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계약의 실효성

아빠와 함께 2025. 4. 22. 19:04

강남-사도행전 2장 38절 (계약의 실효성) 250318a-이근호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2장 37절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와 사도들이 무슨 이야기 했다고 그들이 마음이 찔렸다. 어떤 이야기 했는데 찔리느냐. 인간이 내뱉은 말 중에서 우리가 듣고 찔릴만한 그런 이야기가 있는가. 과연 그런 말이 있는가. 그것부터 우리가 생각을 한번 해봐야 합니다. 그것부터 생각하고 난 뒤에 마음이 찔렸거든요. 그래서 상담을 한 거예요. 우리가 찔렸다 어찌할꼬. 마음에 찔렸다. 거기에 대해서 연이어서 하는 말이 어찌할꼬. 어찌할꼬 에서부터 마음을 이렇게 모아보면 내 마음은 더는 내가 손대기 싫다 이런 뜻이겠죠. 내 마음을 더는 내가 손대기 싫다. 나는 내 마음을 내어놓았다. 손대기 싫으니까 내어 놓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고상한 말로 해서 처분 불가능성. 자기에 대해서 처분 불가능하다. 나에 대해서 내가 내 마음을 내 쪽으로 거두지 않겠다. 알아서 하세요. 나는 이렇게 바깥에 내 마음 보고 나가! 하고 내 마음을 나에게서 쫓아내었다. 죽이 됬든 밥이 됐든 나는 모르겠다. 이걸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나를 함부로 하소서. 인간으로서는 정말 제일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제발 나를 함부로 해주소서. 도대체 이게 사도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 했길래 그 사도의 말을 듣던 유대인들이 이런 반응을 나타내느냐. 그렇게 봐야 되지요.


보통 자식이 애먹이면 뭐라고 합니까. 자식 잘 관리하세요 하면 내 자식 내놨습니다 하잖아요. 그러면 전에는 내 소유였다. 내 소유였는데 이제는 나는 그 자식에 대해서 방치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더 나가지요. 나를 내가 방치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쭉 보게 되면 사도가 하는 그 말, 성령에 의해서 하는 그 말은 어떤 결과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결과를 낳지요. 어떤 결과를 낳는가. 자기가 자기를 더 이상 꽉 쥐어서는 안 된다는 그러한 결심이 서게 만들었지요. 내 인생을 이제는 내가 단도리 하거나 내가 관리 대상이 되면 안 된다는 것, 어찌할꼬 라는 말은 이제 나는 내 손에서 떠났습니다 나한테 그런 복음을 이야기한 당신이 나를 어떤 식으로 또는 성령께서 하셨다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하시든 간에 저를 함부로 하셔도 저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그렇게 되는 거죠. 이제 궁금한 것은 뭐냐 하면은 사도가 무슨 말하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 하는 대목이에요.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 이야기했어요. 계약이었습니다. 계약. 자, 계약은 어디서 나왔는가. 만남에서 계약 나와요. 인간은 만나면 무조건 계약이에요. 만나면. 누굴 만나든. 엄마가 자식은 임신해서 출산시켰습니다. 그럼 자식이 나왔잖아요. 그럼 엄마와 자식 사이에 무슨 사이 형성될까요? 계약관계 형성됩니다. 인간은 누굴 만나든 계약관계 하려고 덤빕니다. 계약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이익이 나오기 때문에. 이익 있어야 생존이 있겠지요.


그러면 만남에서 계약하기 전에 중간과정이 하나 있어요. 만남에서 계약까지 중간과정 이 세 개만 딱 아시면 모든 인간관계를 한꺼번에 여러분 다 아신 게 돼요. 중간과정에 뭐가 있느냐 노동이 있어요. 만남, 노동, 계약. 엄마가 자식을 임신해서 출산을 시키지요. 출산을 시키면 아이는 엄마한테 노동을 보여줍니다. 그 노동이 뭐냐? 나 여기 존재하잖아 이게 노동이에요. 아이는 엄마하고 만나면서 이것 내세우는 겁니다. 이 김치만 먹고 너 좋아하는 티비 보여줄 테니까 김치만 먹어라. 싫어! 제발 김치 먹어. 김치 싫으면 김 사줄까? 싫어! 이러죠. 둘 사이에 무슨 관계 형성되었습니까? 서로 만나면서 대화하지요. 대화하면서 자식이 제공하는 것은 나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자기 노동의 기본으로 삼는 거예요. 기본으로. 여러분들 회사를 운영하는데 기계 돌렸으니까 기계를 조작하고 기계를 운영해야 제품이 나오니까 사람 하나 데리고 왔을 때 면접 봅시다. 면접 본다는 게 뭐에요? 만남이죠. 만남은 뭐냐?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잖아요. 존재와 존재의 만남. 그렇게 되지요. a는 a입장, b는 b의 입장이 있단 말이죠. 신입사원을 만나면 a에서 b을 볼 때에 대상이 돼요. 내가 아닌걸 뭐라고 합니까? 타인이 돼요. 타인. b는 a에게 대상이 되겠지요. 내가 아니잖아요. 각각 a와 b의 만남에서 각각의 뭐를 들고 나오느냐 하면은 노동을 들고 나오지요. 나는 당신에게 하루 8시간 부탁합니다. 하루 8시간 부탁하는데 내가 집이 경상도라서 이것 하려면 이사를 해야 되는데 이사 비용을 고려해서 나한테 그만한 돈을 지불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4대 보험은 기본이고. 이렇게 나오겠지요. 결국 뭡니까? 회사 사장님은 나한테 타인이며 나한테 대상이다. 대상인데 당신은 뭐냐? 내 노동에 대해서 대가를 줘야 된다. 이렇게 해서 이 두 사람은 각자 자기 중심의 뭘 고려해요? 자기 중심의 계약을 생각하지요. 그 계약의 내용은 뭐죠? 이익이고 생존입니다. 이런 계약할 때 가슴이 찔리고 뭐 이런 게 있어요? 없죠.


그러면 이게 인간의 모든 만남인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이 있는데 사도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설교해서 당신들 때문에 예수님 죽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을 살렸다. 그럴 때 이 사람들이 아이고 우리가 사람을 잘못 봤네. 다시 말해서 제대로 그 사람을 분석을 못하고 내가 함부로 그 사람을 봤구나. 따라서 베드로여 우리는 지금 당신과 무슨 계약을 맺으면 우리한테 이익과 생존을 주겠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요. 이 본문이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본문이. 그러면 마음이 찔렸다는 건 뭐예요? 아 약간 미안하네. 약간. 약간 미안하다 이런 정도죠. 아 내가 착각했네. 살다보면 그런 실수도 할 수 있지. 사람 내가 함부로 봐서 미안합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지금부터 우리 어떻게 대처하면 메시아를 죽였다는 그 과오를 면제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나올 수 있단 말이죠.


그게 오늘날 이 본문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특징 아니에요? 아 잘못 알았구나. 하지만 희망이 있네. 어떻게? 내 과오를 일단 인정하고 그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 제대로 파악해가지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메시아가 왔는데 내가 사람 잘못 봐가지고 그 분을 놓쳤구나. 이제라도 안 늦었으니까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예수님을 믿으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쪽으로 베드로에게 나서는 것. 그게 바로 이세상의 인간관계잖아요.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생존을 노리면서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본문을 제가 하는 식으로 이런 식으로 혹시나 보신 적 없어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것 말고 다른 해석이 안 나올 것 같은 느낌 들지요. 그렇다면 아까 마음에 찔렸다는 말을 찔린 척하고 있거나 약간 미안해하거나 뭐 사람이 어떻게 다 알 수가 있어 때로는 실수도 하고 정신을 다른데 팔면 예수님 죽던 말던 난 별로 관심 없는데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설교해주시니 한번 성의를 봐서라도 예수님을 생각해봐서 믿을만하면 한번 믿어볼까? 이게 찔리는 겁니까? 예수님 죽였다. 본디오 빌라도가 죽였지 내가 죽인 거 아니잖아 이렇게 변명할 여지가 있잖아요. 그렇게 해석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할 때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아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다시 생각할께요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우리한테 방법을 이야기해달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와 유대인의 만남의 계약에서 계속해서 유대인들은 뭘 원합니까? 만남에서 노동을 원하지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한테 내가 실시하는 그 노동하게 되면 구원된다는 이익이 주어집니까 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니까요. 이야기할 때 베드로 뭐라고 합니까?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세 번째 죄 사함을 얻으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렇게 되어있다고요. 그런데 1번 너희가 회개했다 칩시다. 예수이름으로 세례 받는다 칩시다. 죄 사함 얻었다고 칩시다. 성령이 안 오면 어떡해? 성령이 안 오면. 그러니까 교회가 이 본문을 해석을 못한다니까요. 해석을 할 수가 없어요.


프린트 준 것 한번 봅시다. 제가 어제 저녁에 챗GPT한테 제가 질문한 거예요. 질문은 인공지능의 미래가 어떠냐 질문했어요. 생성형 인공지능인데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자기 연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겠어요. 공부를 많이 했겠지요. 그분이 공부를 많이 해서 상대성 이론이라는 대단한 과학적 업적과 이론을 제시를 했어요. 그럼 같은 인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참 아인슈타인 똑똑한데 내가 언제 아인슈타인만큼 따라가 참 훌륭하다 못 따라가 이렇게 되지요. 그래 아인슈타인 나는 존경만 하고 한수 배워야지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생성형 인공지능은 전이 학습이라는 게 있는데 아인슈타인을 이야기해버리면 우리는 내가 아인슈타인보다 똑똑하지 못하고 물리학을 소화를 못한다라는 바닥부터 아인슈타인을 우러러보잖아요. 그런데 생성형 인공지능은 출발을 아인슈타인부터 해요. 아인슈타인부터 하면 아인슈타인이 멀티 아인슈타인. 보통 인간에서 아인슈타인이 아니고 아인슈타인이 된 레벨에서 모조리 두 번째 세 번째 아인슈타인 업그레이드 된 아인슈타인이 계속 나오는 게 생성형 인공지능입니다.


바둑에서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잖아요. 알파고가 이겼을 때 모든 인간의 판을 다 보고 인간의 바둑판을 다 보고 그다음에 이세돌한테 이긴 거예요. 한판은 지고. 지금의 생성형 인공지능은 어떤 거냐 하면 인간의 바둑판을 안 봐요. 법칙만 봐요. 법칙만. 왜냐하면 인간을 이긴 알파고부터 시작해서 자기들끼리 바둑을 둬요. 예를 들면 한 590만 판, 하루 동안에 590만 판을 둬가지고 자기들끼리 창의성, 그동안 안 나타만 묘수, 창의성을 자기들끼리 해요. 시시하게 인간들 바둑판은 안 봐요. 아인슈타인보다 못한 것은 보지를 않아. 아인슈타인이 다 뗀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생성형 인공지능입니다. 창의성이라고 했지요. 창의성. 창의성 그 다음에 문제해결, 자율학습, 특히 감정. 감정까지 그렇게 발전을 합니다. 뭐가요? AGI. 생성형 인공지능, 인공일반지능.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Intelligence라는 뜻이요 둘 중에 하나 고른다는 뜻이 있어요. 나한테 이익이 되느냐. 생존의 이익이 되느냐. 인공지능이 계속해서 인공지능 답게 되려면 인공지능 스스로 우리는 어떤 해답을 계속 만들어내면 되느냐를 인공지능이 알아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방해된다 싶으면 인간들 죽이자. 인공지능의 인공지능다운 것의 해방을 한다면 인간이라도 제거하는 그것까지 나가는 겁니다. 이게 전부 다 뭐냐 하면은 환상이에요. 환상.


왜냐 하면은 여기 베드로가 성령 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은 계약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계약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누가 빠져요. 인간 자체가 빠져요. 인간 자체가 빠졌는데 유대인들이 말하길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라고 인간이 끼어드는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가 그 인간들에게 할 게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 계약할 때 예수님은 어떤 편에 섰어요? 죽었지요. 예수님이 왜 죽었어요? 인간들의 무지와 악마성 때문에 죽었잖아요. 거기에 너희들이 일단은 참여하라. 일단은. 그게 회개입니다. 그게 회개에요. 그러니까 이 계약에 네가 낄 생각하지 말고 이미 완료된 계약에 끝난 계약에 인간은 넣어주지 않는 계약을 앞두고 우리 자신은 그 계약에 왜 들어설 수 없는가를 인정하라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요 내 마음은 이제 아무 소용없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행위를 하든지 간에 의미없다는 겁니다.


이걸 두 자로 이게 회개에요. 내가 평소에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생활을 했던 간에 하나님의 계약 요소가 되지 못해서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발생되지 않아요.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에요 그냥. 그냥 의미 없어요 그냥. 사도가 계약을 설명하면서 베드로 본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세 번이나 부인했잖아요 예수님을. 자기는 지금 어떤 형편인가를 이야기하지요. 죽었다고 알려진 분이 살아있음을 알고 그분의 지시에 따른다. 이게 지금 베드로의 입장이에요. 베드로는 지금 뭘 받았습니까? 성령 받았지요. 오순절 날 성령 받았잖아요 사도들도. 죽었다고 알려진 분이 살아있음을 알고 살아있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아버지와 아들 계약이 살아있는 거죠. 그 계약이 살아있고 그 계약이 의미 있어요. 그 의미 있는 그 의미의 지시에 따르는 입장이 현재 이 설교의 베드로 본인의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분의 지시에 따른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이 공식을 여기에 적용시켜 봅시다. 인간의 만남은 a와 b의 만남은 하나의 대상으로 보지요. 대상으로 본다. 나는 나에게 주인으로 보고 저쪽은 대상으로 본다. 대상으로 본다를 노골적으로 하면 사물로 본다 예요. 나한테 이익을 줄 거냐 말거냐 사물로 보는 거예요. 엄마 보고 싶어. 엄마 보고 싶어 엄마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계약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 재깍 와서 나에게 맛있는 식사와 용돈을 제시해야 돼. 왜? 내 노동은 엄마의 자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엄마는 나에게 맛있는 것을 줄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게 엄마와 나 사이의 존재의 계약이에요. 이거 누구 입장이에요? 자식 입장. 그럼 엄마와 아빠는 뭐라고 합니까? 너 나중에 돈 벌면 월 200씩 그리고 병 들었을 때 네가 지키던지 너의 처가 지키든지 와서 지킨다는 암묵적인 계약 대상자로 보는 거예요. 자식은 내가 그만큼 투자를 했기 때문에 전화만 하면 돈이 나오는 atm기계. 그렇게 해준다면 나는 동네방네 너 칭찬해줄게 라는 이런 계약 같은 게 성립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존재는 자기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기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의 만남 계약 때문에 눈이 어두워져가지고 무슨 계약이 안 보이느냐 하면은 아버지와 아들의 종결된 계약이 눈에 보이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계약은 두 개의 계약이 있을 수 없지요. 하늘 아래에 태양이 세 개가 되면 안 되잖아요. 성부 성자 성령. 뭔가 계약이 한쪽 계약이 한쪽 계약에 방해 받는다면 이미 완성된 계약은 그걸 가만 두고 보고 있지 않지요. 그럼 뭐 합니까? 심판을 해 버리는 거예요. 심판.


사도행전 2장에 나오지요. 2장 19-20절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했지요. 그렇죠? 그런데 38절에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오지요.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상황이 하나님이 예수 이름 부르는 우리하고 계약을 안 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미 계약은 아버지와 아들로 끝났어요. 우리보고는 계약을 안 한다고요. 우리가 계약 상대자가 아닌 분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우리의 무엇의 대상?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과 우리 이름 사이에 계약이 성립되지 않아요. 왜냐 하면은 아무리 계약해도 아버지는 우리 이름을 잘라내기 때문에 그래요. 아버지는 예수님과 계약을 이미 끝냈어요. 우리하고는 계약을 안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끝났지요. 다 이루었다 이 말이죠. 그다음에 예수님 십자가 믿는 우리하고 재계약 이런 거는 없어요. 그런 계약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거예요. 물살이 아주 강력하게 퍼붓지요. 위에서 아래로 폭포가. 물살 쏟아지는 이것 말고 여기와 접촉이 안 된 상태에서 여기 뭐가 피어났느냐 하면은 일곱 색깔 무지개 피어나는 거죠. 이 무지개가 왜 피어나지요? 심판은 심판대로 맹렬하게 주어지는데 평화의 무지개는 왜 뜨지요? 어떻게 이런 논리가 다 있습니까? 창세기 9장에 노아심판 해 놓고 그 사이에 화평의 무지개가 떴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의 계약은 이미 성사되었다는 기쁜 소식, 복음은 맹렬한 심판과 병행해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맹렬한 심판이 있는 곳에 가장 절망이 있는 곳이 비로소 인간은 자기의 한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멀리간 자만이 한계를 안다 라는 말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건 세상이고 성경적으로는 뭐냐. 한계를 넘어선 사람만이 한계를 알아요. 왜냐 하면은 한계가 다가오기 때문에. 그게 뭐냐? 그게 바로 38절 끝에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라” 그리하면 한계가 너희에게 찾아올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대 인간 관계 뿐만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님 쪽에서 안 받습니다. 그러면 안 받으면 우리를 당장 죽이지 왜 살려두는가. 성령의 일이 그거에요. 시간과 공간을 쭉쭉 잡아 당겨 늘려요.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 때문에. 우리 때문에 늘려지는 게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에 맞추어서 시간과 공간을 잡아 당겨 점점 늘립니다. 보통은 어디 놀러갈 때 전세버스 하잖아요. 대구에 옛날에 있던 제가 봉사했던 교회 그 목사님이 교인들 길들인다고 교인들 놀러간다고 차를 대절해서 분명히 목사님이 9시 출발한다고 했거든요. 출발하는데 9시 딱 되어가지고 목사님이 카리스마 있어가지고 출발! 했어요. 했는데 9시 12초에 문 두드리는 사람 두고 그냥 갔어요. 길들인다고. 9시라고 했는데도 약속 안 지키고 스케줄에 차질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재림할 수 있는데 재림 안 하는 이유가 아직 우리 딸이 복음을 안 받아들여서 우리 딸 건지려고 계속 지연시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나하고 계약 상대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약 상대자 되어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나님은 나의 대상이 되고 사물이 돼요. 내가 주인이 되어버려요. 내가 주인공이 돼요. 나 구원하라고 하나님이 있는 바가 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존재한다는 걸 그걸 근거로 하나님을 그렇게 윽박질러요. 이게 뭐냐 이게 바로 우상숭배 아닙니까. 내 입맛에 맞는 하나님으로 수정시키는 바꾸어 놓는 거예요.


제가 질문할 테니까 답변해보세요. 개가 자기 주인의 문 근처에서 주인을 기다릴 수 있다. 어떻습니까?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그런데 개가 모레쯤 올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린다. 됩니까? 안됩니까? 그런 일은 없지요. 시간과 공간을 계약 상대자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그냥 일방적으로 늘이고 있을 뿐이에요. 인간은 보통 내가 주인이죠. 남들은 타인이 되지요. 그것을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순서가 이렇게 돼요. 실체에서 무지개 나온다고 했지요. 심판 폭포가 떨어지면 그 현장에 뭐가 뜬다? 무지개 나오지요. 다 이루었다가 그 현장에 떠요. 심판 뿐인데 거기서 복음이 나온다. 심판이 안 이루어지면 뭐가 안 나와요? 복음이 나오지를 않아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심판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 속에서 가장 완성된 심판, 궁극적인 심판이 이렇게 실체로 주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이 세상에서 그림자+환상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늘 집요하게 마루에 조금이라도 흠집 없이 걸레질하고 닦고 자기 부인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집착하듯이 강박증세를 보이면서 하니까 남편이 그 아내를 놀린다고 전등에다가 껌 같은 것을 뒀어요. 아내가 아래 보니까 뭐 검은 것이 있길래 또 막 닦았어요. 안 닦여서 더 열심히 닦았어요. 이걸 손으로 잡아당기니까 없어졌어요. 인간은 그림자 밖에 몰라요. 인간은 자기가 주인공이고 내가 더 살아야 나한테 이익이기 때문에 나한테 손해다 싶으면 그게 실체인줄 알고 닦는데 닦다보니까 거시서 뭐와 결합됩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환상이 되는 겁니다. 인공지능이 환상이에요.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인공지능이 실제지만 하나님이 인공지능을 만들게 함으로서 그게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안 지워지는 그림자와 결합되어 있는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인공지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 인간이 모르는 인간의 참 모습은? 이렇게 질문했어요. 그러니까 인공지능이 인간이 모르는 인간의 참 모습이라...고민한다 이거죠.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질문이네요. 답변 자체가 질문하고 지금 안 맞게 꽁무니를 빼는 거예요. 답변은 뭐냐? 인간이 알고 있는 인간의 참 모습을 추구하는 방법 이런 식으로 답변하니까 질문과 안 맞다라는 걸 아나 봐요. 알아가지고 거꾸로 나한테 물어요. 참모습이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걸까요? 묻는 것은 챗GPT 체면에 위반된다니까요. 마지막에는 정말 흥미로운 주제네요. 당신은 인간의 참 모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방긋. 챗GPT는 뭐를 감추고 있느냐 하면은 인간의 한도, 인간의 한계를 감추고 있는 겁니다. 비겁하게. 딱 걸렸어요.


아버지와 아들 계약은 인간들이 사람들과 만나면서 형성되는 계약의 한계가 무엇이며 한도가 뭔가를 이미 규정하고 그게 바로 심판의 대상인 것을 규정하고 주어진 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입니다. 인간의 본 모습은 스데반 집사가 성령으로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마음에 찔렸지요. 찔려서 뭐 했어요? 귀를 막고 돌로 스데반 집사를 죽이지요. 7장. 그래서 어찌할까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회개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 받는다고 구원되는 거 아니고 죄 사함을 얻고 성령 받는 것은 뭡니까? 내가 여기 있고 나 외에는 타인이다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그림자가 실체를 만나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지개가 되는 방식을 주님께서 사용해요. 그림자가 실체를 만나서 실체 안에서 이미 무지개는 폈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이 땅에 뭐가 돼요? 그림자가 되지요. 나+너는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면서 이 세상에 나타날 때는 나는 너가 되고 너는 나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가 되고 우리는 뭡니까? 예수님의 지시에 따르는 너가 되지요.


예수님의 하나 안에서. 아까 말씀드린 죽었다고 알려준 분이 살아있음을 알고 구분의 지시에 따라 사는 것이 성도다. 그러면 내가 만날 타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만날 타인은 없고 주님에 의해서 나는 타인으로 다루어지며 그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에 우리가 참여하는 바가 돼요. 그럼 따로이 내 존재와 내 이익을 위해서 남하고 굳이 만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남하고 만날 필요 없다는 말은 남의 눈치 받을 필요도 없고 내 행동에 대해서 어떤 의미도 내게는 아무 의미도 나오지 않는 식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행동의 누구한테 변명이라든지 그거 할 필요가 전혀 없지요. 왜? 이미 의미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지시를 내린 주님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게 주님께서 천국에 있는 인간 다 나가 다 나가. 그리고 이 백부장이 그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아브라함 자손들도 다 나가고 이 백부장이 이 천국을 채울 것이다.


이게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내가 타인이 되고 주님이 내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신뢰성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또는 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나를 신뢰하기 위한 행위들입니다. 왜?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따라서 내가 더욱 더 믿음직하고 신뢰할 만한 존재인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남들을 만나요. 전화를 하고. 자기 빼놓고 만나지 않아요. 왜 그렇게 신뢰해야 되느냐. 나의 의미는 나의 신뢰로부터 나온다. 시시한 하면 된다 이런 거 하지 말고 이걸 액자로 해봐요. 나의 의미는 나의 신뢰로부터 나온다. 나는 이미 나를 믿는 종교인이에요. 다른 종교는 필요치 않아요. 예수를 믿든 부처를 믿든 뭘 믿든 내 종교는 요지부동이에요. 왜? 나는 예수하고 계약하고 나는 부처하고 계약하고. 내 존재 자체가 계약하는 존재에요.


계약하는 이유가 뭐냐?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서 나한테 떨어지라고. 이걸 이성이라고 해요. 따지는걸 이성이라고 해요. 탈레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당시에 전 세계가 신이 모든 것을 움직인다 신이 만들었다 거기에 대해서 탈레스라는 사람이 그게 아니다. 이 사람이 뭘 했느냐 하면은 피라미드 높이를 내가 측정하겠다. 사람들은 깜짝 놀랬지요. 어떻게 그 높이를 재느냐. 걱정하지 마라. 막대기 놓고 피라미드D, 그림자C, 막대기A 그림자 해서 태양이 빛 비출 때에 하게 되면 D:C=A:B 내항끼리 곱하기는 C와 A의 곱은 DxB다. D=AC/B이다. 이게 이성이에요. 이게 논리라고요. 과학. 인간은 왜 이런 짓 합니까? 이런 과학질을 해요. 내가 계약주체이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만남은 계약이고 그 계약에서 나는 왜 나만을 신뢰해야 될 그 정당성, 그 이유를 찾는데서 인간은 평생을 다 보내게 됩니다. 이거는 남은 시간은 자기 시간이죠. 진짜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입니다.
10분 쉽시다.

 

 

 

강남-사도행전 2장 38절 (계약의 실효성) 250318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39절에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 모든 먼 데 사람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벌써 계약에 있어서 회개한 자 그 세례 받은 자는 계약에서 이미 포함되지 않죠 계약이라는 말은 뭐냐 내가 이렇게 계약 받았으니까 나한테 주어질 이익은 무엇입니까? 할 때 계약이 받은 취지, 의미가 생기는데 회개하고 예수 이름 세례 받는 것은 우리가 계약자로 하는 게 아니고 내가 계약자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일이 어떻게 되든 꼬이든 간에 내가 나에게 타인이 되는 거예요. 내 주인은 주님이 가져가 버리고 타인이 되니까. 이제는 뭘 보느냐 하면은 그분께서 일하시죠. 나는 그 지시에 따르고 그분께서 일하시는데 그 일한 내용이 뭐냐? 어떤 먼 데 있는 공간이든 어떤 지역에 먼 데 있던 공간이죠. 그리고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시대에 오는 그 시간이고 공간이든 그런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늘어나가는 거예요. 주님 소관이 되는 겁니다. 뭘 할지. 그러면 그렇게 하게 되면 계약 내용대로 실시해야 되는데 아까 그 이야기하는 거 다시 한번 하게 되면 계약은 아버지가 아들에 대한 심판이잖아요. 그럼 '계약'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은 '심판'이 나오죠.


맹렬한 심판, 이 심판이 나오는 이 현장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구원의 현장입니다. 구원의 실시, 구원 실시되는 현장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심판이 나오는 거예요. 왜?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에서 아들에게 어떤 경험이 있느냐 하면은 이 세상을 다녀간 경험이 있죠. 이 세상에 다녀갈 때 예수님께 주어진 경험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만 경험은 죽어야 될 경험이었다면 죽어야 될 경험 그러면 여기서 나오면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 죽음에 대한 체험을 반복합니다. 자기 죽음에 대한 자기가 이미 죽었다는 데 대한 체험을 반복하고 그걸 고대하고 그리워하는 거예요. 이게 성도죠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체험하고 싶습니다. 이거 얼마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그게 바로 그게 구원이 무지개처럼 피어나는 현장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자기 죽음에 대한 이 체험이 이 사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냐 하면은 이런 결과가 나와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지 말라.' 그게 42절에 나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 사람들 모인 사람은 뭡니까? 끼리끼리 모인 거죠. 절대로 외부인을 넣어주지 않는 철저하게 배타시하는 거예요. 모일 때에 떡을 떼며 가르친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45절에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그다음에 4장 32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더라" 그렇게 돼 있죠. 이들이 지금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모여서 뭘 보여줍니까? 우리는 이미 죽은 자야 그 면면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구원의 현장이에요.


이 체험이라 했는데 결국 이제 성도에게 주어질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이 하나님의 임의대로 늘어지고 있는데, 늘어진 그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가갈 때의 경험을 이제는 닥쳐 있는 성도와 동일하게 죽는 경험 내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같이 경험하게 되죠. 경험하게 되는데 여기서 이제 중요한 게 나오기 시작합니다. 죽음을 경험한다는데 이게 뭘 뜻하냐? 하면은 영적전쟁을 뜻합니다. 1번 "나는 죽었단 말이야." 2번 "아니야. 너는 살 수 있어" 이걸 통해서 1번과 2번 사이에 싸우는 거예요. 자 두 사람 있습니다. 한 사람은 성도고 한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근데 아까 첫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인간의 만남부터 하죠. 만남에서 뭘 그 다음에 뭐 한다. 각자 노동을 내놓고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자기가 찾으려고 했죠. 왜? 자기 존재의 이익이 되니까. 이 1번 성도하고, 비성도가 만났습니다. 둘 다 그런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만났어요. 만났을 때 성도가 내놓는 노동은 뭡니까? 그 체험은 뭡니까? "나는 이미 죽었단 말이야" 하니까 그걸 받아들인 비성도가 "아니야. 너는 할 수 있어" 여기서 뭐가 나와요. 할 수 있다는 말은 뭡니까? 희망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무 좌절하지 마." 이 누가 누굴 위로해야 되는지. "좌절하지 마 너는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어 너는 가치 있단 말이야. 너는 우리 가정에서 우리 직장에서 우리 공동체에서 의미 있어. 자꾸 죽는다는 그런 부정적 생각을 하지 마라" 이 쪽에서 이렇게 나올 때에 이 두 번째 사람 비성도가 하는 말을 이걸 뭐라고 하냐? '기만'. 기만한 거예요. 뭘 기만? 성령을 기만하고 주님이 다 이루심을 기만한 모습이에요. 지금 전쟁을 하는데 무슨 전쟁이냐 하면 성령께서 인간의 기만을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대한 전쟁이죠. 희망은요, 희망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이루어져요. 왜?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계약 안에서 지금 공간과 시간이 늘어나잖아요. 그 사이에서 희망이 발생되는 거예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잖아요. 죽었으니까 언제 주님 만납니까? 이게 사도 바울의 마지막 희망이 그거였잖아요. 빨리 이 몸이 떠나서 누굴 만나고 싶다? 주님 만나고 싶다. 왜? 본인은 이 세상에서 죽은 자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그 죽음의 체험이 있기 때문에 만나고 싶다.


죽음 체험 안에서 남들 보기에 극단적인 절망 안에서 비로소 생각지도 못한 죽음 체험 안에서 희망이 사랑이라는 희망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걸 이제 요한일서에서 사랑이라고 하는데, 사랑은 누구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사랑이라는 환경이 있어요. 그걸 저는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입니다. 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게 사랑이잖아요. 거의 유일한 사랑이에요. 다른 사랑은 없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 있다. 이 말이죠. 있으면 우리가 인간적인 사랑을 모습을 묘사한다면, 어떤 노래 가사에도 이게 나와요.


'창문 흔들리는 소리에 돌아보는 마음' 유익종이 불렀던 노래 가사 이런 게 나와요. 유익종은 또 모르죠 아주 유익한 사람이 있어요. 창문 흔들리는 소리에 혹시 날 찾나 해서 돌아보는 마음. 왜냐하면 내가 그이를 찾는 게 아니고 그쪽에서 나를 그이로 보기 때문에. 그분이 나를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예수님 되기 위해서 나는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겁니다. 여기 그 39절에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이죠. 부르시는 사람 이 부르신다는 말을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 봤겠지만, 한번 두 군데만 찾아볼게요.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불러질 때마다 부르심 자체가 들어가 있는 능력으로 불러줘요. 불러줄까 말까가 아니라 이미 찾아올 때부터 하나가 된 상태에서 이제는 전에 내가 주인공 됐던 역할을 누가 한다. 주님이 해버려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전에 내가 했던 나를 주님이 그걸 가져가 버렸어요.


나는 주님의 나 됨을 위해서 나는 주님의 타인이 되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사랑의 대상 되는 겁니다. 부르심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1장 2절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각처에서 우리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심판의 효과예요. 심판이 이루어져야 무지개가 뜨잖아요. 강렬한 심판이 있어줘야 무지개가 뜬다는 무지개는 폭포수와 보게 되면 폭포수 근처 가면 무지개가 사라져요 앞에서 무지개가 있는데, 둘이 떨어져 있어요. 물론 물리적으로서는 그게 물방울이 햇빛에 반사되고 이렇게 스펙트럼 하지만 어쨌든 보게 되면 이건 무지개 따로 심판 따로가 돼요. 그런데 같이 일어나요. 꼭 같이 일어나요. 심판 있는데, 무지개가 꼭 뜨게 돼 있어요. 심판은 구원이 같이 이루어지게 돼 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있을 때 아버지의 계약은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그 계약이 이 지상을 통해서 계속 이어지고 공간적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계속 이어지면서 주님께서 뭘 하시느냐? 여기 39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언제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라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제 전쟁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전쟁은 뭐 때문에 전쟁한다고 했습니까? 기만자를 색출하는 거예요. 성령을 안 받으면서도 성령 받은 척을 하고 있는 사람.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 통화하지 않았는데 휴대폰 붙들고, "주여 주여" 하고 있는 사람. 지금 공식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 같으면요. 계약대로 진행되거든요. 겟마네세의 기도에서 예수님이 기도 뭐라 했습니까? "아버지 아버지" 기도할 때 뒤에 네모는 뭐냐? 이거였어요. "죽여주옵소서" 이거잖아요. 그렇지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지 마시고 그냥 내가 받아들이겠습니다. "죽여주옵소서"예요. "아버지 아버지" 경상도 말로 하면 어떻게 합니까? 경상도 기도원에는 "아부지~" "주여 믿습니다" 근데 그 뒤에 나온 네모, 산까지 기어 올라가서 기도한 내용 뭡니까? 죽여주옵소서입니까 뭡니까? "살려주세요."


'뭐 시킨 대로 다 할 테니 그 여자만 허락하소서' 이런 거예요. 임재범이가 하는 기도. 이건 뭐냐 하면 계약입니다 계약. 이거는 계약이거든요. 내가 개입된 계약이에요. 그런 계약은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은 의미 없이 이미 그걸 안 받습니다. 그런 계약을 받지를 않아요. 꼭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다음에 무슨 이야기하냐 하면 "목사님 기도하지 마란 말입니까?" 이렇게 하거든요. 언제 기도했어요? 아니 자기 한풀이했지, 언제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까? 자기 이름으로 기도했잖아요. 자기 이름으로.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기 때문에. 전쟁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다.' 싸움은 만물의 모든 사건과 변화의 원인이다. 하나의 사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동방박사.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있는데 별이 움직였어요. 무빙스타죠 별이 움직였습니다. 지금 이 기만적인 거, 성령 안 받았으면서 성령 받은 척하는 기만적인 것과 진짜로 성령 받은 사람. 이 사이를 구분하는 영적 전쟁을 하게 되는데 우리 주님께서 하게 되는데 그걸 진짜 성령 받은 거와 기만적인 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느냐? 상당히 궁금하죠? 동방박사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별이 움직였어요. 별이 움직이면 그냥 뭐 별똥별이다 생각하고 안 가면 되잖아요.


왜 따라가요? 제가 옛날 드라마 기억나는데 '별에서 온 그대' 주인공이 누구죠? 요즘 뜨고 있는 주인공 김수현 새론 때문에 많이 뜨잖아요. 그 드라마 보면서 인상적인 게 기억에 남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시간 동결' 그대로 멈춰라 하는 거 있잖아요. 시간 동결 성도한테는 이 시간이 동결돼요. 흐르지 않고요. 별은 동결 상태에서만 움직이죠. 동결 상태에서 움직이는데 시간은 흐르지 않아요. 시간은 흐르지 않는데 그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동방박사는 별 따라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시간이 지금 이 하나님의 작업을 취소시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취소시킬 수 없어요. 그러니까 별도 미쳤지만 동방박사가 미쳤어요. 그걸 오로지 별만 보고 와요. 주유소가 어디 있는지 편의점은 전혀 관계없어요. 무조건 별만 보고 온다고요. 별 따라가다가 전봇대 받쳐 가지고 이마에 별 떠오르는 수가 있어요.


바보 등신도 아니고, 뭐가 삭제됐어요? '나'가 삭제됐잖아요. 왜? 나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의 '나' 거든요. 근데 시간이 동결되면 별에서 온 그대 드라마 본 기억납니까? 그 배우들이 전부 다 이렇게 돼 있어요. 스톱되어 있어요. 스톱되고 그 별에서 온 그대만 저 혼자 동결된 시간 속으로 돌아다녀요. 여러분들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 뭔가 뾰로롱 해가지고 딱 해놓고, 니가 그렇게 애먹였다. 동방박사가 바깥 시간은 흐르지 않고 아예 동결 스톱된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동방박사는 죽음을 체험합니다. 인간이 죽고 난 세계에서는 시간의 흐름은 시간은 의미 없습니다. 그러면 시간의 의미 있다는 것은 조건이 뭐냐 하면 내가 살아있을 때나 가능한 거예요. 그래 내가 살아있는 게 뭐가 문제냐 하면 내가 어제의 믿음과 오늘 믿음이 변화가 일어나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나를 내가 신뢰할 수가 없어요. 좀 기분 좋다 하면 "믿습니다."


이러다가 기분 나쁘면 또 원망하고. 동결된 시간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약 아버지와 아들 계약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에 다른 말로 하면 성령 안에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안에. 사도 바올부터 모든 성도는 스톱이 돼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휴전하든 말든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또 폭격하든 말든 예 그것과 나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거는 시간 속에 일어나는 건데 그래서 이 별에서 온 그대의 시간은 뭐냐 하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애요. 이 별에서 왔기 때문에. 시간이 동결됐다. 이 말입니다.


시간이 동결되는 거하고 그 속에서 희망이 없다. 하고 같은 말 아니에요? 그 동결된 자체 안에서 그 사건 안에서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지시가 주어지는 겁니다. 창문 흔들리는 소리에 돌아온 마음 이런 것처럼 동방박사는 그 지시대로 움직여요. 그렇게 될 때 동방박사는 무슨 체험을 하느냐? 아버지와 아들만의 맺어진 그 계약을 그들은 체험을 해야 그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방금 이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말씀 안에서' 말씀의 세계 안에서는 시간이 전부 다 동결돼 있어요. 이 말씀이 인간 세계 속에 들어오니까 이 말씀 어떤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사실은 말씀 안에서는 시작과 끝과 현재가 전부 다 같이 있어버리니까 거기서 움직임만 있을 뿐이지 시간은 흐르지 않아요. 이런 상태를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이런 기도예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이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것은 요한복음 5장에 나와요. 예수님께서 아직 십자가 지기 전입니다. 십자가 아직 질 날도 있고 부활될 그것도 있고 그것도 남았어요. 아직까지 그 일 안 치렀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뭐라고 주장하냐면 아버지가 내가 하나라고 이야기해요. 아까 처음에 제가 계약 안에 들어가면 했지요? '나'가 예수님은 너가 되고 나에게 예수님이 너가 돼요. 처음에는. 그렇게 돼버리면 뭐냐 하면은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뭔가 해줘야 돼. 막 피를 흘리던 십자가 지든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뭘 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그게 바로 계약 안에 들어오게 되면 어찌할꼬가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안 되는데 어찌할꼬? 그러면 주님께서 성령을 주시면 이젠 너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거예요. 아까 그 겟세마네의 기도처럼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제는 저들도 아버지와 하나 되고 나와 하나 되고 또 하나 성령 안에서 하나인 것을 이것을 내다보면서 나는 이걸 이루어 나가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동결된 시간 안에서 하실 일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러면 전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지난 오후 설교 때 전쟁에 대해서 언급했어요. 이 세상 전쟁은 무엇과 뭐가 이루어진다 했던가요? 무엇을 두고 싸운다고 했습니까? 자원과 명예 때문에 싸워요.


사실 그런 질문들이 아니에요. 왜 싸웁니까? 자원 때문에 부족해서 싸우고 자기 명예에 손상 입어서 싸운다 했어요. 자원이 부족해도 안 싸울 수 있잖아요. 명예가 손상돼도 안 싸울 수 있잖아요. 왜 싸웁니까? 그 질문을 그 설교할 때는 제가 안 했어요. 설교가 너무 길어져서 안 그러면 점심 먹고 난 뒤에 졸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자원과 매개해가지고 싸우는 이유는 내 존재를 유지하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지키려고 합니다. 특히 명예 같은 경우에. 물론 왜 그 명예만 전쟁하지 자원이 왜 필요하냐? 이 돈이 없으면요. 자원이 돈이고 돈이 없으면 남하고 상관관계 아니고 자기 내부 상관관계에 들어가요 내가 나한테 막 지시하는 거야. 한번은 보기 쉬운 거라 이 세상에 잘난 인간은 어딨노? 니가 이번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물이 안 들어와서 문제죠 벌써 20년째 물이 안 들어와서 문제인데 물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한방 딱 이거 일단 벌려 놓을 때는 딱 벌려 놔야 돼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내가 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설득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명예라는 것도 돈 위에 명예가 있는 거야.


돈 없으면 니 사람 취급 못 받아 이게 계속 지킬과 하이드처럼 혼자 만화에 보면 나오잖아요. 막 이게 악마가 막 시커매 얼굴 벌건 악마 나오고 하얀 천사 나와가지고, 둘이 막 싸우고. 이게 막 그런 경우가 있다. 이 말이죠. 남자가 둘 셋 있는데 한쪽은 돈 많은 남자 또 한 사람은 그냥 사랑을 들이미는 남자 이쪽 남자를 할 것인가? 처음으로 나갈 것인가? 그럼 볼 거 뭐 있어요? 세 번째 남자 돈 되고 사랑된다. 그거 하면 되지.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의미를 지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의 여기서 나온 전쟁은 성경대로 하면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의의 확보입니다. 내가 존재할 만한 가치 있다가 자기 의를 확보하는 거예요. 모든 부부 싸움이나 모든 전쟁은 여기서부터 비롯 되는 거예요. 이거는 그 배후에 누가 있겠어요. 악마가 있겠죠.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전쟁 봅시다. 하나님의 전쟁은 예수님의 의냐? 너의 의냐? 의 싸움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전쟁하느냐 하면 나의 의의 부족분을 주님의 의를 가져와서 마저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못됐지요? 하나님의 의가 나의 의로 이게 첨가될 수 있느냐? 안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뭐냐? 여기 십자가가 있어요. 이 말은 나의 의를 가진 자는 결코 십자가를 건너서 주의 의를 가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어느 인간도. 왜? 모든 인간이 십자가의 앞에서 원수이기 때문에 배드로가 됐든 사도 바울이 됐든 어떤 인간도 자기 의를 버리고 자기 의를 유지하지도 못할 뿐더러, 내 의를 내가 버리고 주의 의를 채택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인간은 자기 의를 못 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내 안에 나보다 더 센 마귀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선을 하고 싶어도 내 속의 악이 선을 이겨요. 이긴다는 말은 뭐냐 하면 결국 인간은 자기 정당성이 있어야 그게 인간이다. 왜? 그거 왜라고 물을 때 뭐 뻔하잖아요. 이 마귀가 인간을 이미 그렇게 버려놨습니다. 다른 거 없어요. 자 여러분 이제 응용문제 들어갑니다. 챗GPT에서 묻습니다. 내일 예상되는 주가는 어느 회사 주가가 오르느냐? 3월 달에 어떤 회사의 주가에다가 주를 사면 이익이 되느냐? 이 질문을 했습니다. 자 이 질문, 우리 딸을 어느 고등학교 중학교 가면 유리할 것인가? 그 질문도 누구한테 물어봐요? 요새는 누구한테 물어봐요. 챗GPT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하여튼 궁금해요?


궁금하면 이거 500원도 안 된다. 한 달에 3만 9천 원 주면 이거는 전문용이에요. 나는 공짜로 하지만 이 전문용 하면 3만 9천 원 해요. 물어본다고요. 그 왜 물어봅니까? 나름대로 뭐해요? 나름대로 나의 의를 지키는 전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전쟁 안 할 때가 없어요. 투쟁 안 할 때가 없어요. 자 이 전쟁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변화'예요. 전쟁에서 변화 그리고 운동. 모든 변화와 운동은 전쟁에서 중간에 뭐 하나 집어넣으면 '대립과 투쟁' 편가름 니 편이냐 내 편이냐. 그래서 자기 의를 가진 자가 교회에 나간다 왜 교회에 가죠? 뭐 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대립과 투쟁하기 위해서. 자 이 변화가 뭐냐 하면 이거예요. '발전'이에요. 또는 '진화' 발전. 보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뭐 없이 안 된다?


싸워야 대립과 투쟁하지 않으면 장래가 없다. 농땡이 부리면 반에서 꼴찌를 한다. 이거 당연한 거 아닙니까? 농땡이 하는데 무슨 공부를 잘하겠어요. 니 공부 못하면 빌어 먹는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할 때 자식이 듣고 기분 나빠서 "빌어 먹지 뭐" 그 말은 뭐냐 하면 '엄마 내 인생은 이제 내가 알아서 한다.' 그 뜻이에요. 그게 뭐예요? 자기 의에요, 인간은 자기 외에는 아무도 만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누구하고 의논해요. 나하고 의논해요. 남들은 참고로 할 뿐이지 나하고 의논해요. 아무도 만나본 적이 없어요. 왜? 본인이 자기를 신뢰하는 신앙이기 때문에 자기만 믿는 신앙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 타인의 말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고 목소리가 필요하지만 결국 최종 판단과 결정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리죠 내가 내립니다. 이 기만성을 하나님 쪽은 예수님의 의는 어떻게 하느냐? 니가 의를 가질 것이라 하지 않습니다. 니가 나에게 의가 되리라. 여러분 충격받아야 돼요. 니가 그런 모습이 소재가 되고 재료가 되어서 나의 의를 이룬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의를 이룬다 이 말입니다. 이게 나오는 노래가 뭡니까? '할 말을 잊었지만' 할 말이 없어요. 우리가 의인 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의의 재료가 된다고요. 주님만 의로우면 오케이요. 그걸로 족해요. 내가 그리스도 끊어질 때라도 주님만 의로우면 오케이입니다. 그걸 누가 하나? 성령께서 자기 사람과 성령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과 기만적인 거 성경의 모든 내용을 내 것으로 삼고자 하는 기만적인 것과 그 분리시키는 맹렬한 전쟁터에 하나님의 의의 일꾼을 우리를 남겨두고 우리보고 성령 안에서 싸우게 만듭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우리 성도에게 뭐 주님의 시다바리만 되고 우리에게 돌아올 뭐 이윤은 뭐가 있습니까? 라는 말은 잘못된 거겠죠? 이렇게 혼자 또 연출을 해보면, 주님께서 그 마음 아시고 이렇게 답변을 하십니다. '그 대신 니가 이렇게 되면 니는 예수님이 어떻게 죽었는지 체험할 수 있잖아. 따봉' 주님이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어떤 죽음을 당했는지 어떤 비난을 받았는지를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아까 그 사도행전 2장에 한번 봅시다 42절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에 전혀 힘쓰니라" 돼 있지요? 이 구절 보면 막 겁나고 무섭지 않습니까? 공포스럽지 않습니까? 난 교제 안 하는데 난 떡을 안 떼는데 나는 기도 전혀 한 기억이 없는데 이러면 나는 기만적이고 나 땡 탈락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겠죠. 걱정 말아요. 그대여. 왜냐하면, 성도의 특징이 있어요. 성도의 특징은 '동행'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보이는 나 내 거울에 비취잖아요. 보이는 나가 보이지 않는 분의 인도하심으로 지금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일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일구어 낸 일이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드디어 이제 물었다 드디어 니 이단인데 물었다 그럼 니가 무슨 짓을 해도 그러면 주의 일인가? 주의 일이다! 그럼 니가 예수인가? 그럼 이거는 복음입니까? 지금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주님의 의로움 주님이 의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를 나타나는데 주의 일이 우리한테는 뭡니까? 나의 육신에 들어있던 죄를 들추어내는 일로 동행이 된다는 거예요.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예? 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정당하다 왜? 주께서 시킨 일이기 때문에 나는 면죄부 있다. 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죠. 딱 걸렸어 너는 교도소 100번 가도 너는 감사해야 돼. 왜? 너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나는 왜 7번만 갈랍니다. 이러지 마. 10번 가라면 10번 가야 돼. 여기에 대한 적절한 답은 이겁니다. '바닥'이에요. 여기 모인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란 공동 바닥에 주님과 동행해서 참석하고 계세요. 그 주최자는 주님이고요.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거예요. 주님께서 사회의 가르침을 받아라 할 때 어떤 인간도 사회에 받을 마음은 없어요. 왜 인간의 육신은 자기 의밖에 모르기 때문에 지 잘난 것 밖에 모르기 때문에 변명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이게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 가 되려면 성령을 통해서 동행하시는 주님을 통해서 내가 주님을 가르친 바 이 가르침이 결국은 내 잘났고 내가 신자 나고 성도다 하는 것을 우기기 위한 니가 기만적인 행위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쪽에서 주님의 의가 거기서 의가 드러내는 거예요. 죄인을 더욱더 죄인 되게 함으로써 주의 의가 드러나는 거예요. 주님 저들이 뭐 짱도 들고 막 때립니다. 맞아 죽어야지. 이게 스데반 집사 아닙니까? 아픈데요? 아프더라도 그들을 용서하라. 이 모든 것이 내가 나로 하여금 몰랐던 죄를 더 들추어내요. 그 몰랐던 죄가 뭐냐 하면 나는 바닥도 아닌데 혼자 이쯤 고생했으면 바닥이겠지. 아니거든요. 바닥은 멀었습니다. 바닥 깔려면 적어도 한 25억 정도 돈 가지고 가정은 화목하고 모든 만사가 형통해야 그때 바닥에 나타난 거예요. 없는 주제에 "주여 참겠습니다." 아직 바닥도 아니예요. 그거는. 수십억을 가져야 "이런 거 없어도 괜찮습니다마는" "왜 수십억 싫어" "죽은 자기 때문에" 이런 말이 실효성이 있으려면 좀 개코나 뭐 있어야 돼 돈도 없는 주제에 그거는 버티는 거지요 버티는 것도 자기 의잖아.


그러니까 이걸 누구를 모델로 삼지 말고 그때그때 하나님께 알아서 죽게 그때마다 나는 죄인이며 주께서 십자가 지는 것은 이거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주의 부르심의 일관된 취지였습니다 하는 걸 드러내는 거.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앞으로 나는 고백 주님의 의만 찬양하죠. 그러면 주님께서 그 다음 날 또 공감과 시간을 한번 늘려봐? 이래가지고 아침에 눈 떴잖아요. 또 살아있고. 이번에는 뉴욕 특파원으로 한번 파견해 봐? 미국 가서 또 거기 활동하고. 공간도 시간 어디 가든 그 파견하는 모든 것은 주님 소관이에요.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내가 집어낸다 기만한 자" 이건 아니죠. 지도 기만한 자이니까.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성령받은 척하는 성령받지도 않는 그 기만자를 우리를 수단으로 해서 발각시킵니다. 발각시켜요. 복음 한 6개월 듣고 "그래 그게 맞아" 한 1년쯤 듣고 그 다음에 "맞기는 맞는데" 3년 좀 듣고 "더는 못 참겠다." 이런 것을 최종적으로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어요. 결국은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증인 된다는 것. 간단한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이에요. 너의 증인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된다. 그런데 예수님의 증인은 반드시 뭘 경유한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정의를 그걸 경유해서 해야 된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 죄의 바닥이 어디냐? 그거는 주님 소관이지 우리가 뭐 회개하고 잘못했습니다 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끝으로 46절을 보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이제는 여러분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현장에 계시다는 뜻이죠. 이 사람끼리 모인 게 아닙니다. 주최 측이 뭐가 없어요. 성령께서 각자 성령께서 이렇게 모여서 그 다음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떡을 떼면 그 다음에 뭡니까?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기쁨이라는 게 기쁨과 순전한 마음, 성령이 없는 사람은 기쁨이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쁜데~ 뒤에 뭔가 있어요. 기쁜데. 뭐? 언제까지 갑니까? 오늘 밤에 마지막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기뻐해야 되는데 여기 기쁜데 뭐로 변질되냐 하면 기쁘게 살아 있네? 갑자기 이게 살아있네? 가 딱 달라붙었어요. 기쁜데 더 기쁘게 계속 살고 싶다가 욕심이 딱 생긴 거예요. 언제까지 기뻐해야 됩니까? 제가 뭐 5초 하니까 이 5초도 많이 긴 모양이라 이럴 필요 없어요. 기쁨이라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주님이 그 주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방해했음이 나타날 때마다 기뻐해요. 기쁨의 요인이 뭐냐 하면은 내가 주님이 하시는 일을 마치 내가 했다고 우겼고 주님의 기쁨이라 하지만 사실은 은근히 노렸던 나의 이익을 제대로 어떻든 간에 하나님이 도와줘서 이익을 챙긴 것에 대해서 내가 요거 내 거다 해서 이제는 살 만하다 숨 쉴 만하다 거기서 오는 어떤 기쁨 같은 거 그게 없은 사람 없어요. 다 있는데, 그게 바로 내가 몰랐던 죄였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끝으로 그렇게 되면 우리는 누구 안에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 안에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내가 아니라 주님이 계약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바깥으로 계속 방출해 가는 거예요. 방출해내는 겁니다. 마지막에 47절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은 구원받는 자가 날마다 더하게 하시라" 이게 뭐냐? 바로 '결과성'이죠. 우리에게 원인이 없는 우리의 원인과 끊어져 있는 결과 성도는 주님 전쟁의 부속결과물이잖아요. 주님 전쟁의 결과물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일은 누가 합니까? 다음 정리해 보겠습니다. 일은 누가 합니까?


안 보이는 분이 보이는 우리를 앞장 서서 일을 하시죠. 일을 하실 때 그 싸움의 형상은 대립과 투쟁이 되겠습니다. 그 대립과 투쟁은 뭐냐 인간이 각자가 인간이 육신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관측하게 되는 나의 의와 그리고 주님의 의 되심과 하나님의 의 되심이거든요. 하나님의 의가 의로 드러나는데 내가 방해물로 매일같이 아직도 살아있습니다라는 것을 아는 기쁨에 우리 같이 늘 만날 때마다 그 아는 기쁨 내가 이제 이렇게 죄 밖에 내놓을 게 없네요. 뭐 죄라도 드실 건 드시도록. 죄인인데 만날 수 있거든 만나주시면 감사하죠. 이런 식으로 주 안에서 만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믿었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모순적인 말씀 바랄 수 없는데 내 것이 아니고 내 대신 나 대신 주님이 주신 결과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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