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도 못하고 좋아할 수 있을까? 이유가 없는데 사랑할 수 있을까? 알지 못하니까 좋아하고 이유가 없는데 생겨 난 그것, 그것이 사랑이었다.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 정확히 말하면 자기 안에서 자체 의미 제작이 시작되는 순간, 사랑의 관계는 끝이 난다. 마음에서 이미 헤어졌기에, 그제야 좋아하거나 사랑했던 이유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어느새 사랑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던 내가 스물스물 모습을 드러내고, 내가 찾아내는 수많은 사랑의 이유가 하나로 수렴된다. ‘나만 있고, 나는 나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신을 포함한 모든 타인은 타이밍을 기다리는 미움의 대상 후보이다. 이것을 사도행전 8장(23절)에서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되었다고 말씀하신다.
한때, 딸과 교회를 다닐 때, 그 어린아이는 나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있었던 거 같다. ‘엄마, 하나님은 왜 이렇게 돈을 좋아해요?’ 뭐라 답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종교적 의미가 덕지덕지 뭍은 뭔가를 뱉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마술사 시몬 또한 나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자이다. 이 세상에서 돈보다 중한 것이 뭔디? 뭣이 중헌디? ‘사도 당신들의 권능을 나도 행할 수 있으려면...얼마면 돼? 얼마면 되는데?’ 딸도 마술사 시몬도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돈을 좋아하는 하나님조차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제는 여기 계시지 않는, 이곳에 오셔서 죽으신 하나님을 안다는 경건한 척, 사람인 척하는 옛 나가 의심당하고 추궁당한다. 옛사람으로 말미암아 핍박받으신 분의 영이 핍박자의 마음 안에 다시 찾아와 박히시면, 옛사람은 새로운 피조물로 말미암아 계속 미움을 받고 구박받는 것이 마땅해진다.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칭찬하신 말씀이 참되다. 마귀 들린 시몬의 악독을 포착한 말씀이 시료처럼 육을 뚫고 들어와 비파괴검사를 시작한다. ‘딱 걸렸어!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라도 사고 싶을 정도로 너는 너만 사랑하고 있음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또는 ‘돈 주고라도 사고 싶을 만큼 성령이 귀한 선물인 것을 아는 시몬만도 못하다. 생물도 아닌 주제에, 죄짓지 않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네 안에 악독이 가득하다’라는 검사 결과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줄줄이 출력된다.
영생을 원하는 부자 관원에게 예수님은 친절하게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네가 어릴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켰는데, 여전히 부족한 게 있어.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줘버리고, 그다음에 나를 따르면 된다” 여전히 살 희망이 남은 채로 영생을 원하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절망을 담을 빈공간을 요청하셨다. 네가 네 소유를 스스로 없앨 수 있느냐를 물으셨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 마음 안에 정립되지 못하고, 슬퍼하며 스스로 정리하고 돌아갔다.
나는 오직 나를 위한 용도로만 쓰이고 있는 갇힌 마음 안으로 십자가가 꽂혀야만 생기는 구멍, 이 바늘구멍을 사람이 스스로 통과할 수 있는지를 새로운 피조물이 추궁한다.
선지 생도의 아내가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되었을 때, 그녀는 스스로 버린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친히, 남편을 없애주고, 돈을 없애주고, 이제는 두 아이를 없이 하고자 하실 때, 그제야 삶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절감하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쪽으로 방향을 튼다. 엘리사는 과부에게 아직도 무엇이 남아있는지를 물었고, 과부는 ‘아무것도 없나이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한 병 기름 ‘외에는’이라고 먼저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절망이 도리어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바늘구멍으로 낙타가 들어가는 것보다 더 기적 같은 일이 과부의 마음속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리할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은 채로 복음 안에 정립됨을 당하는 일. 아직 스스로 정리할 여력이 남은 ‘아는 자들’은 이미 십자가에 정과 욕심이 못 박힌 채 정립된 ‘알지 못하는 자들’의 세계에 합류될 수 없다.
지하철역에 한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한 여자가 소리를 지른다. ‘여기 여자 화장실이에요. 빨리 나가세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거 같다. 미친놈이 뭔 짓을 하려고 들어왔나? 그런데 상대가 더 큰소리로 역정을 내며 고함을 친다. ‘나, 여자라고!!!!’ 뒤따르는 육두문자는 마침표를 잃었다. 그런데 외모로 판단하고 오해했던 여자의 반응이 예상 밖에였다. ‘많이 언짢으셨죠. 죄송해요. 남자인 줄 알았어요...’ 너무도 차분하고 공손한 대답에 상대가 도리어 뻘쭘해져서 잠잠히 화장실 밖으로 나간다. Cut! Fade Out!
이 일은 대다수의 무리에게 그냥 그저 그런 화장실 사건으로 정리되지만, 어떤 무리에게는 십자가 복음 안에 자신이 정립되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표적과 세상이 원하는 기적은 같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이적을 볼지라도, 그것이 내 마음 안에서 차곡차곡 정리되면 나는 여전히 괜찮음이 유지되기에, 그저 그런 화장실 사건의 하나가 될 뿐이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바다의 기적을 보고도, 어린양의 피 안에 자신들이 정립되지 못했기에, 광야에서 원망이 터져 나오는 현상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경중에 상관없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십자가로 정립되면, 그 하나하나가 놀랍고 떨리는 표적이 된다.
왜 그곳에 있는지 자신도 알지 못한 채로, 뚜벅뚜벅 사막을 걷고 있던 한 남자가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고위 간부에게 다가갔다. 그는 마침 이사야서를 펼치고 있다. 다가선 남자가 묻는다. ‘그거 이해하니?’ 지식과 지혜를 겸비한 한 나라의 고위 관리에게 무척 무례하고 주제넘게 들릴 수도 있는 그 질문에, 내시는 놀라운 대답을 한다. ‘몰라’
빌립이 이사야 말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를 전할 때, 내시의 입에 말이 기이하다. “내가 세례를 받음에 주저할 게 없다”(행8:36) 내가 이제야 예수님과 십자가를 알았으니, 이제 나도 이 복음을 전해야겠고 하는 것이 더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인데, 내시는 자신이 이미 죽었음을 받아들이는 행동에 주저함이 없다. 단순히 화장실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이 갈라지고 그의 육은 십자가로 정립되는 사건이 된다.
성령께서 친히 전하시는 복음의 증상은 ‘안다’가 아니라 ‘너는 죽었고’였다. 살아서 깨달아 알고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과 죄와 죽음이 있다. 그러나 금지를 품고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죽음 안에는 하나님도, 죄도, 그리고 죽음도 없다. 즉, 예수 안에는 사람이 없다. ‘나’가 없다. 오직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다시 살아나신 생명이,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십자가 안으로 빨아들이신다.
분명히 나는 화장실 사건을 들었는데, 그 사건이 내 마음 안에서 말씀 사건을 일으킨다. ‘여기 들어 오시면 안 돼요. 성도도 아니면서 복음은 왜 기웃거리십니까?’라고 태클이 걸릴 때, 난데없는 분노감이 올라오는 이유를 알 길이 없다. 나조차도 나를 성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씀을 들을수록 듣고 있는 이 복음과 상관이 없는 자인 것이 분명해지는데, ‘나, 성도라고!!!!!!’라는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안에 속마음이 튀어나오는 이 증상.
여자인데 여자 아니라고 오해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고, 성도인데 성도 아니라고 말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 자기를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고, 역할로 하는 연기를 실제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정리하고 사건을 비켜나서 버려둠을 당하는 것이 마땅한데, 상대가 도리어 잠잠하고 차분한 침묵으로 이미 죽어있음을 그래서 아무것도 알지 못함을 비칠 때, 나라는 허상은 말할 수 없는 뻘쭘함(틈이 벌어지거나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고 어색한 태도를 뜻함)을 느끼며, 사건 안에 정립된다.
누가 누구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규정할 일이 아니라, 핍박받은 분은 한 분 뿐이고, 모두들 핍박자의 자리에서 연기를 펼치게 된다. 분노 섞인 반응에 상대가 더 치열하게 반발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그 틈에서, 피의 해석이 나온다. 한 분의 죽음 활동에서만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인내가 넘치도록 쏟아져 나온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어서 지옥 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세상으로 보내서, 자기 가족들에게 이 모든 진실을 알게 해달라고. 죽은 자가 저희에게 다시 가는 기적을 보면, 자기 가족들이 믿을 거라는 이 믿음이 부자가 지옥에 간 믿음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그 믿음이 지옥에 가는 믿음이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기적을 보고 믿게 되는 믿음이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믿어지게 되는 믿음, 종말이 임박했고 그리스도가 여기에 저기에 있다는 말에 요동하지 않는 믿음, 이미 죽으신 하나님이 다시 사셔서 가지고 오신 죽음의 징표 안에 정립된 믿음이 예수님께서 보고 계신 믿음이고, 주의 날에 구원될 믿음이다.
이 믿음의 침노를 받고 지시대로 움직이는 육체는, 갈라짐의 사건을 만드실 주님의 지팡이로 주께서 원하실 때까지 쓰일 것이다. 지팡이라고 다 같은 지팡이가 아니요, 오직 예수님의 다 이루심의 싹이 나고 꽃을 피워 열매가 맺히는 지팡이가 언약궤에 연결된 주님의 지팡이이다.
성도의 교제 안에서는 관계의 끊어짐은 없고, 열리고 닫히고만 있다. 임의로 부는 성령의 바람이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는 쪽으로 주께서 공급하시는 힘이 흘러가는 현상들이 서로 통용될 뿐, 사람 대 사람끼리의 관계 유지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령의 바람이 방향을 바꾸시매, 사람의 관계에 어떠함에 이유를 찾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께서 열어 주셨기에 지금껏 나눌 수 있었던 은혜의 순간들을 감사하면 된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그냥 버려두고 지나치는 것이 당연한 건데, 무생물 같은 죽은 육신의 문을 열어서 주의 일하시는 공간으로 써주시는 그 자체가 참으로 놀랍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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