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무늬 (사무엘상 1:1-6) 대전-(사무엘2강)
이근호
2015년 5월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1-6
(1: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술의 현손이더라
(1: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1: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 의 두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께 제사장으로 거기있었더라
(1: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나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 게 하시니
(1: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 민케 하더라
(1: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1장 2절 보겠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엘가나라고 하는 사람은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인데요 레위지파라 함은 전에 이야기했듯이 각 지파마다 흩어져 있어요. 자기 땅이 아니고 더부살이 한다고 생각지 말고 사실은 그 지역이 하나님의 축복을 유지하는 일종의 책임자이지요.
왜냐하면 레위지파를 통해서 말씀이 전달되어 지니까 레위지파가 그곳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파견하는 근무자가 그 곳에 근무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요. 모든 땅은 누구의 땅이냐 하면 하나님의 땅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땅이 내 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어느 것이 편합니까?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몸이 내 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의 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의 몸이 되면 편해요. 왜냐하면 사무엘상에 보면 나오지요? 2장에 한나의 기도에 보면 나오잖아요.
(삼상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 시는 도다
(삼상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낮추시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아프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것은 뭐냐하면 이 장치가 무슨 장치이냐 하면 영생주시는 장치 속에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겁니다. 영생 주시는 장치. 하나님을 만나서 영생주시면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건 우리 생각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죽어요.
영생 받을 자격이 안되면 죽습니다. 이 장치는 뭐냐하면 영생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영생 주도록 하는 자격입니다. 비닐하우스라는 것을 보면 쉽지요. 시설 좋은 비닐하우스에 장미를 키운다던지 이런 것을 보면 그 비닐하우스에 연결된 파이프에서 이슬같이 물이 막 나오지요? 시간에 따라 채소나 화훼, 꽃에 물주잖아요?
그 장치처럼 시간에 따라 영생을 준다고 보면 되요. 비닐하우스에서처럼, 그럼 신나지요! 그대신 비닐하우스에 있는 꽃과 채소들은 무엇을 포기해야 하냐하면 내 인생, 내가 키운다는 것을 포기해야 되지요! 이렇게 보시면 되요. 이스라엘의 장치 자체가 영생 주는 장치이다. 이 장치 속에서 하나님의 영생 만들기에 그들이 가담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영생 만들기에 가담이 돼있으면 그러면 영생은 영생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게 문제거든요! 영생을 하는데 있어 생명을 두 종류로 생각하면 되요! 한 종류는 뭐냐하면 신체가 유지되는 것을 사람들은 이것을 생명이라고 하는데 이건 생명이라고 하는 게 아니고 ‘목숨’이라고 합니다. 내 신체가 계속 사는 것, 숨 쉬는 것, 이것은 ‘생명’이 아니고 ‘목숨’이지요.
그럼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겠어요? 생명이 아니고 자기 목숨을 위해 살겠지요? 이거 하면 살겠습니까? 이거하면 밥 먹고 살겠습니까? 바로 이게 예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먼저 가셨잖아요! 광야로 먼저 가셨는데 거기엔 누가 대기하고 있었습니까? 사탄이 있었지요? 사탄이 예수님께 첫 번째로 시험한 것이 뭐냐하면 “네가 살아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에요.
네가 살아야 하나님의 일도 하고 네가 밥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냐? 마귀가 예수님에게 밥 먹고 살아야 된다고 얘기한 것은 예수님뿐만 아니고 예수님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에게 마귀가 그런 식으로 이미 압력을 가해 왔던 방법이에요. 네가 큰일을 하던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선 밥 먹고 사는 게 그게 근본이고 기본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오직 하나 밖에 없지요! 근본적으로 뭐냐하면 내가 살아있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아니요! 라고 나설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마귀에 속하는 거지요. 마귀가 네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네가 사는 목적이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냐 하면 “사람이 사는 것은 밥 먹고 사는, 떡으로 사는 목숨말고 뭐로 사는 게 따로 있다고 했습니까?
‘말씀’에 의해서 얻는 ‘생명’이 따로 있다“는 거지요! 이게 바로 ‘영생’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주려고 왔지 목숨주려고 목숨 유지하라고 오신 분이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는 목숨 끊어진 것을 뭐로 보시냐하면 이것을 ‘쉰다’라고 봐요! 편히 쉬는 것, 또는 편히 잠자는 것, 요즘 현대인들 잠 못자서 난리아닙니까?
잠이 안와요! 잠들 때 까지 양 천마리 세어 봐야 잠이 안와요. 왜 잠이 안와요? 잠 자는 법을 애초부터 인간은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잠은 누가 재워줘야 되지 스스로 잠자는 법을 터득한 게 아니에요. 보통은 건강한 사람이 잠을 잘 자잖아요? 본인이 잠을 잘 자서 자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재워줘서 잠자는 거예요. 잠을 자게 되면서 부터 자기 관리로 부터 끊어 집니다. 그야말로 그 순간은 죽은 겁니다. 내가 나에게 조치할 수 없는 상태가 잠자는 동안입니다.
꿈꾸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겁니까? 내 마음대로 꿈 못꿔요! 꿈을 꿀 때 인간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잠자고 꿈 꿀 때만은 자기로부터 자기 것에 손을 뗄 수밖에 없어요. 처지가. 나는 억척같이 내가 쥐고 있다 해도 잠들어 버리면 자기 손을 떠나 버립니다. 어떤 분들은 말해요. 제 설교 들으면 잠이 잘 온다고,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나의 손길에서 주님의 손길로 이동시키는 방법, 주의 손길로 이동되겠지요? 왜 이동시키느냐 그래서 성경에 보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고 하니 마침 ‘낮’이 우리의 주인공 역할을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주인공인 ‘밤’이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하느냐가 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내 관리를 못할 때 내가 나에게 손을 뗄 때 정말 주인공이 따로 계시다라는 것이 들통나지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그게 뭐냐? 저녁과 아침사이에 네가 한 것이 뭐가 있냐? 없어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세상은 주님 손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생명을 몰라요! 왜? 생명은 전체적으로 있기 때문에 기껏 인간이 챙기는 것은 생명의 일부인 내 목숨만 유지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체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그저 코앞에 있는 것, 내 배 고플 때 밥 먹는 것, 그것이 현실의 전부라고 알고 있어요.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그것도 모르고 철없는 형제간들은 방에서 엄마는 피난살이 꾸리고 있는데 애들은 딱지치기 하면서 “엄마! 형 좀 혼내줘! 내 딱지 뺏아 갔어!”라고 하는 것처럼 코앞에 있는 것 밖에 모르는 거예요. 전체적인 사태가 지금 어떻게 흘러가느냐 전혀 감 못잡고 있고 코앞에 있는 자기 이익, 그 이익만 얻기 위해 형제간에 싸우는 것이 엄마 보기에 얼마나 철없습니까?
그게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아요! 교회가 주님의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복 받아서 여러분의 목숨이 유지됩니다.” 이런 것만 들으려 하고 이런 것만 외치니까 완전! 교회가 매일 석가모니 탄일 같아요! 교회로 자기의 목숨 챙기려 무당 만나러 가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전체가 뭐냐 나를 왜 이렇게 이런 식으로 몰아넣는,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그 분의 진정한 뜻은 무엇이냐 이걸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 목숨이 생명을 가로막고 있다고 언급하는 겁니다. 마귀가 그런 짓을 하지요! 가로 막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가로막는 사람이 여기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 여기서 브닌나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대적, 원수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여기서 한나와 브닌나는 정실과 첩과의 관계지요. 남편 하나에 아내가 둘이니까 그런 관계에요.
그 두 여자가 서로 원수(대적) 관계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남편의 행실이 나쁘다 그런식으로 보시지 말고 이렇게 보세요. 이삭이 아기를 가졌는데 야곱과 에서, 서로 투쟁하는 관계에서 태어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이삭에게 에서와 야곱, 이 두 자식이 있다는 것이 남의 가정의 사소한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했지요?
왜냐하면 두 국민이 나오니까 두 민족으로 나눠진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이삭이라는 사적인 가정에서 나온 그것이 인간 전체 계시를 총괄적으로 압축해서 다 보여주는 거지요. 그 안에 응축해서 다 보여 주는 겁니다. 두 국민이 나오는데 한 국민은 저주받는, 한 국민은 복 받는 그렇게 나오는 원인을 저는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찾는다했지요?
아브라함에게 숨겨져 있던 복과 저주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흘러가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자에게는 저주가 내려지고 숨겨진 축복과 저주가 유일하게 이 지상에서 구체화되는 그런 첫 지점이 뭐냐하면 바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요. 그 아브라함속에 누가 있냐? 이삭이 있고 이삭 속에 야곱과 에서 즉, 축복과 저주가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겁니다. 그 축복과 저주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아브라함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의 속성이 한 쪽은 저주하고 한 쪽은 축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랑의 속성과 반대되는 속성이 있는데 그건 저주하는 속성이에요. 결국 마지막에는 저주하는 속성은 지옥을 형성하고 축복하는 속성은 천국을 형성하게 되지요. 그것을 롬9장에서는 진노와 긍휼의 그릇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을 그릇으로 비유해서 질적으로 딱! 중성이 없어요. 이거 아니면 저거에요.
사랑의 대접 아니면 저주의 대접, 그릇이 얼마나 예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이 담겨 있느냐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겁니다. 요3장에 보면 예수님이 담겨 있으면 축복, 예수님의 복음이 안 담겨 있으면 저주,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판사, 변호사, 검사, 의사라도 상관없어요. 세상 아무리 소프라노 잘 해도 소용없어요.
저주를 담는 사발이에요. 악령이, 세상 신이 함께 있기 때문에 제가 가락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길 했지만 사람이 복음을 안 받아 들이는 것은 그 사람 잘못이 아니라고요. (고후4:4)에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가려 버리니까 가려버리는데 무슨 수로 보여요! 자기가 아는 것만 있지요! 가려진 상태에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목숨이 중요하다!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가려져 있지 않으면 목숨보다 생명, 영생이 중요하다! 이렇게 되겠지요.
이 땅은 뭐라고 했습니까? 생명을 보여주는 비닐하우스라고 했지요! 비닐하우스에서 브닌나는 영생의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생 받기로 작정된 사람은 하나예요. 그런데 한나에겐 자식이 없습니다. 자! 이제 부터 강의가 어려워져요. 성도가 생명이 있다는 것은 곧 축복이 있고, 축복이 있다할 것 같으면 인간은 축복을 더 좋아하지 저주를 안 좋아하잖아요?
그러면 생명이 우리가 이해하는 축복으로 온다면 언제든지 우리는 생명을 좋아하고 우리의 목숨보다도 까짓것 생명을 좋아할 수 있는데 어떻게 생명이 오면서 우리가 아는 축복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저주의 형식으로 생명이 (속에는 물론 축복이 담겨져 있지만) 형식과 형태는 저주 형태로써 주어지느냐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데로 모든 게 잘 되게 되면 얼마든지 주님! 사랑하겠습니다라고 자진해서 나올수도 있는데 왜 우리가 보기에 저주 또는 실패가 다시말해 애가 있어야 될 한나에겐 애가 없는 거에요. 이건 누가 봐도 실패로 보이지요? 지금 한나에게 어떤 과제가 주어졌어요. 어떤 과제냐 하면 남들 보기에 실패가 곧 성공으로 바꿔줘야 될 책무가 주어지는 거예요.
아! 정말 이건 인간의 힘으론 안되지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을 때 사람들은 이것을 전부 실패로 봤잖아요!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얼마나 동정을 보냈다고요! 막 울었어요 안됐다고 아이고! 참 안됐다! 저 사람 참 안됐다! 죄도 없는데! 많은 착한 일을 했는데! 아저씨! 용기내세요! 힘내세요! 참으세요!라고 우니까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울어야 되는지 분간도 못하나?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이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끝났어! 이제 예루살렘이 네팔에 지진 난 것처럼 다 무너져 버려요. 지금 도대체 누굴 위해서 울어야 하는지도 모르느냐 측은해야 되는 대상을 분간 못해서 누가 불쌍한건지 분간도 못하고
이 땅에 살면서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구원 못받습니다. 장차 올 메시야가 실패의 모습으로, 실패라는 형식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 분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사실은 그 분이 하나님인데, 우리들이 기대했던 멋들어진 성공적인 하나님은 마귀였지요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우리가 기피하는 것, 우리가 그렇게 안됐으면 좋겠는 것,
제가 지난 설교에 말했잖아요! 사람이 아무리 실패해도 아무리 바닥으로 나락으로 떨어져도 첨벙! 십자가로 떨어진다고요 이러다가 내 인생 꼬라박히는 게 아닌가? 꼬라박아도 꼬라박는 그 자리가 십자가 피 있는 자리로 꼬라박아요! 성도에게는 실패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처럼 보이지요! 본인에게 조차도
그래서 이 생명의 비닐하우스는 그냥 비닐하우스가 아니고 생명을 비닐하우스를 통해서 생산해내요! 없는 생명을 여기서 만들어 내는 비닐하우스가 약속의 땅이 되겠지요! 그 과정에 바로 사무엘상이, 역사가 진행되는 겁니다. 실패자를 데리고 실패자속에서 생명을 끄집어 내는, 생산해 내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실시해 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언약의 무늬라고 해요. 나무를 자르면 나이테 무늬가 나오죠? 언약이 층층이 뭐가 있냐하면 무늬가 있어요. 그 무늬 나이테 한겹 한겹 하나 하나에 실패했던 자국, 증거들이 거기에 누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한 평생을 뒤돌아보게 되면 층층이 실패의 무늬, 나이테가 있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을 톱으로 잘아 보세요. 잘라보면 7살 때에, 20살 때에 실패 층층이 실패했던 무늬의 층이 나와요. 어떤 사람은 삼겹살, 어떤 사람은 오겹살, 칠겹살.. 성도는 매일 실패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전체가 다 실패의 길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 그 당시에도 메시야를 기다렸잖아요? 사람들이 메시야의 모델을 만들어 놓고 메시야가 여기 온다하고 기다렸어요. 그들은 거룩한 행동을 하면서, 거기에 앞장선 사람들이 바로 바르세인과 서기관들이 여기에 메시야의 빈자리에 상상을 그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짜 메시야는 여기서 뒤로 차지요 그게 아니라고 밀쳐내는 거예요. 자꾸만 마치 뭐같으냐 하면 장예모 감독, 중국의 유명한 감독이 만든 ‘5일의 마중’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에서 보면 그 주인공 여자가 늙어서 치매에 걸렸어요. 남편은 젊을 때 아내를 떠나고 뒤늦게 아내가 치매 걸린 이후에 찾아오니까 이미 못알아 봐요!
여기서 치매증상이 뭐냐하면 5일만 되면 남편이 역으로 온다고 기다려요. 남편 이름을 써서 피켓 들고 기다리는거예요. 그런데 이미 남편은 돌아와 옆에 있어도 치매로 못알아봐요. 그래서 오지 않는 남편을 매번 기다려요. 그런 아내를 위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역으로 나가줘요. 5일만 되면 무조건 역으로 나가서 남편 오기를 기다리는 치매 아내를 위해
꼭! 바르세인이나 사두개인 같아요. 메시야가 왔잖아요! 메시야가 왔는데 내가 기억했던 메시야를 인간은 그 메시야가 본인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기다린 메시야가 실패로 끝나면 영생이 주어지는데 계속 고집을 부리게 되면 계속 마귀적인 메시야만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힘으로 실패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실패는 실패할 때 실패인지 알수 있지 실패하기 전에 실패라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성공이 되요. 지금 제가 방금 어려운 말을 했는데 예를 들자면 사람이 너무 살기 힘들다 그러면 내가 죽어 버리자 하고 죽고자 해요. 그래서 정말 죽을 뻔 했어요. 이러면 그 사람은 다른 건 다 실패해도 자살은 성공했잖아요! 그게 바로 실패가 아닌 거예요. 그게 자살도 실패를 해야 진짜 실패가 되는 거에요.
실패라 하는 것은 항상 당겨서하는 실패란 개념이 인간에겐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지나고 난 뒤에 실패이다. 오늘도 실패다 이렇게 되는 건데, 주께서 자기 백성을 실패로 만들어야 될 이유가 인간은 날 때부터 코앞에 있는 자기의 목숨을 쥐기 때문에 목숨이 영생을 가려버리는 칸막이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영생은 따로 있는데 기껏 자기 목숨이 생명이라고 알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것이 주께서 주신 생명인줄 알고 오늘도 교회와서 열심이 새벽기도 하면서 주여! 원상복귀 해주시옵소서! 다른 욕심 안냅니다. 돈 사기 당해서 500만원 이것만 어떻게 해주세요! 십일조 할테니까! 원상복귀 해주옵소서!
거기에 목사가 30배, 60배, 100배라고 하니까 또 계산하기 시작해서 가만있어봐라! 50만원하게 되면30배, 100배 같으면 5,000만원? 주여 ! 100배! 이처럼 추구하는 자체가 실패안하기 위해서 교회를 오기 때문에 사기꾼들이 이러면 성공합니다! 라는 긍정적 사고방식을 그런 마인드를 집어넣으니까 서로 죽이 잘 맞아요.
어떻게 콩쿨에서 우승 할 수 있겠습니까? 우승이 된다? 우승이 안된다? 주여! 제가 매일같이 실패하는 것도 주의 뜻 맞지요? 이것을 알아야 되지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날 이야기 했잖아요. 성경은 해답을 주는 책이 아니고 내가 왜 문제인가를 구성하는 책이라고, 아무 문제 없던 내가 왜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기에 뭐든지 내 뜻대로 안되는지를
주님의 입장에서 진짜 주체, 주님 입장에서 언약 적 주체를 다시 만들어 주옵소서! 언약에 의해서 나 라는 인간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언약 적 능력으로 다시 만들어 주옵소서!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나입니다. 만들어질 때 혼자서는 안 만들어져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남들 때 원수가 있어줘야 되요.
야곱이 나중에 이스라엘이 되잖아요. 그것은 야곱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자기를 괴롭히는 형 에서가 있어줘야 되요.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야곱이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원래 복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복을 장자가 받게 되어 있어요. 다 가져가지요.
그럼 동생은 뭐냐 형의 하인이에요. 형이 살림을 살면 저 뒷방에서 사는 게 동생들이에요. 그리고 대기하고 있다가 형이 아들을 못 낳으면 동생이 형수와 관계해서 자식을 계속 낳아줘야 되요. 그게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오직 맏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동생들이에요. 왜냐하면 모든 축복은 맏이를 통해서 오기 때문에
그런데 그 맏이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목숨이라는 차원에서 맏이는, 먼저 태어난 사람이 장땡이에요. 먼저 나면 끝났어요! 육신적으로 끝난 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입장에서는 아깝지요? 왜냐하면 진짜 나이가 많아서 그렇다면 덜 억울 할텐데 쌍둥이인데 금을 누가 먼저 넘었느냐 머리가 먼저 나와서, 에서가 먼저 선을 넘은 게 에서가 먼저 넘었고 야곱이 뒷꿈치를 붙잡고 나온거에요. 아까운 거에요.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상식이잖아요. 먼저 난 운명을 바꿀 수가 없는 거에요. 토끼와 거북이에서 누가 이기겠습니까? 토끼가 이기지요! 빠른 걸 어떻게 바꿉니까? 그런데 야곱은 거북이가 토끼를 추원하려고 시도하는 거에요. 참!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야곱은 뭐냐 처음부터 실패자이죠. 처음부터 실패 한거에요.
처음부터 실패 했다는 말은 뭐냐 거기에 플러스로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실패한 그것이 본인에겐 실패지만 언약의 성공을 위해서 너는 실패자로 가담되는 것! 이것이 바로 축복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셨습니까? 그럼 그것은 구원받은 겁니다. 구원에 성공하신 거에요. 십자가 앞에서 본인이 실패자로 인정하십니까? 나는 강도요 창녀인줄을 아시겠습니까? 바로 당신이 이미 벌써 구원에 넉넉하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뭐 대통령이다, 국회의원이다! 라고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다. 그러면 대통령 되도 괜찮아요! 국회의원 되도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국회의원 뺏지가,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대통령이 어떤 자리인데~ 이렇게 나오면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거지요. 그래서 에서와 야곱의 관계처럼 언약은 반드시 대적관계, 원수관계가 성립이 되면서 언약은 이 지상에서 현실화 되는 겁니다.
(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나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1: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1: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5절 다시보면 애도 못 낳으면서 무슨 형님 노릇 하려고 합니까? 라고 했겠지요! 자식을 못 낳는다는 것은 태가 막히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저주의 표상입니다. 축복이라 하는 것은 마지막까지 하나님나라와 연결될 때 축복이 되거든요! 태가 막혔다는 것은 내 육신이 끊어진다는 것이고 장차 끝에 오시는 메시야 시대에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늙어 죽으면 끝나는 거에요. 자식이 없으니까!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잖아요. 그럼 나는 늙어 죽어도 자식은 생생하니까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으면 자식 안에 누가 들어 있어요? 할아버지가 들어있고 증조할아버지도 제2의 제3의 자아가 자식이라는 연속된 자식을 통해서 이어져 이어져서 나중엔 하늘나라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면 자식을 낳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지요! 그런데 자식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난 너하고 안 놀아!”라는 의사표시로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 땅의 삶이 늙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이젠 난 없어요. 죽어 흙이 되면 끝이에요. 브닌나는 기고만장 한게에요. 난 자식있다! 결국 자식이 있다라는 것은 엘가나라는 레위지파에서 자식은 누가 대표합니까? 브닌나의 자식이 대표하겠지요!
그리고 레위지파라고 하는 것은 누가 지정한거예요? 레위지파가 알아서 회의해서 우리가 레위지파다 한거에요? 누가 지정한거에요? 하나님이 야곱의 언약 즉 12지파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레위지파 자체가 축복이에요. 그 자리가, 축복의 대를 이을 쪽이 브닌나가 되어 버리고 그러면 자식을 못 낳는 한나가 탈락이 되버립니다. 실패지요.
그러데 실패의 노선에서 메시야가 온다는 사실, 이거는 상상도 못합니다. 구원 받았다는 자에게 구원이 오는 게 아니고 구원 받지 못한자를 통해서 구원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면 구원 받아야 할까요? 구원 받지 말아야 할까요? 참 어려운 문제지요? 그래서 오늘 공식을 하나 적어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공식인데요. 뭐냐하면 ‘저주가 모아져야 구원이 된다’ 다른 말로 실패가 주어져야 구원이 된다. 십자가가 뭐냐하면 모든 저주를 다 모은 게 십자가에요. 그 십자가 안에 만 영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저주 받는 우리를 모아서 주께서 영생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저주 받는 우리를 통해서 영생을 만들어 내신다. 그러면 영생을 얻는데도 우리가 한 몫을 합니까? 안합니까? 못해요!! 영생을 받는 것은 우리를 계속 실패케 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솜씨로 영생을 만들어 내시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그렇게 되는 거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구원이라는 것은 언약의 무늬가 있다.
무슨 무늬겠습니까? 실패와 저주의 무늬, 또 중요한건 그 실패를 어떻게 안다고 했습니까? 뒤돌아봐야 알지, “나 실패해서 구원 받을래!” 이렇게 하는 자체가 본인이 하는 얍삽한 그 자체가 실패를 모아서 성공으로 잇겠다는 것을 자기에게 성공할 힘이, 조건이 되는 줄 알고 착각하는데 그런 건 없습니다!
한나를 통해서 그러면 우리가 얻을게 뭡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영생의 비닐하우스를 우리주변에 설치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되요. 그리고 설치된 비닐하우스에 모든 장치, 이슬과 물을 주는 모든 장치는 그때그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알아서 주께 드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살다보면 실패해요. 왜 그것이 성공입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가 뭐냐하면 살다보면 성공하겠지? 이게 문제에요. 살다 보면 좋은 날 오겠지! 아니예요! 살다보면 실패하는 날 옵니다. 감사하세요! 그날을 “아이고! 목사님 그런 말씀마세요! 지금도 실패인데요!” 아니요! 아직 멀었어요! 지금 실패는 나중에 보면 숨 쉴만한 실패지요! 아주 숨도 못쉴 실패가 올 수도 있어요! 아직 배부른 소리 하지 마세요!
아직 멀었어요! 소위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의 제일 큰 실패가 뭐냐하면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소리를 제일 듣기 싫어해요! 마지막 카드가 기도인데 믿는 자의 기도는 능력이 있다! 이건데 믿는 자의 기도는 능력 없거든요!! 그러면 (능력) 있다고 해야 된다고 해야 되는데 또 삐져가지고 “내가 기도하나 봐라!” 이렇게 나오지요! 그럼 주께서 “기도하지 마라! 누가 하라고 했냐! ”
그런데 기도 안하면 안될 다급한 일이 또 터지게 되어 있어요. 혹시 (여러분 중에) 네팔에 일가 친척있습니까? 아는 사람 있어요? 없지요! 그런데 만약에 누구의 자녀 하나가 네팔로 베낭 여행을 갔다 그러면 기도가 절로 되지요! “주여! 왜 이러십니까?” 하필 타이밍이 절묘하게 나는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하십니까? 기도를 안 할래야 안할수가 없지요?
기도가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게 뭐냐 기도하는 순간이 아니고 주께서 알려주시는 실패의 순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신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영생 안에 포함된 사람이에요. 영생 주시려고 우리 목숨에 연연하지 않게 하시는 거에요. 비로소 그 동안 내가 살아온 것이 주님 사실은 다 내 목숨을 내가 어떻게 관리를 해볼까하고 교회다닌다 하는 그것이 본색이 들통나는 그 순간이에요.
이런 것 안해도 영생 얻는데 그렇잖아요! 내 목숨, 내가 근사하게 유지해보려고 그냥 얍삽한 짓을 한 그것이 교회다니기, 이런거에요.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이해하는데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그럼 나 교회 안다니까?” 안 다닐 수 있습니까? 답답한데 집에 있어 보세요! 근지럽지!
제가 왜 이렇게 같은 말을 반복하냐 하면 한나의 기도를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해야 하나다는 말이죠 하나의 기도를 누가 시키느냐 비닐하우스에 있는 주님이 시켰어요 한나의 기도를 왜냐하면 그 증거가 뭡니까? 브닌나가 “아이고! 형님 애 없다고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했습니까? 약 올리지요! 옆에서 약을 올릴 때 브닌나가 약 올릴만 해요 왜 주님이 주신 축복의 증거를 가졌으니까
그런데 본인은 자식이 없으니까 지금 한나가 기도하는 게 무슨 내용입니까? 브닌나 저주받으라고 하는 겁니까? 아니면 남편이 나에게 재산을 갑절이나 주라고 하는 겁니까? 이미 그건 줬어요! 남편의 직업이 제사장이니까 (제물의 분깃) 갑절로 줬어요! 이 부분이 좀 어렵지만 설명을 해야겠네!
지금 한나의 키가 155Cm 몸무게60Kg에 바느질 우수, 김매기는 2등급 이런 요건들이 한나에요. 하나님께서는 키도 작은 것이.. 이런 게 아니라니까요! 한나라는 조건은 자신 스스로 보기에는 좀 이쁘다 남편의 사랑을 더 받는다 이런 조건들을 갖춰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규정짓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위해서 한나에게 없는 것으로 주체를 만들어 버립니다. 한나에겐 뭐가 없습니까? 자식이 없지요! 자식이야기만 꺼내면 한나는 아무리 조건을 갖추고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아도 이건 실패자에요. 실패자지요! 그런데 여기서 자식에 관한 있음에 관해서는 누가 승리자입니까? 브닌나가 승리자지요!
바로 ‘없음’의 자리에 누가 계시냐? 예수님이 계시는 겁니다. 메시야가 계시고 언약의 성공자가 계시는 거에요. 만약에 어떤 교회에 가서 여기서 나이50이상인데 흰머리가 없는 사람만 천국에 갑니다. 헌금 많이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거울을 보니까 그 교회에선 나는 뭡니까? 지옥가는 겁니다.
왜? 염색해서 흰머리 없는 것이지 염색 안하고 흰머리 없는 사람, 이런 조건을 내세우면 그 교회 교인은 전부 실패자지요! 그 교회가 바로 천국이에요. 천국은 우리가 내밀 수 있는걸 다 끊어 버립니다. 왜? 다 실패자로 만들어야 되요. 그리고 우리가 다 저주 받아야 되요. 그 저주가 모아져서 우리가 저주라고 칭하는 것들이 모아져서 생명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생을 받게 되면 그 안에서 영생이라는 유리 거울을 받게 되면 우리는 뭡니까? 그 앞에서 나는 실패자이고 저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받은 것은 값없이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값없이’라는 말씀, 값없이 영생 받았다라는 그 말이 이것은 평생을 두고 실감나는 거에요.
‘값없이’를 기억하는 게 아니고 ‘값없이’를 정보로, 지식으로, 내가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 자체로 ‘값없이’를 보여주는 ‘값없이’를 표현하는 그런 실패의 무늬를 언약적 무늬로 이렇게 우리를 몰고 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성공이 아니고 주님의 성공이지요. “너 같은 인간도 구원 받았다!” 얼마나 주님이 신나하시는지 몰라요!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나를 많이 사랑한다 한나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하면 그 실패의 자리에서 뭐도 실패에 포함되냐 하면 남편의 애정행위, 사랑, 갑절을 주는 그 사랑도 인간의 성공에 요소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하면 이렇습니다. 혈육관계란 죽음의 관계에요. 결국은 아담과 하와라는 부부관계도 다 떨어지면 죽음으로 갈라서면 평소에 남남이 같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부부가 서로 정을 나누냐! 그건 상대가 있음으로 나의 외로움이 덜하고 내가 하는데 상대가 보탬이 되기 때문에, 배우자가 보탬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내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 갈 수 있는 게 없어요. “당신 내 마음 알지?” 그런 건 없어요! 인간이요 나말고 다른 타인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좀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할 수 없어요. 자식이 부모 마음을 알아요? 말도 안되는 소리죠! 부부가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알아요? 몰라요! 내 마음 나도 모르는데 무슨 남이 내 마음을 알겠어요! 그게 다니엘서에 나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어떻게 느브갓네살의 꿈을 다니엘이 알 수 있어요? 모르지요! 다니엘도 몰랐어요!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니까 아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 목숨만 충실하게 지키다가 평생을 그냥 자기목숨과 함께 공중분해 하고 마는 겁니다. 내가 남을 알 수 없듯이 내가 주님의 나라에 간다? 못가요! 나는 내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나는 내 안에 살아요. 내 밖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어요. 우리에게는 아무리.. 행위 해도 주인공은 ‘나’이지 나를 바깥에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제3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눈이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항상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이게 피히테의 철학에 보면 나와요. 인간은 자기부터 시작해서 자기로 돌아오는 거에요. 나 외에는 다른 현실은 없다! 나 외에는 다른 현실은 없어요! 일상적으로 왜 부부로 사느냐 헤어지면 외롭잖아요! 같이 있으면 좋잖아요! 싸우더라도 옆에 있는 게 좋잖아요! 덜 외롭고
왜 그동안 준 정이 얼만큼인데! 그래서 사랑이라 하는 것은 순수한 사랑이 아니고 일종의 투자 내지는 자기 영역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만약에 여자가 자기하고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살면 휘발유통 가지고 가서 불질러 버리지요! “내가 너한테 투자한 돈이 얼만데! 너는 속상하다고 나를 한번에 버리고 다른 인간하고 사느냐! 내가 복수하고 말겠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사랑한적 없다는 거에요 없고 나는 너에게 투자했던 거에요.
여기 개 한 마리 있는데 다른 사람이 가져가 버려 봐요 그동안 투자한 돈이 얼만데! 그래서 이게 뭐냐하면 개는 내 영역 안에 내 소유가 돼 버렸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어요! 진정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는 없어요! 내 새끼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내 영역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에요.
그런데 만약에 자식이 아빠 엄마 말고 남편만 챙기고 그러면 섭섭하지요! 저게 벌써 결혼한지 얼마나 됐다고 엄마 생일도 잊어 버리고 자기들 끼리만 놀러 가고.. 타인에게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맙시다! 그것을 이렇게 합시다! 표현을 예의 차리는 거에요. 에티켓이에요. 따라서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게 아닙니다. 그저 자기 한풀이 하는 거에요.
속이 다 시원한네! 자기 바깥으로는 못나가서 그래서 얼마나 한풀이를 했으면 술취했지? 라고 엘리 제사장이 그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너 술먹었지? 어디서 술 주정이야! 술 먹은 게 아닙니다. 분통이 터져서 기도 한 겁니다. 누구에게 기도 했지요? 하나님한테 하는 거예요. 한나는 기도해도 하나님에게 하소연을 할 뿐이지 기도하는 그 순간도 자기영역에서 못 벗어나서 자기영역을 패쇠적으로 품고 있습니다. 이 원통함을 어떻게 좀 해결해 달라고, 기도 실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실패케 했지요! 브닌나 때문에 둘다에게 애가 없으면 괞찮아요 애가 없으면 남편의 사랑을 누가 더 받았나하고 이렇게 끝날건데 둘다 실패한 것이 한쪽은 애를 가졌고 한 쪽은 못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나로 하여금 극도의 자기주의,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의 모습으로 한나를 변모시킨 겁니다.
원통해서 못살겠다 이런거에요. 애가 죽던지 나에게 하나 주던지 어떤 조치를 취해 주시던지, 한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언급하시고 수용했다라는 말은 한나의 기도가 어디에 포함되있나 이미 포함된 기도로써 하나님께서 의미를 부여하고 계시다. 네가 실패한 것은 언약안에서 실패한 것이다라고
예를 들면 강도가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 전에도 이야기 했잖아요 네가 강도짓 한 것도 하나님의 전체 언약 적 그림 안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이었다라는 그 전체 그림을 강도가 왜 그런지 모르지만 알게 되었을 때 주여! 오늘 밤에 저를 기억하소서! 이 놀라운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반대편의 강도는 “너 누구 보고 이야기 하고 있냐? 너는 몰라도 돼!” 왜 너는 니 이야기만 해야지 너의 범위를 벗어난 범위까지 니가 왜 알아차리느냐는 거지요! 한나가 기도를 하므로써 기도한 한나가 2장에 보면 한나의 기도 내용이 새로운 찬양으로 바뀝니다. 개인의 기도에서 전체의 기도를 대변해 주는 한나의 찬양이 되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그런거예요. 이런 기도를 나중에 마리아가 합니다. 누가복음1장에서 마리아가 하지요. 그렇게 한나는 성공한 적이 없어요. 실패 속에 하나님의 성공이 담겨 있는 거지요! 한나는 여전히 실패해요. 앞으로 계속 실패 할 거예요. 마리아도 계속 실패할 거예요.
하지만 실패한 것 속에 실패하게 하신분이 실패한 한나와 실패한 마리아를 통해서 실패한 강도를 통해서 계속 성공자로 나오지요! 언약을 영생을 얻는 성공자로 나와 버리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하듯이 한나와 마리아를 대할수 있는 눈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무시하겠지요! “에잇! 조용히 해! 어디 여자가 술 먹고 와서 기도하고 그래!” 엘리가 오해했잖아요
그 오해가 장차 메시야가 오실 때 예수님이 받아야 될 오해를 한나가 미리 당겨서 받은 거에요. 그러니 한나는 철저하게 주님이 미리 당겨서 쓰신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노리개지요! 주님의 노리개. 그런데 그게 어딥니까! 아무나 되는 역할이 아니잖아요! 천국가야 될 사람이지
여러분들이 주님의 노리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선 항상 매일같이 오늘도 실패다 오늘도 자식에게 100점 맞아 오길 기대 했지만 98점 받아서 전교1등 했지만 100점으로 1등은 아니잖아요 “ 이놈아! 다음엔 100점 맞아 1등 해라 전국1등 석차가 15등, 얘야! 오늘도 실패다 전국 1등 해야 될텐데” 또 다음에 전국1등 하니까 그래도 실패다
왜 1등은 했는데 두드러기가 나서 그래도 실패다. 계속해서 내 위주로 내 한 풀이 위주로 하면서 우리는 실패일수 밖에 없는데 그걸 통해서 내가 원했던 성공은 주시지 않고 전체 안목, 그 실패가 곧 영생을 얻는데 있어 성공의 재료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오늘도 성공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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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된 모임 (마 18:19-20) 대전- 64강
이근호
2015년5월26 일 본문말씀: 마태복음18장19-20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 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게 뭐냐하면 한마디로‘허락’이에요. 교회 만들기에요. 주님의 교회 만들기는요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하자! 한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제가가 나야 합니다. 주님의 허락이 있어야 되요. 교회란 뭐냐‘허락’된 결과가 교회가 되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허락은 맡을 수 없어요.
인간이 아무리 요청해도 허락이 안되지만 허락된 상태에서는 반드시 교회가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뭐냐하면 이거에요. 이 말씀, 예수님 말씀을 할 때 지금 예수님 여기 계시고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겐 보이거든요! “아! 저 말씀을 저 분이 저런 말을 하는구나!”보이는데,
만약에 예수님이 안 보이는 형태로 사라진다면 그때 이 말씀은 어떻게 성사되는가! 하는 그 문제가 남아요. 예수님이 어떤 자리를 점령하고 있다면 멀리 가시더라도 그 자리로 가면 되잖아요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하면 구약의‘성전’입니다. 구약의 솔로몬 성전이라는 특정자리가 있어요. 모리아산에 성전이 있거든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쳤던 터가 성전 터 입니다. 특정 지점이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뭔가 병이 났다, 죄 지었다, 또는 전쟁에 패배했다 그러면 쪼르르 가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면 되요. 그리고 출애굽기에 보면 모든 남자들은 1년에 3번씩 그곳 성전으로 나오라 했다 말이죠!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세 차례 모든 남자들은 오게 되있어요
얼마나 편리 합니까? 이쪽에서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듯 가면 되잖아요 누구 만나러? 하나님 만나러 와! 편리하네요 참! 편리 하지요! 그래서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성전이 없어질 때에 얼마나 가슴 아픈지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아프다 표현 했어요. 예레미야 애가 2장19절에 보면 나와요. 창자고 간이고 다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아프다했어요.
하나님이 모처럼 배려를 해 주셔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 특정 장소를 주셨는데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꾸 곁눈질 한거죠. 우상을 섬긴 거예요. 다른 신을 섬긴 거에요. 왜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겼을까요? 왜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을 섬겼냐 그건 뭐냐하면 다른 신에겐 언약이 없습니다.
언약이 없다라는 것은 율법이 없다라는 말이에요. 십계명도 율법이 없으면 다른 신에겐 무엇이 있냐하면 본인의 욕망만 있으면 되요. 욕심만 있으면 되요. 그러면 욕심에 비례해서 아부를 하면 됩니다. 돈을 받치면 되요. 돈 놓고 돈 먹기에요. 많이 받치면 복 받고 적게 받치면 퇴짜 받고 ‘지성이면 감천이다’만 있으면 되요.
그런데 언약은 누구에게 매어 있어야 되야 하면 레위 지파에게 제사장에게 교육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저건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건‘종속’을 의미 하거든요! 지배당하는 것, 권력에 지배당하는 것, 사람들은 남에게 관섭 받는 걸 싫어해요.
왜 관섭 받는 걸 싫어하냐 하면 사람들이 성격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분풀이되는 욕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엄마가 아이보고 “얘 너 잘못했지? 너 매맞아야 되겠어!”라고 할 때 애들은 굉장히 스트레스 받고 기분 나빠 하는 게 뭐냐하면 이거에요. 매를 맞는 게 싫은 게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것을 찾아내라고 하니까 그게 본인에겐 어처구니없는 짓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버려요. 잘못해서가 아니라 우선 안 맞고 보자는 식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게 뭐냐하면 회개하는 겁니다. 회개, 반성을 내 쪽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반성의 내용을 내 쪽에서 만들기 때문에 회개, 반성이 전부다 엉터리입니다.
“잘못했습니다! 뭐? 잘못했습니다! 무조건 더 맞아야 되겠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 뭐!” 여자 친구가 친구남자에게 “오빠 잘못했지? 그래 잘못했다! 그럼 뭐 잘못했는데? 모른다! 모르니까 내말 건성으로 듣고 있잖아!”잘못했다고 해도 문제고 잘못 안 했다 해도 문제고 어떻게 할 줄 모르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왜 내 마음을 니가 몰라주느냐 하는 건데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에요. 인간은 텅텅 비어 있는 게 아닙니다. 상대방의 마음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에요. 상대방이 어떤 소리를 해도 이걸 내식으로 전부 다 변절시켜 버리고 바꾸어 놓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잘못을 자기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 내가 내 잘못을 아는 경우는 자기 생각 내부에서 본인이 그러리라고 생각한 일방적인 추상적인 거에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회개는 인간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회개 했다 잘못했다라고 해서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는 그 안에 화해함이 포함된 회개이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 안에는 화해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회개를 줘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회개는 매 안 맞으려는 이기주의적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인간의 회개는 안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네가 잘못했지? 예!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화해할께!”이게 아니고
잘못했다고 하는 이야기 안엔 이미 뭐가 들어있냐 하면 이미 용서했기에 추후적으로 죄가 발생되는 거에요. 용서를 용서답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한테 죄라는 것을 알려 줄께!”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죄를 지적할 때 우리는 신나해야 됩니다. 왜? 이미 용서받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이 집사님)이 음악회 초청장을 주셨죠! 당신은 여기에 참석할 자격이 된다라고 준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초청장을 들고 갔는데 욕하는 곳은 노무현 6주기 추도식 외에는 없습니다. 노건호, 노무현 아들이 욕하는 것 외에는 없어요. 주께서 결국 교회란 뭐라고 했습니까?
허락된 자리 그것을 구약의 성전을 의미하게 되면 이미 내쪽에서 성전이 있다고 여긴다면 하나님은 그런 걸 허락하지 않지요! 구약 때 성전이라 하는 것은 죄지었다! 그러면 찾아가면 되는 거예요. 예루살렘이 거기 있으니까 그래서 병들었다 하면 가서 기도하면 되고 죄 지었다 하면 양 가지고 1년에 세 번씩 들어가면 되니까
그런데 그 성전이 불타버렸습니다. 그러면 불탔다는 건 무엇을 의미 하겠어요? 이제는 내 쪽에서 양을 가지고 특정 장소에서 제사하는 것을 이제 하나님께서 허락한다는 거예요? 안 한다는 거에요?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 안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양을 잡아서 드리는 것이 인간의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인데 어떻게 할꺼에요?
아까 우상이야기 다시 합시다. 우상과 참된 신앙의 차이점은 우상은 뭐가 없다? 언약이 없다! 참된 신앙에는 언약이 있다라는 거에요. 그러면 성전이 있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은 그걸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십일조 하라는 말은 십분의 일 내면 십일조 된다? 이건 전부 오해 입니다.
자기 주제 파악이 안되서 그래요. 내가 뭔지를 모르고 하나님한테 드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뭔가 착각 한거에요. 마치 할례를 행하면 거룩한 백성이 되는 줄 알고 오해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성전을 가지고 화해를 했더라면 성전은 영원해야 되요. 성전은 불타면 안됩니다.
그런데 성전이 있다 해놓고 성전이 없어졌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책임일까요? 아니면 누구의 책임일까요?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장소가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인데 그 만나는 장소마저 불타 사라졌다면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는 것에 있어서 누구 때문에 만남이 성사 안된다는 말입니까? 이거는 하나님 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인간 네 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을 섬겼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하면 우상이 뭐냐 하는 것은 그들은 우상을 섬기면서도 우상이 뭔지를 몰라요. 나중에 성전이 사라질 때 모든 것이 우상 섬긴 게 되요. 심지어 성전에 와서 한 것이 전부 우상 섬기게 된 것이 되요.
정답이 뭐냐 없어져야 해답이 나와요! 모든 게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붙잡을 수 있는 하나님을 섬긴 수 있는 모든 요소가 하나님 쪽에서 허락이 없어야 되요. 저리가! 손 떼 이렇게 해 줘야 비로소 우리 자신을 아는 기회를 부여 받게 되는 겁니다. 지금 교회가 무엇이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이냐를 설명하면서 제가 지금 성전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성전이 있을 때는 그들은 오해했다. 성전이 없어졌다. 성전이 없어지고 난 뒤에 (스룹바벨 은 B.C 538년에 제1차로 유대인을 이끌고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 중단되었다가 그 후 (B.C 457년에 에스라와 함께 유대인등이 2차로 귀환) 에스라, 느헤미야 성전인데 이건 성전 재건하는 겁니다.(B.C 445년경 느헤미야가 3차 귀환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재건)
재건하는데 에스라, 느헤미야가 성전을 재건하고 이게 다시 무너져요. 에스라 때는 뭘 하느냐 하면 율법을 낭독하고 율법을 지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하는 일은 뭐냐 에스라, 느헤미야를 누가 도와주냐 하면 바사(페르시아)에서 도와줘요. 바사는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나라인데 이방나라에는 언약이 없습니다.
율법도 없고 귀신을 섬기는 나라에요. 소위말해 마귀 섬기는 나라로 보면 되지요! 마귀 섬기는 나라에서 후원을 받아 성전을 짓습니다. 그러면 성전은 누가 져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느헤미야가 바사 나라의 임금을 통해서 모든 재정을 보장 받으면서 성전을 지어요. 일반 백성들이 율법을 받는 백성들이 새로 등장했습니다.
제사장도 생기고 이렇게 이방나라에서 얻은 여인들과 강제로 이혼시키고 십일조도 하게 하고 성전에서 제사 드리게 하고 특히 율법을 공부하게 하고 이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중간에 보면 이방나라가 들어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다 흩어졌습니다. 그러면서 바벨론, 바사 나라 이후 이방나라의 압제를 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방나라의 압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방나라의 압제를 받는 식으로 되면서 하나님의 언약이 진행에 차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차질이 없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그들이 실패하는 가운데 신앙생활이 되고 있습니까? 안되고 있습니까? 되고 있지요!
누가 도와줘서? 이방 나라가 도와줘서! 그러면 그들이 성전 안에서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키고 하지만 이게 전부다 인간이 있으면 인간 주변에 누가 있습니까? 사단이 있고 사단의 도움을 받고 사단을 역사하게 하신 분이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죠! 그렇다면 사단이 있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신앙이 되고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마귀민족 마저도 하나님이 자체적으로 영광이 될 수 있도록 실패한 이들을 사용하고 있는 거지요! 이게 바로 언약 안에서의 신앙의 참 모습이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안되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신앙에 대해서는 포기를 해야 되지요?
이것을 더 줄이게 되면 신앙생활 하지 맙시다가 되버려요! 신앙생활 하십니까? 실패하세요! 전혀 신앙생활을 안하고 있는데 주변 환경이 나에게 신앙생활 하는 인간으로 생산해 내시는 겁니다. 참! 기가 찰 이야기지요?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NO! NO! 누구 좋으라고? 하나님 좋으라고~. 신앙생활이 되지도 않는 인간을 신앙생활 되는 쪽으로 주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믿어질 때 신앙이에요. 이게 바로 신앙이에요. 왜! 막 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이게 신앙이라고, 자!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알았더라면 개축한 성전마저 타락되고 또 로마군, 짐승이 와서 사탄의, 짐승의 나라가 무산시켜 버려도 그 때는 신앙생활이 될까요? 안될까요? 되지요!
어차피 내 쪽에서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니니까! 방금 이것을 설명하면서 제가 아까 한 것이 허락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회개 안에는 이미 화해의 손길이 담겨 있다는 그 원칙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거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려울테니까 말라기를 한번 봅시다.
(말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 리니
(말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 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데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크고 두려운 날이라는 것이 네팔의 지진보다 더 크겠지요!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신답니다. 따라서 내쪽에서 만약에 신앙생활을 하려면 누굴 찾아야 되요? 엘리야를 찾아야 되겠지요! 그러면 결국 엘리야를 찾으면 세례요한이 와도 그때는 실패지요! 왜? 그들이 원하는 엘리야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 엘리야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애초부터 인간은 실패다. 모든 신앙은 애초부터 실패에요. 그게 하나님 신앙생활의 절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누가요? 하나님이 보내신 엘리야가요! 그런데 이 엘리야가 세례요한이었습니까
그럼 자신이 엘리야이어서 옥에 갇혀 버리면 그러면 끝났네요? 아니지요! 엘리야라고 여겼던 (세례요한)이 엘리야가 아니니까 그럼 세례요한 마저 선지자의 기능에 속합니다. 마지막 선지자가 세례요한이라면 선지자가 선지자되려면 마지막 선지자 때에 다 이루시는 분이 따로 있어야 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실 엘리야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라기 말씀마저도 예수님 자신이 그냥 있지 않고 그걸 다 삼키기 때문에 모든 선지자의 말은 예수님의 영이 임합니다. 그러면 말라기마저 예수님의 영이 임해서 그런 것이고 그 말씀은 완성을 보지 않으면 안되거든요. 그 완성은 말씀을 주신 분, 율법을 주신 입법자가 올 때까지 계속 가동 돼야 하거든요!
모든 법이라고 하는 것은 입법자, 즉 법을 만드신 쪽으로 달려가게 되어 있어요. 법을 만드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요! 예수님한테 와서 완성이 됩니다. 모든 법은 예수님이 시행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이미 화해가 된거지요!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그 중간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이지요. 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바로 교회가 된다는 그말 입니다. 오늘 본문 18장 다시 봅시다.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이거든요! 주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자!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할 때 예수님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지요!
예수님이 말을 하시니까 “아! 예수님이 여기 계시니까 우리가 안 떠나면 우리가 교회 된다.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왜 예수님이 자기네들 가운데 계시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 승천해서 떠나시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어디에서 찾을 거예요? 어느 지점에서? 지금도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감람산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을 어디서 만나면 되요? 감람산에서 만나면 되겠지요! 그러면 일본의 후지산에선 안되요? 여기 한라산은 안되나요? 한라산에 가있으면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감람산으로 가려고 했는데 왜 한라산에 있느냐? 나는 너하곤 안 놀아!”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한라산이 감람산으로 되게 하시는 작용을 주님께서 못하실 것 같아요?
다시 쉽게 말해서 장소를 잘못 찾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화해 안하십니까? “내비게이션이 왜 감람산으로 가야 하는데 한라산으로 가라 하지? ”우리가 장소를 잘못 정했다고 해서 우리가 잠들어 있었다고 구원 못할 전도로 화해가 능력이 없는 거예요? 주님과의 화해가 잠에서 깨어 있어야 하는 데 잠들어 있었다고 우리를 구원 안해 주는 화해입니까?
화해하심, 용서하심이 “하여튼! 잠꾸러기들은 안돼!” 이렇게 잠꾸러기라고 우리를 내치십니까? 하나님의 용서가 그 정도 밖에 능력이 안되요?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조건이 없어요! 왜 조건이 없냐하면 우리하고 대화를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계약에서 제3자입니다.
우리는 나가 있어야 되요! 아버지와 아들이 계약하는데 우리가 도장 들고 나서면 안되요! 볼펜 들고 이거 필요합니까? 라고 해서도 안되고 어디 감히 끼어들어요! 제가 주일 낮 설교에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의 운명이 바뀌어지지 않는다고 히6장 백날 들추어 보세요! 운명 바꾸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히6:4)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신 능력을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내치는 능력이에요. 주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그들 보고 똑바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예수님 본인이 이미 창세전에 했던 계약서를 마18장 18-19절로 이렇게 제시 하시는 거예요.
왜 제시하느냐 “너희들이 내가 아버지하고 아는 계약서를 백날 줘 받자 그들은 못 지키고 무슨 말인지도 알아먹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인간 제외하고 아버지와 아들하고만 계약 하셨지요! 봐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인간입니다. 보면 볼수록 오해하지 봐도 몰라요!
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누가 할 숙제요, 과제요, 누구의 업무이냐 하면 예수님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업무입니다. 그걸 제가‘허락’이라고 하는 거에요. 주님의 허락이 있는 곳에만 교회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전에 이야기 했잖아요 교회란 친목단체도 아니고 선교 사업의 중심 단체도 아니고 교회는 바람입니다.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교인들 보기를 바람같이 보시길 바랍니다. 언제 왔다 언제 갈지 모르는 모였다가 흩어지는 거에요. 바람같이, 언제 우리가 모였었나? 기억이 안날 정도로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그냥 모였다가 흩어지는 거에요. 따라서“전에 오셨었는데 어떻게 잘 찾아 오셨네요?”이렇게 하지 말고 주께서 바람 불어 널어 주셔서 이렇게 와서 대전 모임이 되는 거에요. 기대하지 마세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어떻게 알 수 있어요?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인데 주께서 허락하셨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만약에 지진이 일어난다면 건물 붕괴하면 우리가 못 만나잖아요.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를 다 삭제해야 되요. 왜냐하면 우리가 할 수 있다라는 것은 어디에 포함 안되냐 하면 회개에 포함이 안되요.
내가 잘나서 솜씨 있어서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나머지는 죄인지 모르지만 그만큼은 나의 잘남이 되어 버리면 나의 잘남에는 뭐가 빠져 있나하면 주님의 화해와 용서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잘났어요! 아이고! 잘난 거 가지고 네가 천국에 갈수 있나 한번 보자! ” 항상 우리는 실패해야 합니다. 항상 성사될수 없어요. 빡세게 기대한다고 교회 오는 것도 아니고 심방안가도 교회 안 나오는 것도 아니에요.
제가 설교하고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을 생각해서 설교를 하게 되면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데 다른 사람이 은혜 받았다고 하니 “나는 또 실패다” 그 사람을 생각하고 한건데 늘 콩닥콩닥거려요. 설교하고 난 다음에 내가 또 여러 사람 시험 들게 만들었구나! 그래서 “아이고! 집사님! 가정 이야기해서 얼마나 시험 들었습니까?
아이고! 잘 하셨어요! 저는 아주 기쁘게 들었어요! 마음껏 사용하세요! 저희 가정이야기 마음대로 하시고 저는 개의치 마세요! 라고 이야기 해주실 때 저는 고맙지요! 저는 한 사흘을 고민했었는데, 또 주제넘게 사적인 이야기해서 얼마나 상처받았겠나 했는데 오히려 그렇게 이야기 해 주시니까 굉장히 감사하지요! 그것도 이용해서 틈만 나면 사적인 비밀 또 캐내려하면 안되고 다른 분들이 마치 나보고 이야기 하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할 때 제가 움찔합니다.
“내가 당신보고 이야기한 게 아닌데 차마 그런 이야길 못해요.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잠시 말할까 말까 고민했어요. 자 계속 이야기 하겠습니다. 자! 회개에 대해 해봅시다. 우리가 주 앞에 회개를 합니다. 그런데 회개할 때 반드시 내가 잘못했다라는 증거가 따라야 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나님께서“너 그러면 증거 한번 제시 해봐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걸 아시기 때문에 “네가 잘못했다 하면 내가 모를 것 같지! 그래~ 잘못했어? 기특하다!”이러실줄 알지요!“네가 잘못했다는 반증, 증거 대봐라! 잘못했다는 증거가 없네!”그리고 증거 없다라는 것 회개했다는 그 자체가 자기 자랑이 돼버려요. 자기 의가 되버린다고요.
“앞으로 네가 증거 없거든 함부로 입 놀리지 마라! 정말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 해라! 내가 그걸 수정해 줄께!” 사실은 그게 진짜 잘못한 게 아니고 수정 할텐데 잘못한 거 없으면서 겸손한 체 하고 맨날 입에 달듯 “저는 부족합니다! 죄인입니다!” 그런다고 주께서 그냥 넘어가실 줄 알지요!
그럼 한번 생각해봅시다. 18장봅시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잘못을 했어요. 잘못을 하니까 그 사람에게 권고합니다.“당신은 말씀에 의해서 잘못 됐습니다! 라고 권고를 했어요.(17절)권고를 하니까 그 사람이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거든 교회에 받아드리고 만약에 거부하거든 교회의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그야말로 이인과 세리같이 여겨라 하시면서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 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따라서 이 말은 교회내에서 행정처리가 하나님나라에서 이미 추진하고 인정한 행정처리로 내가 간주하겠다라는 말씀을 하게 되지요. 그러면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행정적인 처리를 완벽하게 갖추면 그것이 곧 하늘의 뜻을 지상에서 인간들이 모여서 구체화하는 하나님의 대행자 역할을 하는 셈이 돼버리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어디서 많이 사용하는 것입니까?
바로 천주교에서 하는 행정이잖아요 교황이 누구에요? 예수님의 대리자, 그래서 교황은 오류가 없어야 되요.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니고 오류가 없는 자리에 앉았다는 거에요. 말을 교묘하게 해요. 교황이 개인의 자격이냐? 신분의 자격이야? 구분되야 된다라는 겁니다. 왕이 오류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왕의 자리는 오류가 있으면 안되요.
왜 법을 집행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자 만큼은 어떤 경우에라도 법에서 벗어나 줘야 법이 교통신호가 잘돼요 교통순경이 “거긴 오른 쪽으로, 여긴 왼쪽으로 가시고!”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나 가다가 창문 열고 순경에게“너는 왜 거기 서서 길을 막냐!” 이런 말을 하면 안돼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존재가 따로 있어줘야 돼요. 그것이 공터, 빈터에요.
국민들에게 첩을 두지 말고 근친상간을 하지 말라는 법을 유효하기 위해서는 왕은 근친상간을 해야 되고 첩을 둬야 돼요. 그래야 되는 겁니다. 솔로몬은 첩이 1000명이에요. 다윗은 일곱 명인가 여덟 명인가 그렇지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자녀들도 많이 낳았어요! 법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 법에서 벗어난 사람, 그럴 때 질서가 잡히거든요! 왜냐하면 질서를 잡는다는 말은 죄를 생산해 낸다 이건 우리의 상식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거지요. 질서가 잡히는 걸 우리는 의로 보잖아요.
질서가 잡힐 때 비로소 죄가 만들어져요. 왜냐하면 이 지상의 질서라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의인이 없다라고 할 때만 질서가 잡혀요. 이것을 여러분은 미리 아셨죠? 두더지 게임에서 두더지가 나올 때 머리를 때리잖아요. 맞아도 싼 존재인 인간 두더지 이래야 질서가 잡히는 거에요. 만약에 두더지가 아닌 어떤 사람의 남편 얼굴이 나오던지 이웃집 원수가 나오면 우린 깜짝 놀라겠지요? 원래 두더지가 나와야 되는데..
예수님만 의인되기 위해서는 모든 자가 죄인 돼야 되요. 그래서 죄인 되기 위해 투입된 것이 율법입니다. 그 율법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속해있는 세상, 예수님이 지상에 오셨을 때 지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죄악 된 세상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다 똑같이 다 죄인 만들기 위해서, 만약에 예수님이 말씀을 안하게 되면 바르세인들은 남을 치는 두더지를 때리는 초월적인 위치에 있는 겁니다. 왜 자기들은 의인이니까
따라서 그 질서를 예수님 빼놓고 무두 다 죄인 만들어 놓을 때 비로소 그 질서가 잡히는 겁니다. 교회가 뭐냐? 교회란 사람들의 모임이지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니까 혼자는 교회라 하지 않으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모이면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따지겠지요! 그렇다면 “너는 잘못했다”라고 권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이 있겠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 자체가 법에 의해서 사람들이 잘했다 잘못했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가 생산되는 환경이 되겠지요? 이런 환경이 될 때 예수님의 피가 여전히 이쪽에서 유일한 의로써 유효한 게 되요. 왜냐하면 여기선 뭐가 살아있기 때문에 법이 살아있고 법이 살아 있으면 뭐가 살아 있는 겁니까? 죄가 살아 있지요 “너는 잘했냐? 나는 너 보단 못했지! 그럼 너는 완벽해?”이게 계속 교회 안에서 어떻게 됩니까?
고린도전서 보세요. 그 법을 가지고 서로 고소하고 난리 났잖아요! 서로 네가 잘했냐? 내가 잘했냐? 가 계속 있어줘야 돼요. 계속 있게 되면 예수님의 피와 십자가의 살이 계속해서 유효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에서 사람들은 누굴 쳐다보겠어요? 나는 잘났다하게 되면 자기 이름이죠! 그런데 교회는 누구 이름을 봐야 돼요? 주의 이름을 불러야 되겠지요! 주의 이름을 부르려면
여기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내가 그 사람을 평가해요. 평가 할 때 어떻게 평가 합니까? 내가 아는 법의 지식으로 평가하겠지요! 지켰는데 넌 못 지켰다라고 평가 하지요! 그리고 권고 하겠지요! “회개해라!”이쪽에선“너는 뭐가 잘났냐!”그럼 다른 쪽에서“너를 교회에서 내 보낸다”그러면“잘 먹고 잘 살아라!”하고 나오겠지요!
그렇게 A가 나왔다 하면 그 다음에 조용합니까? 누가 B보고 이야기 하지요 “너는 잘났나?”또 나가겠지요? 그 다음에 C가 네가 잘못해 하고 내보내겠지요?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뭔가 묻는다는 것은 특정 전문가 집단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법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법이 계속해서 한두 번이 아니고 법의 지시와 명령과 법의 지적에 노출 돼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되는 거에요.
그러면 이 사람들이 무얼 의지해야 됩니까? 교회는 우리가 유지하는 게 아니고 누가 유지한다? 주의 이름으로 유지되게 하옵소서! 라고 되겠지요! 이게 뭐냐하면 바로 모든 사람에게 뭐가 통한다? 예수님의 피만 경유해서 통하는 거에요.“나도 죄인인데 당신도 죄인입니까? 아이고! 그런 죄도 용서 받았어요!”그런 죄를 지었습니까가 아니라 그런 죄로 용서 받았습니까가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어떤 사람에게 죄를 권고 할 때 당신이 죄인입니다라고 권고 하면 안되지요 뭐라고 해야 됩니까? 당신이 이런 죄를 지은 죄인이아도 예수님은 피를 흘렸습니다라고 해줘야 돼요. 그럴 때 삐져서 “나는 그 딴것! 예수님의 피 필요 없어! 나는 내가 완벽하게 살았기 때문에 필요 없어!”그러면 그때 어떻게 해야 하냐?“나가세요!”
그러면 땅에서 한 조치가 하늘에서도 인정받는 조치가 되는 겁니다. 이 설명이 이렇게 깁니다. 이 노선이 롤러코스트처럼 한 바퀴 돌고 반전의 반전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보통 교회에서 어떻게 권고 합니까? 교회법 만들어서 어떻게 합니까? “당신은 이걸 못 지켰으니까”라고 하지요!
참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피를 믿습니까? 이렇게 해야 되지요! 행함이 아니고 우리 가운데 주님이 우리를 용서 하는 것을 믿습니까? “나는 내가 열심히 해서 구원 받지 누구로 부터 용서 받기 싫습니다! 그러면 나가세요!” 그런데 실제로 누가 나갑니까? 교회에서 나가세요! 라고 한 사람이 나가게 돼있어요. 왜냐 그 쪽에선 행함으로 굳어진
교회 행정가들 목회자들이 행함으로만 줄곧 유지했기 때문에 누가 쫓겨 나가냐 하면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사람이 쫓겨나게 돼있어요. 그러면 목사님! 누구나 쫓겨나면 주의 사람입니까? 여기서 주의해야 돼요. 그래서 이 내용이 할 말이 많은 거예요.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해라! 주의 이름으로 쫓겨나면 구원받습니까? 그게 아니라니까요!
지금 주의 이름으로 이야기 할 때는 우리 앞에 있는 주의 이름이 아니고 우리를 포함하고 있는 주의 이름입니다. 우리 앞의 대상으로 있는 주의 이름이 아니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살면 구원 받겠지!”그게 아니에요. 그러면 주의 이름 자체가 나의 밖에 계시는 대상이 돼버려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모여야 된다니까요! 주의 이름으로 모이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모여야 된다니까요! 말이 참! 미안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야! 우리 주의 이름으로 모이자!”이러면 이건 교회가 아니에요. 주의 이름으로 모여야 된다니까요! 그러면 “우리 주의 이름으로 모이자!”이러면 안돼요! “주의 이름으로 모였네!”가 돼야 되요. 결과적으로 봐야 돼요. 주의 이름으로 모였네 “나는 내가 알아서 왔다! 나가 주세요!”이렇게 돼야 되는 거에요. 권고해서“나가 주세요!” 이렇게 돼야 되요.
그래서 이런 실수를 해선 안돼요! 주의 능력으로 모였기 때문에 “이 모임에 반대하는 사람은 나가주세요!”이러면 또 안된다니까요! 그걸 왜 자기가 이야기 하는데요! “자! 묻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롯 유다에게 나가라고 했습니까? 본인이 알아서 나갔지요? 그래야 된다니까요!” 그래서 기존 교회가 교회가 아닌거에요! “저 사람은 예수님 안 믿고 부처 믿었기 때문에 망했다!”그러면 안된다니까요!
부처를 믿든, 부처 믿는 사람을 붙여 주셨다고 보면돼요. 걱정하지 말고 목사는 복음만 전하면 돼요. 간단하게 할께요! 이겁니다! 이거 하나만 알면 돼요! 오늘 강의 다 이해되는 거에요.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마라! 이 원칙만 알면 돼요. 그게 개인지 아닌지 내가 알바 아니에요. 우리는 진주만 던지면 되는데 이 생각은 해선 안돼요! 저 사람이 개이지만 진주 던지면 인간될꺼다? 이런 노림수는 우리 소관이 아니라니까요!
우리도 개였어요! 우리 같이 개 같은 인간이 천국가는 것은 주의 이름 때문이니까 주님 앞에서 “저는 개입니다!” 수로보니아 여인처럼 “저는 주님! 개인데요!” 이렇게만 살면 돼지 남 걱정까지 할 필요 없다니까요! 저 사람 꼬실려고 할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거든요! 그런데 니 같으면 믿겠나? 그런데 믿는다 말이죠 그럼 뭐에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마치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최근에 생각한 건데 저는 교회를 뭐로 보느냐하면 교회를‘복면가왕’이라고 봐요! 복면 쓰고 노래 부르는 것, 복면 쓰고 노래 부르는데 사람들이 뭘 기대하냐 하면 나중에 복면이 벗겨질 때 기대하지요 그게 개입니다. 개, 돼지였습니다. 우리는 계속 끝까지 복면을 못 벗게 주께서 하시지요. 왜냐하면 복면 뒤에 내 본 모습이 이미 죽어 없어졌기 때문에 주님의 가면이 나의 가면이 되었어요.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게 주의 이름으로 사는데 거기다가 다시 또 내 이름으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CF에 이런 게 있지요. 대장금을 패러디한 유명한 CF있잖아요. 어린 아이가 임금 앞에서“어째서 너는 다른 사람은 못알아 맞췄는데 너는 어떻게 아느냐?” 하니까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이 “한우를 한우라 하는데 어떤 말이 필요합니까? 딱! 한우인지 다 알수 있는 데 한우를 한우라고 하지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느냐? 주님이 구세주인 것을 다 아는 데 어떤 말을 더 합니까? 네 정체를 밝혀라!”정체를 밝힐 필요 없어요. 주님은 그냥 주님이지. 내 정체를 보탤 필요 없거든요! 내가 누구이기에 주님을 알아챘다고 할 필요 없어요! 그냥 내 본 얼굴이 주님의 가면이고 주님의 가면이 주님이고 그래요! 그게 주의 이름이에요. 그리고 바람 같아요. 항상 모일 때 주께서 바람으로 불러서 모인 거에요. 흩어질 때도 바람으로 흩어진 것이고,
여러분! 전부다 복면가왕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인 얼굴 내놓지 마세요! 내놔봐야 늙은 죽을 얼굴들인데 보고 싶지도 않아요. 전부다. 주의 이름의 얼굴을 쓰고 다 오시는 거에요. 따라서 만약에 진짜 개이면서 돼지이면서 그럴싸하게 주의 이름 붙이고 복음전하면 그 복면 다 벗겨져 버립니다. 들켰구나! 그게 바로 가롯 유다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택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택했지만 다른 제자들은 가롯 유다를 자기들의 형제로 자기들의 한 교회로 간주했다는 사실, 왜냐 귀신을 쫓아 냈거든요. 주의 능력을 행했거든요!
그러니 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모인 12명이라고 믿었고 이 시대의 12지파를 대표하는 마지막 때 12지파라고 생각했지 누가 그 사람을 사탄이 들어갔다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에게 “네 할일을 해야지!”라고 한 것을 다른 제자들은 유다가 빵 준비하는데 비용이 들어갔고 그가 회계 담당이었기 때문에 오늘 얼마가 들었습니까? 그가 장부처리 하라고 한 것으로 알았지요!
예수님을 팔아먹으려는 건 몰랐지요. 나중에 알았지요. 우리가 눈치 채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주님은 빈틈이 없고 실수가 없고 하자가 없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때에 다시 살리십니다. 이건 실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실수 없으신 주님을 믿어야지 그걸 눈치 챈 나를 믿으면 안돼요. 나를 믿으면 복면 벗어버리고 자기 자랑 할 수 있어요.
두번 째 제목을 뭐라 한다 했습니까? 허락. 복면가왕이라 할걸,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였다는 말은 세명, 다섯 명, 열 명 되기를 바라지 마라! 두세 사람도 내 이름으로 모였으면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너희를 모이도록 만나게 해 주셨는가! 만약 두세 사람이 모였다면 그건 모임이 아니고 만남이지요. 두세 사람 밖에 없으니까!
우리 가운데 주님이 함께 계시다! 이것은 우리가 어느 장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게 아니라 그런 시절은 끝났습니다. 주께서 함께 계신 곳에 주의 뜻으로 모였다면 이미 그것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주와 함께 있는 것인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을 저희가 감사합니다. 이것이 성령안에서 이루어진 일 인것을 우리는 날마다 되새겨 가면서 느끼고 또 느끼고 또 감사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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