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11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11-루터, 칼빈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종교개혁시간인데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이지만 천주교나 개신교와 관계없는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종교개혁의 시작이라는 자체가 그들한테는 별로 다가오지 않지요. 그 기독교나 이 기독교나 똑같은데 자기들의 정치적인 이권다툼 정도밖에는 생각하지 않지요. 그러나 개신교 입장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마치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처럼 드디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고 참된 진리로 인도한다는 그러한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동안 어둠이었지만 어둠에서 빛이 나왔다. 그럼 그전의 사람들은 다 지옥 갑니까?
그래서 개신교에서 이렇게 해요. 그전에 사람들이 다 지옥 갔다고 할 수 없지만 그들 가운데서 성령이 임한 사람이 있겠지만 정치의 기세에 눌렸다, 주눅 들었다 하거든요. 그리고 역사의 주류로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미하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 논리라면 이것도 생각해봐야 됩니다. 개신교 이루고 난 뒤에 개신교가 많은 나라에서 천주교 자리를 차지했잖아요. 차지했으면 개신교가 정치적인 종교가 된단 말이죠. 천주교에서 정치적인 권력의 주도권을 가졌기 때문에 참된 신앙인이 숨도 못 쉬고 있었던 그 상황이 개신교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동일하게 일어날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천주교, 원래 로마교회나 그리스 정교회 같은 것이 처음부터 주변 역사적 상황을 용납한 것이 아니고 싸웠단 말이죠. 무신론, 다신론과 싸워서 정치적인 자리를 마련해서 커져서 사상적으로 전 로마제국을 지배한 셈이 된단 말이죠. 그게 문제라면 교리는 문제없는데 정치적 상황으로 주도권을 쥐었다는 게 문제냐? 그게 만약에 문제라면 그건 기독교도 똑같은 상황이 될 게 뻔하다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게 문제라면 개신교가 천주교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을 천주교의 비리를 알았더라면 차후에는 답습이 되지 않는 자체적인 방지대책이 마련되지 않아야 않습니까? 그래서 방지대책을 마련한다고 시도한 게 신앙고백서 작성입니다. 신앙고백서 작성이 일종에 심사하는 거예요. 우리 네덜란드는 개신교입니다.
심사할 때 “당신은 ~는 아니지요?”라고 묻지요. “당신은 교황 믿는 천주교인은 아니지요?”라고 묻는 거예요. “그럼 당신은 뭘 믿습니까?” “우리는 새로운 개신교를 믿습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서에 사인을 해야 되지요. 그러면 그런 식으로 우리 편이라고 확답이 되는데 그런 것을 천주교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단단히 했지요. 삼위일체 교리 나올 때부터 단호하게 했어요. 이것 안 믿으면 이단이라고 정치적 보복을 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시다. 개신교가 정치적으로 천주교와 어떻게 갈라지고 어떻게 존재했느냐? 이것보다도 사실은 이걸 생각해야 돼요. 둘로 갈라졌으니까 같은 성경책 놓고 같은 역사적 상황 놓고 교리가 같을까, 다를까? 그것만 생각하면 되겠지요. 어느 쪽이 숫자가 많으냐? 어느 세력이 기세를 드러내느냐? 이것은 패션이나 유행은 그때 기분이지 지나가면 유행도 사그라지는 거예요. 신천지가 요새 뜨고 있는데 신천지가 얼마나 교세가 크냐는 것은 별 의미 없어요. 신천지가 이야기한 교리가 뭐냐가 중요하잖아요. 한때 위세 떠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렇게 보자는 거죠. 개신교라는 것은, 천주교가 너무 박해하고 심하게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참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정치적 운동이다. 그렇게만 개신교를 본다면 어떤 문제가 생겨나느냐 하면,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하기 이전에 개신교가 있었느냐하는 문제가 또 등장해요.
왈도파가 있었고, 위클리프라는 영국의 옥스퍼드 학장이 있었고, 그 다음에 체코에서 유명한 후스파가 있었고, 이태리에서 사보나놀라, 사실 이 사람은 개혁주의자라기보다도 예언가, 곧 종말이 온다고 외쳤던 사보나놀라. 제일 빠른 게 왈도파로 1170년이고, 위클리프는 1350년경이고, 후스는 1400년경이라고 보면 되고, 사보나놀라는 1450년경이라고 보면 돼요. 그리고 루터는 1517년이지요. 과연 이 사람들이 개신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돼요.
지금 제가 뭘 따지느냐 하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잖아요. 그게 종교가 될 수 있는 요건이 있는 겁니까? 도서관 출입구에 이것 하나 붙이면 종교가 되는 거예요. 벽보 붙이는 게 종교가 되는 요건이 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왜 최초냐 말이죠. 교황을 반대했기 때문에? 교황을 반대한 것은 왈도,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놀라, 이 사람들도 다 반대했어요. 왈도는 평신도고 위클리프는 대학학장이고, 후스는 신학자고, 사보나놀라는 신부고.
루터 이전에 이 사람들이 교황을 반대했어요. 그 당시에 로마교회가 교황중심으로 이미 갖추어져 있었지요. 이걸 그들은 교회라고 생각한 거예요. 성경에 교황이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말이 안 나오지요. 그렇다면 개신교가 이런 교황중심의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등장한 개신교도 교회라고 우길 수 있는 근거는 없지요. 성경에 안 나오는 것으로 교회가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그게 성경적이냐 이 말입니다. 반대를 했다고 진리가 됩니까? 그건 아니지요. 교황체제의 교회를 반대했으니까 우리는 정통이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말이죠. 둘 다 정통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잖아요.
그러면 제가 말씀드릴게요. 성경에서 교회라는 것은 누가 만들고 자시고,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붙이는 것이 교회 되는 요건입니까? 아니지요. 이것은 정치적인 하나의 이벤트에요. 그러면 애초부터 교회는 이미 성령에 의해서 교회가 꾸준하게 그것도 아무 하자 없이, 문제없이 이어져왔지요. 거기에 대해서 천주교, 개신교 모두 교회입니까? 교회라고 하면 교회가 아니고, 교회가 아니라고 하면 교회고 그렇지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지금 개신교 신학교, 장로교, 감리교 신학교에서 종교개혁에 자꾸 강조점을 주잖아요. 종교개혁 같으면 왈도는 프랑스, 위클리프는 영국, 후스는 보헤미아, 지금의 체코, 사보나놀라는 이태리, 이런 데서부터 운동이 일어났을 때 개신교라고 말을 못합니까? 현재 개신교에서. 왜 자꾸 루터와 칼빈이 등장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해놓고 사실은 성경으로 돌아간 게 아니고 성경에 대한 해석한 사람들에 돌아가서 스톱이 돼버린 거예요. 여기에 이 사람을 모델로 삼고 학문적 후배들이 지금의 개신교를 만들어버렸어요. 그럼 기독교로 구원받지 천주교로 구원 못 받는다는 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지요. 말이 될 리가 있습니까.
제가 서론 격으로 먼저 이 말씀을 드린 겁니다. 이게 신학교에서 개신교이기 때문에 개신교 위주로 역사를 구축하는 것은, 항상 역사란 반드시 역사를 구축한 자의 정당성과 합리성과 선입관이 내포된 역사인데 진짜 역사는 부정당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역사는 십자가에 부정당해야 돼요. 하나님의 묵시적 능력, 구원의 능력 앞에 부정당해야 되는 거예요. 개신교라고 하면서 백날 십자가라고 언급하면서도 막상 자기들은 십자가 앞에 부정당하지 않으려는 그런 역사를 쥐고 있다면 그 자체가 십자가에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문제점이 뭐냐? 개신교를 못 알아본 게 문제가 아니고 천주교는 그들의 교황교회를 십자가 앞에 부정하지 못하는 게 잘못이에요. 그리고 개신교의 잘못은 뭐냐? 같은 잘못을 또다시 똑같이 저지르고 있는 거예요. 유럽의 기독교를 반분, 너만 차지하지 말고 갈라 먹자는 식이에요. 갈라 먹자가 무슨 진리입니까.
다시 생각해봅시다. 왜 왈도,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놀라, 이 네 사람들의 공통점은 교황제도의 부정이에요. 교황제도의 부정이니까 줄줄이 따라오는 게 다 부정돼요. 고해성사의 부정, 성만찬도 부정. 물론 후스 같은 경우에는 성만찬은 부정하지 말자는 귀족파와 성만찬마저 부정하자는 강력파가 있어요. 나중에 그들이 전쟁해서 몰살당했어요. 몇 십 년간 반짝 독립 국가를 했는데 다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종교 거론해서 독립국가 됐잖아요. 네덜란드 마찬가지고. 스위스는 칼빈이 와서, 프랑스 사람이 스위스로 도망친 거지요. 이민자지요. 거기서 스위스라는 독립적인 나라를 만들고 정치적인 협상에 의해서 국가로 인정을 받아요. 여러 가지 수난도 있었지만 나라를 마련하니까 그때 1648년 회담에 의해서 종교를 인정한다. 종교를 누구 인정하고 누구한테 인정받아야 됩니까? 천사가 인정해줘요? 왜 사람한테 인정받아야 돼요? 인정받으면 천국 가고 인정 못 받으면 지옥 가는 가요? 인간이란 주변 환경의 권력에 주눅 드는 것도 문제지만 통치를 자진해서 받고자하는 그것도 더 문제라. “때려주세요.” 이런 식으로. “당신이 인정해주면 그때부터 안심하겠습니다.” 이런 것.
교재에 루터를 봅시다. 우리가 공부해야 될 것은 그들의 역사적 그런 것은 해봐야 소용없는 짓이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루터가 성경을 어떻게 봤느냐가 더 중요하고 칼빈이 어떻게 성경을 봤느냐가 중요하고 그것인 그전에 천주교 신학자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가 중요한 거예요. 루터가 메시아가 아니니까. 칼빈이 메시아 아니지요. 칼빈이 메시아도 아닌데 왜 신학교에서는 칼빈, 칼빈 하는지 내 참. 칼빈이 십자가 졌습니까? 아니잖아요.
루터(1483~1546)를 봅시다. 루터신학이 몇 페이지로 함축이 돼있기 때문에 문장 하나하나 그냥 넘어갈 문장이 없어요. 루터 이전에는 그 당시 분위기가 과연 하나님이 의미가 있느냐? 차이점을 보세요. 하나님이 의미가 있느냐? 이게 그 당시 사회전반 분위기였어요. 신은 천주교가 독점했지요. 그러면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가서 성만찬하고 세례 받고, 일곱 성사하고 죽으면 천국 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일상에서는, 지난번에 했잖아요. 하나님을 위에 올려놓고 밑에서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분위기가 바뀌었지요. 이미 이때는 십자가운동 이후입니다. 십자가전쟁 이후에는 무역이 발달했기 때문에 농사지어서 귀족이 되는 방법이 있지만 그게 봉건 영주고, 돈 벌어서 귀족처럼 살아도 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 일어났던 시대에요. 영국에서 1515년 명예혁명이 일어났고 분위기 자체가 서서히 도시 부르주아가 강조되는, 상업이 강조되는, 땅덩어리 없어도 큰소리칠 수 있는 시대에요. 그전에는 땅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아요. 왜냐하면 봉건사회에서는 장원제도라 해서 땅에서 나온 것만 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제는 돈 번다는 것이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상업이 전문화되면서 상업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가 서서히 기지개를 펴려고 하면서 새로운 계급이 등장한 겁니다. 그 새로운 계급이 도시 부르주아고 도시민이고 그들이 힘을 합쳐서 국왕과 대립적인 힘을 구축할 때 비로소 그들은 국왕도 무시 못 하는 민주제도, 의회가 드디어 발생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에게 종교는 신은 다들 인정하니까 구태여 신이 있다는 게 자기 일상에 의미 있느냐 이 말입니다. 결국 의미 있다, 없다? 교회 나가서 예배드리는 그걸로 됐다. 결국 신은 의미가 없는 거죠. 오늘날 교회 나오는 현대인들 보세요. 목사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이 의미 있습니까? 기도하면 하늘에서 돈이 떨어집니까? 내가 생존에 필요한 걸 하나님이 제공해주느냐 이 말입니다. 안 해주지요.
그러면 내 생존과 생계문제는 하나님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잖아요. 내가 밥 빌어먹고 사는 게 일차적인 문제라면 신은 있기만 있을 뿐이지 나한테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서서히 근대주체의식이 성립될 시기기 때문에. 신을 안 믿는다는 게 아니고 믿어요. 교회 다녀요. 하지만 신학적으로 신을 올려버렸다니까. 헌금만 받으시고. 일상을 꾸려나가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에서 하나님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것이 그 당시 분위기였습니다.
①하나님의 의미가 있느냐? 의미가 없다. ②하나님이 하시는 의미가 뭐냐? 다르지요. 하나님 자체가 의미 없는 거고 루터는, 하나님이 어떤 뜻으로 이 세상에 펼치느냐? 하나님이 일하시는 의미가 뭐냐? 벌써 뉘앙스가 다르지요. 하나님이 이런저런 일을 하는데 무슨 뜻으로 그런 일을 하게 하십니까? 그러면 그 일은 나의 일이 돼요, 하나님의 일이 돼요?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의 의지라 합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나의 의지를 능가하고 덮칠 때 나는 나의 인생을 나름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의미를 갖고 있는 일에 참여하는 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1번 같은 경우에 “하나님 자체가 의미가 있어?” 그런데 갑자기 이사를 간다. “하나님이여, 언제쯤 이사하는 게 낫겠습니까?” 이럴 경우에는 의미 있는 걸 내가 만들고 그 다음에 알쏭달쏭하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는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는 식으로 내가 결정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식이 되는 것이 1번이라면,
2번은 자기가 결정한 건 있다, 없다? 아예 없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면, 결국 나는 내가 사는 게 아닌 거예요. 만약에 내가 산다면 그 자체가 주님의 일에 훼방이 되고 방해가 되는 겁니다. 루터는 그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천주교를 반대한다. 교황을 반대한다. 그러면 자기가 자동적으로 착한 사람이 됩니까? 아니지요.
122페이지 밑에서 일곱 번째 줄에. [‘신학 자격증’은 대학에서 주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주는 것이다.] 대학이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대학이라는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역사적 전통을 다 끊어버리지요. 그러면 성령은 전통에 안 메이지요. 바람 같이 부니까. 결국 루터의 신학은 모든 원인을 잘라버리고 이 세상에 연결된 바탕을 다 잘라버려서 하나님은 일하지만 하나님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모토입니다. 하나님은 있어도 없다. 루터의 신학은, 하나님은 있어도 우리한테는 없다. 있어도 없다는 말은 존재로 따져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 나타내고 싶을 때만 나타나는 거예요.
그게 123페이지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지만 하나님은 숨어계시고, 나타나실 때는 나타나시는 것이므로 아무데나 계신다 할지라도 말씀과 신앙이 없는 곳에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루터 이전의 신학은, 하나님은 늘 계시고 하나님은 산천초목을 키우시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아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 속에 숨어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십자가로 나타나는데 십자가로 나타난다는 말은, 십자가가 객관화되어 나타난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의 어떤 주관적인 퇴보와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 계시며, 어디에 계시기를 원하실까? 루터의 사상은 하나님의 편재를 시인하면서도 편재를 부인하는 것인데, 이 시인과 부인은 곧 특수한 장소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그 특수한 장소는 어디서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특수한 장소란 말은 사건이죠. 사건화 될 때만 나타나는데 그 다음에, [그런데 그 특수한 장소는 객체로서의 하나님의 일방적인 임재와 현현의 장소라기보다는 그를 찾는 인간의 주체적 태도와 관련돼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타난 객체뿐만 아니고 객관으로 인하여 찾고자하는 주관 자체가 바뀌는 현상도 동반해서 나타난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물으면, 바로 하나님은 십자가 뒤에 숨어있기 때문에 나타날 때는 십자가로 나타나거든요. 십자가에 달린 건 사람이지요. 이 사람은 아버지에 대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그 의미를 동반해서 나타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타나는 동시에 그동안 하나님을 찾고자 했던 나의 욕망과 욕심이 부정당하는 현상을 유발시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목사님들 이해되실 거예요. 워낙 십자가 복음을 잘 아시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존재로 따지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될 거예요. 하나님이 어르신인데 그 어르신이 나타나면 나타나는 거지 그게 주관이고 객관이고 뭐. 나타나는 자체가 객관인데. 그러나 루터는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 없이 나타나는 하나님이 돼버려요. 십자가 사건 없이 나타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오늘날 신학으로 말하면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면 언약을 앞장세우지 않으면 절대로 그 하나님은 가짜라는 거예요. 루터가 대단하지요.
천주교는 하나님의 존재로 어떤 조직을 만들었어요. 신은 존재한다.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증거가 있을 것인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황과 주교와 신부를 주셨고, 그들이 교회법을 만들고 전통을 세우게 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만든 교회기 때문에 그 교회에 등록해서 지시에 따르면 죽어도 천국 간다. 이게 천주교거든요.
제가 방금 그것이 천주교라고 이야기했지요. 오늘날 개신교는 아닙니까? 개신교도 마찬가지지요. 루터에 의하면 뭐가 문제입니까? 그들이 존재로부터 시작해요. 내가 여기 있는데 신이 만들어서 있다. 따라서 내가 여기 있으니 신이 있을 것이다. 이 자체를 루터는 이걸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십자가가 빠졌기 때문에. 십자가는 숨어있는데 내가 여기 있음에 그냥 있어버리면 존재와 존재의 유비가 돼버려요. 그래서 루터교 신자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존재와 존재의 유비가 천주교고, 개신교는 신앙의 유비라 했어요.
지금까지 강의한 걸 다시 하겠습니다. 제가 강의하면서 이렇게 했지요. 하나님 의미 있나? 이건 제가 말을 끄집어내서 우리가 생각해보는데 사실은 말을 안 끄집어내도 교인들이 교회 올 때만 하나님 생각하고 평소에는 하나님 생각합니까? 바빠서 못 하지요. 지금 하나님은 나한테 중요한 의미가 못 돼요. 내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야 되니까. 내가 자식들과 살고, 밥 빌어먹고 살고, 사업해서 살아야 되니까 하나님 찾는다고 돈을 줍니까, 밥을 줍니까? 아무것도 안 줘요.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때나 개혁주의 당시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요.
그런데 루터가 하나님이 의미 있느냐고 묻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일하심의 의미가 뭐냐고 한 거예요. 그러면 내가 여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의미에 속한다, 안 속한다? 안 속하지요. 그 의미가 뭐냐? 그 의미가 십자가라는 겁니다. 천주교 같으면 교회 있음이 의미고, 오늘날 우리 같으면 내가 밥 빌어먹고 사는 게 의미라고 보고, 어떤 신학생 같으면 내가 졸업해서 어느 교회에 취직해서 부교역자로 사는 게 의미지만.
루터는 그런 것으로 하나님과 엮이지 말란 말이죠. 하나님은 십자가 뒤에만 계시기 때문에 나타날 때 십자가로만 나타나는 게 하나님이지 자꾸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이러지 말란 말이죠. 강도가 목회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강도는 뭐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강도가 달린 장소가 십자가지요. 만약에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십자가에 나타난다고 한다면 강도 두 사람 다 낙원에 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객관성이 주관과 관련돼있기 때문에 옆에 같이 달린 강도 가운데 한 사람만 구원받았지요.
그렇다면 주님이 나타난 십자가는 객관적 십자가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우리 영혼 안에 나타나는 그 일을 성령이 한다고 보는 겁니다. 이제 루터신학 이해됐지요. 대학에서 목사 자격을 주는 게 아니고 왜 오직 성령이냐 하면, 바로 그 성령이 십자가 영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는 성령은 루터에 의하면 없지요.
그런데 그 뒤에 칼빈은 루터의 신학과 거의 반대에요. 칼빈은 천주교 신학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을 답습했다고 보면 됩니다. 칼빈은 삼위일체로 봅니다. 삼위일체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을 나란히 세워놔요. 갑바도기아 세 신학자에 의하면 상호 소통하는 식으로 삼위가 활동하거든요. 그게 128페이지에 나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의 신학대로 ‘속성의 상통’으로서의 인성과 신성을 설명한다.]
예수님을 의미할 때 모든 일을 루터는 성령에 의해서 하잖아요. 칼빈은 성령에 의해서 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신성에 준해서 일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은 십자가 영으로 오는 게 아니고 성령은 독자적으로 따로 일해요. 예수님도 따로 일하고. 우리는 성부 믿고, 성자 믿고, 성령 믿으면 돼요. 그런데 루터는 오직 십자가만. 이제 그 신학 차이를 알겠지요.
칼빈의 신학에서 주관이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인간 스스로가 주관을 갖추면 돼요. 이게 어거스틴, 아퀴나스 사상이에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를 받아서 자율의지 또는 자유의지에 의해서 스스로 믿음의 체제를 갖추어나가면 그게 은혜고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루터는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터지고 십자가 능력이 터지는 그 현장으로써 우리 주체가 쓰인다는 겁니다. 그때는 언약이라는 것이 발달되기 전인데 지금 우리는 그것을 언약의 핵심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교재 124페이지에 보면, 제가 일부러 에라스무스의 신학과 루터의 신학을 비교해놨어요. 에라스무스의 신학이 뭐냐 하면, 123페이지 밑에, [옛날에 자연법이 있었는데 그건 고전시대다. 그건 행위법이고 모세의 법이었는데 이제 신약에 와서는 은혜의 법이다. 따라서 자연법이라는 모세의 행위법에서 은혜의 법으로 발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그 점을 따져봅시다. 지금 에라스무스는 뭘 생각합니까? 신이 나에게 의미 있을 때 의미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때 신이 있다는 거예요. 신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충족시켜준다는 의미에서 신은 꼭 믿어야 될 분이고 필요한 분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럼 인간은 완전히 되기를 원하지요. 방법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행함의 법을 주시고 신약에 와서는 은혜의 법을 주셔서 행함에서 은혜로 나가면서 드디어 완전에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124페이지에 보면. [에라스무스는 이 완전을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하여 달성된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이 만일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서 벌하실 리가 만무하다.] 에라스무스가 이런 이야기해요. 이게 무슨 뜻인 줄 아시겠습니까?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삼각함수를 풀라고 했을 때 풀 수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그걸 못 풀었다고 때린다면 때린다는 자체가 의미가 없단 말이죠. 어차피 안 될 것을 왜 때립니까? 뭔가 때렸으면 때림으로 되는 아이가 돼야 되는데 애초부터 될 수도 없는 아이를 때리면 진짜 선생님이 원하는 결과를 못 얻잖아요.
마찬가지로 인간이 죄인이라면 때리는 자체도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에라스무스가. 인간이 죄인이 아니고 착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때려서라도 인간 되게 만들 때는 합리적으로 옳은 이야기인데 애초부터 죄인인 걸 때린다는 자체가 무의미한 짓이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루터는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 하거든요. 그러면 에라스무스는 십자가를 빼고 이야기해버린 거예요. 그런데 루터는 십자가를 집어넣고 이야기하고. 단지 십자가 하나 있고, 없고의 뿐인데 이 차이가 엄청난 차이가 되는 거예요.
루터가, 이 복음이 사도바울의 복음이라 하면 에라스무스는 성경에 사도바울밖에 없느냐고 나와요. 에라스무스의 사고방식은 이거에요. 얼마나 정상적인지 보세요.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이 성경 줬잖아요. 성경 통해서 하나님 알면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간단해요. 성경은 객관적이고 주관은 내가 결정하고. 그런데 루터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십자가는, 내가 생각했던 주관은 주관이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면 이 악마의 작용이 어디서 찾느냐 말이죠. 마태복음 4장에 악마가 나오지 않습니까? 악마가 그냥 구경하러 왔습니까? 2014년 3월 11일 지금 악마는 뭐하고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눈 돌리게 하는 작업을 악마가 부지런 떨면서 하고 있단 말이죠. 십자가만 빠지면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다 되는 거예요. 나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있고, 시키는 대로 살면 되니까.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행복을 원하고. 행복은 완전함에서 오고.
보세요. 지금 옛날이야기잖아요. 에라스무스, 루터, 16세기 초반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역사가 흘러도 안 달라져요. 이게 안 달라진다는 말은 구약 때도 안 달라졌고, 아브라함도 안 달라졌고, 지금도 안 달라지고, 에라스무스도 안 달라지고, 인간은 안 달라집니다. 왜?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마귀를 인정해줍시다. 마귀가 매일같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너한테 얼마나 이익인지 계산해 보란 이야기에요. 내가 위주고 하나님은 나보다는 덜 중요해요. 내가 나에게 의미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라니까요. 내가 나의 의미에 치중할 때는 하나님은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루터는 하나님의 의미가 전부고, 그 의미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나온 부산물이 현재 나란 육체가 생겼다고 보는 거예요.
말로만 신이 만들었다. 말로는 누가 못합니까. 말로만 하면 뭐합니까. 이것 해달라고, 저것 해달라고 있는데. 그게 제대로 누가 주인인지, 누가 종인지 분간도 안 되는 타고난 인간의 품성, 이걸 로마서 5장에서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났다. 엄마한테서 태어난 게 아니고 인간은 죄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죄 속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맨날 칼 들고 현금차량 턴다고 그게 죄가 아니라 항상 나부터 “내가 일단 살고보자. 그게 제일 중요해. 이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일단 나는 나야. 내가 사는 게 전부고 진리야.”라고 여기서 출발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은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고 어떤 보탬이 되느냐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악마가 그려낸 현실 세계, 이 세상이에요.
그래서 심판은 우리 행동에 의해서 조심하면 되니까 주의 공로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게 에라스무스라면, 여기에 대해서 루터는 말하기를 구원문제에 있어서 이성은 무력하다. 루터가 에라스무스를 마귀 들렸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어요. 구원문제에 대해서 인간은 무력하고 아무 역할이 없다. 둘 다 서로 다른 소리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에 머물러 살기 위해서 사람이 할 일이나 꾀할 일은 전혀 없다.] 루터가 이 말했거든요. 전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그게 당연히 나와야지요. 그럴 때 성령이 새롭게 함으로써 들어간다. 따라서 자유의지라는 것은 성령 그분의 자유의지라면 몰라도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에 악마나 어떤 대적이 우리를 빼앗아가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한테 빼앗기지 않는다. 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에서 온 믿음이라는 것이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제가 루터가 하는 이야기 전체를 동의하지는 않아요. 율법에 관해서 루터가 그 당시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기본 모토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십자가 나타날 때만 거기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