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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강의-여호와의 밤 1507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7. 13. 07:53

2015-07-03 23:52:10 조회 : 165         
여호와의 밤 150703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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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4.♡.134.102) 15-07-07 10:14 
20150703a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여호와의 밤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4장 21~23절에 나오는 내용을 제가 우선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 일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출애굽이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에게는 동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은 일말의 동정 할 가치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세계거든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세계에요. 그걸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이 세상이 자기영광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영광, 인간에,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영광, 그걸 빼놓고 인간은 딴 생각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 적용되는 모든 제도는 납득이 되는 법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부터 자기영광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내 이름을 빛내고 내가 잘 되고 내가 행복해지는 걸 자진해서 포기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내가 내 행복을 자진해서 포기 안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복에 미치는 사람이 그게 사는 최종 목적인데 이것 말고 내가 달리 존재할 이유가 있을 거야, 라고 그러한 낌새, 그런데 마음을 둔다는 자체 그게 오히려 이야기하는 제가 이상한 사람이 돼요. 그렇잖아요. 목적이 이미 정해졌거든요.

나는 왜 있는가? 나를 위해서. 정해버렸다면 내가 누구와 교제할 때는 내 영광이 손해가 될까, 이익이 될까, 내 영광이 높아질까, 훼손될까를 최우선으로 적용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누가 나를 동정해주고 위로해주고 도와준다면 아낌없이 그 사람에게 위로하고 도와주고 협력할 용의가 돼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할 출애굽기 34장의 절기를 왜 알아야 되지요? 유월절, 오순절, 나중에 초막절까지 나오는데 이 세 절기를 반드시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 세워질 때 세미나 받아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사람들은 그 대목을 보면서 이 절기가 무슨 뜻인지 성급하게 성경해석을 봐요. 모든 주석이 다 그렇게 본다고요. 절기가 나왔다. 절기를 지키자. 지킬 때 그냥 지키면 안 되지. 진리를 지키는 이유와 목적을 알고 지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거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절기를 지키겠다는 그 순간 우리가 자기 나름대로 챙겨놓은 자신의 사는 목적을 서슴없이 포기했습니까? 성경 대하기 전에 성경 보면서 천하없어도 나는 양보 못할 내 존재의 의미와 목적은 따로 있어. 그것을 포기한 상태에서 성경을 보느냐 이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우리 가정이 잘 되길 원해. 나는 우리 가정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라는 그것을 포기하시고 성경 보십니까, 아니면 그것을 품고 성경을 보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을 품고 보잖아요.

그렇다면 성경해석은 너무 일방적인 해석이 돼요. 하나님 제가 성경 봅니다. 성경 지켜서 내가 노렸던 내 가정의 행복에 얼마나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미 성경을 보기 전부터 목적의식을 가지고 성경 볼 때 일방적으로 성경을 자기가 해석도 못하면서 오늘 해석했어, 납득이 돼, 큐티 이렇게 했어. 이렇게 하면 복 준다 이 말이지, 넘어가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절기 보기 전에 먼저 사람에게 동정하지 마세요. 그 말은 곧 내가 나에게 동정하지 마세요. 오버하지 말고 객기 부리지 말라고.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절기는 우리의 행복과 우리가 평소에 세상에서 하고 싶은 나의 영광과 전혀 상관없는 원칙입니다. 이 원리가.

사람들은 절기를 보면서 절기를 지켜야지, 절기를 지키려면 원리를 알아야지, 라고 시작하는 그 마음 자체가 나는 수상하다고 보는 거예요. 절기를 알았을 때가 오히려 절기 몰랐을 때보다 더 행복해졌어, 라는 은연중에 기대와 노림수를 가지고 주여, 이 절기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고 돼있는 게 인간이란 거예요.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주님이여, 성경이 뭔 뜻입니까, 십자가가 뭡니까. 예수님 재림은 언젭니까? 그렇게 말을 내뱉을 때 이미 내뱉는 그 심사 자체가 자기한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고 난 뒤에 그걸 보기 때문에 이건 주님의 뜻과 관계없어요. 그렇게 일방적인 해석을 끄집어내놓고 납득이 되니, 이해가 되니 이렇게 자기 본래 자기 일로 돌아간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절기를 이제부터 설명해드릴 텐데요, 먼저 마음가짐 자체가 일체 인간에 대해서 동정하지 마세요. 울산 한화케미칼 공장 터지더라도 동정하지 마세요. 세월호 얘들 빠지더라도 동정하지 마세요. 이 말은 우리 자신에게 과도한 동정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가 뭐냐? 절기란 밤에서 낮으로 가는 절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하루 중에 노동하지 않을 때가 언제죠? 밤이죠. 창세기 1장에 보면 뭘 경유해야 돼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죠. 첫째 날 시작이 저녁이에요. 저녁을 경유해야 됩니다. 유월절이 언제냐 하면, 1월 14일 오후 3시에요. 예수님 십자가 달린 것은 안식일 전에 금요일 아침 9시고요. 우리 식대로 하면.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안식일이 시작이 되거든요. 목요일 체포되어서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시는데 오후 3시부터 안식일에 들어갑니다.

오후 3시니까 해가 뜰까요, 질까요? 해가 지겠지요. 밤이 되겠지요. 밤이 되고 난 뒤에 그 다음날 낮이 안식일에요. 이걸 일곱 번하면 무교절 지키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가 만들어지는 그 밤, 출애굽기 12장 42절에 보면,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밤에 이스라엘이 만들어졌어요. 왜 밤이냐? 밤은 인간이 노동하지 못하는 때입니다. 강제 안식이에요. 하루일과 중에서 안식의 의미는 밤이에요. 밤에는 꿈만 꾼다는 것은 수동적이거든요. 자기가 꿈꾸고 싶은 대로 못 꾸니까. 의식에서 무의식 상태로 넘어가는 겁니다. 잘 때 손발 다 놓고 아무것도 못한 채 그냥 맡기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 낮이 아니고 밤에 만들어져야 하느냐 하면, 원래 이스라엘이 야곱 이름이죠. 야곱이 이스라엘 될 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이상한 특징을 가졌어요. 뭐냐 하면 밤에만 나타나요. 야곱과 계속 씨름을 못한 이유가 있어요. 힘이 달린 게 아니고 해가 떠오르는 거예요. 밤이 끝나가요. 인간이 노동하지 못하는 시기가 밤이잖아요. 밤에는 태양이 빛을 잃어요? 밤에 태양이 스위치를 꺼놨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우리가 일하지 않는 밤에도 해는 누구 힘으로 빛나고 있고, 별은 누구 힘으로 빛나고 있습니까? 자연 초목은 누구 힘으로 뜨지요? 그게 누구 힘이냐 말이죠. 천지창조를 만드신 하나님의 힘이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언약에 합류했다는 뜻은, 천지창조의 비빌 정보가 역사 전개와 더불어 펼치는 과정을 유일하게 보여줄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는 낮에 시작하지만 이스라엘은 밤에 시작하지해요. 다른 나라는 낮에 시작한다는데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하느냐? 최초의 나라가 성경에 보면 나옵니다. 최초의 나라는 가인의 나라죠. 도시국가니까.

가인이 동생을 죽였지요.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는 같이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내린 징벌이 뭡니까? 네가 살도록 보호해줄게. 그런데 그냥 사는 게 아니고 가인이 품고 있는 인간의 범죄 속성, 아벨을 죽일 만큼 가득 차있는 그 기능을 발휘해서 그것이 인류의 낮의 문화를 장악하는 인간의 문화를 펼치는 사명과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서 가인을 살려둔 겁니다. 따라서 가인이 살아서 낮에 일한다는 자체가 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저주스런 징벌입니다.

이 원리를 간단하게 추려서 말하면 사는 게 벌 받고 있는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살아있는 게 저주스럽습니다. 싯다르타라는 석가모니는 생로병사는 알았는데 내가 왜 이래야 되는지 그 이유는 몰랐어요. 그래서 기껏 찾아낸 것이 해결책을 자기로부터 끄집어내려고 한 겁니다. 그것, 바봅니다. 왜 바보냐? 세 살 먹은 얘가 아빠 퇴근해서 놀아주고 엄마는 삼시세끼 밥 해주고. 그러면 얘가 해야 될 일이 뭐죠? 주는 밥 먹고 뛰놀면 되지요. 어린이집에 갔다 오고.

지금 세 살 먹은 얘가 유승민이 퇴진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 있습니까? 그리스 부도문제에 대해서 세 살 먹은 얘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필요 있어요? 없지요. 만약에 세 살 먹은 얘가 유승민 퇴진 문제와 그리스 부도에 대해서 고민한다면 그 얘는 그게 징벌이에요.

석가모니가 왜 인간은 생로병사, 힘들 게 사느냐, 라고 고민하는 자체가 싯다르타에게 주신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입니다. 다른 사람은 고생해도 잘도 살 더만 고민을 왜 해요. 아프면 아픈 대로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그걸 왜 따지느냐 말이죠. 그걸 이유를 따지고 원인이 어디 있느냐? 인간의 탐욕에서 나왔다. 탐욕을 줄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팔정도를 하면 된다.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자체가 추가적인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간단하게 돼있어요.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판결문이 너무 간단해. 죄의 삯은 사망이죠. 그러면 어렵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형당할 때 벌 받는 겁니까, 사형 당하기 직전까지 사는 게 벌 받는 겁니까? 길 가는데 난데없이 쇳덩어리 날아와서 죽을 때 그 사람은 벌 받는 것도 모르고 죽지요. 그런데 길 가는데 공사장 인부들이 쇠붙이 들고 내 앞에 맞추고 내 뒤를 맞추고 하면 편안하게 갈 수 있습니까? 어느 것이 스트레스 받아요? 죽이려면 죽이던지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어느 것이 아파요? 죽음을 미리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게 아프지요

이미 아담은 살 때부터 선악과 따먹은 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걸 창세기 3장에서 이마에서 질질 땀이 나와요. 물론 사우나 해도 땀이 나오는지 압니다만 사우나도 벌 받는 거고. 어제 가락교회에서 그런 강의했습니다만 여자가 임신을 했다. 남자는 모르지요. 임신할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어서 임신의 기분을 모르지만 여자는 임신을 함으로 말미암아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게 붙어있는 거예요.

저는 남자기 때문에 상상을 해봐요. 세상에 이것보다 더 확실한 현실이 어디 있을까. 상상 임신 같으면 눈 뜨면 임신 아니었구나, 하면 되는데 이건 내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그냥 부풀어 오르는데 떼어내지도 못하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고 나이트클럽도 못 가고 술도 못 마시고 태교한다고. 아주 순한 말, 고운 마음씨, 음악도 모차르트 안 돼. 베토벤? 운명은 너무 심각해. 아주 부드러운 슈만 곡, 트로트는 아예 멀리해야 되고. 그전에는 자기만 챙기면 됐어요.

임신하고 난 뒤에는 자기 말고 뱃속의 아기를 더 챙겨야 되니 이것을 레비나스란 철학자는 타자, 타인이 있다는 것을 포함시켜야 이게 바로 현실이다. 제가 쉬운 말로 번역하면,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네. 레비나스는 그게 바로 현실이야. 내 마음대로 좀 하자. 왜 그렇게 잔소리가 많아, 하면 그 철학자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게 바로 현실이야.

어제 밤에 늦게 와서 택시 탔는데 나이가 나보다 좀 적은 게 같아요. 아주 겸손하고 친절하게 손님, 어디까지 모실까요, 했어요. 그 사람이 만약에 내가 손님이 아니고 보통 사람이라면 친절했겠는가? 그럼 왜 그렇게 친절한가? 손님이기 때문에 한 거예요. 그러면 친절은 자연스럽지 않고 억지가 되겠지요. 억지가 현실이에요. 그게 하나님이 주신 벌 받고 있는 거예요. 꿇어앉아 벌서고 있는 거예요. 차라리 바보가 돼서 치매 걸리든지 아이큐가 50이어서 죽는 게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게, 그래서 정박아의 특징은 암이 없다는 거예요. 스트레스를 안 받으니까. 미리 앞당겨서 걱정하는 게 없어요.

지금 가인이야기를 합니다. 가인은 낮을 장악해줘야 돼요. 장악하려면 혼자선 안 되지요. 가인이 도시를 이루는데 성공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가인 혼자 죄인이 아니라는 뜻이고, 가인 같은 성품을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보편적인 속성으로 갖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도시의 주도권은 가인이 쥐고 있지 않아요.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누굴 만나면 됩니까? 창세기 4장에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에 가인 죽고 난 뒤에 가인의 칠대 손 라멕이 나오지요. 라멕과 가인은 같은 유입니까, 다른 유에요? 같은 종류지요. 그러면 우리는 가인의 심리분석은 못하지만 고맙게도 하나님께서 가인을 꼭 닮은 라멕을 줌으로 말미암아 선배 된 가인의 품성을 그대로 인수받았으니까 가인이 벌 받을 수밖에 없는 품성이 뭔지 궁금한 거예요. 그 궁금한 것을 라멕이 대신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라멕이 뭐라고 이야기했던가요? 가인을 건드린 사람은 벌을 7배를 받지만 나를 건들면 77배 받는다고 하지요. 그 말을 요즘 쉬운 말로 하면, 어느 놈 건드리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않는다.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 말을 하면 벌 받는 게 아니고 그 말한다는 자체가 주께서 내린 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걸 사자성어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보복운전’입니다. 어렵지요.

운전만 보복입니까? 우리 얘를 유치원에 보냈는데 멍이 들었어요. 새로 온 아이가 때렸다는 거예요. 엄마가 어떻게 합니까? ①참는다. ②유치원에 가서 그 아이에게 직접 보복한다. ③침착하게 그 얘 엄마 불러서 앞으로 그런 일 없도록 조리 있게 따진다. ④유치원 교사에게 cctv 달도록 해서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고 또 때리면 교육청에 고발한다. 몇 번입니까? 지금 겁나서 이야기 못한다. 모두 똑같은 정답이에요. 참으면 보복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한테 동정하지 말라 했지요. 하나님이 내린 벌 받고 있는데 벌 받고 있는 나를 동정해버리면 나는 벌 내린 하나님 편일까요, 그 벌이 부당하다고 하는 사탄의 편일까요? 이 논리는 쉽다. 우리의 본성 자체가 교회에서 기도하지만 사실은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것은 딱 이거에요. 언 놈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 땅에서 사는 게 벌입니다.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주여, 죽여주옵소서. 에스더가 하는 말이 뭡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보다 확실하게 구약보다 신약의 사도 바울이 더 멋있지요. 아이고, 죽으면 죽지 뭐. 이건 에스더 수준인데 급이 좀 다르지요.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주여, 죽여주옵소서.”

그런데 사도 바울보다 급이 더 높은 사람이 있네요. 야고보서에 우리는 안개니라. 어디 안개가 죽여 달라고 합니까. 살아도 안개고 죽어도 안개인데 입 뗄 것 뭐있습니까.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온 말이, 우리가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리니. 이 말을 할 때 뭔 뜻입니까? 그래도 될 수 있으면 사는 쪽으로 해주시지, 이런 게 일체 없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이미 이 안개, 최 안개에요. 황 안개, 안개라니까. 앞에 성씨 붙이고 안개에요. 우리는 동일한 이름을 가졌어요. 안개가 뭐 살고, 죽고. 산다고 해서 안개 벗어나고 죽는다고 해서 안개 더 되고, 그런 것 없어요. 사나죽으나 안개고. 백 년 사나, 십 년 사나 안개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징벌은 보복의 의미를 갖고 있어요. 그걸 정의롭다, 공의롭다고 고상하게 표현하는 거예요. 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 차원에서 보복하는 겁니다. 이번 8월에 수련회하는데 사사기에 보면 나와요. 유다지파가 제일 먼저 나와서 베냐민지파를 보복했지요. 보복할 때 전쟁 초반에 누가 승리했습니까? 인간이 납득이 차원에서는 베냐민지파가 죄 지었으니까 정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율법의 이름으로 유다지파가 주동한 11지파가 승리해야 되는데 대패했어요. 그래서 연합군의 기도가 바뀌었어요. 주여, 우리가 칠 수 있는 자격이나 됩니까? 그걸 야고보서 4장에선 우리는 안개인데 늘 그냥 웃지요, 이런 식으로.

여보, 사기 당했어. 복음 아는 남편이, 그냥 웃지요. 이 세상에서 사기 당해도 그냥 웃는다고 할 경우는 다음 중 몇 번일까요? ①예수님 마음을 가진 사람. 정답 아닌 줄 아시지요. ②자기가 사기 당한 것보다 더 심하게 남을 사기 친 사람 두 개만 합시다. 몇 번이 정답입니까? 2번이 정답이죠. 왜? 내가 당한 것은 새 발의 피니까. 자기가 20억 사기 쳤는데 20만원 사기 당했다고 어떻게 사냐는 그런 소리 안 나오지요.

그렇다면 주님하신 말씀이 이해됩니다. 하늘나라를 누가 가느냐? 세리와 강도와 탕자가 가지요. 그 사람들이 싱긋이 웃으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직업이 창기인데, 직업이 남들 욕하는 세리인데, 십자가 달리게 만든 강도인데, 아버지 유산 탕진한 탕자인데 왜 싱긋이 웃어요? 심지어 퇴직하기 전에 사장 돈 횡령해 먹은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받습니까? 그리고 귀신이 나간 마리아, 그리고 소문 나쁜 여자, 그 사람들이 왜 예수님한테 칭찬받습니까? 그들은 자기 의가 없지요. 남들 갖고 있는 자기 의가 왜 없어요?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자기한테 동정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 다음에 무슨 말 했던가요? 우리는 사는 자체가 하나님이 알아서 벌주고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막상 오늘 절기를 볼 때 어떻게 본다고 합니까? 절기 알아서 내가 얼마나 행복해질까, 절기 알아서 성경 많이 안다고 얼마나 복 받을까? 이미 그것부터 출발한다고 했지요.

제가 말할 때 저 목사는 무슨 뜻으로 그런 말하느냐? 성경 보고 복 받으면 얼마나 좋은데 왜 그걸 거부하느냐. 이렇게 궁금해 했지요. 그런데 성경 전체는 밑에 지하에 가면 얽혀있어요. 우리는 표면에서 촐싹대지요. 성경 깊이 들어가 보세요. 촐싹댈 수도 없어요. 촐싹대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촐싹대세요. 그걸 세 자로 ‘막 산다’고 합니다. 하지만 촐싹대게 해주신 그분의 은혜를 말씀의 밑바닥에서 연관시켜서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지금 강의 초반밖에 안 했어요. 할 게 너무 많은데 너무 어렵기 때문에 주춤하고 있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라멕이 누구의 심성이라 했습니까? 라멕 자기의 심성이 아니고 선배 가인의 심성이지요. 가인은 이미 그 자체가 벌 받고 있지요. 그렇다면 세상 끝났네. 벌 받고 이마에 땀 흘리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을 받고 얘가 있다는 그게 현실이고. 남자는 홀몸이지만 여자는 난데없이 인격체가 하나 생겨버리니까.

타인과 더불어 산다는 게 현실이라고 했지요. 지리산에 도 닦으려고 가지 마세요. 함께 사는 게 현실이에요. 사기도 당하고, 이게 현실이라니까요. 그렇다면 전부 다 지옥 갔다고 하겠지요. 창세기 4장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 있어요. 출애굽기 12장 42절에 무엇의 밤? 여호와의 밤이죠. 창세기 4장 끝에 그들이 여호와를 불렀다고 돼있어요. 여호와를 불렀으면 그 사람은 죄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호와 불러도 여전히 죄 있지요. 창세기 5장에 보니까 여호와 부르든 말든 죽었더라, 죽었더라, 나오니까. 분명히 죄 있는 건 맞습니다.

그러면 죄인이 어떤 경우에 어떤 전제의 바탕이 될 때 여호와가 의미 있게 다가옵니까? 나는 이 땅에 산다는 자체가 죽어 마땅한 거야,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여호와 이름을 부르면 되겠지요. 그렇다면 나로 하여금 나는 죄인이야. 이 땅에 살아가는 게 벌 받는 거야, 라는 그런 기이한 마음씨를 누가 뿌린 겁니까? 여호와께서 뿌린 거예요. 여호와께서 뿌린 것을 여호와께서 회수하면서 나타난 효과와 결과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것.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여호와의 정보, 여호와께서 일을 벌이시는 그 내막 비밀을 안다는 거예요. 그 비밀은 로마서, 에베소서에도 나오지만 창세전에 숨겨진 비밀이 마지막에 나타났다고 했지만 그 비밀을 우리가 흔히 쓰는 용어로 하면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 뭐가 들어 있느냐? 오늘 하려고 하는 절기가 포함이 돼있습니다.

절기와 언약의 차이는 뭡니까? 언약은 개념이고 추상화된 언어라면, 그걸 이 땅에 구체화된 현상이 절기입니다. 그러면 그걸 구체화하기 위해서 절기를 지켜야 될 사람들이 필요하겠지요. 거기에 동원된 엑스트라를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자기가 납득이 되고 기대하는 본래의 자기 자신의 의도는 허락됩니까? 허락되지 않습니다. 허락되지 않는 것을 매일같이 반복해서 확인시켜주는 것을 상번제라고 합니다. 아침에 죽음이 시작하고 저녁에도 죽음으로 마감되는 것.

결국은 미국의 넓은 서부개척시대에 말 타고 달리면 자기 영토가 돼요. 그러면 자기 영토인 것을 무엇으로 표시할까요? 서부영화에 보면 나오잖아요. 내 영토라고 울타리 치지요. 그게 절기입니다. 그게 법이에요. 구원의 정보가 들어있는 특수한 지역, 그게 절기에요. 미국의 서부는 지리적으로 바운더리잖아요. 시간적인 바운더리는 절기입니다. 안식일이고.

그래서 절기는 다른 말로 하면, 절기란 천국의 리어설입니다. 지금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가 따지면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이기 때문에 그걸 따진다는 것은, 주님이 추방시킨 취지를 모독하겠다는 의사밖에 안 되거든요. 따라서 천국은 생각하지 마세요. 천국에 우리는 못 갑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천국이 왔다고 했지요. 그러면 천국은 우리가 가는 게 아니고 천국이 와야 되겠지요.

세례요한이 천국이 왔다고 하면서 정작 보여준 것은 구름이 움직이고 별이 바뀌는 게 아니고 누가 왔어요? 예수님이 왔지요. 천국 오는 줄 알았더니만 쾌적한 환경이 온 게 아니고 사람이 온 거거든요. 잘 생긴 것도 아니고 행색이 초라해서 누구도 못 알아봐요. 그런데 세례요한은 성령을 받아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천국인데 자기 백성을 위해서 죄를 짊어지기 때문에 천국을 만드신 분이지만 꼴이 아주 망가진 모습으로 저렇게 오셨다. 그래서 천국은 천국이고 저분 외에 다른 천국은 없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처음에 시작한 사람이나 이 세상이나 공경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납득이 안 돼요. 왜 납득이 안 되느냐 하면, 내가 기대했던 말이 따로 있다는 은근히 자기 속내를 들켜버린 거예요. 나는 다른 말 듣기 좋아하는데.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그 이야기 듣고 싶어요. 내가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자체가 주님이 나를 추방시킨 사는 게 벌인데 그걸 완전히 모독하는 게 돼요.

여러분, 어린 자식 때려봤잖아요. 때릴 때 “엄마, 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그게 잘못한 것을 아는 얼굴이던가요. 아프니까 때리지 말라는 거지. 우리도 마찬가지라니까요. 사사기도 마찬가지에요. 때리니까 때리지 마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주의 뜻과 일치되는 겁니까? 그러다 형편이 나아지니까 헤헤거리면서 또 바알을 섬기는 거예요.

절기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절기가 일곱 가지 있습니다. 그 절기는 반드시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던 그 사건을 반복해서 터뜨려줘야 돼요. 천사가 뭘 가져왔어요? 천사가 밤을 가져왔어요. 야곱이 매일같이 겪는 그 밤은 아니에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천사를 만났지요. 신약의 성도는 예수님을 만났지요. 예수님이 누구시지요, 라고 할 때는 어디를 가야 되느냐 하면, 야곱이 만났던 하나님의 천사가 무슨 의도로 야곱을 찾아왔는지 그 의도의 완성 상태가 예수님의 찾아오심이에요.

“야, 날 새려고 한다. 밤으로 꺼져야 돼. 놔줘야 돼.” “아니 되옵니다. 축복해주시고 가십시오.” 축복해주니까 드디어 해가 밝았다고 했지요. 그러면 야곱이 경험한 밤이 평소에 매일같이 살아왔던 그 밤일까요, 특수한 밤일까요? 천사를 만났던 특수한 밤이죠. 천사는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특수한 밤 속으로 사라졌잖아요. 그러면 야곱은 천사를 만나서 브니엘, 생명 얻었잖아요. 그러면 신약에서는 누굴 만나야 생명을 얻습니까? 예수님 만나서 생명을 얻지요. 그런데 예수님 만나놓고 울산 밤이나 낮이나 이건 엉터리잖아요. 울산의 밤으로 살다가 주님 만나고 난 뒤에는 울산의 밤이 되면 안 되고 여호와의 밤이 돼야지, 오늘 참 아름다운 밤이에요. 이건 시상식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밤 말고 여호와의 밤.

여호와의 밤인지 어떻게 압니까? 야곱이 천사를 만나고 자기를 산 자로 봤어요, 죽은 자로 봤어요? 죽은 자로 봤지요. 그러면 내가 야곱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죽어 마땅함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루치를 계속 살려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살려내는 의미와 목적은 천사가 와서 나를 아예 죽여 버릴 때 죽기 위해서 나는 그 동안 살아왔구나.

그렇다면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죽여 버리지 왜 지금까지 살려냈습니까? 야곱은 언약적 의미와 사명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천사가 품고 있던 정보가 구체화되어서 죄수들만 있는 인간세계에서 하늘의 구원의 정보, 영생을 얻는 정보가 야곱이라는 언약의 사람에 칩처럼 집어넣는 임무를 야곱이 부여받은 겁니다. 하여튼 이해는 되시지요?

이렇게 제가 구성해보겠습니다. 당신은 뭡니까? 나는 천사다. 왜 왔습니까? 죽이려고 왔다. 그러면 죽이세요. 지금까지 산 것이 왜 살았습니까? 죽기 위해서 살았다. 벌 받는 중이다. 그럼 죽이세요. 죽었다, 끝. 이게 아니고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태어나게 한다면 드디어 야곱 본인의 모든 요소는 이제 자기 인생을 좌지우지 못합니다. 자기 인생은 하늘의 구원정보를 보여줄 임무를 맡은 거예요. 이게 나중에 이스라엘 나라로 연장되는데.

그렇다면 쉽게 해서 야곱 인생의 특징이 뭡니까? 간단하게 대답하는 거예요. 장차오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의 응용문제가 뭐냐 하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유가 뭡니까? 이미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를 우리를 통해서 발산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답변이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그건 믿음 좋은 사람이나 하세요. 저는 바빠서 못합니다. 손사래 치면서 겸손을 떨면서 못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야곱이 이스라엘 인생을 사는 것이 본인의 의지였습니까? 그거는 이름을 주신 분이 주변의 상황이 야곱을 그렇게 몰아간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늘 하는 소리가 낯선 이야기지만 신앙생활하지 마세요, 하는 말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 방해만해요. 엄마가 손님 온다고 부엌에서 잡채를 하는데 세 살 먹은 딸이 엄마 도와준다고 온 천지에 엄마 일거리를 더 만들어놨어. 하여튼 세 살, 네 살, 다섯 살, 걔들은 사춘기도 아니고 뭐라고 해야 돼요? 얼마나 저지르는지.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그래서 그걸 찍으면, 찍지 마라! 자기 존재의 의미는 알아서 자기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그건 가인의 벌 받는 모습은 그대로 과시되고 있는 거예요.

하지 마세요. 안 하면 구원 못 받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는 게 가짜인 거예요. 정말 믿는다면 아무것도 안 해요. 지금껏 안 해왔지만 여전히 안 하고 극렬하게 안 할 거예요. 앞으로. 카드 cf에 그런 게 나와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삼성카드가 알아서 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알아서 다한다는 이 표현을 빌립보서 4장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왜? 나는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알아서 다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체스나 장기, 바둑 두는데 남들은 바둑 잘 두고, 체스 잘 둔다고 해요. 그런데 그건 남들이 내 사정을 몰라서 그래요. 나는 그냥 손가락만 있고 네 안에 상자 안에 난장이가 있는데 체스 챔피언이라. 장기 챔피언이고 바둑 챔피언이에요. 안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는 거예요. 남들은 내가 마치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한 것처럼 보는데 실제로는 주께서 내가 엉뚱한 길로 가면 발길질하며 그쪽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건 네 뜻대로 일체 안 해준다고 했잖아. 우리는 주님한테 얻어터지기 바빠. 그걸 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형제우애란 말이죠. 이걸 쉽게 말해서 우리가 주께 늘 얻어터지면 나오는 게 뭐다? 성령의 열매. 내가 곱상해서 착하면 나오는 게 뭐냐? 육신의 열매. 간단하죠, 뭐.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 (IP:14.♡.134.102) 15-07-07 10:17 
20150703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여호와의 밤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성경을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깊이 있게 봐야 전체가 다 연결이 돼요. 자칫 표면만 흩으면 자기 잘남을 위한 그런 것밖에 안 되거든요. 깊이 들어가면 누구만 자랑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나게 돼있어요. 창세기 4장에서 여호와 이름을 불렀잖아요. 창세기 6장에 가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땅의 여자들과 결혼해서 온 천지가 개판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걸 싹쓸이하기 위해서 땅을 정화하는 노아 홍수가 일어난 겁니다.

창세기 15장에서 그걸 한글성경에서 이렇게 표현했어요. 이걸 숙성이라고 했어요. 빵 굽는 거나 술 담글 때 숙성하잖아요. 죄의 숙성이에요. 죄가 무르익어야 되는 거예요. 왜 죄가 무르익어야 됩니까, 라고 물으면, 내가 주께서 생각하는 죄의 조명발, 가수가 무대에 나오면 조명 비추잖아요. 동그란 그 조명 안에 들어와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벌이라고 하는 그것을 빛이라 해요.

둘째 시간은 쉽게 안 하겠습니다. 쉽게 하려고 하면 복잡해버리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만드는데 낮과 밤은 이차적인 문제고 빛과 어둠을 이 땅에 구체화시킨 겁니다. 해와 달이라 하지 않아요. 큰 광명과 작은 광명으로 나눈 겁니다. 창세기 1장 5절에 보면,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해서 낮과 밤이 원천적인 게 아니에요. 부차적인 거라니까요. 낮과 밤을 제거하면 빛과 어둠만 남아요.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온 천지가 어둠이라는 거죠. 빛은 외부에서 개입돼야 돼요.

빛이 왔음에 사람들이 빛인 줄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뭡니까? 어둠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어둠과 빛은 그런 성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둠이라도 빛이 오게 되면 자동적으로 빛이 비춘 부분은 밝게 되는데 이 세상은 오히려 빛이 오게 되면 어둠이 더욱더 어둠으로 드러나는 희한한 일이 다 있습니다, 참 성경 어렵지요.

빛이 안 왔으면 우리는 나름대로 빛과 어둠을 구분했습니다. 유대인 같은 자기는 빛이요, 이방나라는 어둠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잘못된 해석을 도리어 이용해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했지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드디어 어두운 곳에 빛이 임했더라. 이사야 9장에 나온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첫째 시간에 인간을 동정하지 말라 했지요. 그 이유가 뭡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원리만 나타나지 인간의 사적인 의견은 완전히 개 무시해야 돼요. 둘째 시간은 인간의 신학을 믿지 마세요. 인간의 신학은 자기 잘남을 위한 핑계에 불과하죠. 그리고 그 신학의 최 선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성으로써 가인은 도시국가를 만들었지만 교회는 종교국가를 조작해낸 겁니다.

교회나 천주교나 기독교나 교회란 이름의 종교국가를 만드는데 투입된 이성적 원리는 뭐냐? 힘의 원리에요. 강자가 대우받고 약자가 설움 받는 그런 것. 먼저 된 자가 계속 먼저 되고 나중 된 자는 끝까지 나중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줄 아시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바꿔치기하는 겁니다. 세리와 창녀와 강도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 간다고 이야기해요.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천국이 너희 것이니. 숫자 불려준다는 게 아니고.

적으냐? 아프냐? 나도 아프다하는 것처럼 적으냐? 나도 나 홀로밖에 없었어. 적다고 기죽어 있는 그 심상도 수상해.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당부했거든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함께 있다고 했잖아요. 달랑 두 사람이라도 주님이 괄시치 않는 거예요. 그러면 그 두 사람은 어떻게 모였습니까? 너 오고 나 오고 그래서 주님 이름 부르자. 그러면 주님이 거기 계십니까? 주님이 웨이터입니까, 아줌마에요? 식당 이몹니까, 오게. 그런 뜻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부르게 한 사람은 모여도 주의 이름만 부르게 돼있는 거예요. 주께서 오라하실 때만 오게 하시는 거예요.

아까도 제가 이야기했지만 천국은 우리가 가는 게 아니고 갈 생각도 없기 때문에 천국이 오는 거예요. 오는데 갑자기 천사를 대동하고 이렇게 오지 않아요. 아주 초라한 행색으로 오십니다. 오신 분이 요단강에 뛰어들지요. 예수님께서 요단강이 뛰어든 이유는, 세례요한은 요단강 물세례 생략한 불세례와 성령세례를 이야기했거든요. 마태복음 3장에서. 그분이 오시면 도끼 들고 와서 불세례와 성령세례로 끝난다. 타작마당 끝나는 줄 알았는데 물세례를 누락시킨 거예요.

그 다음에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 주는데 어떤 아저씨가 들어와요. 세례를 줍니다.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오거든요. 비둘기란 말은, 옛날 노아홍수 때 온 천지가 땅은 한 뼘도 없이 전부 물밖에 없었잖아요. 그 물은 심판의 물 곧 죽음의 물이죠.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분노하시고 분통해하신 표시가 물로 덮어버린 거예요. 물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여전하다는 뜻이에요. 빠지면 죽으니까. 그런데 그때 땅을 발견해서 땅이 있다고 언급한 짐승이 까마귀가 아니고 비둘기죠.

예수님께서 요단강 세례 받을 때 비둘기가 온 것이 아니고 비둘기 같이 비둘기의 기능을 품고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러면 이 땅은 빛이란 손톱만큼도 없고 전부 다 물속에 잠겨있는 어둠의 세계다. 세례요한도 몰랐지요. 물세례는 죄인들만 받게 돼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인데 세례요한이 말립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죄 없이 이러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만약에 내가 의인의 자격으로 죄인들의 더러운 물속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나는 아버지가 주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느니라. 시키는 대로 하라. 나한테 물세례 주고 난 뒤에 불세례(심판), 그 다음에 성령세례(구원)가 주어지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 맞는지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는 세 가지입니다. 물과 불과 성령. 성령은 예수님이 참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는, 그래서 물과 불과 성령은 하나니라. 요한일서 5장 8절에 나오는 말씀.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는 없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공생애를 밟아오지 않으면 너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 어떻게 갑니까? 걱정하지 마라. 내가 기어이 예수님 공생애를 가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가고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사람들이 이게 궁금한 모양이라. 내가 지금 주님한테 이끌리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지요. 그래서 절기도 마찬가지고 율법도 마찬가지인데 인간들이 납득이 되고 소통이 되는 세계에 낯선 것으로 긁어버려요. 낯-설-게.

그러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비로소 나도 남보다 밑지지 않다고 하다가 본인이 죄가 되고 어둠이라는 걸 알아요. 빛을 받게 된 어둠과 빛을 안 받은 어둠이 차이가 난다 이 말이죠. 죄인 맞는데 내가 죄인인 줄 알아서 주께서 오신 것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나 같은 죄인 부르러 오셨지요, 라고 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 절대로 독자적인 생각을 안 갖습니다. 그걸 의존적이라 해요. 주님만 의지하게 돼요.

어제 가락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다윗의 고백 가운데 놀라운 고백이 뭐냐 하면, 밧세바를 범하고 밧세바의 남편을 죽여 놓고 하는 말이, 나는 사람에게 죄진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만 죄졌다. 이게 뭔 뜻입니까? 나는 처음부터 죄를 짓도록 돼있기 위해서 어머니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것을 그냥 죄가 아니고 근원적으로 다 아는 죄, 그 죄에 합류한 자는 주와 함께 동행하고 계십니다. 축하합니다.

이유도 묻지 말고 무조건 죄인이에요. 이유 달면 엉터리 죄에요. 이유 다는 죄는 윤리적, 도덕적, 양심적 죄라 합니다. 그 죄는 진짜 죄를 위선적으로 가리는 방해 놓는 사탄의 작업이에요. 또 죄졌어. 회개하는 거예요, 잘난 척하는 거예요? 그때 조금만 침착했으면 죄 안 짓는 건데. 아직도 자기한테는 죄 안 지을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성경구절 한 군데 찾아봅시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지금 사도 바울이 이 말하는 취지는 뭐냐 하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뭔지를 알려주잖아요. 십자가는 이런 겁니다, 이러면 될 건데 뭘 동원시킵니까? 십자가 로마 군병이 찔렀대, 바리새인이 재판해서 죽였지. 이렇게 설명하지 않고 십자가 죽었던 사건 현장을 설명하지 않고 누굴 동원시킵니까? 나지요. 과거의 십자가에 머물지 않고 지금도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가 뭐라는 걸 알려주는 거예요.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방법의 주인공들이 누구에요? 오늘날 우리들이라고.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생각을 갖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완전히 먹칠하는 사탄의 짓이라는 말입니다. 십일조 거기다 안식일 지키는 것, 목사한테 순종하는 것, 사도 바울의 권면 지키는 것, 성경말씀을 의로 교육하기 유익하다고 해서 지키고 또 지키는 그것이 십자가를 모독하는 짓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쩌란 말입니까? 그냥 사시라니까요. 그냥 살다가 구원 안 해주면 어떻게 됩니까? 아직도 본인 생각하네. 아직도 본인이 구원을 탐을 내네. 구원을 탐내면 안 돼요. 구원해주면 고맙다고 하면 되고, 구원 안 해주면 그건 오야 마음대로고. 여러분, 그게 믿음 아닙니까? 그게 의존적이잖아요. 날 의존하지 않고 주인님 마음대로 하세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까라하면 까고, 그거잖아요.

절기라는 것은 이 어둠의 세계에 빛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투입된 거예요. 그러면 절기가 투입될 때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 때 낯선 밤이 왔지요. 여호와의 밤이 온 거예요. 이건 야곱이 평소에 겪었던 밤과 달라요. 이건 낯선 밤이에요. 이 밤은 결국 야곱으로 하여금 야곱의 인생은 끝장나도 상관없음을 알려주지요. 그것은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인간이 알고 있는 낮과 밤에서는 안 나오고 여호와의 밤이 야곱을 침투할 때 그 사건이죠. 이 사건으로 새로운 스케줄을 짠 게 일곱 가지의 절기입니다.

일곱 가지 절기가 유월절(1월 14일), 무교절(1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그 다음에 초실절. 초실절에 두 종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리 나올 때 그 다음의 초실절이 7*7=49+1이라 해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오순절에 밀이 처음 나오는 초실절이라 해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칠월에 들어가면 첫날이 나팔절, 그걸 한 해의 머리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7월 10일이 중요한 날이에요. 그전까지 죄 지은 줄 모르다가 뒤늦게 죄 지은 걸 알고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양을 바치고 죄를 깨닫게 될 경우에만 제사 드릴 때 없어지는 거예요. 죄인 것도 모르고 제사 드려도 용서 안 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 일곱 번 죄 지었을 때 베드로처럼 일곱 번 용서한다고 칩시다. 그럴 때 누가 대단해 보입니까? 일곱 번 용서한 내가 대단해 보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일곱 번 용서해달라는 사람이 더 대단한 것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뻔뻔스럽지요. 진짜로 참회를 일곱 번한다면 대단한 거예요.

그래서 용서한다는 것은 사실은 의지로 나타날 필요 없어요. 회개하면 용서는 저절로 따라오게 돼있어요. 따라서 죄 지은 사람이 용서에 용서를 유도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냥 보면 일곱 번씩 용서하다니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죄 지은 사람이 없으면 용서가 없잖아요. 죄 짓고 용서를 구할 때 용서가 성립돼요.

어쨌든 간에 보통은 자기가 죄를 짓고 알아야 되는데 칠월 십일에는 세상에 이런 바겐세일도 없어. 죄를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이스라엘 사람이란(할례를 행한) 조건 하에 모든 인간은 일괄적으로 다 용서가 됩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지은 죄는 빠이빠이. 죄는 내가 지었는데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가 미처 모르지만 모르는 죄까지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일괄해서 수거해서 그걸 한 사람한테 짊어지게 했어요. 그 사람이 그 해의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이 옷에 방울을 달고 언약궤까지 갑니다. 뜰 지나서 성소에서 지성소 들어가서 언약궤에 들어서면 막다른 길이에요. 언약궤 앞에 보이는 게 있어요. 그림이 있는데 그게 천사에요. 벽에 천사가 수 놓여 있고 앞에 둘이 손잡고 있는 조각상이 보입니다. 천사의 눈이 응시하는 곳은 바로 1미터 50 되는 안에는 아카시아고 바깥은 금박 입힌 상자가 나와요. 그 상자 안에 깨진 돌 판을 대신 만들고 글씨는 하나님이 직접 쓰신 돌 판이 들어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네가 봤냐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안 봤습니다. 성경에 나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약궤가 그렇게 돼있고 천사가 있고 마련돼 있다는 것을 일반 백성들은 보고 싶어도 아무도 못 본다는 것. 그러면 일반 백성들의 죄는 어떻게 씻습니까? 그걸 보고 오신 대제사장의 기능에 대해서 신뢰를 하고, 신뢰만 해선 안 돼요. 일단 신뢰해야 되고 그 다음에 의존해야 돼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그 말을 믿어줘야 돼요.

아내들이 남편에게 잔소리하는 이유가 뭡니까? 첫 번째는 신뢰가 안 되고 신뢰가 안 되니까 주춤하게 되는 거예요. 믿다가 나도 같이 망할까 싶어서. 남편이 믿을만한지 따지는 건 괜찮은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잖아요. 지금 죽어가고 있잖아요. 우리가 독자적으로 한다고 천년만년 삽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면 미리 앞당겨서 신뢰해버립시다. 그냥 주의 말씀대로 진척되도록 하자 이 말입니다. 그게 칠월 십일에 합니다. 일괄해서 모든 죄를 수거해서.

저는 빌라에 살기 때문에 밤 되면 대구시에서 만든 음식쓰레기통을 내놔요. 아침에 운동 나가다 보면 벌써 간밤에 천사가 다녀갔는지 가벼워요. 물론 안의 토큰은 빼먹고. 간밤에 누가 다녀갔지요? 수거하지요. 뭘 수거합니까? 내가 처리 못하는 음식쓰레기, 더러운 것들을 처리했지요. 그러면 내가 내놔야 돼요, 안 내놔야 돼요? 지금 음식쓰레기야 쓰레기인 것과 쓰레기 아닌 것을 구분하지만 우리는 엄마 태중에서부터 갖고 있는 죄를 분류할 자격도 안 돼요. 모든지 죈데 뭘 따로 분류해. 입만 떼면 다 거짓말인데.

그러니까 주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간다면 그냥 얼른 내가 분류하지 말고 이 몸 자체를 죄인 여기 있나이다하고 맡기세요. 그게 막 사는 겁니다. 그리고 번지점프하세요. 발목 묶였잖아요. 아찔하지요. 발목 묶였으니까 뛰어내리세요. 울산 한화케미칼로 마지막 아르바이트하다가 죽어 버렸어. 그냥 이 세상을 자기 몸을 던지세요. 던질 때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상대성원리에 의해서 중력과 상쇄되면서 우리 몸이 가벼워져요. 그걸 마태복음 11장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짐이 가볍지요. 그걸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동안 자유 못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의존하지도 않았고 신뢰하지도 않았고 태어날 때부터 박혀있는 악마의 방식이 뭐냐 하면, 내 인생 나 말고 책임질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집에 놀고 있으면 돈 갖다 줄 사람 아무도 없다. 그러면 누가 나서야 돼요? 내가 나서지 않으면 나는 못 삽니다. 여기에 대한 응용문제가 뭔지 알아요? 내가 예수 믿어야 살지 예수 안 믿으면 나는 죽는다. 이게 옳은 믿음입니까? 마귀적 믿음이지요. 어딜 감히 죄인 주제에 구원받겠다고 시도한다는 자체가 나쁘지요.

그러면 성령 받은 믿음은 뭡니까?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잖아요. 주여, 누구십니까? 왜 저를 가만두지 않고 매사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서 저를 데려가십니까? 이러한 고백, 그것은 절기의 총체가 우리에게 덮친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되면 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뭐뭐 안에서, 예수 안은 신약이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절기 안에서 그들은 구원을 받아요. 여기서 문제 내겠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은 나를 위해서 있습니까, 절기를 위해서 있습니까? 절기를 위해서 있지요. 절기 안에 구원의 정보, 심판의 정보가 하나님의 언약이란 이름으로 그 안에 담겨있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할게요. 언약이란 추상명사가 이 땅에 구체화되게 되면 스케줄로 나타나게 되지요. 봄, 가을 일곱 개의 절기로 나타난 겁니다. 그러면 절기에 참석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절기에 관한 모든 행사나 법도에 대해서 우리가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습니까? 안 돼요. 안 되니까 수동적이 되고 전적으로 의존해야 되고 의지해야 되지요.

그렇다면 절기가 뭉쳐진 것이 십자가지요. 십자가는 뭐냐?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함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헛되이 죽었다고 했잖아요. 그 말은 뭡니까? 이미 구원받는 데에 대해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남아있다, 없다? 없다. 참 이게 정말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히브리서 10장에서 우리의 죄를 사할 제사는 이제는 없다고 했거든요. ‘없다’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살릴 나는 없습니다.

야곱은 없어지고 이스라엘만 남았어요. 이스라엘은 누구 작품이에요? 낮의 작품이 아니고 나의 노동의 작품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말해서 여호와 밤의 작품이에요. 그래서 출애굽기 12장 42절에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때 야곱처럼 밤에 나타났고 그 천사가 애굽의 장자를 몰살했고 살아남은 자를 거두어서 이스라엘과 그 외에 잡족이라 했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는 그 밤을 여호와의 밤, 참 오늘도 아름다운 밤이에요.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밤이.

그러면 절기란 낯선 밤의 이동수단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절기 안에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시간 스케줄이 계획이 잡혀있겠지요.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은 낮과 밤을 주관하지만 낮과 밤을 주관했던 모든 별들은 사실은 새롭게 더 추가되고 추가되는 그들은 그쪽을 향하여 해석이 점점 더 깊어지고 세심해지고 세밀해지는 거예요. 구약 때도 그랬지만 신약에 예수님에 오게 되면 구약에 주어진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꾸준하게 이 땅에 유성처럼 계속 쏟아져 왔던 겁니다.

속죄일은 7월 10일. 그 다음에 7월 14일부터 일주일 동안 바깥에 텐트치고 살아가는 그걸 텐트 친다고 해서 우리말로 텐트 절기, 한자말로 초막절. 초막절은 가을이기 때문에 모든 열매를 모아서 저장한다고 해서 수장절이라고 해요. 유월절부터 마지막 수장절까지 했는데 그 안에 담겨있는 정보를 이어봅시다.

처음에는 여호와의 밤이죠. 여호와의 밤에 사자가 와서 모든 것을 죽여 버리죠. 야곱이 죽기 직전에 축복받을 정보를 빼냈지요. 본인이 소유한 건 아니에요. 본인은 없으니까. 다만 야곱과 씨름하면서 그 밤을 낯선 밤, 이 땅의 밤이 아니고 하나님의 세계가 밤이란 모습으로 왔던 그 밤에 줬던 축복이 뭐냐 하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브니엘, 하나님과 마주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명을 얻었다고 하니까 저 멀리서 동이 트더라.

지금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온통 낯선 하나님의 스토리가 전개된 거죠. 그 스토리가 국가 이스라엘로 퍼지면 이스라엘이 가는 데마다 전에 야곱이 만났던 하나님의 사자와의 언약적인 정보가 계속해서 펼쳐지겠지요. 종이접기하고 하나씩 펼쳐보세요. 하나씩 펼쳐보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남은 역사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남은 역사에 재수 없이 애굽이 말려든 거예요. 그래서 애굽은 모세를 앞장세운 하나님의 사자의 투입으로 장자는 다 죽게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모세가 신발 안 벗으니까 신발 벗어! 분명히 떨기나무가 타는데 소비되지는 않고 이상하다.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사자다. 뭘 하시려고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언약대로 실시하려고 왔다. 그 실시하는 것 중에 구체적으로 된 게 절기란 말이죠. 절기니까 죽음이 왔잖아요.

처음에 유월절, 그 다음에 무교절이죠. 유월절, 무교절을 언제 실시했어요? 애굽에서 나오던 여호와의 밤에 처음 실시했지요. 1회. 그러니까 이미 여기에서는 우리가 늙어 죽는 것 말고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 발생된 희한한 이건 불신자는 도저히 경험 못한 죽음이 절기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죽었는데 거기서 이삭이 펴고 열매를 맺네요. 이걸 초실절. 초실절하고 난 뒤에 좀 지나니까 밀이 펼 때 맥추절. 교회에서는 맥추절이라 해서 봉투 돌리죠. 왜냐하면 6월이 가장 헌금이 적게 나올 때에요. 한 번 거둬야 추수감사절까지 버틸 수 있어요. 가게세 내고.

그 다음에 칠월이 되면 나팔을 불거든요. 7월 1일이죠. 나팔절은 칠월을 대표합니다. 사실은 칠월이 죽음에 담긴 내용을 반복된 일 년을 통해서 구체화된 날이기도 해요. 나팔 분다는 것은 전쟁을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이름이 뭐지요? 하나님과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임무, 그래서 여호와 밤에 나올 때 다른 말로 여호와의 군대라고 했어요. 싸움은 누가 합니까? 칼 만들고 총 만들고 해야 됩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가만있어라. 가만있을 때만 보이는 전쟁, 희한한 전쟁이죠. 설치면 안 보이고 가만있으면 보이는 전쟁. 아무것도 안 하면 느껴지는 것이 은혜, 설치면 자기 자랑질만 되는 희한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보니까 새순교회도 아무것도 안 해. 늘 주님의 은혜를 만끽하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여러분 언제까지 가만있는 줄 알아요? 아무 일 없을 때는 가만있어요. 일이 터지면 기도하고 철야하고 난리 나요. 가만있으라는 말이 내가 나한테 하는 것은 헛발질이고 우리가 불안할 때 가만있음의 효과를 얻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설칠 수밖에 없고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환경을 집어넣어 버려요. 그게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서 원망을 해대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열 번이나 반발하고 그런 가운데 가만있어. 지금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본성상 가만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나팔 분다는 것은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널 구원하는 목적이 아니고 너를 앞장 세워서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겠다. 그 전쟁이 무슨 전쟁이냐 하면, 바로 7월 10일, 속죄일이죠. 이후에는 초막절에 들어가고. 속죄일은 죄와 관련돼있지요. 결국 하나님의 싸움은 돈 있고, 없고, 출세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살고 죽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죄를 그냥 둘 것이냐, 죄에서 의로 바뀔 것이냐? 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죄 싸움은 내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윤리적, 양심적 죄와 싸우는 죄에요.

어렵게 말씀드릴까요? 인생 조심스럽게 살지 마세요. 조심스럽게 산다는 말은, 내가 날 관리한다는 방식이고 그렇게 해서 의가 되게 되면 그 의는 천국 갈 수 있는 능력의 의가 아니고 내가 인생 관리 잘한 내 의가 돼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산다는 말은 거기에 무슨 심리가 들어있느냐 하면, 지금껏 내가 이만큼이나 사는 것도 내가 말씀대로 조심스럽게 살기 때문인데 만약에 내가 개처럼 살게 되면 받은 재산과 가족의 행복도 일거에 주께서 날리게 되면 내가 손해지요. 그러면 나는 벌 받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벌 받기 전에 조심해야 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가 이익이에요? 자신은 안개가 아니고 죄인도 아니고 자기 잘남이 남아있고 그걸 자랑질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조심스럽게 살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주께서 이끄는 대로 막 살았지요. 본인이 로마 가고 싶어 했습니까? 로마 가기를 기도했습니까? 풍랑이 일어서 가다가 죽게 만들었는데요. 사도 바울이 느낀 것은 베드로가 느낀 것과 똑같아요. 원치 않는 길로 현재 주님이 원하는 쪽으로 이끌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해온 것이 조심한 게 아니고 모든 것이 주께서 친히 이끄시는 인생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죄와 싸운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존심과 싸우고 있어요. 타인의 시선을 느끼면서 내가 이렇게 죄 짓고 난 뒤에 경찰서에 가게 되면 나한테 잔뜩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안겨줄까. 그러면 내 위신은? 위신은 날아가 버렸죠. 안 돼, 안 돼, 그러면 안 돼. 그게 자기 의의 일환이지 무슨 주의 의입니까.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살란 말이에요? 길게 이야기했는데. 죄인답게 사시면 되는 겁니다. 죄인답게 사는 게 어떤 건데요?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세요. 구체적인 예를 말씀드릴게요.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했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지요. 그 여인을 예수님이 용서해줬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 여인이라고 해봅시다. 용서해주실 때 기뻤을까요, 주님한테 섭섭했을까요? 섭섭하지요. 왜? 동네방네 개망신 당하고 용서했잖아요.

정말 주님이 날 사랑한다면 내 위신을 좀 고려해서 안 들키고 용서해주면, 이왕 용서해주는 것 일처리 깔끔하게 하면 되는데 이건 개 끌듯이 질질 끌어서 온 동네 소문 다 내고 주홍글씨+빨간글씨, 온 동네에 저 여자 간음했다고 창피주고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를 정죄한 자 있더냐? 없습니다. 내가 용서해줄게. 그러면 그 여자 기분 좋을까요? 인생 다 망가뜨리고 이제 와서 용서라니 용서는 무슨. 여인이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그러면 그 여인은 자기 자신에 매인 인간인데 이건 의존적이 아니고 독자적인데. 주님을 신뢰하지도 않은 게 되죠.

그 여인은 너무나 감사했을 거예요. 그걸 주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발가벗었어요. 말씀으로. 저는 어릴 때 엄마 지갑에서 돈을 훔쳤습니다. 주여, 잘못했습니다. 넌 그걸 죄라고 이야기하느냐? 인간은 자기가 감당할 것만 끄집어내요. 주님은 그걸 회개로 받지 않습니다. 그냥 살아. 사는 것도 내가 보기엔 죄 짓는 거니까 새삼스럽게 죄 졌다고 이야기하지 마. 괜히 네 잘난 척 돼. 그냥 살아. 어떻게 살아도 목회하고 설교하고 살아도 그게 죄야. 기도하고 철야해도 죄야. 그냥 살아. 얘 키우고 살아. 죄니까. 그 죄 내가 십자가에 해결했기 때문에 주 덕분에 죄 짓고 삽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에요. 어렵지 않지요. 어렵지 않으면 기도해야지.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은혜로 살았으면서도 내 관리 철저히 했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살아왔다고 아직도 내 자존심을 지킬만한 여지를 따로 챙겨놓지는 않았습니까? 주여, 그것마저 극도의 죄가 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