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4. 11. 21) 9-1
지난 강의에서도 안식일에 대해 언급했는데 오늘 본문 3장에서도 안식일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여러분은 안식일 이야기를 하면 그것에 대해서는 다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안식일 속에 전체가 들어있습니다. 안식일 속에 모든 하나님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면 안식일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전체를 모릅니다. 우리가 성경공부하고 있는 이 시간에도 이라크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성경공부와 이라크 전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현재를 동그라미라고 한다면 현재는 전체지요. 그런데 우리는 전체에 대해서 알 수가 없어요. 일부만 알지요.
그러면 일부만 아는 이것도 제대로 아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제한된 일부로 측정하는데 나머지 일도 주님이 일으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머지 일은 젖혀두고 내가 아는 일부만을 가지고 나는 잘했다, 혹은 잘못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면 이 판단이 제대로 된 판단이 되겠습니까?
빛나가 두 아이를 낳아 키웁니다. 빛나는 자신의 잘, 잘못을 무엇으로 평가합니까? 아이들 잘 키우면 잘한 것이고, 잘못 키우면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면 빛나는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 받는다는 것은 전체와 관련된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움직였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일으키는 주관자로 일하십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맞지요. 지금 록키산맥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하나가 우리 구원과 무관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북극에 있는 빙산의 얼음이 녹는 것과 우리 구원이 다 연관이 있습니다. 왜 연관이 있습니까? 이 모두는 주가 일으키신 일입니다.
우리는 나의 작은 행동 하나를 놓고 잘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반성과 회개를 하는데 이것은 너무도 일방적인 자기 판단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할까요, 말까요?”라는 것도 너무나 좁은 시야로 보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 행동마저도 주께서 주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에서 사기를 당하고 손해를 입는 것도 주께서 만드신 환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은 빼버리고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할까, 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경유하면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 가해자가 됩니다. 가해자가 된다는 말은 내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애초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뭘 해도 내 코앞에 있는 것밖에 모르는데 이런 내가 전체를 아는 방법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내 자리를 떠나면 됩니다. 예를 들면, 눈이 소박하게 왔습니다. 눈이 계속 내리는데 내가 눈사람을 만든다고 한 자리에 5분 정도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는 눈이 2 Cm가 쌓였는데 내가 있는 자리에는 얼마나 쌓였을까요? 그것은 모르죠?
내가 머물던 자리를 떠나면 맨땅이 드러나겠지요? 그러면 맨땅은 꺼멓고 다른 자리는 하얗게 보이겠지요.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면서 나는 전체를 이해하지 못한 장애 요소로 존재하며 살아가는구나를 깨달을 때 전체를 아는 것이 돼요. 전체를 어떻게 압니까? 내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전체가 안 보이는 거예요.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서 뒤돌아보면 그동안 내가 전체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눈사람 만들 때 내 정신은 눈사람에 팔려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로 인하여 주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생각이 안 나요. 자기 일에 몰두하는 순간은 주님 하시는 일을 가리게 됩니다.
우리가 전체를 모르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게 되면 자기 정당성을 주장할 수가 있어요. “나는 최선을 다하고 바르게 살았는데 왜 내 삶은 이렇게 힘이 듭니까?”라고 불평하면, 주님은 “네가 전체를 알아? 현재 이라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내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르면서 ‘나는 불행하다.’라고 판정을 내릴 수 있습니까? 전체를 모르면서.
예를 들어, 수능시험을 쳤는데 생물 8번 문제를 틀렸어요. 정답이 ‘나’인데, 자기는 ‘가’로 했어요. “이것만 틀리지 않았으면 100점이 되는데 아쉽다.” 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가, 나’ 두 개가 다 정답일 때, 내가 처음 판단을 내릴 때는 틀렸다고 판단했는데 나중에 두 개가 정답이 된 거예요.
내가 내린 판단은 주님 보시기에는 항상 성급한 판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는 구원 받을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때 그 판단을 누가 내립니까?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나는 구원 받았다, 나는 구원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겁니까? 인간은 전체를 모르면서 자신이 경험한 일부를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기준은 전체의 요소를 고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체를 모르면서 ‘내가 구원 받았다, 아니다.’ 라고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베네수엘라 국영방송에서 방영되는 드라마가 어떤 내용인지 모르잖아요. 모르면서 뭘 기준해서 구원을 논합니까?
인간들은 일방적입니다. 인식론에 빠져있는 것이지요. 인식론이란 ‘진리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내가 어느 것까지 알 수 있는가?’ 거기에 빠져서 단언을 내려요. “나는 구원 받았다.”또는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지옥 갈 거야.” 때로는 절망, 때로는 희망을 가집니다. 자신이 자기 인식론에 말려드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론을 가지고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인식론에 빠져 있으니까 목사들이 사기 치기 딱 좋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지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 했고, 더러는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지요. 이들의 판단이 옳습니까? 틀렸지요.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려고 내려갈 때 아브라함이 어떤 기도를 했습니까?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래도 의인과 악인을 함께 심판하시겠습니까?”라고 했어요. 이런 기도를 했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현 시대상황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왜 기도를 하는가 하면 무지목매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겁니다. 또 불안 때문에 기도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는 뜻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은 전체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데 여러분들이 바람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바람이 부는 것은 시베리아의 고기압까지 동원해야 됩니다. 남태평양, 북태평양 기류까지 계산해야 됩니다. 그 바람을 우리가 조정할 수 없잖아요. 따라서 바람이 분다는 것은 우리 권한 밖의 이야기죠. 이것은 제가 ‘전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전체가 움직일 때 우리 자신도 전체의 일부가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전체를 내 손에 쥐려고 해요. 왜? 우리의 인식론이 고집이 쎄서 내 뜻대로, 내 원대로 하려합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나서 못 살아요. 그러니까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지요. 그래서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왜 기도했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개인적으로는 쓴 잔을 마시기 싫지만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 마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이것이 ‘주님의 일’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잠을 잤습니다. 왜냐? 자기는 자신만의 작은 일이 있는데 이번 기도는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거기에 동참할 이유는 없다고 여겨 잠을 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는 것은 예수님 일만이 아닙니다. 제자들 자신의 운명과 관련된 일인데 제자들은 몰랐지요. 그래서 편히 잠을 잔거예요. 지금도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그 간구가 예수님 혼자만의 일입니까, 우리들의 일입니까? 성도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기도한 여파로 주어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귀기우려 보세요. 주님의 음성이 들릴 거예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는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지만 사실 제자들도 이 기도에 동참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 잠을 잤지요. 그 뒤에 예수님 죽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합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 제자들은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아버지 뜻대로 끌려가게 되지요. 그래서 성도의 생활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전체를 위하여 개인의 뜻은 거절당하는 인생 길, 이것이 베드로가 가는 길이고, 성도가 가는 길입니다.
제가 목이 발라서 물을 마시겠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뜻입니까? 내가 목이 마른데, 나를 목마르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내가 목이 말라서 내가 물을 마신다.’고 생각했는데, 전체 속에 개인은 사라진다고 하니까 목마르게 하는 것도, 물을 마시게 하는 것도 다 주님의 뜻이지요.
이것이 이해되면, ‘막 사세요.’라는 말이 비로소 이해됩니다. 만약 ‘막 살지 않겠다.’고 한다면, 막 살지 않는 기준은 전체에 해당될까요, 나의 개인적인 기준일까요? 내가 만든 기준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잠자는 제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뜻에 나는 동참하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오늘 안식일에 대해서 하는데, 안식일 속에 전체가 들어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려는 사람은 안식일 지키기 전에 무엇이 전제되어 있는가 하면, ‘내가 이정도 지키면 안식일을 준수한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체가 작은 주머니 속에 들어가겠어요? 들어갈 수가 없지요.
큰 바구니에 가득 담겨있는 저 고구마가 내 바지 주머니에 다 들어가겠습니까? 안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왜 고구마 네 주머니에 다 안 넣었냐?” 라고 꾸중할까 싶어서 전부는 아니고 몇 개 주머니에 넣고 “나는 안식일 지켰다.” 이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주님이 말씀하신 율법은 전체가 다 담기는 율법을 주셨기에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전체를 다 지키는 것이 주님 기준에 맞는데 우리는 사적인 내 기준이 따로 있어요. ‘이것 하나만 지켜도 안식일을 지켰다고 할 수 있지.’ 라고 나의 일방적인 주장을 하는 거예요. 왜 이렇게 우기는가? 선배들이 전부 고구마 한 개 주머니에 넣고 안식일 지켰다고 하니까 자기도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고신측 신학에서는 안식일 지키는 매뉴얼이 나와 있습니다. ‘오전에는 예배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병자, 가난한 자를 돌아보고, 그 외 시간에는 기도 또는 경건한 서적을 읽고 하루를 보낸다. 그 후 평일에는 열심히 직장생활하고 주일이 되면 또 경건하게 하루를 보낸다.’
구약에는 안식일을 지켰는데 신약에는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기에 그 날을 주의 날로 지킨다고 하는데, 이것은 다 엉터리입니다. 제가 엉터리란 말은, 부활한 날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성경에서 이것을 끄집어낸 의도가 안식일을 나름대로 지켜보겠다는 의도에서 성경 본문을 짜깁기 한 거예요.
뉴턴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맞아요? 아닙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뭔가를 떨어뜨려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피사의 사탑에서 물건을 떨어뜨려서는 차이를 측정할 수가 없어요. 겨우 높이가 50미터 밖에 안 되기에. 갈릴레이가 마지막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다는데, 이것은 지구 중심설의 증명이 될 수 없습니다.
태양이 있고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이 태양 중심설이고, 지구가 있고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는 것은 지구 중심설인데, 그 때까지는 태양 중심설이었어요. 그런데 갈릴레이가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은, 태양 중심설이든 지구 중심설이든 ‘그래도 태양은 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이 맞나, 틀리나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다른 노림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집에 불이 나서 허탈해 있는데, 옆 집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이번 프로야구 시즌에 삼성이 우승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의미 있습니까? 삼성이 우승했다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난 집 주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학교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서울역에서 대모를 하고 있는데, 제가 그분들에게 찾아가서 “서세원, 서정희 부부가 이혼에 합의했답니다.”라고 말했다면 그 말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성경에서 신학을 뽑아내고 논리를 뽑아내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제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사적인 것이 하늘나라에 반영되도록 제 마음대로 성경을 편집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일부가 아니고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죠.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는 성경의 일부가 아니고 전체를 다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어요. 그렇지만 사적인 노림수가 있어요. 소망, 기대, 욕구를 위해서 일부를 끄집어내놓고 ‘이것만 지켜도 하나님 말씀 지킨 것으로 간주해 달라’는 기준을 따로 만들어요. 이건 반칙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 바리새인이 반칙을 저질렀습니다. 안식일 날 제사 드리고 아무것도 안 하면 그것은 안식일 지킨 것으로 간주한다는 식의 신학적인 분위기가 유대 나라에 지금 확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분은 부분을 지키는 분이 아니라 전체를 지키는 분입니다.
전체를 지키는 분이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따로 가고 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는 기준과 당시 사람들이 안식일 지키는 기준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인간은 자기 코앞에 있는 것밖에 모르고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전체를 다 아시니까요. 예를 들면, 엄마가 털실로 아이들 옷을 뜨개질 할 때, 둘째 아들이 하는 말이 “엄마, 이거 내 옷 짜는 거지?”라고 일방적으로 선언을 한 거예요. 엄마는 가정의 전체를 아는데, 둘째 아들은 자기 욕심밖에 모르지요. 그러니 엄마 생각과 아들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네 형 옷이야.”라고 하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고, “그래, 네 옷도 예쁘게 만들어 줄 게.” 이런 식으로 대충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자기밖에 생각 못하니까요. 그런데 이것을 보고 둘째 아들이 착각을 해서 ‘역시 엄마 생각과 내 생각이 같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엄마의 입장에서는 난감하겠지요. 주님이 바로 이런 심정입니다.
예수님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으면, 우리는 그냥 막 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왜냐? ‘혹시 막 살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지면 나만 손해다.’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수능 문제는 학생이 출제하지 않습니다. 학생이 출제를 한다면 그런 시험은 칠 필요 없습니다. 문제는 주님이 내고 해답도 주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전체를 알 수 있는가?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전체를 압니까? 우리는 전체 중 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데, 내 자리를 떠나보세요. 그러면 뭘 알 수 있는가 하면, 내 자신도 전체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다만 그동안 전체를 몰랐던 것은 내가 전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겁니다.
예를 들면, 안경을 끼고 시계를 볼 때 안경을 느끼지 못하지요. 그런데 파리가 안경 알에 붙으면 파리 때문에 갑자기 시계가 안 보입니다. 대신 파리가 안경에 붙은 것을 보겠지요. 그 때 뭘 의식합니까? 내가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이 그 때 느껴집니다. 내 뜻이 작용을 한 거예요. 평생을 내 욕심이 나를 가린 채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파리를 떼내니까 비로소 주님이 보이면서 내가 주님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하기 이전부터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가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그러면 내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는 것도 주님께서 그렇게 조치하신 거예요. 요즘 제가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는데 왜 빠집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살다가 치매에 걸려 죽었다. 누가 죽이신 것입니까? 주님께서 죽이신 거예요. 이것을 성령을 통해 미리 앞당겨 알게 되면, 설사 치매에 걸려 예수가 누군지 모른다 할지라도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주님이 하신 거지요. 그 기준을 믿는다면 구원 받습니다. 그 기준은 안식일에 담겨 있습니다.
왜 안식일에 담겨 있는가? 한 계명 안에 모든 율법이 다 담겨 있어요. 그래서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전체를 어긴 것이 됩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문어에 여러 개의 다리가 있는데,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법이고, 이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법인데 이 모두는 어디에서 나온 법입니까? 전체에서 나온 법이지요. 예수님에게서 나온 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쪽 다리가 아프면 주님이 아파해요. 하나를 어기면 같은 몸통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어기는 것이 돼요. 주님이 신약에 와서는 문어발을 더 많이 만들어 놓았어요.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이고, 형제를 미워해도 살인이고,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 구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러면 기도 제목에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면서 구하는 것은 빠지는 거예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우리는 문어의 발이 되어야지 우리가 단독으로 작은 문어가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등기 이전을 해야 됩니다.
등기 이전은 성령께서 해주십니다. 성령이 보증을 하십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미 우리 것은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염려하거나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나의 매니저가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기도를 어떻게 하면 응답을 받을 것이고, 내가 헌금을 얼마나 하면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것이고 이런 생각으로 뭔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막내가 고3이라 기도를 더 많이 하고, 맏이의 결혼을 앞두고 교회 봉사를 더 많이 해서 행여나 올지 모르는 불행을 사전에 막겠다는 생각은 집에 부적을 붙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부적처럼 사용합니다.
자기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자기 자리에 있다가 성령에 의해 자기 자리를 떠나서 뒤돌아 보면 이 자리가 죄인이 머물다 간 자리가 돼요. 왜 죄인인가 하면 전체를 가리고 있었거든요. 나의 존재가 주님의 주 되심을 가리면서 살아왔단 말이지요. 그동안.
따라서 주님은 우리를 구원시켜놓고 죄인의 자리를 주목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죄인의 자리가 무엇으로 바뀌는가 하면 의인으로 바뀌는데 이제 마가복음 3장을 시작하는 겁니다. 바뀌면서 동원되는 것이 바로 안식일의 완전함이 동원되어서 죄인을 의인으로 바꿔줍니다.
그동안 내 방식으로 안식일 지켰다고 우기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만들어서 떠난 자리를 뒤돌아보게 합니다. 뒤돌아보면 안식일의 자리가 내 나름대로 지켰다고 하는 자리지요. “하나님, 나는 안식일을 이런 식으로 경건하게 지켰습니다.”라는 자기의 자리가 있겠지요. 그것이 죄라 했지요. 떠나고 보니까 그 자리가 죄라는 것을 압니다.
그 안식일을 예수님이 지키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고 의가 되겠지요. 그 죄와 의가 안식일을 통해서 상호 대비가 서로 마주침이 있겠지요.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 3장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가가 잠잠하거늘(막3:1-4).”
안식일을 완성하는 것이 뭡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안식일의 완성이죠. 그러면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은 안식일입니까, 안식일 아닙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와서 죽은 우리를 살리는 것은 안식일의 완성입니까, 아닙니까? 완성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안식일 날 그냥 막 살면 되지요.
막 사는 방법 중 하나가 뭔가 하면, 나름대로 이만하면 안식일을 잘 지켰다고 여기는 그것을 행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안식일 날 막 사는 거예요. 죄를 막 짓는 거예요. 그것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면 안식일의 완성으로 죄인에서 의인되는 그 완성에는 누구 공로가 개입되겠습니까? 안식일 지킨 우리 공로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겠습니까? 십자가 공로죠.
그래서 안식일은 십자가를 통해서 해석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십자가 지기 전에 앞당겨 손 마른 사람에게 일을 행하신 거예요. 이제 마가복음의 흐름을 이해하겠습니까? 십자가가 언덕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에 십자가가 나오고, 현재 우리는 3장을 공부하고 있지요?
3장에서 이미 십자가의 긴 카펫이 깔리는 거예요. 영화배우가 카펫을 밟고 난 뒤에 집에 갑니까? 카펫이 펼쳐진 그 식장에 들어가잖아요. 본문에서 안식일 날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이 그냥 집으로 가면 됩니까? 자기 병 고치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고, 어떤 인간도 율법을 못 지키는 죄인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율법을 못 지키면서도 의인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오셨잖아요. 이것이 3장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죠. 3장 다음에 4장, 4장 다음에 5장. 이런 식으로 카펫이 펼쳐지면 결국 우리는 3장에서도 십자가의 카펫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2014. 11. 27. 09:12 녹취 마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