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계시의 폐쇄성(자유게시판3556 오용익)에 대한 이장우 목사의 반박글에 대한, 저의 재반박글입니다.
참고로 이 장우 목사님 글
이 글에서 계시의 자기 폐쇄성과 개방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이 독점하고 계시기에 인간의 노력으로 계시를 열어보려고 하는 시도는 일절 허락되지가 않는다는 말에서 계시의 자기 폐쇄성이라는 말은 옳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방성을 인간이 계시에 접근하려는 자의적인 노력은 마치 화염검에 둘러싸여 인간에게 접근금지가 된 생명나무로 나아가려는 시도와 같기에 악마적인 시도라고 해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으로 인하여 성령이 부어지면 폐쇄성을 유지하되 성령이 임한 자에게는 계시가 열린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계시에 접근하려고 하는 개방성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계시를 받은 자는 사적구원을 챙기기 위하여 자기 근력을 키우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자가 됩니다. 이런 자들이 성경에서 계시를 받은 사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의 계시마저 계시의 자기 폐쇄성이라고 하면 성령께서 개방하여 주신 것도 부인할 수 있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사명이 눈을 감기고 귀를 막히게 하여 스스로 고치고 돌아오지 못하도록 막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이 언제까지냐고 질문하니 심판하여 모든 것이 다 날아가고 거룩한 씨가 남아야 한다는 말씀을 합니다(사6:9-13).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거룩한 씨로 인하여 자기 백성들은 계시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계시를 받은 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증거 합니다. 이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는 자기 능력이 아니라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주어졌기에 은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열렸다는 의미에서 십자가 이후에는 폐쇄성과 개방성이 동시에 작동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적인 구원을 챙기기 위한 자들에게는 끝까지 폐쇄성이 유지되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자기 영광 곧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내시는 일에는 계시를 열어보여 주신다는 의미에서 개방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단어라도 사용하는 문맥에 따라 전혀 다르게 사용됩니다. 오 목사는 인간의 자의적인 구원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것을 개방성이라고 하였다면 저는 성령께서 계시를 열어주시는 것을 개방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계시의 폐쇄성과 개방성이 동시에 주어지는 시대가 새 언약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3-8절입니다.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복음의 광채가 가려지는 자가 있고 비쳐지는 자가 있습니다. 가려지는 자는 망하는 자에게 가려지고 비쳐지는 자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 비쳐지는데 이것이 바로 태초에 빛이 비치
라고 하신 그 창조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창조의 능력으로 복음의 빛이 비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9월 11일 주일 설교를 참고하셔도 좋겠습니다.
디모데전서 2: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데살로니가 후서 3:2절입니다.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이 두 곳의 말씀만 보아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하시면서도 믿음의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두 구절의 말씀만으로도 개방성과 폐쇄성에 대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주장을 위하여 성경을 부분적으로 첨삭하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 목사님의 글은 십자가란 오직 구원저지용으로만 사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글의 문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읽을 수는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 저지용(폐쇄성)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은 구원의 근거가 되는(개방성)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 믿는 자도 나오지 믿지 않는 자도 나오는 것이 성경대로 되는 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이사야의 내용을 인용하였는데 바울이 복음을 전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말씀 그래도 인용합니다.
사도행전 28:23-28절입니다.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ㄱ)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사 6:9,10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만 믿는 사람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의 또 다른 면인데 심판하여 남은 거룩한 씨로 인하여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거룩한 씨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증거 되면 믿는 자도 나오고 믿지 않는 자도 나옵니다. 믿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하게 폐쇄되어 있는 것이고 믿는 자는 열려져 있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복음을 듣게 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은 살아계셔서 계시의 폐쇄성과 개방성을 완벽하게 실현하고 계십니다
(2013.2.23 읽으면서 느낀 점: 오목사님의 폐쇄성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인듯한데 왠 뜬금없는 개방성?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해야 은혜가 필요한데 꼭 딴지 거는것 같다-내 생각-나중에 틀릴지도 몰라!)
(2013.2.24 다시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목사님이 주장하시는 계시의 개방성은 폐쇄성과 함께 사용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폐쇄성에 의해 죽고 그 가운데서 새 생명이 창조되는 것이므로 폐쇄성을 주장하는 오목사님의
주장이 옳다.즉 모든 사람을 죄 아래 율법아래 가두었다는 말씀이다
함께 사용하게 되면 계시가 열려 죽지않고(폐쇄성의 적용없이) 살아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 장우 목사님께 드리는 글)
목사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제 글에 대한 이 장우 목사님의 글의 요지는 이 문장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오 목사님의 글은 십자가란 오직 구원저지용으로만 사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글의 문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읽을 수는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 저지용(폐쇄성)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은 구원근거가 되는(개방성)십자가입니다.”
쉽게 말해 그 글의 요지는 ‘십자가 안에는 구원을 저지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시키는 기능도 있는데 제 글이 그 점에 대해서는 누락시켰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장우 목사님이 주장하기를 ‘사적인 구원욕구를 차단해야 된다는 취지에서 계시의 폐쇄성(구원을 저지하는)을 강조하는 것은 십분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만 강조하게 되면 정작 성령으로 곧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계시를 받아서 구원받은 사람들(이것을 계시의 개방성이라고 하면서)은 그 구원의 근거를 찾을 길이 없게 되니 그거야 말로 계시를 개방해 주신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셈이’ 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성경을 자의적으로 읽었다.’고 보십니다.
(제 답변)
1. 사도바울이 성령 받고 나서 전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분 한 분 뿐이다.’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이 계시의 속성전체, 십자가의 내부사정 전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는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라.” 라고 설명합니다.
이 장우 목사님의 이해대로라면 위 구절은 이렇게 해석됩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는 계시의 폐쇄성이지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는 계시의 개방성이다. 계시는 폐쇄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적용시키고 있다.
2.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 사도바울이 이 소리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위에 언급한 구절 말고도 성경 모든 구절, 목사님의 언급한 몇몇 성경구절들, 이사야 6장, 고린도후서 4장, 디모데후서 2장, 살후 3장, 사도행전 28장이 전부 사도바울의 이 주장이 실려 있다고 봅니다. 즉 바로 이것이 사도의 모든 성경의 뜻이고 해석인 겁니다. 저는 바로 이 점을 들어서 성경의 폐쇄성을 언급했고 이 폐쇄성으로 인해서 성경전체가 구원을 저지하는 하나님의 의지로 충만하며 바로 충만한 하나님의 의지가 실린 십자가복음만이 참된 복음이라고 주장했던 겁니다.
왜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바로 그것이 십자가안의 감취어진 하나님의 속내임이 사도에게 개방되었고 그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구원되는 사람에게서 똑같은 하나님의 속내를 이 지상에서 펼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사도에게 개방된 십자가내부에 숨어 계신 하나님의 뜻이 뭘까요? 이 지상의 모든 구원시도를 극력 저지하고 무산시키는 십자가복음, 곧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하는 예수님의 행함만 자랑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3. 목사님이 주장하기를
『이 글에서 계시의 자기 폐쇄성과 개방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이 독점하고 계시기에 인간의 노력으로 계시를 열어보려고 하는 시도는 일절 허락되지가 않는다는 말에서 계시의 자기 폐쇄성이라는 말은 옳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방성을 인간이 계시에 접근하려는 자의적인 노력은 마치 화염검에 둘러싸여 인간에게 접근금지가 된 생명나무로 나아가려는 시도와 같기에 악마적인 시도라고 해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으로 인하여 성령이 부어지면 폐쇄성을 유지하되 성령이 임한 자에게는 계시가 열린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계시에 접근하려고 하는 개방성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계시를 받은 자는 사적구원을 챙기기 위하여 자기 근력을 키우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자가 됩니다. 이런 자들이 성경에서 계시를 받은 사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의 계시마저 계시의 자기 폐쇄성이라고 하면 성령께서 개방하여 주신 것도 부인할 수 있게 됩니다.』
목사님의 문제성은 성경에서 ‘성령 받은 자’ 혹은 ‘계시가 개방된 존재’를 따로 상정하는데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어떤 존재를 따로 상정해 놓고 시작하니 그 다음은 모든 성경구절을 그 상정된 존재를 변호하기 위하여 재구성하게 되는 순서만 남습니다. 이런 성향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개혁주의에서는 성령을 받게 되면 이런 성향에서 벗어나서 계시를 이해하게 된다고 하는데 목사님이 하는 주장 그대로입니다. 한마디로 목사님은 악마를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보고 계십니다.
목사님의 주장을 보면 성령 받은 자에게만 고스란히 개방되는 육적안목, 곧 마귀가 주는 사고체계가 성령에 의해서 통째로 고발당하는 죄의 자리에 위치해 있지 않다는 점이 치명적으로 성경해석의 오류를 범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4. 그렇게 되니 목사님은 제 글에서 아주 중요한 사항을 가볍게 처리하고 마는 오류를 범하셨습니다. 그 오류 속에서 목사님은 악마의 주장을 충실하게 대변해 주게 됩니다. 제가 주장하기를 ‘왜 계시가 폐쇄성을 유지해야 되느냐하면 계시가 자기 폐쇄성을 고수한 채로 이 지상에 전개될 때만 비로소 역사 뒤에 숨어 있는 묵시적 존재인 악마의 활동을 들추어내는 것이 가능하고 악마의 활동을 들추어내는데 여기서 악마의 활동이란 어떻게 해서든지 십자가의 폐쇄성을 개방성으로 돌려놓는 시도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계시의 개방, 또는 예수님의 성취하신 새 언약의 개방, 또는 주님 지신 십자가안의 내부사정의 성령을 통한 개방이란, 역사 뒤에 숨어 있는 마귀의 활동을 개방하는 식으로만 개방된다는 점을 말한 겁니다. 왜요? 십자가는 이 지상 역사와 묵시의 유일한 만남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고전 2:8-9). 곧 계시에 개방된다는 것은 그 묵시와 역사의 만남의 현장이 오롯이 개방된다는 뜻이지요. 어떤 식으로 개방될까요?
사도가 줄기차게 증언 하는 바는 ‘주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빼놓고는 다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한 몸 빼놓고는 한시도 한 몸도 빠짐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 싶은 본성, 곧 악마의 본성으로 가득 찬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내 몸을 비롯한 이 온 세상의 몸이 벌이는, 곧 악마가 이 온 세상의 몸을 가지고 벌이는 그 악마의 활동성을 들추어서 고발하는 성령의 활동성이 아울러서 개방될 때 비로소 계시에 개방되고 노출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 안에서 파악된 하나님과 악마의 활동성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악마는 인간에게 심어서 발휘시킨 악마의 활동성인 자기 몸 구원의지의 최종만개,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의 죽음으로 이 지상의 모든 구원저지에 성공. 그 내용이 언약의 성취된 십자가안의 내부사정입니다. 그 성취된 내용을 그대로 품고 예수님 홀로 부활 승천하사 주의 자리에 등극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었던 겁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세례란 이 십자가내부사정으로 초청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내부사정에 밝아지게 되면 끊임없이 죽어 마땅한 악마의 활동성을 들키우는 바가 되고 그 사람에게서 외부로 발설되는 바란 언제나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 십자가안의 내부사정에 환해지자 사도는 그 내부사정을 이렇게 증언했던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 1절부터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장우 목사님이 지난주일 설교해서 해석한 것처럼 단지 그 당시 유행하던 수사학 동원 안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이 구절은 사도가 전한 바 복음은 “이 지상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 못되게, 인간 구원을 바늘구멍이라도 틀어막는, 그래서 인간의 모든 구원시도를 극력 저지하는 십자가를 전한다.”는 말입니다. 왜요? “너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의 취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 전해서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한다.’는 십자가의 본래취지, 그리스도만 심판주가 되게 하시려는 계시의 취지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증언하는 이 십자가안의 내부사정에 개방된 자, 즉 참된 복음에 접한 자는 다른 복음, 거짓복음을 아울러 증언하게 되는데 이들에게 거짓복음이란 십자가 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인간구원저지의지를 어떻게든 무산시키는 악마의 활동을 의미하게 됩니다. 사도가 알게 된 십자가안의 내부사정에 어두운 자, 곧 십자가 안에는 왜 인간의 모든 구원시도를 극력 저지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로 충만하게 하셨는지, 그 취지에 대해서 개방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5. 목사님의 주장을 실어서 구성해 봤습니다.
늘 푸른 교인 : ‘십자가 안에는 구원을 저지하는 하나님의 의지로 충만합니다.’ 목사님, 어떤 목사가 이런 주장을 하는데 그러면 대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이 장우 : ‘구원을 저지하는 것으로 충만한 하나님인 것은 맞는데 그게 다가 아니고 특별히 어떤 분들에게는 구원을 저지하기를 그만두시고 구원을 해주시는 개방성도 아울러 작동하는 것이 계시이며 십자가입니다. 그 점은 성경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늘 푸른 교인 : ‘그렇다면 왜 저 사람은 저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까? 저런 주장을 한다면 성령의 은혜 혹은 성령의 계시를 열어 보이는 주님의 작용까지도 무시하고 왜곡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장우 : ‘그야 성경을 자의적으로 첨삭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보고 싶은 대로 성경을 보고 있는 겁니다.’
5. 제가 다시 구성해 보겠습니다.
교 인 : 목사님, 왜 계시(십자가)안에는 모든 인간구원시도를 저지하는 하나님의 의지로 충만합니까?
목 사 : 이 지상 누구도 하늘나라 못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교 인 : 왜 하늘나라 가면 안 됩니까?
목 사 : 다 귀신들렸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면 안 되는 인간들뿐입니다. 하늘나라는 오직 예수님 한분에게만 해당되는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교 인 : 이 세상이 다 귀신들렸다는 증거는 무엇이며 귀신들렸기에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 사 : 이 지상에 오신 하나님을 살해한 십자가사건이 그 증거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 악마의 정체를 날마다 들키면서 복음을 증거 한 사도바울이 증언 한 바 악마의 정체성이란 한시도 자기구원욕망을 포기치 못하기에 뭘 해도 자기 몸을 중심으로 해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몸의 모든 활동성, 곧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교회 다니고 절에 다니고 목사하고 장로하고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다 마귀의 활동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마귀의 활동의 배후에는,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에는 늘 이런 사고방식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가 피 흘린 십자가가 꼴 보기 싫다.’ 십자가는 이 지상의 모든 인간의 구원 작업을 무산시키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졸지에 십자가 앞에만 서면 나는 무조건 지옥 갈 인간 되는 것이 싫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교 인 : 그렇다면 성경에 분명히 성령 받아 구원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들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목 사 : 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한 새 사람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명명한 특이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특이성은 성경에서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요.
교 인 : 이들은 어떤 면에서 새롭습니까? 하늘나라 못갈 이 세상 사람과 어떤 면에서 차이나는 겁니까?
목 사 : 하나님의 구원훼방작업에 의해서 나의 구원의지가 날마다 좌절되는 경험을 통해서 오직 외부로 악마의 활동성을 들추고 고발하는 일을 반드시 동반해서(중요함, 이 장우 목사님의 주장에서 누락된 부분) 하나님의 구원저지의지가 가득한 십자가만 외부에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이들은 본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십자가안의 내부사정에 끊임없이 개방되면서 하나님의 속내를 알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강제적인 사랑입니다.
즉 이들의 관심사는 성령의 책망을 거쳐서 늘 주님의 십자가에 가 있게 됩니다. 즉 이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들이닥치는 모든 계시가 다 성령의 책망을 거쳐서 내 몸에 작용하는 마귀의 활동성을 고발당하는 과정을 거쳐 주님의 십자가만 외부에 자랑하기에 이르는데 이 모든 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우발적인 주 되심의 활동성입니다.
성경에서 보이는 성도란,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의 활동성의 결과물로서만 차후로 등장하고 확인되는 묵시적 존재들입니다. 즉 이 묵시적 존재들이(십자가 안에 가두어진 채 폐쇄되어 어느 경우에도 개방되는 경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역사가운데 개방되는 경우란 서로 서로 오직 구원저지의 의지로 충만한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나타날 경우에만 우발적으로 차후적으로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입니다. 이들 자체가 아예 십자가의 폐쇄성 안에 폐쇄된 채로 영원토록 살아질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주장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데살로니가 후서 3:2절입니다.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이 두 곳의 말씀만 보아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하시면서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두 구절의 말씀만으로도 개방성과 폐쇄성에 대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주장을 위하여 성경을 부분적으로 첨삭하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 목사님의 글은 십자가란 오직 구원저지용으로만 사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글의 문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읽을 수는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 저지용(폐쇄성)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은 구원의 근거가 되는(개방성)십자가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목사님 같은 주장, ‘계시에는 폐쇄성과 개방성이 아울러서 작동한다.’는 소리가 곧 계시의 내부사정, 십자가의 내부사정에 어둡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목사님의 주장은 계시의 외부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경우에나 나올 수 있는 주장이라는 말입니다.
결론
1. 목사님, 이게 거짓복음입니까?(이 근호 목사님의 글)
『십자가상에서 가장 놀랄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응답성'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 철저한 버림받음! 창조의 목적인 예수님의 '주되심'이 하늘 자리에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지상의 자리, 악마가 통치하는 이 지옥의 공간에서 성사되리라는 것은 누가 알겠습니까!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창조 세계는 예수님을 주로 등극시키는 충분한 양분이 마련되었습니다. 그 세상 안에서 인간이 배제된 채 진행되는 '보이지 않는 전쟁'은 벌어졌고 '주의 이름'이 친히 용사가 되어 자신의 전리품을 양산했고 그 전리품으로 둘러싸인 채 놀랍게 그 가운데서 비로소 '주님의 자기 처소'가 마련됩니다.(출 15:17-18) 이로 인하여 "왜 인간은 범죄해야 했고 왜 하나님에게 자기 백성이라고 불리워지는 피조물이 꼭 필요했는가"가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두 세상이 온통 "예수님의 주되심"으로 충만케 하기 위함입니다. (엡 1:10.23)』
2. 결국 목사님의 글은 그동안 숱하게 반복적으로 되어온 십자가마을에 대한 공격이 품고 있는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하게 한 것까지 죄로 몰아붙이는 행태는 옳지 않다. 그런 행태야 말로 복음을 지식으로, 신학을 답습해서 아는 경우에 해당된다.’는 그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도의 구원,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마저 죄로 몰아붙이는 것은 성령을 받지 못한 채 신학이나 지식으로 알고 있는 거짓 복음이다.’
그러니까 목사님의 주장을 포함한 그 주장들이 십자가 앞에서 이런 주장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무조건 심판아래 가두는 조치를 취한 것에 대해서 동의 못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주되심만 증언하고 높이는 십자가복음에 대해서 정말 못 마땅합니다.’
3. 목사님 주장의 요지를 다시 들려드립니다.
“오 목사님의 글은 십자가란 오직 구원저지용으로만 사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글의 문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읽을 수는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 저지용(폐쇄성)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은 구원근거가 되는(개방성)십자가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 주장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성경에서 보이는 성도란,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의 활동성의 결과물로서만 차후로 등장하고 확인되는 묵시적 존재들입니다. 즉 이 묵시적 존재들이(십자가 안에 가두어진 채 폐쇄되어 어느 경우에도 개방되는 경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역사가운데 개방되는 경우란 서로 서로 오직 구원저지의 의지로 충만한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나타날 경우에만 우발적으로 차후적으로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입니다. 이들 자체가 아예 십자가의 폐쇄성 안에 폐쇄된 채로 십자가공로만으로 영원토록 살아질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계시의 폐쇄성에 개방성을 끼워 넣거나 혹은 개방성으로 돌려놓는 시도가 악마의 시도 맞습니다. 목사님, 누가 이 마귀의 궤계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십자가복음외에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라고 한 것 아니었는지요? 우리는 그 동안 그런 의미를 품고 ‘십자가 복음만’이라고 증언했던 것이 아니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