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익

속이 찬 설교란 이런 것?(오용익)

아빠와 함께 2013. 1. 29. 13:19

“반면 교회력과 해석학을 기반으로 성서 텍스트를 다각적.중층적으로 접근하는 박종화 목사(경동교회)나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임영수 목사(모새골공동체) 등은 '꽉 찬 설교'라며 칭찬했다.”

경동교회(www.kdchurch.or.kr)

박종화 목사의 8월 30일자 설교(살아 움직이는 성전)

본문) 이사야 49:1-3, 6/고후 6:14-18/마태 15:21-28

(앞부분 요약)

설교자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비행기 고장으로 3-4시간을 기다리는 중에 공항측에서 빵을 내 왔는데 대부분이 한국인인 승객들이 줄서서 받아먹는 질서의 선진의식을 보여줘서 감사하다는 아나운서 멘트까지 나왔다는 것, 그런데 그런 한국인이 자카르타나 태국에 가면 그들보다 더 엉망으로 논다는 것, 이것이 적응력이 뛰어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차별의식의 발로가 아니냐 라는 문제제기. 그와 유사한 이야기가 본문에 등장하는데---

오늘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말씀 속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하나 등장합니다. 고명딸이 오래도록 귀신들려서 미친 상태로 살아가고 괴로워하는 어머니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께 찾아와서 간구합니다. ‘제 딸을 고쳐주십시오 제 딸이 귀신들렸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제 딸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도 보쳐대니 제자들이 ‘어떻게 위로해서 보냅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

이 여성은 길을 잃었지만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당시 용어로 말하면 이방사람, 천민, 정통이 아닌 비정통 많이 배우지 못한 무식층에 속하는 사람, 하여간 인종차별입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나님이 아들이. 두 번째 토막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여성이 하는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톤을 더 높이십니다. ‘자녀들이 먹는 떡을 개한테 줄 수 없다.’ 최악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표현은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늘 있던 금언, 비하할 때 쓰는 보통의 용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용어를 차용하셔서 ‘자녀들이 먹는 떡을 개에게 줄 수는 없지 않느냐’ 하고 인종차별의 보통 상식이 이야기를 그냥 던졌습니다.

우리 같으면 ‘병을 안 고쳐도 좋으니 기분 나빠서 못 있겠다’ 하고 확 박차고 나갈 겁니다. ‘사람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그게 우리 심정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목적 지향적입니다. 이 여인이 하는 말입니다. ‘개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대화를 한번 잘 염두에 두어 보십시오.

여기까지 왔더니 예수께서 마지막 하시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딜찌어다’ 결과는 귀신이 딸에게서 물러가고 고명딸이 나음을 받았다 이게 오늘 마태복음에 있는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마지막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네 믿음이 크도다.’ 믿음이 뭡니까?

예수의 대답은요? ‘나는 길잃어 버린 이스라엘백성을 위해서 온 사람이지 너 같은 이방사람을 위해서 오지 않았다.’ 청천벽력같은 벽입니다. 벽창호같은 소리입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안왔다. 나는 너를 취급할 수 없다.’ 어머니의 최고의 목적은 딸을 구하는 겁니다. 귀신쫒아 내는 겁니다. 누구도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할 수 있다고 믿고 예수한테 왔더니 예수께서 커다란 바윗돌 하나를 던지십니다. ‘나는 이스라엘만 상대하지 이방인 상대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어떻게 그 벽을 상대했습니까? 어머니의 초점이동, ‘돌을 발로 차고 내 발이 깨질까?’ 그러다가 어머니는 돌을 발로 딛고 넘기로 했습니다. 예수께서 또 큰 바위를 하나 던지십니다. ‘어떻게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개에게 줄 수 있느냐?’ 했더니 어머니는 또 다른 지혜를 발휘합니다.

‘넘자, 주인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개가 먹는데 나는 조금만 먹으면 우리 딸이 낫겠습니다.’ 딸이 낳아야 된다는 미래의 장대한 목적 하나를 위해서 또다른 걸림돌을 뛰어 넘습니다. 예수께서 말합니다. ‘참으로 네 믿음이 크도다.’ ‘뛰어넘는 확신과 목적지향이 크도다 소원대로 되라.’

만일 여인이요, 차고 피나고 부딪히고 했던들 낫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두자기가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목적과 어머니의 목적이 같았습니다. 난관이 있다. 인종차별이 있다. 종교차별이 있다. 다 차별이 있습니다. 차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별을 어떻게 극복하고 넘는 것은 다르지만 예수의 목적은 귀신 쫒아내서 고쳐주는 겁니다.

어머니의 목적은 차별을 넘어 자기 딸이 고침 받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고침받을까? 둘이 합의한 겁니다. 뭘 로 합의했느냐? 최종 목적 하나 가지고 합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목적 지향적, 목적이 이끄는 삶, 이런 이야기 많이 들으셨죠, 우리의 최종 목적이 있으면 그 목적 하나를 이루는 방법은 발로 찰수도 있고 뛰어 넘을수도 있습니다.

돌부리는 발로 차는 방법도 있고 모든 일에 분노할 수 있는 방법이 있고 꾸짖는 방법이 있고 부정적인 것만 골라내는 방법이 있고 그래서 아플수 있고 불만할 수 있고 어떤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넘어서 커다란 목적을 성취하는 방법도 있고, 어느 하나만 중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뭐냐 하면, 발로 찰 때 용기와 돌부리를 발로 밟고 넘어서서 목적을 쟁취하는 지혜의 믿음과 저항의 믿음과 뛰어넘어서 목적을 성취하는 믿음이 결합되어야 목적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께서는 ‘믿음이 크도다.’ 이 말을 받은 사도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있는 자와 믿지 않는자가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습니까?’ 이것을 ‘예수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지 마십시오. ‘돌부리를 차는 믿음과 돌부리를 디딤돌 삼아서 구원이라는 목적을 얻어 들이는 믿음, 이렇게 깊고 지혜로운 믿음이 있는 자와 무조건 머리로 받는 믿음이 있다고 하는 자와 세상을 살아가되 지혜롭게 살아가고 진실로 살아가는 사람과 혀로 살아가는 사람과 둘 사이는 어떻게 공존이 가능합니까?’

 

이렇게 뜻을 생각하시면 ‘외형상 믿는자와 외형상 믿지 않는자 문제가 아니라 믿되 우리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 사는 믿음, 그 믿는 자와 그 믿음이 덜한 자 사이는 같이 살수 없느니라 믿음의 깊이와 믿음의 넓이와 믿음의 높이를 최대한 간구하되 마지막 구원이 하나님의 최종 선물이니라.’ 이 은혜를 간구하는 믿음을 여인은 가졌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소원대로 되어라’ 사도바울은 이 말을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면 최종목적은 내가 만든 우상이 됩니다. 최종의 해결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믿으면 하나님께 의지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우상을 견주었습니다.

 

우상이 뭡니까? ‘내가 할 수 있다. 나만이 할 수 있다. 내가 만든 것이 하나님이다’ 하고 내가 만든 것을 우상화 절대화 시킵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런 우상은 살아계신 하나님, 뛰어넘어 목적을 성취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전혀 공존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요, 당시 이 여인의 비유를 통해서 많은 청중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나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율법이 생동하게 만드는 것이지 율법조항 때문에, 나한테 지금 귀신을 쫒아 달라고 이야기 하는 사랑하는 불쌍한 고명딸을 가진 여인이 당신의 율법 때문에 지금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율법이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율법주의 때문에 당신딸이 죽어가니 당신들의 율법주의는 우상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는 단순합니다. ‘내가 믿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방식이 하나님입니다’라고 믿는 것이 우상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유일한 하나님이지만 나하고 우상을 같이 섬길 수 없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우상일 수 있다. 신격화시키면.’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고 고치고 울고 웃고 동거하고 삶의 족적마다 같이 거닐고 싶다. 사람이 만든 것으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

 

오늘 이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분 한분 여러분은 움직입니다. 살아 움직입니다. 여러분 속에 우상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거하고 싶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거닐고 싶으십니다. 그 하나님 받을수 있습니까?’ 살아 움직이는 성전, 그렇게 되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인종주의 이야기 좀 했습니다만 예수 당시에도 인종주의벽이 너무 높았습니다. 그 인종주의 벽은 지금도 있습니다. 제가 요즘 언론보도를 접하면서요. 백인 엄마와 흑인 아빠 사이에서 오바마가 태어났다는데 왜 오바마를 흑인으로 이야기합니까? 색깔 때문에 흑인입니까? 그러면 오바마의 엄마는 어디 갔습니까?

 

혹시 오바마의 누이나 여동생이 백인으로 태어났으면 그때는 백인이라고 해야 됩니까? 이 인종주의의 벽, 요즘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선진 미국사회나 우리사회의 공통된 벽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사우스아프리카라는 나라에서 홀랜드 출신의 백인들이 수십년 동안 지배를 했습니다. 다수의 흑인들을 아까 귀신들린 고명딸을 가진 엄마처럼 차별했습니다. 그 차별의 이야기를 서로 차별한다고 해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말을 썼습니다.

 

흑인들 보고 하는 말이 사우스아프리칸, 그러면 아프리칸이면 흑인을 주로 의미합니다. 자기들은 아프리카에 둥지를 두고 살지만 그러나 아프리칸, 흑인은 아니라는 뜻에서 용어를 하나 개발한 것 아시죠? 아프리카너, a자를 두 개 써서 아프리카너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똑같은 말, 아프리칸 그렇게 말하면 흑인이고 아프리카너 그러면 백인입니다. 주로 홀랜드 출신 백인이죠.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져서 다시 흑인들이 스스로 정치와 문화와 경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체제로 바꾼지 얼마 안 됩니다. 흑백 차별문제, 인종 차별 문제, 예수 당시에도 유태인과 이방인의 인종차별, 인종차별 속에 담긴 것은 또 신념의 차별, 종교의 차별입니다. 제가 성경말씀 다시 한번 찾아 봤더니요, 노아의 세 아들중에 셈족 함족 야벳족이 있었다고 그러죠.

 

간단한 설명을 보면 셈족에 속한 사람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동쪽을 향해서 살게 하고, 지금의 아시아쪽을 살게 하고 함족은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아프리카를 비롯한 남쪽으로 가게 하고 야벳족은 서쪽을 살게 했습니다. 서쪽은 유럽지역입니다.

 

‘아버지 노아가 홍수 다음에 농사를 짓다가 포도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자기소득인 포도주가 너무 좋아서 너무 많이 마시다 보니 취해서 발가벗은 채 자고 있었다. 그 광경을 함이라는 아들이 와서 보고 너무 우습고 기가차서 두 형제들에게 가서 우리 아버지 벗은 모습을 보자고 비아냥 거리면서 들어왔을 때 두 아들은 벌거벗은 모습 보기가 미안해서 큰 옷감 하나를 가지고 뒷걸음질 쳐서 들어와서 아버지이 벌거벗은 몸을 덮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함이라는 녀석은 즐겼습니다. 두 녀석은 미안해서 아버지를 보호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함이 저주를 받아서 아프리카로 쫒겨 났는데---’

 

그때 함이 까만색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색깔 이야기는 없으니까요. 하여튼 그래서 흑인, 백인, 색깔있는 유색인종인,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실을 제가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가 인종의 분규속에, 언제부터 인종분규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인종이 다른 것은 좋은데 차별하는 것은 아니라고 성경말씀도 그렇고 우리도 상식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 사회가 이상하게도 그동안의 전통이 아닌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불교와 기독교가 정치적 차별이란 이름으로 지금 바야흐로 갈등을 시작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정치적 차별은 정치적으로 풀면 됩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에게 종교적 신앙적 차별의 벽이 높아서 앞으로 계속되면 어떻게 할까? 이것은 큰일인데 우리의 전통도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오늘 이 예화도 다시 한번 들여다 봤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최근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에서 여러지역에서 사고가 났습니다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라고 하는 지역에서 인종청소를 단행했던 세르비아지도자들이 한 사람은 감옥에서 죽었고 또 한사람은 도망다니다 잡혔죠, 인종청소하는 대량학살을 저질렀는데 그동안 연방체제 속에서 보스니아 동네에 앞집은 이슬람, 뒷집은 천주교, 옆집은 정교회 오순도순 살다가 이제는 인종주의 종교주의가 범람하면서 갈등을 시작하면서 엊그제까지 이웃집 아저씨를 아줌마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죽입니다.

 

세르비아 정교회가 주도권을 잡고 제일 피해보는 것이 보스니아 종족에 속하는 회교도들이고 약간 회색적인 것이 슬로베니아출신의 천주교도 들입니다. 갈등은 기독교정교회와 이슬람으로 갔습니다. 얼마나 죽었나? 피비린내 나는 집단 학살, 그래서 그중에 한사람이 감옥에서 죽었고 최근에 붙들려와서 국제전범재판소에서 국제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시절에 종교개혁이 한참 일어날 때 그때 천주교와 개신교가 다르다고 유럽에서조차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같은 기독교인데 파가 다르다고요. 그보다 훨씬 앞서면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아니 이스마엘의 후계자와 이삭의 후계자 사이에 ㅍ비린내 나는 전쟁이 나서 십자군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몇 명이 죽었습니까?

 

수만명 수십만명이 죽었습니다. 그런 역사를 우리 기독교문화사에 세계역사에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이런 말을 좀 쓰고 싶습니다. 서구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을 당시 선진 대륙이었습니까? 아니면 무지한 대륙이었습니까? 선진이라는 말, 앞섰다는 말, 신사라는 말 많이 배웠다는 말, 지금 얘기지 옛날은 아닙니다.

 

무지한 돌부리와 벽을 세우고 살았던 시절, 서양이든 동양이든 피비린내 나는 인종차별의 역사 좌절의 역사 죽임의 역사 칼부림의 역사, 이런 역사들이 우리 종교역사를 지배하고 있고 인종역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있을 당시 왜 종교개혁입니까? 교회가 선진적이고 개방적이고 진실했으면 무엇 때문에 종교개혁이 생깁니까?

 

저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제가 아까 비행기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예수 믿는 한국 사람이지만 저는 선진적 한국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이 땅이 비록 작은 나라지만 기술도 문화도 예술도 마음씨도 선진화되고, 우리가 원하는대로 발달하고 무지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좀 작은 나라지만 이 땅을 살리기 위한 우리의 지혜가 충만하고 그 미래의 믿음의 열매가 확신이 되는 그런 나라로 선진조국을 살아보자고 얼마나 떠듭니까?

 

그런데 왜 하필 이 지경에 와서 그렇게 종교 하나가지고 평화를 깨면서 종교전쟁이 생기면 살육이 생기면 뭘 가지고 기독교복음을 전하라고 합니까? 어떻게 예수 믿고 살라고 합니까? 도데체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왜 뒷걸음치면서 살아가는 역사를 가져야 합니까? 너무 안타까워서요. 예수께서 말쑴하신 대로 ‘사랑하는 여성아, 분노하는 여성아, 목적을 위해서는 서로 담을 뛰어넘는 지혜를 가져라.’ 오늘 이 지혜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종교가 여럿이 있고 세상이 여럿이 있으니까 같이 어울려 살되 이제부터는 진실로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정도의 종교신앙이 아니고 믿으면 이 여성처럼 나에게 주어진 원대한 구원을 위해서 뛰어넘기도 하고 차기도 하고 극복도 하고 끌어 안기도 하고 살아가면서 우리 구원의 역사를 해야 된다고 봅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늘 인용하셨는데 오늘 이사야서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아 나는 그대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대들은 내 백성이 된다고 약속을 하자. 단 내가 그대들을 내 백성으로 삼은 이유는 너희들만 몽땅 묶어서 게토처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뭇백성을 위한 빛으로 먼저 구원시켜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시키기 위한 빛으로 선발대로 택했노라. 이것을 잊어버리면 전쟁이 나느니라.’

 

저는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주시는 진실된 믿음은 ‘다른 종교인보다 예수를 믿는 종교인은 훨씬 더 이웃을 진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훨씬 더 고상하고 높은 이상을 가질수 있어야 됩니다. 훨씬 더 많은 유연성과 함께 끌어안는 포용성을 가질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래야 마지막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계의 구원 민족의 구원 저자신의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우상의 하나님이 아니고 지금도 살아 움직이시면서 만백성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구원을 일으키시는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높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넓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신앙이란 선의의 이웃사랑 경쟁, 진실된 신앙의 경쟁, 깊은 신뢰의 경쟁시대로 가는거지 그냥 벽을 쌓아놓고 갈등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오셔서 ‘사랑하는 백성들아, 예수 좀 깊게 믿어라. 예수를 민족주의에 묶지 말고 율법주의에 묶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예수 좀 넓게 믿어라. 그리고 높은 신앙을 좀 가져라. 그게 선진적 신앙이 아니고 선진적 교회가 아니냐’ 예수님은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

 

보다 진실하게 보다 진정으로 보다 높고 고매하게 보다 따뜻하게 그렇게 믿어서 세상 좀 구원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는 그대들 안에 살아 있는 하나님으로 거하고 싶다. 그대들의 발걸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동행하고 싶다.’ 이 축복의 말씀을 여러분이 감사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주님이 되어 주시고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주님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오용익 (IP:59.♡.201.241) 08-09-02 15:59 
소감) 소위 성서를 가르친다는 아카데미의 원장이 속이 찬 설교라고 분류한 설교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들어보니 대체 이걸 속이 찼다고 하는 그 사람의 그 속은 대체 무엇으로 차 있는 것인지 그게 더 기막혔다. 내가 보기에 이 설교의 핵심을 담아낸 용어가 이것이었다. 선진적신앙. 선진적교회.

성경에서 듣도 보도 못한 말이다. 대체 이런 신학용어와 그 맥락이 어디서부터 주어졌는지? 주님이 주신 약속은 ‘내피를 마시지 않고 내 살을 먹지 않고서는 생명이 없다’ 인데.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 위엣것을 찾으라’ 인데.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해 주지 않으면 내게 올수 없다’ 인데. ‘내가 은혜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베풀자에게 긍휼을 베푼다’ 인데. ‘사람에게서 난것도 아니요 사람의 뜻으로 난것도 아니다’ 인데. 맞다. 속이 가득 찼다. 지옥이 가득 가득 들어찼다. 무슨 잘남으로 이 더러운 지옥에서 탈출이 가능할까? 십자가가 왜 미련한 십자가인지, 그 십자가만이 왜 하나님이 구원의 능력인지, 그리고 복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닫게 해준 너무도 고마운 설교시간(지옥에서 들려오는,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인 것을 알려주는)이었다.
 정낙원 (IP:124.♡.243.28) 08-09-02 21:51 
옛말에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들 합니다. 유유상종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정용섭 목사가 어떤 분인줄 모르지만 오 목사님께서 올려 주신 설교를 속이 꽉찬 설교라고 추천을 한 것이라면 이 분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위에 박종화 목사의 설교는 설교라기 보단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성경을 이용하는 수준입니다.

특히 박종화 목사의 설교 중에서 언급한 아래의 내용을 보면 이 양반은 예수 믿는 것이 무슨 도 닦는 것인줄 아는가 싶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오셔서 ‘사랑하는 백성들아, 예수 좀 깊게 믿어라. 예수를 민족주의에 묶지 말고 율법주의에 묶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예수 좀 넓게 믿어라. 그리고 높은 신앙을 좀 가져라. 그게 선진적 신앙이 아니고 선진적 교회가 아니냐’ 예수님은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 보다 진실하게 보다 진정으로 보다 높고 고매하게 보다 따뜻하게 그렇게 믿어서 세상 좀 구원하십시다."

그리고 정용섭 목사는 한국교회의 내노라 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비평한다고 하는데 그 비평의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복음으로 설교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져 자기가 배운 학문으로 분석하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설교란? 언어 유희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하여 듣기 좋고 격식 있게 말하는 종교 강연이 아닙니다.

설교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지적하지 않고, 왜? 에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지를 말하지 않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무식한 할머니가 말하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고 하면 가장 좋은 설교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공부를 많이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증거하지 않으면 잡설입니다.

한마디로 위의 설교는 잡설이고 이런 설교를 속이 꽉찬 설교라고 추천한 정용섭씨 또한 목사라고 말하긴 곤란하고 그져 흔한 종교인 중에 좀 튀고 싶어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위 설교를 좋은 설교라고 추천을하는 수준이라고 한다면 한국교회의 기라성 같은 자들을 공격함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여보고자 하는 영웅심의 발로라고 하겠네요.

특히 속지 말아야 할 것은 박사학위는 학문으로 평가하여 주는 것이지 복음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무슨 무슨 박사가 비평한다고 하여서 복음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박사라고 우러러 볼 필요도 없고 박사라는 학위 앞에 주눅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슨 설교이든지 비평의 기준은 학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입니다.

왜냐하면! 그 피만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넘어가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살아 꿈틀대는 생명의 역사이기 때문에 학문으로 판단할 수가 없고 생명의 근원인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서만 판단이 되어야 합니다.
 구득영 (IP:203.♡.97.201) 08-09-02 23:36 
자기와 같은 경험들이 많이 축적되어 있으면 좋은 설교라고 판단을 하겠지요. 같은 연속극을 보더라도, 나는 재미가 있지만 마누라는 전혀 재미를 느끼는 못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저는 요즘 롯데가 야구를 잘해서 신이 나지만, 대구는 좀 덜 그럴 것이고, 광주는 조마조마하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이근호 목사님을 만난지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도대체 같은 경험이 축적된 것이 없습니다. 강의를 녹취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날마다 새롭습니다. 요즘 하루에 보통 서너시간은 미팅을 하는데, 아니 녹취를 주로 하고 장사를 틈틈히 하는데, 아무튼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2004년 칠곡에서 '구' ㅋㅋ
 최복희 (IP:211.♡.192.56) 08-09-04 03:35 
엄청난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워도 인간의 귀는 가청 주파수만 들을 수 있듯이 인간의 판단은 보고 듣는 감각지각능력에 의존되어 있다. 인간은 세계를 3차원의 공간으로 표상하지만 지렁이는 무한한 직선으로 1차원공간으로 표상할 것이다. 예수님을 민족주의, 율법주의에 묶지 않고 높은 신앙으로 좀 더 진화된 유전인자에 묶고고자 하는 자의 사유활동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순간 찰나의 작품이 아닐까?
 강구만 (IP:125.♡.86.207) 08-09-04 15:57 
우리의 믿음이나 신학을 강변 하는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의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문화,역사,인종,종교) 보는 자가 성도요 교회일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쟁취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그 어떤 수단 방법도 막혀있다. 저주받고 말라 죽어버린 무화과 나무는 어떤 불만도 저항도 없었다. 이방여인의 사건도 같은뜻으로 구원을 당연시 하는 이스라엘이나 모든 인간을 공격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과 목적 쟁취를 위해 뛰어 넘고 저항하는 믿음이나 지혜를 거부하고 심판하는 것 이 십자가다. 따뜻하게 예수 믿고, 고매하게 예수 믿어서 인종차별.종교차별 분쇄하고 좋은세상 만들어 잘살아 보자는데 이용되는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 피 이야기는 잠시 덮어두고, 십자가는 우회해서 신과 인간이 마음 열고, 이야기 해서 합의 보면 구원이 별거 있겠냐는 인간적인 속성을 '설교' 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속지 않는다. 예수님을 죽여버린 인간들의 본성을 우리 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신다. 그리고 십자가에 흘리신 피를 잊지않고 이땅에 다시 오신다.    선진신앙, 선진교회는 자체생산이 가는 한지 모르겠다만,'하나님의 피'로 사신 성도와 교회는 창세전 부터 예정하신 '비밀'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복음을 모른다고 화낼 필요는 없다. 영원한 현실로 굳어져 버린 십자가 앞에서 증인으로 살 뿐이다. 아벨의 피를 흘리고 스데반을 죽여버린 세상이 바뀌거나 개선 되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이근호 (IP:117.♡.144.99) 08-09-05 06:23 
최복희 간사님의 리플에는 약간의 해설이 필요한 것 같아 덧붙여봅니다. 철학자 라캉에 의하면, 의식 세계란 숨어있는 무의식 세계의 표상으로 구성되게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이론은, 우리가 의식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의 한계가 폭로된다는 것이지요. "네 자신을 알라"라는 식입니다. 예수님을 민족주의로 관점에서 활동했다는 보는 것은, 그렇게 보는 당사자의 관심사가 극히 세상적인 것에 묶여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확정적 의미를 '상상계'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식에 대해서 반발하고 지적해서 그 사람의 한계를 드러내도록 조치하는 상징계의 위력입니다. 자아도취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충고조차 확정적 의미로 놔두지 않고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내게 하는 우연적 사태가 곧 실재계입니다. 쉽게 말해서 욥의 고난이 상상계라면 그런 욥을 죄라고 나무라는 것이 상징계요, 마지막에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시는 것이 실재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최복희 간사님은 항상 자기 깨어짐을 유발시키는 실재하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더높은 신앙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용익 (IP:59.♡.201.241) 08-09-05 10:24 
(2005년 이근호목사 광주강의 고린도전서 두번째 시간 끝부분 발췌)
자아는 아무리 해도 타인을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아의 특징이에요.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아무리 해도 상대방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 자아의 한계입니다. 이것을 네비나스라는 사람은 ‘초월’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의 ‘초월’은 더러운 곳에서 성스러운 곳으로 뛰어넘는 것을 ‘초월’이라고 했는데, 네비나스는 그렇게 보지 않고 자아에 갇힌 자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초월’에 해당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단 것입니다.

그러면 신은 어디에 있는가? 타인의 얼굴로 온다는 것입니다. 이 얼굴은 내 자아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양태로 자아에게 다가옵니다.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자가 여러 명이겠지요. 그러면 그들이 내게 피해를 호소합니다. ‘너 때문에 내가 아프다. 너 때문에 내가 괴롭다’ 할 때 비로소 자아는 ‘초월’과 접촉이 됩니다. 여기서 진정한 이웃 사랑이 나옵니다. 이것이 네비나스의 철학입니다.

신은 바로 우리 때문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십자가의 아픔으로 나타나면 그 십자가의 아픔 속에 신의 얼굴이 들어있고, 그 얼굴은 우리 때문에 상처받은 아픔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 네비나스의 주장에 대해 신학자들이 깜짝 놀랐어요. 철학으로 십자가의 신학을 풀어낼 줄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기독교 신자냐? 아닙니다. 유대인이에요. 마르틴 부버라는 사람은 유대인 신학자인데 이 사람은 ‘나와 사물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라고 보았습니다. 사물의 관계란 뭐냐, 나와 그것, ‘그 자식이 말이야, 그 놈이’에서 그는 인간이 아니에요.

내 앞에서 물건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서 그 물건은 부서져도 그만 이예요. 그런데 마르틴 부버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이웃 관계가 깨지니까 ‘진정한 신의 관계는 뭐냐, 나와 너의 관계로서 그 안에 신이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유대인 수용소를 거쳐 가면서,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이 어느 정도 지독하게 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을 연구하면서, 그러면서도 신을 부정하지 않고 신의 사랑은 바로 ‘신의 모든 죄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신의 모든 사랑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발생된다.’는 것이 마르틴 부버의 주장이라면, 이에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런 ‘너’가 그냥 ‘너’가 아니라 나 때문에 피해보는 당사자의 입에서 나오는 ‘너’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진정한 윤리와 도덕은 피어난다고 본 것입니다. 이 철학의 문제점이 뭡니까? 이것 하고 둘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문제점이 뭘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것은 예수님이 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비나스가 주장하는 죄는 뭔가,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상대방이 있으면 그것이 나에게 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은 뭡니까? 윤리, 도덕적 죄지요. 그렇다면 네비나스의 철학에 의하면 예수님은 필요치도 않고, 정신병자지요.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했으니까, 자기 빼놓고. 반대로 이야기해서 복음을 안다는 것은 결국 뭐라고요? 윤리, 도덕이 아니고,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상하기 짝이 없는 철학도 다른 복음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다른 복음을 증거 하는 오늘날 교회는 어떤 곳이냐? 감리교, 장신, 자유주의 신학 등등이지요.  이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모순을 교회가 나서서 해결함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아직도 이 사회에서 유용한 기관임을 알리는 것을 사명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한신, 장신, 감리교, 천주교 등이 이런 신학을 펼 때, 무식한 기존 교단이 반박을 못해요. 기껏해야 ‘그렇게 해서 교회가 되느냐?’는 식의 주장만 하지요. 이렇게 반박하는 쪽도 복음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철학이나 교육학 등은 이웃에 대한 아픔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여깁니다.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고, 헐벗은 자를 도와줄 때 그것은 종교와 관계없이 이것이 곧 구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저도 교사 생활하면서 여름방학 때 연수를 받았는데, 강의하는 교육학자들이 저렇게 복음을 모르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아직 신학을 공부하기 전이었고, 다만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을 읽었는데 그래도 복음이 아닌 것이 구분이 되었습니다.

(교정보다가 위의 설교에 대한 적합한 비평글이 될듯해서 댓글로는 좀 길지만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