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익

정말 그 십자가 아니었나(오용익)

아빠와 함께 2013. 1. 29. 13:07

정말 그 십자가가 아니었나?

 

3380, 3381번의 두 개의 글을 여러 번 읽었다. 참 독해가 어려운 글이다. 심도 깊은 내용을 다뤘거나 들어보지 못한 용어가 나와서가 아니다. 이 글의 요지를 이런 식으로 정리해 봤다.

 

이 글이 주장하는 바를 경우의 수로 정리해 봤다.

 

1. ‘이 근호목사가 전하는 복음은 거짓복음입니다. 즉 그와 그의 복음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볼 것도 없이 다 이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이 근호 목사가 전하는 복음은 별 문제 없는데 다만 그 복음을 전하는 이 근호 목사가 문제입니다. 그 문제인즉 복음만 전하지 정작 본인에게서 복음 아는 자의 행위는 보이지 않습니다.

 

3. 이 근호 목사의 행태로 미루어볼 때 이 근호 목사도 문제 있고 따라서 이 근호 목사가 전하는 복음도 필경 문제성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3번의 경우부터 생각해 보면,

 

한 개인의 행태에 의해서 거짓복음과 복음이 판별된다는 설정자체를 복음이 용납하지 않는다. 언제 주님이 한 개인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이 참된 복음인지 거짓복음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삼으라 한 적이 있었던가. 이런 짓, 이런 짓의 다른 복음을 사도가 제쳐두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복음은 그 자체로 거짓복음을 판별하는 자기기준인 오직 한 주님의 행위인 십자가만을 품은 채로 활동한다고 되어 있다(갈 3:1). 그 활동 앞에서 드러나는 다른 복음이란 간단하다. 주님의 그 유일한 행위의 가치 외에 다른 무엇을 첨가하면, 그래서 복음의 기준을 흐리면, 곧 심판 주되시는 주님의 활동, 복음의 광채를 가리우면 그것이 곧 악마의 활동이요 그것이 곧 저주받을 다른 복음이다.

 

거짓복음이 모습을 드러낼 경우란 주님께서 이 지상에 마지막 남긴 자기기준인 십자가를 드러낼 때뿐이지 않나. 따라서 십자가안 3번 같은 경우의 이런 경우 자체가 상정될 수 없게 된다. 십자가 안에서는 바로 그런 짓이 저주받을 짓으로 책망 받고 뭉개지는 복이 있을 뿐. 그런 복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3번 같은 경우를 상정할 수 있겠는지.

 

2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단절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죽었다(갈 6:14). 죽은 자 가운데서 산자이신 주님에 의해서 산자의 산자다운 모습이란 매일 매일 오직 한 행위뿐이다. ‘제가 비로소 죽은 자로만 살아왔음을, 제가 살아가는 실력이 평생가도 그것뿐임을 알았습니다.’ 하는 고백이다. 이것이 인간이 자기 행함으로는 생산해 낼 수 없는 겸손이고 온유고 사랑이다. 예수님의 것이었기에, 예수님에게 붙은 가지였기에 맺은 열매이고 성도 자체가 예수님의 작품이고 열매이다. 뭘 해도 성도는 이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이 새 언약의 구조 속에 갇혀 지낸다. 그래서 2번의 경우가 십자가 앞에서 성립 안 된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이 다 죽었고 그걸 아는 자는 십자가 안으로 불려 들어온 자뿐이다.

 

이제 1번 경우만 남았다.

 

여기서 생각해 보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이것 하나다. 글쓴이의 문제제기가 이것 하나만 최종 남는다는 말이다. ‘당신의 십자가와 내 십자가가 달라요.’ 어떻게 다름을 드러냈나? 2번과 3번의 경우의 수가 십자가 안에서 성립 가능하다는 것으로 드러냈다. 바로 이 점이 성도로서는 독해를 차마 힘들게 만드는 부분이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차마 이 글을 이분의 주장으로 액면 받아들이기가 안타깝고 무섭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 글 아무리 읽어봐도 ‘난 십자가 안이라고는 구경해 본 적도 없어요.’ 라는 고백 말고 달리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지. 정말 이분이 내가 알던 그 집사님이 맞는지, 누구나 태어나면서 가지고 태어나는 이 육적구조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글을, 달리 말하면 성령 아니어도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논리를 들고 나와서 복음적 논쟁이라고 하고 있는 이 분이 정말 그분 맞나.’ 하였기에.

 

이장우 목사님이 6월 26일자 출애굽기 주일설교 마지막 대목의 요지는 이렇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장식물은 다 떼 내야 한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 지금까지 믿은 것 다 버리라.’고도 하셨다. 주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좆은 사람들이고 베드로가 목숨도 버리고 따른다고 했다. 그것마저 다 쓸데없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출생자체가 마귀자식들이었으니.

 

베드로의 잘못된 태도나 행함이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자체가, 인간자체가 쓸데없다. 이 장우 목사님이 행한 설교 그대로, 바울이 전한 말씀의 위력이 그대로 우리에게 작렬해서 이미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그래서 우리의 지금껏의 모든 것, 그게 잘났다고 여겼던 못났다고 여겼든 이 모든 것이 다 부서지고 먼지처럼 안개처럼 날아갔으면, 매일 매일 그래서 우리는 그저 십자가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데없음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십자가만 자랑할 것 아닌가? 십자가 앞에서 더 기대할 것이 또 무엇인가? 그런 취지로, 그런 언약구조를 장 근식 목사님도 늘 푸른 교회에서 설교했고, 그런 취지에서, 그런 구조 속에서 방종 예화도 삽입되었던 것 아닌가. 그런 취지를 잘 읽으라고, 우리 다 같이 주님의 십자가를 한 번 더 보자고 이 장우 목사님이 이 근호 목사님의 설교녹취록을 늘 푸른교회 홈에 올려놓으신 것 아니었겠는지. 내내 선포되는 늘 푸른 교회의 설교가 그리고 성도들이 증거 하는 십자가는 바로 그 십자가가 아니었나? 우리를 십자가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데없음만으로 남기는, 그래서 그 순간에는 다 잊어버린 채 십자가만 한통속으로 자랑하게 하는. 그런데 글쓴이의 십자가는 그 십자가가 정말 아니었나?

 이근호 (IP:117.♡.132.36) 11-06-30 06:19 
복음에 반발하는 자들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인간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지 않는 십자가인가 아니면 2.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가치만 인정하신 그런 십자가인가 입니다. 달리 말해서 1. 예수님은 여럿 인간들 중에 존중할 만한 한 분인가? 아니면 2.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짓고 그 가운데 홀로 의인이신가?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만"이라는 십자가 복음에 시비거는 모든 자들은 자기 뜻을 숨기지 말고 솔직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십자가는 혹은 내가 아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가치를 존중해주고 무시하지 않고 죄인이라고 몰아세우지 않고 그저 '봐줄게 봐줄게'라는 식으로 넘어가주는 그런 하나님이다"고. 그리고 현대 신약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사도 바울은 독선가요 자기 외에는 다 틀렸다고 주장하기에 전혀 그의 논리는 믿을 만한 자 못된다"고 왜 자신있게 주장하지 못하는가! 뭐가 무서워서?  누가 생명책에 있는지 왜 아무도 모른다고 주장하는가? "글레멘트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 이 말씀도 사도 바울이 언급했다는 이유 때문에 싫은 겁니다. 그만큼 "사람은 다 거짓되다"(롬 3:4)는 말씀 속에다 자기를 집어넣기 싫은 겁니다. 좀더 노력하고 공부하게 되면 이들의 눈에는 결국 불교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예수만이 위대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길은 모두가 품고 있다. 自性(자성)이 곧 진리다"는 성인들의 주장이 맞다고 나올 것입니다.
 우인숙 (IP:211.♡.47.73) 11-06-30 08:07 
지난주 광주 공부후 늦은 시간까지 공부머리(?) 하던 즐거움이 문득 생각납니다...방종이라는 칼럼의 글에 이구동성으로 아멘에다 죄인된 그 편안함을 다 얘기하는 화평교인들은 오 목사님이 목회를 안해서 그런가벼????
 김대식 (IP:124.♡.84.34) 11-06-30 10:13 
몇 년 전에 어떤 목사 이야기가 수요설교에 갑자기 언급이 되었습니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듣고 내용을 파악해 보니

아마 교회에서 쫏겨나는 상황이 벌어진듯한 모습이였습니다. 물론 제가 그 설교를 듣고 저 혼자만의 판단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남의 교회 사정까지 뭐 저렇게 일일이 챙기나 싶었죠 항상 오바를 하니 말이죠.
(남의 교회? 하여튼 꼬투리 잡으면 또 집중포화가 벌어지죠. 그러면 저도 아차 하는거죠. 이것은 누구다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의 육적속성이니 성령의 소욕이 가만히 두지 않죠. 교회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주님도 하나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그 표현 그 생각 그대로 올리고 있고요)

그것도 아직 사건이 터지기도 않았는데 미리 말을 끄집어 내어버리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어쩌면 사건이 터지기 바로 직전이라 생각하고 긴박하게 언급한지도 모르죠. 그 일을 격을 그 목사 보다 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 원. 그 목사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복음이 더 중요해서 말이죠. 물론 실패하는 것은 더 다반사로 보아왔습니다만.)

그런데 막상 그 당사자의 입장에 되어보면 심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분이라는 것을 존중하는 전제를 깔고서 그런 어려움의 상황을, 미리 그런 징후를 견지해서 파악해서 설교 시간에 겁도 없이 운운해 버리고 본인이 더 발을 동동 구르게 되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그런데 저는 더 웃기는 것을 발견해서 놀랬습니다. 그것을 단지 설교에 언급했을 뿐인데 갑자기 수그러들면서 잠잠해 졌다는 저의 판단이 드는 겁니다. 전운이 감도는 그 긴박한 상황이 갑자기 없었던 일로 된거죠. 물론 다시 속내는 은폐가 되면서 말이죠. 아직까지는 표면화 표출이 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그 분은 당장 쫏겨나지 않으니 일단 패스 한거죠.

제가 말하고픈 것은
결국 이 말은 그 목사가 귀해서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정치적인 속셈이다 라는 둥
아니면 제가 한 개인 목사의 뛰어난 면을 말하고 있다는 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뛰어나든 말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인간이란 변하기 때문에 일말의 기대를 가질필요가 없기에 그것은 입에 다룰 가치가 없고요.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복음이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증거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속에 누가 주님의 자녀로써 말씀을 듣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필히 따라오는 손가락질의 비방이 있습니다. 그러는 너는 그런 너를 정치화 할려고 하는 것 아니냐 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라오죠.

답은 간단합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미쳤죠 왜 제가 저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 말씀을 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해 놓고서는 또 합니다. 또 그럽니다.

하지마 윽박 지릅니다.

또 그럽니다.

하지마 머리카락 다 뽑아버린다.

또 그럽니다.

(과거 5-6-70년대에 가난한 시절의 어머니들이 교회갈때마다 아버지로부터 괴롭힘을 당해도 기여히 말씀을 듣고자 가던 그런 시대가 있었듯이 말입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라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을 혼쭐내야겠다 싶어서 두 팔 거두어 올라가보지만 그 우발성은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 소년 쫒아내고 딴 소년으로 교체 해 보니 또 그럽니다.

아니 늑대가 나타났다고 본대로 들은대로 외칠 뿐인데 소년을 백날 짤라내어 본들 어쩌란 말입니까? (손가락 짤라내본들 달이 없어지냐 말이죠,)

그래서 아예 교육을 시킵니다. 절대로 절대로 네버 네버 늑대를 봤다 손 치더라도 절대로 늑대가 나타났다 라고 말하지 않으면 돈 월급 두득히 줄께.

실제로 성경에 어린 사무엘이 엘리제사장에게 자꾸 이런 상황으로 벌어지게 되니
실제로 엘리 제사장 가문이 다 짤려버립니다. 목 뿌라져서 죽죠, 가문은 더 처참하고요.

그런데 이 상황이 확장 확대 증식이 되면서 더 복잡하게 됩니다. 점점점 죄악이 깊어지게 되니 거짓선지자의 출현이 기정사실화 된 시대에서는 더 이상 인간의 손에서 떠난 문제로 확대가 됩니다.

자 이렇게 복음은 서로 서로 충돌시키고 싸움질을 벌려서
좀 전 까지만 해도 서로의 목숨까지 나누자 라고 화평했던 자도 원수지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유가 뭘까요? 월급 두둑히 주면 그 원수지간 만드는 복음을 막을 수 있을까요?

그럼 또 따지죠 왜 꼭 원수지간 만든다고 생각하느냐 복음은 화평을 만든다 라고 하겠지요.

바로 그 차이입니다.

원수지간 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화평을 이룹니까?
십자가는 원수 된 우리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원수성을 뽑아냅니다. 원망을 담아야 피가 뿌려질 것 아닙니까?

결국 예수님의 관심사는 자기 피입니다.

그런데 다들 엉뚱한 것 보고 시기가 나고 질투가 나는 것을 억지로 억지로 참고 참고 있다가 누가 용감하게 나서면 거기에 같이 용감하게 짱똘 들고 돌삐 던지는 겁니다.

그래서 부정한 인간이 미끼로서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인위적으로가 아니라 우발적으로 말이죠.

성령만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 또는 예수님께 돌 던져야지

엉뚱한 놈에게 돌 던지고 있으니 웃기죠.
그래야 예수님도 속이고 성령도 속이는 자신이 들통나지 않으니까 말이죠.

예수도 내가 만들어 내고, 성령도 하나님도 만드는 재주가 우리는 타고났지만

문제는 마귀는 안 속습니다.

마귀는 만들어낼 재주가 우리에게는 없거든요.
(왜냐? 선악을 따먹고 예수도 하나님도 다 상상할 수 있지만, 심지어 성경까지 동원해서 상상할 수 있지만, 정작 마귀는 실제 이기 때문에 상상할 수가 없지요. 마귀야 말로 지금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나를 내가 조작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실제적으로 표출하기 때문에 마귀로 일부러 될 수가 없지요. 이미 마귀인데요 뭘? 그래서 예수님이 모세가 장대 높이 뱀을 들었듯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실상을 들어야 하는 겁니다. 허상 말고 실상)

그래서 예수님만이 허상인 인간을 상대로 하지 않고 오로지 실상인 마귀만을 상대하십니다.
아주 아주 디기 디기 예민하게 혼자만 상대하십니다.
 유일자 (IP:116.♡.234.248) 11-06-30 10:30 
십자가란 구원받겠다는 자들을 자기가 왔던길로 돌아가게 하든지..
아니면 그 현장에서 죽든지 하게 하는 장소를 만들어 낸다.
 김대식 (IP:124.♡.84.34) 11-06-30 11:02 
아멘

출애굽 홍해 세례 점 하나 찍고, 요단강 입수 세례 점 하나 찍고. 그 두 점 사이에 광야40년을 얼굴로 만들어서, 예수님의 싫어버린바 된 얼굴(풍경,배경)을 형성합니다.

그 광야라는 얼굴을 두 눈 두 점(응시점) 찍어서 형성하지요.
(십자가의 죽음의 점, 부활의 점 그 사이의 아무도 건널수 없고 좁힐수 없는 3일이라는 죽음의 간격)
이것이 교회 입니다. 광야교회. 예수님 자신의 집(성령의 전)이요 얼굴(빈터)입니다.

우리가 고은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태양빛에 거슬려 새까맣게 된 그 얼굴을
마주 보는 얼굴로써가 아닌 고개돌려버리는 얼굴로써 형성한 그 얼굴을

예수님은 장대 높이 달려서 쳐다보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유치합니까? 어리석고 미련합니까? 그거 쳐다본다고 구원 됩니까?
(그런 구원의 조건이라면 다들 안쳐다보고는 못배기죠. 그런데 그 간격은 안좁혀집니다. 아무도 못쳐다봅니다. 고개 돌리는것 쯤이야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불가능 합니다. 심판성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얼굴을 내가 쳐다보는 내 얼굴이 거기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못쳐다보지요. 그 뱀을 못 쳐다 봅니다.)

그러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자기얼굴을 주님은 찾으시는 겁니다.

그 외 나머지는 광명한 천사의 얼굴을 하는 악마의 얼굴 입니다.

(고전 13:9, 개역)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개역)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개역)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유일자 (IP:116.♡.234.248) 11-06-30 11:34 
보이는 것은 안보이게 해주시고
안보이는 것은 보이게 해주시는 기적을 주신 주님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