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50410b-히10장1절(구원의 효과) - 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보다 좀 더 난해하게 할 수밖에 없어요. 왜 난해하냐 하면, 천국이 무엇이냐, 하는 그 문제가 걸려요. 천국이 무엇이냐. 천국을 만들 때,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따먹고 난 뒤에, 갑자기 자기 문제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어요. 하나님보다 누가 더 중요하다? 내가 더 중요하게 되었어요.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생로병사 너무 힘들게 살잖아요. 이거 방치하면 안 되지요. 내 인생은 누가 관리해준다? 내가 관리해야지요. 아무도 나 외에 누가 나를 끝까지 사랑하고 관리할 자 없습니다. 나밖에 없어요. 끝까지.
인생동행 누가해줍니까? 내가 내 몸을 내가 관리해야 되고 내가 책임져야 돼요. 따라서 인간들은 자기를 어떤 식으로 천국에 넣어주기 위해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미지’입니다. 이미지. 나는 이런 식으로 천국 간다, 하고 중요한 천국에 있는 좋은 것들을 다 끄집어 모아서 천국이라고 조립을 해버려요. 그래서 아라비아인들의 천국하고 아시아인의 천국이 달라요. 그리고 로마신화에 나오는 천국이 달라요.
로마신화의 천국은 신과 플러스 거인들의 세계입니다. 그리 합리화돼요. 헤라클레스는 바로 신과 거인의 낳은 아들이 헤라클레스에요. 이것은 성경에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히어로 영웅의 시대에요. 아이언맨,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전부 다 특징이 뭡니까? 비범한 능력을 가진 자들의 어떤 총화 그걸 사람들은 가고 싶어 하는 나라에요.
그런데 여기 10장1절에 보면,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되어있지요. 그림자요, 이게 뭐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말이 그림자는 뭐는 아니다? 참 형상은 아니라고 되어있지요. 워낙 인간들이 상상을 가짜 천국, 가짜 하나님, 온갖 신들을, 일본에 가면 신이 백만 개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십오만 개라 하고 어떤 사람은 백만 개라 하는데 어떻던 신들이 많아요. 그리고 대만 같은데 보면요, 가는 곳마다 향불 켜놓고 비는 거예요. 타이완. 특히 베트남에 안 가봤는데 여행 보면 이상한 나무만 있어도 전부 다 향 피워 놓고 있지요. 앙크로와트 거기에 가면 도대체 힌두교 신자들이 나오는데 여자들이 상체 옷 입고 나오는데 신들의 세계에 노래하는 찬양대랍니다. 그리고 앙크로와트에 나오는 그 사원들의 모양새가 기존에 있는 자연물의 모습을 모방해서 미메시스라 하는데, 모방해서 사원을 만든 거예요.
그러면 사원이란 뭐냐, 자연의 일부가 되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그림자로 보는 겁니다. 그림자. 무슨 그림자? 그림자의 실체가 따로 있지요. 그 실체의 그림자인데. 그게 그림자가 되어버리면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지, 실체는 모르고 그림자만 붙들고 있지요. 인간의 방법은 그림자 붙들면 행여나 실체에 접촉하지 않을까, 접근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세상이 그림자라고 규정되는 것은 율법이다. 따라서 율법 외에는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말씀 외에는. 한방으로 끝내버렸어요.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헛것들이에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 인간 자체가 헛되기 때문에 인간에 나오는 모든 상상력도 전부 다 헛된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 헛된 것을 모아서 뭐로 보는가 하면, 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현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의미의 연결망이에요. 의미의 연결망. 자꾸 의미를 줘요. 실제로 예를 들면, 오렌지 하나만 봅시다. 하도 어려우니까 쉽게 하겠습니다. 이 오렌지가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인간이 재배했지요. 재배란 말은 유에서 유가 나온 것이 재배지요. 인간의 모든 하는 공작과 일은 인간은 창조를 못합니다.
재작은 할 줄 알아요. 재작은 할 줄 아는데 오렌지 씨앗으로 오렌지를 만든 거예요. 그럼 처음 오렌지는 누가 만들었어요? 그건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이걸 모든 인간은 인정을 해요. 모든 종교, 모든 신화를 보면 세상만물은 신이 만들었어요. 신이 만들어서 오렌지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이 만들었다하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실 것같이 보이지요. 로마서1장21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안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할 것 같지요? 천만에 말씀. 이 자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만들어낸 조작된 의미로 보는 거예요.
신이 만들었다는 것도 조작된 의미로 보는 겁니다. 그럼 이 오렌지는 누가 만들었어요? 성경적으로 봅시다. 누가 만들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만들었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 33살 먹은 청년이에요. 왜 하나님 믿는 사람과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정반대인지 이제 알겠습니까? 하나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곁가지로 들어가요. 하나님이 만든 이미지를 일단 그건 하나님을 인정했다고 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모르는 빠진 부분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만 빠져있다, 말이죠.
그러니 밥상은 차려놨는데 숟가락 쪽으로 들어간 것이 예수님이 들어가 버리면 이제 제대로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발상을 유지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던가요? 너희들의 하나님에다가 나하나 더 추가하게 되면 온전하게 진리에 다 관계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어떻습니까?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들은 내 아버지를 모른다, 하십니다.
바리새인이 모르면 누구도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바리새인이 누구의 아들입니까? 아담의 아들이죠. 아담의 아들들이 예수님의 아버지를 모른다는 말은 그 누구도 몰라요. 모르는데 왜 이리 신들은 넘쳐납니까? 다 그림자에요. 한 번 물어봅시다. 이 오렌지를 왜 재배합니까? 오렌지가 있다, 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 손에 있는 게 아니죠. 오렌지가 있어야 오렌지가 나오니까. 오렌지가 있는 것을 가만히 두지 왜 재배하느냐 말이죠. 들개가 있으면 있는 거지 왜 집에다가 묶어서 반려개로 집에서 키우느냐 말이죠. 왜 그렇게 합니까? 여기에 의미가 들어가요.
그 의미가 어디서 나오는가, 나는 잘났다는 것,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선악과 따먹어도 하나님은 뭐라고 해도 나는 선악과 따먹은 나를 나무라지 않겠다는 그 자기 나름대로의 고집과 반발심, 반앙심, 이런 것들이 오렌지에 의미를 담긴 겁니다. 담겨놓고 이런 핑계를 대요. “주여,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맛있게 먹겠습니다.” 이런 핑계를 댄다고요. 그렇게 해서 드린 제사가 뭐냐 하면, 가인의 제사에요.
가인의 제사가 추수감사절 제사입니다. “하나님이여, 이거 원하시잖아요. 우리는 받아놓고 입 싹 닫는 그런 염치없는 인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왔다는 것을 성의를 표할 정도로 그 정도로 하나님의 생각에 우리는 가득 차 있습니다.” 라고 드렸더니만 그 제사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안 받았지요.
그러면 가인이 뭐라고 불평했어요? 이렇게 할 거예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뭐라고 뭔가 언급을 해주셔야 제가 그 제사 드릴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이렇게 바치라고 말은 안 해놓고 무조건 내 제사 안 받아버리면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이 되겠습니까?” 라고 하겠지요. 하나님이 받은 제사는 니 손으로 니가 살인자가 되는 제사, 그게 받은 제사에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율법과 제사가 아니고 주께서는 상한 심령을 원하십니다.
인간은 오렌지뿐만이 아니고 여기다가 오렌지에다가 사과에다가 귤이라든지 컴퓨터, 피아노, 자동차 다 집어넣읍시다. 그게 모여서 총화가 뭐냐, 그렇게 눈에 띄는 모든 걸 총화라고 하는 걸 가지고 현실이라고 해요. 우리 인간은 어디서 산다? 현실 속에서 살고 있지요. 그건 뭔 뜻입니까? 내가 우리들이 만든 이미지 속에 우리 인간이 갇혀 사는 거예요. 그럼 그 바깥에는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나요.
그런 영화가 미국에 있잖아요. 어릴 때부터 카메라 장착해가지고 성장과정을 전부 다 찍어났는데 나중에 커서 우연히 보니까 자기가 남들이 몰래카메라 안에 전부 다 생중계된 인생을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투르먼 쇼>지요. 나중에 무대세트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비로소 처음으로 내가 사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잖아요. 전 세계 생중계되는 쇼를 받은 거예요. 영화에서.
<투르먼 쇼>는 그 주인공이 밖에 튀어나갈 수는 있지만, 실제 우리는 못 빠져나갑니다. 그래서 제 말이 어렵다는 거예요. 아무리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어도 그것마저 나를 위한 하나의 그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둥그런 구안에 들어있는 갇혀있는 장식품, 옛날에 촌스런 장식품 알지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서 산호도 집어넣고 하잖아요. 그거 볼 때마다 불쌍해 죽겠어. 산호 갇혀가지고. 꼼짝도 못하고. 물고기, 조개 같은 거 넣잖아요. 보기에는 이쁜 줄 모르겠지만 그 조개는 숨 막힐 거예요. 플라스틱으로 꽉 차여있으니까.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이미지, 인간들의 이미지에 꽉 차여 숨도 못 쉬고 있어요. 이렇게 살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 줄 알아요. 그렇게 꽉 손으로 막았느냐, 마귀가 그렇게 한 거예요. 죽기 무서워서 종노릇 한 거예요. 주님은 이겁니다. “죽어봐라. 죽어도 괜찮아.” 이게 주님인데, 우리는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야 되지 내가 책임져야 되고 내가 죽으면 누가 책임져 줄 사람 없다는 겁니다. 내가 죽어버리면 하나님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하나님도 소용없으니까.
“그러니까 니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너를 위한 하나님이지.” 라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지적하고 계시는 겁니다. 무슨 하나님이 니 죽으면 같이 없어지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말이죠. 니가 죽더라도 살아나는 하나님이 되어야 되지요. 그러면 니가 죽더라도 살아나는 하나님 같으면 어떻게 되어야 돼요? 내가 죽더라도, 원래 죽도록 조치했던 하나님이어야 되고 더 나아가서 내가 죽는 그것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흐뭇해하시는 일로서 하나님이 되어야 돼요. 차마 우리는 그 범위를 거기까지 확장하기가 겁나는 겁니다.
“이러다가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진짜 하나님이 기쁘다는 그걸 핑계로 해가지고 나를 세월 호 물속에 빠져 죽게 하면 누구만 손해입니까? 나만 손해지요. 5억 받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5억 받아서 술이나 먹겠지만. 자식은 안 돌아오잖아요. 결국 나만 손해잖아요. 인간은 자기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건 예수님이건 뭘 믿어도 인간은 자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구원 안 됩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은 없었습니다. 왜? 개가 우리 동네에 수변공원해가지고 시냇가에서 흐르는 내가 있고 나라에서 구청에서 개발해가지고 산책로를 만들었어요. 그래가지고 공사하는 사람들이 지금 시멘트 양생중이니까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푯말을 붙여 놓은 거예요. 나중에 끝나고 보니까 발자국이 남는 거예요. 누가 했는가 보니까 개들이 했어요. 개가 글자를 몰라요. 개의 세계에서는 언어라는 이미지가 없기 때문에 출입금지라는 말을 못 알아듣고 개가 지 맘대로 해가지고 엉망진창으로 해놨어요.
우리는 개거든요. 주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믿는 것은 같은 인간밖에 믿을 게 없어요. 손잡고 손에, 손잡고, 믿을 것은 인간밖에 없어요. 믿을 것은 주님이 아니고 목사밖에 없어요. 목사가 위로해 주면 우리는 구원받는 줄 알고 있어요. 같은 인간이면서. 지도 몰라. 아무도 몰라. 지도 지 살기 바빠. 그런 인간을 붙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죠?” “그럼, 기뻐하시죠.” “십일조하면 복 주죠?” “그럼 복 주고말고.” 전부 다 사기 쳐가면서 손에, 손잡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출애굽을 한 적이 없어요. 왜냐, 그 개가 들어올 때, 개가 아스팔트를 밟았잖아요. 그걸 온 천지 시커멓게 질질 밟아놓은 거예요. 그러면 뭡니까?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았잖아요. 애굽에서 살던 행세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는 곳마다 전부 다 애굽 화시켜 놓은 거예요. 그게 바로 함 땅에서 함 땅으로 시편105편 나옵니다. 함 땅에서 나왔던 인간이 결국 들어간 땅이 뭐다? 함 땅이죠. 저주 받은 땅에서 살다가 결국 저주받아서 멸망했잖아요. 이스라엘이. 그걸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다. 율법주고 하나님이 은혜주고 만나주고 온갖 것 다 제공했지만, 그 품새가 이미 애굽이에요. 모든 걸 애굽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니까요.
애굽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살고 보자!’에요. 그리고 만나를 주니까 만나의 의미도 몰라요. 고기 먹고 싶다. 고기 주니까 그 다음 뭐라 합니까? 우리는 애굽에 있을 때 수박도 먹었고, 참외도 먹고, 파도 먹고, 남자의 정욕에 좋다는 걸 먹었는데, 이건 뭐 정욕에 좋다는 산수유도 안 주고, 이건 수박도 없고, 매일 먹는 게 만나하고 이것만 먹으니 못 살겠다하고 원망할 때, 주께서는 광야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낸 그 꿈인데, 사실은 현실이라 보거든요. 그 현실이란 이름의 꿈에서 인간은 깨어날 수 없어요. 자다가 깨어나도 인간은 맨 애굽사람이에요. 출애굽이 안 됩니다.
자, 출애굽 안 되는데 주의 대책방법이 뭡니까? 대책방법이 이래요. 동그란 큰 오리 알 같은 게 있으면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바늘을 가지고 와요. 바늘을 가지고 외부에서 찌르고 빼버립니다. 찌르고 빼면 여기에 뭐가 남겠지요? 작은 구멍이 남겠지요. 그게 십자가 구멍이에요. 외부에서 찌르고 들어왔을 때, 인간은 외부라는 게 없어요. 왜냐 하면, 모든 게 자기가 꿈속에서 만든 착각의 현실 속에 예수님이 들어왔기 때문에 목수의 아들, 요셉의 아들이라고 본 거예요.
왜 그리 봤습니까? 본인들에게는 누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앞에 어떤 청년이 나타나니까 청년에는 분명히 아버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벌써 예수님은 청소년 때, 그런 고백을 했어요. 성전에 올라가지고 유월절 행사 갔는데 나흘 동안 찾았는데 아버지가 너를 찾았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주 대발아진 말씀을 하시지요. “내가 아버지 찾는 걸 몰랐습니까? 아저씨라는 말은 안했지만, 아이고, 아저씨는 내가 아버지 찾는 걸 같으면 성전에서 찾아야지 왜 엉뚱한데 돌아다니며 찾습니까? 내 아버지는 여기 있는데 어디서 찾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가 없어야 구원받아요. 이게 이삭입니다. 구약의 이삭.
성경 말씀이 누가 쉽다고 했습니까? 이삭은 아버지가 없어요. 왜냐 하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했기 때문에. 고장 난 생식기입니다. 할례가 뭡니까? 생식기를 고장내버리는 거예요. 앞으로 난 자식은 우리가 난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미래의 약속에 의해서, 앞당겨서 주어진 미래에 이런 아들이 있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림자로 온 거예요.
사람들은 현실을 그림자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을 주면서 그림자라고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 율법을 자기의 현실을 더욱 더 부흥시키기 위한 용도로서 그림자라는 것을 끄집어 떼어놓고 그 율법과 실체와 연결되는 연결고리는 사람들이 죽여 버렸어요. 주님의 바늘이 율법이거든요. 율법을 쑤시고 당겼단 말이에요. 구약에서는.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오시고 빠지거든요. 오시고 빠졌을 때, 그 예수님 십자가가 모든 율법을 완성했다는 것을 몰라요.
그게 유일한 통로인데, 문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자기들이 그림자라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도 자기 현실 속의 일부로 가둬놓은 거예요. 저런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 했잖아요. 사형시켜 놓고 손을 털었습니다. 잘 죽었다. 아이고, 골치 아픈 사람. 골치 아픈 사람 괜히 했는데,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죽었는데 혹시나 저 인간이 사기를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그런 헛된 소리를 했기 때문에 로마군민이 지켰습니다. 여기서부터 부처, 소크라테스, 맹자, 공자보다 예수님이 차이점이 나는 거예요.
그런 모든 인간은 훌륭한 소리를 했지만, 그 훌륭한 소리가 꿈이에요. 전부 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꿈속에 자는 꿈끼리 이야기거든요. 바깥에 출애굽도 해본 적 없는 그 바깥 생각도 모르고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울리는 하나의 메아리, 주고받고 하는 메아리에 불과한데 주님께서는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모든 인간이 다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의 공동묘지가 된 겁니다.
그래서 이미 나는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우리는 하나의 공동묘지의 터만 제공했을 뿐인데 주께서 여기다가 부활의 빨대를 꽂아서 우리로 하여금 요구르트 되게 만들어요. 천국에서 주께서 뽑아낼 게 쪽 쪽 뽑아낼 게 그렇게 많아요. 뽑아도 또 맛있네. 주께서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요구르트로 래시피를 주께서 마련하셔가지고 주님이 쉐프가 되셔가지고 우리를 하나의 천국에 양식으로 만드신 거예요. 참, 허황된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러나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냥 잔소리하고 산상설교 해놓고 나간다 하고 간 게 아니고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생각한 부활과 천국이 다 죽은 자끼리 만들어낸 조작된 드라마에 지나지 않아요.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아요. 천국이.
그래서 천국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돼요. 그래서 골로새서1장13절에 보면 천국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들의 나라라고 하지요. 하나님 아버지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충격적입니다. 인간이 알고 있던 신들은 전부 다 자기 존재를 합리화시키는 논리적으로 끼워 맞추기 위해서 없는데서 있다고 신을 도입한 거예요. 그게 바로 신학이고 그게 바로 철학이에요. 그걸 유신론적 철학이라 하거든요. 신이 없는데서 만들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건 철학이에요.
복음은 뭐냐,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요. 예수를 위해서. 지금 제 차이를 여러분이 잘 이해를 못 찾았는데. 인간은 신과 자기가 있어요. 그런데 신은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지만, 내가 여기 있음을 어디로 가져갑니까? 내가 있지만 없을 때 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 죽고 난 뒤에 없으니까 무가 돼요. 요 무를 무 있게 되게 한 유가 있을 것이라고 연상해서, 마늘로 하면 동글, 동글하게 상상해서 이걸 신을 걸쳐놓고 신을 토대로 해서 비로소 나의 있음이 토대를 마련하고, 근거를 마련하고, 어휴! 나, 이제 신자가 되었다고 주장하게 돼있어요. 이게 바로 바리새인이고 이게 바로 인간은 이 범위를 못 벗어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걸 뭐냐, 그림자로 봐요. 천장으로 봐요. 그림자가 천장이에요. 천장바깥에는 뭔지 몰라요. 천장을 사람들은 하늘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삼층천이라 해가지고 하늘로 봐요. 거기에 하나님 거기 계시고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얼마나 양심적이고 신앙적으로 보이는지 경건해 보이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런 것은 누가 만든 거예요? 본인의 마음을 거기다가 본인이 투여한 거예요. 자기가 환등기고 필름을 집어넣어서 거기서 하늘을 하나의 스크린으로 삼아서 펼쳐진 거예요. “오, 주님이여! 보고 계십니까? 저, 무지개 봐! 무지개 봐!” 여러분, 무지개는 하늘에 있는 게 아닙니다. 무지개는 예수님한테 있어요. 무지개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한테 있어요.
그게 바로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바로 요한계시록(계4,10장)에 보면 무지개 있지요. 또는 에스겔1장28절에. 하나님의 성전에 무지개가 피잖아요. 예수님의 나라에 무지개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아이고, 목사님, 복잡하게 하지 마시고 예수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까?” 아니에요. 예수님의 나라는 예수님만 알고 있었던 나라지 예수님 외에 아무도 모르고 있던 나라에요.
그럼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있고 거기다가 예수님은 거기다가 추가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추가가 안 돼요. 둘 중에 하나가 충돌하게 돼있어요. 왜 충돌하느냐, 십자가가 바로 그 충돌의 의미입니다. 왜 충돌해야 되는가, 천국은 주님 중심의 나라고 내가 그리는 천국은 내가 거기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자꾸 생각하는 내가 거기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고 거기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거기에 합류해서 나는 영원히 산다, 라는 그 점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조작된 그러한 욕구가 욕망이 조작된 나라가 천국이기 때문에 이것은 허물어져야 돼요. 이것은 하나의 꿈같은 거예요. 내가 무너져야 돼요.
무너지는 방법은 뭐냐, 베드로 길을 가야지요. 베드로가 뭐했습니까? 주님한테 사탄소리 들었지요. 나는 주님을 모른다, 소리 했잖아요. 그것을 베드로가 했다고 하지 말고 우리도 평소에 마음에서 그런 잠재력이 있다가 갑자기 외부에서 큰돈을 준다든지 취직을 잘되게 할 때, “혹시 우리 회사에서는 기독교 신자는 안 되는 데요.” “아이고, 저 기독교신자 아닙니다. 아, 예수 처음 듣는데요. 예수는 어릴 때 빵 먹으러 간 적이 있고 그러고는 커서는 예수 안 믿습니다.” “아이고, 합격입니다. 예수쟁이 들어올까 걱정했는데.” “아이고, 일만 시켜주이소.” 우리는 밖에 나가면 시켜만 주이소. 다른 말로 돈만 주세요. 뭐든지 합니다. 이리 되거든요.
그게 뭐냐, 이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것은 누구 중심이어야 나는 만족하다? 나 중심입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행복’이라고 하고요, 행복에서 행만 가로 쳐 봅시다. 그럼 뭐가 됩니까? ‘복’되지요. 복은 교회에서 그리고 행복은 교회 바깥 모든 세계에서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겁니다. 전화 벨소리에 뭐라고 합니까? 행복하세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느냐.’ 에피쿠로스학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무소유하라. 완전히 법정스님이에요. 서양에서 벌써 나왔어요.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말고 행복할 수 있다면 소유를 버려도 상관없다.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목표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끼리 맞대고 나온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왜? 모든 것이 주님 때문에 만들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나의 본래의 자리는 사실은 나의 자리는 이미 없어요. 없고 없는 자리를 주께서 자기 자리를 내줘가지고 이제 주님의 자리가 내 자리가 돼가지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식으로 해서 주의 나라에 합세하겠다는 것이 바로 이 히브리서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전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동의를 한다는 자체가 기적입니다. 뭐가 빠졌기 때문에 동의가 안 되지요? 누가 빠졌기 때문에? 나는요! 이게 빠져있지요. 나는요! 가 빠져있는데 동의가 돼? 그러면 그 사람은 주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나는요! 그럼 주의 나라에 나는 어떻게 돼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주의 사람을 빙자한 여전히 나는 내 사람, 내가 책임지는 내 사람이 되어버려요. 아, 이 교회가 위험한 거예요. “주님 계시니까 교회 이거 망해도 괜찮습니다.” 이런 소리가 나와야 돼요. “여러분, 이 교회 보이지요. 여러분 투자했지요. 여러분, 한 구좌씩 했지요. 그렇다면 그거 다 날아가도 주님 좋아하시겠습니까?” 이리 나와야 돼요.
“여러분, 이 교회는 주님의 기적으로 세운 교회에요. 여러분들은 목숨 바쳐서 이 교회에다가 헌금하시고 재산 바쳐서 키워야 하늘나라가 확장됩니다. 하늘나라 확장을 반대하는 것은 오직 마귀밖에 없습니다. 보세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전도하라 했잖아요. 이 교회 중심으로 아파트 단지를 완전히 여리고성처럼 무너뜨립시다.”이리 나오더라 말이죠. 그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고 있어요. 왜, 나의 헌신의 가치가 빛을 보니까. “이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마음을 낮춰야 됩니다.” 이게 바로 아까 한 겸허한 자존심입니다. 마귀 세계의 지옥 보려하면 가까운 교회에 가시면 됩니다.
히브리서에 사도바울이 언급하는 것은 그겁니다. 그림자라는 거예요. 실체는 누구냐, 예수님이다.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데, 오셨다는 거예요. 아, 키가 몇 센티? 키는 묻지 마. 뭘 믿어라? 뭘 봐라? 기능을 봐라. 어떤 기능? 죽었다가 부활한 기능. “주님은 좋겠다. 죽었다가 다시 사니까.” “아니.”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알아야 돼요. “그거야 뭐 배웠습니다. 저 때문에.” “아니.” “너의 뭐 때문에? 죄 때문에.” “그런데 니는 니 죄를 아느냐? 모르느냐?” 모르잖아요. 왜? 선악적인 사고기 때문에 별로 나쁜 짓한 기억이 안 나거든요. 파출소를 간 적이 없다니까요. 그러니 아무리 봐도 자기는 나쁜 쪽이 아니고 착한 쪽이에요. 왜? 주변에서 아이고 이쁜 딸래미라 해가지고 어릴 때부터 그렇게 컸기 때문에.
문제는 예수님을 알아야 되는데, 문제는 어디서 막힙니까? 내 죄를 내가 모른다는 사실이에요. 기껏 선악 기준으로 들어가지만 선악 기준 자체가 죄악된 거거든요. 죄악된 거 가지고 자기를 판정내리면 그 판정은 전부 다 무효가 돼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아,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이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은 나쁜 것이구나!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그 해답이 틀렸다는 사실이에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는 것의 정답을 말씀드릴까요? 정답은 그겁니다. 예수님을 믿어라, 그게 정답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까지 연결을 못 시키고 뭐냐, 돈을 사랑함이 악의 뿌리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내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아니까 나처럼 돈 사랑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별로 없잖아. 봐라 그러니까 나는 뭐다?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다.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주께서는 그걸 정답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 십자가 앞에서는 십자가만이 모든 해답을 쥐고 있고 그 앞에서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죄인으로 드러나야 되는데, 우리는 손들고 잘난 체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생각하는 죄와 우리의 말씀해석이 이게 서로 사맞지 아니할새, 일치되지를 않는 겁니다.
자, 어떤 분이 상담하러 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양이 많은데, 부자가 자기 양은 놔두고 자기 종의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가져다가 잡았습니다. 상담을 하러왔습니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여러분, 다들 뭐라고 하겠어요? 다들 분개하겠지요. 왜? 착하니까. 그건 정답이 아니에요. 그럼 뭐가 정답이냐, 그 못돼 먹은 사람이 바로 상담 자인 내가 그리 못된 인간이에요. 시편51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부잣집 재벌이 그렇게 잘 사는 거 불구하고 그 가정부 딸을 못 살게 구박하는 그런 드라마를 지금 하고 있어요. <폭풍의 여자>하는 거. 그걸 보고 사람들은 분개를 하는 거예요. 그걸 보면 이 세상에서 악한 것이 자꾸 나온다는 말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그걸 악이라고 지적한다는 자체는 우리가 뭐가 되어버려요? 나는 악에서 빼주세요, 라는 말밖에 더 돼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악한 걸 자꾸 유발시키는 이유는, 그렇게 우리가 얼마나 평소에 착한 척을 하고 있느냐는 이 진짜배기 악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악한 짓을 자꾸 발생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발생시킨 일에 대해서 우리가 죄라고 규정해야 될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바로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지옥 갈사람 같으면 그런 걸 안 해줍니다. 천국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상징적인 그 잘못된 의미와 십자가의 의미를 자꾸 와서 부딪쳐요. 자꾸 부딪쳐 가지고 나의 의미를 주장함으로서 내가 몰랐던 죄를 드러나게 하시고 그 죄마저 이미 십자가에서 해결했다는 것을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따라서 이 세상은 뭐로 깔려있다? 주의 말씀의 의미의 그물망이다. 이게 정답입니다. 이 세상은 어느 구석이라도 주의 깔아놓은 말씀에서 못 벗어나요.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만든 것은 애굽에서 못 벗어난다고 했지요. 그런데 우리는 못 벗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어디서 못 벗어납니까? 주의 세계에서 못 벗어납니다.
따라서 이미 이것이 주의 세계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어디 있느냐, 바로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하늘나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그것이 하늘나라의 현존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즐거움과 희락이다. 그걸 존재의 차원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과로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킵니다.
존재의 차원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너와 내가 있고, 너는 나에게 뭘 해줄 것이냐, 요게 따지는 게 존재의 차원이에요. 어려우면 그걸 바꾸겠습니다. 생존의 차원. 내가 여기 살아있고 너가 살아있는데 니 하나 좀 손해보고 내 좀 살려둬. 반갑다, 친구야! 무슨 뜻이에요? 내 좀 살려 둬, 이 말이에요. 아이고, 초등학교 동창! 반갑다, 친구야! 사실은 내가 요번에 보험하나 들래? 내가 나이 많아서 보험회사 들어갔는데 요거 하나 해라. 이게 뭐냐, 니 하나 희생하고 덕분에 내가 살자. 요게 바로 존재의 차원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꿈이라 했지요. 그건 다 그림자라 했지요. 실체 아니지요.
그림자인데, 그림자라고 이야기해도 안돼요. 왜냐 하면, 그림자가 되려면 실체와 연결해야 되는데 실체를 모르는 이상, 계속 그림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뭐로 바뀝니까? 십자가의 차원으로 바뀌어버리면, 저 동창생을 왜 만났지? 나로 하여금 보험회사 외판원 왜 하게 하셨지? 나로 하여금 왜 정수기 팔게 하시지? 잘나가던 남편 사업 망하고 왜 나는 정수기 팔아야 되지? 왜 나는 애가 넷이나 되지? 여기 넷이 없으니까 만만하게 말합니다.
나는 왜 네 명이나 돼가지고, 왜 그 때 수술할 때 수술이 안 되어가지고 잘못돼 가지고 네 명이나 되지? 왜 그렇게 하신 겁니까? 그 현실은 누가 깔아놓은 현실이에요. “그 애, 니 애 아니야. 예수님 내꺼야. 착각하지 마!” “사업 망한 남편 니 남편 아니야. 니한테 붙여줬어.” 모든 것을 십자가 차원으로 움직일 때, 천국은 바로 여기가 천국이구나! 주님이 내 중심을 바꿔치기 했던 그 곳이 바로 살아도 주와 함께 살고 고대로 죽어도 이제는 주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우리가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목사님, 듣기는 좋습니다만, 이렇게 힘들게 살기에는 천국이라 한들 힘듭니다.” 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주어지는 것은 세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과 피조물은요, 예수님 중심에 맞추어서 재편성되게 되어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웨딩드레스라 하는 것은 신부의 고귀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날만큼은 화려하게 만들어서 입잖아요. 입어봤지요? 만족했었어요?
이 세상은 예수님의 웨딩드레스에요. 천국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따라서 반짝 반짝 보석이 들어있는데 보석 자체를 위한 보석이 아니고 자기들 좋아라 보석이 아니고 누구 좋아라고? 예수님 좋아라고 반짝이어야 될 보석들입니다. 그 안에는 어린양의 보좌가 있어요. 희생당한 분이 계시고, 그 앞에 그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깔려져있습니다. 눈물이 없고 아픔이 없고, 우리 좋으라고 한 게 아니에요. 남편 되신 주님 좋아라고 신부된 우리에게 그런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없는 다른 웨딩드레스, 지금까지 입어보지 못한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웨딩드레스를 우리에게 새로운 장막으로 입혀주신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내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이에요.
그럼 이 땅에서 진짜 입혀주지, 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왜 초라하게 변변치 못하게 세일해도 돈이 없어 이 허름한 옷을 입고 사느냐, 이게 바로 실컷 애굽적인 옷을 원 없이 입어보라고. 실컷 입어봐라 말이죠. 부르똥인지 실컷 가방 들고 다니고 그걸 해보면 해볼수록 그게 얼마나 꾸미고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건 말로는 안 되고요, 누려봐야 돼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제발 부자 되세요. 정말 부자 되세요.
부자 되시고 난 뒤에 이 부자 이것이 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외양간에 소가 없다 할지라도 경남기업 망해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좋아하겠다. 하려면 경남기업 회장이 되어야 돼요. 또 자살하지 말고. 청와대에 국회의원도 돼보고 청와대에 아들이 있어보기도 하고 그래야 정권 바뀔 때 초라하게 허무하게 어떻게 떨어져 나가는지를, 하여튼 다 해보세요. 어쨌든 할 때까지 해보시고 평생 꿈만 꾸다 가는구나! 하는 것을 아시고 유일하게 꿈이 아닌 것은 부활했던 그 분만이 꿈이 아니에요. 십자가 부활만이 꿈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 받기 때문에 제발 저주받는 걸 알게 되면 그건 구원받은 사람이고 저주인 것을 모르는 내가 다이아몬드를 하고 무슨 고급의류를 입는데 이게 지금 헛되고 헛된 것을 입는다고 생각 안하고 입어버리면 그게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알고 입으면 이왕이면 좋은 옷 입으면 기분도 좋아지고요, 갑자기 생활에 용기가 업그레이드되고 활기찹니다. 여유 되시면 소비를 하세요. 소비해야 경제가 사니까. 뭐든지 하세요. 그걸 가지고 내가 막살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냥 막 사세요. 뭘 기준해서? 이게 다 헛된 망상이고 꿈인 것을 아시고 그냥 막 사세요.
내가 예수 믿는 거 망상이에요. 예수 믿는다고 주께서 도와주는 게 아니고 예수 안 믿어도 주께서는 구원해주니까 그 사실이 믿어지니까 굳이 내가 예수 믿을 필요가 없잖아요. 믿음이 있는데 왜 거기다가 내가 왜 또 믿어야 돼요? 주께서 이미 준 믿음이 있는데, 그 믿음은 어디에 버리고 내가 또 예수를 믿씁니다, 쌍시옷까지 해가면서 믿씁니까? 믿씁니다, 그런 짓을 왜 하는가 말이죠.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믿씁니다, 라고 강요를 하겠어요.
기도를 2시간, 3시간 뭐 할 게 있다고 2,3시간 하겠어요. 얼마나 한 맺혔으면 그렇게 하겠어요. 우리교회에 오후에 기도시키면 최고 빠른 사람이 7초 걸리는지 그렇고 지난번에 15초 갔지요. 그런데 그것도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거예요. 전 세계 생중계 되니까. 내가 남한테 판정 받으니까. 심판 받으니까. 무서워서 못 하겠다는 거예요.
9절에 봅시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 행하러 왔다의 그 행함이 뭐냐, 폐하러 왔다는 거예요. 헛되고 헛된 망상 율법을 줬는데, 그 율법은 딴 분이 이루었어요. 누가? 예수님이 이루었잖아요. 그러면 율법 쥐고 뭔가 구원받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은 어떻게 돼요? 폐지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사람은 성도입니다. 율법의 폐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분명히 성경에 나와요. 그걸 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실천에 옮겨가지고 내가 신자임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멈출 수가 없어요. 우리는. 그러나 그 돈이 오백 원은 천원은 우리가 안 돌아볼 수 있어요. 그러나 50억 100억은 미안합니다, 해서 후딱 해가지고 “주여, 이거 내가 쓸려고 하는 게 아니고 선교하는데 보태어 쓰려고.” 해가지고 훅 잡아당깁니다.
도박은 우리는 십원짜리 십원빼이, 백원빼이 고스톱은 안칩니다. 그런데 로또복권이 바람에 날려 와서 얼굴에 뭉개면 우리는 버리지 않습니다. 한 주, 토요일을 기다리고 있네요. 혹시나 바람에 날렸는데 이 바람이 주께서 두 바퀴 세 바퀴 돌려서 붙인 바람인데 혹시 1등 되게 되면 교회 지으라고 주신 돈이 아닌가. 로또 액수가 만약에 만 원짜리 같으면 에이 씨~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참새 키울 때, 누가 키워 주십니까? 발걸음을 누가 세셔요? 우리는 이걸 그냥 주면 기본으로 그냥 오는 줄 알고 있어요. 기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신음소리에서 예수님의 피 때문에 주어진 세월을 살면서도 우리는 그냥 받아요. “마땅한 거고 그거 말고 내가 원하는 거 주세요.” 이리 나온다 말이죠.
기본적으로 주신 그 주님의 아픔이 들어있는 하루, 하루 먹을 것, 입을 것 주시고 햇빛, 공기주는 이것은 감사할 줄 모르고 그저 내가 세상적인 환상, 애굽에서 서로가 서로끼리 지금 꿈꾸고 있는 꿈속을 아직도 헤매고 있는 겁니다. 망상들을. 그거 안 가졌다고, 그거 망했다고 자살하고요. 사실은 자살하기 전에 이미 죽은 자에요. 농약이 너무 독해서 안 먹지, 사실은 농약이 달콤하고 바나나 우유처럼 만들었으면 여러 명 다 죽었어요.
폐하러 왔다, 폐하러 왔다고 해서 우리가 죽는 게 아니고 의미의 차원에서 폐하는 거예요. 의미의 차원이 바꿔진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주님이 임해도 그대로 손가락 5개 맞아요. 그대로 있어요. 다만, 우리는 이 손가락이 나를, 생존을 위한 의미로 우리는 가짜로 했잖아요. 이걸 바꾼다니까요. 이 손은 주님에 의한 손이라고 의미를 바꾸어주는 그것을 행하려하기 위해서 나의 의미 장, 처신의 의미라는 그것을 폐하러온다 말이죠. 그냥 사시면 된다고요. 왜, 주의 주신 은혜인데 왜 안 살아요. 돈 쓰세요. 돈 모으시고. 왜, 주님이 주신 돈인데 아껴서 쓰시고 모으고 하세요. 하지만, 의미를 나의 자존심을 위한 의미로 그걸 하게 되면 주께서는 강제로 그걸 폐지시킵니다.
욥이 하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왜 사람들은 고 까지만 끊어서 읽는지를 몰라. 그 뒤에 말이 뭐지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 그 뒷말은 왜 벌벌 떨면서 이야기하는지 몰라. 벌벌 떨면서. 사무엘상2장에 보세요. 신명기32장에 보세요.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고, 왜 심방 가서 그 뒤 이야기는 안 합니까? 죽이기도 하신다. 그걸 왜 빼요?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은 병을 낫게도 하십니다. 이 말은 뭡니까? 없는 병도 감기도 주시기도 합니다. 상하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고. 무슨 뜻입니까? 꿈 깨라 이 말이죠. 너 때문에 준 게 아니고 너 때문에 뺀 게 아니고 나 때문에 줬고 나 때문에 뺏고.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정답은 막 사세요. 그냥 되는대로 사세요. 우리가 보기에는 질서가 없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꽉 짜진 질서입니다. 어떤 질서? 바꿔치기한 질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집어넣기 위해서 이루어보려고 하는 것을 폐기시키는 그 헛된 꿈과 비전과 꿈을 폐기시키는 교체작업을 합니다. 주님은 지금 바빠요. 되게 바쁩니다. 우리는 혼자 신기한 기적 없나, 맨 날 이러고 있지만 주님은 지금도 발걸음 센다고 가만히 있어 봐! 1248, 7238, 바빠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카락이 한 줌 빠졌지요. 가만히 있어봐! 몇 개 빠졌나. 주님은 다 아시고 계십니다.
다 주님의 세계, 그 마음이 바로 하늘나라, 성령이 임한 그 마음가지고 죽으면 주와 함께 더불어 살게 되는 겁니다. 한 마디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0절에 봅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렸잖아요. 그럼 몸이 몇 개에요? 아담의 몸이 있고, 예수님의 몸이 있고. 분류하면 두 개밖에 안돼요. 로마서5장에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굳이 우리보고 합니까? 니 몸은 어디서 나왔지? 자연적 차원에서. 아담의 몸에서 나왔지요. 그 자연적 몸을 누가 폐기시킵니까? 주님 중심으로 폐기시키면서 이 몸 말고 흙에 속한 형상 말고, 천사같이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에구 누가 그걸 믿을 줄 압니까? 안 믿습니다.” 할 때, 주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몸이 바로 우리 몸이에요.
주께서는 우리의 가는 그 행로를 미리 앞당겨서 먼저 가셔가지고 그 길 따라 가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안 가고 싶은데 빼고 우리는 안 갑니다. 왜, 지금 곧 가방이 보이는데 왜 가요? 빌딩이 보이는데. 로또가 지금 될까 말까한데 그걸 왜 가요? 애가 지금 성적이 좋아가지고 사법고시 수석이냐 하고 있는데. 애가 지금 좋은 신랑 만나서 결혼식 해야 되는데 결혼식 이전에 재림하면 어떻게 돼요? 재림은 5월18일인데, 결혼식은 5월17일 같으면 어떻게 돼요? 주님 한 이틀 늦추면 안 되겠습니까?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할 때, 갑자기 왔잖아요.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평소에 방주만 쳐다본 노아는 신났고, 다른 사람들은 헉! 헐! 끝났고, 그 노아 말씀이 지금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장착을 시켜 놓고 그 효과를 퍼지면서 우리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의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 했다는 점에서 신났고, 안 지켜도 된다는 점에서 즐거웠지만, 오히려 본격적으로 바꿔치기한 율법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그 자체를 하나님이 성도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