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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단번에 15052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9. 26. 08:18

2015-05-22 01:23:22 조회 : 400         
단번에 150521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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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218.♡.196.154) 15-05-29 00:55 
가락-요한복음6장66절(단번에)150521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6장66절에 보게 되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6장39절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렇게 언급했어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 이리 하잖아요. 요한복음39절에 그렇게 되어있지요. 아버지께서 보낸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데, 현실은 모든 제자들이 다 떠나버렸잖아요. 그러면 요 두 개의 결과에서 두 개의 안목을 도출해 냅시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전도, 그것은 예수님에게 혜택 입었고 오병이어 혜택 입었잖아요. 예수님에게 혜택 입었고 예수님의 말씀 듣겠다고 오는 인간들의 안목으로서는 무엇이 밝혀지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잃어버리지 않는 자와 만나지 않습니다. 상당히 엄청난 말이지요. 인간들이 파악하고 있는 예수님한테 왔고 예수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인 것을 봐가지고는 저는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신 자가 맞다, 고 여긴다면 그것은 예수님만 알고 있는 아버지가 보낸 자와 접근하지 못합니다. 실패합니다.

접근하지 못한다고 방금 언급했는데, 저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단절’ ‘끊어짐’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신 주변에 이런 단절의 철조망이 쳐져 있어요. 단절의 철조망. 이 단절의 철조망은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는 전도, 인간들이 이해하는 구원, 인간들이 이해하는 영생과 천국, 하나님 나라, 이게 전부다 단절이라는 철조망에 걸려서 전부다 뒤로 돌아 갓! 하고 다시 본인의 자리로 되돌아와 버립니다. 이 말은 인간이 이해한 것과 예수님이 이해한 것과 이렇게 매치를 시키려는 그 의도자체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의도 자체가.

인간이 생각하는 그 이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는 반드시 구원 받고” 라는 것이 거기 포함이 돼있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복음6장39절에서 분명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제가 한 번 쓸게요. 여기에 다 쓸 필요 없이 ‘내게 주신 자’ 는 반드시 구원받습니다. 맞지요? 그런데 내게 주신 자를 사람들이 이해하면서 자기 자신을 내게 주신 자 속에 필히 포함을 시키는 오류를 범해요. 내가 그 말씀 봤고 그 말씀 보면서 내가 흔쾌하고 기분 좋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내가 내게 주신 자라는 것을 내가 알아챘다는 말은, 반드시 거기에 내게 주신 자 중에서 거기에 몇 명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반드시 내가 포함됐기 때문에 내가 기뻐하는 거죠.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거기에 포함이 안됐다면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얘, 너는 내게 주신 자에 포함이 안됐어.” 라고 너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이렇게 확정을 시키고 내쫓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주신 자는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를 좋아하고 기뻐할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없지요. “에이, 잘 먹고 잘살아라.” 이렇게 되겠지요.

바로 인간은 어떤 성경 말씀을 줘도 반드시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로부터 회수하는 이 방식을 인간들은 고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걸 고칠 수가 없어요. 이걸 고치지 못한다는 말은 반드시 예수님 말씀에 오해할 수밖에 없도록 성경을 볼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뿐만이 아니고 그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지요. 유대인들은 요한복음7장에 보면 나오는데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목숨 건 사람들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모세율법에 목숨을 걸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자기가 택했다는 것을 어떻게 확정하는가 하면, 다른 이방민족과 자기와의 차별 하에 있습니다.

다른 이방민족에는 뭐가 없느냐, 모세율법이 없잖아요. 그런데 자기에게는 뭐가 있습니까? 모세율법이 있잖아요. 누구보고 줬습니까? 자기 민족, 아브라함 자손 보고 줬다 말이죠.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모세율법을 주신 쪽의 편에 서겠습니까? 안 준 쪽의 편에 서겠습니까? 이것은 말할 것도 없지. 하나님께서 말씀을 줬다는 것은 “너는 나의 택한 백성이야.” 라는 취지로 줬잖아요. 그러면 말씀 받은 자체가 이미 하나님은 내 편이고 반대로 이방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안 줬기 때문에 택한 백성 아니거든요. 시편에 보면 주의 언약을 모르는 사람은 저주를 퍼부으소서. 라고 되어있어요. 예언입니다. 그냥 호소가 아니고 예언이에요. 언약을 모르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유대인들이 보면서 뭐를 즐거워하겠습니까?

저쪽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이쪽은 기쁨의 요소가 돼요. 왜냐, 저쪽에서는 언약이 없어서 저주를 받는다면 만약에 우리가 복을 받는다면 순전히 뭐 때문에 복을 받겠어요? 저쪽에 없는 것 때문에 받지요. 이쪽에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어떻게? 혈육 적으로. 혈통적으로. 이건 김씨니까 김씨됐고 이씨니까 이씨 된 거잖아요. 한국사람 이니까 한국사람 되잖아요. 아브라함자손이니까 우리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브라함자손 되어서 하나님의 할례행하고 구원을 받았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안 좋아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래서 유대인들은 교리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말씀 지켜서 영광 돌립시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 받은 그런 대가를 내놔야지요. 은혜 주실 때는 반드시 노림수가 있는데 뭐냐, 은혜 받아놓고 입 닦지 말고 은혜 받았으면 은혜 받은 그 힘으로 주의 주신 말씀을 잘 지켜서 영광 돌리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 구원하는 방식이다, 하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지금도 교회가 딱 그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뭐냐 하면, 은혜를 받고 말씀을 지켜버리면, 지키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 지켰다는 자기 자신과 은혜 받았다는 본인을 사수하게 마련이에요. 이게 인간이니까. “니 은혜 안 받았지? 나 은혜 받았어.” “니는 은혜 받고도 게을리 하잖아. 나는 은혜 받고 티낸다고 열심히 말씀을 지켜.” 그러니까 지킬 것은 그리스도를 지켜야 할 건데, 그리스도 잘 믿고 말씀대로 잘 사는 본인을 완전히 신성시해서 지키는 거예요. 예수여! 하면 가만히 있다가 자기 욕하면 화낼 수밖에 없어요. 특히 목사한테 그래요. 교회에서 예수님 자랑하게 되면 목사 특히 기분 나빠해요. 그 주님을 누가 증거 했는데 왜 나한테는 감사하지 않고 왜 예수님한테 하느냐,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는 못해요.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하면 지 믿음 없는 게 들통 나기 때문에 말은 못 하지만.

교회에 보면 철없는 사람들 많아요. “목사님 전하신 복음 듣고 얼마나 감사한지. 제가 제 이웃에 사는 어떤 어려운 사람에게 제가 십일조를 그 사람에게 돌렸습니다. 목사님! 참 잘했지요?” 이게 얼마나 철없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거예요. 내가 복음 전했으면 양떼가 이 교회에서 꼴을 먹었으면 돈을 어디에 내야 돼요? 꼴을 준 그 교회에 내야 되지 옆에 있는 어려운 사람을 왜 줍니까? 또 교인들이 또 철없이 이야기합니다. “뭐~ 아무나 주나 주께 드리면 되지요.” 말은 맞는데, 철딱서니 없는 거예요. 말은 맞아요. 누가 이웃이냐, 이런 거 있잖아요. 사마리아인. 말은 맞아요. 말은 맞는데, 너무 맞아서 탈이라. 요령이 없어. 교회에 처신술이 너무 없어요.

목사가 복음 전하는 그 취지를 알아야 돼요. 그 뒤에 깔아놓는 게 있어요. 우리가 복음 전해놓고 헌금 딴 데 하지 말라, 그런 뜻이 깔려있는데 얼마나 순진한지 그 밑에 깔려있는 것은 눈치를 못 채고 순박하게 ‘은혜를 받았으니까 다른 데 주겠다. 그래도 우리 목사님은 나를 칭찬할 거야.’ 현장에서는 면상에서는 칭찬을 해요. “아이고, 믿음이 목사보다 낫습니다.” 하면서 속으로는 사려가지고. ‘아이 씨~ 죽 써서 개줬네.’ 그렇게 된다니까요. 그래서 노골적으로는 못하고 친구 목사 불러다가 부흥회 하잖아요. “여러분! 다른 교회에 주는 것도 좋습니다만, 일단은 꼴을 교회에 주시고 여유 돈이 있거든 다른데 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에베소서 5장 1~2절 한 번 봅시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했지요. 자, 질문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해줬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가지고 이웃에게 사랑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설명한 거 참고로 한 번 들어보세요. 자, 이제 설명 들어갑니다.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에요. 이 질문이.

이 본문을 아까 제가 이야기한 유대인들이 성경 보는 것처럼 해석하면 안돼요. 이 본문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사랑이 뭐냐 하면 십자가지요. 십자가로 나타난 사랑이죠. 십자가 없는 사랑 아니지요. 십자가 나타난 사랑이죠. 그럼 십자가 사랑과 십자가 없는 사랑,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이거하고 십자가 죽기까지 사랑한다, 하고 차이점이 뭐냐 하면, 십자가 죽음으로서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면서 무엇을 주느냐 하면 너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지요. 그러면 죄인이었다는 것을 유지해줘야 십자가 사랑이 같이 유지가 되겠지요.

십자가 안하고 사랑해버리면 누가 위대한 사람이 돼버려요? 사랑한  내가 졸지에 위대한 사람이 되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사랑이 아니고 그냥 사랑이 되어버리지요. 그러면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을 하려면 나는 남을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과정에서 뭐가 등장해야 됩니까? 나는 왜 사랑하면서도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 라는 사실을 폭로당해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겁니다.

모든 말씀은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드는 그 작용이 내 사랑 전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사랑의 과정 속에 나도 포함돼 있는 거예요. 내가 받은 사랑 전하는 게 아닙니다. 둘 다 공유하는 주님 사랑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거예요. “아이고, 권사님은 참 열심을 통해서 저한테 전도하네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교인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나게 해서 복음 전하는 나라는 권사가 복음 전하면서 왜 내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를 당신 때문에 깨닫는 환경을, 상황을 주께서 당신 때문에 또 조성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줘야 온전한 모든 공로를 누구한테 돌립니까? 주님한테 돌리지요.

사실은 따지고 보면 어렵지 않아요. 어렵지 않은데, 교회에서 뭔가 봉사랍시고 해보면 이런 마음 잘 안 듭니다.  ‘나는 일하는데 지는 놀고 이렇게 되지 나는 일하는데 나는 이용당한 것 밖에 안 되잖아. 왜 나만 직사하게 봉사해야 돼? 다른 사람은 히히닥거리면서 우리는 일하고.’ “일한 덕분에 깨끗하다. 아이고, 교회 깨끗하다.” ‘지는 청소 안하고 거기서 커피 빼내서 먹고 있고. 나는 일하고. 누구 말대로 나는 시다바리인가.’ 그걸 보세요. 주께서 봉사하게 함으로서 내 속에 딴 마음 들었다는 것을 봉사하는 과정을 통해서 들추어주시잖아요. 아이고, 얼마나 주님께 감사합니까?

그래서 오후2시 30분에 주의 사랑을 알았으니까 오후5시5분되면 벌써 이 주의 사랑이 나의 잘난 사랑으로 변해버려요. 모든 인간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주의하세요. “은혜 받았으니까 선교사 하겠습니다.” 그 선교사 주의하세요. 이미 그 은혜 받았다는 시점을 벌써 몇 달, 몇 년 지나갔어요. 그리고 잘 보세요. 옛날 은혜 받은 거 우려먹어가면서 돈 내라 할 가능성이 어떤 방식으로 돈 내라 하는지를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옛날에 이만큼 죽을 고생했다. 죽을 고생이 지금 돈을 합당하게 가지려는 정당화로 밑천으로 어떻게 반복해서 쓰여 지는가를 보세요. 예수님의 은혜로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2마리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에요. 달라한 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알아서 보리떡 5개 물고기2마리 주님의 기적에 참여시켰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났습니다. 주의 은혜로 소유한 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용도가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암에서 나았고 하나님의 기적으로 모든 게 잘된 그것이 결국은 내가 죽지 아니하면 나의 소유가 되는 거예요. “주님 덕분에 내가 잘됐습니다.”라는 순간 이미 주님과는 벌써 바이, 바이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주님 덕분에 내가 잘됐습니다.” 라는 것은 이런 공식은 주께서 인정한 바가 없어요. “주님 덕분에 이렇게 잘되게 하셔가지고 주께서 나를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들었습니다.” 하면 딩동댕. 장학퀴즈 합격입니다. 합격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인간이 시도하는 모든 하나님의 일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일단 나는 나의 능력을 믿고부터 시작해요. 주신 성령이 있겠다, 주신 능력이 있겠다, 게다가 남들이 나보고 마음 비웠다. 겸손하다. 모든 짐을 다 내놓았다 하니까 주께서 이제는 나를 얼마나 들어 쓰시려고 이렇게 주셨는가, 이제부터 슬슬 일해 볼까, 하는 순간 그것은 믿음에서 탈락이에요.

왜냐 하면, 요한복음6장28절에 보면,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라고 우리가 성경 하나 하나 따지고 보면 빼먹을 게 없어요. ‘우리가’ 먼저 주체가 나오지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이렇게 질문을 했지요.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라고 했지요. 주께서는 우리를 제거해버리고 여기다가 뭘 집어넣어라? “방금 너가 우리라고 했나?” “네” “그 우리 자리에다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집어넣고 이야기해라.” 이 사실을 수용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주의 보내신 자가 의도하고 하나님의 의도했던 바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 자의 특징이 돼요.

제가 오늘 처음부터 강의 어떻게 했습니까? 잃어버린 자가 오병이어 먹었던 사람에 해당 되느냐, 안 되느냐 그걸 따졌잖아요. 강의 처음부터. 그런데 우리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할 때 우리는 의당 내가 거기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누가 나에게 어떤 작업을 걸기도 전에 우리는 먼저 성질이 급해가지고 우리는 ‘야, 잃어버린 자는 나다.’ 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안 되고 누가 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손질을 해야 돼요. 그 손질이 뭐냐 하면 바로 우리라는 자리에다가 예수님이 점령해버리는 자리입니다. 바꿔치기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바꿔치기한 상태에서 요한복음 6장 39절 다시 보게 되면, “나는 아버지가 내게 보내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 라고 했으면 내가라고 하지 말고 “주님의 일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하고 인정해 줘버리면 바로 그런 고백이 나온다는 사실이 바로 잃어버린 자중에 포함이 된 사람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것까지 어떻게 이동할 수 있습니까?” “‘나는 반드시 구원받아야 돼! 나는 반드시 잃어버린 자중에 포함이 되어야 돼!’라는 생각을 스스로 포기하고 ‘주께서 잃어버린 자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주님의 솜씨입니다. 따라서 내가 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 말씀 듣는 순간 내가 갑자기 마음이 모든 인생의 문제가 갑자기 해결이 다돼버리고 너무 가볍습니다. 내 마음이 매사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가볍습니다.’ 라는 마음을 어떻게 하면 가지지요?” 이렇게 돼버리면 이게 또 다시 소유가 작렬해버려요.

혹시나 그런 마음이 있을까 싶어서 내가 언급을 했는데 그런 말씀을  위계해서 오늘 본문 65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 출발점이 다르지요. 출발점은 방금 질문할 사람은 없지만, 질문을 했다고 치고 질문한 출발점이 어딥니까? 내 존재지요. “저는 어떻게 그런 마음으로 바뀝니까?” 나로 출발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출발점은 어떻게 합니까? 너부터 출발하지 말고 내 아버지부터 출발한 것만 내가 실천에 옮긴다는 거예요. 참, 주님이 야박하지요. 너희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아니고 아버지요구만 들어주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왔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 뜻만 행하러왔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는 아버지를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매사에 예수님의 말과 틀어지게 되어있어요. 모든 게 오해에요. 그럼 제가 오해라고 하면, “목사님, 그럼 오해해가지고 어느 말씀 하나도 못 지키면 어떻게 합니까?” 못 지키기 위해서 그 말씀 주신 거예요. “왜? 우리가 지키면 영광 된다는데.” 우리가 지켜서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못 지킴을 인정하면 영광이 돼요. 또 나와요. 막 살라고. 못 지키는 게 영광이 된다니까요. 어떤 인간도요, “나는 전적으로 못 지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보통 성령 받은 사람 아닙니다. 정말 대통으로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얼마나 그 사람의 존재감이 가볍겠습니까.

못 지키는데 밥을 먹고사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요? 주의 말씀을 하나도 못 지키는데 이빨 3개 아픈 게 아니고 단 하나만 아픈 게 이게 얼마나 은혜인가 말이죠. 애는 3명인데 둘은 데게 못하는데 아무 말씀도 못 지키는데 셋 다 공부 못해야 되는데 둘만 못 하니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아무것도 못 했는데 이런 은혜가 어디 있어요? 미장원에 가면 머리 잘 나오고. 말씀도 못 지켰는데. 뉴스보세요. 졸음 운전하다가 박았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도 멀쩡하잖아요. 오늘도 안 박혔거든요. 말씀도 안 지킨 주제에 멀쩡하게. 당뇨는 있지만, 그 정도는 멀쩡하게. 세상에 이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이걸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기도해라. 내가 기도했다.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날이 갈수록 나는 작아지고 나를 둘러싼 사랑은 너무 넓어지는 거예요. 우주만큼이나. 너무 넓어서 나는 거기에 비해서 점점 더 작아지네요. 한도가 없어. 카드에는 한도가 있지만 주의 사랑에는 한도가 없어요. 이것은 너무 넓어. 전에는 나 크게 보이고 내가 받은 사랑에 몇몇 거리였는데, 점점 더 걸이가 멀어지네. 나는 점점 더 졸아들고. 나를 둘러싼 대기권은 점점 더 넓어져요. 넓어져서 인공위성 몇 개 다니고 우주정거장도 막 있고. 세상에 이렇게 넓은 사랑이.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세리와 창기가 소위 잘난 체 하는 인간보다 먼저 천국 간다. 바리새인보다도 엎드려서 나는 죄인이라고 했던 세리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의인되었어요. 그것을 가지고 의의 왕 노릇이라고 해요. 쉬운 말로 의가 왕으로 통치하는 주입니다.

옛날에 너희는 사탄이 왕으로 통치했어.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쫓겼어요. 뭔가 일은 잘됐는데 무서워. 또 깨질까 싶어서. 돈은 벌었는데 또 친척이 와서 돈 내 놓으라 할 까 겁나. 뭔가 겁나. 뭐든지 알 수 없는 두려움. 꿈자리만 이상해도 오늘도 알 수 없는 공포. 설거지하다 그릇을 깨기만 해도 “야, 야, 오늘 차조심해라. 엄마가 오늘 뭐 깼다.” 하는 거예요. 매 순간이 마귀한테 주눅 들고 있어요. 기독교신자 아닌 사람은 부적하나 끼고 점치고 절에 가지요. 기독교신자는 교회 가서 헌금천원 더 내고 더 빌고. 이게 뭐냐, 공포에 질린 마귀의 하수인들이 노닥거리는 모습이 이거에요. 벌벌 떨면서 거래하고.

다음 주일에 중요한 미팅이 있다 싶으면 주일날 바짝 성가대 일찍 연습해가지고 사전에 애군을 미리 방지를 하려하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부적 붙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날 막 목사 설교 적고 하는 거예요. 벌벌 떨면서. 특히 수능 앞두고. 모든 행동 조심, 동생 까불지 마! 행동 조심! 조심 해! 못 지킵니다. 말씀 못 지킵니다. 알아야 지키지요. 우리가 아버지를 모르는데. 그럼 아버지를 영원히 모르느냐, 소급해서 알아요.

예수님께서 은혜 주심을 통해서 소급해서 보니까 하나님은 나의 행함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 값없이 주기 때문에,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의 행동은 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바로 옆에서 나의 행동을 지켜봤던 것이 있는데 그 인물이 누구냐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우리의 선악체계를 가지고 우리를 윽박질러서 우리가 오금에 질려가지고 어쩔 줄 모르는 걸 보고 속으로 얼마나 사탄이 킥킥 거리면서 좋아들 하고 웃었는지. 그러니까 그 사탄이 보낸 하수인이 귀신입니다.

일곱 귀신을 보내가지고 우리 마음을 들쑤셔나요. “금식해야지. 이때는 금식해야지. 못 배웠어? 이때는 철야해야지. 성경 백 번 쓰고, 통독하고, 소리 내어서 읽고.” 마치 오멘 영화처럼. 귀신 들렸으니까 온 벽에다가 성경책을 째서 도배를 해놨어요. 혹시 귀신이 물러갈까 싶어서. 귀신이 그 짓했는데 무슨 귀신이 물러가요.

우리는 알 수 없는 공포를 유발하고 그리고 뭐도 유발하느냐, 그 공포를 나름대로의 회수하는 회수책략도 같이 수입해가지고 우리 안에서 스스로를 지어서 해결된 상태에서 괜찮은 존재로 만들어놓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저 전심으로 한 가닥 배웠던 말씀의 힘으로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됐습니다.”하고 자기 자신의 우수함을 내놓고 영광 돌리고 싶은 그런 속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게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게 은혜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준 자만 만든다는 것은 어떻게 아느냐, 소급해서 압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고 보니까 내가 노력해서 십자가 믿은 게 아니고 아버지가 보냈기 때문에, 보낸 자기 때문에 믿어야 해야 될 선택과목이 아니고 반드시 들어야 될 이수과정이기 때문에, 이수 강의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반드시 들어야 되고 이미 학점 받아 놓고 듣는 거예요. 학점 이미 체크 되어 놓고 들어서 십자가를 보라고 한 거죠. 돌아서면 육신이 약해서 잊어버리지만, 어쨌든 간에 주께서는 그렇게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주님 손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뺏을 사람 없어요. 그것은 사전에는 알지 못하고 소급해서 십자가의 능력을 알고 난 뒤에 갑자기 성경전체가 예수님의 말씀이 한꺼번에 이해가 돼버려요. 보통 영안이 열렸다고 하는데 눈이 떠버리면 한꺼번에 알아요. 한꺼번에 안다는 그 이야기하고 그 다음 어려운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쉬운 이야기인데.

한꺼번에 라는 말이 이걸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단번에’라고. 단번에 라고 되어있어요. 이 말이 왜 어려우냐 하면 인간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시간관이 있어요. 시간관은 인간들이 쪼갤 수가 있어요. 쪼개다 보니까 1번, 2번, 3번 이렇게 쪼개집니다. 그러면 7같으면 7이지 단번이 아니잖아요. 인간에게는 시간관이 있기 때문에 이 시간관을 통합해서 단번에 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주여, 5년 전에 주셨잖아요.  5년 후 오늘은 왜 은혜가 떨어졌습니까?” 이렇게 되어버리면 둘돼버려요. 숫자처럼 2가 되어버려요. 분명히 성경은 단번인데 우리가 인식하기에는 느끼기에는 왜 단번이 아니고 쪼가리 쪼가리 다 놔버렸느냐 말이지요.

오늘 새벽에 그렇게 은혜 받았는데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싶었는데 오후2시에 속도위반해서 오만원짜리 걸리고 왜 주님께서는 은혜주신 후에 왜 또 안 주십니까? 라는 것은 주께서 니는 시간이 흘렀다고 봤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시간이 흘렀다고 본 거예요.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아버지께서 보낸 자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데 이 이야기가 의외로 어려워요. 어렵지만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여러 번 했습니다마는 여러 번 해도 모르긴 마찬가지니까 또 해야 되겠어요.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버리면 문제가 되는 것이 오후3시, 오후4시, 오후5시라고 해놓고 자, 시간은 어떻게 흘러갑니까? 유치원 애들부터 물으면 알아요. 3시에서 어디로? 4시에서 어디로? 다시 흘러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이 3시, 4시, 5시 이렇게 있으면 시간만 흘러갑니까? 오후3시 때 내 모습이 오후4시 되면 내 모습으로 또다시 오후5시 모습으로 흘러가겠지요. 그럼 나는 변화되겠지요.

그러면 오후3시 때 믿음은 오후4시 때는 안통하고 이게 또 새로 만들어져야 되고 오후4시 때 믿음은 오후 5시 때는 안통하지요. 이래서 나중에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건데요? 이래가지고 한65세 때부터 치매 걸렸다. 지난 간 것은 다 무효가 되는데. 지금 믿느냐. 치매 걸린 환자보고 “지금 믿습니까?” “옛날에 많이 믿었는데.” “옛날에 말고 지금 믿습니까?” “그런데 예수가 누구지?”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남 이야기 아니잖아요.

제가 이 말이 어렵기 때문에 분명히 말합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지금 오해하는 거예요. 왜 시간은 흐르지 않느냐,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고 있어요. 그런데 흐르지 않아요. 인간은 시간 층이 이렇게 갑니다. 제가 어제 수요일 날 <안식일과 월삭>설교를 하면서 안식일을 시간소라고 했지요. 시간 소. ‘소’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모든 걸 조각내고 나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마지막 조각, 그걸 소라고 해요. 소, 화학에서 원소, 원자, 시간에는 그 시간의 엑기스, 씨앗이 있어요. 그게 안식일입니다. 왜냐 그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보기 심히 좋았더라.’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면 안식일은 뭐냐 하면, “보기 심히 좋았더라.” 하는 하나님의 뜻을 유일하게 담고 있는 시간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면 그 안식일을 확대시키게 되면서 확대된 나름대로의 시간들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겠지요. 그것을 이스라엘에게는 절기라고 해요. 모든 절기의 공통점이 뭐냐, 모든 절기마다 안식일입니다. 그걸 제가 어제 약방의 감초라고 했지요. 한의원은 잘 모르겠지만, 들은풍월에 의하면 한방의 약초는 감초가 다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감초가 다 들어가면 나머지 모든 성분은 감초의 효능을 보안하고 그걸 들추어주기 위해서 추가되는 거죠. 한방에서의 약재소가 뭡니까? 약재의 공통으로 들어가는 소는 뭐냐, 감초가 되겠지요.

모든 시간에 있어서의 감초 같은 역할이 뭐냐, 안식일이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안식일 속에서만 “다 이루었다! 보기 심히 좋았더라.”가 내용이 포함되어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그 이야기하면서 그 다음 말이 힘든데 안식일과 그 다음에 절기에 관한 문제, 안식일이 확대되면 절기 된다. 유월절, 무교절, 월삭, 절기가 되는데 특히 월삭 같은 경우는 달을 의미하거든요. 이쪽 초승달에서 다음 초승달까지를 월삭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월삭이라는 그 뜻이 히브리어로 초승달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해와 달과 별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관련되어있어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제가 어제 설교하면서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어요. 끝나고 난 뒤에 다시 올릴 테니까 다시 들으라고 언급을 했는데. 안식일은 창조 때에 그 내용을 품고 있지만, 안식 이후에 확대된 시간 속에서는 이미 창조된 해와 달과 별 창조된 시간에 의해서 계절마다 생산되는 소산물이 절기라는 이름으로 이것이 안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투입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투입하게 되면 어디를 겨냥하느냐, 안식일을 겨냥해서 투입이 돼요. 그러면서도 확대됩니다. 그러면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유교절, 무교절, 초막절, 수장절에 동원되는 제물에 어린수양과 수송아지 그리고 어린양의 숫자를 조사해보면 어딘가 한 곳에 수렴하고 접근한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 숫자는 민수기28장에 나오는데 복잡해서 다 이야기 못해요. 그런데 어디에 맞추느냐 하면, 안식일 어린양 숫자만은 딱 맞게 되어있어요. 안식일에는 뭘 바치는가, 어린양 한 마리를 잡거든요. 이것은 무엇의 사건으로 포함되어 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어린양을 바침으로서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했지요. 탈출하고 난 뒤에 안식일의 계명의 내용이 바뀌어요.

처음에는 천지 창조 때문에 기념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다가 신명기5장에 보면 안식일 지키는 이유가 무엇으로 바뀌는가 하면, 너를 종 되었던 애굽에서 나온 게 되지요. 이 말은 뭔 뜻인가 하면,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의 구체적인 가시적인 표현방법은 없어요. 없는데 뭔가 콩고물처럼 묻혀야 돼요. 공간이 묻혀야 됩니다. 어렵지요. 공간이 콩고물처럼 시간에 묻혔다.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세요. 이게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지요.

들어가는데 그 묻힌 공간에서 만들어낸 시간이 콩고물처럼 묻혀요. 콩고물처럼. 시루떡에 팥 있잖아요. 팥 중에 하나가 공간인데, 공간에서 뭘 만드는가, 따로 시간을 만들어요. 창조이후에 만들어진 공간에서 만든 시간과 그리고 창조되기 시점에서 생겼던 안식일의 시간과 대비상태에 가요. 왜 대비상태냐 하면 선악과 따먹고 뭐가 됐기 때문에? 이미 찢어버려야 될 우주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히브리서1장11절.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주께서 주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을 파괴시키고 허물어버리는데, 풍선을 바늘로 찌르면 완전히 찌부러지지요. 완전히 허물어지지요. 지금 이 공간이 그런 식이에요. 찌부러지면 뭐도 찌부러진다? 이 공간이 유발된 시간도 찌부러지기 때문에 붕괴하기 때문에 시간은 흐르지 않는 거예요. 흐르지 않는 겁니다.

지금 오후3시, 4시 흐르잖아요. 15살 때하고 50살 때, 치매 걸린 75살 때가 흐르잖아요. 15세 믿음가지고 75세 믿음을 대체할 수 없거든요. 75세 믿음을 믿느냐, 못 믿어? 그러면 지옥 가. 치매 걸린 노인이 뭘 알아? 믿긴 뭘 믿어?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데. 뭘 믿어요? 이 문제 어떻게 할 거냐 하는 거죠. 정답은 이겁니다. 15세 알았던 믿음, 치매 걸려서 믿음하고 똑같은 믿음이에요.

같이 파쇄 되어야 되고 무너져야 될 시간선상에서 그 순간에 본인의 시간적 인식과 결부해서 착오를 일으킨 거예요. “나, 예수 믿는다.” 그게 엉터리인데 왜냐 하면 “내가 믿는다.” 이런 것은 성경에 보면 없는 겁니다. 내가 믿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믿게 하신 믿음 따로 입니다. 그럼 내가 믿는 것 따로 있고, 주께서 믿게 하신 믿음 따로 있지요.

주께서 믿게 하신 믿음은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걸 가지고 ‘단번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15세, 75세 왜 다르게 하느냐, 단번에를 드러내기 위해서 엉터리 믿음을 계속 그 주위에 순회하도록 하는 겁니다. 순회하도록. 빙빙 돌도록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생수 나오는 우물이 있는데 그 생수에 접근하지 못하고 “아이고, 이 근처 같은데?” 하고 맨 날 뱅뱅 도는 거예요. 옛날 내비게이션 가지고 낯선 집 찾아가니까 분명히 다 왔다고 했는데 다 온 게 아니에요. 뭘 모르겠어. 나중에 보니까 그 집에 가보니까 그 집을 뱅뱅 돌았어. 그 집이 있는데 뱅뱅 돈 거예요. 예수님을 중간에 놓고 뱅뱅 도는 역할을 하라고 요한복음6장70절에 나옵니다. 뱅뱅 도는 역할 그 역할이 뭔지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됐습니다. 열둘을 택했거든요.

12제자가 자기 힘으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다 떠났습니까? 아니지요. 왜냐 하면 예수님과 사람들이 같이 있었잖아요. 그럼 같이 있을 때 제자들의 역할이 뭐예요?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자기가 예수님을 안다는 거예요. 심지어 베드로는 마태복음16장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니까 주께서의 반응이 멋지지 않습니까. 바요나 시몬아 니가 복되구나!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고 니 아버지가 아니고 예수님의 내 아버지라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잖아요. 그 이야기를 베드로가 듣고 오해한 거예요. ‘아,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가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구나! 동일 인물이라고 본인이 자신만만했지요. 왜냐 하면, 예수님한테 칭찬 받았으니까. 바요나 시몬아 니가 복되도다! 했으니까.

복 되도다 했다는 것은 나중에 소급해서 뒤돌아볼 때 비로소 아는 의미를 베드로는 성령받기 전에 이미 알았다고 착오를 일으킨 거예요. 그리고 그 뒤에 뭐라고 합니까? 거기다가 더 하나 기분 업그레이드 만드는 게 있지요? 바요나 시몬아 니 반석위에 이름을 뭐라고 집니까? 시몬인데 베드로라고 이름을 짓지요. 쉽게 말해서 “근호야, 내가 근호 위에 교회를 짓겠다.” 이 말을 듣고 근호가 가만히 있을 근호가 아무도 없잖아요. 나 말고 다른 근호, 축구선수 이 근호. “야, 주님께서 나를 동업자로 여기는구나!” 얼마나 기분 업 되겠습니까. 그것도 오해라. 그것도 오해거든요. 심지어 그 오해를 성당에서는 그걸 천주교로 만들어 놨으니. 오해의 후유증이 너무 크게 오래 가네요.

그 정도로 띄워놨으니까 베드로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고난 받는다고 하니까 “주님, 제가 있잖아요. 제가 가만히 두고 볼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렇게 할 때 만약에 그 현장에 제가 있었다면, 베드로가 뭐라고 했겠어요? “저 말입니까? 바로 저 보고 이야기하셨어요? 사탄이라고. 저 말이에요?” 주님이 뭐라고 하느냐, “너 말고 너!” 이 말이 더 어렵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뭐냐, 인간은 이중적이라는 겁니다. 육신의 아브람이 있고 영의 아브라함이 있고. 육신의 자식이 있고 영의 자식이 있고. 항상 하나님께서는 밑에 있는 인간의 시간이 있고 거기에다가 흐르지 않는 주님의 안식일을 집어넣고. 층으로 만들어요. 왜냐 하면 그렇게 층으로 만들어야 그 사이에서 뭐냐, “너희들은 죄를 지었다.” 가 유지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습합시다. 십자가의 사랑은 사랑이 유지되려면 반드시 뭐가 나와야 된다? 죄가 나와야 돼요.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참깨를 짜면 참기름이 나오지요. 참기름이 죄고 그 죄를 피라고 보면 피가 나온다는 말은 우리는 피 앞에서 할 말을 잃지요. 내가 힘들다, 배고프다, 피 앞에서 그런 소리 하면 안돼요. 어떻게 내 대신 돌아가신 앞에서 아이고 허리가 아픈데…, 그런 소리를 말이 안 되지요. 피 앞에서. 요 피를 계속해서 짜내면 영광이고 없으면 영광 아닙니다. 왜냐 하면, 새 언약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영광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 언약은 살과 피니까. 따라서 층이 두 개로 겹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시간이 흐르게 하십니다. 느끼게 해요. 왜, 인간이니까. 느끼게 해놓고 여기서 주께서 성령이 임해버리면 지난날도 내가 한 게 아니고 앞으로도 내가 할 게 아니고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도 내가 아니고 이것은 주인 되시는 안식일의 완성 때문에 나에게 이게 주어졌는가, 왜나는 또 깜빡 잊어버렸을까,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겁니다.

수요일 날 했지만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요거하고 첫 시간 쉽시다. 이사야 제일 마지막 봅시다. 설교를 죄송하게 어렵게 하고 난 뒤에 항상 설교자 입장에서는 찜찜해요. 수요설교를 이렇게 했지요. 이사야 맨 마지막에 어떻게 끝납니까? 라고 물었지요. 보통 우리가 성경 마지막 끝나는지는 신약은 잘 알지요. 항상 마지막에는 성부, 성자, 성령 안부하는 게 있고 마태복음 마지막도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항상 끝이 멋있잖아요. 이사야가 얼마나 멋있는지 봅시다. 진짜 멋있어요.

이사야66장23절,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되, 월삭이라 하는 것은 피조세계에서 만들어진 시간의 대표에요. 왜? 모든 것은 월삭부터해요. 월삭부터 무교절이 나오니까. 그 다음에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처음 창조할 때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소유된 시간이에요. 이것은 인간 공간의 시간이 아니고 인간의 창조행위를 담고 있는, 담으면서 시간으로 표현된 창조의 본래의 뜻, 이 둘이 끝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뭐냐 하면, 24절에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지옥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뭐로 끝납니까? 지옥으로.

그리고 우리한테 이런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왜, 꼽나?” 주님의 관심사가 주님의 자기 계획으로 하게 되면 끝나버려요. 어제 수요 설교 때 마지막에 뭐로 끝났습니까? 손 터는 걸로 끝났지요. 탁탁 소리 났잖아요. 사적인 기대 없어요. 주께서 십자가 다 이루었잖아요. 그 앞에서 사적인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사적인 기도? 그건 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온 자기의 울분과 원한 때문에 튀어나온 거예요.

제가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 본질>할 때 그 포이에르바하의 기도 쓰면서 기독교의 기도에서 얼마나 날카롭게 봤어요. 기도하는 사람은 예술가다. 어떻게 그렇게 잘 지어내느냐? 그런데 그 지어낸 게 자기 한을 맺힌 걸 가지고 지어내놓고 자체적으로 이걸 편집하고 조정하더란 말이죠. 기도를 하면서 본인이 응답을 본인이 그것을 창작해내요. 창조가 아니고 창작해내요. 본인이. “하나님, 이쯤하면 응답받은 걸로 쳐 주겠습니다.” 지가 막 지어낸다니까요. “아이고, 무릎아파라. 이정도 무릎아파 했으면 저도 엔간히 했지요? 나머지는 주께 맡기겠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벌세우고 바빠. “이 정도 잘못하면 내가 벌 받아도 싸지요.”해놓고 “그렇지만 내가 죄 값은 치루고 있습니다. 앞으로 잘할게요.” 세상에 그걸 포이에르바하는 예술가가 따로 없다는 거예요. 기도하면서 자기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겁니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세요. 두 기독교 나라가 축구시합 할 때, 이쪽은 자기 나라 이기라고 기도하고 저쪽은 자기 나라 승리해서 월드컵 올라가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난처하지요. 두 아들이 하나는 짚신장수하고 하나는 우산 장수하는데 비 올수도 없고 비 안 올수도 없고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사야 마지막에 보니까 뭐라고 합니까? 애초부터 주께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주님께서는 흐르지 않는 시간 거기에 관심 있습니다.

단번에 다 이루었다. 오늘 강의제목을 ‘단번에’ 다 이루었다. 그리고 그 단번을 이해 못하기 때문에 12제자는 바로 뱅뱅이 도는 거예요. 계속해서. 예수님 누가 더 높은가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요. 예수님 본  뜻도 모르고. 3년 동안 뱅뱅이 돌면서 결국은 그들은 다 뱅뱅이 돌면서 예수님 십자가질 때, 다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218.♡.196.154) 15-05-29 00:56 

가락-요한복음6장66절(단번에)150521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여기 계신데 12제자는 여기에 그냥 중심에 오지 못하고, 인물에 오지 못하고 뱅글 뱅글 도는 거지요. 여기에서. 돌면서 그냥 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면서 오해를 하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또 싸우고 누가 더 높으냐고 이리 했잖아요. 그러면 분명히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면 예수님을 보는 재산 바치고 청춘을 바쳐서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으면 나름대로의 예수에 대한 인상이라든지 예수의 느낌, 메시아 된 이유, 그런 근거를 뽑아내도 충분히 뽑아낼 수 있는 거예요. 숙식을 같이 했거든요. 숙식을. 생활을 같이 했잖아요. 같이했는데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쳐주는 능력을 줬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예수님, 마귀들이 하늘에서 마구 떨어집디다.” 하면 어중간 하면 주님께서 같이 칭찬해 줄만도 한데 마귀가 떨어진 걸 좋아하지 말고 니 이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좋아하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아마 그 이야기 들으면 12제자들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 ‘이미 기록됐는데 뭘 좋아해? 한때 좋으면 되지. 이미 기록됐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취지가 아니거든요.

니가 기록됐다고 진짜 나와 동일한 생각으로 기록됐다고 한다면 귀신이 떨어지는 것을 좋아 안해야 되지요. 그런데 귀신이 떨어지는 걸 좋아하는 걸 보니까 아직도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그 기쁨과 그 기적의 의미를 너희들은 모르고 역시 뱅뱅이 도는 거예요. 그 중심에 있지 못하고 계속 도는 거예요. 처음에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가 좀 난해하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할 때는 예수님께서 12제자와 더불어서 함께 하면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이미 왔다는 징후들을 많이 남겨요. 귀신을 쫓아낸다든지 병을 고친다던지 점점 더 그 징조가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에 맞춰줘요. 맞춰 줘가지고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왔다! 그야말로 존경하는 호산나! 부르도록 그렇게 유도를 했어요. 오병이어도 마찬가지 취지고요. 그렇게 했는데 그럴 때 이 제자들이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야말로 우리 같아도 “야, 우리는 이미 천국 왔고 이제는 높은 자리에 누가 차지하는가?” 국무총리는 니가 하고 누구는 누가하고, 이런 식으로 공과 갈라먹는 식으로 여기에 분주해져요. 여기에 자기는 합격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을 이렇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간격이. 예수님과 밀착됐다고 생각됐는데 이 밀착이 점점 더 간격이 벌어져요. 벌어지다가 나중에 베드로는 아예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잖아요. 단절상태에 들어가 버립니다.

단절상태라는 말은 이렇게 삼년동안 나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기적을 받고 또 너희들이 기적을 베푼다 할지라도 이것이 나에게로 오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갈수록 요한복음 특히 갈수록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와 함께 있다. 그러면 너희들이 나에게 건너올 수 없다는 것은 뭐를 원천적으로 폭로시키는가 하면, 너는 처음부터 아버지께 올 수 없는 자였다는 것을 그동안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느끼지를 못한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이 그 소리 듣고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우리한테 아버지를 보여주시옵소서. 분명히 요한복음 13장에 나오지요. 도마가. “아버지를 보여주면 우리 아버지를 알려주면 제가 알지 않겠습니까?” 라고 할 때 지금 예수님의 뜻은 그거에요. 지금 예수님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요 단절의 늪이에요. 주님은 이 단절의 지층구조, 균열된 늪을 쳐다보고 있는데 제자들은 뭐냐, 늪을 건너뛰어서 예수님과 그리고 같이 있다는 아버지를 상상하고 있는 겁니다. 앞에 있는 예수님과 그 벌어진 균열에 대해서는, 갈라진 그 틈에 대해서는 이건 시답잖게 보는 거예요.

“아이고, 그거 팔짝 뛰면 되지.” 펄쩍 뛰면 된다는 거예요. 펄쩍 뛰어보세요. “목사님, 그럼 그게 몇 센티입니까?” 처음에 제자들이 예수님하고 숙식을 같이 했으니까. 그런데 베드로보고 사탄아! 하고 이상하게 나중에 하니까, 그거 해야 뭐 30Cm 뛰지 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할 때는, 그 십자가 지지 뭐. 그럴 때는 한 35Cm같으면 성경대로 넓이 뛰기 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뛰었다 칩시다. 35Cm 뛰는 순간 60Cm로 순간적으로 벌어져버리면 어디에 빠집니까? 이쪽으로 건너오지 못하고 빠지겠지요. 그리고 또 보니까 주님께서 이야기하니까 ‘아, 35Cm는 오해였고 70Cm 였구나!’ 70Cm해가지고 다리 만들어서 건너가보니까 대번에 2m건너서지요. 이 말은 공관복음이 점점 더 갈 때마다 틈은 점점 더 벌어져가지고 나중에는 십자가라는 균열은 이 세상에 인간의 육신으로는 아무도 알지를 못합니다. 오직 성령이 아니고서야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고린도전서2장의 말씀이 있는 거예요.

벤틀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인데요 총신이고 보수에서는 최고의 조직신학자로 쳐줘요.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가지고 교수들이나 학생들에게 되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접촉점이야기를 했어요. 그 사람이 주장한 게 이겁니다. 저도 신학교 때 그 강의를 많이 들었으니까. 우리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하늘나라를 갈 수 없습니다. 시작은 그렇게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건너올 수 있도록 접촉점을 줬다는 겁니다. 그 접촉점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종교성이라는 거예요. 종교성이라고 하고 그걸 쉽게 말하면 마음속에 하나님이 종교성을 줬다는 겁니다.

그 종교성이 뭐냐, 로마서1장21절을 거론해요.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있잖아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자가 없는데 하나님께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게 문제가 되고 하자가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벤틀 교수는 말하기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았으니까 이제는 뭐만 추가하면 돼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되겠지요.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그들이 피조물을 창조보다 더 섬겼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피조물을 섬기지 말고 창조주를 자기가 알고 있던 그 하나님을 섬기면, 이게 구원이 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는 그런 접촉점을 줬다는 겁니다. 그 벤틀 교수가 이슬람교를 아는지 모르겠어요.

이슬람교 신학이 이겁니다. 이슬람교는 구약을 경전으로 사용하거든요. 구약을 보면 어떤 형상이라고 만들지 말라. 가 있지요. 그래서 이슬람교의 모든 성전에는 형상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구약에 보면 뭡니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고 말씀을 줬지요. 그러면 이슬람 모든 벽이 뭡니까? 그게 말씀입니다. 그 말은 뭐냐, 이슬람은 하나님의 구약의 시킨 대로 그걸 완벽하게 인간의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동원했던 업적이 이슬람교에요. 마호메트가 구약을 신봉해요. 다시 말해서 마호메트는 최후의 결정적 해석자로 등장하지요. 마호메트가. “구약 너희 해석 못하지? 내가 해석해줄게.” 하고 등장한 자가 마호메트에요. 마치 신, 구약을 해석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마지막 때 이만희 선생님을 보고 준비해 놓은 것처럼. 보혜사 되시는 분이 오셔서 등장한 것처럼.

구약에서는 말씀 그대로 우상 섬기지 말아야 돼요. 그 우상이 뭐냐 하면, 피조물의 형상대로 신을 형상한 게 우상이잖아요. 그러면 안하면 되잖아요. 베틀 교수 이야기가 이거에요. 마음속으로 종교심이 있다는 거예요. 접촉점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전서2장에 보면 그 벤틀 교수의 말을 정면으로 사도바울이 거부해버립니다. 저는 옛날에 이 대목을 보고 신학교 때 벤틀 교수 해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야, 하나님 참 고맙게도 전적 타락했다 해놓고는 하나님을 알되, 아는 걸 잘 이용하게 되면 건너올 수 있다. 정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고마운 하나님이구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여기에 고린도전서2장9절의 말씀을 보면서 벤틀 이 사람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뭐냐 하면,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그 다음이 뭡니까?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지요. 인식론 자체가 다 헛짓이지요.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자체도 이것은 바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할 소리겠지요. 차라리 사울처럼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아예 내려가세요. 다메섹으로. 그게 차라리 빨라요.

사울이란 사람이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 죽이려고 가면서 “이쯤 해서 예수 나타날 때가 됐는데.” 이렇게 자꾸 곁눈질했습니까? “아이고, 지금 뭐하는 거야? 해가 갑자기 광채가 비쳐야 될 건데. 아이, 진짜 뭐하시노? 빨리 좀 안 찾아오시고?” 이랬습니까? 성경에 보면 혈기 등등했다. 위를 볼 생각도 안했어요. 자신만만했어요. 왜? 예수는 이단이기 때문에.

자,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생각이 뭐가 포함되어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몰라요? 알아요? 안다는 뜻이에요. 알기 때문에 예수가 이단이에요. 사도바울 그 똑똑한 사람이 나사렛 예수의 이단의 종교에 대해서 연구 안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 연구했잖아요. 그냥 소문만 듣고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 그 작자가 했던 이야기를 다 들었어요. 그 당시에 워낙 유명하니까 다 들었어요. 부활이야기, 내가 길이요 진리고, 다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예수는 뭡니까? 이단이지요. 이단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합니다. 내가 전에는 예수님을 육으로 알았다는 거예요. 아주 문장이 짧아요. 내가 전에는 예수를 육으로 알았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같은 취지입니다. 내가 전에 예수를 육으로 알았다. 육으로 안 사람 중에서 김 동림, 이문열 그리고 많은 기독교에 대해서 썼던 소설가, 시인들,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다. 이런 사람들, 예수가 위대한 분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몰라서 그래요. 예수님 이단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태어났기 때문에 육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존경하고 있는 거예요. 가상적인 예수를 생각해서.

진짜 예수를 알게 되면 예수님은 이단이에요. 줄 곧 이단으로 가세요. 행여 아시겠습니까? 행여 모르잖아요. 주께서 또 문열아, 문열아, 부를지. 성령이 찾아와야 예수님의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고린도전서2장이야기입니다. 내가 전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 설득하는 게 아니다. 고린도전서2장 4절에. 내가 전하는 것은 사람의 말로 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이야기한다 했어요.

제가 오늘 어떤 여자 목사님을 만났다고 아까 이야기했지요. 그 분 하는 이야기를 듣고 저한테 조언을 해 달라 해서 조언을 했어요. 그동안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한 사람이라도 건지려고 사람들에게 납득되는 말을 했지요? 그게 실수네요. 왜 납득되는 말을 했습니까? 분명히 고린도전서2장에서는 그렇게 안 되어 있는데. 이해 못할 말을 해야지요. 이해 못할 말을 해야 이 단절을 건너가는 것은 이 전도하는 내 실력과 내 말발이 아니잖아요. 그럴 때 진정 우리가 무익한 종이라고 말을 해야 되지, 무익한 종이라는 자기 낮춤의 능력으로 사람을 꾀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술책의 술책입니다. 이건 귀신도 알아요.

이렇게 모든 걸 비우고 내려놓으면 이란 책도 2권 나왔다나. 내려놓게 되면 주께서 쓰시겠지. 몽골 가서 전도하겠지. 이거 아니에요. 내려놓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아무도 구원 못 받아요. 주님이 직접 성령으로 주님의 영으로 찾아와줘야 돼요. 아버지가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그래야 성립이 되지요. 그래서 내가 훈수 뜨면 안돼요. 장기도 못 두는 게 무슨 훈수를 떠요. 바둑도 못 두면서 주님 바둑 두는데 훈수하고. 우리가 무슨 수로 압니까? 5분 앞을 모르는데. 우리가 5시간 앞만 알면 우리는 떼 부자 돼요. 주식 사가지고 팔아버리면 부자 된다고요. 우리는 5시간 뒤도 몰라요. 모든 것은 주님의 손에서 지금 부속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매트릭스입니다. 녹색 글자 숫자가 문자가 마구 내려와요. 매트릭스1,2,3 영화 봤어요?  거기 삼위일체 나오고요, 시온 산 나오고 다 나와요. 메시아 나오고 다 나와요. 기독교 용어 다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관복음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뭡니까? 단절을 점점 넓히는 기간이 공생애입니다. 어디까지 말입니까? 십자가까지 말입니다. 그럼 십자가 진 의의가 뭡니까? 예수님이 알고 있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왜 그렇습니까? 고린도후서4장 4절, 모든 인간의 아비가 마귀이기 때문에. 결국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광야에 가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배후 세력을 먼저 만나게 했지요. 그게 누굽니까? 마귀를 만난 거죠. 인간이 아는 현실 속에는 마귀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만난 현실은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 못 지게 하는 것이 전력으로 막는 것이 마귀고요, 십자가를 졌으면 십자가 복음을 못 전하게 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 것이 지금 살아있는 마귀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복음 십자가가 바로 영적 무기고 유일한 영적 쟁투의 논쟁거리가 돼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를 설득해라. 우리를 설득해서 구원해 달라.” 이건 마귀 이야기거든요. 십자가는 그 누구도 설득해서 나는 구원하지 않겠다. 다만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일방적으로 구원하겠다. 그래야 예수님의 공로만 드러나는 그 상태가 바로 주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천국은 바로 그게 천국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 싸움입니다. “나를 제발 설득해 달라.” 설득해버리면, 설득이란 말을 했는데,  접촉점, 설득 다 같은 말인데, 이렇게 돼버리면 예수님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 사이에 공통요소가 다 같이 들어있는 셈이 됩니다. 공통요소가 들어있고 이 공통요소는 죄에 대해서도 오염되지 않은 상태가 유지가 되어야 돼요.

예를 들면 미국사람한테 “그 소금 좀 주세요.” “what?” “소~금?” “아이, 당신 소금 몰라?” “소금이 뭔데?” “소금 sa...” “아, 솔트” “oh! salt” 솔트라는 말을 해야 가지고 오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솔트라는 말이 소금이라 하는 것이 공통적인 단어가 양쪽에 공히 있을 때 비로소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고 이해가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주님이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먹을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마귀가 그걸 전부다 반대로 다 뒤바꿔났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선지자는 어떻게 됩니까? 선지자는 층이 두 층이에요. 천상회의를 참석했잖아요. 미가야는.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 말이죠. 사도바울 같은 경우. 신이 임하니까 본인의 것과 신이 임한 것이 같이 겹쳐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도 어리둥절한 거죠. 특히 어린 사무엘. 목소리가 꼭 엘리제사장 목소리에요. “선지자님, 왜 불렀습니까?” “안 불렀는데.” “자거라.” “예” 사무엘이 “왜 불렀습니까?” “나, 안 불렀어.” “자거라.” “분명히 불러놓고.” 또 세 번째 불렀어요. “불렀습니까?” 그 때 엘리제사장이 ‘아하!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과 함께 있구나!’ 그런데 그 어린 사무엘은 그걸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너무 어려서. 아무리 천재라도 몰라요.

그걸 우회적으로 어른 엘리제사장을 통해서 하지요. 엘리제사장이 묻습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무슨 이야기하더냐?”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엘리제사장은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의 받은 계시는 어린 사무엘이 갖고 있어요.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이 주신 걸 모르고 어른 엘리제사장이 준 걸로 알고. 둘이 만나게 하지요. 둘이 만나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엘리제사장님 망한답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이런 소리해서.” “아니, 미안해하지 마. 세 번씩 부른 하나님의 뜻이지. 망하면 망해야지. 끊어질 수밖에 없지요.” 그럴 때 어린 사무엘이 “야, 오늘도 내 말발 좋았다.” 이런 소리를 못하지요. 자기는 완전히 주의 일에 소외당한 입장에서 참여하기 때문에. 참 말도 어렵다. 소외와 참여는 반대말입니다.

소외당한 입장에 서면서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발길질 당하면서도 주의 일은 다하고 있는 거예요. 참, 이 대립되는 말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할 수 없어요. 그냥 저는 순회합니다. 맨 날 오해하면서 돌아다닐 수밖에 없지요. 그 단절.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는 아버지와의 단절 때문에 즐거운 예수님과 바이, 바이 할 수밖에 없어요. 단절할 수밖에 없어요. 서로 같은 평지에 있었는데 거기에 지진이 일어난 거예요. 네팔처럼 지진이 일어나는 거예요. 지진이 일어나니까 이쪽은 이쪽 편에 아담 편에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 안, 예수님 안. 쫙 갈라졌어요. 성령이 오니까 이쪽에 있는 인간을 예수 안으로 집어넣는데, 갈라진 게 뭐냐, 십자가로 갈라졌기 때문에 십자가 죽었다는 조건에 충족될 때만 이쪽으로 넘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쪽에 넘어온 사람의 특징의 하나가 전부다 창 자국, 못 자국 다 각자 갖고 있어요. 예수님만 갖고 있는 게 아니고 다 갖고 있어요. 예수님의 흔적을 다 갖고 있어요. 사도바울이 나는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다. 나는 흔적만을 자랑한다. 내가 죄인인 것만 자랑하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막 살아왔던 것만 자랑해요. 피아노 치는 막 산 것, 꽃꽂이 한 막 산 것, 교회 청소한 그 막살음. 막 산다하니까 오해들 했어요. 그게 아니고 성경 공부하는 막살음, 전부다 막 산거거든요. 그거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랑하고 싶겠어요. 아담의 그릇이기 때문에 얼마나 자기 자랑하고 싶겠어요. 그런 것들이 바로 십자가를 드러내는 소외된 참여의 증거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자,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사도바울까지 전부다 해석이 다 끝난 셈이 되죠. 십자가를 들썩 떼어놓으면 안 됩니다. 십자가 건너서 이젠 부활로! 이러면 안돼요. 항상 십자가를 껴안는 그 상태를 부활상태라고 해요. 뭐 십자가 건너서! 6.25전쟁 났습니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뭘 앞으로 가? 십자가 끌고 가야지. 십자가를 장고처럼. 관 들고 관속에 기관총 넣고. 20대에 봤어요. 예수님을 관속에 십자가를 끌면서 십자가만 증거하고, 이거 말고 다른 거 증거 하면 나라 할지라도 저주받는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어요. 그게 십자가에요.

설명 들어보면 어려운 거 없어요.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안 해요? 왜 안할까요? 눈에 안 보이는 주님보다 눈에 보이는 교인들이 구름처럼 운집한 것을 보고 그 군중이 목사의 야심이고 야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외로운 건 싫어. 우리 마누라와 둘이 하는 목회는 싫어. 수천 명이 그리워. 그게 그리워. 광야에서 두 번째 시험이에요. 뛰어내려보세요.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오병이어만 해도 5000명 인기 확 올라갔는데 뛰어내렸는데 안 다쳐보세요. 군중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또 보여주세요. 또 보여주세요.” “또 보여주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렇게 보여준 것이 바로 결국은 뭡니까? 세 번째 시험에 보면 그게 누구의 종이에요?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 그렇게 종 짓을 한 거예요. “여러분, 뭘 원합니까? 원하는 거 드리겠습니다. 기적? 기적 드리겠습니다.” 진짜 기적은요, 내가 기적 받을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아는 그것, 그게 진짜 기적이에요.

유대인들은 기적은 어디서 오느냐, 기적은 바로 법에서 와요. 법을 지켰을 때에 기적이 온다는 겁니다. 납득되지요. 하나님의 기적은 어디서 온다? 내가 법을 지켰을 때,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하나님께서 “아이고, 하나 먹어라.” 해서 보너스를 손에 쥐어주는 거예요. 이걸 유대인 방법으로 하면 유대인은 법이 지켜질 때에 그 법에서 뭐가 나오는가? 의가 나와요. 의가 나올 때 의에서 뭐가 나온다? 기적이 나오지요. 유대인보고 이 증거를 찾으라 하면 증거를 구약 전체에서 다 뽑아냅니다. 대표적인 게 뭐냐 하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 드리면서 그 다음에 뭐했지요? 자기의 건강도 생각 안하고 원수가 망하는 것도 원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의 재물도 원하지 안했다는 법을 지켰더니만 하나님께서 구하지 않은 것까지 덤으로 줬으니까 그 방정식을 인간들이 놓칠 수가 있습니까? 특히 일천번제를 드렸다는데. 일천번제가 뭐냐 하면, 역대 하에 보면 한꺼번에 일천 제물을 드리는 거예요. 하루치 그것도 새벽마다 일천 번 세 번마다 나누어서 드리는 게 어디 주님이 계주도 아니고 주님이 일수놀이 합니까? 시장에서 “아줌마, 도장 찍어야지.” “오야, 다음에 돈 잘 줄게. 올 가을에 딸 시집보내자. 목돈 타고 조금씩 갚아 나가자.” 일수놀이 해요? 일수놀이 특징이 뭐냐 하면, 장부가 작다는 거예요. 손바닥만 하지요. 이것은 뭐 일천번제가 교회 올 때마다 천 원씩 내요? 천 원씩 내면 그건 양반이에요. 올 때마다 만원씩 내야 돼. 일천 번. 그럼 낼 때마다 뭘 생각하겠어요? 시간은 흐른다 했잖아요. 시간은 흐르니까 시간 끝났을 때 나오는 그 성과를 노려요.

사람은 언제 행복한 줄 알아요? 사람은 가졌다고 행복한 게 아니에요. 사람은 꿈과 희망이 클 때 가장 행복하고 꿈과 희망이 적어지면 불행해져요. 뭔가 잘됐잖아요. 잠시 기쁘지 그 다음 허탈해져요. 그래서 인간은 또 욕심을 부려서 꿈과 희망의 범주를 넓혀야 돼요. 폭을 넓혀야 돼요. 넓힌 만큼 성공한 입이 미소가 절로 나요. “아, 기분 좋다.” 사업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주장하는 거예요. 왜, 꿈과 희망을 넓힌 만큼 되던 안 되든 이미 넓혔다는 그 자체가 행복하기 때문에. 애가 장학금 받았다면서요? 잠시 행복한데 나중에 애가 스카우트 돼서 삼성그룹에 가면 더 좋아하는 거예요. 계속 꿈과 희망을 갖는 거예요.

이런 것은 초등학교 애들도 생각해요. 초등학교 애들이 컴퓨터 게임에 빠지지요. 이유가 뭡니까? 거기에 뭐가 나와 있어요? 순위가 나와 있어요. 요 게임 전 세계 순위, 25550KD 1등, 자기는 찾지도 못해요. 정신없이 매달립니다. 빨리 10등 안에 들기 위해서. 애들만 그런 줄 알아요? 스마트폰해가지고 테트리스게임하고 전부다 그거하고 있어요.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스스로 이 각박한 세상에서 잠시나마 마약처럼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법을 지킴으로서 기적을 봤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뭐냐 하면, 유대인들은 법을 지켜서 기적을 봤는데, 제자들은 놀래버렸어요. 기적부터 받고 시작을 하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것은 자기들은 자동적으로 합격이라 들지 않겠습니까? 병고치고 하늘에서 귀신이 떨어지고 세상에 이런 횡재를 했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다 떠나버렸어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로마서7장을 보면, 외부에 있는 법을 지키면 외부적으로 상황이 원하는 상황으로 바뀌어져서 사람들은 원하는 게 뭐냐 “상황만 좋으면, 환경만 좋으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잘 섬기겠습니다.” 가 인간이 갖고 있는 잘못된 착각입니다.

에덴동산이 그리 좋아도 선악과 때문에 망한 걸 모르고 “지금보다 살만하고 여유 있으면 얼마든지 구제하고 남한테 인자함을 베풀 수 있는데 하도 사는 게 내 입에 풀칠도 못했기 때문에 안 됩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첫 번째 시험이에요. “니가 지금 배고파하는데 너부터 우선 돌이 떡 되게 해라.” 유대 광야에서. 돌이 떡 되게 해라. 유대광야가 어디 있느냐 하면, 유다는 건너오고 난 뒤에는 유대광야에요. 유대광야에서 조금 내려가면 예루살렘이고, 조금 더 내려가면 여리고 있고, 유대광야 돌들이 있어요. 그게 다큐멘터리에 보면 나와요.

그 돌들이 꼭 빵처럼 생겼다고요. 그 돌들이 떡 되게 해라. 우선 먹어야 일을 하지. 사탄이 예수님한테 그렇게 다뤘던 방법은 그동안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을 그동안 그렇게 인간을 다뤄왔다는 그 방식을 동일하게 예수님에게 적용시킨 겁니다. 사탄인 나는 평소에 사람을 다룰 때 이렇게 다뤄왔다는 거예요. 뭐? 일단 배가 불러야 주의 일을 하던지 뭐를 하던지 할 게 아니냐, 라는 멘트를 가지고 그동안 인간들을 설득해 온 거예요.

거기에서 우리가 반발할 수 있습니까? 맞는 말이잖아요. 그렇지요. 에너지가 있어야 세포가 움직일 게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오히려 더 엉뚱하지요.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뭐냐 하면, 사탄은 니가 살아야 니가 주의 일을 한다고 너에 대해서 주체를 하는데, 예수님은 주체를 말씀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말씀에다가 주체를 옮겨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그 말씀에 옮기니까 사탄이 그걸 가지고 두 번째 시험을 한 거예요. “그렇지. 말씀이지. 그러니까 말씀대로 니가 하게 되면 내가 니 메시아라는 걸 인정하게 되고 사람들은 추종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네가 기대했던 하나님의 메시야로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니 작업은 드디어 성사되잖아. 해라.” 이런 식으로 그동안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을 그런 식으로 현혹해 온 거예요.

그러니까 두 번째 시험은 결국은 목회자, 목사들에게 그렇게 한 겁니다. “주님이여, 목회하려고 하는데 기적만 베풀어주시면 주께 원하는 성도들을 많이 모아서 주께 바치겠습니다.” 라는 사고방식이 있는 사람은 현재 마귀의 두 번째 시험에 빠진 사람이에요. 목사만 그렇겠어요? 장로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자기가 세운 교회에 숫자 적어보세요. 장로들도 환장하지요.

그런데 로마서7장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 법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고 기적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니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런 기적들은 아무 소용없다. 이게 로마서7장입니다. “니 속에 죄 들어있다. 모르겠지?” “몰랐는데요.” “율법 찾아간다.” 율법 찾아가게 되면 율법이 “아이고, 율법이다!” 반기는 손이 머쓱해져요. 손님 오기로 되어있는데 딩동! “아 손님이로구나!” “아이고, 반갑습니다.” 하고 문열어주니까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경찰이 와가지고 “아드님을 현행범으로 체포하겠습니다.” 하면 경찰이 손님인 줄 알고 반기다가 내 아들이 범죄 한 줄도 몰랐지요. 엄마는. 그런데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두 시간 전에 사람을 찔러 죽였어. 그걸 잡고 찾아와서 경찰이 신고 돼가지고 경찰이 와가지고 내 아들 잡아갈 때 엄마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역시 우리나라 경찰은 참 훌륭해.” 이렇게 합니까? “누구야? 내 아들 못 잡아가. 저리가!” 이렇게 밀어내는 거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법을 지키면 의가 생기고 의가 생기면 뭘 받는다? 행운을, 하나님의 기적을 보너스로 받는다. 이걸 교회에서는 상급이라 하잖아요.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고 보너스 받는 것은 법 지키면 된다. 그 법을 지키면 되는 줄 아는데 이 법이 로마서7장에는 법이 어떻게 됩니까? 법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야 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진 작에 죽어도, 차에 받혀서 개에 바쳐서 약물중독으로 죽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 정도로 죄인인 것을 우리 속에 이런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겁니다.

벤틀 교수의 접촉점, 접촉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가 조직신학을 만들어내요. 어떤 조직신학? “납득해주시면 믿겠습니다.” 이런 조직신학을 만들어내는데 하여튼 그런 신학들이 있어요. 인간에게는. 있는데 그게 아니고 사탄이 들어있다니까. 사탄이. 일곱 귀신이 들어있어요. 우리는 귀신들렸는지 몰랐지요. 우리는 양심껏 산다고 생각했지요. 그놈의 양심, 세상에 있는 역사 철학을 보게 되면, 양심가지고 의로 쌓는 역사가 철학의 역사입니다. 초창기에 그리스철학에서는 스토아학파, 평정심을 통해서 니가 영혼을 자유케 한다, 나오지요.

하나님께서는 전적 타락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형상, 의와 거룩한 것이 잠자는 상태지 그걸 이렇게 자극 주게 되면 다시 양심과 의는 깨어나서 “주여, 그동안 제가 몰랐습니다.” 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찾아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너무나 무게가 무거워서 눌려서 그게 안 된다면 패자부활전을 준비해놨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연옥설이에요. 연옥설인데, 천주교 연옥 설은 죽고 난 뒤에 연옥 가는 게 천주교 연옥설이고 개신교 연옥 설은 뭐냐 하면, 예수님 재림할 때 또는 승천하고 난 뒤에 휴거하고 난 뒤에 1차 휴거 난 뒤에 2차 휴거 남은 가기 전에 중간상태에 7년 환난 동안에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원리입니다. “지가 고생 많이 하면 잘못했다고 하겠지.” 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요한계시록16장11절에 보면 이리 되어있어요. 그들이 환란을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더 하나님을 혐오하게 되어있다, 이리 되어있어요. 아프니까 더 욕을 하게 되어있어요.

사람이 고생하면 예수 믿는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만 더 키워요. 한만. 거짓말이야 하며 테이프 막 틀러놓고.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선교사로 가가지고 북한에 들어가서 잡히고 난 뒤에는 나는 이렇게 북한이 잘 사는 줄을 몰랐다고 생방송을 하고. 도대체 누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을 이야기합니까? 누가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강하다고 자부합니까? 인간 세상은 시간이 흐르는 이상은 전부다 치매현상입니다.

나중에 다 깨어지고 성령에 의해서 다 깨어지고 난 뒤에 정말 구원은 단번에 되는 것이지 내가 용쓰고 그동안 고생한 업적들이 많아서 내가 신앙 책을 많이 내서 믿음이 더 증가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의로운 실적만 누적될 뿐이에요. 마일리지만 쌓일 뿐이지요. 그 마일리지 대한항공 한마디 해버리면 다 날아갑니다. “나 마일리지 인정하지 않습니다.”하면 다 끝납니다. 항공 마일리지 백날 쌓아도 대한항공 법 바뀌었습니다. 내규가 바뀌었습니다. 끝납니다.

70절 다시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열둘 중에 가룟유다가 마귀라고 해석하시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열둘을 하나로 봐요. 하나로 움직이는 하나의 단체로 봐요. 단체 속에 마귀를 집어넣었다는 말은 나머지 열한명이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은 하나로 못 당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를 못 당해요.

<불편한 여정> 책에 나오지요. 포카 카드 있잖아요. 카드놀이 할 때에 피라미드 하는 게임 있지요. 밑에는 4장 그 다음에는 3장, 2장 최후에 1장, 이렇게 다방에서 심심할 때 하잖아요. 성냥개비 쌓고. 요거 하나 빼버리세요. 나는 목사다. 나는 수천 명의 목사다. 이렇게 했는데 성추행 한마디에 다 무너져요. 한 번에 확 다 가버려요. 그 명성, 명예. 결국 이건 뭡니까? 한국에서 자살. 가룟유다가 왜 자살했어요? 가룟유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할 때 자살하자, 이렇게 자살했습니까? 처음부터 가룟유다가 뽑힐 때마다 “주여, 자살하겠습니다.”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에요. 본인이 본인을 몰라요. 오늘의 내용의 핵심입니다.

나는 나를 모른다. 그럼 누가 알아요? 아버지 쪽에 계신 분이 알겠지요. 아버지도 알고 아들은 아는데 막상 본인은 모르지요. 나는 모르고 주님은 알고, 그래서 십자가외에는 다른 복음은 없는 거예요. 십자가 능력으로 코 꾀어서 가는 거예요. 우리는 그동안 모든 행동은 마치 내가 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나쁜 짓은 멀리하고 말씀 지켜서 영광 돌리자, 우리가 기껏 챙기는 게 그거에요. 그거 한 방에 훅 갑니다. 아무리 마일리지 쌓아도 한 방에 훅 가게 되면 본인이 믿음 없음을 들통 났을 때는 본인이 너무나 초라해서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자기의 성질에 합당해요. 그래서 가룟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죽었으니까 가룟유다는 양심적으로 살았으니까 천국 갔습니까? 사람의 행동으로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자살 문제가 나와서 분명히 하지만, 그럼 자살한다고 지옥 갑니까? 자살한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자살 안한다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천국은 주께서 사랑을 주지 않으면 지옥가고 사랑 주면 누가 뭐래도 구원 받아요. 아니 자살해도 구원받습니까? 누가 그걸 자살이라고 누가 그걸 규정했느냐가 문제거든요. 그걸 규정하는 잣대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주님한테 나왔습니까? 어디서 나왔어요? 인간들에게 나왔지요. 니가 뭘 아는데? 주님이 알고 있는 해답을 니가 자살에서 뭘 알아? 압니다. 뭘 알아? 몰라? “자살을 하면 지옥 갑니다.” 가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합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괜히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살 안해야지 라는 그런 스스로 법을 만들도록 유도해서는 안 되지요. 가룟유다가 자살했기 때문에 지옥 간다, 하니까 “그러면 자살 안하면 천당 갑니까?” 법을 자꾸 만들지 마세요. 그 법을 만들겠다는 것은 어떤 처신을 잘하게 되면 구원받는데 유리하다는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발휘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안돼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택했다는 겁니다. 열둘을 택했잖아요. 그냥 놀아. 그냥 막 살아. 열두 명 택했으니까 너희들은 나한테 오지를 못했지만, 나를 알지 못하지만 택함은 유효하잖아요. 마귀로 택한 것은 지옥가면 되고 마귀로 택하지 않으면 천국 오면 되고 그 소관은 누구한테 있다? 주님한테 있다는 것을 그들이 나중에 자기 자리로 갔을 때, 성령이 왔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되거든요.

마지막으로 요한복음2장22절 봅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보세요. 전에는 왜 몰라요? 왜 모릅니까?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알 수가 있습니까? 본인도 모르는데 본인부터 출발해서 상대방 예수님을 타인을 이해할 때 그 이해는 본인에서 출발했던 이해잖아요. 본인이 이해했던 그것과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부활의 영을 받았잖아요. 출발점이 어디에요? 본인이 아니고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부터 나왔던 이해가 그들에게 도달되니까 그들은 뭐와 뭐가 어긋났다는 것을 알지요.

우리가 이해했다는 것은 잘못된 이해다, 라고 이해한 그것이 성령 받은 자의 이해지요. “아이고, 몰랐습니다.” 이게 성령 받은 자의 모습이에요. “이것마저 은혜인 줄 몰랐습니다. 내 몸이 아픈 것도 은혜인 줄 몰랐습니다.”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자의 모습이라니까요. “니가 그것밖에 모르지. 앞으로 더 알게 많아. 기다려봐~~ 앞으로 모르는 것도 더 캐낼 테니까. 내가 너를 부를 때까지 계속 너는 살아야 돼!” 좀 더 살게 되면, “이것까지라도 몰랐습니다.” 그러면 시간에 의해서 점점 늘어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단번에 다 이루어졌던 것이 조금씩 우리에게 적용이 되지요. 끝에는 “에이, 단번에 다 하셨잖아요. 주님이 단번에 다 하셨으면서. 나한테 조금씩, 조금씩 알려줘. 단번에 다 이룬 걸 가지고.” 그러면 주님께서 “내가 전에 단번에 이루었다고 했잖아. 니가 이해도가 나빠 가지고 그 단번을 또 오해해가지고 단번에 다했구나!” 이렇게 오해하다가 단번에 다 알았다! 까불어가지고 또 넘어졌지만. 이제 나중에 다 살아보니까 정말 단번이에요. 정말 단번에. 내가 한 거 아무것도 없이. 정말 주께서 온전히 다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따져보니까 요한복음6장 70절 말씀이 또 기억이 나는 거예요. 성령 받고 난 뒤에 내가 너희를 뭐했나니? 택했나니. 내가 너희를 택했다. 이것이 나중에 발전해야 돼요. 어디로 발전해야 되느냐 하면, 요한복음15장16절로 발전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 말 하신 것은 그 전에 택했다는 것을 이미 그동안 충분하게 오해했다는 그 균열이 벌어졌거든요. 벌어지니까 점점 더 균열을 벌어지게 하시면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했나니, 요한일서4장10절에 나오지요.

“창세전부터 주께서 다 하셨네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전부터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해놓으시고 자비의 그릇으로 작정하시고 자비의 그릇으로 만들어놓으시고, 어떤 이는 진노 받으라고 진노의 그릇을 만든 것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가 찝찝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도리어 감격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