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03a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여호와의 밤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4장 21~23절에 나오는 내용을 제가 우선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 일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출애굽이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에게는 동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은 일말의 동정 할 가치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세계거든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세계에요. 그걸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이 세상이 자기영광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영광, 인간에,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영광, 그걸 빼놓고 인간은 딴 생각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 적용되는 모든 제도는 납득이 되는 법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부터 자기영광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내 이름을 빛내고 내가 잘 되고 내가 행복해지는 걸 자진해서 포기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내가 내 행복을 자진해서 포기 안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복에 미치는 사람이 그게 사는 최종 목적인데 이것 말고 내가 달리 존재할 이유가 있을 거야, 라고 그러한 낌새, 그런데 마음을 둔다는 자체 그게 오히려 이야기하는 제가 이상한 사람이 돼요. 그렇잖아요. 목적이 이미 정해졌거든요.
나는 왜 있는가? 나를 위해서. 정해버렸다면 내가 누구와 교제할 때는 내 영광이 손해가 될까, 이익이 될까, 내 영광이 높아질까, 훼손될까를 최우선으로 적용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누가 나를 동정해주고 위로해주고 도와준다면 아낌없이 그 사람에게 위로하고 도와주고 협력할 용의가 돼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할 출애굽기 34장의 절기를 왜 알아야 되지요? 유월절, 오순절, 나중에 초막절까지 나오는데 이 세 절기를 반드시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 세워질 때 세미나 받아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사람들은 그 대목을 보면서 이 절기가 무슨 뜻인지 성급하게 성경해석을 봐요. 모든 주석이 다 그렇게 본다고요. 절기가 나왔다. 절기를 지키자. 지킬 때 그냥 지키면 안 되지. 진리를 지키는 이유와 목적을 알고 지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거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절기를 지키겠다는 그 순간 우리가 자기 나름대로 챙겨놓은 자신의 사는 목적을 서슴없이 포기했습니까? 성경 대하기 전에 성경 보면서 천하없어도 나는 양보 못할 내 존재의 의미와 목적은 따로 있어. 그것을 포기한 상태에서 성경을 보느냐 이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우리 가정이 잘 되길 원해. 나는 우리 가정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라는 그것을 포기하시고 성경 보십니까, 아니면 그것을 품고 성경을 보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을 품고 보잖아요.
그렇다면 성경해석은 너무 일방적인 해석이 돼요. 하나님 제가 성경 봅니다. 성경 지켜서 내가 노렸던 내 가정의 행복에 얼마나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미 성경을 보기 전부터 목적의식을 가지고 성경 볼 때 일방적으로 성경을 자기가 해석도 못하면서 오늘 해석했어, 납득이 돼, 큐티 이렇게 했어. 이렇게 하면 복 준다 이 말이지, 넘어가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절기 보기 전에 먼저 사람에게 동정하지 마세요. 그 말은 곧 내가 나에게 동정하지 마세요. 오버하지 말고 객기 부리지 말라고.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절기는 우리의 행복과 우리가 평소에 세상에서 하고 싶은 나의 영광과 전혀 상관없는 원칙입니다. 이 원리가.
사람들은 절기를 보면서 절기를 지켜야지, 절기를 지키려면 원리를 알아야지, 라고 시작하는 그 마음 자체가 나는 수상하다고 보는 거예요. 절기를 알았을 때가 오히려 절기 몰랐을 때보다 더 행복해졌어, 라는 은연중에 기대와 노림수를 가지고 주여, 이 절기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고 돼있는 게 인간이란 거예요.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주님이여, 성경이 뭔 뜻입니까, 십자가가 뭡니까. 예수님 재림은 언젭니까? 그렇게 말을 내뱉을 때 이미 내뱉는 그 심사 자체가 자기한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고 난 뒤에 그걸 보기 때문에 이건 주님의 뜻과 관계없어요. 그렇게 일방적인 해석을 끄집어내놓고 납득이 되니, 이해가 되니 이렇게 자기 본래 자기 일로 돌아간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절기를 이제부터 설명해드릴 텐데요, 먼저 마음가짐 자체가 일체 인간에 대해서 동정하지 마세요. 울산 한화케미칼 공장 터지더라도 동정하지 마세요. 세월호 얘들 빠지더라도 동정하지 마세요. 이 말은 우리 자신에게 과도한 동정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가 뭐냐? 절기란 밤에서 낮으로 가는 절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하루 중에 노동하지 않을 때가 언제죠? 밤이죠. 창세기 1장에 보면 뭘 경유해야 돼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죠. 첫째 날 시작이 저녁이에요. 저녁을 경유해야 됩니다. 유월절이 언제냐 하면, 1월 14일 오후 3시에요. 예수님 십자가 달린 것은 안식일 전에 금요일 아침 9시고요. 우리 식대로 하면.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안식일이 시작이 되거든요. 목요일 체포되어서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시는데 오후 3시부터 안식일에 들어갑니다.
오후 3시니까 해가 뜰까요, 질까요? 해가 지겠지요. 밤이 되겠지요. 밤이 되고 난 뒤에 그 다음날 낮이 안식일에요. 이걸 일곱 번하면 무교절 지키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가 만들어지는 그 밤, 출애굽기 12장 42절에 보면,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밤에 이스라엘이 만들어졌어요. 왜 밤이냐? 밤은 인간이 노동하지 못하는 때입니다. 강제 안식이에요. 하루일과 중에서 안식의 의미는 밤이에요. 밤에는 꿈만 꾼다는 것은 수동적이거든요. 자기가 꿈꾸고 싶은 대로 못 꾸니까. 의식에서 무의식 상태로 넘어가는 겁니다. 잘 때 손발 다 놓고 아무것도 못한 채 그냥 맡기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 낮이 아니고 밤에 만들어져야 하느냐 하면, 원래 이스라엘이 야곱 이름이죠. 야곱이 이스라엘 될 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이상한 특징을 가졌어요. 뭐냐 하면 밤에만 나타나요. 야곱과 계속 씨름을 못한 이유가 있어요. 힘이 달린 게 아니고 해가 떠오르는 거예요. 밤이 끝나가요. 인간이 노동하지 못하는 시기가 밤이잖아요. 밤에는 태양이 빛을 잃어요? 밤에 태양이 스위치를 꺼놨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우리가 일하지 않는 밤에도 해는 누구 힘으로 빛나고 있고, 별은 누구 힘으로 빛나고 있습니까? 자연 초목은 누구 힘으로 뜨지요? 그게 누구 힘이냐 말이죠. 천지창조를 만드신 하나님의 힘이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언약에 합류했다는 뜻은, 천지창조의 비빌 정보가 역사 전개와 더불어 펼치는 과정을 유일하게 보여줄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는 낮에 시작하지만 이스라엘은 밤에 시작하지해요. 다른 나라는 낮에 시작한다는데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하느냐? 최초의 나라가 성경에 보면 나옵니다. 최초의 나라는 가인의 나라죠. 도시국가니까.
가인이 동생을 죽였지요.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는 같이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내린 징벌이 뭡니까? 네가 살도록 보호해줄게. 그런데 그냥 사는 게 아니고 가인이 품고 있는 인간의 범죄 속성, 아벨을 죽일 만큼 가득 차있는 그 기능을 발휘해서 그것이 인류의 낮의 문화를 장악하는 인간의 문화를 펼치는 사명과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서 가인을 살려둔 겁니다. 따라서 가인이 살아서 낮에 일한다는 자체가 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저주스런 징벌입니다.
이 원리를 간단하게 추려서 말하면 사는 게 벌 받고 있는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살아있는 게 저주스럽습니다. 싯다르타라는 석가모니는 생로병사는 알았는데 내가 왜 이래야 되는지 그 이유는 몰랐어요. 그래서 기껏 찾아낸 것이 해결책을 자기로부터 끄집어내려고 한 겁니다. 그것, 바봅니다. 왜 바보냐? 세 살 먹은 얘가 아빠 퇴근해서 놀아주고 엄마는 삼시세끼 밥 해주고. 그러면 얘가 해야 될 일이 뭐죠? 주는 밥 먹고 뛰놀면 되지요. 어린이집에 갔다 오고.
지금 세 살 먹은 얘가 유승민이 퇴진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 있습니까? 그리스 부도문제에 대해서 세 살 먹은 얘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필요 있어요? 없지요. 만약에 세 살 먹은 얘가 유승민 퇴진 문제와 그리스 부도에 대해서 고민한다면 그 얘는 그게 징벌이에요.
석가모니가 왜 인간은 생로병사, 힘들 게 사느냐, 라고 고민하는 자체가 싯다르타에게 주신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입니다. 다른 사람은 고생해도 잘도 살 더만 고민을 왜 해요. 아프면 아픈 대로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그걸 왜 따지느냐 말이죠. 그걸 이유를 따지고 원인이 어디 있느냐? 인간의 탐욕에서 나왔다. 탐욕을 줄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팔정도를 하면 된다.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자체가 추가적인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간단하게 돼있어요.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판결문이 너무 간단해. 죄의 삯은 사망이죠. 그러면 어렵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형당할 때 벌 받는 겁니까, 사형 당하기 직전까지 사는 게 벌 받는 겁니까? 길 가는데 난데없이 쇳덩어리 날아와서 죽을 때 그 사람은 벌 받는 것도 모르고 죽지요. 그런데 길 가는데 공사장 인부들이 쇠붙이 들고 내 앞에 맞추고 내 뒤를 맞추고 하면 편안하게 갈 수 있습니까? 어느 것이 스트레스 받아요? 죽이려면 죽이던지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어느 것이 아파요? 죽음을 미리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게 아프지요
이미 아담은 살 때부터 선악과 따먹은 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걸 창세기 3장에서 이마에서 질질 땀이 나와요. 물론 사우나 해도 땀이 나오는지 압니다만 사우나도 벌 받는 거고. 어제 가락교회에서 그런 강의했습니다만 여자가 임신을 했다. 남자는 모르지요. 임신할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어서 임신의 기분을 모르지만 여자는 임신을 함으로 말미암아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게 붙어있는 거예요.
저는 남자기 때문에 상상을 해봐요. 세상에 이것보다 더 확실한 현실이 어디 있을까. 상상 임신 같으면 눈 뜨면 임신 아니었구나, 하면 되는데 이건 내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그냥 부풀어 오르는데 떼어내지도 못하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고 나이트클럽도 못 가고 술도 못 마시고 태교한다고. 아주 순한 말, 고운 마음씨, 음악도 모차르트 안 돼. 베토벤? 운명은 너무 심각해. 아주 부드러운 슈만 곡, 트로트는 아예 멀리해야 되고. 그전에는 자기만 챙기면 됐어요.
임신하고 난 뒤에는 자기 말고 뱃속의 아기를 더 챙겨야 되니 이것을 레비나스란 철학자는 타자, 타인이 있다는 것을 포함시켜야 이게 바로 현실이다. 제가 쉬운 말로 번역하면,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네. 레비나스는 그게 바로 현실이야. 내 마음대로 좀 하자. 왜 그렇게 잔소리가 많아, 하면 그 철학자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게 바로 현실이야.
어제 밤에 늦게 와서 택시 탔는데 나이가 나보다 좀 적은 게 같아요. 아주 겸손하고 친절하게 손님, 어디까지 모실까요, 했어요. 그 사람이 만약에 내가 손님이 아니고 보통 사람이라면 친절했겠는가? 그럼 왜 그렇게 친절한가? 손님이기 때문에 한 거예요. 그러면 친절은 자연스럽지 않고 억지가 되겠지요. 억지가 현실이에요. 그게 하나님이 주신 벌 받고 있는 거예요. 꿇어앉아 벌서고 있는 거예요. 차라리 바보가 돼서 치매 걸리든지 아이큐가 50이어서 죽는 게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게, 그래서 정박아의 특징은 암이 없다는 거예요. 스트레스를 안 받으니까. 미리 앞당겨서 걱정하는 게 없어요.
지금 가인이야기를 합니다. 가인은 낮을 장악해줘야 돼요. 장악하려면 혼자선 안 되지요. 가인이 도시를 이루는데 성공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가인 혼자 죄인이 아니라는 뜻이고, 가인 같은 성품을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보편적인 속성으로 갖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도시의 주도권은 가인이 쥐고 있지 않아요.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누굴 만나면 됩니까? 창세기 4장에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에 가인 죽고 난 뒤에 가인의 칠대 손 라멕이 나오지요. 라멕과 가인은 같은 유입니까, 다른 유에요? 같은 종류지요. 그러면 우리는 가인의 심리분석은 못하지만 고맙게도 하나님께서 가인을 꼭 닮은 라멕을 줌으로 말미암아 선배 된 가인의 품성을 그대로 인수받았으니까 가인이 벌 받을 수밖에 없는 품성이 뭔지 궁금한 거예요. 그 궁금한 것을 라멕이 대신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라멕이 뭐라고 이야기했던가요? 가인을 건드린 사람은 벌을 7배를 받지만 나를 건들면 77배 받는다고 하지요. 그 말을 요즘 쉬운 말로 하면, 어느 놈 건드리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않는다.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 말을 하면 벌 받는 게 아니고 그 말한다는 자체가 주께서 내린 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걸 사자성어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보복운전’입니다. 어렵지요.
운전만 보복입니까? 우리 얘를 유치원에 보냈는데 멍이 들었어요. 새로 온 아이가 때렸다는 거예요. 엄마가 어떻게 합니까? ①참는다. ②유치원에 가서 그 아이에게 직접 보복한다. ③침착하게 그 얘 엄마 불러서 앞으로 그런 일 없도록 조리 있게 따진다. ④유치원 교사에게 cctv 달도록 해서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고 또 때리면 교육청에 고발한다. 몇 번입니까? 지금 겁나서 이야기 못한다. 모두 똑같은 정답이에요. 참으면 보복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한테 동정하지 말라 했지요. 하나님이 내린 벌 받고 있는데 벌 받고 있는 나를 동정해버리면 나는 벌 내린 하나님 편일까요, 그 벌이 부당하다고 하는 사탄의 편일까요? 이 논리는 쉽다. 우리의 본성 자체가 교회에서 기도하지만 사실은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것은 딱 이거에요. 언 놈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 땅에서 사는 게 벌입니다.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주여, 죽여주옵소서. 에스더가 하는 말이 뭡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보다 확실하게 구약보다 신약의 사도 바울이 더 멋있지요. 아이고, 죽으면 죽지 뭐. 이건 에스더 수준인데 급이 좀 다르지요.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주여, 죽여주옵소서.”
그런데 사도 바울보다 급이 더 높은 사람이 있네요. 야고보서에 우리는 안개니라. 어디 안개가 죽여 달라고 합니까. 살아도 안개고 죽어도 안개인데 입 뗄 것 뭐있습니까.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온 말이, 우리가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리니. 이 말을 할 때 뭔 뜻입니까? 그래도 될 수 있으면 사는 쪽으로 해주시지, 이런 게 일체 없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이미 이 안개, 최 안개에요. 황 안개, 안개라니까. 앞에 성씨 붙이고 안개에요. 우리는 동일한 이름을 가졌어요. 안개가 뭐 살고, 죽고. 산다고 해서 안개 벗어나고 죽는다고 해서 안개 더 되고, 그런 것 없어요. 사나죽으나 안개고. 백 년 사나, 십 년 사나 안개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징벌은 보복의 의미를 갖고 있어요. 그걸 정의롭다, 공의롭다고 고상하게 표현하는 거예요. 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 차원에서 보복하는 겁니다. 이번 8월에 수련회하는데 사사기에 보면 나와요. 유다지파가 제일 먼저 나와서 베냐민지파를 보복했지요. 보복할 때 전쟁 초반에 누가 승리했습니까? 인간이 납득이 차원에서는 베냐민지파가 죄 지었으니까 정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율법의 이름으로 유다지파가 주동한 11지파가 승리해야 되는데 대패했어요. 그래서 연합군의 기도가 바뀌었어요. 주여, 우리가 칠 수 있는 자격이나 됩니까? 그걸 야고보서 4장에선 우리는 안개인데 늘 그냥 웃지요, 이런 식으로.
여보, 사기 당했어. 복음 아는 남편이, 그냥 웃지요. 이 세상에서 사기 당해도 그냥 웃는다고 할 경우는 다음 중 몇 번일까요? ①예수님 마음을 가진 사람. 정답 아닌 줄 아시지요. ②자기가 사기 당한 것보다 더 심하게 남을 사기 친 사람 두 개만 합시다. 몇 번이 정답입니까? 2번이 정답이죠. 왜? 내가 당한 것은 새 발의 피니까. 자기가 20억 사기 쳤는데 20만원 사기 당했다고 어떻게 사냐는 그런 소리 안 나오지요.
그렇다면 주님하신 말씀이 이해됩니다. 하늘나라를 누가 가느냐? 세리와 강도와 탕자가 가지요. 그 사람들이 싱긋이 웃으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직업이 창기인데, 직업이 남들 욕하는 세리인데, 십자가 달리게 만든 강도인데, 아버지 유산 탕진한 탕자인데 왜 싱긋이 웃어요? 심지어 퇴직하기 전에 사장 돈 횡령해 먹은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받습니까? 그리고 귀신이 나간 마리아, 그리고 소문 나쁜 여자, 그 사람들이 왜 예수님한테 칭찬받습니까? 그들은 자기 의가 없지요. 남들 갖고 있는 자기 의가 왜 없어요?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자기한테 동정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 다음에 무슨 말 했던가요? 우리는 사는 자체가 하나님이 알아서 벌주고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막상 오늘 절기를 볼 때 어떻게 본다고 합니까? 절기 알아서 내가 얼마나 행복해질까, 절기 알아서 성경 많이 안다고 얼마나 복 받을까? 이미 그것부터 출발한다고 했지요.
제가 말할 때 저 목사는 무슨 뜻으로 그런 말하느냐? 성경 보고 복 받으면 얼마나 좋은데 왜 그걸 거부하느냐. 이렇게 궁금해 했지요. 그런데 성경 전체는 밑에 지하에 가면 얽혀있어요. 우리는 표면에서 촐싹대지요. 성경 깊이 들어가 보세요. 촐싹댈 수도 없어요. 촐싹대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촐싹대세요. 그걸 세 자로 ‘막 산다’고 합니다. 하지만 촐싹대게 해주신 그분의 은혜를 말씀의 밑바닥에서 연관시켜서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지금 강의 초반밖에 안 했어요. 할 게 너무 많은데 너무 어렵기 때문에 주춤하고 있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라멕이 누구의 심성이라 했습니까? 라멕 자기의 심성이 아니고 선배 가인의 심성이지요. 가인은 이미 그 자체가 벌 받고 있지요. 그렇다면 세상 끝났네. 벌 받고 이마에 땀 흘리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을 받고 얘가 있다는 그게 현실이고. 남자는 홀몸이지만 여자는 난데없이 인격체가 하나 생겨버리니까.
타인과 더불어 산다는 게 현실이라고 했지요. 지리산에 도 닦으려고 가지 마세요. 함께 사는 게 현실이에요. 사기도 당하고, 이게 현실이라니까요. 그렇다면 전부 다 지옥 갔다고 하겠지요. 창세기 4장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 있어요. 출애굽기 12장 42절에 무엇의 밤? 여호와의 밤이죠. 창세기 4장 끝에 그들이 여호와를 불렀다고 돼있어요. 여호와를 불렀으면 그 사람은 죄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호와 불러도 여전히 죄 있지요. 창세기 5장에 보니까 여호와 부르든 말든 죽었더라, 죽었더라, 나오니까. 분명히 죄 있는 건 맞습니다.
그러면 죄인이 어떤 경우에 어떤 전제의 바탕이 될 때 여호와가 의미 있게 다가옵니까? 나는 이 땅에 산다는 자체가 죽어 마땅한 거야,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여호와 이름을 부르면 되겠지요. 그렇다면 나로 하여금 나는 죄인이야. 이 땅에 살아가는 게 벌 받는 거야, 라는 그런 기이한 마음씨를 누가 뿌린 겁니까? 여호와께서 뿌린 거예요. 여호와께서 뿌린 것을 여호와께서 회수하면서 나타난 효과와 결과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것.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여호와의 정보, 여호와께서 일을 벌이시는 그 내막 비밀을 안다는 거예요. 그 비밀은 로마서, 에베소서에도 나오지만 창세전에 숨겨진 비밀이 마지막에 나타났다고 했지만 그 비밀을 우리가 흔히 쓰는 용어로 하면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 뭐가 들어 있느냐? 오늘 하려고 하는 절기가 포함이 돼있습니다.
절기와 언약의 차이는 뭡니까? 언약은 개념이고 추상화된 언어라면, 그걸 이 땅에 구체화된 현상이 절기입니다. 그러면 그걸 구체화하기 위해서 절기를 지켜야 될 사람들이 필요하겠지요. 거기에 동원된 엑스트라를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자기가 납득이 되고 기대하는 본래의 자기 자신의 의도는 허락됩니까? 허락되지 않습니다. 허락되지 않는 것을 매일같이 반복해서 확인시켜주는 것을 상번제라고 합니다. 아침에 죽음이 시작하고 저녁에도 죽음으로 마감되는 것.
결국은 미국의 넓은 서부개척시대에 말 타고 달리면 자기 영토가 돼요. 그러면 자기 영토인 것을 무엇으로 표시할까요? 서부영화에 보면 나오잖아요. 내 영토라고 울타리 치지요. 그게 절기입니다. 그게 법이에요. 구원의 정보가 들어있는 특수한 지역, 그게 절기에요. 미국의 서부는 지리적으로 바운더리잖아요. 시간적인 바운더리는 절기입니다. 안식일이고.
그래서 절기는 다른 말로 하면, 절기란 천국의 리어설입니다. 지금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가 따지면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이기 때문에 그걸 따진다는 것은, 주님이 추방시킨 취지를 모독하겠다는 의사밖에 안 되거든요. 따라서 천국은 생각하지 마세요. 천국에 우리는 못 갑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천국이 왔다고 했지요. 그러면 천국은 우리가 가는 게 아니고 천국이 와야 되겠지요.
세례요한이 천국이 왔다고 하면서 정작 보여준 것은 구름이 움직이고 별이 바뀌는 게 아니고 누가 왔어요? 예수님이 왔지요. 천국 오는 줄 알았더니만 쾌적한 환경이 온 게 아니고 사람이 온 거거든요. 잘 생긴 것도 아니고 행색이 초라해서 누구도 못 알아봐요. 그런데 세례요한은 성령을 받아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천국인데 자기 백성을 위해서 죄를 짊어지기 때문에 천국을 만드신 분이지만 꼴이 아주 망가진 모습으로 저렇게 오셨다. 그래서 천국은 천국이고 저분 외에 다른 천국은 없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처음에 시작한 사람이나 이 세상이나 공경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납득이 안 돼요. 왜 납득이 안 되느냐 하면, 내가 기대했던 말이 따로 있다는 은근히 자기 속내를 들켜버린 거예요. 나는 다른 말 듣기 좋아하는데.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그 이야기 듣고 싶어요. 내가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자체가 주님이 나를 추방시킨 사는 게 벌인데 그걸 완전히 모독하는 게 돼요.
여러분, 어린 자식 때려봤잖아요. 때릴 때 “엄마, 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그게 잘못한 것을 아는 얼굴이던가요. 아프니까 때리지 말라는 거지. 우리도 마찬가지라니까요. 사사기도 마찬가지에요. 때리니까 때리지 마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주의 뜻과 일치되는 겁니까? 그러다 형편이 나아지니까 헤헤거리면서 또 바알을 섬기는 거예요.
절기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절기가 일곱 가지 있습니다. 그 절기는 반드시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던 그 사건을 반복해서 터뜨려줘야 돼요. 천사가 뭘 가져왔어요? 천사가 밤을 가져왔어요. 야곱이 매일같이 겪는 그 밤은 아니에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천사를 만났지요. 신약의 성도는 예수님을 만났지요. 예수님이 누구시지요, 라고 할 때는 어디를 가야 되느냐 하면, 야곱이 만났던 하나님의 천사가 무슨 의도로 야곱을 찾아왔는지 그 의도의 완성 상태가 예수님의 찾아오심이에요.
“야, 날 새려고 한다. 밤으로 꺼져야 돼. 놔줘야 돼.” “아니 되옵니다. 축복해주시고 가십시오.” 축복해주니까 드디어 해가 밝았다고 했지요. 그러면 야곱이 경험한 밤이 평소에 매일같이 살아왔던 그 밤일까요, 특수한 밤일까요? 천사를 만났던 특수한 밤이죠. 천사는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특수한 밤 속으로 사라졌잖아요. 그러면 야곱은 천사를 만나서 브니엘, 생명 얻었잖아요. 그러면 신약에서는 누굴 만나야 생명을 얻습니까? 예수님 만나서 생명을 얻지요. 그런데 예수님 만나놓고 울산 밤이나 낮이나 이건 엉터리잖아요. 울산의 밤으로 살다가 주님 만나고 난 뒤에는 울산의 밤이 되면 안 되고 여호와의 밤이 돼야지, 오늘 참 아름다운 밤이에요. 이건 시상식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밤 말고 여호와의 밤.
여호와의 밤인지 어떻게 압니까? 야곱이 천사를 만나고 자기를 산 자로 봤어요, 죽은 자로 봤어요? 죽은 자로 봤지요. 그러면 내가 야곱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죽어 마땅함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루치를 계속 살려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살려내는 의미와 목적은 천사가 와서 나를 아예 죽여 버릴 때 죽기 위해서 나는 그 동안 살아왔구나.
그렇다면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죽여 버리지 왜 지금까지 살려냈습니까? 야곱은 언약적 의미와 사명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천사가 품고 있던 정보가 구체화되어서 죄수들만 있는 인간세계에서 하늘의 구원의 정보, 영생을 얻는 정보가 야곱이라는 언약의 사람에 칩처럼 집어넣는 임무를 야곱이 부여받은 겁니다. 하여튼 이해는 되시지요?
이렇게 제가 구성해보겠습니다. 당신은 뭡니까? 나는 천사다. 왜 왔습니까? 죽이려고 왔다. 그러면 죽이세요. 지금까지 산 것이 왜 살았습니까? 죽기 위해서 살았다. 벌 받는 중이다. 그럼 죽이세요. 죽었다, 끝. 이게 아니고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태어나게 한다면 드디어 야곱 본인의 모든 요소는 이제 자기 인생을 좌지우지 못합니다. 자기 인생은 하늘의 구원정보를 보여줄 임무를 맡은 거예요. 이게 나중에 이스라엘 나라로 연장되는데.
그렇다면 쉽게 해서 야곱 인생의 특징이 뭡니까? 간단하게 대답하는 거예요. 장차오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의 응용문제가 뭐냐 하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유가 뭡니까? 이미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를 우리를 통해서 발산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답변이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그건 믿음 좋은 사람이나 하세요. 저는 바빠서 못합니다. 손사래 치면서 겸손을 떨면서 못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야곱이 이스라엘 인생을 사는 것이 본인의 의지였습니까? 그거는 이름을 주신 분이 주변의 상황이 야곱을 그렇게 몰아간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늘 하는 소리가 낯선 이야기지만 신앙생활하지 마세요, 하는 말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 방해만해요. 엄마가 손님 온다고 부엌에서 잡채를 하는데 세 살 먹은 딸이 엄마 도와준다고 온 천지에 엄마 일거리를 더 만들어놨어. 하여튼 세 살, 네 살, 다섯 살, 걔들은 사춘기도 아니고 뭐라고 해야 돼요? 얼마나 저지르는지.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그래서 그걸 찍으면, 찍지 마라! 자기 존재의 의미는 알아서 자기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그건 가인의 벌 받는 모습은 그대로 과시되고 있는 거예요.
하지 마세요. 안 하면 구원 못 받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는 게 가짜인 거예요. 정말 믿는다면 아무것도 안 해요. 지금껏 안 해왔지만 여전히 안 하고 극렬하게 안 할 거예요. 앞으로. 카드 cf에 그런 게 나와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삼성카드가 알아서 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알아서 다한다는 이 표현을 빌립보서 4장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왜? 나는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알아서 다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체스나 장기, 바둑 두는데 남들은 바둑 잘 두고, 체스 잘 둔다고 해요. 그런데 그건 남들이 내 사정을 몰라서 그래요. 나는 그냥 손가락만 있고 네 안에 상자 안에 난장이가 있는데 체스 챔피언이라. 장기 챔피언이고 바둑 챔피언이에요. 안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는 거예요. 남들은 내가 마치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한 것처럼 보는데 실제로는 주께서 내가 엉뚱한 길로 가면 발길질하며 그쪽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건 네 뜻대로 일체 안 해준다고 했잖아. 우리는 주님한테 얻어터지기 바빠. 그걸 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형제우애란 말이죠. 이걸 쉽게 말해서 우리가 주께 늘 얻어터지면 나오는 게 뭐다? 성령의 열매. 내가 곱상해서 착하면 나오는 게 뭐냐? 육신의 열매. 간단하죠, 뭐.
10분 쉬고 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