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전지적 관점

아빠와 함께 2026. 7. 4. 17:47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다.(요한일서4:21) 그리고 보이는 손을 넘겨주어 악수해도, 보이지 않는 손이 미리 넘어오지 않았다면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이기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둘이 하나가 될 수 없고, 하나가 아니라면, 그 어떤 언어로 표현된 들 모든 말이 사랑 없는 거짓이다. 사랑 없는 모든 말은 나를 지키고자 하는 두려움을 유발하기에, 살인과 악독과 미움과 저주가 올라온다.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와 잠시 하나가 되는 사건 안에서 선행된 것은 담보물이다. 다말이 자신을 창녀로 내어놓도록 만든 것은 유다가 넘긴 담보물이 아니라, 언약의 통로로 사용되는 유다가 무너지도록 만들 증거, 언약으로 말미암아 유다라는 자아가 조각나야 하는 증거, 그것을 며느리 다말은 유다에게 넘겨받고서야 기꺼이 자신의 몸을 창녀처럼 던졌다. 실상은 자신의 목숨을 불 속에 던졌다.(창38:24)

언약이 빠진 채로 성경을 눈으로 본 자들에게, 다말은 시아버지를 속였고, 거짓으로 위장했고, 몸을 함부로 굴려서 시아버지를 엿 먹이려고 작정한 나쁜 여자이다. 이런 일은 요즘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 놀랄 일도 아닌 에피소드이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코웃음을 칠 지도 모르겠다. 성경은 눈으로 보고 읽을 수는 있지만, 내가 성경에 박힐 수는 없다. 성경에 자신이 못 박히듯 박힌 자들은 더 이상 성경을 읽는 자가 아니다.

언약의 못으로 말씀에 박혀버린 다말은 유다 집안의 언약이 계속 흘러가도록 사용되는, 사람의 눈에는 더러운 모습인 창녀였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깨끗함, 거룩이 통과하는 몸짓이 된다. 무엇을 했느냐, 무슨 일을 당했느냐, 무슨 말을 했느냐, 무슨 말을 들었느냐, 무슨 생각을 했느냐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그저 ‘어디에 있느냐’로 말미암아 확정된다. 용서하심이 있는 공간에는 모든 것이 가볍고 자유로운 것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아지는 것을 믿는 믿음이 모든 행위를 회수해 가기 때문이다.

개울물이 흐르다가 앞에 바위를 만나면, 물살이 갈라지긴 해도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약속의 세계에서 또한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온통 꽉 막힌 벽이 있다고 해도, 틈을 생성시키는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계속 흐른다. 속도가 더뎌지는 것은 멈춘 것과 같지 않다. 흐름을 훼방하는 것이 핍박과 거짓과 악독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복음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배려와 친절과 사람답고 싶어 하는 양심이었다.

‘넘어질 거 같은데, 부축해 드릴까요? 무거워 보이는데 들어드릴까요? 차가 흔들리면 주스 마시기가 힘들텐데 잠깐 멈춰드릴까요?’ 성도가 서고 넘어짐이 그 주인의 손에 달렸다는 말씀의 일을(롬14:4) 사람의 선행이 가리게 되는 것이다. 투기와 분쟁으로 하든, 착한 뜻으로든, 죄인이 어느 쪽 역할을 하든 아무 문젯거리가 아니되, 전파되고 흐르고 있는 말씀, 말씀의 주인공인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소식들이(빌1:18) 말씀 안에 있는 자들을 서로 그리워하게 하고, 위로하신다.

복음의 소리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며 흐르고 있는 물방울들은 그저 밀리는 흐름을 타고 흘러가기에 물개처럼 수영을 잘하는 조오련보다 수영을 더 잘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물속에 있으되, 스스로 수영하지 않는다. 말씀의 전지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은 세상 이치를 꿰뚫고 명석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명철가를 일컬음이 아니었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며느리 다말이 세상의 막장 소설에 등장하는 팜므파탈 여주인공과 같은 그저 그런 부류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모든 것의 결국을 미리 보여주신 분의 관점이 지배하는 공간에 들어와 있다면, 이미 모든 것을 알 수밖에 없고, 그 공간 안에서는 멈춤이 없다. 하루하루 살리시는 능력에 이끌려서 이미 끝장난 그곳에 도달해 있다. 그렇기에 자리에 서서 멈춘 채로 흐르는 자를 판단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 된다. 흐르고 있기에 판단이 일어나지도, 어떤 판단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단지 세상에 속한 육안에, ‘나’를 나로 멈춰 세워 사태를 파악하도록 만드는 마귀의 희롱과 농락이 있다.(창21:9)

전쟁터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 있다. 칼에도, 총알에도, 폭탄에도 죽을 수 있다. 핍박받는다고 해서, 죽는다고 해서, 이런저런 현상을 다 복음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억지이다. 하지만, 언약의 통로로 쓰이는 다윗조차 혼동한 우리야의 죽음은 아무 화살이나 아무 칼이 아니었고, 전장에서 누구나 죽는 죽음이 아니었다.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삼하11:25) 그 칼은 결과적으로 다윗이 휘두른 칼이었고 다윗이 죽인 우리야 장군의 죽음은 언약궤로 말미암아, 언약궤가 있는 그곳에서 피 흘린 죽음이었다.

세상에서 허다하게 일어나는 살인과 죽음 사건 중 하나가 아닌 이유는, 다윗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나게 해 주시고, 죄인으로 드러내시는 능력이 다른 공간에서 왔고, 그 능력이 임한 자들은 이미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다른 공간에 옮겨진 것이다. 선지자가 담고 온 말씀으로 다윗이 어느 공간에 놓여 있는지를 다시 확인받을 때, 다윗은 뼛조각으로, 언약의 일부분으로 환원되어, 그리스도 죽음의 근원을 드러내야 하는 죄인 됨을 고백한다.

자신이 죄인임을 밝혀주시는 말씀 앞에, 마귀의 정죄에 빠져서 투정(왕상17:18)이나 겸손과 경외함(눅5:8)으로 떠나시기를 구할 것이 아니었다. 다윗의 고백처럼 즐거워하고 감사함으로 말씀을 마중 나가는 모습이(시51), 암에 걸린 자에게서, 혹은 출세해서 장관이 되거나 대기업 사장이 된 자에게서 펼쳐진다면, 누구나 암에 걸릴 수 있고 다 같은 아픈 자인데 이미 다른 공간이고, 다 같은 출세한 자인데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주님의 잃어버린 뼛조각들이 주의 몸으로 발견되는 증거를 목격하고 전해주는 자들의 기쁨, 사람이 느끼는 기쁨이 아닌 몸의 주인이 느끼는 기쁨에 잠시 잠시 공유될 때, 이 지옥 같은 뜨거운 광야 세상을 지나가다가 만난 오아시스에서, 햇빛과 공기를 주신 분이 키우신 박넝쿨이 주는 그늘 아래서 잠시 쉼을 얻게 된다. 그곳이 좋다고 계속 머무를 수 없는 이유는 몸의 주인이 계속 움직이시기에 흘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자칫 머무르려는 시도가 있으면 속히 벌레와 바람을 보내실 것이다.(요나4:7~8)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이 나와야 할 곳에서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는 차원이 다른 말씀이, 주의 의로우심과 순전하심을 향한 찬양이 나와버릴 때, 자기 처지를 한탄하고 있는 자들의 입이 저절로 닫히게 된다.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감사를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자신의 마음보다 앞서 자리 잡으신 새 마음이 묵은 마음을 찢고 나오는 보이지 않는 복음이 진짜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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