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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강의-구상적 현실 1504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6. 11. 10:10

2015-04-03 23:50:51 조회 : 304         
구상적 현실 150403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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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4.♡.134.30) 15-04-07 09:59 
20150403a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구상적 현실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34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돌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라고 돼있죠.

하나님이 그냥 아무 일도 안 하고 계신 게 아니고 일을 꾸미고 있고 일을 실천에 옮기잖아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일을 하다보니까 뭘 놓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이 우리가 속해있는 현실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려요.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사람들(불신자들이죠)이 이런 이야기합니다.

세상은 옛날처럼 그대로 있다. 대자연은 옛날처럼 그대로 있다. 동양철학이 그렇잖아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대로 있어 보이지 사실은 하나님의 부지런함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대로 있어 보인다고 여겼던 그들이(베드로후서 3장 이야기입니다) 물로써 심판받을 줄은 그들은 생각도 못했지요. 왜? 물로써 심판받기 그전부터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봄여름가을겨울, 봄여름가을겨울 그대로 있었잖아요. 안정된 대자연 속에서 그들은 먹고 마시고. 이것은 노아 때 예수님 이야기한대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냥 일상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사는 게 그냥 사는 것으로 여긴 거예요.

그럼 하나님은?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점잖은 할아버지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하나님은 쉬고 계시고 지상에 인간들은 부지런 떨면서 자기 밥벌이하고 있고. 그게 세상이지 뭐가 세상이냐고 생각하는데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하나님 쪽에서 부지런히 일을 하시는 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해야 돼요. 도대체 이 현실, 세상이라는 게 누구 좋으라고 있는 거냐? 우리는 우리 좋으라고 현실, 대자연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오해하는데 출애굽기 34장뿐만 아니고 성경 전체는 이야기하기를 이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물로써 현실이 지금 이뤄지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그걸 모르면 어떻게 되느냐? 모르면 베드로후서 3장 말씀처럼, 모르면 멸망이지요. 특히 노아 방주를 만들면서 약간은 경악스러운 현상은 방주가 굉장히 큰 데 거기에 한 가족만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다 죽여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에요. 숫자의 많은 쪽에 하나님은 관심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르면 필히 멸망 받는 내용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선 일을 시작하시고 꾸미는 내용 안에 이런 자는 멸망한다는 내용이 같이 들어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멸망이 필수 내용으로 들어가 있어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멸망의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죠. 멸망의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은 흔히 말해서 하나님 하시는 일을 믿습니다. 그걸 줄이면 하나님 믿습니다. 나의 존재를? 아니요.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 계시면서 꾸역꾸역 하시는 그 일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내 하는 일을 알아?” “압니다.” “무슨 일을 했는데?” “출애굽기 34장에 모세한테 돌판 깎아 만들라고 했잖아요. 산 밑에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묻지요. “그래. 만들라고 지시했지. 그 의미를 아느냐?” 돌판 깎아 만들라는 그 의미를 아느냐는 말입니다. 성도는 알게 돼요. 왜 성도는 아느냐 하면, 성도는 성경을 볼 때 자기의 이성과 지성으로 보는 게 아니고 뭔가 외부적으로 추가적으로 능력이 임해서 성경을 보게 돼있습니다.

추가적으로 임한 것을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성경은 문자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읽는다고 돼있거든요. 예수님의 영을 고린도후서에서는 자유의 영이라고 해요. 자유의 영에서 자유란 마음대로 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탈출에 성공했다. 벗어났다는 의미의 자유입니다. 어떤 자유냐 하면, 죄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지옥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벌써 몇 가지입니까? 저주로부터, 같은 이야기에요. 죽음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심판으로부터. 여기서부터 벗어난 그 능력을 고린도후서 3장에서 자유의 성령이라고 한 겁니다.

자유의 성령이 오게 되면 자유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돼있거든요. 그리스도의 영을 받고 다른 사람은 영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국어책 보듯이 신문 보듯이 역사책, 고고학 자료 보듯이 도서관에서 책 보듯이 인터넷에서 뭔가 자료 찾기 위해서 정보 얻기 위해서 보는 반면에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으며, 성령을 받기 전에 어느 곳에서 살았으며,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바로 그곳에서 벗어나서 어느 곳에 지금 놓여있는가, 어느 곳 안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을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내가 무엇을 하느냐는 여기서 날아가 버려요. 왜냐하면 인간은 뭘 행해서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행했던 그 자리에 주님이 도대체 나에게 뭘 했는지가 들어가지요. 주님께서 나에게 뭘 하셨기에 내가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세계에서 벗어났습니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 내용은 방금 제가 요약해드린 이것이 성경해석을 이렇게 한다면 성경 내용 속에는 필히 뭐가 전제돼있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받지 못해서 인간들끼리 그냥 그대로 살아가는 모양새나 삶의 모습들이 성경에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당연히 나오지요. 들어 있어야 내가 이렇게 살았던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3장에서 자유하는 영은 언제 오느냐 하면 구약 때 오는 게 아닙니다. 신약 때 온단 말이죠. 신약 때 성령을 받은 사람이 나타났다는 말은 구약 전체의 내용은 무슨 뜻일까요? 구약 전체의 내용은 성령을 받기 전에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지요. 물론 거기에는 애굽 사람들처럼 아예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던 사람도 있지만 주 내용은 하나님과 동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벌어진 일들이 기록된 것이 구약 성경이 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하면,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곡해와 오해 덩어리로 계속 살아갔겠지요. 성령을 안 받았다는 말은 어디에 묶여있다는 거예요. 죄와 저주와 심판과 세상과 욕심에 묶여있는 상태에서 성령을 받게 되면 자유하는 영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났지만 성령을 안 받았다는 말은 거기에 묶여있으면서 묶여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그 안목으로 본 거예요. 자연적으로 여기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오해가 생기고 의견의 충돌이 일어나겠지요. 충돌한 것을 고스란히 하나도 버리지 않고 구약 성경에 이스라엘 역사란 이름으로 깔아놓은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뭘 발견하다고 했습니까? 내가 옛날에는 저렇게 살았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과 결부하게 되면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모든 실수와 오해는 결국 내가 성령을 받지 않았으면 나도 저렇게 오해하고 곡해할 수밖에 없는 그냥 인간들의 타고난 자연스러운 본성에 입각한 하나님 믿기를, 하나님 사랑하기,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물론 오해  잘못된 거예요. 어쨌든 잘못된 모양새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지난번에 한 것, 모세가 돌 판을 내려왔지만 산 밑에 있는 사람들은 돌 판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애굽에서 섬기던 송아지 모습을 연상해서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매개물로 신을 찾아가는 중간 매개물로, 모세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산에 올라간 지 삼사일이면 올 줄 알았는데 40일 지나도 안 오니까 이 사람은 분명히 죽었다. 왜? 아무것도 가져간 게 없어요. 시내 산꼭대기는 풀도 안 자라요. 그리고 화산 터지는 것처럼 무서운데 거기에 홀로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가진 게 없거든요. 하루 이틀이라면 견디겠지만 40일이라면 이미 죽은 자에요.

하지만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갔으니까 그들 마음속에 신이 있겠지요. 그 신을 표상한다고 하지요. 자기를 표현하는 거예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여,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여, 우리가 하나님을 이런 매개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래서 만들었어요. 모세가 40일 동안 안 내려온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 마음속에 있는 신의 모습을 실제로 물상이라 하는데 물체로서 형상화 할 때까지 대기하는 거예요. 끄집어내봐라. 너의 개념을 구체화된 형상으로 만들어봐라. 아주 자비로운 소의 형상이지요.

그걸 오늘날 우리들과 교회에 적용시켜보면, 예를 들어서 목사님이 만약에 행방불명되었다. 교통사고 났는지 가출해서 신고해도 안 들어온다든지 40일 지났다. 40일 지나니까 교회가 돌아가면서 설교하기로 했다고 칩시다. 본인이 설교 안 할 때는 몰랐는데 설교하면서 본인에 잠재돼있던 평소에 예수에 대한 의견, 하나님에 대한 생각, 의식이 그대로 나오겠지요.

그렇게 예배드리고 있는데 마침 40일 만에 뒤에서 허름한 옷에다 수염은 길게 자라고 양 손에 돌판 들고 하나님 뵙고 왔다고 등장했을 때 이제 오십니까? 우리도 걱정했습니다. 안 그래도 가출신고 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에게서 가져온 돌 판을 모세가 깨뜨리잖아요. 깨뜨린 의미가 뭐예요? 이게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바로 내가 없을 때 하나님과 너희들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한 모세가 없을 때 인간은 우상을 유발하는 우상을 만들어내는 우상숭배자로 이미 잠재력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적절하게 사용하신 거예요. 훌륭하다고 사용하신 게 아니고 온 인류를 대변해서 네 속에 들어있는 걸 끄집어내봐라. 끄집어내보니까 우상 나왔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 우상이 신약에 오게 되면 바로 마귀가 집어넣어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마귀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게 신약에서 확정된 사실입니다.

아까 제가 성령, 자유로운 영을 받으면 마귀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죄로부터 벗어난다고 했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그냥 그걸 받아들이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요즘 의료보험 체제가 허술한지 본인이 진찰을 받지도 않고 식구 시켜서 약 타려고 병원에 가는 사람들 많이 있데요. 병원도 시간 절약하고 의료보험 나오니까 병원도 이익이고. 진찰도 안 받고 약만 타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그냥 교회 와서 신약성경, 신약을 그냥 약으로 처방 받아 먹는 거예요. 십자가 먹고, 예수 피 그냥 먹는 거예요. 이게 어디 쓰는 물건인지 몰라요.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본인이 자기를 모르니까. 바르라는 무좀약을 먹으면 돼요? 안 되잖아요.

십자가를 어디 쓰는지 물건인지 몰라요. 십자가는 죄를 씻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죄는 뭐냐? 모르지요.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어요. 얘와 같이 산다고 얼마나 착실한데 착실한 나를 죄인이라고 하면 섭섭한 이야기지요. 뭐가 죄인이에요. 벚꽃 펴서 벚꽃구경하는 게 죄입니까? 봄바람 휘날리며~ 노래 부르면서 벚꽃구경하는 게 죄에요? 본인은 죄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죄인 것과 죄 아닌 것을 자꾸 구분 짓는단 말이죠. 구분 짓는 자체가 죄가 돼요.

피곤하시기 전에 중요한 것 빨리 해치워야지.
 
최초의 법은 이겁니다. 금지였어요. 하지 말라는 겁니다. 맞지요? 창세기 2장에. 최초의 법은 지키라는 게 아니라 하지 마라에요. 이것은 뭘 의미하냐 하면, 너는 한계에 놓여져 있어야 그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인간에게 뭐라고 합니까? 너한테 금지하거나 한계 있거든 그걸 넘어서란 말이죠. 휴전선 금 그어놓으면 괜히 술 먹고 넘어가고 싶어요. 금이 있으니까.

옛날 국민학교 때 책상에 금을 그어놓잖아요. 오학년 때 반에서 제일 예쁜 얘와 짝이 되었는데 그렇게 친하게 지내다가 시험 때만 되면 막아버리는 거예요. 못 보도록. 책받침, 그것도 이상한 얼룩덜룩한 책받침으로 막고 못 보게 만들죠. 터놓으면 궁금한 게 없는데 막아놓으면 궁금해요. 재미있는 것은 여자들이 옷 갈아입는 걸 남자들이 보고 싶어 해요. 옷 갈아입고 비키니로 나오면 별로 안 보고 싶어요. 비키니가 더 벗었는데 그건 별로에요.

금지하니까 자기가 한계 놓여있는 것을 답답해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걸 문제 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설교할 때 사람들이 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는 이유가, 우상이란 말은 하나님이나 우상이라고 했지 인간은 자기 스스로 우상이란 말을 하지 않아요. 신은 신이지 무슨 우상이 있어요. 우상이라고 판정을 내릴 분은 참 신에 한해서 판정을 내리지 네가 믿는 신은 우상이라고 하면 그 믿는 사람은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알라 신은 우상이라고 하면 알라 신 믿는 사람들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건 네 입장이고, 이러잖아요.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이 바보기 때문에 믿어요. 어수룩하기 때문에 믿어요. 그 이야기를 하겠어요. 이게 오늘날 하나님 믿는 것과 관계있어요. 인간이 신을 믿을 때 신을 멀찍이 떼어 놔요. 그 다음에 신과 인간 사이에 자기가 투자할 수 있는 행위들이 가미되는 여유와 그런 간격이 있을 때 신을 믿어요. 남녀 간에 이야기할 때 멀찍이 떼어 놓고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코앞에 두고 그러면 뽀뽀하는 것이지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입을 맞대고 이게 뭐야. 이야기할 때는 떨어져 있어야 떨어진 간격에 자기의 의미와 가치를 깔아놓을 수 있다니까요.

하나님을 코앞에 두면 우리는 무서워서 못 견뎌요. 그러나 하나님을 멀찍이 두면 어떻습니까? 하나도 안 무서워요. 하나님이 있든 말든 봄바람 휘날리며~ 벚꽃놀이 간다니까요. 교회 안 오고 진해 가 있고. 발에 밟힐 정도로 놀려가 있는 거예요. 왜? 멀찍이 떨어져있으면 떨어진 그 간격이 전부 내 것이에요. 내 가치와 의미를 반짝반짝 빛나게 만드는 그런 거리가 있는 거예요.

이 간격이 매개 또는 중개, 중보. 그러니까 신을 믿을 때 내가 나한테 가치와 의미 있는 것을 생색내서 던져놓고 이걸 통해서 “신이시여, 내 기쁨을 받아주옵소서.” 하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입니다. 구약 창세기 4장 이야기하는데 이게 어떻습니까? 들어보니 창세기 4장에서 끝날 이야기가 아니지요.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다니고 예배하는 마음자세, 평소에 생활자세로 딱 우상숭배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을 바보라서 믿느냐 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바보인지 이 행위를 넘어오지 못해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하나님이 금지했는데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누가 금지하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이 넘어오지 말라고 금을 그었어요. “하나님, 넘어오면 안 됩니다.”

강아지 키우면서 사료를 거실 바깥에 놓고 여기서 먹고 침대에 올라오면 안 돼! 이건 누구의 결정입니까? 주인의 결정이죠.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그 강아지가 지 말 잘 들으면 예쁘잖아요. 그게 바로 하나님 믿기라니까요. 하나님이 귀여움 받고, 존경 받고, 사랑 받으려면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인간이 넘어오지 말라고 하면 넘어오지 말아야 돼요.

며느리한테 시어머니가 사랑받으려면 전화하고 찾아와야 돼요. 그냥 며느리 사적 영역에 침범하면 안 됩니다. 아파트 비밀번호 절대로 알려주면 안 돼요. 그냥 막 들어오면 안 돼요. 경비실에 김치 갖다 놨다. 경비실에서 끝나야 돼요. 김치 갖다 놓고 돌아가야 돼요. 다만 시어머니가 내 영역에 들어올 경우는 얘가 한 살 때 키워줄 때 용돈 드리고. 얘 크고 난 뒤에는 어머니한테는 교육받을 것 없습니다. 맨날 단 것만 주고. 어머닌 촌에 가시고.

그런데 보세요. 명절 아니라도 부모님 집에 자식들 금지선 있습니까, 없습니까? 새벽에 가도 낮에 가도 촌에 있는 어른은 반기지요. 물론 새벽 두 시에 가서 탈난 사람은 있습니다. 어떤 며느리가 예천에 새벽 두시에 시어머니 목 졸라 죽인 경우는 있습니다. 남편과 헤어지고 6개월 뒤에 4대강공사 때 낙동강보 만든다고 물이 차서 시어머니가 보상을 받았어요. 이혼하고 남편이 양육비 안 주니까 시어머니한테 돈 달라고 했는데 안 주니까 새벽 두 시에 가서 죽였어요. 새벽기도 안 나오니까 장로가 찾아가보니까 이미 싸늘한 시체가 돼있어요.

만약 새벽 두시나 세시에 시어머니가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며느리는 시어머니 안 볼 겁니다. 그러나 이혼한 며느리가 와도 받아주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이 이 정도로 심합니다. 자유요? 엑서더스, 출애굽 없습니다. 인간은 지만 살면 돼요. 어디서 탈출도 싫어요. 벗어나는 것도 구원도 싫고 그냥 내 식대로 살다가 고대로 천국에 내 부스 하나, 내 코너 하나 장만해서 천국 환경 좋은 데서 역시 나만을 위해서 사는 것, 그 사는 훈련을 지금 울산바닥에서 대구바닥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우상이지 다른 게 뭐가 우상이겠어요. 우상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 쪽에서 하는 것은 완전히 무시당하고 완전히 천대받고 내가 하나님 앞에 해준 것이 고스란히 빛나면서 남아있는 것, 그게 우상이에요. 그러니까 우상은, 인간이 즐겨 믿는 신은 그야말로 천치바보에요. 개보다 못해. 개는 사료나 제 때 주지. 하나님한테 사료는 헌금이잖아요. 헌금 제 때 주지도 않아. 푼도 동냥 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나 없이도 천사들과 잘 살 텐데 무슨 돈이 필요하노. 하나님, 돈 필요 없지요?” 이게 바로 인간의 착각입니다. 망상입니다.

다시 물어볼게요.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신은 우상입니다. 그 우상은 내가 주인이고 신은 시다바리에요. 그냥 하인도 그런 하인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 가야 되는데 현실이 빡빡해서 못 가겠어요. 그걸 현실이라고 한 거예요. 그걸 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자기만을 위한 현실만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구상적 현실’이라고 해요. 현실을 구상하는 것,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무슨 현실이냐 하면, 구상적 현실의 반대말이 ‘규제적 현실’이라고 합니다. 현실은 규제의 대상입니다. 지적받는 대상으로서의 현실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규제적 현실을 만드는데 인간은 자기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 소설을 만드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 된 내가 영웅이 되는 구상적 현실을 만들어놓고 똑같은 현실이에요. 해 뜨고 달 지고 똑같아요. 다른 것 없어요. 코스모스 피고 지금 벚꽃 피고 지금 봄이고 조금 있으면 여름 되고. 똑같은 현실을 두고 하나는 구상적으로 보고 하나는 규제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 규제 안에는 뭐가 포함된다고 했습니까? 아까 이야기한 멸망하는 것. 엄포입니까? 그냥 공갈치는 거예요? 아니에요.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옛날에는 물로써 멸망당한 겁니다. 물로써 멸망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도대체 물로써 멸망하기 전에 어떤 규제로 주께서는 현실을 이끌어왔는가? 현실을 규제하는 원칙과 원리가 사실은 더 중요하거든요.

노아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 전에 하나님이 노아를 규제했고 세상을 규제했던 원칙이 나옵니다. 그 원칙이 뭐냐?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러면 이 말을 정리하게 되면, 규제적 현실을 통해서 생산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 은총이 생산되는 겁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34장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다는 것을 하나님의 속성으로만 유지하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고 이걸 만들어내는 공장으로서 현실을 새롭게 펼쳐나간다는 것을 잊으면 안 돼요. 하나님 마음이 자비롭지, 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만들어내시는 현실, 해와 달 이 현실 속에서 뭘 발견해야 돼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노하기를 더디 하심을 발견해야 돼요.

그러면 노하기를 더디 하심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발견합니까? 지금 우리가 숨 쉬지요. 이것 주님의 은혜의 혜택입니다. 효과입니다. 우리가 에베레스트 산 올라가면 숨 못 쉬잖아요. 산소 없이 못 살잖아요. 값없이 공기주시고 값없이 햇빛 주시고 아무리 농사에 달인이라도 비 안 오면 농사 못 짓잖아요. 그런데 때에 따라 비 오시잖아요. 우리가 착해서 우상 안 섬겨서 주시는 겁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인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멀쩡하게 앉아 있잖아요. 온 몸이 아픈 사람도 계시지만 여기 앉을 정도는 되잖아요. 그렇지 않고 이 순간에도 아픈 사람 있고 다친 사람 있고 죽는 사람 있단 말이죠.

그 사람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습니까? 망대가 무너져 십팔 명이 죽은 사람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었습니까? 그런 것 아니지요. 세월호에 자식 잃은 사람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은 건 아니잖아요. 똑같이 죄가 큰데 그 자식은 일찍 죽고 우리 자식은 아직까지는 유지되고. 뭡니까? 이런 불공평함이 어디 있어요. 인간 쪽에서는 불공평이지만 하나님의 은혜 차원에서 보게 되면 이건 아주 적합한 거예요. 그러한 불공평하게 보이는 은혜를 줌으로 말미암아 어떤 자가 생산 되느냐 하면, 여기 7절에 봅시다.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6절과 7절을 제가 의미 있게 해석해드리겠습니다. 분명히 6절에서는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지요. 7절에 보면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잖아요. 과실과 죄를 용서하게 되면 모든 죄를 용서해야 되는데 어떤 자는 빠지는 겁니다. 형벌 받은 자는 어떻게 한다? 결단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비롭고 은혜로우면 모든 사람에게 자비롭고 은혜로워야 되는데 왜 특정 사람에게만 자비롭고 은혜롭고, 똑같은 죄를 지어도 한쪽은 용서하고 똑같은 죄를 지었는데 너는 형벌 받은 자니까 용서하지 않겠다고 나올 때에 그것이 인간 입장에서는 불공평하게 보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공평한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현실을 내 중심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 보시는 것과 반드시 마찰을 일으키게 돼있단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현실을 구상적 현실로 본다고 했지요. 지 마음대로 해석하는 거예요. 돌아가는 게 내 좋으라고 있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다 좋은 대로 해석했는데 막상 규제적 현실에 의해서 난데없이 하늘이 완전히 꺼져버렸지요.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니까 200밀리 오다가 말겠지. 더 오니까 1000밀리까지 오다가 말겠지. 1000밀리가 아니고 1000미터가 와버린 거예요. 다 죽었어. 이건 예상도 못한 건데.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왜 네 예상에 맞춰야 돼.” 네가 뭔데 내가 네 예상에 맞춰야 되느냐 말이죠. 평소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네가 뭔데? 네가 감 놔라, 배 놔라 그럴 쨉이 못 되는 것 같은데?”

모세를 보냈는데 이틀 만에 와야지요. 40일이 뭡니까? 하지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40일 있어야 그들이 금송아지 섬겨서 좋다고 자기 속에 있는 개념이 실제적인 물상, 사물로써 구체화되는 거예요. 사물로 구체화된다는 말은, 인간의 문명이고 문화를 의미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문명과 문화 속에는 우상숭배적 요소가 들어있는 거예요.

하늘나라에는 인간이 절대로 컴퓨터 들고 못 갑니다. 노트북 들고 천국에 못 갑니다. 천국 가서 뭐 할 건데? 피씨 방에서 게임하려고? 오락 게임기 천국에 못 들고 갑니다. 바다이야기 못 들고 갑니다. 하늘나라에 카지노 없어요. 장담하건데. 심지어 인간이 세운 것은 다 헐어버린다.

인간이 세운 것을 자진해서 헐어버립시다. 내가 한 것 다 취소해버립시다. 그럼 남는 건 뭡니까? 햇빛 준 것, 공기 준 것, 밤에 잘 때 숨 쉬게 하신 것, 발걸음 세신 것, 키를 한 자나 자라서 하든지 작게 하신 것, 머리카락 세시는 것. 그리고 보니까 전부다 하나님이 주신 거네요. 하나님이 안 주신 게 없잖아요. 평소에 누굴 위해서 삽니까? 구상적 현실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규제적 현실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우리는 규제라면 듣기도 싫어해요.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뭘 규제해. 알아서 한다는 말은, 신과 나 사이에 연결시키는 내 가치와 자존심을 살려주는 그러한 것들을 깔아놓고 알아서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는 멸망하는 원리와 이유가 포함이 안 돼있어요. 내가 알아서 해서 깔아놓은 기준대로 만약에 이 세상을 심판한다면 나는 필히 멸망되지 않고 반드시 나는 면제가 돼버립니다. 왜? 내가 안 문제는 내가 냈고 정답을 냈기 때문에 그 정답을 그대로 시험 친다면 나는 합격이고 다른 사람은 불합격이겠지요. 그러면 나만 달랑 구원받는 거예요.

아무도 의로운 인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매 의로운 자가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 것을 끄집어내고 예수님 것에 대해서 무조건 합격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구원받는 사람은 누구 이름으로 구원받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내 대신 인생 살아줘서 구원받는 겁니다. 내가 내 인생 살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내 대신 인생 살아주는 거예요. 그 대신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동 속에서 예수님이 내 대신 바꿔치기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필요가 있지요. 그렇게 주님께서 나와 동행해서 늘 나의 모든 것을 주의 것으로 가져갈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내가 주님 앞에서 뭘 해도 그게 죄가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내가 죄인이 될 때 주님은 그 죄에 대해서 이미 용서를 해줬잖아요. ‘아직’이 아니고 ‘이미’ 용서를 해줬잖아요. 지금 고린도후서의 자유로운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의 눈으로 보는 거예요. 이미 예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잖아요.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구약 출애굽기 34장을 보는 겁니다.

여기서 나오는 하나님의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그렇게 이야기하시면서 7절에서 형벌 받은 자에게는 용서가 없다는 겁니다. 왜 한쪽은 용서를 하고 한쪽은 용서를 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공평하심이고 은혜로우심이고 자비로움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 거래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자기 구원에 대해서 개입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 의논해서 제 의견도 일단 들어보시고 좋으면 구원해달라고 나온다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누구와 의논하느냐 하면, 이 말씀을 위해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거예요.

그러니까 출애굽기 34장 이야기는 그 당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 보고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34장은 장차오실 분을 위하여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장차오실 분이 누구죠? 예수님이죠. 예수님 보고 이 말씀 주시고 이 말씀 받은 예수님은 이 말씀 그대로 성취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가 택한 자는 용서하고 택하지 않은 자는 저주하는 권한이 예수님에게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중보자는 일단 내가 있고, 내가 생각하는 신이 있고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이 중보자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중보자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없애버리고,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있게 된 하나님도 없애버리고, 하나님도 인간도 판을 새로 깔아놓고 중보자가 먼저 나타나셔서 중보자가 필요한 양쪽 대상도 함께 세트로 등장하는 그런 판을 새로 짜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내 예상을 벗어난 나에게도 낯선 일이 되고 말지요. “어, 제가 진짜 예수님 믿는 것 맞아요?” 하나님이, “왜 그러는데?” “전에는 제가 예수 믿었거든요.” 지금 말 톤을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 제가 예수 믿는 것 맞습니까? 왜 그러는데? 전에는 제가 예수 믿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제가 왜 예수를 믿지요. 희한한 일이 벌어졌네요. 이런 뜻이란 말이죠.

“이건 분명히 내가 믿는 믿음은 아닌데 믿게 된 것으로 봐서 인생 자체가 완전히 바뀐 것 맞지요.”라고 묻는 겁니다. 지금 주님이 개입한 인생 맞지요? 그전까지는 내가 예수 믿었는데 주께서는 그걸 믿음으로 취급도 않고 나로 하여금 예수 믿게 만드신 거예요. 나로 하여금 예수 믿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제 내 원대로 내 뜻대로 이 세상이 안 풀리고 몽땅 망한다할지라도 우리는 수지맞는 장사가 되는 겁니다. 다 잃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잃을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을 격려하는 것은 신약이 아니고 구약 때입니다. 격려 해봤자 결국 이스라엘 백성 멸망당했어요.

제가 지금 34장 이야기하면 왜 돌 판을 새로 깎는지 안 했어요. 그 이야기해봐야 우리가 그냥 이해 차원에서 넘어서는데 돌 판을 이래서 깎았다고 말하려면 먼저 내가 이것 알아서 구원받는다는 판부터 완전히 작살나버려야 돼요. 깨져야 돼요. 출애굽기 34장 알아서 구원받아야지,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 뜻이 아니고 마귀 뜻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 있고 신이 저기 있는데 중간에 간격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옛날에 출애굽기 34장 공부했다는 것을 여기에 던질 가능성이 있어요.

이제 돌 판을 새로 만드는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돌 판을 만든다는 것은 선악과 이야기할 때 했지만 선악과에서 첫째 금지지요. 금지는 다른 말로 한계지요. 돌 판을 새로 만든다는 말은, 너희들은 돌 판에 갇혀있는 거예요. 돌 판에 갇힌 것을 고맙게 여기고 다행스럽게 여겨야 됩니다. 왜냐하면 돌 판에 갇힌 것이 바로 언약 안에 갇힌 거예요.

우리가 여기 있으면 병풍처럼 포위돼있는데 돌 판에 포위돼있는 거예요. 돌 판에 포위돼있으면 우리는 못 빠져나오잖아요.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넘어서면 안 돼요. 그러면 돌 판을 지키게 됩니까? 못 지키지요. 못 지키면 율법 안에 있다는 뜻이고 저주받는데 영원토록 저주받는다는 뜻입니까? 아니에요. 왜 아닙니까? 그 돌 판이 자체가 살과 피로 바뀌어요. 그냥 살과 피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뀌어요. 요한복음 6장에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고 했지요. 돌 판이 인물로 바뀌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 한계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놓여있고. 이제 보라는 거예요. 돌 판이 어떻게 하나의 인격체로 바뀌는지. 그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 (IP:14.♡.134.30) 15-04-07 10:00 
20150403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구상적 현실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돌 판을 깎아서 시내 산에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시내 산 없는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지요. 더 나아가서 시내 산 없는 하나님 있습니까? 그건 우상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있는 자리가 중심이거든요. 이걸 하나님께서 깨버리는 겁니다. 너는 중심이 아니라는 거죠. 너를 있게 한 중심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된 이상은 내가 나왔던 내가 출현했고 내가 시작했던 그 중심은 잃어버렸어요.

인간은 잃어버렸으니까 그 다음에 찾아가겠지요. 찾아가는 과정에서 원래 자기 자리를 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인간이 원래 자기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찾아가면서 처음부터 인간이 삐딱하다는 사실이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증명이 되는 겁니다. 엉뚱한 길로 계속 가는 거예요.

얘들 노는 자동차 바퀴가 빠져있으면 삐딱해서 갈수록 점점 멀어지잖아요. 처음에는 같이 출발했는데 나중에는 엉뚱한 길로 완전히 갈라지잖아요. 처음에 함께 있을 때는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인생을 살면 살수록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엉뚱한 길로 감으로써 나중엔 뭐가 원천지인지 드디어 상실해버리고 노출돼버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돌 판을 네가 쓰지 말고 다시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 내가 다시 쓰겠다는 것은 중심에서 떨어져나간 쪽에다가 모세가 중보자의 기능을 하면서 그들과 다시 원천지, 하나님을 만났던 그것을 거기에 삽입시키는 겁니다. 그 방법을 이렇게 하면 돼요.

미래에서 당기기에요. 제가 표현한 것 가운에 많은 것이 어렵게 들려지지만 그 중에 하나 어려운 게 미래에서 둘둘 감아 당긴다는 이걸 실제로 우리 생활에서 느끼기가 힘듭니다. 얘가 카펫에 앉아있을 때 오라고 하면 안 와요. 그땐 카펫을 둘둘 감으면 오잖아요. 얘들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하면 이불 채 잡아당기면 재미있어 해요. 이불 채로 당겨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따로 중심이 필요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회귀 본능이 있어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요.

하나 예를 들면, 우리가 옛날 어릴 놀던 때 그립잖아요. 시내에서 멱 감고 놀던 걸 회상하면 도대체 내가 1970년도인지 2015년인지 잠시 착각할 때 있습니다. 특히 꿈속에서 그런 게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깨보면 그 친구는 어디 가고 없고 자기만 덜렁 옛날 놀던 냇가에 서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분 납니까? 안 나잖아요. 뻔히 과거로의 회귀가 실패하는 줄 알면서도 인간의 현재는 과거만 놓여있어요. 과거만 집합돼있기 때문에 항상 의미와 판단할 때 과거의 것을 동원해서 판단해버려요.

친구 만나면, “너, 옛날에 그랬잖아.” 제 말은 뭐냐 하면, 미래는 모른다는 거예요. 미래는 모르고 과거만 알기 때문에 자꾸 과거에 입각해서 현재를 채우는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미래를 향하여 인간을 잡아당겨버립니다. 인간은 과거만 알고 있고.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세상 살아가는 모든 것이 우리의 예상대로 안 되는 이유에 여기에 있습니다. 시간의 시작은 곧 시간이 끝나는 지점이 시간의 시작 지점이에요. 알파요 오메가거든요.

시내 산부터 시작했던 이스라엘이 다시 시내 산으로 가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지 순례해야 되느냐? 아니죠. 시내 산에서 나왔던 게 있어요. 그게 십계명이었습니다. 친히 쓰신 말씀이거든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돼있어요.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은 누굴 의미합니까? 예수님 곳에 가는 거예요.

지금 돌 판을 새로 만드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네가 내용을 채우지 말고 네가 빈 돌 판만 만들고 글씨는 여기서 새기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중심은 시내 산이 중심이죠. 중심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 중심에서 못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팔자, 운명이.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중심이 되는 기준 밖으로 못 벗어나요. 여기에 입각해서 멸망당하기도 하고 뭐 되기도 하는데.

그러면 시내 산에 다시 찾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시내 산이 뭐냐 하면, 말씀을 적어주는 곳이거든요.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누가 있다? 말씀이, 예수님이 계시다 말이죠. 지금의 시내 산 가봐야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계신 곳이 원래 첫 출발지고 마지막 종착점이 되는 겁니다. 공간적으로 그렇고 시간적으로도 마찬가지에요. 알파요 오메가니까.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 있는 곳을 못 찾아간다는 거예요. 몇 번 버스? 5001번 탈까요? 뭘 타고 주님한테 갈까요? 문제는 엘리야, 모세, 아브라함, 이삭, 이 사람들이 이미 갔다는 사실입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천국 갔잖아요. 그들은 몇 번 버스 타고 갔지요? ktx 기차 타고 갔습니까? 비행기 아시아나 타고 갔습니까? 그럼 뭘 타고 갔어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내린 것은 그들을 미래에서 잡아당겼다. 그래서 구약에 있는 모든 선지자들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입니다. 그들 속에 장차오실 예수님의 영이 먼저 있어서 비록 그들은 과거밖에 몰라도 그들 속에 있는 예수님께서 이미 원래 자리로 끌고 가야 될 특수한 임무와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들은 천국 가야만 하는 그래서 변화산에서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그러한 팔자가 된 겁니다.

이야기 들어보니까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지요. 우리도 미래에 만날 분이 먼저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미래에 주님 만날 그쪽으로 강제로 끌고 갔으면 좋겠지요. 사실은 성령이 오면 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뭐냐 하면, 이걸 인식론이라 하는데, 인식론이란 무엇이 있다는 존재론은 아니라는 거예요. 뭐가 여기 있으면 존재한다고 하잖아요. 있는데 이것이 비타500인지 어떻게 알아 할 때 이걸 인식론이라 합니다.

꿈에 갑자기 자기 집이 넓은 아파트 사는 걸 봤다. 꿈 깨보니까 별로 넓지 않지요. 분명히 꿈에는 인식했는데 실제는 존재하지 않지요. 그런데 반대로 이 안에 매직을 넣어놨습니다. 보니까 책이에요. 매직이 어디 있는지 찾고 있는데 책을 펼치니까 매직이 나왔습니다. 그건 뭡니까? 몰랐는데 알았지요. 그러면 우리가 몰랐지만 들어있습니까, 안 들어있습니까? 들어있지요. 하지만 내가 매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들어있지요. 눈에 안 보이니까. 그러나 매직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소급해서 차후적으로 일이 다 진행되고 난 뒤에 처음부터 있었다고 뒤늦게 자백하고 고백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이 매직이 들어있었구나, 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고 난 뒤에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돼있었네. 하는 것은 인식론입니다. 성경의 내용에 보면 택한 백성은 창세전에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분명히 한글로 돼있어요. 한글성경이니까. 그런데 그걸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지요. 대부분 안 믿지요. 왜 안 믿습니까? 성령이 안 와서 인식론이 형성 안 됐어요. 주님이 주신 영으로 못 보기 때문에 인식론이 형성 안 되어있으니까 행함으로 착함으로 천당 가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만약에 인식론이 형성 돼버리면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내가 도대체 과거에 무슨 생활을 했었어, 라고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내가 어제 무슨 일을 했지? 우리 조금 전에 미스터피자 먹었잖아요. 그런데 성령 받으면 어떻게 돼요? 조금 전에 피자 먹은 죄를 졌잖아요. 왜? 창세전에 주께서는 피를 흘려야 됩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면, 창세전부터 피 흘리기로 작정돼있습니다. 피를 흘려야 죄 사함을 받습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것이 1장 3절에 보면, 예수 안에서 이루어질 일이 창세전부터 예정돼있다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창세전에 뭘 예정했다는 말입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만 구원받는데 그 예수가 뭘 해야 된다? 피 흘려야 된다는 것이 창세전에 이미 예정돼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피를 흘려야 죄 사함 받는다면 우리는 뭘 해야 돼요? 우리가 착해서 죄 용서받는 일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뭘 해도 그게 죄가 돼야 되죠. 그게 창세전에 확정돼있으니까.

문제는 아까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내가 안 것만 안다고 했어요. 미래는 모르고. 그렇다 보니까 과거에 피자 먹은 것이 죄가 됩니까, 안 됩니까? 배고픈데 밥 먹는 게 뭐가 나쁩니까? 노아 때 홍수 오기 전에 사람이 먹었잖아요. 왜 먹었습니까? 배고파서 먹었어요. 장가 왜 왔어요? 사랑하는 사람 있으니까 장가 간 거예요. 그게 뭐가 나빠요. 장사했습니다. 왜 장사했습니까? 놀면 뭐 합니까, 장사해서 먹고 살아야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았지요. 그때 그들이 그걸 죄라고 봤습니까, 안 봤습니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 아니지요.

그런데 그게 나중에 구원받고 보니까 그것마저 죄였습니다. 먹고 마시고 그게 죄가 됨으로 말미암아 어떤 짐이 벗어지느냐 하면, 내가 죄라고 여겼던 죄는 적극적 극렬하게 죄가 아니에요. 단호하게 죄가 아닙니다. 왜냐? 더 큰 죄 속에서 나온 것이지 그 자체를 단독적으로 떼어놓고 죄라고 하면 마치 그것만 죄고 나머지는 죄가 아니고 의로운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는 그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몽땅 죄인이 되면 몽땅 죄기 때문에 따로 떼어서 특별한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죄는 없습니다. 우린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인식은 중요한 인식인데 왜냐하면 내가 뭔가 일이 잘못됐을 때 죄가 없기 때문에 죄 값을 치루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착해도 죽잖아요. 죄 값은 죽음이지 뜻대로 안 되는 걸 죄 값으로 해버리면 그건 저주의 무거운 짐을 자진해서 지는 셈이 돼요. 내가 행동 잘못하니까 재주가 옴이 붙어서 뜻대로 안 된다. 이러면 큰 일 날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착한 일 많이 해서 빨리 보상하려고 하는 그런 마귀의 시험에 빠지게 돼요. 이중 삼중으로.

정말 출애굽기를 보면서 인식 전환이 와야 됩니다. 발상의 전환이 와야 돼요. 왜 자꾸 인식과 존재를 나누느냐 하면, 인식론이 잘못된 것을 마치 자기 존재가 지옥 가는 양 구원 못 받은 것처럼 걱정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식이 안 되는 걸 좀 더 살면 느끼는데 그걸 모르고 지옥 가면 어떻게 하죠? 예수님께서 이미 구원받게 했습니다, 하면 그건 맞는데요. 내가 그게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제가 그런 예를 들었지요. 어떤 사람이 자기가 곡식이라는 거예요. 사람이면서 곡식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병원에서 열심히 치료해서 자기가 곡식이 아니고 사람인 걸 알았습니다. 알고 병원에서 나가자마자 되돌아오는 거예요. 병원 앞에 닭이 한 마리 있는 거예요. 의사가 하는 말이, 이제 당신 사람이니까 괜찮잖아요, 하니까 나는 내가 사람인 줄 아는데 저 닭은 나를 아직도 나를 곡식으로 보면 나를 먹을 게 아니냐. 그래서 겁나서 들어왔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나는 예수 믿는 걸 내가 인정하는데 하나님이 내가 예수 믿는 걸 믿음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그 말이에요. 이거 히스테리입니다. 나는 예수를 잘 믿는데 하나님이 그 믿음은 믿음도 아니라고 나오면 내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무슨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대책, 해법을 내보세요. 우리가 다들 하는 고민이지만 전부 다 쉬쉬하고 있어요.

정답을 알려 드려요? 우리가 나는 곡식이다. 사람이 아니다. 나는 믿는다. 이런 건 어디서 나왔는가? 과거의 산물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과거에 있었던 편집된 내용이 내 기억 속에 저장돼있고 그 기억을 현재 용어로 재편집하다보니까 자르고 찢고 붙이고 하다보니까 과거가 뭉쳐진 과거의 산물이 현재의 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어디서 구원받는다? 카펫을 둘둘 감는 거예요. 카펫은 우리가 딛고 있는 자리입니다. 원천적 자리에요. 중심된 자리, 출발점이에요. 이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고 창세전에 예수님이 깔아놓은 예수 안이란 자리입니다.

산상설교 7장에 이런 말씀이 나오거든요. 모래 위에 집을 짓지 말라고 했지요. 모래만 쌓으라고 한 게 아니에요. 집을 지어도 괜찮아요. 모래만 붙들고 있어라, 반석, 이게 아니고 집을 짓되 돌 위에 집을 지어야 되지 모래 위에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보기에는 똑같아요. 보기에 전혀 구분이 안 되는데 이게 언제 구분되느냐 하면, 홍수가 들이닥칠 때 모래 위의 집은 멸망하잖아요. 그런데 집은 왜 짓습니까?

인간은 인식론이 과거로부터 미래로 가거든요. 과거를 통해서 미흡했던 것, 뭔가 모자랐던 것, 짜증났던 것, 그런 것을 미래에 가서 보상받겠다고 잔뜩 희망에 차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론은 과거에 이미 알고 있던 거예요. 성도가 됐으면 과거에 알고 있던 것이 전부 죄가 돼야지요. 그걸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기준이 함께 있다는 것인데 그게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먹고 마시고 뭘 해도 피 앞에서 나를 구원시키고 나를 영원하게 하는 요소가 아니에요. 피자를 먹든 칼국수를 먹든 칼국수 먹었다고 구원받고 천당 가는 게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헌금했다고 천당 가는 것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선교사 됐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예배 참석하고 성경 공부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닌 것 맞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경 공부 참석 안 한다고 구원받습니까? 그것도 아니지요. 그러면 헌금 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안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면 구원은 어디서 오는 거예요? 예배를 참석 안 했다, 또는 헌금을 안 했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알아요? 과거에 헌금 안 한 것을 본인이 알잖아요. 인간은 과거 것만 알아요. 내가 지난번에 예배 참석 안 했어. 알고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 알면 구원받습니까? 과거 알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사실은 여러분이 과거 다 알 수 있어요? 몰라요. 새순교회 교인들 계단 몇 개이지요? 분명히 밟았잖아요. 몸은 밟을 때마다 기억하는데 숫자는 모르지만. 몸은 기억해도 이성적으로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계단 밟는 것은 빠진 거예요. 왜냐하면 계단 밟을 때 아이고, 추워라. 다음엔 옷을 더 입고 올까. 이것 생각하느라고 몇 개 밟았지만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인간이란 자기의 몸 편한 쪽으로 모든 걸 현실을 구상합니다. 오늘 강의를 구상적 현실로 할게요. 구상할 때 편집을 한다니까요.

얘들이 지금 배고파서 밥 먹고 있는 가부장적 집안 같으면, “하늘같은 가장이 있는데 너희들끼리 밥을 먹어?”라고 나무라면 얘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빠가 있는지 몰랐어요. 왜 편집이 안 됐을까요? 배고픈 게 급해서 평소에는 “아빠, 식사하세요.”란 말을 했는데 너무 배고프면 안 나온다니까요.

인간의 행동은 죄인으로써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을 잘했다고 하면 안 돼요. 어쩔 수 없이 죄인 되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죄인 되는 겁니다. 거기다 어떤 가치와 의미를 두지 마세요.

구원의 자리는 십계명이 깔아 앉았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언약이고 언약은 새 언약을 예상해서 먼저 깔아놓았습니다. 그러면 언약 자체를 주신 분이 본인한테 적용시켜서 본인이 인간으로 오시면서 예수님의 몸 자체가 새 언약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면 구약에서는 십계명 지켜야 복 받는다고 하다가 신약에 오게 되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고 생명이 없느니라. 이렇게 바뀐 게 아니고 그렇게 실현되고 완성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자리는 어딥니까? 말로 하니까 어려워지는데 이걸 보세요. 돌 판에 뭐가 새깁니까? 말씀을 새기지요. 말씀은 어디서 새깁니까? 지상에서 새깁니까, 어디서 새깁니까? 시내 산. 시내 산에 하나님이 버티고 계시지요. 왜냐하면 이게 원천이고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중심이 아닙니다. 중심을 따로 거쳐 와야 돼요. 이 말씀이 요한복음 6장에서 살과 피가 되어 영생이 되지요. 예수님이 스스로 이야기했으니까. 구약에서는 말씀대로 지켜야 산다고 했잖아요. 신약에 오면 사는 방법이 말씀 지켜서 사는 게 아니고 피를 마셔야 산다고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돌 판에서 말씀을 주님께서 스스로 자기한테 적용시켜서 완성시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인식론적으로 살과 피에서 우리에게 주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신약에서 성도가 되거든요. 주어지면서 어딜 경유하느냐? 바로 오는 게 아니고 살과 피의 말씀을 통해서 돌 판을 거쳐서 이렇게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게 아닙니다. 구약 성경이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복음화 된 율법으로서 복음을 보여주는 율법으로 우리에게 그대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한 오해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했던 똑같은 오해를 해요. 저는 지금까지 바람피운 적 없습니다. 그럼 뭐가 되지요? 바람피운 적 없으니까 하나님, 저 착하지요? 착한 만큼 복 내놔. 누가 이런 실수를 했습니까? 성령 오기 전에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대로 한 거예요. 우리는 그들을 아주 무시하면서 “이 사람들 참 무식하다. 그걸 모르나?” 이렇게 비아냥거리면서도 막상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법감정이라는 게 있어서 법감정에 의해서 우리는 날마다 의인되었다고 여기더라도 새로운 법이 오게 되면 죄인 돼버립니다.

평소에 던져놓은 주식이 갑자기 열배나 불어났다든지, 조그만 토지가 도시계획 잡혀서 열배나 보상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싱글벙글하지요. 아내한테 부자 되었다고 자랑하려고 하는데 바람이 불어서 뭔가 종이 하나 날아왔는데 보니까 마태복음 19장 부자 청년 돈 좋아하는 내용이 나오더란 말이죠. 우연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런 게 날아와 붙는다면, 우리는 율법이 오기 전에는 하나님 복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바람에 하박국 3장이 날아왔어요.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한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율법을 지켰다, 복 받았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 기준해서 그렇습니까? 우리 인식론은 과거에서 내가 은근히 노렸던 것, 부자 되고 싶었던 그것이 현실화 될 때 하나님 축복으로 간주했는데 이것을 미래에서 보면 뭡니까? 십자가만 복이고 그 앞에선 안개 같은 것이고 있으나 없으나 의미 없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 도착해보면 아는 거예요. 그때 돈 벌었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건 십자가 앞에 주님 만날 때 참 내가 그런 헛된 야망과 꿈에 잠시잠깐 빠졌습니다. 그때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인식론 바꿔치기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 작업을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 작업을 하면서 나는 이미 십자가로 구원받았기에 인식론 바꿔치기 하는 효과를 그동안 평소에 늘 누리고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똑같은 거예요. 그들에게 직접 예수님을 안 보내고 왜 돌 판에 쓰게 했습니까? 그들에게 율법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율법에 대한 그들의 오해와 그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를 통해서 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속에서 죄 속에서 예수님이 의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정리해보면, 의인은 죄에서 나와요. 십자가 그 다음은 없다. 십자가 이후가 없어요. 왜? 결국 마지막은 십자가만 남기 때문에. 그것도 모르고 십자가 다음에 부활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부활이 뭐냐 하면, 십자가 마지막에 함께 참여시키는 게 부활의 능력이에요. 십자가와 부활 사이는 시간적으로 더 이어지는 게 아니에요. 시간이 정지된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에서는 죽었으니까. 사람이 살아있을 때나 시간이 흐르지 죽은 사람에게 무슨 시간이 흐릅니까.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의 작업은 도리어 우리의 과거로 돌아가요. 과거에 어디서 살았으면 무엇이 죄였으며 무엇이 율법이었으며 무엇이 마귀의 시험이었으며 이런 것을 되돌려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걸 사후적 또는 차후적으로 소급해서 우리 자신의 죄와 용서하심과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 날로 새로워지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게 되면, 돌 판 다시 깎아 만들라는 말은 어떤 인간도 시내 산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신자든 불신자든 지옥 가든 마찬가지에요. 왜? 시내 산이 중심이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럼 시내 산 찾아가면 되는데. 그 시내 산이 인격으로 바뀌었지요. 예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 바깥에 없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도 예수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찬양소리 나오지요. 그걸 예를 들면, 성가대가 찬양하잖아요. 듣는 사람들은 은혜롭고 기쁘고 합니다. 은혜롭다는 말이 뭔 뜻일까요? 이미 과거에 믿음 괜찮았다는 것을 잠시 회상하는 순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성가대는 그런 것마저 없어요. 성가대는 노래하면 오늘 안 틀려야 되는데 소프라노 맞나? 딴 생각하고 있다니까요.

교인들이 찬송가 4절 부르면서 무슨 생각합니까? 찬송가를 1절만 하고 말지 4절까지 하고. 누가 4절까지 다 부르라는 법은 누가 정했어?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드리는 목사도 그걸 감안해서 피곤하다싶으면 짧은 것 찾고 될 수 있는 대로 3절만 있는 것 하고. 배려해준다고. 어차피 4절까지 가면 은혜고 뭐고 가사는 생각 안 나고 빨리 끝내고 딴 짓할 생각할 테니까. 굉장히 은혜로운데 막상 노래하는 사람은 몸이 피곤하니 아프니 딴 생각하고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주어진 환경이라는 게 우리를 위한 환경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 환경을 내 것 만들려고 하지만 내 것 만들 수 없어요. 그냥 주어진 환경대로 사는 겁니다. 왜 사느냐? 인식 바뀌라고. 어떻게? 우리가 과거를 뗄 수 없어요. 과거와 성령에서 주신 미래와 내 안에서 만나라고. “주여, 이것밖에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우상숭배에도 불구하고 구원시켜주셨습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제가 예수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를 믿다니요? 이건 예상 못한 건데요. 이걸 글로 쓰면 앞뒤가 안 맞는 글이에요. 저는 예수 잘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왜 내가 예수를 믿지요. 제가 뉘앙스를 달리 하니까 이해되시죠. 내가 예수 믿는 걸로 끝내야 되는데 그걸 폐기처분해버리고 나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는 이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미래에서 왔지요. 아아, 내가 믿는 게 아니고 믿게 하시는구나. 믿게 하시려면 내가 믿어야 돼요. 그 믿어야 되는 것이 과거에 근거해서 믿어야 되고 그 믿은 것이 다 가짜로 엉터리로 우상숭배로 들통 나는 과정을 거쳐야 은혜로 믿게 한다는 것이 인식 되지요. 하여간 니 마음대로 믿으세요. 그리고 깨지세요.

예수 잘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예. 그래요. 그렇게 하세요. 잘 하셨습니다. 예수 잘 믿는데 이런 일이 생겼느냐는 말은, 예수 잘 믿으면 이런 일은 안 생긴다고 미리 당겨서 자기가 예수 믿기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멀찍이 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잘 할 테니까 잘 믿었다고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한 거예요. 그런데 그게 우상일 줄이야. 그게 바로 애굽의 황소 섬기는 거였어요. 주께서 그 자리를 예수의 피와 살로 메운 겁니다. 네가 한 것, 네가 피자 먹은 것도 내 희생 덕분에 피자가 나온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신음 소리에 근거한 겁니다. 예수님이 채찍 맞음에서 아픔을 겪는 그 위에 그 은혜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 힘으로 내가 정신 바짝 차려서 살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열심히 나름대로 노력해서 이만큼 살았다고 우긴단 말이죠. 그런 것을 우린 평생 동안 겪어야 됩니다. 겪으면서 과거에서 올라온 잘못된 인식론과 미래에서 주신 새로운 주님의 뜻과 늘 충돌을 일으키면서 우리의 주체는 파열되고 깨지는 겁니다.

우리는 깨질 때 나의 의미도 같이 깨지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의미로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미로 구원받은 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의미로 구원돼야 하기에 구원이 주어진 거예요.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의미가 찾아온 게 아니고 의미가 찾아온 동시에 그게 구원이 돼버린 거예요. 내가 손쓸 새도 없이 일방적으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덮친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변화가 인식론적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9절에 봅시다.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은총을 입었기 때문에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이란 고백이 나온다 이 말입니다.

또 이 소리 듣고 주여, 전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그것 해서 구원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도 일종에 행함이죠. 이렇게 하게 되면 미래에 구원받겠다는 것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가는 내 시간적인 책략에 불과한 겁니다. 그 자체가 인정 못 받는다니까. 우리의 꼼수에 넘어가지 않아요. 우리가 미래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몸통 자체가 인생 자체가 출애굽기 34장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왜? 말씀의 완성자가 찾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이 성경에 보면 다 들어있어요. 그분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말씀의 얼룩무늬가 돼요.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말씀에 위반해서 되는 일이 없습니다. 말씀에 합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죄와 용서가 만났지요. 죄와 용서가 만난 것을 10절에서 두 자로 이렇게 합니다. 죄와 용서가 만난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언약 안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언약적 죄인입니다. 선악과적 죄인이 아니고 언약적 죄인입니다. 선악과적 죄인이든 언약적 죄인이든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전부 다 한계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 예수 안에 갇혀있는 거예요. 예수 밖에는 정죄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어요. 정죄함이 있느냐, 없느냐는 경계선으로 결정돼요.

마음 같아서는 훌라후프를 운동할 때만 하지 말고 훌라후프에다 ‘예수 안’이라고 새겨서 걸치세요. 장 보러 가도 어디 가도 예수 안에 있다. 항상 예수 안에서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죄인 되는 겁니다. 죄인의 입장에서는 이걸 달라, 저것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없어요. 그럼 뭐냐? 모든 것이 그냥 은혜로 주어지는 겁니다. 날 위해서는 없어요. 예수 안에서는 예수님을 위해서 필요한 일들이 나한테 주어진 겁니다.

언젠가 엠비씨에서 차승원이 어떤 탑배우인데 공효진과 사랑하는 [최고의 사랑]이란 드라마가 있어요. 거기서 차승원이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믿기 힘들었는데 ‘극복’한 게 나와요. 어려움을 스스로 이겼다는 이 말이거든요. 저는 이걸 바꿨어요. ‘감사’ 우리 힘으로 극복한 게 아니고 인식론, 미래에서 보니까 내가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주어진 것이 은혜가 되는 겁니다. 은혜가 언제 깨지느냐 하면 갑자기 과거로부터 추억이 들어오면서 깨져버려요.

내가 과거에 이런 걸 기대했는데 이게 뭐고. 얘가 전교에서 10등 기대했는데 전교에서 100등, 이게 뭐야. 그러면 쫓아가서 하나님이여, 이럴 수 있느냐고 따지고. 미래로 가야 되는데 자꾸 과거로 가는 거예요. 과거의 추억으로 가는 거예요. 그때가 좋았지. 자기중심이 될 때 그때가 좋았지요. 한 번 살아보지 그때가 좋은지. 멸망당할 자를 건졌습니다. 우리는 그때 멸망당할 줄도 모르고 그냥 기분에 도취해서 살았지요.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누가 방해하느냐? 내가 내 중심이 내 과거의 출발 인식이 방해합니다. 자꾸 나를 스스로 단단히 싸매려고 애를 써요.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술과 담배잖아요. 마약, 도박. 술, 담배, 도박하면서 자기는 잠시 추억에 잠깁니다. 과거에 잘났던 것을 생각하지요. 술 안 잡사보니까 알 수가 있나. 그때 참 좋았지. 그게 자기를 단도리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지금 주신 은혜를 은혜가 아니고 극복! 지 잘난 맛으로 바꾸는 자기 드라마를 짜고 있는 중입니다.

10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언약을 세울 때 누가 필요합니까? 바로 죄인이 필요하지요. 그 죄인으로 동원된 자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가 바로 죄인으로 동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맨날 죄인이에요. 그게 언약 안,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그 언약 안에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언약 안에서는 도시락에다 간식, 차비까지 전부 언약에서 제공합니다. 잠자리, 숙소, 먹을 것까지. 언약이 다 제공한다는 주께서 주신 환경이 뭐냐? 광야. 광야에서는 숙식 제공 다 됐습니다. 가끔 고기 줬지요. 매일 아침마다 만나 줬지요. 가끔 물 줬지요. 숙소는 텐트 생활했지요.

애굽은 과거잖아요. 과거에 살던 사람이 미치는 거예요. 그때는 마늘, 부추, 파, 심지어 수박도 있었고 하여튼 정력에 좋은 건 다 있는데 우리는 정력이 씨가 말랐다. 주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늘나라는 정력이 필요 없다. 하늘나라는 내가 준 것만 필요하지 니가 필요한 것은 전혀 없다. 왜? 니가 없거든. 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신이 되기 때문에 네가 필요한 것은 다 버려라.

논산훈련소 가는데 지가 알던 휴대폰, 사복, 모자, 손수건 다 소포로 보내버려요. 애굽으로 보내버리고 군에 필요한 것만 군에서 다 제공합니다. 막 탈영하려고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용서한 것만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11절 봅시다.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제가 오늘 강의하면서 제일 먼저 뭐라고 했던가요? 이 현실이 누구 좋으라고 있는 현실이냐고 했지요. 우리는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나만 좋으면서 살아왔어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나만 좋으면 좋은 거예요. 이 울산이 나한테 좋으면 울산은 좋은 동네고 나를 싫어하면 울산은 나쁜 동네에요.

그러나 출애굽기 34장에서 돌 판을 다시 만들라. 시내 산에 올라오너라.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말고 내가 준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말씀 중심, 언약, 돌 판 중심,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이 세상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있는 거예요. 그걸 눈치 채면 인식론 있는 거고 성령 받은 거고 눈치 못 채면 그대로 아직 탈피 못한 거고 불신자지요.

여러분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은 좋겠다. 맨난 성경 보니까. 이러는데 목사가 성경 봐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왜 보는데? 성경 왜 보지요? 누구 좋으라고 보는데요? 자기 기도하는 것이 옆의 교회 부흥되라고 기도합니까? 성경 항상 보고 심방 한 번 더 가고 하면 혹시 교인 하나 그것도 돈 되는 교인 하나 올까 싶어서. 이상한 정신병자 오지 말고 제발 비리비리한 노인네도 오지 말라고 멀쩡한 사람, 좀 배운 그런 사람들, 교회에서 돈 빼가는 그런 사람들 말고.

도시에 약간 큰 교회에 거지들 참 많습니다. 정말 골치 아파요. 그들 성경 너무 잘 알아요. 돈 받고 예배 참석해서 지 필요한 것만 이웃사랑해라. 사마리아 사람이 어떻고, 다 알아요. 돈 달라고. 돈 주면 인간 버리는 겁니다. 돈 안 주면 욕을 해요. 그 교회 가지 말라고 욕하고 돌아다니고.

목사는 똑같아요.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과거에 내가 신학했으니까 이천 명 모아야지. 그 꿈을 아직 포기 못했습니다. 과거의 꿈을 위해서 하니까 여전히 과거에 매인 사람 돼요. 자기가 언약이라.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가 믿는 예수가 진짜 예수고 전부 다 그런 거예요.

그런데 진짜 구원받은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몰라요. 이미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이미 주님이 된 통으로 자기 돌 판의 완성을 돌 판 모서리로 자기 머리를 때리니까 십자가가 뾰족하잖아요. 정신 차려라. 널 위해 사는 게 아니고 나를 증거하라고 살라고 성령 줬다고 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으로 우리의 죄를 다 고발시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죄 지음에도 불구하고 저주하지 않고 지금까지 끈질기게 우리를 계속 살려내기 위해서 예수 안의 능력과 그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드높이기 위해서 우리를 살려왔다는 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 11절 말씀에 여부스 사람, 히위 사람,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따라서 그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게 뒤에 나옵니다. 그건 다음 시간에 하겠는데 그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말은 이미 나는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너는 다른 여자를 다른 신을 사랑하게 되면 내가 그냥 두지 않겠다. 내가 그냥 두지 않고 너희를 칠 때 분노로 치는 그것이 두 자로 하면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다시 크게 나타나도록 다가오도록 조치하신 것이 이게 얼마나 큰 기적인 것을 큰 사랑인 것을 사람 만들기 위해서 천국 백성 되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셨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