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마음의 문둥병

아빠와 함께 2026. 4. 22. 11:32

보이는 귀가 아니라, 들리지 않는 소리를 담아 놓는 마음의 귀에서 스스로 소리가 울려 입을 통해 발화는 것은, 말했다고 표현하지 않고 지시대로 행했다고 표현한다. 분명 귀신 들려서 말씀에 귀먹었고, 말씀이 한 자도 나오지 않는 수다스러운 벙어리가 분명한데, 무슨 영문인지 귀로 더듬어 그리스도의 영이 전하는 증거를 감지한다.(요5:39, 벧전1:10~11) 보는 줄 알았는데, 더듬고 있는 소경이었고, 성경이 글자로 빼곡히 적힌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지였다.

본다고 생각했던 것이, 소경이 자신의 자리에서 부분만 더듬고 있었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안다가 모른다로 바뀌는 순간을 기뻐하게 된다면, 이제 거울을 통해 첫 아담이 첫 아담인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아담이 첫 아담을 다루어 주시기에 벌어지는 확연한 차이, 차이가 모든 것을 밝히 규명해 주시기 때문이다. 빛이 아니고 어둠이라고, 주를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향한 핍박이라고, 주의 뜻이 아니라 너의 뜻이라고, 이렇게 항상 말씀 앞에서 어긋맞게 하시는 낯선 사건에 슬퍼도 행복한, 아파도 기쁜 증상을 발한다. 이제는 귀와 눈과 입을 지으신 분이 값 주고 사신 몸 안에 함께 거하시며, 친히 들으시고 보시고 말하신다.(시94:9)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육은 하나님의 생각과 원수가 되고, 이로써 육의 모든 일은 “사랑이 없으면”(고전13:2)을 동반한다. 그래서 육은 이를 알게 하신 한 분의 희생에 힘입어 모든 일을 행한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씀만, “네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책망이 사랑의 메시지로 계속 침투되도록, 예수님의 핏자국, 못 자국이 증거되도록 모든 일을 행한다. 썩음을 당해 마땅함을 드러내 주시려고, 썩음을 당치 않으신 예수님이, 자신의 빈 무덤으로 우리를 덮으신다. “이제 너도 나의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줄게. 나랑 함께 버림받게 해줄게” 마음의 문둥병을 고침 받은 자는 마침내 주의 고통으로 아파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위대한 장군이 문둥병에 걸렸다. 바늘로 발바닥을 찔러도, 손으로 뜨거운 물건을 만져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얼굴, 손가락 그리고 발가락이 뭉개지기 시작하자, 흙처럼 뭉개지는 육체를 감추기 위해 마스크와 장갑과 신발로 상시 몸을 감쌌다. 그런데 그의 나병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주님 계획의 일부였다.

“이는 여호와께서”(열하5:1) 나아만에게 문둥병이 있게 하셨고, 또한 그를 통해 적에게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고, 이스라엘에서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게 하셨고, 그가 아람을 구원한 위대한 장군이었기에 엘리사에게 곧바로 가지 않고, 왕궁을 경유해서 선지자에게 나아가기까지, 이 모든 경로가 오직 보이지 않는 말씀대로, 인간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율법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그려지고 있었다. 이미 쓰여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의 피가 백지에 뿌려졌기에, 세상에 밝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케 하려 함이로라”(마5:17)

대부분의 인간은 육체로는 문둥병이 아니다. 작은 자극에도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예민한 통증을 느낄 수 있고, 그런 아픔을 통해서 ‘나는 나만 생각한다’라는 자기 방어벽을 더욱더 견고히 쌓아간다. 덕분에 나는 태생 자체가 문둥병이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다. 심지어 나에게도.

주위에서 소집되고 학습되는 정보는 이미 병든 필터를 거쳐 ‘나’스러움을 견고히 해 주고, 하물며 경건한 말씀을 듣는다 해도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통증은커녕 내가 임의로 만들어낸 가짜 통증을 통해서 자체 희락의 극치를 느끼기도 한다. 영적인 감각을 느낄 눈도 코도 입도 그리고 귀까지 모두 문드러져 있다. 진짜 아픔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피에 무감각한 현실 속에서, 나의 희생에 아파하고 고통한다.

나의 아픔에서 나오는 해석이 모든 듣는 말씀을 독으로 바꾼다. 히틀러의 나치당 치하에서, 한 철학자는 언제 붙잡힐지 모를 극한의 공포 속에서 자신을 자유케 해 준 건, 주머니에 항시 있었던 독약이었다고 말한다. 평생의 모든 일이 자기 일이었고, 죽음조차도 자신의 일이 되어야 한다는 자유의지, 마귀는 이 독약으로 인간의 마음을 마비시켰다. ‘자유의지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기에 유월절 희생양, 예수님의 죽음을 거치지 못한 해석은 차라리 듣지 않은 편이 더 나은 상태를 유발한다. 육체의 문둥병을 가리듯, 영적 문둥병을 가리는 가면이 되고, 의복이 된다. 가면과 의복 제작자는 마음속에 숨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은 점점 속임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믿음은 잃으신 분이 일으키신 사건으로 말미암아, 내가 진즉에 ‘버려진’ 존재였음을 알게 되면서 등장한다. 태생부터 버려졌던 것을 몰랐기에 교만하게 내뱉어지는 말은, ‘어떻게 나를 버릴 수가 있습니까?’라는 원망과 원통이 먼저이고, 그것을 뒤따르는 뉘우침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주의 믿음이 작동하면, 그제야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지켜주겠다는 실체를 보게 되고, 주를 향해 뱉어내는 원통이 나의 것이 아니라, 지옥까지 함께 끌려갈 수 있도록 끝까지 의리를 지키려는 마귀의 발악이, 원망으로 슬픔으로 나를 통해 터져 나온 것이었다.

두 아들에게 포도원 일을 시켰을 때, “가겠소이다”하고 가지 않은 맏아들이 아니라, “싫소이다”라고 하고서 뉘우치고 갔던 둘째 아들을 통해 믿음의 일하심이 증거된다.(마21:30) 두 아들 모두 처음에는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일이 있었다. 맏아들에게는 가겠다고 한 것도, 가지 않은 것도 모두 자기 일로 끝이 나지만, 둘째 아들에게는 싫다는 자기 일이, 결국에는 시키시는 것을 하게 되는 주의 일이 되었다.

나아만 장군이 처음에는 ‘문둥병’이 자기의 문제였고 자신의 일이라 여겼고, 선지자의 반응과 자신의 기대가 어긋나며 자존심이 상해서 분을 내며, “싫소이다”라고 말했다. 자기 종들의 강권함으로 들어간 그 요단강에서, 그는 싫다, 좋다의 마음 자체가 허물 벗겨지듯 벗어지고, 그 안에서 새로운 마음이 돋아났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일이 아닌, 그 낯선 마음의 일이라는 것을 감지하며, 나아만은 자신의 마음이 버림을 당하게 하신 것에 감사한다.

잃어버릴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놓으시고 잃어버리게 만드시는 거, 있는 것을 없게 하시고 없는 그 상태에서 있게 하시는 거, 죽게 만드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거, 사랑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그 일이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신 언약의 완성이었고, 완성된 언약을 담아 아버지께 가셨기에 만들어진 자리, 예수 안을 가득 채운 영원한 약속이 아래로 다시 뿌려진다. 택하신 자들에게 약속의 세계가 담기는 순간, 더 이상 그들에게 할 것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 이미 모든 일을 끝내신 분이 담겨있다.

담김의 증상은 죄로 발각되는 사건 사건의 연속이 즐겁고 감사가 절로 나오는 현상이다. 일하시는 분의 성과만 계속 드러나고 있는데, 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한 껍질이 함께 진동하는 것이 용쓰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표현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내 마음을 내가 찢을 수 없는데, 주님 사건의 칼이 와서 잘라내 주실 때, 그렇게 해서 새로운 마음만 드러내도록 일하실 때, 그는 마침내 입을 열어 주의 일을 증거한다. ‘이제부터 제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은 약속의 땅,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겠나이다’,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왕하5:17)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왕하5:18) 나아만 안에서 미리 앞당겨 비친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의 문둥병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은 마음의 문둥병이 치유된다. 원래부터 있지도 않았던 나의 고통에 폭삭 찌들어서 진짜 아픔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는 자신을 통해 표현되는 어떤 아픔도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4~25) 주의 십자가는 십자가 사건보다 먼저 있었고 이제도 영원히 있다. 나아만도 사도바울도 십자가 사건 장소에 없었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인간의 육체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동일한 고백을 하고, 이처럼 이미 주의 마음 판이 박혀있는 성도들도 동일한 고백을 한다.

박혀있는 증상은 아무것도 꾼 적이 없는데, 늘 빚진 마음으로 작동한다. 내 것이 아닌 것이 들어와 버리면, 다시 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안절부절이 일어난다. 값없이 받은 것을 거져 주는 마음은 본래 내게 속한 것이 아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왜 왔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고, 베드로도 고넬료에게 무엇을 말해줄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오가는 연결망 안에서 ‘왜’라고 물을 필요가 없는 관계,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관계, 서로가 제 것을 주장하지 않고 서로 통용하는 현상, 고넬료는 주께서 베드로에게 명한 것을 듣고자 기다렸고,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했다.(행10:33)

성경의 말씀은 일이 끝나고 사건이 말씀으로 적히는 책이 아니라, 하얀 백지처럼 보이는 공간은 이미 말씀으로 가득 채워있었고, 창세전부터 있던 그 말씀이 때가 되매, 약속의 공간이 찾아온 성도들 안에 마치 백지처럼 담겨있던 말씀들이 피가 번져나가며 글자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온 세상을 피로 다 덮으신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온통 심판을 위해 예비된 증거들만 비치느라 지금도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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