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6장66절(단번에)150521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여기 계신데 12제자는 여기에 그냥 중심에 오지 못하고, 인물에 오지 못하고 뱅글 뱅글 도는 거지요. 여기에서. 돌면서 그냥 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면서 오해를 하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또 싸우고 누가 더 높으냐고 이리 했잖아요. 그러면 분명히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면 예수님을 보는 재산 바치고 청춘을 바쳐서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으면 나름대로의 예수에 대한 인상이라든지 예수의 느낌, 메시아 된 이유, 그런 근거를 뽑아내도 충분히 뽑아낼 수 있는 거예요. 숙식을 같이 했거든요. 숙식을. 생활을 같이 했잖아요. 같이했는데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쳐주는 능력을 줬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예수님, 마귀들이 하늘에서 마구 떨어집디다.” 하면 어중간 하면 주님께서 같이 칭찬해 줄만도 한데 마귀가 떨어진 걸 좋아하지 말고 니 이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좋아하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아마 그 이야기 들으면 12제자들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 ‘이미 기록됐는데 뭘 좋아해? 한때 좋으면 되지. 이미 기록됐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취지가 아니거든요.
니가 기록됐다고 진짜 나와 동일한 생각으로 기록됐다고 한다면 귀신이 떨어지는 것을 좋아 안해야 되지요. 그런데 귀신이 떨어지는 걸 좋아하는 걸 보니까 아직도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그 기쁨과 그 기적의 의미를 너희들은 모르고 역시 뱅뱅이 도는 거예요. 그 중심에 있지 못하고 계속 도는 거예요. 처음에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가 좀 난해하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할 때는 예수님께서 12제자와 더불어서 함께 하면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이미 왔다는 징후들을 많이 남겨요. 귀신을 쫓아낸다든지 병을 고친다던지 점점 더 그 징조가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에 맞춰줘요. 맞춰 줘가지고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왔다! 그야말로 존경하는 호산나! 부르도록 그렇게 유도를 했어요. 오병이어도 마찬가지 취지고요. 그렇게 했는데 그럴 때 이 제자들이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야말로 우리 같아도 “야, 우리는 이미 천국 왔고 이제는 높은 자리에 누가 차지하는가?” 국무총리는 니가 하고 누구는 누가하고, 이런 식으로 공과 갈라먹는 식으로 여기에 분주해져요. 여기에 자기는 합격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을 이렇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간격이. 예수님과 밀착됐다고 생각됐는데 이 밀착이 점점 더 간격이 벌어져요. 벌어지다가 나중에 베드로는 아예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잖아요. 단절상태에 들어가 버립니다.
단절상태라는 말은 이렇게 삼년동안 나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기적을 받고 또 너희들이 기적을 베푼다 할지라도 이것이 나에게로 오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갈수록 요한복음 특히 갈수록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와 함께 있다. 그러면 너희들이 나에게 건너올 수 없다는 것은 뭐를 원천적으로 폭로시키는가 하면, 너는 처음부터 아버지께 올 수 없는 자였다는 것을 그동안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느끼지를 못한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이 그 소리 듣고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우리한테 아버지를 보여주시옵소서. 분명히 요한복음 13장에 나오지요. 도마가. “아버지를 보여주면 우리 아버지를 알려주면 제가 알지 않겠습니까?” 라고 할 때 지금 예수님의 뜻은 그거에요. 지금 예수님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요 단절의 늪이에요. 주님은 이 단절의 지층구조, 균열된 늪을 쳐다보고 있는데 제자들은 뭐냐, 늪을 건너뛰어서 예수님과 그리고 같이 있다는 아버지를 상상하고 있는 겁니다. 앞에 있는 예수님과 그 벌어진 균열에 대해서는, 갈라진 그 틈에 대해서는 이건 시답잖게 보는 거예요.
“아이고, 그거 팔짝 뛰면 되지.” 펄쩍 뛰면 된다는 거예요. 펄쩍 뛰어보세요. “목사님, 그럼 그게 몇 센티입니까?” 처음에 제자들이 예수님하고 숙식을 같이 했으니까. 그런데 베드로보고 사탄아! 하고 이상하게 나중에 하니까, 그거 해야 뭐 30Cm 뛰지 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할 때는, 그 십자가 지지 뭐. 그럴 때는 한 35Cm같으면 성경대로 넓이 뛰기 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뛰었다 칩시다. 35Cm 뛰는 순간 60Cm로 순간적으로 벌어져버리면 어디에 빠집니까? 이쪽으로 건너오지 못하고 빠지겠지요. 그리고 또 보니까 주님께서 이야기하니까 ‘아, 35Cm는 오해였고 70Cm 였구나!’ 70Cm해가지고 다리 만들어서 건너가보니까 대번에 2m건너서지요. 이 말은 공관복음이 점점 더 갈 때마다 틈은 점점 더 벌어져가지고 나중에는 십자가라는 균열은 이 세상에 인간의 육신으로는 아무도 알지를 못합니다. 오직 성령이 아니고서야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고린도전서2장의 말씀이 있는 거예요.
벤틀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인데요 총신이고 보수에서는 최고의 조직신학자로 쳐줘요.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가지고 교수들이나 학생들에게 되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접촉점이야기를 했어요. 그 사람이 주장한 게 이겁니다. 저도 신학교 때 그 강의를 많이 들었으니까. 우리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하늘나라를 갈 수 없습니다. 시작은 그렇게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건너올 수 있도록 접촉점을 줬다는 겁니다. 그 접촉점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종교성이라는 거예요. 종교성이라고 하고 그걸 쉽게 말하면 마음속에 하나님이 종교성을 줬다는 겁니다.
그 종교성이 뭐냐, 로마서1장21절을 거론해요.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있잖아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자가 없는데 하나님께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게 문제가 되고 하자가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벤틀 교수는 말하기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았으니까 이제는 뭐만 추가하면 돼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되겠지요.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그들이 피조물을 창조보다 더 섬겼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피조물을 섬기지 말고 창조주를 자기가 알고 있던 그 하나님을 섬기면, 이게 구원이 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는 그런 접촉점을 줬다는 겁니다. 그 벤틀 교수가 이슬람교를 아는지 모르겠어요.
이슬람교 신학이 이겁니다. 이슬람교는 구약을 경전으로 사용하거든요. 구약을 보면 어떤 형상이라고 만들지 말라. 가 있지요. 그래서 이슬람교의 모든 성전에는 형상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구약에 보면 뭡니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고 말씀을 줬지요. 그러면 이슬람 모든 벽이 뭡니까? 그게 말씀입니다. 그 말은 뭐냐, 이슬람은 하나님의 구약의 시킨 대로 그걸 완벽하게 인간의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동원했던 업적이 이슬람교에요. 마호메트가 구약을 신봉해요. 다시 말해서 마호메트는 최후의 결정적 해석자로 등장하지요. 마호메트가. “구약 너희 해석 못하지? 내가 해석해줄게.” 하고 등장한 자가 마호메트에요. 마치 신, 구약을 해석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마지막 때 이만희 선생님을 보고 준비해 놓은 것처럼. 보혜사 되시는 분이 오셔서 등장한 것처럼.
구약에서는 말씀 그대로 우상 섬기지 말아야 돼요. 그 우상이 뭐냐 하면, 피조물의 형상대로 신을 형상한 게 우상이잖아요. 그러면 안하면 되잖아요. 베틀 교수 이야기가 이거에요. 마음속으로 종교심이 있다는 거예요. 접촉점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전서2장에 보면 그 벤틀 교수의 말을 정면으로 사도바울이 거부해버립니다. 저는 옛날에 이 대목을 보고 신학교 때 벤틀 교수 해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야, 하나님 참 고맙게도 전적 타락했다 해놓고는 하나님을 알되, 아는 걸 잘 이용하게 되면 건너올 수 있다. 정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고마운 하나님이구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여기에 고린도전서2장9절의 말씀을 보면서 벤틀 이 사람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뭐냐 하면,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그 다음이 뭡니까?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지요. 인식론 자체가 다 헛짓이지요.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자체도 이것은 바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할 소리겠지요. 차라리 사울처럼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아예 내려가세요. 다메섹으로. 그게 차라리 빨라요.
사울이란 사람이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 죽이려고 가면서 “이쯤 해서 예수 나타날 때가 됐는데.” 이렇게 자꾸 곁눈질했습니까? “아이고, 지금 뭐하는 거야? 해가 갑자기 광채가 비쳐야 될 건데. 아이, 진짜 뭐하시노? 빨리 좀 안 찾아오시고?” 이랬습니까? 성경에 보면 혈기 등등했다. 위를 볼 생각도 안했어요. 자신만만했어요. 왜? 예수는 이단이기 때문에.
자,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생각이 뭐가 포함되어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몰라요? 알아요? 안다는 뜻이에요. 알기 때문에 예수가 이단이에요. 사도바울 그 똑똑한 사람이 나사렛 예수의 이단의 종교에 대해서 연구 안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 연구했잖아요. 그냥 소문만 듣고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 그 작자가 했던 이야기를 다 들었어요. 그 당시에 워낙 유명하니까 다 들었어요. 부활이야기, 내가 길이요 진리고, 다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예수는 뭡니까? 이단이지요. 이단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합니다. 내가 전에는 예수님을 육으로 알았다는 거예요. 아주 문장이 짧아요. 내가 전에는 예수를 육으로 알았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같은 취지입니다. 내가 전에 예수를 육으로 알았다. 육으로 안 사람 중에서 김 동림, 이문열 그리고 많은 기독교에 대해서 썼던 소설가, 시인들,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다. 이런 사람들, 예수가 위대한 분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몰라서 그래요. 예수님 이단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태어났기 때문에 육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존경하고 있는 거예요. 가상적인 예수를 생각해서.
진짜 예수를 알게 되면 예수님은 이단이에요. 줄 곧 이단으로 가세요. 행여 아시겠습니까? 행여 모르잖아요. 주께서 또 문열아, 문열아, 부를지. 성령이 찾아와야 예수님의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고린도전서2장이야기입니다. 내가 전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 설득하는 게 아니다. 고린도전서2장 4절에. 내가 전하는 것은 사람의 말로 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이야기한다 했어요.
제가 오늘 어떤 여자 목사님을 만났다고 아까 이야기했지요. 그 분 하는 이야기를 듣고 저한테 조언을 해 달라 해서 조언을 했어요. 그동안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한 사람이라도 건지려고 사람들에게 납득되는 말을 했지요? 그게 실수네요. 왜 납득되는 말을 했습니까? 분명히 고린도전서2장에서는 그렇게 안 되어 있는데. 이해 못할 말을 해야지요. 이해 못할 말을 해야 이 단절을 건너가는 것은 이 전도하는 내 실력과 내 말발이 아니잖아요. 그럴 때 진정 우리가 무익한 종이라고 말을 해야 되지, 무익한 종이라는 자기 낮춤의 능력으로 사람을 꾀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술책의 술책입니다. 이건 귀신도 알아요.
이렇게 모든 걸 비우고 내려놓으면 이란 책도 2권 나왔다나. 내려놓게 되면 주께서 쓰시겠지. 몽골 가서 전도하겠지. 이거 아니에요. 내려놓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아무도 구원 못 받아요. 주님이 직접 성령으로 주님의 영으로 찾아와줘야 돼요. 아버지가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그래야 성립이 되지요. 그래서 내가 훈수 뜨면 안돼요. 장기도 못 두는 게 무슨 훈수를 떠요. 바둑도 못 두면서 주님 바둑 두는데 훈수하고. 우리가 무슨 수로 압니까? 5분 앞을 모르는데. 우리가 5시간 앞만 알면 우리는 떼 부자 돼요. 주식 사가지고 팔아버리면 부자 된다고요. 우리는 5시간 뒤도 몰라요. 모든 것은 주님의 손에서 지금 부속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매트릭스입니다. 녹색 글자 숫자가 문자가 마구 내려와요. 매트릭스1,2,3 영화 봤어요? 거기 삼위일체 나오고요, 시온 산 나오고 다 나와요. 메시아 나오고 다 나와요. 기독교 용어 다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관복음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뭡니까? 단절을 점점 넓히는 기간이 공생애입니다. 어디까지 말입니까? 십자가까지 말입니다. 그럼 십자가 진 의의가 뭡니까? 예수님이 알고 있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왜 그렇습니까? 고린도후서4장 4절, 모든 인간의 아비가 마귀이기 때문에. 결국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광야에 가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배후 세력을 먼저 만나게 했지요. 그게 누굽니까? 마귀를 만난 거죠. 인간이 아는 현실 속에는 마귀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만난 현실은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 못 지게 하는 것이 전력으로 막는 것이 마귀고요, 십자가를 졌으면 십자가 복음을 못 전하게 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 것이 지금 살아있는 마귀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복음 십자가가 바로 영적 무기고 유일한 영적 쟁투의 논쟁거리가 돼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를 설득해라. 우리를 설득해서 구원해 달라.” 이건 마귀 이야기거든요. 십자가는 그 누구도 설득해서 나는 구원하지 않겠다. 다만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일방적으로 구원하겠다. 그래야 예수님의 공로만 드러나는 그 상태가 바로 주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천국은 바로 그게 천국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 싸움입니다. “나를 제발 설득해 달라.” 설득해버리면, 설득이란 말을 했는데, 접촉점, 설득 다 같은 말인데, 이렇게 돼버리면 예수님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 사이에 공통요소가 다 같이 들어있는 셈이 됩니다. 공통요소가 들어있고 이 공통요소는 죄에 대해서도 오염되지 않은 상태가 유지가 되어야 돼요.
예를 들면 미국사람한테 “그 소금 좀 주세요.” “what?” “소~금?” “아이, 당신 소금 몰라?” “소금이 뭔데?” “소금 sa...” “아, 솔트” “oh! salt” 솔트라는 말을 해야 가지고 오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솔트라는 말이 소금이라 하는 것이 공통적인 단어가 양쪽에 공히 있을 때 비로소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고 이해가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주님이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먹을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마귀가 그걸 전부다 반대로 다 뒤바꿔났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선지자는 어떻게 됩니까? 선지자는 층이 두 층이에요. 천상회의를 참석했잖아요. 미가야는.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 말이죠. 사도바울 같은 경우. 신이 임하니까 본인의 것과 신이 임한 것이 같이 겹쳐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도 어리둥절한 거죠. 특히 어린 사무엘. 목소리가 꼭 엘리제사장 목소리에요. “선지자님, 왜 불렀습니까?” “안 불렀는데.” “자거라.” “예” 사무엘이 “왜 불렀습니까?” “나, 안 불렀어.” “자거라.” “분명히 불러놓고.” 또 세 번째 불렀어요. “불렀습니까?” 그 때 엘리제사장이 ‘아하!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과 함께 있구나!’ 그런데 그 어린 사무엘은 그걸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너무 어려서. 아무리 천재라도 몰라요.
그걸 우회적으로 어른 엘리제사장을 통해서 하지요. 엘리제사장이 묻습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무슨 이야기하더냐?”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엘리제사장은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의 받은 계시는 어린 사무엘이 갖고 있어요.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이 주신 걸 모르고 어른 엘리제사장이 준 걸로 알고. 둘이 만나게 하지요. 둘이 만나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엘리제사장님 망한답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이런 소리해서.” “아니, 미안해하지 마. 세 번씩 부른 하나님의 뜻이지. 망하면 망해야지. 끊어질 수밖에 없지요.” 그럴 때 어린 사무엘이 “야, 오늘도 내 말발 좋았다.” 이런 소리를 못하지요. 자기는 완전히 주의 일에 소외당한 입장에서 참여하기 때문에. 참 말도 어렵다. 소외와 참여는 반대말입니다.
소외당한 입장에 서면서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발길질 당하면서도 주의 일은 다하고 있는 거예요. 참, 이 대립되는 말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할 수 없어요. 그냥 저는 순회합니다. 맨 날 오해하면서 돌아다닐 수밖에 없지요. 그 단절.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는 아버지와의 단절 때문에 즐거운 예수님과 바이, 바이 할 수밖에 없어요. 단절할 수밖에 없어요. 서로 같은 평지에 있었는데 거기에 지진이 일어난 거예요. 네팔처럼 지진이 일어나는 거예요. 지진이 일어나니까 이쪽은 이쪽 편에 아담 편에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 안, 예수님 안. 쫙 갈라졌어요. 성령이 오니까 이쪽에 있는 인간을 예수 안으로 집어넣는데, 갈라진 게 뭐냐, 십자가로 갈라졌기 때문에 십자가 죽었다는 조건에 충족될 때만 이쪽으로 넘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쪽에 넘어온 사람의 특징의 하나가 전부다 창 자국, 못 자국 다 각자 갖고 있어요. 예수님만 갖고 있는 게 아니고 다 갖고 있어요. 예수님의 흔적을 다 갖고 있어요. 사도바울이 나는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다. 나는 흔적만을 자랑한다. 내가 죄인인 것만 자랑하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막 살아왔던 것만 자랑해요. 피아노 치는 막 산 것, 꽃꽂이 한 막 산 것, 교회 청소한 그 막살음. 막 산다하니까 오해들 했어요. 그게 아니고 성경 공부하는 막살음, 전부다 막 산거거든요. 그거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랑하고 싶겠어요. 아담의 그릇이기 때문에 얼마나 자기 자랑하고 싶겠어요. 그런 것들이 바로 십자가를 드러내는 소외된 참여의 증거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자,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사도바울까지 전부다 해석이 다 끝난 셈이 되죠. 십자가를 들썩 떼어놓으면 안 됩니다. 십자가 건너서 이젠 부활로! 이러면 안돼요. 항상 십자가를 껴안는 그 상태를 부활상태라고 해요. 뭐 십자가 건너서! 6.25전쟁 났습니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뭘 앞으로 가? 십자가 끌고 가야지. 십자가를 장고처럼. 관 들고 관속에 기관총 넣고. 20대에 봤어요. 예수님을 관속에 십자가를 끌면서 십자가만 증거하고, 이거 말고 다른 거 증거 하면 나라 할지라도 저주받는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어요. 그게 십자가에요.
설명 들어보면 어려운 거 없어요.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안 해요? 왜 안할까요? 눈에 안 보이는 주님보다 눈에 보이는 교인들이 구름처럼 운집한 것을 보고 그 군중이 목사의 야심이고 야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외로운 건 싫어. 우리 마누라와 둘이 하는 목회는 싫어. 수천 명이 그리워. 그게 그리워. 광야에서 두 번째 시험이에요. 뛰어내려보세요.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오병이어만 해도 5000명 인기 확 올라갔는데 뛰어내렸는데 안 다쳐보세요. 군중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또 보여주세요. 또 보여주세요.” “또 보여주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렇게 보여준 것이 바로 결국은 뭡니까? 세 번째 시험에 보면 그게 누구의 종이에요?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 그렇게 종 짓을 한 거예요. “여러분, 뭘 원합니까? 원하는 거 드리겠습니다. 기적? 기적 드리겠습니다.” 진짜 기적은요, 내가 기적 받을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아는 그것, 그게 진짜 기적이에요.
유대인들은 기적은 어디서 오느냐, 기적은 바로 법에서 와요. 법을 지켰을 때에 기적이 온다는 겁니다. 납득되지요. 하나님의 기적은 어디서 온다? 내가 법을 지켰을 때,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하나님께서 “아이고, 하나 먹어라.” 해서 보너스를 손에 쥐어주는 거예요. 이걸 유대인 방법으로 하면 유대인은 법이 지켜질 때에 그 법에서 뭐가 나오는가? 의가 나와요. 의가 나올 때 의에서 뭐가 나온다? 기적이 나오지요. 유대인보고 이 증거를 찾으라 하면 증거를 구약 전체에서 다 뽑아냅니다. 대표적인 게 뭐냐 하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 드리면서 그 다음에 뭐했지요? 자기의 건강도 생각 안하고 원수가 망하는 것도 원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의 재물도 원하지 안했다는 법을 지켰더니만 하나님께서 구하지 않은 것까지 덤으로 줬으니까 그 방정식을 인간들이 놓칠 수가 있습니까? 특히 일천번제를 드렸다는데. 일천번제가 뭐냐 하면, 역대 하에 보면 한꺼번에 일천 제물을 드리는 거예요. 하루치 그것도 새벽마다 일천 번 세 번마다 나누어서 드리는 게 어디 주님이 계주도 아니고 주님이 일수놀이 합니까? 시장에서 “아줌마, 도장 찍어야지.” “오야, 다음에 돈 잘 줄게. 올 가을에 딸 시집보내자. 목돈 타고 조금씩 갚아 나가자.” 일수놀이 해요? 일수놀이 특징이 뭐냐 하면, 장부가 작다는 거예요. 손바닥만 하지요. 이것은 뭐 일천번제가 교회 올 때마다 천 원씩 내요? 천 원씩 내면 그건 양반이에요. 올 때마다 만원씩 내야 돼. 일천 번. 그럼 낼 때마다 뭘 생각하겠어요? 시간은 흐른다 했잖아요. 시간은 흐르니까 시간 끝났을 때 나오는 그 성과를 노려요.
사람은 언제 행복한 줄 알아요? 사람은 가졌다고 행복한 게 아니에요. 사람은 꿈과 희망이 클 때 가장 행복하고 꿈과 희망이 적어지면 불행해져요. 뭔가 잘됐잖아요. 잠시 기쁘지 그 다음 허탈해져요. 그래서 인간은 또 욕심을 부려서 꿈과 희망의 범주를 넓혀야 돼요. 폭을 넓혀야 돼요. 넓힌 만큼 성공한 입이 미소가 절로 나요. “아, 기분 좋다.” 사업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주장하는 거예요. 왜, 꿈과 희망을 넓힌 만큼 되던 안 되든 이미 넓혔다는 그 자체가 행복하기 때문에. 애가 장학금 받았다면서요? 잠시 행복한데 나중에 애가 스카우트 돼서 삼성그룹에 가면 더 좋아하는 거예요. 계속 꿈과 희망을 갖는 거예요.
이런 것은 초등학교 애들도 생각해요. 초등학교 애들이 컴퓨터 게임에 빠지지요. 이유가 뭡니까? 거기에 뭐가 나와 있어요? 순위가 나와 있어요. 요 게임 전 세계 순위, 25550KD 1등, 자기는 찾지도 못해요. 정신없이 매달립니다. 빨리 10등 안에 들기 위해서. 애들만 그런 줄 알아요? 스마트폰해가지고 테트리스게임하고 전부다 그거하고 있어요.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스스로 이 각박한 세상에서 잠시나마 마약처럼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법을 지킴으로서 기적을 봤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뭐냐 하면, 유대인들은 법을 지켜서 기적을 봤는데, 제자들은 놀래버렸어요. 기적부터 받고 시작을 하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것은 자기들은 자동적으로 합격이라 들지 않겠습니까? 병고치고 하늘에서 귀신이 떨어지고 세상에 이런 횡재를 했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다 떠나버렸어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로마서7장을 보면, 외부에 있는 법을 지키면 외부적으로 상황이 원하는 상황으로 바뀌어져서 사람들은 원하는 게 뭐냐 “상황만 좋으면, 환경만 좋으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잘 섬기겠습니다.” 가 인간이 갖고 있는 잘못된 착각입니다.
에덴동산이 그리 좋아도 선악과 때문에 망한 걸 모르고 “지금보다 살만하고 여유 있으면 얼마든지 구제하고 남한테 인자함을 베풀 수 있는데 하도 사는 게 내 입에 풀칠도 못했기 때문에 안 됩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첫 번째 시험이에요. “니가 지금 배고파하는데 너부터 우선 돌이 떡 되게 해라.” 유대 광야에서. 돌이 떡 되게 해라. 유대광야가 어디 있느냐 하면, 유다는 건너오고 난 뒤에는 유대광야에요. 유대광야에서 조금 내려가면 예루살렘이고, 조금 더 내려가면 여리고 있고, 유대광야 돌들이 있어요. 그게 다큐멘터리에 보면 나와요.
그 돌들이 꼭 빵처럼 생겼다고요. 그 돌들이 떡 되게 해라. 우선 먹어야 일을 하지. 사탄이 예수님한테 그렇게 다뤘던 방법은 그동안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을 그동안 그렇게 인간을 다뤄왔다는 그 방식을 동일하게 예수님에게 적용시킨 겁니다. 사탄인 나는 평소에 사람을 다룰 때 이렇게 다뤄왔다는 거예요. 뭐? 일단 배가 불러야 주의 일을 하던지 뭐를 하던지 할 게 아니냐, 라는 멘트를 가지고 그동안 인간들을 설득해 온 거예요.
거기에서 우리가 반발할 수 있습니까? 맞는 말이잖아요. 그렇지요. 에너지가 있어야 세포가 움직일 게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오히려 더 엉뚱하지요.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뭐냐 하면, 사탄은 니가 살아야 니가 주의 일을 한다고 너에 대해서 주체를 하는데, 예수님은 주체를 말씀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말씀에다가 주체를 옮겨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그 말씀에 옮기니까 사탄이 그걸 가지고 두 번째 시험을 한 거예요. “그렇지. 말씀이지. 그러니까 말씀대로 니가 하게 되면 내가 니 메시아라는 걸 인정하게 되고 사람들은 추종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네가 기대했던 하나님의 메시야로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니 작업은 드디어 성사되잖아. 해라.” 이런 식으로 그동안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을 그런 식으로 현혹해 온 거예요.
그러니까 두 번째 시험은 결국은 목회자, 목사들에게 그렇게 한 겁니다. “주님이여, 목회하려고 하는데 기적만 베풀어주시면 주께 원하는 성도들을 많이 모아서 주께 바치겠습니다.” 라는 사고방식이 있는 사람은 현재 마귀의 두 번째 시험에 빠진 사람이에요. 목사만 그렇겠어요? 장로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자기가 세운 교회에 숫자 적어보세요. 장로들도 환장하지요.
그런데 로마서7장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 법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고 기적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니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런 기적들은 아무 소용없다. 이게 로마서7장입니다. “니 속에 죄 들어있다. 모르겠지?” “몰랐는데요.” “율법 찾아간다.” 율법 찾아가게 되면 율법이 “아이고, 율법이다!” 반기는 손이 머쓱해져요. 손님 오기로 되어있는데 딩동! “아 손님이로구나!” “아이고, 반갑습니다.” 하고 문열어주니까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경찰이 와가지고 “아드님을 현행범으로 체포하겠습니다.” 하면 경찰이 손님인 줄 알고 반기다가 내 아들이 범죄 한 줄도 몰랐지요. 엄마는. 그런데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두 시간 전에 사람을 찔러 죽였어. 그걸 잡고 찾아와서 경찰이 신고 돼가지고 경찰이 와가지고 내 아들 잡아갈 때 엄마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역시 우리나라 경찰은 참 훌륭해.” 이렇게 합니까? “누구야? 내 아들 못 잡아가. 저리가!” 이렇게 밀어내는 거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법을 지키면 의가 생기고 의가 생기면 뭘 받는다? 행운을, 하나님의 기적을 보너스로 받는다. 이걸 교회에서는 상급이라 하잖아요.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고 보너스 받는 것은 법 지키면 된다. 그 법을 지키면 되는 줄 아는데 이 법이 로마서7장에는 법이 어떻게 됩니까? 법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야 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진 작에 죽어도, 차에 받혀서 개에 바쳐서 약물중독으로 죽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 정도로 죄인인 것을 우리 속에 이런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겁니다.
벤틀 교수의 접촉점, 접촉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가 조직신학을 만들어내요. 어떤 조직신학? “납득해주시면 믿겠습니다.” 이런 조직신학을 만들어내는데 하여튼 그런 신학들이 있어요. 인간에게는. 있는데 그게 아니고 사탄이 들어있다니까. 사탄이. 일곱 귀신이 들어있어요. 우리는 귀신들렸는지 몰랐지요. 우리는 양심껏 산다고 생각했지요. 그놈의 양심, 세상에 있는 역사 철학을 보게 되면, 양심가지고 의로 쌓는 역사가 철학의 역사입니다. 초창기에 그리스철학에서는 스토아학파, 평정심을 통해서 니가 영혼을 자유케 한다, 나오지요.
하나님께서는 전적 타락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형상, 의와 거룩한 것이 잠자는 상태지 그걸 이렇게 자극 주게 되면 다시 양심과 의는 깨어나서 “주여, 그동안 제가 몰랐습니다.” 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찾아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너무나 무게가 무거워서 눌려서 그게 안 된다면 패자부활전을 준비해놨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연옥설이에요. 연옥설인데, 천주교 연옥 설은 죽고 난 뒤에 연옥 가는 게 천주교 연옥설이고 개신교 연옥 설은 뭐냐 하면, 예수님 재림할 때 또는 승천하고 난 뒤에 휴거하고 난 뒤에 1차 휴거 난 뒤에 2차 휴거 남은 가기 전에 중간상태에 7년 환난 동안에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원리입니다. “지가 고생 많이 하면 잘못했다고 하겠지.” 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요한계시록16장11절에 보면 이리 되어있어요. 그들이 환란을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더 하나님을 혐오하게 되어있다, 이리 되어있어요. 아프니까 더 욕을 하게 되어있어요.
사람이 고생하면 예수 믿는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만 더 키워요. 한만. 거짓말이야 하며 테이프 막 틀러놓고.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선교사로 가가지고 북한에 들어가서 잡히고 난 뒤에는 나는 이렇게 북한이 잘 사는 줄을 몰랐다고 생방송을 하고. 도대체 누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을 이야기합니까? 누가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강하다고 자부합니까? 인간 세상은 시간이 흐르는 이상은 전부다 치매현상입니다.
나중에 다 깨어지고 성령에 의해서 다 깨어지고 난 뒤에 정말 구원은 단번에 되는 것이지 내가 용쓰고 그동안 고생한 업적들이 많아서 내가 신앙 책을 많이 내서 믿음이 더 증가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의로운 실적만 누적될 뿐이에요. 마일리지만 쌓일 뿐이지요. 그 마일리지 대한항공 한마디 해버리면 다 날아갑니다. “나 마일리지 인정하지 않습니다.”하면 다 끝납니다. 항공 마일리지 백날 쌓아도 대한항공 법 바뀌었습니다. 내규가 바뀌었습니다. 끝납니다.
70절 다시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열둘 중에 가룟유다가 마귀라고 해석하시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열둘을 하나로 봐요. 하나로 움직이는 하나의 단체로 봐요. 단체 속에 마귀를 집어넣었다는 말은 나머지 열한명이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은 하나로 못 당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를 못 당해요.
<불편한 여정> 책에 나오지요. 포카 카드 있잖아요. 카드놀이 할 때에 피라미드 하는 게임 있지요. 밑에는 4장 그 다음에는 3장, 2장 최후에 1장, 이렇게 다방에서 심심할 때 하잖아요. 성냥개비 쌓고. 요거 하나 빼버리세요. 나는 목사다. 나는 수천 명의 목사다. 이렇게 했는데 성추행 한마디에 다 무너져요. 한 번에 확 다 가버려요. 그 명성, 명예. 결국 이건 뭡니까? 한국에서 자살. 가룟유다가 왜 자살했어요? 가룟유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할 때 자살하자, 이렇게 자살했습니까? 처음부터 가룟유다가 뽑힐 때마다 “주여, 자살하겠습니다.”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에요. 본인이 본인을 몰라요. 오늘의 내용의 핵심입니다.
나는 나를 모른다. 그럼 누가 알아요? 아버지 쪽에 계신 분이 알겠지요. 아버지도 알고 아들은 아는데 막상 본인은 모르지요. 나는 모르고 주님은 알고, 그래서 십자가외에는 다른 복음은 없는 거예요. 십자가 능력으로 코 꾀어서 가는 거예요. 우리는 그동안 모든 행동은 마치 내가 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나쁜 짓은 멀리하고 말씀 지켜서 영광 돌리자, 우리가 기껏 챙기는 게 그거에요. 그거 한 방에 훅 갑니다. 아무리 마일리지 쌓아도 한 방에 훅 가게 되면 본인이 믿음 없음을 들통 났을 때는 본인이 너무나 초라해서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자기의 성질에 합당해요. 그래서 가룟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죽었으니까 가룟유다는 양심적으로 살았으니까 천국 갔습니까? 사람의 행동으로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자살 문제가 나와서 분명히 하지만, 그럼 자살한다고 지옥 갑니까? 자살한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자살 안한다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천국은 주께서 사랑을 주지 않으면 지옥가고 사랑 주면 누가 뭐래도 구원 받아요. 아니 자살해도 구원받습니까? 누가 그걸 자살이라고 누가 그걸 규정했느냐가 문제거든요. 그걸 규정하는 잣대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주님한테 나왔습니까? 어디서 나왔어요? 인간들에게 나왔지요. 니가 뭘 아는데? 주님이 알고 있는 해답을 니가 자살에서 뭘 알아? 압니다. 뭘 알아? 몰라? “자살을 하면 지옥 갑니다.” 가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합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괜히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살 안해야지 라는 그런 스스로 법을 만들도록 유도해서는 안 되지요. 가룟유다가 자살했기 때문에 지옥 간다, 하니까 “그러면 자살 안하면 천당 갑니까?” 법을 자꾸 만들지 마세요. 그 법을 만들겠다는 것은 어떤 처신을 잘하게 되면 구원받는데 유리하다는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발휘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안돼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택했다는 겁니다. 열둘을 택했잖아요. 그냥 놀아. 그냥 막 살아. 열두 명 택했으니까 너희들은 나한테 오지를 못했지만, 나를 알지 못하지만 택함은 유효하잖아요. 마귀로 택한 것은 지옥가면 되고 마귀로 택하지 않으면 천국 오면 되고 그 소관은 누구한테 있다? 주님한테 있다는 것을 그들이 나중에 자기 자리로 갔을 때, 성령이 왔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되거든요.
마지막으로 요한복음2장22절 봅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보세요. 전에는 왜 몰라요? 왜 모릅니까?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알 수가 있습니까? 본인도 모르는데 본인부터 출발해서 상대방 예수님을 타인을 이해할 때 그 이해는 본인에서 출발했던 이해잖아요. 본인이 이해했던 그것과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부활의 영을 받았잖아요. 출발점이 어디에요? 본인이 아니고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부터 나왔던 이해가 그들에게 도달되니까 그들은 뭐와 뭐가 어긋났다는 것을 알지요.
우리가 이해했다는 것은 잘못된 이해다, 라고 이해한 그것이 성령 받은 자의 이해지요. “아이고, 몰랐습니다.” 이게 성령 받은 자의 모습이에요. “이것마저 은혜인 줄 몰랐습니다. 내 몸이 아픈 것도 은혜인 줄 몰랐습니다.”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자의 모습이라니까요. “니가 그것밖에 모르지. 앞으로 더 알게 많아. 기다려봐~~ 앞으로 모르는 것도 더 캐낼 테니까. 내가 너를 부를 때까지 계속 너는 살아야 돼!” 좀 더 살게 되면, “이것까지라도 몰랐습니다.” 그러면 시간에 의해서 점점 늘어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단번에 다 이루어졌던 것이 조금씩 우리에게 적용이 되지요. 끝에는 “에이, 단번에 다 하셨잖아요. 주님이 단번에 다 하셨으면서. 나한테 조금씩, 조금씩 알려줘. 단번에 다 이룬 걸 가지고.” 그러면 주님께서 “내가 전에 단번에 이루었다고 했잖아. 니가 이해도가 나빠 가지고 그 단번을 또 오해해가지고 단번에 다했구나!” 이렇게 오해하다가 단번에 다 알았다! 까불어가지고 또 넘어졌지만. 이제 나중에 다 살아보니까 정말 단번이에요. 정말 단번에. 내가 한 거 아무것도 없이. 정말 주께서 온전히 다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따져보니까 요한복음6장 70절 말씀이 또 기억이 나는 거예요. 성령 받고 난 뒤에 내가 너희를 뭐했나니? 택했나니. 내가 너희를 택했다. 이것이 나중에 발전해야 돼요. 어디로 발전해야 되느냐 하면, 요한복음15장16절로 발전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 말 하신 것은 그 전에 택했다는 것을 이미 그동안 충분하게 오해했다는 그 균열이 벌어졌거든요. 벌어지니까 점점 더 균열을 벌어지게 하시면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했나니, 요한일서4장10절에 나오지요.
“창세전부터 주께서 다 하셨네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전부터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해놓으시고 자비의 그릇으로 작정하시고 자비의 그릇으로 만들어놓으시고, 어떤 이는 진노 받으라고 진노의 그릇을 만든 것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가 찝찝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도리어 감격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