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8 00:37:56 |
조회 : 206 |
하나님의 낭비 141016 |
이름 : 이근호
(IP:119.18.9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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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례
(IP:203.♡.42.222) |
14-11-21 22:25 |
가락-요한복음 4장31(하나님의 낭비)141016a-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4장 30절부터 해봅시다. 30절부터 한 이야기는 요한복음 4장 43절까지 한 내용은 사실은 추수에 관한 내용입니다. 추수를 한다는 거, 이 추수를 할 때 뭣과 연관 지어야 되느냐 하면 추수니까 봄이 아니고 일종의 가을이잖아요? 한 계절의 1월 1일에서 추수한다는 것은 시작지점에 추수가 아니고 1년이 끝날 지점에 추수가 있죠.
그렇다면 추수를 할 때는 반드시 전제로 뭘 하느냐 하면 창조를 염두에 두게 되죠. 그렇다면 먼저 묻고 시작합니다. 창조 행위와 추수 행위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추수 행위의 차이점, 차이점이라 물었지만 차이점이 있느냐, 없느냐도 한번 생각해봐야 됩니다. 창조 행위와 추수 행위 차이점이 과연 있느냐? 사실은 차이점이 있는 게 아니고 창조 안에 추수가 이미 내장돼 있고 그 내용이 사전에 포함돼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겠느냐 하는 겁니다. 사전에 계획되었기에 그 계획된 걸로 하다 보니 그게 추수가 되었다.
그러면 추수하는 것도 결국 창조 행위 속에 포함이 된다 그렇게 보시면 되겠죠?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가 아는 상식대로 얘기한다면 없는데서 있고 죽은데서 살아난다. 이것이 로마서 4장에 나오잖아요? 이미 자식이 없는데서 자식이 나오고, 죽은데서 살아나는 겁니다. 그 말, 제 말이 맞아요. 창조 맞죠? 그 창조가 하늘나라에서 나타난 흔적입니까? 이 지상에서 나타난 흔적입니까? 지상에서 나타난 흔적이죠.
아브라함의 자식이 없었는데 있었다. 그게 하나님의 계획한 창조 행위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구름 위에 있는 게 아니고 지상에 있잖아요? 그러면 한번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부터 이미 뭐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일이 지상에서 이미 개시가 되었다는 뜻이죠. 그러면 지상의 일 가운데서 우리가 뭘 뽑아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우리가 파악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 주께서 그런 일을, 그런 증거를 남겼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창조를 어떻게 하느냐? 그 핵심 되는 그 중심 되는 원리 원칙이 이 지상에서 이미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그렇다면 창조 행위 안에 뭐가 들어있다? 추수 행위가 들어있다. 그러면 추수 행위를 하나님께서 지상에 남겼습니까? 안 남겼습니까? 남겼죠. 아까 남겼다 했으니까. 처음에 아브라함 남겼으니까. 마찬가지로 추수 행위를 남겼죠. 남긴 것이 뭐냐,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예수 믿게 된 이게 남긴 거예요. 이해되겠죠.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찾을 때 하늘 쳐다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자기 흔적을 남겼으면 우리는 뭘 봐야 돼요? 지상에 남겨진 하나님의 행위를 찾아야지, 저 높은 하늘을 보고 ‘신이시여, 하늘이시여,’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하늘만 쳐다보고 비는 이게 실패로 끝나요. 대표적인 예가 엘리야 시대 때 850:1로 맞장 뜨잖아요? 고등학교 때 17:1로 싸운 적이 있다고 그런 전설을 누가 이야기합니다마는 영화에 보면 나오는가, 한데 850:1로 싸운 사람이 있어요. 누굽니까? 엘리야죠. 엘리야 저쪽에 아세라 선지자와 바알 선지자 850명이 누굴 향해 빌었어요? 신을 향하여 빌었는데 그게 소용 있어요? 없어요? 그러니까 하늘을 향하여 비는 게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 인간들 생각에 하나님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옛날 우리 할머니도 그랬는데 새벽에 정화수라 해서 내가 보기는 둘 다 H₂O인데 정화수 떠놓고 빌면서 종이를 태워서 그거 올해는 남산 위에 노루새끼처럼 자식들 잘 되게 해주고 일 잘 되고 건강하게 해 달라 하잖아요. 그러면 종이를 태우면 종이 태운 재가 이상스럽게 위로 올라가요. 신기해요. 그리고 태운 종이를 맨 손으로 바치면 뜨겁지가 않아요. 그러면 종이가 중력에 반해서 하늘로 올라가요. 뜨거운 공기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요.
그런데 실제로 성경에서 하나님 어디 있습니까? 바로 엘리야는 제단을 만들어 놓고 제단에 돌이 12개, 돌에 물 12 바케스를 갖다 부어요. 그러니까 뭡니까? 결국 하나님의 흔적은 이 지상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국가의 존재, 그게 하늘의 하늘입니다.
지금까지 한 강의 한번 정리해 볼까요? 하나님은 창조했다. 창조한 흔적을 남겼다. 남긴 것이 어디 있느냐? 지상에 새겨져 있다. 지상에 새겨져 있을 때 그것을 찾아내면 된다. 그럼 찾아내는 방법은 바로 이스라엘 역사, 하나님의 언약 역사 속에서 지상에 하나님께서는 일종의 글씨라고 볼 수 있죠. 자기 흔적을 남겼으니까. 그렇다면 창조 행위 속에 뭐가 포함돼 있다? 추수 행위가 포함돼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추수 행위를 어떻게 합니까? 하늘보고 찾지 말고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추수 행위를 찾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 이예요.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이 이 땅에서 추수를 당했잖아요? 주님이 추수를 했거든요. 여기 35절에 보면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미 추수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더 나아가봅시다. 그러면 여기에 이 여인은 추수당한 사람이 됐는데 이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받은 그 방식대로 그것이 하나의 모델이라면 그 뒤에 추수 받는 사람도 여인이 추수된 것처럼 똑같이 추수될까요? 안 될까요? 똑같이 되죠. 그러면 우리가 파악할 건 뭐냐? 이 여인이 어떻게 구원됐느냐? 그 방식을 알면 되죠.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럼 오늘 강의 핵심은 찾을 수 있죠? 추수 방식을 여인에게 해당했다면 그 여인을 구원하게 된, 추수하게 된 그 방식만 우리가 눈치 채고 알아채면 바로 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우리가 접합한 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어떻게 추수됐느냐?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잠시 설명해 드리면 미국에서 예배 설교한 건데 잠시 간추려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처음에 이 여자와 주님은 무엇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났습니까? 우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났죠? 그림으로 그리면 우물을 사이에 두고 이게 사마리아 여인이고 여기 예수님이 이렇게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여인에게 말을 걸었죠? “물 좀 달라” 했어요. 그러면 여인은 “당신이 유대인인데 왜 나한테 물을 달라 하느냐?”라고 했죠. 둘 다 지금 관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둘 다 관심사가 물 길러 왔고 예수님을 물 먹으러 왔다. 이렇게 돼요. 우물을 사이에 두고 거기 관심을 두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추수할 때, 또는 구원할 때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느냐? 그걸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인물 대 인물로 할 때 주님께서 여기 물체, 또는 사물을 가운데 두는 겁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누군가에 대해서 모르고 있고 무엇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자기는 우물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자기는 이 우물에 물 길러 온 거죠.
그러면 우물은 어느 영역에 포함돼 있느냐 하면 이 사마리아 여인이 알고 있는 영역 속의 우물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살고 있는 차원, 그 영역, 삶의 공간 속에 우물이 포함돼 있고 거기에 사마리아 여인이 있는 거죠. 지금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추수, 구원할 때 어떻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 설명해 드리는 겁니다.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요걸 몽땅, 사마리아 여인만 달랑 구원하는 게 아니고 요 체제 자체를 몽땅 사용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면 여인이 지금 알고 있는, 여인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삶의 현재, 우물가서 물 긷는다는 그걸 그대로 사용하면서 똑같은 용어를 쓰면서 전에 이해 못한 이야기를 해버려요. 왜냐 하면 예수님은 우물과 자기라는 요 폐쇄된 공간, 이 바깥에서 예수님께서는 건져내야 되거든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우리는 영원히 천국에서 살잖아요? 살 때 영원히 살려면 하나님 생각하고 우리 생각하고 일치돼야 같이 살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던 그 마음을 같은 그 마음과 심정을 알아야 우리가 주님과 영원히 같이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할 때는 아무것도 없는데서 창조했잖아요? 없는데서 주께서는 일방적으로 말씀으로 창조해 있게 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미 있어버린 상태에서 주님의 없을 때 있던 그 창조 행위를 있는 상태에서 과연 그걸 알아챌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거는 안 되죠.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한다 할지라도 그전에 선입관이 뭐가 있습니까? ‘나는 여기 있어. 나는 여기 있단 말이야. 나는 여기 있어.’ 이게 여기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순수하게 창조 행위를 언급하면서도 항상 밑바닥에 깔린 건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나는 기어이 구원해야 됩니다.’하는 자기 구원 욕구를 스스로 이걸 초월할 수가 없어요. 왜 내가 있으니까.
미국에서 그런 강의 했습니다만 목요 강의인가 내세웠던 문장이 뭐냐 하면 로마서 9장에 있습니다. 그 대목을 읽어드릴 테니까 여러분의 느낌을 한번 말씀해 보세요. 3절에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요 대목을 읽으니까 어떤 분이 멋도 모르고 아멘 했어요.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이게 아멘이 되신다면 저주 받으실래요? 이 본문이 뭡니까? “내가 내 골육 형제를 위해서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저는 오케이 하겠습니다.” 라는 그 대목이거든요. 이게 아멘이 돼도 문제고 안 돼도 문제에요. 그렇잖아요? 아멘이 된다는 말은 ‘주여 저 자진해서 지옥 가겠습니다.’ 그 말이고, ‘아휴, 저는 아멘이 안 됩니다.’ 해버리면 세상은 주의 말씀대로 아멘 하던 안 하든 간에 말씀대로 실시하는데, 그 실시에 동의 안 하면 그 사람은 구원 못 받는 사람이 돼 버리잖아요. 내 말씀대로 하겠다는데 ‘주여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이렇게 나온다는 말은 ‘이건 뭐냐? 너는 지옥 가.’ 이런다 말이죠. 이래도 지옥 가고 아멘 해도 지옥 가고 안 해도 지옥 가고. 그렇게 돼 버린 구절이 로마서 9장 3절입니다. 여러분, 아멘 해 보시렵니까? 내가 주의 저주를 받는다 할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이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지금 제가 왜 이걸 거론 하냐 하면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고자 한다면 바로 로마서 9장 3절 같은 게 걸림돌이 돼 버리는 거예요. “네가 구원받고자 하느냐?” ‘예, 구원받고자 합니다.’ “구원받으려면 내 뜻에 동의해야 되는데?” ‘아, 동의하죠.’ “그래? 동의해?” ‘동의합니다.’ “그러면 이 로마서 9장 3절에 아멘해라.“ ‘뭔데요?’ 주께서 원하신다면 주한테 잘려서 지옥 가도 좋습니다.‘ ”동의해?” 하면 ’그것만큼은,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주여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이렇다 말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이미 창조되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결국은 주님의 뜻과 합치된다? 합치 안 된다? 합치가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항상 남 구원이 우선이 아니고 누구부터 우선이에요? 내 구원만큼은 양보를 할 수가 없어요.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만약에 우리가 지옥 가면 누가 격려해줘요? 여러분? 여러분 격려 안 해줘요. 누가 격려해요? 내가 격려해요. ‘가다 보니까 지옥 가는데 지옥 가서 힘내, 파이팅!‘ 결국은 내가 나를 다독거려주고 격려해줘요. 나는 누구 편입니까? 주님 편이요? 아니에요. 나는 내 편입니다.
제가 맨해튼 처음 강의할 때 그 이야기했거든요. 에고와 셀프를 나누었습니다. 다른 분은 못 알아들어요. 내가 영어로 했는데도 못 알아들어요. ego와 self. ego라 하는 것은 자아, self라 하는 것은 자기, 자기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유일하게 자기라고 부를 수 있는 분에게만 나왔습니다. “나는 누구라 하느냐“ 할 때 나, 그게 자기에요. 이 세상에서 자기라고 할 수 있으려면, (어려우니까 잘 들어보세요.) 독자적인 영역을 영원토록 유지할 때만 계속 자기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죠. 어제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분이잖아요. 그분에게만 자기가 돼요. 우리는 자기가 안 돼요. 왜냐 하면 우리는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는 안개기 때문에 영원치가 않아요. 우리가 영원한 경우는요, 예수님에 의해서 소속이 될 때 그때는 나의 몸에 자기가 달린 게 아니고 주님 자기가 붙이는 자기의 이름, 주의 이름으로 우리가 영원한 겁니다. ...에서 가장 간단하고 기본이 뭐냐 하면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영원할 수 없고 누구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영원하거든요. 그런데 이 말을 성경에 그렇게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 불러라. 주의 이름 불러라. 네 이름 부르지 말고.‘ 그렇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뜻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주의 이름 부른다는 말은 뭘 포기했다는 말입니까? 내가 나라고 부르는 이것은 사기라는 것을 자인한 거예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내가 있지, 내 이름으로 내가 있는 게 아닙니다. 할 때만 주의 이름이 의미가 있어요. 내가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부를 수 있는 자기가 없었는데 자기라고 부를 수 있는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주의 이름으로 우리는 나를 자기라고 부르면서 그 자기는 알파요 오메가 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천국 가서 영원토록 살 수 있는 겁니다. 내 이름으로 영원한 게 아니에요. 누구 이름으로? 주님 이름으로, 이 땅에서는 우리는 ego에요.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 이름 갖다 붙이고 내 이름 부르고 해요. 하지만 그 이름은 천국에 합류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에요.
베드로가 베드로 이름을 가지고 자기 목숨을 바치며 하는 말이 “예수님 제 목숨 바쳐서 주와 합류하겠다.” 할 때 예수님께서 반겼습니까? 거부했습니까? “제가 목숨 바쳐서 주님 따라가겠습니다.“ 할 때 주님이 어떻게 했어요? ”그러라“ 했습니까? ”나 있는 곳에 못 온다.“ 했습니까? 못 오죠. 내가 천국 가요? 내가 천국 가는 법은, 그런 일은 성경에 없습니다. 나는 천국을 못 가요. 내 이름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주의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참 어렵죠. 주님의 자기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자기에서 파생된 게 뭐냐 하면 1인칭 복수를 영어로 하면 we라고 해요. 우리. 1인칭 복수 맞죠? 예수님께서 뭐가 나오느냐 1인칭 복수 we가 나와요. self에서 we가 나와요. 그 we는 내 이름 이예요? 주의 이름 이예요? 주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we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그 다음에 우리 아버지죠. 그 앞에 주의 기도문 다음에 마태복음 6장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기도하라 했어요? 기도하지 말라 해요? 기도하지 말라 했죠.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죠. 이방인들의 기도는 뭐냐 하면 이방인의 기도는 언약 밖에 있기 때문에 ego밖에 없어요. ego밖에 없으니까 기도해도 누구 좋아라고 기도합니까? 자기 좋아라고, 자기 것을 다지고 자기 것을 확장시키고 자기 것을 더 끌어 모으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한 겁니다.
그래서 만날 기도할 때 기도하는 이유가 뭡니까? 기도 왜 합니까? 나한테 이런 것이 있어야 되는데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원하는 것을 채워달라고 기도하잖아요? 가정이 어렵습니다. 회사가 안 됩니다. 교회가 교인들이 나가서 교회가 텅텅 비고 예배당은 있는데 교인은 없어 운영이 안 되고,이런 것 때문에 하잖아요. 그 기도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라 말이죠.
주께서 뭐라 합니까? 그런 기도는 하라? 하지 마라? 그런 기도는 일절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저한테 항의해요. 그 기도 안 하고 내가 기도할 게 뭐가 있느냐고 항의하는 겁니다. 평소에 결국...(몇 사람이 오는 소리. 어서 오세요. 시작한지 20분 됐습니다.) 늦게 오셨으니까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할게요.
요한복음 4장 31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추수에 관한 이야긴데 주님이 추수를 할 때 이 땅에 추수의 흔적을 남기십니다. 추수의 흔적을 남기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뜻을 발견할 때 자꾸 하늘을 쳐다보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은 실제로 하늘 쳐다보고 하나님 앞에 뭔가 호소하라는 게 아니고 이 지상에 남긴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이렇게 남겨 놨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남겨 놓은 그 지상에 남겨둔 흔적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돼요.
그러면 요한복음 4장에서 지금 추수에 관한 이야긴데 이 추수에 관한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남겨진 흔적이 뭡니까? 미리 들으신 분 말해보세요.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됐잖아요. 사마리아 여인이 있다는 것은 주께서 이미 추수행위를 했고, 이미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난 일을 봐야지, 그것도 안 보고 하늘을 향하여 ‘주여 추수, 어떻게 구원되겠습니까?’ 이래봤자 소용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이미 하나님의 일은 이 땅에 벌어졌다는 거예요. 이미 이 땅에 벌어졌는데 왜 자꾸 하늘을 쳐다보느냐? 하나님과 지상의 만남은 이미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사도바울이 이미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해서 그 십자가 사건을 제시하는데 십자가 사건이 어디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입니까? 땅에서 일어난 사건입니까? 그게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잖아요. 하나님을 어디서 찾느냐 이 말입니다.
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누굴 보고 기도했습니까? 하늘을 향하여 기도했다고요. 그런데 엘리야는 뭘 했습니까? 이 땅에 하나님이 여기 있다는 흔적을 남겼죠.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존재를 언급하는 단을 쌓고 그 다음에 12통 물을 붓잖아요. 12지파를 상징하듯이. 하나님은 일을 마치 쟁기로 밭을 갈 듯이 이 지상에다 밭을 갈아서 이미 주님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면 지상을 봐야죠. 땅을 봐야죠.
주기도문에 뭐라 돼 있죠? 하늘의 뜻이 어디에 이루어진다? 땅이죠. 땅을 봐야 되는데 사람들은 자꾸 이방인처럼 하늘을 쳐다보고 기도를 하니까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 뭐라 하시느냐 하면 이방인들의 기도를 먼저 언급하죠.
오늘 강의에서 이제 중요한 게 나오는데 어렵더라도 참으세요. 논리를 차근차근 말씀드릴 테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건 하나님께서 일하신 흔적이 땅에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죠? 그럼 우리 생각은 그 이야기 듣고 ‘그럼 땅의 흔적을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게 아니에요. 이 땅에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 방법이 중요하다가 뭐냐 하면 이방인들이 평소에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대비하는 가운데서 ‘그게 아니고’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건 제가 실시한 방식이 아니니까 저보고 탓하지 마세요.
기도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주님께서 주기도문 하기 전에 먼저 뭐부터 이야기해요? 이방인의 기도부터 먼저 하죠. 이방인의 기도를 제가 간추려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게 필요한 것을 신께서는 주시옵소서. 제가 기도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니까 제게 이런 것이 아쉽고 제 가정에 우환이 있고 자식이 아프고 사업이 안 되고 교회 부흥이 안 되고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그리고 제가 선교를 하려고 하는데 선교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런 게 있을 때, 내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은 아시오니 하나님께서 내가 기도할 테니까 그 기도내용 따라 이루어주시옵소서.‘라고 하죠. 그게 이방인의 기도라는 거죠.
우리는 다들 그렇게 하니까 이게 하나님께 인정받는 기도처럼 생각했는데 주께서는 그것부터 먼저 언급하면서 이렇게 합니다. “네가 그런 식으로 기도하지 마라. 그런 기도 아예 하지 마라.” 왜냐 하면 너한테 있어야 할 것을 누가 안다? 내가 알아서 채워주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 하는 이야기를 제가 했더니만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항의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항의가 뭐냐 하면 ‘목사님 그러면 기도 할 게 없네요.’라는 뜻이거든요. 평소에 기도할 게 없다는 말은 말로써 반응을 나타냈다는 말은 평소에 다 누굴 위해서 기도했다? 나를 위해서 기도했다. 이방인들의 기도를 했다는 것을 토해놓게 되었어요. 들통 난 셈이죠.
그 다음에 나온 게 뭐냐 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죠. 내가 아니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해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되려면 우리가 1인칭 복수죠. 영어로 we. 이걸 맨해튼 첫 번째 강의해서 했는데 ego, 이게 자아거든요. 인간은 자아를 뭐로 보느냐 하면 self, 자기로 이해해요. 그런데 self로 이해하려면 인간은 영원해야 됩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영원히 고정되고 영원히 불변하고 영원히 존재해야 계속해서 나, 나가 성립돼요. 알파요, 오메가 될 때만 이게 나, 자기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알파요, 오메가가 누굽니까?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죠. 그러면 자기라고 말 붙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누굽니까? 예수님인 거예요. 천국에는 이 ego가 못 들어갑니다. 이 자아는 못 들어가요. 자아가 자기가 됐을 때 들어가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내 이름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네 이름 말고 누구 이름? 예수 이름,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 들어본 적 있습니까? 이거는 예수 믿는 사람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잖아요? 다 알고 있는 이야기, 뜻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이 세상에 self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영원해야 돼요.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변함이 없어야 돼요. 영속돼야 돼요. 그분만이 영원히 self, 자기가 돼요. 이 자기에서 나온 것이 뭐냐 복수가 되면서 그게 we,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 그 우리는 ego라는 인간들 백날 모여 봐야 우리가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우리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통해서 이스라엘이 출애굽 나올 때 남자가 몇 명 나왔습니까? 40만 명 나왔죠. 40만 명을 출애굽기 4장 23절에서 그걸 1인칭 복수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게 분명히 40만 명 같으면 단수가 아니고 복수인데 그걸 1인칭으로 표현해요. 뭡니까? 내 아들! 내 장자를 애굽에서 불러내라는 겁니다.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내 아들들이 아니고 내 장자들이 아니고 내 아들이 된 장자, 하나로 묶어버려요. 묶는 이유는 어린양이라는 약속 하에 모든 개성은 다 묵살되기 때문에 하나로 묶는 겁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이건 유치원 애들도 아는 이야기 나옵니다. 바로 동방박사 이야기 나오죠. 동방박사 이야기하면서 거기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는 호세아 말씀을 인용했죠. 그 아들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동방박사가 본 아기 예수, 예수님 이야기잖아요. 예수님이 단수죠? 단수가 나오면서 그 단수가 옛날 이스라엘 그 40만이 이루지 못한 것을 그걸 대체하면서 그들이 실패한 것을 예수님 홀로 그 언약을 이루면서 예수님 쪽에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생산하는 겁니다.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인간 안에 세상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보통 우리는 세상 안에 너, 나가 있는데, 우리의 상식인데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예수님 안에 세상이 따로 있어요. 숨어 있어요. 그 세상은 눈에 안 띄는데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세상이 부활을 통해서 바깥에 있는 어두운 세계를 삼켜버리면 비로소 주님 안의 세계, 그 낯선 세계가 인간들 익히 아는, 세상은 넓고 하늘은 별이 있고 물이 있고 놀러 가고 이 세상에 미국 있고 필리핀, 이 세상 말고 주님 안에 있는 특수한 세상이 이 세상을 덮쳐 버리면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하늘 쳐다본다고 되는 게 아니고 이미 이 땅에 이동했어요. 이미 천국은 와 있는 거예요. 와 있다는 것을 세례요한은 가까이 왔다고 이야기했고 이미 천국은 와 있는 겁니다. 와 있는데 옆에 있어도 못 알아봐요. 왜, ego 때문에. ‘주여 나 천국 넣어 줄 거요? 말거요?’ 우리는 천국 안 넣어줍니다. ego기 때문에 안 넣어줘요. 안 넣어주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는 어디에 부딪쳐야 되느냐 하면 self에 와서 부딪쳐야 되죠. 부딪친 장소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을 때 모든 게 다 죽은 거예요. 주께서는 ego를 죽여서 self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self 안에 있는 생명을 가지고 ego 안에 있는 생명을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한번 물어봅시다. 베드로가 목숨 바치고 주님 따라간다 할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인정했습니까? 거부했습니까? 거부했죠. “주여 제 목숨 바치겠습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 나 있는 곳에 못 와.” 그게 오늘날 주의해야 돼요. 주님 계신 곳에 우리 못 갑니다. 못 가는데 교회마다 천당 보내준다고 이야기하고 천당 간다고 이야기하고 “주여 우리 엄마 천당 보내주시고 우리 아빠 천당 보내주시고” 아니 이건 성황당에 가서 비는 것과 똑같이 빌어요. 도대체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옛날 빌던 식으로 ‘그저 남산 위에 노루새끼처럼 잘 뛰놀게 해주시고 옛날 조물주 빌던 식으로 그대로 교회 와서 빌고 있는 거예요. 나 잘 되라고. 우리가 아니고 나 잘 되라고.
그 우리라 하는 것은 주기도문의 내용은 바로 출애굽입니다. 출애굽 사상입니다. 모든 개성을 십자가 어린양 피로 다 묵살시켜 버리고 어린양만 선도 주자가 되어서 뒤에 줄줄이 따라오는 방식으로, 대표자는 어린양이고 뒤에 따라오는 식으로. 어디 사람보고 홍해가 갈라진 게 아닙니다. 어린양 보고 갈라진 거예요. 그 어린양을 기념하는 것은 제사법 이예요. 어린양을 매일 아침저녁마다 바치게 해서 어린양, 그 어린양의 피 묻힌 곳이 소의 피, 염소의 피, 제물의 피가 묻힌 곳이 성막이고 그 핵심은 뭐냐 언약궤입니다. 언약궤 앞장세웠더니만 요단 강 갈라지면서 약속의 땅 들어가요. 대표자 없이는 못 들어갑니다. 그게 중보자입니다. 그게 맏아들이고 장자고.
하나님 우리 안 넣어줍니다. 이거부터 출발해야지, 복음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우리 넣어주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우리를 넣어줄 것 같으면 생명나무 가는 길을 애초부터 차단 안 했습니다. 오히려 문을 활짝 열어서 ‘아이쿠, 선악과 따먹었쪄요? 아이고, 아이고, 어쩌노, 내가 선악과나무에 철조망을 쳐놓았어야 했는데 아이고, 내가 잘못이다. 자, 문 열어 놨다. 생명나무 막 따먹어라.’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추방해 버리고 문을 철석 잠가 놓고 혹시 올까봐 두루 도는 화염검까지 24시간 경비체제 들어가죠. 이 말은 생명나무 언감생심 생각도 하지 말라. 너희는 그걸 생각 할 잽도 못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가 생명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천국 가지고.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은 뭐냐, 살아있을 동안에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에 점점 전선으로 확장된 거예요. 인간의 사유가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의 사유는 생각은 뭐든지 생각하게 되면 반드시 그 너머를 생각할 수 있는 게 사유거든요. 비록 인간은 지구에 갇혀 있지만 태양계 말 듣는 순간 인간은 뭘 생각합니까? 태양계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우주 하면 인간은 뭘 생각합니까? 우주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하니까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는데?’ 이게 인간의 사유체계라는 거예요. 인간의 사유체계는 항상 자기 지평을 유지할 수밖에 없어요.
죄를 유지한 가운데 죄 너머를 생각하니까 이 너머 선 천국이 천국이겠습니까? 죄의 확장이고 연장이겠습니까? 이거는 죄의 사고방식의 확장일 뿐 이예요. 이건 천국은 아니거든요. 그러니 교회는 여러분이 죽으면 천국 간다 하는데 이걸 상품으로 장사하고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의 삶이 나오잖아요. 온유와 화평 나오니까 ‘그래 내가 옛날 육적이었을 때는 몰랐는데 이제 성령 받고 난 뒤에는 그런 삶을 살아야지.’ 이렇게 하거든요. 그거는 성령의 삶이 아니고 육적인 인간의 확장 이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전에는 나는 그야말로 술 먹고 담배 피웠는데 이제 성경에 보니까 온유와 화평과 용서 하고 이렇게 나오니까 그게 탐이 나는 거예요. 그게 내 사는 것 너머니까. 너머를 영어로 go over 라 합니까? 그러니 너머는 항상 기준점이 있을 때 너머라는 게 +알파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이미 기존을 전제로 한 이것 아닌 다른 어떤 것, 이렇게 해서 + 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요, 내가 어떻게 착하냐가 아니라 자기 생각을 안 해요. 왜냐 하면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왕 노릇하죠. 그리고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왕 노릇하죠.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은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성령 받고 착하게 살아야지.’ 그 생각합니까? 아담 생각합니까? ‘오, 아담 때문에 우리가 뭘 해도 죄가 되는구나. 아하, 그렇구나. 왜 그걸 몰랐지?’
내가 착하다고 여기는 것도 사실은 이미 죄 안에서 죄의 일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헌금하고 십일조 하고 전도한 것도 선교회비 한 것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요. 왜냐 하면 아담의 죄 때문에 그 뒤에 태어난 모든 새끼 친 모든 인간은 어떤 걸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그 다음에 누굴 보느냐 하면 마지막 아담, 예수님을 생각하거든요. 예수님 안에서는 어떤 죄도 은혜로 용서가 되기 때문에.
결국은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담 죄 때문에 뭘 해도 죄가 되는 나를 주님의 십자가 은혜 때문에 뭘 해도 용서가 되는 그러한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 순간 자기 생각하지 않고 누구만 생각해요? 주님의 은혜만 생각할 때 그게 성령 받은 사람 이예요.
그런데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자기 기존의 ‘내가 남들처럼 착하고 싶다. 담배 끊고 싶다.’ 이렇게 하니까 ‘그래 예수 믿고 난 뒤에 나 술 끊었다.’ 자꾸 자기가 자기를 조작해요. 그러면서 그 안에는 뭐냐 ego가 살아있으니까 그거 가지고 미안하지만 천국 못 갑니다. 그건 자기 이름으로 예수 믿는 건 쳐주지 않아요. 자기 이름으로 예수 믿는 걸 행함이라 하지, 그걸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와야지, 자기 행함에서 나오는 그건 신념, 열심, 각오, 결단이지 그거는 성령이나 믿음이 아니에요. 인간이 말하는 믿음은 양육과 강압과 훈련과 교육을 통해서 얼마든지 습득이 가능합니다. 반복된 훈련을 모방을 통해서. 성령 안 받았으니까 믿는 척은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믿씁니다. 쌍시옷 붙이면서 하거든요. 교회는 커미션 받아먹고 장사해 먹고 그렇죠.
구원받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인간이 빠지면 돼요. 해를 봐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죠. 해보면서 ‘내가 열심히 기도했더니만 해가 저렇게 빛나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해가 왜 빛납니까?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빛나거든요. 시편 136편. 별을 봐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다. 달을 봐라. 달 속에 주님의 인자하심이 있다. 그건 누구 이름으로 만든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만든 거예요. 내 ego이름으로 만든 게 아니거든요.
집사님, 보름달 만들려고 애 좀 썼습니까? 아니죠. 그래서 미국에서 강의할 때 이랬어요. 여러분들이 자기 이름으로 뭐든지 하는데 여러분 밤에 잠자고 일어나면 뜰에 눈 온 거 그거 누가 눈 퍼다 담아놨습니까? 수금포로 퍼 담았습니까? 수금포 하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딱 한 사람 알아들어요. 그 안에 경상도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라. 수금포, 삽이거든요. 밤에 누구 이름으로 하얗게 사방에 눈이 쌓였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따라서 인간이 주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뭐냐 하면 내 이름으로 기도해서 놓쳐버린 하나님의 감사 거리를 내 뜻대로 안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뜯지도 않은 감사 보따리를 뜯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기도라 해요. 그러니까 내 이름으로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 내 이름의 기도를 주의 이름으로 바꾸어 주면서 ‘네가 네 뜻을 쟁취한다고 고집세운 것 때문에 네가 발길로 차버리고 네가 무시하고 갖다 버린 그런 것들 속에서 이미 주의 은혜가 감사할 거리가 얼마나 많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눈을 뜨고 보라고 우리보고 기도를 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주기도문이라는 이름으로 제가 뉴저지 교회에서 한 설교잖아요. 거기다 ’왔다 장 보리‘ 이야기까지 하면서 했어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지금 요한복음 4장에서 지금 이 여인을 추수를 하는데 우물이 있는데 예수님 계시고 여인이 있다 말이죠. 이 우물은 여인이 우물로 물을 길러 왔잖아요? 우물은 어떤 세계 속에 속합니까? 이 여인이 알고 있는 삶의, 생존의 차원에 우물이 포함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 여인을 추수하면서 이거 자체를 뭐로 보느냐, 창세전으로 돌리는 방법을 하는 거예요.
늦게 오셔서 못 들었죠? 다시 할게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천국 간다는 것은 예수님과 영원히 산다는 뜻이고, 그렇죠? 살면 사고방식이 같아야 되겠죠? 부부도 사고방식이 같아야 오래 가지, 아니면 애 둘 낳아도 갈라서면 끝나는 겁니다. 참다 참다 갈라서는데. 예수님과 사고방식이 같으려면 예수님께서 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 때 창조했던 그 마음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주님께서 창조할 때는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없었던 것을 창조했다 이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이미 있고 난 이후에 주님의 창조를 알려면 불가능한 이유가 이미 있는 나를 항상 제일 먼저로 고려해서 창조를 생각하는 그 버릇이 진짜 창조를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주여 어떻든지 저는 빼놓으면 안 됩니다. 저는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자기부터 먼저 챙기는 식으로 하니까 그거는 이미 있고 난 뒤에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난 뒤에 창조기 때문에 아예 내가 없었던 창조 행위와 이게 어긋나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그 뜻이 그 뜻이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있는 입장에서 주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이건 애시당초 성립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을 천 독 만 독해도 소용없어요.
그렇다면 천국 갈 사람이 없죠? 그런데 주님이 추수를 한다는 거예요. 추수를 하니까 이거는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누가 한다? 주님이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이건 오케이입니다. 맞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가 알 것은 뭐냐,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구원하니까 사마리아 여인에서 그 모델을 찾아보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할 때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는 모델을 아까 말씀한 것처럼 자꾸 뜻을 하늘에 하지 말고 지상에 남긴 뜻이 있으니까 지상을 통해서 그 뜻을 발견하면 되는 거거든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구조가 이미 어떤 사물과 내가 딱 결합이 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여인의 우물이거든요. 주님께서 찾아 우물에 찾아오시는 거예요. “물 다오.” 할 때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나보고 물을 달라합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이 사마리아 여인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차원이냐? 자기 차원에서 자기가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절대로 못 벗어나요. “물은 드리겠는데 당신 유대인 때문에 의아해 합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뭐냐 지금 현재 여자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야기하면서도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나한테 물 달라 했을 때 내가 누군 줄 알았더라면 물 줬을 것이다. 내가 누구냐 하면 네가 물 길러오지 않을 정도로 생수가 나오는 물을 줄 사람이 바로 나다.”라고 이야기하죠.
그러면 이 여인은 졸지에 뭐냐 되느냐 하면 이 여인은 자기 세계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우선이고 우물은 나중이기 때문에 “그런 우물이 있으면 저한테 그걸 주시옵소서.“라고 예수님을 이쪽 자기 세계에 끌어당기려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인 자체를 뭐로 만드느냐 하면 우물로 만들어 버려요. 여인 자체를 우물로 만들면 여인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인은 그 순간 날라 가죠. 추수란 주께서 나를 날려 보내는 일이 추수입니다. 나를 없애 버려요.
이 우물이 생수가 나오는 우물로 여인이 변해버린 거예요. 그럼 이 우물은 전에는 여인에게 소속된 우물이 지금은 예수님에 속한 우물이 되면서 창조 전, 없을 때 그 심정으로 온 거예요. 여인이 있고 난 뒤에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가 아니라 여인이 아예 사라진 상태에서 창조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창조를 하는데 창조 방법이 뭐냐, 생수가 나오는 인간만 창조했다는 것이 여기서 밝혀지죠.
그게 뭐냐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둡니다.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를 버렸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움직이는 우물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내 안에 누가 있다? 전에는 내 안에 나만 있는데 나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인 줄 알았는데 내 그림자가 내 그림자가 아니고 주님의 그림자인 거예요. 그게 갈라디아 2장 20절에 “내가 주님과 함께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죠.” 그럼 그리스도가 가는 모든 태양이 비치는 그림자가 누구 그림자라 말입니까? 사도바울의 그림자가 아니고 누구 그림자입니까? 함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ego가 사라지고 self로 된 거예요.
예수님만이 self안에 사도바울이 포함되니까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만든 우리, 우리 안에 포함이 된 거예요. 그리스도는 머리고 우리는 그의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교회죠. 이래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럼 신앙생활은 간단하죠. 뭡니까? 인간은 빠져라. 우리가 빠지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빠집니까? 가만있어 보세요. 늙으면 죽습니다. 그럼 빠져 있는 거예요. 빠지기 전에 이미, 어떤 사람이 추수되고 구원된 사람이냐 하면 죽기 전에 이미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죽어야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 이예요. 그러니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이미 죽은 자로서 좀비로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일찍 깨우쳐 주는 사건입니다. 구원의 흔적은 지상에 있으니까. 십자가 사건을 자꾸 이동해서 잡아당겨서 지금 현재 우리까지 십자가 사건은 십자가를 봐라. 이미 우리는 죽은 자고 우리가 사는 것은 주의 것으로 사는 것이지, 내 것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늘 확인시켜 주죠.
그러면 우리의 옛 사람, 우리의 몸은 어떻게 되느냐? 우리의 몸은 이게 앞에 옛 자가 붙잖아요? 옛 사람. 옛 사람으로 살면 되죠. 그러면 그때 주기도문 설교할 때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면 돼요. 이거는 잘 해요. 내 자식이 최고고, 내 남편이 최고고, 나는 돈밖에 모르고, 이거는 안 가르쳐줘도 너무너무 잘하죠. 그걸 하면서 그게 뭐다? 이것을 옛 사람이게 알게 해주신 그 효과로 우리는 내 자신이 이렇게 살아가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 행동을 변명해요. 잘해보려고 하는데 뭐 돈이 궁해서 돈 좀 밝혔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성도는 뭡니까? ‘돈 좀 줘. 돈 좀 벌게 해줘.’ 왜, 이게 옛 사람이니까. 감히 옛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새 사람이라는 뜻 이예요. 새 사람이기 때문에 옛 사람을 알죠.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옛 사람, 새 사람 구분이 없이 현재 있는 자기가 전부에요. 그 사람은 ego만 살아있지,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지, 백날 주의 이름 들먹여도 그거는 거짓말입니다.
10분 쉽시다. | |
가락-요한복음 4장31(하나님의 낭비)141016b-이 근호 목사
추수 이야기를 합니다. 추수 이야기할 때 인간은 빠지라 이야기했죠? 우리에게 상당히 파격적인 말이라서 좀 위험스런 말이 아니냐 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37절 봅니다. “그런즉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 그 다음에 그걸 설명하시면서 사람들은 여기 4장 37절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 할 때 사람들은 ‘거두는 것도 힘들잖아요?.’ 하기 쉽잖아요. 뒤의 말씀 보세요. “내가 너희로” 뭐, 뭐 아니한 것을 거두러?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추수는 누가 한단 말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럼 너희들은 뭐냐? 참여하는 거죠. 벌려 놓은 추수에 그냥 숟가락 하나 얹어놓는, 추수한다 할 때 추수는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추수라 하는 것은 이미 있는 내가 나를 추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미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항상 내 우선 이예요.
로마서 9장 요번에 버지니아 강의할 때 일부러 언급했습니다. 뭐냐 하면 “내가 예수님께 형제를 위해서라면 예수님께 저주를 받아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라는 구절이 로마서 9장 3절에 나오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이야기를 딱 하니까 저 앞에 계시던 어떤 교인이 기계적으로 무심코 목사 입에서 말씀 나오니까 ”아멘“ 해야 되는 줄 알고 무심코 한 분이 ”아멘“ 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분한테 물었어요. ”방금 아멘 하셨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왜냐 하면 ”내가 그리스도께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께 끊어져도 그 운명을 수용하겠습니다.“라는 말씀인데 그분은 아멘 해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저 천국 안 가겠습니다.“ 와 똑같은 소리거든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 이예요? 그러니까 성경 전체가 이런 거예요. 성경 전체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내 것이 없다는 것부터 출발해야 돼요. 나의 것이 없어요. 이 세상에. 다 주의 것이지, 내 것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신앙을 방해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내가 내 것 있다는 그 자체가 자꾸 신앙을, 내 구원을 내가 막았어요. ‘주님 저한테 이래 나오시면 안 되죠. 일 처리 잘못 하신 겁니다. 제가 주님한테 이 정도 헌금하고 십일조 복리로 계산하면 얼마가 되는데 그 돈 받아놓고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되죠.’ 제가 김ㅇㅇ장로님한테 이야기했어요. 김 ㅇㅇ 아십니까? 맨해튼 교회 장로님이 있어요. 그분은 숙소에 7~8일 정도 같이 있었는데. 같은 패밀리끼리 무슨 돈 관계를 하고 돈 거래 하고 무슨 출석 체크를 하느냐 이 말이죠. 주일 날 참석 안 하느냐고. 같은 식구인데. 출석 체크해서 삼촌 조카가 그 다음부터는 조카 삼촌 안 되는 겁니까?
자꾸 주일 성수 십일조 교회를 강조하면 안 돼요. 수상합니다. 그런 것은. 주께서는 뭘 받는 게 아니에요.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 한 겁니다. 사도바울은 누군지 알죠? 성령 받은 사람 이예요.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누구냐 하면 그리스도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도에요. 사도가 이야기한 건 무조건 옳은 이야기에요. 그분이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너희 것을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죠. 주님께서는 우리가 드린 것은 안 받습니다. 안 받는 이유가 뭐냐 하면 친히 주신다는 그 은혜를 가리지 않기 위해서 받지를 안 해요. ‘100% 다 얻어 챙긴 겁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 준 것을 받지 안 해요.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있잖아요. 그 부부가 사도 발 앞에 뭐 내놨습니까? 헌금을 내놓을 때 반을 속였죠? 그 사람 죽었잖아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헌금을 아예 안 했다고 해보세요. 안 죽이죠? 결국 그 사람이 만약에 헌금 전부를 했으면 그 사람 죽었습니까? 안 죽었습니까? 죽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아나니아 삽비라는 항상 눈에 보이는 베드로, 사람보고 헌금을 했기 때문에 헌금을 다해도 죽고 반해도 죽고. 그런 사람은 성령의 공동체 속에 들어올 수 없다고 죽이는 겁니다. 시범적으로 죽인 거예요. 그 뒤에 헌금 반 한 사람 많습니다. 안 죽입니다. 왜, 그것은 뭐냐 시범적으로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교회와도 이미 교인이 아닌 걸로 판정난 걸 본인들이 알아요. 나는 주님 안 믿고 교회 믿는다는 걸 본인들이 알기 때문에 안 죽여도 죽은 자에요.
이미 교회에서는 항상 시범적으로 세워서 그 뒤에는 그게 적용되는 방법을 사용하거든요. 홍해 두 번 안 갈라졌죠? 요단강 건널 때 홍해 건너는 방법이 아니었죠? 그렇잖아요? 홍해는 섰으니까 자동적으로 열렸잖아요? 요단강은 백날 천만번 서도 갈라지는가? 안 갈라지죠. 언약궤 들어가야 되죠.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 받았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에 우리보고 방주 만들라하면 방주 만들까요? 안 만들까요? 우리는 대번 만듭니다. 절대로 구원 안 시킵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용한 방법을 절대로 사용을 안 해요. 그것은 모든 인간은 오직 따로 있는 한번으로 끝내기 때문에. 그 따로 있는 한번이 뭐냐 하면 바로 ‘네가 뭘 했다.’가 아니라 ‘주님이 뭘 했다.’로 한번으로 끝내버립니다. 그게 뭐냐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피 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그 피란 의미는 무슨 의미냐 하면 인간이 행해 드린 모든 것은 더러웠다는 뜻이 피 안에 포함이 돼 있어요.
제사장 복장이 화려하죠? 화려했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화려한 복장 입은 채로 죽은 사람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 아, 옷이 아깝다 정말. 옷 입고 폼 재고 보석 달고 죽었어요. 그것도 그냥 죽은 게 아니고 심장마비? 아니거든요. 어떻게 죽었습니까? 불에 새까맣게 타서 죽었어요. 상상해 보세요. 불에 새까맣게 탔다니까요. 탔다는 말은 세포 탄 건 물론이고 주께서 만들라 한 그 화려한 그 옷, 신부복 교황복 하는 그 옷도 불 속에 홀랑 타버렸죠. 그럼 그게 거룩합니가? 거룩 안 합니까? 그게 안 거룩하다는 뜻 이예요. 인간이 만든 것, 인간이 손 댄 건 다 더러워요.
그러면 그 사람, 나답과 아비후 왜 죽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지정한 그 제단, 피, 피에서 나오지 않은 다른 불을 했기 때문에 죽은 겁니다. 주께서 피 흘렸다는 말은 “일체 나는 너한테 받은 게 없다. 알겠지? 너한테 받아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네가 준적도 없는데 내가 너를 구원했다.”는 어떤 표시로써 피 흘린 겁니다.
그 이야기가 로마서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로마서 11장 35절에 보면 잘못 보면 빨리 넘어갈 수가 있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뒤에 물음표 있죠? 이 말을 서술형으로 바꾸면 아무도 주께 먼저 바쳐서 구원된 인간 있다? 없다? 없다는 이야깁니다. 네 것 받아서 너하고 거래해서 네 솜씨, 네 재롱 받아서 구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로마서 9장에도 나오죠. 네가 원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달음박질 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누가 구원 되냐, 안 되냐 하는 것은 네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됐다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됐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돼 있다는 겁니다.
야곱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하면 야곱은 뺏어서 사는 인간이 야곱이잖아요? 뺏어서 사는 인간인데 주께서는 야곱이 어떤 짓거리를 해도 한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라. 창세전에 이미 정해진 사랑은 태어난 인간이 그걸 취소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했다면 그 사랑은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그 사랑을 내 힘으로 그걸 변경시켜서 나를 지옥으로 보낼 수가 없어요. 팔자가 그런 팔자들이 성도의 팔자라는 게 희한한 팔자라니까요. 노력한다고 바뀔 팔자가 아니라니까요. 죄 짓는다고 지옥 갈 팔자가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는 야곱을 찾아올 때 야곱을 속이죠. 약한 척 하는 거예요. ‘어이쿠, 안 되겠다. 왜 이렇게 힘이 세노.’ 야곱은 자기의 평소의 버릇대로 내 것 건드리면 누구든 용서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내 것 건드리면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징계하노라.’ 하며 하나님을 공격을 해대죠. 하나님이 야곱을 속였죠. 야곱의 본색이 다 들통 날 때까지. 그리고 난 뒤에 환도 뼈를 쳐버리니까 비로소 야곱은 자기 들통 다 나고 자기가 주님에 대한 원수라는 사실을 알고 그런데 원수라는 사실을 알게 했다는 자체가 이미 내가 구원받았다는 통보임을 야곱은 알죠.
주님께서 구원하지 아니하면 내가 원수인 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다 주님의 원수에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내가 주의 원수입니다.’라고 자인하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의가 박혀서 구원받는 겁니다.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더 나아가서 원수 된 자를 십자가 피로 널 구원한다는 게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이 추수를 이야기하면서 요한복음 4장 가봅시다. 추수를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명심해야 될 것은 딱 한 가지 명심해야 돼요. 이거 빠지면 오늘 강의 헛 강의입니다. 제일 중요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추수라 하는 것은 반드시 추수되지 못한 자를 배제하는 작업도 같이 병행한다는 겁니다.
추수를 한다는 말은 버린다는 말과 작업을 같이 해요. 주께서 심지 않은 것은 다 뽑히죠. 뽑는 작업과 병행해서 추수를 한다니까요. “가라지 가만 두어라. 마지막 때 내가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뽑는 것도 내 소관이고 알곡 뽑는 것도 내 소관이다. 그런데 ‘누가 가라지입니까?’ 우리가 궁금한 건 ‘주여 저 가라집니까? 알곡입니까?’ 그게 궁금하죠. 궁금하다는 자체가 바로 창조 이전을 생각 못하고 이미 창조된 상태에서 다시 창조 이전으로 돌아가 볼까, 하는 그런 심보 때문에 궁금한 거예요.
내가 나를 염두에 두고 내 구원을 먼저 전제로 깔고 ‘주여 저 선택됐습니까? 이렇게 묻는 건 질문 자체가 애초부터 주께 응답이 안 되는 질문 이예요. 성립이 안 되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욥도 그 질문 했어요. ’주여 왜 저한테 고난이 옵니까?‘
할 때 주님께서 내세운 것은 어떤 철학이냐 하면 바로 ‘낭비의 철학’입니다. 낭비의 철학 들어본 적 있습니까? 강둑이 범람을 하죠. 태양의 에너지는 낭비되는 거 아십니까? 욥기에 보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묻는 거예요. “사람이 경작하지 않는 땅에 비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고 묻습니다. 원래 인간이 자기 위주 같으면 자기가 땅을 경작할 때 비 올 때 비 와주고 오지 말아야 할 때 안 와줘야 되죠. 그럴 때 우리는 뭐라 하느냐 하면 참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좋으신 하나님이니까 그 하나님의 규모가, 그 영역이 내가 먼저 있고 나에서 배트맨 그 투영하는 것처럼 나에게 투영하는 그 영역만큼의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ego의 하나님이죠. 이게 하나님이나 삼위일체나 예수님이나 ‘아이고, 우리 예수님 좋은 분이다.’ 이것은 내가 먼저 여기 있고 내가 나를 투영한, 내가 투사한 가짜 예수기 때문에 나에게 좋은 하나님 이예요. 순 복음 하나님. 이게 뭐냐 가짜 하나님 이예요. 왜, 먼저 좋은 내가 먼저 있고 내가 나를 사랑한 만큼만 사랑해주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내 사랑하는 조건 하에 사랑해주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잘할 용의가 돼 있는 거예요. 이건 거래고 흥정이죠. 왜냐 하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같은 건데 선물 주니까 좋은 거예요. 밤에 안자고 선물 줄까봐 굴뚝 앞에 기다리는 그 하나님.
기도 안 했는데도 선물 줘보세요. 우리는 받아놓고 찝찝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참된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기도 안 해도 되겠네요.‘ 하는데 우리 옛사람은요. 답답하면 기도하게 돼 있어요. 애가 아프면 ’내가 복음을 알기 때문에 아파도 내 기도 안 듣기 때문에 기도 안 할 거야.‘ 주께서는 ’네가 어디까지 버티는가 한번 보자.‘ 기어이 ’주여 저 애를 ...‘ 그럴 때 주께서는 ’짝짝짝, 어이쿠, 네 본색 드러나는데 이틀 19시간 걸렸다.‘ 옛 사람대로 사세요. 그걸 저는 ’막 살아라’ 라고 하는데 제발 막 사시고 막 살면서 비로소 느껴지는 은혜가 내가 스스로 나를 단정하게 절제해 버리면 그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단정하게 살다가 삐끗해서 실수하잖아요? 대번 오는 것은 트라우마입니다. ‘요번 주 내 벌 받지 싶어.’ 일곱 귀신 집나간 마귀 다 들어왔어요. 그때는 기도 주기도문 9번 외우고 성경 한 장 더 읽고 새벽기도 나가야지, 안 그러면 네 저주가 풀리지 않아. 이걸 누가 요청하느냐? 내가 요청해요. 왜냐 하면 우리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거기에 익숙해져서 벌을 미리 땅겨서 받아버리면 오는 나쁜 일도 미안해서 ‘아이쿠, 벌 받는데 내가 때리려 하다 가버려야 되겠다.’ 인간이 이런 계산이 있어요. 꼭 중요한 일 앞두고는 헌금 액수가 늘어나고 꼭 딸 결혼식 앞두고 새벽기도 나오고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닥쳐올 액운을 미리 떼는 거예요. 세상에 미신도 이런 미신이 없어요. 마치 그동안 내가 버틴 것은 내가 착실하게 주의 말씀 들었던 그 양만큼 복 받았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살아왔다고 스스로 자기의 조직신학을 갖추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세상에 이런 마귀 종이 없어요. 그거는 그 자체가 공포요 두려움 속에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그게 정신병, 우울증 같아요. 교회가 사람들 우울증, 정신병 다 만들어놨어요. 손만 떼면 되는데 뗄 줄을 몰라요.
요한복음에서 제가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경작하지 아니한 곳에 비가 오는 이유를 아느냐,” “모릅니다.” 왜 자기는 자기 아픈 것만 생각했지, 언제 공무원도 아니고 뭐 하러 황무지 돌아봐서 뭐 할 건데 자기 일도 아닌데, 주의 이름으로 황무지에 비오는 걸 모르고, 욥은 ego, 자기 이름으로 한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작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낭비, 황무지에 비오면 낭비잖아요? 이 낭비의 정신을 알아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차고 넘치게 주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5장 설교에 로저스 목사님 설교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내가 참 은혜를 받았는데 선악과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나쁜 짓 하게 되면 나쁜 짓이 제거되는 방법은 나쁜 짓만큼 착한 일이 그만큼 들어오니까 그게 상쇄가 되니까 없어지는 그 방법을 우리는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로저스 설교인지 제가 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실제로 저에게 결혼 초기에 있었던 일인데 바케스에 물 틀어놓고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바케스에 물이 넘쳐나서 낭비가 된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로마서를 딱 읽는데 그게 나와요. 아담은 의인이 아니고 무지한 자다. 이 말, 뭔 뜻인지 아세요? 아담은 의인이 아니고 무지한 자라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담은 죄 짓기 전에는 죄가 없는 상태지 의인은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무지한 상태로 돌리는 게 아니고 의인으로 돌리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우리는 죄 지은 건 요만큼인데 은혜로 퍼붓는 은혜는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어요. 이건 바케스에 물이 철철 넘치는 것처럼 죄는 요만큼 졌는데 거기 죄를 용서하는 의는 천 배 만 배 넘쳐서 누가 봐도 의인이야. 누가 봐도. 우리는 쥐 꼬리만큼 죄 지어놓고 용서받는 용서의 양은 엄청나서 감당을 못해요. 아무리 죄져도 그 받은 은혜, 의를 다 상쇄를 못시켜요. ‘아나 먹어라’는 식으로 줘버리는 거예요.
자, 이것과 추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추수를 할 때는 반드시 뭣과 병행을 하느냐 하면 뽑혀야 될 사람들, 지옥 갈 사람들과 항상 겸하여 등장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십니다. 요한복음은 잘 나오지 않는데 누가복음 4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25절에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닫히어 온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여기 보세요. 말씀 나와 있는 거 보세요. 이스라엘에 많은 뭐가 있었다? 이스라엘에 과부가 있는 게 아니고 무슨 과부? 많은 과부가 있었죠? 많은 과부라는 언급을 왜 하십니까?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는 그 중에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한 과부뿐이다.”라고 돼 있죠? 이 말 자체가 이상하죠? 한 사람도 보내지 않았으면 사렙다 과부한테도 안 가는 것이 우리 문장 상 맞는 이야긴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한 사람도 보내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한 과부뿐이다.“ 했죠?
제가 간단하게 단정하면 이렇습니다. 과부가 있으되 찾아갈 필요가 있다? 없다? 없다는 이야기에요. 흉년 들어서 모든 과부가 굶어 죽어도 주께서 그들을 건져야 될 그들에게 어떤 양심을 줄 의무가 주께 있다? 없다? 그런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다는 거예요. 없는데 사렙다 과부에게 준 것은 사렙다 과부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그걸 찾아갈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자유로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갔기 때문에 그 과부가 배불렀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야, 우리 주님이 저러신 분인가? 주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추수를 벌린다.’는 이야기를 누가복음 4장을 통해서 말씀드리는 취지입니다.
추수는 누가 구원받았나. 누가 구원 못 받았다. 이게 아니고 주님 자신에 의해서만 추수와 그리고 뽑힐 사람은 뽑히고 가라지는 가라지 된다는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일방적인 자기 조치에 국한해서 일이 벌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신앙의 기본은 내 것이 없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주여 저 있잖아요. 저를 구원 하소서.’ 이런 소리 하지 말라 말이죠. 내 것이 아예 없어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아무것도 아니죠. 주께서 찾아주셨다는 말은 안 찾아와도 되는데 주님 증거 하라고 찾아오신 거예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데 중풍병자가 찾아올 때 사람들은 중풍병자에게 관심 있어요. ‘자, 예수님이 얼마나 재주 있는가 보자.’ 중풍병자가 지붕 뚫고 왔잖아요? 지붕 뚫고 왔는가 낫겠는가 안 낫겠는가 한번 보자. 중풍병자가 낫잖아요.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네가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죠. 우리 같으면 ‘네 중풍 병이 나았다.’ 가 돼요.
아까 사마리아 여인 다시 해 봅시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관심사는 뭐다? 우물이다. 우물은 사마리아 여인이 아는 자기 세계 속에 포함이 돼 있죠. 중풍병자가 왔다. 온 이유는 중풍 병이 낫게 하겠다. 중풍병자가 낫겠다는 기대는 중풍 병이 나아서 건강하다는 자기 건강, 자기 건강은 자기에게 속한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 합니까? 그 사람에게 속한 것을 가지고 뭐로 이동을 시킨다? 현재 이미 있는 자는 주님의 창조 행위를 모르기 때문에 창조 의의를 모르기 때문에 있는 것을 이용해서 전체를 주님 것으로 가져오기 위해서 중풍 병이 낫다고 하지 않고 이거는 모든 관중이 거기에 쏠려 있어요. ‘낫겠느냐, 안 낫겠느냐.’ 있는데 “죄 사함을 받았다.”고 이야기해버려요.
그러니까 바리새인이 하는 말이 “당신이 뭔데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죄사함을 당신이 이야기하느냐?” 할 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병 낫는 것과 죄 사함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이야기하죠. 그 답변이 뭡니까? 둘 다 어느 게 쉬운 게 아니고 둘 다 인간이 못하는 거죠. 바로 내가 중풍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중풍 병을 낫겠다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의 관심사는 인간, 중풍 병, 거기에 있는데 나는 관심사를 나에게 돌리는 거예요. 여기에 누가 와 있다? 여기에 하나님이 와 있다는 것. 그걸 주목하기 위해서 중풍 병 보다가 죄 사함으로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죄 사함이란 용어를 주께서 사용하신 거예요.
이것과 병행해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이 감기 걸려서 안 나아서 기도하니까 나았잖아요? 낫고 난 뒤에 성도 같으면 행동을 어떻게 해야 돼요? ‘주여 그 귀한 십자가 피를 세상에 제 감기 낫는데 사용하다니, 주여 이런 나쁜 놈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자책할 수 있을 때 그게 성도에요. 주께서는 죄 사함 하러 왔는데 우리는 죄 사함에 관심 없고 나에게 관심 있을 때 이게 바로 우리의 옛 사람, 옛 버릇입니다.
물론 죽을 때까지 이 버릇 고쳐질까요? 안 고쳐질까요? 안 고쳐지고 그거 고치지 마세요. 고치면 안 돼요. 왜냐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쳤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절대로 고치지 마세요. 우리는 돈 좋아합니다. 심지어 우리교회도 그런 교인이 있습니다마는 예배드리다가도 ‘예, 오후에 문 엽니다. 예, 좀 있다 갑니다. 예, 예배 마치고 갑니다.’ 예수님보다 돈이 급한 사람들 다 있어요. 저도 마찬가지일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고치면 안 돼요. 있는 그대로 이것 때문에 십자가 졌다는 것을 계속 알면 그 사람이 성도에요. 뜯어 고친 사람이 성도가 아니고 그 사람은 신자 아닙니다. 그냥 뜯어고친 적도 없는데 뜯어고쳤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분명히 자기가 위장하고 있는 사람 이예요.
우리의 몸은 뜯어고칠 문제가 아니고 쓰레기통에 집어던질 문제에요. 나중에 늙으면 죽으니까 쓰레기 처리는 나중에 주께 맡기면 되는 거예요. 이래 돈만 좋아하다가 죽으면 돼요. 그게 우리의 운명이기 때문에 아주 즐겁게 우리 몸을 죽이시고 우리의 속사람만 살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막 살아라.’는 말을 자꾸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삐져서 우리교회 안 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질문 : 이해를 하시는 분은 하시겠지만 ‘막 살아라.’는 영적인 그런 면을 말씀하시지만 그런 분들은 세상하고 어디까지 선을 그어서 세상과 얼마나 타협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혼동이 있을 수 있거든요. 답변 : 질문하는 사람이 ‘나는 막 살아야 됩니까?’ 할 때 이미 질문 자체가 자기의 행위에 관심을 둬버렸죠. 제가 막 살아도 된다 할 때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주님의 용서에 관심이 있는데 주님의 용서하심은 우리의 어떤 행위라도 용서됐다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데 질문자가 ‘나는?’ 그러면 지금 질문을 그렇게 하면 다행인데 어떤 사람은 그게 아니고 ‘내가 막 살면 내가 지옥 가잖아요?’ 노골적으로 질문하는 분이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뭐냐 하면 그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어떤 식으로 변형시켜서 자기 자신의 자기 노력으로 자기를 구원하겠다는 그러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셈이 돼 버렸죠. 그렇잖아요. 예를 들면 설날인데 설날인 것을 모르고 ‘낼 모래 너는 공부하지 말고 푹 쉬라.’ 하니까 공부 좋아하는 애가 ‘엄마 낼 모래도 공부해야 돼요.’ 할 때 ‘걔 공부해야 됩니다. 막 놀면 안 돼요.‘ 하는 말은 낼 모래 설인 줄 모르고 자기는 지금까지 했던 대로 내 인생은 내가 제대로 관리해야 어느 정도 절제가 돼야 이만큼이나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실수 없다는 계속 그 방법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는 ’낼 모래 설이야.‘라는 말은 ’네가 어떻게 해도 용납이 되는 거야.’라는 뜻으로 그쪽을 보라고 그렇게 언급하는 거죠.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 있잖아요. 예를 들면 디모데전서 6장 같은 경우에 “마지막 때에 자기만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그 말씀 무슨 뜻일까요? 마지막 때에 돈을 사랑하고 자기만 사랑한다는 것을 만약 어떤 사람이 정신 차려서 성령 받아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한테는 디모데전서 6장을 찢어버려야 됩니다. 왜 자기는 이미 다 뗀 건데, 자기는 해당사항이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십계명에 보면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나오잖아요? 그런데 성령 받아서 이미 간음 안 하고 살인 안 하고 탐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요? 십계명 자기하고 관계있다? 없다? 십계명 그건 기본으로 다 뗀 건데 성경에 십계명 매직으로 덮든지 지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성경은 죽을 때까지 그 말씀이 우리한테 유용한 이유가 우리의 옛 사람이 아무리 우리가 돈을 사랑 않고 싶어도 우리의 본성 자체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니까요. 막 산다는 것이 내 잘못이 아니고 우리의 본성이 막 사는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자인을 하고 확인을 한 인생을 살자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보다 더 긍정적인 예를 들게요. 전에는 헌금을 하는 것을 굉장히 착한 일로 여겼어요. 그런데 살아보니까 사람이 헌금을 하면서 다시 한 번 깨닫는 것은 내가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헌금을 하는 순간에 다시 깨닫게 돼요. ‘저 사람은 십일조만 하는데 나는 미쳤다고 십 이조를 하고 내가 미쳤지, 환장했지, 하지만 곱빼기를 했으니까 복을 주시겠지, 어이쿠, 복이라면 안 되는데.’ 본인이 하면서 그 생각을 한다 말이죠. 전에는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착한 일인 줄 알았는데 전에는 찬양이 착한 줄 알았는데 찬양하면서도 ‘내가 지금 소프라노가 음정이 제대로 잡혔나.’ 항상 자기 생각하고 같이 소프라노 하는데 ‘저쪽은 엘토가 잘 나오는데 내가 소프라노 해서 음정이 안 맞지.‘ 지금 소프라노 하면서 누구 생각하느냐 하면 내 생각한다니까요.
새벽기도 하면서 새벽기도 30분 하고 일어서려는데 옆에 사람이 계속 하고 있으니까 ‘저 집사는 35분, 좋다. 나도 갈 때까지 가보자, 두 시간.’ 자연적으로 경쟁하게 돼 있어요. 장로님이 대표기도 하잖아요? 대표기도 할 때 어떻게 합니까? ‘기도 아이고, 내가 경로 안다.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그 다음에 남북통일, 옳지, 옳지, 어이쿠, 저게 기도가?’ 막상 나보고 시키면 할 게 있어야죠. 기도 할 게 없으니까 들은 게 있어서 남한테 실수 안 잡히는 기도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축복해주시고, 그리고 북한 선교회 이거만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전에는 그게 죄가 아닌데 그게 죄라고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막살라고 하느냐? 아까 오해한다 했죠? 그게 예수님 방식입니다. 예수님 방식은 추수할 때 추수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방식은 바로 오해케 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설득 납득이 아니고 새 사람 아니면 백이면 백, 오해할 만한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만 눈치 채게 하고 다른 사람은 저건 정말 율법에 위반되는 소리를 지금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주장한다는 말을 해버리죠.
예를 들면 바로 세리가 엎드리고 바리새인이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 한다고 할 때 즉결 순회 재판이죠. 마지막 최후의 재판 이전에 미리 당겨서 심판합니다. 십일조하고 금식하고 기도한 사람은 어디 간다? 그거는 지옥가고 자기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그 사람은 진정한 의인으로서 천국 간다. 재판해 버렸습니다.
또 간음한 여인이 질질 끌려서 주님한테 왔죠? 바리새인이 뭐라 합니까? “율법에 의하면 이 여인을 돌로 치라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할까요?” 할 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죠? 그러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해놓고 여자에게 묻습니다. “너를 고소한 자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아무도 없죠. 그 아무도 없는 상태가 바로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했던 그 상태에요. 아무도 없어요.
따라서 추수라 하는 것은 없는 데서 구원받을 자를 새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건 믿는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인데, 지옥 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데 지옥 갈 사람을 추수하는 사람 때문에 일부러 옆에서 병행해서 지옥 갈 사람을 따로 만들어내요. 그래서 인간이 잘못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을 만들어 놓고 그 지옥 넣어주기 위해서 주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생산해내서 보내는 것이 주의 역할입니다. 미친 소리로 들리죠. 인간하고 상대를 안 해요.
주님은.인간을 이용할 뿐 이예요. 마귀를 이용하고 가룟유다를 이용할 뿐 이예요. 예수님이 가룟유다에게 뭐라고 하신지 알아요? “네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다.” 이게 사람에게 할 소리입니까? 이게 사람에게 할 소리에요? 듣는 가룟유다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네 속에 사단이 있구나. 사단이 시키는 대로 가거라.” 사단이 시키는 대로 했으면 가룟유다 상 줘야죠. 가룟유다 없으면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 안 이루어지잖아요? 그러면 공로자잖아요? 신학자들 가운데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천국 가야 된다고. 왜 십자가에 협조자이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은 뭐냐, 지옥 갈 사람은 나쁜 짓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를 못 믿게 만든 사람을 따로 만들어서 그들을 지옥에 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옥을 보낼 권한도 있고 천국 보낼 권한도 있음을 이걸 병행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 이야기하려고 미리 한 겁니다.
“추수할 때가 되었다.“ 할 때 오늘 요한복음 4장 31절 합시다. 추수할 때가 되었다 할 때 그때 제자들은 뭐라고 생각했습니까? 몇 달 지나야 추수가 된다? 예수님이 대신 이야기했지만 제자들은 네 달 지나야 추수가 되죠. 그럼 지금 추수할 때에요? 아니에요? 추수할 때 아니죠. 그러면 계절상 추수할 때가 아닌데 주님은 뭐라 합니까? 이미 추수가 되었다면 추수는 예수님이 생각한 추수하고 인간이 생각한 추수가 같다? 다르다? 다른 거예요. 의도적으로 다른 거예요.
인간의 추수는 인간이 손대는 추수고 주님의 추수는 주님이 그냥 손대고 나머지는 “이건 주께만 하셨습니다.”를 확인하면서 뒤따라가면서 줍기만 하는 추수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추수는 뭐냐 하면 뒤따라가면서 줍기만 하는 추수에요.
사도행전 3장에서 요한과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낫게 했잖아요? 낫게 했을 때 아까도 언급했지만 사람들이 “당신이 했습니다.” 하니까 요한과 베드로가 제 말을 쉽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목격 자”라 했거든요. 목격자를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내 눈에는 보이는데 당신 눈에는 안 보이는가 보죠?” “뭐가요?” “주님께서 앉은뱅이를 고치셨잖아?” “우리 보기에는 주님은 안 보이고 당신만 보이는데? 당신이 나사렛 이름으로 걸으라. 할 때 걸었잖아요?” “우리는 목격자입니다.” 목격자가 하는 일이 뭐냐, “나에게 금과 은은 줄 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을 주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거든요. 베드로 이름도 아니고 요한 이름도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이 있다는 말은 지금 예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계시다는 말 이예요. 계신데 다른 사람은 못 느끼고 사도는 느끼고. 그 차이점이거든요.
사도가 그 예수님을 느낀다면 사도가 뭘 생각하겠습니까? 자기는 할 수 있다? 없다?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를 증거 하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은혜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를 증거 하는 거예요. ”옆에 계신 분이 하셨잖아요?” 손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지금 카메라 보이죠? 이렇게 내미는 거예요. 이렇게 내미니까 사람들은 이걸 이해 못하고 이렇게 ’사도 내가 했습니다.’로 이해를 하는 것은 그들이 이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하지 않으면 안 일어난다는 식으로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이해해달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는 그런 식으로 납득이 되는 식으로 이야기 못하고 매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한 게 아니고 이렇게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들은 뭐냐 ‘아이쿠, 겸손하기를’ 뭐가 겸손해요? 있는 그대로 하는데. 이게 겸손입니까? 방귀 내가 뀐 게 아니고 주님이 꿨습니다. 이게 겸손입니까? 아니잖아요. 실제로 주님이 뀐 방귀를 우리가 뀐 것으로 오해 받고 살아가야 되는 것이 성도의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열심히 교회 청소하니까 ‘아이쿠, 집사님 부지런하기를’ 집사님 부지런 한 게 아니고 이렇다 하니까. 자꾸 사람들은 집사님 본인이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미국 가서 강의할 때 이렇게 했어요.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딩동딩동 반주를 잘 하니까 ‘아이쿠, 최 집사님은 음악을 전공해서 피아노를 이렇게 잘 치시니 주께 영광되겠습니다.’ 이 소리 듣자마자 화가 나서 ‘우당당당’ 쳐버린 거예요. ‘내가 안 했는데 왜 자꾸 내가 했다고 합니까? 짜증나서 난 아무것도 안 할래요.‘
또 예를 들면 꽃꽂이를 하는데 ‘아이쿠, 박 집사님은 매주 이렇게 자비 들여서 비싼 꽃을 십만 원어치나 사서 이 제단을 이렇게 아름답게 하니.’ 그 소리 듣고 박 집사가 ‘에잇,’ 하고 박 집사가 꽃을 다 부수려버려요. ‘내가 안 했다는데 왜 자꾸 내가 했다고 하느냐. 주께서 돈 줘서 주께서 병원에 입원하게 않고 건강한 몸으로 주께서 봉사할 마음 주셔서 모든 것은 주로 말미암아서 모든 영광은 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으로 영광을 돌려야 되는데 사람들은 자꾸 내가 한 걸로 했다는 것은 그 사람 평소에 살아가는 본인들이 내가 잘해서 주께 영광돌리겠다는 그러한 원칙 속에 있기 때문에 너도 나하고 같은 원칙 아니냐, 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뭘 해도 욕먹게 돼 있습니다. 내가 한 게 아니고 주님이 한 것이라 해도 못 알아 듣고 “아이쿠, 겸손하기를, 아유, 온유하기를“ 뭐가 온유해요? 우리는 이거 하면서 내 자랑하고 있는데. 인간은 그렇거든요. 인간은 뭐든지 하게 되면 자기 자랑하기 마련이고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기억은 스스로 자기 힘으로 뽑아내질 못합니다.
앞자리에 왜 갑니까? 앞자리에 가서 은혜 받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앞자리 앉으면 은혜 받을 줄 알고 가는데 가봤자 은혜 안 받습니다. 같은 찬송가 두 번 부르면 은혜 안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은 기억 때문에 은혜 받은 것으로 자꾸 억지를 부리는데 언제 은혜 받느냐 하면 그것이 죄로 들통 날 때 그때 ‘주여 또 주께서 저를 떠나지 않고 있군요.’ 다시 한 번 은혜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사세요. 사시면 교체를 누가 한다? 주께서 알아서 이렇게 은혜 되도록 주께서 다 손 봐 주십니다.
세상에 어느 여자가 미장원에 가서 자기가 누워서 자기가 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냥 머리만 맡겨 주시면 아주 젊은 아이돌 남자가 와서 남성의 우악한 손으로 머리 감겨줄 때 얼마나 짜릿합니까? 그렇잖아요? 자기는 뭐만 맡겨요? 긴 머리만 맡기면 되거든요. 이렇게. 그렇잖아요? 미장원에서 자기가 머리 감습니까? 집에 가서 감지 뭐하러 미장원에 가서 감습니까? 돈 주고 맡기잖아요? 맡기면 감겨주잖아요. 우리는 막 살 수밖에 없는 내 몸을 주께 맡기면 주께서 은혜로 네가 용서라는 걸 느끼게 해주신다니까요. 모든 게.
그 다음에 “거두는 자가 이미 삯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 함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에 거두려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노력한 것에 참여했다.” 이 대목에서 제가 언급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양식 문제입니다. 32절에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가 알지 못 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 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의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그것이라” 이렇게 돼 있거든요.
여기 34절을 하는데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질문이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일을 합니까? 성경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일을 합니까? 꽃꽂이? 피아노? 선교헌금?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죠? 정답은 예수님이 하는 일을, 하나님이 보낸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죠. 그러니까 일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고 일의 행동의 주체가 따로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버리면 그게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일해서 내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이 일해서 그분의 효과로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는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함께 포함돼 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양식을 이야기하고 추수를 이야기할 때 지금 제자들은 빵 사러 갔잖아요? 빵 사러 갔는데 “빵 잡수세요.” 하니까 “내 양식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제부터 너희들은 빵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내가 한 내 양식, 영생에 의해서 살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요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나실 인 이야기를 잠간 할게요. 나실 인이란 뭐냐 하면 날 때부터 나실 인의 조건이 있어요. 나실 인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구분된 자인데 사람들이 있는데 나실 인은 따로 나와서 이 사람들과 구분돼서 따로 있어서 나실 인이라 해요. 구분된 자인데 왜 구분됐느냐 하면 이 사람들의 죄는 원래 제물을 바쳐야 죄가 용서됩니다. 그런데 제물은 사람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이 제물은 사람의 요소가 들어가면 안 돼요. 요것은 짐승의 흠 없는 짐승의 요소가 그 당시 민수기 제물이 되거든요.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시겠죠?
그런데 제물이 나중에 뭐로 달라지느냐 하면 제물이 인격으로 달라집니다. 구약에서 어린양이지만 신약에는 뭡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누구십니까? 예수님, 인격이죠. 달라지려면 이 제물 속에 뭐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인간적 요소가 포함돼 있어야 돼요. 그 포함시키는 방법의 하나가 뭐냐, 나실 인의 머리카락을 이 제물에 섞습니다. 화목제물에 섞어요. 민수기 6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모든 제물은 다 인간의 요소가 못 들어가는데 오직 유일하게 나실 인의 머리카락만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나실 인의 머리카락이 무슨 머리카락인데 다른 사람 머리카락은 들어가면 안 되고 이 머리카락은 들어가느냐, 나실 인의 조건이 있어요. 포도주와 관련된 것은 일체 먹지 말아야 되고, 서원된 기간 동안에, 그 다음에 자기 형제 죽는데도 참석하면 안 돼요. 장례식에 참석해서 시체 만지면 안 되거든요.
그렇다면 여기서 ‘포도와 자기 형제 장례식과 그리고 머리카락, 요 3가지를 가지고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 보세요.‘라고 내가 설교 하면서 10초 여유주면서 10초 여유로 되겠습니까마는 퀴즈를 냈어요. 포도, 형제죽음, 머리카락, 세 가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황, 연관성은? 문제 어렵죠. 포도라 하는 것은 약속의 땅에서 포도는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포도라 하는 것은 포도에 의해서 결속돼 있는 집단이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은 이 포도에 만약에 귀속돼 있으면 이스라엘은 이동하지 못해요. 신약까지 가지를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만족합니다. 포도만 있으면 살겠다. 그냥 이스라엘은 그림자입니다. 신약에서 천국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천국에는 이런 포도 말고 다른 포도가 필요해요. 그 포도가 뭐냐, 마태복음에 보면 “내가 이 살과 이 피를 먹을 때까지 천국에 올 때까지 다시는 포도에서 난 것을 먹지 마라.“ 이 말은 뭐냐 장차 올 천국은 예수님이 준비한 그 포도, 피죠. 피에서 결속되는 새로운 이스라엘 자체가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주님의 축복의 상징인 포도 생산물로 인하여 결속이 됐다면 꿀과 포도를 생산했다면 그거는 하나의 모형이고 그림자이기 때문에 실체는 뭐냐 하면 예수의 피, 포도에서 난 피, 피 아닙니까? 포도, 피로 결속된 새로운 단체가 천국 가는 이스라엘 단체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여기 형제 죽음, 형제가 죽더라도 그거는 이 형제로부터 벗어나야 돼요. 다른 육에 속한 형제가 아니고 다른 형제가 뭉쳐져야 돼요. 아버지가 죽어도 장례 치르지 말고 예수님 따라가야 됩니다. “누가 내 형제며 누가 내 모친이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지상의 육적인 형제를 떠나서 영적인 하나의 패밀리, 형제를 연상하는 겁니다.
따라서 나실 인은 결국 뭐냐 장차 오실 천국 백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준 사람이 나실 인이고, 그 기간을 지켰을 때 위반하지 않았을 때 자라난 그 머리카락은 그동안 제대로 지켰다는 것이기 때문에 끝나면 그 머리카락을 잘라서 자라난 만큼 머리카락을 잘라서 제물에 포함시키면 제물은 그 머리카락을 다 싣고 전동차를 움직여서 궤도를 달려서 신약까지 골인하는 겁니다. 그게 나실 인 이예요. 이게 뉴저지 설교 1부 설교에 한 거예요.
그러니까 양식이란 요한복음 4장에서 주께서 양식으로 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이 뭐냐 하면 그 일을 인간들이 모형으로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일은 아버지와 아들만 할 수 있지, 예수님 외는 아무도 못해요. 이게 복음 이예요. 이게 복음 이예요. 우리가 뭘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내가 날 믿음을 믿는 거예요. 그거는 내가 믿는 것이고 결국 내 증인, 내 잘남밖에 안 돼요.
주께서 믿게 하시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된다는 사실, 뭘 보고? 십자가 피를 보고, 피 흘리실 때 다 이루었다 했잖아요. 그 다 이룸 속에 이뤘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이거는 초능력이고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언제 우리가 예수님하고 무슨 사이인데, 우리가 예수 집안도 아니고 우리가 예수 성을 안 가졌잖아요. 우리는 단군의 조상이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조상인데 언제 알았다고? 우리 학교 배울 때 예수님은 4대 성인 중에 하나에요. 예수와 관계없어요. 그 관계없던 아무 상관도 없는 아무 관계도 없는 그 예수가 나의 구주가 된다는 이것은요, 누가 목사가 설득해서 복음 전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이거는 하나님이 직접 기름 부음,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 2장 27절에 보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으니까 목사한테도 지시받지 마세요.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고 목사는 “제가 아는 것은 이정도입니다.” 하고 옆에서 후원하고 도와주면 성령 받은 사람은 “나도 동의합니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하기를 ‘창세기하고 공부하고 싶은데 목사님이 허락할까 모르겠습니다.’ 답변하기를 ‘왜 목사 눈치 봅니까? 목사가 십자가 졌습니까?’ 지금 우리교회 같으면 누가 성경 공부 내 허락 없이 한다면 나는 감사하게 여기고 혹시 도와줄 것, 조언할 거 있습니까? 하면 ‘필요 없습니다.’ 하면 ‘예’ 하고 꿇어앉아있으면 되죠.
왜냐 하면 성령이 하시는 일을 목사가 자기가 뭔데 왜 간섭해요? 교회 나올 때는 주님만 보여야 되지, 목사가 주님 앞에 서면 안 돼요. 교인들 뒤에 가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Can I helf you?’ 이렇게 돼야 돼요.
바로 지금도 안 보이는 주님이 자기 택한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내십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만날 이거에요. 이 자세 잊지 마세요. 내가 한 게 아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나의 증인이 아니고 주의 증인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제 알았다고 주 예수님을 언제 사랑했다고 믿겠습니까? 믿고 싶어서 믿은 것이 아니고 믿어지니까 그분이 유일한 구원자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시니 감사합니다. 시작을 주님께서 시작 했사오니 마감도 주께서 마감할 줄로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