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악령의 파이팅

아빠와 함께 2026. 8. 11. 15:43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막5:15) 무덤이라는 현장에, 인간이 제작한 옷으로 감당되지 않고, 세상 법이나 규칙의 사슬로도 억제시키지 못해서, 거의 짐승에 가까운 모습으로 군대 귀신이 집결한 육체가, 이제는 예수님 앞에서 옷을 입고 죽은 듯이 얌전히 앉아 있다.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에게 고하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보고 있는 눈의 종류가 둘로 갈리었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자기 눈으로 보고 판단한 쪽은 ‘어디서 무당 짓거리하며 마을을 혼잡하게 하는 거야. 썩 꺼져라’하는 마음으로 주께 떠나시기를 구했고, 예수님만 향하는 눈이 떠진 그 광인은 그분과 함께 있기를 간구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양쪽 모두를 떠나셨다. 그러나 한쪽에는 예수님이 미리 입히신 옷이 함께 있었다.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막5:19) 돌아가! 괜찮아, 돌아가!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어디에 있든지 주의 동행이 드러난다.

이 세상이 어느 정도로 어두운지, 어느 정도로 더러운지, 왜 주께서 더 이상 이곳을 두고 보지 않으시고 그분의 불같은 분노를 쏟으실 준비를 마치셨는지,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열심히 너의 궤계를 보이거라, 악령아!!

이기려고 한 적이 없는데, 이기려고 애쓰고 있다. 마치 화내려고 한 적이 없는데, 화내고 있는 꼴이다. 내가 나를 알 리가 없으면서도 자신을 아는 척하느라, 인간은 이유도 모르고 화내고 분노한다. 무엇을 하든지, 결국은 자신을 향한 열심으로, 동이 트고 눈을 뜨기 바쁘게 파이팅한다. 햇빛과 공기를 주셔서, 다시 하루를 살려주신 분의 뜻을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 유익을 주지 않는다.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 육이 아닌, 성령의 침노는 마침내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가 아님을 친히 규정하는 성령이 마음속, 주인 자리에 앉으신다. 내 맘대로 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율법이 눈앞에만 머무르고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나만 있었는데,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어떤 분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분명히 알리셨던 율법 자체가 되셔서, 하나님의 법을 유일하게 알리셨던 바로 그곳으로 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왜 굳이 이 세상에 오셔야 했지? 그것도 뭔가 어마어마한 어떤 모습도 아니고, 동질처럼 보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고 자기 백성에게 고작 ‘죄’ 있음을 알리시려고, 그 엄청난 방문을 하셨단 말인가?

고작, “너희를 죄 없다고 핑계 못 하게 만들어 줄게” 이거 주시려고? 내가 유대인이라도 그런 사람이 메시아라고 하면, 정말 화가 났을 일이다. 도대체 인간을 뭘로 보고, 우리를 고자, 병신쯤으로 보시나? 그냥 위에서 율법 주시고, 지키라고 하시면 최선을 다해 지킬 거고, 우리도 죄를 그닥 좋아하는 심성은 아니어서, 시키면 자원하여 지킬 준비가 되어있다고요!

이 정도로 유대인은, 그리고 세상 인간은 죄에 무지했다. 죄에 바짝 눌려 있다. 죄를 모르니 큰소리쳤다. 주님은 죄가 뭔지를 알려주시러 오신 것이, ‘고작’이 아니라, 전부를 걸어도 받을 수 없는 것임을 알려주셨다. “오지 않았더라면”이 “이 땅에 오심”으로 바뀜으로 말미암아, 그것도 인간을 철저히 무시하고 배제하시는 모습,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뜻이 아들 안에서 펼쳐지게 하셨다.

떴던 눈은 감겨야 하고, 새롭게 창조된 눈이 뜨이는 기적은 예수님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담 안에 모든 자들에게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악령 들린 죄인으로 드러날 수 있는 자비도 없는 것이다.

호프(Hope)라는 영화에서 진짜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싸움인데, 인간들이 본다고 생각하며 어쭙잖게 외계인을 자기들의 원수로 단정하고 공격하고, 마치 자기들이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외계인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거창한 해석을 하면서 깐족거리고 있는 내용이다. 그 모습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일이었고, 그들이 알지 못했던 차원의 싸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원수가 되는 것을 드러내실 언약이 벌이는 싸움의 담당자는 인자, 그분의 일이셨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율법을 알았던 이스라엘이 실상은 이미 죽은 모습으로, 그들 안에 죄가 살아나서 철저히 죄를 표현하는 무늬로 파이팅했다. 아버지의 말씀을, 그분의 뜻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이루어드린 것은 인자, 예수님의 피였다.

피에서 피로의 여정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종결된다. 그곳에서 저주와 복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공간, 아브라함의 품, 예수 안이 하늘에서 이루어졌기에 땅에도 그림자를 드리우셨다. 세상이 아무리 분주하고 어지럽고 난리법석인 듯 보여도, 실재는 참으로 가볍고 심플하시다.

저주 아니면 복! 이제 남은 건, 예수 안에서 최종,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갈라진 출애굽의 홍해 사건의 재현이다. 갈라졌기에 건너는 것이 아니라, 갈라졌기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수 없다. 저주가 복으로, 복이 저주로 건너갈 수 없다. 갈라짐 자체를 당하고 넘어온 자들 안에서는 새 노래가 흘러나오고, 갈라짐을 겪지 못한 자들은 수장되면서 비명이 흘러나온다.

저주와 복의 기준이 되시는 정보가 성령으로 임하실 때, 이 세상에 속할 수 없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 사람의 육체에 임할 때, 육체는 뭘 하거나 무슨 증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찢긴다. 육체를 터치고 뭔가가 출산 되듯 쏟아진다. 어여쁜 아기가 응애 하며 손짓발짓하는 모습이 아니라, 피투성이 그대로, 죄 덩어리가 펄펄 살아 심장이 역동하듯이 움직인다.

이미 십자가의 칼날이 세상과 연결된 탯줄을 잘라내셨지만, 관성적으로 마치 아직도 세상과 연결된 듯 움직인다. 이 세상은 악령의 세상이다. 쎄다. 이길 자가 없다. 그러니 세상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몸은, 보이는 세상에서는 잉태치 못한 모습으로 있다. 사도바울도 만약 보이는 게 다라면, 성도의 모습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해 보인다고 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죄 된 육체에서 예수님 몸의 지체들이 새롭게 만들어지도록 연결 시키는 생명의 길, 아들이 아버지께로 나와서, 아버지의 뜻으로 말미암아, 다시 아버지께로 가는 언약의 여정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길이 나타나고, 그 사이가 피로 촘촘히 인테리어되었다. 피로 덮인 그 사이에, 인간은 없다. 낄 자리가 없다.

예수님이라는 그 한 분이 다 이루신 아버지의 뜻으로 말미암는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새 언약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미 사방에 드리워졌고,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더 밝듯이, 이 땅에 머무르는 육체에서 역겨움이 더욱 판을 치고, 역한 죄가 진한 냄새를 발할수록, 죄를 밀어 올리시는 주의 기이한 사랑이, 용서의 향기가 보이지 않는 그분의 나라를 가득히 채운다.

여전히 이 땅에 있기에, 보이는 육체에 채워지는 향기는 이것이다. “싫어, 너무 싫어. 다 싫어” 주어나 목적어는 굳이 쓸 필요가 없다. 항상 인간이 싫어하며 떠나시기를 구한 분은 예수님뿐이었고, 그걸 외칠 몸들의 아우성이 도리어 주만 의로우심을 더욱 드러내는 재료가 되고 있으면 된다.

갈라짐이 없었던 부자가 지옥에 가서도 아브라함에게 감히 말이라는 것을 건다. ‘나’ 하나뿐인 부자가, 땅에서 나사로를 동질의 인간, 그것도 지질히 복 없는 인간으로 본 것처럼, 지옥에서도 여전히 그런 나사로를 본다고 착각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주세요”

참 겸손도 하다. 한 컵도 아니고 한 방울도 안 되는 손가락에 묻은 물을 간절히 원하는 마음. 죄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말하고 있느냐 이고, 손가락의 묻은 물 만큼의 죄라고 해도 나를 위해서 말한다면 지옥이 합당하다. 어느 인간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으로써 지옥에서 발 빼기를 바랄 수 있을까.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나’ 뿐인지, ‘나 아닌 나’의 동행이 있는지, 갈라짐의 문제였다.

땅에서는, 갈라짐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누구와도 다를 바 없는 나사로가, 하늘에서는 그 갈라짐이 어찌나 뚜렷한지, ‘나’와 ‘아브라함의 품 안에 나’는 원래부터 그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큰 간격이 있었다. 다만 세상에서는 본다고 여기는 존재함으로 인해, 실재가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부자는 자신을 쪼개시는 주의 사랑의 조치를 이 세상에서 미리 받지 못했다.

세상에 있을 때부터 갈라진 자들은,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말씀의 세레나데로 계속 더 깊이, 골수까지 쪼개져서, ‘나’와 ‘나 아닌 나’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진다. 쪼개진 것이, 이미 죽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느낀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분의 사랑을 감사한단 말인가. 죽은 나와 산 나는 이미 소통할 수 없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 26)

어두운 곳에 비취는 등불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샛별처럼 떠오를 때, 눈이 부셔서 점점 더 내가 보이지도 않고, 알지 못하는 나를 마음에 둘 필요도 없고, 아예 뒤돌아볼 필요도 없도록 만드신다. 악령아, 파이팅!! 너의 발악이 활개 칠수록 성령은 주의 다 이루심의 공로만 계속 드러내느라 신이 나신다. 그 현상을 표현하는 흔적들도 연동되어 덩실덩실 파동친다. 물결친다.

‘이것저것 세상 책들 제법 많이 들여다보았는데, 결국 불교나 기독교나 천주교나, 종교라는 것이 비슷한 무늬던데, 당신이 듣는 그 말씀이라는 것은 차이가 뭡니까?’

“와 보라”(요1:39, 46) 말씀의 지시는 늘 간단하다. ‘와서 보라’. 주께서 보내 주신 자 인지, 아니면 먼저를 털어내듯 털어내야 하는 건지를 파악하고 설명하는 것이 증인의 역할이 아니라, 인간이 할 일이 더 이상 없음을 외치는 역할뿐이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상세하고 장황하게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

3일 길이나 되는 그 큰 성을 단 하루 만에 쓰~윽 돌면서 심플하게 외쳤다. “니들 다 망해! 뭘 해도 소용없어~~~” 당연히 니느웨 백성들이 들을 거라는 기대는커녕, 망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전했다. 그런데 그들의 회개가 도리어 전도하는 요나를 뭉개면서, 말씀이 스스로 증거하고 계심을 다시 증거하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말씀 안에서 순환하며 하나님의 뜻만 증거된다.

그래서 그냥 심플하게 대답했다. “우리 교회든지, 지역 강의든지, 수련회든지, 그냥 한 번 와서 보라”

와서 본 자의 반응은 이러했다. ‘뭐야... 등질이네...’ 뭐 다른 데서 본 인간이나, 와서 본 인간이나 그 인간이 그 인간이네.

Bingo! 와서 보면 다 알게 된다. 진짜 교회는 옷 입은 척, 옷이 보이는 척하는 인간은 없다. 그래서 애초에 인간이 없다. 그냥 다 같이 얼레리꼴레리 하는 등질뿐이다. 그래서 복음 안에서는 서로 간에 놀림도, 비난도, 그리고 자랑도 성립되지 않는다. 다 벗은 몸으로 주 앞에 섰는데, 누가 누구를 부끄럽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5) 주님 안 보고, 존재로 서로를 보고 판단하니, 그 부끄러움이 두려움을, 분노를, 짜증을 유발할 뿐이다.

옷 자체이신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려주는 말씀의 발치로 기어들어 감을 당한 자는 다만 이런 소리를 낸다.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3:9) 당신이 알려주신 죄, 그 죄로 가득한 죄인이오니, 당신의 긍휼의 옷으로 덮으소서. 당신만이 이 역겨운 땅인 육체를 무르실지에 대한 권한이 있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시지 않았더라면, 아기 예수가 처녀의 잉태함으로 이 땅에 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인데, 이 땅에서 벌어진 어린양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부활 생명이 찾아오셔서 죄를 핑계치 못하게 만들어 주시고, 예수님 죽으심의 피로 발라주시고, 그렇게 함께 죽게 해주셨다. “너희 죄를 핑계치 못하겠지? 이 죄인아, 갈라져! 죽자!” ‘고작’이 아니라, ‘전부’가 맞다. 참으로 십자가 외에는 모든 것이 배설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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