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제사장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들을 출산 하고 죽으면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삼상4장) “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그녀의 죽음 뒤에는 “이가봇”을 대신할 다른 이름이 없었다. 라헬의 출산이 가져온 죽음 또한 외모상 달라 보이지 않았다. “베노니”(슬픔의 아들). 그러나 라헬이 죽는 해산 현장에는 라헬도 모르는 대신할 이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냐민”(오른손의 아들)
멸망이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처럼 이르는 것같이(살전5:3), 구원이 여자의 해산함으로 말미암아 이른다. 한쪽은 여전히 나와 육이 하나이고, 나의 이름으로 믿는 믿음도 그대로 있다. 그리고 육은 육이니 그냥 지옥으로 퇴장한다.
다른 하나는 해산으로 말미암아 주의 완성된 언약의 뜻대로 이루어진 분리이다. 약속하신 이름으로 말미암아 죽고, 여자와 태의 열매가 분리되듯이 나의 믿음이 육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미 죽었기에 믿을 수 없는 믿음이 되고, 더 이상 내가 나를 단속할 수 없어진다. 마음껏 육의 더러움을 털리는 낯선 믿음의 움직임에 말려든 것이고, 이제껏 주인 행세하던 마귀가 이제는 지체 안에 잔존 하는 죽은 믿음을 터는 털이기로 주께 이용당한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5)
긍휼을 베푸셨던 은혜의 출처, 언약궤가 이스라엘을 떠났다.(사무엘상 4장) 피 없이는 제사장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언약궤를 감히 이스라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전쟁터로 가지고 갔다. 이스라엘이 알듯이 블레셋 또한 애굽을 만신창이로 만든 언약궤의 신을 알고 있었고, 오히려 이스라엘은 언약궤의 은혜 앞에 교만했으나, 블레셋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서 이겼고, 언약궤는 빼앗겼다.
그러나 블레셋이 언약궤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먼저 버렸고, 언약궤가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듯 이스라엘을 떠났다. 언약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줘야 할 이스라엘의 죽은 믿음을 털어내려고 언약궤가 블레셋을 이용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오는 걸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왔다고 기뻐했지만, 그들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언약궤 안에 담긴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주의 영광을 자세히 보고자 하여 언약궤 안을 들여다보다가 죽었다. 시체가 시체 값했다.
이스라엘도 블레셋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언약궤를 몰랐고 율법도 몰랐던 그들의 믿음 없음을 언약궤가 친히 들춰내셨다. 언약궤를 담은 공간이 이스라엘에 나셨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외모를 한 예수님을 임의로 대우했고, 들여다보면 안 되는 그것, 그분의 내부를 마치 언약궤 뚜껑을 열어보듯이 파헤쳤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27:40) 광야에서 예수님을 상대로 시험하던 마귀의 모습이(마4:3) 바로 십자가 앞에 소위 인간,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분의 몸 안에서 쏟아진 피가 누구의 죄와 누구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인지 알지 못하기에, 마음껏 무시했고, 마음껏 조롱했고, 마음껏 곡해했다. 피는 인간의 믿음 없음의 극치, 나의 믿음이 ‘0’이 되는 지점을 생성시킨다. 피가 생성한 공간에 있는 자들 또한 영문도 모르고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을 겪어야 한다. ‘네가 만약 예수님의 성도거든, 십자가를 믿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보이라. 테레사 수녀나 이태석 신부만큼은 못 되더라도, 믿는 자가 보여야 할 믿음의 모습이 행함으로 나타나야 하잖아’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했다는 칭송을 받은 신부와 수녀, 그리고 그런 삶을 지향하는 세상에 푹 잠겨있는 나라는 육, 너라는 육, 이미 뚜껑이 열린 언약궤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판 앞에서, 인간의 선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미쳐 날뛰는 발악이고, 나를 두렵게 만드는 예수 너는 죽어 마땅한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상대한 건 오직 마귀뿐이었다. 사람 모습을 한 마귀가 바로 육 이었다.
십자가가 발생시키는 이웃, 피로 인하여 육이 철저히 육임을 발각당하는 이웃을 만났는데, 복음의 증인을 만난 기쁨으로 예수님 앞에 세례요한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지 못하고, 왜 믿음 없는 모습과 복음의 상충 됨에 도리어 불편해지는가. 자신의 믿음과 의로움이 손상되면서, 자기 속에 숨겨진 자신도 모르는 두려움이 들춰질 때, 너무도 당당한 두려움 없는 믿음, 살아있는 믿음은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 철저히 지식을, 그리고 지혜를 이용하는 마귀의 정체가 육을 통해 털리는 증상이고, 이 증상이 속에서 올라오는 이유를 말씀으로 샅샅이 조사받고 발각당하는 것이 오히려 기쁜 상태를 무시로 감사함이라고 한다.
십자가 사건이 만들어내는 말씀에 먹힌 자들은 대꾸할 말이 없다. ‘자존심이 없어서, 할 말이 없어서, 내가 없어서’라는 말은 무색하다. 오히려 하나만 있어서이다. 피. 자신이 흘려야 할 피가 어떤 낯선 분의 몸에서 대신 흘러내리고 있을 때, ‘나를 대신해서 죽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셨구나’라는 지저분한 인간적, 마귀적인 생각은 차단된다.
‘찾으러 오신 보물, 아버지와만 함께 나누시는 소중한 보물, 그걸 기억하시고 찾으러 오셨군요’
있지도 않은 자기 의미를 찾으려고 평생 육체 안을 열심히 곡괭이질 하며 허송세월할 뿐인데, 철커덕! 뭔가가 속에서 걸렸다.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라는 말씀이 안으로 들어와 합치되는 보물이 발견되었다.
알고 보니, 내가 보물에게 발견 당한 것이고, 그 십자가 보물에 붙잡혀서 내 모든 것이 팔리게 되는 주님이 벌이시는 사건의 시작점이었다. 마치 요셉이 자기 것을 스스로 처분하지 않고, 꿈이 먼저 요셉 자체를 죄에게 종으로 팔아버린 것처럼, 내가 내 것을 주장하지 못하는 종의 모습으로 팔아버리신다.
회개는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찾아와서 발견해 주시는 것이었다...
수거 작업을 위해 찾아오신 주께서, 언약궤 같은 그분의 몸 안을 보게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죽은 시체인 인간의 몸을 그분의 부활체 안에 넣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 삽입구는 마귀의 인질이었던 육이 예수님의 몸에 만들어낸 상처이다. 주께서는 이렇게 지옥을 가야 하는 이유 쪽으로, 반드시 죽으리라는 저주 쪽으로 자기 보물이 담긴 육체들을 끌어들이신다.
어느 인간도 예수님의 허락이 없이는,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고, 선 좀 넘지 말고, 그렇게 점잖게 그냥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 된다. 형편대로 헌금도 좀 하면서 염치도 챙기고, 그렇게 적당히 듣고 이해가 가든 안 가든 그냥 순조롭게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말씀을 듣는 것만 하면 된다. 왜 쓸데없는 열정을 발휘해서 복음이 나오는 출처를 알고자 인자에게 접근하고, 언약궤 뚜껑을 열려고 시도하는가. 죽으려고, 지옥 가려고 환장한 것인지, 아니면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끌려가고 있는지.
말씀을 알아버리는 행위는 말씀에 잡아먹힘으로 종결된다. 아무리 말씀을 알아듣고, 주의 지시대로 예언했을지언정, 십자가로 말미암는 그리스도 안에 먹히지 않고서야, 온 힘을 다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발람의 어그러진 행위가 종착점이다. ‘내가 이스라엘의 언약을 아는데, 그거는 이런 뜻이야. 저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깝죽대도 그들을 망하게 할 수 있어. 내가 그들을 알고 그들의 율법을 알거든’
마귀는 예수님의 사랑 빼고는 다 안다. 발람의 한계는 율법까지이다. 율법을 다 이루신 분의 ‘피’로는 접근 불가이다.
차라리 모르게 하시는 것이, 차라리 이삭처럼 눈먼 것이, 차라리 욥처럼 입이 막히는 것이, 차라리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가 복이다. 오직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주의 이름에 먹힌 자만이 입을 열게 하신다. “안다. 나도 안다” ‘일이 이상하게 망쳐지고 어긋나는 거 같지만, 지금 주의 이름이 일하심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단다. 우리는 모두 털리고 팔리는 것에 감사하면 된다’
내 마음도, 내 생각도, 내 믿음(기대, 예상, 희망)도, 모두 세상에 팔리고, 주의 보물 하나만 남게 하신다. 주께서 원하시는 그 하나만 남는 과정에서 필히, 육은 육이어야 한다. 육이라는 것이 참 요상해서, 비워진 듯하면 누가 보내셨는지, 열두 귀신 몰려와서 상상으로 환상으로 생각으로 다시 괜찮은 나를 만들어주느라 열심을 부린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감사가 흘러나오는지, ‘졸졸졸’ 때문에, ‘줄줄줄’ 감사가 새 나온다. 따라가는지, 흘러가는지, 밀려가는지를 생각하지 말자. 졸졸졸 따라가지는 현상은 세상 등신도 그런 등신이 없고,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다.
진짜 사랑을 아시는 예수님은 진짜 미움이 뭔지도 알고 계시고, 그분의 사랑을 통과시킨 통로들은 그분의 미움과 증오도 걸러내지 않고 통과시킨다. 미워하지 말아야 할 분, 예수님을 죽도록 미워했다는 것을 털린 자들은, 세상의 조롱과 미움에 죽도록 감사할 수 있다. 애초에 우리는 사랑받을 대상도 아니었고, 그래서 진짜 미움이 뭔지도 알 수 없는 자였다.
그러나 미움받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면, 사랑은 그보다 앞서서 미리 받은 것이다. 그런 자들은 사랑을 값없이 그리고 이유 없이 받았기에, 미움 또한 값없이 그리고 이유 없이 받는 것이 당연해지는 틈, 그 틈새에 집중한다.
틈에서 쏟아지는 지시대로 모든 것을 하는 움직임이 남는다. 말씀이 말씀답게 재현되도록, 가인도, 발람도, 사울도 될 수 있고, 뭔 짓거리해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해서 죽은 유다의 장자, 엘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씨가 자기의 소유가 되지 못하기에 율법을 어기는 둘째 아들 오난도 될 수도 있고, 가족을 하나님의 율법보다 사랑한 유다도 될 수 있으며, 영문도 모르고 율법의 집안에 말려들어 시아버지와 행음 해야 하는 다말도 될 수 있다.
무엇을 해도 육이 육 되는 결과가 되게, 모든 죄가 합력하여 주의 이름의 선하심만을 드러내도록 말씀이 시키시는 그곳, 그 틈새에서, 믿음이 만들어낸 행함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다. 거기서. ‘누가 뭘 했고, 어떻고, 저떻고...’라는 판단이 아니라, 최종으로 누가 옳은지를 고백하게 이끄시는 능력이 작동한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옳으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창28:26)
복음이 흘러나온다는 드라마가 시선을 붙잡았다. 드라마상에서 연기자로 나오는 한 엄마와 친딸이 아닌, 연기 생활을 하다가 만나 자기 딸로 삼은 수양딸과의 대화가 인상 깊었다. “엄마에게 인정받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드라마 찍었는데...연기같이 안 보일 정도로 진짜 했는데...진심으로 했는데!! 왜 내가 나온 드라마를 안 보세요!!” 듣고 있던 엄마의 대답이 복음이었다. “누가 진짜 하래? 진짜인 척 연기하랬지. 내 진짜 딸은 너희가 꿈도 못 꿀 정도로 근사해”
하나님은 내 진짜 아들, 정말 근사한 진짜 아들 예수님의 들러리만 하라고, 애쓰지 말라고 하시는데, 마귀는 항상 속삭인다. “진심으로 해야지. 연기처럼 안 보일 정도로 진짜 해야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미 다 끝내 놓으시고 말씀하신다.
“내 짐은 정말 가벼운 짐이야. 힘이 하나도 안 들 정도로 가벼운 짐. 짊어지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쉬워야 하는데, 무거워? 십자가는 어디에 버려두고 열두 귀신 짊어지고 다니느냐, 이 등신아!”
예수님의 책망 소리가 ‘이제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마, 캔디! 힘들 때, 더욱더 하나님 품을 향해 달려야지, 하늬!’라고 외쳐대는 마귀의 소리를 이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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