자기의 그 옛날 자리가 얼마나 위험한 자리였는가를 깨닫고는 두 번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 모든 것을 언약의 땅으로 !!

그래서 고침을 받은 나아만 장군은 어떻게 하는가? 아예 자기가 딛고 있는 그 땅을 아람 나라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이스라엘의 언약의 땅으로 바꾸어 버린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기념으로 이스라엘 땅의 흙을 들고 가서는, 아람 나라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더라도 이스라엘에서 섬긴 것으로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잘 몰라서 아람 나라에서 다른 신을 언급한다고 해도, 그 신이 그 신이 아니라, 그것은 의미가 없고, 그분이 자기를 이렇게 다른 세계인 언약의 세계에 넣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임을, 그것을 미리 당겨서 알게 해달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나아만 장군과 게하시 !!

그러면 여기서 제가 질문을 던지겠는데, 나아만 장군이 병을 고쳤는가? 아니면 그 병을 누가 가지고 갔는가? 고친 것이 아니라 누가 가지고 갔는데, 그러면 그 문둥병을 누가 가지고 갔는가?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가 그만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의식세계에서는 남들에게 밑지지 않기 위해서는, 즉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즉 그래도 재산이 좀 있어야 행세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이 올 때 보니,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그게 상식인데, 빈손으로 올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게하시는 거기에 그만 시선이 자꾸 꽂힌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 스승인 엘리사가 분위기 파악도 하지 못하고 그것을 받지 않는데, 그것을 도로 나아만 장군이 가지고 가면 평생 후회를 할 것만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 몰래 가서 그것을 가로챈다는 것이다. 자기 스승이 달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게하시가 엘리사와 너무 붙어 있다가보니, 바깥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몰랐는데, 얼마나 개떡같은 세상인지 말이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행세하는 그 세계가 그만 그리워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금 자기 세계는 그만 허무해지고 말이다. 그래서 그 세계에서 행세를 하는 그 물품을 자기 세계로 가지고 오는 동시에, 그만 문둥병도 같이 가지고 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평생토록 말이다.

◈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해주는 이방나라들 !!

그것을 성경에서 왜 언급하는고 하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입장이 바로, 즉 이스라엘이 왜 아람 나라에게 지배를 받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지배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 이유를 누가 알려주는가? 도리어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을 지적해준다는 것이다. 그것도 여로보암 2세 때 말이다.

그것은 요나의 시대도 마찬가지인데, 그때 북쪽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누가 알려주는가? 그것은 바로 니느웨 성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회개로 인해서 "아하, 우리 이스라엘이 회개를 모르는, 언약의 고귀함을 모르는, 그런 이방나라와 똑같이 되었구나" 라는 것을, 그것을 도리어 이스라엘에게 알려주고, 그들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 성도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 강의에 있어서, 우리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의식이나 무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었다고 하면 우리는 어차피 영적인 존재인데, 이 세상이 인정을 하든 말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그런 영적인 존재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성실함이 아니라 언약인데, 즉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의 피와 살이 어디서 생겼는지 아는가?" 라고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는데, 그러면 그 십자가의 피가 왜 생겼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 때문에 발생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웃사랑을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물론 우리는 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율법은 철수해야 하는가? 그게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 율법의 일부로 가담이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지 못합니다" 라고 하면서 이웃사랑을 다하게 되는 식으로, 그렇게 주님께서는 처리하신다는 말이다. 

◈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것이 곧 이웃사랑 !!

그러면 어떻게 이웃사랑을 하는가?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것이 곧 이웃사랑이란 것이다. 이웃사랑은 곧 율법인데, 이 이웃사랑을 5가지로 나누면, 그게 십계명에 나오는데 말이다. 즉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지니라. 간음하지도 말지니라. 도적질하지도 말지니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도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라고, 뒤의 두 개는 하나로 보면 되고 말이다. 

이러한 이웃사랑과 내적 할례가, 즉 마음의 할례가 하나로 만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하지 못했는데, 이웃사랑도 그렇지만 마음의 할례를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마음을 칼로 짼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니 말이다. 

◈ 언약의 세계에 그만 '풍덩' !!

이게 분명히 모세언약에 속하는데, 십계명이 모세언약이란 말이다. 그렇게 언약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바깥에 있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영적 존재인 우리를 언약적으로 다루어서, 즉 모든 일을 다 이루신 주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게 되면, 우리는 그때부터 이 세상에서 이웃사랑을 하고 마음을 할례를 하는, 그러한 세계에 그만 풍덩 들어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불은 주님만 견딜 수 있는데, 그런데 그 불 속에 누구도 들어갔는가? 다니엘의 세 친구가 들어갔는데,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소망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오히려 이제 죽었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라는 것은 언약인데, 그것을 알기는 아는데, 그런데 그것을 의식세계에서 지키게 되면 자기가 그만 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사탄이 원했던 바인데, 그러니 지키려고 하면 신이 되고, 그냥 있으면 지키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못 지키면 지옥에 가는데, 그러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세계를 그만 칼로 째버리는데, 즉 할례를 행하신다는 말이다. 즉 우리의 영적인 세계를 주인공이 되신 예수님이 그만 손을 대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자기 전개 !!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아만 장군에게 문둥병에 걸리게 하시고, 또한 어린 소녀의 말을 듣게 하시고, 여로보암 왕을 만나게 하시고, 그 다음에 요단강 앞에 서게 하시고, 그리고 삐치게 만드시고, 그렇게 삐치고 있는데 한 번 해보자고 해서 해보게 하시고, 막상 강에 들어가니 낫게 하시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소급해서 보면, 나아만 장군의 경우에는 자기가 문둥병에 걸린 것을 비롯해서 아예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진행된 예수님의 자기 전개라는 것이다. 즉 중보자의 자기 전개로 인한 그 증거물이 바로 나아만 장군 자신이 되고, 그것이 바로 나아만 장군의 존재 이유가 된다는 말이다.

◈ 이방나라의 백성들에게 언약적인 효과가 !!

사실은 이방인인 나아만 장군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존재이유인데,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나라의 백성들에게 그만 언약적인 효과가 나타나 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왔는데, 즉 "이웃을 사랑하라.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라고 말이다. 우리의 첫째 반응은 무엇인가?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에 가야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살과 피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받게 하셨다고 하면,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 이웃사랑과 마음의 할례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 구제가 사람을 망친다 !!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이 이웃사랑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웃사랑인가?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말이다(ㅋㅋ).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이것을 제가 20년 전부터 외쳤다는 것이다. 구제가 사람을 망친다고 말이다.

어설픈 동정이 그만 사람을 완전히 버려놓는데, 그런 사람을 도와주면 더욱 더 돈에 얽매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자식 사랑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곧 자식 사랑이라는 것이다(아멘). 물론 자식은 돈만 원하겠지만 말이다.

◈ 이웃사랑의 원조는 예수님 !!

이것이 곧 이웃사랑인데, 그러니 이웃사랑의 원조가 누구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즉 "너희들은 돈을 원하지만, 내가 줄 것은 피밖에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 때 잘살래? 아니면 영원히 잘살래?"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웃사랑이라는 것이다. 

"니가 강도가 되어도 좋고 거지가 되어도 좋고 창기가 되어도 좋으니, 제발 지옥에는 가지 마라" 라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이웃사랑이라는 것이다. "탕자야, 돈을 다 날렸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가 있잖아"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웃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잔치를 벌리는데, 어떤 잔치인가? 탕자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 그런 아버지의 세계를 이제 자기 아들이 알게 되었는데, 아버지로서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풍악을 울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르는데, 아버지의 기쁨이 무엇인가? 아버지의 세계를 몰랐던 자에게 알게 하는 기쁨, 그것이 바로 이웃사랑에 나오는 주님의 기쁨이라는 말이다.

◈ 이제 끝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

이제 끝으로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이웃사랑이 성립되지 못하는 세상인데, 즉 지옥과 같은 세상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 우리를 살게 하신 것도 주님이 허락하신 사랑이고 배려라는 것이다. 사탄이 이렇게 돌아다니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그래서 남들이 잘한다고 하면 그것에 장단을 맞추어서 좋은 줄로 알고, 그리고 남들이 못한다고 하면 그저 죽으려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남들의 장단에 같이 놀아나는 우리를, 그런데 이제는 주님의 기쁨에 놀아나는 천국의 백성으로, 그게 숨겨진 나라인데 말이다.

우리가 망가지지 않았으면, 즉 마음의 할례를 받아서 찢어지지 않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세계,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세계, 그야말로 기가 막힌 세계, 죽어도 좋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세계, 이미 주님이 먼저 가 계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가 있는 세계, 바로 그 세계를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오늘도 주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찢고 찢으면서, 그렇게 내적 할례를 행하시면서,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이렇게 행세께나 하는 이 세계보다 더 낫다고 하는 것을, 그것을 사랑으로서 우리에게 매일같이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돈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짐승 같은 세계가 전부인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우리가 감히 영적인 존재임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언약에 의해서 완성된, 그리스도를 위한 세계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영적인 세계에서 주신 하나님의 의와 죄 사함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으면서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7,5 새벽 1시에 마침.

                               찾아온 이웃에게 돈을 주지 않는 이웃사랑이 참 편리하고 좋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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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5: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왕하 5: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왕하 5:3)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왕하 5: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왕하 5:5) 아람 왕이 가로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왕하 5: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
(왕하 5: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 줄 알라 하니라
(왕하 5: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왕하 5: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왕하 5: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왕하 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왕하 5:12)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왕하 5: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왕하 5: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 5:15)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왕하 5:16) 가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
(왕하 5:17)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왕하 5:18) 오직 한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왕하 5:19)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평안히 가라 저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진행하니라
(왕하 5: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
(왕하 5: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왕하 5:22)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왕하 5:23)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왕하 5:24) 언덕에 이르러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저희를 보내어 가게 한 후
(왕하 5:25)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왕하 5:26)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왕하 5: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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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이기적 유전자' 내용 좀 가르쳐 주세요.
* 답변 - 이거 제가 학교 독서시험 때문에 정리해 놓은 거라서 인터넷 어디에도 없습니다. 잘 쓰세요.
이기적 유전자는 1976년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리차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로부터 불거져 나왔다. 우선 이 이기적 유전자의 핵심 내용은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 라는 데 있다. 그는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존의 원칙에 의해서 존재를 영위한다고 주장하며 자기 본존은 자기복제를 의미하고 자기 복제는 유전자의 기능에 의존한다고 기술하였다.
생명체의 기본 단위는 어디까지나 유전자이고, 세포는 유전자의 화학 공장이고, 인간의 몸은 유전자의 몸체일 뿐이다. 유전자는 컴퓨터의 프로그램 작성자처럼 간접적으로 자기의 생존 기계인 우리의 행동을 제어한다. 그것들은 생존 기계의 체제를 미리 만들고 개체로 독립시킨 후 그 행동을 조종한다.
더킨스는 유전자 수준에 있어 "이타주의는 악이고 이기주의는 선이다"라고 주장한다. 개체의 수준에서는 이타주의로 나타나 보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전자가 자기의 숫자를 최대한으로 증식시키기 위한 계산된 이기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근친도라는 지표를 통해서 측정할 수 있다. 근친도는 2인의 친족이 1개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확률을 나타낸다. 2인의 형제간의 경우,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절반을 다른 사람도 공유하고 있으므로 그 근친도는 1/2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수고는 혈연 이타주의의 특수한 예일 뿐이다. 갓난아기인 동생이 고아가 됐을 경우에도 누나는 이 어린 동생을 자기의 친자식처럼 열심히 돌보아 준다. 왜냐 하면 그의 근친도가 부모와 똑같이 1/2이기 때문이다. 부모 자식 관계가 형제 자매 관계에 비해 '유전적'으로 특별한 것이 없다.
성선설의 맹자는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를 위할 줄 알고 형제를 공경할 줄 안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또한 도킨스에 의하면 "나"라는 존재에서 부모가 가깝고 형제가 가깝기 때문이라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는 부모의 입안에 든 음식도 종종 손으로 뺏어 먹으며.. 젖을 먹고있는데 형이 다가오면 밀쳐 내기도 한다. 이는 분명 어린아이 입장에서 나 >부모> 형제>이웃의 순으로 차등관계가 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왜 이런 차등관계가 지어질까? 이러한 유전자의 자기 본위적인 이기적 성향은 곧 바로 인간의 성향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위주로 사고하고 자기위주로 행동한다. 이기적인 개체는 이타적인 개체보다 더 살아남기 쉽다. 어찌보면 모순이지만 여기서의 이타적이란 자기 유전자의 보존과 상관이 없는 개체를 돕는다는 말이 된다. 물론 우리 유전자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바탕으로 한 근친도 계산에 의한 이타주의는 행해지고 있다.
왜 유전자가 이렇게 이기적이게 되었을까?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이 유전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복제자를 널리 퍼뜨리려고 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체는 유전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움직이는 하나의 기계라고 가정한다. 유전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복제자를 널리 퍼뜨리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자신의 복제자를 퍼뜨리기 위해서 생존 확률이 더 높아야 하고, 더 잘 생존하려면 이기적으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자손이 후세까지 널리 번영하기를 바라고, 옛날에 가장 큰벌중 하나가 삼대를 멸하는 벌이라는 점을 보아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의 본성도 이기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배우자간도 마찬가지로 대립의 관계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들이 자식들에게 투자한 50%의 유전자의 복리에 우선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서로 협력하여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그것이 양자 모두에게 유리하기 때문일 뿐이다. 사실상 이기적인 개체는 가능한 한 많은 이성과 교미하고 자식 양육은 모두 상대에게 떠맡겨지기를 바라고 있다. 사회생물학은 성적인 협력을 이와 같은 상호 불신과 상호 착취의 관계로서 파악한다. 개개의 생물체는 이기적인 유전자들의 이익을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기계이다. 그들의 최대의 전술은 파트너가 자식들에게 공평한 분담량 이상의 투자를 하도록 만들고, 자기는 그 사이에 다른 파트너와 새로운 자식을 얻는다는 수법이다. 그러나 어미가 자식을 아비에게 맡기고 다른 수컷을 찾아 도망치는 전술을 취하면 아비 편에서도 자식을 버린다는 식으로 보복한다. 새로운 배우자를 취한 직후, 의붓자식일 가능성이 있는 자식은 모두 죽여 버리는 수컷들이 실제로 있다. 동물의 경우 쥐의 경우 수컷이 분비하는 어떤 화학물질을 암컷이 맡으면 다른 배우자의 태아를 임신하였을 경우 유산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수컷의 쥐는 이 방법으로 의붓자식일 가능성이 있는 태아를 죽이고 새로운 암컷이 자신의 구애에 응해 주도록 요구한다. 또한 수사자가 무리에 새로이 끼게 되면 그는 거기에 있는 새끼를 모두 죽여 버리는 수가 있다.
개미 또는 꿀벌과 같은 그룹에서 여왕을 위해 일벌레들이 행하는 희생적인 봉사를 보통 이타주의의 표본으로 꼽는다. 그러나 유전자의 수준에서 보면, 이것은 이기적 유전자의 대표적인 한 예에 불과하다. 오히려 일벌레는 번식충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사육하고 있다. 일벌레는 번식충이 자기들의 몸 속에 있는 유전자의 복제물을 더 많이 증식하도록 조작한다. 실제로 일벌레들 서로간의 근친도가 여왕과의 그것보다 높다. 여왕은 젊어서 결혼 비행을 한 번 하고, 그 때에 저장한 정자로 나머지 전 생애에 걸쳐 애낳기를 수행한다. 암놈은 정자를 일정량 방출하여 수란관을 통과하는 알을 수정시킨다. 그러나 모든 알이 수정되는 것은 아니다. 미수정란이 발육하면 수놈으로 된다(수놈에게는 아비가 없다). 반면에 벌목의 암놈은 보통의 동물과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모친과 공유하는 유전자의 확률은 50%이고, 부친과 공유하는 확률은 100%이다. 유전자의 사본을 생산하기 위해 일벌레는 스스로 그 일을 하기보다 더욱 효율이 좋은 어미를 그들의 유전자 사본의 생산자로 양식하고 있다.
<'밈(새로운 자기 복제자)' 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 책에서 내가 처음 접한 개념이 '밈' 이라는 개념이다. 이 밈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모든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는 특성이라는 점과 다르게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특성이다. 이 밈은 문화와 비슷하게 보일 거 같은데,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곡조나 사상, 표어, 의복의 양식, 단지 만드는 법, 아치 건조법 등이 모두 밈의 예이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번식함에 있어서 정자나 난자를 운반체로 하여 몸에서 몸으로 날아다니는 것과 같이 밈이 밈 풀 내에서 번식할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과정을 매개로 하여 뇌에서 뇌로 건너다니는 것이다. 나의 뇌는 그 밈의 번식용의 운반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밈이 인간의 본성과 어떠한 관계가 있냐 하면은, 밈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된다. 예를 들어 '착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하나의 밈만 해도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고, 이 밈은 자신의 복제자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 실제로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되고, 그러한 행동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 네이버의 질문과 답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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