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한 몸에 두 마음

아빠와 함께 2025. 1. 28. 09:17

강남-사도행전 2장 29절 (한 몸에 두 마음) 241217a-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2장 합니다. 2장 23절에 보면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베드로가 설교를 상당히 난해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알아서 내어줬다 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이 알아서 내준 걸 모르고 자신이 처단할 수 있고 처리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지막 표적을 예수님이 해야 될 마지막 업무를 그런 식으로 장식했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의 하신 일의 마지막 업무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십자가로 자기 일을 마감했어요. 살리고 죽이고 하는 것은 누구 몫입니까? 부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몫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까지만 일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자들아 너희들이 부활까지 넘보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도 죄 있는 육신을 가졌고 너도 죄 있는 육신에 있다면 죄 있는 육신이 있는 곳에만 가야하고 넘보지 말아야 할 것은 넘보지 말아야 해요. 꼼수를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죽으면 주께서 부활해주겠지 이것까지 자꾸 고려하지 말아라 하는 그것이 오늘 베드로 설교의 핵심요소입니다.


24절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망의 고통에서 계속 매여 있지 않게 하셨다.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라고 되어있거든요. 예수님이 죽으시고 아버지 손에 맡김으로서 나타난 새로운 사실은 사망에 매여 있음. 어디어디에 매여 있음이 이게 실제 현실로 완전히 노출되었습니다. 사망에 매여 있으니까 그동안 예수님뿐만 아니라 육신을 가진 모든 인간들의 모든 행동과 태도, 강의 듣는 태도 이 모든 걸 포함해서 설교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어디에 매인 현상이라는 거예요? 사망에 매여 있는 현상들을 보여주었다.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을 때에 그 명분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 십자가 못 박을 때 명분이 이거였습니다. 종교에 관한 문제, 종교 문제 때문에 그래요. 본디오 빌라도가 인정했어요. 너희들 종교잖아. 너희들 알아서 해결해야지 이렇게 하니까 유대인들이 우리 종교로 해결하는데 사람 죽이는 것은 당신 소관이잖아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요구한 것은 뭡니까? 종교문제는 이미 우리 손에서 해결 났는데 종교문제가 틀어졌다는 그 결과로 저 사람 좀 죽여주세요 라고 요청한 겁니다. 죽여달라고 요청한 거예요 예수님을.


그럴 때 베드로가 그 상태를 그러한 요구를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은 법 없다고 해요. 법 없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거예요. 이 법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사망의 권세 안에서 결국은 법 없이 행동하는 것이 최종 행동이다 이 말입니다. 왜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뭐 여러 가지 이유를 대겠지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복음을 못 받아들이겠다 이렇게 하겠지요. 그걸 베드로가 한마디로 하면 네가 법 없이 마음대로 생각하는구나. 법이 없이. 그런데 그 법 없다는 걸 뭐로 표현합니까? 네가 사망에 매였다. 다시 쉽게 말하면 죽을 네가 죽을 값을 하고 있구나. 제 값을 하고 있구나. 사망에 매여 있는 모습을 톡톡히 잘 보여주는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여러분들에게 물어봅시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무엇의 권세로 죽었다는 겁니까? 사망의 권세로 마귀의 권세로 악마의 권세로. 이게 현실이에요. 현실은 인간이 모르는 다른 권세로 현실이 설명이 되지 인간들끼리 모여서 헌법 재판소 탄핵 그거는 전부 다 뭡니까? 그 현상 자체가 뭡니까? 죄에 매여 있는 모습이죠. 죄악에 매여 있는 모습. 그들 나름대로의 법을 거론하지요. 법을 거론하지만 베드로 입장에서는 법대로 한다고 자꾸 억지 쓰지 말고 그냥 본능대로 했다고 이야기해. 그게 솔직해. 본능이 뭐지요? 사망이 시키는 대로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했어.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 그게 정답이야 라고 베드로가 설교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진도를 더 나가야 하는데 25절에 다윗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다윗’. 다윗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은 다윗이 예언한 게 있다는 겁니다. 다윗은 선지자니까요. 선지자에 대해서 분명히 해야 될 게 있어서 선지자는 예언하는 사람이죠. 이 예언은 나 또는 타인이 확인 가능한가요? 확인 가능합니까? 어떤 사람이 남들한테 미쳤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는데 멀쩡한 사람인데 자기는 예지몽이 있다. 외계인이 쳐들어온다든지 하늘에서 기름이 떨어진다든지 새 떼가 막 곤두박질치는 그런 거 사람들이 광분해서 달려드는 거 깨보니까 그게 꿈이었단 말이죠. 꿈을 꿨는데 누가 달려들어서 물었는데 꿈같으면 고통이 없어야 되는데. 천둥소리 치는 거 같은데 가족들한테 물어보니까 아빠 미쳤어?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니까 그 사람이 판단을 내린 거예요. 이건 예지몽이다. 남들은 모르지만 나는 예언하고 있다 라고 해서 그 사람은 이건 분명히 종말이 올 것을 나한테만 유독 종말을 알려줬다 해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직장에 가서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인데 몰래 회사 중장비 빌리고 몰래 자기 꿈대로 되어질 이 미래에 대해서 자기의 피난처를 건설하고 했단 말이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미쳤다고 하지요. 병원 가보라고 하고 그런데 자신은 병이 아니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리고 어느 날 보니까 진짜 태풍 치고 폭풍 오니까 여보 그날이야 그날. 마지막 때가 왔어. 외계인이 침범하는 마지막 때가 왔어. 빨리 내가 공사한 지하실에 가자. 지하실에 딱 들어갔어요. 들어가고 난 뒤에 그때가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 오는데요. 아내가 있다가 여보 이제는 그 마지막 순간 지나간 것 같애. 밖에 문 열어 봐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이 좀 열어 봐. 아니야 당신이 믿었으니까 당신이 열어 봐 라고 하는 거예요. 딱 열어보니까 바깥에 아무 일이 없었어요. 그럴 때 그 사람이 자기가 예지몽 있고 하는 것을 본인이 그 믿음이 본인이 확인된 겁니까? 안 된 겁니까?


야고보서 5장에 보면 9절에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있지요. 자, 그러면 이 문을 열어서 예수님이 계신지 아니면 아무도 없던지 아니면 마귀가 기다리든지 그 문을 누가 열어야 돼요? 구원받는 내가 열어야 돼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열어주고 내가 확인을 해야 되는 겁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문이 하나 있어요. 이게 천국 문일지? 세 가지 경우에요. 문 여니까 천국 문이다. 주님이 기다리고 있다. 이 문 열면 예수님이 기다리든지 마귀가 기다리든지 아니면 예수도 아니고 마귀도 아니고 애초부터 그냥 망상을 했는데 셋 중에 하나에요. 그런데 그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제 질문은 본인이 열어야 돼요? 타인이 열어줘서 확인해야 돼요? 어느 쪽입니까? 다른 교회에서는 말하지 않는 복음을 알았는데 복음을 알았으니까 지옥에나 가라 나는 천국 갈란다 했는데 천국 갔는데 문이 하나 있단 말이죠. 수십 년 동안 복음 알았으니까 문 열면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겠다 했는데 그 문을 본인이 열어야 돼요? 남이 열면 그 뒤에서 아 맞네 이렇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해야 돼요? 재미있지요. 재미있는 문제입니다. 예지몽이 있다. 예언이 있다 하는데 성경에 예언자들 많이 있잖아요. 그 말 들을 때 그 말 보는 순간 어느새 자기가 예언자같이 된 예언자와 같은 처지에 있다고 스스로 자신을 그런 식으로 조작을 합니다 인간은. 남이 믿지 않지만 나는 특별히 선택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예언의 말씀을 믿게 했다 라는 자의식을 스스로 만들어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교회에서는 이런 경우 어떻게 하느냐? 다른 교회는 처음부터 고민이 안돼요. 왜? 처음부터 양다리 걸치기 때문에 이거 아니면 비트코인이거 하지 뭐. 양쪽을 다 양다리 걸쳤거든요.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하나도 고민할거 없어요. 로또 사면서 전 재산 다 바치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그냥 재미로 하는 거예요. 로또 한 장에 얼마입니까? 로또 한 장 사는 거 그냥 재미로 사서 되면 로또고 안 되면 그만이죠.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회에 목숨 바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복음에 목숨 바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바보가 어디 있어요. 수녀도 안 바쳐요. 신부도 안 그래요. 목사는 물론이고요. 그 성경을 곧이곧대로 믿는 그들이 바보 아닙니까? 그게 바보잖아요. 기존 교회에서 성경 믿는 게 바보입니다 그런 소리 안 하지요. 왜? 돈이 안 들어오니까 그러면. 교회 안 나오니까. 그냥 해보고 아니구나 그렇게 후회 없도록 합시다. 이걸 누가 했느냐.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했어요.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지은 책이 팡세예요. 팡세에서 하나님 믿는걸 내기로 설명한 겁니다. 일단 하나님 믿어보시고 되면 이거는 대박 나는 거고 안 되도 그다지 손해 아니잖아요. 십일조 낸 것도 푼돈 냈다 치고 착한 신부들 밥벌이 해줬다 생각해서 넘어가면 결국은 여러분 손해 안봅니다. 이걸로 해서 그들은 하나님 믿기를 권장했어요.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아주 똑똑한 사람이죠. 수학자고. 예언은 인간치고 아무도 안 믿어요. 심지어 누구도 안 믿는 줄 압니까? 예언하는 본인도 안 믿었어요. 말씀이 말씀되지 말씀 받았다고 구원받은 사람 아닙니다. 예언자 본인도 안 믿었어요.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누가 이야기했어요? 세례 요한이 했지요. 세례 요한이. 아무도 안 믿습니다. 모든 예언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마가복음 9장 잠시 보면 24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아버지가 말이 앞뒤가 안 맞아요. 내가 믿나이다 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나 = 믿음 없지요. 믿음 없는 자가 누구라고요? 나예요. 믿음 없는 자가 아빠 아닙니까. 아빠가 하는 말이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했지요. 그런데 내가 믿음 있다 없다가 주님 보시기에 믿음 있는 상태가 아니잖아요. 내가 믿음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내가 주님 앞에 요청하는 일도 믿음 있는 일이다? 믿음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다? 믿음 없는 상태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일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예수님이 일으켰지요. 예수님이 일으킨 이유는 어떤 인간도 믿음을 도와달라고 하든 나 믿음 없습니다 하든 나 믿음 있습니다 하든 주님 보시기에 몽땅 다 무슨 상태? 믿음 없는 상태죠. 다윗도 포함해서 믿음이 없는 상태에요. 이걸 성경은 뭐라고 우리에게 요청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기뻐해야 될 일이다. 자기가 믿음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냐 이 말입니다.


여동생이 언니한테 언니라고 하잖아요. 언니가 있다가 너 나 알아? 아가씨 누구세요? 동생이 언니는 언니잖아. 나는 동생이고. 그럼 언니가 그걸 믿어? 믿지. 인간은 절대 믿음 없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이성적으로 제대로 판단한 것은 믿을만한 것은 챙기고 정신 없을 때는 믿음 없이 했다 이렇게 할 수 있지만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믿음 있음을 위한 확인이라고 본 거예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 그러니까 교인들이 교회 와서 목사 설교 듣는 그 이유는 뭐냐?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에요. 나를 기쁘게 하는 방법은 뭐냐? 나 다운 조건을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나 다운 조건을. 내가 나 다움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은 뭘까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괜찮아 보이는 개념들 있잖아요. 사상들. 그걸 주워 끌어 모으는 거예요. 덕지덕지 가지한테 다 끌어와요. 왜? 괜찮은 거니까. 괜찮은 것을 끌어왔으니까 자기는 어떻게 됩니까? 괜찮은 나 다움에 보탬이 되겠다 하겠지요.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성경 말씀, 예수 믿어라 그러면 구원받는다 이거 괜찮은 거예요? 뭐 안 괜찮은 거예요? 예수 믿으면 어디 간다? 영생 얻는다 하니까 괜찮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자기한테 끌어모으는 거예요. 내가 복음 안다 하면서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법 없음. 다른 말로 하면 충동대로 사는 모습. 이 모든 충동대로 사는 모습은 내가 나를 늘 확인하기 또는 내가 나 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늘 실험을 반복하기. 길 가는 사람 붙들고 아저씨 저 어떤 사람이에요? 물으면 이 사람 미쳤구나 저리 가세요! 하고 가지요. 그런데 길 가는데 마침 내 친한 친구를 만났어요. 나 어떤 사람이야? 친한 친구가 친절하게 대답했지요. 그러니까 그 두 사람 사이는 친구 사이.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확인시켜주고 기꺼이 실험대상이 되어주는 관계. 친구 아이가~~! 그게 친구에요. 교인들은 술 안 먹지만 나이 들어서 만나자 하는 것은 술 같이 먹을라고 부르잖아요. 친구 사이에요. 내가 누군지를 늘 확인하는 관계.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평생을 가도 자아에서 벗어나지를 않죠. 그래서 교회에 가서 복음을 듣던지 뭘 하게 되면 이런 나를 교회 와서 또 시험하고 또 확인해요. 목사님 이번에는 어느 말씀 가지고 나를 채우면 정말 나 다운 내 모습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킬만한 가치 있는 나로 계속 내가 유지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조로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교회 가자 이렇게 되지요. 이것을 구약에서는 나와 내 몸과 다른 몸으로 내 몸 하나, 내 몸과 다른 몸 둘, 타인이죠. 나와 타인 사이에서 이것을 시도한 것이 구약 이스라엘 역사라면 신약에서는 나 라는 한 몸 안에서 두 개가 내 안에 나와 또 다른 나와 이 사건이 한 몸 가지고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차이점이에요. 그게 오늘 베드로 설교에 다윗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예언자인데 구약에 있는 예언자이면서도 신약 상태를 미리 구약에서 실시된 일이 예언자 개인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겁니다. 다윗은 분명히 예언을 했는데 그 예언의 내용이 본인이 누군지를 확인해주는 게 아니고 자기 아닌 다른 나를 확인해주는 그 내용이었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그런 상태지요? 다들 성령 받았으니까. 일단 좋은 거니까 땡겨놓고 봅시다. 아까 마가복음 9장 있잖아요. 귀신 나간 아들, 내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나 믿음 없음을 도와주는 것을 믿나이다 이런 식이죠.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단어를 그냥 막 자기 조건 지키기에 급급해가지고 이 단어가 적당한 단어인줄 몰라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성경에 마가복음에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그러한 한도 안에 갇혀있다는 것, 사망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사망에 매여 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해주는 거예요. 누가 그런 식으로 표현해줍니까?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그런 형편에 있다는 것을 노출시키니까 이게 바로 무슨 소식? 기쁜 소식이다 이 말이죠. 이게 기쁜 소식이잖아요. 안 기뻐요?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이에요. 내 짓거리를 극단까지 몰아세워가지고 내 짓거리를 다 까발려주니까 주께서 지적한 짓거리를 죽을 때까지 하면서도 계속 기쁜 거예요. 왜? 에게!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늘 확인시켜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내가 얼마나 믿음 있는지 확인하러 왔는데. 전혀 엉뚱한 소리 하니까. 문 밖에 주님이 계시든 마귀가 있든 그리고 예수님 하신 게 모두 구라고 조작한 거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든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내가 스스로 내 운명을 확인하는 그 자체가 이게 허망한 짓이에요. 내가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 확인하는 그런 짓거리 자체가 이게 하나님의 예언과 전혀 상관없는 일인 것을 그것이 바로 확인 돼야 돼요. 확인 돼야 된다고요. 성경에서 좋은 거 따와가지고 내가 천당 가는데 유리한 걸 끌어모으겠다 이런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용납되지만 그렇게 해서 그들은 망했다는 뜻이에요. 신약에서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0절-31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인간들이 어떻게 살던 뭘 해도 엉터리니까 허물치 않았는데. 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믿을 만한 증거를 주었다. 모든 인간이 믿지 못하는 증거를 주께서는 믿음의 증거로 주셨다. 자기 힘으로 인간은 믿지 못하는 증거를 믿음의 증거로 제공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주님의 성령 받아서 주님의 십자가 영이 들어온 사람은 이제는 누구하고 싸웁니까? 나와 내 속의 낯선 나와의 싸움이에요. 그래서 이 모습을 셋으로 나눠보겠습니다. 성령 받은 성도가 있고 이쪽이 하늘 쪽이고 이쪽이 땅 쪽이죠. 하늘 쪽에서는 나의 구원이 가능해요. 성경에 있듯이 내 속에 있는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너희 몸을 살린다. 가능한 것은 가능한 요소를 주께서 먼저 성령으로 삽입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 쪽에서는 뭘로 나타나요? 불가능해요. 당신은 어떻게 성령 받고 어떻게 구원 받게 되었습니까? 그러면 세상 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서 설명하기가 곤란합니다. 내가 뭘 해서 가능하다면 설명이 되는데 불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에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그게 예언대로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언대로. 어떤 인간도 말씀 듣고 깨달아서 구원되는 사람 하나도 없게 한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이에요. 말씀 그대로입니다. 아무도 구원 받지 못해요. 또 마찬가지에요. 또 여기에도 성령 받은 성도가 있고 이쪽 이쪽 나눈다면 구원은 뭐냐 하면은 개별적이에요. 개별적. 너 올라와. 개별적으로 구원되는데 밑에는 집단적입니다. 다 지옥에나 가라. 여기는 법 없는 충동 자체가 예수님을 죽이는데 합세할 그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단을 통째로 누구는 잘났고 못났고가 이게 의미가 없어요. 전체 다가 사망에 매여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 뽑힌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입니다. 다윗. 이 사람이 하늘 쪽에서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종의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고 주인은 따로 계시다. 이쪽에서는 뭐냐? 주인의식을 갖고 있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 앞에서 달란트 비유 있지요. 모든 게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다 누구 것입니까? 주님의 것이니까 시간부터 내 몸부터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나한테 실험하는 것도 주께서 하게 하셔서 하는 주인 의식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의식이지만, 종의 의식을 갖고 있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너희들은 너를 장악할 주인이 없지. 왜냐하면 개별적으로 자기가 신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전체적인 종의 의식이 없어요.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미 주인이 확고하게 보장된 사람은 세상의 협박이나 공갈에 안 넘어가는 이유가 성도는 누구 지시 받습니까? 종이니까 주님 지시 받고 사는 것이지 사람 지시 받고 살지는 않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나 다움을 유지하는데 있어 그 대가로 거부할 게 생기는데 그 거부가 바로 생명이다. 내가 나 다움을 지키고 확인하기 위해서 행동이나 태도에 나설 때 그 사람은 지금 뭐가 날라간 겁니까? 영생이 날라간 거예요. 예수님의 희생이 날라간 거예요. 언니 나 믿지?! 하면 언니가 또 안 믿는다고 할 수 없잖아요. 나 너 믿지 그런데 왜 그걸 나한테 이야기해. 나 언니한테 확인받고 싶어. 내가 지금 제대로 살아가는지. 그럴 때 언니가 뭐라고 해야 됩니까? 그래 잘 살고 있어 이렇게 하지 말고 잘을 길게 하는 거예요. 자~~~~~~알 살고 있어. 이 말은 뭡니까? 네가 너 잘 살기 위해서 애쓰는 그것은 바로 영생을 천국을 포기한 대가다. 천국을 포기한 대가로 자기 챙기고 있는. 시간에서 시간 밖으로 또는 역사에서 역사 밖으로. 다른 말로 하면 역사에서 개념 안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무슨 현상이 일어나야 하는가. 비극입니다. 비극. 내가 더는 나를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망가졌음을 확인해야 되는 내가 이미 나한테 어떠한 좋게 좋게 나를 이렇게 꾸미고 평가하려고 해도 그것은 다 거짓인 것을 알게 되는 비극이 발생 돼야 되지요.


사람이 돈을 번다. 왜 법니까? 돈 있는 내가 돈 없는 나보다 더 가치가 높으니까요. 이게 내가 원하는 쪽이기 때문에. 돈 없는 나를 원하는 게 아니고 돈 있는 나를 원했던 거예요. 돈 있는 쪽이 내가 그런 나 다움을 확인하고 싶어서 인간은 돈에 매진하고 돈 사기당하면 괴로워하고 이렇단 말이죠. 그런데 그거는 비극입니까? 희극입니까? 비극을 목표로 하는 거예요? 희극을 목표로 하는 거예요? 목표가. 내가 잘되는 것이 눈물 나고 슬픈 일입니까? 기분 좋은 일이죠.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데서는 뭐를 집어넣는가? 역사에서 개념으로 할 때 뭘 집어넣느냐 하면은 바로 비극을 집어넣어 버려요.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그 대표적인 예가 신약은 십자가니까 구약에서 그게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는 그 대목입니다. 미운 아들이 아니에요. 미운 아들은 따로 있어요. 이스마엘. 그 말고 사랑하는 아들, 이스마엘 말고 이삭. 걔 없으면 못살겠다 하는 걔. 걔를 바치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것을 로마서 4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게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거예요. 너무나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스러운 비극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비극으로 인하여 비극 안에서 비로소 세상에서 예상도 못한 큰 희열이 기다리고 있어요. 큰 환희가 기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기쁨이 오늘 본문대로 한다면 더 이상 사망에 매여 있지 않게 된 나. 악마로부터 매이지 않는 나. 그걸 사도행전 2장에서는 바로 오순절 성령을 통해서 나타난 결과고 현상이라고 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어요. 그러면 천국 문이 있는데 거기 예수님이 있는지 마귀가 있는지 아니면 다 조작한 거고 아무것도 없었는지 그런 것을 실험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비극을 당한 사람한테는. 없지요. 비극적인 존재가 문을 열어서 예수님 기다린다는 것은 아직 제대로 비극 맛을 못 봐서 그래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직도 약간이나마 낙관적인 희망을 갖기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받았으니까 혹시 주님께서 고생 많이 했지?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 있잖아요. 고난 받으면 주께서 영접해서 면류관 주시고 그것을 계속 하기 위해서 무모한 실험을 계속 반복해보는 거예요. 이케요? 저케요? 이런 고난해볼까요? 아프가니스탄 선교, 내가 인질 한번 돼 볼까요? 브라질 아마존에 가서 모기한테 물려서 말라리아 죽을 고생 해 볼까요? 안 그러면 남수단에 가가지고 울지마 톤즈 그런 거 해볼까요? 우물파기 해봐? 왜 그런 짓하는 거죠? 건전한 거 해서 나를 높여주는 것은 성경에 보니까 이거는 주님의 고난의 길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자기를 계속 시험하되 이번에는 어느 시험해요? 비우고 더 비우고 낮추고 낮추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됨을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천주교에서 하는 모든 것이 껌 같아요. 씹으라고 만든 종교 같아요. 천주교에서 잘 부르는 노래 아베마리아라는 노래 있어요.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가사를 한번 불러드리겠습니다. 아베 마리아, 성모 마리아께 문안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자비로우신 성모마리아여,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으소서. 어린소녀의 기도, 갑자기 옥색 드레스 입고 반쯤 꿇어앉고 하늘 쳐다보고 있고 위에 광채 비추는 그림. 오늘도 무사히 앞에 글자 딱 붙어있는 거. 마리아 당신은 이 힘든 세상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당신의 보살핌으로 우리는 편히 잠 듭니다. 쫓겨나고 버림받고 욕 받을지라도 동정녀 이 어린 소녀의 기도를 들으소서. 물론 이 소녀는 나이 제한이 없지요. 소녀는 15살 뿐만 아니라 82살도 가능합니다. 성모여 어린아이의 간구를 들으소서. 당신의 보살핌으로 우리는 편히 잠 듭니다. 아베마리아. 이게 가사에요. 지금 이 노래를 부르고 성모 마리한테 묵주 하겠다는 말은 끝까지 희망의 선을 내가 놓지 않겠다는 거예요. 배 300척 날아가도 12척 배가 아직도 내게 남아있습니다 하는 식이에요. 이거는 오기입니다. 신앙이 아니고 오기에요. 자기에 대한 집념이고 집착입니다. 이걸 아름답게 미화하고 있어요. 성령을 받지 않은 전형적인 모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뭐냐 하면은 보통 성경에서 이야기를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러면 마태복음 5장 3절은 뭡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러면 이 천국은 무엇과 관련되어있다는 말입니까? 나 말고 이 세상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천국이라는 것이 죽어보면 알겠지 가 아니라 지금 천국이 무엇에 먼저 연결되어있어요? 심령, 마음이죠.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에 와 있다는 거예요. 천국이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너의 가난한 심령으로 실제로 천국이 있다는 것을 네 마음을 통해서 내가 너를 증명했다는 겁니다. 뭐 해가 떨어지고 달이 떨어지니까 그것만 쳐다보고 아 천국이 가까이 왔구나 우리는 이러고 싶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훅 들어오는 거예요. 어디로?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우리 마음. 심령이 가난한자는 천국이 너희 것이라. 이미 천국이 마음으로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께서는 어디를 노리고 공략한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공략하는 거예요. 신기한 기적 이런 거 말고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 말고 문 열고 주님 계신지 마귀 있는지 확인하는 거 말고 확인하기 이전에 우리 심령에 천국이 도달하는 방식으로 내가 천국을 이루겠다. 네 마음이 달라졌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 첫째 시간 마지막으로 그 성령은 누구의 마음이죠? 하나님의 깊은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죠. 인간들은 알 수 없었던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만 알았던 그 예수님의 깊은 마음, 창세전에 언약했던 그 마음이 어딜 공략한다 했습니까? 놀라운 기적 이게 아니고 세상 권세 누리는 이거 말고 그건 천국이 아니고 우리 마음, 우리 마음을 공략해서 주님 마음과 우리 죄 있는 마음이 연합이 될 때 이미 천국은 계시가 된 겁니다. 일단은 기뻐하시고 10분 쉽시다.

 

 

강남-사도행전 2장 29절 (한 몸에 두 마음) 24121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천국을 보여 달라고 할 때는 가난한 심령이 된 것을 보여주면 되겠죠.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마찬가지 요구한 거예요. 예수님 천국이 어디 있습니까? 보여주세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나를 보았거늘 왜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근데 예수님이 나를 보았다. 할 때 예수님의 키가 몇 센티고 그런 걸 보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식의 어떤 내용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는지를 보라는 거예요. 제자들이 그 마음을 알아챘습니까? 몰랐어요. 옆에 있어 같이 생활하면서도 예수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몰랐습니다. 그것은 두 개의 마음이 섞일 수가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의 계획은 뭐냐 두 마음이 섞일 수가 없는데 섞일 수 없어서 구원이 안 되는데, 내 백성이 안 되는데 이걸 섞이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참 이게 보통 기적이 아니에요. 큰 작업이에요. 여기서 구약적인 이스라엘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동행 하셔서 그들을 광야에서 이끄시고 약속의 땅에 했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이야기한 것 중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할 때 네 마음을 다하여 하는 거 있잖아요.
그리고 사도 바울이 할례 행하는 걸 보고 너희는 육신의 할례를 행했지만, 무슨 할례를 지금 안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네 마음을 왜 잘라내지 못하냐는 거예요. 마음을 잘라내지만 내 마음을 잘라 내지를 못하는 거예요. 내가 잘라낸 내 마음은 폐기 돼야 될 마음인 것을 내가 인정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내 마음대로 할 때 그 마음은 전혀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는 마음인 것을 왜 본인이 그걸 수긍을 못하고 인정을 못하느냐 말이죠. 그거 하면 되거든요. 그러면 자기 몸에 썩은 마음이고 이거는 지옥 갈 마음인 것을 아는 방법은 새로운 마음이 들어오면 돼요. 하나님의 합한 마음이 인간의 몸은 하나인데 거기에 또 하나의 마음으로 들어오시면 문제 딩동댕 하고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겁니다. 이 더러운 내 마음, 나는 폭행자요 살인자요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이런 식으로 교회를 핍박했고 내가 아담의 후손으로 물려받은 더러운 마음 이 이 마음은 마귀의 마음이고 죄의 마음이다. 왜 그 고백을 못합니까? 저 사람은 내 사람이다. 저 마음은 내 악한 마음이다. 왜 고백을 못하냐? 이 말이죠.


인간의 딜레마죠. 딜레마를 묘사하기 위해서 제가 스노우 걸이라는 2024년도에 나온 스페인 영화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 영화는 뭐냐 하면은 딸 하나 있고 두 부부의 딸 하나 있는데, 축제 때 놀러 가가지고 딸을 잃어버렸어요. 딸을 잃어버리고 딸을 찾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근데 경찰이 못 찾아요. 찾을 수가 없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축제 인파가 복잡한데 불임 여성이라서 자기에게 자식이 없음을 탄식하고 거기에 대해서 늘 불만을 품고 있던 어떤 여성이, 애가 엄마 아빠 없다고 인파 속에서 울고 있으니까 걔를 강제로 납치했어요. 그게 몇 살이냐 하면 6살 때 납치해가지고 자기 집에 데려가면서 납치해가면서 노란 비옷을 벗기고 다른 옷을 입히니까 경찰에서 cctv 수사해보니까 노란 옷이 없으니까 못 찾는 거죠. 그래서 9년 동안 걔를 이제는 내가 네 엄마다 하고 계속 세뇌 줘가지고 애는 이제는 이 납치한 엄마가 엄마인 줄 알고 다른 엄마는 없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 영화의 끝부분에 공모했던 남편이 양심 선언을 해가지고 그 남편도 이제 신고하러 가서 죽어버리고, 마지막에 기자가 밝혀내 가지고 마지막에 이제 잡히는 거예요. 문제는 그게 아니고 진짜 엄마가 딸하고 9년 만에 만났어요. 내가 네 엄마라 하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은 이미 마음 자체가 옛날에 있던 엄마 마음이 없어졌고 9년 동안 납치했던 여자의 마음으로 계속 세뇌받았던 거예요. 그 대목이 이사야에 보면 이사야 1장 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율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여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를 만홀히 여겨 우습게 여기고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을 알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호소하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 심어서 다 했는데 비로소 하나님이 보살펴주면 보살펴 줄수록 그들은 어떤 마음을 드러내는가 하면 자기에게 마음에 맞는 친근한 신을 더욱 더 찾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살펴주면 줄수록. 하나님 여호와 아닌 다른 신을 찾는 겁니다. 그 말은 이미 마음이 신약 성경에 준비된 하나님의 합한 마음이 그 마음이 올 때까지 인간의 마음은 아무리 그들이 생존에 넉넉하고 부유하게 산다 할지라도 뭐는 바뀌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근원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도 어떻습니까? 바뀔 리가 없지요 바뀔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부 다 이방나라 너희들 좋아하는 신한테 찾아가라 하여 이방나라 포로 잡혀서 국가 자체를 멸망시켰죠. 그럼 멸망시키면 원상 복귀가 되는 겁니까? 결국 한 사람도 없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게 있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인간 자체가 이미 기존의 인간 세계 아까 무엇에 매였다? 사망에 매인 이 세계의 영향력이 인간의 마음을 형성한다. 이걸 어떻게 천국 가는 심령이 가난한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인가? 이게 하나님의 대작전이죠. 그렇게 작전을 시작하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택했다는 이들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이 하느님 쪽에 있는 마음이 아니고 세상 쪽에서 온 마음인 것을 다 들통 나게 만들어야 돼요. 그걸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극단까지 가자' 네 마음의 끝은 어디냐? 내 마음의 솔직함이 끝은 어디냐? 끝까지 가보자. 끝까지 가보면 인간이 자기의 마음의 끝을 스스로 파낸다고 이게 파집니까? 밝혀집니까? 아니죠. 그럼 밝혀지도록 누가 유도하는 거예요? 하느님 쪽에서 유도하는 거예요. 유도하는 방법은 내가 하나님이다. 그 다음에 나를 믿어라 라고 계속해서 유대인 민족에게 다가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 뭐 가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 믿고 율법 믿습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지금 네 마음 상태가 마귀의 마음이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아비가 악마니까 마음이기 때문에 네가 어떤 율법을 지키든 그거는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이 아니다 라고 계속 밀어붙여야 되겠죠.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어디까지 밀어붙이는가? 그들의 마음은 바뀔 리도 없고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알릴 때까지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내 마음으로 깨달았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끝까지 가게 되면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이건 빨간 걸로 쓸께요. 희생입니다. '희생'. 세상 죄를 지고가는 희생물로서 주님께서는 그게 자기가 하셔야 될 마감 일입니다. 희생을 남기게 만들어요. 예수님 혼자 산속에서 희생하는 게 아니고 그들과 부딪히면서 희생이라는 주님의 과업을 완성을 시키는 겁니다. 그 완성된 과업 안에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죽였던 가해자가 되죠, 그 희생 안에. 이런 일이 이렇게 밀어붙일 때에 인간들의 마음이나. 인간의 마음이라 하면 원래 눈에 안 보여요.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앞장세워서 감추는 형식으로 마음이 뒤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릴 때까지 주님께서는 유대인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뭘 하느냐 자꾸 말씀을 던져요. 말씀이니까 이건 말이잖아요. 언어잖아요. 언어는 사물이 아니에요. 언어는 사물이 아니죠. 그럼 언어는 무엇을 겨냥해서 날아갑니까? 인간의 마음을 겨냥해서 날아가죠.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무슨 죄? 간음죄.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것은 무슨 죄? 살인죄. 이걸 그전에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실제로 칼 들고 사람 안 죽이는 이상 살인자 아니고 간음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육체 관계 아니면 간음 않는 걸로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작전은 뭡니까? 마음으로 다 한다. 이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나와요. 그러니까 이게 신앙생활 종교생활 하는 게 이게 얼마나 우리 마음을 위선적으로 가리는 역할밖에 안 하는 거예요


6장 21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면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은 끌리게 돼 있고 그 끌리는 방법은 흔히 이 세상에서 말하는 보물에 가 있다. 근데 이 보물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거고, 마음은 눈에 안 보이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자기의 마음이 실제로 마음이란 게 있을까..라는 그것은 보물 앞에 두게 되면 마치 그 자석 앞에 가만히 있던 그 쇳가루가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이 보물 앞에 인간의 마음은 흔들리게 돼 있다. 자기의 마음의 본질을 드러내게 돼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6장 21절에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하고 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그 다음에 "눈이 나쁘면 온 몸이" 뭡니까? 어둡다고 이야기했어요. 눈에 보이는 몸에서 마음으로 가면서 몸을 두고 이야기하면서 몸 안에 뭐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마음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럼 몸은 무슨 역할? 마음을 담는 그런 역할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 몸이 어둡다는 말은 곧 뭐가 어둡다? 네 마음이 어두침침하다 더럽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염려잖아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한다.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천국을 공략할 때 뭐 구름 타고 오고.. 유대인들도 그 기다리고 있었어요. 다니엘 예언대로 언제쯤 구름 타고 오는가 이제 기상대 연락해가지고 '이상한 구름 못 봤냐' 뭐 이런 식으로.. 구름 타고 오는 게 아니고 마음을 공략해서 와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나니 천국이 이미 너희의 것임이요" 마음 자체가 밝으려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까지 결속이 돼야 돼요, 예수님 말씀이. 근데 예수님 말씀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예수님 마음이 들어있어요. 예수님 마음이 아까 무슨 마음이라 했습니까? 무슨 마음? '희생하는 마음'. 예수님이 너 때문에 희생했다는 그 희생 마음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 떡을 떼시면서 피를 나누고 살을 나누면서 이게 내 하느님과의 마지막 최후의 언약이다. 마음이 언약이라는 거예요. 어떤 마음? 나 때문에 희생당한 마음. 그게 천국이고 영생이에요. 내가 너에게 다가갈 날이 올 것이다. 언제? 네 눈에 내 몸이 보이냐 안 보이냐? 보입니다. 보이니까 보이는 것이 사라지는 거예요. 왜냐? 너희는 보이는 것들의 집합체니까. 보였던 예수님의 몸이 사라짐으로써 이 세상의 보이는 모든 것은, 우리 몸도 포함되죠. 부정당합니다. 보였던 예수님이 사라지면서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은 부정당합니다.


그리고 만든 것이 보이지 않으면서 다시 태어나는 공간 확보가 가능해졌습니다. 그게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사도행전 33절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자 이제 설명 들어갑니다. 33절 자 여러분 답변해 줘야 돼요. 하나님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하나님 안 보이는데 하나님 오른 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예수님 높이시며 할 때 높은 예수님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가 약속한 성령. 성령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아버지께 받아서. 보입니까? 안 보이죠.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이 세상은 이미 거부당하고 부정당했어요. 부정당하면서 파괴되면서 보이지 않는 그것이 이 땅에 오게 되면 세상은 부정당하지만 부정당한 세상 속에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는 겁니다. 그 공간 확보는 성령으로 요단강 성령 세례 받았던 예수님이 이 땅을 다녀갔던 절차에서 해당됩니다. 그 공간은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우리는 그 지체. 이걸 보이지 않는 교회라 하는 거죠. '보이지 않는 교회'.


우리의 육신에 이 육신이라는 그릇에 무슨 마음이 왔어요? 기존 내 마음도 있고 주님 마음이 왔는데 내 마음과 주님 사이에서 뭐가 계속 피어난다? 희생했다는 취지가 나타나죠. 내가 폭행자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게 계속 파생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셨잖아요.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셨는데 거기에 누가 계셨습니까? 요단강에서 뭐가 내려왔어요? 성령이 함께 있겠지요. 오늘날 우리는 뭐냐? 죄 있음이 확정된 몸이죠. 그런 마음이잖아요. 거기에 누가 옵니까? 성령이 오셨다도 되지만 예수님의 마음이 오셨다 해야 돼요. 예수님 마음이 오신 겁니다. 내 다리 내놔라고, 전설의 고향.. '네가 날 죽였잖아. 네가 어두운 마음이 밝은 내 마음을 죽였잖아.‘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해서 천국 백성 성령 받은 백성이 되었을 때 이것이 외부인들 우리 성령 받은 사람 말고 외부인이 볼 때에 우리의 이 마음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왜? 다시 태어난 공간은 어떤 공간이어야 돼요? 보이지 않아야 될 공간이에요. 기적을 100% 봐라 네가 성령 받았으면 안수해봐라 아이가 병이 낫게.. 그런 거에 말려들면 안 돼요.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들이 자꾸 당신이 예수 믿는 방법을 이야기하면 나는 믿겠다 하는 것은 아까 뭐라 했습니까? 나의 나 됨을, 괜찮은 나 훌륭한 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어디까지 훌륭해지는가를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애들 노래 있잖아요. 앞에 가고 뒤에 하면서 "어디까지 왔나 어디까지 왔다" 노래 있죠? 자꾸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문이 있는데, 내가 문을 열면 이게 천국 문일까? 지옥 문일까? 이 더러운 마음 가지고 어딜 그 문을 열어? 지가 그 문을 열 짬이나 됩니까?


인간은 어느 정도로 자신에 대해서 비극적이어야 하느냐 하면은, '무시당할 가치도 없다' 이 정도는 더러워요. 인간의 마음은 무시당할 가치도 없어요. 이 말은 뭐냐? 성도는 뭘 한다? '다투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마음하고 보이는 마음하고 다투어봐야 이겨봤자 뭐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기게 되면 이긴 나가 돼버려요 눈에 보인다고요 이겨봤자. 만약에 복음을 아는 성도가 대통령 되었다. 오늘 저녁에 뭐 할 거냐? 된장 끓여 먹지 뭐. 헌재가 어떻게 결정 나느냐 그 쓸데없이 보이는 세계에서 신경 쓸 거 뭐 있어요? 김건희 여보 된장 맛있게 끓였나? 파출부가 다 끓여서 하지, 누가 끓이든 맛있게 끓이면 되지 그거 먹으면 되잖아요? 누가 주신 겁니까? 희생당하신 주께서 주신 된장 아닙니까? 다툴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다투겠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은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게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것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왜? 예수님은 보이는 형식에서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어느 인간도 그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제자들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꾸 물어요.


"천국은 어떻게 옵니까 천국은 어디 있습니까?" 주께서 계속 심령이 가난한 마음을 보여줬건만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말씀을 받은 그 마음이 지저분하고 추잡하고 더러운 마음으로 계속 받아들이니까. 결국은 "예수님은 상종할 분이 못 된다. 야 고기 잡으러 가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사라지면서 주께서 보이지 않는 몸으로 사라지면서 사물도 같이 사라졌어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불로써 싸질러져 버린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6장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누가 이 책 떼기를 합당하냐?" 하고 울고 있어요 사도 요한이. 이게 뭔 뜻이냐 하면은 이 책이 있잖아요. 성경책 있잖아요. 이 덮어둔 한 권의 책이 만약에 펴지면 세상은 끔찍한 일이 발생 돼요. 왜? 보였던 하나님이 떠난 세상이기 때문에 이거는 파괴할 것만 남아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좋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 사도의 모든 말씀은 성경 말씀은 나를 파괴한다 나를 부순다' 내가 나 다움을 견지하기 위해서 그걸 기어이 해내기 위해서 붙드는 그것이 말씀에 의해서 파괴당하면 우리는 파괴된 부스러기로써 내 마음과 그걸 파괴시킨 그 마음 주의 마음이 한껏 공작하면 내 쪽에서 내올 마음은 뭐냐? 내가 내세울 마음은 내 뜻은 아무것도 없지요 그걸 가지고 심령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에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 나는 무시당할 가치도 없으니까..


십자가에 강도 둘이 달렸잖아요.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구원받은 강도를 굉장히 무시했어요. 굉장히 무시했다고요. 어떻게 저런 사람을 다 믿나. 처음에 같이 이용했거든요. 주께서 하신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라 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조심하라는 것이 필요 없다'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심해도 무시당하고 없지만, 조심 안 해도 무시당하는데 이제는 무시당한 그게 기쁜 소식인데 뭘 또 조심해요? '아 이거는 주님의 경고다' 경고 없어요. 끝났는데 뭐 이미 주와 함께 죽었는데 무슨 경고가 있어요? 죽은 사람한테도 경고가 통합니까? 죽은 사람 붙들고 네 죽인다 하면 이게 말이 돼요? 안 되잖아요. 이미 모든 게 있으니 문제야 있음이. 드디어 타이밍 왔어요. 모든 게 있음이 문제라고요.


이게 에릭 클랩튼이라는 소위 기타의 신이라고 여기는 그 사람이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이 호텔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었어요 일찍이. 그 소리를 듣고 자기는 유명 가수가 됐는데도 아들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 얼마나 아버지로서 애통합니까? 지가 죽인 건 아니죠. 아브라함이 자기 손으로 자식을 죽인 그런 건 아니에요. 어쨌든 간에 호텔 베란다 떨어져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만든 노래예요. 가사를 봅시다.

'천국에서 널 본다면 네가 내 이름 기억할까’

아들 잃은 심정으로 함 보세요. 그것도 어린 아들 아까 아베마리아 했죠. 어린 소녀의 기도 했지요 어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그 나이처럼 생각되는 아들.

'천국에서 널 본다면 네가 내 이름 기억할까 천국에서 널 본다면 우리가 예전과 똑같을까’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나는 강해져야 돼 앞으로 나아가야 해 왜냐하면 난 여기가 천국이 아니니까’

자기가 있는 곳은 천국이 아니고 아들은 천국에 갔으니까 두 번 다시 못 만나는 거예요. 아들이 죽었다는 것도 애석하지만 죽은 아들을 다시 볼 수도 없다는 게 더 애석하다 이 말이죠. 잠시 헤어지면 참다 나중에 만나면 되는데 자기는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아들을 죽인 아빠니까 뭐 자기가 죽인 건 아니지만, 자기가 제대로 보호 못해서 아들 죽였으니까 이 같은 죄인이 무슨 천국을 가겠느냐 하는 생각이 에릭 클랩튼의 생각이에요. 본심이에요. 그래서 이런 가사를 쓴 거예요.

'왜냐하면 난 여기 천국에 머물 수 없으니까 천국에서 널 본다면 너가 날 일으켜 주겠니'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계속 나는 지금 천국에 못 가고 갈 수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탄식하는 거예요.

'밤낮없이 헤매겠지만 결국 길을 찾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천국에 머물 수 없으니깐’

그러면 어떻게 길을 찾는가 그 다음에 '시간은 사람을 무너뜨리고 무릎을 꿇게 만들고 마음을' 마을이 아니고 마음을 산산조각 내버리죠 여기 뭐가 나옵니까? 마음이 나오죠. 이 사람이 그 당시에 한 달 수입이 얼마쯤 되겠어요. 수천억이죠. 수백억 넘겠죠. 수천억은 될 수 있겠다. 그 정도로 돈 많은 사람이 아들 잃으니까 그 마음이 어떻게 됐어요. 돈이 보물입니까? 아들이 보물이었어요? 돈 많을 때는 돈이 보물인 줄 알았는데 아들 잃고 난 뒤에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는 것이 뭐냐 하면 돈 까짓 거 없어도 괜찮아요. 아들 잃으니까 모든 게 다 상실스러워요 내 보물은 아들이었던 겁니다 아브라함처럼.
'시간이 나를 무릎 꿇게 만들고 마음을 산산조각 내버려 그리고 결국 간절히 애원하게 만들지' '천국의 문 저편엔 평화가 있을 거야 분명히’

이거는 바로 요한계시록 21장 1-3절 내용입니다. 그 뒤에 나와요. 왜냐하면, 천국에는 더 이상 눈물이 없을 테니까. 지금 자기가 인기 있고 1회 공연에 수십억 받고 이게 문제가 아니고 아들이 없으니까 그까짓 그런 게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더구나 아들은 지금 천국 갔으니까 만나면 될 텐데 자기는 천국 갈 수 없어요. 죄인이라서 그래서 자꾸 묻는 거예요.
'천국에서 널 보면 네 이름을 기억할까? 천국에서 널 본 모든 걸 예전과 똑같을까‘
‘난 강해져야 돼 그리고 너 없이도 살아가야 돼 왜냐하면 난 아직 너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 왜냐하면, 난 아직 너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

다시 하면 네가 갔던 천국에 내가 합류하기 위해서 천국 갈 자신이 없다는 거예요.
이 애절함을 이해하면서 한번 들어보실래요? 다 아는 노래지만 가사를 한번 보세요 영어 가사를.

Would you know my name if I saw you in heaven

Would it be the same if I saw you in heaven


I must be strong and carry on

Cause I know I don't belong here in heaven


Would you hold my hand if I saw you in heaven

Would you help me stand if I saw you in heaven


I'll find my way through night and day

Cause I know I just can't stay here in heaven


천국에서 나는 계속 못 간다 못 간다를 반복하고 있죠.
Time can bring you down

Time can bend your knees

Time can break your heart

Have you beg and plead

Beg and plead


아까 말한 그 저 문 열고 나오면 예수님이 기다릴까 하는 그런 게 있죠.

Beyond the door there's a peace, I'm sure

And I know there'll be no more tears in heaven


자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 사람의 이 노래를 전에 보다 좀 노래를 길게 튼 이유가 교회 한 50년 60년 다니고 설교 많이 듣고 복음을 안다고 하는데 결국은 있는지 없는지 어느 누가 아나요. 그러고 끝날 수밖에 없는 우리 마음이 내가 과연 어떠한 인간인지를 스스로 확인하는 방법으로 나선다면 다시 말해서 주님이 마음이 없다면 결국은 애를 잃으나 안 잃으나 돈 가난하나 관계없이 이런 모습이 전부입니다. 이 모습이 전부예요. 다른 대안이 없어요. 그냥 가려고 애를 썼던 것만 남아 있는 것을 주께서 좀 양해를 그런 것을 고려해줘서 정말 천국이 없는 걸 아는데 지옥도 없는 걸 아는데 혹시나 있다면 내가 천국 갈라고 애썼던 거는 좀 그걸 감안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거 믿음이에요? 그거 자기 확인 아닙니까? 평생 동안 한 게 교회에서 하는 게 자기 확인이죠? 나 어느 정도로 괜찮은 존재인 걸. 내가 괜찮은 존재인 것을 그걸 중심에 놓고 그 다음부터는 천국이니 지옥이니 예수님이니 십자가니 하나님이니 삼위일체이니 복음이니 언약이니 전부 다 거기다가 덕지덕지 갖다 붙이는 것밖에 안 돼요.


이 사람이 언제 천국에 관심이나 있었습니까? 이 사람 관심 없었어요. 없는데 누구 죽고 난 뒤에? 아들 죽고 난 뒤에, 우리 애는 무조건 천국 갔을 거야.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이렇게 우기기 나서는 겁니까? 내 자식이거든. 자기 자식이면 무조건 천국 가야 돼요. 어린 소년이거든. 어린 소년이면 그거 되는 겁니까? 나쁜 짓해서 떨어진 게 아니니까. 나쁜 짓해서 떨어진 건지, 지가 어떻게 아는데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거 결국 이거는 뭐냐? 하나님과 협상하고 타협하는 방법이에요. 협상 타협은요, 이거는 열두 제자의 주특기예요 예수님한테.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다녔습니다. 이게 협상 카드예요. 제자들이 협상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교회 나오면서 자꾸 협상 카드나 들고 나오는 거예요. 그 협상 카드 거래가 주님한테 통하지 않습니다. 부정당하기 위해서 보존 돼야 되는 것이 우리의 죄예요, 부정당하기 위해서. 자기가 아들이 천국 갔다는 게 어떤 보장입니까? 어디에 근거 있습니까? 근거 없어요. 내 자식이니까. 천국 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에릭 클랩튼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만약에 당신이 아들이 베란다 떨어져서 즉시로 지옥 갔다면, 아들 따라 당신도 지옥 가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버지 에릭 클랩튼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안 간다 하겠어요? 간다고 하겠어요? 간다고 하죠. 왜? 자식이 곧 나고 자식이니까. 그게 자식에게 보여줄 수 있는 아비로서의 최대의 희생이니까. 결국 인간은 마귀는 예수님을 모델로 해서 유사 예수님으로 인간에게 예수님을 가장해서 찾아오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죠. 악마가 뭐로 옵니까? 어린 양으로의 모습으로 오죠. 교묘하기 짝이 없어요. 목사가 이렇게 교인들에게 설교해요. 당신들은 복음을 안다 하면서 그러면 당신은 누구를 위해서 희생했습니까? 누구를 위해 희생했습니까? 교인들 답변 안 합니다. 왜? 다들 알고 있으니까.. 목사님 이야기 하나 안 하나 내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희생이에요. 어느 자식 말입니까? 내 자식이지 뭐 내 자식 위해 희생하지요. 그런데 '내 자식 아니오' 라고 손 들고 나온 사람이 있어요. 손양원 목사. 이건 또 뭐 이런 또 시츄에이션 이런 신파극.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자기는 양아라 해가지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인양 이거는 뭐 감히 사람이 못하니까 성령이 임해야 한다고 이 전부 다 뭡니까? 눈에 보이는 뭐가 돼요? 업적이잖아요. 눈에 보이는 업적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날마다 우리를 부정하는데 우리는 내가 부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그 목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사도행전 본문으로 돌아올 때가 됐어요. 자 다윗은 어떻게 됐을까? 다시 말해서 이게 구원이라 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능해요. 구원은 불가능한 겁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게 되면 25절 이거는 시편 16편 8절에 나온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는 거거든요.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요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다윗이 이런 예언을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신약적 관점에서 다시 말해서 다윗과 하나님의 마음이 그 당시 예언자니까 함께 있잖아요. 함께 있으니까 다윗은 예언을 못 믿어요. 그러나 예언하시는 하나님은 다윗을 사용하십니다. 사용하시는데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면 다윗에 있게 예언만 살아있고 다윗이 예언에 방해되지 않도록 어디다가 집어넣느냐 하면 무덤 속으로 집어넣어버리죠. 무덤 속으로 집어넣어요. 왜 다윗을 무덤 속에 집어넣는가? 아담의 후손이니까. 마땅히 무덤 속에 가야지요 그게 뭐 이상한 건 아니죠. 남들 다 가는 무덤 속에 가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다윗이고, 그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날라온 거예요. 날라와가지고 주께서 지옥 가고 있는 죽여가고 있는 다윗, 아담의 후손 다윗을 주께서는 다윗을 사용해버리는 겁니다. '잠깐 네 몸 좀 빌릴게' 그러면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요" 할 때 주가 몇 명이냐 하면 주가 두 명이 되는 거예요. 다윗 속에 있는 주와 그리고 그 주를 보내신 주, "주께서 내 주에게" 시편 110편은 그렇게 표현되는 겁니다. 근데 이 해석은 누가 해석하느냐? 다윗이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다윗 안에 계신 주님이 그렇게 해석합니다.


이걸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주님이라 하지 않고 "주의 영이"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성도에게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성도가 하는 그 행세, 한 짓거리 맨날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이냐 자기가 시험하는 그 짓거리에 대해서 본인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걸 평가하도록 평가의 대상이 돼 버려요. 내가 하는 행동과 마음에 대해서 평가를 누가 하느냐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문이 있는데, 이 문 앞에 주님이 계실지 아니면 악마가 있을지 아무것도 헛방이고 애초부터 그런 것은 하나의 꾸미는 종교적 이론이라고 하는 것을 헛방으로 끝날지 하는 이럴 때는 그 주인공이 누굽니까? 내가 문을 열어야 되잖아요? 내가 문을 열어야 되는데 성령은 뭐냐 하면 말씀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말씀의 완성은 누구의 몫이고 누구의 과업이고 누구의 업적입니까? 누구의 작업이에요? 주께서 문을 열어줬어 봐 주께서 계시잖아. 라고 언급해 주는 거예요. 말씀이 그렇게 나오니까 말씀이 말씀대로 말씀이 말씀에 입각해서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쪼다가 되고 우리는 엉터리 해석했다는 것들 들통나고 거래 흥정 이런 거 없어요. 어디서 누굴 상대로 거래해? 그러니까 이게 뭔가 조심해야 될 게 없다는 거예요. 더 이상 성도한테는 뭔가 조심해야 될 게 없다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관리하는 게 아니니깐요.


조심해야 될 게 없다는 말은 이거는 감사해야 될 것과 슬퍼해야 될 것을 내가 나눌 권한이 없다. 이 말입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되지 '아이고 이거는 내가 큰일날 뻔했네 아이고 기쁘다 아이고 내가 또 실수했네 슬프다' 이렇게 내게 하는 행동을 다시 내것으로 소환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모든게 말씀이 말씀대로 될 거예요. 남들이 와서 어떻게 그걸 믿게 되느냐 묻거든요. 보이지 않는 분이라 하세요. 보이지 않는 분이 그렇게 했다고 하세요. 자꾸 내가 했다 하지 말고 기도 빡시게 했다고 하지 말고요. 여기 27절에 보면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이 말이죠. 베드로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뭐라고 하냐 하면은 이렇게 해요. 29절 "형제들아 지금 다윗의 묘가 있잖아. 거기서 다윗의 묘는 썩어 문드러져 있잖아"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가 지금 시편 16편 8절 예언을 언급하면서 이 예언은 누구 것이다? 다윗 것이다? 아니면 주님 것이다? 주님 것이다. 주님 것인데 주님 안에서 썩음을 당치 않고 주님은 무덤의 썩음을 당치 않고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베드로 하는 말이 "거봐. 주님은 죽어서까지 하면서 스스로의 말씀을 스스로 성취했잖아" 그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지금 다윗같이 우리를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언더스탠드? 이해하세요?


에릭 클랩튼의 아들은 이게 자기께 아니에요. 자기 아들 아니에요. 그냥 주님의 아들이 때가 되면 베란다에 떨어져 죽은 거예요. 그렇다면 '천국에선 아들아 널 본다면 내 이름 기억할까' 자꾸 아들 찾으면 안 되고 천국 가면 누굴 찾아야 돼요? 주님을 찾아야죠. 요한계시록 보면 주님이 눈물 닦아주지 아내의 눈물 안 닦아줘요 아들 자식 부모 관계 남편 아내 관계 이 세상으로 끝났어요. 그때는 천사하고 같이 결혼도 안 해요. 인사는 하세요. 그냥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전 부인 되십니까? 아이고 전 자식 되십니까? 말씀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거예요 말씀이. 지금껏 여러분들은 말씀대로 살아온 거예요. 말씀대로.


끝으로 우리 보이는 육신 안에 마음이 두 개의 마음이 들어 있어요. 주의 마음 성령과 그리고 우리 마음이 들어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어요. 이 더럽고 추잡한 나를 힘들게 하는 내가 얼마나 잘 났는가 날마다 시험하고 독촉하는 이 더러운 내 마음을 주께서 좀 없애주지 왜 안 없애주는가?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육신 자체가 사망의 고통 주께서 겪으신 사망의 고통을 현재 육신이 있는 한 겪어야 돼요. 이게 고통인 것을 사는 게 고통인 것을. 그리고 내 마음이 내 육신을 내 마음이 관리한다는 이 자체가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항상 불안하고 두렵고 또 이런 소리 했으니까 내 자식이 죽으면 어떡해 나는 그러면 이런 소리 안 할까 하는 그런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이 자체가 무슨 고통이요? 사망의 고통. 왜 사망의 고통이라 하냐면 사망에 매여 있으니까요. 악마에 매여있으니까. 그러면 거기서 주께서 얻고자 하는 건 뭐냐? 주님의 자신의 '희생'이죠. 세상 죄를 지고 갔던 어린 양으로서 보이는 분으로 오셨다가 지금 보이지 않는 분으로서 우리 속에 오신 그 '희생'입니다. 그 희생을 드러낼 때 바로 이것이 "천국의 너희 것임이요" 끝으로 마태복음 5장 11절을 보겠습니다.


의미심장하게 주께서 말씀하시니까 우리도 의미심장하게 주의 심정을 이해하고 들어봅시다. 11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렇게 되어있죠. 아들의 죽음 가지고 뭘 한 게 아니고 아들 죽음은 없고 예수님에 관한 거예요. 자꾸 에릭 클랩튼은 아들한테 매여 있어 가지고 아들을 못 버리고 있는데, 아들 못 버리고 있으니까 뭐를 대가로 아들만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희생을 버린 대가로 아들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사망에 매여 있는 모습이잖아요? 이게 고통이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있는 사람은 "나를 인하여 예수님을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의 선지자들도 이같이" 모했다? "핍박했다" 선지자에게 육신이 있다는 것이 이게 바로 그들에게는 그 당시 핍박 요소가 된 겁니다. 나와 내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아라 주께서 한두 번 이야기한 게 아니죠. 나와 내 복음을 위해서 내가 한 일을 위해서 너희는 고난을 받아라. 이게 무시할 게 아니고 유의미 있게 여러분에게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온통 관심사는 내가 얼마나 건재하는가? 내 뜻대로 내 마음에 드는 내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느냐 거기에 온몸을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주여 언제 우리가 심령이 텅텅 비어 있는 가난한 심령이 된 적이 있던가요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가난한 심령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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