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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강의-루터 칼빈신학 1403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1. 29. 16:17

2014-03-11 17:45:51 조회 : 794         
루터, 칼빈 신학 140311 이름 : 이근호 (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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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4.♡.134.60) 14-03-13 13:09 
20140311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1-루터, 칼빈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종교개혁시간인데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이지만 천주교나 개신교와 관계없는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종교개혁의 시작이라는 자체가 그들한테는 별로 다가오지 않지요. 그 기독교나 이 기독교나 똑같은데 자기들의 정치적인 이권다툼 정도밖에는 생각하지 않지요. 그러나 개신교 입장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마치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처럼 드디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고 참된 진리로 인도한다는 그러한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동안 어둠이었지만 어둠에서 빛이 나왔다. 그럼 그전의 사람들은 다 지옥 갑니까?

그래서 개신교에서 이렇게 해요. 그전에 사람들이 다 지옥 갔다고 할 수 없지만 그들 가운데서 성령이 임한 사람이 있겠지만 정치의 기세에 눌렸다, 주눅 들었다 하거든요. 그리고 역사의 주류로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미하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 논리라면 이것도 생각해봐야 됩니다. 개신교 이루고 난 뒤에 개신교가 많은 나라에서 천주교 자리를 차지했잖아요. 차지했으면 개신교가 정치적인 종교가 된단 말이죠. 천주교에서 정치적인 권력의 주도권을 가졌기 때문에 참된 신앙인이 숨도 못 쉬고 있었던 그 상황이 개신교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동일하게 일어날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천주교, 원래 로마교회나 그리스 정교회 같은 것이 처음부터 주변 역사적 상황을 용납한 것이 아니고 싸웠단 말이죠. 무신론, 다신론과 싸워서 정치적인 자리를 마련해서 커져서 사상적으로 전 로마제국을 지배한 셈이 된단 말이죠. 그게 문제라면 교리는 문제없는데 정치적 상황으로 주도권을 쥐었다는 게 문제냐? 그게 만약에 문제라면 그건 기독교도 똑같은 상황이 될 게 뻔하다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게 문제라면 개신교가 천주교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을 천주교의 비리를 알았더라면 차후에는 답습이 되지 않는 자체적인 방지대책이 마련되지 않아야 않습니까? 그래서 방지대책을 마련한다고 시도한 게 신앙고백서 작성입니다. 신앙고백서 작성이 일종에 심사하는 거예요. 우리 네덜란드는 개신교입니다.

심사할 때 “당신은 ~는 아니지요?”라고 묻지요. “당신은 교황 믿는 천주교인은 아니지요?”라고 묻는 거예요. “그럼 당신은 뭘 믿습니까?” “우리는 새로운 개신교를 믿습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서에 사인을 해야 되지요. 그러면 그런 식으로 우리 편이라고 확답이 되는데 그런 것을 천주교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단단히 했지요. 삼위일체 교리 나올 때부터 단호하게 했어요. 이것 안 믿으면 이단이라고 정치적 보복을 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시다. 개신교가 정치적으로 천주교와 어떻게 갈라지고 어떻게 존재했느냐? 이것보다도 사실은 이걸 생각해야 돼요. 둘로 갈라졌으니까 같은 성경책 놓고 같은 역사적 상황 놓고 교리가 같을까, 다를까? 그것만 생각하면 되겠지요. 어느 쪽이 숫자가 많으냐? 어느 세력이 기세를 드러내느냐? 이것은 패션이나 유행은 그때 기분이지 지나가면 유행도 사그라지는 거예요. 신천지가 요새 뜨고 있는데 신천지가 얼마나 교세가 크냐는 것은 별 의미 없어요. 신천지가 이야기한 교리가 뭐냐가 중요하잖아요. 한때 위세 떠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렇게 보자는 거죠. 개신교라는 것은, 천주교가 너무 박해하고 심하게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참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정치적 운동이다. 그렇게만 개신교를 본다면 어떤 문제가 생겨나느냐 하면,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하기 이전에 개신교가 있었느냐하는 문제가 또 등장해요.

왈도파가 있었고, 위클리프라는 영국의 옥스퍼드 학장이 있었고, 그 다음에 체코에서 유명한 후스파가 있었고, 이태리에서 사보나놀라, 사실 이 사람은 개혁주의자라기보다도 예언가, 곧 종말이 온다고 외쳤던 사보나놀라. 제일 빠른 게 왈도파로 1170년이고, 위클리프는 1350년경이고, 후스는 1400년경이라고 보면 되고, 사보나놀라는 1450년경이라고 보면 돼요. 그리고 루터는 1517년이지요. 과연 이 사람들이 개신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돼요.

지금 제가 뭘 따지느냐 하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잖아요. 그게 종교가 될 수 있는 요건이 있는 겁니까? 도서관 출입구에 이것 하나 붙이면 종교가 되는 거예요. 벽보 붙이는 게 종교가 되는 요건이 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왜 최초냐 말이죠. 교황을 반대했기 때문에? 교황을 반대한 것은 왈도,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놀라, 이 사람들도 다 반대했어요. 왈도는 평신도고 위클리프는 대학학장이고, 후스는 신학자고, 사보나놀라는 신부고.

루터 이전에 이 사람들이 교황을 반대했어요. 그 당시에 로마교회가 교황중심으로 이미 갖추어져 있었지요. 이걸 그들은 교회라고 생각한 거예요. 성경에 교황이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말이 안 나오지요. 그렇다면 개신교가 이런 교황중심의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등장한 개신교도 교회라고 우길 수 있는 근거는 없지요. 성경에 안 나오는 것으로 교회가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그게 성경적이냐 이 말입니다. 반대를 했다고 진리가 됩니까? 그건 아니지요. 교황체제의 교회를 반대했으니까 우리는 정통이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말이죠. 둘 다 정통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잖아요.

그러면 제가 말씀드릴게요. 성경에서 교회라는 것은 누가 만들고 자시고,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붙이는 것이 교회 되는 요건입니까? 아니지요. 이것은 정치적인 하나의 이벤트에요. 그러면 애초부터 교회는 이미 성령에 의해서 교회가 꾸준하게 그것도 아무 하자 없이, 문제없이 이어져왔지요. 거기에 대해서 천주교, 개신교 모두 교회입니까? 교회라고 하면 교회가 아니고, 교회가 아니라고 하면 교회고 그렇지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지금 개신교 신학교, 장로교, 감리교 신학교에서 종교개혁에 자꾸 강조점을 주잖아요. 종교개혁 같으면 왈도는 프랑스, 위클리프는 영국, 후스는 보헤미아, 지금의 체코, 사보나놀라는 이태리, 이런 데서부터 운동이 일어났을 때 개신교라고 말을 못합니까? 현재 개신교에서. 왜 자꾸 루터와 칼빈이 등장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해놓고 사실은 성경으로 돌아간 게 아니고 성경에 대한 해석한 사람들에 돌아가서 스톱이 돼버린 거예요. 여기에 이 사람을 모델로 삼고 학문적 후배들이 지금의 개신교를 만들어버렸어요. 그럼 기독교로 구원받지 천주교로 구원 못 받는다는 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지요. 말이 될 리가 있습니까.

제가 서론 격으로 먼저 이 말씀을 드린 겁니다. 이게 신학교에서 개신교이기 때문에 개신교 위주로 역사를 구축하는 것은, 항상 역사란 반드시 역사를 구축한 자의 정당성과 합리성과 선입관이 내포된 역사인데 진짜 역사는 부정당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역사는 십자가에 부정당해야 돼요. 하나님의 묵시적 능력, 구원의 능력 앞에 부정당해야 되는 거예요. 개신교라고 하면서 백날 십자가라고 언급하면서도 막상 자기들은 십자가 앞에 부정당하지 않으려는 그런 역사를 쥐고 있다면 그 자체가 십자가에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문제점이 뭐냐? 개신교를 못 알아본 게 문제가 아니고 천주교는 그들의 교황교회를 십자가 앞에 부정하지 못하는 게 잘못이에요. 그리고 개신교의 잘못은 뭐냐? 같은 잘못을 또다시 똑같이 저지르고 있는 거예요. 유럽의 기독교를 반분, 너만 차지하지 말고 갈라 먹자는 식이에요. 갈라 먹자가 무슨 진리입니까.

다시 생각해봅시다. 왜 왈도,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놀라, 이 네 사람들의 공통점은 교황제도의 부정이에요. 교황제도의 부정이니까 줄줄이 따라오는 게 다 부정돼요. 고해성사의 부정, 성만찬도 부정. 물론 후스 같은 경우에는 성만찬은 부정하지 말자는 귀족파와 성만찬마저 부정하자는 강력파가 있어요. 나중에 그들이 전쟁해서 몰살당했어요. 몇 십 년간 반짝 독립 국가를 했는데 다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종교 거론해서 독립국가 됐잖아요. 네덜란드 마찬가지고. 스위스는 칼빈이 와서, 프랑스 사람이 스위스로 도망친 거지요. 이민자지요. 거기서 스위스라는 독립적인 나라를 만들고 정치적인 협상에 의해서 국가로 인정을 받아요. 여러 가지 수난도 있었지만 나라를 마련하니까 그때 1648년 회담에 의해서 종교를 인정한다. 종교를 누구 인정하고 누구한테 인정받아야 됩니까? 천사가 인정해줘요? 왜 사람한테 인정받아야 돼요? 인정받으면 천국 가고 인정 못 받으면 지옥 가는 가요? 인간이란 주변 환경의 권력에 주눅 드는 것도 문제지만 통치를 자진해서 받고자하는 그것도 더 문제라. “때려주세요.” 이런 식으로. “당신이 인정해주면 그때부터 안심하겠습니다.” 이런 것.

교재에 루터를 봅시다. 우리가 공부해야 될 것은 그들의 역사적 그런 것은 해봐야 소용없는 짓이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루터가 성경을 어떻게 봤느냐가 더 중요하고 칼빈이 어떻게 성경을 봤느냐가 중요하고 그것인 그전에 천주교 신학자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가 중요한 거예요. 루터가 메시아가 아니니까. 칼빈이 메시아 아니지요. 칼빈이 메시아도 아닌데 왜 신학교에서는 칼빈, 칼빈 하는지 내 참. 칼빈이 십자가 졌습니까? 아니잖아요.

루터(1483~1546)를 봅시다. 루터신학이 몇 페이지로 함축이 돼있기 때문에 문장 하나하나 그냥 넘어갈 문장이 없어요. 루터 이전에는 그 당시 분위기가 과연 하나님이 의미가 있느냐? 차이점을 보세요. 하나님이 의미가 있느냐? 이게 그 당시 사회전반 분위기였어요. 신은 천주교가 독점했지요. 그러면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가서 성만찬하고 세례 받고, 일곱 성사하고 죽으면 천국 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일상에서는, 지난번에 했잖아요. 하나님을 위에 올려놓고 밑에서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분위기가 바뀌었지요. 이미 이때는 십자가운동 이후입니다. 십자가전쟁 이후에는 무역이 발달했기 때문에 농사지어서 귀족이 되는 방법이 있지만 그게 봉건 영주고, 돈 벌어서 귀족처럼 살아도 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 일어났던 시대에요. 영국에서 1515년 명예혁명이 일어났고 분위기 자체가 서서히 도시 부르주아가 강조되는, 상업이 강조되는, 땅덩어리 없어도 큰소리칠 수 있는 시대에요. 그전에는 땅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아요. 왜냐하면 봉건사회에서는 장원제도라 해서 땅에서 나온 것만 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제는 돈 번다는 것이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상업이 전문화되면서 상업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가 서서히 기지개를 펴려고 하면서 새로운 계급이 등장한 겁니다. 그 새로운 계급이 도시 부르주아고 도시민이고 그들이 힘을 합쳐서 국왕과 대립적인 힘을 구축할 때 비로소 그들은 국왕도 무시 못 하는 민주제도, 의회가 드디어 발생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에게 종교는 신은 다들 인정하니까 구태여 신이 있다는 게 자기 일상에 의미 있느냐 이 말입니다. 결국 의미 있다, 없다? 교회 나가서 예배드리는 그걸로 됐다. 결국 신은 의미가 없는 거죠. 오늘날 교회 나오는 현대인들 보세요. 목사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이 의미 있습니까? 기도하면 하늘에서 돈이 떨어집니까? 내가 생존에 필요한 걸 하나님이 제공해주느냐 이 말입니다. 안 해주지요.

그러면 내 생존과 생계문제는 하나님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잖아요. 내가 밥 빌어먹고 사는 게 일차적인 문제라면 신은 있기만 있을 뿐이지 나한테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서서히 근대주체의식이 성립될 시기기 때문에. 신을 안 믿는다는 게 아니고 믿어요. 교회 다녀요. 하지만 신학적으로 신을 올려버렸다니까. 헌금만 받으시고. 일상을 꾸려나가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에서 하나님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것이 그 당시 분위기였습니다.

①하나님의 의미가 있느냐? 의미가 없다. ②하나님이 하시는 의미가 뭐냐? 다르지요. 하나님 자체가 의미 없는 거고 루터는, 하나님이 어떤 뜻으로 이 세상에 펼치느냐? 하나님이 일하시는 의미가 뭐냐? 벌써 뉘앙스가 다르지요. 하나님이 이런저런 일을 하는데 무슨 뜻으로 그런 일을 하게 하십니까? 그러면 그 일은 나의 일이 돼요, 하나님의 일이 돼요?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의 의지라 합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나의 의지를 능가하고 덮칠 때 나는 나의 인생을 나름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의미를 갖고 있는 일에 참여하는 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1번 같은 경우에 “하나님 자체가 의미가 있어?” 그런데 갑자기 이사를 간다. “하나님이여, 언제쯤 이사하는 게 낫겠습니까?” 이럴 경우에는 의미 있는 걸 내가 만들고 그 다음에 알쏭달쏭하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는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는 식으로 내가 결정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식이 되는 것이 1번이라면,

2번은 자기가 결정한 건 있다, 없다? 아예 없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면, 결국 나는 내가 사는 게 아닌 거예요. 만약에 내가 산다면 그 자체가 주님의 일에 훼방이 되고 방해가 되는 겁니다. 루터는 그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천주교를 반대한다. 교황을 반대한다. 그러면 자기가 자동적으로 착한 사람이 됩니까? 아니지요.

122페이지 밑에서 일곱 번째 줄에. [‘신학 자격증’은 대학에서 주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주는 것이다.] 대학이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대학이라는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역사적 전통을 다 끊어버리지요. 그러면 성령은 전통에 안 메이지요. 바람 같이 부니까. 결국 루터의 신학은 모든 원인을 잘라버리고 이 세상에 연결된 바탕을 다 잘라버려서 하나님은 일하지만 하나님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모토입니다. 하나님은 있어도 없다. 루터의 신학은, 하나님은 있어도 우리한테는 없다. 있어도 없다는 말은 존재로 따져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 나타내고 싶을 때만 나타나는 거예요.

그게 123페이지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지만 하나님은 숨어계시고, 나타나실 때는 나타나시는 것이므로 아무데나 계신다 할지라도 말씀과 신앙이 없는 곳에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루터 이전의 신학은, 하나님은 늘 계시고 하나님은 산천초목을 키우시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아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 속에 숨어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십자가로 나타나는데 십자가로 나타난다는 말은, 십자가가 객관화되어 나타난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의 어떤 주관적인 퇴보와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 계시며, 어디에 계시기를 원하실까? 루터의 사상은 하나님의 편재를 시인하면서도 편재를 부인하는 것인데, 이 시인과 부인은 곧 특수한 장소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그 특수한 장소는 어디서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특수한 장소란 말은 사건이죠. 사건화 될 때만 나타나는데 그 다음에, [그런데 그 특수한 장소는 객체로서의 하나님의 일방적인 임재와 현현의 장소라기보다는 그를 찾는 인간의 주체적 태도와 관련돼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타난 객체뿐만 아니고 객관으로 인하여 찾고자하는 주관 자체가 바뀌는 현상도 동반해서 나타난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물으면, 바로 하나님은 십자가 뒤에 숨어있기 때문에 나타날 때는 십자가로 나타나거든요. 십자가에 달린 건 사람이지요. 이 사람은 아버지에 대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그 의미를 동반해서 나타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타나는 동시에 그동안 하나님을 찾고자 했던 나의 욕망과 욕심이 부정당하는 현상을 유발시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목사님들 이해되실 거예요. 워낙 십자가 복음을 잘 아시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존재로 따지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될 거예요. 하나님이 어르신인데 그 어르신이 나타나면 나타나는 거지 그게 주관이고 객관이고 뭐. 나타나는 자체가 객관인데. 그러나 루터는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 없이 나타나는 하나님이 돼버려요. 십자가 사건 없이 나타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오늘날 신학으로 말하면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면 언약을 앞장세우지 않으면 절대로 그 하나님은 가짜라는 거예요. 루터가 대단하지요.

천주교는 하나님의 존재로 어떤 조직을 만들었어요. 신은 존재한다.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증거가 있을 것인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황과 주교와 신부를 주셨고, 그들이 교회법을 만들고 전통을 세우게 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만든 교회기 때문에 그 교회에 등록해서 지시에 따르면 죽어도 천국 간다. 이게 천주교거든요.

제가 방금 그것이 천주교라고 이야기했지요. 오늘날 개신교는 아닙니까? 개신교도 마찬가지지요. 루터에 의하면 뭐가 문제입니까? 그들이 존재로부터 시작해요. 내가 여기 있는데 신이 만들어서 있다. 따라서 내가 여기 있으니 신이 있을 것이다. 이 자체를 루터는 이걸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십자가가 빠졌기 때문에. 십자가는 숨어있는데 내가 여기 있음에 그냥 있어버리면 존재와 존재의 유비가 돼버려요. 그래서 루터교 신자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존재와 존재의 유비가 천주교고, 개신교는 신앙의 유비라 했어요.

지금까지 강의한 걸 다시 하겠습니다. 제가 강의하면서 이렇게 했지요. 하나님 의미 있나? 이건 제가 말을 끄집어내서 우리가 생각해보는데 사실은 말을 안 끄집어내도 교인들이 교회 올 때만 하나님 생각하고 평소에는 하나님 생각합니까? 바빠서 못 하지요. 지금 하나님은 나한테 중요한 의미가 못 돼요. 내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야 되니까. 내가 자식들과 살고, 밥 빌어먹고 살고, 사업해서 살아야 되니까 하나님 찾는다고 돈을 줍니까, 밥을 줍니까? 아무것도 안 줘요.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때나 개혁주의 당시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요.

그런데 루터가 하나님이 의미 있느냐고 묻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일하심의 의미가 뭐냐고 한 거예요. 그러면 내가 여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의미에 속한다, 안 속한다? 안 속하지요. 그 의미가 뭐냐? 그 의미가 십자가라는 겁니다. 천주교 같으면 교회 있음이 의미고, 오늘날 우리 같으면 내가 밥 빌어먹고 사는 게 의미라고 보고, 어떤 신학생 같으면 내가 졸업해서 어느 교회에 취직해서 부교역자로 사는 게 의미지만.

루터는 그런 것으로 하나님과 엮이지 말란 말이죠. 하나님은 십자가 뒤에만 계시기 때문에 나타날 때 십자가로만 나타나는 게 하나님이지 자꾸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이러지 말란 말이죠. 강도가 목회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강도는 뭐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강도가 달린 장소가 십자가지요. 만약에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십자가에 나타난다고 한다면 강도 두 사람 다 낙원에 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객관성이 주관과 관련돼있기 때문에 옆에 같이 달린 강도 가운데 한 사람만 구원받았지요.

그렇다면 주님이 나타난 십자가는 객관적 십자가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우리 영혼 안에 나타나는 그 일을 성령이 한다고 보는 겁니다. 이제 루터신학 이해됐지요. 대학에서 목사 자격을 주는 게 아니고 왜 오직 성령이냐 하면, 바로 그 성령이 십자가 영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는 성령은 루터에 의하면 없지요.

그런데 그 뒤에 칼빈은 루터의 신학과 거의 반대에요. 칼빈은 천주교 신학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을 답습했다고 보면 됩니다. 칼빈은 삼위일체로 봅니다. 삼위일체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을 나란히 세워놔요. 갑바도기아 세 신학자에 의하면 상호 소통하는 식으로 삼위가 활동하거든요. 그게 128페이지에 나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의 신학대로 ‘속성의 상통’으로서의 인성과 신성을 설명한다.]

예수님을 의미할 때 모든 일을 루터는 성령에 의해서 하잖아요. 칼빈은 성령에 의해서 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신성에 준해서 일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은 십자가 영으로 오는 게 아니고 성령은 독자적으로 따로 일해요. 예수님도 따로 일하고. 우리는 성부 믿고, 성자 믿고, 성령 믿으면 돼요. 그런데 루터는 오직 십자가만. 이제 그 신학 차이를 알겠지요.

칼빈의 신학에서 주관이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인간 스스로가 주관을 갖추면 돼요. 이게 어거스틴, 아퀴나스 사상이에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를 받아서 자율의지 또는 자유의지에 의해서 스스로 믿음의 체제를 갖추어나가면 그게 은혜고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루터는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터지고 십자가 능력이 터지는 그 현장으로써 우리 주체가 쓰인다는 겁니다. 그때는 언약이라는 것이 발달되기 전인데 지금 우리는 그것을 언약의 핵심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교재 124페이지에 보면, 제가 일부러 에라스무스의 신학과 루터의 신학을 비교해놨어요. 에라스무스의 신학이 뭐냐 하면, 123페이지 밑에, [옛날에 자연법이 있었는데 그건 고전시대다. 그건 행위법이고 모세의 법이었는데 이제 신약에 와서는 은혜의 법이다. 따라서 자연법이라는 모세의 행위법에서 은혜의 법으로 발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그 점을 따져봅시다. 지금 에라스무스는 뭘 생각합니까? 신이 나에게 의미 있을 때 의미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때 신이 있다는 거예요. 신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충족시켜준다는 의미에서 신은 꼭 믿어야 될 분이고 필요한 분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럼 인간은 완전히 되기를 원하지요. 방법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행함의 법을 주시고 신약에 와서는 은혜의 법을 주셔서 행함에서 은혜로 나가면서 드디어 완전에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124페이지에 보면. [에라스무스는 이 완전을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하여 달성된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이 만일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서 벌하실 리가 만무하다.] 에라스무스가 이런 이야기해요. 이게 무슨 뜻인 줄 아시겠습니까?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삼각함수를 풀라고 했을 때 풀 수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그걸 못 풀었다고 때린다면 때린다는 자체가 의미가 없단 말이죠. 어차피 안 될 것을 왜 때립니까? 뭔가 때렸으면 때림으로 되는 아이가 돼야 되는데 애초부터 될 수도 없는 아이를 때리면 진짜 선생님이 원하는 결과를 못 얻잖아요.

마찬가지로 인간이 죄인이라면 때리는 자체도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에라스무스가. 인간이 죄인이 아니고 착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때려서라도 인간 되게 만들 때는 합리적으로 옳은 이야기인데 애초부터 죄인인 걸 때린다는 자체가 무의미한 짓이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루터는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 하거든요. 그러면 에라스무스는 십자가를 빼고 이야기해버린 거예요. 그런데 루터는 십자가를 집어넣고 이야기하고. 단지 십자가 하나 있고, 없고의 뿐인데 이 차이가 엄청난 차이가 되는 거예요.

루터가, 이 복음이 사도바울의 복음이라 하면 에라스무스는 성경에 사도바울밖에 없느냐고 나와요. 에라스무스의 사고방식은 이거에요. 얼마나 정상적인지 보세요.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이 성경 줬잖아요. 성경 통해서 하나님 알면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간단해요. 성경은 객관적이고 주관은 내가 결정하고. 그런데 루터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십자가는, 내가 생각했던 주관은 주관이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면 이 악마의 작용이 어디서 찾느냐 말이죠. 마태복음 4장에 악마가 나오지 않습니까? 악마가 그냥 구경하러 왔습니까? 2014년 3월 11일 지금 악마는 뭐하고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눈 돌리게 하는 작업을 악마가 부지런 떨면서 하고 있단 말이죠. 십자가만 빠지면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다 되는 거예요. 나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있고, 시키는 대로 살면 되니까.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행복을 원하고. 행복은 완전함에서 오고.

보세요. 지금 옛날이야기잖아요. 에라스무스, 루터, 16세기 초반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역사가 흘러도 안 달라져요. 이게 안 달라진다는 말은 구약 때도 안 달라졌고, 아브라함도 안 달라졌고, 지금도 안 달라지고, 에라스무스도 안 달라지고, 인간은 안 달라집니다. 왜?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마귀를 인정해줍시다. 마귀가 매일같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너한테 얼마나 이익인지 계산해 보란 이야기에요. 내가 위주고 하나님은 나보다는 덜 중요해요. 내가 나에게 의미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라니까요. 내가 나의 의미에 치중할 때는 하나님은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루터는 하나님의 의미가 전부고, 그 의미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나온 부산물이 현재 나란 육체가 생겼다고 보는 거예요.

말로만 신이 만들었다. 말로는 누가 못합니까. 말로만 하면 뭐합니까. 이것 해달라고, 저것 해달라고 있는데. 그게 제대로 누가 주인인지, 누가 종인지 분간도 안 되는 타고난 인간의 품성, 이걸 로마서 5장에서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났다. 엄마한테서 태어난 게 아니고 인간은 죄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죄 속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맨날 칼 들고 현금차량 턴다고 그게 죄가 아니라 항상 나부터 “내가 일단 살고보자. 그게 제일 중요해. 이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일단 나는 나야. 내가 사는 게 전부고 진리야.”라고 여기서 출발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은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고 어떤 보탬이 되느냐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악마가 그려낸 현실 세계, 이 세상이에요.

그래서 심판은 우리 행동에 의해서 조심하면 되니까 주의 공로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게 에라스무스라면, 여기에 대해서 루터는 말하기를 구원문제에 있어서 이성은 무력하다. 루터가 에라스무스를 마귀 들렸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어요. 구원문제에 대해서 인간은 무력하고 아무 역할이 없다. 둘 다 서로 다른 소리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에 머물러 살기 위해서 사람이 할 일이나 꾀할 일은 전혀 없다.] 루터가 이 말했거든요. 전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그게 당연히 나와야지요. 그럴 때 성령이 새롭게 함으로써 들어간다. 따라서 자유의지라는 것은 성령 그분의 자유의지라면 몰라도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에 악마나 어떤 대적이 우리를 빼앗아가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한테 빼앗기지 않는다. 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에서 온 믿음이라는 것이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제가 루터가 하는 이야기 전체를 동의하지는 않아요. 율법에 관해서 루터가 그 당시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기본 모토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십자가 나타날 때만 거기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4.♡.134.60) 14-03-13 13:10 
201403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1-루터, 칼빈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125페이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뭐냐를 이야기하면서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영광이다. 죄를 구원하는 영광이다. 도대체 그전에는 뭘 이야기했기에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개신교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느냐는 알 필요 없고 의미도 없고요. 그전에 성경 보는 해석은 뭐였는데 달리 봤는지 그 차이만 이야기하면 되거든요.

124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스콜라주의자들도 신의 영광을 말했으나(토마스 아퀴나스를 보면 됩니다) 그들은 신을 최고의 축복으로 알고 그 축복을 얻으려는 행복주의의 동기에서 말한 것이다.] 이게 아리스토텔레스 신학과 접목하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 왜 좋은 분이야? 우리 인간을 행복해주려고 애를 쓰시기 때문에 좋으신 분인 거예요. 하나님이 좋다, 안 좋다는 판단기준을 우리가 먼저 정해버린 거예요.

개척교회 하는 목사들에게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하나님이 좋은 분이지요. 그럼 어부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자기를 행복하게 하면 되는 겁니다. 정치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행복이라는 그 동기를 마다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요. 그들은 신, 하나님 이야기하면서 은근히 뭘 원하는 상태에 있단 말입니까? 결국 “행복하게 해주세요.”를 전제로 하고 계속 하나님과 관계를 이으려고 하는 거예요.

루터는 뭐라고 했습니까? 보통 인간들은 나의 행복. 남의 행복은 짜증나. 신경질 나. 상대적으로 내가 덜 행복하게 되니까. 루터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효과가 행복이 아니라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행복, 복에서 시작해서 복으로 나가는 반면에 루터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와서 영광으로 가는데 그 노선은 오직 십자가의 반복으로서만 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잖아요. 십자가 안에서 세상과 원수가 되었고 죽었고 하는 말이 나오지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125페이지 봅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구원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찾았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자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그 의도가 뭐지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스콜라신학이라고. 인간이 행복,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잖아요.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라고 하는 거예요. 무엇에 근거해서? 그것으로 인하여 십자가가 천시되고 외면받기 때문에 그렇단 말이죠. 하나님 영광은 십자가를 보고 싶어 하는데 십자가 자리에 자기 행복을 집어넣고 영광을 드리겠다고 하니까 그것은 악마의 일이란 말이죠.

이런 루터의 주장은 빌립보서 2장에 잘 나와 있지요. 2장 9절에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되기를 스스로 포기했지요. 왜 포기했습니까? 이 마음을 품으라 했는데 우리도 그 마음을 품어야 되는데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데? 스스로 영광을 포기한 그 마음을 품으란 말입니다. 포기하신 예수님의 목적지가 어디지요? 십자가까지 낮아지죠.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 죽은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알아요. 무엇이 아버지께 영광인지. 십자가에 죽는 게 영광이거든요. 그 영광을 마다하는 것은 악마가 그렇게 시키면 마다하지요. 그게 악마 짓인지 안다면 어쨌든 간에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어이 아버지 영광을 이룸에 어떤 것도 포기할 마음이 없지요. 그러니까 그 다음 하나님 조치가 뭡니까? 십자가 달려 죽은 그를 지극히 높여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고 많은 입으로 그를 주라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심이라. 빌립보서 2장 11절에서 나오잖아요.

성령 받은 자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그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정도로 골치 아픈 이야기가 아니고 스무스한 그야말로 미끄럼틀 내려가듯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우리의 복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고 자신의 행복을 거론한단 말이지요.

그 뒤에 봅시다. [루터는, 회심 이전의 금욕주의적인 그 방법은, 결국 스콜라주의자들이 긍정하던 자기애의 그릇된 노력임을 후에 고백한다. “내가 구하면 구할수록, 그리하여 하나님에게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었다. 아니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가 그를 찾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라고 하였다.]

상당히 말이 어려워요. 가까이 갔다고 생각한 것이 도리어 멀어졌던 거예요. 그러면 가까이 간 것이 왜 멀어지느냐 하면, 가까이 갔다고 하면 내가 나의 존재를 생각하지요. 나는 지금 이 정도야. 하나님 앞에 바짝 붙었어. 자기 존재를 의식하지요. 신과 내가 좁아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십자가는 어디 있습니까?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걸 알려주는 십자가와 성령의 책망은 어디 있습니까? 너무나 완벽한데 책망 받을 게 있어야 책망 받지.

성령은 책망하는데 있어요. 책망 없는 성령의 역사는 없습니다. 방언? 은사?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에요.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책망을 해줄 때 나타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설교자로서 강단에 서면, “오늘 뭐라고 이야기하지.”라고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요. 그럴 때 성령이 임하면 이 시간에 나를 포함해서 이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의 말씀을 앞장세워서 저희를 책망해주시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고마운 일입니다. 이렇게 마음 갖도록 책망하는 마음을 허락해달라고 하시면 돼요. 설교가 책망하는 설교를 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야 회개가 유발돼요.

[구약의 율법은 적극적인 의인 반면, 신약의 복음은 피동적인 의로 보았다.] 이런 게 루터가 성경신학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한 거예요. [율법은 죄인을 보복하시는 정의이고, 복음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의이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죄인을 용서하는 것을 사랑이라 하잖아요. 루터는 그 사랑이 정의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뒤에 나오는 칼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의가 우선이고 사랑은 나중이에요. 루터는 사랑이 곧 하나님의 의, 정의인 반면에 칼빈은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세우기 위해서 사랑을 줬다고 보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내 사랑 받고 용서받았으면 이제 내 정의를 펼쳐봐라. 이게 칼빈의 생각, 칼빈주의에요. 루터는 하나님의 용서해주신 사랑을 율법의 완성으로 보는 겁니다. 로마서 13장 8절의 말씀처럼.

[루터는 인간의 믿음 자체도 죄의 용서를 받을 만한 토대, 즉 공적이 되지 못하고] 참 중요한 말했네. 믿는 자체도 공적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믿음이라는 은혜로 구원받지요. 믿음이란 선물로 구원받지 선물이 은혜니까. 내가 믿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란 뜻이에요. 그냥 믿어버리면 하나의 결단력이 되고 신념이 되고 오기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의 잠재적인 속성에 속하기 때문에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돼버려요. 그러면 안 되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그 믿음이 우리에게 나온 믿음이 아니고 주께서 선물로 준 믿음이기 때문에 둘의 믿음을 구분해야 된다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에요. 그래서 다만 경로에 불과하다. 파이프라 하지요.

[의인은 믿음으로 얻지만 궁극적인 구원은 은혜로 거저 얻는 것이다.] 거저 얻는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이 땅에서 지옥 갈 사람이 천국 갈 사람이 섞여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해서 지옥 가고, 내가 이렇게 해서 천국 간다고 서로 싸운다는 그게 의미 없는 이야기에요. 나는 지옥 간다고 한들 주님께서는 그 분위기를 참조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영향을 고려하지 않아요. 따라서 인간이 이 땅에서 설치고 산다는 자체가 자기 구원과 관련 없는 거예요. 구원받아야 될 죄와 관련돼있지요. 주님의 피에 의해서 씻겨 내려가야 될 시커먼 죄 속의 일부가 그거지 씻어주는 피에 어떤 영향력에 줄 수 있는 것은 아닌 겁니다.

[루터의 예정론은 칼빈의 예정론과 심한 대조를 이루는데, 루터는 ‘그리스도중심의 예정론’이라면, 칼빈은 ‘하나님중심의 예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칼빈은 삼위일체적 예정론이라고 보면 돼요. 삼위일체적 예정론의 특징은 바로 구원론적 예정론입니다. 날 구원하기 위해서 예정이 있다는 거예요. 예정되어서 구원되었다는 말은, 동일한 말이지만 느낌이 뭐냐 하면, “날 구원하려면 예정되어야 구원되는구나.”라고 여전히 주어 자리에 자기 구원을 집어넣고 생각하는 예정론은 잘못된 예정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중심의 예정론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예정론이에요.

그러나 성경을 언약적으로 보면, 이때는 언약을 몰랐으니까 성부와 성자 사이에 창세전에 의논해서 확정된 그 내용, 그 질서가 언약이고 그 언약을 펼치는 방식은 예정된 것 아니면 펼쳐지지 않습니다. 에서와 야곱에서 한쪽은 무조건 사랑했고 한쪽은 미워했고. 왜 그렇게 했는가? 야곱, 에서한테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태어나지도 않은 피조물에게도 지배권을 갖는다는 뜻이에요. 피조물이 그냥 태어난 게 아니고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의논된 대로 이뤄지기 위해서 태어났단 말이지요. 따라서 예정론은 따지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 논리에요. 성부, 성자의 언약을 위해서 태어났다면 태어난 것은 언약의 내용에 종속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고 지극히 당연한데 그게 논리가 어렵다고. 아무 이상한 것도 아니지요. 정상적이지요.

[루터는, 예정의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의 은폐성에 속하는 것과 예정의 유일한 확정은 그리스도임을 밝히면서 인간 이성의 제한으로서 예정론을 소개하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루터가 예정했다는 것은 예정을 이용해서 자기 구원을 시도한 모든 인간의 시도로부터 단절되기 위해서입니다. “예정론 이용해서 구원받아 볼까?”라는 시도가 성사되지 못하도록, 그러한 시도가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다른 영역에 속한 예정론입니다. 따라서 “그러면 그 예정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잖아.” 할 때는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는 이미 예정된 자에 한해서만 십자가의 피가 믿어지게 돼있고 그 결과로 우리의 구원은 예정된 바에 따라서 구원됐다는 사실을 아울러 믿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단 말이지요.

그러면 자기 구원중심이 아니고 주어 자리가 자기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지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이 된 거지요. 결과적으로. 그러니까 구원론이고 종말론이고 모든 이론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 일어난 현상들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중심이고 인간들도 예수님중심으로 돼요. 주는 예수님만 주가 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뒤에 53번 칼빈 보세요. 루터가 이런 이야기할 때는 항상 예수님중심이잖아요. 예수님중심이 왜 칼빈이나 개혁주의신학자들에게 못 마땅할까요? 인간들에게 왜 못 마땅할까요? 그들에게 삼위일체가 심어져있거든요. 삼위일체는 특정 누구 하나를 높아지게 하면 삼위일체 자체가 균형이 안 맞는다는 그런 개념을 갖고 있단 말이지요. 나란히, 나란히. 피아노 위에 못난이 인형 세 개 있는 것 봤지요. 러시아정교회 성화처럼 성부, 성자, 성령 나란히 있을 때 인간들은 만족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만족하는 것과 주님이 영광 받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어요. 예수님이 중심이라면 따라줘야 되는데 삼위일체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가 복음이지 삼위일체가 복음이 아니거든요.

칼빈 봅시다. 칼빈의 실질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예정인데 이 예정은 십자가 사건의 예정이 아니고 존재의 예정이에요. 모든 존재가 그와 관련돼있다는 겁니다. 칼빈의 사상은 모든 세상 피조물들이 삼위일체 이론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 이론을 위해서 있다고 본 거예요. 그 삼위일체 이론을 칼빈은 하나님중심이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이 원리에 준해서 그는 항상 성화와 경건의 실천을 권하고 있다.] 참 이상하지요. 칼빈이 뭔가 너무 잘못 생각한 게 성화와 경건의 실천을 한다고 했는데 이 점이 어렵기 때문에 128페이지 봅시다.

[칼빈은 그 다음으로 외면적 자유를 말하는데 외면적 자유는 영적 삶보다는 지상의 삶에 속한 것으로써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들과 관련한다. 외면적 자유에는 섭리와 아디아포라(무해 무익한 중립적인 것)에서의 자유가 있다. 성경에는 금하거나 명백하게 명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자유인데]

성경에서 뭔가 하지 마라, 또는 하라는 것이 없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 실제 교인들이 목사한테 물을 거잖아요. 그럴 때는 자유의 능력을 알아서 균형 맞추어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아디아포라라고 하는데 왜 그게 필요하냐 하면,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은 칼빈의 이론에 의하면 성령 받은 사람의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나야 된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칼빈은 눈으로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고 본 겁니다. 믿음으로 의가 아니고 행함으로 파악이 돼야 그게 의라는 거예요.

지금 칼빈을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하라, 하지 마라는 그 당시까지 문화잖아요. 성경에 스마트 폰 하라, 하지 마라가 있습니까? 그때는 스마트 폰이 발명되지 않았지요. 세상은 모든 게 얽혀있거든요. 칼빈이 무식한지 유식한지 진짜 구분이 안 되는데 세상은 모든 쪼개져 있는 게 아니에요. 전에 율법 이야기할 때 돼지 털을 몇 개 뽑으면 돼지가 아프냐고 했지요. 모든 율법은 몸통과 연결돼있지요. 야고보서에 보면 율법 하나만 어겨도 모두 어긴 게 되잖아요. 그 몸통이 예수님이잖아요.

이 말은 세상에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돼있단 말이죠. 악마라는 것도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거부한 게 악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룬 것이 새 언약이잖아요. 그런데 구약에서 악신들이 어디를 공격합니까? 사울이 왜 다윗을 공격합니까? 다윗에게 새로운 언약, 다윗언약이 함께 있기 때문에 사울은 다윗언약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윗언약이 아니라 사울언약이 돼야 되잖아요. 언약이 등장하니까 창 던졌는데 악신이 들려서 던졌거든요.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가인의 본성이 아닙니다. 죄가 덮치니까 동생을 죽일 수밖에 없잖아요. 마귀를 누가 이겨요?

십자가를 안 믿는다. 그러면 우리는 상당히 복음적으로 받아들여요. 성령이 아니고서는 십자가 복음은 어리석게 보이고 그냥 기적만 원하고 지혜만 원하지. 십자가는 어리석을 수밖에 없어요. 악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다 그렇게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요. 개인적으로는 안 됐지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새 언약에 묶여있다면, 보통 인간들이, “목사님, 이걸 할까요, 말까요?” 하는 모든 것은 이 세상 죄 아래 있는 원리에 같이 묶여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젖 물리는 것은 착하는 일이고 그 착한 내가 화투치는 것은 나쁜 일이고. 이렇게 안 돼있다고. 젖 주면서 화투치는 게 나쁜 일입니까, 좋은 일입니까? 진짜 애매모호해요.

전쟁하면서 대민 사업하는 것, 이게 착한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북한의 김정은이 시찰 나가면서 병든 노모를 모시는 가족을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 착한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진짜 나이팅게일 같은 슈바이처 같은 그런 자비심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버이 태양 같은 존재 아닙니까. 그런데 미사일은 왜 쏘는데?

다윗이 얼마나 대단하냐 하면, 다윗이 분명히 남편 있는 여자를 간음했습니다. 더 못 된 것이 그 남편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사람이 상식적으로 우리야한테 미안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미 죽어 버렸지만 우리야한테 고맙다고 그래요. 주께서 꺾어진 뼈를 통해서 내가 용서받았으니까 고맙다는 거예요. 세상에 뻔뻔함의 극치 아닙니까. 자기가 가해자가 되어 피해 본 그에서 오히려 너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그 뻔뻔함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것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진짜 하나님이 나타날 때 그 감동, 이것은 지금까지 고생해서 이스라엘 왕 되었다는 건 문제도 아니에요. 진짜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는 사실.

루터는 그게 십자가였어요. 십자가를 알았다는 말은 모든 책, 백과사전 덮고 바보등신 되어서 상관없는 큰 기쁨이에요. 충격이에요. -게임 오버- 게임 끝났어요. 개콘에 나오는 것처럼(‘깐죽거리 잔혹사’란 코너)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고 끝. 모든 것을 당황하지 않고 십자가로 끝. 그러니까 마귀는 뭘 못 보게 하는 겁니까?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기근과 어떤 걸 다 끄집어내서 기어이 뭘 못 보게 해요? 정죄함이 없다는 십자가를 못 보게 만들어서 가슴 콩닥콩닥하게 만들고.

사탄도 바빠요. 사탄이 천사거든. 천사는 시키는 대로 해요. 마귀도 지 마음대로 못해요. 언약 안에 묶여있어요. 언약을 드러내는데 필요한 거예요. 사도바울의 가시가 사탄의 가시 아닙니까. 사탄이 없으면 그런 가시 박히질 않을 거예요. 사도바울이 그 가시 빼달라고 세 번 기도했는데 다 캔슬됐지요. 거부당했잖아요. 네가 약한데서 은혜가 모인다. 약하면 그 정도로 된 줄 알아. 그 정도면 됐어. 더 이상 어떤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지 말란 말이에요.

칼빈은 그 믿음이 없는 거예요. 눈으로 보고 싶은 겁니다. 눈으로 보고 싶으니까 제일 눈으로 잘 보이는 사람으로 목사를 세운 겁니다. 131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줄. [칼빈은 가견적인 교회를 강조해서 기강을 잡으려고 했다.] 기강을 왜 잡습니까? 에베소서에 나오는 교회는 성령이 잡아도 잡는데 목사가 왜 잡아요. 그것은 보고 싶은 거예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정의를 윤리적, 도덕적으로 보고 싶은 겁니다. 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심사를 해야 돼요. 교회의 심사장이 목사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제 점수는요? 하고 눌려야 돼.

말씀 안에 정의가 들어있고 그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이 정의로운 공동체가 될 때 칼빈은 그걸 교회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이러한 칼빈의 교회정치는, [귀족주의적 과두정치의 공화국 정치사상과 상통하는 교회 정치론이다.]라고 131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132페이지 봅시다. 위에서 여섯 번째 줄. [칼빈은 초대교회의 교회 직분을 설명하여 사도가 제일 높은 자리에, 그 아래 예언자, 전도자, 그리고 교사가 제일 낮은 것으로 말하였다.] 사도가 제일 높은 자리, 그 다음에 예언자, 전도자, 교사의 자리가 있으면 자리의 역전, 자리의 분배가 고정된 자리입니까, 변동이 있는 자리입니까? 한 번 자리면 계속 자리에 있는 겁니까, 거기서 탈락될 수도 있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탈락될 수도 있지요. 반복음을 한다든지 성경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하면 탈락돼야 마땅하지요.

교회라는 것이 복음으로 서야 되잖아요. 그러면 교회에서 탈락된다는 말은 직분에서만 탈락되는 걸 말하는 겁니까, 그리스도 몸에서 끊어지는 걸 의미합니까? 아예 끊어지는 걸 의미하지요. 그런데 직분에서만 쫓겨날 때 그 사람이 교회에서 쫓겨났다고 확정지을 수 없지요. 그러면 도대체 교회가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잘못 해석한다든지 잘못된 복음을 전했을 때 직분에서 쫓겨난다면, 직분에서 쫓겨날 정도가 아니고 아예 교회 성도 자체가 아닌 사람일 경우에 해당 돼요. 내가 보기에 칼빈 자체가 복음을 몰라. 칼빈 자체가 쫓겨나야 돼.

목사가 제일 높고 그 다음에 교사, 장로, 집사로 돼있는데 목사와 집사 사이에서 복음을 더 잘 알고, 덜 알고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복음을 조금 알기 때문에 집사하고, 많이 알면 목사 한다는 게 돼요, 안 돼요? 이게 안 되지요. 왜냐하면 성경적으로 복음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나타나는 거거든요.

그러면 목사가 안 되고 집사가 되더라도 얼마든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걸 인정한다면 목사보다 더 은혜를 많이 알고 복음을 더 많이 아는 사람 되는 거예요. 로마서 12장에 믿음의 분량대로 은사의 분량대로 하라고 돼있지요. 그것은 적다는 말이 아니고 어느 자리라 할지라도 구원받는데 합당한 용서에서는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아까 식당에서 수정과 주지요. 수정과 조금 먹으니까 맛나든가요, 많이 먹어야 맛나든가요? 조금 먹든, 많이 먹든 수정과 그 맛이잖아요. 그럼 나는 왜 많이 먹었느냐? 수정과가 뭔지 알기 위해서 먹은 게 아니고 목말라서 먹었다고요. 어떤 집사가 복음이 목말라서 많이 먹으면 그 사람이 목사 해야 됩니까?

칼빈이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이유는, 성령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세상 안에 성령 없는 곳에서 교회를 만들어서 그걸 보여줘서 그 사람들로 교회 등록하게 해서 구원받게 하고자 하는 그러한 천주교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이런 현장이 일어나는 겁니다.

왜 칼빈이 그런지 여기 나옵니다. 125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 봅시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실은 정의 실현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선택된 자를 구원하시고 버림받은 자를 멸망케 하시는 그의 정의에 있으며, 이런 정의로움이 곧 하나님의 영광의 열쇠라고 보았다.]

루터의 영광은 뭐였습니까? 십자가지요. 빌립보서 2장 9~11절. 영광 돌리는 코스를 하나님이 이미 정해놨지요. 칼빈은 정해놓은 걸 안 믿고 우리가 납득이 되는 정의를 따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 정의가 뭐냐? 세상에서 통하는 정의를 따라줘야 저 사람들도 자기가 원하는 윤리, 도덕을 찾고 싶을 때 교회 온다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죽은 것도 사람들에게 오해 받아 죽었지요. 그걸 성경에서는 걸려 넘어진다고 해서 ‘걸림돌’이지요. 걸림돌을 빼버리면 그게 교회입니까? 십자가 사건이 걸림돌 때문에 생겼잖아요. 걸고 넘어졌잖아요.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이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네가 죽으라고 해서 죽여 버렸단 말이죠. 십자가 자체가 모든 인간을 걸려 넘어지도록 하는 십자가란 말이죠.

그런데 칼빈은 안 넘어지도록 배려해준 거예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보고 싶습니까? 우리 교회에 오세요. 우리 교회는 아주 체계적으로 잘 돼있습니다. 이러면 그 사람들이 교회 몰려오더라도 걸림돌이 빠진 교회지요. 걸림돌이 빠진 교회라면 가짜, 진짜를 구분할 수가 없지요. 이제 가짜, 진짜는 목사가 판정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목사보다 더 착한 사람 온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것은 사울이 다윗에게 창을 던지는 거예요. 왜? 다른 사람은 사울이 다 장악하는데 다윗에게는 장악하려고 해도 장악 당하지 않는 요소가 다윗에게 아우라처럼 있었단 말이죠. 사울 왕이 자기 딴에 믿음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확인해봤어요. 확인 해봐도 하나님이 뭔가 빼주는 것 같아. 그래서 나중에 사울도 인정해요. 하나님이 너를 승리하길 원한다. 그 다음부터 사울은 사울의 길로 가고, 다윗은 다윗의 길로 가버려요.

126페이지 제일 위에 뭐라고 돼있냐 하면, [칼빈의 신론은 그리스도중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 삼위일체 하나님에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인간의 세상에 ‘적응’하시는 형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 물어봅시다. 하나님이 인간 보기에 낮아졌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단의 모습으로 온 거예요? 분명히 성경에 낮아졌다고 하거든요. 그 낮아지심이 우리 인간들 보기에 낮아짐으로 보입니까, 교만한 것으로 보입니까? 바리새인 보기에 예수님이 낮아지신 분이에요, 교만한 분이에요? 교만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누구라도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지요.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갖춘 신학적인 자질은 인간끼리 붙어서 최고의 자리에 있지요. 최고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판정해봤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낮아진 게 아니고 교만덩어리고 귀신의 왕초요, 율법을 모르는 자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저주받아 마땅한 자지요.

그런데 인간들의 생각한 하나님의 낮아짐이란 결국 뭡니까? 테레사 수녀? 결국 그런 쪽이네. 주기철 목사? 아낌없이 내주고 자기는 죽는 것? 그런데 그게 바리새인 같은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라면 예수님은 거기에 없지요. 예수님은 오히려 반대로 나갑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너희들이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소경이라 하니까 보는구나. 이게 인간들 귀에는 얼마나 건방진 소리냐 말이죠.

그래서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 믿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열두 명 가운데 한 명도 없어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은 했지만 성령이 와야, 성령은 예수님의 사건으로 책망하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열두 제자가 돌아보니까 살아온 인생 자체가 전부 다 곡해와 오해와 왜곡, 오류의 세월이었던 거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뜻대로 인생을 가지 못하고 주의 뜻대로 가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 앞에 등장하고 십자가 앞에 등장하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짜여지고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가 있어요.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을 죽이는 쪽으로 하나 되어 움직이는구나. 그게 눈에 들어온다니까요. 심지어 교회마저 마찬가지에요.

칼빈은 신의 섭리를 이야기했습니다. 신의 섭리와 일반종교에서 말하는 주권과 차이점이 없어요. 칼빈이 신의 섭리를 이야기한 이유는, 자연세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로마서 8장에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요. 피조물이 허무한테 탄식하며 그들이 누가 나타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원하지요. 보세요. 피조물조차 십자가 복음을 경유해야 되지요.

홍수 이후에 자연세계가 봄여름가을겨울로 돌아가지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절대로 이 땅에 억울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조건 하에 돌아가는 겁니다. 그냥 십자가 없이 잘 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그들이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잘 돌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잘 돌아가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운영한다는데(127페이지) 뜻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운행된다는 게 뜻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습니까? 그 뜻에 대해서 칼빈은 이야기를 못해요.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돼. 그 말은 맞는데 그 뜻이 뭐냐? 모르지요. 성경에 보면 새 언약대로 돼요. 새 언약이 뭡니까? 십자가 따라 움직이게 돼있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노아 때는 노아언약, 모세 때는 모세언약. 모세 때 여호수아와 아말렉이 싸웠습니다(출17:8~16). 그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운행된 거지요.

그럼 물어봅시다.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요? 뜻대로 되지. 그럼 그 뜻이 뭐냐고 물으면, 여호수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세가 언약한 대로 은혜 받지 아니할 자는 멸망당하고 은혜 받은 우리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그 뜻대로 되겠지요. 그런데 칼빈이 세상은 뜻대로 되는 거야 할 때 이것은 운명론이고 섭리론이지 여기에 복음적인 것이 없는 거지요. 이건 스토아철학이에요.

“세상 다 그렇고 그런 거야.” 이걸 안다고 구원받습니까. 이건 성철 스님도 그런 소리하겠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요. 도대체 불교 중과 손잡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들에게 복음이 없는데도 손잡을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운명론, 섭리론,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되고 저쪽은 신이란 이름의 부처의 뜻대로 되고. 둘 다 주권사상이니까 손잡으면 되겠네. 그래서 칼빈주의가 말하는 신의 주권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맹탕이에요. 이렇게 되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칼빈은 말하기를 악도 신의 뜻대로 된다는 겁니다. 악이 뭡니까? 몰라요. 악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훼손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악이에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전쟁이었으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전쟁을 벌였으니까. 구체적으로 악이란 여자의 후손이 하는 일을 훼방하는 것이 악마의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리고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경유해야 되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지 말고 주 안에서 해야 돼요. 주가 누굽니까? 십자가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란 말이에요. 그만큼 우리가 스스로 죄인인 것을 알면서 부모를 공경하란 뜻이에요.

128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봅시다. [칼빈은 잠언 16:4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다. “여호와께서는 온갖 것을 그 용도에 따라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여호와란 말 대신에 신이나 부처, 자연이란 말을 넣어도 말 되지요. 일반인들에는. 그럼 이 잠언해석이 뭘 경유하지 않았습니까? 잠언이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예루살렘의 왕이 이야기한 거죠. 잠언이 이방 왕이 이야기했습니까? 아니지요. 예루살렘의 왕이 이야기했잖아요. 그것은 다윗언약에 소속된다고요.

잠언의 모든 것은 하늘의 질서에요. 하늘의 질서가 땅의 질서를 책망하기 위해서 잠언을 준 겁니다. 이것은 잠언 중 몇 개를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문제가 아니고 하늘에서 쏟아진 모든 질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다 대응하는 관계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내가 알아서 할 거다. 내가 알아서 할 일은 잠언서에 없어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관계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내를 얻은 자는 여호와께 복을 얻은 거지요. 그러면 아내를 얻었다는 것은, 그 당시 다윗언약을 경유해서 보면 다른 이방민족에게는 절대로 아내에게서 언약이 있지 않고 그냥 살림 해주는 여자만 만나지요. 저에게 살림해주는 여자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은 이방민족이 생각하는 신께서 내게 아내 주셔서 고맙다는 뜻이고. 이스라엘은 언약과 관련되어서 아내를 주셨다. 이것이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과 같이 하라. 그것과 연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성경 전체가 지혜가 되는 겁니다. 중국에서 강의했잖아요. 솔로몬 깨면 두 개가 나온다고. 하나는 지혜가 나오고 하나는 율법이 나온다고.

지혜라는 것은 율법이 깨졌을 때 지혜는 깨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근거가 돼요. 율법은 사람 손으로 지키면 되지만 지혜는 사람 손으로 할 수 없어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 이걸 어떻게 수정할까요? 가만있어도 헛된데. 이제부터 헛되지 않기. 이게 안 되는 높이에 지혜가 있어요. 그래서 율법의 완성은 지혜가 되는 겁니다.

솔로몬이 범죄 했기 때문에, 우상 숭배했기 때문에 솔로몬 안에 담겨있는 지혜를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계기가 된 거예요. 그리고 율법대로 이스라엘은 14대, 14대, 14대를 거쳐서 멸망해야 되고. 멸망할지라도 지혜는 손을 안 타니까 지혜는 오히려 지혜답게 성취되는 하나의 과정이 되는 겁니다.

129페이지 봅시다. 칼빈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의 신성에 가있다. 예수님을 인성, 신성으로 따지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일하는 걸 보지 않고 내재하는 신성으로 보는 겁니다. 그만큼 칼빈은 인간이 만든 신학을 복음이고 진리라고 우기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렇게 주장하지 않으면 저쪽에서 이단이라고 하면 교회 안 될까 싶어서.

마지막으로 생각해봅시다. 교회가 인간이 되고 안 되고 간여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될 수 있습니까? 주께서 만들어놓은 교회를 이게 교회냐, 아니냐? 더 교회답게 되느냐? 하고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있느냐 말이죠. 우리가 열심히 하면 교회 더 잘 되고 나태하면 교회 안 되는 그런 게 교회냐 말입니다. 그러면 교회 머리가 주님이 아니고 목사고 사람이 되잖아요. 그래서 목사나 모든 직분자는 머리 되신 십자가를 경유할 때 경유하면서 “내가 교회 주인도 아니고 알아서 일한다고 교회 더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나, 안 하나 주님에 의해서 날마다 교회 되게 하시는구나. 십자가를 적용하면서 되는구나.” 할 때 우리는 완료된 묵시의 세계에 대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칼빈과 루터를 보면서 그들이 메시아도 아니고 그들도 죄인에 불과한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학 자랑하지 말고 주님만 자랑할 수 있는 성령 받은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