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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강의-차이 속의 복음 1507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7. 18. 09:03

2015-07-11 00:43:34 조회 : 226         
차이 속의 복음 150710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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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길 (IP:180.♡.194.146) 15-07-17 01:02 
서울 의존교회150710a (차이 속의 복음)―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마지막 보겠습니다.
 
20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21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찌어다(디모데전서 6장 20-21)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 무엇을 부탁했다는 말이죠. 부탁한 것이 있는데 그 부탁한 것이 어떤 성격과 성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지식의 망령되고 허황됨과 변론을 유발시키는 내용을 디모데한테 부탁한 거죠.

디모데한테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디모데가 사도 바울한테 들었던 내용은 사도 바울에게 들은 것 외에는 다 거짓되고 망령되고 허황되고 변론에 해당될 수밖에 없는 내용을 디모데한테 줬습니다.

여기서 생각 해 봅시다. 만약 바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의 지식을 전하지 않았다면 디모데는 무엇을 분간 못했을까요? 복음과 망령된 것을 분간 못하는 경우가 발생되겠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이 있는 동시에 디모데는 아하, 이것이 바로 지식의 망령되고 허황되고 변론에 해당된다는 것이 파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믿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되는 거죠.

그럼 여기서 정리해 봅시다. 믿음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믿음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이것은 믿음에서 벗어난 것이다. 맞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나, 믿어! 예수 믿어! 나 하나님 잘 믿어! 이렇게 생각하는데 막상 디모데가 바라는 것은 누구한테? 사도 바울 에게 바라는 것,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내용을 만약에 그 사람이 모른다고 칩시다.

모른다고 치면 그 사람은 어떤 경우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보기에 망령되고 허황된 말이고 믿음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그것을 모르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내용을 모르게 되면 무엇을 모르게 되느냐 하면 내가 지금 믿음의 노선에서 벗어난 것인지 안 벗어난 것인지 그것을 판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디모데전후서가 왜 있습니까? 성경에서 뺄까요? 그러면 안 되죠. 디모데전서가 있다는 말은 단순히 이것은 사도 바울의 사적인 편지입니까? 아니죠. 성경이죠.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왜 있느냐 하면 네가 믿는다는 믿음이 믿음의 노선에서 벗어난 것인지 망령되고 허황된 말인지 변론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엉터리인지를 하나님에서 사도 바울에게 전한 복음을 가지고 판정과 측정을 실시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제일 기분 나쁜 마음이 뭐냐 하면 남한테 지적 받는 것을 제일 싫어하잖아요. 남편 된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아내 잔소리하는 거예요. 그렇죠? 잔소리하는 게 제일 싫죠?
 
잔소리가 옳고 안 그렇고 가 문제가 아니에요. 왜 나를 지적 질 하느냐! 왜 나를 감히 건드리나? 그거죠.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복음은 어디 가지고 노는 장난감입니까? 무슨 목적이 있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내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그것을 왜 지키느냐? 그래야 거짓되고 일컫는 지식에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 그런 것들을 가려내는 절대적 기준으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부탁이 아니고 누구의 부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지금 구원을 장악하고 있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부탁한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를 마감하면서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허한 말인지 분간할 수 있는 기준을 종합적으로 우리가 점검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야기한 것이 뭐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알려준 것이 뭐냐? 몰라도 된다고요? 아니죠. 몰라도 되는 게 아니죠. 알아야 되겠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가 나로 하여금 가짜 믿음과 잘못된 복음이라고 들추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한 것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것을 디모데전서를 1년에 한번만 볼까요? 한 달에 한번 씩 볼까요? 한 주에 한 번만 볼까요? 매일 들여다봐야 합니까? 1년에 한 번 안 그러면 1년에 두 번, 설에 한번, 추석에 한번 안 그러면 1년에 12번, 달마다 월삭 지킵니까? 아니면 365일? 몇 번이 정답이 되겠어요? 5번 정답 없음.

정답 없죠. 왜 정답이 없는가! 제가 이제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 질문이 뭐가 문제이냐 하면 몇 번 봐야 됩니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디모데전서를 우리는 몇 번 봐야 됩니까? 이 몇 번 봐야 된다는 이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봐도 모르게 되어 있어요. 천 번을 봐도 몰라요. 천 번을 봐도 모르는데 뭘 몇 번을 봐요? 남자가 여자를 자기 아내로 삼을 때 몇 번을 봐야 됩니까? 두 번? 세 번? 천 번? 천 번을 봐도 안 넘어 가는 나무가 있는데 한 번을 보면 딱 보면 모릅니까? 딱 보면 몰라요? 한번 봐도 되죠.
한번 봐도 될 때 쉽게 이해되게 상대방을 한번 보고 내 아내 삼았다와 두 번보고 내 아내 삼았다가 어느 것이 더 신중하고 어느 것이 성실하고 어느 것이 제대로 된 겁니까? 뭐 어느 것이라고 할 수가 없죠.

어느 것이 옳습니까? 라는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 저 여자가 나의 아내가 된 것은 한번 이던 두 번이든 좋아요. 이것은 결코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이렇게만 알면 천 번 만 번 해도 상관없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붙여준 사람이지 내가 골라잡은 것이 아니다. 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제가 질문한 정답이 나왔죠. 방향을 바꾸는 거예요. 내가 저 여자를 얼마나 꼬였다가 아니라 주께서 내게 붙여주셨다. 주께서 나와 부부되게 조치를 하셨다. 이렇게만 하게 되면 주님께서 하셨다 에 대해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몇 번이냐, 천 번이냐 만 번이냐 하는 게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의미가 없죠.

그러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키라고 하는 것은 몇 번 지킬까요? 라는 자체가 의미가 없죠. 주께서 믿게 하신 그것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있을 것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마지막 21절에 보면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찌어다”은혜가 가거든 잘 영접해라, 잘 대접해라! 그러면 네 것이 된다! 그런 뜻입니까?

은혜가 가거든 무시하지 말고 거부하지 말고 잘 모셔라! 그런 뜻이에요? 은혜가 덮쳤는데 우리가 저리가세요!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게 돼요? 안 돼요? 안되죠. 이미 은혜는 누구의 은혜입니까? 은혜라는 말 앞에 누구의 은혜입니까? 주님의 은혜죠. 주님을 우리가 못 이기잖아요.

주님이 찾아 오시겠다는데 다음에 오세요! 두 시간 뒤에 오세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지금 바쁘니까 내일모레 오세요. 이게 돼요? 안돼요? 안 되죠. 그리고 여기 앞에서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켜라 라고 할 때 어떤 우리의 행동의 결심이나, 우리의 어떤 다짐을 요구한 것 같은데 마지막에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찌어다!”이것은 뭡니까?

이렇게 되어 버리면 지킨다는 것이 뭔가 의미 없이 날아가 버리죠. 어렵게 할 것 없이 쉽게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부탁을 했어요. 내가 고난 받고 죽더라도 너희들은 내 하는 말을 당부하고 지키고 전파하라 했죠.

그런데 그 제자들이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을 전했습니까? 도망갔습니까? 도망갔잖아요. 다망 갔는데 그래! 너희들이 감히 나를 배신하다니 하고 주님도 두 번 다시 상종 안했습니까? 에이 그래 잘 먹고 잘살아라! 이렇게 했습니까?

부활하고 난 뒤에 40일 동안 어떻게 했어요?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 다녔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 다녔습니까?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 다녔죠. 그것을 은혜라고 하죠. 은혜 받은 거 맞아요? 은혜 받은 거 맞습니까? 내가 찾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나 찾은 것 맞습니까? 지금 이게 맞다면요. 제 말에 동의를 할 수 밖에 없어요. 이게 동의가 된다면 내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10번을 시도 했습니까? 기도원을 20군데 다녔습니까? 기도원에서 철야를 100일 동안 했어요? 40일 금식기도 했습니까?

새벽기도 꼬박꼬박 안 빠지고 나갔더니 주님 만나게 해 줬습니까? 아니죠. 말씀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더니만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아이고 지킬 것 뭐 있나? 내가 은혜주면 그만 인데 이렇게 하고 찾아오셨습니까?

은혜로 와버리면 무엇이 받기 싫으냐. 하면 그 부탁한 것을 지키라 할 때에 하나님을 지키고 있는 그 말씀대로 지키고 있는 그 존재는 은혜 안에 새롭게 창조 된다는 사실을 차후 적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은혜가 오게 되면 말씀을 순종하고 있는 내가 전에 은혜 받기 전에 나로부터 출발한 그 나가 아니고 바뀐 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말이에요. 나는 말씀 지킨 것을 자랑질 할 수 없게 하게 한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의 은혜가 고스란히 은혜답게 드러나는 조치가 은혜 안에 이미 취해 져 있습니다.


안양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차를 자동 세차할 때 어떻게 합니까? 차를 가져다 들이밀죠. 부러쉬 돌고 물 나오는데다가 그래서 자동세차 끝나고 나왔을 때 이쪽에 와서 잠시 창문 내리시고요. 세차하느라 수고 많았죠? 하고 물으면 뭐라 합니까? 출애굽기 14장 14절 말씀이 뭡니까?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했죠.

그런데 자동 세차 하는데 문 열고 나오고 하면 세차를 돕는 거예요? 방해 하는 거예요? 세차 방해하는 거죠. 그런데 자동세차를 하는데 왜 자기가 나와서 걸레 들고 물 맞고 본냇뜨 닦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 버릇은 어느 버릇이에요?

자동세차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옛날에 비 올 때 찬스 노려서 걸레 들고 와서 내가 내 차니까 내가 관리한다는 그 버릇을 그대로 습관화 돼서 자기한테 적용시켰잖아요. 그렇게 해서 세차 끝나고 난 뒤에 기지개 펴면서 세차 끝! 빨래 끝! 하는 것처럼 세차 끝! 그렇게 되겠죠.

바로 그것이 믿음의 노선에서 벗어난 가짜 믿음이 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의 믿음을 확정짓고 정립하려면 자동적으로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할 수가 없어요. 변론을 가지고 자기변명을 자기한테 계속해서 심어줘야 하고 갖다 부어야 되는 겁니다. 갖다 안겨야 돼요. 더덕더덕 붙여내는 거예요. 나는 이래서 신앙이 맞고 저래서 신앙이 맞고 이렇게 나는 성령의 열매를 만드는 것 맞고 이래서 나는 성령 안에 살고 이런 기적이 있으니까 나는 예수 믿는 사람 맞고 그야말로 누더기가 돼요.

정신적으로 약간 치매 걸린 노인네를 요양사가 와서 목욕을 시킨다 하면 치매 노인네가 곱게 고맙다! 목욕시켜 줘서 고마워요! 알아서 옷 벗고 내가 뜨신 물에 씻어줄게! 이렇게 곱게 나온다면 그것은 치매 걸린 노인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할머니 목욕합시다. 하면 뭐라 합니까? 목욕한 지 얼마나 됐는데 네가 남의 집에 와서 목욕시키나! 이렇게 되죠.

이게 뭐하면 강열한 저항입니다.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광야에 살 때 자동세차입니다. 그들이 지나 가면서 곱게 지냈습니까? 한 시도 곱게 낸 적이 없죠. 결국 그들이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못 들어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새 하늘과 새 땅에, 약속의 땅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을 뒤돌아보면서 다 알려주는 겁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라고 애굽에서 건져낸 게 아니죠. 왜냐하면 그들이 들어가려 한다면 어떤 식으로 든 들어가야 되는데 그들을 약속의 땅에 넣어주기 위해서 탈출시킨 것이 아니고 또 안 넣어주기 위해서 탈출시킨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뜻과 그들이 애굽에서 가졌던 사고방식과 차이가 있죠.

그 차이 속에서 뭐가 나오겠어요? 너희들이 오해한 하나님 말고 진짜 하나님의 뜻을 그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게 나오죠.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그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히브리인을 통해서 주님께서 뭐만 뽑아냅니까? 이런 자는 못 들어  가고 그래서 이런 자는 들어간다! 주님의 자기의 뜻을 실패 속에서 발굴해 내는 작전, 이 작전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가지고 활용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뭡니까? 그 하나님의 논리 원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중요한 게 되어 버려요. 내가 구원받습니까? 우리는 항상 질문이 이것부터 시작해요. 내가 구원 받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죠. 내가 구원받습니까? 하는 질문은 어느 경우라도 나를 포기 못하겠습니다. 하는 다짐을 가지고 쥐고 질문을 해대니  다시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를 구원 하지 안한다면 이제부터 주님하고 상종 안 할 거예요! 하는 그러한 오기를 표현하거든요.

주님께서는 그런 너를 바꾸고 싶다! 이게 주의 뜻입니다. 무조건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면 주님하고 안 놀 거야! 주님하고 교제 안 할 거야! 하는 그 사고방식을 주님께서는 뜯어 고치십니다.

그래서 뜯어 고치고 난 이후에 어떤 모습이냐,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위한 하나님인데 나는 나를 위한 하나님을 너무 고집을 부리다 보니까 내가 하나님의 하는 일에 상당히 방해자, 또는 하나님께 대드는 존재로서 새삼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구원을 노렸더니만 구원이 안 되고 구원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다고 하는 순간, 나한테는 내가 요구할 권리가 없는 애초부터 그런 존재였다는 것이 내 마음에 퍼지게 되면 우리에게 퍼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을 유발해 냅니다. 구원을 성사시켜 냅니다.

그것을 사자성어로 “힘을 빼라”입니다. 목에 힘 빼라! 세차하면서 걸레 들고 나오지 말고 가만히 앉아있어! 네가 걸레 들고 들어오면 자동세차 방해 되니까 가만히 있어! 그런데 사람이 가만히 있으라 하면 가만히 있습니까? 비짜루 들고, 걸레 들고 나오죠. 그게 바로 믿음의 노선에서 벗어난 겁니다.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하는 겁니다.
 
2천년 교회사에서 교회라는 게 삼위일체부터 삼일동정녀, 많은 교리들이 있어요. 그리고 1517년의 루터가 한 모든 교리들, 개혁주의 교리들 그 교리들이 결국은 뭡니까? 안 믿어지니까 변명하는 거예요. 믿어지지를 않으니까 뭔가 안 믿는 것이 남한테 들킬까 싶어서 무더기로 자기 자신을 변호해야 돼요.

여러분, 물어봅시다. 믿음은 논리로 증명이 될까요? 안될까요? 증명이 안돼요. 왜냐, 증명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증명한다는 것은 남이 나를 네가 믿는 자라고 규정해 줄 때 비로소 나는 믿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겠습니다. 이거거든요.

믿을 것을 믿어야지 왜 남의 평가를 왜 믿습니까? 자기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남들이 위로 해 주면 우리는 비로소 진리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복음을 안다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내 구원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진짜 복음을 안 다면요. 왜냐하면 내가 내 구원에 대해서 아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구원을 내가 자부할 수 없다면 나도 나를 구원 못하는데 남이 나를 구원시켜요?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불교는 자력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종교라 이야기합니다. 불교는 자기가 스스로 구원하는 종교이고 기독교는 남이 나를 구원해 주는 종교라 이렇게 합니다. 그 말 자체는 어떤 경우에 맞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고 싶지 않을 때는 그 말이 맞아요. 그러나 내가 한번 구원받아볼까 하는 순간 그 말은 사기에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구원받을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구원 받을 생각을 하겠다는 말은 결국은 구원 못 받았다는 말이에요. 구원 못 받은 사람에게 아무 이야기해 봐야 구원이 주어지지 않아요.

디모데가 사도 바울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알아들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된 자이기 때문에 알아듣는 거예요. 그것을 디모데전서에서 그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우리”영어로 We 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말고 다른 곳에 많이 전한 복음에 보면 우리라는 말을 많이 해요. 우리라는 말, 단어를 쓴다는 것은 우리 중심의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전한 말은 분명히 네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못 알아듣게 되어 있다 말입니다. 왜냐, 사도 바울도 전에 예수님 만나기전에는 못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은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이 인간 능력으로는 없는 것이 분명해요. 없기 때문에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거예요. 우리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없던 데서 무에서 우리라는 사람이 새롭게 생긴다는 겁니다.

생겨나면서 우리를 다른 말로 “모든”everybody 라는 말을 써요. 디모데전서 2장 3절 4절에 보면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절의 “우리”는 WE, 우리 모두, 우리에 해당되는 것만 모두, 우리 밖에는 없어요. 우리라는 바운더리 울타리 그 전체를 “모든”이라 합니다. 그러면 모든이 되려면 어디를 거쳐야 돼요? “우리”가 되어야 되겠죠. 그런데 우리는 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되는 방법은 우리에게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합쳐서 우리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출발점이 예수님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우리가 되는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어요. 없는데 왜 우리라는 말을 할 수 있나, 우리라는 말하고 그 다음에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라는 이 말 있잖아요. 복음의 말씀,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앞장 세워서 우리에게 쳐 들어와요. 우리에게 쳐 들어오게 되면 우리만 달라 보이는 게 우리 뒤에 봐요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신분 자체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들어오실 때 예수님께서 우리라는 말을 썼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전에 십자가에 달렸을 때는 우리라는 말은 성립이 안돼요. 왜냐하면 요한복음에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전에는 일반 사람들과 예수님 자신을 구분했어요. 너희들은 아버지를 모르고 예수인 나는 아버지를 아니까

그래서 그 당시에 우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아버지를 가지고 우리라고 해요.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나의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이 돼요? 너희의 하나님이 되죠.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의 아버지가 돼요? 이제는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요. 

그 말은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제자들의 아버지가 있다? 없다? 아버지가 없죠. 성령이
와서 우리와 처소를 같이 해 줘야 비로소 예수님의 아버지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거든요. 그럴 때 그 상황을 가지고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라 하는 겁니다.

아바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라 하는 겁니다. 제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거 동락한다고 그들의 아버지가 되는 게 아니에요. 주기도문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죠. 그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와야 돼요? 안 와야 돼요? 와야 돼요. 제자들은 성령이 안 오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듣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간 거예요.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헐어버리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고 요한복음 2장에 나오죠.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것을 성령 받기 전에 제자들이 알아먹었습니까? 못 알아먹었습니까?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까요.  

예수님이 같은 아랍 말을 쓰고 같은 한국말을 쓴다고 해서 알아먹는 게 아닙니다. 여기 성경이 한글로 되어 있다고 알아먹는 게 아니에요. 알아먹지를 못해요. 못하지만 이 성경 보게 하는 것은 네가 네 능력으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해 주기 위해서 성경을 우리에게 보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은 주님의 은혜라”이게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옵니다. (디모데전서1: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잘만하면 구원됩니다. 나처럼 그런 실수 안하시면 구원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주시는 그 은혜 없이는 누구도 구원된다? 안 된다? 구원이 안 되죠. 그러면 은혜를 안 온다고 봅시다. 은혜가 안 오게 되면 너희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겠어요?

가만있을 위인들이 아니거든요. 노력하는데 그 노력 중에 하나가 성경에 있으니까 성경에 예수님이 있네! 예수 믿자! 어 우리라는 말이 있네! 우리 믿자! 어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 우리는 전도하자! 이런 시도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열심히 하죠. 왜? 누가 중요하니까? 내가 중요하니까 내가 중요해서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그것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 의하면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고 모든 에 해당되지도 않아요? 그것을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꾸 내가 예수 믿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 예수 믿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죠. 하라! 하라! 지키라! 나오니까 자, 예수 믿는 것은 됐고 기본으로 그 다음에 뭘 한다? 성령 받으라 하니까 성령 새벽기도 해서 또 받아 냈고 성령 받고 난 뒤에 뭐합니까? 성령 받은 성령으로 뭘 써 먹느냐 하면 말씀 지키는데 그동안 성령 못 받아서 말씀대로 못 살았는데 성령을 받은 것은 성령 받고 끝나는 게 아니고 그동안 못 지킨 말씀을 지키라! 지키라! 한 것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성경에 사도 바울의 권면이요.

전에는 육으로 지켰지만 이제는 성령으로 지키면 된다는 겁니다. 못 지킵니다. 못 지키면 어떻게 되는데? 속죄를 안후에 짐짓 다시 죄를 범하면 무서운 지옥불이 기다리는데! 아,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열심히 예수를 믿고 죄를 알았는데 죄를 범했어요.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됩니까?

히브리서 10장 26절에서 27절을 읽어 드릴 테니까 여러분들이 대책을 한번 세워보세요. “26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이 대목입니다. 예수를 속죄, 십자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었습니다. 속도위반을 했습니다. 시속 60인데 80으로 달려 속도위반 했습니다. 그래서 4만 원짜리 끊겼어요. 어떻게 할 거예요? 출애굽기에 속도위반해라 했습니까? 음주 운전 해라 했습니까? 없지요. 말씀에 돈을 사랑하지 말라 했는데 돈을 사랑했죠. 어떻게 할 거?

속죄함을 알고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할 거? 흔히 교회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회개하면 된다고 합니다. 죄를 알아야 회개를 하죠. 죄를 알아야 회개를 하는데 생각나지 않아서 회개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회개할 항목에서 빠지죠. 빠지는 죄는 어떻게 합니까?

기껏 내 놓은 아이디어가 이런 거예요. 하나님, 일단 내가 아는 죄는 회개하고 반성하는데 혹시 모르는 죄 있거든 아울러서 십자가의 피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미처 모르지만 아울러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한다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이미 죄를 용서한 제사이후에 다른 제사가 필요합니까? 필요가 없습니까? 없죠. 이미 십자가로 속죄했는데 속죄하고 난 뒤에 또 그 다음 죄를 위해서 필요한 제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속죄의 문제에 대해서 아직 해결이 안 난거예요. 주여! 제가 미처 모르는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또 이렇게 관여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돼 버리면 주님은 자기 뒤만 붙어 다니면서 닦아내는 시다발이 되는 거예요. 뒤처리해 주는 거예요.

제가 묻는 것은 이거예요. 죄가 용서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죄가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죄를 용서받았는데도 용서 받지 않은 죄가 또 나올 수 있느냐 그런 문제입니다. 질문을 간단히 하면 이미 죄를 용서받았는데 죄를 용서 받은 나에게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죄 용서 받지 못한 죄가 나올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를 질문하는 겁니다.

1번 있다 2번 없다 여러분, 묵비권 할 권리가 있습니다.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다시 용서 받을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용서 받을 죄가 없다고 한다면 회개할 죄가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 용서할 회개가 남아 있습니까? 안 남아 있습니까? 안 남아 있죠. 없죠.

그래서 우리는 죄 없다 하면 이게 유병언이 돼요. 구원파 된다니까요. 뭐 속죄 했는데 무슨 죄가 있어? 애들이 물에 빠지던 말든 도망가죠. 그러면 구원파가 이단입니다. 이단인 이유가 뭡니까? 두 번 다시 죄가 없다가 이게 문제가 되죠. 지금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답변하기가 궁하고 난처하다는 말은 지금 모든 초점이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라는 그것에서 못 벗어났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라는 질문이 나오는 겁니다. 어떻게 자기 단도리, 어떻게 자기 관리 급급해요. 지금 주님의 영광이고 그 딴것 필요 없어요. 지금 일단 살고 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살고 보자는 것이 죄인데 어떻게 합니까? 주님은 묻습니다. 네가 뭔데 살아야 돼? 답변해 보세요. 우리가 뭔데 살아야 됩니까? 우리가 그렇게 사는데, 생명나무 따먹은 거에 급급할 것 같으면 주님께서 애초부터 생명나무에서 추방된 그 주님의 조치가 결국은 우리 개인적으로 볼 때 크나큰 실수라는 것밖에 더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당신 나한테 실수한 거예요! 그 소리 밖에 더 돼요? 손가락질하면서 나같이 건실하고 착실한 사람을 지옥가지고 협박 공갈한다는 것은 당신 실수한 겁니다. 하는 이런 발언은 결국 주님 앞에 누가 할 소리 입니까? 마귀가 할 소리이죠.

주님, 주님 가라는 대로 갈게요. 주님이 천국 가라 하면 천국가고 지옥 가라면 군말하지 않고 가겠습니다. 그 결정은 주님이 하시는데 제가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 속에 자기가 주인공입니까? 주님이 주인공입니까? 선택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선택권이 주님한테 있죠.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본인이 이야기하잖아요. 이것을 먹을 때 선택할 권한이 있다. 이것을 자기원인이라 해요. 그러면 원인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자기한테 있죠. 자기가 원인이고 원인이 자기한테 있죠. 내가 원인이 돼서 그 결과가 나올 때 이것을 사람들은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가 없다면 어떻게 합니까? 이 자기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이 자기가 몸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태어나기 전에 여러분들이 몸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의견을 어떻게 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제가 태어날 때는 재벌 집에 태어나게 해 달라고 의견을 제시했습니까? 오래 돼서 기억 안나요? 태어나기 전에 나는 아이큐가 155로 태어나야 되고 나는 인물이 잘생겨야 되고 나는 키가 커야 되고 여자 같으면 나는 날 때부터 이뻐야 되고 이쁠뿐만 아니고 20대를 계속 유지해서 70이 되도 20대의 탱탱한 피부와 그 미모를 유지하길 원합니다. 이렇게 옵션을 제시 했습니까?

그런 것을 제시한 적이 없죠. 우리는 그냥 주어진 대로 살죠? 주어진 대로 살게 되면 자기 원인이 가능해요? 가능 안 합니까?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은 자기 원인이 아니죠.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몸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내 몸을 만드신 분이 진정한 자기가 돼야 돼요. 내 몸의 주인이 따로 있잖아요. 

그분이 내 이름이 돼야 되고 그분이 나의 소유자가 되어야 되고 그분이 주님이 돼야 되고 그분의 뜻이 나에게 반영이 되는 것, 이것은 자기 원인입니까? 주님이 원인이 되는 겁니까? 주님이 원인이 되잖아요. 그러면 주님의 원인이 되면 자유는 내 자유가 아니고 주님의 자유로움이 되잖아요. 

그런데 가인은 왜 제사를 안 받는다고 삐졌습니까? 삐진 이유? 가인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안 받았습니다. 질문을 하나님이 왜 안 받습니까? 하지 말고 왜 가인은 삐졌습니까? 왜 동생은 받고 나는 안 받았는데 왜 삐졌습니까? 라고 물어 보세요. 그러면 그들은 뭐라 합니까? 가인은 잘못이 없는데 누가 잘못이다?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이 잘못이다.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하나님을 잘못된 존재로 전환시키는 동기가 어디서부터 출발한 겁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주님 앞에 원수가 되겠죠. 그러면 회개라는 게 뭐에요? 회개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자기 죄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했다는 것이 전에 주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이 그 죄에서 비롯된 요소를 제가 지금 나타냈습니다. 라는 점을 회개하는 거예요.

죄 짓고 난 뒤에 또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전에 죄를 지을 때 우리가 무엇을 몰랐느냐 하면 도대체 주님께서 어떤 죄를 지었는지 죄의 그 깊이와 넓이를 내가 미처 몰랐던 거예요. 네 죄는 용서했다는 이정도만 알았지 그 죄가 살아가면서 그 죄가 얼마나 다양하고 깊고 여러 가지인 것을 우리가 미처 몰랐던 거예요. 이제야 이 죄를 알았습니다. 하는 것이 회개가 되는 거예요.

추가적으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있는 죄가 밝혀진 거예요. 방출 된 겁니다. 그러니까 평생 회개할 삶이 되는 거예요. 유병언하고 다르죠? 죄 없다 하는 것과  다르죠? 그리고 죄 지을 때 마다 회개하는 것과 다르죠?

아울러 우리의 죄를 일관적으로 용서한 그 몸은 내가 용서받은 것이 아니고 내 몸의 주인 되시는 분이 주님의 몸을 용서하신 거예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주님 안에서 그 몸이 전에 네 몸이라고 오해했던 그 몸이라 하고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통고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죄 용서 받으면 우리는 할 게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 괜찮은 몸이 왜 죄의 몸일까? 그 때부터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높이는 취지하에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죠. 1번 쫓겨날 때 이마에 땀을 흘렸다. 2번 쫓겨난 뒤에 두 달 동안 땀 흘렸다. 3번 죽을 때 까지 이마에 땀 흘렸다. 몇 번입니까?
죽을 때 까지 땀 흘렸죠. 왜 쫓겨날 그 때만 땀이 왜 나야 됩니까? 왜 추방 될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그 쫓겨난 몸을 가지고 삐질 삐질 땀이 나오고 주변에서 계속해서 가라지와 엉겅퀴가 나오게 되어 있죠.

인간의 한 평생이 주님의 취한 조치가 정당함을 드러내는 증거로 주께서는 이 몸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세상은 우리에게 살라고 준 세상이 아니고 죽으라고 준 세상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죽으라고 산 세상을 오해해서 밥 먹고 살라고 준 세상인줄 알고 걸핏하면 오해하고 오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혹시 내가 죄 지으면 벌 받아서 사는데 궁핍해 질까봐서 벌벌 떠는 것이 더 큰 문제에요.

살만큼 살다 죽으면 되는데 무슨 하늘의 별을 따겠다고 살아야 돼! 살아야 돼! 하나님이여! 새벽기도 나갔으니 살려주세요. 십일조 했으니까 살려주세요! 교회에 충성했으니까 설마 저를 아프게 하지는 않겠죠. 설마 내 애 성적 올라가겠죠. 이런 짓거리 하는데 누가 좋아합니까? 사기꾼들이 일곱 귀신이, 군대 귀신이 다 와버려요.

제가 일찍 와서 여기 시장을 돌아봤는데 여기 시장이 단테의 시장이에요. 신곡시장입니다. 장사 왜 합니까? 재림 기다리려고 장사합니까? 먹고 살려고 하는 겁니다. 먹고 살아서 뭐하려고? 먹고 살면 아이 공부시키지! 애 공부시키면 뭐할 건데? 내가 행복하지! 행복해서 뭐할 건데? 행복하면 좋지! 좋긴 죽으면? 결국은 행복해도 죽네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죠. 죄가 있다는 말은 그 전에 뭐가 있다? 욕심이 있다는 거예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죠. 그러면 우리는 결국 늙어죽잖아요. 늙어 죽는다는 것은 죄를 졌다는 말이고 죄는 어디서 나왔다? 욕심에서 나왔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신곡시장에서 장사해서 밥 먹고 사는 그것이 욕심이다. 그 욕심을 욕심인줄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50710b (차이 속의 복음)―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말씀 드린 것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무엇을 이야기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야기했기에 디모데가 받은 그 복음으로 인하여 각용 모든 일원들이 다 거짓이고 허한 소리 이고 변론에 지나지 않고 다른 복음이 되고 믿음이 아닌 것으로 들통 날 수밖에 없는 그게 뭐냐 하는 겁니다. 무엇을 줬기에 디모데로 하여금 선한 싸움을 싸워야 되는 거예요.

뭘 갖고 있어야 싸우죠. 이 갖고 있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싸우잖아요. 그 갖고 있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디모데전서 6장 마지막에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했잖아요. 그러면 은혜가 있다면 지킨다는 것이 무의미 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은혜가 있으면 주면 되지 지키라는 말은 왜 했느냐 하는 그런 느낌이 들잖아요. 그것은 은혜가 우리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은혜가 우리 구원의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우리를 피조물로 삼았다는 그 내용이에요.

피조물이 자유가 돼 버리면 내가 나를 관리하는 원인이 되어 버리면 이것은 아무리 성경기준을 갖다 안겨도 이것은 내 우상 놀이, 게임이 되지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 복음이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구원을 못 받고 있다가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구원을 못 받고 있었는데 아하 구원 못 받는 것이 당연하구나 하는 그것이 그게 복음이라니까요. 왜냐하면 만날 내 생각만 하고 내 천당 가는 것만 생각해서는 이래서는 여기다가 뭐를 담아도 이것은 복음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이 되려면 우리로 하여금 내가 마치 내 구원을 받는 것이 나한테 이익인 것처럼 생각되는 요소들이 은혜와 더불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말씀을 지켜라! 이런 것을 말씀을 지키라 함으로서 우리는 갑자기 은혜로 하다가 말씀 지켜야지 말씀 지키려고 나서다가 그 다음부터 말씀 지킨 것과 안 지킨 것을 우리가 따로 구분하기 시작하잖아요.

그렇게 구분 해 버리면 자기의 원인, 나의 자유, 발휘, 나의 선택, 나의 오기, 나의 행함, 이런 것들이 속에서 또 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돼 버리면 그러한 작업 자체가 주께서 그냥 주신 은혜를 훼방하고 그것을 가리는 그러한 죄악된 것들이 막 쏟아지게 되죠. 그러면 사도 바울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요? 은혜가 더욱더 죄 되게 했느냐? 이렇게 되잖아요.

그 말이 맞아요. 은혜가 우리를 더 죄 되게 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첫 시간 마지막에 아담이 추방되고 난 뒤에 이마에 땀을 흘리라는 것이 평생도록 계속해서 땀을 흘려야 되는 것처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계속해서 주께서 은혜주신 그 은혜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의 죄를 평생도록 들추어내는 그런 힘으로 작용하는 은혜란 말입니다.

그 작용이 뭐냐, 내 구원 받기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고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는 내 중심의 세계, 심지어 천국도 가짜거든요. 천국도 가봐야 내 중심의 세계되면 완전히 가짜잖아요. 바로 천국을 나의 세계로 간주하는 내가 스스로 뜯어 고칠 수 없는 죄, 그리고 이것이 죄라고 안다고 해서 고쳐지는 것도 아닌 것, 따라서 마땅히 이것은 이 죄를 안고 지옥을 가야 마땅한데 주께서는 주님의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우리를 활용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천국에 합세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제자들 이야기를 했잖아요. 제자들이 3년 동안 따라 다녔지만 안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결국은 예수님을 차버렸고 차버린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걸음아 나 살려라! 살고 보자! 어디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 지고 가고 있는데 베드로가 십자가 지는 예수님 앞에서 살고 보자 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나밖에 모르고 살고 보자 하는 그 인간을 주께서 천국 사람으로 만들어 놨으니까 도대체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에요? 그 은혜를 우리는 뭐라고 오해를 하느냐 하면 내가 노력해서 구원받았다는 식으로 아직도 내가 뭔가 했다는 식으로 그것을 변경하려는 요소가 우리는 죄의 모습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등장합니다.

주님도 십자가 지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믿는 나도 참 대단한 놈이다. 이런 식으로 꼭 한 다리를 걸쳐요. 왜 그렇게 걸치고 싶은가? 구원은 받아놓고 드디어 본색 드러나는 겁니다. 이 땅에 살면서 좀 편안하게 살고 싶어서 천국은 기본이고 보너스로 이 땅에서 떵떵 거리면서 진짜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꺼리를 풍성한 복을 누리면서 살다가 춤추고 가면 도착하면 천국이다.

우리가 우리 시나리오를 다 짜고 있어요. 드라마 이후를 우리가 다 짜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미처 모르는 것은 그러한 우리의 시도가 주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식으로 우리의 몸이 다른 방식으로 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사실은 우리의 몸이 주님의 몸입니다. 주의 몸이기 때문에 주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야 되는데 우리는 중간에 마귀가 들어와서 이제는 이 몸이 자기 소유로 확정 지었죠. 창세기 4장에 라멕이 뭐라 합니까? 나를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 이렇게 이야기했죠. 그런데 그 라멕의 정신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가인에게서 나왔죠. 그러면 가인은 그런 마음이 왜 나와야 됩니까? 주께서 벌을 주셔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동생을 죽인 벌이 사형이 아니고 살려주는 것이 가인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벌입니다. 네가 살아야 계속 새끼를 낳고 새끼를 낳아야 가인 같은 새끼들이 계속 나오죠. 그런 자식들이 계속 나오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세상에다가 무엇을 유발시키십니까? 죄를 유발시켜 버린 거예요.

당신같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죄의 원인자가 하나님이라는 그런 소리를 하지! 그런 소리 나온 그게 죄에요. 왜 그게 죄가 되는지 그림으로 설명 해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죄가 왜 있느냐? 이것을 신정론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정의로우냐? 그런 논리인데 악이 왜 있느냐?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악이 직접, 하나님 선한 분이 악에서 나올리는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악은 담당하는 악마가 있어야 된다. 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악이 있는데 어떤 관여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시고 악과 싸워서 이기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선하심을 드러내신다. 라고 할 때 우리의 위치는 어디에 와 있습니까?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 여기 제 3의 지역, 관찰자 영역에 와 있죠. 이게 성립합니까? 이게 성립이 안돼요. 우리는 관찰자 입장이 아닙니다.

프로야구 합니까? 관람석에 앉아 있어요. 하나님이 싸운다고 우리가 구경하고 있는 거예요?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악속에 있는 겁니다. 악속에 있으니까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엮는 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악이 되는 겁니다. 인간 너마저 악이라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겁니다.

그러면 아하, 내가 악이군요! 내가 죄인이군요! 라고 하는 사람만 뭐라 합니까?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죠. 그러면 은혜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돼요? 이 자리, 악의 자리, 죄인중의 괴수 자리에 있어야 되거든요. 이게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옵니다. 이것을 지금 디모데에게 가르친 거예요.

디모데야 네 싸움이 아니고 누구의 싸움이다? 주님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싸움에 너는 걸려들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싸움이 되려면 주님의 뜻과 대적이 되는 다른 뜻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것이 다른 뜻이 되느냐?

주의 뜻은 무엇이고 다른 뜻은 무엇이냐 하는데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이렇게 이야기해요. 주의 뜻은 이것이고 다른 뜻은 이거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는 관찰자에서 주의 뜻은 따르고 악의 뜻은 안 따르게 돼요. 이게 바리새인들이 한 짓이에요. 그러면 선과 악을 두고 눈치 봐서 선한 쪽은 서고 악의 쪽에는 안 서려고 하는 그러한 위치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어요? 안 주셨어요? 주신 적이 없죠.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을 십자가 사건과 관여 되지 않고 따로 나와서 그것을 관찰할 수 있는 자격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모든 자가 어떻다고 했죠? 모든 자가 죽었다 했죠.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자기는 안 죽고 눈을 뜨고 예수님의 죽음을 관람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예수님이 죽을 때 모든 사람이 죽은 거죠. 영화 보는데 비 내리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이게 만약에 영화관이 4D가 아니고 5D 영화관이라고 칩시다. 갑자기 관객석이 흥건하게 그런 것은 없지만 지어내서 천장 위에서 구멍 뚫려서 극장 위층이 목욕탕이거든요. 목욕탕에서 알게 되면 관객들이 아이고 두 남녀가 날씨도 안도와 주네! 둘이 비 맞아 가면서 나 잡아봐라 하면서 그러고 있는데 막상 자기가 우산도 안 쓰고 관람석에 앉아 있는데 흥건하게 양복 있고 있는 것 다 젖고 원피스도 다 젖어 버리면 그 영화 박수 치겠습니까? 욕 하겠습니까? 욕 하겠죠.

왜 영화 장면에 나를 끼어들게 하느냐 하면서 욕 하겠죠. 십자가 질 때 참, 주님 착하다! 우리 박수 칩시다! 우리는 이러고 싶은데 여러분, 십자가 질 때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를 졌습니까? 누구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죠? 죄인이죠. 그 죄인에서 빠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이려고 할 때 아닙니다. 죽이면 안 됩니다. 하고 반대표 던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반대표 던지면 자기가 죽는데? 다 도망가겠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말은 예수님 빼 놓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을 자 맞죠? 결국 십자가 질 때 나의 자리, 나의 포지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십자가 지시면서 세상은 어둠이었고 실제로 어두워 졌고 이 세상이 어둠이고 모든 것이 악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악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것이 유일하게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자리에요. 십자가 아닌 다른 자리는 없어요. 내가 십자가에 죽인 죄인의 자리에 있을 때만 십자가가 십자가지 다른 자리에서 보면 십자가 질사람 욕할 사람이에요. 에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렇게 죽이다니 하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비난할 겁니다.

비난하면서 우리는 또 자기 잘났다고 할 거고요. 여러분 그동안 십자가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 3자의 자리에서 여유만만하게 에어컨 켜 가면서 시원하게 십자가 생각하죠. 나는 거기 없었다! 나는 돌도 안 던졌다! 나 태어나기 전에 십자가 있었지! 나는 그 때 태어나지도 않았어! 나는 책임 없어! 이러고 있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여러분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죠. 그때 누가 있었습니까? 아담만 있었죠. 아담만 있었는데 여러분의 존재, 여러분의 속의 DNA는 어디서 받은 거예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이 누우려고 하죠. 그러면 낳았을 때 아담 죽고 새로 만들었습니까? 아담에서 뚝 떼어서 나온 거예요? 아담에서 뚝 떼어서 나온 거죠.

아담 몸에서 여자가 나왔으니까 아담 몸 하나밖에 없죠. 아담 몸에서 뚝 떼어져 나왔잖아요. 수제비 만들어 봤죠? 수제비가 어디서 떨어지는 거예요? 밀가루 반죽에서 떨어지잖아요. 그 떨어진 게 우리라니까요. 떨어질 때 선악과 따먹은 그 속성도 같이 할당 받죠. 분양 받잖아요. 푸르지오 아파트 분양한다고 하면 자기 혼자 나는 안 푸르지오 이런 게 아니잖아요. 아파트 단지가 다 푸르지오잖아요.  

그것을 로마서 5장에서는 우리가 죄 아래 있다 말이죠. 죄 아래에서 우리의 자리를 할당 받은 거예요. 여러분 아파트 분양 받아서 죄 아래에 있는 거예요. 죄 아래에서 할당 받은 거예요. 대한민국이냐 필리핀이냐 그것 상관없어요. 일체 그런 게 없어요. 어느 나라 사람이냐 국적이 문제가 아니에요. 남녀노소가 문제가 아니라 전부 다 어둠 안에 있는 거예요.

스피노즈가 그런 이야기를 했든가? 어둠 속에 있는 소는 다 검다. 말이 맞죠. 밤에 소는 다 검죠. 얼룩소인지 뭐 관계없죠. 캄캄한데 다 시커멓죠. 그 말은 어둠 속에서 모든 죄인은 다 죄인이에요. 퐁드라고 먹어보지는 않았는데 프랑스 요리에 치즈 찍어 먹는 게 있다는데 치즈를 찍어버리면 그 안에 뭐가 있든 간에 겉모습은 치즈가 발라져 있잖아 요. 아담의 죄를 물려받았으면 남녀노소, 아이큐가 얼마냐, 어느 대학 나왔느냐 관계없이 전부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죗값은 사망으로 다 죽어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제 3의 자리에 우리가 나서지 마세요. 그런 관람석이나 전망대 없습니다. 어디 나이아가라 폭포입니까? 전망대 있게? 우리는 전망대 없어요. 관객에게도 비가 온다니까요. 제가 5D 영화를 만들던지 해야지, 영화에서 눈이 오면 객석에도 눈이 막 떨어지고 우박 떨어지고 해야 돼요. 나중에 영화 끝나고 나면 추어서 덜덜 떨면서 나와야 돼요. 실감 나잖아요.

우리의 인생은 주님이 해 놓은 십자가 안 세계에서 실감 나라고 우리의 인생을 계속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현실입니다. 다른 현실인데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판입니다. 모내기할 때의 모판입니다. 안 가봤지만 삼성 반도체에서 그 제조 과정을 TV에서 기판이 있어요. 뭔가 로봇 팔이 나와서 빠른 속도로 심어요.

이것은 반도체뿐만 아니고 라디오도 그렇고 컴퓨터도 그렇고 냉장고도 그렇고 중요 부품을 컴퓨터가 가서 적재적소에 지정된 자리에 박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예수그리스도의 모판으로 삼아 놓고 그리스도의 저주 받을 자, 나쁜 고기죠. 염소, 가라지, 그리고 지옥 갈 사람들 그런 짐승에 속한 사람들을 모판에 심어요.

또 무엇을 심느냐 하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도 같이 심어요. 그러면 이 세상은 그리스도와 인 맞은 사람과 그리고 짐승의 도장을 받은 사람이 공존해서 같이 살고 있죠. 그러면 같이 살고 있으면 각자 인생관이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니까 차이가 나겠죠. 그 차이가 난 그것이 십자가 사건의 반복입니다.

짐승에 속한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왜 내 말을 안 들어? 복음에 속한 사람은 왜 우리가 전하는 말을 못 알아듣느냐?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갈라서자! 갈라선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요. 왜 그 십자가냐 결국 이 세상에는 모든 인간이 다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건져 주는 사람만 알곡이 되어서 살아남는 세계, 그 복음을 지금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언급을 한 겁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이 복음을 받고 싸워야 되는 거예요. 선한 싸움을 싸워야 됩니다. 어떤 싸움을 싸울까요? 잘 설득해서? 아닙니다. 말씀을 잘해서? 아니에요. 디모데전서 2장을 봅시다.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기 모든 이라는 말을 사도 바울의 다른 복음을 가지고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모든 앞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우리가 들어있죠. 그러니까 아까 제 말이 맞지요. 모든 이라는 말은 어디에 제한된다? 우리라는 것에 포함되어 있죠. 그러면 남아 있는 것은 하나밖에 안 남았어요. 뭐냐, 우리가 뭐냐 그것만 남았죠. 왜? 모든은 우리에 종속되니까요. 

로마서 4장 11절 봅시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그 다음에 모든 자의 조상이 되죠. 누가?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은 몇 명입니까? 하나죠. 우리를 뭐라 합니까? 복수형 1인칭이죠. 아브라함이 한 명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누구의 조상입니까?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죠. 그러면 우리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돼요? 믿는 자의 조상 한 사람부터 시작돼야 하죠.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받는다고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사 아브라함의 자식들, 아브라함은 믿음의 선두 조상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조상이라는 말을 한다면 믿는 자는 어느 뿌리에서만 나와야 된다? 아브라함 뿌리에서만 나오죠.

물론 예수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말을 했죠. 우리가 알기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렇게 되어있죠. 그런데 사실은 이삭을 위해서 아브라함이 먼저 생긴 거죠. 왜냐하면 이삭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자손이라는 말은 그 안에 뭐가 있다? 아브라함의 구주님이라는 뜻이거든요. 아브라함의 구주님이 이삭 안에 들어있죠.

이삭으로 끝나나요? 누구를 낳습니까? 야곱을 낳죠. 그러면 야곱을 위해서 그 전에 누가 먼저 와야 되는가? 아브라함과 이삭이 먼저 있어야 돼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결국 믿음의 주가 누구입니까? 디모데전서의 믿음의 주가 누구죠? 예수님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서 누가 있어야 돼요? 모든 믿음이 있어야 되죠. 그러면 우리라는 게 누구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되죠.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한 우리죠. 우리가 먼저 나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이고 그 다음에 이삭이고 야곱이고 쭉 해서 어디로 모아져요? 예수그리스도로 모아지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그 지체를 가지고 뭐라 한다? 우리라하죠.

아브라함이 없었다는 우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 믿음의 조상이니까 그러면 아브라함이 없으면 모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제 말은 모든 이란 없습니다.

없고 아브라함이 등장할 때 모든이 시작돼서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장할 때 없던 우리가 생겼고 없던 모든이 생긴 거죠. 그렇다면 뭐는 없어요?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리스도를 안 믿는다면 또 그리스도를 모른다면 우리라는 것도 성립이 안 되고 모든도 성립이 안 되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복음은 있는 사람을 끌어 모은 게 아니고 복음을 전하면서 반응을 나타내는 그 집합과 무리, 그들이 바로 디모데전서가 전하는 우리와 모든에 일치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모르고 그것을 거부하고 따로 예수가 어떠니 하나님이 어떠니 그러한 모든과 그러한 우리라고 우리기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면 그들에 대해서 디모데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됩니까? 그게 바로 고린도전후서 아닙니까? 고린도교회가 자기가 교회라고 우기잖아요. 교회라고 우길 때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증거했습니다. 고린도후서 증거하면서 어떻게 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이 모시는 목사님은 진짜 주의 종 맞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했던가요? 고린도후서11장에서 어떻게 이야기했습니까? 여러분들이 목사라고 한 것은 주의 종이 아니고 누구의 종이라고 했습니까? 사단의 종이라 했죠.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은 마귀의 종을 여러분들의 당회장으로 섬기면서 마귀의 말만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모든 이란 말을 사용하고 우리라는 말을 지금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고린도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하면 됩니까? 아하 그렇구나! 이러면 끝나는 문제이죠. 참 쉽죠? 이러면 끝나는 문제인데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거기서 환대 했습니까? 거부했겠습니까? 볼 것도 없죠.

그 쪽 당회장이 뭐라 했습니까? 바도 바울은 사도가 아니고 사이비라고 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고린도후서에서 뭐라 합니까? 그렇게 이야기한 너희 목사가 사이비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제가 지금 이 고린도교회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이 우리는 다 같은 형제이고 다 같은 교회이고 다 같은 복음을 안다는 것으로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겁니까? 분란을 유발시키는 겁니까? 제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했죠.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나왔잖아요. 나왔을 때 그들이 40년 광야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약속의 땅에 못 갔죠. 거기 못 갔다고 해서 지옥 갔습니까? 그들이 약속의 땅에 못 가서 지옥 갔다고 하면 누구도 지옥 갈 사람이 됩니까? 모세?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까? 안 들어갔습니까? 바라보기만 했죠. 못 들어갔죠.
모세가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천국 갔습니까? 모세가 천국 간 근거가 어디 나옵니까? 변화 산에 나오잖아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는데? 못 들어갔는데 왜 천국에 갑니까? 복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 구원이 아니에요.

그 차이입니다. 내가 나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던 그것이 진짜 은혜를 받고 보니까 그게 바로 아담의 죄였다는 겁니다.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고 내가 구원받을 권리도 없으면서 내가 당연히 구원받아야 하고 가인처럼 당연히 내 예배는 하나님이 받아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예배는 누구의 예배만 받느냐? 오직 예수님의 예배만 받아요.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알아요? 예수님의 예배와 내 예배의 차이를 발견하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드린 기도와 주님이 드린 기도의 차이를 발견하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의 기도는 받는데 내 기도는 안 받았어! 삐졌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 사람은 자기 욕망을 위해서 주님이 거저 주신 자동세차를 치워버리고 자기가 걸레 들고 닦는다고 하는 거예요. 

1년에 두 번밖에 안 빠졌어! 오늘 출석도 괜찮아! 이런 식으로 오늘도 복 줘서 십일조하게 되면 요번 주에는 별 사고 없겠지 십일조 받아먹었는데 저주 하겠나! 지도 양심이 있으면 뭐 이런 식으로 만날 우리 자신을 사수하고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왜 사수하고 지켜야 됩니까? 왜 살아야 되는데요? 내가 살아서 뭐 하는데요?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 붙들고 오해한 것이 왜 우리 오빠를 죽이느냐? 이 말아닙니까? 주님 보기에 답답했을 거예요. 왜 오빠가 죽기 전에 오라 했는데 죽고 난 뒤에 오셨습니까? 그것 때문에 화가 나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복음을 모를 때 마르다 마리아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그럴 만하다. 내가 마르다 친구라면 나도 한 표 던진다. 마르다 마리아에게 얼마나 대접을 받았습니까? 숙식제공 받았어요. 사람이 그 만큼 대접을 받았으면 남의 동네 가서 배 고치지 말고 그 가까운 식구 같은 패밀리 아닙니까? 잘 섬겼던 오빠, 젊은 오빠! 그것도 나이도 많은 것 같지 않아요. 결혼 안한 것 같아요. 올케 언니가 없는 것을 보니까요.

젊은 오빠를 좀 그 만큼 받아먹었으면 낫게 했으면 좋겠는데 자기는 단도리 한다고 오라고 했는데 죽고 난 뒤에 왔으니까 얼마나 심난 하겠어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병 고치는 게 좋습니까? 죽은 오빠 살려내는 게 좋습니까? 어느 게 좋아요? 어느 것이 복음의 기쁨이 큽니까? 아픈 사람 살리는 게 기뻐요? 죽고 난 뒤에 나흘 뒤에 살려내는 게 기뻐요? 어느 것이 주님의 위대함이 더 커집니까?

주님의 위대함이 죽고 난 뒤에 더 커지죠. 여러분들 이제 죽었어요. 주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주님의 복음이 커지기를 원합니다. 뭐 다른 교회 같으면 아멘 나왔을 텐데.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죽이십니다. 어떻게? 보트 타다 죽고 골프 치다가 죽고 칠레 산에 가서 행글라이더 타다 죽고 타다 사고로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그거 타다 집에 와서 30년 동안 더 살다가 죽고 집에 수영장 만들어서 수영 놀이하다가 낮에 90넘어 죽고 지금도 여러분을 죽이십니다. 수영 더하고 싶어요? 죽고 싶어요? 골프 더 치고 싶습니까? 이왕 치는 것 홀인원 한번 치고 죽고 싶습니까? 그냥 죽고 싶습니까?

더 결정적인 것을 묻습니다. 여러분 말씀 지키다가 죽을까요? 그냥 죽을까요? 그냥 죽이게 하십니다. 말씀 지키고 죽으시면 그만큼 말씀 지킨 만큼 우리가 잘난 존재가 되고 맙니다. 나도 할 만큼 했다고! 그 입 다물라! 이러는 거예요.

“우리”라는 것이 내가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새로 생겨야 됩니다. 그럼 저는 왜 안 됩니까? 모판이 달라요.

두 아이가 있는데 한  아이가 자랑을 합니다. 야, 우리를 아빠가 레고 장난감 사줘서 나는 어제 탱크 만들고 뽀도 만들고 오토바이 만들고 차 만들고 했다! 너는 그런 거 없지? 하고 자랑질 했어요. 듣고 있던 친구가 하는 말이 어제 우리 아빠가 집에 있는 레고 다 버렸다! 듣고 있다가 아이고 안됐다! 너희 아빠가 너를 미워하는 구나? 아니! 진짜 뽀도 사주고 진짜 오토바이 사주고 진짜 오토바이 사줬다!

모판이 달라요. 우리를 죽여 가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그 생명이 바로 주께서 우리를 나로 만들어요. 왜? 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 그 몸을 거기에다가 내 자아라고 새롭게 만드는 진짜배기 나를 지금 하늘에 준비 해 놨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과 교체하기 위해서는 이 몸은 이 땅에서 은퇴를 해야 돼요.

은퇴할 때 뭐 지저분하게 처박듯이 은퇴할 필요는 없어요. 골프치고 노래 부르고 즐기다가 은퇴할 수도 있고 그것은 그때그때 달라요. 그것은 주님께서 깔아 놓은 환경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간에 공통점은 죽어도 괜찮다는 사실입니다.

취직해서 결혼해서 아파트 100평짜리 사서 살다 죽어도 괜찮고 취직해서 결혼했는데 직장에서 쫓겨나도 괜찮고 어쨌든 간에 똑같아요. 다만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는 것 그게 바로 자동세차, 은혜가 머물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근본적인 아담의 죄가 무엇인가를 평생 동안 온 몸으로 느끼게 하는 조치가 반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애가 시험을 쳤는데 또 100점이에요. 주여! 저의 애가 또 100점 맞았습니다. 정말 이런 식으로 죽일꺼에요? 수능 석차 전국 1%라 애가 나중에 공부해서 검사가 되면 얼마나 많데 물론 복면 쓰면 괜찮지만 그러면서 우리 애를 꼭 이렇게 해서 검사 만들고 의사 만들어서 이렇게 꼭 죽이셔야 됩니까? 하나님! 좀 편하게 9급 공무원으로 살지 않고 또 승진하게 만들어서 꼭 이렇게 죽이실꺼에요?

이게 바로 이 땅에서 잘 죽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우리가 자랑할 것이 뭐가 있느냐? 우리는 뭐만 자랑합니까?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 한다고 하죠. 그리스도만 자랑한다고 하죠.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만들어요.

우리 가운데 잘난 사람이 누가 있으며 우리 가운데 가진 사람이 누가 있느냐? 못난 자를 택하사 잘난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재산이 한 760억 되는데 있는 자들 3600억을 부끄럽게 만드는 거예요. 내 아파트가 두 채인데 합쳐서 150평 되는데 별장 200평 가진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거예요.

이 부끄럼이라 하는 것은 항상 어느 정도 없는 사람입니까? 라고 하지 말고 그 차이를 눈여겨보는 사람들,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되지 않도록 하게 하시는 것은 그 차이를 눈여겨보라고 하는 주님의 조치인 것을 아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지금 내가 재산이 200억인데 200억에 만족하지 않잖아요. 200억인데 2천억 되고 싶잖아요. 그런데 주께서 2천억을 허락하지 않을 때 나는 2천억 되고 싶은데 현재 200억 밖에 안돼요. 그 차이 1800억 차이 속에서 1800억을 할래? 예수 이름인 나 할래? 그것을 바라보게 하시는 겁니다.

참, 의존교회하고 아무 상관없는 예를 들었습니다. 지금 단위가 억 단위인데 억 단위가 뭡니까? 십만 단위가 나와도 션찮을 텐데 10만원입니까? 20만원입니까? 10만원 밖에 안 주셔서 20만 원짜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최저 임금 5300원 가지고 최저 임금 천만 원짜리를 부끄럽게 만들어요. 그러나 우리는 적게 받았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왜냐하면 가난한 것을 자랑질하면 그것은 이단이죠.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변론 디모데전서 마지막에 보면 여기에 온갖 지식이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했는데 이런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이 이게 전부 다 뭐겠습니까? 그 당시 디모데가 누구하고 싸웠습니까? 유대인들하고 싸웠잖아요. 

그 유대인들의 주특기가 뭐에요? 자기가 나선 거 자랑하고 자기가 고난 받은 것 자랑하고 말씀 지키면서 양보 했던 모든 세상 부귀영화를 포기했던 그것을 자랑할 거잖아요. 결국 그게 뭐냐,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그게 믿음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그런 것은 믿음에서 벗어난 거예요. 제가 지금 힘주어 이야기하는 게 다 이유가 있어요.

지금껏 제가 계속 당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또 당했어요. 목사님은 왜 인간의 행함을 부정하십니까? 새벽에 전화해서 막 따지는 거예요. 순복음 교회도 있고 사랑의 교회도 있는데 왜 그 교회를 무시합니까? 이런 식으로 따지는 거예요.

그 사람이 따질 때 뭐로 완전 무장했겠어요? 변론과 망령된 것과 허한 말로 계속해서 자기를 더덕더덕 붙이게 되는 거예요. 왜? 그게 그동안 그야말로 교회 지사충성했던 대가가 그거거든요. 목사한테 칭찬받고 누구한테 아이고 착실한 청년이네! 이런 것들이 아니면 내 세울 것이 없거든요.

그 사람들에게만 꼭 붙는 것이 있어요. 주님의 은혜로 성령의 역사로! 절대로 이거 제 자랑 아닙니다. 이런 것을 갖다가 붙여요. 그런 말을 안 붙이면 덜 미운데 그런 말을 붙이니까 더 미운 거예요. 언제 나오는가! 기다리죠. 나는 무엇을 해도 죄인입니다. 하는 것을 언제 나오나 들어보면 안 나와요.  

참 교만해서 암 걸렸는데 겸손하니까 고쳐줬어요. 계속 그 이야기만 나왔어요. 안 나와요. 내가 암에 걸렸는데 나았습니다. 그런데 이것마저 나는 십자가 앞에서 사단의 생각이었고 저주였습니다. 그 이야기만 하면 얼마나 감사할 텐데 아멘 할 텐데 그게 안 나와요. 타이밍이 안 맞아요. 기다려도 나오지를 않는 거예요.

왜 안 나올까요? 차이가 아니고 차이가 뭐가 바뀌었어요? 이게 소유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자기가 소유가 되면 동시에 자기 원인이 돼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에 대한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돈만 많으면 돼요. 돈만 많이 있으면 자유롭고 너그럽고 훌륭한 사람이 돼요. 빌게이츠 있죠. 만약에 빌게이츠가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지갑을 주었다면 빌게이츠가 자기가 갖겠습니까? 아니면 지갑 주인 돌려주겠습니까? 돌려주죠. 왜? 푼돈이니까 돌려주면서 빌게이츠가 제가 재산이 많은데 이것은 푼돈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까? 뭐라 하겠습니까? 원래 주인을 찾아줘야죠. 제가 이것은 생색 낼 일이 아닙니다. 제가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이고, 빌게이츠여 이런 일을 하셨으니까 사례금 받으셔야죠. 하면 마땅히 돌려 줘야죠. 왜 제가 그것을 받습니까?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굶어죽기 직전이라면 그런데 10억을 발견했다면 물론 10억을 돌려주면서 뭘 기대하겠습니까? 사례금을 기대 하겠죠. 그냥 좀 줘! 이러겠죠. 그러니까 이 심보가 하나님께 받은 영광을 돌리면서 우리 손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콩고물을 바랍니다. 새벽 기도 나오면서 결국 콩고물을 바라면서 나온다니까요. 교회 참석하면서 콩고물을 바라고 있습니다. 진짜 콩고물 줘버려요. 신곡시장에 콩고물 사서 콩고물 줘버려요. 콩고물 이것을 원해요.

 왜 이게 필요할까요? 그게 모이면 부자가 되잖아요. 그런데 부자가 왜 좋습니까? 부자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하게 돼요. 따라서 죄는 뭐냐 권리에요. 내가 나다운 권리를 소유하는 겁니다. 나의 운명은 내가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악마가 하나님께 대든 이유입니다.

 나, 더 이상 더러워서 피조물 노릇 더는 못하겠다! 독립선언을 하고 나가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섭섭할 때가 독립 선언할 때가 섭섭해요. 나도 다 컸습니다. 나는 아버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말을 해도 싸가지 없이 그렇게 하죠. 거기다가 더 싸가지 없는 것이 부모가 나한테 해 준게 뭐가 있습니까? 이럴 때는 절로 눈물이 나오죠. 자식 키워도 소용없구나! 뭐 그럼 소용 있으려고 자식 키웠습니까? 사람이 자식을 키우면서 콩고물을 바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자식마저 내 소유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왜 자식을 소유하려고 합니까? 이것은 결혼 안한 사람은 몰라요. 왜 부모는 자식을 끼고 돌려고 합니까? 결혼해도 내 자식하려고 합니까? 그것이 나의 힘이 되고 남에게 여유 있는 사람이라고 티를 낼 수 있는 나를 과시할 수 있는 자유능력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남한테 베풀어줄 때 얼마나 내 영광이 되겠어요? 영광이 되려면 이 땅에 힘이 있어야 되고 힘이 있으려면 돈을 가져야 되고 돈이 있어야 나는 구제할 수 있고 남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묻습니다. 오늘 밤에 구원 받은 그 강도가 그동안 얼마나 남을 도와줬습니까? 강도가 강도질하면서 그냥 나오기 미안하니까 빨래 개서 서랍에 넣어주고 나왔습니까? 강도가 사람 찔러 죽일 때 안 아픈 엉덩이 찔러서 사람 죽였습니까? 강도가 그런 짓 했습니까? 강도가 무슨 착한 일을 했습니까?

강도는 어디 가야 마땅해요? 지옥가야 마땅하죠. 지옥가야 마땅한 그 강도를 천국에 넣어준다면 우리는 그런 예수를 믿을까요? 말까요? 참 문제 어렵다! 믿을까요? 말까요? 우리는 믿고 안 믿고 할 그런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기어이 참 잘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죠. 강도는 우리하고 예가 너무 동 떨어집니까? 그러면 가까운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의 돈을 떼어 먹고 도망간 사기꾼을 어느 날 만났는데 돈은 안 주고 복음을 전하더라, 그러면 그 인간 죽으라고 기도 했어야 됩니까? 지옥 가라고 기도해야 됩니까? 복 받으라고 기도해야 돼요? 물어보는 내가 나쁘네요. 복 받으라고 기도 하는 그 허세와 위선, 죽여야 됩니다. 주여! 저 인간 때려 죽여주시옵소서! 내 사적인 복수를 감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뭐다? 주여! 기다렸던 죄 맞지요? 주여!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오늘 정답 다 나왔어요. 그게 복음이에요.

디모데야 네 싸움해라 남에게 전하기보다 네 싸움부터해라 선한 싸움을 싸워라! 나한테 걸맞은 환경이 또 주어질거에요. 그럴 경우에 마지막에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그 너희가 누구입니까?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만 은혜가 함께 있을 찌어다는 것을 네가 소급해서 기쁨으로 감사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디모데전서 끝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남보다 우리가 착합니다. 남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덧 그것 가지고 복달라고 하는 밑천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복을 받았는데 우리는 그 받은 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