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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강의-츠빙글리의 예정론 1404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1. 29. 16:23

2014-04-15 17:02:54 조회 : 676         
츠빙글리의 예정론 140415 이름 : 이근호 (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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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4.♡.134.60) 14-04-18 09:27 

20140415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2-츠빙글리 예정론
(강의:이근호 목사)


츠빙글리 해보겠습니다. 1484~1531에 츠빙글리는 개혁주의자인데 유명하지 않아요. 개혁주의 혁명에 성공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역사에서 유명하려면 성과가 있어야 되고 큰 성과가 없으면 유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츠빙글리의 논리가 루터나 칼빈이 놓친 것을 잘 언급해주고 있어요. 어떤 복음성이나 진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 그러냐 하면, 질문을 하게 될 경우에만 진리가 나오게 돼있어요.

신앙생활이란 뭐냐 하면, 복음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서부터 신앙생활이 되는 겁니다. 언젠가 질문이 끝나게 되면 신앙생활도 마감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나타나게 되면 자꾸 질문을 하게 되거든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창세기에 나무가 두 그루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나무고 또 하나는 선악과나무거든요. 선악과를 건드려줄 때 생명나무의 건드리는 신호가 되어서 생명나무의 본질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선악과 어디 가 있습니까? 선악과는 인간과 함께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따먹으면 죽으리라고 돼있으니까. 선악과가 지금은 죽인다는 형식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때부터 이 세상에 뭐가 왔습니까? 너나할 것 없이 직업과 나이와 상관없이 심지어 놀라운 것은 갓난아이가 죽는다는 거예요. 계모한테 얻어맞아 죽지요. 그럴 때 그 애가 무슨 잘못했느냐고 묻잖아요.

신에게 질문할 때 사람들이 그냥 질문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통해서 질문하게 돼요.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계모한테 얻어맞아 죽은 아이의 생모의 경우에. 내 자식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질문을 하게 돼요. 이미 질문 자체에서 뭘 범주로 잡느냐 하면, 답변 자체가 내 아이가 왜 죽었는지, 내 아이는 착할 수밖에 없었다는 답변을 요구하게 되는 거예요. “원래 천사 같은 아이인데 계모 잘못 만나서 죽었으니까 죽어도 좋은 나라 갈 거야.”라는 답변을 기대하면 질문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인간이 질문할 때 반드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질문 자체가 뭐냐? 육하원칙이 아니라 울부짖음 또는 한, 기도, 금식 이런 것도 질문에 포함될 수 있거든요. 이것은 자기 정당성을 경유해서 자기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그런 답변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질문을 언제 했지요? 자기 아이가 계모한테 맞아죽을 때 질문하지요. 그러면 그 전에 자기 아이가 학교 잘 다닐 때는 그런 질문이 안 나오지요. 그렇다면 보세요. 생모에게 “당신은 정당하지요?” “정당하지요. 나는 나쁜 짓하지 않고 착하게 잘 살아오고 있습니다.” 자기 정당성에 의문이 생길 때는 자기가 맡긴 아이가 죽을 때 “신이시여, 내 아이 왜 죽입니까?”라고 아이와 더불어서 질문하게 되는 거예요. 선악과는 건드려줘야 생명나무와 관계돼있는데 그 건드리는 작업을 생명나무에서 하게 돼요.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를 건드려줄 때 우리는 한에 맺혀서 악에 받쳐서 갈등하면서 그 답변하는 형식이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면서 질문하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신앙 자체가 인간과 인간의 모임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 따먹은 자들끼리 모임이라는 복음적 관점, 신앙적 관점에서 다시 보게 되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앙이란 내가 바르게 사는 게 신앙이 아니고 내가 처해 있는 구조가 어떤 질서와 구조로 돼있는가? 영적 구조와 질서로 돼있는가를 만끽하는 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다른 구조가 있어요. 그게 자본주의 구조입니다. 오늘 하루 일하고 얼마를 벌까? 하는 돈으로 매겨지는 구조. 아담 스미스는 이걸 시장이라고 해요. 이건 날 때부터 시장이에요. 공부하는 것도 시장에서 좋은 상품가치를 얻는 거예요. 그럼 교회는 뭘까? 가게, 사업체가 되는 겁니다. 목사가 목회에 관심 두게 되면 이미 그 자체는 휴대폰 파는 점포의 업주가 돼요. 업주가 되면서 신앙생활은 하지 못하죠. 신앙적 구조에 그들이 본의 아니게 놓여있다는 걸 언제 아느냐 하면, 그 목회가 잘 안 될 때, 방해받을 때.

지난 오후에 예를 들었잖아요. 어떤 개척교회 목사가 술 먹고 들어와서 한 시간 동안 살림살이 부수고 사모님은 바깥으로 나가고 목사는 두 시간 동안 엉엉 운다고. 목사가 눈물 흘리는 이유가 뭘까요? 목사가 어떤 경우에 눈물 흘릴까요? 교인들이 신앙생활 안 해서 눈물 흘립니까? 그런 경우가 있어요? 휴대폰 가게 점주가 눈물 흘릴 때가 언제입니까? 공짜라고 하고 전국에서 두 번째로 싸다고 했는데도 안 될 때 울잖아요. 그러면 목사가 술 먹고 새벽에 두 시간 동안 우는 경우가 어떤 겁니까? 교인들이 신앙생활 제대로 못해서 웁니까? 그런 목사 있는지 보고 싶어요. 신앙생활 못 해서 우는 게 아니고 장사가 안 되서 그래요.

왜 장사가 돼야 됩니까? 목사가 개척교회 왜 성공해야 됩니까? 그것은 자기가 정당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살아가는 게 정당하다는 거예요. 그럼 당신이 정당한 이유가 뭡니까? 이유는 없어요. 정당하다는 자체가 정당치 않은 증거는 성경에 나오지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러면 인간의 신앙생활은 간단하지요. 이런 짓했기에 죽어 마땅하고 저주받고 하는 일마다 말아먹는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진정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그것 하면 되는 거예요.

바로 그 질서와 구조 속에 내가 놓여있음을 느낄 때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는 죄인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모든 걸 장악했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의미고,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인생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목적성, 나름대로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목적을 가질 때부터 인간은 벌써 뒤틀리기 시작하고 엉터리 쪽으로 가게 마련이에요. 원래 신앙생활에서 목적은 이미 확보된 것이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때그때마다 성령께서 사업아이템을 주십니다. 할 일을 주셔요. 목적은 성령이 갖고 있고 주님이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질 필요가 없는데 내가 따로 나의 목적을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의 정당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며칠 후에 내 아이가 시험을 치르는데 꼭 합격해야 되는데. 이것 목적이거든요. 하루 일과의 모든 것에서 햇빛 주시는 기쁨도 탈락, 공기 주시는 기쁨도 탈락,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건강함도 탈락, 병원에 입원해서 사진 안 찍어도 되는 여유, 호사거든요. 이런 누림도 탈락. 되면 감사하고 안 되면 감사 못하겠다는 거예요. 딸이 시험에 합격하면 하나님께 한턱내고 그렇지 않으면 섭섭하다고 하겠다는 거예요. 그걸 위해서 사전에 준비기도하고 금식하고. 부활절을 부활로 맞이하기 위해서 미리 금식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인간은 스스로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어느 인간도 자진해서 신앙생활에 나설 위인도 없고 할 수 있는 그런 재주도 없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천사가 있고, 성령님이 계신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보좌의 특징이 사면에 눈들이 박혀있어요. 독수리, 사자, 송아지, 사람. 사면 전체가 눈들이 박혀있다는 말은, 천사의 담당구역을 말하는 거예요. 이 세상 전체가 천사의 담당구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세상이 있잖아요. 또는 천지, 우주. 우주는 과학적 개념이잖아요. 성경적 개념은 이미 하늘의 보좌로 확정돼버렸어요.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부시의 아들 에스겔이 봤던 하늘의 보좌의 이미지 자체가 그것에 의해서 세상을 유발하고 생성하고 발생해내는 겁니다. 그런데 과학적 개념은 뭐냐 하면, 현재 뭔가 있다고 보고, 있는 게 어디서 나왔는지 그 원인을 추적하는 겁니다. 그 방식 중 하나가 수학적 방식을 동원하는 거예요. ‘2+3=5’라는 걸 진리라고 본 거예요. 하나에 수단에 불과한 건데.

여러분 아시는 이야기할게요. 천지창조는 있음으로는 천지창조의 내막이 안 밝혀져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야 천지창조의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든 거예요. 이걸 에스겔에 의하면 하늘의 보좌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천지창조의 모든 것은 그 범위 안에서 움직이게 돼있어요. 어느 경우에도 보좌에서 시키는 대로, 주님이 시키는 대로 천사가 활동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입니다. 그 질서 속에서 인간은 없고 죄인밖에 없어요.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만 독점하게 돼있지요.

지난 대구공부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두 종류가 있는데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은 영혼과 물질로 돼있다. 또 하나의 인간은 죽었다고 살아날 때만 인간이 된다. 그걸 ‘인자’라고 하지요.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지요. 사람의 아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면 기존의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 아니에요. 사람이 아닙니다. 현재 예수님만 사람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만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닌 걸로 하늘나라에서 그렇게 정리가 돼있어요.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분명히 나오고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만 워낙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시장 한복판이잖아요. 전부 다 가게, 점주, 업주다보니까 예수님 중심의 현실구조가 아니고 인간도 아닌 것들이 모여서 만든 인간이 있고, 세상이 있어요. 과학적 사고방식이에요. 아인슈타인이 아무리 연구해도 인간이 왜 죽는지 몰라요. 그건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얼마나 건방진지 선악과 따먹어서 죽은 걸 과학적으로 점검에 나선 거예요.

이건 어느 정도로 어리석으냐?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과학적으로 증명됩니까? 증명이 안 되지요. 유리창이 깨졌습니다. 그러면 깨진 유리창을 모으면 깨진 이유가 나옵니까? 이미 깨져버렸는데. 깨어진 조각을 아무리 맞추어도 깨지기 전의 원형이 뭔지 몰라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몰라요.

노벨문학상 받았던 카뮈가 제시했던 게 이겁니다. 이방인이란 소설에도 나옵니다만 세상에 모든 것이 이유가 없고, 목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발생됐는데 문제는 어디서 발생됐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다만 발생된 것들은 있는데, 저와 여러분들처럼 생겨난 것들은 있는데 모든 것이 왜 있는지에 대해서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걸 이 사람은 이걸 부조리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있는 것끼리 모으면 조리가 있어요. 이건 물 마시기 위해서 샀고, 나는 어머니가 태어나게 했고. 왜 어머니가 태어나게 했느냐? 나 말고 내 밑에 동생은 없느냐? 그것에 대해서는 조리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은 조리와 부조리가 섞여 있거든요. 그런데 조리를 아무리 따져도 부조리를 알 수 있느냐?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카뮈의 철학은 뭐냐? 모른다는 겁니다.

모른다는 것에 머무르면 우리가 못 살잖아요. 그러니까 모른다는 걸 감추는 방식으로, 참 이게 어렵다. 우리가 매사에 열심히 활동하는 것은 감추는 방식이에요. 이를 위해서 스스로 위장해야 되고, 스스로 상상해야 되고, 스스로 가장해야 되고, 스스로 위선자가 돼야 돼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그런 부조리에 마주쳐서 부조리 앞에서 우리는 마치 조리 있는 양 위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에요.

오늘 츠빙글리하는데 츠빙글리 내용이 예정론입니다. 모든 신학의 핵심이 예정론인데 하나의 교리지요.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 시대가 종말이지요.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지요. 그러면 그전에 하나님 나라가 있었단 말입니까, 없었던 말입니까? 깨진 유리 조각 모으면 원래 유리가 뭔지 압니까? 이걸 가역적이라 하는데 인간은 가역성이 될 수 없어요.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기 원형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결국 자기 자신의 욕망과 자기 잘남을 경유하거든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아는 천국이란 뭐냐? 잘난 내가 잘난 동네에 사는 걸 천국이라고 합니다. 잘난 내가 이 땅에서 너무 잘나서 또 천국 가서 잘난 척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잘난 척하는 주체 자체가 다 날아가 버려요. 이스라엘 멸망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에게만 독점돼있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자기는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천국의 본 자손이라고 우겼잖아요. 백부장 이야기 나올 때 나오잖아요. 그런데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체가 멸망해버리지요. 멸망하면서 등장한 게 하늘에서 징벌이 주어지고 저주가 주어지고 불이 내려오는 거예요. 요엘서에 보게 되면. 특히 하박국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의 잘못은 뭐냐? 나를 경유한 거예요.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죽어서 가는 어떤 세계를 천국으로 보는데 나를 경유한 나가 정작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파괴돼야 되는 거예요. 파괴되면서 인간과 인간끼리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만든 게 언어입니다. 인간 자체가 파괴되면 언어도 파괴되고 와해되지요. 그래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말은 언어의 파괴에요. 이게 요한계시록 언어입니다.

하늘나라가 오게 되면 언어가 파괴돼요. 언어란 인간 쪽에서 사용했던 거잖아요.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사용하잖아요. 그런데 언어가 파괴돼버리면 내가 사용한 언어를 총동원해봐야 하늘나라에 접근이 안 되는 거예요. 언어가 이상해서 이해 못하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는 인간을 파괴했다는 내용이 포함될 때만 천국이에요. 지옥이 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지옥을 내다보면서 만들어졌어요. 거지 나사로가 뭘 쳐다봅니까? 부자가 갔던 유황불, 뜨거운 불구덩이 속을 바라보면서 자기는 즐기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 창조했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만들었고, 이스라엘 멸망했고 심판 날 왔고 다음에 인자가 오셔서 죄 씻음 받은 사람은 천국 간다. 이 모든 내용이 천국 가면 끝나는 게 아니고 천국까지 그것이 그대로 반복되는 곳이 천국이라니까. 창조부터 모든 것이 반복되면서 우리의 면류관을 주님한테 바치는 거예요. 천국 가서 24장로가 에헴 합니까? 요한계시록에 보세요. 천사들이 영원토록 찬양하지요. 찬양 보따리를 풀어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되게 주께서 친히 만드신 천국에 도달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주께서 하는 그 작업 속에 우리가 빠질 수 없는 거예요. 그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이. 이스라엘에 일어난 모든 일이 우리와 무관한 게 아니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돼요.

다시 정리하면, 종말에는 언어가 파괴된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종말은 언제부터 종말이냐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부터 드디어 구원받을 자체들이 없지요.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자처했지만 주께서 그들을 우상 숭배했다는 이유로 친히 멸망시킴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구원받을만한 자격이라든지 구원받을 준비됐다고 손들고 나올 권리나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회개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세례요한한테 세례 받으면 구원받습니까? 그게 구원의 요건이 아니라니까요. 회개가 구원의 요건이 아니에요.

종말에는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가, 종말에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 오직 인자만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천국을 만들 때 예수님 중심으로 만드는 겁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서 주와 함께 있게 해달라고 했을 때 주께서 그 목숨을 받았습니까? 너는 죽어도 못 와. 왜? 지금 천국은 베드로의 목숨, 제자들의 목숨으로 만든 게 아니에요. 그 목숨도 천국 만들기 위해서 빠져야 돼요. 천국을 위한 목숨은 하나밖에 없어요. 죄 없으신 예수님의 목숨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언약적 생명이거든요. 언약에 부합된 생명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 생명으로 천국을 만들고 예수님의 생명이 만약에 작게 만든 바람 넣기 전의 풍선이라면 풍선에 바람을 넣으면 커지면서 그리스도 몸이 되고 그것이 천국이 되는 거예요.

제가 지금 츠빙글리를 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종말 때 교리라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종말 때 인간이 끄집어낸 교리가 과연 하늘나라에 유효하게 긍정적으로 쓸모 있느냐 하는 겁니다. 쓸모없어요. 이스라엘도 한 교리 했거든요. 예정론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우리가 쓸모없으면 안 하면 되겠다고 하잖아요.

생명나무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건드려요. 벚꽃 피지 않고 봄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까? 사람이 봄이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부산의 벚꽃 개화속도가 3일 만에 서울로 올라왔을 때 봄이 온 걸 알거든요. 나는 집구석에 앉아서 그냥 봄을 기다릴래. 이게 아니고 창문 열고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 노래 나올 때 봄이라 하고 자기가 봄을 느끼잖아요. 그 시대, 우리가 속한 시대를 내가 따로 억지로 자신은 다르다고 뽑아낼 수가 없어요. 우리가 교리, 조직신학이라는 걸 벗어날 수 없단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조직신학이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걸 공부해야 되는 겁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전문의 딴다고 구원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 구원 안 되니까 의사면허 반납하고 놀까요? 논다는 그것도 자기가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직업 중 하나가 돼버려요. 노는 사람끼리 사이트에서 만나서 누가 잘 노는지 시합할 건데. 앞으로 이런 직업 나올 거예요. 24시간 잘 보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우리 학원에 오세요. 백수로 잘 사는 학원도 나올 수 있는 문제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신앙생활 자체를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세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끼리 만든 것은 신앙생활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 시장이 되기 위해서 만났기 때문에 정신이 거기에 팔렸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도 잘못이에요. 신앙생활이 안 되면 안 돼야지 하겠다고 하면 신앙생활 따로 마련할 수 있는 겁니까? 신앙생활은 주님이 하게 하셔야 됩니다. 지금이 종말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종말의 내용이 뭐냐?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는 인간들끼리는 통할지 모르지만 통했던 인간 전체가 저주받을 인간이고 그 저주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종말에 언어가 파괴되기 때문에 주의 말씀은 인간의 힘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게 하신 이유가, 생명나무 되신 주님께서 지금도 일하시고 작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생명나무로부터 시작된 신앙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뭘 해도 신앙생활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깨닫는 거예요. 주께서 건드려주지 아니하면 지금 신앙생활 잘하느냐, 못하느냐, 자체가 생각이 안 나요. 하루 종일 워낙 바빠서. 정신이 다른데 가 있기 때문에.

제가 제일 처음에 이야기한 걸 다시 해볼게요. 울산에 계모가 있었고 생모가 따로 있었잖아요. 자기 아이를 남편한테 보내고 자기는 그냥 열심히 생활하는 거예요. 자기가 얼마나 정당한지 그런 것도 생각 안 나요. 그냥 열심히 살 뿐이에요. 그런데 맡긴 아이가 계모한테 맞아죽었을 때 “신이시여, 왜 내 애를 죽입니까?” 할 때 자기는 그동안 말은 안 하고 무심코 살았지만 평소에 자기 존재가 건강해야 되고 불행이 없어야 되고 비극이 없어야 되고 나는 그 정도로 자기 의로움의 정당성의 법칙을 만들며 살아왔다는 것이 들통이 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신앙생활은 질문을 하면서 시작된다고. “신이시여, 어찌 이렇게?”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언제 오십니까?” 시간성이거든요. 그전에 목적성이 있고. 인간이 무슨 목적성이 있으면 자기가 망가졌다고 보면 돼요. 내가 뭔가 꽂혀서 이루고 말리라고 나온다면 그만큼 자기가 정당하다 의롭다는 뜻이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에요.

이 언제와 예정론과 결합시켜 봅시다. 우리가 창세전에 예정 돼있으면 이 땅에서 예정론을 믿는 순간에 구원받습니까? 언제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이 됩니까? 예정론을 받아들일 때입니까, 십자가 복음을 믿을 때입니까, 기도가 잘 될 때입니까, 성령이 올 때입니까? 언제 입니까? 이런 궁금증으로 계속 이어져나가고 있습니다. 언제 오십니까? 할 때부터 이미 그런 질문과 답변에 궁금하다는 것부터 벌써 우리는 교리에 매여 사는 존재라는 것. 이것 알았으면 내가 알아서 잘 할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부지런히 얻어터질 때마다 주님만 증거하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매일같이 내 뜻대로 안 되고 매일같이 여지없이 무산될 때 주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쓰시는군요. 이것은 정말 기적도 그런 기적이 없어요. 어떻게 저를 안 버리십니까? 저 같은 인간은 방치하고 지옥 가도록 내버려도 괜찮은데 왜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으시고 날마다 때려서 저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 교만함을 들춰주십니까? 그런 것은 교리공부해서 안 나옵니다.

성당이고 교회고 문제점이 목적이 있다는 거예요. 예배당을 짓는 목적이 있고, 절기를 지킨다든지 설교해도 목적이 있어요. 목적은 그 교회, 자기 정당성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것은 사실은 자기 것을 감추고 있다는 거예요. 감추고 있는 상태에서 어떤 말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적용하는 법칙과 다른 법칙을 자기한테 적용시켰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흔히 아는 이야기해봅시다. 이스라엘 망할 때에 묵시문학이 있다. 다니엘,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아까 에스겔 이야기했지요. 에스겔 1장에 보좌 이야기 나왔지요. 세상은 없다고 했지요. 천사가 만들어내면 그게 세상, 우주고.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으니까. 그렇게 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한 묵시, 역사가 끝나버린 묵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나타났지요? 다니엘은 어떤 반응을 나타냈어요? 에스겔은?

우리가 에스겔을 보게 되면 에스겔의 일대기가 나온 게 아닙니다. 에스겔이 어떤 사건에 마주친 경우들이 나열돼있지요. 하루는 아내가 죽는 일도 있고, 하루는 박스에 글을 쓰고, 밥을 먹고 돌아눕기도 하고, 허리끈 풀어서 강가에 하기도 하고. 이것은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에스겔, 다니엘의 특징은 뭐냐 하면, 본인이 하루하루를 이끌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그걸 저는 ‘자리’라고 표현한 거예요. 광대가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활동하면 빛이 오니까 그림자, 자리가 있지요. 그림자가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그림자를 밑에 깔고 그 예수님의 그림자에 합당하게 사건을 유발시키면 그것이 바로 인자라고 불리는 묵시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에스겔, 다니엘. 이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날 그리스도에 속한 그리스도 몸인 지체, 성도의 하루하루를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에스겔, 예레미야나 다른 하박국 등 선지자들의 특징은 자기의 일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보여주게 되는 거예요. 계시와 말씀은 이미 확정된 상황에 대한 반복으로 나타내요. 흔히 사이비 교주들이 말하는 나는 뭘 봤다는 것처럼 새롭게 보여주는 게 아니고 그 깊이를 더하지요. 자리의 깊이를 더한다니까.

아이스크림 빠는 것과 똑같아요. 첫 번째 아이스크림 비닐을 벗기고 처음 빨았을 때 느낌, 무슨 느낌일까? 한 번 더 빨아봐? 또 느낌. 이틀 지났어요. 한 번 더 빠는 느낌. 같은 아이스크림을 매일 살아가면서 계속 빨면 빨수록 첫 번째 빨 때 느끼지 못한 맛을 음미하듯이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던 고난과 아픔과 희생의 의미, 그리고 그로 인한 부활,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 자리에 들어갔다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바로 대조와 대립을 성도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는 겁니다. 나는 누군데 저쪽은 왜 저렇게 살까? 하고 자기 존재가 나라는 것이 계시적 역할, 주의 증거 역할을 할 때 그냥 하는 게 아니고 대조와 대립에 속하는 겁니다. 나는 이런 세계에 속하는데 저 사람은 왜 안 속하지? 나는 그리스도 앞에서 죄인 되었다는 것, 내가 평소에 돈을 밝히다보니까 햇빛과 공기를 공짜로 주시고 그게 주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온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 산다는 죄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자기의 목적한 바가 달성됐다고 좋다고 까불고 또 안 되면 안 됐다고 술 한 잔 걸치면서 세상 더럽다고 새벽 한 시부터 세 시까지 울고. 왜 같은 인간인데 뭐가 대조가 되고 대립이 되지? 그걸 보게 하는 그런 식으로 에스겔, 예레미야, 하박국, 이사야가 살게 된 거예요. 그들이 사는 목적이.

그걸 반복적인 종말현상으로 보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성령이란 말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한 게 있어요. 알곡은 곳간에 모으고 쭉정이는 불에 태운다고 해서 불과 성령으로 온다고 예언했지요. 하늘나라가 어떻게 오느냐고 할 때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다. 그 다음에 그 날이 오게 되면 불과 성령으로 오는데 알곡은 모으고 가라지는 불에 태우지요. 대조잖아요. 그냥 분류하는 게 아니고 대립되면서 분류한다니까요. 2학년 1반, 2학년 2반, 그게 아니고 질적으로 차이가 안 나는 그냥 분류가 아니고 대립이 되면서 분류가 돼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알곡과 가라지를 대비시키면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 말이죠.

츠빙글리 들어가지도 못해요. 그냥 들어가면 옛날에 이런 주장했구나. 보니까 복음 아닌 것 같은데. 끝. 그게 아니고 츠빙글리가 했던 주장들이 오늘날 우리가 평소에 하는 행동들을 자기 정당성을 위해서 교리적으로 모으게 되면 츠빙글리의 논리가 나온다는 것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칼빈이나 루터도 마찬가지고.

여기에 나오는 신학자들의 주장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부지런히 자기 정당성에서 나오는 그런 것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자기 언어를 모은 거예요. 종말에는 언어가 와해되지만 그들은 언어를 모아서 그걸 남한테 교육시켜서 교회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 주장이 교육이 되면서 교회가 만들어지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교회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성령이 와서 이 시대는 종말이다. 마지막에는 언어가 깨지지요. 무슨 말을 해도 설득이 안 되는 거예요. 종말 자체가 언어를 공격하기 때문에 공격당하는 언어로 종말을 묘사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침묵하지. 천주교에서 잘하는 묵상하는 그것 하면 되겠네. 침묵도 언어의 일종이라니까. 이스라엘은 침묵 안 했는지 알아요? 하여튼 인간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다 해봤거든요. 열심당원, 쿰란공동체.

제가 이야기합니다. 에스겔, 예레미야가 어떻게 살았느냐?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고 산 게 아니고 그들보다 먼저 된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들보다 선행된 게 자리라고 했지요. 이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에서 자리가 나왔지요. 구약에서는 오실 예수님이 자리를 깔았고 신약에서는 오신 예수님이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자리를 깔았잖아요.

우리는 교회만 보이고 주님은 안 보여요. 하지만 성경에서 분명히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했잖아요. 그걸 언제 느낍니까? 교인 다 떠나버릴 때 심지어 마누라도 떠나버릴 때 전부 떠났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 때 왜 사람들이 외로워서 못 산다는, 그 사람이 있어서 외롭지 않다는 그 사람들이 떠남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게 즐거우냐? 저쪽과 대립되고 대조가 되는 그런 구조 속에 있는지 파악할 때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용도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 자기 증거 외에는 다른 용도가 없어요. 이미 주님의 목적이 확정돼있어요. 거기다 괜히 우리 목적을 집어넣지 마세요. 대조되고 대립됨으로써 이 시대 자체가 이미 종말에 돌입된 시대임을 알려주는 용도로써 자기 백성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왔어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주여, 이 마지막 때에 내가 어떻게 살까요?” 하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겠다는 것도 자기 정당성, 잘남을 보여주는 자기 목적성이거든요. 그 목적성이 있다는 자체가 종말이 뭔지 몰라요.

내 중심으로 대조가 되고 대립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교주가 돼요. 내 중심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죄인 만들게 하신 그분인데 눈에는 안 보여요. 하지만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그분. 그것이 바로 성령 받고 난 뒤에 열두 사도들이 갔던 그 길입니다.

요즘 시대에 설교자가 설교하면서 스데반 집사를 언급한다는 것은 교회 망하라고 환장할 때나.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죽었잖아요. 그런 부정적인 언사를 할 수 없어요. 잘되는 쪽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스데반 집사를 돌 맞게 한 증거는 그쪽 세계에서는 유용성 없는 쓸모없는 증거가 돼버려요. 튕겨 나온다고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 튕겨내고, 십자가 튕겨내고, 열두 사도들이 총회장 된 게 아니고 다 순교했거든요. 그 순교를 튕겨내는 그들의 질서의 핵은 뭐냐? 여러분 수상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교회를 왜 만들었지요? 친목단체인가? 모여서 돈 모아서 회 먹으려는 교회란 이름의 친목회인가요. 그들의 분주한 하루 스케줄을 봅시다. 자기 목적성에 분주하잖아요. 자기 목적성이 있다는 말은, 이 시대가 종말이고 이 세상은 인간 세계를 와해시키는 작용이 일어난다는 그것이 스며들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딱딱해요. 그걸 물체라 하지요. 드디어 칸트 이후에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기계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어요. 사르트르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하나의 사물이고, 물체고. 그게 장터에 나가면 상품이 되고. 팔릴 것을 예상하면서 시장에서 사줘야 내가 산다고 하는 것, 24시간 거기에 매여 있는 거예요.

이러한 종말적인 현상, 거기에 준해서 이게 종말의 사태라고 생각하시고 그 다음에 츠빙글리의 교리를 어떻게 볼 수 있느냐?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 (IP:14.♡.134.60) 14-04-18 09:27 
201404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2-츠빙글리 예정론
(강의:이근호 목사)


교재 132페이지 봅시다. 츠빙글리가 예정론을 했는데 십자가와 관련된 예정론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예정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예정론이 십자가 예정론과 논제의 전개에 무슨 차이가 나는가? 루터는 신앙을 위한 예정론이라고 하거든요. 예정보다 신앙이 앞선다고 본 반면에 츠빙글리는 신앙보다 예정이 앞선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사실은 함축된 글이기 때문에 읽어보는 게 좋은데 읽어본다고 이해되는 게 아니니까 전체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츠빙글리는 말하기를 예수 안 믿어도 구원된다는 거예요. 예정되었으니까. 상당히 도발적인 발언이지요. 루터같이 십자가 중심의 예정론이면 십자가 지신 분이 하나님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졌지요. 그러면 일단 예정론이 예수님을 거쳐서 펼쳐진 예정론이에요. 그런데 츠빙글리는 예수님의 예정론이 아니고 하나님 예정론이 되거든요. 여기서 현재 개혁주의신학을 표방하는 한국의 모든 교회를 보세요. 그들의 예정론이 무슨 예정론입니까? 하나님 예정론이지요. 하나님의 예정론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이란 말을 씁니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다시 확인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의 주권이 구약 때 있었습니까? 답변을 못하시는 걸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있었다면,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외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말이 안 되는 소리에요. 왜냐하면 에덴동산부터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게 돼요. 새삼스럽게 하나님 나라 새롭게 등장한다는 것은 예수님이나 세례요한이 뭔가 말을 잘못했다든지 인간들이 잘못한지 둘 중에 하나겠지요.

하나님의 주권을 우선시했을 때 사람들은 어떤 것을 기대하느냐 하면, 신앙이 없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논리적 범위가 마련돼요. 먹고 입고, 참새가 떨어지고 시장에서 팔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주권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구원되고 안 되고는 주권이지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인간은, 내가 구원받으려고 예수 안 믿어도 구원되는 수가 있고, 내가 예수 믿는다고 처도 구원 안 되는 수가 있고. 왜냐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관계없이 그것보다 먼저 앞서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먹구름이 온다는 게 내가 대리운전 부르듯이 먹구름이 옵니까? 또 먹구름을 가라하면 갑니까? 먹구름은 일방적으로 오잖아요. 구원과 선택이 일방적으로 와버렸는데. 소낙비가 쏟아지는데 “소낙비야 내 옷이 젖잖아. 그만 내려줘.” 하면 비가 멈춥니까? 그런 일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자를 신자로 만드는 방법은 있음 자체를 신의 주권 속에 포함돼있다는 것에 대해서 수긍해버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구약의 긴긴 역사와 관계없이 이 사람을 신자로 만들 수가 있는 겁니다. 무슨 신자입니까? 하나님 믿는 신자로.

로마서 1장 21절에 유명한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 알면 구원받습니까? 성경에 뭐라고 돼있어요? 야고보서 2장에서 귀신들이 하나님이 한분인 걸 믿잖아요. 그럼 귀신이 천국 갑니까? 귀신은 지옥 간단 말이죠. 천국 가려면 모든 사람이 아는 하나님 아는 그것도 최종적인 결정요건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한분인 걸 알고 무서워 떠는 것도 천국 가는 구원 요건에 탈락되죠.

성경에서 주님의 권리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주님의 권리입니다. 그러면 다른 나라도 신이 있지요. 다른 나라 신도 권리를 주장하지요. 이렇게 신이 있고 신의 주권이 있으면 최종적인 관점에서 보는 신, 이 신만 믿으면 저절로 다 구원받는 셈이 돼버린다 이 말이지요.

츠빙글리는 말하기를 천국에 가면 안 믿는 사람도 모여 있다는 겁니다. 그게 신의 주권에 의해서 예정돼있다는 겁니다. 신이 그냥 예정론을 내뱉으면 구원되는 거예요. 그런데 루터는 십자가 예정론이라고 했지요. 신의 예정론이 우리가 아는 신과 예정론이 아니고 십자가를 향하는 예정론이 돼버리면 루터에 있어서는 우리가 아는 예정론은 십자가 예정론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부정당해야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그냥 주님께서 독약 마시고 자살한 사건이 아니고, 개인이 칼로 죽은 사건이 아니고 주님이 죽은 사건에 누가 개입되게 돼있습니까? 신의 주권을 언급하고 최고의 윤리와 도덕을 자랑했던 그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언약을 먼저 받았고, 율법을 먼저 받았고, 신의 계시를 먼저 받았던 대표자로서 예수님의 죽음에 가담했단 말이죠.

예수님의 죽음 안에 반드시 무엇이 포함되느냐 하면, 십자가 내용상에, 인간이 끄집어낸 어떤 신학적이고 철학적이고 놀라운 관념적인 형이상학적인 논리라 할지라도 모든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진짜 하나님을 죽여 버리는 우상적 조치에서 나온 것이라고 되는 거예요. 신의 형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상이 아니라 마지막 때는 신이란 이름을 이야기해도 그게 우상이 되는 시대에요. 삼위일체를 이야기해도 그게 우상이 되고, 심지어 십자가를 언급해도 우상이 되는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과 실제로 십자가 능력이 왔을 때는 어떻게 돼요? 제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주의 원수가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원수 된 자도 구원되잖아요. 이 말은 원수일 경우에만 십자가 은혜가 은혜답게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원수가 아니면 마치 자기 실력으로 알아낸 것처럼 자기는 자기 잘남의 증인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구원받는다고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말씀대로 적용시켜놓고 그 적용된 사람이 자기 위치가 아니고 말씀 위치에 가보니까 자기는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파악했을 때 어떤 짓을 해도 소용없는 게 아니고 죄인이 되는 거지요. 내 구원에 소용없다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다. 소용없다는 것은 중립의 자리에 있을 때나 가능하거든요.

“내가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구나. 내가 예수 믿어도 소용없구나.” 이러면 여전히 자기 자리를 계속해서 시도해보는 자리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렇게 시도한다는 자체가 반드시 시도해야 된다는 거예요. 왜? 죄인이기 때문에 죄 모습을 드러내야 되는 거죠.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를 계속해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된다는 말이죠.

내가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전에 지키려고 하는 그 자리마저 성경에서 규정받은 자리에요. 너는 죄인이니까 죄의 솜씨를 부려봐. 부려보니까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것은 다 튀어나오더라. 그러면 그 자리는 내가 마련한 자리가 아니고 성령께서 마련한 자리라면 자리 값을 하면서 살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즐거운 이야기에요.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교리공부를 새삼스럽게 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 인생을 내가 건드려서 될 문제가 아니고 내가 건드리기 이전부터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건드려진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좀 어렵지만 칼빈 예정론, 루터 예정론, 츠빙글리 예정론, 유대교 예정론, 한국교회 예정론 그리고 복음적인 예정론 등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그림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여러 가지 예정론 자체를 죄로 만들어버리는 점선의 예정론이 바구니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끄집어낼 수 있는 예정론을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점선으로 된 예정론. 이게 왜 점선이냐? 인간은 자신을 자아, 자아적 존재, 존재란 말은 어려우니까 나는 나라는 덩어리.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입니다. 이 바깥은 책상이지 나가 아니거든요. 나라는 것은 그냥 나가 아니고 자기의 한계 지어진 나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가 대구 가면 부산에는 없어요. 대구에 나가 있지 부산에는 사라진 나가 되는 겁니다. 나란 어디서 어디까지 규정이 돼있어요. 하나에 덩어리니까. 신체라는 덩어리를 갖고 있으니까.

눈에 보이는 성경책, 교재, 성경의 내용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아중심으로 자아를 경유해서 이해를 해버려요. 지금 여러분이 부산에 오시면서 가로수에 나뭇잎에 몇 개인지 헤아려 봤어요? 안 세어 봤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가로수 괜히 심게 하셨네. 우리와 상관없는 가로수를 왜 심어놨지요? 그만큼 우리가 아는 것은 주님이 준비한 것 중에서 일부만 알지요.

그러면 우리는 뭘 몰라요? 가로수 있는 줄 몰랐는데 가로수가 부러져서 내려앉을 때 그때 우리는 가로수와 나와 그 순간 연결이 되지요. 우리는 우발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필연적 관계 속에서 만나게 하신 거예요. 만나게 되면 우리는 내가 생각한 가로수 없는 나의 세계에서 가로수한테 얻어맞아 본넷이 터지는 순간 가로수와 연관돼있는 나가 되고 그 다음부터는 가로수를 한 번 더 보게 되지요. 가로수 이야기하니까 재미가 없어요?

이십 대 아가씨가 사랑한다고 접근해서 명품 가방을 들고 튈 때 그 다음에 아가씨 사귈 때 뭘 봅니까? 인간은 반드시 현재의 모든 결정은 과거를 참조로 해서 하게 돼있어요. 두 번째 아가씨 만날 때 “아가씨, 혹시 명품 가방 좋아하십니까?” 이렇게 물어본다니까. 첫 번째 당했기 때문에 두 번째는 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한 2개월 사귀다보니까 백혈병이라. 그럼 세 번째 사귈 때 “혹시 집안에 병력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본다니까. 인간, 자아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고 과거의 사건이 층층이 중첩돼있는 거예요. 제가 떠벌이는 모든 말과 행동은 그 사건이 뿜어내는 풍기는 냄새 같은 것이라니까. 과거의 흔적들이 나오는 거지요. 자아라는 게 주님 보기에 하나에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대전수련회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존재는 예수님뿐이고 우리는 존재의 기능으로 환원한다. 우리는 자아를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 나와!” 이러거든요. 자기 여기 있다는 말이거든요.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여기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는 주님께서 우리가 있도록 만든 사건의 중첩된 덩어리가 있는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내 인생 내가 관리한다고 우기는 말도 안 되는 그것으로 “주님 나와! 나는 신의 주권과 상대할 거야.” 주권을 언급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걸 점선으로 이야기해요. 실은 여기 실선이라고 우기는 이것도 사실은 점선에 불과한 거예요. 그때그때마다 인간은 쉴 새 없이 변화되고 달라지는 겁니다. 인간은 정해진 게 아니에요. 정해지지도 않았으면서도 마치 우리가 정해졌다고 여기고 정해진 신이 나를 예정했다고 본 겁니다. 나를 구원하는 주님의 구원이 예정됐는데 우리는 나의 덩어리가 예정됐다고 우기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예정했어요. 예수님 세계를 예정했고 예수님을 예정했단 말이죠.

지난 수요일인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사적 구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 구원입니다. 이 세상을 둘로 나눴어요. 천국이란 세상과 지옥이란 세상에서 천국이란 세상을 만든 동시에 지옥이란 세상도 필히 만들어요. 지옥 없는 천국 없고 천국 없는 지옥 없거든요.

주님께서 세상을 만드는데 우리는 자기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나를 포함된 세계를 따로 만들고 있고 이 세계를 건지기 위해서 신의 주권사상으로 신과 거래와 흥정에 나서는 겁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신께서 만드셨습니다. “방금 그 이야기 누가 하고 있지?” “제가 하고 있습니다.” “네가 누구지?” “제가 여기 있잖아요.” “너는 어디 소속이고?” “소속은 무슨 내가 여기 있다는데. 나만 있으면 되지 소속이 왜 필요합니까?”

이렇게 주장하는데 주님께서는 개인으로 다루는 법이 없어요. 어디에 소속된 개인으로 보는 거예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할 때 야곱은 천국에 소속된 야곱으로 구원하신 거예요. 그게 변화산에 나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무슨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언제 돌아가십니까? 그러니까 엘리야, 모세, 아브라함이고 간에 개인적 구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 나라, 예수님 세계에 소속된 소속원으로서 그들은 주의 일을 한 거예요.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도 그렇게 주의 일을 한 겁니다.

소속이 어디냐고 묻는 거예요. 네가 누구냐고 묻는 게 아니고. 그런데 우리는 어떤 소속을 언급할 이유가 없는 게 우리가 말하는 소속의 출발점은 나라는 덩어리에요. 내가 덩치에서 만들어서 내 몸의 확장이 나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나의 세계는 가로수의 나뭇잎을 세지 않아도 되는 세계, 이 앞의 가로수 나뭇잎을 몰라도 나는 괜찮은 세계에요. 그런데 주님의 세계는 가로수가 다 심겨져있는 세계, 그것도 나뭇잎사귀가 수천 개 달려있는 그 가로수가 있는 세계거든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가로수를 빼고 생각한 주의 주권이고, 주님의 주권은 가로수가 심어져있는 주의 주권이고. 같은 게 아닙니다. 이게 달라요.

말썽꾸러기가 없는 학원과 말썽꾸러기가 있는 학원, 내 목적과 부합되는 걸 따지는 학부모가 생기는 그런 계기, 그럴 때 갑자기 화를 낼 때 모든 주의 주권인데 왜 화를 내요? 원래 주의 주권이면 화가 안 나야 돼요. 따라서 여러분 차가 길의 실선을 넘어가면 위법이지요. 그런데 여기 점선이 있으면 지 마음대로 왔다갔다해도 괜찮지요. 우리 인생은 실선이 아니고 점선으로 돼있는 주님이 마음껏 침입하고 주께서 마음대로 내 인생을 뺄 것 빼고 병들게 하고 아프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님의 주권이에요.

그래서 주권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주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망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주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 능력으로 알 수 있는 주권은 날아가 버렸어요. 다만 이스라엘이 느끼는 것은 우리의 주권은 소용없었단 말이죠. 우리가 주장한 주권과 상관없이 주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는 사실. 그러면 진정한 주권은 점선을 통해서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굳혀진 주권, 이것은 아들만 알지 아들 외에 어떤 인간도 모르는 주권. 요한복음 5장에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아버지께서 자기 택한 백성을 살리는 것처럼 나도 택한 자를 살린다고 돼있어요.

여기 교재에 보면 츠빙글리 예정론, 루터 예정론, 칼빈 예정론과 함께 칼 바르트까지도 언급해놨어요. 안셀무스도 나오는데. 133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 [그의 관심은, 구원이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며 우리의 신앙이나 자비와는 무관하다는 데 있다.]

츠빙글리가 개혁주의에 속하거든요. 그래서 천주교를 반대했거든요. 천주교 반대했다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을 반대한 것이고, 그 당시 모든 제도와 조직을 반대한 거예요. 츠빙글리가 원래 수도사였는데 설교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회심하고 기도하고 헌금해도 구원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정된 사람만 구원받습니다.”라고 해서 수도원에서 채용을 안 했어요.

옛날에는 수도원이 성지 순례하듯이 순회하거든요. 그 수도원에 취직한 거예요. 설교해서 순례자한테 헌금을 받아야 운영이 되는데 돈 빼내라고 설교자로 세웠는데 츠빙글리가, 여러분이 순례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하니까 그 소문 듣고 안 오는 거예요. 츠빙글리가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자에요. 신부의 미사나 참회도 소용없어요. 믿음도 소용없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예정된 자만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츠빙글리 신학 확 들어옵니까?

첫째 시간과 연관해서 해볼게요. 마지막 때에 교리를 가지게 되면 구원받습니까? 교리로 구원 못 받지요. 교리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지 않지요. 츠빙글리가 우리가 죄인이라고 했습니까, 신의 주권과 신의 예정을 믿으라 했습니까? 적어볼까요? 중요한 건데. 츠빙글리가 주장한 것이 어느 쪽입니까? 신의 주권을 이야기했지요. 이것은 교리가 되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첫째 시간에 츠빙글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성경 이야기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러면 나는 죄인이라고 하면 구원받습니까? 나는 죄인이라는 교리 믿으면 구원되는 것 없어요. 마지막 때는 예수님 마음대로 다루기 때문에 구원될 자는 십자가 뜻대로만 구원돼요. 우린 안 되는 거예요. 새로운 질서 앞에.
 
여기서 나는 죄인이라 할 때 아까 제기했던 문제의 응용문제 해봅시다. 나는 덩어리다. 덩어리는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에요. 무조건 나에요. 서울 가도 나고, 부산 가도 나고, 미국 가도 나에요. 그럼 내가 교리를 들었다. 죄인이라고 해야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들었어요. 그러면 내가 나를 죄인으로 어떻게 만들어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보세요. 나란 덩어리가 있다면 죄인을 어떻게 만들어요. 그래야 십자가 피로 용서받고.

그럼 내가 나를 어떻게 죄인 만듭니까? 우리가 만들어내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선악과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생명나무가 우리를 건드려줘야 질문이 나오고 그 질문은 나의 정당성, “내가 이 세상 사는데 이렇게 힘들게 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잘못, 무슨 죄를 지었기에 힘드냐?”라는 질문을 하게 되지요. 신앙생활의 시작은 질문부터 해요. 이 질문이 원통과 절통과 분통으로 나온다니까요. 그냥 살아버리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놓고 돈 먹는 도박에 빠지는 거예요. 주께서 건드려준다고.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왜 힘들게 살게 만듭니까?” 주께서 하는 말이, “네가 죄인 되어라.” “그럼 죄인 되지요.” 그 다음부터 선악과적인 죄인 만들어요. 성경을 활용해요. 성경을 율법적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무시로 기도를 안 했구나. 감사를 안 했네. 구제를 해야겠다. 이게 바로 주님한테 버림 받은 바리새인이 한 거예요.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기도하고. 금식한다는 말은, 나는 죄인이라는 뜻이고, 구제한다는 것은 착한 일 하겠다는 것이고, 십일조하는 것은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나는 돈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그건 지금 자기 자랑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나라는 덩어리가 문제 되는 거예요.

그래서 츠빙글리의 공부가 중요한 거예요. 츠빙글리는 말하기를 신의 주권을 인정하라. 그러면 네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뭘 심하게 차이 둡니까? 천주교 신부들, 미사들, 헌금하는 것들, 기도하는 것들, 회개하는 것들, 참회하는 것들, 그래서 구원받는 게 아니야. 순례객? 치워라. 하지 마라. 구원은 오직 신의 주권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츠빙글리는 내 말에 반박하려거든 반박해봐라.

신의 예정을 반박하려면, 같은 인간의 논리로 반박이 되려면, 신의 주권으로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간의 행함으로 들어가야 된다. 이럴 경우에만 츠빙글리에 대해서 반박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츠빙글리는 더욱 더 개혁주의, 오직 믿음이잖아요. 신앙생활하는 믿음이 아니고 신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오직 믿음이라니까요. 츠빙글리의 논리는 이겁니다. 구원은 신으로부터 온다. -끝-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오늘날 교회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보세요. 우리가 츠빙글리나 루터나 칼빈을 공부할 이유가 있지요. 그들이 내세우는 교리라는 것이 이미 그전에 언급을 해놓은 거예요. 우리는 그런 것 몰라도 되고 내가 성령으로 성경만 해석하면 된다고 생각했잖아요. 내 나름대로 해석한 모든 업적들이 이미 선배들, 바리새인들이 깔아놨는데?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겼지. 자기만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교재를 보니까 주권론이라 하는 것이 얼마나 비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인지 노출되는 거예요.

루터는 말합니다. 예정론은 십자가를 통해서 예정론이 나온다. 이런 루터의 예정론을 크게 부각시키는 예정론이 칼 바르트의 예정론이에요. 칼 바르트의 예정론은 루터와 같은 시기의 칼빈의 예정론을 치기 위함이란 말이지요. 칼빈의 예정론은 구원을 위한 예정론이에요. 방금 츠빙글리는 구원을 위한 예정론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이지 그걸 이용하라는 말이 아니고.

츠빙글리는 뭐냐?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의 예정대로 움직이니까 인간들아. 저 사람이 예수 안 믿는다고 할지라도 구원되는 거예요. 신이 예정된 사람은 예수 안 믿고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고. 칼빈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정되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이고, 루터는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예정론이 나온다는 거예요. 십자가의 뜻을 증거하기 위한 예정론이라는 것이 루터의 예정론이고. 그런데 그런 소리를 듣는 인간들은 자기 구원에 대한 욕구의 차원에서 그런 것들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고.

세리가 고백했던 “주여, 제가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죄인입니다.”라고 할 때 주님께서 의인이라고 했잖아요. 바리새인은 그 앞서 스스로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동네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134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줄부터 보겠습니다. [츠빙글리는 더 담대하게 하늘나라에는 성경의 족장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사도들 외에도 프랑스의 선임 왕들과 비기독교인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츠빙글리의 보편주의는 종교다원주의적 이해에 기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성에 근거된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교황의 운명보다 세네카(스토아학파 윤리학자)나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물론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구원의 근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에 대한 사고는 루터와는 달리 츠빙글리를 그리스도와 성례에 대한 다른 이해와 강조로 나가게 한다. 츠빙글리는 어거스틴을 이해함으로써 서구신학의 지배적인 전통이 되어 온 예정의 문제를 섭리와의 관련에서 파악했다. 칼빈에게서의 예정은 섭리론이 아니라 구원론과 교회론의 맥락에서 다루어짐으로써 예정론에 대한 운명론적 사별을 봉쇄하는 데 진일보하게 된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섭리를 ‘예정의 어머니’로 파악함으로써 섭리론에 구원론적이며 기독론적인 성격을 간과하지 않았다. 고전적 예정론은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써 타락했음을 말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타락 전 예정론이냐, 타락 후 예정론과 관련되어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칼빈에 따르면 어거스틴은 타락 후 예정론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정론이 츠빙글리 예정론과 동일해요. 사실 동일하다고 하지만 하나 추가한 거예요. 타락 전 예정론 뜻도 섭리적으로 이미 가담이 돼있습니다. 뭔 뜻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보세요.[칼빈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타락했지만 그러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타락 전, 타락 후 예정론 봅시다. 우선 타락 후 예정론을 먼저 언급해야 돼요. 타락 후 예정론은 누구나 이해되기 때문에. 타락 후 예정론은 인간이 타락하고 난 뒤에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지요. 그 다음에 죄인 되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음이 확정되었지요. 그 뒤에 죄인 중에서 특정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특정 인간을 버리기로 작정했을 때 죄인들이 반발할 여지가 있습니까? 반발할 여지가 없지요. 어차피 그들은 지옥 가야 마땅하기 때문에. 그래서 타락 후 예정론은 납득하기는 쉬워요. 그리고 구원 안 됐다고 반발할 수 없지요. 그래서 구원 안 됐다고 반발하는 것에 대해서 해답을 주는 것이 타락 후 예정론입니다.

그런데 타락 후 예정론에 문제점이 있어요. 창세전에 이미 버리기로 작정됐다는 게 문제에요. 인간이 죄 짓기 전에 버리기로 작정돼있다면, 뭔가 잘못을 저질러야 수긍이 되는데 잘못을 저지르기 전부터 구원 안 되기로 해버리면 얼마든지 반발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뭔가 시켜보고 안 될 때 매 맞는 건 당연한데 시키지도 않고 때리면 인간의 자기 행위에 대한 죄에 대한 책임이 자기에게 주어질 수 있는 근거가 없잖아요. 사람이 뭘 하고 난 뒤에 잘못 했을 때 맞으면 되는데 하기도 전에 매부터 맞고 시작하면 얼마나 억울하냐 말이죠. 이러한 타락 전 예정론은 로마서 9장에 합당하죠.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뭔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는 사랑받고 하나는 버림받았다는 것에 합당한 거예요.

그럼 목사님은 어느 쪽입니까? 둘 다 말이 안 돼요. 전과 후라는 개념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주님 나라에 전과 후는 없습니다. 창세전이라는 말은 창세 이전이란 말이 되기는 되지만 창세 이전의 세계가 아니고 사실은 창세에 있던 모든 원리를 통괄하고 지배하는 영역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전과 후는 인간의 육신이 갖고 있는 시간개념에서 나온 겁니다. 시간의 흐름. 그리스도 안에서는 전과 후가 아니고 동시성입니다.

대구에 극장이 두 군데 있습니다. A라는 극장이 있고 B라는 극장이 있어요. 조조 9시 20분에 영화를 상영했어요. 두 개의 영화가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후입니까? 둘 다 아침 9시 20분인데. 이것은 동시에 상영하지요. A라는 극장에서 보고 나왔습니다. B라는 극장에서 보고 나왔습니다. 둘이 시내에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영화 본 것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전과 후가 생기지요. 영화는 같은 시간에 봤지만 이야기하는 순간 전과 후가 생기지요. 주님께서 벌인 사건에 대해서 인간의 입으로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여기서 전과 후를 도입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개인적으로 내가 스물네 살 때 친구 만나서 영화 이야기를 했다. 그게 2014년 4월 15일이었다. 그 사람이 태어난 건 1994년이었다. 태어난 것은 전이고 영화 이야기한 것은 후가 되겠지요. 그런데 주님 안에서는 이것을 전부 다 동시성이라고 해요. 예수님은 시간이 없다고 했지요. 알파와 오메가니까. 예수님에서 뿜어내는 것은 시간적 요소로 진행됩니다. 언제 태어나야 되고, 시내에서 친구 만나서 영화 이야기해야 되고.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은 여기 있다면, 인간이 시간적 요소를 갖고 있는 덩어리가 주님을 만나려고 하면 시간적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주님을 경유하는 순간 내가 태어난 사건도 주님 안에서 태어났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도 주님 안에서 일어났다면 모든 시간적 요소가 결국 이스라엘 멸망처럼 내가 죽는 순간이 올 때 태어난 나도 죽고, 친구 만나서 영화 이야기한 나도 죽는다면 결국 죽음 안에서 모든 것은 사건의 중첩으로서 도서관에 편집이 되지요. 하늘나라 도서관에 꽂히게 되겠지요. 그러면 같은 장소에 꽂히게 되는 거예요. 그걸 생명책에 기록이 된 거예요. 기록이 먼저 됐고 주님 안에서 펼쳐지는 거지요.

사람들이 타락 전, 타락 후를 논하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 요소로 구원을 어떻게 따낼까, 구원을 어떻게 이해할까와 관련돼있습니다. 제가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쉽게 할게요.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봤지요. 어디서 봤습니까? 아들 잡을 봤어요? 죽을 때 봤어요? 보고 기뻐했다니까.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은 죽은 자에요, 산 자에요? 산 자지요. 그럼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은 살아있지요.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주를 만나는 게 당연하지요. 하늘나라에는 시간이 없지요.

엘리야가 선배입니까, 모세가 선배입니까? 지상에서는 모세가 선배지만 그런데 변화산에서 같이 만났지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전부 동시성이지요. 같이 일어났지요. 같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같다는 말이 아니고 시간 요소를 뺀 상태에서 같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같은 차원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는 시간적인 전후 차원, 시간의 순서대로 일어나지만 주님은 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시간적 요소를 집어넣지 마세요. 하여튼 그 세계에서는 같이 일어난 거예요. 시간적 요소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시간적 요소가 있어야 돼요. 우리는 시간적 요소를 갖고 있는 육신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시간적 요소로 상대합니다. 그래서 죽고 난 뒤에 사흘이란 기간을 두고 부활해야 돼요. 그것은 바로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구원될 수 없다. 완전히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몇 년에 구원되는 것과 상관없이 나이가 몇 살인지 상관없이 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에 도달하게 돼요. 먼저 도달한 사람, 선배가 텃세 부릴 수가 없어요. 몇 년에 구원받은 것과 상관없이 구원받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같은 시간대에 영원한 시간 속에 같이 있게 되는 겁니다. 같이 산 자가 돼버려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를 강조한 것처럼 고함지르는 것 같은데. 조용조용 이야기하겠습니다. 선악과 사건이 이미 우리의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한테 들어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이 지금부터 이천 년 전에 있었잖아요. 하지만 이미 성령 안에서는 그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고 선악과 사건도 반복되고. 여리고 성 무너지는 것도 우리 안에서 같이 연동되어서 같이 연결되어서 같이 진동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백부장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 옆에서 일어난 이야기라니까.

어리석인 자여, 네 영혼 누구 것이 되겠느냐? 옛날이야기라고 덮어버릴까요? 주께서 성령 안에서 어리석은 자여, 네 영혼을 오늘 밤에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우리 안에 반복시켜서 나한테 적용되는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시간과 무관하게 늘 우리에게 반복되는 거예요. 홍해 사건 버릴까요? 지금 홍해 사건이 우리 안에 계속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여리고 성, 요단 강 사건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주께서 성령 안에서 말씀의 사람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끝 날까지 주님이 함께 있으면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되고 주님의 증인이 되면서 주님이 하시는 일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면,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주께서 예정된 구원의 상황, 구원의 상태, 주 안이 되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어거스틴과 칼빈은 오해한 거예요. 만약에 루터가 십자가를 통해서 예정론이 온다고 그것만 이야기한다면 루터도 오해한 거예요.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예정된 거예요. 에베소서 1장 4절,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정론의 정답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예정됨이 우리 안에 반복해서 작용하고 있음을 저희들이 증거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