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4. 11. 21) 9-2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정리해 보면, 인간은 전체를 모르고 지극히 일부분만 아는데, 이 일부분을 가지고 “나는 천국 간다.” 혹은 “나는 지옥 간다.” 고 일방적인 주장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안식일 율법을 지켰다, 못 지켰다는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는 전체가 다 담겨 있어요. 그럼 안식일을 누가 지키는가? 안식일 주인이신 예수님이 지켜야지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내가 안식일 지켰다는 것으로 진짜 안식일을 막아서는 안경에 앉은 파리같은 짓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드러냅니다. 드러내면 그 빈자리는 죄인이었는데 그것도 모르면서 의인인 척하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의 안식일 속에 들어와 보니까 주가 안식일을 지킨 그 공로로 그동안 내가 오해했던 모든 죄를 용서하시려고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밝혀지지요. 마가복음 3장에서 병 고쳤다고 그것이 끝이 아니고 진짜 중요한 것은 죄 문제고, 이 죄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없는데 이것을 주께서 죄 값을 치름으로 우리는 주 안에서 의가 되는 효과를 보게 하십니다.
주께서 용서한 자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 받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 지켰다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든 십일조를 하든 결국 모든 완성은 십자가 속에 완성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예수 믿으면 돼요. 그 안에 십일조가 다 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믿으면 선교, 전도, 예배, 헌금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다 담겨 있어요.
그러면 예수만 믿으면 전도, 헌금, 봉사, 예배를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 자아의 뜻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다루십니다. 때로는 예배에 참석하게 하시고, 때로는 봉사도 하게 하시는데, 누구 묻기를 “열심히 봉사하시네요?”라고 하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라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막 살아야 돼요. 길거리에서 누구를 구제해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사도들의 삶이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주가 주신 힘으로 하라.’고 했어요. 왜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실컷 예수 믿는다, 충성한다고 해놓고 자신이 돋보이게 되면 이것은 성경과 다른 노선을 가고 있는 거예요. ‘믿음으로만은 안 돼. 행함이 있어야 해.’ 이렇게 되면 천국이 아닌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부족합니다.’라고 외쳐도 예수님 이름을 빙자한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행동일 뿐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것에 대해서 그들이 동의했겠습니까?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이번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우리가 보기에 우리는 당당하고 깔끔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의 내용을 우리가 이성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내가 의지만 있다면 이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하는 짓이 자기 보기에는 정직하고 성실해 보이지만 바울이나 베드로의 서신서에 보면 제자들이 하는 행동을 ‘육’으로 규정했습니다. 로마서 3장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평소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없다는 말은,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요. 로마서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은 다 거짓되다.’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 공생애(복음서)에는 없고 시편에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뽑은 12제자들 가운데는 없고, 그전 구약에는 있고, 십자가 지신 후에는 있습니다.
이 말은 성경을 볼 때 직접 사도 바울이나 구약에 들어가지 말고 12제자의 자리에 가서 구약과 신약을 다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무엇을 정리할 수 있는가 하면, 예수님 하신 말씀에 대해서 제자들이 어떤 가능성을 가졌을까요, 안 가졌을까요? 잔뜩 가능성을 높였던 겁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 중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습니까?” 이런 질문을 제자들이 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구원 받는 것은 기본이고 천국에 가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너희들이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했지요.
아직 쓴 잔을 마실 때는 아니었습니다. 쓴 잔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너희들이 나에 대해서 오해하고 곡해하는데 좋다. 그러나 날 떠나지는 마라.’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제자들은 다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할 수 있다. 성실히 말씀 지키자.’고 하는데, 우리가 놓친 것이 있어요. 우리는 달려들어 말씀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자신에 대해서 뭔가 모르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뭘까요? 이걸 몰랐기에 베드로는 ‘내가 목숨 바쳐서 주를 따르겠습니다.’ 라는 객기를 부렸지만 결국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랐던 겁니다.
'나는 누구의 종이 되기 싫다.'는 의식이 있었던 겁니다.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이나 의논의 대상은 될지언정 누가 나를 지배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거지요. 이것은 권세의 문제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내가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할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마귀가 너를 청구하려고 청구서 들고 왔다. 만약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너는 지옥에 가야 한다."
아무리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 때문에 물 위를 걸었고, 장모가 병이 낫고, 병 고치는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해도 여전히 마귀의 권세 밖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베드로가 자신감이 있었으면 "주님이 어디를 가든지 제 목숨 바쳐서 따르겠습니다."라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이 사단의 권세에 놓여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베드로가 감당 못할 새로운 권세를 주십니다. 그것이 뭔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시선이 마주치기 전에 그 쌘 권세 중에 미약한 권세를 보내지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 이스라엘 편에서는 누가 나섰습니까? 다윗인데, 다윗은 당시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소년이라도 적장 골리앗을 이긴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소년을 파견한 이유는 상대를 깔보는 것입니다. 시편 8편에서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셨다.'는 말은 상대의 권세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지금 베드로가 자신만만합니다.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 때 마귀 쪽에서 소녀를 보냈지요.
같이 불을 쪼이면서 소녀가 베드로에게 하는 말이 "당신도 예수님과 함께 다녔잖아요?"라고 했고,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며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이런 성질이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우리가 배반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역경을 이겨내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주님을 잘 믿는 것 같은데, 주님은 믿음이고 신앙이고 전혀 못하게 만드는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라고 나오도록 하십니다. 그래도 구원 돼요. 예수님을 모독하고 부인해도 구원 됩니다. 그 정도로 십자가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마귀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능력이기 때문에 다시 와도 마귀가 어찌할 수 없는 능력이 우리에게 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세상과 타협하며 아부하는 자인지 폭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구원 받았다는 소식을 십자가로 증명해 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다른 것은 알아도 소용없어요.
나는 개척교회를 했다. 봉사를 했다. 이런 것으로 구원 받는다면 바울은 진작 구원되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내가 한 어떤 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됩니다. 왜? 내가 한 헌금, 봉사, 예배도 다 죄가 되기 때문에.
혹시 구원파가 여러분이게 묻거든 이렇게 답하세요. "당신은 예수 믿어서 구원 받지. 나는 예수 안 믿어서 구원 받아." 예수 믿는 것도 죄라고 하세요. 그럼 그쪽에서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는 구원 받는다고 했는데, 예수 안 믿는데 어떻게 구원 받아?"라고 하겠지요. 그러니까 주의 공로지요. 이게 바로 결과적으로 '믿음'입니다.
우리의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믿음이 아닌 신념입니다. 그 신념은 우리에게 장착되어 있는 악마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신념은 약간만 환경이 어렵게 되면 갔다버릴 허례의식입니다. 일종의 사치품이죠. 편안할 때는 걸치지만 다급할 때는 차버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위장술이죠.
물론 우리는 죽을 때까지 위장하면서 살 수밖에 없지만 그 위장술을 위장으로 드러내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 거죠.
3장 6절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까? 그들은 악마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 죽이려는 것에 대해 소극적이었습니다.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풀어줄까?" 할 때 어떻게 나왔습니까?
이런 시험은 명절에 식구들 모였을 때 한 번 해보세요. "나는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다. 그냥 선하게 살다가 죽을래." 이렇게 말하는 어른이 있다면 질문을 해 보세요. "절이 좋습니까, 교회가 좋습니까?"라고. 무엇이든 선택하도록 항목을 두 개 주면 자기의 본색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도 절이 낫겠다. 절에는 제사 드리는 것을 허용하잖아."
자기가 아무 종교도 없다는 말은 '내가 조상 제사 드리는 일에 시비 걸지 않으면 우호적으로 지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십자가 안다. 복음도 언약도 안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 받는다.”라고 주장하는 목사에게 이렇게 질문하세요. “그럼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복음은 뭡니까?”라고. 대답 못합니다. 왜냐? 그 목사는 구원파나 여호와 증인, 신천지에서 온 사람이 있다면 말을 바꿉니다. 한 명이라도 더 자기 교인 만들어야 하니까.
사람들은 ‘나는 ~를 안다.’는 식으로 긍정적 서술을 해요. 하는지 ‘나는 ~는 싫어!’라는 말은 굉장히 조심해요. 누가 싫다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이 옆에 있다면 본인은 얼마나 경솔한 사람으로 판정 나겠어요? 그래서 가능한 한 부정적 표현은 잘 안 하고 긍정적 표현을 사용함으로 다수에게 인기를 얻고자 합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라는 사도바울의 말을 지금 선교사들이 못하고 있습니다. “이단이 뭡니까? 다른 복음이 뭡니까?” 물을 때,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이단이다.”라고 한다면 이런 반문이 가능합니다. “당신처럼 믿으면 믿는 자이고 당신과 달리 믿으면 이단입니까?”라고.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예수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예수 안 믿습니다.”라고 하면 차후의 질문이 안 들어옵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라고 하세요. 이것이 에베소서 2장 8절에 나오지요. 믿음은 하나님은 선물이기 때문에 주시는 분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요. 만약 선물 받은 사람이 믿음을 소유한다면 사람은 그 믿음을 관리할 능력이 없습니다.
커피와 녹차의 차이점이 뭡니까? 커피는 잔 안에서 다 녹습니다. 그런데 녹차는 잔에 들어가도 줄이 연결되어 있지요. 이게 믿음이고 이게 소망, 사랑입니다. 주님은 믿음과 소망이 우러나도록 하시지 그것을 인간이 소유하도록 하시지 않았습니다. 녹차는 선이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기에 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입니다. 그 주인은 마귀의 권세에서 탈출하신 분이잖아요. 이분이 선으로 나를 묶어 놓았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어도 그분이 당기는 대로 딸려갈 수밖에 없고 기어이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탈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줄을 끊고 우리가 나를 관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절대 마귀의 권세에서 탈출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관리합니다. 고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사기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제발 그만 속으세요. 얼마나 못났으면 줄에 달려있는 녹차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싫어서 커피를 원합니다.
주님이 안식일을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는 ‘죽은 자를 살리고 죄인을 용서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뭡니까? 죄인이 누구며, 진정 죽은 자가 누구냐? 이것만 드러내시면 예수님의 일은 마무리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3장 이후의 이야기는 멀쩡한 사람을 주님은 죄인으로 만들고, 죽은 자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는 겁니다.
3장 23-24절을 보면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라고 하셨어요.
사단을 누가 먼저 거론했습니까? 예수님을 미쳤다고 이야기했던 서기관들이 바알세불 이야기를 먼저 했잖아요. 제가 아까 권세라고 이야기했고, 이미 이 권세로 말미암아 자력으로 권세 밖에 계신 분과 연결되지 못하지요. 그러면 이 권세로 인하여 판정이 생깁니다. 판정이 뭔가 하면, 무엇이 악마고 무엇이 천사인지 나름대로 판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 판정을 인간은 스스로 부정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이 좋다고 할 때, 다른 사람이 “넌 그 사람이 왜 좋은데?”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무슨 조건을 붙이더라도 결국 남는 것은 하나입니다. ‘좋다’는 것입니다. “너는 왜 그렇게 며느리를 미워하니?”라고 할 때, 그냥 미우니까 미운 것뿐이에요. 드라마에 보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는데 구박의 이유가 없어요. 그냥 그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에요.
다들 그래요. 같은 자식이라도 예쁜 자식이 있고 미운 자식이 있어요. 이건 이유가 없어요. 왜? 내가 판정을 내리기 때문에. 만약 판정이 바뀐다면 ‘너는 나가 죽어라.’는 소리와 같은 거예요. ‘그런 판정을 내리다니. 넌 살 가치도 없어.’ 이것은 ‘도’ 아니면 ‘모’입니다. 내가 무가치하든지 아니면 내 판정이 옳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인간이 생겨나기 전에 마귀가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이상은 둘 중 하나에요. 마귀가 맞든지 하나님이 맞든지. 이미 하늘나라가 둘로 분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분열될 줄 알고 선악과를 심어놓았고, 선악과를 따먹게 했고, 따먹은 후 인간 내부는 선과 악으로 분열되었어요.
이 분열된 상태를 우리는 부정하지 못합니다. 왜냐? 우리는 선과 악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분열된 체로 가는 거예요. 인간의 내부는 선과 악으로 되어 있어요. 오디오 시스템이에요. 아침에 눈뜨면 뭘 할까를 생각하고,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내부에 물어봅니다. 우리 내부에는 나가 없어요. 선과 악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미지의 X가 우리 행위에 대해 판정을 내려요. 우리는 행동하면 꼭 묻습니다. 잘했나, 잘못했나? 만약 잘했으면 복을 기대해도 좋고, 잘못했으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인간 내부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이해해요. 이런 사람이 교회에 갔다면 목사의 설교가 어떤 것은 선, 어떤 것은 악으로 들리는 거예요.
그러면 악한 자는 벌을 받고 선한 자는 복을 받으니까 내 미래의 일을 예상해보면 악은 버리고 선은 행하면 됩니다. 선은 뭔가? 목사가 선한 것을 이야기해 줘요. 십일조하고, 봉사하고, 전도해라. 이 때 선한 일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하면 나에게 복이 온다는 것이 중요해요.
만약 목사가 “여러분이 아무리 기도하고 봉사해도 복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 봉사 자체가 귀한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기도하고 봉사하겠어요? 안 합니다. 반드시 성과급이 있어야 돼요. 당근과 채찍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당나귀와 같습니다. 받는 것이 없으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습니다.
학생이 시험 없으면 공부할까요? 미쳤어요? 시험도 없는데 공부하게. 미국에 사는 교민들 이야기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된답니다. 그래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미국의 경제사정이 어려운데 동양인이 취직하기는 더 어려운 거예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기대가 없으면 행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과 저주로 분열되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40일 금식시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살게 해요. 광야에서 40일을 굶었다. 이것이 복입니까? 어떤 인간도 이것을 저주로 봅니다. 인간은 분열되어 있으니까 저주를 피해 가겠지요. 가난하다고 부자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를 받았으면 더욱 간절히 복을 사모합니다.
인간 내부가 반대쪽을 쳐다보기 때문에 내가 저주를 받았으면 복을 쳐다보게 되어 있어요. (사단 생각에)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돌이 떡이 되게 하라.’ 이게 타고난 본성이니까. 돌은 저주고 떡은 복이잖아요. 메시아라고 해서 별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모든 인간성이 다 이런데, 인간성을 마귀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니 돌이 떡이 되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했는데, 메시아에게 추종자가 많으면 복이고 추종자가 없으면 저주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예배당을 멋지게 꾸며놓았는데 10년이 넘게 교인이 없어요. 그 목사님의 소원이 뭔가? 나도 설교 좀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세상의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유한 것을 얼마나 바라겠어요? 결국 돈과 인기와 성공. 인기는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의 미끼가 되어 저주에서 복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 가지 유혹을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위함이 아니고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 왔다.”
아버지 뜻이 뭡니까? 자기 백성을 구해내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자기 백성 건져내듯이. 그러면 구출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구출되면서 자신이 마귀 안에서 분열된 상태로 있었음을 파악하게 되고, 여기서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었음을 압니다. 인간이 신앙생활 아무리 잘해도 돈, 명예, 성공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경로당이 앞에 있는데 그곳에 가서 물어보세요. “돈 싫은 사람 있습니까? 외로움이 좋은 사람 있습니까? 자식 실패를 바라는 사람 있습니까?”라고.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이런 유혹을 못 이깁니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 대신 따로 조치를 하신 거예요. 내가 스스로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 때 선악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내가 잘했나, 못했나? 이게 의미가 없어요. 못해도 못한 것이고 잘해도 못한 것입니다. 구조 자체가 고장이 났기에 제품이 나와도 불량품입니다. 기계가 고장 났는데 그 기계에 뭘 기대합니까? 결국 돈, 인기, 성공만 나옵니다. “엄마, 나 수능 만점 받았어!”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 돈과 인기와 성공이 보장되었다는 뜻입니다. 수능 만점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이어서 공부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수능 만점 후에 얻는 것이 있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소원이 될 수 없지요. 뭔가를 얻고자 함입니다.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함으로 돈과 인기와 성공을 얻고자 해서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척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겨냅니까?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24절)” 이 말은, 나(예수님) 외에 이 세상에 반란을 일으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사단은 사단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한 통속이거든요.
선악을 아는 자끼리 한 편입니다. 마귀와 우리가 한 편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마귀는 우리의 참 좋은 친구예요. 마귀는 늘 우리를 격려하는데, 욥기에 보면 빌닷을 통해서 하는 말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용기를 줍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시편 90편을 인용했어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거예요.
성도는 마귀에게 시험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시험 칠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미생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완생이예요. 바둑에서 미생이 있고 완생이 있어요. 우리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에요. 자신이 자신을 때리지 마세요. 제발 자신을 용서해 주세요. 주께서 용서하셨다는데 우리가 왜 용서를 못합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았기에 나도 주님께 용서받지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주기도문을 언급해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이 말씀은, 우리의 대변자이신 예수님이 그 말씀을 이뤘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지 못한 일을 내가 대신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남을 용서할 필요가 없어요. 다만 주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한 것을 용인하면 되는 겁니다. ‘내가 용서하기 전에 주께서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뿐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지요. 내가 왜 건방지게 남을 용서해요. 용서하면 나는 ‘갑’이 되고 그 사람은 ‘을’이 되어 나의 종이 되는데.
남 용서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있어요. 왜? 자기 종이 많이 생기니까. 천주교 신부가 자신에게 찾아 온 사람들에게 사죄를 해주는데 그것은 스스로 자신이 마귀임을 티내는 짓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교인들이 숨어 있는 죄를 신부에게 다 고백하겠어요?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고해성사하는 것은 신부가 자신을 용서하기 전에 스스로 용서한 죄만 고백하는 거예요. 왜냐? 자신이 신앙인임을 티내기 위해서. 어떤 교인이 목사에게 상담을 한다는 것은 본인이 이미 해결한 문제입니다. “목사님,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데 이혼을 할까요, 말까요?” 물을 때, 그 사람은 이미 결심이 서 있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이혼하려고 결심했기에 목사에게 그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서 온 거예요.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사님, 마음 내키는 대로 하세요.” 그래서 제 말 듣고 이혼 안 한 사람 없고 다 이혼했어요. 사람은 누구를 이용할 뿐입니다. 자기 분열을 다른 사람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삼계탕을 끓일 때 닭을 반 잘라서 내장을 끄집어내지요? 이처럼 주님은 우리를 완전히 노출시킵니다.
우리 내장을 드러내고 거기에 인삼, 대추, 밤을 집어넣고 끓여 맛있게 먹습니다. 이것을 주님의 양식이라고 해요. 이게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남자 다섯 명을 사귀고 다 해어지고 여섯 번째 사람과 사귀고 있는 여자의 사생활을 닭의 몸을 잘라 내장을 꺼내듯이 잘라내시고 그 자리에서 분수가 나와요. 영원히 마르지 않는 분수인데, 분수의 이름이 ‘야곱의 우물’이에요.
진짜 야곱 되시는 분이 와서 생수를 쏟아내실 때 그것이 주님의 양식인 삼계탕입니다. 제자들이 “주님 빵 사왔습니다.”라고 하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내 양식은 따로 있다.”고 하셨고, 제자들은 “누가 빵을 사 드렸습니까?”라고 물어요. 주님의 양식은 사마리아 여인이에요.
선과 악의 갈등, 살 동안에 늘 저주에 쫓기고 축복을 갈구하는 이 결합될 수 없는 정신적 분열자를 완전히 해부해서 내장을 끄집어내고 그 자리에 십자가를 꽂아서 그 사람을 낙원에 보내십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가시거든 내가 어떤 식으로 분열되어 있는가를 말씀을 통해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분열을 본인이 알아서 봉합하지 마세요. 성령은 봉합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파헤쳐 놓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실현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렇게 맺고 싶고 안달했던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힘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맺게 하십니다.
선과 악이 관계없다는 말은 축복과 저주가 더 이상 우리 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오시면 환란과 핍박도 복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기근과 적신도 복이 됩니다. 주님과 끊어지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복을 기대하지 마세요. 죽어도 살고, 죄를 용서 받은 이 복 외에 무슨 복이 있겠어요?
진정한 복은 주께서 주신 복음이 전부입니다. “복음을 알았거든 사정이 어떠하든지 내가 너희를 다그치지 않겠다. 다만 내가 다그치는 것은 네가 복음에 관심이 있는지, 복음을 늘 생각하는지에 대해 다그치지, 수능 몇 점 받았어, 취직 했어, 언제 결혼할거야?” 이런 것으로 다그치지 않아요.
10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인간은 예수님을 몰라도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길 수가 없어요. 우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분열된 우리를 주님은 더 분열시킵니다. 우리는 돈, 인기, 성공 이런 것을 즐거워하는 자임을 알면 알수록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저주받아야 되는데 오늘도 은혜를 주시는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재파악도 못하면서 주님을 이용하려했던 그것조차 주께서 익히 아시고 이미 용서하신 항목에 들어가 있는 줄 우리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너무 책망하지 말게 해 주시고 도리어 감사로 바뀌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12. 9. 09:56 녹취 마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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