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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강의-찬양의 요건 1505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5. 30. 08:29

2015-05-09 00:49:19 조회 : 306         
찬양의 요건 150508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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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존교회150508a (찬양의 요건)―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6장 15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딤전 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은 단서가 있어요. 무슨 단서이냐 하면 성도일 경우에만 믿어지고 성도가 아닌 사람한테는 절대로 믿어지지 않는 글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한글 성경은 한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한글을 아는 사람은 한글 안다는 그 공통점 때문에 전부 다 이 의미를 공통적으로 획득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맞는 상식이죠.

 

“불조심", 한글로 불조심이라고 되어 있다면 한글을 아는 사람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어야 돼요. 아, 불내지 말라는 그런 뜻이구나! 너는? 너도 불내지 마! 나도 불내지 마! 아, 우리는 생각이 같네!

 

한글로 되어 있는 불조심에 대해서 한국 사람은 동일한 의미를 획득해요.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디모데전서 6장 방금 읽었던 15절 16절도 한글로 되어 있죠. 그러면 한글로 되어 있으면 한글 아는 사람은 동일한 의미를 획득을 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에 맞잖아요.

 

그런데 제가 전제를 뭐로 깔았느냐 하면 성경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 이것이 의미가 획득되고 성령 받지 않은 사람, 신앙이 없는 사람한테는 이것이 거부해야 될 내용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그 점이 이상한 거죠. 그 점이 왜 이상하냐 하면 성경에서 글자가 쓰여 있는데 이 글자가 희한한 글자가 되어서 어떤 것을 낳느냐 하면 사람을 둘로 분류 시키는 그러한 기능을 작용하는 한글이 돼요. 글자가 되는 겁니다. 불조심하고 성경하고 다르죠.

 

예를 들겠습니다. 성경 디모데전서 7장을 봅시다. 7장 없는 거 아시죠? 7장 1절에 불조심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7장 1절에 불조심이 나타났습니다. 성경 보시면 큰일 나죠. 예를 들면 7장 1절에 불조심이라고 되어 있다면 그러면 불조심은 누구나 어떤 내용인지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이 불조심이라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요, 못 알아듣는 사람은 성령 받지 않은 불신자라고 이야기했을 때 여러분! 이게 수긍이 되겠습니까? 똑같은 글자인데 방금 제가 이렇게 운을 떼는 것은 성경에 특정 대목만 신앙인으로 확인해 주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경 내용이 전부 다 신앙인 것을 확인해 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특정 구절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장판 밑에 보일러 깔잖아요. 보일러를 깔게 되면 보일러에 배선이 다 깔려 있어요. 특정 지역만 방이 따뜻하면 그 보일러 시공은 잘못한 겁니다.

 

파이프 지나가는 곳, 온수 지나가는 모든 곳이 뜨끈뜨끈해야겠죠. 성경 밑에 보일러가 깔려있다고 봅시다. 그것도 성령으로 보일러 깔렸다고 생각합시다. 왜냐 하면 성경은 누가 썼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썼기 때문에 보일러가 다 깔려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불조심이 나왔다고 해서 아하, 그 불조심이 이 불조심이라고 이해하시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어떤 기준은 수용되고 어떤 기준은 거부하면 그것은 보일러 시공을 잘못한 거죠.

 

동일하게 나타나야 돼요. 그러면 동일하게 나타났을 때 그 동일함의 구체적인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거에요.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계시면 만왕의 왕시며 하는 이러한 이야기가 하나의 동일한 성령의 보일러가 깔린 사람들, 성경에만 보일러가 깔려있겠어요? 성도 마음 내부에도 보일러가 깔려 있겠어요?

 

성도 내부에도 보일러가 깔려있죠. 깔려있으니까 성경 말씀이 의미 있게 오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그게 없는 거예요.

 

불신자에게 묻습니다. 불신자여! 디모데전서 6장 15절과 16절의 내용이 뭐지? 당신 한글 아니까 불신자지만 성령은 안 받았지만 하여튼 설명해 보라고 하면 불신자는 이렇게 설명을 잘합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맞는 이야기입니까? 처음부터 제가 너무 어렵게 질문해서 미안합니다. 이거 맞는 이야기에요? 방금 똑같이 읽었는데?

 

창세기 1장에 뭐라 되어 있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되어 있죠. 불신자가 한 말이 그게 맞는 말일까요? 밑에 성령의 보일러가 깔려있는데 글자 그대로 읽었는데? 그게 맞는 이야기입니까? 맞는 이야기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에요. 똑같은 말을 해도 진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말을 했기 때문에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인간 편을 들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져요.

 

인간 편을 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뭐냐, 아까 성령이라는 것은 보일러가 깔렸다고 했잖아요. 성령 보일러 깔기 전에 뭔가 하나 빠진 게 있어요. 뭐냐, 중보자의 보일러가 깔렸다가 먼저 해야 돼요.

 

성령은 중보자에 대해서 언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논리가 중보자에 대해서 모르면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했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따라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이것이 정답이 아니고 정답은 이렇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천지를 창조했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러면 불신자는 창세기 1장 1절을 통해서 예수님을 집어넣는 그 작업을 불신자는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못합니다. 왜냐 하면 성경대로 읽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성경대로 읽으면 그게 성경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성령이 오기 전에 우리 예수님 중보자 보일러가 깔려있죠. 그러면 성경이 우리 눈앞에 있다, 문자를 기계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고 먼저 어디에 도달하느냐 하면 우리 속에 깔려있는 중보자를 경유해서 외치게 되어 있는 겁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한 그 사람이 예수님을 죽여서 여호와 믿는다는 그 사람이 왜 죽였는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는 것을 그렇게 굳게 믿으면서 왜 창조하신 주님을 왜 믿었는가?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없어요.

 

따라서 우리가 그 점을 아니까 그 점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태초에 예수님과 더불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골로새서 1장 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방금 뭐가 가미되었습니까? 예수님이 가미 되었죠. 그러면 불신자가 이렇게 시비를 겁니다. “창세기 1장에 예수라고 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지금 유대인들도 그렇게 해요. 예수, 예수 하는데 창세기 1장 1절에 예수가 어디 나와? 아무리 눈뜨고 봐도 예수가 안 나오는데요? 안 나오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했지 거기에 예수가 안 나오잖아요. 그러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고 되어 있지 거기에 예수가 안 나오잖아요.

 

왜 안 나오는 소리를 더 첨부해서 그것을 진리라고 말도 안 되게 우기느냐! 라고 했을 때 여러분들은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이렇게 해야 옳습니다.

 

성경의 능력이 성경책은 성경책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너를 덮치는 활동력으로 지금 활동하고 있다. 성경책은 글자 그대로 낭독하라고 준책이 아니고 성경책 안에 있는 말씀이 성경책을 벗어나서 지금 우주를 관리하고 있는 능력과 힘으로 실행에 옮기는데 그 실행에 옮기는 대상 중에 하나가 지금 너와 나다.

 

그렇다면 말씀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말씀이 우리를 덮쳤을 때 우리는 구약을 해석할 때 신약을 경유해서 해석할 수밖에 없죠.

 

구약에는 예수님이 빠져 있지만 정답이 되는 최종적으로 마감이 되는 마지막 최종 정답, 항상 수학 정석 책 뒤에 보면 정답이 나와 있잖아요.


마지막 정답을 경유해서 다시 구약을 보니까 이제는 구약이 새롭게 보이는 거예요. 태조에 예수님과 더불어서 창조했구나 하는 것이 이게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 그게 그렇게 되어 버리면 창세기 1장에 뭐라 겹치겠어요? 요한복음 1장도 겹치고 골로새서 1장도 겹치겠죠.

 

그렇다면 성경은 성경책 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날아다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 날씨가 흐리다. 구름이 끼었다. 황사가 온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나온 능력입니까?

 

바로 성경 속에 있는 능력이 지금 우리 눈앞에 황사로서의 모습으로 지금 나타난 거예요. 지금 신비주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이런 이야기이에요. 그렇게 어렵게 복잡한 게 아니에요. 간단한 겁니다. 지금 앞에 전봇대에서 새가 짹짹 운다. 친구가 묻죠. 그러면 저 새가 누가 기르시나? 그렇게 물으면 모르죠. 새는 지 엄마가 키우겠지 뭐!

 

자기 엄마가 키우는 게 아니죠. 새는 누가 키웁니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누가 키우죠. 주께서 친히 기르시죠. 너는 어떻게 아는데? 성경책에 있는 내용이 성경책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고 그게 성경 밖으로 나오죠.

 

나와서 지금 짹짹 거리도록 했죠. 누구를? 참새를, 그리고 그것을 봄으로 인하여 보고 있는 내가 거기에 대해서 의미를 주도록 주께서 정신적으로 조치를 했죠.

 

아하, 참새가 짹짹하는 것을 보니까 주께서 기르시는 구나! 그러면 그런 말을 하는 나는 누가 기르지? 주께서 나를 지금 기르고 있는 거구나! 참새야! 너나 내 신세나 똑같은 신세다. 다 주님이 기르시나니, 그런데 참새는 죽는 것을 걱정 안하죠.

 

우리는 평소에 염려하고 있습니다. 주여,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참새보다 못하군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주께서 책임지는데 왜 그것을 생각했을까? 그러면 옆에 있는 안 믿는 친구가 뭐라 합니까? 너는 왜 인생을 복잡하게 사느냐? 이렇게 나오겠죠.

 

인생을 왜 복잡하게 사느냐? 그냥 남들처럼 살라고 이야기하게 하신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죠. 그래서 성경대로 하자는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인 줄 아시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살해야 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고요? 이것은 상식적인 글자를 봐서는 몰라요. 알 수가 있어요. 그렇게 이해되고 그렇게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세요. 예수님이 보일러를 깔아서 그렇게 해요.

 

그래서 강의 처음부터 지금 까지 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겁니다. “없음”입니다. 성경은 없음으로 시작해서 해석하지 않으면 성경 해석이 안 됩니다.

 

“없음” 그 없다는 말을 오늘 본문에서는 16절에 보면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죽지 아니함이 있다는 말은 죽음이 없다 이 말입니다.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그렇게 되어 있죠.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해도 제가 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지 취지를, 여러분들이 감을 좀 잡았으면 좋겠어요. 뭐냐 하면 성경에 있는 이 내용이 우리의 체험으로 감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게 사실상 의미 없는 이야기에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내 일상에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성경에 적혀 있어요.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주께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유도하세요.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라고 되어 있죠. 의도적으로 그렇게 다시는 거예요.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그러면 인간이 있어서의 세상은 체험 세상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은 방금 제가 적었던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은 결국 뭡니까?

 

안 보이고 망원경으로 봐도 안 보이고 실험실에서 조사해도 안보이고 단서를 안 남긴다면 그 쪽은 있음 쪽이 아니고 없음 쪽에 속합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이 시점에서 내리는 결론은 이겁니다. 성경의 어떤 내용도 우리한테 없습니다. 성경 디모데, 마태복음, 어떤 구절도 우리한테는 없는 대목이에요. 아이, 예수님이 실제로 계셨잖아! 실제로 계셨잖아! 라고 말을 해도 그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한 겁니다.

 

왜 오해했는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갔고 하나님이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도 그분을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고 알지 못하는 뿐이라는 것을 인간 사람들은 보기 때문에 그것을 믿지를 못했던 거예요.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나 예수가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야!

 

이미 그것을 정답으로 내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지를 못한 겁니다. 보고도 보지 못한 것, 그거 희한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개한테 던지지 마세요. 어디 귀한 진주를 개한테 던집니까? 그 사람들은 귀한 줄 몰라요. 돼지한테 귀한 보석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들은 성경 이야기를 하면 성경을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도록 설명을 하려고 할 거예요. 오늘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으로 하늘에 계시다. 그래서 보지 못한다? 아닙니다. 결코 그런 뜻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본인 모습으로 와도 그들은 하나님을 못 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은 없는 것으로 시작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지는 창조했는데 창조주는 창조된 피조물 속에서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보고도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그렇게 하신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성령이 와야 비로소 정답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으로 좀 알았는데 성령이 오니까 확실히 알더라.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육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점점 더 엉뚱한 길을 가서 주님의 나라에 못갑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나라는 인간들에게 가리어졌고 숨기어 졌고 알지 못합니다. 성경 어느 대목으로 이해하지 마세요.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시편135편에 제가 예를 들 테니까 여러분들이 어떻게 체험했는지 여러분들이 한번 들어 보세요. 해를 지으신 분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자, 여러분 해 보고 감사한 사람 손들어 보세요.

 

뭐 장마철인가요? 오랜만에 해 봅니까? 장마철 말고 평소에 해를 보고 감사한 것 말고 거기서 인자하심을 끄집어 낸 사람 손 들어보세요. 밤에 달 보고 인자하심을 끄집어 낸 사람 손들어보세요.

 

없습니다. 왜냐 하면 달의 존재는 그냥 보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나의 존재를 경유해서 보게 되어 있죠. 내가 여기 있으니까 달이 저기 있구나! 그거 달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확장이라 해요. 내 현실에 나에서 출발한 내 존재의 확장 가운데 달을 거기다 범주에 집어넣은 거예요. 달은 지금 인자하심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그 발산된 인자가 나한테 포착되지 않는다는 말은 나는 주님의 범주에서 탈락자에요.

 

나는 나의 범주를 고수하다보니까 주님이 발산하는 주님의 계시가 내 범주 안에서 지금 삭제되어 있어요. 알기는 뭘 알아요? 아무 것도 몰라요.

 

그러면 또 질문 하겠습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고 창세기 1장에 되어 있죠. 질문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낮과 밤을 왜 구분해 놨습니까? 합치지 다 낮이면 좋을 텐데 천국 보세요. 다 낮이잖아요.

 

왜 낮과 밤을 구분 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답변을 못하는 것은 이래서 답변을 못하는 거예요. 원래 하나님께서는 낮과 밤을 구분해서 끝! ‘원래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구분해서’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거기서 무엇을 빼야 되냐, 하나님을 빼야 돼요. 원래 낮은 낮이고 밤은 밤이야! 원래 세상은 그래 ! 그래야 솔직한 답변이에요. 하나님을 거기에 집어넣으면 안돼요.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낮과 밤을 경계하는 거기서 바로 하나님 그리스도가 도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나와요. 빛이 오매 비로소 어둠이 어둠으로 되는 겁니다. 하루에서 낮과 밤을 수평으로 구분했다면 요한복음에서는 낮과 밤을 수직적으로 구분해 버렸어요.

 

그 수직적 구분에서 누가 끼어드느냐, 예수 그림이 끼어듭니다. 어떤 식으로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을 도입해서 끼어드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라 하는 것은 창조했던 그 분의 명예와 영광과 그분의 격과 그분의 가치와 의미를 호위하라고 둘러싸라고 시간과 공간이 주어 졌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고난 받을 때 공생애할 때는 예수의 시간은 뭐냐, 일반 인간들과 동일하게 시간과 공간이에요.

 

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 됐잖아요. 그럼 죄인들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뭐냐 하면 미래가 보장돼요. 때가 되매 십자가 질 때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고난 받고 사흘 만에 부활 하셨잖아요. 부활하게 되면 시간과 공간은 거기에 격에 맞도록 새롭게 조성되는 겁니다. 그게 새 하늘과 새 땅이에요. 피조물도 새로 만들어 지고요.

 

탕자가 집에 왔을 때 아버지가 한 게 뭡니까? 야, 고생했다! 목욕하고 자거라! 네 자리 비워 놨다! 하고 끝났습니까? 아니죠. 탕자가 놀랬어요. 손에 가락지 5캐럿짜리, 야야가 받은 5캐럿짜리 그 비싼 엄청난 가락지에다가 소한마리에다가 고급 의복까지, 놀란 것은 탕자가 놀란 거예요. 왜냐, 내 격에 안 맞는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하는 말이 네 격에 맞도록 입은 게 아니야! 이것은 아버지의 기쁨의 표현이에요. 이 말은 뭐냐? 탕자는 아직도 자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내가 이런 잽이 안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받습니까?

 

세상은 탕자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이냐 하면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 중심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범죄하고 난 뒤에 항상 세상을 누구의 현실로 조립하느냐 하면 내 중심으로 내 사적인 개인 중심으로 내 행복을 위해서 내 편리를 위해서 내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따로 잘라내요.

 

가위로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영역, 개 오줌 싸듯이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구역, 일본 말로 내 구역을 나오바리, 여기서 여기까지 내 구역, 뜨내기들이 장사하지 말라고 내가 포장마차 하는 내 나오바리야! 딱 내 구역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은 균형과 협력과 타협의 세상입니다. 각자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 줌으로서 자신의 영역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왕이요? 이 세상의 왕은 추첨해서 뽑아요. 조건이 있어요. 내 영역, 내 소유를 지켜 주는 조건하에 당신을 왕으로 인정하고 만약에 내 소유, 내가 가진 재산이 흔들리면 당신은 하루아침에 암살당할 준비를 해라! 이겁니다. 누가 죽일지 몰라요.

 

그래서 이 세상은 지도자는 항상 영웅이에요. 예상 밖의 혜택을 주게 되면 영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노아가 왕이었습니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할 때 노아가 왕이었습니까? 그냥 노인네죠. 왕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심판은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심판했잖아요. 그러면 결과적으로 누가 왕이에요? 누가 화투 패를 쥐고 있는 거예요? 홍수를 누가 일으킨 겁니까? 심판주가 누구에요? 노아 쪽에 있죠. 그러면 결과적으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들에게는 노아가 없는 거예요. 그냥 노아에게는 그들이 없는 거예요. 자기 식구들 빼놓고 다 죽었으니까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한테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보일러 깔린 사람한테는 성경만 있어요. 말씀만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현실은 참새요, 말씀대로 살고 있어요. 우리의 발걸음, 말씀대로 움직입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은 그것을 발굴하는 겁니다.

 

그러면 왕은 어디 있느냐? 왕은 바로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겁니다. 바로 사도 바울의 복음은 그거예요. 지금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죠? 내 말 맞죠? 동의하시죠? 그것을 묻는 거예요.

 

아, 천국가기 위해서 성경 한번 해석해 볼까? 이런 거 아닙니다. 그거 아니에요. 그냥 있는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확인 차 보니까 이 상황이 디모데전서 6장 15절 16절 이 상황 속에 이미 우리는 놓여 있어요.

 

우리가 놓여 달라고 요청 한 적도 없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입니다. 내가 왕이야! 끝! 끝났어요. 왕 맞습니다. 끝났어요. 의견조율 간단히 끝났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왕이다. 오케이! 왕으로 인정합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성도에게만 하나님이 계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숨기시는 겁니다. 해석? 네가 원대로 해석해 봐라! 거기서 예수그리스도가 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언급한다는 것은 우리는 항상 실패자입니다. 우리는 우리 현실만 고집했습니다. 그 중에 탕아가 접니다. 라고 고백을 한다는 것은 성령 받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유대인들이 어찌할꼬! 했죠. 그 사람들이 돈이 없어 어찌할꼬! 주식 값이 떨어져서 어찌할꼬 했습니까?

 

그들이 어찌할꼬! 라고 만든 그 외침이 뭐였습니까?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었다! 저쪽 반응은 뭡니까? 어찌할꼬? 그러면 청와대 국회에 가서 해 보세요.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하면 새누리당하고 새민주당 사람들이 아, 어찌할꼬? 하고 가슴을 칩니까? “여기 교회 아닙니다. 잘못 들어 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어찌할꼬?” 없어요. 그 말은 우리의 현실이 현실입니다. 우리한테 현실을 가르치지 마세요! 우리 현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제 말은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냥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은 이것은 위선자에요. 왜 신앙생활 해야 됩니까? 신앙생활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시키시는데요.

 

시키는 사람 없거든 내가 하세요. 지금 모든 말씀 자체가 주께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왜 또 활동해야 됩니까?

 

활동하면 할수록 활동이 가로막히는데요. 주님을 욕되게 합니다. 우리는 피동적입니다. 활동하게 하셔서 활동하는 겁니다. 활동하게 하셔서를 놓쳐버리니까 그것을 빼버리니까 아, 나라도 설쳐야지! 설쳐 보세요. 그게 영광이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 내용이 뭡니까? 오늘 본문 내용은 간단한 거예요. 네가 설치든 가만히 있던지 여전히 하나님은 왕이시다! 끝! 아쉬운 거 없죠? 걱정 없죠? 그냥 넘어 가겠습니다.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애가 아파요? 오케이! 감사 오케이 넘어갑니다. 당신 현실은 없습니다. 내 현실 밖에 없습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제가 서론적으로 길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그 없음이 어떻게 없음이 처음부터 출발하는지 그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우리가 아는 교회에서 들은 상식 이야기를 먼저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앞장세워서 일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 바깥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의 핵심은 뭐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움을 하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 싸움터로 번져지는 것이 곧 이 세상이다. 왜? 하나님은 약속하신바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차후에 역사라는 것이 뒤에 생기기 때문에 그 모든 역사는 앞에 제시한 그 핵심부분 긴긴 그림자에 해당된다. 이 정도는 다 알고 계시죠.

 

그렇다면 그 정도 알게 되면 어떤 결론이 있느냐 하면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 것입니다. 라고 이렇게 정리하게 되면 별로 틀렸다는 느낌이 안 들잖아요. 그렇죠? 왜냐 하면 여호와 자체가 약속을 앞장세우고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의 후손은 어디서 왔으며 뱀의 후손은 어디 있느냐? 뱀은 알아요. 뱀은 이렇게 기어 다니는 것을 알아요. 여자는 알잖아요. 반이 여자니까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라고 다 알잖아요?

 

그런데 뱀의 후손은 어디 있죠? 여자의 후손은 어디 있죠? 이게 바로 제가 아까 강의 한 없음의 존재에요. 분명히 그 현장에 아담 있었고 하와 있었고 뱀 있었습니다. 뭐가 없어요? 그 후손이 없는 거예요.

 

만약에 그 자리에서 후손을 등장시키기 위해서, 여자의 후손을 있게 하기 위해서 남자를 집어넣어버리면 그것은 여자의 후손이 아니고 남자의 후손이 되어야 돼요. 왜냐 하면 그전에 여자의 후손이라 하는 것은 배필 자거든요.

 

여자는 단독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여자 곁에는 항상 여자라는 말을 하기 전에 이것을 반드시 옆에 누가 있느냐 하면 그냥 여자가 아니고 누구의 여자, 누가 먼저 앞서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여자를 마이너스 남자라 하잖아요. 마이너스 남자를 여자로 대체함으로 말미암아 여자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남자를 잠자게 해서 갈빗대를 빼서 만든 거예요. 그러면 남자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서 여자가 출현했고 여자는 다시 회귀, 돌아와야 돼요. 어디로? 남자의 의미를 보여 주기 위해서 여자는 고무줄 당겨놨으면 손을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후딱 다시 원 위치로 가죠.

 

거기서 여자가 남자를 사모한다는 말은 나는 남자 없이 살래! 따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여자의 본래의 기능의 역할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뭐가 된다? 두 사람이 숫자 2가 아니고 하나다.

 

하나의 범주 안에서 남자 여자가 있으니까 그것을 1더하기 1이라 하지 말라 그것은 마트에서 하는 거고요. 1+1이 아니고 그 전체가 1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처음 죄짓기 전에 아담과 하와가 아무 이의가 없어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니까 두 사람이니까 2이라고 쓰고 싶죠. 그러나 처음에 죄짓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이게 바로 1이다 말이죠.

 

무슨 뜻이냐 하면 두 사람이 있게 해 놔야 1이 빛이 난다는 겁니다. 혼자서는 1이 안 나타나요. 둘을 만들어 놓고 1맞지? 예 그렇습니다. 할 때 그게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1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의 머리가 몇 분입니까? 1이죠. 그러면 교회의 수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교인의 수자가 몇 명입니까? 144,000이죠. 144,000이 어떻게 1이 됩니까?

 

144,000이기에 그게 1이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거기에 동일하게 연결되어 있는 끈이 있어요. 그게 12곱하기 1,000입니다. 12라 하는 것은 언약을 숫자로 표기하면 12가 돼요. 왜냐, 국가적 집단적 언약의 최초가 야곱의 12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해서 12명의 자식이 있잖아요. 선을 보면 안돼요. 레위가 유다를 보면 안돼요. 야곱을 경유해서 봐야 돼요. 볼타전지 알죠? 볼타전지 실험할 때 수용액 넣고 연결해서 아연 넣고 중간에 꼬마전구 물리시간에 해 봤잖아요.

 

볼타전지 양쪽에 수용액으로 뭔가 경유할 때 하나가 있으면 1이 안 나와요. 분명히 둘인데 그게 하나라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둘이라고 여기는 인간적 차원에서 주의 언약을 해석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2명이 1로 우기는 것은 출발점이 위에서 출발에서 1에서도 출발에서 1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출발하느냐? 나 여기 있소! 나로부터 출발하니까 어 나 말고 또 옆에 누가 있거든요. 여자? 그럼 둘이네! 그러니 1은 아니지!

 

그러니까 이것은 1로 쳐도 나라는 주장의 1로 나에게 1로 오는 거예요. 이게 죄 짓고 난 뒤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뭐라 하느냐 하면 저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하고 남자가 아내의 탓으로 돌렸잖아요. 비겁한 남자, 끝까지 지켜 줄줄 모르고 저는 안 그랬어요! 이런 뜻이잖아요.

 

제가 안 그랬어요. 따먹었지만 죄는 먼저 여자가 지었습니다. 여러분, 그게 보일러가 안 깔려 있으면 맞는 이야기죠.

 

보일러 깔린 사람은 내가 먼저 따먹지 않았고 여자가 먼저 따 먹어서 여자가 죄가 더 많습니다. 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나의 죄인 현상으로 들어난 겁니다. 라고 이야기해 줘야 돼요.

 

남의 애가 공부를 잘하면 기분이 나쁘고 내 애가 공부를 잘하면 기분이 왜 좋으냐?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나로 출발하지 말라고 그렇게 죄를 범하게 의도적으로 하신 겁니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의미는 다 엉터리구나! 다 죄가 되는구나!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 다할 때 까지 목숨 다할 때 까지 우리는 우리만 생각하도록 그렇게 편성이, 속성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유지 해 주십니다. 그게 감사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항상 유지 해 주십니다. 항상 나는 나의 의미로 되돌아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눈에 체험되고 보이는 것만 가지고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만 쏙쏙 뽑아서 신이 어떠니,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니 성령의 역사가 어떠니, 삼위일체가 어떠니, 그런 식으로 자기의 신앙을 변호하는 그런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지금 여자의 후손을 이야기하면서 손도 못 데고 있어요. 난해해서요. 그 전에 지금 새로운 부분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남자하고 여자라 할 때 남자로 다시 귀환되어야 해요. 왜냐 하면 여자는 남자를 위한 배필 자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액기스로 집어넣은 약속의 핵심은 뭐냐 하면 남자 안에 여자의 후손이 아니고 남자가 아예 없어요. 탈락해 버렸어요.

 

그러면 이 여자는 귀환할 수 있는 남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귀환할 수 있는 남자가 없어요. 그리고 뱀의 후손이라니? 뱀의 후손? 뱀도 암컷 수컷 구분되는 겁니까? 뱀의 후손은 어떻게 생겨나는 거죠? 뱀이 새끼를 쳐서 후손이 나타나는 겁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해석할 때 그 시점에서는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미 신약에서 정답을 경유해서 다시 창세기 3장을 해석 줘야 됩니다. 왜냐 하면 새언약이니까 새언약은 마지막 언약이에요.

 

더는 없습니다. 다른 언약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 할 때 그게 마지막 정답이에요. 이미 정답을 안다면 앞에 있는 것은 뭡니까? 그것은 문제지에요. 주께서 북치고 장고치고 다 하신 겁니다.

 

주께서 문제 내고 주께서 해석해 버린 겁니다. 인간은 인간의 의견을 묻지 않아요. 다만 인간은 주님께서 자기 문제 푸는데 있어서 같이 휩쓸러 가도록 그렇게 조치한 거죠. 원치 않는 상황 속에 휩쓸려 가도록 그렇게 하신겁니다.

 

여자의 후손할 때 우리는 여자가 누구냐? 그리고 여자가 누구냐를 알아채면 그 다음에 플러스로 후손도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이게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라 하는 것은 뱀의 후손과의 그 사이에서 나오는 어떤 사건들이 있어요.

 

그 사건들을 누가 받아내는가, 그 후대 역사의 표면에서 이것을 받아내요. 그 사건이 뭔지 여러분 알죠? 한 쪽은 한 쪽을 물고 한 쪽은 그 머리를 치고 그럴 때 결과적으로 소급해서 여자의 후손과 뱀은 뒤늦게 나타난 겁니다.

 

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누구냐고 묻는 것은 그 묻는 당사자의 공통된 지평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가 어딘데 그런 것을 물어? 네가 놀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다른 세상에 대해서 네가 물을 입장이 못돼! 그런 뜻이에요.

 

네가 사는 것은 이미 윗대 사람들이 하던 것에 대해서 혜택을 받거나 아니면 배제 되거나 그런 문제이지 ‘주여! 누구십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 너는 나한테 그것을 물을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성경을 볼 때 극히 작은 거, 이미 죄 지었다. 죄 지었으면 우리가 문제가 있다. 심지어 어떤 문제가 있느냐? 아내를 보고 아까 한 몸이라고 분명히 했잖아요. 그런데 끝났어요. 한 몸 아니에요. 몇 사람입니까? 분명히 두 사람 되어 버렸어요. 두 사람 됐잖아요.

 

그런데 죄짓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두 사람이기에 한 몸이라는 것이 그게 더 자연스러운 거예요. 세 명이기에 하나이고 144,000명이기에 하나다.

 

뭐가 이상해요? 에이 144,000명이 어떻게 1이 돼! 그게 묻는 게 더 이상 하네! 하나에서 나왔으니까 144,000명이 하나로 회기하고 돌아가는 것이 그게 뭐가 이상해?

 

엄마, 아빠는 왜 나를 닮았어? 바보야, 질문을 거꾸로 했다! 나는 왜 엄마 아빠를 닮았어? 이렇게 질문을 해야지 출발을 어디부터 하느냐? 엄마 아빠가 왜 나를 닮았어? 이거 자기가 주인공이잖아요.

 

한 대 쥐어박아야 돼요. 이게 어디서 거꾸로 이야기를 해! 그러다가 더 되바라진 질문입니다. “엄마는 왜 나를 낳았어?” 고상한 답변은 네가 부모 되어 아이 키우면 안다는 유명한 노래에 나온 것처럼 네가 애 키우면 안단다. 키워봐도 몰라요. 인간은 자기한테 귀환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본론 들어가려니 겁납니다. 왜 겁나느냐 하면 두 사람이 되면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분명히 아담과 하와가 두 사람이잖아요. 그 과정에 누가 개입했어요? 하나님이 개입했죠. 하나님이 개입했으면 하나님의 개입을 2, 3이라는 우리가 아는 숫자로 이렇게 측정을 하면 안돼요.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주님은 한 분시니까 한 분이 하는 일은 다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인데 하나만 나와야지 하는 인식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가 다양성을 낳더라도 무조건 그것은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걱정입니다. 둘이 갈라서면, 아담과 하와가 갈라서면 어떻게 하나가 되지? 그것은 바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비로소 발생되는 걱정꺼리가 되는 겁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것을 아는데 제가 어떻게 믿으면 되겠어요? 라고 걱정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뜻이에요. 저는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믿음인거예요. 이미 믿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믿을 필요가 없어요.

 

주님이 주신 믿음이라는 체제 안에 있으니까 개인의 믿음은 개인용이지만 주님의 믿음은 집단용이거든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만 믿는 게 아니고 너도 믿었잖아요. 그러면 믿음이 몇 가지에요? 너 믿는 믿음 하나, 내 믿는 믿음 하나, 둘이죠.


목사님 믿음 세 명, 벌써 도대체 몇 명입니까? 그게 아니고 성경에 보면 믿음도 어떻게? 믿음도 하나요. 이게 이해 안돼요? 지금 이해 안 되는 것은 출발점을 내가 아는 상식, 기호, 언어를 자꾸 거기에 적용시키다 보니까 쟤는 믿는데 나는 왜 안 믿어? 걔가 안 믿어요. 믿게 하셨지.

 

뭘 부러워할 것을 부러워해요? 그 사람도, 구원받는 사람도 안 믿었어요. 엘리야도 안 믿고 모세도 안 믿고 아브라함도 안 믿었어요. 주께서 믿게 하셨죠.

 

고함지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 같으면 상상이 안 됩니다. 왜? 아버지가 다 달라요.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고 야곱의 아버지가 이삭입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모두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에요. 엘리야의 하나님과 모세의 하나님이 다 같은 하나님이고 구세주도 하나에요. 하나에요. 괜히 우리의 숫자를 따지지 마세요.

 

하나라는 말은 네가 아는 것 손 놓아라 이 말입니다. 네가 파악해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이성적인 모든 노력을 그것을 손을 놓아버리면 돼요. 어떻게? 죄라고 놔버리면 돼요. 그렇게 죄짓게 하는 것도 하나에서, 말씀의 능력에서 나왔으니까 할 것 없어요.

 

신앙생활 할 것 없다니까요. 다만 우리의 할 것은 주여, 어떻게 해서 우리를 구원했습니까? 주님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해야 돼요. 관심 있어야 돼요. 분명히 안 되는데 어떻게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해 내셨죠? 놀라워라!

 

그것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가 노력한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가지고 놀았느냐에 대해서 증거하는 겁니다.

 

주님이 욥을 얼마나 가지고 놀았습니까? 만날 하나님께 원망하고 나중에 끝에 가서는 제가 잘못됐습니다. 성경에 내가 잘못됐다고 분명히 나왔는데 우리는 욥을 이해 못해요. 욥이 뭐가 잘못됐어? 고난 주신 하나님이 잘못 됐지.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KO승 욥의 손을 들고 욥의 친구들이 패배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해석은 어느 쪽이냐 하면 욥의 친구의 해석이 나오는 거예요. 욥의 친구에서 욥으로 건너갈 수 있는 그런 머리가 안 떠 올라와요.

 

어떻게 해서 주님은 욥의 친구는 완전히 하나님만 찾았던 그 사람인데 왜 그것을 잘못이라고 하지? 어떻게 그렇지? 예수님을 경유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경유를 하게 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없는 분이에요. 이 땅에 와도 없는 분이에요. 없음을 통해서 있음을 구원하시는 거예요.

 

왜냐 하면 있음 자체가 하나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이것 나름대로의 따로 현실관이 장만되어 버려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뭐냐? 라고 묻지 말고 분명히 하나님이 약속했잖아요. 여러분들이 믿음이 있으니까 그러기를 바랍니다. 이제 믿음대로 해 봅시다.

 

여자의 후손이 있다고 하나님이 하셨죠. 그러면 있는 거예요. 믿어지십니까? 간단하잖아요. 뱀의 후손이 있다 했죠. 그러면 있는 거예요. 누구입니까? 묻지 마세요. 있으면 됐지 왜 물어요? 왜? 알아서 뭐하려고요? 주께서 쓰시는데 다만 여기 둘 사이에서 뭐가 벌어진다? 여기서 투쟁과 전쟁이 일어나죠.

 

여기에 누가 말려들었어요? 여기에 모든 인류가 말려든 거예요. 그 이야기가 창세기 4장 이야기입니다. 아벨은 어느 쪽에 속하고? 여자의 후손 쪽에 속하고 그리고 가인은 어디에 속하고? 뱀의 후손 쪽에 속하고 그 투쟁에서 그러면 아벨은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요. 아벨이 그것을 했다고 해서 여자의 후손을 아는 게 아니에요.

 

아벨은 예수그리스도를 경유해서 비로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누군가가 알아나요. 왜냐 하면 뱀의 후손이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의 적이에요. 그러면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적입니다.

 

미장원 옆에 이발소 있고 이발소 옆에 미장원 있는 거예요. 새로운 것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계속해서 없는 거예요. 누가 당신을 구원했습니까? 당신이 모르는 분이 나를 구원했습니다. 계속 없는 거예요.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아, 예수! 그거 나도 믿습니다.’ 아니거든요. 지금 당신을 안다고 하는 것은 소지하는 것 밖에 안돼요.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나를 소지해서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는 것을 고백케 하는 그런 방향으로 지금 이끄십니다.

 

왜? 주님은 이것을 의식하기 때문에, 뭘 의식합니까? 뱀의 후손의 실존적인 이 문제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뱀의 후손의 지배를 받고 있었거든요. 이것을 우리 인간이 모르고 질문을 해 댄 거예요.

 

마치 뱀의 후손이 아무 쪽도 속하지 않고 제 3의 지역에서 내가 물어서 답변 끄집어내서 그 답변가지고 내가 인정하게 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를 내가 사용했다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건방지게 우리가 대드는 겁니다.

 

첫 째 시간을 결론을 내리면서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이것을 캐내서 연구해야 된다는 그런 걱정꺼리는 좀 들어주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나를 두고 누구와 싸웠는지 우리가 살아가는 사건을 통해서 아,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이렇게 전쟁을 벌였구나! 하는 것을 받아 드리신다면 이제는 우리의 마음은 창세기 3장 15절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50508b (찬양의 요건)―이 근호 목사

 

천국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누가복음 17장 6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보고 이야기했습니다. 천국은 어디 있습니까? 어디라는 말은 바리새인의 개인적인 사적인 시간과 공간론에 입각해서 예수님께 물은 거예요.

 

어디 있는가를 알려 주면 찾아가겠다는 거죠. 예수님께서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 알 수 없다. 너희들이 알 수 없는 곳에 있다 하지 않고 너희가운데 있다 했습니다. 사람들 약을 올리는 겁니다.

 

가운데 있는데 왜 못 찾죠? 주께서 말씀을 하셔도 완전히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말씀이에요. 너희들 가운데 있잖아! 경상도 말로 어데에? 어디 있는데?

 

제가 문제를 내겠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한 쪽은 발꿈치 물고 하나는 머리를 친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한테 물어 봅시다. 아담아,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데? 하와야, 뱀의 후손이 누구지? 몰라요.

 

왜 모르느냐 하면 창세기에 보니까 여자는 잉태를 하고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을 능히 다스리고 남자는 종신토록 일하다가 나중에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자기 업무를 맡았죠.

 

자기 업무를 맡은 상황에서 여자 후손, 뱀의 후손을 알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을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책 구원하라고 줬다고요? 아닙니다.

 

성경책은 주님의 책이지 우리 책이 아니에요. 언젠가 강의 할 때 주님이 성경을 이렇게(우리 쪽으로) 본다고 했죠. 이렇게 보지 말고 주님 쪽으로 돌리라고 했죠. 왜 우리가 보고 있어요? 주님이 봐야죠.

 

이것을 당겨서 봤다는 것은 마치 아담이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아닙니다. 여자 남자한테 다른 징후가 있어요. 너는 일하다 죽어라! 여자야 너는 남자를 사모하다가 해산하고 고통 하다가 죽어라! 이미 다른 사명이 주어져있어요.

 

그러면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은? 그것은 네가 알바가 아니다. 네가 알바가 아니에요. 그럼 우리가 모르는데 어떻게 일을 해? 네가 모른다고 일이 안 돼? 그게 믿음이 없는 거예요.

 

내가 시작하지 않은 일은 나에게 어떤 효과를 주지 않는다는 생각, 도대체 누가 그렇게 가르쳐 준 거예요? 내가 아무 것도 행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천국에 갈꼬? 라고 하는 걱정! 그 걱정 누가 준거예요? 바로 뱀의 후손, 마귀가 그렇게 준 겁니다.

 

그것을 뱀의 후손, 마귀가 줬다고 어떻게 장담하느냐?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한 분이 예수님이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서 정답을 내렸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옵니다. 여자의 후손은 아들, 예수님이다. 그것을 정답으로 해서 다시 창세기로 돌아오는 거예요.

 

돌아와서 보니까 아담과 하와는 멋도 모르고 그냥 자기 인생 살기 바빴지 여자의 후손, 남자의 후손을 눈치 채서 스스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그 갈등이 아담과 하와를 구원 시킨 거예요.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는 주님이 하시는 약속의 쟁탈전에 말려든 겁니다.

 

이게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차려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말려든 거예요. 주의 하는 일에 포함이 돼서 우리는 그것을 구원받기에 포함되는 중에 하나가 성령 주심, 은혜주심이 다 포함이 됐어요.

 

비가 오는데 이 비를 누가 주셨는가? 이것 불신자는 안 묻습니다. 달이 떴는데 달에게 인자하심을 찾아낸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물을게 아니에요.

 

신자는 예수그리스도를 소급해서 보면 정답을 압니다. 주님께서 달을 만드셨거든요. 예수님을 경유하니까 아는 거예요. 왜 주님께서 달을 만드셨을까요? 달 안에 뭘 담고 있기 때문에? 인자하심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달 속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그 하나님은 자기가 아는 하나님이에요? 모르는 하나님이라 생각하겠습니까?

 

본인들이 아는 하나님을 생각했죠. 그게 실수였습니다. 본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몰라요.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른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몰랐을까요?

 

뱀의 후손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몰랐습니다. 왜 뱀의 후손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여자의 후손이 등장 안했습니까? 등장했죠. 등장했는데 못 알아봤죠. 왜 못 알아봤습니까? 뱀의 후손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말장난 하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전제가 뭐냐,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이 누구냐고 묻기 전에 그 둘 사이에 투쟁해서 나온 결과들을 보라! 그 결과가 역사의 장에 펼쳐져 있다.

 

그 역사의 장에 누가 말려들었습니까? 우리의 선배들이 말려들고 지금은 우리가 말려 든 거예요. 어떤 식으로 예수그리스도 아니면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뱀의 지배를 받습니다.

 

거봐, 벌써 그런 고백을 한다는 자체가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이미 그 조합에 네가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잖아! 아하 그렇군요! 그게 바로 믿음인 겁니다.


처음에 제가 뭐라 했던가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가 글자 그대로 읽는다고 해서 그게 신앙이냐 했습니다. 신앙이 아니죠.

 

왜냐 하면 출발점은 어디서부터 한다? 나로부터 출발하죠. 나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이미 내가 숫자를 1로 칩니다. 1로 시작했으면 남이 있으면 나는 1인데 그 사람은 2가 되고 다른 사람이 있으면 3이 돼요.

 

그것을 다시 1로 회복할 수가 있을까? 없을까요? 기껏 봐야 그 일은 누구의 일입니까? 처음 출발한 나부터 챙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이 가운데 누가 천국가지?” “저요.”천국 가는데 한 세 사람 정도도 내가 넣어줄 용의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저 1번이고 저 아는 사람 2번, 부부까지 같이 하라고 3번, 그 사람은 나에게 싫을 수 있잖아요. 나하고 친하기 때문에 천국가도 같이 놀 수 있거든요. 모든 출발점을 우리는 어디서 하느냐 나부터 출발하는 이것이 뱀의 후손에 속한 특징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누구를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죽인 사건을 통해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드디어 우리에게 뒤늦게 차후 적으로 소급해서 파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영육권 속에서 태어나고 살고 있고 죽을 때도 말씀 속으로 사라지는 구나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경의 해석입니다. 이게 말씀 해석입니다.

 

그 다음 문제, 이제 알았다 치고 정의는 뭡니까? 신앙생활 하지 마세요! 이제 정말 부탁합니다. 신앙생활하지 마세요. 먹고 마시고 일상이 신앙생활입니다. 특별히 신앙생활하지 하세요.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렇게 간주합니다.

 

두 번째 문제입니다. 누가 복음 17장 20절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를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를 안 하고 왜 누가복음을 펼치느냐, 창세기를 펼치나 라고 하실 분이 분명히 계실건데 이유가 다 있어요.

 

딤전 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사람들은 백이면 백 이 본문을 보면서 이 나라가 인간 세상 말고 저 하늘나라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시비를 거는 겁니다.

 

이 나라 우리 가운데 있어요. 그게 주의 뜻입니다. 하늘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속에 있느니라, 죄 속에서 의를 끄집어내요. 죄 밖에 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죄속에서 의가 나타납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이미 예수 안으로 하나님께서 시스템을 바꿨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인간들 세상이라는 그것을 완전히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세계로 전환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누가 풍덩 뛰어들었어요? 여기 주스 컵이 있는데 파리가 날아가다가 뚝 떨어졌습니다. 옆에 있는 아버지가 파리를 잡으려다가 분명히 이 근처에 파리가 있었는데 보니까 이 안에 파리가 떨어져 있어요.

 

그러면 이것은 주스의 세계입니까? 파리의 세계입니까? 파리가 든 세계이죠. 이것을 마시겠어요? 못 마시겠어요? 못 마시죠. 이미 찜했으니까 이미 침뱉어났으니까 못 마십니다.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풍덩 어디에 뛰어들었어요? 세례요한한테 세례를 받을 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주님은 주의 나라에 사셔야죠. 이 더러운 세상에 왜 오십니까?

 

주님은 죄가 없으니까 세례를 받을 필요 없습니다. 죄가 없는데 씻을 죄가 있어요? 없어요? 회개할 것도 없죠. 주님은 아니다! 나한테 세례를 줘라!

 

이 세계를 뭐라 하느냐 하면 위에 있는 것을 아래로, 아래 있는 것을 위로 위위 아래아래 위아래 위 아래 EXID가 부르는 노래, 전복 시켜 버려요. 뒤집어 버려요.

 

위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자기가 사는 세상 말고 이쪽 세상에 천국이 있다고 본겁니다. 이거 마귀의 상상력입니다. 악마의 상상력이에요. 하늘나라에는 맨션아파트 있고 맨션아파트에 못 살아 환장했습니까?

 

맨션아파트 가서 음식물 처리 어떻게 하려고 해요? 쓰레기 처리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옆집이 떠들면 어떻게 하려고? 위층에서 떠들면 어떻게 하려고? 맨션아파트가 있다고요? 분명히 예수님이 그 처소는 없습니다.

 

베드로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에요. “베드로야!” “예” “못 온다.” “왜요?” “처소가 없거든” 처소가 없어요.

 

인간은 천국을 나음대로 이미지화 시켰습니다. 이 쪽에 사는 것 중에서 괜찮은 것, 보다 그것을 완벽하게 갖추는 것, 모델링이 잘된 세계, 왜냐 하면 우리의 몸은 이 세계에 적합한 몸이에요. 이 몸을 가지고 천국 가려면 기껏 물들여 놓은 몸이거든요. 이 몸을 그대로 잘 유지를 해서 천국 가서 이 몸 보다 더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하에 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런데 주께서는 우리의 몸을 죽여 버리죠.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 죽여 버리죠. 우리를 죽인다는 말은 우리가 죽었던 그 자리가 우리가 가까이에 있는데도 발견하지 못한 천국의 자리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느냐 하면 우리 인간은 죽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의 의미의 정복이에요. 하나님이 늘 죽인다고 하면 인간은 죽는다는 뜻이 끝장나는 것,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죽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통일체 이전에 조각조각 난 찢어진 몸조각으로 환영 되는 것을 죽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옛날 고문할 때 양쪽에서 잡아 당겨 찢으면서 이래도 네가 이단 아니냐? 이런 식으로 재판하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면서 조선시대 때 그렇게 했거든요.

 

네가 몸이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고 찢어버리는 것을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겁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이미 그 단계를 거쳐 왔기 때문에 이미 통일체, 거울을 보고 저 거울이 내 모습인 것을 알고부터 이미 들어왔기 때문에 그것을 거울단계라고 하는데 들어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이미 경험한 것이 있기 때문에 끝나죠.

 

무슨 말이냐 하면 부자가 이 땅에서 물을 마셨잖아요. 물을 마셨기 때문에 지옥이 힘든 거예요. 이 땅에 살면서 부자가 사우나 뜨거운 기운만 받았으면 뭐 지옥도 뭐 살만할 거예요. 왜? 뜨거운 경험을 했기 때문에요. 그런데 이 땅에서는 물을 마셨기 때문에 지옥 가니까 제일 먼저 뭐 달라고 했습니까?

 

내가 내 몸에 필요한 것이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군에 들어가면서 건강식품, 비타민을 챙겼다는 거예요. 나는 남자다 하는데서 나와요. 그 비타민을 챙겼다는 것은 말은 평소에 군대 가기 전에 건강을 위해서 비타민을 챙겼다는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군에 비타민을 챙겨 가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잖아요. 특히 훈련소에서는요. 그것을 몰랐죠. 이 땅에서는 나를 위한 조건인데 천국가면 이미 나를 위한 조건이 허용이 안돼요. 왜? 천국에서 보니까 내가 나를 위해서 챙기는 조건 그 자체가 죽음의 원인이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인간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어 버렸어요.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뭐가 끝났냐 하면 죽음이 사라져 버렸어요.

 

인간은 안 죽습니다. 마지막 인자의 땅에 다시 살려 냅니다. 자살한 사람은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자살은 자기에 대한 폭력이거든요. 타인에 대한 공격을 대신해서 자기를 공격한 겁니다.

 

공격할 것이 없으니까 자기를 공격한 것이 자살이거든요. 죽으면 참 좋겠는데, 없어지면 좋겠는데 인자의 마지막 날에 선한 자는 선한 부활로 다시 호출해 버려요. 안 죽어요. 이것 보다 더 심한 저주가 있을까요?

 

죽어서 고통이 없으면 좋겠는데 그것 때문에 자살했는데 자살해도 또 살아났어요. 저는 그것을 뭐로 비유하냐 하면 약간 공기 빠진 풍선을 발로 밟아보세요. 분명히 밟혔죠. 납작해 졌어요. 발 떼 보세요. 다시 원상복귀 되죠. 이것은 밟아도 없어지지 않아요.

 

환장할 지경입니다. 그것은 나를 다른 분의 용도를 위해서 다른 분의 의미를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위해서 내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간단한 것을 인간들은 몰라요. 마치 내가, 나라는 존재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처럼 나의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유행을 하고 있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은 행복이죠? 행복해서 뭐할 건데요? 예수님 말씀이 이거잖아요. 이 땅에서 네가 고생했기 때문에 호강해 봐라! 하는 이런 원리이잖아요.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할 때 부자야 이 땅에서 맛있는 것 다 먹었잖아! 거지는 거지로 살았다, 이제는 호강해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이것은 천국에 못 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런 인간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에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을 위하여 나는 너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나를 위하여 살아야 됐음에도 불구하고 못 살았으니까 저주 받으라는 저주를 보여 주는 용도로서 그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려 두면서 저주해 버려요. 그런 권리가 주님한테 있습니다. 왜? 창조주니까요. 창조주를 창피하게 무시하지 마세요. 오늘 본문에서 이 말씀이 나오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해요. 아, 하나님이 저기 존재하는구나! 세상에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존재하지 않느냐, 이 존재라는 말을 내가 나한테 쓰기 때문에 그런 존재는 안 계세요.

 

인간은 존재는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실존적 존재가 있고 하나는 의미적 존재가 있어요. 둘 다 엉터리에요. 실존적 존재가 있다는 말은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컵이 있는 것처럼 있다! 이것을 있다고 본거예요. 아무 의미 없어요.

 

여기 마이크 있네! 그래서? 하나님이 묻습니다. 그래서?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있는 목적은? 몰라요. 모르잖아! 목적을 모르니까 있어도 그것은 정답이 아닌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 있는 거야! 이렇게 해야 정답이 되는 겁니다.

 

바보도 아닌데 간단한 것도 다 이야기를 해야 돼요. 워낙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습관화 되다 보니까 정말 바보 같이 살고 있어요.

 

바보같이 산다는 말은 뭐냐? 꾸짖는 게 아니고 안타깝다는 말이죠. 걱정할 것도 아닌데 걱정하고 근심할 것도 아닌데 근심하고 염려할 것도 아닌데 염려하고 신경 쓸 것도 아닌데 신경 쓰고 있고요.

 

어떤 사람이 그런 질문했죠. 목사님, 저는 청년인데 자위하는 것을 못 끊겠습니다. 어떻게 하면서 좋습니까? 바보도 아니고 자위하고 안 하고 거기에 왜 의미를 둡니까? 의미를 두니까 그게 족쇄가 되는 겁니다.

 

나는 자위를 안 하면 나는 훌륭한 사람 될 거야! 그게 정답이에요? 의미는 하던 안 하든 의미 없어요. 담배를 피우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담배에 의미를 둔 것이 나빠요. 그게 죄에요. 담배에 의미를 둔게 죄에요.

 

주께서 피우라고 쓰실 때 있겠지 하면서 피우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럴 용기도 없어요. 의미는 내가 두는 게 아닙니다. 의미는 그분이 주는 거예요. 우리는 나한테 의미를 주고 내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아까 안양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삼위일체라는 게 없어요. 삼위일체 자체가 사단의 생각입니다. 엉터리입니다.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고, ‘계시고 뜻이 뭔데?’ ‘내가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틀린 거예요. 내가 있는 것처럼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실존하는데 나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둘 다 틀렸어요.

 

의미는 누가 주느냐? 의미는 중보자, 주님이 주십니다. 어떻게 알아요? 몰라요. 나중에 주와 함께 죽고 난 뒤에 소급해서 내가 죽었다고 치고 그 다음에 다시 보게 되면 그 의미가 발생돼요.

 

아, 죽는 것이 영광이구나! 죽음이라 하는 것은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죽음의 의미는 죽어가면서 죽음의 의미를 몰랐어요. 죽음의 의미는 누가 갖고 있느냐, 그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이 진정한 최종적인 죽음입니다.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 그날 왜 안 죽었죠? 이튿날 죽었어요? 따먹는 그 다음에 뭡니까? 따먹는 날에는 그 날이 몇 시간인데요? 24시간? 15분 44초 남았다. 15분 43초 남았다. 그래서 죽습니까?

 

흙이 됐죠.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왜?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은 마지막 최종적인 마지막 예수님입니다. 죽음이 뭐냐?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죽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령 버림을 받을 당할 것이다. 그게 죽음이에요.

 

지옥 가서 안 죽어요. 살아 있는 채로 버림당하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께만 유일하게 나타난 죽음의 의미에요. 그러면 산다는 게 뭡니까? 오래 사는 것? 큰일 날 소리에요. 지옥가도 영생 얻었겠네요? 오래 사니까요.

 

산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알아요. 예수님만이 압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는 것이 사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는 것은 휴식하는 겁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쉬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성도가 죽는 것은 주 안에서 쉬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도마야!’ ‘예’ ‘깨우러 가자!’ 주님은 깨우러 가자! 사람들은 죽은 줄 알고 있어요. 죽은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너희들이 죽어 보이지 내가 보기에는 잠자고 있는 거예요.

 

죽음은 예수님만이 독점하고 있어요. 문제는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이게 현실적으로 반영이 안 된다는 겁니다. 현실에 반영이 안 되죠. 벌벌 떨고 이제는 떠는 것이 버릇이 돼서 일부로 떠는 것도 만들어요.

 

일부로 찾아서 걱정꺼리가 없는가? 세상에 경남기업이 저래서 되겠나? 경남기업을 자기가 걱정을 왜 하는지? 얼마나 심심하면 남의 걱정까지 다 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할 것은 그리스도의 의미를 뽑아내는 거예요.

 

그 의미를 어디서 뽑아냅니까? 하늘나라 있는 곳에서 뽑아내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나라가 어디 있는데요? 네 자리가 하늘나라야! 내가 있던 자리가 하늘나라야!

 

왜 그러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터에서 틈새 사이에서 하늘나라가 나오거든요. 예수님이 나오잖아요. 발꿈치 물고 머리치고 하는 그것이 그 당시에는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이니까 어떤 아들을 의미하고 그 당시에는 뱀의 후손이니까 파충류 뱀이 있기 때문에 발꿈치를 물고 한 쪽은 이런 게 있어! 하고 뱀을 대가리를 치고 그 당시 은혜로서는 그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발꿈치 물렸습니까? 예수님, 거기 물리면 안티프라민 하나 바르던지 후시딘 연고 바르면 낫겠네요? 예수님께서 평소에 망치 들고 다녔습니까? 그 창세기 3장하고 예수님 사이의 기간 동안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윤곽을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내요.

 

그 드러내는 방법은 그 틈새, 경계선 사이에서 사건들이 유발돼요. 천국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중보자라 했습니다. 중보자 있거든요. 우리 생각에는 중보자, 매개자니까 인간세상이 여기 있다면 천국은 우리 사는 이곳 말고 중보자 저쪽 세계에 천국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접어 버렸어요. 이것을 접어버려서 위에 것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사라지고 이 접은 것을 우리 인간세계에 중첩시켰습니다. 겹치고 말았습니다.

 

하늘나라가 위에 있는 게 아니고 너희 가운데 있다. 겹치고 말았습니다. 왜 겹쳤는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그 전쟁터가 전쟁이 점점 더 뉘앙스가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고 네가 있는 현장에서 약속이 약속대로 실현되는 장소라면 그것은 약속이 있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 발생되는 장소에요.

 

멀리 찾지 마세요. 그러면 우리가 할 게 없잖아요? 왜 네가 할 게 없어? 너는 뱀의 후손이니까 너 본성, 우리의 본성, 죄 짓는 주 특기 있잖아! 나 밖에 모르는 뭐든지 나를 위해서 사는 것, 그것을 구약에서는 그것을 뭐라 하느냐, 우상숭배라 하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의 선배들의 특징을 보면 우리로서는 뭐 우리라 하면 안 되지만 우리로서는 하나의 기독교, 종교에 해당되지만 구약의 그 사람들은 현실이었습니다. 생존에 관한 문제였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광야생활, 아이고 땡볕에 힘들겠다! 하지만 본인들은 힘들겠다가 아닙니다. 분노를 폭발하지 않을 수 없어요.

 

애굽에서 익힌 몸은 광야에 적합하지 않아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너희들이 상상한 그 약속의 나라는 이 땅에 애초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약속의 나라는 어디 있느냐? 너희들이 불평하는 너희 가운데 불평하기 때문에 그 틈새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겁니다. 반석에서 물 나오고 새벽에 만나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만나 나오는 조건은 뭐냐? 그들은 광야에 가야 되고 만나 나오는 조건은 그들이 원망을 해야 되고 반석에서 물 나오는 이유가 그들이 원망을 해대야 돼요.

 

따라서 우리도 그들처럼 원망을 합시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원망을 합시다. ‘원망을 합시다.’ 라는 말이 어패가 있어요.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 목사님, 사람을 너무 무시한다. 얼마나 내가 영광 돌리고 주여, 오늘도 하나님 영광만을 위해서 저를 도구로 사용해 주십시오! 이렇게 멋지게 기도 하는데 그것을 그렇게 매도하면 됩니까?’

 

그렇게 한다면 제가 묻습니다. 그렇게 기도해서 뭘 얻고자 하는 겁니까? 멋있게 기도 하는 것 그 뒤에 뭐가 담겨 있어요? 이렇게 기도 했으니까 아시죠? 아이 내가 진짜 원하는 것? 이렇게 멋있게 기도 했는데 몰아 주셔야 됩니다. 내가 원치 않는 것 까지 다 보너스로 줄줄 믿습니다.

 

우리는 다 노림수가 없는 인간은 없어요. 괜찮은 것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만큼 반대 보상 해 놔라 이 말입니다. 왜 그러느냐 그게 우리가 애굽에 살던 몸에 익힌 버릇이기 때문에 죽을 때 까지 안 고쳐집니다.

 

철저하게 우리는 나 위주로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께서는 나 위주로 살아야 내 뜻대로 예상 못하는 뜻 속에서 예상 못한 천국의 기쁨이 쏟아져 나옵니다. 아! 이런 기쁨이! 이게 나오거든요.

 

제가 서울에서 누구와 이야기했는데 하나님께서 예상 밖의 큰 기쁨을 줬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 형제가 6명이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은 1라운드이고 2라운드가 남아있죠.

 

아버지 유산을 가지고 어떻게 나누느냐! 그거 문제잖아요. 둘째 오빠가 딱 나섭니다. 그동안 내가 아버지 어려웠을 때 내가 다 모셨다! 나머지 5명이 ok 내가 인정한다. 하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꼭 틀어 버리는 형제가 있어요.

 

법대로 하자! 이래 나왔어요. 그래서 오빠가 삐졌어요. 그래서 다른 형제들이 아이고 그 뭐 몇 천만 때문에 그렇게 싸우나! 하지만 속으로 신납니다. 왜? 아무도 말 못하는 것을 대발아진 형제가 내 속에 있는 본심을 총대를 들고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대신 한 거예요. 아주 당당하게 한 거예요.

 

이게 속의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2년 동안 말도 안하고 형제간에 갈등이 생겼답니다. 그런데 그 오빠가 드디어 돌아와서 그래 법대로 해서 아주 해결이 잘 됐답니다. 뭐가 해결이 잘 됐는지 도대체 모든지 내 뜻대로 돼야 해결이 잘 돼요.

 

그게 바로 숨겨진 마귀의 본성입니다. 마귀의 본성이 보고 싶다고요? 뭘 보고 싶어요? 그 경계성이 나타났는데요. 우리는 의도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법대로 할 것을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6분의 1로 ok 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못 찾아요. 그렇게 해서 아이 그래도 모셨는데 오빠가 더 가져가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왠지 기분은 왜 이리 좋은지요. 몇 푼이라도 더 건지니까요. 안 그래도 돈 쓸 일이 생겼는데 몇 푼 더 건지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요.

 

그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내 죄 때문에 돌아 가셨구나! 내가 바로 탕자구나! 탕자인데 주께서 그 기쁨 때문에 오히려 탕자인데도 불구하고 가락지 준비하시고 옷 준비해 주시고 자신이 의롭다는 자기 기쁨을 스스로 찬양케 하시는 그 고백이 오늘 디모데전서 6장 고백입니다.

 

기분 좋아서 이야기해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복되시고 존재가 아니고 이것을 기쁨으로 고백하려면 우리가 얼마나 이 본문 앞에서 망가져야 합니까?

 

우리는 이 본문을 하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뭐 하나님인데 당연히 그랬겠지! 그러면 기쁨이 없어져요. 난 옛날부터 이거 알고 있었는데! 안돼요. 그러면 기쁨이 없어져요. 그래서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다가 된 통으로 터져서 아, 정말 주님은 빛에 거하시고 주님은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야, 맞아 주님만나고 싶어 미치겠다! 이렇게 되도록 주께서 우리에게 역사할 줄 믿습니다.

 

내가 말씀이 돼요. 그 성경책에 있는 말씀이 살아서 온 우주를 덮고 있다는 것을 나를 완전히 박하사탕처럼 환하게 감미롭게 나를 짜릿하게 만드는 말씀으로 주께서 지금도 땀 흘리면서 땀 흘리는 것까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천국은 네 안에 있느니라.

 

그 다음 봅시다. 중보자가 돼서 겹쳐져요. 겹쳐버리면 인간이 상상하는 세계는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면 그 세계는 사단의 세계입니까?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만 알아요. 왜냐,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알아요. 그 아버지만의 하나님이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그러면 사람들이 만든 유대인들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은 지어낸 자기 아비가 사단이니까 사단이 지어낸 하나님을 걸쳐놓는 거예요. 왜? 왜 걸칩니까? 중보자 메시아를 기다리는 의미로 중간에 비워놓기 위해서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은 저기 있는데 이제부족한 것은 뭐가 부족하다? 때가 되매 메시야가 여기 위에서 오면 되니까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6장 15절 봅시다.

 

딤전 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어떻습니까? 나 구원받고 하나님 계시니까 자기 나라 몰고 오시겠지! 그게 엉터리에요. 그러면 어떤 것이 엉터리가 아닌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나를 못살게 굴어요. 손 떼게 만듭니다. 암은 4기 말기이고 병원도 손을 뗐어요. 그리고 가족들 다 떠났습니다.

 

욥처럼 온 몸에 종기가 있습니다. 나의 가치도 다 날아갔어요. 나의 의미도 없어요. 이제 가족들도 다 떠나버리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개가 와서 핥고 난리 났어요. 개도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우연히 누가 성경 관리를 잘못해서 디모데전서가 찢겨서 바람에 두 바퀴 반 돌아서 내 얼굴에 붙었습니다. 떼어보니까 “하나님이 그의 나타남을 보이리니” 이게 왔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타나기 위해서 전제 작업으로 나를 완전히 엉망으로 망쳐놓은 거예요.

 

인생 망쳐놓은 그곳이 바로 나타날 하나님이 계시를 한 거예요. 주여, 이 나라가 있으니 이보다 더 나를 망친다 할지라도 저는 감수하겠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곧 성경에 살아 역사하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단순히 성경책을 해석하는 게 아니고 사도 바울의 마음 자체가 성경 확장 연장선에 있어요. 확장되었어요. 그게 인력으로 안 됩니다. 주께서 망쳐주셔야 됩니다.

 

나 중심이 나 중심일 수밖에 없는 것을 혹독하게 경험해야 돼요. 모든 근심 걱정이 세상을 내 중심으로 봤던 숫자 1로 봤던 그 후유증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내 숟가락으로 내 눈을 찔렀던 바보짓이었다는 사실을 주께서 밥해 주고 빌려 줬는데 전부 다 우리는 내가 노력해서 내가 취직해서 열심히 일해서 이만큼 얻은 것으로 간주하는 못된 버릇, 그 뜻대로 안 해 주시는 그 고마움으로 인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말씀의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뱀의 후손의 지시를 받았으면 뱀의 후손이네! 아닙니다. 뱀의 후손에 속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것이 여자의 후손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실체를 알게 되는 겁니다.


죄 플러스 피가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것이지만 다시 하겠습니다. 죄+피=언약입니다. 피만이 언약이 아니고 여기 뭐가 유발되죠? 죄가 있어야 되죠.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피가 구원하려면 우리는 피라는 것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지어야 되는데 우리는 죄를 못 지어요.

 

왜? 우리는 죄가 뭔지를 몰라요. 선악과 구조 안에서의 죄는 죄가 아닙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작용하게 되면 예수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 자체가 궁극적인 죄인 것을 깨닫게 하는 그 순간순간이 와요. 그때 순간뿐이에요.

 

의식의 흐름이 3초입니다. 의식의 흐름이 우리의 머리 한계로서는 3초 정도, 범이나 벌들하고 달라요. 동물과 다른데 인간은 두뇌의 반응이 3초 정도하게 되면 다시 다른 것을 살피게 되어 있어요.

 

“그래, 은혜다!” 1초, 2초, 3초 끝! 은혜 끝! 이렇게 됩니다. 야, 은혜 받았으니까 나를 무시 하지 마! 나는 은혜 받은 사람이야! 갑자기 자기 우상숭배자가 되어 버려요.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은혜 받은 나를 믿게 돼요. 다시 내 중심으로 환원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주님 중심이니까 우리 애가 수능 철이 되었으니까 아마 은혜 주실 거야! 왜?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에게 영광을 보이소서! 하는 말씀대로 기도를 반짝 하죠. 반짝 해 보세요. 애가 성적 쑥 내려가서 밤중에 터벅터벅 오면서 비로소 비는 것이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때 비로소 시편 136편이 느껴지는 겁니다.

 

달은 떠 있는 존재만으로도 영광 돌리는데 나는 뭐냐? 영광 돌렸다가 말았다가 울었다가 화냈다가 미친 사람도 아니고 널뛰기하는 것도 아니고요.

 

오늘 본문의 내용이 뭐냐고 묻는 다면 간단합니다. 말씀이 달처럼 떠 있습니다. 달처럼 떠있고 네가 무슨 짓을 하던 술을 먹던 뭘 하던 간에 여전히 주는 주로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내 중심으로 당기니까 이게 화근이 나는 겁니다.

 

그런데 주께서 당기도록 허락을 해 줬어요. 왜? 그래야 말씀이 말씀에 멈추지 않고 우리 속까지 내부까지 점령을 해서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 주께서 주가 되시기 때문에 이 말씀이 성경 속에 말씀이 아니고 우리 안에 모든 것을 점령해 있는 말씀으로 그게 진짜 현실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16절 봅시다.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뭐 하나님 정도면 이 정도 돼야 하나님이지 뭐 별거 뭐 있느냐? 아닙니다. 죽을 때 돼 보면 너무 고맙죠. 진정 이 세계가 나의 세계란 말입니까? 고맙습니다. 이렇게 나오죠.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달림을 받아야 돼요? 모든 존귀를 나한테 돌리고 나도 한 노력했다고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자랑 질하는 그 모든 것,

 

그 다음에 17절 봅시다.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앞에 있는 걸 찬양이라 하는데 찬양은 시간을 정지 시킵니다. 찬양은 시간을 정지 시켜요. 그 찬양은 어디서 합니까? 죽어서 합니까? 성도는 살아 있을 때 고난 가운데 환란가운데 찬양이 되죠. 되게 하시죠. 우리가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요.

 

고난 가운데 찬양되게 하시죠. 주여!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렸습니다. 나는 내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게 찬양이에요. 찬양은 뭐냐? 죄+피가 찬양이에요. 이게 언약이니까 내 죄를 고백할 때 피를 만나라고 그게 찬양의 요건이 되는 겁니다.

 

뭐 가사 잘 쓴다고 찬송가 한다고 찬양이 되는 게 아니고 그 내용에 우리는 죄인인데 주의 피로 구원했습니다만이 영광이 돼요. 왜? 하나님은 그 이 약속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집해요. 제가 고집하는 것이 아니고 죄+피,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하지만 주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요건에 맞아요. 물론 지식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으로 깔고요.

 

그런데 찬양은 시간을 어떻게 합니까? 정지를 시키는 거예요. 정지를 시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죄+피가 이것이 이미 정답으로 확정된, 언약으로 확정된 이상은 내가 눈을 이것으로 돌리지 않고 나한테 돌렸다 할지라도 반드시 이쪽으로 다시 되돌아오도록 주께서, 성령께서 역사를 해요. 정답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래야 17절 말씀이 이해가 돼요.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했잖아요.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제는 난 가난하게 살아야지 너무 부하면 안 돼’ 이러는데 그 사람들은 글자를 볼 줄 몰라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부자로 살면서 마음을 안 높이면 되잖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나한테 돈 한번 줘 보세요. 마음 높이는지 실험해 봅시다.

 

한 700억 가지고 있으면서 마음 안 높이면 되잖아요. 비행기 207대 가지고 있는 칼기 부사장 돼서 땅콩 가지고 시비 걸면 되잖아요. 지금 마음 낮춰서 교도소 가 있잖아요.

 

이게 뭐냐, 그런 뜻이 아니고 부자는 이게 모방이 돼요. 전염이 되면 이게 흐름이 생깁니다. 흐름이 생기면 찬양은 시간을 정지 시키잖아요. 다시 부자한테 눈을 돌리면 정지가 안돼요. 나는 몇 년 후에 저런 부자가 되느냐? 주택부금 지금 얼마 찍었습니까? 언제 되면 부금 끝나느냐? 언제 나는 보금자리 아파트로 옮겨가느냐?

 

이러면 시간이 정지가 안 되고 그 순간을 간곡하게 기다리고 있죠. 찬양은 언제 찬양합니까? 찬양은 정지인데 주여, 이대로 죽어도 좋습니다. 이게 찬양이잖아요. 그런데 주의 은혜 받았으니까 주님께 자랑해야지! 나 아파트 두 채 사서 자랑해야지! 이러면 기다려야 돼요.

 

우리 교회에 이제 의자도 사다 놨으니까 부흥되겠지, 의자 40개인데 언제 40명 다 찰까? 성경 책 갖다 놨는데 주일에 다 올까? 주일에 오지도 않을 것 같은데……. 벌써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

 

주여, 지금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때 여기 40명 다 차면 만족하겠습니다. 이것은 마음을 높인 거예요. 시간은 마음의 높임에 비례해요. 마음의 높낮이에 시간이 비례하거든요. 정지인데 정지는 끝난 거예요.

 

이미 정답을 알아버렸습니다.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 너무 계획이 많아요. 하여튼 어느 가정치고 문제없는 가정이 없어요. 그런데 그 문제가 뭐냐, 시간이 정지가 안돼서 문제가 생겨요. 목사님, 지금 이라도 만족합니다. 뭐 내일도 만족하겠지만 저는 이대로도 좋습니다. 하는 이런 가정을 저는 못 봤어요.

 

야, 우리 가정 한번 보세요. 여름에 한번, 겨울에 한번 보세요. 인테리어 새로 하고 아주 멋집니다. 자꾸 기다려요. 그러면 시간이 흘러가게 되면 마음이 높아져요. 이 말은 지금은 성에 안 찬다는 거예요. 지금은 찬양 싫다는 거예요. 주께서 그 때 채워주면 그 때 몰아서 찬양하겠다는 거예요.

 

그거의 대표자가 부자로 등장한 겁니다. 가난한 자들아! 너희도 똑같다 이 말이에요. 왜? 부자 되기를 힘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가 끝에 죽는 순간에 봐라! 죽는 순간에 돈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라?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나누어 줘라! 이렇게 한 거예요. 마지막 정지된 시간을 인정한다면 돈이 있을 때도 감사하다면 없을 때도 감사하는 돈말이고 다른 요소로 시간이 정지됐다면 돈이 있고 없고를 벗어난 거기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말이죠.

 

왜? 마음과 돈을 결탁을 안 시켰어요. 돈이 이렇게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 아님을 나눠줌으로서 자유롭게 보일 수가 있는 겁니다.

 

권사님, 나눠주는데 몇 번씩 나눠주세요? 한국에 나눠줄 때 없어요. 한국의 하류층이 아프리카 중산층이기 때문에요. 노숙자도 나이키 신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마음의 높낮이는 예수님과 비교를 해야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 집에 있는지 모르는데 왜 따로 찾습니까? 아버지가 따로 있는데 예수님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어요. 공생애에서는 십자가의 때가 따로 있지만 주님의 목표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시간은 항상 아버지와 같이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신 그 나라가 중보자가 돼서 중보자로 넘어갔잖아요. 처소가 이 땅에 없잖아요. 처소가 없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 경계선 넘어 지평선 넘어 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데 여기에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언제 기다리느냐, 이게 무너져요.


중보자 인간 무너지면서 뚫고 들어와요. 이게 재림입니다. 모든 것을 불바다 만들어 버려요. 기다리지 마라! 기다림 자체가 장벽이다. 기다린다는 말은 계속 시간을 늘린 거예요. 늘어 버리면 이것은 구원이 아니고 구원의 미완성이 되고 마는 겁니다.

 

아, 구원 안됐어! 안됐어! 사도 바울 그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주여, 저를 데려가 주옵소서!” 왜? 자기는 이미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는 것 보다 주님 만나는 것이 더 낫다는 겁니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고 지금 나를 데려가 달라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스데반 집사가 돌을 맞기 전부터 성경에 보면 성령의 충만이라고 되어 있어요.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이 누구의 이름이죠? 예수의 이름이죠.

 

그러면 스데반의 모든 활동은 누구의 활동입니까? 스데반 활동이 아니고 주님께서 점령한 활동이죠. 따라서 스데반 집사는 알아요. 저 사람이 돌을 던진 게 아니고 주께서 돌을 던지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나는 그 현장에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도록 주께서 조치했다는 그 자체, 스데반은 끝까지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그렇게 만들어 냅니다. 아, 나 100살 살아야지! 누구 마음대로? 내일되면 몰라요. 이중에 누가 빠져 있을지 이빨 빠지듯이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밤에 어디를 가리라?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이르리라, 시간이 정지된 거예요. 주님의 시간의 정지함이 시간만 초조하게 기다리는 우리를 덮쳐버리면 우리는 그 짧은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주와 함께 있음을 아는 겁니다.

 

네가 나와 하나가 된다는 것, 이걸 꺾어버리면 중보자를 꺾어버려 우리의 상상력을 제거해 버립시다. 하게 되면 주께서 나를 가지고 지금 하늘나라를 여기서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헌 하늘과 헌 땅에 커튼 뒤에 있어요. 이미 커튼 뒤에 있어요.

 

시간이 정지 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서 오는 것이 아니고 커튼을 제 치면 빵빠랑빵빵하고 딱 제쳐 버립니다. 지금 동남아에서 공연하고 오신 새로운 가수가 왔습니다. 이미 가수는 무대 뒤에 서 있어요. 그것을 계시라합니다. 드러나는 겁니다.

 

이미 문 밖에 서 있으니 야고보서 5장, 주께서 문 밖에 서 있어요. 우리의 인간적인 시공간을 제쳐버리면 이미 시간과 공간이 없는 영원한 거기에 이미 계신 거예요. 지금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엘리야는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인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구름타고 승천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여기 있는 디모데전서 이야기도 이제 실제 상황입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걱정하는 것 주께서 의도 한 줄 압니다. 죄를 지으면서 죄 아닌 줄 우기는 그것, 하지만 진정한 죄는 십자가 앞에서 죄를 느낄 때 그것이 모든 것이 범사에 일거의 감사로 다가올 때 이 기쁨은 돈이 주는 기쁨,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월등함을 다시 한 번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