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점(사무엘상 1:1-2) 대전-(사무엘1강)
이근호
2015년4월28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1-2
(1: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술의 현손이더라
(1: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오늘부터 사도행전은 끝나고 사무엘상을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을 끝내고 나면 강의자 입장에선 약간의 염려가 되는 게 있어요. 끝났으니까 곧 잊자? 사도행전의 주제는 ‘주님은 주로 살아계시다’ 이 말은 “사도야!”또는 “성도여! 너의 할 일은 일체 없다! 전혀 없다.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하지마라!”
그래서 사도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일이예요. 성도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을 사도는 그것을 해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자기 책임 챙기기이기 때문에 자기가 다 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이 하셨다! 라는 것을 요한복음6장에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은 일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하고 계시다! 라는 것을 믿는거예요. 그렇게 믿음으로써 행함으로 버티던 것이 믿음으로 바뀌면서 교체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그 교체작업이 말은 쉬워요. 이건 찢어질 정도로 아프지요. 교체작업이 하나의 일부로써,
제가 설교 중에 예를 든 게 있어요. 바다에 뿌려진 기름 덩어리, 기름이 뜨니까 우리는 하나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바다에서 물결이 일어나니까 기름이 갈라지고 균열이 일어나고 한쪽은 떠내려가고 난리가 났지요? 이것이 한 덩어리가 될 때가 뭔가 하면 남자들은 군대 갔을 때나 우리 클 때는 학생들, 특히 고등학교 때 “우리 10년 뒤엔 어디서 만날까?”
그 때는 전부같이 하나처럼 그러다가 10년 뒤나 20년 뒤나 30년 뒤에 나오는 사람은 성공해서 자랑할만한 얘들만 나오고 안 오지요! 이때는 친구가 하나같이 생각되는데 시집가고 장가들 가고 이러다 보면 다 흩어지지요!
다 흩어지고 나라고 여기는 주체성이 전부 다 갈라져 버립니다. 갈라지면서 뭐가 생기냐 하면 결핍이 생기지요? 결핍이 생기니까 하나였던 것이 갈라지면서 사이사이 중간에 결핍이 생기잖아요. 그것을 메꾸기 위해서 갖가지 다른 것으로 집어넣어 채웁니다. 그것이 바로 상상하면서 어설픈 자아상을 형성하는 거예요.
그래서 동창을 만나면 전에는 그냥 너라는 친구, 나라는 친구 그 자체로 좋았는데 이제는 여기에 우리 얘가 어찌~어찌 되었다! 자기 남편 자랑하고 자식 자랑하고 나서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아상을 이렇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조차 나중에 세월이 흘러가면 바닷물이 출렁거리듯 하면 이것조차 다 해체되지요. 그래서 끝까지 자신을 지켜주는 자식만이 최고의 자식이 되는 거예요. “야! 야! 네가 최고다!” 아쉬울 때 그러면 도대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어디 있느냐? 인간은 구체화할 수없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럼 누가 ‘나’를 ‘나’라고 만들었는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해답이 없어요. 왜? 나는 ‘나’라고 생각합니까?에 대한 질문에 그들은 해답이 없습니다. 제가 주일 낮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왜 행복해야 되는가에 대한 해답이 없다고 했지요! 왜 행복해야 하는데요? 갑자기 답변이 막혀버려요. 누가 입을 치는 것 같아요.
내가 왜 행복해야 되나?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 못 할 수밖에 없지요! 이성으로 살아가기 보다 본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또 다른 질문 “내가 왜 살아야 되지?”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이것도 해답이 없어요.
신약에 성령 받은 사람은 알지요!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너는 내 것”이라는 것, “사나 죽으나 내 것이다” 주님께서 주님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 것이라고 우기는 이 말도 안되는 오해를 낳는 신체를 우리에게 주시다가 성령께서 부르심에 이르게 되면 “내 것이 아니였네!” 라고 고백하면서 주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나 밖에 모르는 세상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그것에 대한 어떤 해답이란 게 없습니다. 그러면 신약 때 성령을 받으면 알수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공부하려는 사무엘상은 신약이 아니고 구약인데, 구약은 뭡니까? 그 해답을 내가 누구며 왜 행복해야되며 왜 나는 살아야 되는가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어떠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지금 사무엘상을 통해서 살펴보자는 겁니다.
사도행전이라는 신약을 공부했었거든요. 했다하니까 또 걱정되네. 사도행전의 주제가 뭐라고 했지요? ‘주님은 살아계시다’ 주님이 살아계셔서 구원도 주님께서 다 하셨다 그러면 구약은 뭐냐 주께서 다 하신다는 것이라는 정답을 알기 이전에 인간 본인들이 나름대로 내가 누구냐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것을 개인으로 혼자서 도 닦는 게 아니예요. 집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집단을 뭐라 하냐하면 이스라엘 나라라고 하지요. 그들이 집단적으로 알아가면서 그들은 어떤 하나님으로 부터 후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을 받았어요.
율법이니까 (율)법 하면 ‘법’을 받았지요! 그런데 이 법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거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주신거지요. 법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죠! 그러면 이 말은 우리가 이것을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못 지킨다는 거예요. 간단한 논리예요.
컴퓨터를 만든 사람에게 컴퓨터를 고치라하면 금방 고치죠? 왜 본인이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강원도나 전라도등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에게 컴퓨터 고치라하면 못 고칩니다. 왜 “난 컴퓨터 할 줄 모른다!” 자기가 만들지도 않았고 다뤄보지 않았으니까! 해체해 보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수박 키우는 건 잘해요. “그거 수박이요! 이거 비가 와서 그래요!” 대번 알아요! 그런데 컴퓨터는 못해요. 자기가 안 만들었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점이 율법을 본인이 안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안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지키고자할 때 내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내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이스라엘 내부에 자리 잡은 유사 메시야, 그러니까 메시야는 아닌데 적그리스도겠지요! 메시야를 흉내 내는 어두운 세력이 고개를 쏘옥 내밀게 되는 겁니다.
“그래! 할 수 있어! 지킬 수 있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까 재호가 제게 질문한 것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지켜서 구원 받으라고 준 거잖아!” 라고 할 때 정답은 “아니요!” 그러면 왜 주셨는데 네 속에 괴물 끄집어내려고 우리 속에 그럼 괴물은 어떤 모습인데 예수님을 닮았는데 예수님 아닌 것.
이것을 창작된 예수님 또는 구약 적 용어로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번에 가야산 수련회할 때 사사기를 하려고 하는데 사사기가 바로 사무엘상 앞 부분에 있지요. 룻기도 사사기에 속한 시대입니다. 사사기의 주제를 대전강의 들으시는 분들께 미리 혜택을 드리겠습니다.
사사기의 핵심은 어디 있냐하면 마지막 끝 부분에 있어요. (사사기21:25)에 보면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행해버렸다. 엉망이었다. 이러면 돼요.
그런데 그들이 소견대로 행한 이유가 그들에게 왕이 없으므로 소견대로, 옳은 데로 행하였더라. 이렇게 성경에 나오므로 말미암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면 왕만 있으면 되겠네라는 뉘앙스를 한껏 부풀게 하지요. 말씀 자체가 왕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았는데 그러면 해결책은 간단하네! 무얼 주면 되겠네요. 왕만 있으면 그럼 정상적으로 돌아가겠네! 라고 하는 생각이 들게 하지요! 그게 바로 숨어 있는 왕 같은 가짜 사탄이 이스라엘 속에 있는 거예요.
(사무엘상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신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그들이 무엇을 원해요? 왕을 구하는 그 행위가 왕을 구할 때 “야! 야! 우리 왕을 구하자! 이제부터 여호와는 뚝! 이다. 여호와는 너무 믿지 말자!”이런 의도로 왕을 구한 게 아니예요. 그들이 왕을 구한 이유가 굉장히 신앙적이예요. 어떻게 신앙적이냐하면 하나님이 왕을 주시면 하나님이 계시고 ‘자기’있고 거기에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왕, 하나 딱! 등장하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실감나겠습니까? 예? 교회에 목사가 없다? 뭔가 허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주위 사자를 보내 주소서! 했는데 주의사자, 목사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마음에 평화를 얻지요. 이제는 하나님이 보내신 목사 말을 듣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바로 그 생각들을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유발 시키도록 하는 겁니다.
왜 그게 바로 악마가 평소에 꿈꾸던 현실이기 때문에 목사가 있어서 말씀 주시면 우리가 잘 믿겠습니다. 이런 아이디어가 사탄에게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면 하나님이 형상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모시고 춤을 추겠다는 이게 사탄이 노리는 바에요.
사탄도 인간들로 하여금 보는 것을 믿게 하므로 잘 믿었다고 안심시키는 전략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런데 (요20:29)에서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지요. “보여줘! 보여줘!”이건 사탄의 소리이고 주께선 “안 보여줘! 안 보여줘!”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뜻이 놀라운 사실은 안 보여줘 했잖아요 안 보여주는 내용을 듬뿍 담고 보여줘 버려요! 그걸 가지고 spot (작은 점) 어떤 점이다. 뭔가 이상한 낯선 점. 이거 어디서 튀었지? 양복에.. 이 손바닥의 점은 왜 생겼지? 이 점은 곧 손바닥 전체의 부분에 속하지 않은 이질적인 점이에요.
이걸 내가 이번에 불편한 여정의 책에서 이걸 뭐라하면 ‘비 전체’라고 했지요! 이런 게 생기지 말아야 하는데 생겨 버려요. 요근래 한국의 뉴스에 보니 여성들의 유방암이 갑자기 급증했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 대충 이유를 보면 나이가 서른 살에 결혼 할 나이에 결혼 안하고 점점 애기 낳는것이 늦어지고 놀면서 결혼 안하는 게 아니라 일도 많이 하고 늦게 새벽4시까지 일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걸 뭐라하면 스트레스를 음식으로 그것을 푸니까 그것이 균형이 깨지고 세포내에서 생겼다는 거예요. 어떤 아줌마가 자기의 가슴을 만졌는데 뭔가 딱딱한 게 만져졌다는거예요.
그게 바로 이질적인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하면 참! 제가 설명하기 힘든데요. 처음부터 그게 우리 내부에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손에 만져지는 것. 눈에 보이는 것만 믿잖아요. 그러니까 암이 생기니까 이건 암이 안 생겨야 되는 줄로 알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오후 설교 때 그런 얘기 했지요?
내가 암이 걸렸다고 생각하지만 암이 그동안 내 안에 잠복해 있다가 이제 모든 기능이 약해지니까 “내가 원래 너를 장악하고 있었어!”라고 티를 내면서 마지막 때에 제대로 네가 너의 주인이 아니라 암인 내가 주인이지라고 등장 하듯이 처음부터 우리는 사탄이 우리의 주인이었어요.
그런데 사탄이 주인이 된 행세가 뭐냐 하면 “나는 구원받아야 돼” 이게 바로 사탄의 아이디어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가인입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리잖아요. 그런데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가인이 한 걸 뭐라고 하냐하면 철학적 용어로 단독성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저 보이시지요?” 하나님과 단독적으로 관계를 맺겠습니다. 단독성이에요.
철학에서 단독성이라는 ‘키에르케고르’ 실존주의 철학을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에요. 가인이 단독적으로 할 때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상상을 동원해서 제사를 드렸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줘요.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줘요. 보여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거예요. 가인 눈에는
가인에게는 그게 누굽니까? 아벨이죠. 그런데 아벨을 보여줬다는건 아벨을 통해서 가인이 제사 드리지 않더라도 밥 먹고 살게 했는데 가인이 자기 손으로 누구를 죽었냐하면 아벨을 죽여 버려요. 자기에게 은혜가 왔든 자신이 사탄에 속했어도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벨을 통해서 먹고 살았던 것인데 아벨의 통로를 제거해버리죠. 바보예요!
집에 싱크대의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와야 밥도 해먹고 하는데 부부싸움을 해서 성질난다고 파라핀으로 수도꼭지를 막아 버리면 어떻게 되요? 죽잖아요! 은혜의 출구를 막아버린 거예요. 은혜의 출구가 누구냐 하면 바로 아벨이고 아벨을 따라온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거예요.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아벨과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은혜가 그분으로부터 나온 거예요. 그러면 가인부터 역사가 예수님까지, 신약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정말 은혜가 누구에게서 왔는가가 spot지점 낯설어한 그 지점을 확대시키고 깊이 들어가 보면 노아 때는 희생양, 그리고 출애굽 때는 어린 양, 이것들을 통해서 또는 구약에 가면 애매하게 죽었던 선지자들의 죽음, 피, 이런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보여 주옵소서!” 금송아지도 섬겼다가 온갖 것 섬겼다가 온갖 우상을 건전한 신이라고 다 섬기는데 사실은 그 보이는 분으로 오셨어요. 그것 섬긴다고 비난하고 그러지 마라고 외쳤던 선지자속에 진짜 하나님의 은혜의 출구가 그 안에 있었던거예요. 엘리야가 고난 받고 얼마나 인간이..
그럴 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가인이 살인한 것은 죄가 문 앞에서 엎드려 덮쳤다 했지요! 그 죄 속에 뭐가있냐 유사 메시야, 메시야를 빙자한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삼위일체를 믿어야 구원받고 이단이 아니라하는 그러한 세력이 사탄이 그렇게 해서 왜 삼위일체만 있으면 된다고 그런 식으로 해서 결국 노린 게 뭡니까?
나는 이것 믿으니까 누가 필요 없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 십자가를 제거하는 힘으로써 작용하는 거예요. 유사 삼위일체, 유사 메세야, 유사 교회, 유사 목사, 유사 신앙, 유사 소망, 유사 성령 이런 것들을 자꾸 생산해서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능력을 사도행전에서 했던 ‘주께서 다 하셨다’ 이런 것을 제거하는 거예요.
내 쪽에서 뭔가 보탰다. 내 쪽에서 협조했다. 내 구원에 내가 신경썼더니 구원 됐구나! 이런 것 기도 좀 하고 말씀 공부했더니만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케 되는 그 말씀대로 구원 받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모든 게..
그래서 제가 누구에게 편지를 보낼 때 이렇게 보냈어요. 성경을 해석하고 목회를 하고 강의하는 이것이 어떻게 내가 하면 할수록 나에게 죄가 되는지를 그것이 중요하다고, 내가 하는 이 모든 것이 주께서는 나의 죄로 되돌려 주는 이유를 알아야 되요.
여러분! 수물, 수몰지역 아시죠? 소양강 안동댐 있잖아요. 만약에 수몰지역에 옛날 마을의 잔해가 있다면 그것이 물 위에 덮여도 그것이 어떻습니까? 그대로 물속에 있겠지요? 주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수몰시켜버려요. 그러면 주께서 수몰시키는 바다가 무슨 바다냐 하면 용서입니다.
용서의 물로 덮어씌우면 그 안에 뭐가 있어야 해요? 죄가 그대로 있어 줘야 되지요! 그래야 용서가 계속 용서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안에 마귀가 들어 있으니까 자기의 단독성을 유지하려고 해요. 죄를 없애줬으면 좋겠다! 이 말입니다.. 없애주면 또 뭐라고 합니까? 이제 나는 깨끗하니까! 깨끗하게 설칠 수 있으니까
이제 성령 받아서 말씀을 내가 지킬 수 있으니까 전에는 성령을 못 받아서 못 지켰던 율법을 이제는 성령 받아서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본성. 수몰지역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수몰지역이 자꾸 용서받으면 받을수록 용서의 깊이가 더 할수록 그동안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죄가 발굴이 되요. 밑에서 계속해서..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길 했는데 전에는 우리애가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었는데 점점 더 성령 받아 은혜에 들어가 보니 내 애가 그 대학에 들어가므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 내 애 때문에 못 들어간 애가 지금 재수를 한다고 얼마나 울겠나! 가슴 아프다! 이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해야 되요.
또 우리 딸이 결혼하므로 말미암아 그 사윗감을 좋아했던 여자가 한 둘이 아닐건데...지금은 다 노처녀예요. 가슴 아파요! 이 음식이 먹히지 않아요. 그래서 세월호의 애들 빠졌다고 가슴아파한 것, 그거 마귀 마음입니다. 울어야 되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보고 울어야 되지! 그런데 예수님의 희생에 아무도 울 필요 없어요.
(누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무슨 뜻이냐 하면 바로 네가 나의 아픔을 네 선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단독적으로 네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냥 동정하듯 울기 때문에 그 값싼 동정, 그것도 마치 위장한 가짜 메시야적 경건입니다. 그 해답은 니 마음대로 사세요! 이것이 바로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내 마음대로 하게 하시는 목적이 있어요. 뭐냐 하면 “니 속에 마귀 있다!” 그걸 들춰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넌 몇 마리있냐? 7마리. 나는 8마리 있다.” 하나 차이네! 이런 식으로 꿈을 꾸면 무대에서 마귀가 설치는 꼬락서니. 기가막히죠?
사무엘상을 정리하면서 사무엘상에서 언급 하는 것은 어차피 인간은 믿음 없어요. 왕만 있으면 우리가 이렇게 개판처럼 안 살텐데..라는 것이 그들에게 모든 일이 잘 안되니까 그냥 실증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자꾸 쏟아내거든요. 주께서는 “그래! 또 내놔봐! 내놔봐! ” 마술사 입에서 테이프가 나오듯이 계속 나올 때 그 막나오는 테이프의 끝은 마귀가 쥐고 있습니다. 마귀가 솔솔 풀어주는 거예요.
그 마귀적인 것으로 가장 요근래 절정적으로, 마귀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신천지의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리고 천년 대 환란 이것 주장하는 사람들, 휴거 주장하는 사람들. 3차 대전이야 아마겟돈 전쟁이냐 마곡 전쟁이 언제이냐 따지는 것 일곱 나팔이냐 여섯 나팔이냐 이런 것들. 바로 그렇게 해석해줘야 마귀가 나오기 때문에, 그게 마귀적해석입니다.
그 배경에는 뭐가 있느냐하면 뭔가 무섭다는 거예요. 나만 구원 받으면 되겠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주님께 구원받으면 그거로 끝이예요. 주님 몸에 딸려서 구원받는 것뿐이지 내가 구원받겠다는 것 잊어주세요. 내가 구원받겠다는 순간 우리는 마귀짓을 하게 되요.
이것은 주의 구원이 나로 하여금 내 구원과 교체하는 작업이 벌어지게 되면 우리가 왜 내가 구원 받아야 했던가? 왜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던가? 하는 이유가 마귀가 나에게 자꾸 그것을 부채질했다는 사실이 주의 십자가 앞에서 발각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뭐냐? 내가 성경 해석해서 구원 받겠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못 박게 한 마귀적인 술책인 것을 십자가 앞에서 들통 나게 되면 그 사람은 십자가속에 성령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새삼스럽게 성경 해석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예요. 우리는 왜 십자가뿐인가? 십자가 능력뿐인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성경을 볼 뿐이에요.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성경을 보는 겁니다. 그것을 역으로 성경 해석하는 방법이에요. 그렇다면 사무엘상에서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몰되어 있어요. 사무엘상이 전부다 우리 안에 수몰되어 있거든요.
이제는 성령으로 다이버장치를 하고 우리가 수몰지역을 가는 겁니다. 용서 안에서 헤엄치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즐겁습니다. 용서 안에서 헤엄치기. 주님의 의, 용서, 자비, 긍휼의 바다 안에서 헤엄치면서 도대체 우린 어떤 인간이기에 용서가 되어야 구원되는지를 이제 우리의 수몰지역을 찾아가 봅시다.
그 찾아가는 것은 내 일기장을 볼 필요 없고 사무엘상 전체가 우리의 일기장이 되는겁니다. {1장 에브라임 산지에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에브라임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크게 사각형으로 나눠 보면 좌측이 지중해고 우측이 요단강으로 보게 되면 거의 사각형이거든요. 투박하게 보면 우리 보기에는 에브라임이 지역이 좀 넓고 베냐민과 유다지역이 작아보이지요. 그런데 옆으로 보세요. 이게 보면 제일 넓은 지역이 되고 여기에 시온성이 있어요. 시온 산, 시온성은 누가 차지했습니까?
베냐민 여기 있고 유다 여기 있고 에브라임이 여기 있다면 제일 노른자는 누가 차지했습니까? 유다가 차지했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땅이 넓어서 살기 좋지만 유다는 땅이 넓음에 의해서 생존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등불 때문에 유다는 북쪽 이스라엘보다 오랫동안 버틴거예요. 북 이스라엘은 BC722년에 멸망했고 남 유다는 BC586년이니까 약 140년 더 버텼잖아요.
하나님께선 항상 나라를 멸망시킬 때 그냥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고 신앙을 각성시켜 놓고 흩어지게 해 버려요. 처음 교회가 있었을 때 3천 명 가량 모였잖아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모여서 계속 갔습니까? 핍박이 일어났잖아요! 핍박이 일어 날 때 반드시 신앙을 각성시켜 놓고 흩어 버려요.
흩어지니까 사도바울처럼 개인 집에서 하거든요. 군데군데서 있는 거지요. 산 불 끈다고 확 후려치니까 불이 더 온 천지로 다 튀는 것처럼, 산 전체가 불로 더 번지는 것처럼 모인 것을 쳤다고 해서 그게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예요. 오히려 신앙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시고 계시는 겁니다.
시온산은 하늘과 땅이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예요. 여기에 다윗이 성전을 세웁니다. (삼하24:10-25)인구조사 하다가 용서받는 장소도 여기 시온산이예요. (대상21:1-27)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받치려 했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상은 에브라임지역이 있는데 이 사람이 에브라임지역 사람이 아니예요.
어디 사람이냐하면 위쪽은 에브라임족속의10지파 유다 2지파, 합하면 몇 지파입니까? 12지파지요. 그러면 이스라엘12지파로 완결된것이 아니고 이걸 초월하는 한 지파가 있다 했지요! 민수기 할 때 했잖아요. 그게 무슨 지파입니까? 레위지파지요. 레위지파가 파견 근무하는거예요. 각 처소에서
레위지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땅의 땅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나처럼 땅이 없어야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레위지파가 모델이 되고 레위지파 속에 누가 있습니까? 제사장이 있고 제사장이 모델이 되는 겁니다. 제사장의 특징과 다른 지파의 특징이 뭐냐 다른 지파는 땅을 개간하고 농사지어서 살아가는 반면에 레위지파와 제사장이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제사 때문에 사는 것이 특징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제사 때문에 밥 먹고 산다는 것이 왜 모델이 되냐?
여러분! 천국을 보고 싶지요? 천국이 어떤지 보고 싶지 않습니까? 천국의 모델은 제사장과 성전 안이 바로 천국의 모델이에요. 거기에 누가 종사합니까? 제사장이 일하잖아요. 그게 천국이에요. 천국은 우리가 자꾸 살기 좋은 환경을 생각하는데 천국은 그런 식으로 규명하는 얼마나 살기좋은가? 얼마나 온도와 습도가 맞춰야 하는 게 아니라 도대체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느냐가 천국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겁니다.
바로 메시야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을 하게 되면 천국이고 어린양의 죽음과 무관하면 그건 적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영생을 메시야 죽음으로써 죽음 안에서 영생이 나오잖아요. 영생이 있으면 천국이고 영생이 없으면 영생의 나라가 아닌 오래 못산다는 게 아니라 저주의 나라가 되요.
그래서 지옥과 천국의 차이점은 뭐냐 지옥에는 생명나무가 없는 게 지옥이고 생명나무가 닜으면 천국입니다. 그러면 레위지파가 흩어졌다라는 말은 그들이 사는 곳이 사막이든 광야든 관계없어요. 생명나무와 함께 있다면 그게 천국이 되는 거예요.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어디서나 하늘나라에요.
우리가 포도 먹고 참외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 먹고 살거든요. 지난주일 낮에 그런 이야길 했지요? 요11장 설명하면서 나사로가 뭐 한다고 했습니까? 잠잔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제자들이 이래야되요. 그러면 누구와 함께 잠잡니까? 누구와 함께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해야 하는데 그들은 주님을 보면서도 단독자 입장에서 주님을 보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게 아니고 나사로는 죽어도 살아도 주와 함께 있었던 거예요. 제자들은 보고도 못 믿는 거예요. 못 믿는 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개념을 바꿔버립니다. 주께선 죽었다는 것을 아시면서 일부러 잠자는 것으로 바꿉니다. 알아듣도록
그러나 알아듣지를 못해요. 깨워야 된다. 깨우는 것은 뭔가 죽은 것을 살리러감이다. 이런 식으로 또 요한복음을 설명을 해왔어요. 얼마나 친절합니까? 잠자는 것은 주님 안에서 잠자는 것인데 그것도 알지 못하면서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죽었다고 절망적인 개념을 사용한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잠자는 것이다.
친절한 (역주) 친절하게 번역하는 사람이 친절하게 답을 달아 논거예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지금 잠자기 위해서 열심이 살고 있는 거예요. 하루하루가 다 잠자기 위해서 주님,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잠자기 전에 조건이 있어요. 뭐냐하면 죄가 없어야되요.
죄가 없으려면 주의 의로 주의용서와 긍휼로 수몰돼야 되요. 그러면 우리는 그 안에서 주의 의가 되는 겁니다. 용서 자체가 의니까 “나는 죄가 많은데 용서 받았어요!” 를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의가 나와 함께 있어요와 같은 거예요. 주의 의 안에 놓여 있어요. 그래서 나는 뭐든지 해야 죄가 되요.
왜 신나요. 수몰지역이 있으니까 어차피 해봐야 주의 용서에서 탈출이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롬5:12) 예수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인된 것처럼 (롬5:19)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에 수몰되었다. 수몰되었다는 표현을 의의 은혜, 의로 말미암은 왕 노릇이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레위지파의 사람인데 엘리후의 손자라 했으니까 레위지파 사람이거든요.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한나와 브린나 두 아내가 나왔습니다. 이게 항상 아내가 둘이 되면 문제가 되요. 아브라함에게 아내가 둘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언약을 보여줄 민족과 그렇지 못한 갈라진 두 민족이 되는 겁니다.
부모는 하나예요. 부모는 하나인데 한 부모에서 두 민족이 나온다. 대전에서 했는데 다 잊어버렸지요? 하나는 이삭이고 하나는 이스마엘 이라고 했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려운 말씀을 하셨어요. 여기다 뭘 집어 넣느냐하면 이것을 언약 또는 언약관계라고 하지요. 사라에서 나온 것과 하갈에서 나온 것.
곧 두 언약이라 자! 두 언약이라 할 때 우리의 심성은 어느 쪽이냐 어느 쪽에 속할래? 이렇게 하잖아요. 에게 바로 사탄 적 본능이에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말고 이것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봐야하는데 어느 쪽에 속할 때는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게 되지요. 구체적인 것은 항상 우상이 되고 형상화되는 거예요.
우상이 되요. 십자가 목걸이를 하게 되면 부적 같은 능력이 있는 것처럼 오해 하듯이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잘라내야 돼요. 이 쪽 교회는 이단이고 우리는 복음교회라면 우리는 복음교회를 믿는다 할 대 이미 그 자체가 사탄 적이죠. 무슨 기준으로 하냐 그것을 차이 또는 균열된 차이에 의해서 그게 뭐냐 능력입니다.
구원의 능력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예수의 십자가를 믿느냐? 믿습니다! 그럼 너는 구원 받았겠네? 네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오늘 이야기와 내일을 갈라놓는 그곳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오지요.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으면 안되겠구나! 그것을 쥐면 안되겠구나!
구원받게 하신 십자가는 나의 소유의 대상이 아니고 항상 교만한 나를, 우쭐 댈 수밖에 없는 나를 잘라 내는 자르는 칼 같은 역할이 바로 구원의 능력입니다. (히4:12-13)에서는 그것을 잘 이야기했지요. 말씀이 우리가운데 임하면 우리가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도록 모든 것을 도려낸다 했지요.
말씀이 우리의 속을 속속들이 다 발라내지요. 가시 있는 물고기 발라내듯이 전부 발라내지요. 항상 말씀이 오게 되면 발라 냅니다. 만약 말씀이 오지 않으면 “주여! 이건 내 자존심입니다. 하나님이여 이건 손대시면 안됩니다. 이건 꼭 내게 있어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쳤잖아요? 여기서 받쳤다는 말은 포기했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아브라함이 포기하고 얻은 게 뭡니까? 수풀에 걸린 양을 받았지요! 이삭 대신 양을 잡았잖아요. 그럼 아브라함이 뭘 믿으면 되요? 자식 믿지 않고 양 믿을까요? 아니예요. 그 둘을 갈라놓게 개입하시고 두 사이를 개입하신 그 분이 우리의 소유의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그 중간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을 소유하게 된 겁니다.
그 실증적인 구체적인 내용은 뭐냐 하면 이삭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게 증거가 되지요. 그럼 이삭의 증거는 오래 갑니까? 아니예요. 야곱이 등장하게 되면 증거 뚝 갈라지죠. 그러니까 쉐프가 도마 위에서 양파를 썰어 쪼개면 계속해서 양파에서 매운 향이 나듯이 십자가에서 매운 맛이 계속 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대전 세미나에 온 사람들은 다 구원받아서 죽음의 나라로 가지만 그들의 숨소리는 맵지요. 남 보기엔 굉장히 맥없어 보이지만 그들의 숨소리는 성령의 숨소리는 천하 복음으로 인해 매운 거예요. 아내가 둘이 있다는 말은 레위지파가 첩을 두었다는 말이잖아요. 이것은 좀 수상하지요?
그런데 이것이 죄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죄라는 것은요 성경에서 이런 것은 상황 자체가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들 그렇게 해 버리면 죄가 날아가 버려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라는 것도 인간 세상으로 오게 되면 죄가 뭐로 바뀌냐 하면 윤리, 도덕으로 바뀌어요.
그런데 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사회의 안정망을 헤치지 않은 것을 윤리, 도덕이라 하는데 특히 윤리라는 게, 윤리는 절대 기준이 없어요. 사회 연대감과 결속력을 헤치지 않으면 그것이 윤리적이고 헤치면 비 윤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윤리적입니까? 비윤리적입니까? 비윤리적이지요!
세리나 창기가 천국 갔다는 이야기는 비윤리적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하므로 말미암아 선으로 사회질서를 잡아야하는 그 당시의 지도자에게는 도전적인 이야기가 되요. 그게 옳다 그르다의 문제를 떠나서 그것을 만약 유포시켜 버리면 사회가 주저앉아요. 간통한 여인을 그 자리에서 돌로 치지 않고 예수께 데려온 이유도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당신이 간통한 여인과 한패다라는 말이죠. 너 같은 그런 이론은 간통한자에게 돌도 못 던질 수밖에 없고 율법체제를 허물어트려서 사회를 혼란, 지옥으로 만드는 위험한 발언을 예수 당신이 평소에 하고 왔었던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 자리로 질질 끌고 예수님 앞에 등장 한 거예요.
죄를 제거해야 선한 사회가 된다는 것이 바르세인들의 주장이고 주님께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자가 돌로 한번 쳐 보지? 죄를 없애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메시야나라 된다? 메시야 나라가 된다는 것이 마귀 적이고 자기 아비가 마귀니까 악마답게 선한 메시야 나라를 구상한 거죠.
죄 안 짓는, 죄 안 짓겠다하는 것이 바로 악마의 발상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죄 없는자가 돌로 한번 쳐보지! 다 가버렸어요 가벌렸습니다. 그럼 남아 있는 것은 뭐냐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이죠. 그게 바로 암 세포. spot 뭔가 낯선 것이죠. 낯선 일이 실제로 일어났잖아요 그게 실증적이고 실제적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이게 뭐지? 하고 못 알아보는 거예요.
성도입니까? 성도 아닙니까를 어떻게 알아보냐? 그 낯선 사건이 바로 자기 인생 속에 암처럼 출몰돼야 되요. 전에는 나는 여자구나! 이러면 끝나는데 “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따로 만드셨지?”라는 생각이 든다는 자체가 이상해요. “나는 행복하다! 그럼 가만있어봐 내가 왜 행복해야 되지?” 이런 건 안 해도 되는 질문?
그것을 질문 하나 안 하나 생명에 아무 지장 없는 건데 그런 질문이 나오지요?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았다 전에는 “주여!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내가 왜 구원받지? 내가 왜 지옥가선 안되지? 이상한 알인데? 나는 지옥가야 되는데! 왜 안가지? 저 왜 안갑니까?”
전에는 구원해 주시옵소서! 상처 내가면서 철야 해가면서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하다가 나중에 구원받고 난 뒤에는 “주님! 구원은 왜 해주시는 거예요? 왜요? 왜 구원해 주시는데요? 그냥 지옥으로 내던지시지 왜요? 하나님이 이건 구원해줘도 불만이네! 그게 아니고요. 왜 저 같은걸 구원해 주시는데요?” 이런 질문이 나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삼위일체가 뭐냐? 이런 질문 말고! 어떻게 하면 구원 받아요? 이런 질문 말고! 어떻게 하면 죄 안져요? 이런 질문 말고 내게 왜 착한 일이 생깁니까? 반대로 질문을 해줘야 되요. ‘나’라는 정체성이 무너져야 돼요. 나의 단독성이 무너져야 되요. 그것에 대한 모든 답변은 내 몸이 내것이 아니였기 때문에..
오늘 사무엘상 시작하면서 이 엘가나라 하는 자의 가정은 자기 가정이 아닙니다. 여기에 오점이 발생됩니다. 낯선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들은 낯선, 그 당시 이스라엘의 많은 가정들이 있지만 엘가나라는 사람의 가정이 드디어 메시야가 가짜 메시야를 들춰내는 어떤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건 다음 시간에..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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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마 18:15-18) 대전- 63강
이근호
2015년4월28일 본문말씀: 마태복음18장15-18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8: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 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7절 여기에 ‘교회’라는 말이 나오지요! 교회라는 것은 언제 있었느냐 하면 오순절 성령이 오고 난 뒤에 교회라는게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오순절 성령이 오고 난 뒤에 교회가 있다 할 때에 제가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는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데요! 왜냐하면 기존에 교회들이 있거든요!
이미 교회가 있잖아요! 뾰족탑이 있고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그것과 성경에서의 교회를 같은 것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하지요? 성경에서의 교회라 하는 것은 안에 말씀이 작열하고 하나님의 계시가 작동해서 나타난 결과물이 교회거든요. 교회가 시작점이 아니고 말씀이 시작점이예요.
복음의 말씀이 있으면 교회이고 복음의 말씀이 없으면 교회가 아니예요. 그런데 이 말에도 약간의, 정립를 잘해야 되는데 복음이 있으면 교회라고 할 때 그러면 완전한 교회이냐 그세 아니고 복음을 전해도 반드시 여기에서는 복음을 듣는 사람과 안 듣는 사람이 다 있어요. 그것을 염두해 두세요.
복음을 전했다고 이야기했지 복음을 전하면 무조건 사람들이 성도가 된다? 성도만 나온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이론은 아주 잘못된 것이 뭐냐 하면 교회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무형 교회가 있고 유형 교회가 있다. 이 이론은 아주 크게 잘못된 거예요.
칼빈인지, 루터인지, 어거스틴부터 있었던 이야기인데 아주 잘못된 이론이예요. 이것이 왜 잘못됐냐하면 존재적으로 눈에 띄고 싶은 충동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상적인 교회가 어떻습니까? 이상적인 교회라는 것은 흔히 말하는 회복 교회, 지방 워치만 리 교회처럼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끼리 따로 모이는 것, 그게 이상적인 교회이냐
➀ 번 거듭난 자들의 집합, 이것이 교회이냐 ➁번 교회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섞여 있는 것이냐 둘 다 잘못된 겁니다. 왜냐하면 둘 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교회가 보고 싶다는 거지요. 그런데 ➂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고 복음이 전달되는 그 현장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눈으로 보고 만질수가 없잖아요. 온도계나 체중계로 측정이 안 되잖아요. 상당히 이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 되지요. 세 번째가 교회입니다. 말씀이 전파되는 곳. 그러면 말씀이 전파되지 않는다면 교회가 아니지요. 어떤 예배당의 역사가 100년인데 어느 날 말씀과 복음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교회가 아닌 겁니다.
그런데 그 곳에 어떤 목회자가 와서 복음을 전한다. 그러면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을 알아 듣는 것이 목사 본인 밖에 없다? 그러면 교인 수가 1명 밖에 없는 거지요. 나머지 100년 된 교회 교인들은 아무도 교인이 아니죠. 이 이야기는 어려운 것 같지만 쉬워요.
구약에서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주의 신이 임한 사람은 봤잖아요. 예레미야가 천상회의를 봤잖아요. 그런데 예레미야가 천상회의에 참석하고 미가도 천상회의에 참석할 때 그 집 시구들은 어디에 가 있지요? 그들이 회의 참석할 때 그들은 어디 가 있습니까? “아! 여보! 출장가야 되니까 짐 좀 싸요! 이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신 앞에서 천상회의에 참석했잖아요.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그래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하늘을 쳐다보면 안되지요. 그러면 누구의 말을 들어야 됩니까?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되요. 그래서 에스겔이나 예례미야를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시되 라고 나오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무엇을 들으면 되요? 에스겔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들으면 그것이 진정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복잡하게 부동산 구입해가지고 강대상 사고 의자 만들고 이건 필요없어요. 주의 말씀을 전하고 듣게 되면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어느 교회로 가면 됩니까? 어디로 가서의 교회는 교회가 아니예요. 어떤 말씀을 들으면 됩니까? 그것이 교회예요. 혼자 집에서 말씀 듣고 있으면 교회라니까요!
말씀이 역사하게 되면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난 뒤에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말씀이 계시가 있는 곳이 교회란 것을 알게 되요. 이 말씀을 복사해서 자기 교회로 가져오는 거예요. 마치 석가모니 죽고 난 뒤에 사리가 나왔잖아요. 그 사리를 온 인도 전역에 사리 있는 곳에 절을 세우고 경주까지 가고 진짜 사리가 있는지도 몰라요.
그러면 그것은 진정한 교회가 아니고 부처의 사리처럼 의미 없는 거가 되지요. 구체적인 물질화가 됐잖아요. 물질을 붙드는 거예요. 구약에서 법궤를 붙들고 있다가 나중에 법궤도 없어지지요. 싹 난 지팡이도 있다가 없어지지요. 심지어 광야에서 놋 뱀 있잖아요. (민21:9) 놋 뱀 섬기는 것도 나중에 히스기야 때 없어지잖아요.(열하18:4)
아예 성전자체, 법궤고 뭐고 성전구조 자체가 불타버리고 없다니까요 (왕하25:9) 그런 게 있으면 다 불살라 없어져야 돼요. 만약에 예수님의 옷이 있다. 그걸 보호하면 안돼요. 그게 물질화되고 권력화 된다니까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를 그것이 건물이든 조직이든 인간의 공동체든, 공동체도 마찬가지예요.
전부다 눈에 보이는 물질화되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모이는가가 중요하지 모였다가 말씀 전한다 이것 안된다는거지요. 순서가 모였으니까 우리 예배드립시다. 이런 것 없어요. 예배라는 것은 반드시 조건이 있어요. 예배의 조건이 무엇이야 성령이 임해야 예배가 됩니다. 이것을 무슨 예배라 하냐하면 영적예배예요.
성령이 임해야 예배서 예배드리는데 성령은 장소가 있는데 장소를 보고 “아이구! 거기 더러워서 안간다!” 이런 성령은 안계시거든요. 성령은 “임마 넌 못생겨서 성령받으려고?” 이런 것도 없어요. 성령을 통해서 예배하는 장소가 어떤 장소냐? 그게 바로 일상의 공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장소예요. 부곡 하와이도 괞찮아요. 제주도 관광지도 관계없어요.
조랑말타고 예배드리고 있어요. 성령이 임하게 되면 조랑말 타는 것도 영광이 돼요. 왜 죄를 아니까 “주여! 저 안식일 날 이러고 있습니다.”(요4:23-24)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이 만나서 예배에 관해서 그 문제로 언급을 한거예요. 예배라 하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되고 성령이 있는 네 속이 바로 성전이다.
니가 성전인데 어느 성전에 가려고 그리심산 예루살렘 그런 것 따지지 마라. 니가 가는 곳이 곧 성전이고 예배가 진행중이예요. {진리와 영으로 예배 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벌써 너 성령받았잖아 그러면 이때다 성령이 역 사하면 이때지, 이게 신약만 그런게 아니고 구약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에게 신이 임하면 그게 하나님이 계신 곳이 되는 겁니다.
“나는 선지자다! 아니고! 아니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야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겁니다. 가짜 선지자가 나타나 길에서 사자가 나타나 물려 죽었잖아요(왕상13:) 하나님의 말씀도 안 받고 말씀 받은 것같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을 꼬셔서 집에 데려가 밥 먹었다가 그 사람 죽었어요. 하나님의 사람이 죽었어요. 길에서 사자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여로보암에게 이야기할 때 절대로 이 이야기를 하고 누구에게도 대접받지 마라 했는데 (벧엘에 늙은 선지자가) “나도 같은 신학교 출신인데 나한테만 이야기해봐라! 나도 계시 받았는데 당신을 대접하라 하더라하고 속이고 같이 집에서 밥 먹다가 나중에 (벧엘)선지자가 나 때문에 죽었구나!”하며 후회하는데 이것이 북 이스라엘의 형편, 현재 신앙상태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선지자를 죽이는 겁니다. 그 당시에
마태복음18장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기존 교회하고 다를 때는 어떻게 합니까? 간단해요. “영구없다” 심형래처럼 “교회없다”하면 돼요. 교회는 없어요. 만들어 주실 때 말씀전해질 때만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도 없어요. 교회없어요. 그러면 사람이 모이면 되겠네요? 아니예요! 주께서 모이게 하신 사람만 모이는 거예요.
오다가 차 바퀴 빵구나면 못 모이고 막! 오는데 집에 지금 수도다 터졌어요. 그럼 얼른 가야되요. 얼른 가서 수리해야 되요. 주께서 흩으시든 모이게 하시든 또는 어디를 가든지간에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면 그 사람이 바로 성령의 예배를 드리는 당사자이고 그게 바로 성도고 교회이고 교인입니다.
“아이고! 집에서 그냥 편하게 그냥 편하게 예배드릴래 편하게 예배드리려 하는 그 마음을 성령께서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진짜 예배 잘 드리는 것이 되는데 나 편하려고 그냥 집에서 예배드려야지 이러면 그거는 주를 위해서 행함이 되기 때문에 ”주여! 편한대로 주께서 오시죠
자기 쪽에서 뭔가 시도했기 때문에 그건 아니지요. “아이고! 또 오늘도 주께서 편하게 해주시니까 어쩔 수 없이 편하렵니다. 이러면 괜찮은데 내 쪽에서 편하려고 시도할 때 예배드린다고 주님 앞에 생색내려는 시도가 있을 때 그것은 이미 가미 된거예요. 내 뜻이 가미 된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인간은 교회를 이룰수 없습니다. 어떤 교회도 이 말씀을 이룰수 없고 어떤 교인도 이것을 행할수 없습니다. 제가 사도행전 할 때 했잖아요. 손 떼라!
성령이 하신다. 어떻게? 이 말씀대로 하세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 말씀대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거든 “아! 교회의 주인되시는 주님께서 이 말씀대로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이런 현상을 유발시키셨구나!!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하나의 주님이 일으키는 연극이라고 봅시다. 그러면 이 연극은 무대가 필요하겠지요. 무대의 등장인물을 봅시다. 등장인물을 보면 첫번 째 15절에 ‘형제’라는 집단이 등장해야 되고 특히 주연급인 대사가 제일 많은 주연급 형제가 있겠지요. 그 형제의 역할이 뭡니까? 죄를 범하는 탤런트가 하나 필요해요.
그러면 다른 형제들의 역할이 뭐냐하면 그 사람에게 가서 죄를 권고하는 역할을 맡아야 해요. 연극을 하는데 총연습을 해요. 리허설, 왜 연습을 이렇게 하나? 천국이 이런 모습이니까! 천국의 구체화거든요. 지상에서의 성령께서 이 땅에서 교회 이러이러하는 것은 바로 천국에 가서도 똑같이 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들 구원받은 상태에서
예를 들면 이렀습니다. 천국엘 갔는데 천사가 묻기를 “야! 너 어떻게해서 천국에 왔지? 예 전에 그때 제 역할이 죄 짓는 역할이지 않았습니까?” 그 근거가 어디 있냐 마18장에 의해서 그렇게 시키셨잖아요! 저보고 죄짓게 해서 제 친구는 권고하는 역할을 맡아서 그때 연극의 총연습해서 “아! 천국인지 알았잖아요!”
천국은 말씀대로만 되거든요. 그 말씀 안에 마18장이 들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들은 옛날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가 그랬잖아! 그렇게 했던 그 사이에 그 연극을 주관했던 주관자인 우리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연극을 베푸셨고 우리는 그 역할로 뭣도 모르고 빨려 들어갔고 우리는 연극인지도 모르고 그게 실제인지 알고 지옥과 천국을 오가며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간 다 태웠지요.
그런데 연극할 때 너무 몰입을 한 사람이 있어요. 몰입하는 것을 메소드라고 해요. 너무 몰입해서 하나님께 원망했던 사람이 욥이었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몰입을 했으면 기왓장으로 긁었어요. 또 너무 몰입해서 죽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아들 열 명 걔들은 잠잤는데 죽는 역할이었어요. 태풍이 불어서. 요새는 네팔에 지진이 일어났잖아요.
재산도 다 날아가야해요. 또 도둑이 와서 아들 죽이고 재산도 다 가져가고 태풍불어 기둥도 다 무너지고 그리고 자기 몸에 종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겨 진물이 질질 흐르는 이런 메소드. 연극에 몰입하려고 연기 잘 했어요. “주여! 제가 무슨 죄를 지어 이렇게 하십니까?” 나중에 연극 끝나면 하나의 연기였던 것을 그 연극을 해서 상 받았잖아요. 최우수 연기상.
말씀 지키는 것. 굉장히 쉬워요. 내가 안 지키면 되요. 주께서 시키면 대본대로 움직여 나가면 되는 겁니다. 문제는 역할을 내가 골라서 하면 안 된다는 사실, 맡겨 준대로 하면 되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예를 들었잖아요. 마포 염광 지구대에 근무하는 김치열 순경 이야기 했잖아요. 일 년에 마포대교에서 자살하려는 사람 50명을 건진 이야기.
그런데 자살할 사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하니까 두 가지를 이야기 했잖아요. 땅만 보고 걷는 사람과 다리를 건너가면서 건너갈 목적이 없는 사람, 어쩌면 우리 모습이죠! 땅만 보는 삶, 나그네처럼 천국을 보는, 맨날 코 앞에 있는 것 밖에 모르는 사실, 대부분이 다 그래요. 대부분의 인간은 코 앞에 것 밖에 몰라요.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이것 때문에 그렀습니다. 의미 체계 때문에, 나에게 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자기의 의미 모으려 하다보니, 바쁘다 보니까 눈 앞에 있는 것만 자꾸 끌어 모으는 겁니다. 의미, 나는 오늘 뭐 했다! 자꾸 의미를 (부여해요) 마치 이글루 같아요. 에스키모인이 사는 집. 얼음 하나하나 맞춰서 짓는 것.
이글루에 있는 얼음, 모든 얼음 조각들을 전부 의미로 모아 놓고 그 속에 우리가 들어가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의미가 어떤 난대없이 지진이 나서 구멍이 생겨 뚫어지게 되면 의미 체계가 무너지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은 자살하는 겁니다. “ 나는 이래서 못 산다! 이래서 못 산다! 나는 이것 때문에 살고 있는데 이제 무슨 낙으로 사나!”
갑자기 사랑하는 남자가 죽는다든지,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 버리면 뻥! 빵구가 나는 거예요. 갑자기 암에 걸린 다든지 그동안 나는 건강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나는 이렇게 건강해! 건강하지? 이게 자기의미가 된거예요. 친구에게 물어보고, “난 건강해! 살 뺀다!” 이러다 차에 치어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런 의미 때문에 가로 막혀서 십자가 의미가 가로 막혀 있는 거예요. 결혼 하면 행복합니까?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자기에게 행복이라는 의미로 주님의 연극하고 있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거예요. 무대 자체를 본인이 꾸미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꾸미는 연극 무대가, 연극 무대의 한 요소로써 연극에 포함되어 있어요.
잠자다가 꿈에서 깨잖아요. 깨어나 보니 맨 그 꿈이라는 거예요. 이중 삼중으로 지난 주 낮에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제가 (병원)심방한 어떤 할머니에게 테스트를 한다고 했지요. 말기 암으로 인해 의사조차 손들어 버린 환자. 거기서 분명한건 가상 테스트였지만, 구원 받는데 있어 자기의 행함으로 아니고 주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것이 비록 가상 테스트였지만 그 사람이 거기서 예수 때문에 구원 받는 것 이라고 하니까 OK! 했냐 하면 그분이 이미 자기가 자기 의미 체계를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만약 20대 때 까불락 까불락하는 30대에게 그렇게 전하게 되면 “왜 그런대요?” 젊은이에게 그렇게 하게 되면 “얘야! 너는 뭘해도 다 죄고 주의 은혜이다! 왜 그런대요? 왜 그런대요?”
아직까지 내가 이정도로 잘났는데! 분명히 이렇게 나올거란 말이죠! 그런데 그 할머니는 모든 걸 포기 했기 때문에 테스트에 통과가 되는 거예요. 그걸 미리 암 걸이기 전에 그러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이 와서 십자가로 하여금 우리를 죽게 하시는 거예요. 잠시 롬6장 봅시다. 로마서와 마18장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한번 봅시다.
(롬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 하여 살아계심이니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 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6장 앞부분은 제가 설명을 못하는 게 너무 어려워요. 설명하는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 제가 10절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이 말이 어렵지만 설명 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몇 번 죽습니까? 단번에 죽으심 안에 우리가 포함돼 버렸지요?
그러면 우리가 육으로 나중에 늙어 죽는 것은 잠자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잠자는 것으로 몰아 세워 버리면 우리의 죽음은 단번에 죽음이지요. 단번에 죽음이 매일 같이 반복되는 거예요. 죽고 또 죽고 또 죽는 거예요. 왜? 우리는 주님의, 예수 안에서 단번에 살았기 때문에 살았고! 살았고! 살았고! 살았고가 되기 때문에 제 설명이 더 어렵습니까?
우리는 “ 너 몇 살이지? 칠십, 너 몇 살? 팔십, 우리는 어떤 기간을 이야기하잖아요! 그 기간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는 시간이나 기간은 없는 거예요. 오직 사건만 있는 거예요. 그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늘 죽이고 늘 살리는 사건으로 매일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경험하다 보니까 길어 졌는데 길어 졌다고해서 또 의미를 두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게 지금 롬6장이거든요! 로마서는 무엇이냐! 이미 마18장에서 교회라고 언급한 그 교회가 이미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현실화되는 상태에요. 그러면 교회 안에 뭐가 있느냐! 지금 제가 물었죠! 교회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작용한다 했지요! 말씀이 작용하는 방법이 뭐냐! 늘 죽이고 늘 살리는 것이다. 그 방법의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18장의 이야기는 결국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아! 예? 연극해라! 무슨 연극? 주제가 뭡니까? 너희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십자가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서 너희가 연극해야 된다! 그러면 우린 죽습니다!
아니! 그런 식으로 죽는 게 아니고 너희들은 너희의 일상적인 행동과 그것이 이렇게 끈으로 연결시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아지는 행동을 하고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십자가에서 응축된 그 내용을 풀어 보게 되면 우리의 일상이 되는 겁니다. 마트에 가서 빵 사고 포도사고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는 일상의 의미망.
새로운 의미망입니다. 이것은 주일 낮에 이야기했습니다. 새로운 십자가에서의 의미망, 결혼하는 것이 나의 행복의 의미망이 아니고 평소엔 결혼이 나의 행복을 위해서 했다라고 하다가 중보자를 발견해서 결혼했다! 이 말은 새로운 의미의 그물망에 포착이 되는 겁니다. 그 자리를 뭐라 했습니까? 그것을 ‘은사’라고 했지요!
(마18:15)의 내용은 십자가를 주께서 전제로 하시고 너희들이 내게 속한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역할들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이게 교회의 큰 문제예요. 마귀적인 거에요. 주께서 어떤 식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셨는가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차후적으로 이미 역할을 배정받은 거예요. 이것이 성령의 은사예요.
마18장 계속 합시다. 십자가로 갈 때는 반드시 여기서 충돌 현장이 일어나야 되요. 곱게 끌려가는 법이 없어요. 반발하고 저항하고 반항하고 왜? 우리 속에 괴물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저항하는 이유는 자기의 선함 때문에 그렀습니다. 자기의 의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아담은 선악을 다 알고 있다고 했지요! 그 말이 맞아요. 선과 악을 다 알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필히 죽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이 다 엉터리거든요. 부자 청년이 선한 선생이여 하고 질문 할 때 이것도 엉터리입니다. 왜 엉터리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궁극적인 악입니다. 전체가 악이에요. 자기가 악을 감추기 위해서 선을 위장하고 있는 거예요. 선과 악은 상대적이죠. 그런데 선과 악이 잘못됐다는 것을 주께서 보여주기 위해서 무엇을 주셨냐 하면 쾌와 불쾌를 허락하셨어요.
그러면 땅에서 저주 받잖아요. 아무리 선하고 싶어도 불쾌하면 짜증이 나게 되있어요. 우리의 육신 자체가 그래요. 삐질삐질 땀나면 아무리 사랑한다 하더라도 여름엔 땀 날 때는 각 방 써야 되요. 붙어 있으면 열이 나요. 36.5˚열이 나서 안되요. 우리 시원하게 여름에는 각 방 쓰자.
그런데 고전7장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기도하기 위해서 합의 하에 각 방 써도 되지만 그 외에는 각 방 쓰지 말라 얼마나 세밀하게 가르쳐 주는지. 제가 설교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을 아무도 지킬 사람 없다. “여보! 내가 기도해야 되는데 잠시만 각 방 쓰는 걸 허용해줘!”라고 남편이 아내에게 말하면 아내는 “늘 기도해라 나는 당신이 늘 기도만 했으면 좋겠어! 짜증나!”
왜 그렇게 기도 외에 합방 안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사탄이 시험한다 했지요. 그래서 사탄이 역사하는데 아담에게 사탄의 역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담 자체가 저주받은 환경 속에 던져졌어요. 여기서 무엇이 생깁니까? 이마에 땀이 흐르지요. 삐질삐질 땀이 흐르지요. 밥 먹고 살기 힘들지요. 전부다 불쾌하잖아요.
불쾌하니까 이게 뭐가 되냐 하면 악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선은 뭡니까? 이 불쾌한 것이 상쾌하게 될 때 이것을 선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선은 뭡니까? 이 불쾌한 것이 상쾌하게 될 때 이것을 선으로 본 는 거예요. 그러면 선과 악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본인의 컨디션에서 나왔지요? 그러면 이것은 저주가 저주 티를 팍팍 낸 겁니다.
아내가 고통 가운데서 해산 할 때 왜 고통을 줬습니까? 순풍순풍 낳게 하지 왜 고통을 줍니까? 짜증나요. 모든 게 괴로워요. 그러면 남편이 온화하게 대해주면 되는데 꽥꽥 고함만 지르고 남자는 남자 행세 한다고 개뿔도 돈도 없으면서 남편은 하늘이라고 이런 소리만 하고 그럼 여자는 갈라서자! 한 달간 말미를 다오! 하던지 하는데 여자는 바보같이 남자와 헤어지고 난 후 기다려요.
왠지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해요. 이게 사모한다고 하는 거예요. 사모 자체가 저주예요. 남편 말고 사모하는 게 개를 키우는데 여섯 마리나 키우고, 연예인들 보면 집에 여섯 마리나 키우면 집이 꼬라지가 뭐가 되나, 어디는 고양이 10마리 키우고 그런 연예인도 있고 아기 대신 개 키우니까 말이죠.
결핍, 왜 이렇게 반려 동물을 키우냐? 뭔가 사모하고 그리워 지는 거에요. 빈틈을 채우는거에요. 왜 행복 때문에, 행복이 자기 의미의 체제가 되는 겁니다. 마18장에 나오는 이 죄라는게 뭐냐 하면 죄 지은 사람이 본인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선악을 알기 때문에 악이 있는 곳에도 나름대로의 선한 것을 끄집어 낼 줄 아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면 선이 왜 악이 되냐 악을 가리기 때문에 더 못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식으로 악이면서 악이 아닌 척 하는 게 그게 더 못된거예요. 제가 개혁주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개혁은 거짓이고 위선이다 하니까 글로 써놨으니까 발표할 때 교수들이 인상 다 쓰고 전부다 짜증내고 있어요. 그 대목이 나와서 제가 읽었어요.
개혁주의는 개혁 자체가 거짓이고 위선입니다. 왜 개혁했던 그 자체가 본인만의 지평선에 역사의 지평을 따로 만들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를 가리는 위선이다라고 했어요. ‘개혁했노라’가 얼마나 위선적이냐 말이죠. (마18:15-19)까지 중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 이것이 증거라는 거에요.
증참 한다는 게 증거한다는 거든요. 이 증거한다는 말이 왜 어렵냐 하면 죄 지은 사람이 이 증거를 거부합니다. 왜 거부하냐 하면 앞으로 잘할께요!. 이게 문제에요. 앞으로 잘하면 되잖아요. 왜 자꾸 예전에 잘못한 그것을 가지고 자꾸 꼬집습니까? 앞으로 잘 할께요!. 남편들이 아내에게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하면 잔소리 하는 거예요.
잔소리하면 왜 싫어하냐 “나도 알거든” 네가 말안해도 나도 알거든 잔소리는 좀 있다하고 씻고 자고 내일 아침에 해라. 내가 이미 알거든 은 무슨 뜻입니까? 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내 죄를 내가 안다는 게 뭐에요. 그게 뭡니까? 선이잖아요. 그런데 아내가 남편에게 잔소리하는 것은 몰라서 잔소리 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그것을 해서 내가 피해 입었으니까
너는 내가 피해 받은 것 만큼 당해보라고 잔소리하는 거예요. 한소리 또 하고 한소리 또 하고 너 때문에 내가 가슴 아프니까 나만 당할 수 없다. 너도 한번 당해봐라! 막 쏘아대는 거에요. 그럼 남편은 어~어~어~어 안 들을라고 그럼 아내가 오늘은 밥 없다! 문 콱 닫고 방에 들어가 버리는 거에요.
그렇게 싫으면 내가 말 안할께! 그게 준비된 2차 무기에요. 말 안하는 것. (아내가)“여보! (남편이) 시끄럽다! 말 안한다 하면서 이러지요. 그렇게들 하는데 제일 좋은 결혼 생활은 소꿉놀이 하는 겁니다. 경상도 방언에 빵깨이라고 하는게 있어요. 소꿉놀이 하는거에요. 어릴 때 많이 해 봤지요? ”여보! 밥 지어 왔어요!“
소꿉놀이를 하려면 어른 되는 걸 포기 해야되요. 어린애로 돌아가서 그 때 그 소녀, 그 소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시간이 멈춰야 되요. 다시 어릴 때로 돌아가서 직장에 갔다가 집에 와서 문을 여는 순간 애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왜 못 돌아가느냐 나는 돌아가고 싶은데 상대가 날 무시할까봐 너에게 함부로 할까봐 둘 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둘 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언제 잠시 멈춰 주는 가 둘 다 술 먹었을 때 둘 다 취하게 되면 자신의 체면을 놓아버리죠! 그 때 둘 다 애가 되버려워. 소꿉놀이가 성립됩니다. 그런데 또 자주 술 먹으면 알콜 중독되니까 조심해야 되요. 마18장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증거를 갖다 대는거에요. 그런데 죄를 범한 사람이 그걸 거부합니다.
“왜 잘못한 것 나도 알거든 앞으로 내가 잘 할께!” 그러면 그건 교회가 아니예요. 왜? 교회는 시간이 멈춰져야 되요. 시간이 아예 삭제 되야 되요. 시간이 삭제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왜? 시간이 삭제죄면 무엇도 같이 삭제되느냐 하면 그 동안의 모든 역사도 같이 삭제 되버립니다. 그냥 수몰되어 버리고 시비 걸질 않아요.
죄 지었으니까 죄 지었다 하면 끝나는 거에요. 그런데 앞으로 잘 할께요라고 하면 교회가 아니라는 거에요. 지금 왜 이 말이 어려우냐 하면은 “주여!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이런 구원 문제를 들이댔기 때문에 이게 교회가 아니에요. 구원 문제를 들이되면 무조건 교회가 아니에요.
그럼 뭐냐 나는 이미 구원 받은‘증참’증거물이면 되는 겁니다. 죄를 지었다 일부러 죄 짓게 하셔서 죄인되게 만들었다하면 우리는 하나의 연극 무대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 역할을 한 것으로 결부시키면 문제 없어요. 하나의 탤런트인데, 죄 짓는 역의 탤런트인데 그런 이야기를 욥에게 하기엔 좀 미안 하지만 욥은 온 몸으로 했어도
괜찮아! 메소드 아주 멋진 연기를 하고 있다면 끝나는 문제인데 욥에겐 연기가 아니라 실제이지요. 하지만 실제라는 것도 주의의미망, 의미의 계열에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연기로 합류가 되는 겁니다. 지금 나의 의미망, 나에게 무슨 이익이냐! 내가 구원 받겠느냐! 내가 복을 받겠느냐! 자꾸 내 의미망을 포기 안하니깐, 하는 척을 해버려요.
하는 척을 하는 것은 메소드 연기가 아닙니다. 그건 자기를 위장하는 거지요. 자기 자신을 의식 하면서 연기하는 겁니다. 그건 믿는 모습이 아니죠. 그건 어느 구조냐 하면 선과 악이죠. 악을 행하면서 선을 따로 챙기는 거죠. 악보다 선이 더 얄밉지요.
동생을 죽인 그 행위가 사실은 어디에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가인의 제사 행위 속에 이미 동생을 죽일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면 되는 거지요. 그 마음이 그 마음이니까 그래서 제사 드리는 그 마음을 거부하시고 동생을 죽이는 그 역할이 진짜 본심인거죠. 가인의 본심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본심을 모르죠. 왜 모르냐 자기는 십자가 앞에 서는 게 아니고 자기가 생각하는 행동의 의미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의 진짜 모습인줄 알고 있어요. “주여!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행복해야 되니까 그런데 마지막에 차마 그 말을 못하는 거에요.
그 말을 못하고 그 말을 바꾸지요.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이렇게 바뀌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영광을 위해서 “네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래? 그것은 곤란한데요. 그것 봐! 니 행복이잖아! 끝까지 너 밖에 모르잖아! ”이렇게 추궁당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 (마18:15절)을 보면서 죄인을 찾지 마세요.
우리교회는 누가 이런가~ 본인이에요. 본인들이 증거물들이에요. 안 들켜서 그렇지! 들키게 되면 같은 교인들이 불러서 호출을 해도 소환 당해야 됩니다. 검찰청에 소환되듯, 검찰청 입구에 탐색대를 지나서 찰칵!찰칵!찰칵! 기자들이 몰려와서 “왜 비자금을 그렇게 했습니까? 하면 미안합니다. 국민들에게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충실하게 진술에 임하고 나오겠습니다.
다시 나와도 어떻게 ~어떻게 했습니까? 보디가드가 막 밀어내고 밀치고 그러면서 가버리고 항상 인간은 누구나 그래요. (죄 지어 놓고) 앞으로 잘할께요라고 하는 겁니다. 선과 악에서 악으로 밝혀지면 곧장 어디로 갑니까? 선으로 쫓아가서 거기서 피할 피난소를 마련합니다. 들어가는 그 순간에 주께서는 막아 버립니다. 스톱! 못가게 해라! 막아라!
막고 뭘하냐 십자가를 들이대요. 십자가를 “아! 여기선 십자가가 아니고 죄 지은 것라 하는데 아니고 죄 지었다는 그것이 연결 고리가 십자가와 연결 되있는 죄입니다. 성경에서의 예를 들면 ”너는 왜 아버지의 첩과 간통했느냐 (고전 5장)에 나오지요. 예! 저도 그것이 죄인줄 압니다. 그러면 땡! 탈락이에요.
또 이렇게 하면 안되요. 주께서 이렇게 죄짓게 하셨습니다. 주를 믿는 선함을 자기 앞에 방어책으로 가져 오는 게 되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책임을 주님께 넘김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믿는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제게 일어난다 할지라도 저는 당당합니다. “너 왜 그렇게 했어?
제가 이것보다 더 큰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제가 밥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저는 죄인중에 괴수이고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고 제가 그 일을 통해서 제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의 현장이 되는 겁니다. 우리 한 번 성경에 나온 것을 실습해 볼까요?
왜 남자 다섯 명을 사귀었습니까 그것도 다 버리고 여섯 번째 사귑니까? 나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예배를 어디서 드려야 됩니까? 그리심산에서 드릴까요? 어떻게 할까요? 그럴 필요 없다. 그런 너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신령과 진정으로 네가 뭘해도 예배가 되는 그런 날이 왔다
그러면 이제 해야 될 것이 뭡니까? 나는 누구를 만났다? 나는 메시야를 만났다. 이러면 메소드가 끝나는 겁니다. 막은 내리고 잠시 휴식하고 내일 되면 또 새로운 죄를 짓고 요번에 우리 아들 사법고시 합격 했습니다. 이런 죄가 어디 있습니까? 저희 애가 합격되면 다른 애가 탈락되는데 이런 나쁜 죄가 어디 있습니까? 이러면 남들 보기엔 미쳤다 할꺼예요.
무슨 자랑 질을 이렇게 하는가라고 “그래! 너는 이것보다 더 심한 죄를 짓게 될꺼다 앞으로 네가 재벌되는 죄를 짓게 될거야 주여! 차마 그건 못합니다. 도저히 땅 값이 올라가고 이건 참을 수 없습니다. 어쩔수 없어! 너는 그런 죄를 지어야 돼! 너로 말마암아 12명을 살리고 네가 지하철에서 술 취한 사람이 너로 인해 살아나고 그런 죄를 지어야돼 주여! 제가 그런 죄를 짓는다니요? 어쩔수 없어!
이건 남들 보기엔 진짜 연극이지요 자기 손으로 남을 구하고 할 때 전부다 죄가 되는 거에요. 왜 주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죄인 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아니! 목사님 그런 사람이 어디 잇습니까? 있지요 누구요? 12제자. 원치 않는 길로 질질 끄려가고 허리 끈 쥐고 원치 않는 길로 가면서 주께서 일하시고 본인은 원치 않는 길로 갈 수 밖에 없어요.
사도 바울도 내가 나 된 것은 주의 은혜고 나는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그게 할 수 없는 거에요. 그 모든 것이 그럴 때 18절에 무엇이든 땅에서 출면 하늘에서도 풀면 풀린다 이래서 어려운거에요.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준다 하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로 다시 해석하면 이미 십자가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이런 죄들이 일어난다. 이렇게 해석되는 겁니다.
주기도문에 뭐라고 돼있어요. 너희가 너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면 너희 죄도 용서해 주잖아요. 십자가로 와서 보게 되면 이미 용서 받았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다는 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일단 그 말씀을 누가 가져가냐 하면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져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게 되면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을 우리는 증거물로 예수님이 이런 일 까지 하셨습니다.
용서 하셨다는 증거물을 보여 주기 위한 역할을 맡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그런 일을 주께서는 우리로 시키시는 상황이 일어나는 겁니다. 문장이 길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뜻은 아시겠죠!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이것을 몽땅 우리는 손 떼고 주께서 가져가십니다.
주께서 가져 가셔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고 그 다음에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구원 받는 사람은 이미 하늘에서 매인 자도 풀리고 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죄와 남의 죄가 비로소 눈에 들어나는 거예요. 들어 나는데 그 사람한테 “앞으로 똑바로 해!”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해도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시고 일이 일어 날 때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냐 하면 그게 바로 두 자로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두 번째 강의 제목은‘교회’ 첫 번째는 ‘오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말씀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의 삶이 정말 실제적으로 짜릿짜릿 할 정도로 다른 현실이 필요 없고 이것이 우리의 전부인데 이것조차 주님을 증거하는 연극이 되게 하시니 우리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메시야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