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사도행전 2장 17절 (가려진 실상) 241203a-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2장 16절부터 21절까지 보겠습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아멘.
거기서 19절 20절을 보게 되면 이 점을 한번 유념해 봅시다. 자연이 망가지고 무너지는데 인간이 왜 관여되느냐. 해가 변하고 달이 변하고 피가 되는데 모든 것이 어두워지는 그 자연세계에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왜 예언을 하게 되고 환상을 보고 영을 부여 받아야 되는가? 그 점이 매치가 안 되지요. 자연은 자연이고 인간은 인간이잖아요. 해를 움직이는데 우리가 어떻게 도움준 거 있습니까? 밤에 달이 빛나는데 인간이 보태준 것 있어요? 없잖아요. 상관이 없는 거예요. 상관이 없는데 성경은 상관이 있는 걸로 되어있어요. 그럼 상관관계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자연이 망가졌는데 인간이 예언을 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 예언한다는 말은 자연이 무너지는데 개입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인간이 성령 받고 예언을 하기 때문에 자연은 자연세계의 운행은 스탑이 된다. 자연아 그만 움직여. 너희들 소용없어. 너는 끝났어 라는 인간관계가 성립된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인간관계, 원인과 결과 관계를 어떻게 우리가 규명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가 먼저 이 상황에 삽입되어 들어가는 그 구절을 20절에서 한번 찾아보게 되면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 멀쩡하던 해와 달이 색깔이 변한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된다는 말은 누가 위에서 억누른다는 이야기밖에 안돼요. 해와 달과 별을 위에서 억눌러버리는 겁니다. 짓밟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공격받는 자연. 자연세계 전체가 공격을 받고 있는 거예요. 누가 공격하느냐? 누가 자연을 공격하느냐? 왜 공격하지? 멀쩡한 자연이 잘 돌아가다가 자연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왜 공격받을 짓을 했습니까? 그런데 가만있는 자연이 넘어뜨려진다 무너진다 주저앉는다 납작하게 된다. 자연 바깥에 다른 힘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자연 바깥의 다른 힘. 자연 바깥에 있는 힘이 이제는 자연을 철거하려고 하는 거예요. 치워버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럼 자연을 치워버린다는 말은 자연 속에 편안하게 살고 있는 인간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연이 무너지면 인간은 어떻게 되겠어요? 같이 무너지겠지요. 그래서 여기서 자연이 잘못 됐느냐 아니면 자연 속에 있는 인간 쪽에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자연하고 인간하고 같이 뭉개버리려고 하시는가. 그것을 한번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러면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해와 달, 별 이것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이것은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만들어졌어요 자연은. 넷째 날 이런 날은 해와 달 별 만들지요. 그 전부터 빛과 어둠과 땅과 바다 다 만들어졌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이렇게 6일 동안 자연을 만들어놓았거든요. 이제 그것을 철거하시려고 하십니다. 철거하시는 이유는 꼴 보기 싫다는 거죠 이제. 더 이상 운행할 가치도 없다. 그런데 6번째 날에 누가 만들어졌는가? 인간이 만들어졌습니다. 다 무너트리는 거죠. 무너트리는 이유가 7번째 날 때문에 그래요. 7번째 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은 이게 안식일입니다. 1,2,3,4,5,6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면 안식일이 정상적으로 유지가 되는데 안식에 대해서 침해를 받는다든지 안식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게 되면 1,2,3,4,5,6 이것을 제거해서라도 안식을 완전케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딴 것은 무너져도 뭐는 포기 못한다? 안식은 포기 못한다.
따라서 방금 제가 한 말, 딴 것은 무너져도 안식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 말을 통해서 1,2,3,4,5,6과 7 사이에 여기에 뭐가 있느냐? 단절이 있는 거예요. 끊어져있다. 무언가 끊어져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없앨 것은 없애더라도 살릴 것은 살리겠다는 주님의 뜻입니다. 1,2,3,4,5,6을 없앰으로서 제대로 안식일의 완성을 보겠다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이 안식일을 살리느냐? 아니면 안식을 살리느냐가 중요한데요. 안식일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은 시간에 속해요. 시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다. 시간입니다. 그런데 1,2,3,4,5,6 시간 전체가 날라간다는 말은 안식일 자체도 이거는 날라간다는 뜻이에요. 시간 자체를 거부하니까. 그럼 남는 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안식일이 아니고 안식이 남겠지요. 안식. 히브리서 4장에 나와요. 하나님께서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다. 이 말은 새롭게 함으로서 안식을 안식답게 완성시키겠다는 그런 취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마저 다 무너진다면 무너지기까지 하면서 안식을 살리겠다는 것은 이거는 누가 안식하겠다는 것이냐를 분명히 해야 돼요. 이거는 인간도 무너진 판에 안식할 수 있는 그 주체, 주인공. 주인공은 따로 있는 거예요.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냥 안식하고 싶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이렇게 자연세계가 무너지는 이유가 이 정도 해도 대충 정리가 된 거예요. 어떻게 정리가 되느냐 하면은 안식은 실상이다. 그리고 이 창조된 세계는 허상이 되는 거예요. 안식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은 실상이 되고 창조된 세계는 허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 창조된 세계에서 허상으로 보지 않고 창조된 세계를 실상으로 보는 자들이 있지요. 그게 누구냐 하면은 바로 인간입니다. 또는 인간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이 자연세계를 실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너뜨리겠다는데 인간은 무너질 리가 없다고 고집부리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무너뜨리는 이유는 안식이라는 실상을 위해서 무너뜨리겠다는데 인간들은 그냥 그대로 갑시다 하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그냥 이대로 그냥 살면 되잖아요 라는 식으로 인간은 밀어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은 왜 인간이 실상에 속하지 않고 허상에 속하느냐. 오늘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겁니다. 인간은 자연세계 속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거나 증명할 근거가 없다. 여러분 살아있어요? 살아있습니까? 인간은 살아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정녕 죽으리라 라고 했어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 이후에도 본인이 죽는 게 아니고 살아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세계를 통해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 어떤 토대를 갖지 못해요. 토대를. 자연세계가 있음에 내가 살아있다 하고 서로 결부되어있습니다.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Walden이라는 책이 있어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책인데 이 사림이 1814년에 자급자족하겠다고 메사추세츠 근처에 숲속에 들어가서 혼자서 자연과 함께 살겠다고 들어갔습니다. 자발적 빈곤이라고 취지로. 그래가지고 사람은 자기가 먹고 사는데 있어서는 하루에 3시간만 일해도 충분하다. 나는 집도 필요없다. 나는 자연과 교감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의미다. 이렇게 살아야 정상이다. 그 책 써서 대히트를 쳤어요. 법정 스님부터 해가지고 간디부터 해서. 사실은 이 사람 자기 엄마가 많이 도와줬어요. 수시로 김장해서 줬는지 모르겠지만 많이 도와줬거든요. 간소하게 살기, 단순하게 살기, 소박한 숲속에서 해와 달과 별과 대화하며 살기. 하버드 출신인데 인생을 깊이 알아서 깊이 알겠다고 자연 속에 들어갔어요.
그 사람의 취약점은 뭐였는가? 자연이 무너진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절대적으로 숭고한 자연과 교감하면 나도 절대적인 나의 존재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살아있음을 자연과 대비하면서 확인하고 증명하기를 원했던 겁니다. 소로라는 사람의 이러한 의식은 사실은 도시에 살아도 그리고 어디 시골에 살든 도시에 살든 고기를 잡던 농사를 짓던 금융회사 출근하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의 한계를 보여줘요 한계를. 살아있다는 것을 왜 확인하고 싶어할까요? 살아있는 것만 실상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실상. 이걸 다시 이야기하면 간단합니다 이 사람의 주장은. 살아있음에 진리 그 자체. 앞에 뭘 하나 더 붙이면 정확하죠. 내가 살아있음의 그게 나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게 진리다. 내가 살아있는 게 진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요. 성경은 선악이 없어야 된다. 선악지식이 없어야 이게 실상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과 악마는 선악지식을 갖추는 것이 실상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 45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라고 되어있어요. 유대인들은 모세를 거론합니다. 모세한테는 하나님의 법이 있거든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까 ‘나’라는 인간은 여기 살아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이것은 실제로 있는 실상이다. 이 실제로 있는 실상을 실제로 내가 살아있고 내가 느끼는 진짜 세계라는 것을 그 다음부터 인간은 가만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걸 증명할 거리를 찾아요. 증명할 거리를 찾는데 그들이 멋진 것을 찾았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율법을 받은 그 율법이 내가 지금 생각하는 모든 것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최종적인 토대가 되고 근거가 된다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졌고 그들은 말하길 율법은 나한테 주어졌다는 거예요.
따라서 나한테 주어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얘야 너 십계명 지켜야지. 십계명 지키면 너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훌륭한 자질을 가진 백성으로 살아있는 거야. 네가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으면 그게 제대로 증명이 되는 거야. 어때? 네가 그 기회를 놓칠 거야? 얻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교회 나와서 성경말씀 설교를 들으면 사람들은 아 나보고 죽으라는 이야기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고요 내가 살아있다는 이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보증해주시는 방법이 하나님께서 추가적으로 나에게 나 있음에다가 추가적으로 말씀을 덧붙여주시는구나.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천국 백성이 되니까. 그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런데 성경에서의 율법은 누구한테 줬습니까? 여러분들이 성경공부 좀 하고 복음 공부 좀 했으면 아시겠지만 율법은 누구한테 줬습니까? 예수님한테 줬지요. 예수님에게 준 거예요.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에게만 준 거예요. 사람 이름에게 안 줬습니다. 사람의 이름은 노아 때 홍수 때 다 죽여버렸어요. 다 죽여버렸다고요. 증명하고자 하는 그 대상 자체가 다 날라가버렸어요. 그때 개입된 것이 뭐냐? 노아언약이라는 겁니다. 언약은 인간세계가 허상이라는 것을 까발리는 용도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걸 폭로하는 용도로 주어진 겁니다. 노아 홍수에서 노아가 의인이라고 했지요. 자, 노아홍수에서 노아가 의인이다. 그것이 노아를 구원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안 했습니다. 노아를 구원한 것은 노아가 의인이다가 아닙니다. 방주였어요. 방주였습니다. 의인하고 갖다 붙여도 구원 못 받아요.
하나님은 노아를 죽이고 노아를 살렸습니다. 죽일 때는 노아의 존재를 허상으로 죽이고 살릴 때는 노아언약을 위해서 노아를 살린 거예요. 노아 언약을 위해서. 토대를 새롭게 개입시키는 겁니다. 토대를. 나 여기 있습니다 구원하세요 이런 거 없어요. 성경에 그런 거 없어요. 뭘 보고 너를 살리는데? 저 보고 살리세요. 나는 너 보고 안 살릴 거야. 너 보고는 안 살릴 거야. 다른 근거가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어야 돼요.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베드로가 예수님 3번이나 배신했다. 그 베드로 왜 찾아가십니까 주님께서? 빠이빠이 하시지 왜 찾아가시는 겁니까? 주님께서 십자가 언약을 위해서 베드로 찾아간 거예요.
여기서 퀴즈 나갑니다. 베드로가 죽을 때 자기 마음대로 죽습니까? 주님 뜻대로 죽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못 죽어요. 네가 원하는 죽음을 내가 너한테 용납하지 않겠다. 네가 원하는 죽음을. 네가 원치 않는 죽음으로 갈 거야. 철저하게 베드로의 살아있음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베드로에게 중요한 것은 베드로 속에 하나님의 새 언약이 살아있는 게 실상이에요. 베드로가 살아있는 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베드로를 증거 하면 안돼요. 베드로가 증거 한 것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을 증거 해야 되지 베드로 본인이 살겠다고 설치는 것은 애시 당초 그런 베드로는 살리지 않아요. 그때 베드로는 누구냐? 시몬이죠. 시몬. 시몬이 이름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베드로로 바뀌잖아요. 이름부터 전에 너하고 상대 안 한다 이 말입니다. 시몬아! 예! 상대 안 해. 베드로야! 예! 상대해. 주님은 베드로를 상대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을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권한이 없어요.
인간은 뭐든지 상대하려고 하는 것은 나 잘 났다를 증명하는 용도로 타인과 상대하거든요. 남들과 만나는 이유가 뭡니까? 남하고 대화하는 이유가 뭐에요? 내가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인 것을 매일같이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누굴 만나고 대화하는 거예요. 결혼한 지 35년 되었는데 두 사람의 대화가 없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우리 서로 증명하지 말자. 우리 서로 남편이고 아내고 그 자체를 증명하지 말자. 언제 갈라서더라도 신경 안 쓸 테니까. 대화 없음.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것은 우리가 실상이 아니고 허상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언약을 주신 겁니다. 그러면 이 허상이라는 말 자체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 실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실상이 아니라는 뜻이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이 성경을 보면서 성경을 파고들어가는 접근 방식에 대해서 놓치고 있는게 있어요. 보통 상식적으로 성경은 내가 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앎으로서 내가 있음이 하나님을 토대로 했을 때 나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정당하게 있다. 구원 받을만한 정당성을 나는 확보했다. 이것 때문에 교회 다니거든요.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뭐냐? 내가 있다 예요. 성경은 내가 있다로부터 성경을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뭐냐? 있음과 없음의 대비가 아니라 악함이 있고 선함 또는 의로움이 있다는거에요. 의로움이 있는 것을 가지고 실상이라고 하고 악함만 있는 것을 가지고 허상이라고 합니다. 허상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고 악만 딱딱하게 굳어져있다는 것이 허상이에요. 쉽게 말해서 없음보다 더 못한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없애지 않습니다. 부활시키죠. 인간에게 제일 골치 아픈 것, 안 죽는다는 것이죠. 마지막 때 무덤을 열고 악한 자를 부활시켜버려요. 내뺄 수가 없어요. 한번 다루었던 도구는 끝까지 다룹니다. 끝까지 밟아요. 너 인간이냐? 그러면 못 빠져나가요. 한번 인간 되었으면 자살을 100번 해도 없어지지 않아요. 자기 칼로 난도질해도 토막 살인사건 나도 없어지지 않아요. 주께서 다 조립해버립니다. 그러니 뭐 살다가 힘들면 죽으면 그만이지 그러한 부질없는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습니다. 좋든 싫든 연속적이에요. 그 본질이 연속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일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감사한 사람이 있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선악이 없는 상태, 선악지식이 없는 상태가 실상이고 선악지식을 가진 상태가 이게 허상 또는 악함입니다.
그러면 인간 존재는 누가 증명하는가? 내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입니까? 요청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존재를 증명하는 거예요. 증명하는 것이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인데 첫 번째 중요한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연세계에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고 했지요. 자기의 살아있음을 증명할 길이 없다. 첫 번째, 자연세계 속에서 내가 여기 살아있음을 증명할 길이 없다. 두 번째는 인간의 본성은 누굴 위하여 살해의지가 있다. 이거 창세기 4장입니다. 모든 인간은 타인에 대한 궁극적 인간의 본성의 끝은 그 인간의 모든 말이나 도구나 행위에 칼날은 반드시 누구를 향하여 죽이게 되어있어요. 죽이게 되어있습니다. 이거는 말릴 수가 없어요. 성경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잖아요. 그래서 인생동안 열심히 사는 이유는 한 놈만 팬다 하는 정신이에요. 한 놈만 죽인다는 정신으로 그것이 자기의 삶의 활력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 칼날의 최후에 노리는 그 대상자가 누구냐? 인간 본인은 그걸 몰라요. 그러나 뭔가 살해 의지가 항상 가득해 인간 본성에는. 이 살해 의지가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모르는데 주님이 알려줘요. 그게 나라고. 너희들이 죽이고 싶은 그 대상자가 바로 나라고. 어서 죽여라.
그러니까 교회 와서 예배 찬송 헌금 전도 이게 전부 이건 허상이에요. 구닥다리에 불가해요. 다시 말해서 살인의지를 감추기 위한 용도로 성찬식하고 세례식하고 예배하고 노래 부르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이런 거예요. 부모한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교회에 봉사 많이 하고. 이게 뭘 감추는 용도예요? 예수님을 살해하겠다는 의지가 그게 행여 들킬까 싶어서 자기 추스르는 모습이에요. 이거는 타고났어. 이거는 뭐 좋은 유치원 다녀서 가르쳐주는 게 아니고 이거는 교육과 상관없이 타고난 본성이 뭐냐? 주님을 향하여 죽이고자 하는 그 의지, 그 악마의 의지, 이게 인간의 전부입니다. 인간 본 마음의 전부에요. 그것을 누가 확인하느냐? 율법이 확인해주지요. 율법이.
그래서 가룟 유다는 차리리 이럴 것 같으면 내가 없어지겠다 하고 가룟 유다가 자살했잖아요.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없음보다 더 못한 게 뭐예요? 자살하기 전에 예수님을 팔아먹었잖아요. 이거는 자기가 어쩔 수 없어요. 자기가 그 심성을 거두어서 자기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은 도망쳤구요. 종교? 기독교? 교회 다니기? 취미활동이구요. 그 취미활동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축구입니다. 컴퓨터 게임이에요. 축구, 컴퓨터게임, 도박 주식투자, 이 모든 게 게임이거든요. 게임의 끝은 뭐겠어요? 너 죽고 나 살자 예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엄마, 직장생활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두고 조그만 김밥천국 분식집 하나 냈어. 엄마 나 잘 했지? 라고 30대 아들이 그런 이야기하면 엄마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죠? 직장에서 못다 죽인 상사를 김밥장사 해서 죽이려고 하느냐. 그렇게 생각하시면 100점입니다. 어떤 장사를 하던 그거는 상대에 대한 공격의지를 표현하는 거예요. 더 큰 가게 보면 저거 불 질러버릴까? 손님이 저 가게에 막 가는 거예요. 레시피가 좋아서 손님이 가게 되면 저걸 언제 불 지르지? 혼자서 안돼 신자는 그러면 안돼. 혼자 막 하지요. 그런데 이미 자기 속에 있는 살인충동은 머리 젓는다고 날라갑니까? 이미 생겼는데요. 이미 생겨버린 성격을 주섬주섬 허겁지겁 정리한다고 그게 사라질까요? 사라지지 않지요. 안 사라집니다.
첫 번째, 자연세계 속에서 내가 여기 살아있음을 증명할 길이 없다. 그 증명을 누가 한다고 했어요? 인간이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언약을 통해서 하면서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드디어 아벨을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증명했습니까? 형과 동생의 제사를 그냥 받으면 될 텐데 하나님께서 이상하게 형의 제사는 안 받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새 심기가 불편해가지고 아무 제사도 안 받는구나 이러면 살인사건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 제사는 받습니까? 동생을 제사를 받아버렸어요. 동생 제사를 받아버리니까 형이 하나님 받아버린 거예요. 도저히 못 참겠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일상의 용어를 창세기 4장에서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은 죄가 가인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다고 했어요. 죄가 더 쎄요 가인이 더 쎕니까? 죄가 더 쎄요.
그리고 이 자연세계는 로마서 8장에서 모든 자연세계는 피조물이 쓰러져요. 왜? 죄가 관영했으니까. 이게 실상이에요. 이 모습이. 그런데 사람들은 몰라요. 모르는데 언약, 말씀이라는 실상이 오면서 폭로당하지요. 아 인간세계라고 하는 것은 이게 하나님이 원하는 실상에 미치지 못하는구나. 실상이 아니고 나중에 뭉개져야 마땅한 세계라는 사실을 밝혀집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이 점을 잘 이해하셨다면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답변해보세요. 내가 살아있다 쇠퇴했다는 증거와 인식이 삭제되는 경우는? 이게 문제입니다. 힌트 드립니다. 한글로 한 자에요. 꿈이죠 ‘꿈’. 이게 뭐냐 사도행전 2장에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는 거예요. 꿈인데 성경에서 신약에서 새 언약 안에서 이 꿈을 무슨 꿈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랑의 꿈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할 때 안식일도 날라간다고 했지요. 안식일이 날라가면서 뭐는 살린다 했습니까? 안식만. 그러니까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교체에서 일어나는 인간세계의 실제는 그렇지만 안식이라는 것은 느낌 감정이잖아요. 안식. 아 편하다 감정이잖아요. 물론 하나님의 감정이지만. 이게 하나님의 아주 냉혹하고 냉정한 역사, 하나님의 일하심,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일으키신 사건의 덩어리, 집합체 이럴 때는 굉장히 실제적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뭘 붙였습니까? 사랑을 붙였다고요. 실제적인 자연현상에 이게 사랑이 붙어집니까? 사랑이 과연 붙여지느냐? 성경에서는 이걸 붙여버려요 사랑을. 성령하면 인격체 할 수 있는데 이 앞에 사랑의 영이 붙어버리면 사랑의 영? 뭐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랑의 영.
그러니까 사랑이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연세계에서 실제로 실체가 아니잖아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러니까 이것은 어디 속하느냐? 바로 인간세계를 실상으로 본다면 인간세계에서 나타나지 않는 층, 그걸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은닉층’. 숨어있는 것, 잠복되어있는 은닉층. 480억 개의 신경세포의 상호교환으로서 인간 인식이 생긴다고 이야기하거든요 뇌 과학에서. 그런데 480억 하면서 뭘 갖고 있느냐 하면은 눈에 보이는 것 말고 은닉층을 합류하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이런 생각하는 줄 몰랐는데 하는데 불쑥 튀어나오지요. 은닉되어 있는 거예요. 숨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의 말씀대로 살겠다 하지만 불쑥불쑥 내가 예상 못한 다른 일이 발현되는 이유는 꿈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에서 내가 모르는 다른 일들을 나를 가지고 활용하시고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은닉층이죠.
숨어있는 층을 이용해서 요새 만들어진 게 뭐냐? chatgpt에요. 인공지능. 자동적으로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는 기능이 은닉층을 활성화시켜서 나온 거예요. 옛날에 고정적 기계적인 메카니즘으로 입력을 했는데 은닉층이 막 나와요. 사랑? 어디까지 사랑입니까? 사랑 얼마면 돼? 이건 정할 수 없잖아요. 사랑의 특징은 사랑은 꿈 같은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사라져요. 내가. 그래서 진정 구원받은 사람은 내 구원을 언급을 안 해요. 주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주님 뭐할까요?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그 이야기하지 도대체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면 나 천국 보내주겠습니까? 이런 거래가 안 나온다니까요. 이게 뭐냐? 꿈의 세계에요. 실제 세계. 그러면 사도행전 2장 17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영이라고 했습니다. 앞에 뭘 붙이라고 했습니까? 사랑의 영을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예언은 뭐냐 하면은 실상이 실상도 아닌걸 허상세계에 실상이 실상답게 나타내는 현상, 그 현상이 뭐냐? 자연세계의 붕괴입니다. 10분 쉽시다.
■강남-사도행전 2장 17절 (가려진 실상) 241203b-이근호 목사
사랑 앞에서 내 생각이 가동 중단돼요. 사랑하는 사람이 "짬뽕 잡술래요? 짜장면 드실래요?" "좋을 대로 하세요. 나는 주는 대로 먹겠습니다." 자기 생각이 가동 중지가 돼요. 이것은 바로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되고 싶은 나보다 삭제 당하고 싶은 나가 우세하다.‘ 되고 싶은 나 삭제당한 거예요. 삭제당한 것보다 우세해요. 이게 뭐라고요? 사랑이고 그 사랑 뒤에 뭐냐면 사랑의 무슨 영? 사랑의 영. 여러분 고린도전서 13장 생각하면 되고요. "사랑은 성내지 아내하고" 성령을 은사를 받아야 그게 가능한 거예요. 되고 싶은 나가 삭제당하고 싶은 나가 되고 싶은 나를 이것을 침몰시키고 이걸 뭉개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이 없다. 성령을 안 받은 상태에서 지금 오순절 성령 이야기니까 성령을 안 받은 상태에서는 안 받은 상태에서 교회 나오면 이게 뭡니까? '삭제당하는 나'는 없고 뭘로 하게 됩니까? '되고 싶으면 나'가 있죠. 이걸로 교회 제단에서 울고불고 난리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하나님께 아부하고 충성 봉사하겠다고 다짐하고, '되고 싶은 나' 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보험 드는 이유가 뭡니까? 삭제 당하고 싶어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되고 싶은 내가 있어서 보험 드는 거예요? 남편이 17가지, 16가지인가 생명보험 들었다. 남편을 위함입니까? 자기를 위함입니까? 자기 위해서 남편 죽이고 생기면 타겠다는 거 그런 뜻이잖아요? 뭔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동 중단 사태가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근데 그게 나에 대한 파멸이 아니고 나에 대한 파멸이 아니에요. 왜 파멸이 아니냐 하면은 이미 우리가 이 세계에 태어날 때부터 파멸이기 때문에 그래요. "정녕 죽으리라" 해당되는 세계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꾸 고집 부리면서 나는 안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존재로 태어나는 거예요. 이 죽은 존재로 태어난 것은 제가 얼마 전에도 설교한 내용이 생각나는데 뭔가 그 씨앗이 생명이 있어야 그 씨앗이 죽어서 열매를 맺지 생명도 없는 거를 백 번 죽었다 깨나도 거기서 열매가 안 맺어요. 우리는 생명 없는 씨기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생명이 없다고요. 예수님을 본받아 십자가 지고 가도 우리는 생명이 없어요. 그러면 이런 점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확실히 하는 그 근거가 뭐냐? 첫 번째 게 중요한 건 뭐였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길이 없다. 두 번째는 인간의 본성은 마지막에는 누구를 노리는 살인 충동이다. 세 번째는 뭐냐? 아주 걱정돼요.
자꾸 세 번째 하니까 진짜 다 잊어버릴까 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주님의 이름은 차이다' 차이. 이 말은 뭐냐 장벽이다. 장벽 또는 뭐 장벽보다 노골적인 표현은 '방파제'. 파도가 방파제를 치는데 파도가 육지로 넘어오지는 못하죠. 방파제가 워낙 강력해서 예수님의 이름은 방파제입니다. 허상의 인간들이 천국에 오지 못하도록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수 주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장벽인 이유가 '차이'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은 바로 실상과 허상 둘 다를 경험하신 분입니다. 둘 다를 양쪽 세계를 유일하게 알고 계시는 분이 주의 이름이에요. 오늘 사도행전 2장 21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뭡니까? "구원을 얻으리라" 하죠. 이 주의 이름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앞에 있는 뭉개짐을 겪어야 되는 겁니다.
뭐냐하면, 앞에 있는 자연 세계의 뭉개짐과 더불어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이러한 너무나 차이 나는 그 두 개의 차이 나는 양쪽 질을 다 경험한 자만이 바로 그 모든 능력이 예수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차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성도는 뭡니까? 성도도 뭐가 돼요. '차이'다. 양쪽 세계 꿈의 세계와 허상과 실상을 가로막는 차이다. 그리고 성도 존재는 장벽이다. 뭐냐 하면 어중이 떠중이 천국 못 오도록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배치해 놓은 장벽이에요.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오지마" 장벽이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성경하고 예배 잘 참석하면 구원 받습니까?" 방파제. "저리 가" 왔다가 맞고 "그냥 가 집에 가세요." 파도가 치고 파도 밀린 그곳으로 돌아가세요. 이 역할을 성도가 하는 겁니다. '나도 당신처럼 성도가 되고 싶어요.' 그거는 내 소관 아니죠. 왜냐하면, 나도 내 마음대로 성도 안 되었기 때문에 거기서 이렇게 하면 성도 됩니다. 말해 줄 어떤 말도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 꿈은 '집단적'이에요.
이거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보통 꿈은 어떻게 됩니까? 개인적으로 각자 꿈이 있죠. 왜냐하면, 과거에 꿈의 이야기 잠깐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지만 잠깐 소개하면, 인간의 꿈은 인간의 뇌 속에 있는 시각 정보가 청각 정보보다 활동하지 않는 밤중에 오래 남기 때문에 꿈에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고 동영상이 떠요 인간의 기억 속에서 동영상이 뜬다구요. 램수면 속에 동영상이 뜹니다. 꿈속에서 뜨는데 이 동영상이 어떤 식으로 나오느냐 그 꿈에 의미를 나타내려고 예를 쓰면서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두뇌 속에 있는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장소가 언어를 담당하는 장소가 가까운 데 있어요. 그래서 꿈은 언어적이에요. 언어구조적이에요. 뭔가 의미를 전달하려고 애를 써요. 의미라 하는 것은 언어의 배열에 의해서 발생되는 게 의미거든요. 이 순서 저 순서하고 왜 저렇게 짜집기 안 하고 이렇게 짜집기 하는가?
저렇게 하면 의미가 없어지지만 이렇게 하면 의미가 생기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짜집기 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꿈은 의미를 전달하려고 애를 써요. 애를 쓰는데 그게 뭐 의미 있는 것 같은데, 이게 의미가 없어요. 그 의미는 해몽하는 데서 자기가 꿈 깬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해석을 덧붙이면 그게 꿈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그게 꿈의 의미를 꿈속에서 찾는 게 아니고 그걸 해석하면서 꿈의 의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조작이지요 엉터립니다. 그냥 꿈은 그냥 개꿈일 뿐이에요. 이게 뭔가 우리한테 뭘 예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은 꿈 꾸었다가 깨고 난 뒤에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왜곡해서 해석을 해대는 겁니다. 목사님 꿈에 뭐 의미가 있습니까? 꿈의 의미가 있습니까 묻는 당신이 지금 의미다. 의미는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시각적으로 나타났다는 것과 그것이 언어적인 어떤 조립의 형태를 갖는다는 거 그거는 평소에 인간들이 얼마나 언어적으로 의미를 산출하기 위해서 공을 들이고 있는가를 잠자면서 그게 티가 나버린 겁니다. 그 의미가 무슨 의미겠습니까?
아까 공부했지요 나는 왜 존재하고 나는 왜 사는지 내가 살아있는 게 맞지? 나는 지금 안 죽었지? 나는 지금 가치 있는 삶 맞지? 이걸 자기가 자기한테 강력하게 세뇌 주는 그게 의미죠 일방적이죠. 그런데 오늘 보니까 꿈이 개인적이 아니고 집단적이에요. 집단적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개인의 관여를 최소화 시켰다 이 말이거든요. 개인의 경험을 하나님께서 이 예언과 꿈과 환상 가운데서는 개인적인 꿈을 안 넣어주는 거예요. 그걸 넣어 줘버리면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계시가 되지를 못하고 본인의 욕망의 화신이 돼버리는 거예요. '목사님 꿈에 주님이 나타나 가지고 키가 180 하고' 누구 닮았나? '정우성이 닮았는가 잘 생겼는데 네가 주의 종이 되어라 그 말씀을 해 가지고 이제부터 신학교 왔습니다.' 자꾸 그게 너무나 개인적이에요. 집단적이 아니에요. 그러면 집단적이라는 말은 공유하는 의미가 주어질 때 이거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계시를 받았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 집단적인 너가 이야기하든 내가 이야기하든 집단적으로 동일한 의미가 나와 산출되는 거 그게 바로 복음이에요 복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다른 말은 '주님이 나를 삭제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삭제하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이거는 구원받은 사람의 공통점이에요.
그런 사람 찾기 힘들지만 어쨌든, 자 이걸 그냥 말로 하는 것보다 실제로 예를 드는 게 좋겠죠. 룻기에 한번 보겠습니다. 룻기 4장 4절에서 5절요. 보아스 이야기하고 룻 나오는 거기 대목입니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 이르되 모압 지방" 4장 3절 "모압 지방에서 올라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내게 구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너가 무르거든 무르려니와 너가 무르지 아니하거든 내게 구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에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지 아니하니라 보아스가 가로되 너가 나오미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그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이랬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차 타고 가다가 만약에 차 사고가 났다 합시다. 그래서 당황해가지고 아는 전화 번호가 삼촌밖에 없어가지고 전화를 해가지고 "삼촌 나 사고 냈어. 저 차 벤츠인데 다 망가졌어 완전 폐차 직전이야 어떡하면 돼?" "가만있어 봐라 내가 갈게" 갔어요. 벤츠 주인이 "이거 2억 6천짜리 S클라스 벤츠인데 어떡할 거예요?" 그래서 삼촌이 "내가 물어줄게요 내가 물어줄게요." 얼마나 고마운 삼촌입니까? 내가 물러드리겠습니다. 2억 6천 낼게요 신차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4장 5절에 보면 그냥 재산만 물어주는 게 아니고 죽은 자의 기업 거기에 결혼까지 해야 돼요. 그때는 조카 나오면 안 되죠. 그러면 친구 딸 합시다. 친구 딸이 차 사고 내가지고 벤츠 박아가지고, 2억 6천 할 때 친구 아버지가 "내가 물어줄게" 그니까 그 친구 딸이 철딱서니 없는 딸이 한 말이 "아저씨 저 결혼 안 했어요." "니하고 시집 가줄게" "아저씨 솔로예요?" "그래 아직 솔로야 너하고 첫 결혼해줄게" 이 말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또 나오미 가정에께 한 게 그 일이에요. 아시겠어요? 도대체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가서 뭘 믿겠다는 말입니까? 말씀을 믿어야 되는데 지금 이렇게 할 사람이 있어요? 보아스 같이 행동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헌금도 아까워서 천 원 내냐 5천 원 내가 지금 이거 가지고 몇 푼이나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주제에, 우리가 성경을 보고 믿고 행한다는 말은 적어도 이 정도 수준 돼야 클래스가 이 정도 클라스가 돼야 돼요. 총각인데 보아스는 총각이잖아요. 그럼 룻은 누굽니까? 과부잖아요. 완전히 젊은 처녀 고를 수 있는 그러한 카드 상품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중고시장에 나온 사람하고 결혼하는 거예요. 도대체 교인들이 이거 빼고 저거 빼고 다 빼고 또 뭘 믿고 교회 나온단 말입니까?
모세의 말씀을 모세의 율법이죠. 모세의 율법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이거는 이미 거짓입니다. 아까 그 요한복음 5장 45절 봤지요? 그들이 모세 율법을 믿는다 했지요" 주님이 뭐라 했습니까? 모세가 너희들 고소할 거야 모세가. 성경 말씀은 믿고 지키는 용도가 아니에요. 우리가 얼마나 허당인가를 속으로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들추어내는 용도가 바로 성경 말씀이에요. 어느 성경 말씀 하나 우리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은닉층, 우리가 모르는 숨어있는 성경 말씀에 숨어 있는 것이 얼마나 우리 바깥으로 활성화되는가 그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우리는 뭐 우리는 유대인처럼 자꾸 말씀을 지켰다 하거든요. 지켰다 지켰다 하는데 그거는 다 지킨 것도 아니고 그것도 지킨 것도 아니지만, 하여튼 간에 우리는 지켰다고 보는 거예요. 자기가 아는 성경 구절을 들이대면서 여호와 증인 그런 거 잘 하잖아요. 여호와 증인 그런 거 또는 내비게이터 그런 거 잘한다 이 말이죠. 내비게이터 막 성경 시험 치거든요. 사람들이 그러한 성경 말씀을 지키겠다는 말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따로 있어서 그래요. 어떤 목표가 있고요.
이 정도로 착하면 이 정도로 훌륭한 신앙이라면 그런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 목표가 자기를 계속해서 위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걸 또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그 원인은 선악체계입니다. 선악과 다시 한번 가봅시다. 선악과 지식을 따먹지 말라 그러면 너 죽는다 선악지식을 따먹으면 죽는다 했어요. 선악 지식을 따먹으면 인간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악마의 말대로 스스로 뭐가 돼요. 신이 되죠? 신이 된다는 말을 오늘날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편해요. 굉장히 간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입자가 되는 거예요. 딱딱한 입자. 최종적으로 더 이상 분할될 게 없는 끝까지 남아있는 1, 단 한 개 사람들은 겉으로 넘버원을 생각하잖아요. 나는 최고가 되겠어 이번 수능 한 개 틀렸어 이런 거 만점 맞았어 사실은 이건 거짓말이에요. 최고가 되는 게 아니고 성경적으로 봤을 때는 뭐냐 '온리원'이에요. 넘버원하고 온리원이 다르죠 넘버원은 남들 중에 최고고 온리원은 이거는 유일한 거, 오직 나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이 추구한 것은 온리원 오직 나밖에 없어요.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밖에 없다는 것의 최고 라이벌이 누구겠어요. 신이겠지요. 그래서 하늘 아래 태양이 둘 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의 본성은 누구를 겨냥하게 됩니까? 신을 죽이는 것으로 겨냥하는데 어느 인간도 신을 죽이겠다는 사람은 없어요. 니체도 신을 죽이겠다는 게 아니에요. 신이 죽었다고 이야기했지 내가 죽이리라 하지 않습니다. 아는데 하나님께서 신을 죽이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 세운다니깐요. 하도 우리 자신의 정체를 우리가 모르고 있으니까 우리 속에 살인 충동이 마지막 충동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자꾸 말씀을 우리 앞에 들이대는 거예요. 죽여라 죽여라 자꾸 들이대는 거예요. 모세 율법을 주니까 그 당시에 모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누구를 죽이려고 했습니까? 모세 죽이고 우리 장관 하나 따로 뽑아서 애굽으로 돌아가자 리턴하자 누가 이야기했어요? 광야 때 같이 동행했던 백성들이 주동자로 일어나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게 실제 우리 인간사회입니다.
그럼 여기에 대한 그 대책 이제는 대책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인간들밖에 없는 대책 주님의 대책은 뭐냐? 아까 제가 룻기를 언급했는데 약간 힌트가 있어요. '희생'입니다. 희생. 희생은 어디서 나오는가? '은닉층'에서 나와요. 왜냐? 껍데기는 전부 다 지 잘났다 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의 바닥에서 은닉층에서 희생이 올라옵니다. 사사기 시대 때 세계는 뭐냐? 힘의 우열이에요. 힘의 우열을 논하는 세계 힘센 자가 권력을 쥐는 세계 그 사사시대 때에 룻이라는 이방 여인이 있었으니 라고 이야기가 되지요 그 룻이라는 여인은 바로 희생의 기표로서 희생의 상징으로서 이스라엘에 뜹니다. 이스라엘에 피어오르기 시작하죠. 보아스와 만나서 그 룻의 증손자가 누구냐 다윗이었어요. 근데 그에게서 다윗까지 가는 그 계통이 은닉층이에요. 숨겨진 거예요. 마태복음 1장에 족보 나오죠. 1장에 족보 나오는데 14대 14대 세 번째 14대에 나온 그건 은닉층이에요. 유명하지도 않아요. 마리아 남편 요셉은 유명인사도 아닙니다. 숨어있는 거예요. 마치 거지 나사로처럼 숨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닉층과 은닉층의 발현으로서 거기에 노선에 속한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 관련된 인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힘의 세계 힘의 우열의 세계에서 특징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힘의 우열 세계 이게 구약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은 뭐냐 하면 전쟁의 시대예요. 전쟁의 시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방 민족보다 우리가 함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힘이 더 세다 사사기부터 해서 여호수아 그런 걸 다 경험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전쟁의 시대에서는 힘의 우열 힘이 센 자가 승자가 되는데 이방민족의 신이나 이방민족의 그것보다도 하나님인 여호와가 힘이 세다 라는 여호와를 그들은 뭐 했느냐 믿었습니다. 여호와를 믿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믿었을 때에 모순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힘센 분이 자기 백성을 힘센 분이 인도하면 될 텐데 왜 힘센 하나님이 계신데, 힘이 약한 이방 민족에게 왜 사로잡혀 갔을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그 남아도는 힘을 왜 발휘 안 해요?
힘센 하나님을 뭐라고 하냐면 만왕의 왕이라 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합니다. 전능하시고 만왕의 왕이잖아요. 교회에서 그 집사님들 기도할 때 뭐라 합니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시고 모든 걸 아시는 하나님, 좀 도와주소. 뭐 단축해서 좀 도와주세요. 사정이 이렇게 힘듭니다. 좀 도와주세요. 우리 애가 수능 또 점수 또 안 나왔어요. 좀 도와주세요. 전세인데 이게 이중계약돼서 사기당했습니다. 내가 20대 청춘을 바친 돈 다 날아갔습니다. 어떻게 살까요? 좀 도와주세요. 헬프 미. SOS 막 탄원하고 하죠.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 돈 많잖아요.' 그런 뜻이거든요. 하나님 말씀만 하시면 물 위를 걷는다면서요? 물 위까지 안 바랍니다. 그저 오병이어 정도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구약에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힘센 자 그들은 이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힘센 하나님이 있으면서도 힘 약한 민족에게 그것도 여호와 없는 민족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설명할 길이 없네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설명해야죠 그들이 설명 못하면 여러분들이 설명해 보세요.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교회 많이 다녔잖아요. 오래 다녔잖아요. 그동안 목사님 설명 안 해줬는가요? 궁금하면 500원.
이 힘센 전쟁은 뭘 보느냐 하면 이걸 이야기해요. '사로잡혀 있음' 너희는 지금 육신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육신의 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전쟁을 하신 겁니다. 내 너희들 편이야 내 너희들 도와줄게 이게 아니고 너가 현재 못 빠져나오는 그 죄의 힘에 또는 악마의 힘에 하나님 원수의 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사로잡혀 있기에, 나보고 도와달라고 한다는 거예요. 죽여달라고 하는 게 아니고 도와달라는 거예요. 죽여달라는 것은 죽여 없애버리세요. 하는 뜻이고 도와달라는 것은 지금 살아있는 것을 보호해 달라는 거예요. 유지해 달라는 겁니다. 죽기 싫다는 거예요. 살려달라는 것은, 하나님 뭐하십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인데. 주님은 살아계시죠. 살아계신데, 주님은 차이를 두고 장벽을 가지고 살아있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간에 죄 악마 또는 죄, 여러 가지 악함 죽음 저주가 장벽을 쳤지요. 이스라엘 죄에 의한 장벽 그 위에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가오려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쪽에 제시한 제물이 여기서 그냥 오는 게 아니고 희생을 하면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무슨 법이냐 제사법입니다. 제사법에 피 내는 제사법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인간은 모르는데 하나님 알아요. 너희들의 영역과 공간이 뭐가? 환상적인 요소가 강한 악한 환상적인 요소가 너희를 꼼짝 마라 하고 둘려쳤다는 사실을 인간들만 모르고 있어요. 인간들만, 그런데 누가 그 낌새를 챘느냐? 다윗이 챘어요. 그 낌새를 한번 봐야 되지 않습니까? 다윗의 낌새를. 시편 22편 1절 누가 한번 크게 읽어보세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며 돕지 아니하시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아멘 다윗이 지금 뭐를 느끼고 있느냐 하면은 내가 하나님 쪽으로 가는데 장벽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 내가 속해 있는 이 공간이 집단적으로 버려진 공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리고 다윗은 왕이기 때문에 대표자로 지금 기도로 표현하는 거예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이 버렸다는 말이죠. 나를 버린 것이 하나님의 정당한 조치라는 뜻입니다. 나를 돕지 아니하시고.. 돕지 않아야 돼요. 돕지 않아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냐하면은 도울 어떤 건덕지가 없어요. 악한데 왜 도와요. 의가 없는데 뭘 도와요. 버린 것이 정당한 조치지요 내가 신음한다. 안 듣습니다. 듣질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내가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뭐냐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과 뭐가 발생돼요? 차이가 나는 거예요. 결국 이스라엘이 몰랐던 것은 뭐냐? 그 차이남을 몰랐던 거예요. 신약의 성도들은 오순절 성령 받은 성도들은 뭘 알아요? 그 차이를 아는 거예요.
주님의 자신이 하시는 일은 꿈과 환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거고, 거기에 우리는 집단적으로 그 주위에 하는 일에게 새롭게 실행에 옮기는 사람으로 뽑혔을 때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래 구상했던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구약 때 생각한 이스라엘 아니고 진짜 백성은 성령이 올 때 비로소 감을 잡는 거예요. 이 모든 일이 나의 부귀영화나 나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는 그 사실이죠. 아까 강의할 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성령이 앞에 뭐가 붙는다 했습니까? 사랑의 의죠 자 다시 한번 복습해 봅시다 사랑이라는 것은 무슨 용도다?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삭제시키는 것 그 힘이 사랑의 힘이에요.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가 아니라 뭘 할까요? 하라 하면 하겠나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의 특징 중에 하나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달라고 하지 않는 것. 자기의 유익을 요청하지 않는 것. 하나님 이거 나한테 도움 되니까 주세요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음을 인식하는 것 그게 사랑이죠. 왜? 나는 존재하지 않아도 그분만 존재하면 그걸로 충분하게 됩니다.
내 따로 내 머리 굴리는 내 생각 가동 안 해도 주님 생각으로 주님 생각의 그 여파가 파급되는 결과가 나의 삶이니까. 주님만 생각하면 되지 귀찮게 나까지 생각할 필요 없다. 그럴 때 성도는 주님과 더불어 이 땅에 장벽이 돼요. 방파제가 된다고요. 아직 중요한 건 아직 멀었습니다. 좀 더 많이 나와야 돼요. 시작은 했습니다. 사로잡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사로잡힌 자를 여러분들이 구원하려면 그 다음은 어떤 조치가 준비되면 되겠습니까? 사로잡힌 자를 그 다음에 어떻게 하면 돼요? 사로잡으면 되죠. 참 쉽죠잉?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면 돼요. 에베소서 4장 8절.
힘 위의 힘이니까. 일단은 그 악한 힘 안에 있는 자기 백성을 건져내버리면 이거는 어느 꼴이 되느냐 하면 에덴 동사에 있는 꼴밖에 안 돼요. 에덴 동산에 있어 봐야 또 따먹습니다. 뱀이 들락거리니까 안 돼요. 먹음직도 보암직도 하고 그것 때문에 고민해서 뭐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목사님 말씀을 들었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말씀은 은혜 됐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게 말씀이 은혜 되게 되면 뭐가 삭제당합니까? 두 번 돌아서든 세 번 돌아서든 101번 돌아서든 돌아선다는 내 자체가 그걸 잊어버려야 되는데, 말씀에 은혜 받고 하니까 이거는 뭐 은혜 받아가지고, 내가 또 또 멀쩡한 내가 또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마귀가 또 꼬시니까 휘까닥 또 자빠져 가지고 옆에 또 다 깨지고 정형외과 왔다 갔다 하면서. 안돼요. 안돼요. 하는데, 뭐가 안되죠? 아까 했죠. 뭔가 되고 싶은 나가 삭제돼야 되는데 아직도 뭐 되고 싶은 내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대신 여러분 되고 싶은 거 제가 말씀드려요? 나 복음 알고 나로 인하여 온 식구가 다 복음 알고 그다음에 아들 취직 잘 되고 딸 의사한테 시집 가고 시집만 간 게 아니고 딸 하나 먼저 놓고 아들 놓고 둘 놓고 딸 하나 놓고 아들만 낳은 게 아니고 저 둘이 멀리 가서 살아서 시어머니 안 돌봐도 되는 먼 곳에 저희끼리 오순도순 잘 사는 거. 아주 멀리 가버려 네덜란드 가버려. 그냥 좋은 소식만 전해주고 가끔 용돈이나 보내오면 되지 쓸데없이 애 봐달라 소리 안 하는 그런 상태. 그러다가 늙은 아버지 계셨는데 내 복음 알고부터는 갑자기 자는 잠에 이제 간다 해놓고, 누군지 2시간 반 만에 돌아가신 거예요. 근데 하필 그 아버지가 직장생활 하다 돌아가셨어 부조가 얼마나 들어오는지. 근데 보니까 어릴 땐 재산이 있네 유언장에 또 집은 너하고. 이런 게 막 적혀있다. 이 말이죠. 여러분 이런 걸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할 때 시편 68편은 달리 돼 있거든요. 18절에 보면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로 인간으로서 또는 피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은 뭐냐? 주님께서 전쟁에서 힘이죠. 그냥 힘 희생 아니에요. 그냥 힘이에요. 이방민족 저주 안에 있는 이방민족 언약도 모르고 언약도 알지도 못하고 받은 적도 없는 이방민족을 이스라엘 하나님이 쳐들어가서 그걸 정복하고 포로를 잡아왔다 이 말이에요. 포로뿐만 아니고 뭐까지 챙기느냐 선물까지 하나님께서 받아야 합당하다는 겁니다. 왜? 그 전쟁의 공로자가 우리 주님이시니까. 받아놓고는 하나님께서 그 전리품 속에서 느긋하게 앉아 계시는 거예요. "내 너한테 이겼지 너 내가 이겼지 너도 내가 이겼지? 그 선물 니가 나한테 바친 거야. 이제 너꺼 아니야. 내꺼야 알았지?" 이렇게 하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시편 68편 18절의 상황이에요.
그런데 이게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시고 오히려 선물을 구약 때 완성한 완성 상태를 선물 받을 자격도 안 되는 인간에게 이 상태를 주께서 자기 몫으로 그대로 공유하면서 이제부터는 너와 나와 함께 살자 이게 신약의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 좀 다르죠? 다른 이유는 중간에 누가 끼어들어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끼어들어서 그래요. 예수님이 성과를 내었고 그 성과 낸 것에 예수님이 자신의 것으로만 돌리지 않고 자기 식구들을 패밀리와 공유하겠다고 그렇게 제안을 하셨고 아버지는 그 제안을 수긍하셨고 그 수긍했다는 증거가 뭐냐? 성령을 예수님의 성령을 주심으로써 나의 모든 승리에 같이 기뻐하자고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의 영입니다. 사랑의 영이라 했는데 아직 그 본문은 제가 언급을 안 했죠. 지금 와서 한번 언급을 해 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대목인데요.
4장이 아니고 3장 18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돼 있죠. 여기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뭘 생각해야 됩니까? 이게 면적적도 아니고 수평적도 아니고 입체적이라는 사실이죠. 입체적이라 하는 것은 어떤 특정 공간이 마련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미국에 이민 가나 한국에 살다거나 북한에 가거나 중국에 가도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뭐냐? 네가 중국에 살면 그것조차도 주님의 사랑인 줄 알아라 이 말입니다.
거기서 중국 살면서 주님의 사랑 장모님 주님 사랑 많이 받았죠? 깊이를 많이 알면 되잖아요. 왜? 어차피 나의 존재는 삭제됐으니까.. 그리스도가 파견하고 보내준 그곳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입니다. 자 여기서 오늘 강의에 마지막 대목이 또 남아있습니다. 마지막 대목을 하기 전에 내가 우려했던 거 첫 번째 두 번째 다시 한번 복습 들어갑니다. 걱정이 돼서 잘못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뭐라 했습니까? 이 자연세계 속에서는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가 없다. 이유가 뭡니까? 자연이 뭉개지니까. 거울을 깨버리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도 같이 깨지잖아요. 인간의 과학이 뭡니까?
자연을 보고 시작하는 게 과학이잖아요. 자연이 무너지는 과학을 인간은 못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무너지게 되면 이 과학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과학자들은 빅뱅이라고 이야기해요. 한번 빵 하고 터져버린 그 에너지가 계속해서 우주를 팽창시킨다고 하는 겁니다. 우주를 팽창시키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어디서 나오는지, 물질에서 나오는지 아무도 몰라요. 힉스장이라는 데서 에너지가 상호작용에 의해서 첫 입자가 등장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에너지 상호작용을 왜 하는데? 몰라요. 모른다고요.
그냥 내질러 보는 거예요. 뭔지 몰라요.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끝까지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뿐 이걸 붙잡고 가야 된다. 다른 대안은 없다. 이게 전부예요. 눈에 보이는 이 자연세계. 그 자연세계가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다? 존재의 이유가 나온다는 거예요. 존재의 이유 아시죠. "좀 기다려봐 내 달려갈 테니까" 존재의 이유. 내 존재의 이유는 뭐가 있음에 있는데, 자연이 있음에 존재의 이유가 있는 거예요. 이게 불교고 점성술이고 타로점이에요 전부 다. 어미 무당 좋으라고 춤추는 줄 압니까? "오늘 취직은 되겠습니까?" "된다~" 부채 도사. 왜 그런 짓 해요?
'나'라는 존재를 내가 괜찮게 정립하고 싶어서 누구를 찾아가는 거예요. 무당 찾아가는 거나 목사 찾아가는 거나 차이 없습니다. 둘 다 의도는 동일해요. 신부를 찾아가든지 열혈 사제를 찾아가든지 마음대로 하라 해요. 두 번째 어떻게 했습니까? 인간의 본성은 이미 결정 났죠? 온리 나, 온리유~ 오직 나를 위해서 걸리적거리는 것은 다 죽여버립니다. 윤석열 죽여버립니다. 이재명 죽여버립니다. 영국 축구팀 이름 뭡니까? 아무거나 유나이티드 뭐 죽여버려요. 왜? 감히 토트넘을 이기다니 이거는 용납이 안 돼요. 우리 손흥민이 있는 팀을 이기다니 용납이 안 된다고요. 모든 게 보세요. 나와 연관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이에요.
세 번째. 방파제. 육신으로 천국 올라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커버하는 집단이 뭐다? 교회에요. 천국 올 수 없다. 어떤 방법으로 천국에 올 수 없어요. 그거 이야기하고 구원받은 자예요. 왜? 그 교회 안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의 이름이 없고 무슨 이름이 대체되어 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대체되어 있기 때문에. 똑같은 꿈을 꿨어요. 주의 이름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꿈. 그것만이 유일한 실재죠. 이제 나머지 네번째.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고난입니다. 고난은 쉬워요 왜냐하면, 방파제가 뭐를 낳습니까? 고난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하나님은 악마라 했지요 그렇게 이야기해서 주님이 얻은 게 뭡니까? 죽음이죠. 주님 입 다물고 있으면 안 죽었어요. 너희 아비는 악마라 해서 죽었잖아요. 똑같은 길을 성도가 가야 돼요.
그래서 골로새서 1장 24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어디에 채운다? "내 육체에 채운다" 그리스도에 했던 아버지가 예수님께 줬던 그 기능의 연속성을 위해서 아직도 내 육체는 지금 안 죽고 살아있다는 겁니다. 뭘 위해서? 방파제. 방파제가 내용이 뭔데요? 오직 사로잡은 자만 구원하는 거예요. 사로잡고, 사로잡은 자만 주님의 영생의 은혜를 사로잡은 자만 구원해요. 어디서 사로잡았습니까? 마귀에 있던 자를 주님께 일방적으로 끄집어내시고 그에게 예수님의 모든 사랑을 담아버리면 그 사람은 이제 남은 고난의 길을 가야 될 하나님의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시다시피 모든 사도들은 어떤 길을 갔습니까? 고난 길로 갔지요 나쁜 짓 했어요? 그래서 고난 받았어요? 아니죠. 그들이 고난 받는 이유가 뭡니까? 오직 복음을 위하여. 그 복음의 내용이 뭔데요. 복음의 내용이 뭡니까?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된다는 것. 주의 이름이 뭔데요?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그 일로 통해서만 비로소 내가 허상이고 실상은 내한테 찾아온 사랑의 성령이 유일한 실상이라는 것. 이것 때문에 스데반 집사 돌에 맞았고 나머지 사도는 모가지 다 날라갔거든요. 목 베였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전승에 보면 목 베였어요. 그러면 끝으로 만약 여러분들이 복음 때문에 목 베이는 일이 벌어진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처하면 됩니까? 어떤 태도를 가지면 돼요? 왜 이제 왔어요? 나 그동안 여기서 제대하고 있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는 나의 고난은 끝나고 이제는 쉼만 남아 있군요. 요쪽 부분 쳐주세요. 요게 쉽게 갈 수 있습니다. 바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예수님이 보였잖아요. 허상이 삭제되니까 실상이 뚜렷하게 등장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말씀의 세계지, 마귀가 만들어준 보암직도 먹음직도 하는 그 세계는 다 허구고 허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실상을 가렸습니다. 마귀에 빠져서 세상 것으로 성공해서 보란 듯이 잘났다 자랑질을 하려고 살다 보니 말씀의 실상을 놓쳤습니다. 정말 우리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허구적 존재인지를 날마다 십자가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