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5. 7. 24) 17-1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갔습니다. 돼지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귀신이 들어와서 다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된 원인을 찾지요. 이것을 ‘시선’이라고 합니다. 내가 보는 시선이 현실을 해석해요. 내가 키우던 돼지가 죽었다. 이런 손실을 입힌 자가 누구인가? 예수님이 나에게 이런 손실을 입혔다.
지금 이 현실이 돼지 주인들에게는 좋은 현실입니까, 나쁜 현실입니까? 나쁜 현실이죠. 이처럼 현실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가치에 의해서 현실을 규정하는데 이것이 나의 시선입니다. 성경에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것은 ‘너희들이 예수님의 시선을 아는가?’라고 묻는 겁니다.
우리가 고수하는 것은 ‘내가 바라본 예수’인데, 이것은 나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십자가 사건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지요. 다른 사람을 내가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은 큰 의미가 없어요. ‘나는 미국을 이렇게 본다.’ 괜찮아요. 이 모든 것은 나의 시선입니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볼 거야. 관여하지 마!’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시선을 보낼 때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해.’ 라고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누락시키고 하나님을 보기에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빠진 시선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상태라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귀신을 쫓아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시선을 고수하다보니 귀신이 나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한 의미를 두지 않는 겁니다. 누가 귀신을 보냈느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내 돼지가 바다에 빠졌다고 분통을 터드리죠. 17절에 “저희가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고 했어요.
제가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떠난 현장에는 어떤 현실이 남을까요? 자기 시선으로 바라본 자기 현실만 남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찾아왔다가 떠나가는 분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예수님이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나중에 알게 됩니다.
잠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예수님이 떠나가시지요. 왔다가 사라져 버리죠. 그 다음에 보세요. 그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겠습니까? 안 믿습니다. 왜냐? 그 사람들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 예수 믿습니까?” “예, 예수 믿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봤습니까?” 이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적당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적당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에서 억지로 답변을 끄집어내게 되면 그 답변은 본인이 생각해도 궁색합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을 봤다.’는 말은, 나의 시선이 출발해서 보게 되면 ‘내가 믿는다.’가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본다. 보인다. 믿는다.’ 1) 본다. 2) 보인다. 3) 믿는다. 이 셋이 현실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이 누락되었습니까? 십자가. 십자가가 누락되면 이것은 귀신들린 자입니다.
마귀의 작전은 보는 것을 믿게 함으로 예수님을 못 믿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9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 믿지?” 이런 염려하지 마세요. 예수님 시선에서만 그 말이 타당해요.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 말씀을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 받는가? 내가 소경인 것을 받아들이면 돼요. 예수님이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실 때 우리는 “제가 죄인입니다.”하고 나서면 됩니다. 그래서 세리가 의인 되었잖아요. 그런데 옆에 있는 바리새인은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이 바리새인은 인생 최대를 실수를 했어요. 천국 가는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지옥갈 수밖에 없잖아요.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어요. 지옥 갈 사람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천국 보내는 사람이 지옥 갈 사람으로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고,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 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를 보고 지옥 갈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 판단 근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천국 갈 사람인데, 너는 나처럼 행하지 않으니까 지옥 간다.’는 거예요. 바리새인의 시선은 자기로부터 출발한 시선입니다. 자기로부터 출발한 시선이 또 있어요.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고,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고, 그에 대해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되물어요. 이에 대한 예수님 답변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청년을 근심하며 떠나지요.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 중 자신의 것을 가지고 오는 사람은 예수님이 반기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온 사람만 주께서 반깁니다. 예를 들면, 욥이 언제 인간 되는가 하면, 욥이 하나님께 상처를 받을 때 인간이 됩니다. 개구리와 인간의 차이점이 뭡니까? 개구리는 상처를 줘도 하나님의 형상이 안 나와요. 그런데 성도는 하나님이 상처를 주시면 “주여!”하면서 주님을 찾게 됩니다.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상처를 “주님이 주신 상처입니다.”라고 가지고 나오는 사람을 주께서 받아주십니다. 이것은 인간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남긴 상처를 주님이 회수하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나는 죄인이다.’라는 것이 단정되었을 경우에만 ‘피’가 됩니다.
히브리인이 죄인일 때 피를 바름으로 살았습니다. 피가 없으면 애굽인, 히브리인 가리지 않고 다 죽습니다. 주님은 약속에 의해 죄인이란 사실을 규정하기 위해서 피를 발라요. ‘우리는 너무나 못난 자들이기에 약속의 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전제로 피를 바른 거예요.
히브리인들이 여호와를 믿고 애굽인들은 여호와를 안 믿은 이유가 뭡니까? 애굽인들에게는 자신의 신들이 있었어요. 그 신들은 누구의 시선에서 납득이 됩니까? 그 신은 우상인데, 우상은 인간의 시선으로 납득이 됩니다. 시선, 보인다는 말은 존재하고 있다는 거예요. 존재하는 나에게 보이니까 그 보이는 것을 믿는 거예요.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신도 존재해. 신의 존재를 나는 믿는다. 그래서 믿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시선은 약속에서 나오는데, 여호와는 보이지 않는 신이에요. 보여주면서 못 보게 하는 방식으로 보여주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이런 식이었어요.
두 제자와 나란히 예수님이 대화를 나누며 길을 갔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봤어요. 왜냐? 예전에 자신들이 알았던 예수님이 아니에요. 지금의 예수님은 부활하신 모습인데, 그 전에는 죽음이 있었어요.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은, 부활 전 세계를 죽음으로 간주합니다. 왜? 본인은 죽음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이지요.
공무원 시험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을 했습니다. 합격 후에 예전 자신이 공부했던 노량진에 찾아갔습니다. 합격한 사람의 입장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은 합격자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네가 합격하려면 이런 식으로 공부하고 이런 문제를 풀어야 돼.”라고 조언을 할 수 있지요.
이 말은, 본인은 이미 합격했다는 이야기잖아요. 예수님은 죽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를 대할 때 “너는 죽었는데, 살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말씀만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다른 말씀은 안 합니다. 그런데 꼭 합격되지 않은 인간들이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이렇게 하면 건강을 회복하고, 이렇게 하면 부자 됩니다.”라고 하지요. 속지 마세요.
합격하신 주님은 그런 것은 시험에 안 나온다고 했어요. 좋은 상대 만나서 결혼하는 것, 가족 화목한 것, 건강한 것, 이런 것은 합격의 요소가 아닙니다. 천국 갈 요소가 아니라니까요. 딸을 낳는가, 아들을 낳는가? 이것은 천국 갈 요소와 무관한 거예요. TV를 보면 전부 영생과 무관한 이야기들만 해요. 국제 기름 값이 51달러로 내린다. 서울 집값이 2% 올랐다. 이런 것은 영생과 관계없는 말들입니다.
영생과 관계없는 것을 예수님이 이야기하면서 ‘영생과 관계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관심 두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 시선과 주님의 시선을 비교해 보는데 차이가 너무 커요.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가 나와요. 이 말씀이 어렵습니까? 유치원 아이가 들어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씨를 먹었다.’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이잖아요. ‘씨가 돌밭에 떨어져 뿌리가 제대로 내리지 못했다.’ 또 ‘어떤 씨는 옥토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예수님이 물으셨는데, 묻는 분이 이상합니다. 뭐가 어렵다고 이것을 묻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천국과 연결시킵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라고 하시면서.
지금 마가복음 5장을 공부하고 있는데, 분명히 현실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지요?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가서 돼지들이 물에 빠져 죽었잖아요. 그러면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귀신이 나갔다’는 것에 포인트를 잡아야 하는데, 돼지 주인들은 ‘내 재산 바다에 다 잃었다’는 것에 포인트를 잡습니다.
그래서 돼지 주인들은 예수님께 “우리 동네에서 나가주세요.”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을 쫓아 내셨는데, 그 이후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잠시 예수님이 다녀갔던 상황인데, 이제는 예수님이 없지요. 지금까지 이것을 설명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잠시 만났지만 헤어졌지요.
이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 또는 “예수님을 봤어”라고 할 때, 다른 제자들은 “우리는 네 말을 못 믿겠다. 우리는 안 봤어.” 이렇게 나오겠지요. ‘나는 보았다.’고 하면 시선이 누구에게서 나옵니까? 나로부터 시선이 나와서 “나는 보았다.”는 것이고, 보았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나는 그것을 믿는다.’ 이렇게 되겠지요.
‘나는 본다, 보인다, 그래서 믿는다.’고 했을 때 이 믿음이 믿음입니까? 이것은 예수님께 “우리 동네에서 나가주세요.”하는 사람들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자 하지요. 예수님을 믿으려면 ‘나는 본다, 보인다, 그래서 믿는다.’는 이 체제가 허물어져야 돼요.
이 말은,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못 받아요. ‘예수님을 믿는다.’ 앞에 ‘내가’를 넣으면 안 돼요. ‘주님이 예수를 믿게 했다. 나를.’ 이런 식으로 뒤에 ‘나’를 집어넣어야 해요. 그래서 이렇게 돼요. 주님께서 나를 뒤에 집어넣기 위해서 내가 믿는 믿음을 날마다 없애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안 되고, ‘예수님이 나를 믿게 하셨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순서가 있어요. ‘나는 예수 믿어서 예수님께 깨어졌어. 그 후 예수님이 나를 믿게 하셨어.’ 이게 7월 15일 상황이라면, 7월 16일에는 ‘예수님이 나에게 믿게 해서 내가 믿었는데 그런 나를 또 주께서 깨어버렸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복잡한데, 이것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미래에 나는 예수를 믿었다.’이렇게 돼요. 왜냐? 이 작업이 사후적으로 가게 되면 미래를 위하여 처음부터 일을 시작하신 분이 중간중간 나에게 그 일을 실시했다는 것을 미래에 가면 총괄적으로 파악이 되니까요. 그 미래가 앞당겨 나에게 주어집니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가 있을 뿐 현재는 없습니다. 현재는 주님이 쥐고 있어요. 현재 속에 우리의 미래와 과거가 다 들어있어요. ‘미래에 너는 구원 받는다.’는 것을 현재에 집어넣는 역할을 성령이 하십니다. 성령은 육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지금 믿는다.’가 아니라 ‘미래에 믿었다.’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미래에 계신 분이 처음부터 시작해서 미래까지 이끌고 가고 있는 것이 현재 일입니다. 미래에서 과거에 한 일이 지금 현재의 일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나를 미래에 밀어 넣는 일이 아니고, 미래에 가도 그것이 현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시선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나의 시선으로 출발해서 주님의 시선으로 바꾸죠. 나의 시선으로 출발하면 ‘내가 예수를 믿었다.’가 되지요. 그런데 이것을 주께서 주님의 시선으로 바꾸면 ‘주님이 나에게 믿게 하셨다.’가 됩니다. 믿게 하시는데 그 절차 가운데 하나가 귀신을 추방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면 귀신 쫓아내지 않고 구원되는 일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은 다 귀신이 나간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근거해서. 여러분들에게서 나간 귀신에 돼지에게 들어갔는지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나간 것은 분명합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않고 예수 믿는 방법은 없어요. 이것의 일반적 모델로 본문의 청년이 등장한 거예요.
그러면 귀신 일곱이 들어가는 것이 힘들까요, 2,000이 들어가는 것이 힘들까요? 그 숫자가 상관이 없습니다. 아들이 “엄마, 큰 암소가 내 마음에 들어왔어요.”라고 한다면, 엄마가 묻지요. “그 암소가 얼마나 큰데?” “나보다 더 커.” “너보다 더 큰 것이 어떻게 너 속에 들어가?”
나 보다 더 큰 것이 어찌 나에게 들어올 수 있습니까? 그러면 아들이 말을 잘 못한 것입니까? 아니면 엄마가 질문을 잘 못한 것입니까? 그러면 엄마가 어떻게 질문해야 됩니까? 상당히 난해한 문제지요. 마음이란 크기에 상관없습니다. 크기에 상관없으면 크다, 작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청년의 몸에 2,000의 귀신이 들어왔으니까 얼마나 비좁겠어요? 나의 시선에 의한 몸은 크다, 작다가 됩니다. 그런데 이 몸을 주님 시선으로 본다면 귀신 2,000이 아니라 2만도 들어올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이 몸을 내 몸으로 여기면 정신과 몸 사이에서 언어적 모순이 발생됩니다.
내 마음에 암소가 들어왔는데 그 암소가 내 몸보다 더 크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산이 뽑혀 바다에 빠진다.’고 할 때 제자들은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는 물었고, 예수님은 ‘너는 아직도 너의 시선으로 너의 현실은 고수하고 있구나.’라는 식으로 답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내 몸이든 산이든 바다든 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주님의 소유라면 주님의 몸은 이 우주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합니까? 주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다는 생각을 왜 못해요? 이것을 제가 수요일 설교에서 ‘허공에 떠 있는 컴퓨터 화면’이라고 표현했어요. 집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 말고, 허공에 창이 떠서 손짓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있어요.
이처럼 지금 천국이 공중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고수하다 보니 ‘이 몸이 죽어서 천국에 어떻게 들어가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런 생각에서 나온 천국은 귀신에게 장악된 자의 이미지에 불과해요. 이 귀신이 나가야 됩니다.
내 몸은 주가 값으로 산 것이기에 주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앞에 ‘내’가 붙어 있으면 안 돼요. 근심, 걱정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근심해도 주님이 근심하고, 걱정해도 주님이 걱정하지 내가 왜 걱정합니까? 그래서 신앙에 가장 방해되는 요소가 바로 행함입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했을 때 받은 구원도 무효가 되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태산입니다.
대구 강의 때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함의 끝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예수 믿어도 나쁜 행동 했을 때 지옥 간다는 걱정이 다시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분명히 심판 때는 행함에 묶여 있는 사람은 전부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구원 받는 사람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책은 미래의 책입니다. 여기서는 일체 인간의 행함을 묻지 않습니다. 왜냐?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모든 성도의 행함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현재로 나에게 집어넣어준 행함이거든요. 예수님의 행함이란 말이지요.
예수님의 행함은 나의 시선을 주님의 시선으로 바꿉니다. 내가 포도를 먹는다면, 포도를 먹게 하신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주님이 먹게 하신 거예요. 나는 그냥 주께서 먹여주셔서 먹은 것뿐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은, 포도를 먹으면서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한 후에 먹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모든 시작과 모든 시선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주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런 생각이 머리가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해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 시선에 메인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지요. 다시 말합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방해되는 것은 내가 행동이 게으르고 성경도 보기 싫고 기도도 하기 싫을 때, ‘이러다가 내가 천국과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주께서 성경을 보기 싫게 해서 안 봤는데, 본인은 자신이 성경이 보기 싫어서 안 봤다는 거예요. 겸손해 보이지만 자기 시선을 고수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뭐냐? ‘내가 주님 말씀대로 안 살면 천국에서 탈락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지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나의 현실이 없습니다.
내 컴퓨터는 내가 한 작업이지만 허공에 떠있는 창은 전부 주님의 언약에 따라 움직입니다. 내 현실은 없어요. 몇 월 며칠 누구는 죽어야 하고, 누구는 죽는 것처럼 보이다가 살아나고. 이 모든 것을 주께서는 다 아십니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주님 허락이 있어야 떨어지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노무현씨가 부엉이 바위에서 죽을 때도 주님 허락이 있어서 떨어진 거예요. 부인되시는 분이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허락 때문인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운동하고 몸을 관리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허락 없이는 어떤 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5장의 귀신 쫓아내는 이야기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모든 인간은 자기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이 나갔으면 시선이 바뀝니다. 어떻게? ‘주님이여, 돼지 없어도 좋으니까 주님 저와 함께 있어 주십시오.’ 이렇게 나옵니다.
17절과 18절이 대조가 되지요. 17절은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고, 18절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합니다. 이 청년이 과거에 2,000귀신이 들렸다는 것도 본인의 잘못이 아니고 주께서 잠시 귀신 들게 했다가 빼내주신 거지요. 그러니까 일종의 그림 그리는 도화지죠.
화가가 어떤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고 다른 그림을 그렸지요. 그런데 종이가 “전에는 도자기 그렸다가 왜 이번에는 화분을 그립니까?” 이렇게 대들 필요 없어요. 그것은 그림 그리는 화가 마음대로 그리는 겁니다. 주께서는 귀신 주고, 귀신 쫓아내고 그런 가운데 “너는 내가 사용하는 피조물이다.”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욥 이야기하면서 주님은 자기가 남긴 상처만 회수한다고 했지요. 욥에게 상처를 줌으로 욥이 인간이 돼요. “주님이 그렇게 했지요.”라는 반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개구리와 인간의 차이라고 했잖아요. 욥은 ‘주께서 하셨다’는 고백이 나오는데, 사람이 아닌 자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이처럼 하나님이 하셨다는 반응이 없을 때, 하나님이 회수할 것이 없을 때 그 사람은 짐승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던져 봐서 “내가 왜 죄인인데?” 이렇게 나오는 그는 사람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군요.”하게 되면 “이것은 당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입니다.”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의 입장에서 실로암 못은 전에 아무 상관이 없었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와서 소경된 자와 실로암 못을 연관을 시켰지요.
실로암의 뜻이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갑자기 소경 된 이유가 생겨버렸어요. 뭡니까?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는 거예요. 어떻게 소경에서 눈을 떴는데, 눈 뜨게 하신 분을 몰라요. 그러니 여전히 소경이죠. 나중에 예수를 믿게 되니까 소경이라도 예수 믿으면 소경 아니라는 것을, 주께서 이 사람이 소경에서 눈을 뜨는 과정 속에 양쪽 다를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소경이라도 나를 믿는 사람은 소경 아니다.’ 라는 것을 이 사람을 통해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이 그림 그리는 도화지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19-20절에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여기에 “기이히 여기더라.”는 말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 당시 병 고친다고 인기 있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 기이히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 중요한 분이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병 나은 사람이 자신의 놀라운 일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고 합니다.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이 사람이 설명을 어떻게 합니까? 소상하게 납득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합니까? 아니에요. 그냥 “내가 귀신 들렸는데 주님이 그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이야기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의 주체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주체였는데 지금은 예수님으로 주체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이 기이히 여긴다는 것은 아직도 그 이야기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인공은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모든 사건은 장차 십자가가 합류하고 있는 의미를 미리 앞당겨 사건화 시킨 거예요. 십자가가 있다면, 십자가의 그림자를 사건화 시킨 겁니다. 이 그림자 속에 귀신 쫓아내는 일이 있었지요.
귀신 쫓아내는 일을 제가 무엇으로 설명했습니까? ‘시선 바꾸기’라고 했지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나로부터 출발한 시선을 주님으로 바뀌었지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체 바꾸기’입니다. 주체가 바뀌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내 속에 주께서 남기신 것이 있고, 주님은 내가 예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자신이 남긴 것을 회수하는데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사랑하지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 것을 회수하다보니 우리는 딸려가는 겁니다. 이것의 예를, 주일 설교에서 치과 이야기를 하면서 설명했습니다. 썩은 이에다 심을 2개 박았다고 했지요. 1개 심을 때마다 30만원이에요. 썩은 이 위에 심을 박아요. 그 심 위를 덮어서 온전한 이 모양을 만든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내가 썩은 대상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요. 그러면 죄를 지어서 썩었습니까, 아니면 썩을 수밖에 없어서 썩었습니까? 썩을 수밖에 없어서 썩었지요.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의 대상이 되면 그동안 우리를 죄 짓게 한 것이 마귀였습니다.
마귀, 귀신을 편하게 생각합시다. 이미 우리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에. 삼성 회사에 다니다가 현대 회사로 직장을 바꾸었으면 편하게 이건희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소속이 달라졌으니까요. 마귀는 마귀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내게 보이는 것만 현실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과학입니다.
내가 보는 것만이 전부라고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왜? 나 외에 다른 주체를 상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귀신이 나를 지배한다.’ 귀신 들린 자는 이런 소리를 안 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지 귀신이 왜 관여합니까. 내가 역사를 만들고,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실적도 나에게 주어지지 않고 이게 마귀입니다.
나로부터 출발한 시선을 고수하도록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럼 마귀가 언제 등장합니까? 이런 내 시선이 완전히 무시당하고 주님의 시선으로 나를 다시 보니까 그동안 악마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시선을 주님이 바꾸십니다. 나의 시선을 뭉개고 ‘내가 너에게 십자가 사랑을 심었다.’ 십자가 피를 회수하면서 우리의 시선이 바뀌는 현상,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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