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 십자가가 아니었나?
3380, 3381번의 두 개의 글을 여러 번 읽었다. 참 독해가 어려운 글이다. 심도 깊은 내용을 다뤘거나 들어보지 못한 용어가 나와서가 아니다. 이 글의 요지를 이런 식으로 정리해 봤다.
이 글이 주장하는 바를 경우의 수로 정리해 봤다.
1. ‘이 근호목사가 전하는 복음은 거짓복음입니다. 즉 그와 그의 복음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볼 것도 없이 다 이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이 근호 목사가 전하는 복음은 별 문제 없는데 다만 그 복음을 전하는 이 근호 목사가 문제입니다. 그 문제인즉 복음만 전하지 정작 본인에게서 복음 아는 자의 행위는 보이지 않습니다.
3. 이 근호 목사의 행태로 미루어볼 때 이 근호 목사도 문제 있고 따라서 이 근호 목사가 전하는 복음도 필경 문제성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3번의 경우부터 생각해 보면,
한 개인의 행태에 의해서 거짓복음과 복음이 판별된다는 설정자체를 복음이 용납하지 않는다. 언제 주님이 한 개인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이 참된 복음인지 거짓복음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삼으라 한 적이 있었던가. 이런 짓, 이런 짓의 다른 복음을 사도가 제쳐두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복음은 그 자체로 거짓복음을 판별하는 자기기준인 오직 한 주님의 행위인 십자가만을 품은 채로 활동한다고 되어 있다(갈 3:1). 그 활동 앞에서 드러나는 다른 복음이란 간단하다. 주님의 그 유일한 행위의 가치 외에 다른 무엇을 첨가하면, 그래서 복음의 기준을 흐리면, 곧 심판 주되시는 주님의 활동, 복음의 광채를 가리우면 그것이 곧 악마의 활동이요 그것이 곧 저주받을 다른 복음이다.
거짓복음이 모습을 드러낼 경우란 주님께서 이 지상에 마지막 남긴 자기기준인 십자가를 드러낼 때뿐이지 않나. 따라서 십자가안 3번 같은 경우의 이런 경우 자체가 상정될 수 없게 된다. 십자가 안에서는 바로 그런 짓이 저주받을 짓으로 책망 받고 뭉개지는 복이 있을 뿐. 그런 복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3번 같은 경우를 상정할 수 있겠는지.
2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단절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죽었다(갈 6:14). 죽은 자 가운데서 산자이신 주님에 의해서 산자의 산자다운 모습이란 매일 매일 오직 한 행위뿐이다. ‘제가 비로소 죽은 자로만 살아왔음을, 제가 살아가는 실력이 평생가도 그것뿐임을 알았습니다.’ 하는 고백이다. 이것이 인간이 자기 행함으로는 생산해 낼 수 없는 겸손이고 온유고 사랑이다. 예수님의 것이었기에, 예수님에게 붙은 가지였기에 맺은 열매이고 성도 자체가 예수님의 작품이고 열매이다. 뭘 해도 성도는 이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이 새 언약의 구조 속에 갇혀 지낸다. 그래서 2번의 경우가 십자가 앞에서 성립 안 된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이 다 죽었고 그걸 아는 자는 십자가 안으로 불려 들어온 자뿐이다.
이제 1번 경우만 남았다.
여기서 생각해 보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이것 하나다. 글쓴이의 문제제기가 이것 하나만 최종 남는다는 말이다. ‘당신의 십자가와 내 십자가가 달라요.’ 어떻게 다름을 드러냈나? 2번과 3번의 경우의 수가 십자가 안에서 성립 가능하다는 것으로 드러냈다. 바로 이 점이 성도로서는 독해를 차마 힘들게 만드는 부분이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차마 이 글을 이분의 주장으로 액면 받아들이기가 안타깝고 무섭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 글 아무리 읽어봐도 ‘난 십자가 안이라고는 구경해 본 적도 없어요.’ 라는 고백 말고 달리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지. ‘정말 이분이 내가 알던 그 집사님이 맞는지, 누구나 태어나면서 가지고 태어나는 이 육적구조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글을, 달리 말하면 성령 아니어도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논리를 들고 나와서 복음적 논쟁이라고 하고 있는 이 분이 정말 그분 맞나.’ 하였기에.
이장우 목사님이 6월 26일자 출애굽기 주일설교 마지막 대목의 요지는 이렇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장식물은 다 떼 내야 한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 지금까지 믿은 것 다 버리라.’고도 하셨다. 주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좆은 사람들이고 베드로가 목숨도 버리고 따른다고 했다. 그것마저 다 쓸데없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출생자체가 마귀자식들이었으니.
베드로의 잘못된 태도나 행함이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자체가, 인간자체가 쓸데없다. 이 장우 목사님이 행한 설교 그대로, 바울이 전한 말씀의 위력이 그대로 우리에게 작렬해서 이미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그래서 우리의 지금껏의 모든 것, 그게 잘났다고 여겼던 못났다고 여겼든 이 모든 것이 다 부서지고 먼지처럼 안개처럼 날아갔으면, 매일 매일 그래서 우리는 그저 십자가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데없음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십자가만 자랑할 것 아닌가? 십자가 앞에서 더 기대할 것이 또 무엇인가? 그런 취지로, 그런 언약구조를 장 근식 목사님도 늘 푸른 교회에서 설교했고, 그런 취지에서, 그런 구조 속에서 방종 예화도 삽입되었던 것 아닌가. 그런 취지를 잘 읽으라고, 우리 다 같이 주님의 십자가를 한 번 더 보자고 이 장우 목사님이 이 근호 목사님의 설교녹취록을 늘 푸른교회 홈에 올려놓으신 것 아니었겠는지. 내내 선포되는 늘 푸른 교회의 설교가 그리고 성도들이 증거 하는 십자가는 바로 그 십자가가 아니었나? 우리를 십자가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데없음만으로 남기는, 그래서 그 순간에는 다 잊어버린 채 십자가만 한통속으로 자랑하게 하는. 그런데 글쓴이의 십자가는 그 십자가가 정말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