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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강의-구원의 효과(히10;1) 1504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4. 26. 10:46

2015-04-11 01:04:51 조회 : 163         
구원의 효과 150410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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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50410a-히10장1절(구원의 효과)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10장1절 들어가기 전에 9장에 보면, 사람이 죽는 건 정해진 것이고 그 다음에 심판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심판에서 면죄시킬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두 번째 오시고, 그러면 이 구약이 마지막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면 됐잖아요. 끝났잖아요. 여기 써 놓은 다 이루었다. 끝! 이리 있네요. 그런데 10장 1절에 율법이야기 왜 나오지요? 어떤 사람이 와서 나를 데려간다. 그러면 됐잖아요. 그런데 법이 왜 필요 하느냐 이 말이죠.

이 세상은 뭐하나 움직이면 다 법이에요. 어떤 가게를 새로 낸다든지 집을 새로 등기를 한다든지 모든 곳곳에 법이 있습니다. 법에 대해서 부합이 되면 패스가 돼요. 성공이 되고 법에 위반되면 벌칙이 주어지는 겁니다. 바로 율법의 그런 기능이 이미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죄와 상관없이 죄로 용서받은 사람을 데려가시기 위해서 두 번째 오신다면, 제 질문이 그러한 벌칙 조항이 있고 그러한 복 조항이 있는 그런 법이라는 것이 왜 그다지 필요치 않은 것 같은데 왜 법이야기가 왜 10장에 나오느냐 말이죠. 이미 이야기가 끝났는데. 예수님이 데려가겠다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가자! 천국 가는데 법이 왜 필요 하느냐 말이죠.

법이라 하는 것은 보통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법은 누가 지키는 겁니까? 법을 받은 사람이 법을 지키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히브리서10장1절에 나오는 법은 뭐냐 하면, 법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손을 잡고 데려가시는 분이 우리가 지킬 수 없는 법을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생각해 보세요. 그 이야기도 이왕 우리를 데려가는 입장에서는 새삼스럽게 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가자! 가! 하고 데려가면 되지 내가 데려가는데 너 때문에 니가 법을 못 지키기 때문에 내가 지켰다는 이야기를 굳이 생색내시면서 하실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말이죠. 상당히 따지고 보면 10장 1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거든요. 문제는 이겁니다. 사실은 중요한 문제인데. 어떤 분이 와서 나를 천국으로 데려갈 때,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지요? 이 문제와 관련이 되어있어요. 예수라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키가 크고 좀 잘생기고 수염 좀 나고 머리 좀 기르고 이러면 예수입니까?

예수 또는 예수의 종, 예수의 사도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직접 계시 받은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고 천국 갔다 온 사람도 왜 그리 많은지. 옛날부터 그런 사람이 많아요. 왜 사람들이 주님만이 하시는데 제2의 제3의 주님이 그다지 필요치 않는 것 같은데 왜 그리 주의 종, 주의 사자가 왜 그리 많은지 상당히 위험한 지금 시절을 우리가 보내고 있다, 이리 보시면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10장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데려간다, 이야기를 했으면 이 모든 게 마감이 됐는데 10장의 율법이야기를 또 끄집어내느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율법이 어떤 분에게 메시아에게 임했을 때에 그 메시아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 현상을 통해서 진짜 메시아냐 아니냐를 분별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나, 메시아다.” 누구나 주장할 수 있어요. “당신이 메시아인지 증거를 대보세요.” 그러면 그 쪽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를 믿으라니까 나를 무조건 믿으면 돼. 무조건 믿어. 그리고 너에게 천국을 보장하마.” 나보고 죽어서 천국 가도록 해주는데 일단은 거부할 일이 없잖아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따른다 말이죠. 그럴 때 나를 부르는 것이 예수란 이름을 갖고 나오는 사탄인지, 진짜 예수님인지 그것을 분간할 줄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된 성도다, 이 말입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알고. 놀라운 사실은 목자가 양을 쥐고 다니면 어떤 마귀가 아니라 어떤 세력이 오더라도 내 손에 있는 양을 뺏을 권세 자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요한복음10장에서 그렇게 선언한 거고요. 도대체 장악하는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장악하는 힘이 주님이기 때문에 나왔다, 이리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뭘 하신 것 때문에 자기 양을 놓치지 않는 힘이 있다, 이리 되어야 되는데 고 중간에 들어가는 그 기능이 바로 율법적인 기능인 겁니다.

우리가 생각한 율법적 기능이라 하는 것은 십계명 줬다 하는 것은 우리가 지키라고 준걸로 생각하는데 일단 그건 아니라는 것은 히브리서1장부터9장까지는 나왔어요. 나왔다면, 10장부터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고 난 뒤에 그 지킨 효과가 우리한테 직접 와 닿아야 되거든요. “율법 지켰다. 내가 메시아다.” 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 나올 수 있어요.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열 수십 명 나올 수 있어요. “내가 바로 율법 다 지킨 메시아다. 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런 주장을 정신만 철판 깔면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정말 율법을 다 지켰다면 그 예수님한테서 나온 그 멘트, 그 이야기가 우리한테 어떤 효과로서 다가와야 되는 거예요. 주님이 지킨 것이 우리의 마음에 변화가 유발되어야 돼요. 그 유발되는 현상이 뭐냐 하면, 어려울 때는 결론부터 이야기하는 게 제일 좋거든요. 유발되는 현상이 뭐냐 하면, “나는 구원 자격이 없다.” 나는 구원될 자격이 없는 자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그런 효과를 줘요. 그러면 구원 될 수 없는 자격자가 구원이 되게 한다면 그 모든 공로와 그 모든 성과는 누구 몫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전부 다 예수님 몫으로 돌아가겠지요.

그러면 심지어 내가 예수 믿는 거 할지라도 그것은 구원되는 능력이 될 수 없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아무리 믿는다고 하지만, 그 문장을 따지고 보면, 내가 예수를 소유한 게 돼버려요. 주님이 우리를 소유해야 되지 내가 주님을 소유하면 안 되잖아요. 아들이 자기 친구하고 이야기하면서 “내가 우리 집의 아버지 내가 잘 키우고 있다.” 이걸 지나가는 아버지가 들으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누가 누굴 키우는 겁니까? “아, 나 우리 아버지 있는데, 내가 우리 아버지를 갖고 있어.” 자기가 아버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자식을 갖고 있겠지요. 듣는 아버지 기분 나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한테 자기 천당 가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 자기가 주님을 가졌데. 이 가졌다는 말은 안하지만,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예수를 믿는다, 가 되어버려요. 믿는다는 말이 내가 믿겠다는데 설마 주님께서 외면할까, 이런 뉘앙스가 강렬해요. 내가 믿겠다는데 감히 저 쪽에서 예수님 쪽에서 “아, 나는 싫어.” 그럴 리 있겠어. ‘내가 감히 믿어줬으면 딸려와야지. 오는 것이 주님의 자비로운 성품일거야.’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경향이 있어요.

그러면 정답이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고자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그걸 떨쳐버립니다. 너가 나를 예수를 믿어? 어디서 수작 부려? 어디서 나를 가지려고 해. 내가 니 노리개야? 어디서 수작 부려? 나, 니하고 대화 안 해. 나, 니하고 상대 안 해. 그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10장 7절에 나와요.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성경에 있는 율법에 대해서 인간은 일단 배제됩니다. 율법의 뜻도 모르고요, 인간은 의식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그렇다면 율법을 줬으면 반드시 성취가 되어야 되는데 그 성취자를 위해서 따로 한 몸을 줬다는 겁니다. 그 한 몸이 5절에 나오지요.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하나님을 위하여 한 몸을 예비했는데 그 예비 된 몸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을 예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되지요. 아버지와 아들이 알아서 다 해버려요. 다른 사람은 고스톱 판에 끼어들지 못하고 우리는 그냥 효과만 보는 거예요. 두 번 고스톱치고 그 남아있는 돈 딴 거 가지고 누가 딴 거 모르지만, 그것가지고 과자 살 때 과자부스러기 얻어먹는 거예요. 고스톱은 그 분 두 분이 치시고 우리는 덤으로 그냥 몸만 가서 먹은 겁니다. 먹으면서 이 맛있는 것은 다 주님 덕입니다. 이런 이야기하는 그 공간을 가지고 천국이라고 해요.

그러니 천국 가려면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자기를 토해내야 됩니까? 자기가 할 수 있다는 것, 나도 가능하다는 것, 나도 예수 믿을 수 있다는 자기 솜씨를 얼마나 이걸 찢어야 되고 폐기처분해야 돼요. 그러니 그게 방금 이야기한 효과라는 겁니다.

처음에 강의할 때 어렵게 시작했는데 결국은 뭐냐, 진짜 메시아는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주느냐, 나의 것을 몽땅 게워내는 효과를 유발할 때 진짜 메시아다, 이 말입니다. 그 분이 바로 진짜 메시아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그 하나님의 율법을 줬다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다시 이야기할게요. 율법을 줬다는 것은 진짜 메시아가 율법을 완성한 메시아가 누구냐에 대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작업이 되고 그 작업의 현장은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율법을 다 이루었다, 지켰다, 굉장히 말은 쉬워요. 구체적으로 우리의 일상 일거수일투족을 통해서 다 이루었다, 를 증거를 우리가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느냐, 뽑아낼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가 그 다음에 계속되는 겁니다. 그 문제를 위해서 성경 한 구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사야53장10절,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딱 요 구절이에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다 이루었다. 아, 참, 주님께서 다 이루었구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덕분에 구원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우리는 뒤돌아서고 다시 본연의 내 자리로 돌아올 때, 뒷덜미를 딱 잡아요.

“내가 너에게 구원을 시킨 효과 있잖아.” 그러면 우리가 “고맙다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죽어서 천국 보내주심을 아낌없이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이 손 놓으세요.” “고맙다고 해줬잖아요. 찬양 드립니다. 헌금 섭섭지 않게 해드릴 테니까 이 손 놓으세요. 네, 믿습니다. 믿고 나 천국 갑니다. 그런데 지금 사업을 해야 되니까 공장을 세웠기 때문에 지금 빨리 가야 됩니다. 바쁩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지요.

자, 주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이루었던 것이 효과로 올 때는 그 주님께서 받은 게 뭐냐 하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상함 받기를 원했다는 거예요. 상함이라는 것은 뭐냐, 외상, 내상 다 포함됩니다. 아픔이고 채찍에 맞는 것이고 고생이고 고난이고 그리고 그 전체를 한꺼번에 묶어서 이야기한다면 내어버려두는 거죠. 내어주는 것 그걸 의미하거든요. 그리고 형벌 받게 하시고 8절에도 나오는데 그건 다 읽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간에 제가 말씀드린 것은 질고를 그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되어있어요. 그렇다면 구원받는 효과가 뭐냐, 오늘날 성도에게 그대로 전이가 되어버리면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한테 줬던 그 상함과 그 질고가 그대로 구원받은 효과로서 성도에게로 반드시 주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니가 복이 많구나! 아이고 이 복된 것. 보통 애가 공부 잘하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이쁜 것, 이 복된 것. 하잖아요. “아이고, 복이 많구나! 이게 무슨 횡재를 해가지고 주의 이름으로 이렇게 고난과 핍박과 욕을 얻어먹지. 아이고, 요거 복된 것” 그걸 감사하고 즐거이 그걸 받아드릴 때, 구원의 효과 속에 놓여있는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거래로 생각해요. 주께서 니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손 떼시고 고맙다고 이야기해 줄 테니까 헌금은 섭섭지 않게 내고 교회는 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가게 문을 열어야 되니까 빨리 가겠습니다. 우리는 내 생각 따로 있고 주님한테는 고맙다는 말로 때우고 내 생활 따로 챙기려는 의도가 강한데 주님께서는 쫓아옵니다. 옛날의 전설의 고향처럼.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내 다리 내놔라, 니는 효도한답시고 엄마한테 고기 먹였지만, 내 송장의 엉덩이 살은 니가 왜 떼어 가는가, 내 다리 내놔, 라고 뛰어오는 것처럼 주께서는 죽을 때까지 끝까지 우리를 따라옵니다. 내 다리 내놔라~~ 끝까지 따라와요.

그래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성도는 하는 일 족족 안 돼요.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했어요. 사람들이 찾는 것은 완전히 꿇어 박는 길이다.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은 꿇어 박는 길이다. 그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길이다. 길이 잘 닦였어요. 양쪽 10차선 도로에요. 그냥 사람들이 다 쏠려가요. 완전히 조용필 리사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전부 다 몰려가요. 죽~ 거의 다 가요.

그런데 진짜 영생이 기다리고 있는 그 길은 없어요. 찾아봐도 사람이 없어요. 보니까 길이 들어서자마자 힘들어요.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한 260m힘들고 그 다음부터는 아스팔트 나오면 좋겠는데 이것은 갈수록 골짜기라. 260m지나도 계속 힘들어요. 한 3년간 힘들어도 괜찮겠지, 3년이 어디 있습니까. 죽을 때까지인데. 한 10년간 고생했으면 주님도 양심이 있으니까 좀 쉬엄쉬엄하라고 숨통은 터 줄줄 알았는데 숨통이 어디 있어요? 갈수록 점점 더 좁아요.

같이 출발했던 그나마도 몇 안 되는 숫자 나중에 한5년 사니까 다 떨어지고 없어요. 친구도 다 떨어지고. 친구가 떨어지면 괜찮지요. 남편도 떨어지고 자식도 떨어지고 다 떨어지고. 그래서 그쯤 돼서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목사님, 복음 가는 길이 왜 이리 외롭습니까?” 처음에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왜 그리 힘듭니까?” 하다가 나중에는 힘든 것보다 더 깊이 들어가 버리면 “왜 이렇게 외롭습니까? 주위에 복음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왜 이리 외롭습니까? 어느 교회 가야 됩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그거 로또복권 딴 거예요. 횡재한 거예요. 갈수 없는 나라에 가고 있는 거예요. 갈 수 없는 나라에. 성경에 나오는 천국의 특성은 갈 수 없는 나라에요. 가고 싶어도 우리가 거부하는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될 수 없는 게 어디서 감히 생명나무를 따먹어요? 요한계시록22장에 보면 생명나무 가로수가 깔려있거든요. 어디서 그걸 따먹어요? 처음에 창세기3장에 결정했는데 따먹지 말라고 그걸 파수를 해놨는데 어딜 감히 넘봐요? 생명나무를 어떻게 넘봐요? 우리는 따먹을 생각도 하지 말아야 되고 따먹을 능력도 없어요.

주의 이름으로 “걱정 마! 내가 따 먹으라 하면 따먹어.” 주의 명령으로 따먹게 된 거예요. 구차 없이 천국 가게 된 거예요. 팔자가 더러운 팔자가 돼가지고 천국 가는 팔자가 된 겁니다. “이것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한 거 맞지요?”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좁은 길 가는 것은 제 뜻 아닙니다.” 좁은 길로 가서 천국 가볼까? 요거는 수작부리는 거예요.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고난과 고생을 자처해가지고 마치 뭔가 사도나 된 것처럼. 기만이고 오만입니다. 특히 사람이 천국 가는데 모든 걸 다 투자할 수 있는 그러한 오기 같은 게 있어요. 인간은. 악마적인 오기가 있다니까요. 내가 기어이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두고 보자. 이런 식으로 오기인데 그 오기는 천국에서 큰 일 납니다. 가봤자 천국 가서 자기 부서 만들고 자기 코너 만들어서 자기 찬양하게 될 거예요. 그런 자는 아예 천국에 못 갑니다.

안 가겠다는데 왜 자꾸 거기다가 천국에 집어넣습니까? 안 가겠다는데. 주님도 아시다시피 내 성품과 내 노닥거림은 딱 지옥이라니까요. 왜? 돈 좋아하지 남한테 꿇리기 싫어하지요, 세상 모든 중심이 내 중심이지요, 남의 애는 물에 빠져 죽든 말든 내 애만 잘되면 괜찮지요. 좋은 거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서 온갖 동네방네 자랑질 다하지요. 어딜 봐서 천국을 가요? 어딜 봐서. 차라리 세리가 가는 게 빠릅니다.  창기가 가는 게 빠릅니다. 그 정도밖에 안돼요. 이게 나이 든다고 성화된다고 거룩해야 된다고 해서 이게 달라지지 않아요. 갈수록 더 세련해지고 교묘해지지 결단코 인간 자체가 바뀌지를 않습니다. 인간성 바뀌지 않은 채 가야돼요. 그래야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던 주님의 취지에 부합될 수밖에 없어요. 끝까지 죄인을 부르셔서 구원하는 주님의 그 사랑과 긍휼이 우리에게 100% 계속 남아있어야 됩니다.

따라서 이 율법이라는 이야기는 결국은 시작부터 우리가 보니까 내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이 하신 이야기고 주님이 우리가 싫던 좋던 우리 허락도 없이 강제로 우리 속에 집어넣는 그게 있는데, 그게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그 과정 속에서 주님은 어떻게 했는가, 찔림을 받았고 내어버림을 당했고 사람한테 모욕과 핍박을 받았지요. 그것은 우리한테 도달되게 되면 우리가 고생깨나 했다고 찔찔대고 짜증대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이러면 주께서 “그것도 고생이라고 했냐?” 내가 한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사람이 선행으로 반듯하게 살아서 인생 깨끗하게 살아서 구원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 이게 천국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반듯하게 살고 예수 믿고 착하게 살자, 이리 하는데 그건 천국을 너무 몰라요.

천국은 가로막는 장벽이 있습니다. 장벽을 보여준 게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이 착하게 살면 천국 갑니까? 하나님이 요구한 건 그거였습니다. 니 아들을 나한테 죽여서 바쳐라. 세상에 착한 사람들 다 나와 보라고 그래요. 나 이렇게 착했습니다. 저렇게 남한테 이웃사랑 했습니다. “다 나와! 다 나와!” 손에 칼 하나씩, 나이프 하나씩, 식칼 하나씩 쥐어주고 “자, 이제부터 내가 장벽을 뚫을 테니 각자 자기 아들 데리고 와! 5월8일 날 군에 가는 아들도 다 데리고 와. 다 데려와 가지고 눕혀놓고 묶어놓고 잡아.” 아무도 안 옵니다. 할 수가 없어요. 그걸 아시고 주님께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이 율법을 해낼 수 있는 용기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걸 아시고 율법을 준 겁니다.

왜냐, 그래서 율법의 전담반이 담당할 담당자가 너희들이 아니고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 분이 있기 때문에 이미 너는 율법을 못 지켜서 저주 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주기 전부터 이미 저주를 받는 자라는 것을 확인차원에서 율법을 준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모세가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하심이라, 그 뜻이거든요. 율법주기 전부터 이미 죽었고 죽었던 이유를 율법을 줌으로서 새삼스럽게 그걸 확인시키는 거예요. “너는 죽으면서 죽는 이유를 모르지? 몰랐지? 자, 율법 줄게. 한 번 지켜 봐. 못 지키지. 그러니까 니가 죽어도 나한테 할 말 없지.” 그런 뜻으로 준 거예요. 율법을.

율법 지킬 줄 아시고 줬다면, “야, 우리 착한 아기. 율법 지키나 한 번 봐야지. 상 줄게. 오늘도 율법 지키면 맛있는 떡볶이 해줄게.” 이래서 준 게 아니라니까요. 이미 생명나무에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고 난 뒤에는 니는 모르지만, 나는 하나님은 알아요. 그들은 추방되어 놓고 “내가 추방될 만한 그 만한 양심도 있는데 왜 추방시키지? 이건 하나님이 너무 심한 과한 일을 하는군. 내가 선악과 따먹지도 않았는데 조상이 따먹었는데 왜 벌칙을 나한테 주지? 너무 심한 조치 아니십니까?” 이런 불평을 입이 한 나발 나와 가지고 만날 불평하는 거예요. 가인처럼.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버려도 나는 하나님을 안 버렸지롱. 해가지고 제사 드리고 말이지요. 그게 무슨 해프닝, 그런 해프닝이 다 있어요? 버림받아놓고 제사는 왜 드려요? 가인이. 제사 드리면 좋아할 줄 알았는가요?

집나간 아들이 ‘어머님, 전 상서’ 써가지고 ‘어머님, 불효자는 웁니다.’ 이리하면요, 짜증나요. 그 따위 편지하지 말고 집에나 들어와. 집나가서 지 마음대로 다 하면서 효도한답시고 ‘아버님, 어머님, 전 상서. 불효자는 웁니다. 그동안 키워준 은혜가 어떻고...’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집에나 들어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마치 불효자이면서도 효도인척을 하는데 그 효도한 그 바탕이 뭐냐, 선악적인 바탕가지고 왠 효도를 다합니다. 제사 드리고 영광 받으시옵소서. 찬양 드리고 그 모든 바탕이 뭐냐 하면, 선악과 바탕이에요. “어릴 때부터 나는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주여, 이제 남은 것은 영생이니까 예수님이여, 선생님이여, 제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듣기에 같잖아서 말이 안 나왔을 거예요. “네가 뭐?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키고? 하나님의 복으로 부자 됐다고? 에이, 다 팔고 오너라.” 딱 그 한마디에 갑자기 근심이 돼가지고 안녕히 계세요, 하고 가버리지요. 이게 바로 인간의 본색입니다.

부자 되었으니까 복 받아서 착한일 많이 했더니만 덤으로 상 받아서 부자 된 줄 알았어요. 교회의 장로들 부자 가운데 그런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장로는 그리 안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리 많이 생각해요. 얼마나 기도 많이 했으면 부자 됐노. 부자가 부러운 거예요. 주님이 부러운 게 아니고. 교회가면 주님이 부러워지는 게 아니고 교회 가서 잘된 사람들이 부러워서 교회 가는 거예요. 사람들이. 얼마나 헌금을 해댔으면 부자 됐을까.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이에요. 그게.

주께서 하신 그 율법의 언급 속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주의 앞에 저항하는 세력이 우리 안에 담겨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를 챙겨서 죽고 난 뒤에 눈 떠보니까 천국에 왔다. 그 때 예수 챙기는데 행동과 내 결단력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라고 여기는 그것이 얼마나 불신앙 적인지. 참 불신앙 적이거든요. 그래서 그 마음을 예수님이 당했던 수난의 마음으로 이걸 교체를 하는 강력한 힘이 침투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침투하는데 바꾸는 그 변화되는 모습이 상당히 궁금할 거예요. 어떤 때 변화되느냐, 이렇게 변화되거든요. 하나님 믿고 내가 예수님 믿고 복음 알고 십자가도 알고 이제 말씀대로 살고, 교회도 성화하라고 하니까 성화까지 하고 경건하게 살라고 하니까, 나는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 말씀이 베드로전서 이야기가 마구 해가지고 “그래, 이제는 경건해야지.” 이렇게 했는데 되는 일은 하나도 제대로 안 돼. 그것이 내가 이만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 해준 것은 내 책임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나에게 뭔가 행정적인 처리가 잘못됐습니다. 엉뚱한 사람에게 복주고 저쪽 복이 나한테 올 건데, 이거 사무착오 아니십니까? 이런 식으로 대드는 그런 사고방식이 나오도록 주께서는 유발하시는 겁니다. 방금 이런 이야기가 다 성경에 들어있어요.

3절에 봅시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야, 이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제사를 드렸잖아요. 그 제사는 속죄제도 포함됩니다. 속죄제를 드린다고 합시다. 속죄제 드릴 때, 마음가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이 제물 받으시고 하나님이 우리한테 먼저 하신 약속이 있잖아요. 이 것 드리면 죄 용서한다고 분명히 약속을 했지요. 자, 그러면 보세요. 찰칵! 사진 찍으세요. 드립니다. 죄 없어집니다.” 돌아서서 뭡니까? 나는 드디어 죄 없어졌다, 가 되겠지요. 그게 죄인 줄 몰랐던 거예요. 그게.

왜냐 하면, 세상은 주님중심인데, 제사까지 드리면서도 여전히 나만 죄 없으면 되지, 라는 내 중심을 포기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제사 드린 것이 하나님 약속대로 드린다고 하는 그것이 그 심보가 결국 우회해서 돌아보면 누구 좋아라고 한 겁니까? 내 좋기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용해먹은 거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들이 있잖아요. 그 약속들을 어떻게 그걸 잘 이용해먹으면 내가 죄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왜? 천국에는 죄 있는 사람은 못 들어간다고 하니까.

그럼 내가 천국은 따내야 되겠고, 인생의 목표고 지금은 내가 아무리 봐도 죄가 있는 게 분명하고 따라서 중간에 죄 씻어주는 어떤 방안 같은 게 대책 같은 것이 하나님 쪽에서 제공해 주시면 고맙겠는데, 그게 제공됐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고 그걸 4글자로 기쁜 소식, 죄 용서하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고 따라서 기쁜 소식만 챙겨버리면 지금 내가 어느 정도 돈도 있고 이제 남은 것은 죽어서 천당 가는 그것만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기쁜 소식 그것마저 챙겨버리면 나는 신자가 되고, 기독교 교인이 되고 교회 등록이 되면서 나는 양쪽 다 챙기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챙긴 게 되지요. 기도해서 복 받고, 예수 믿어서 천당 가는 거, 이 두 마리 토끼 아닙니까.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두 마리 토끼.

복음이 아니면 그 죄가 죄인 줄 모르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주께서는 복음을 전하고 율법을 전하면서 드디어 니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죄가 드디어 발각을 시키는 겁니다. 그걸 누가 먼저 시키느냐, 구약 이스라엘 우리 선배들이 제사제도라는 제사법을 받으면서 그것이 해마다 되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되풀이 되면서 어떻게 됐습니까? 이스라엘은 멸망당합니다.

율법은 왜 줬느냐, 멸망하라고 준 거예요. 그걸 나중에 소급해서 보니까 나중에 차후에 회고적으로 보니까 사도바울은 알았지요.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멸망 받아도 싸다, 하는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줬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는 몰랐고 성도는 아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또 덤벼들지요. 어떤 식으로? 은혜로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구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 사도바울의 권면은 착실히 지켜서 반듯한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거룩이고, 사랑이고, 용서기 때문에 그것을 내 몸을 통해서 성령의 열매로 은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게다가 보너스까지 상급까지 챙겨주실 것이 뻔하기 때문에 천국 가서 남들은 부끄러운 구원받지만, 나는 천국 가서 푸짐하게 롯데종합선물 다 받아가지고 누리고 챙겨가면서 “저거는 에이~ 겨우 구원받았구나. 나는 상급 받고 산다.”얼마나 신바람 나는 일이에요. 이런 보험도 없어요. 이순재보험보다 더 많은 혜택을 입는 보험이에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신학입니다. 그게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학이었어요.

유대인들의 신학이 예수님을 죽였던 신학이 뭐냐 딱 나옵니다. 은혜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리자,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신학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신학이었어요. 그러면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않겠느냐, 못 벗어나요. 인간은 바리새인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끝입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 인간이 아무리 머리 쓰고 똑똑해도 바리새인만큼 철저하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역량은 바리새인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법을 보면 깜짝 놀랄 법이에요. 산상설교와 유사한 내용들이 굉장히 많아요. 탈무드 보세요. 세상에 인간의 지혜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헌신적이고 마음을 낮추고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 그들.

그들이 오신 주, 여호와를 죽였다는 사실, 이 아이러니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하나님한테 충성하겠다고 어릴 때부터 말씀밖에 모르던 그들이 정작 말씀되신 주님을 살해했잖아요. 하나님이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던 그들이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어진 사람이에요. 가까이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주님이.

주님은 세리와 창기와 가까워요. 죄인들과 가까워요. 의인들은 가깝지 않아요. 의인들은 점점 멀어집니다. 바리새인들은 고난주간에 뭐했습니까? 나는 부족하다고 자기 금식했지요. 그 금식한 현장에 주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러 갔습니다. 의도적이에요. 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술 드시고 식사하러 갔어요.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바리새인의 마지막 헌신은 금식이에요. 금식이라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거예요.

목숨 내놔도 갈 수 없는 나라, 나는 너희에게 공짜로 제공하겠다. 이것이 주님의 취지입니다. 나대지 마라. 나대면 나댈수록 니는 점점 나와 멀어진다. 나대지 마라. 그냥 있어. 내가 준 효과 있을 거야. 그 효과가 뭐냐, 내가 이 땅에서 당했던 아픔과 그 슬픔과 그 외로움과 핍박을 이제는 하나님의 상급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이 상급이라 하니까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이 주로 졸업식 때 주는 개근상, 영어사전 그런 거 있잖아요. 또 상 준다 하면 밥솥주고 TV주고 그런 걸 상준다고 생각하는데. 상이 뭐냐 하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한 고 자체가 사도바울에게는 상입니다.

이게 내게 상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주님의 일에 고난을 받겠느냐. 내가 고난 받는다는 이 자체가 왠 횡재를 한 거예요. 그게 상이에요. 그런데 분명히 해야 돼요. 주님의 이름을, 복음을 위해서 받는 고난입니다. 내가 복음을 위해서 받는 고난이 아니고, 복음에 의해서 받는 고난이지, 복음을 위해서 내가 시도한 고난 아니에요. 내 구원을 위하여 내가 받는 고난은 고난이 아닙니다. 구원을 벌이시는 구원에 의해서 구원되기 때문에 따라오는 고난은 고난이지만, 내가 구원 받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의 전제조건으로 내가 고난 받는 것은 순교사하는 것은 구원 아닙니다. 그건 마귀 짓이에요.

그냥 사시면 돼요. 사시면 찾아온다니까요. 사시면 친구 떨어져요. 동창회 찾아가면 친구도 재미가 없어요. 살아보면 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닌 것 같아. 누구의 인생입니까? 주의 인생이 되는 거예요. 내가 어느새 내 인생 날아가 버리고 주께서 먼저 오셔서 했던 공생애 인생에 내가 그 좁은 길을 어느새 그 노선으로 지금 내가 뚜벅 뚜벅 가고 있어요.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는 내빼는 거예요. “주여, 이건 아니지요.”하고 내빼는 거예요.

주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니가 뺄 수 있는가 보자. 내가 쥔 양은 어떤 경우라도 누구한테 빼앗기지 않는다. 니가 몸부림 쳐봐도 내가 내 권세에서, 구원의 권세에서 네가 못 빠져 나갈 거야. 안 믿어져? 그럼 해봐! 죄 지어봐!” “그럼 내가 불효해요.” “그래, 불효해봐. 다 해봐. 간음해봐.” 간통해도 아버지의 처와 간통해도 마지막 날에 구원받아요. 고린도전서5장. 그 설교했잖아요. 간음해놓고 천국가고 간음 안하고 지옥가고. 희한한 세상이에요.

그만큼 이 성경을 볼 때에 이론상은 예수님이 다하셨다. 하지만, 이건 이론이고 내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아요. 그걸 지식으로 간직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중력에 의해서 나한테 스며들어오지는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설쳐봐야 돼요. 우리가 설쳐보면 삐걱거리게 돼요. 설쳐보면서 삐걱거려보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내가 미처 몰랐던 내 고집, 내 자존심이 이토록 강렬했던가, 나는 내가 내 이성과 내 감정을 내가 관리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거꾸로 되어가지고 내 보이지 않는 미지의 X의 감정이 나의 믿음이나 이성까지라도 완전히 그야말로 먹칠하는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나를 말릴 수가 없습니다. 내 성질을 내가 말릴 수가 없어요. 그것도 모르고 목사는 강단에서 인간 거룩하게 돼 라고 잔소리 해대지, 지도 못하는 걸 남한테 강요해대지 정말 성도는 미치는 거예요. 목사 니 해봐라. “여러분, 성경에 나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먹는 것으로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아세요.” “니 해보세요. 니. 당신 보내면서 퇴직금 하나도 안 줘 보내면 당신 분명히 고소할 걸.” 성경말씀은 하나도 못 지킵니다. 성경말씀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에요. 니가 지키겠다고 한 그것이 니가 몰랐던 죄의 시작인 줄 알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한 번 지켜봐! 또 발작 시작되었다! 또 발작시작 되었어!

제일 위험한 게 이런 거거든요. 뭐냐 하면, ‘겸허한 자존심’ 겸손을 위장한 자존심. 이걸 어떻게 빼냅니까? 우리 몸에서. 이걸 무슨 수로 빼냅니까? 이걸. 빼낼 수가 없어요. 티눈이야 한 달 뒷면 빼낼 수 있는데. 한 달 되면 빠져요. 약을 바르니까 빠져요. 안 빠질 것 같았는데. 그런데 죽어도 못 빠질 것은 뭐냐 하면, 겸손한 자존심입니다. “부족합니다.” 이걸 어이 빼내요? 이걸 어떻게 빼냅니까? “할렐루야! 부족합니다.” 이 악마를 어떻게 빼내요?

저게 악마인데. 악마가 입에서 그 소리 하고 있거든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나는 주의 종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 가면을 어떻게 벗깁니까? 가면 벗기면 가면 나오는데. 가면 벗기면 맨얼굴 안 나와요. 인간은 죽어도 맨 얼굴 없어요. 인간이 맨얼굴이라고 여기는 그것은 여태까지 지가 안 돼가지고 어설프게 조작한 거예요. 임시 땜 방이라. 내일되면 내 얼굴 또 달라져요. 내 진 자아가 달라진다니까요.

자아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추억들이 구성해서 만들어진 게 자아입니다. 내일되면 추억이 더 추가되면서 인간이 달라져요. 가끔은 친구들이 와서 이런 소리할 수 있겠어요. “아, 니가 학교 때는 안 그러더니 그런 것도 다 할 줄 아느냐.” “내가 뭐? 내가 어떤 인간인데?” “니 학교 때 개고기 안 먹었잖아. 개고기만 찾네.” “내 잠재 속에 개고기 좋아하는 요소가 있었던 모양이라. 그게 이제 발현되는 모양이라.” 발현 또는 체현이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냐, 우리가 도화지거든요. 무슨 도화지? 예수님은 일을 벌여놨고 인간은 그걸 못 알아보니까 우리를 완전히 도화지로 펼쳐놓고 거기다가 예수님께서 그림을 그려요. 그림을 그리면서 주의 말씀을 이루었던 복음을 그려버리면 우리가 그동안 잠잠했던 우리의 악마성이 격렬한 반발과 발작을 일으키면서 “주여, 이러면 나의 자존심 없어집니다. 주여, 나의 체면과 존재의 의미는 날아갑니다. 이렇게 나오시면 더 이상 예수 못 믿습니다. 나 안 믿겠습니다. 나 도망치겠습니다.” 온갖 소리들이 다 나와요. 주께서는 “이제야 나오는구먼.” 마지막 사인이 뭐냐, 죄를 다 후벼놓고 중장비로 아스팔트길을 다 훑어 놓고 다 깨놓고 마지막 사인이, 구원했음! 예수 그리스도 사인으로 끝납니다. 천당입니다. 인간 다 조져놓고 갈 갈이 다 조져놓고 후벼놓고 마지막 사인은 예수 이름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되면 우리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날아가 버립니다. 뭐가 빠졌기 때문에? 이 겸허한 자존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못 빼던 걸 주께서는 미리 뽑아가지고 십자가에 들고 가면서 “환자님, 당신 안에 이런 암 조직이 있었네요.” 그걸 들고 십자가에 가지고 가니까 하나님께서 버림받잖아요. 주님이 버림받았다는 말은 내가 사실은 진 작에 내가 버림받아야 될 사실을 우리는 십자가 오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나는 바르게 살면 주께서 칭찬하고 사랑받을 것이라 했지요. 선과 악이니까 착한 일보다 악한 일 적게 하고 착한 일 많이 하면 천국 넣어줄 줄 알았지요. 착한 일의 양에 따라서 좋은 자리 배정 받는 줄 알았지요. 12제자처럼. 하늘나라에 누가 높습니까? 누가 더 헌신하면 높습니까? 누가 상급 받습니까?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그런 하나님인 줄 알았지요. 십자가 보낼 줄이야 상상도 못했습니다. 우리 대신 얻어맞는 분을 보낼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우리는 칭찬 받을 준비했지 주께서 매 들고 설칠 줄이야 몰랐잖아요. 그 매가 우리 오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때리시고 때리는 그 매가 효과로서 이미 구원받은 자에 한해서만 그 매질의 효과가 우리한테 들어오니까 우리는 강력한 반발을 하지요.

“주여, 제가 주 앞에 무슨 억한 심정이 있다고 제가 무슨 짓을 했는데 제 일이, 저의 사업이 꼬이게 하십니까?”라고 숨겨져 있는 이 겸허한 자존심이란 이름의 악마성이 드디어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합니다. “제발 제 애 만큼은 건드리지 마세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식 죽인 거 뭐가 돼요? 이것은 남의 아저씨가 자기 이삭을 죽인 게 아니에요. 그냥 미운 자식 같으면 죽일 수도 있겠어요. 사랑하는 독자를 잡아라. 사랑하는 독자. 이 심정이 뭐냐, 아버지가 예수를 이 땅에 십자가에 못 박은 심정에 동참될 수 있도록 주께서 그 일을 시킨 겁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잡음으로 말미암아 특히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식이 없지요. 자식은 이미 자기 손에 죽었어요. 자식이 죽었다는 말은 자식이 있어도 없는 아버지가 되고 없는 아버지라면 만인의 아버지라는 아브라함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 이름 자체가 만인의 아버지인데, 자식도 하나도 없으니까. 그런데 그 만인의 아버지가 아버지 값을 하고 있는 것은 죽었다고 여긴 그 자식을 하나님이 옆의 숲에서 수양을 다시 살림으로 말미암아 자식 덕분에 아버지가 아버지 값을 하는 거예요. 이게 시간의 역전입니다.

내가 자식을 도와주는 게 아니고 자식이 나를 아버지 값을 하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우리 아브라함의 자손이 오신 분이 그 전에 왔던 모든 사람을 다 살려서 천국 보내는 작업을 하시는 그 방법을 사용하신 거예요. 시간의 역전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니고 미래에서 거꾸로 우리에게 미래의 사건이 우리에게 들이닥쳐서 우리는 자꾸 과거라고 여기고 현재로 여기는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게 바로 미래라는 거예요. 미래.

현재 일어난 일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미래는 무슨 뜻이냐, “그래, 이 일은 일어나야 했었어.” 우리가 과거에 매이면, “주여, 이런 일이 일어나면 못 삽니다. 왜 이렇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도대체 무엇이 원인이었습니까? 이 결과가.” 주님께서는 원인은 미래가 원인이기 때문에 결과는 현재가 결과에요. “너는 그런 일이 있어야 했었어.” 그래서 가락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기차 앞에 서지 말고 기차 제일 뒤편에 서가지고, 옛날 기차는 뒤편에 서면 끝이 보이잖아요.

기차가 앞으로 가면 이미 지나온 철로가 다 보이지요.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된다 이 말이죠. “그래, 저 일이 일어나야 돼.”  또 가면 전봇대2대가 지나가면, “저, 전봇대 지나가도록 되어있었어. 그래, 그렇게 되어있었어.” 우리 애가 재수하면, “재수해야 돼.” 온갖 것이 이미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이미 지나간 일인 것처럼. 그렇게 완료된 상태에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인데, 그게 왜냐 하면, 예수님이 갖고 있던 시간의 의식이기 때문에.

시간의 의식을 우리한테 구원의 효과로 받게 되게 되면 우리는 마치 이미 지나간 일을 새삼스럽게 다시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건 덤으로 사는 것보다 더한 거예요. 기껏 덤으로 사는 정도가 아닙니다. 덤을 살아봐야 덤으로 사는데 문제 일으키면 안 되니까. 덤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바둑에서 복귀라는 게 있어요. 복귀.

다 두고 난 뒤에 우리가 어디에 두었지? 다 비워놓고 수를 다시 놓는 것처럼. “그래, 니는 강도가 되어야 되고 나는 창기가 되고 사기를 당해야 돼.” 다 복귀하듯이 느긋하게 살아가라고 주께서는 이 율법을 언급하신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218.♡.196.154) 15-04-22 16:29 
안양20150410b-히10장1절(구원의 효과) - 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보다 좀 더 난해하게 할 수밖에 없어요. 왜 난해하냐 하면, 천국이 무엇이냐, 하는 그 문제가 걸려요. 천국이 무엇이냐. 천국을 만들 때,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따먹고 난 뒤에, 갑자기 자기 문제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어요. 하나님보다 누가 더 중요하다? 내가 더 중요하게 되었어요.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생로병사 너무 힘들게 살잖아요. 이거 방치하면 안 되지요. 내 인생은 누가 관리해준다? 내가 관리해야지요. 아무도 나 외에 누가 나를 끝까지 사랑하고 관리할 자 없습니다. 나밖에 없어요. 끝까지.

인생동행 누가해줍니까? 내가 내 몸을 내가 관리해야 되고 내가 책임져야 돼요. 따라서 인간들은 자기를 어떤 식으로 천국에 넣어주기 위해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미지’입니다. 이미지. 나는 이런 식으로 천국 간다, 하고 중요한 천국에 있는 좋은 것들을 다 끄집어 모아서 천국이라고 조립을 해버려요. 그래서 아라비아인들의 천국하고 아시아인의 천국이 달라요. 그리고 로마신화에 나오는 천국이 달라요.

로마신화의 천국은 신과 플러스 거인들의 세계입니다. 그리 합리화돼요. 헤라클레스는 바로 신과 거인의 낳은 아들이 헤라클레스에요. 이것은 성경에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히어로 영웅의 시대에요. 아이언맨,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전부 다 특징이 뭡니까? 비범한 능력을 가진 자들의 어떤 총화 그걸 사람들은 가고 싶어 하는 나라에요.

그런데 여기 10장1절에 보면,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되어있지요. 그림자요, 이게 뭐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말이 그림자는 뭐는 아니다? 참 형상은 아니라고 되어있지요. 워낙 인간들이 상상을 가짜 천국, 가짜 하나님, 온갖 신들을, 일본에 가면 신이 백만 개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십오만 개라 하고 어떤 사람은 백만 개라 하는데 어떻던 신들이 많아요.  그리고 대만 같은데 보면요, 가는 곳마다 향불 켜놓고 비는 거예요. 타이완. 특히 베트남에 안 가봤는데 여행 보면 이상한 나무만 있어도 전부 다 향 피워 놓고 있지요. 앙크로와트 거기에 가면 도대체 힌두교 신자들이 나오는데 여자들이 상체 옷 입고 나오는데 신들의 세계에 노래하는 찬양대랍니다. 그리고 앙크로와트에 나오는 그 사원들의 모양새가 기존에 있는 자연물의 모습을 모방해서 미메시스라 하는데, 모방해서 사원을 만든 거예요.

그러면 사원이란 뭐냐, 자연의 일부가 되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그림자로 보는 겁니다. 그림자. 무슨 그림자? 그림자의 실체가 따로 있지요. 그 실체의 그림자인데. 그게 그림자가 되어버리면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지, 실체는 모르고 그림자만 붙들고 있지요. 인간의 방법은 그림자 붙들면 행여나 실체에 접촉하지 않을까, 접근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세상이 그림자라고 규정되는 것은 율법이다. 따라서 율법 외에는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말씀 외에는. 한방으로 끝내버렸어요.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헛것들이에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 인간 자체가 헛되기 때문에 인간에 나오는 모든 상상력도 전부 다 헛된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 헛된 것을 모아서 뭐로 보는가 하면, 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현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의미의 연결망이에요. 의미의 연결망. 자꾸 의미를 줘요. 실제로 예를 들면, 오렌지 하나만 봅시다. 하도 어려우니까 쉽게 하겠습니다. 이 오렌지가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인간이 재배했지요. 재배란 말은 유에서 유가 나온 것이 재배지요. 인간의 모든 하는 공작과 일은 인간은 창조를 못합니다.

재작은 할 줄 알아요. 재작은 할 줄 아는데 오렌지 씨앗으로 오렌지를 만든 거예요. 그럼 처음 오렌지는 누가 만들었어요? 그건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이걸 모든 인간은 인정을 해요. 모든 종교, 모든 신화를 보면 세상만물은 신이 만들었어요. 신이 만들어서 오렌지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이 만들었다하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실 것같이 보이지요. 로마서1장21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안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할 것 같지요? 천만에 말씀. 이 자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만들어낸 조작된 의미로 보는 거예요.

신이 만들었다는 것도 조작된 의미로 보는 겁니다. 그럼 이 오렌지는 누가 만들었어요? 성경적으로 봅시다. 누가 만들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만들었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 33살 먹은 청년이에요. 왜 하나님 믿는 사람과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정반대인지 이제 알겠습니까? 하나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곁가지로 들어가요. 하나님이 만든 이미지를 일단 그건 하나님을 인정했다고 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모르는 빠진 부분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만 빠져있다, 말이죠.

그러니 밥상은 차려놨는데 숟가락 쪽으로 들어간 것이 예수님이 들어가 버리면 이제 제대로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발상을 유지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던가요? 너희들의 하나님에다가 나하나 더 추가하게 되면 온전하게 진리에 다 관계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어떻습니까?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들은 내 아버지를 모른다, 하십니다.

바리새인이 모르면 누구도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바리새인이 누구의 아들입니까? 아담의 아들이죠. 아담의 아들들이 예수님의 아버지를 모른다는 말은 그 누구도 몰라요. 모르는데 왜 이리 신들은 넘쳐납니까? 다 그림자에요. 한 번 물어봅시다. 이 오렌지를 왜 재배합니까? 오렌지가 있다, 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 손에 있는 게 아니죠. 오렌지가 있어야 오렌지가 나오니까. 오렌지가 있는 것을 가만히 두지 왜 재배하느냐 말이죠. 들개가 있으면 있는 거지 왜 집에다가 묶어서 반려개로 집에서 키우느냐 말이죠. 왜 그렇게 합니까? 여기에 의미가 들어가요.

그 의미가 어디서 나오는가, 나는 잘났다는 것,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선악과 따먹어도 하나님은 뭐라고 해도 나는 선악과 따먹은 나를 나무라지 않겠다는 그 자기 나름대로의 고집과 반발심, 반앙심, 이런 것들이 오렌지에 의미를 담긴 겁니다. 담겨놓고 이런 핑계를 대요. “주여,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맛있게 먹겠습니다.” 이런 핑계를 댄다고요. 그렇게 해서 드린 제사가 뭐냐 하면, 가인의 제사에요.

가인의 제사가 추수감사절 제사입니다. “하나님이여, 이거 원하시잖아요. 우리는 받아놓고 입 싹 닫는 그런 염치없는 인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왔다는 것을 성의를 표할 정도로 그 정도로 하나님의 생각에 우리는 가득 차 있습니다.” 라고 드렸더니만 그 제사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안 받았지요.

그러면 가인이 뭐라고 불평했어요? 이렇게 할 거예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뭐라고 뭔가 언급을 해주셔야 제가 그 제사 드릴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이렇게 바치라고 말은 안 해놓고 무조건 내 제사 안 받아버리면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이 되겠습니까?” 라고 하겠지요. 하나님이 받은 제사는 니 손으로 니가 살인자가 되는 제사, 그게 받은 제사에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율법과 제사가 아니고 주께서는 상한 심령을 원하십니다.

인간은 오렌지뿐만이 아니고 여기다가 오렌지에다가 사과에다가 귤이라든지 컴퓨터, 피아노, 자동차 다 집어넣읍시다. 그게 모여서 총화가 뭐냐, 그렇게 눈에 띄는 모든 걸 총화라고 하는 걸 가지고 현실이라고 해요. 우리 인간은 어디서 산다? 현실 속에서 살고 있지요. 그건 뭔 뜻입니까? 내가 우리들이 만든 이미지 속에 우리 인간이 갇혀 사는 거예요. 그럼 그 바깥에는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나요.

그런 영화가 미국에 있잖아요. 어릴 때부터 카메라 장착해가지고 성장과정을 전부 다 찍어났는데 나중에 커서 우연히 보니까 자기가 남들이 몰래카메라 안에 전부 다 생중계된 인생을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투르먼 쇼>지요. 나중에 무대세트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비로소 처음으로 내가 사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잖아요. 전 세계 생중계되는 쇼를 받은 거예요. 영화에서.

<투르먼 쇼>는 그 주인공이 밖에 튀어나갈 수는 있지만, 실제 우리는 못 빠져나갑니다. 그래서 제 말이 어렵다는 거예요. 아무리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어도 그것마저 나를 위한 하나의 그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둥그런 구안에 들어있는 갇혀있는 장식품, 옛날에 촌스런 장식품 알지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서 산호도 집어넣고 하잖아요. 그거 볼 때마다 불쌍해 죽겠어. 산호 갇혀가지고. 꼼짝도 못하고. 물고기, 조개 같은 거 넣잖아요. 보기에는 이쁜 줄 모르겠지만 그 조개는 숨 막힐 거예요. 플라스틱으로 꽉 차여있으니까.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이미지, 인간들의 이미지에 꽉 차여 숨도 못 쉬고 있어요. 이렇게 살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 줄 알아요. 그렇게 꽉 손으로 막았느냐, 마귀가 그렇게 한 거예요. 죽기 무서워서 종노릇 한 거예요. 주님은 이겁니다. “죽어봐라. 죽어도 괜찮아.” 이게 주님인데, 우리는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야 되지 내가 책임져야 되고 내가 죽으면 누가 책임져 줄 사람 없다는 겁니다. 내가 죽어버리면 하나님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하나님도 소용없으니까.

“그러니까 니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너를 위한 하나님이지.” 라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지적하고 계시는 겁니다. 무슨 하나님이 니 죽으면 같이 없어지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말이죠. 니가 죽더라도 살아나는 하나님이 되어야 되지요.  그러면 니가 죽더라도 살아나는 하나님 같으면 어떻게 되어야 돼요? 내가 죽더라도, 원래 죽도록 조치했던 하나님이어야 되고 더 나아가서 내가 죽는 그것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흐뭇해하시는 일로서 하나님이 되어야 돼요. 차마 우리는 그 범위를 거기까지 확장하기가 겁나는 겁니다.

“이러다가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진짜 하나님이 기쁘다는 그걸 핑계로 해가지고 나를 세월 호 물속에 빠져 죽게 하면 누구만 손해입니까? 나만 손해지요. 5억 받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5억 받아서 술이나 먹겠지만. 자식은 안 돌아오잖아요. 결국 나만 손해잖아요. 인간은 자기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건 예수님이건 뭘 믿어도 인간은 자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구원 안 됩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은 없었습니다. 왜? 개가 우리 동네에 수변공원해가지고 시냇가에서 흐르는 내가 있고 나라에서 구청에서 개발해가지고 산책로를 만들었어요. 그래가지고 공사하는 사람들이 지금 시멘트 양생중이니까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푯말을 붙여 놓은 거예요. 나중에 끝나고 보니까 발자국이 남는 거예요. 누가 했는가 보니까 개들이 했어요. 개가 글자를 몰라요. 개의 세계에서는 언어라는 이미지가 없기 때문에 출입금지라는 말을 못 알아듣고 개가 지 맘대로 해가지고 엉망진창으로 해놨어요.

우리는 개거든요. 주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믿는 것은 같은 인간밖에 믿을 게 없어요. 손잡고 손에, 손잡고, 믿을 것은 인간밖에 없어요. 믿을 것은 주님이 아니고 목사밖에 없어요. 목사가 위로해 주면 우리는 구원받는 줄 알고 있어요. 같은 인간이면서. 지도 몰라. 아무도 몰라. 지도 지 살기 바빠. 그런 인간을 붙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죠?” “그럼, 기뻐하시죠.” “십일조하면 복 주죠?” “그럼 복 주고말고.” 전부 다 사기 쳐가면서 손에, 손잡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출애굽을 한 적이 없어요. 왜냐, 그 개가 들어올 때, 개가 아스팔트를 밟았잖아요. 그걸 온 천지 시커멓게 질질 밟아놓은 거예요. 그러면 뭡니까?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았잖아요. 애굽에서 살던 행세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는 곳마다 전부 다 애굽 화시켜 놓은 거예요. 그게 바로 함 땅에서 함 땅으로 시편105편 나옵니다. 함 땅에서 나왔던 인간이 결국 들어간 땅이 뭐다? 함 땅이죠. 저주 받은 땅에서 살다가 결국 저주받아서 멸망했잖아요. 이스라엘이. 그걸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다. 율법주고 하나님이 은혜주고 만나주고 온갖 것 다 제공했지만, 그 품새가 이미 애굽이에요. 모든 걸 애굽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니까요.

애굽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살고 보자!’에요. 그리고 만나를 주니까 만나의 의미도 몰라요. 고기 먹고 싶다. 고기 주니까 그 다음 뭐라 합니까? 우리는 애굽에 있을 때 수박도 먹었고, 참외도 먹고, 파도 먹고, 남자의 정욕에 좋다는 걸 먹었는데, 이건 뭐 정욕에 좋다는 산수유도 안 주고, 이건 수박도 없고, 매일 먹는 게 만나하고 이것만 먹으니 못 살겠다하고 원망할 때, 주께서는 광야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낸 그 꿈인데, 사실은 현실이라 보거든요. 그 현실이란 이름의 꿈에서 인간은 깨어날 수 없어요. 자다가 깨어나도 인간은 맨 애굽사람이에요. 출애굽이 안 됩니다.

자, 출애굽 안 되는데 주의 대책방법이 뭡니까? 대책방법이 이래요. 동그란 큰 오리 알 같은 게 있으면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바늘을 가지고 와요. 바늘을 가지고 외부에서 찌르고 빼버립니다. 찌르고 빼면 여기에 뭐가 남겠지요? 작은 구멍이 남겠지요. 그게 십자가 구멍이에요. 외부에서 찌르고 들어왔을 때, 인간은 외부라는 게 없어요. 왜냐 하면, 모든 게 자기가 꿈속에서 만든 착각의 현실 속에 예수님이 들어왔기 때문에 목수의 아들, 요셉의 아들이라고 본 거예요.

왜 그리 봤습니까? 본인들에게는 누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앞에 어떤 청년이 나타나니까 청년에는 분명히 아버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벌써 예수님은 청소년 때, 그런 고백을 했어요. 성전에 올라가지고 유월절 행사 갔는데 나흘 동안 찾았는데 아버지가 너를 찾았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주 대발아진 말씀을 하시지요. “내가 아버지 찾는 걸 몰랐습니까? 아저씨라는 말은 안했지만, 아이고, 아저씨는 내가 아버지 찾는 걸 같으면 성전에서 찾아야지 왜 엉뚱한데 돌아다니며 찾습니까? 내 아버지는 여기 있는데 어디서 찾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가 없어야 구원받아요. 이게 이삭입니다. 구약의 이삭.

성경 말씀이 누가 쉽다고 했습니까? 이삭은 아버지가 없어요. 왜냐 하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했기 때문에. 고장 난 생식기입니다. 할례가 뭡니까? 생식기를 고장내버리는 거예요. 앞으로 난 자식은 우리가 난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미래의 약속에 의해서, 앞당겨서 주어진 미래에 이런 아들이 있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림자로 온 거예요.

사람들은 현실을 그림자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을 주면서 그림자라고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 율법을 자기의 현실을 더욱 더 부흥시키기 위한 용도로서 그림자라는 것을 끄집어 떼어놓고 그 율법과 실체와 연결되는 연결고리는 사람들이 죽여 버렸어요. 주님의 바늘이 율법이거든요. 율법을 쑤시고 당겼단 말이에요. 구약에서는.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오시고 빠지거든요. 오시고  빠졌을 때, 그 예수님 십자가가 모든 율법을 완성했다는 것을 몰라요.

그게 유일한 통로인데, 문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자기들이 그림자라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도 자기 현실 속의 일부로 가둬놓은 거예요. 저런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 했잖아요. 사형시켜 놓고 손을 털었습니다. 잘 죽었다. 아이고, 골치 아픈 사람. 골치 아픈 사람 괜히 했는데,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죽었는데 혹시나 저 인간이 사기를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그런 헛된 소리를 했기 때문에 로마군민이 지켰습니다. 여기서부터 부처, 소크라테스, 맹자, 공자보다 예수님이 차이점이 나는 거예요.

그런 모든 인간은 훌륭한 소리를 했지만, 그 훌륭한 소리가 꿈이에요. 전부 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꿈속에 자는 꿈끼리 이야기거든요.  바깥에 출애굽도 해본 적 없는 그 바깥 생각도 모르고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울리는 하나의 메아리, 주고받고 하는 메아리에 불과한데 주님께서는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모든 인간이 다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의 공동묘지가 된 겁니다.

그래서 이미 나는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우리는 하나의 공동묘지의 터만 제공했을 뿐인데 주께서 여기다가 부활의 빨대를 꽂아서 우리로 하여금 요구르트 되게 만들어요. 천국에서 주께서 뽑아낼 게 쪽 쪽 뽑아낼 게 그렇게 많아요. 뽑아도 또 맛있네. 주께서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요구르트로 래시피를 주께서 마련하셔가지고 주님이 쉐프가 되셔가지고 우리를 하나의 천국에 양식으로 만드신 거예요. 참, 허황된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러나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냥 잔소리하고 산상설교 해놓고 나간다 하고 간 게 아니고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생각한 부활과 천국이 다 죽은 자끼리 만들어낸 조작된 드라마에 지나지 않아요.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아요. 천국이.

그래서 천국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돼요. 그래서 골로새서1장13절에 보면 천국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들의 나라라고 하지요. 하나님 아버지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충격적입니다. 인간이 알고 있던 신들은 전부 다 자기 존재를 합리화시키는 논리적으로 끼워 맞추기 위해서 없는데서 있다고 신을 도입한 거예요. 그게 바로 신학이고 그게 바로 철학이에요. 그걸 유신론적 철학이라 하거든요. 신이 없는데서 만들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건 철학이에요.

복음은 뭐냐,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요. 예수를 위해서. 지금 제 차이를 여러분이 잘 이해를 못 찾았는데. 인간은 신과 자기가 있어요. 그런데 신은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지만, 내가 여기 있음을 어디로 가져갑니까? 내가 있지만 없을 때 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 죽고 난 뒤에 없으니까 무가 돼요. 요 무를 무 있게 되게 한 유가 있을 것이라고 연상해서, 마늘로 하면 동글, 동글하게 상상해서 이걸 신을 걸쳐놓고 신을 토대로 해서 비로소 나의 있음이 토대를 마련하고, 근거를 마련하고, 어휴! 나, 이제 신자가 되었다고 주장하게 돼있어요. 이게 바로 바리새인이고 이게 바로 인간은 이 범위를 못 벗어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걸 뭐냐, 그림자로 봐요. 천장으로 봐요. 그림자가 천장이에요. 천장바깥에는 뭔지 몰라요. 천장을 사람들은 하늘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삼층천이라 해가지고 하늘로 봐요. 거기에 하나님 거기 계시고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얼마나 양심적이고 신앙적으로 보이는지 경건해 보이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런 것은 누가 만든 거예요? 본인의 마음을 거기다가 본인이 투여한 거예요. 자기가 환등기고 필름을 집어넣어서 거기서 하늘을 하나의 스크린으로 삼아서 펼쳐진 거예요. “오, 주님이여! 보고 계십니까? 저, 무지개 봐! 무지개 봐!” 여러분, 무지개는 하늘에 있는 게 아닙니다. 무지개는 예수님한테 있어요. 무지개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한테 있어요.

그게 바로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바로 요한계시록(계4,10장)에 보면 무지개 있지요. 또는 에스겔1장28절에. 하나님의 성전에 무지개가 피잖아요. 예수님의 나라에 무지개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아이고, 목사님, 복잡하게 하지 마시고 예수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까?”  아니에요. 예수님의 나라는 예수님만 알고 있었던 나라지 예수님 외에 아무도 모르고 있던 나라에요.

그럼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있고 거기다가 예수님은 거기다가 추가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추가가 안 돼요. 둘 중에 하나가 충돌하게 돼있어요. 왜 충돌하느냐, 십자가가 바로 그 충돌의 의미입니다. 왜 충돌해야 되는가, 천국은 주님 중심의 나라고 내가 그리는 천국은 내가 거기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자꾸 생각하는 내가 거기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고 거기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거기에 합류해서 나는 영원히 산다, 라는 그 점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조작된 그러한 욕구가 욕망이 조작된 나라가 천국이기 때문에 이것은 허물어져야 돼요. 이것은 하나의 꿈같은 거예요. 내가 무너져야 돼요.

무너지는 방법은 뭐냐, 베드로 길을 가야지요. 베드로가 뭐했습니까? 주님한테 사탄소리 들었지요. 나는 주님을 모른다, 소리 했잖아요. 그것을 베드로가 했다고 하지 말고 우리도 평소에 마음에서 그런 잠재력이 있다가 갑자기 외부에서 큰돈을 준다든지 취직을 잘되게 할 때, “혹시 우리 회사에서는 기독교 신자는 안 되는 데요.” “아이고, 저 기독교신자 아닙니다. 아, 예수 처음 듣는데요. 예수는 어릴 때 빵 먹으러 간 적이 있고 그러고는 커서는 예수 안 믿습니다.” “아이고, 합격입니다. 예수쟁이 들어올까 걱정했는데.” “아이고, 일만 시켜주이소.” 우리는 밖에 나가면 시켜만 주이소. 다른 말로 돈만 주세요. 뭐든지 합니다. 이리 되거든요.

그게 뭐냐, 이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것은 누구 중심이어야 나는 만족하다? 나 중심입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행복’이라고 하고요, 행복에서 행만 가로 쳐 봅시다. 그럼 뭐가 됩니까? ‘복’되지요. 복은 교회에서 그리고 행복은 교회 바깥 모든 세계에서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겁니다. 전화 벨소리에 뭐라고 합니까? 행복하세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느냐.’ 에피쿠로스학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무소유하라. 완전히 법정스님이에요. 서양에서 벌써 나왔어요.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말고 행복할 수 있다면 소유를 버려도 상관없다.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목표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끼리 맞대고 나온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왜? 모든 것이 주님 때문에 만들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나의 본래의 자리는 사실은 나의 자리는 이미 없어요. 없고 없는 자리를 주께서 자기 자리를 내줘가지고 이제 주님의 자리가 내 자리가 돼가지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식으로 해서 주의 나라에 합세하겠다는 것이 바로 이 히브리서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전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동의를 한다는 자체가 기적입니다. 뭐가 빠졌기 때문에 동의가 안 되지요? 누가 빠졌기 때문에? 나는요! 이게 빠져있지요. 나는요! 가 빠져있는데 동의가 돼? 그러면 그 사람은 주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나는요! 그럼 주의 나라에 나는 어떻게 돼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주의 사람을 빙자한 여전히 나는 내 사람, 내가 책임지는 내 사람이 되어버려요. 아, 이 교회가 위험한 거예요. “주님 계시니까 교회 이거 망해도 괜찮습니다.” 이런 소리가 나와야 돼요. “여러분, 이 교회 보이지요. 여러분 투자했지요. 여러분, 한 구좌씩 했지요. 그렇다면 그거 다 날아가도 주님 좋아하시겠습니까?” 이리 나와야 돼요.

“여러분, 이 교회는 주님의 기적으로 세운 교회에요. 여러분들은 목숨 바쳐서 이 교회에다가 헌금하시고 재산 바쳐서 키워야 하늘나라가 확장됩니다. 하늘나라 확장을 반대하는 것은 오직 마귀밖에 없습니다. 보세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전도하라 했잖아요. 이 교회 중심으로 아파트 단지를 완전히 여리고성처럼 무너뜨립시다.”이리 나오더라 말이죠. 그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고 있어요. 왜, 나의 헌신의 가치가 빛을 보니까. “이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마음을 낮춰야 됩니다.” 이게 바로 아까 한 겸허한 자존심입니다. 마귀 세계의 지옥 보려하면 가까운 교회에 가시면 됩니다.

히브리서에 사도바울이 언급하는 것은 그겁니다. 그림자라는 거예요. 실체는 누구냐, 예수님이다.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데, 오셨다는 거예요. 아, 키가 몇 센티? 키는 묻지 마. 뭘 믿어라? 뭘 봐라? 기능을 봐라. 어떤 기능? 죽었다가 부활한 기능. “주님은 좋겠다. 죽었다가 다시 사니까.” “아니.”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알아야 돼요. “그거야 뭐 배웠습니다. 저 때문에.” “아니.” “너의 뭐 때문에? 죄 때문에.” “그런데 니는 니 죄를 아느냐? 모르느냐?” 모르잖아요. 왜? 선악적인 사고기 때문에 별로 나쁜 짓한 기억이 안 나거든요. 파출소를 간 적이 없다니까요. 그러니 아무리 봐도 자기는 나쁜 쪽이 아니고 착한 쪽이에요. 왜? 주변에서 아이고 이쁜 딸래미라 해가지고 어릴 때부터 그렇게 컸기 때문에.

문제는 예수님을 알아야 되는데, 문제는 어디서 막힙니까? 내 죄를 내가 모른다는 사실이에요. 기껏 선악 기준으로 들어가지만 선악 기준 자체가 죄악된 거거든요. 죄악된 거 가지고 자기를 판정내리면 그 판정은 전부 다 무효가 돼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아,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이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은 나쁜 것이구나!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그 해답이 틀렸다는 사실이에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는 것의 정답을 말씀드릴까요? 정답은 그겁니다. 예수님을 믿어라, 그게 정답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까지 연결을 못 시키고 뭐냐, 돈을 사랑함이 악의 뿌리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내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아니까 나처럼 돈 사랑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별로 없잖아. 봐라 그러니까 나는 뭐다?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다.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주께서는 그걸 정답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 십자가 앞에서는 십자가만이 모든 해답을 쥐고 있고 그 앞에서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죄인으로 드러나야 되는데, 우리는 손들고 잘난 체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생각하는 죄와 우리의 말씀해석이 이게 서로 사맞지 아니할새, 일치되지를 않는 겁니다.

자, 어떤 분이 상담하러 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양이 많은데, 부자가 자기 양은 놔두고 자기 종의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가져다가 잡았습니다. 상담을 하러왔습니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여러분, 다들 뭐라고 하겠어요? 다들 분개하겠지요. 왜? 착하니까. 그건 정답이 아니에요. 그럼 뭐가 정답이냐, 그 못돼 먹은 사람이 바로 상담  자인 내가 그리 못된 인간이에요. 시편51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부잣집 재벌이 그렇게 잘 사는 거 불구하고 그 가정부 딸을 못 살게 구박하는 그런 드라마를 지금 하고 있어요. <폭풍의 여자>하는 거. 그걸 보고 사람들은 분개를 하는 거예요. 그걸 보면 이 세상에서 악한 것이 자꾸 나온다는 말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그걸 악이라고 지적한다는 자체는 우리가 뭐가 되어버려요? 나는 악에서 빼주세요, 라는 말밖에 더 돼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악한 걸 자꾸 유발시키는 이유는, 그렇게 우리가 얼마나 평소에 착한 척을 하고 있느냐는 이 진짜배기 악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악한 짓을 자꾸 발생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발생시킨 일에 대해서 우리가 죄라고 규정해야 될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바로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지옥 갈사람 같으면 그런 걸 안 해줍니다. 천국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상징적인 그 잘못된 의미와 십자가의 의미를 자꾸 와서 부딪쳐요. 자꾸 부딪쳐 가지고 나의 의미를 주장함으로서 내가 몰랐던 죄를 드러나게 하시고 그 죄마저 이미 십자가에서 해결했다는 것을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따라서 이 세상은 뭐로 깔려있다? 주의 말씀의 의미의 그물망이다. 이게 정답입니다. 이 세상은 어느 구석이라도 주의 깔아놓은 말씀에서 못 벗어나요.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만든 것은 애굽에서 못 벗어난다고 했지요. 그런데 우리는 못 벗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어디서 못 벗어납니까? 주의 세계에서 못 벗어납니다.

따라서 이미 이것이 주의 세계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어디 있느냐, 바로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하늘나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그것이 하늘나라의 현존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즐거움과 희락이다. 그걸 존재의 차원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과로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킵니다.

존재의 차원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너와 내가 있고, 너는 나에게 뭘 해줄 것이냐, 요게 따지는 게 존재의 차원이에요. 어려우면 그걸 바꾸겠습니다. 생존의 차원. 내가 여기 살아있고 너가 살아있는데 니 하나 좀 손해보고 내 좀 살려둬. 반갑다, 친구야! 무슨 뜻이에요? 내 좀 살려 둬, 이 말이에요. 아이고, 초등학교 동창! 반갑다, 친구야! 사실은 내가 요번에 보험하나 들래? 내가 나이 많아서 보험회사 들어갔는데 요거 하나 해라. 이게 뭐냐, 니 하나 희생하고 덕분에 내가 살자. 요게 바로 존재의 차원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꿈이라 했지요. 그건 다 그림자라 했지요. 실체 아니지요.

그림자인데, 그림자라고 이야기해도 안돼요. 왜냐 하면, 그림자가 되려면 실체와 연결해야 되는데 실체를 모르는 이상, 계속 그림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뭐로 바뀝니까? 십자가의 차원으로 바뀌어버리면, 저 동창생을 왜 만났지? 나로 하여금 보험회사 외판원 왜 하게 하셨지? 나로 하여금 왜 정수기 팔게 하시지? 잘나가던 남편 사업 망하고 왜 나는 정수기 팔아야 되지? 왜 나는 애가 넷이나 되지? 여기 넷이 없으니까 만만하게 말합니다.

나는 왜 네 명이나 돼가지고, 왜 그 때 수술할 때 수술이 안 되어가지고 잘못돼 가지고 네 명이나 되지? 왜 그렇게 하신 겁니까? 그 현실은 누가 깔아놓은 현실이에요. “그 애, 니 애 아니야. 예수님 내꺼야. 착각하지 마!” “사업 망한 남편 니 남편 아니야. 니한테 붙여줬어.” 모든 것을 십자가 차원으로 움직일 때, 천국은 바로 여기가 천국이구나! 주님이 내 중심을 바꿔치기 했던 그 곳이 바로 살아도 주와 함께 살고 고대로 죽어도 이제는 주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우리가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목사님, 듣기는 좋습니다만, 이렇게 힘들게 살기에는 천국이라 한들 힘듭니다.” 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주어지는 것은 세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과 피조물은요, 예수님 중심에 맞추어서 재편성되게 되어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웨딩드레스라 하는 것은 신부의 고귀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날만큼은 화려하게 만들어서 입잖아요. 입어봤지요? 만족했었어요?

이 세상은 예수님의 웨딩드레스에요. 천국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따라서 반짝 반짝 보석이 들어있는데 보석 자체를 위한 보석이 아니고 자기들 좋아라 보석이 아니고 누구 좋아라고? 예수님 좋아라고 반짝이어야 될 보석들입니다. 그 안에는 어린양의 보좌가 있어요. 희생당한 분이 계시고, 그 앞에 그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깔려져있습니다. 눈물이 없고 아픔이 없고, 우리 좋으라고 한 게 아니에요. 남편 되신 주님 좋아라고 신부된 우리에게 그런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없는 다른 웨딩드레스, 지금까지 입어보지 못한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웨딩드레스를 우리에게 새로운 장막으로 입혀주신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내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이에요.

그럼 이 땅에서 진짜 입혀주지, 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왜 초라하게 변변치 못하게 세일해도 돈이 없어 이 허름한 옷을 입고 사느냐, 이게 바로 실컷 애굽적인 옷을 원 없이 입어보라고. 실컷 입어봐라 말이죠. 부르똥인지 실컷 가방 들고 다니고 그걸 해보면 해볼수록 그게 얼마나 꾸미고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건 말로는 안 되고요, 누려봐야 돼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제발 부자 되세요. 정말 부자 되세요.

부자 되시고 난 뒤에 이 부자 이것이 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외양간에 소가 없다 할지라도 경남기업 망해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좋아하겠다. 하려면 경남기업 회장이 되어야 돼요. 또 자살하지 말고. 청와대에 국회의원도 돼보고 청와대에 아들이 있어보기도 하고 그래야 정권 바뀔 때 초라하게 허무하게 어떻게 떨어져 나가는지를, 하여튼 다 해보세요. 어쨌든 할 때까지 해보시고 평생 꿈만 꾸다 가는구나! 하는 것을 아시고 유일하게 꿈이 아닌 것은 부활했던 그 분만이 꿈이 아니에요. 십자가 부활만이 꿈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 받기 때문에 제발 저주받는 걸 알게 되면 그건 구원받은 사람이고 저주인 것을 모르는 내가 다이아몬드를 하고 무슨 고급의류를 입는데 이게 지금 헛되고 헛된 것을 입는다고 생각 안하고 입어버리면 그게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알고 입으면 이왕이면 좋은 옷 입으면 기분도 좋아지고요, 갑자기 생활에 용기가 업그레이드되고 활기찹니다. 여유 되시면 소비를 하세요. 소비해야 경제가 사니까. 뭐든지 하세요. 그걸 가지고 내가 막살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냥 막 사세요. 뭘 기준해서? 이게 다 헛된 망상이고 꿈인 것을 아시고 그냥 막 사세요.

내가 예수 믿는 거 망상이에요. 예수 믿는다고 주께서 도와주는 게 아니고 예수 안 믿어도 주께서는 구원해주니까 그 사실이 믿어지니까 굳이 내가 예수 믿을 필요가 없잖아요. 믿음이 있는데 왜 거기다가 내가 왜 또 믿어야 돼요? 주께서 이미 준 믿음이 있는데, 그 믿음은 어디에 버리고 내가 또 예수를 믿씁니다, 쌍시옷까지 해가면서 믿씁니까? 믿씁니다, 그런 짓을 왜 하는가 말이죠.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믿씁니다, 라고 강요를 하겠어요.

기도를 2시간, 3시간 뭐 할 게 있다고 2,3시간 하겠어요. 얼마나 한 맺혔으면 그렇게 하겠어요. 우리교회에 오후에 기도시키면 최고 빠른 사람이 7초 걸리는지 그렇고 지난번에 15초 갔지요. 그런데 그것도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거예요. 전 세계 생중계 되니까. 내가 남한테 판정 받으니까. 심판 받으니까. 무서워서 못 하겠다는 거예요.

9절에 봅시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 행하러 왔다의 그 행함이 뭐냐, 폐하러 왔다는 거예요. 헛되고 헛된 망상 율법을 줬는데, 그 율법은 딴 분이 이루었어요. 누가? 예수님이 이루었잖아요. 그러면 율법 쥐고 뭔가 구원받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은 어떻게 돼요? 폐지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사람은 성도입니다. 율법의 폐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분명히 성경에 나와요. 그걸 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실천에 옮겨가지고 내가 신자임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멈출 수가 없어요. 우리는. 그러나 그 돈이 오백 원은 천원은 우리가 안 돌아볼 수 있어요. 그러나 50억 100억은 미안합니다, 해서 후딱 해가지고 “주여, 이거 내가 쓸려고 하는 게 아니고 선교하는데 보태어 쓰려고.” 해가지고 훅 잡아당깁니다.

도박은 우리는 십원짜리 십원빼이, 백원빼이 고스톱은 안칩니다. 그런데 로또복권이 바람에 날려 와서 얼굴에 뭉개면 우리는 버리지 않습니다. 한 주, 토요일을 기다리고 있네요. 혹시나 바람에 날렸는데 이 바람이 주께서 두 바퀴 세 바퀴 돌려서 붙인 바람인데 혹시 1등 되게 되면 교회 지으라고 주신 돈이 아닌가. 로또 액수가 만약에 만 원짜리 같으면 에이 씨~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참새 키울 때, 누가 키워 주십니까? 발걸음을 누가 세셔요? 우리는 이걸 그냥 주면 기본으로 그냥 오는 줄 알고 있어요. 기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신음소리에서 예수님의 피 때문에 주어진 세월을 살면서도 우리는 그냥 받아요. “마땅한 거고 그거 말고 내가 원하는 거 주세요.” 이리 나온다 말이죠.

기본적으로 주신 그 주님의 아픔이 들어있는 하루, 하루 먹을 것, 입을 것 주시고 햇빛, 공기주는 이것은 감사할 줄 모르고 그저 내가 세상적인 환상, 애굽에서 서로가 서로끼리 지금 꿈꾸고 있는 꿈속을 아직도 헤매고 있는 겁니다. 망상들을. 그거 안 가졌다고, 그거 망했다고 자살하고요. 사실은 자살하기 전에 이미 죽은 자에요. 농약이 너무 독해서 안 먹지, 사실은 농약이 달콤하고 바나나 우유처럼 만들었으면 여러 명 다 죽었어요.

폐하러 왔다, 폐하러 왔다고 해서 우리가 죽는 게 아니고 의미의 차원에서 폐하는 거예요. 의미의 차원이 바꿔진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주님이 임해도 그대로 손가락 5개 맞아요. 그대로 있어요. 다만, 우리는 이 손가락이 나를, 생존을 위한 의미로 우리는 가짜로 했잖아요. 이걸 바꾼다니까요. 이 손은 주님에 의한 손이라고 의미를 바꾸어주는 그것을 행하려하기 위해서 나의 의미 장, 처신의 의미라는 그것을 폐하러온다 말이죠. 그냥 사시면 된다고요. 왜, 주의 주신 은혜인데 왜 안 살아요. 돈 쓰세요. 돈 모으시고. 왜, 주님이 주신 돈인데 아껴서 쓰시고 모으고 하세요. 하지만, 의미를 나의 자존심을 위한 의미로 그걸 하게 되면 주께서는 강제로 그걸 폐지시킵니다.

욥이 하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왜 사람들은 고 까지만 끊어서 읽는지를 몰라. 그 뒤에 말이 뭐지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 그 뒷말은 왜 벌벌 떨면서 이야기하는지 몰라. 벌벌 떨면서. 사무엘상2장에 보세요. 신명기32장에 보세요.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고, 왜 심방 가서 그 뒤  이야기는 안 합니까? 죽이기도 하신다. 그걸 왜 빼요?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은 병을 낫게도 하십니다. 이 말은 뭡니까? 없는 병도 감기도 주시기도 합니다. 상하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고. 무슨 뜻입니까? 꿈 깨라 이 말이죠. 너 때문에 준 게 아니고 너 때문에 뺀 게 아니고 나 때문에 줬고 나 때문에 뺏고.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정답은 막 사세요. 그냥 되는대로 사세요. 우리가 보기에는 질서가 없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꽉 짜진 질서입니다. 어떤 질서? 바꿔치기한 질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집어넣기 위해서 이루어보려고 하는 것을 폐기시키는 그 헛된 꿈과 비전과 꿈을 폐기시키는 교체작업을 합니다.  주님은 지금 바빠요. 되게 바쁩니다. 우리는 혼자 신기한 기적 없나, 맨 날 이러고 있지만 주님은 지금도 발걸음 센다고 가만히 있어 봐! 1248, 7238, 바빠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카락이 한 줌 빠졌지요. 가만히 있어봐! 몇 개 빠졌나. 주님은 다 아시고 계십니다.

다 주님의 세계, 그 마음이 바로 하늘나라, 성령이 임한 그 마음가지고 죽으면 주와 함께 더불어 살게 되는 겁니다. 한 마디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0절에 봅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렸잖아요. 그럼 몸이 몇 개에요? 아담의 몸이 있고, 예수님의 몸이 있고. 분류하면 두 개밖에 안돼요. 로마서5장에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굳이 우리보고 합니까? 니 몸은 어디서 나왔지? 자연적 차원에서. 아담의 몸에서 나왔지요. 그 자연적 몸을 누가 폐기시킵니까? 주님 중심으로 폐기시키면서 이 몸 말고 흙에 속한 형상 말고, 천사같이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에구 누가 그걸 믿을 줄 압니까? 안 믿습니다.” 할 때, 주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몸이 바로 우리 몸이에요.

주께서는 우리의 가는 그 행로를 미리 앞당겨서 먼저 가셔가지고 그 길 따라 가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안 가고 싶은데 빼고 우리는 안 갑니다. 왜, 지금 곧 가방이 보이는데 왜 가요? 빌딩이 보이는데. 로또가 지금 될까 말까한데 그걸 왜 가요? 애가 지금 성적이 좋아가지고 사법고시 수석이냐 하고 있는데. 애가 지금 좋은 신랑 만나서 결혼식 해야 되는데 결혼식 이전에 재림하면 어떻게 돼요? 재림은 5월18일인데, 결혼식은 5월17일 같으면 어떻게 돼요? 주님 한 이틀 늦추면 안 되겠습니까?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할 때, 갑자기 왔잖아요.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평소에 방주만 쳐다본 노아는 신났고, 다른 사람들은 헉! 헐! 끝났고, 그 노아 말씀이 지금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장착을 시켜 놓고 그 효과를 퍼지면서 우리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의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 했다는 점에서 신났고, 안 지켜도 된다는 점에서 즐거웠지만, 오히려 본격적으로 바꿔치기한 율법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그 자체를 하나님이 성도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