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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강의- 악의 원천 1507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9. 13. 07:45

2015-07-21 22:06:39 조회 : 223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5 - 악의 원천 이름 : 구득영 (IP:203.223.97.152)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5 - 악의 원천
                                                                                
                                                          15,07,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잃어버린 구조를 찾아서 !!

오늘은 교재 115페이지부터 살펴보자. 여기에 보면 '6강, 잃어버린 구조를 찾아서' 라고, 제목이 아주 거창하게 되어있는데 말이다. 구조라고 하는 것은 단 하나로 되어있다고 하면 의미가 없는데, 그런데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서로 상반된 내용이라고 하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어렵게 해서 죄송한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에 나만 있다" 라고 하면 사실은 그 '나' 라는 것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나' 라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너가 있으매 나가 성립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것은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전부이기 때문에 말이다. 동일한 내용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 자체로서는 구조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내가 아닌 다른 너가 있으매 !!

예를 들어서, 이렇게 앙코만 있다고 하면 그것은 빵이라고 할 수 없는데, 거기에 밀가루가 섞여서 겉을 만들고, 그 안에 앙코가 있을 때, 그것을 빵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바깥은 밀가루 부분이고 그 안은 앙코가 있을 때, 그렇게 서로 다른 부분이 있을 때 구조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앙코 덩어리만 있으면 그것 전체가 앙코이지 빵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다" 라고 할 때는, 반드시 '나' 라는 것이 아닌, 그것을 자연, 혹은 대자연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대자연 속에서 내가 무엇인가?" 라고 할 때, 그 전체를 합쳐서 구조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옛날의 경우에, 가장이 자기가 혼자 살면 "나는 내 집에서 산다" 라고 하면, 그것은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 산다" 라고 하면, 그러면 그것은 '나' 말고 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다. '나' 말고 '우리' 라라는 것이 말이다. 그러면 그 '나' 말고 따로 있는 것은 '나'에게 흡수통합이 되겠는가? 안 되는데, 그러니 뭔가 갈라지고 분류가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 그러면 구조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오늘 이 시간에 '잃어버린 구조를 찾아서' 라고 할 때, 그 구조가 동일한 것이 있으면 구조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제가 어렵게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그러면 쉽게 이야기해서, "구조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선이 들어있고 악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이 들어있고 악이 들어있으면,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 질문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대답을 하자면,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언제가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싶은데, 즉 "사람이 사라지고 난 뒤의 현장에 진짜 사람이 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그 앞에 무엇인가가 붙는다.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 라고 말이다.

그게 교재에 나오는 잠언서 11장 27절 말씀인데, 한 번 살펴보자.

(잠 11:27)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여기 27절에 보면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는 선도 찾지 않고 악도 찾지 않을 거야" 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구조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곧 전부이니 말이다.

◈ 나를 나 되게 하는 원천의 시스템 !!

처음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구조라고 할 때는, 그것은 바로 자기 말고, 즉 자기에게 통합이 되지 않고 섞이지 않는 다른 요소가 있을 때, 그것을 구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구조를 찾아서' 라고 할 때는, 그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까, "나를 나 되게 하는 그 원천의 시스템을 한 번 알아보자"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지 않고 말씀을 도외시하게 되면 이 세상에 자기만 있다고 여기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의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왜 태어났으며, 나는 왜 만들어졌으며, 나는 죽어서 어디에 가는가?" 라고 하는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젊었을 때는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지만, 그러나 나이가 80이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친구들은 다 떠나가고 자기 혼자 남게 되면, 살아있을 때도 자기 장래를 걱정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 앞으로 10년 뒤에 자기가 어디로 갈지, 그것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10년 뒤에 나이가 90이 되어서 "나는 나밖에 없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객기를 넘어서 노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치매' 라고 고상하게 말을 하지만, 그게 그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젊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때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사람은, 자기에게 친숙한 것들이 살아있으면 죽음을 느끼지 못해 !!

그러면 젊었을 때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 그것도 다 원리가 있는데, 자기에게 친숙한 것들이 살아있으면 사람은 죽음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러니 인간이 똑똑해 보여도 정말 바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족 중에서 누가 죽는다든지, 혹은 친구 중에서 누가 죽는다고 하면, 부모님이 돌아가시든지 말이다. 그러면 자기가 생각하는 현실이 그만 뭉개진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 인간은 항상 그림을 그리기에 !!

인간은 항상 그림을 그리는데, 그렇게 자기가 그리던 그림이 그만 지워지든지 하게 되면, 그림만 약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만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린 그림 안에 자기가 놓여있을 때 가장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데, 마음의 평안을 얻고 말이다.

그래서 자기 자식도 자기 그림 속에 같이 있어야만, 그래서 남편도 오후 6시가 되면 칼퇴근을 해서 집에 들어오고 말이다. 강아지도 자기 말을 잘 듣고 말이다. 그럴 때, 그렇게 구색이 갖추어질 때 가정주부는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머님도 때에 맞추어서 들어오시고 말이다(ㅋㅋ). 

그래서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배우자인 아내가 죽든지 하면, 남은 사람은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되고 마는데, 그야말로 안절부절인데,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가 아닌데, 뭔가가 뻥 뚫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세계의 무너짐인데, 즉 붕괴라는 말이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해' 라는 노래가 나왔는데, 죽은 김자옥의 신랑인 오승근이 부른 유명한 노래라는 것이다.

뭔가가 와장창 무너지고 마는데, 그래서 정말로 정이 있었던 사람은 1년 안에 따라서 그만 죽고 만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가 키우던 애완견이 죽어도 우울증에 걸려서 6개월만에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러니 강아지가 사람을 따라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강아지를 따라서 죽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은 자기가 속해있던 그림이 무너진 것인데, 그러니 남아있는 자기가 어떻게 걸칠 수 있는 적당한 그림들이 없다는 것이다. 즉 "그때 그 그림이 아니면 내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다시 자기를 찾기 위해서는 적합한 것을 찾아야만 하는데, 그렇게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 그들로 말미암아서 구성이 되고 구축된 '나' !!

물론 젊은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여자가 남편과 사별하고 난 다음에는 어쩔 줄을 모르는데, 어떻게 해서 선을 보더라도 그 상대방은 언제나 죽었던 자기 남편보다는 미흡하고 부족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그림이 있어야만 자기가 성립이 되니 말이다.

그래서 자기를 찾는데 있어서 거울을 보고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했던, 자기가 정성을 다했던, 자기가 투자를 했던, 그렇게 자기가 마음을 두었던 것들이 있을 때 비로소 자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다만 자기가 정을 주었던 것들의 배치 속에서 비로소 '나' 라는 것이, 그들로 말미암아서 구성이 되고 구축이 된다는 것이다.

◈ 자식은 부모의 가슴에 !!

이것을 말로 표현하니 굉장히 복잡하게 여겨지는데, 사실이 그렇다는 말이다.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고 마음이 편한 부모는 없는데, 오죽 했으면 "자식은 산에 묻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 라는 말이 다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자기 마음에 묻어주어야, 옛날의 그 그림이 유지가 된다는 여겼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어제 우리 어머니에게 시동생이 찾아왔는데, 저에게는 삼촌인데 말이다. 그래서 제 아내가 물었는데, "어머님,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인 것 같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누구의 노래처럼, '아들인 듯 아들이 아닌',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 아내가 아무리 치매증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머니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삼촌입니까? 아들입니까?" 라고 하니까, "물론 삼촌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정녕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렇게 묻더라도 자기 앞에 등장한 그 남자로 인해서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다시 정리하는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그 어느 순간에도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유명한 연예인에게 "당장 지낼 곳이 없으면 허름하지만 여기서라도 좀 지내세요" 라고 하니,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가? "감히 내가 누구인데 이런 곳에서 산단 말인가? 그래도 나는 고급 아파트에서 살던 사람이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고급 아파트가 시설이 좋아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 고급 아파트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객기를 부리면서 "나는 이런 곳에서 살지 않아. 나는 고급 아파트에서 살았어"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왜 성경말씀을 보지 않는가?

그래서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잃어버린 구조, 그런 것을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미 구조는 찾았는데, 그 구조가 누구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 곧 구조라는 것이다. 즉 자기가 만든 세계, 자기가 이 자연 속에서 필요한 것들을 끄집어내서 나름대로 구축한 것이 곧 자기 세계라는 것이다.

왜 전두환 시절에 찍혀서 그만 공중분해가 된 대기업이 하나 있었는데, 부산에다가 적을 둔 '국제그룹' 이라고 말이다. 그 당시 재계순위가 7위인가 그랬는데, 그렇다면 그 국제그룹 회장의 경우에는 어떠하겠는가? 얼마나 괴로운지 모른다는 말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아무리 회사가 망해도 남아있는 돈이 많으니 부러워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 회장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왜냐하면 국제그룹이 곧 자기 자신이니까 말이다. 국제그룹은 일종의 회사가 아니라, 평생을 살아가면서 일구어낸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그만 전두환에게 빼앗기니 과연 그 기분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분이 아마 양정모 회장이지 싶은데 말이다. 맞지요?

그러니 아무리 자기 몸이라고 해도 자기의 것이 아닌데, 우리의 몸은 이미 자기를 떠나서 자기만의 절대적인 영역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기 자식도 있고 남편도 있는데, 그렇게 가정도 있고 집도 있다는 말이다.

오늘은 초반부터 성경을 한 구절 더 보겠는데, 이런 경우는 별로 없는데 너무 중요해서 말이다(ㅋㅋ). 마가복음 5장인데, 1절부터 15절까지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막 5: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막 5: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막 5: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막 5: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막 5: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막 5: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막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막 5:8)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막 5: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막 5:10)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막 5: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막 5:12)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막 5: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막 5: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막 5: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 주여, 왜 나를 괴롭게 하십니까?

그런데 여기 7절에 보면,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라고 되어있는데, 물론 전에도 이 구절을 설명했었지만, 저는 이 구절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데 말이다.

여기에 보면 귀신이 누구를 알아보는가?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짧은 상식으로는 어떠한고 하니, 귀신이 들린 청년이 그렇게 예수님을 안다면, 그러면 그 예수님에게 자기를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제가 이 본문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구조라는 것은 자기 말고 이질적인 것과 합쳐서 구조라고 한다고 했는데, 그러니 자기 밖에 없으면 구조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귀신이 들린 청년을 찾아갔는데, 그 청년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맞지요? 제가 알아봤지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그 다음에 그 청년이 "그러니 저를 구원해주세요" 라고 하지 싶은데 말이다.

◈ 나는 주님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 !!

그런데 정작 그게 아니라 뭐라고 하는가? "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구조라는 것이다. 도리어 예수님을 멀리하고 밀어내고, 즉 "나는 예수 당신과는 살기가 싫어요. 나는 영원토록 당신과 같이 있지 않을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옥인데, 즉 "주님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 라고 하면서 주님을 밀치는 것을 합쳐야, 그게 곧 구조라는 말이다. 

그것이 곧 구조인데,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 예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구조적으로 이미 어떠한가?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가더라도 너무나도 당연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아도 멀쩡하다고 여기는데, 그런데 막상 주님이 나타나면 뭐라고 하겠는가? "주님, 저를 괴롭게 하려고 오셨습니까?" 라고 노골적으로는 나오지 않겠지만, "주님, 저의 지난 20대 인생을 그렇게 망가지게 했습니까? 제가 그것을 회복한다고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게 바로 주님이 자기를 괴롭게 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이미 재벌3세와 선을 봐도 일이 다 되가는데, 그런데 어떤 남자가 나타나서 강제로 자기를 추행하는 바람에 그만 그 남자와 결혼을 해서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재벌 3세와 잘 되게 두었으면 되는데, 자기 인생을 왜 이렇게 만들고 말았느냐는 것이다.

◈ 내 인생을 보상하라, 보상하라 !!

이런 내용을 새벽기도시간에 아무리 자기 혼자서 중얼거려도, 그것을 함축하면 무엇인가? "주여, 왜 나를 괴롭게 하십니까?" 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따지기 위함인데, 자기 인생을 보상하라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아까 잠언서 11장 27절에 나온 말씀처럼, 즉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한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지옥도 타고 나야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아무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옥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데, 그것이 곧 성도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것이다.  

(잠 11:27)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그러니 성도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데, 결코 지옥으로 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간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허리띠를 쥐고 잡아당기겠다는 것인데, 베드로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오 목사님, 허리띠를 당깁니다 !!

과거에 오용익 목사님이 계시던 무안교회에서 그런 일을 있었는데,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의 설교에 반대해서 허리띠를 잡아당겼다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목사님, 설교를 왜 그런 식으로 합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즉 "우리는 복음을 원하지 않는데, 그런데 왜 전합니까?" 라는 것인데, 그래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목사님, 왜 우리를 괴롭게 합니까?" 라는 것인데,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라는 말이다. 즉 사람을 기쁘게 해주어야지,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자기를 기쁘게 해달라고 교회에 왔다가, 막상 주님을 기쁘게 해주면 나가버리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이미 구조적으로 사탄이 지배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데,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이 미워하거든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라고 하는데, 원래 이상하니 말이다. 

(요일 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구조는, 선과 악의 구조밖에 없어 !!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왜 오해하는고 하니,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보기 때문인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구조를 놓치고 만다는 것이다. 구조라는 것은, '나' 라는 것은 없고, 선과 악의 구조밖에 달리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선이 주어지게 되면 선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가고, 반면에 악이 주어지게 되면 악한 사람이 되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을 큰 그림으로 펼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라는 것이다. 큰 그림으로 펼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젊은 사람들은 자기 코앞의 일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지도를 보더라도 넓게 봐서 "여기는 노르웨이고, 또한 여기는 필리핀이고" 라고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우리가 지리산에 왔는데, 칠성계곡은 어디로 들어가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인생은, 결국 죽음의 세계 !!

물론 자기가 칠성계곡에 놀러 갈 때는 그렇게 하면 되겠지만, 하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아 가면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젊었을 때는 제대로 취직을 하는 것이 급하고 방 하나를 얻는 것이 급하지만, 하지만 그런 인생을 다 지나면 결국은 무엇인가?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넓은 세계, 바로 그것이 죽음의 세계인데 말이다.

그런 입장에서는 "우리 집 앞에 누가 쓰레기를 또 갖다 놓았노?" 라고 하면서, 그런 것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좀 넓게, 이 세상보다도 더 넓게, 그렇게 해서 영적 세계에까지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적 세계에 들어가면 자기는 모래알이 되고 마는데 말이다.

◈ 인생은, 안개이고 모래알 !!

그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안개라고 할 수가 있는데, 물론 모래알은 손에 잡히는 알맹이라도 있지만, 안개는 그런 것도 없다는 것이다. "너희는 안개니라" 라고 해서, 즉 우리는 물방울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아침에 있었는데, 그런데 10시도 되지 못해서 그만 사라지고 마는 말이다. 우리는 바로 그런 물방울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사실은 젊었을 때 이런 말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 이상한데, 도대체 20대가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분이 있었는데, 하기는 80이 되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런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전체 구조를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전체 구조를 아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지난 시간에도 했지 싶은데, "원천을 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것을 말이다. 즉 "선이 어디서 나오고, 악이 어디서 나왔는가?" 라는 것이다.

◈ 도대체 악은 어디서부터 나왔는가?

그래서 오늘 강의는 제목을 '악의 원천' 이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즉 악의 뿌리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말이다. 즉 "도대체 악은 어디서부터 나왔는가?" 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고 보니 주제가 너무 거창한데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알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먼저 악의 원천에 접촉한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수시로 짓는 죄는 말고, 그런 것은 회개하면 되니까 결코 악의 원천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쿠,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해서 없어진다면 말이다. 그러니 악의 원천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인고 하니,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악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그것이 곧 근원적인 악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 근원적인 악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악(惡)' 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악에다가 무엇을 조금이라도 붙이게 되면 그 원에서 빗겨나고 마는데, 즉 근원의 부속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근원적인 악이 아니라 주변의 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선과 악이 공존하면 근원이 아냐 !!

예를 들어서, "내가 거짓말을 했다" 라고 하면, 그러면 거짓말을 한 것이 분명히 악인데 말이다. 그런데 자기는 거짓말은 했지만 살인은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렇게 거짓말을 한 것만 악이 되고, 살인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남을 도와준 것은 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선과 악이 공존하게 되는데, 그것은 근원적인 악이 아니라는 말이다. 악의 원천에 접근하지 못하고 그 주변만 빙빙 돈다는 것이다.

◈ 악의 근원을 알았던 다윗 !!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뭐라고 하는가?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근원적인 악이라는 것이다. 즉 다윗이 악의 근원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다윗에게 특별한 임무와 사명이 주어졌기 때문으로, 다윗이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그렇게 알게 된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다윗언약이라는 것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도 걱정이 슬슬 되지 싶은데, 어려워지려고 하니 말이다. 저도 이렇게 되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는데, 지금 그림이 엄청 크게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이제 성경을 좀 찾아보겠는데, 먼저 시편 60편을 살펴보자.

시편 60편이 아니고 이사야 60장인데, 1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사 60: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여기에 '네' 라는 것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것이 누구인가? 방금 제가 다윗언약을 이야기했는데, 그 다윗언약이 원천이 되는데, 물론 악의 원천이 아닌 구조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원래의 원천적인 구조가 등장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원천적인 악도 같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오늘 강의주제가 "악의 원천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지금 우리가 추적해보고 있는데, "악은 악이다" 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원천적인 악에 접촉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가 시편 51편에서 다윗이라고 지목했고, 그리고 그것을 다윗이 머리가 좋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다윗은 어떤 하나님과 관계가 되는고 하니, 다윗언약을 표현해주는 모습으로 있다는 것이다.

◈ 성도는, 새언약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는 새언약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데, 그것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마음속으로 당부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무엇을 하면 구원을 받겠습니까?" 라는, 제발 그런 것은 가위표를 쳐달라는 말이다. 이제 그런 것은 잊으시고, "주님께서 무엇을 하시기 위해서 나를 덮쳤습니까?" 라고, 그게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구원은 자기가 소유하는 것이 아닌데, 마치 소나기가 오면 맞듯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어디 소나기에게 오라고 한다고 해서 소나기가 오는가? 자기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구원아 오너라" 라고 한다고 해서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착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구원이 덮치게 되면, 즉 다윗언약이 덮치게 되면 다윗은 악의 원천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구나" 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서 다윗이 뭐라고 하는가? "나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만 죄를 지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원천적인 악은, 하나님에게 대든 것 !!

그러니 진짜 원천적인 악은 무엇인가? 사람에게 짓는 죄가 아니라,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대든 것, 그것이 바로 악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대든 그 원천적인 악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다윗언약에, 즉 새언약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원천적인 악을 모르기에 매일 같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바르게 살아야해. 주님이여,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윤리이고 도덕이라는 말이다. "제가 예배시간에 또 늦게 왔습니다. 그래도 이번 주에는 제발 벌을 내리지 마소서"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것은 자기 행복을 지키는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자기가 원천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만약에 다윗이 원천이라고 하면, 즉 "내가 밧세바와 간음을 했고, 또한 그의 남편을 위험에 빠트려서 죽인 나쁜 놈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윗이 자기가 자기를 살려서 원상회복이 되려고 시도하는 악에 속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다윗은 뭐라고 하는가? "나는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세상에 그런 뻔뻔한 인간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야 장군은 누구 손에 의해서 죽었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밧세바는 자기 마누라인가? 그런데도 뭐라고 하는가? 자기는 사람에게는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지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런 미친놈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 야호, 나는 내 몸에서 벗어났다 !!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윗은 이번 사건을 통해서 자기는 원천이 아님을, 즉 "나는 나에게서 뛰쳐나올 수 있었다. 나는 내 몸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는 자유라는 말이다. 자기에게서 탈출하는 말이다.

그리고 뒤돌아보니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닌 처음부터 주님의 몸이었는데, 자기가 그동안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착하게 관리를 해야하는 자기 몸인 줄로 알았는데, 그렇게 하면 주님이 잘했다고 하면서 천국에 보내줄 줄로 말이다. 다윗이 그동안 그렇게 종교생활을 해왔는데, 즉 교회생활을 그렇게 해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다윗으로 하여금 강제로 죄를 짓게 하시는데, 아니 강제라기보다는 구조적으로 죄를 짓게 하셨는데, 왜 그런가? 자기가 보니 여자의 뒤태가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 뒷모습이 코가콜라 병처럼 생긴 사람과 맥주병처럼 생긴 사람하고는 어떠한가? 어디가 허리이고 엉덩이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사람을 보고 무슨 음욕이 생기겠느냐는 것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눈을 다 버렸다" 라고 나오지 말이다(ㅋㅋ).

◈ 왜 그리 아름다운가?

왜 그리 아름다우냐는 것인데, 즉 왜 선악과가 그렇게도 먹음직하냐는 말이다. 저는 가끔 상상을 해보는데, 하와가 보기에 아담이 얼마나 잘생겼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선택의 여지는 없는데, 남자가 하나밖에 없으니 말이다(ㅋㅋ). 그렇게 한 몸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는데, 그래서 결혼을 하면서 "한 눈에 반했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딱 보면 안다는 말이다.

아무튼 다윗은 이 세상의 65억 모든 사람들이 아무도 하지 못한 엄청난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다른 종교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신은 신이고, 나는 나다" 라고 하는데, 즉 "신께서 나를 만들었으니, 신께서 영광을 받으세요" 라고 하는데, 그것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공통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뭐라고 하는가?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조건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언약의 구조가 나에게 덮침으로서, 악의 원천도 같이 덮쳤군요" 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이는 죄를 지음으로서 자기에게서 자기 몸을 놓게 되는, 즉 다윗은 자기 몸에서 도망칠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 비켜라. 뱀을 쏘겠다 !!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비켜라. 뱀을 쏘겠다" 라고, 그렇게 해서 총을 가지고 뱀을 쏴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뱀을 깔고 앉아서 "앞으로 잘할게요. 착하게 살게요. 성화를 할게요"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자리에서 비껴야 하는데, 그 자리는 뱀의 자리이고, 거기서 비켜야만 비로소 뱀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터치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즉 "물과 성령으로 터치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인데, 즉 아무리 제 자리에서 뛰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무슨 뱀하고 같이 탱고를 출 일이 있느냐는 것이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 십자가가 무엇인가?

그러니 성령은 우리가 "나는 나다" 라고 여기는 것을 강제로 떼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이니 말이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죽고 다시 사흘만에 살아나는 것인데, 그렇게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예수님이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사셨다고 하는 거기에 적용된, 거기에 쏟아 부었던 인간들의 모든 율법적인 해석들이 전부가 죄악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목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오전 9시에 달려서 오후 3시에 돌아가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은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이고, 그리고는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면 안 되고 말이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에 부활을 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안식일 다음 날에서 3일을 빼면 그게 바로 목요일이라는 것이다. (녹취자 - 예수님이 죽이신 날이 금요일이 아닌가요?)

◈ 십자가에게는, 인간들의 모든 열정이 !!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여하면서 무엇이 모아졌는가? "우리는 성경해석을, 율법해석을, 유월절 해석을, 안식일 해석을 이렇게 한다" 라고 하는, 그런 인간들의 해석이 다 집어넣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 집어넣어진 것이 십자가 안에 모아져있는데, 그런데 그렇게 모아진 것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인간의 모든 절기 지키기가, 즉 안식일 지키지, 안식일 해석하기 등이, 그것이 바로 저주를 받을 짓이라는 말이다. 간음하고 살인하는 것만 죄가 아니라, 그것은 원천에서 파생된 죄인데, 여기서 파생이 되었다는 것은 마치 부채살처럼 퍼져있다는 의미인데 말이다.

◈ 파장이 일어나서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지금 우리가 악의 원천에 대해서 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연못이 있는데, 여기에 풍덩 돌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파장이 생기는데, 이것이 이쪽으로 생긴 것이 살인죄라고 하면 저쪽으로 퍼진 것은 절기 지키기이고, 또 이쪽으로 퍼진 것은 간음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쪽은 십일조하기가 되고, 또한 아이 잘 키우기도 들어있는데, 그러니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 모든 것이 다 말이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여기에 이렇게 파장이 있는데, 도대체 그것이 어디서부터 유발된 것인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다윗은 다윗언약의 혜택을 입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께서 원천자가 되어버리니 다윗이 뭐라고 하는가? "내가 주께만 죄를 지었다" 라고 나오는데, 그 나머지 것들을 다 거기서 파생되어서 나왔다는 말이다.

우리가 다윗을 따라할 필요는 없어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윗에 부러워서 "나도 다윗처럼 그렇게 할까?" 라고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누가 대신해서 다 하셨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죽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는가? 그게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을 때, 자기가 과거에 무슨 짓을 했던지 간에, 그것과 상관없이 자기는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잔인한데, 사도바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자의 가족들은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말이다. 자기는 사람을 죽여놓고도 구원을 받고,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실 때 왜 그렇게 불공평하게 보이는 조건들을 동원시켜서 하시는고 하니, 인간이 하는 모든 인간 자신의 일은 자기를 망치게 하고 저주를 받게 하고 지옥에 가게 하는, 그런 일을 지금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하는 일이 지금 자기를 잘못된 길로 하게 하는, 그런 일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것이 무슨 내용인고 하니, 2차 대전에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했는데, 거기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수용소를 만들어서 가두어놓았데, 그 수용소 근처에는 사령관의 가족도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사령관의 아들과 포로로 잡혀있는 같은 또래의 유대인 아이가 서로 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말이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무엇인고 하니, 수용소의 친구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어제부터 자기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서로 친구니까 같이 찾자고 하면서, 그렇게 하려면 옷을 자기가 입는 수용소 옷을 입어야 하는데, 그래서 그 사령관 아들이 같이 죄수복을 입고 친구를 따라서 수용소에 들어가서 친구를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모두 집합을 시켜서 그만 가스실로 데리고 가서 죽여버리고 마는데, 그것이 마지막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사령관이 자기 아들을 찾는데, 그 아들이 그만 가스실에서 죽어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만 하나밖에 없는 독자가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기의 명령에 의해서 그만 유대인들과 함께 아들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 가스실의 시커먼 내부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러면서 등장인물들 알리는 자막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인데,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기가 살려고 하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살리라" 라는 것인데, 이게 이승만 대통령이 한 말이 아니고,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 성경말씀을 보지 않을 거야. 나는 그냥 내가 열심히 살 거야" 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가스실로 들어가는 길목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종교를 선택하겠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지옥에 가는 길이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교회에 가도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 구조는, 덮치는 것 !!

그러니 선택이 아니라 덮치는 것인데, 소나기가 나오는데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소나기가 아닌 햇볕이 내려 쬐는 것으로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대부분이(모든 것이?)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샤르트르의 말대로 우리는 그냥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을 투사(投捨), 즉 '피투성 존재(被投性 存在)' 라고 하는데, 그렇게 던져져보니 재벌3세이고, 또한 던져져보니 매일같이 술 먹고 싸우는 집안의 자식이더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 그러니 "내 팔자가 왜 이런가?"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 자신이라는 것이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운명이라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구조적인 운명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 '나' 라는 것은 구조를 구조답게 하기 위한 똘마니 !!

교재를 다시 보겠는데, 115페이지에 보면 잠언서 11장 27절 말씀이 나오는데 말이다. 즉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인간보다 선이 먼저 있고 악이 먼저 있다는 것이다.

(잠 11:27)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그러면 인간이 아무 것도 찾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을 찾거나 악을 찾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말이다. 그렇게 찾게 되면 "아하, 선만 있고 나는 없고", 혹은 "악만 있고 나는 없고"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나' 라는 것은 구조를 구조답게 하기 위한 하나의 똘마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잠언서가 보여주는 지혜이고 진리라는 말이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 라고 물었는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니가 그것을 알아서 무엇을 하려고?"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즉 "너는 이미 진리 때문에 내 앞에 있다" 라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라고, 예수님이 곧 진리라는 것이다. 바로 그 진리를 진리답게 보여주기 위해서 빌라도가 지금 예수님 앞에 있다는 말이다.

(요 18: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 1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요 18: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요 18: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하지만 그것을 본디로 빌라도가 알 길이 있겠는가? 물론 우리도 성령이 아니면 모르고 말이다. 우리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뭐라고 하는가? "주여, 어떻게 잘 믿으면 구원을 받겠습니까?" 라고, 매일같이 육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일이 좀 꼬이고 하면, "제가 이렇게 열심히 교회에 잘 다니는데 왜 괴롭게 하십니까?" 라고 하고 말이다. 수시로 마귀복음(?)이 튀오나오는데, "망했다. 망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제가 '망했다' 라는 표현을 평소에 쓰면서도 상당히 조심스러운데 말이다. 그런데 그분이 전화를 해서 "목사님, 저에게 대해서 얼마든지 망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라고 하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의 권위를 찾아가는 것이 그렇게 힘드는데, 그러니 힘들게 질질 끌고 가려고 하지 말고 버리고 가라는 것이다.  

◈ 두 개의 '나' !!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나'를 짊어지게 되면, 짊어지는 '나'는 무엇이고, 그렇게 짊어짐을 당하는 '나'는 무엇이냐는 말이다. 이게 꼭 두 개가 된다는 것이다. 못난 '나', 그리고 그 못난 '나'를 괜찮게 만들려고 하는 '나', 그것이 모두 허상이고 가짜라는 말이다.

그러면 진짜는 무엇인가? 진짜는 오직 주님에 의해서 지금의 '나'가 있다는 것이다. 즉 "내가 있음으로 주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계심으로 내가 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연결된 선, 즉 그런 관계를 두고 '선(善)'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렇게 선해지려고 시도하는 예를 한번 들어보자는 것이다. 

◈ 주님 앞에서 뒤 돌아설 수밖에 없는 인생 !!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청년이 나오는데, 그가 예수님을 보고 "제가 선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한데, "나를 따르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청년이 처음부터 "제가 선을 찾으려고 왔습니다. 선과 연결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해서, 주님이 "나를 따르라" 라고 하면, 청년은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 간단한데 말이다.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런데 그 부자청년의 태도는 그것이 아니라 수상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십일조를 했고 어쩌고 하면서 되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자기는 선을 찾으려고 왔다가, 그 선을 눈앞에 두고 뒤돌아서는 아픔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다 왔는데, 그런데 뒤돌아 설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주님은 일류 요리사 !!

그러니 그것은 바로 자기를 자기를 질질 끌고, 자기 방식으로 자기를 선하게 만들려고 하니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못난 놈이니 그냥 맡겨버리면 되는데,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이다. 자기가 뭐라고 마치 음식의 간을 보듯이 하면서 난리를 치느냐는 말이다. 음식이 달든지 맵든지 하는 문제는, 그것은 일류 요리사인 주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단 음식은 달게, 매운 음식은 맵게, 그렇게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 인생이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왜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그 더러운 행세를 누구에게 배웠느냐는 말이다. 물론 마귀에게 배운 것인데, 그러면 이왕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을 주님께 맡기자는 것이다. 자기가 음식을 만들다가 실패를 해서, 이제는 조미료를 아무리 넣고 해도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을 주님께 맡기자는 말이다.

◈ 너와 네 자손의 영원한 응식이니라 !!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주님은 일류 요리사이니 우리가 만든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주시는데, 그것을 레위기에 보면 '응식(應食)'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즉 하나님이 응답하신, 하나님이 받으시고 만들어주신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레 10:15) 그 든 뒷다리와 흔든 가슴으로 화제의 기름과 함께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너와 네 자손의 영원한 응식이니라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이미 예수님은 음식이 있다고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요리사인데, 어떤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일요일에만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일류 요리사라는 말이다. 오른쪽으로 비벼도 괜찮고, 왼쪽으로 비벼도 괜찮다는 것이다(ㅋㅋ).

(요 4: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 4: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요 4: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 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것을 두고서 '언약' 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언약이 덮치게 되면 '나' 라는 것은 없어지고 진짜 선과 악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악의 원천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 시동만 걸었지 말이다. 여기서 이사야 60장 19절을 다시 보자.

(사 60: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그리고 창세기 1장 16절을 보면, '광명' 이란 것이 나오는데, 즉 '빛 덩어리' 라는 것이다. 이것이 낮과 밤을 주관하는데,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이 말이다. 그러면 해와 달이 빛의 원천인가? 아닌가? 아닌데, 빛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말이다. 빛이 따로 마련되어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연세계에 박아놓았다는 것이다. 

(창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여자들의 브라우스에 보면 마치 보석처럼 보이려고 유리를 가공해서 박아놓은 것이 있는데, 60년대 패션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 어머니가 옷 장사를 해서 좀 아는데(ㅋㅋ),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그 옷이 없어지면 박아놓은 유리조각도 같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 이불을 벗겨라 !!

그래서 어제 설교시간에 "대자연은 껍질이다" 라고 했는데, 즉 안쪽과 바깥쪽이 맞닿은 껍질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노아홍수 때는 뜯어내어 버렸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가 둘이서 서로 엄마아빠놀이를 하자고 하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곤거리고 있는데, 그런데 엄마가 와서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이불을 치워버리면, 아이들은 "아이쿠, 부끄러워요" 라고 하는데 말이다.

이와 같이 자연이라는 이불을 벗겨버리게 되면, 그 안에서 마귀가 죽음의 세력으로 인간들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우리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한다고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고, 모두가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있는, 그런 소꿉놀이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 자연을 벗기게 되면 그것이 다 보인다는 말이다. 주님은 그렇게 담요를 벗기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 담요 속에는 교회도 있는데, 예배당을 지어놓고 헌신예배를 드리고, 그런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 망설이지 말고 우리교회로 오세요 !!

어제 대구의 큰 교회에 있는 장로님이 방문을 하셨는데, 부부가 말이다. 저의 설교를 듣고서 그래도 변화가 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목사님,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찬송가를 부를 때 손을 높이 들고 하는데, 그런데 이제 저는 그 손을 조금밖에 올리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장로님의 부인은 우리교회로 나오자고 하는데, 아직 장로님은 그 정도는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거치려고 하지 말고 주님과 바로 교제를 하시면 됩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아니고 말씀이고 주님이니 말이다. 

그러니 교회도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데, 교회법을 만들어가면서 말이다. '퇴행' 이라는 말이 있는데, 어른이 다시 아이의 수준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주의 이름으로 교회가 아이들의 그런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로와 집사라는 계급장까지 달면서 말이다. 높은 계급을 주면 또 헌금을 왕창 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계급을 확 벗겨야 하는데, 마치 부정행위를 하다가 들킨 느낌이 들도록 말이다.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안식일을 이야기하니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 속에서 나온 것이 더 더럽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하면 죄가 아닙니다" 라고 하니, "어디서 그런 꼼수를 쓰고 있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막 7: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막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막 7: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 우리는 껍질밖에 없는 양파 !!

여기 창세기 1장에서 '광명' 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양파껍질이라는 말을 왜 했는고 하니, 양파의 특징은 껍질밖에 없다는 것이다. 벗기고 벗겨도 말이다. 바깥이 있는 그 얇은 막과 같은 껍질 말고 안에 들어있는 하얀 것 말이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러한 껍질인데, 그러니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벗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벗기면서 우리 자신이 안개임을 깨닫게 되는데, 즉 우리 자신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쓰신 주님의 몸만 있었지 말이다. 주님이 우리 몸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 몸의 내용이 주님이 알아서 다 채우시는데, 즉 "너는 나처럼 영광을 받아야하고, 천국에 가야한다" 라는 것은, 그것은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이다. "너는 천사로부터 찬양을 받아야하고, 천국에서 이렇게 섬김을 받아야한다" 라는 것을, 그것을 마치 반도체 칩에 부속을 박듯이, 그렇게 주님이 다 알아서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키판이 아니라 주님의 키판인데, 또한 논에 모심기를 하듯이 말이다.

◈ 흑암에서 빛이 나옴으로서 !!

이제부터 어려운데, 창세기 1장부터 해와 달은 박혀있다고 했는데, 그게 대자연에 박혀있다는 것이다. 여기 3절에 보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첫날인데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먼저 빛이 있으라고 해서 있었으니, 해와 달은 그 빛에서 파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빛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게 정말 어려운데, 여기 2절에 보면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흑암에서 빛이 나옴으로서, 그게 이 대자연 세계를 운영하는 원리가 된다" 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것을 좀 설명하고 지나가야 하겠는데 말이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예를 들어서, "내가 여기에 있다. 아, 생로병사는 힘들다. 하지만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비록 지금은 이 땅에서 고생을 하지만, 장차 천국에 가면 영원히 복락을 누린다" 라고 하면, 그러면 여기에서  여기서 뭔가 빠진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가?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내가 여기에 있고, 천국에 있다. 그런데 아직 나는 30년 정도가 남았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 피를 믿으니 이제 천국에 가는 일만 남았다" 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무엇이 빠졌느냐는 말이다.

◈ 어둠으로 가서 빛으로 !!

우리는 창조의 원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빛의 빛 됨은 어디를 배경으로 하는가? 그것은 어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빛으로 곧 바로 가면 안 되고 어둠으로 가야하는데, 욥처럼 자기가 없을 때로 가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게서는 길이 나오지 않고, 어둠으로 가서 빛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자기 집이라고 하면, 자기 집에서는 천국에 갈 수 없는데, 그게 끊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그게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십자가인데, 즉 "어떻게 하든 십자가로 찾아가서 부활에 이르게 함이라" 라는 것이다.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러므로 십자가가 자기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인데, 그렇게 나갈 때 여기에는 구조가 있는데, 어둠도 있고 빛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빛과 어둠이 있을 때, 빛은 천국으로 분류가 되고 어둠은 지옥으로 분류가 된다는 말이다. 이것으로 성경해석은 끝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신다면, "탕자가 되세요. 불의한 청지기가 되세요" 라는 것인데, 또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세요. 자기 자신을 죽이세요"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같은 의미인데 말이다. 

* 목사님,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 탕자가 되세요.
* 목사님,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 불의한 청지기가 되세요.
* 목사님,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세요.
* 목사님,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죽이세요.

◈ 불의한 청지기의 경우에 !!

자기 몸에서 자기 몸을 빼내는 방식에 대해서, 어제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를 이야기하면서 했는데, 불의한 청지기는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둔 것인데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잘남에 눌러앉을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불의하더라도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바탕에 대해서 떠날 것인지, 과연 어느 것이 지혜로우냐는 것이다. 

죄인이 되어서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데, 왜냐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죄인이니까 말이다. 사람 앞에서 죄를 이야기할 입장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다윗이 그 원천을 발견했는데, 즉 "오직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라고 말이다.  

노아의 경우에, "이 동네에서 제일 착한 사람을 구원하세요" 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모두 다 뜯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아도 횡한데, 모든 것을 다 뜯겼으니 남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노아는 뜯어내고 덮어주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방주라는 말이다. 그러니 노아가 착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방주로 인해서 받는 것이다. 즉 언약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바르게 살아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무엇인가? '십자가' 라는 새언약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뜯긴 채로 살아가면, 이 세상이 그만 훤해진다는 것이다. 갇혀있던 상태에서, 그만 태풍에 지붕이 날아가고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얼마나 시원하겠느냐는 말이다.

◈ 여보, 뚜껑이 없는 자동차를 타고 싶어요 !!

제 아내의 소박한 소망이 그것인데, 뚜껑이 없는 자동차를 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 있는 뚜껑을 날리면 되는데, 얼마나 간단하냐는 말이다(ㅋㅋ).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주님이 주시하고 계시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의 동행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상숭배는 무엇인가? 대자연에 촘촘히 신을 박아놓고 사는 것인데, 그래서 그들을 꼼짝도 하지를 못하는데, 신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뻔한데, 모든 것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났는데,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바르게 살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하늘나라에서 죄인이라고 소문이 다 났다는 말이다. 

강도가 천국에 간다고 해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닌데, 강도로 간다는 것이다. 세리나 창기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기생 라합이 천국에 가서 얼마나 자랑을 하겠는가? 자기는 기생인데 구원을 받았다고 말이다. "니가 창녀가 되어봤어? 창녀도 되어보지 못한 주제에 어디서 감히 까불어?" 라고 나오면, "누님, 졌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많이 용서를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했는데, 물론 천국에 계급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 다윗언약을 인격화하시는 분이 오셔서 !!

다윗언약을 강의처음에 그렇게 강조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다윗언약은 악의 원천을 발견하게 된 자인데, 그래서 다윗은 "나는 사람에게 범죄한 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죄를 지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다윗언약에 따라서 다윗언약을 인격화하시는 분이 오시는데, 그것이 바로 이사야서 7장 14절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이미 뜯겨진 자연세계 !!

매우 유명한 구절인데, 사실은 이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사야서 60장에서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라고 하면서, 이미 자연세계는 뜯겼다는 것이다. 자연에 박혀있던 해와 달과 별도 다 뜯겨나간다는 말이다.

(사 60: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그렇게 뜯기고 나면 빛이 남는데, 원래의 빛이 말이다. 그 빛 되시는 분, 그 원래의 빛이 무엇을 겨냥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라고 할 때, 그 '네' 라는 것이 누구인고 하니, 그분이 바로 7장에 나오는 처녀가 낳은 아들인데, 그가 여호와의 빛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녹취자 - 목사님, 여기에서 '네' 라는 것이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네게 빛이 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까?)

◈ 복음의 광채 !!

이것을 두고서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는 '복음의 광채' 라고 하는데,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타난 복음의 광채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는 오로지 말씀대로만 움직이는데, 모든 것이 다 시나리오대로 된다는 것이다. 즉 구약의 말씀대로만 성취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찾아서 연결함으로서 깊이를 더해야 하고 말이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

그런데 여기서 왜 이사야서를 거론하는고 하니, 여기에 나오는 임마누엘이 다윗의 언약으로 오시는 분과 관계가 되는데, 그것이 이사야서 11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1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라고 하는데, 그것이 CCC의 김준곤이 말하는 그 싹이 아닌데, 그가 이름을 도용해서 새싹, 즉 '순' 이라고 하는데, 그 순은 주님이라는 말이다.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기 이새가 누구인가? 다윗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제가 어제 낮에 뭐라고 했는가? "성령은 자연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언약으로 채워버린다" 라고 했는데, 즉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사는 세상에 다윗언약으로 채워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됨으로서 원천으로 오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 즉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 왜 처녀의 몸에서?

이게 매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한번 해보자는 말이다. 처녀가 낳았으니 남편이 없는데, 그런데 기존 사람들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남자가 없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합쳐야 하는데, 따라서 빛으로 오신 분은 자연 안에, 즉 죄 안에 있는 자들과는 달리 오신 분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기에 말이다.

그렇게 처녀로 태어났다는 것이 창세기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되는데, 보통 사람들은 태어나면 다 남자의 후손이 되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임신을 하고 이삭이 임신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여자가 아이를 낳아도 그 아내는 남자에게 속했는데, 그래서 남자의 족보에 오른다는 말이다.

◈ 땅의 구조화, 재창조 !!

그런데 남자의 족보에 오르지를 않는 유일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런 출생을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이 땅을 구조화를 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러면 이 땅을 구조화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땅에 어둠을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다시 창조, 즉 '재창조' 라는 것이다.

원래의 창조는 흑암 가운데서 이루어졌는데, 그 흑암 가운에서 빛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닌데, 그것은 철학이란 말이다. 주님은 무가 아니라 어둠에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게 언약적으로 맞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왜 무에서 창조했다고 하는가? 그것은 철학적 소양이 있는 자들에게 납득이 되도록,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 교  회 : 여러분, 하나님은 무에서 창조를 하셨습니다.
* 철학자 : 그러면 신이 우리를 만들었구나.
* 교  회 : 예, 그렇습니다.
* 철학자 : 인간은 없는데, 신이 먼저 있어서 우리를 만들었구나.
* 교  회 : 그것을 믿으면 당신은 천국에 갑니다.
* 철학자 : 그래요? 
* 교  회 : 그렇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세요.
* 철학자 : 예,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천국은 그렇게 해서 가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 어떻게 가는가? 십자가의 능력을 받아야 하고, 그 능력은 그 자체가 이 세상을 어둡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어둠을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이 어두운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기 때문에 어둡다는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께서도 강의를 하시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말씀하실 때, '무에서 유의 창조'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해서 사용한 것인가요?)

◈ 사탄의 정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

그러면 그 어둠의 세력인 사탄은 어디서 발견이 되는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비로소 그 어둠이 세력이, 즉 이 세상을 사탄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은 어둠과 싸우려고 오셨는데, 하지만 인간이 아는 어둠은 어둠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아는 것은 자연 안에 박혀있는, 즉 해와 달과 관련된 것이 어둠이라는 것이다. 해가 뜨면 낮이고 달이 뜨면 밤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뜯겨져야하는 자연의 어둠이고, 그 자연을 지배하고 있는 원초적인 악, 그 악은 이미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빛이 오면 아는데, 빛이 오게 되면 사탄이 자기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고 해도 않을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 광야에서 사탄이 등장했고, 그리고 마가복음 5장에서 귀신이 뭐라고 하는가?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 입을 다물라. 시끄럽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십자가의 죽음이 원초적인 악을 증명해 !!

귀신이 들렸다고 해서 귀신이 아닌데, 진짜 귀신은 아직 때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심의 사건이 원초적인 악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원초적 악이 노리는 게 무엇인고 하니, 여자가 낳은 남자를 죽이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게 실패로 끝나니 바다가에 서서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데 내용인데 말이다.

(계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그러니 우리가 세상을 넓게 봐야하는데, 그리스 사태나 유승민을 자르는 것도 다 좋은데, 그런 것은 소꿉놀이라는 것이다. 진짜 진리는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을 뜯어낼 때, 그게 예수님과 마귀의 싸움임을 아는 것, 그것이 곧 진리를 안다는 것이다. 우리는 들러리인데, 그러니 주님이 만드신 요리이고, 또한 그 요리를 고맙게 얻어먹으면 되지, 음식에 대해서 평가할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

이사야서 60장 1절을 보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라고 하는데, 선교단체에서 이 구절을 젊은 아이들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라는 것은 빛이 있었다는 말인가? 없었다는 말인가? 없는데, 어두움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 60: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사 60:3)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물론 우리는 그 이유를 우리는 몰랐는데, 왜 이 세상 전부가 어둠인지 말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근원적 악이 이 세상을 이미 점령했기 때문인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을 해야만 하듯이 우리도 이 세상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빠져 나오면 누가 발목을 잡는고 하니, 자기가 자기 발목을 잡는다는 말이다.

왜 발목을 잡는가? 자기만의 이 세상에서의 소박한 행복의 가정을 일구었다는 것인데,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 라고 하면서 이수만이 부른 노래가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다정하고 행복한 곳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과연 행복이냐는 말이다. 행복하게 지옥에 갈 일이 있느냐는 것이다. 

◈ 십자가를 아는 남편, 십자가를 아는 아내, 십자가를 아는 자식 !!

빠져 나와서 헤쳐 모여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빠져 나오는가? 원천, 즉 현재 소박하고 행복한 자기 가정에 십자가을 집어넣어서,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헤쳐 모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시 가정을 이루면 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아는 남편, 십자가를 아는 아내, 십자가를 아는 자식,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 자체가 곧 천국인데, 즉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꿰더냐?' 라는 것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람들이 빛도 아닌 어둠을 가지고 빛이라고 우기면서 살아가는데, 행복도 아닌 것을 가지고 행복이라고 우기면서 말이다. 그게 행복이라면 너무나 짧은 행복인데, 짧은 만남 긴 이별인가요? 만날 때의 기쁨은 짧았는데, 헤어지고 난 뒤의 슬픔은 왜 그리 길게 가느냐는 말이다. 조광조가 부른 노래 가운데 "남자의 슬픔은 너무 길어요 ♬" 라는 것이 있는데, 아무튼 그런 노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그런 짧고 길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통째로 뜯어버리시는데, 우리는 그렇게 왕창 뜯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울고불고 하면서 헤어지고 아프고 하는 것,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소꿉놀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일본말로 '빵게이(?)' 라고 하는데, 그렇게 통째로 왕창 다 뜯기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하늘에서 빛이 비추이게 되면 뭐라고 하는가? "나는 빛이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어둠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로소 다윗이 한 고백인데, 즉 "나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오직 주님께만 지었습니다" 라고 말이다. 술을 처먹고 마누라를 팼지만, 자기는 마누라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지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악을 더듬어(?) 찾았는데, 왜냐하면 어차피 무엇을 선택하든지 간에 자기는 악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자기가 놓였다는 것이다. 그런 던져진 존재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여, 저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라고 하면, 주님은 "니가 바로 의인이다" 라고, 즉 "니가 세리고 니가 창기고 니가 강도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즉 "니가 바로 구원을 받은 자이다" 라는 것이다.

◈ 뒤로 빠꾸를 해서 가라 !!

그러니 자꾸만 자기 영역을 만들어서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뒤로 가라는 것인데, 마이클 잭슨처럼 하든지 해서 어떻게 하든지 말이다. 그렇게 뒤로 가라는 것을 빌립보서 2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마음인데, 그러니 십자가의 마음은 "나는 없다" 라고 여기고 사는 마음인데, 즉 "나는 없는데 주님이 만들어주신 마음으로 살아라" 라는 것이다. 레시피고 뭐고 간에 우리는 요리를 말아먹어도 되는데, 왜냐하면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시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지나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 12제자들과 사도바울이 어떻게 살았는가? 자기 마음대로 살았는데, 막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이 붙잡아주시니, 즉 그들은 주님의 능력 안에서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남의 의식하지 않고 말이다.

◈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그러면 처녀에서 난 아이가 어떻게 빛이 되는고 하니, 그것이 이사야서 45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사야서가 참 어려운데 말이다. 여기 7절에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라고 되었다는 것이다.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그러니 마귀든 사탄이든 다 어떻다는 말인가? 마귀가 아무리 까불어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버지의 언약 안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저주를 받겠다고 하는 것은, 저주는 어둠인데, 그러니 어둠 안에 있음으로서 그 어둠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어둠이라는 말이다.

◈ 저주를 독생자가 받다니, 말도 안 돼 !!

마귀가 마구 화를 내고 주님 앞에서 쩔쩔매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저주는 누구의 몫이란 말인가? 마귀는 그게 자기의 몫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그 사랑하시는 독생자가 어떻게 하시는가? 마귀가 받아야하는 저주를 몸소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마귀는 그야말로 졸도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주님이여, 우리 따로 이야기를 좀 합시다. 이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절대 안 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만약에 주님이 저주를 받게 되면, 그 저주를 통과할 수 있는 인간도 생겨날 수 있다는 말인데, 그렇게 되면 마귀가 영원히 인간을 지배하려고 했던 것이 그만 무산이 되고 마는데, 즉 인간은 영원히 지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모래를 손가락으로 집었는데, 그만 그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버리고 말듯이 말이다. 그렇게 빠져 나와서 모인 자들의 집합이 바로 천국인데, 이것을 성도가 알게 되면, 그러면 자기들이 구원받은 것은 누구의 공로라는 말인가? 주님의 공로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저주를 받게 해서, 즉 이미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서 구원을 해버리니까 어떻게 되는가? 사탄이 아무리 "너는 지옥에 간다.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잖아" 라고 하면서 아무리 협박을 하고 욕설을 퍼부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너는 인간도 아냐. 너는 개야. 너는 죽어" 라고 해도, "그래, 나는 개가 맞아. 나는 죽어도 마땅해" 라고 나오니 말이다.   

이제는 마귀가 협박할 목록조차도 없어 !!

이렇게 이 모든 것은 이미 언약 안에서 이미 치렀던 일이 되어버리고 마니까, 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귀가 제 아무리 겁을 주고 협박하고 공갈을 치려고 해도, 그런 목록조차도 이제 남아있지를 않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자유이고 말이다.

사도바울이 완벽한 사람이라서 사도가 되었는가? 오히려 자기는 과거에 예수를 믿던 자들을 죽였던 자인데, 그러면서도 "나는 의인이다" 라고 자랑하고 있으니, 그 뻔뻔함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윗의 뻔뻔함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또한 기생 라합도 그렇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선을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주님의 자기 작품이고,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장난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과 긍휼의 그릇이고, 또한 사랑의 레시피이고 일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악의 원천에 대해서 모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의 머리 위에는 훤하게 주님의 구조가 항상 따라다니면서 내리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또한 은혜 없이 살지 않았던 인생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앞으로도 주님의 은혜만을 생각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7,21 오후 4시에 마침.

                                 설교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도 야단을 맞아서, 오늘도 열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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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2008) (미국, 영국) ]
* 감독 - 마크 허만
* 출연 - 아사 버터필드, 잭 스캔론, 도몬코스 니메스 등
* 소설을 원작으로 한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보실 때 각오 단단히 하시고 보시는 게 좋아요. 왜냐하면 정말 슬프고 충격적인 결말이거든요. 띠링이가 이 영화에 대한 줄거리를 아주 살짝만 알려드려 보자면, 세계 대전이 한창인 시대에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 유대인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는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죠. 이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영화는 이런 잔혹한 만행이 일어나는 유대인 수용소 부근에서 일어난 어이없고 슬프기 그지없는 내용을 담은 영화예요.
8살 난 주인공 브루노, 이 아이는 장교인 아버지를 둔 독일인으로 정부의 지시를 받고 유대인 수용소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죠. 그리고 브루노는 수용소 사람들이 입고 있는 죄수복을 보고 줄무늬 잠옷을 입고 다닌다고 생각을 한답니다. 브루노는 아버지에게 농장 사람들이 전부 줄무늬 잠옷을 입고 다니느냐고 묻지만, 장교인 아버지는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브루노에서 말하죠. 또한 어디선가 풍겨오는 악취에 대해서도 아버지는 고무를 태우는 것이라는 말뿐,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는 않죠.
점점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에 대해서 아리송해져만 가는 브루노, 이런 와중 브루노는 슈무엘이라는 아이를 만나게 된답니다. 그 뒤로 브루노는 종종 슈무엘을 만나러 갔고, 점점 유대인들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자신의 집으로 일을 하러오게 된 슈무엘에게 브루노는 우린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을 건네죠. 하지만 슈무엘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선반에 놓여진 과자뿐, 이를 본 브루노는 슈무엘에게 과자를 권내지만 갑작스럽게 들어온 군인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 때버린답니다. 이 일로 슈무엘은 벌을 받게 되죠. 브루노는 자신이 슈무엘에게 잘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한참을 망설인 뒤 며칠이 지나서야 슈무엘을 찾아가게 되고, 진심 어린 화해의 악수로 이들은 다시 친구사이가 되요. 하지만 머지 않아 곧 이곳을 떠나는 브루노, 브루노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슈무엘의 아버지를 같이 찾아준다고 하며 수용소 철장 아래에 조그마한 구멍을 파기 시작해요. 그리고 슈무엘이 몰래 가져온 죄수복인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유대인인척을 하면서 수용소로 들어가게 되죠.
과연 이 뒷일은 어떻게 될까요? 뭔가 찜찜하고 슬프고 충격적인 결말, 개인적으로 보고 나서 며칠간 좀 생각이 났어요. 줄무늬 파자마를 입는 소년 나중에 시간 나시면 꼭 한번 보시길... - 네이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