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익

오용익 목사님의 전도편지

아빠와 함께 2013. 1. 29. 13:30

오용익목사님의 전도편지 
노태진   2006-06-03 00:38:40, 조회 : 366, 추천 : 4

몇주전에 유순자 집사님 내외를 만나고 왔습니다.

제 아내가 해남에서 교사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해남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무안에 있는 교회와 해남의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산지가 일년이 넘었습니다.

아내와 어렵사리 통화가 되었다는데, 주고받은 내용인즉 다니던 교회를 옮겼다는 거지요.
만나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송제근 교수가 가르치는 학교에서 배우고 온 박목사님이 그 가르침대로 교회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몇몇 분들이 목사의 목회방침(물론 목사는 자기뜻이 아니라 주의 뜻이라고 하겠지요)에 동의하지 않을거면 다른 교회에 가라는 식으로 되어서 교회를 나올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상 그렇게 되었다는 말로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바는 이렇습니다.

교회가 할일이란 교회라는 부동산과 조직과 인간관계와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자기 할일인줄 아는 사이비 목사를 보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일을 교회일로 안다면 차라리 교회라는 이름을 지우고 00회사라고 하든지, 00당이라고 하든지, 00협회라 하든지, 00노조라고 해야 합니다. 조폭들도 그정도는 알고 행합니다.

교회의 일이란 진리를 지키고 증거하는 일입니다. 진리를 위하는 교회라면 무엇도 교회 자신마저 진리를 위해서 부인되어야 마땅하다는 심정과 태도를 가져야 진리를 위한 교회라고 볼수 있습니다.

예외없이 진리를 설교하는 목사도 당연히 포함시켜야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수가 한국교회는 지금처럼 신앙생활 해서는 도무지 안되기에 내가 성경에서 배운대로 다시 가르쳐서 제대로 된 교회를 다시 해봐야 겠다든지

혹은 어떤 목사가 어느날 제가 어디가서 기가막히게 성경을 가르치는 분을 만나서 배워보니 우리 교회는 지금처럼 신앙생활 해서는 안되고 제가 배운대로 신앙생활을 다 뜯어 고쳐야먄 제대로 된 교회가 될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은

제가 보기에는 진리에서 나온 소리라고 보아지지 않습니다.

그게 진리라면 예수님과 예수님에게 배워서 진리를 알았던 사도들도 그런식으로 가르쳤어야 옳습니다.

너희들은 지금 교회다운 교회가 아니다. 내가 온것은 다시 가르쳐서 제대로 된 교회를 세우게 해주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한복음 6장)

사도들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 하기로 작정하였노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돗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하려 함이라(고전 1:17)

이 가르침의 취지대로 성경의 모든 명령들을 대한다면 그 명령들을 이용해서 교회를 제대로 해 보겠다든지 혹은 그런 식으로 교회를 제대로 해서 목사의 위신을 세워보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도리어 그런 기만과 위선이 폭로되면서 십자가의 공로를 새삼 또 알게 되면서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의 은혜가 고맙다는 정신만이 충만해서 그 복음만 외칠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들의 복음 증거였습니다.

즉 “이렇게 해야, 그다음에 이렇게 된다”는 인간의 행위의 가능성을 다 부인하고 오직 구원이 예수님의 소관임을 분명히 하자는 취지로 십자가복음을 증거해서 예수님만 높일겁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십자가만 전할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인간의 지혜와 행위로 눈치채지 못할것을 내놓은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이고

인간이 자기지혜를 맘껏 동원해도 절대로 자기것으로 소유하지 못할것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뿐이기에

십자가는 사람을 구원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도리어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받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그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으로 택한 백성만 구원해서 십자가의 공로만 높이겠다는 것이 십자가에 담긴 뜻이다. 따라서 그 십자가를 헛되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만 증거할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만 들어가야 할 자리에 교회부흥, 사회개혁, 교회개혁, 제자만들기, 선교하기, 전도하기, 이웃사랑, 나라사랑, 선한문화이루기등등을 집어 넣는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볼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님이 목사님께 뭘 가르치던가요?

예수의 영께서 목사님에게 뭘 말씀하던가요?(요한일서 2:20) 제대로 된 교회를 해보라고 명령하시던가요? 교인들을 그냥 놔두지 말고 체계적으로 훈련받게 해서 제대로 된 신자를 만들라고 명령하시던가요? 그것이 목사의 사명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그일 제대로 못하면 천국에서 탈락시킨다고 겁주던가요?

그일 제대로 못해내면 목사답지 못한 목사라고 겁주던가요?

제 안에 있는 영은 저보고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는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제 안에 있는 영은 그런 짓을 하고 싶거든, 그런짓이 마귀에 사로잡힌 짓인줄 알라고 하십니다. 더 나아가 너도 그런짓을 할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어떤 식으로든 교회를 장악하고 소유하는 식으로 자기것으로 만들어서

건방지게 구원자 행세하는 십자가의 원수짓을 마음껏 발휘할수 밖에 없는 몸을 가졌기에 그 몸을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날마다 죽이시면서 돌보시는 중이라고 알려주십니다.

그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 고

끊임없이 연이은 파도가 덮치고 또 덮쳐서 더 큰 파도를 이루어 덮치듯이 그렇게 덮쳐오는 사랑으로 말입니다.

이 세상 어떤 일도 예수님이 일으키지 않는 사건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참새 한마리도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모든 사건들은 신자들로 하여금 더욱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만 의지해서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조치로 다가오게 됩니다.

교회란 주님의 십자가공로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기에 그것을 믿는 교회라면 당연 누가 되었든지 설사 목사라고 해도 십자가의 공로외에 다른 것을 보태어서 교회답게 하자는 시도는

아무리 명분이 그럴싸 하고 보인다고 해도 마귀의 사주를 받은 짓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그 와중에 교회가 다시 한번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과정에서 십자가의 영을 받지 못한자들이라면 반드시 십자가의 공로만 증거하는 사람을 핍박하고 외면하는 사태가 일어나겠지요.

목사님!

만일 종에 불과한 목사주제에, 섬김의 대상인 교인들이 그들의 주인인 예수님과 의논해서 결정해야 할 사항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참견하는 것은 목사 그 자신이 교인들에 의해서 쫒겨날 짓을 했다고 봅니다.

교인들 제자답게 살게 해서 타락안하고 무사히 천국가게 해주는 일이 목사의 할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목사의 일이라면, 그렇게 만들어 주려고 애를 쓰는 목사 인정해달라고 우기는 것 밖에 뭐가 더 나오겠습니까?

자리보전과 월급챙기는 것을 정당화하는 일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거룩한 일 하는양 위장하는 것밖에 더 무엇이 있습니까?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자기 하나 책임못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 신앙생활 책임지겠다는 식으로 나선다는 것 자체가 복음을 모르기에 나오게 되어 있는 발상입니다. 본인이 죄인인줄 알면 그런발상 자체가 십자가지신 예수님께 혼날 일인줄 알겁니다.

목사가 해야 할일이란 본인이 받은 은혜의 내용인 복음을 증거하는 일로 교인들을 섬기고 돕는 일입니다. 이때 그 목사가 받은 은혜의 내용이 복음이라면 사도바울이 복음전한 취지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십자가의 피의 공로만 증거될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성령을 받지 못한채 십자가에서 겉돌기만 할뿐 실제로 십자가의 사랑에 참여된 적이 없는 인간같으면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를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고 교회를 말해도 자기가 부인되지 않은채 십자가와 예수와 하나님과 그밖에 성경의 내용들이 실려 나오게 되고

이때는 반드시 성경의 내용들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식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사도바울의 열심처럼, 믿음만으로는 부족해서 행위가 보태어질때만 온전한 믿음이라는 사고방식과 행태들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목사님이 올리신 사이트의 모든 설교가 다 이런 취지로 충만해 있습니다. 목사님이 배웠다는 송제근 교수의 글과 설교가 다 마찬가지이고요.

목사님! 
우리가 헤어진지 5년이 되었군요. 적지 않은 세월입니다. 그렇지만 이 짧고 날아갈듯이 지나가는 이 안개같은 지상생활에서 더욱 더욱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나누어 놓는 것이 세월이 아니라 복음인것을.

목사님! 더 늙고 병들기 전에, 아무런 낙이 없다고 할 해가 찾아들기 전에 십자가를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사자는 온동네 어김없이 찾아들고 오직 어린양의 피의 약속하나 믿고 숨죽이며 지옥을 막 떠나려고 서둘러서 이삿짐을 싸는 심정으로, 이전것을 다 몽땅 버리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복음안에서 만나뵐수 있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추신 : 송제근 교수가 쓴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에 대한 저의 평입니다.

< 송제근 교수의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을 읽고>

이땅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이면 누구든지 꿈을 꾼다. 어른 아이 할것 없이 모두 다 한결같이 꿈을 꾼다. 당장 죽음이 찾아든다 할지라도 오늘만큼은 그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한 달음박질을 위한 꿈이자 미래를 향한 포부이다. 그리고 그 미래의 미래가 성공적으로 쌓이면 자연 하늘에 닿을 것이라는 꿈의 탑을 한 장 한 장 올린다. 자기 힘으로 하늘까지 닿아보겠다는 몸짓이다

성경은 그 몸짓이 어째서 허무한가를 하나님의 시나리오(약속)를 따라 밝혀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왜 인간은 심판받아 마땅한지를, 이 지상에 뿌려진 하나님의 피를 통해서 지적받는 현장이다. 물론 그 피안에만 담겨진 은총속에서.

그런 현장에서조차 인간이 꿈을 꾸고 가꾸어 간다는 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신학을 전개한다. 그것을 가능케 한 분이 하나님이라고 가정하고서.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의 책 “교회를 넘어서” 31쪽,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상을 평정하고 없애기 위한 작업이다. 인간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없애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를 함축해 놓은 것이 바로 새언약이다. 그 새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왜 새언약은 예수님의 피로만 가득 채워져 있을까? 그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세워놓은 표준적인 인간상을 전면 거부하기 위해서이다. ---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과 결부시키게 되면 모든 행위는 영적 존재로서의 행위이기에 하나님의 뜻에 대해 ‘가능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가능성에 매어 달림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하실 몫은 그저 이 가능성을 위한 ‘기초닦기’외에는 없어져 버린다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전제조건으로만 담당하고 진리를 성취할 가능성은 인간의 손으로 넘어 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조기 퇴역 현상이다)

1. 저자의 신학은 하나님나라에서 출발한 신학이다.

(그의 책 14쪽 “창세기의 근본목적은 이 땅위에 하나님나라(씨/땅/주권)가 적극적으로 전개되는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나타내는 것”, 15쪽 ”오경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형성”, 20쪽 “오경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라는 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에 초점--- 하나님나라를 역사상에서 이루는 구체적인 제도인 ‘언약’”)

성경에는 있지도 않은 정치적 의미의 이상국가의 개념에 불과한 “하나님나라”라는 주제를 가지고, 성경의 바른 해석을 도모하고, 성경의 통일성을 입증하며, 나태에 빠진 기독교를 개혁한다는 일석 삼조의 효과를 기대한 기획이다. 그는 구속사신학의 문제점을 들어 “책 20쪽, 부정적인 것을 극복한다는 의미가 강하며 약간은 추상적이다”고 한다. 창조 - 타락 - 구속이라는 구속사 신학의 시나리오로는 성경의 풍성한 면을 다 찾아내는일에 부족한 면을 보이기에 자신이 연구하다 보니 발견하게 된 것으로(언약신학)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언약은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보조장치에 불과하다.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나라이지 언약 그 자체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워서 관계를 맺은 인간들(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오경(성경)의 내용이라고 본다.

교회가 이지경으로 교회답지 못하게 된것은 개인의 구원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다 보니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라는 공동체성이 약화되고 자연 자기 하나밖에 모르는 나태하고 이기적인 신앙으로 흘러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니 개인중심의, 혹은 구원중심의 구속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저자는 이점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반쪽짜리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통치에 따른 은혜로운 삶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나라의 그 현실을 이 지상에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뜻에 부응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2. 십자가가 빠진채 인간의 종교성에서 신앙이나 신학이 도출되게 되면

신과 인간을 마주세워 놓은채

“하나님의 은혜(구속, 혹은 통치)에 대한 인간의 반응(믿음, 순종, 감사등등)”

형식외에 다른 형식을 취할수 없게 되는데 그의 책도 예외 아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조차 인간의 반응을 고려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식의 무리한 해석이 나오는데 그것이 십자가를 훼방한다는 점을 저자는 놓치고 있다.

예를 들어 선악과에 대해서 (책 66쪽,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인격의 자유와 완전성에 대한 증거이다. 선악과는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반할수 있을 정도의 높은 자유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어떤 면에서 인간창조의 영광스러운 면의 표현이며 인간이 가지는 자유의 놀라운 상징으로 볼수 있다”고 한다)

성경과 다른 이야기다. 인간이 선악과와 생명나무 사이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놓여진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피조세계란 오직 말씀 그대로 성취됨을 내어 보이는 증거물에 불과할뿐,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에 관여하고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새언약)안에서나 비로서 파악되어지는 언약적 현실이다.

이점에 대해서 이근호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책 교회를 넘어서 68쪽-70쪽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도 창조 조건이었다. 이런한 일련의 창조사역으로 이어진 것이 바로 ‘언약 안에서의 동질성’, 혹은 ‘언약 안에서의 동행’이다. 처음 창조때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미 없는 자로서 또는 죽은 자로서 언약 실시 밖에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창조사역성을 지닌 언약을 복음의 중심으로 잡지 아니하고, ‘하나님 - 인간’이라는 고정된 틀을 미리 다져놓고 거기에다 ‘언약발전’이라는 구속사 흐름을 집어 넣고 또 히브리적 사고방식으로 접근해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허공에 뜬 ‘초인간주의’인 사유양식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제시한 참 복음은 오직 언약 성취만이 초점이 있는 것이지 결코 언약을 통한 인간 구원이나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형상 회복이나, 현 인간에게 밀착되어 관심사가 되고 있는 그 무엇, 혹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삶, 현 인간에게 추가적으로 제공되는 멋진 생존 환경에 목표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상들은 유사 종교이며 유신론 철학이기에 기존 철학의 가벼운 조작에 불과하다. 신의 존재와 성품을 재료로 하여 인간들은 얼마든지 화려하고 감동적인 복음을 만들어 낼 정도로 상상력들이 풍부하고 안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신학 테마적 아이디어 들은 인간의 염원이 내포된 가능성으로만 머문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언약은 다른 진리를 나타낸다. 즉 언약달성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하나님만의 작업이라는 사실이다”)

즉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의 울타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인간의 피조성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빌려서 다시 표현해 보면 피조된 인간 주제에 자기 주제도 파악 못하고 인격의 자유와 완전성을 발휘하는 식으로 생명을 얻어 보겠다는 발상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기에 나오는 사고방식이며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채 신학하고, 신앙하는 모든 인간을 결단코 지옥으로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아울러 하나님나라에 갈 생명도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어 내실 약속이행에 놓여진 사항일뿐이라는 것이다.

이점에 어둡다 보니 그는 인간이 무엇을 할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육의 가능성에 집착하고 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할 대상이 있고, 목적도 있고, 또 방법도 주어져 있다는 식으로 육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189쪽 기독교가 자체 개혁을 통해서 현대적 도전을 극복해야 한다는것은 이전부터 믿음의 조상들이 가르쳐준 비법이었다. ---성경의 기원이 되는 오경속에서도 개혁의 역사를 찾아볼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기 32장이다. 우리는 이 본문을 주석적, 신학적으로연구함으로 기독교가 현대적인 도전을 극복할수 있는 기초를 쌓을수 있기를---”)

(367쪽, “안식일의 날짜 개념은 명확하게 초월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사단이 날마다 새롭게 준동하는 역사의 현실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369쪽, “그러므로 그의 나라와 그의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먹고 마시는 문제는 마치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초월하여야 하고 100퍼센트 관심을 그의 나라와 의에 집중해야 하는”)

(371쪽, “아무튼 우리의 주일은 이 완악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세상을 향해서 2000년 교회역사가 이룬 금자탑과 같은 유산이고 이것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육의 가능성과 구원에 집착하다 보니 하나님은 어떤 인간을 적극적으로 지옥 보내는 식으로 일하실 리가 없다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변호에 나서지만 바로 그런 해석이 애굽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임을 알지 못한다(히브리서 11:29).

(142쪽 “애굽도 역시 하나님나라 형성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해서 해석해야 할것은 이 애굽의 도구성은 이 도구의 의지를 하나님이 조장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의 마음속에 있는 타락하고 완악한 상태를 하나님이 은혜로 억제하지 않으시고 버려 두심으로 이 도구성이 작용한 것이다)

성경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이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로마서 9:18) 그래야 하나님만 영광받으실 것이 아닌가? 구원을 향한 인간의 몸부림을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신학을 전개하다 보니, 그점이 원천봉쇄되는 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롬 9장 16절은 분명하게 인간의 모든 구원시도는 헛것임을 밝힌다)에 대해서 인정할수 없다는 식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틀렸나? 저자가 틀렸나? 둘중 하나는 틀렸다. 만일 사도바울이 저자의 의견대로 한다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되어 있는 로마서 9장 16절은 이렇게 기술되어야 맞다.

“ 마음속에 있는 타락하고 완악한 상태를 하나님이 은혜로 억제해서 되어진 상태에서의 구원을 원함과 달음박질이 있는데 그런 원함과 달음박질은 제외시켜 놓고, 그 나머지 원하는 자로 말미암암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귀절도 이렇게 고쳐야 한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만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이 은혜로 억제해서 되어진 인간의 행위는 추가되는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니라”고

이것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11:6에서 말씀하고 있는 은혜의 원칙에 위배된다.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으로 믿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삭처럼 출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홀로 성취해 내시는 약속의 능력으로만(롬 4:21). 

마귀조차 하나님께서 사용해서 영광을 받으신다(살후 2:11,12). 십자가의 가치성만 높아지도록(살후 2:13,14).

3. 저자에 따르면 십자가(새언약)는 완성이 아니라 인간이 완성해야할 것을 완성할수 있도록 밀어주는 보조적인 위치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성경은 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내용이라고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는데(요 5:39) 예수님을 증거하는데는 관심이 없고 인간의 행위를 뒷받침 할수 있는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구원중심, 인간중심(하나님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가정한 교회공동체중심)의 신학을 전개하다보니, 하나님의 언약조차 인간에게 미진한 과제물을 내주는 식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인간들이 타락전에 풀지 못한 숙제를 언약으로 제시해서 다시 풀어 보라고 내주는 숙제같은 것이고 재기할수 있는 기회쯤으로 여긴다. 그 기회를 선용하고 마음껏 발휘하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행위를 증거하는 말씀을 가지고 인간의 행위를 끌어내서 어떤 목적을 이루겠다는 발상 자체가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짓이다. 사도바울이 배설물로 여긴것 속에는 세상에 내노라 하는 모든 신학들이 다 들어있다. 배설물 같은 신학의 한계란 어떤 작업을 해도 결국에는 인간중심으로 다시 되먹임을 한다는 것이다. 아담안에 있는 인간의 관심사란 결국 인간이기에.

(그의책 19쪽 “성경해석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우리가 가진 성경 각권이 어떤 통일된 문체와 일관성 있는 신학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 연구하는 것”).  

(372쪽, 세계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주일을 휴일로 정한 것은 하나님이 기독교를 통해서 세상에 내려주신 역사 가운데 나타난 일반은총이라고 할수 있다).

성경은 인간이 해석해 낼 수 있는 책이 아니다(고전 2:12).

성경은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은 예수님의 십자가안에서 이미 죽은자들에게나 알아먹을수 있도록 꽁꽁 감추어져 있다. 그점에 대해서 저자는 어둡다.

저자는 죄를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 하나님나라 사람답지 못하다는 식의 유대교인들의 죄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채, 하나님나라 사람이라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바로 그런 죄관을 가진 유대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고 십자가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가지고 그런 사고방식을 죄악으로 규정하면서 공박하면서 다가서는 십자가임을 저자는 모르고 있다.

저자는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빙자해서 자기의 꿈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기의 원함과 자기의 달음박질로 구원되어야 겠다고 하나님께 열심히 대들고 있는 셈이다.

회개해야 한다. 지금은 구원의 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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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교회 모독하며 안 다니기'와 '주님의 교회'의 차이점 
이근호   2006-06-03 08:59:01, 조회 : 308, 추천 : 5

교회를 인간 존재자들의 모임으로 간주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원칙처럼, 혹은 칼빈주의 교회관처럼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성도도, 하나님 백성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런 실험은 이미 유대교를 통해서 오랜 세월동안 실시한 바 있는데 결국 이 실험은 끝은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모독하는 처사로 이어졌다. 쉽게 말해서 "예수 너만 잘난 인간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들의 주장은 이러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절대로 무가치하게 버려두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님에게만 모든 가치가 다 쏠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 지음받은 백성에게도 고유의 가치를 두었다"이다.

따라서

"새로 지음받은 자들이 모여서 유지해나가는 '교회'와  '그 교회 만들기 솜씨'를 결코 무시할 리가 없다"라는 정신이 바로 그들 교회에서만 허락되는  기본 교회관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이런 교회관을 반대하고 나선다는데 있다.

즉 예수님에 대한 '무릎 꿇기'가 전혀 안되어 있는 마음가짐에서

소위 '잘난채 하는 자들에 대한 비위 틀어짐'이 기본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

교회 자체에 대한 무용론을 주장하고 나선다는 점이다.

'교회 모독하기'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훼방하기'  '교회 무너뜨리기' '교회에 대해  야유하기'가 그런 태도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노골적인 악마적 훼방과 예수님의 교회상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십자가로 인한 용서받음'을 충만하게 드러내는가 아니면 드러내지 못한가에 달려 있다.

'거듭난 인간들에 의한 교회 세우기'와 '교회 무용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공통점은

모두다 '예수님의 용서함' 앞에서 전적 죄인되기를 거부한다는데 있다.

쉽게 말해서 '죄'가 뭔지 아직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아의 죄인됨'은 인정해도 '죄인'으로서 '자아상'은 거부하겠다는 태도를 나타낸다.

즉 본인이 하는 일을 본인이 살펴서 죄인가 아닌가를 판정하고 싶어하지, 십자가 앞에서 당연히 죄가 되는 이유에 대해서 모르겠다는 것이다. 

죄와 십자가 관계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아는 여전히 가치있는 존재로 계속 살아 버티고 있다.

참된 '주님의 교회'는 십자가 사건을  증거해서 

십자가 앞에서  그 어떤 자도 무가치하며 단지 그들에게 제공된 예수님의 용서하심만 의미있고 가치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참된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1)이미 자신에게 분명 교회가 있으며(교회 없음이 아니라 )

(2)그 교회의 목자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된 자로 살아있기에 더이상 자신의 존재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3)교회를 통해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용서하심을 증거케 하기 위해 목숨을 포기하는 쪽으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란, 곧 자신의 자아상에 붙어있는 가치가 자신이 결국 죽게 되는 궁극적 상황 안으로 당겨져서 사정없이 삭제당하는 사건을 수시로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도가 이런 사건을 만나게 하는 교회(그리스도 몸)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같은 그리스도 몸이 되는 지체를 거부하는 것도 말도 안된다.

만약에 자신의 자존심을 공격해주는 견제해주는 그런 주님이 보내신 지체를 거부하게 되면 남는 것은 '절대자아'의 신격화 뿐이다.

참된 주님의 교회 안에서는 성도가 품고 있는 모든 자존심과 체면이 죄라는 이름으로 토해지도록 주님께서 통치하신다.

그래서

왜 우리가 '용서받아야만 되었는가'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 부각되는 식으로 전개된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 성도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추악한 이름과 대비된 상태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성경에서 무엇 때문에 '모이기에 힘쓰라'고 하셨겠는가!

그런데

자신의 가치가 묵사발되는 것이 겁이 나서 도리어 십자가의 義만 증거하는 자리에 참석하기를 싫어하고 그런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나도 안다'라고 되풀이하면서 강력한 거부의사를 드러내는 것은 결국 복음이 없고 안들리는 곳으로 혼자 신격화되어 숨어들어가겠다는 자신의 악마의 심보를 드러내는 행위요 열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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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도 십자가 마을 여름 수련회의 주제와 그 취지 
이근호   2006-06-03 16:06:38, 조회 : 190, 추천 : 2

이번에는 종말론입니다.

[‘끝’을 기억하라! ]입니다.

보통 ‘끝’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라’ ‘예상하라’ ‘고대하라’ ‘대망하라’라는 식으로 표현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다 미래에 대해 환상을 끊임없이 유발하고 있기에 참된 성도의 끝과 구별되지 아니합니다.

성도는 끝을 나중에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끝을 받아서 그 ‘끝’의 처할 상황으로 우리 주님께서 인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끝’은 받은 자가 과연 누구냐를 서로 확인하는 차원에서 [‘끝’을 기억하라]라는 식으로 주제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강의에서 다음 두 가지 내용이 담기게 됩니다.

1. 왜 우리 인간은 항상 현재에 집착하고 ‘끝’을 자꾸만 잊고 미래의 일로 밀쳐두려고 하는가? 도대체 인간의 마음 구조가 어떻게 되었기에 현재 속에서 ‘끝'을 비현실화시키고자 애를 쓰는가? 

2.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마음을 아시고 어떤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끝’을 알려주는 사건들을 터뜨리시는가? 여기에 기본이 되는 성경 말씀과 언약은 어떤 형식을 띠게 나타나서 ‘끝’을 현실화시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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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교인들의 의식- 어느 교회의 목회자 초빙 광고- 
이근호   2006-06-12 14:45:19, 조회 : 126, 추천 : 0

한무리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을 초청합니다."

1. 한무리교회는 이런 교회입니다.

작은, 아주 작은 교회입니다.
흔히 이야기하듯 교회의 크기를 교인 수로 나타낸다면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고정성인이 15명이며 10여명의 어린아이들과 약간의 학생들이 전부입니다.
교회의 건물도 따로 없이 교인이 운영하는 학원의 지하강당을 이용하여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강당옆 사무실을 전용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으나
주일 이외에는 떠들며 사용하기는 힘듭니다.

개척한지 이제 8년차를 맞이한 여전히 개척교회 수준의 교회입니다.
전임 임세일 목사님께서 영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시다 귀국하여 98년 10월에
상계동에 개척한 교회로 2004년에 현재의 방학동으로 옮겼습니다. 한때는 50여명
가까운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 적도 있으나 여러번의 위기를 맞이하며 현재의
규모로 작아졌습니다. 전임 임목사님께서는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8년간의 목회 경험상 본인의 성향이 사람들을 만나
고 설득하고 전도하며 상담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홀로 공부하거나 성경을 분석
하고,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것에 더 적성이 있음을 발견하고 오랫동안의
번민끝에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본인이 개척하신 교회의 담임목사 직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교회입니다.
적은 교인수가 의미하듯이 몇 가정을 통하여 공급되는 교회의 헌금 규모는 월250
만원 수준이며 교회의 지출역시 빠듯합니다. 특히 교회의 기본 경비(전기, 웹관리,
통신, 교회학교비용, 식비, 선교비 등)에 지불되는 것을 제외하면 목회비로 책정될
금액이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재 수준에서 책정가능한 목회비는 월 120-150만원
이 될 것으로 추정합니다. 기타 교회의 저축 규모는 약 2000만원 정도가 있어 향후
작은 규모나마 전세를 얻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회로서 필요한 집기와 비품들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습니다.
회의탁자와 의자는 약 50명 정도까지 수용가능하며, 방송 및 음향설비, 피아노,
전자피아노, 에어컨, 주방기구(식기일체), 사무용책상, 책장, 책과 기본적인 비품,
갓난아이들을 위한 간이침대, 컴퓨터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별다른
추가적인 집기와 비품은 당장 필요하지 않습니다.

2명의 선교사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파송된 1명의 여선교사를 위하여 월10만원의 비용과 기도로
후원하고 있으며, 선교단체에서 교육을 담당하시는 목사님을 위하여 월10만원과
기도로 후원하고 있습니다. 재정규모에도 벅차고, 교인 수에 비하여도 얼토당토
않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후원코자 합니다.

교회의 발전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현재 모이고 있는 교인들의 신앙심이 뛰어난 것도 아니며, 헌신된 삶을 살고 있는
그런 사람들도 아닙니다. 다만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서로를 보며 기뻐하고 주일
예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을 가진 젊은 교인들이 주축으로
아이들의 미래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2. 이러한 목회자를 초빙합니다.

작은 교회를 감수하며 큰 교회에 대한 꿈을 가진 분을 기다립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현재의 제약요인을 극복하고 발전에 대한 꿈과 계획을 갖고
실행하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는 분이기를 바랍니다.

책상에 앉아 있기보다는 발로 뛰며 돌아다니는 분이기를 바랍니다.
고요한 중에 땀이 나도록 기도하는 것보다는 걸어 다니며 기도하며 기도의 내용을
직접 실천하기를 즐겨하는 분이었으면 합니다.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한무리교회의 장점을 전하며 함께 모여 기도하며 찬양하며 말씀을
나누는 것을 전하는 것을 목회자의 천직으로 알고 이웃에게 관심과 사랑을 전하는
분이었으면 합니다.

사람만나기를 즐겨하는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사람들을 만나고, 담소하기를 기뻐하며, 전도의 기쁨과 그
열매를 얻음을 최상의 기쁨으로 여기는 분이었으면 합니다. 최소한 그런 의욕과
실천의지가 강한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지역교회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많은 분이기를 바랍니다.
현재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 상당수가 현재의 교회 위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지역기반이 매우 취약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목회자께서는 지역교회에 대한
비젼과 열정을 갖고 가까운 이웃에 대한 전도와 훈련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일주일 모든 시간을 교회를 위하여 사용해주시길 바랍니다.
최소한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는 목화자 개인의 발전을 위한 투자보다는
교회의 발전과 성장을 위하여 헌신하셨으면 합니다. 일주일 모두를 전도와 심방,
말씀준비로만 사용하셨으면 합니다. 특히 초창기에는 장소상의 제약으로 인하여
수요저녁예배가 용이하지 않으므로 참조하시고 매일 새벽기도회나 주일 저녁
예배를 신설하실 수도 있을 것이므로 이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끊이질 않았으면 합니다.
교인들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일상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셔서 자주 전화나 심방
등의 만남을 주도하시고 세세한 면에까지 자상하게 점검하셔서 기도와 대화로서
관리하셨으면 합니다. 물론 멀리 떨어져 사시는 분들이 많아 자주 만나기는
어렵더라도 전화통화나 전화를 이용한 기도 및 이메일을 이용한 끊임없는 관심과
의사소통을 원합니다.

본인의 삶에 정열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신 분이기를 바랍니다.
항상 긍정적이며 자기통제력이 강하고, 성경말씀뿐 아니라 탐구하는 자세로 삶을
살아가며 세상과 이분법적인 분리태도보다는 세상속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신 분이기를 소망합니다.


3. 다음 사항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본적인 자격요건은 아래와 같습니다.
신학대학원 졸업(금년 여름학기 졸업예정자 포함)

기본적인 제출서류는 다음과 같으며 제출 서류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1) 이력서 - 학력, 경력, 가족관계 등
(2) 자기소개서 - 특성, 성격, 취미, 헌신내용 등 기타 본인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내용
(3) 목회계획서 - 앞서 한무리교회에 대한 소개와 바램을 참고하셔서 향후 교회의
                    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서
(4) 기타 참고서류 - 본인 설교집, 목회자 추천서 등

일정과 교회의 초빙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출기한 : 2006년 6월 30일
예비선정 : 2006년 7월 9일(3명 내외)
면접 및 설교 : 2006년 7월 중
최종 선정 : 2006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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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수 교수의 서양철학사 강의 녹취를 나눠볼까합니다. 
손하진   2006-06-14 11:30:48, 조회 : 95, 추천 : 1

지난 1월부터 몇몇이 모여 경북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시는 김석수교수를 모시고
한달에 2번씩 서양철학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재는 이문사에서 나온 요하네스 힐스베르거의 [서양철학사(상), (하)]입니다.

그 강의를 조금 녹취를 해봤는데 참 좋더군요.
강의가 매끄럽고 한 강좌를 들어도 그 속에 서양철학사 전반,
고대철학부터 현대철학까지 아우르며 진행되기 때문에 
사상사 전반의 지형과 흐름을 포착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오프라인에서 몇몇만 나눠보기보다는 온라인상에서 여러 사람들이 같이 나눠보면 좋을 것같아서
교수님께 승낙을 얻어 올려봅니다.

우선은 지난 1월 24일에 했던 1강입니다. 약 2시간 20분에 걸친 강의입니다.
각 단락 앞의 숫자는 편의상 녹취를 분단위로 끊어 녹취를 하면서 그걸 표시한 겁니다.

1강의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0~42번까지는 오늘날 철학의 주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포스트'의 의미를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습니다.
'포스트'에 대한 의미에 따라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도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43~82번까지는 우리 사회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오용과 악용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83~136번은 철학사의 흐름을 존재중심이냐, 주체중심이냐의 문제설정을 통해
고대, 중세, 근대, 현대를 가르며 각각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강에서는 우선 서양철학사의 전반적인 맥만 짚고
2강부터 교재를 찬찬히 뜯어가며 강의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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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철학의 한계에 대해서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입니다. 
이근호   2006-06-14 14:26:36, 조회 : 110, 추천 : 0

정식으로, 그리고 제대로, 철학을 전문으로 하고 그리고 성당에도 다니는 분의 강의를 접하게 되어서 즐겁습니다.

전혀 복음이 섞여있지 않는 분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세상을 열심히 연구하고 관찰하고 탐색했을 때 결국 내놓을 수 있는 최종  결론이 무엇인가에 대해 주목하게 합니다.

덧붙여 말하면,

공부를 하든지, 종교를 갖든지 다 '나'라는 존재를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가 어떤 변명을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 변명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비복음적 의식을 대변해줍니다. 

즉 '글쎄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이런 생활 외에 달리 어떻게 살란 말이야!"라고.

 

손하진 형제께서 참으로 죽을 고생을 하시면서 녹취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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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김정우 교수의 '언약의 본질' 
박병규   2006-06-15 19:23:29, 조회 : 139, 추천 : 0

왜곡된 언약의 개념을 잘 반영하는 듯 하여 인용해 봅니다.
김정우 교수의 구약통전 상권669페이지 신명기 신학에 대한 설명중에 나오는 글입니다.

"언약의 본질은 신인 관계에 있다.
하나님이 일차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분이나
인간의 응답을 필요로 한다.
이 관계를 움직이는 원리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그의 백성에게 찾아 오시고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해야 한다.
언약의 율법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반영하는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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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총신대 김정우 교수의 '언약의 본질' 
이근호   2006-06-15 19:28:44, 조회 : 158, 추천 : 0

> 神과 人을 겨냥해서 제공된 것처럼 이해될 수 밖에 없는 그 언약이 결국  神은 배후로 빠지고 人은 저주받을 죄인으로 드러내면서 장치 오실 그리스도가 전면으로 등장됩니다. 

이로서

언약을 들이대므로서만이

이단 즉  인간들이 지상에서 제조하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종교, 혹은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의 허상이 제대로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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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에 파고든 마귀의 미신적 신앙 
손무성  (Homepage)  2006-06-20 10:29:11, 조회 : 110, 추천 : 0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 아닐까?

1.특정 목사의 기도의 힘, 기도의 능력으로 축구던 무엇이든지 우리 인간들이 소원하는 바를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는 미신적 생각
2.영혼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은 미신과 부두교(타종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약체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된고 더 우세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영원구원이 쉽다는 미신적 생각 
3.경쟁에서 이기는 것, 세계적인 선수가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는 미신적인 생각

이영무 목사의 글과 태극전사들의 기도내용이야말로 전형적인 미신적 신앙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1.특정 목사나, 기도발 센분(?)의 기도가 능력에 의해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비는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그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고 결국 아버진의 뜻을 알게 하시려고 기도하게 하신다. 그래서 평소 기도할 줄 안다고 하는 인간에게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는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들이 하는 소원을 비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성도의 기도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얼마나 인간들이 활동하여 이룩한 것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 될 것이라고 떠들었으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는지'....이것을 알아야 한다.

2.영혼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그 예언된 대로 "다윗의 무너진 장막에 이방인들을 불러내겠다'는 그 약속에 의해 구원된다. (사도행전 15:15-18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영원구원은 더 우세한 힘으로 접근하게 하여 저쪽을 굴복시키는 물리적 형태의 전쟁이 아니라, 더 연한 순 같은 주님의 모습,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힘도 없는 그 형대로 파고드는 것이다. 마치 천국은 땅에 파뭍힌 겨자씨 같다라는 식이다. 이런 방식을 하나님 왜 취하시고 계시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파괴력있는 파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언약된 대로, 실행 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라는 것을 확증 짓기 위해서이다.

3. 하나님의 영광이란 인간이 더 많은 것을 해서 계급장과 훈장을 달고 하나님께 접근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일하신 결과만이 우리가 복받은 이유라는 것, 그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요한계시록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마귀는 교회에 이 같은  미신적 생각을 세상끝날 때까지 계속 주입할 것이지만 미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
이글은 2006년 6월 16일 뉴스앤조이에 올려진 글을 퍼온 것입니다.

다음은 이영무 목사가 강변교회 방명록에 남긴 글 전문이다.

존경하는 김명혁 목사님께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목사님 가정과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목사님의 기도덕분으로 월드컵 원정 52년 만에 토고 경기에서 첫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준비과정과 치밀한 분석 자료와 전략 그리고 상대팀의 분열 징조를 보아 좋은 경기를 보일 것이라는 기대는 갖고 있었으나 우리선수들이 많이 긴장했고 전반 부진한 경기를 펼치었습니다. 전반전 실점으로 선수들 사기가 떨어져 있었기에 월드컵 원정 첫 승이 정말 힘들구나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토고는 인구 500만 가운데 절반이 넘는 사람이 부두교라는 전통 부족 종교를 믿고 있는데 주술사가 국가대표팀과 동행하며 전 세계와 축구팬들에게 우리의 기도와 주술의 힘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습니다. TV를 통해 선수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하프 타임에 절박한 마음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엘리야의 하나님을 찾으며 간구했습니다. 토고를 비롯하여 아프리카에 전통 부족 종교와 미신을 섬기고 있는 수많은 영혼구원을 위해 우리나라에게 승리를 허락해 달라고 눈물로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세계 선교를 위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 대한민국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태극전사 23명과 코칭스텝, 그리고 그 가운데 믿음의 용사 12명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드렸습니다.

후반전에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우리나라 공격력이 살아나며 두 골을 넣어 역전승 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용사 이천수 선수가 동점골을 안정환 선수가 결승골을 넣어서 더욱 기뻤습니다.  이천수 선수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해 달라며 꼭 골을 넣을 수 있는 수훈의 선수가 되기 위해 기도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었다고 기뻐했으며 안정환 선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기장에서 느낄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도록 기도드렸는데 응답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좋아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목사님의 기도의 힘 인줄 믿습니다. 그리고 저희 할렐루야 축구단 후원교회 성도님들과 한국교회 기도의 능력으로 승리한 줄 믿습니다. 저는 선수단의 승리가 대한민국의 승리요. 또한 한국교회의 승리요 그리고 목사님의 승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부족한 제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비천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저희 할렐루야 축구단을 물질로 후원해주시며 사랑과 관심을 돌보아 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금 목사님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토고 경기 마친 후 적은 믿음이지만 이영표·송종국·이천수·이호 4명의 믿음의 동지들이 함께 운동장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뜨거운 눈물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전 세계 매스컴과 TV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무언의 복음이 전파된 줄 믿습니다. 득점 후에 기도드릴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12명의 선수들의 믿음의 분량대로 기도제목 갖고 기도드리는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드립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쓰임 받게 해주세요" "16강 진출(군면제)과 해외 진출함이 이루어져 세계적인 선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축구선교사 되게 해주세요" "믿음을 갖은 선수들이 주님의 이름과 권능으로 경기할 수 있게 해주세요". 믿음의 용사 12명이 적은 믿음과 적은 실력을 갖고 있지만 순수함과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물매 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앞으로 싸워야 할 프랑스, 스위스는 강한 팀 입니다. 유럽선교와 세계선교를 위해 우리 대한민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꼭 넘어갈 수 있도록 더 간절히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목사님 목회사역 위에 항상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2006년 6월 15일 독일 퀼른에서 이영무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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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 이런일이 
오용익   2006-06-20 11:52:04, 조회 : 139, 추천 : 0

(아래는 우리 아파트 부녀회가 관리소에 의뢰해서 집집마다 넣은 유인물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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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민께 부탁드립니다.
(부녀회 2/4분기 정기 모임결과 건의된 내용입니다)

1. 쓰레기 분리수거 어쩌고(생략)
2. 주자창이 어쩌고(생략)
3. 담배꽁초 어쩌고(생략)
4. 엘리베이터 어쩌고(생략)

** 부녀회비 납부방법을 대다수 회원들의 찬성으로 관리비 고지서에 함께 청구키로 요청하였으니 이해바랍니다.
(월 3000원 - 문의사항 있을시 부녀회장 및 부녀회총무께 연락주십시오)

00아파트 부녀회

(끝)

위의 부녀회장을 제가 오후 8시 30분에 만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관리소장을 만나서 의견을 들어보니, 부녀회가 회비가 잘 안걷히고, 받으러 다니기도 귀찮아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랍니다.

게다가 이 부녀회는 이 아파트에 살면 모두 다 의무적으로 부녀회에 들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택법과 시행령의 관련된 부분을 가지고 가서 관리소장에게

관리비청구란 그렇게 아무나 임의로 할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기에 임의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하니 자기도 알고 있는데,

자기도 고용된 입장인데 주민들이 요청한 사항이라 법들이대면서 못하겠다고 할수가 없답니다.

"관리비 고시시에 함께 청구키로 요청"에 대한 해석은 정말 어려워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것이 부회원이 아닌 사람도 모두 다 부녀회비를 의무적으로 내라는 뜻인지,

아니면 청구는 하되 내고 싶은 사람은 내고 말고 싶은 사람은 말고 알아서 하라는 뜻인지,

어떤방식으로 어떻게 청구하겠다는 뜻인지 정확한 의도는 아직 모르겠는데, 이따가 만나면 이것은 다시 물어볼 참입니다.

어찌되었든 부녀회비를 "관리비고지시에 함께 청구"(???)한다는 소리를 들어 보는 것은 난생 처음인데다,

만일 관리비에 정식항목으로 집어 넣어서 청구한다면 이것은 봉사한다는 명분으로 남의 돈 뜯어내겠다는 심보처럼 보여서 교회와 목사생각이 제일 많이 나기는 했습니다.

교회 봉사가 하나님께 영광되는 일이며 그 봉사를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니

그 선한 목적을 위해서 교인이면 누구나 다 돈을 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일 안한다면 그것은 게으름을 피우고 하나님께 죄짓는 일이 된다는 식으로 돈뜯어 내는 교회와 목사말입니다.

그분들이 하는 일을 죽 들어 보면, 봉사라는 것을 명분삼아서 나(우리)알아 달라고 시위하는듯이 보이기도 하고 또 남을 지배하려드는 심보같기도 하고요.

분위기를 좀 들어 보면 그분들은 부녀회에 안들어오는 사람들을 평소에 별로 안좋게 여기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제 아내같은 사람들!

또 주로 그런 사람들은 뜨네기가 많다는 이유로 안좋아하고요. 예를 들어 저같이 일때문에 들러서 전세사는 사람들!

어떤 주민에게 들은바로는 그 부녀회장이 성당에도 열심히 나가는 신자인것 같습니다.

굳이 이일이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이런 일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성도는 자신에게 닥친 그런 사건을 어떻게 복음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또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수 있는지 여러분들의 복음적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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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 이런일이 
이근호   2006-06-20 16:14:14, 조회 : 117, 추천 : 0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넓게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이가 먹을수록 더욱더 자기 방어적인 성향을 띨 수도 있습니다.  

아파트 부녀회를 비롯해서

우리 대한민국은 누구나 조직 결정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자기네들 끼리 무슨 조직을 만들고 거기에서 무슨 불합리한 법을 제정해서 그것을 대외적으로 적용하든지 그런 활동조차 대한민국의 헌법은 넉넉히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나 절이나 대순진리회의 활동 같은 것도 이런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사법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벌금이라는 것도 그들 친목회에서는 갖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치

교회에서 하는 전도가 아파트 주민들에게 안먹혀들어간다고해서 교회 이름으로 그들에게 벌금을 매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구제차원에서 실시하는 공짜 점심 제공에서 이들 아파트 주민들은 괘씸죄에 걸려서 누락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와마찬가지입니다.

오목사님도 전업 주부로서 째째하게 가게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부녀회에 가입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따져 보는 겁니다.

부녀회에서 결정하기를, 일괄적으로 아파트 값을 평당 100만원 씩 올려받기로 했는데

부녀회를 싫어하는 어떤 가정에서 부녀회의 결정을 모르는채 아파트를 쉽게 팔았을 때, 너무 헐게 팔았다는 심적 후유증을 과연 온 식구가 견딜 수 있겠습니까?

만약

복음 안에서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세상관에 동조하지 않고 주님의 심판날을 고대하게 될 것입니다.

저 같으면

'부녀회'라는 이름의 주체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과연 그 월 관리비 3000원이 참으로 아파트 단지의 정화나 청소에 꼭 합당하게 필요한 금액인가를 먼저 알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합당한 생각이라고 들면,

먼저 부녀회 회장님에게 " 더운신데 아파트 이웃 주님들을 봉사하신다고 참 고생하십니다"라고 진정으로 치하해 드리고

고지서 날아오기 전에 그 날짜가 되면 알아서 착착 미리 드리겠습니다.

"구태어 힘드신데 집집마다 방문하지 마시고 주민들이 좋은 일하겠다는 회장님을 이런 식이라고 수고를 들어들이는 것이 도리이지요"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복음의 눈이란 딴게 아니라

이 세상을 곧 멸망당할 니느웨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지금 오목사님께서 사시는 아파트 단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지옥으로 가시는 그들에게

월 3000원 가지고 시비걸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 돈의 쓰임을 보다 투명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시는 선에서 멈추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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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 이런일이 
오용익   2006-06-20 17:38:40, 조회 : 99, 추천 : 0


말씀의 취지를 잘 알아듣겠습니다.

심판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문제될 것 없는 사소한 문제라는.

그 사소함을 견디지 못해서 자기방어에 나서는 그것이 더 큰 문제라는.

누구도 자본의 그물에서 벗어날수 없는 현실속에서는 사고조차 이미 그 그물속에서 형성되어 나가고

그리 되면 언제나 자기방어적이 될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자기방어를 위한 법, 자기방어를 위한 선, 자기방어를 위한 설교, 자기방어를 위한 목회

이런 생각이 줄줄이 줄줄이 다가옵니다.

제가 보기에는 도무지 저분들이 하는처사가 철없어 보였는데 이게 

도리어 제가 세상을 보는 눈이 좁고 얕아서 철없어서

(자기 방어적이어서, 심판의 현실에 너무 눈이 어두워서)

그런가 봅니다.

이런 마당에 가만히 있는다든지 혹은, 저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식으로 하면

그것이 더 자기방어이며 자기 기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혼란스러웠기에 도움말이 필요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 잘 참고해서 저분들 만나겠습니다.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갈지 저도 참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