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성령의 끌림

아빠와 함께 2024. 11. 19. 09:15

강남-사도행전 1장 15절 (성령의 끌림) 241105a-이근호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1장 120명이 모여서 같이 기도했다는 15절 120명쯤 기도했다. 방향이 바깥쪽이 아니고 안쪽이에요. 바깥쪽이 구심점을 갖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바깥에 있는 자기 가족들이나 자기 앞으로 사업 스케줄 이런 거 오늘 집에 가스 불 안 끄고 왔네 주차 잘못해서 차 끌고 가는 거 아닌가? 이런 것이 아니고 마음을 전혀 같이 해서 뭐냐? 어떤 구심점을 모으고 있어요. 구심점을. 참 희한하지요. 그러니까 성령이 오기 전부터 그들은 구심점으로 한데 모여 있는 거죠. 구심점으로 모여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가 아니고 그들은 시작부터 내가 아니고 우리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우리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왜냐 하면은 구심점은 여럿이 아니고 마음을 하나로 모은 거예요. 옆 사람이나 이쪽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집중되어있어요. 그 하나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무슨 하나를 포기해야 됩니까? ‘나’라는 하나를 생각하지 말아야 되지요. 아주 특이한 일이죠. 성령은 그 다음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구심점으로 모였다. 각자의 나는 의미 없지요. 내 집에 개 사료 안 줬는데 이런 거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집에 개 사료 주는 것하고 옆에 있는 사람이 신경 쓰겠어요? 안 쓰겠어요? 신경 안 쓰지요.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과 내 마음은 하나로 안 모였지요.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그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이상하게 사람은 각자 각자 120명인데 120명이 뭐가 됐어요? 하나가 되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하나가 되게 했는가? 이게 뭔가? 구심점에 있는 게 뭔가? 예수님의 약속이죠. 예수님의 약속. 예수님의 약속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결론부터 반대로 가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느냐 없느냐는 어떻게 차이 나죠? 하나님의 약속 있는 자는 뭐가 날라간다? ‘나’가 날라가죠. 그러면 이 말은 나하고 하나님의 약속하고 어느 것이 크단 말이죠? 나보다 약속이 더 크다. 부등식이 이렇게 되겠지요. 나보다 약속이 더 우선된다 내 인생에서 더 다급한 문제다.


그러면 그 약속 앞에서 나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다가 되요. 그러면 여기서 보통 나에서 뭐가 나옵니까? 구원이 나오지요. 나에서 나의 구원이 나오잖아요. 약속은 뭐냐? 하나님의 약속 안에는 우리들 일을 시키는 겁니다. 일을 시키는 것. 앞으로 이런 일을 내가 시킬거야 라는 게 있단 말이죠. 그러면 이걸 다시 끄집어내는 거예요. 구원보다 뭐가 더 월등합니까? 주님의 시키는 일이 더 월등하겠죠. 주님의 일이. 내 안에서 작동하는 주님의 일이 무엇의 구원보다 더 우선된다? 나의 구원보다 더 우선 된다는 말이에요. 이 논리 잘 따라오고 있지요?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내 구원을 챙기는 사람은 뭐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구원 받습니다 그게 사도행전 1장의 주님의 약속 앞에서는 그거는 엉터리죠. 잘못된 겁니다. 주님 저한테 무슨 일을 시킬 거예요? 이게 우선 돼야 되지. 저 일 시키는 대로 하면 저 구원해줄 거예요? 이거는 아니예요. 이거는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내가 있으면 뭐가 우선이에요? 내가 있으면 남이고 뭐고 나부터 살고 싶어 하는 이게 우선이 된단 말이죠. 벌써 성경에 사도행전 1장부터 성령 오시기 전부터 이미 분위기가 나 중심이 아니라는 분위기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


자, 이것을 제가 일반화시키겠습니다. 어떤 식으로 일반화시키느냐? 이렇게 일반화시킵니다. 주일날 약간 언급했는데 인간의 삶은 자기가 자신에게 신뢰할만한 자인가를 점검하는 기간.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내가 내 자신에게 신뢰할만한 자인가를 점검하는 그 기간이 우리 인생입니다. 신뢰하려면 나의 결정 나의 선택 나의 행함이 나의 예상대로 될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나를 신뢰할만하죠. 신뢰할만하다는 말은 내가 나를 꾸준히 지켜온 것이 참 잘한 일이다라고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삶의 보람. 아닌 경우가 없지요. 자기가 자기를 지킬 때 그냥 지키는 게 아니고 나는 말이야 나는 나를 믿고 싶어 라는 식으로 자기를 사수하고 지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점이 얼마나 오늘날 현실 속에서 실감나게 실제적인가 예를 들겠습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는 뭐냐? 금 사기, 남편한테 얻어맞기. 금 사기는 뭐냐? 금 방마다 돌아다니면서 저 금 도매상인데 지금 사시면 시세보다 훨씬 싸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한 달 받는다면 지금 시세보다 더 좋게 쳐주겠습니다. 만약에 두 달 후에 금을 한다면 더 좋게 시세 쳐서 더 낫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금 시세를 낫게 하는 이유는 가공비를 받지 않기 때문에 다른 데보다 금 시세가 낫습니다 해가지고 금은방 수십 군데가 사기 당했어요. 처음에는 물건 좀 주고 그 다음부터는 점점 더 금을 얻기 위해서 목돈을 해서 사기를 당했습니다. 사기 치는 것, 사기 당하는 것 이게 당사자에게 얼마나 불행입니까. 돈 수천 만원 날렸으니까. 불행이죠. 이게 행복이 아니잖아요. 아 미치겠다 너무 좋아 이런 게 아니잖아요. 왜 불행합니까? 어디서 손상이 일어났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한 그 나에 대해서 내가 신뢰도가 확 떨어진 거예요. 신뢰도가 떨어지고 떨어지고 남는 것은 자살밖에 없어요. 더 이상 마지막 믿고자 하는 것이 결국 나였는데 그 ‘나’가 신뢰도가 내가 믿을 수가 없어. 그때는 차라리 내가 사는 것보다 내 손으로 거두는 것이 마음의 고통을 덜 한다 해서 죽는 수밖에 없지요.


그다음에 두 번째 경우 남편한테 얻어맞기. 남편한테 얻어맞고 남편은 사과하고 얻어맞고 사과하고 반복되는 거예요. 그래서 경찰에 신고 했는데 경찰도 대충 처리하고 격리를 안 했어요. 세 번이나 해도 경찰이 막지를 못했어요. 결국 남편에 의해서 아내가 옥상에서 떠밀어서 죽었습니다. 어제 사건이에요. 그때 아내가 친정집에서 엄마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따라와서 여자보고 옥상까지 데려가서 폭력을 행하고 아내를 죽였어요. 자, 이 여자 이 남편 둘 다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끝까지 자기에 대한 신뢰를 포기를 못한 겁니다. 내가 때린다고 해서 이혼해버리면 내 인생 어떻게 되는데 이거거든요. 내 인생 신뢰하는 인생인데 네가 이혼해버리면 나는 이혼한 남자가 되잖아. 나 그게 싫은 거야. 그러니까 잘 해줄테니까 이혼하지 말고 친정집 가지 말고 같이 살자. 같이 살면서 계속 패는 거예요. 패는 거예요. 여자는 적극적으로 대응을 못해요. 왜? 자기가 좋게 해결하려고 하는 겁니다. 왜 좋게 해결하죠? 남편이 개과천선해서 달라지게 되면 그때까지 살아 온 정이 있어서 붙어 살라고 추이를 바라보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에 성령 나오지요. ‘성령’. 성령의 존재는 딱 하나입니다. 이것은 꼭 기억해야 돼요. 성령이 오신 이유는 인간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에 대한 신뢰를 인간은 포기하지 않아요. 그래서 성령이 적절한 겁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드릴께요. 성령 받아서 변했다 하지 마세요. 인간은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 받고는 어떻게 하느냐? 원래 내 모습은 지금 내가 신뢰할 만한 인간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아는 거죠. 워낙 개판이니까. 성령 받고 난 뒤에 아는 거예요. 내가 나를 신뢰해? 미쳤어. 자살한다고? 너 자살할 권한도 없어. 자격도 안돼. 왜 인간은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느냐 하면은 인간은 세월에 따라 조금씩 자신의 가치를 더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한다고 여기서 보람을 느낍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단어를 꼬집으라면 이겁니다. ‘세월’.


인간은 시간이 없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지고 난 뒤 인간의 시간은 제자리 뛰기입니다. 맨날 시간이 흘러가도 분명히 뛰었는데 성장하기 위해서 분명히 애썼는데 제자리예요. 옛날에 조선시대 때 고전 사극 보면 물레방아 가는데 여기에 사람이 올라가가지고 발 딛고 하는 거 있죠. 뭔가 움직이는데 자기는 제자리에 있어요. 제자리. 인간은 달라진 적도 없어요. 처음도 끝도 달라진다고 착각하지요. 그만큼 가치에 가치를 더하고 성장하고 보람 있다고 하지만 시간에 따라서 시간이 있어줘야 조금씩 조금씩 더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돼요? 시간 자체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면 뭡니까? 인간은 변한 게 없다가 되겠지요. 성령 안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성령 안에는. 성령이 온다는 것은 네가 있던 모든 시간은 이미 종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성령오심은 종말의 시작입니다. 종말의 시작. 종말이 시작되려면요 시간이라는 직선으로 표현하면 안돼요. 시간은 과거부터 현재, 현재로부터 미래로 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으로 현재가 두 개가 되었어요. 두 개가 되면서 인간에 있던 과거든 현재든 인간의 미래든 전부 다 예수님의 현재 안으로 회수됩니다. 소환됩니다. 마치 욕조에 물 빠지는 것 같아요. 이것으로 다 빠져요. 주님의 현재로 다 빠져요. 그러면 주님은 심판주죠. 심판주입니다.


복음,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가? 세상은 멸망한다. 이게 복음이에요. ‘이미 끝’. 더 줄이면 ‘끝’. 무엇의 끝? 심판의 끝, 구원의 끝. 끝났어요. 애쓴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한다고 구원 안 받는 것도 아니고 구원 되고 안 되고가 이미 끝났어요. 십자가로. 어떤 사람이 생명책에 구원되느냐 하는 것은 현재로부터 솟아나올 거예요. 현재로부터. 과거, 현재, 미래 이거는요 인간이 살아봤자 현재도 내일되면 과거로 변하잖아요. 이 모든 것은 현재로 와서 다시 시간 속에 뱉어내어버리면 우리는 아직도 미래가 남아있는데 복음 안에서는 네가 백날 앞쪽으로 100m 200m 달려봐야 그것은 뭐냐? 어디를 가도 이미 멸망의 흔적만 네가 감지될 뿐이지 어떤 희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복음은 뭐냐? 세상은 멸망이에요. 대구강의에서도 했지만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말씀 모든 것은 심판아래 있다. 이게 복음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복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은 평화로 오셨다. 이상한 이야기해요. 하나님은 평화로운 분이고 그 이야기하고 있다고요. 인간에게 긍정적인 희망을 자꾸 주려고 해요. 왜? 기쁜 소식이니까. 기쁜 건 주님이 기쁘지요. 주님 혼자 기뻐요. 기뻐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현재 성령 안에서 주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쏟아질 때 비로소 내가 예상한 기쁨이 아니고 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을 억누르면서 새롭게 주어지죠. 그게 뭐냐? 내가 구원받은 게 기쁜 게 아니고 나에게 주님의 일이 덮쳐졌다는 게 기쁜 거예요. 내가 감히 주의 일을 하다니. 이게 말도 안돼. 천하의 이기주의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 내가 주의 일을 하다니. 이건 불가능해. 그렇습니다. 불가능입니다. 미리 예상하고 얼추 비슷하게 갈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건 다 실패로 갑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내가 지독하게 하기 싫었었었다. 내가 지독하게 하기 싫었다. 이게 불가능이에요. 인간이 하나님을 죽였으니까 이제는 누구 차례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공격할 차례죠. 우리가 하나님을 왜 죽였습니까? 이사야 53장에 주님은 인간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죠. 모든 인간이 주님을 싫어한 겁니다. 아니 모든 인간에게 싫어버린 바 된 모습으로 오셨죠. 어느 인간도 주님을 좋아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았다는 말은 내가 좋아하는 구원은 따로 있었는데 그거는 내가 가능한 거예요. 그러나 우리에게 진짜 주어지는 구원은 우리에게 불가능으로 오거든요. 그 예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19장에서 어떤 부자 청년이 왔을 때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를 본인이 밝혔어요. 왜 찾아왔나? 영생 얻기 위해서 왔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나는 영생을 싫어하지 않고 영생을 좋아합니다. 그다음에 뭐에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이 부자청년의 논리 매치를 한번 보세요. 나는 구원을 좋아하고 구원 얻기 위해서 나는 가만히 있었다? 뭔가 나름대로 했다? 나름대로의 율법을 지켜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영생을 왜 좋아합니까? 십계명 지켜서 영생을 얻게 되면 누가 신뢰하는 대상이 됩니까? 내가 나를 실망하지 않고 이제는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기는 기뻐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기쁨이에요. 내 원대로 뜻대로 내가 소원하는 대로 영생을 지니게 된 존재로 달라졌다는 것이 평소의 소망이었습니다. 싫어버린 바 된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걸 원했던 거예요.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부자청년은 왔는데 그 부자청년이 예수님하고 이야기하고 난 뒤에 예수님 따라다녔습니까? 근심하고 갔습니까? 보낼 때 주님께서 불가능성을 언급했지요. “네 모든 재산을 팔고 나를 따르라” 갑자기 훅 들어왔죠. 뭐가 훅 들어왔습니까? 불가능성이 훅 들어온 거예요. 왜냐하면 부자인 내가 신뢰할 수 없는 상태가 어떤 상태죠? 그 많던 돈이 하나도 없을 때 싫어. 그런 내가 싫은 거예요. 그런 내가. 그런 내가 짜증나는 거예요. 나는 나한테 반하는 재미로 살고 싶어. 멋있는 나. 그런데 돈이 없어? 아 그런 나를 상상도 못해요. 안돼! 그건 안돼. 내 인생에 그런 건 있을 수 없어. 그때 같이 놀랜 사람들이 있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현장에 안 가봤습니다만은 얼굴색이 파랬어요. 파랗게 됐을 거예요. 벌벌 떨면서. 주님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 이게 불가능이거든요. 주님께서는 그걸 가능성으로 바꿨지만 그 가능성이 더 미워. 불가능보다 더 쎈 불가능이에요. 낙타가 바늘구멍 가는 것 분명히 가능 이야기하는데 불가능보다 더 쎄게 불가능 이야기해요. 낙타가 바늘구멍 가는 것보다 어렵다. 누가 갈 수 있습니까? 사람은 못한다. 이게 복음입니다. 사람은 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낸 결론은 이겁니다. 이중에 성령도 안 받고 믿음도 없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공격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구원에 실체가 없다. 사기꾼. 실체가 없는 게 사기예요. 금 없는데 금 있다고 속이고 돈 받아먹었잖아요. 자기 자신을 괜찮은 남편이라고 자꾸 하면서 아내를 팼잖아요. 그러면 아내 입장에서 남편하고 결혼생활 유지하려면 언젠가 개과천선할 것이다 그게 여자 입장에서 자기 남편의 실체이어야 하는데 그 실체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내 입장에서도 저 남편을 선택한 자기에 대한 신뢰가 깨져버리죠. 저 남자한테 뭐 당했다? 사기 당했다. 사기 결혼. 이 가운데서 지금 성령 받지 않은 사람 있다면 구원 자체가 실체가 없다. 사기거든요. 바로 모든 해석은 어디서 시작하느냐?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요. 왜? 인간은 항상 불가능성보다도 가능성부터 한 발자국 내딛기 때문에. 내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본인들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불신자가 있는 것을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왜? 그 사람 마음과 내 마음이 같은 아담의 똑같은 아담의 마음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어쩌면 그 사람은 우리보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죠. 구원 있는지 없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있다고 치고 예수 믿자 이럴 수 있잖아요. 그걸 왜 애써 감추냐는 말이죠. 그걸 까발려야죠. 까발릴 용기도 없어요? 그런 자신감도 없어요? 천국은 애초부터 없었고 예수님은 죽어서 끝났고 하나님은 없고 인간이 만들어 낸 자기 여망 희망 있었으면 좋겠네~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격받았을 때에 여러분들은 반격할 거예요? 아니면 속으로 아멘할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것이 나의 착함에 도움 된다면 없는 하나님이라도 만들어서 믿겠다는 것. 그거 인간의 아담으로부터 온 본성 아니에요? 뭐 다른 본성 받았어요? 그거 받았잖아요. 항상 성경을 볼 때는요 나는 어느 정도 믿고 알고 이렇게 하지마시고요 가장 악랄하게 복음을 반대하는 그 자리에서 늘 새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늘 새로 시작해야 돼요.


자, 그럼 오늘도 마찬가지로 새로 시작해야 되겠지요. 새로 시작해봅시다 이제부터. 다 같이 합죽이가 됩시다가 아니라 다 같이 철저하게 악랄하게 불신자가 됩시다. 그럴싸하게 불신자가 됩시다. 벌써 불신자의 시작을 벌써 제가 아까 말씀 드렸어요. 인간의 시작은 뭐부터 한다? 자기 신뢰성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자기 신뢰성할 때 여기서부터 어디까지 가느냐? 자기 신뢰성부터 해가지고 하나님께 접촉하는 거예요. 바벨탑이 따로 없지요. 하나님까지 도달하겠다. 이 과정을 누가 친절하게 자세하게 그 과정을 다 말해주시면 좋겠다라는 분이 있지요. 있어요. 그 분을 지금부터 소개합니다. 자기 신뢰성을 다져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분이 있어요. 그 분이 누구냐 하면은 칸트입니다. 칸트라는 철학자.


이 칸트라는 사람이 뭐를 주장했느냐 하면은 모든 것은 나의 인식론에서 나온다. 진리 또는 거짓 착함 악함 이것은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내 마음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감각적인 것을 철저하게 나 위주로 조립해서 나온 결과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말씀대로 삽시다 이런 것. 이거는 컵이다. 컵이죠. 칸트는 사과를 예를 든 것 같은데 저기 사과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사과 있기 때문에 사과 있다. 아니야. 사과가 있음에서 오는 감각이 내 쪽에 조립을 해요. 나의 인식에서.


그래서 칸트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그림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동그라미 세 개로 설명해드리겠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은 사물, 사과든 컵이든 사물. 사물이 이것은 우리 또는 나. 인간. 사물이 인간에게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뭔가 중간을 거쳐서 오게 되어 있다. 올 때 인간은 바로 마중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서 쏘아대는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이 사물에 올 때는 경험이 되는 거예요. 촉감이 되니까 경험이잖아요. 그런데 인간 속에 경험보다 먼저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은 게 있다는 거예요. 선경험. 선경험에서 경자를 빼면 선험. 선험적 태도를 갖고 있다. 외부에서 오는 모든 감각이라도 내 마음이 선험적 이것을 편집한다는 거예요. 이걸 칸트가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이걸 잘 이해를 못했어요. 그런데 최근에 와서 밝혀졌어요. 뭐냐 하면은 바로 두뇌작용. 두뇌작용은 눈에 보이는 대로 기억하는 게 아니에요. 두뇌에 미리 와 있는 고참들이 있어요. 그게 기억이에요. 고참들이 내 전체 몸을 관리할 때 내 몸의 생존에 유리하냐 불리하느냐에 따라서 유리한 것은 받아들이고 분리한 것은 내뱉던지 아니면 분리한 것도 유리하게 조작을 해서 내 기억 속에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내 기억 속에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남의 자식 까부는 것은 욕하고 자기 자식 까불어도 욕 안하지요. 그렇지요? 왜 그렇습니까? 내 애가 아니잖아 이러는 거예요. 이 애는 나의 애잖아. 이게 뭡니까? 우리 머리에 나는 내가 지키는 거예요. 이게 본성화 되었어요. 생물학적으로 본성화 되어있어요. 나를 내가 지키겠다. 현재 뇌 과학에서. 그러니까 똑같은 경험을 해도 사람마다 내뱉고 있는 그 고백이 다 달라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성령이 없는 경우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없는 경우를 설명해야 설명이 왔을 때 어떤 차이를 알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 없는 경우 생각 안하고 설명해버리면 그건 선경험 앞에 걸리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이 사물이 있다로 안 보고 뭐로 보느냐? 그 사물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이걸 가지고 현상이라고 합니다. ‘현상’. 존재가 있는 게 아니고 그 현상이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현상으로. 현상으로만 나타납니다. 이런 이야기가 가만 들어보면 맞는 이야기인데 감동이 되는 게 아니고 뻔한 이야기 되죠. 맞는 이야기인데 뻔하지요. 철학자들은 맞는 이야기만 해요. 그런데 문제는 뻔한 이야기만 한다는 게 문제지요. 그래서 칸트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칸트는 이렇게 합니다. 자연은 그냥 분주하게 무심한 일을 해요. 분주하게 활동성이 있어요. 분주하게. 어떻게? 기계적으로. 그런데 인간이 자연을 볼 때는 기계가 아니고 목적론적으로 봐요. 이건 뭐냐? 이 자연을 내가 나를 생존하는데 유리하게 어떻게 써먹을 거냐를 생각하는 거예요. 목적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럼 칸트는 말합니다. 자연의 목적이 있느냐? 자연에 무슨 목적이 있어요. 없지요. 목적이 없어요. 목적이 있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인간밖에 없지요. 그런데 여기서 모순이 뭐냐 하면은 인간은 자연의 일부냐? 아니면 자연 밖에 있느냐? 그것은 뻔합니다. 인간은 자연이에요? 자연 밖에 나가있습니까? 자연이요. 그러니까 이 말이 틀려먹은 거예요. 자연이 목적이 있다 없다. 있다 할 수도 없고 없다 할 수도 없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칸트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뭐를 하느냐 하면은 인간의 목적에다가 자연을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우리가 아는 자연은 그냥 현상이고 현상 바깥에 보면 현상계 말고 더 바깥에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 그걸 가지고 사물 자체, 사물자체 세계는 우리의 인식으로 도달할 수 없다. 신의 세계다. 따라서 신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자연은 모르지만 인간하고 연결되어있다. 인간한테는 어떤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뭐냐? 무조건적인 도덕심이 이거는 인간으로서는 내가 도덕적이어야지 이전에 들어와버린 것이 바로 신의 뜻이다. 이게 칸트 이론의 전부고 결론입니다. 어떠십니까? 칸트의 의견에 대해서 여러분 한 표 드리겠습니까? 아니면 트럼프에게 한 표 하시겠습니까? 어디에 한 표를 던지겠습니까?


자, 아까 강의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이 칸트에 대해서 제가 분명히 전제를 달았어요. 성령이 없는 사람들의 주장이 아주 간편하고 그것도 포괄적으로 못 빠져 나오게 이게 전부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성령 받은 티를 내야지 반박을 해야죠. 반박을 어떻게 합니까? 이 논리에 대해서. 반박할 자신 있습니까? 사물 또는 사물 그 자체가 들어왔을 때 인간은 선험적으로 편집해서 만들어낸 것이 형식이고 이 형식이 뭐냐 하면은 시간과 공간성이죠.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손 댈 수 없을 정도로 공간, 공간 있음 그 자체. 시간은 인간이 손 댈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그냥 막으나 안 막으나 그냥 흘러가는 거예요. 이런 형식을 주게 되면 우리는 나타난 것, 다시 말해서 현상만 받아들일 뿐이다. 여기 사과 있네 이렇게 되지요. 사과 있네. 여기에서 여러분 반박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반박은 이렇게 됩니다. 둘로 나누면 돼요.


칸트의 이야기는 내가 이런 것 하고 싶다. 나는 이런 것 하고 싶다로 나를 규정하는 거예요. 나는 이런 거 하고 싶어. 나 무조건 착하고 싶어. 무조건 원수도 사랑하고 싶어. 칸트가 성경을 다 아니까요. 하고 싶다 이렇게 되지요. 그런데 성경은 뭐냐? 너는 누구냐? 하고 싶다와 누구냐의 차이에요. 인간은 그냥 가만있지 않아요. 자꾸 뭘 하려고 해요. 하려고 하면서 뭘 가려요? 내가 누구냐를 가려버려요.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돼요?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한 인간으로 오셔가지고 아버지께 버림받았죠. 그럼 나는 누구에요? 예수님을 통해서 보면 나는 뭘 해도 어떤 칸트 주장을 해도 어떤 철학을 주장해도 그게 뭐냐? 버림받은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저주받은 모습이에요 그게.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노래교실. 제가 어렵게 칸트 언급했지만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칸트가 우리를 대변했다고 보면 돼요. 대신한 거예요. 대신 했다고 보면 됩니다. 대신 했으니까 칸트 말고 칸트 류, 칸트 같은 사고방식이 오늘 세상에 어떻게 돼요? 차고 넘치겠죠. 모든 사고방식이 칸트 같은 사고방식이 차고 넘치는 거예요. 칸트가 주장하는 게 뭡니까? 나는 나를 신뢰할만한 식으로 살고 싶다 잖아요. 내가 누구냐가 아니에요. 그딴 거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되 내가 스스로 나를 신뢰할만한 그런 인간이 되어 살고 싶다로 꾸준히 밀어붙이는 겁니다. 첫 번째 노래 가사 들으면서 그 가사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An empty street, an empty house텅 빈 거리, 텅 빈 집
A hole inside my heart마음에 난 구멍
I'm all alone, the rooms are getting smaller홀로 있는 이 방은 자꾸만 작아져만 가요
I wonder how, I wonder why어떻게, 왜 그런지
I wonder where they are어디 있는지 궁금해요
The days we had, the songs we sang together. Oh yeah우리가 함께 한 날들, 우리가 함께 불렀던 노래들 말이에요..
And oh, my love오, 내 사랑
I'm holding on forever나는 영원히 기다릴 거예요
Reaching for the love that seems so far멀게만 보이는 사랑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So I say a little prayer그래서 난 기도 드려요
And hope my dreams will take me there그리고 나의 꿈이 나를 인도해 주길 바래요
Where the skies are blue파란 하늘 아래서
To see you once again, my love당신을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도록요, 내 사랑
Overseas from coast to coast바다를 건너고 또 건너요
To find a place I love the most내가 가장 사랑했던 곳을 찾기 위해서요
Where the fields are green푸른 초원이 펼쳐진 곳에서
To see you once again, my love당신을 다시 만나도록 말이에요, 내 사랑
I try to read, I go to work책도 읽어 보고, 일도 해 보고
I'm laughing with my friends친구들과 웃어 보려고 애를 쓰지만
But I can't stop, to keep myself from thinking, oh no당신 생각을 떨쳐 내리는 걸 멈출 수가 없어요
I wonder how, I wonder why어떻게, 왜 그런지
I wonder where they are어디 있는지 궁금해요
The days we had, the songs we sang together. Oh yeah우리가 함께 한 날들, 우리가 함께 불렀던 노래들 말이에요..
And oh, my love오, 내 사랑

I'm holding on forever나는 영원히 기다릴 거예요
Reaching for the love that seems so far멀게만 보이는 사랑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So I say a little prayer그래서 난 기도 드려요
And hope my dreams will take me there그리고 나의 꿈이 나를 인도해 주길 바래요
Where the skies are blue파란 하늘 아래서
To see you once again, my love당신을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도록요, 내 사랑

Overseas from coast to coast바다를 건너고 또 건너요

To find a place I love the most내가 가장 사랑했던 곳을 찾기 위해서요
Where the fields are green푸른 초원이 펼쳐진 곳에서
To see you once again, my love당신을 다시 만나도록 말이에요, 내 사랑
To hold you in my arms당신을 제 품에 안기 위해서.


여기까지요. 이 가사를 보게 되면 좋았던 옛날 사랑이 그리워서 그 사랑이 바다 건너 끝까지 가고 싶단 이야기죠.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무엇을 하고 싶으냐. 내가 뭘 하고 싶으냐.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나는 내가 하고 싶어의 노예가 되어있어요. 이게 성령 없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있어요. 그리고 그걸 정당화하는 거예요. 왜? 칸트는 내가 편집한 내 마음을 자기가 정당화하거든요. 그래야 내가 끝까지 나를 신뢰하고,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의 도덕성까지 내 안에 있으니까 그야말로 나는 나를 믿을만하고 나를 신뢰하고 싶은 거예요. 칸트 철학의 일부라 할 수 있죠. 그다음에 두 번째 노래 보겠습니다. 박건호 작사, 박인희 작곡.


모닥불 피워놓고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재를 남기고
말없이 말 없이 사라지는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끝이 없어라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어떻습니까? 여기 가사의 이야기는 마주앉지요. 인간은 항상 누굴 찾아요. 그래서 나를 위해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재가 되어서 끝날 때까지 인간은 계속 누굴 찾습니다. 안 그러면 외로워서 못 살아요. 인간들의 이야기를 계속 찾아요. 교회 와서 내내 인간들 만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비록 모닥불은 타다가 없어져도 우리들의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계속 된다는 겁니다. 아까 같은 경우에는 누굴 이렇게 자기 사적으로 누굴 찾는 반면에 이 이야기는 인생을 다 산 것처럼 목소리 힘이 없지요. 결국 인생은 홀로 갈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이니까 남는 것은 우리 수다 떠는 것만 남아있다. 그러니까 수다 열심히 떨자 그 이야기입니다. 이 노래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세 번째 보겠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멸시 천대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여기 보면 2절에 ‘끌리도다’ 왜 끌리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험한 십자가에 왜 끌려야 됩니까? 그냥 십자가 알면 안 됩니까? 아니에요. 끌려요. 구심점이라고 했지요. 구심점. 구심점에 갈 때는 뭐를 버린다? 나보다 더 쎄다. 나를 버리고 십자가에 끌리는 거예요. 왜? 이유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나의 뭘 하느냐가 아니고 내 존재도 아니고 주님의 존재가 내 존재보다 구심점을 형성한다는 것, 그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분 쉽시다.

 

 

강남-사도행전 1장 15절 (성령의 끌림) 241105b-이근호 목사

예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그 13절 14절에 그 120명 가운데서 핵심 멤버들이 거기 나열 돼 있는데, 그 핵심 멤버들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은 예수님도 누군지는 모르면서 예수님에게 끌려갔던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을 알아서 간 사람들이 아니고 끌린 거예요. 끌린다는 것은 2개의 존재에서 자석이 쇳조각을 끌 때 자석이 강하면 쇳조각은 끌리게 돼 있어요. 약하면 어떻게 합니까? 안 끌리겠죠. 주님한테 끌렸는데 끌리기는 끌렸는데 그들이 끌려가면서 끌려가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고 그냥 끌려가는데 여전히 그들은 달라지지 않고 변한 것이 없어서 그냥 시킨 대로 그냥 모여 있었던 겁니다. 여기에 들어있는 사람들 14절에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 예수의 아우들, 예수님의 배 다른 동생들 그 가운데 누가 있어요. 야고보 같은 사람이 있어요. 야고보 이런 사람들. 마가복음 3장 2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예수의 친족들이 죽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이러라" 예수님 보고 친족들이 뭐라 했어요. 평이 뭡니까? 미쳤다고 했어요. 예수님 미쳤다 했어요. 다른 말로 예수님 말이 구원의 실체가 없다. 이 말이에요.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13절에 나오는 다락방의 요한 야고보 있죠. 요한 야고보는 형제 간입니다. 변화산에 올라갈 때에 3명의 사도가 올라간 건 맞는데 따지고 보면 두 집안끼리 올라간 거예요. 하나는 베드로하고 야고보 요한은 형제 간 이렇게 올라간 겁니다. 그 야고보 특히 요한 같은 경우에 요한은 누가복음 9장 54절에서 뭐라고 했냐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건 제가 찾아볼게요 피곤하신 여러분들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형제 간이니까.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 쫓아내려 저희를 멸하기를 하시기를 원하시나이까" 이게 불 떨어져 가지고 저들을 완전히 몰살시켜 달라는 거예요. 근데 그 저들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52절에 사마리아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혼혈아들이에요. 정책적으로 앗수르 시대에 그 피를 섞어 버렸어요. 피를 섞어서 유대인들은 개 같이 여겼다 했습니다. 개 같이 여긴 거예요. 어느 정도냐 하면은 만약에 사마리아인들이 우리 유대인을 공격하면 몇 배라도 우리는 갚아 줘야 된다. 그걸로 무장된 것이 그 유대인들의 정체성이에요. 그들이 결집한 겁니다. 어디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가만 못 참죠 헤즈볼라고 공격하면 못 참지요 유대인은 유대인의 가치를 지키는 것을 무력으로 행사해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 유대민족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준 대단한 민족인데 저들은 감히 전쟁통에 그들이 섞여 들어간 주제에 어디서 어줍잖게 유대인 흉내를 내느냐 이 말이죠.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네가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그 다음이 뭡니까? "사마리아 땅까지 이르러 내 증인된다" 사마리아 땅까지 가라는 거예요. 사마리아 땅까지 전담으로서 가신 전도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빌립 집사입니다. 빌립 집사의 주특기는 사마리아 땅에 가는 거예요. 원래 그 사람 출신이 가이사랴 지방이에요. 본도 가이사 현재 이스라엘 수도 그 약간 더 위쪽에 있어요. 그 출신에 대해서 그 출신자인데 그 사람이 오순절 날, 오순절이라고 하는 것은 3대 절기 아닙니까 각처에 있는 흩어졌던 유대인들 디아스포라라 해요.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옵니다. 왜 오지요 왜 옵니까 마음을 어떻게 하기 위해서?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하나 모아서 무슨 정체성 우리가 유대교 택한 민족의 정체성을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정기적으로 3번씩 참석을 한 거예요. 3번 참석 못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참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율법이 나와 있으니까 3대 절기 지키라 지키면 율법이 유효하고 율법이 유효하면은 율법에 걸려들어서 구원받는다. 그런 의식이 있었던 겁니다. 굉장히 편리하죠. 율법을 놓지 않고 지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얼마나 간편합니까?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율법이 없는 저 혼혈아들 사마리아인은 개로 취급하는 것이 율법적으로 합당하다가 되겠죠.

그런데 예수님께선 사마리아 땅 자네 땅은 아니죠. 그다음에 뭡니까? 전혀 유대인하고 관계없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해버렸어요. 그러면 여기에서 그들은 유대인들을 뭐해 인식의 변화가 필히 있어야 되겠지요. 예 빌립 집사지만 비록 유대인이에요. 다 유대인들입니다. 이거 유대인들 집합된 걸 2장에 한번 봅시다 2장 9절부터 보면 "우리는 바대인" 바대인은 현재 이란 제일 북단에 있고 메대인은 이란 북단에서보다 남쪽에 있고 엘람인은 고 남쪽보다 더 남쪽에 있는 거예요. 메소보다미아 티그리스와 유프라데스는 그 사이를 강 사이를 메소보다미아 현재 이라크입니다. 유대는 알고요. 갑바도기아는 바로 현재 터키의 동쪽 해안을 갑바도기아라 합니다. 동쪽 해안 본도 북쪽 터키 북쪽 갑바도기아는 이 터키 동쪽 이라크하고 마주하는데 그리고 터키 서쪽은 바로 아시아 여기 아시아로 돼 있어요. 브루기아는 그 터키의 중부 밤빌리아 터키의 남쪽 애굽은 알고 리비야는 현재 리비아예요. 이집트 바로 옆에 있는 그 아프리카 거기에 로마는 알죠 이탈리아 이런 사람들 그레데는 그레테 섬에서 온 사람들 그레테 구브로라 했는데 그레테 섬 출신자 누구냐 바나바예요.


바나바하고 사도가 된 사도 바울 싸울 때 둘이 가말리엘 동기생들입니다. 동문이에요. 그때 그 당시 남쪽의 수도에 다소에 사도 바울은 출생했고 구브로 섬에는 바나바가 온 거예요. 둘 다 유학을 왔어요. 그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가말리엘은 예루살렘에 있으니까 유학올 정도로 바나바는 재산이 꽤 되는 사람입니다. 그 바나바의 사촌 간이 또 마가 요한 쪽이에요 근데 놀라운 사실은 이 바나바가 일곱 집사에서 탈락했어요. 그 대신 빌립은 터키 쪽 사람 아닙니다. 좀 넓게 해서 갈릴리 쪽이에요. 지중해 있고 터키 있잖아요. 그레데 섬 구브로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총독이 시작합니다. 갈릴리 바다 요단강 사해 예루살렘 여기 있고 요 지점에 바로 위도가 같은 요 지점에 예루살렘이 여기 있어요. 여기 유학 같이 온 거예요. 다소 여기서 이렇게 유학 온 거고, 그러면 여기에 원래 유대 사람들 있잖아요.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원래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오직 유대주의에 철두철미한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마찬가지고 예수님 보고 미쳤다 했으니까 그들은 도무지 변할 수 없는 인간들이에요.

하나님의 전통과 역사를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리오 하는 사생결단을 한 사람이에요. 자 이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서로 우호적으로 한데 몰렸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일본말로 써서 시마이 죄송합니다. 모든 게 시마이 됐어요. 끝났어요. 영업 끝났습니다. 예수님 영업 끝 시마이 된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다른 단체가 뿔뿔이 헤어져서 전부 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되겠죠. 다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내가 꿈을 꿨지 공연히 헛바람 들었구나 복음 믿다가 떠난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 아닙니까 내가 미쳤지 그거 뭐라 실체도 없는 거 가지고 그냥 착하게 살면 천당 가겠지 뭐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야 막 그런 식으로 살지 실체가 없다는 것은 완전히 시마이된 거예요. 그리고 로마 당국이나 유대당국도 그걸 의도했고 왜냐하면, 그 자칭 메시아라는 사람이 등장한 것이 이번 경우처럼 1~2번의 경우가 아니에요. 그전에 있던 사람들 다 죽이니까 끝났다 이 말이죠. 예수도 나사렛 예수도 마찬가지로 죽이면 끝나는 거예요.

그게 그들이 알던 세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어떻게 됐어요. 부활됐잖아요.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이 대략 몇 명인지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몇 명한테 보였느냐 6절에 15장 6절에 "그 후에 500여 형제한테 일시로" 보였습니다. 여러분에게 한번 묻습니다. 자 여러분들이 예수님 십자가 죽은 걸 알고 예수님 부활한 것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여러분 삶이 바뀌겠습니까? 안 바뀌겠습니까? 아니면 하던 일을 하겠습니까? 어떻겠습니까? 그냥 가던 길 가시죠. 그뿐이에요. 그뿐입니다. 하 나는 정말 큰 감동받아서 인간은 감동이 돈이 안 돼요. 감동을 밥 먹여주지 않습니다. 누가 감동 받은 거예요? 내가 감동받은 거예요. 내가 감동 받았으니까 자기 부인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감동받은 내가 아까워서 자기 부인을 못 하죠. 너 십자가 부활 봤어 안 봤어 나 봤어 이거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부활한 것도 자기를 지키는 힘으로 작용하죠. 자기를 못내 못 잊습니다. 그러니까 그 500명 따라 다녔는데 여기 몇 명 남았습니까? 다락방에 120명 3대1 아 4대1이에요. 다른 사람 어디 갔어요. 자기 집에 갔지 뭐, 뭐 했어요.

그런데 그 봤던 사람들 120명 가운데 봤던 사람 가운데서 빌립이 있었고, 바나바도 있었고, 스데반 집사도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공부를 통해서 뭐를 주목해야 되느냐 하면은 이들이 예수님 봤다. 부활 만났다 그래서 스톱이 안 됐다. 스톱이 안 되고 그 뒤에 뭘 받았습니까? 120명 그들이 기도할 때 뭘 받았어요. 성령받았지요 자 성령받았을 때 예수님이 실제로 자기가 예수님 십자가 죽음을 눈으로 목격하고 부활을 목격했다. 그것으로 끝난 사람과 성령을 받은 사람의 차이가 뭐냐 하는 거예요. 사람이 뭘 보게 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아까 칸트 이야기처럼 뭐를 봤을 때는 자기 안에 자기 안의 내부에 있는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이 자극을 받아서 편집에 들어가겠죠. 나 부활까지 봤는데 설마 나 지옥 가겠냐 이런 식으로요. 인간은 달라지고 싶지만 뭘 못하느냐 하면 그 달라진 게 어떤 경우를 달라졌다 하느냐 어떤 경우를 몰라요. 인간이 달라졌다 하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현재까지 왔는 것 가운데 내가 아쉬운 거 모자란 거 미흡한 거 그거 마저 채우는 것을 달라졌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거는 달라진 게 아니에요. 그냥 왔던 기차 그냥 다 속도 유지하고 달려가는 거예요.

달라질 때는 어느 정도냐 하면은 여기서 끊어져야 돼요. 철교가 끊어져야 돼요. 내가 달라질 것을 했던 그 달라짐이 전혀 이 달라짐하고는 이게 노선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달라짐이에요. 완전히 예상도 못 하게 달라졌어요. 근데 그 예상 못함이 여태껏 내가 살아오면서 나의 가치를 보존하려는 모든 시도를 묵사발 만들어 버립니다. 내가 나를 신뢰하겠다 하는 그 시도 자체가 성령과 충돌되지요. 자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에게 달라지는 것이 어디까지 달라지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달라지기 끝 끝판왕 '우리의 승천'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거예요. 왜? 근거가 뭡니까? 예수님이 먼저 승천했기 때문에. 예수님 먼저 승천했거든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보면 그때 밤빠밤 천사들이 나팔을 불면서 재림의 광경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끌리죠 끌리죠 끌릴 때 폼을 어떻게 잡는가 그건 모르겠어요. 비트 영화에 보면 정우성이 오토바이 탈 때 이런 모습입니다. 이래 끌리든지 요렇게 끌리든지 그거는 알지 못하지만 강제 소환이 일어납니다. 안 가 난 더 살아야 돼 딸 시집도 안 보냈어 결혼식 때 손 잡을 아버지가 없잖아요. 이리 버텨도 못 버티고 끌려 올라가게 되어있습니다. 그 능력이 무슨 능력이냐 그 능력이 성령의 능력이에요. 그 능력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그야말로 경상도 사투리로 세피하게 본 거죠. 우습게 봤지요 성령의 능력을 지가 뭐 착한 일 좀 하면 성령 받은 줄로 착각하고 있는데, 능력 안 받아도 할 수 있는 착한 일 가지고 굳이 성령까지 거론할 필요 없죠. 이게 예수님이 승천함으로써 예수의 성령받는 자도 무덤이 쪼개지면서 뽑아 세우면서 모든 우리의 육신의 몸을 영광된 몸으로 변화되어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왜냐 하면은 우리의 육신이 전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 형상을 한 톨이라도 그냥 낭비하지 않습니다. 다 끌고 모읍니다. 우리의 육신은 내 게 아니고 주님의 거거든요. 주님이 우리 닮았다. 하잖아요.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닮았어요. 죄 있는 예수님을 닮은 거예요. 우리가 죽는다 아니죠.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이죠. 우리는 그 예수님의 죽음의 양태들이고 다양체들입니다. 주님의 아버지께 버림받은 죽음을 우리가 그걸 모델로 해서 우리가 죽어 가고 있는 거예요. 버림 받는 거예요. 살아도 소용없다. 모든 것이 뭐 중심이에요. 예수님 중심이에요. 예수님한테 가면 뭐가 있습니까? 아버지하고 창세 전에 예수님만 아는 약속이 거기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 10절에 모든 것이 통일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신자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뭡니까? 구원의 실체가 없는 거예요. 왜 실제가 없는가 미래에 내 모습은 여기 현재 있고 예 미래는 점으로 하께요. 현재 있고 과거는 실선이고 이 현재 바로 옆에 과거잖아요. 점점.. 할 때 이 미래상은 과거까지의 누적된 나의 선경험적 인식 나의 경험이 경험으로써 미래상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 미래상은 나의 뭐가 돼요. 나의 우상이 됩니다. 우상 엉터리 나의 미래상 뭐가 없으면요 성령이 없으면. 성령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성령이 있을 경우에 내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고 버림받는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을 대신합니다. 성령이 있는 사람한테 십자가에 죽은 그 아버지께 과감하게 버림받는 그 모습이 지금 나의 미래가 되는 거예요. 기쁘지 않습니까? 어떻게 쓰레기 버릴 데가 없는데 성령께서 알아서 버려주니까요.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 예수님이 영광된 형상으로 옷 갈아입듯이 완전히 교체작업이 벌어지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그 누구한테 해당됩니까? 성령을 이미 받은 자에게만 해당되고 성령 받지 않는 사람은 교회 70년 동안 열심히 다닌 사람은 해당이 없어요. 이런 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마지막 심판 받는데 천사 융통성 없는 천사가 서류를 뒤적뒤적하면서 명단이 없네요. 명단이 없네요. 저 열심히 다녔는데요. 열심히 다녔는데 애초에 생명책에 명단이 없네요. 옆에 있는 주님이 "쟤들 누구야?" 찬스다 손 들고 "주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주를 위해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나 도무지 모르겠는데" 이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도무지 몰라 쟤 누구야" 몰라요. 땡 탈락!! 저리 가 뒷줄 지금 뒤 바빠 안 돼 대기표도 소용없고 아무것도 소용없는 거예요. 성령의 능력을 자기가 착한 사람 되는 걸로 국한했기 때문에 착한 사람 되는 것은 어디서 잘못 됐냐 하면 내가 살아가면서 과거 이 경험상 내가 악하다 죄인이라 생각하는데 이 악하다 죄인이라 하는 것은 아까 뭐라 했습니까? 자기 인간 속에 있는 윤리적 도덕적 선악 체계의 기준에서 착하다 악하다 하는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이게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성경에서 나온 죄는 뭐냐 어떤 경우에 죄냐? 죄를 짓지 않은데 죄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죠. 죄를 짓지도 않는데 죄가 돼요. 빵 몇 개 잡숴왔어요. 2개 먹고 왔지 2개 먹고 안 잡쉈어요. 죄 지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뭐든지 죄가 된다는 데서 온 즐거움이에요. 뭐든지.

내 행동과 상관없이 이미 죄 안에 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거예요. 10편 51편에 "나는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이게 선이고 악이라는 아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법원에 가면 그 뭐 동상이 하나 있답니다. 안 가봤는데 거기에 여신이 있는데, 정의의 여신이 있답니다. 정의의 여신 보면 천칭을 이렇게 저울 달고 그 다음에 눈을 가렸다는 거예요. 법원에 견학 온 유치원 애가 앞에 여자 판사가 지나가니까 물어요. 판사님 저 저 여자분은 왜 눈을 감고 저울을 왜 들고 있습니까? 할 때 그 여자 판사가 지금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예 '악마가 된 판사' 거기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눈을 감는다는 것은 사람의 어떤 편해 견해 편견을 갖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감고 보지 않고 천칭을 넣는 것은 선악체계 선과 악을 달아서 악이 많으면 처벌하고 선이 많으면 상을 주고 하는 여신이다. 이 세상 자체가 법으로 운영한다면, 곧 마귀가 선악과 나무라고 부추기는 마귀가 지배하는 세계잖아요. 마귀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태어난 거예요. 태어나니까 인간의 살아가는 것이 모든 체계가 선악체계가 전부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건 없어요. 선악체계가 전부예요. 그러니까 죄 지었다 하는 것은 뭐냐 그동안 자기가 또 선악체계가 가동된 거예요. 아무것도 숨만 쉬어도 죄가 되고 숨 안 쉬어도 죄가 돼요. 자살해도 죄고 자살 안 하고 버티고 살아도 죄가 되고 죄 아닌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야기했죠. 뭐냐? 너희들 전부가 나를 죽였잖아. 제가 언제 죽였습니까? 내가 죽었다는 말은 나머지 전부가 나를 죽였단 뜻이야 하는 그런 뜻이에요 이게. 성령은 어디서 오는가? 성령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보내주는 거예요. 순서는 십자가 그다음에 뭡니까? 부활 그다음에 뭡니까? 승천 그다음에 성령 오심이죠. 우리 시간적 순서로 보면 그렇게 되지요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이미 시간도 멈췄다고 했잖아요. 시간 계속 반복해서 해봐야 그건 반복에 지나지 않고 성령은 이렇게 한 게 아니고 십자가 지신 분의 영으로 바로 와요. 십자가 지신 분의 영으로 그러니까 부활은 뭐냐 그 환경을 말하죠. 십자가 지셨다는 그 환경을 십자가 중심으로 조성하는 환경을 부활이라 합니다. 십자가 지신 분이 승천함으로서 성령 받은 자가 예수님의 갔던 그 코스대로 하나의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된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지요. 승천할 자들이 이 땅에서 뭘 해도 죄가 되는 것이 그게 슬픈 이야기가 아니고 반가운 이야기죠 왜? 칸트는 말하기를 인간 속에 자유가 있어야 도덕적 책임이 주어진다 그랬어요.

인간 속에 자유와 영혼 또는 확신 이렇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물 자체 그러니까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현상 바깥의 세계에 있는 신의 세계가 인간 속에 어떤 도덕적 책임감으로 찾아온다는 거예요. 인간은 짐승이 아니니까 도덕적 양심이라는 게 있으니까 윤리적이죠. 이 도덕적 책임감이 칸트 본인도 몰랐죠 이게 마귀의 앞잡이인 것을 몰랐어요 본인도. 마귀는 계속 끝까지 뭘 물어뜯습니까? 완전 도살하는 것 같아요. 물었다 하면 놓치를 않아 셰퍼드보다 더 심해요. 끝까지 뭡니까? 도덕적 책임을 물어요. 완전하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해야지 인간아 이런 거예요. 완전하진 않지만 네가 완전하느냐를 내가 요구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한 걸 요구하는 거예요. 그것도 안 하면 너는 개 돼지보다 못해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합니까? "원래 개 돼지만 못해" 이거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우리는 구더기보다 못해요. 원래 개 돼지보다 못 해요. 그래서 나는 개만이라도 되면 다행이다 한 여자가 누구죠 유명한 여자 수로보니게 여인이잖아요. 주님 개 될게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그거라도 준다면 얼른 병뿐이라도 개 될게요 개 되겠습니다.

도덕적 책임대로 우리는 다 지킬 수 없어서 죄인이 아니라 도덕적 책임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예수를 죽인 자가 도덕적 책임을 갖고 있는 자들이 죽이거든요. 네 애비는 악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너희 애비는 악마야 악마가 사주해서 예수님을 죽이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냐 바라바라 하는 강도는요 도덕적으로 봐서는 제일 말단 존재잖아요. 본디오 빌라도가 선악적인 체계 안목을 가지고 내기했어요. 너희들 사람한테 또 해코지할 바라바라를 풀어줄까 예수님을 풀어줄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라바를 풀어줘라 예수님은 바라바보다 더 우리에게 해로운 존재다 이미 거기에 모든 인간은 이미 날 때부터 동의된 상태입니다. 우리 자신을 뭘 할까보다도 우리 자신을 아는 게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어떤 사람은 선악과 안 따먹었다 하는데 여러분 선악과 생긴 거 봤어요? 안 봤지요? 근데 선악과 따먹었다고 왜 구경도 못한 우리가 왜 죽어야 되죠. 이유가 뭐죠 그 이유가 뭡니까? 선악과 따먹은 자식이기 때문에. 시간은 뭐다 반복이죠. 계속 반복으로 확장시키는 겁니다. 로마서 5장에 나오잖아요.

죄 짓지 않은 자도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는 죽음 안에 죽음이 왕 노릇하고 있다. 죄가 왕 노릇하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나바하고 그 가말리엘 문하생 같이 동기생이거든요. 유학 가서 동기생인데 바나바는 이미 은혜를 받았는데 사도 바울은 자기 동기생 누구 또 그 예수 믿는 사람 누군지 뻔히 아는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내가 누구냐. 내가 자기를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해요. 어떤 자냐 하면은 내가 교회를 핍박한 자라고 돼 있습니다. 그것도 열심으로 핍박한 자라 되어 있는데, 3장 6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의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도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흠이 없는 자로다" 이걸 이야기할 때 지금 사도 바울은 신났어요. 부끄러워하는 거 아닙니다. 신났어요. 내가 도덕적 책임감을 갖겠다는 이 자체가 나는 지옥 갈 인간이라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만이 신나게 외칠 수가 있어요. 짐승, 개만도 못한 거 감지덕지죠 그것도.


근데 이런 이야기 들을 때는 여러분들이 어 그렇다 하지만 막상 이거 문 열고 나가 세상에 나가보세요. 내가 니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 내가 인물로 보나 뭘로 보나 환경을 보나 내가 못한 게 뭐가 있는데, 참 세상 참 더럽다 더러워 내가 빨리 천당이나 가야지 어디 천당 받아줍니까 받아주지도 않는데. 더러운 세상 못 살면 천당 가야죠 지 맘대로 갑니까? 성령도 없는데 도덕적 책임감으로 무장 돼 있는데, 이래 가지고 교회 오고 60년 다녔는데 장로 되고 목사 되고 다 됐는데 이거 가지고 도덕적 책임감을 가지고 당회 회의하는 거 보세요. 전부 다 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예요. 예루살렘에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때 과연 사마리아 사람보다 유다 사람이 나았느냐 이 말입니다. 여러분 그게 훌륭했어요. 아니에요. 똑같애요.

유다나 사마리아 사람이나 세상에 있는 땅 끝에 있는 사람이나 거기서 거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신 분의 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이렇게 거쳤으면 나는 이쯤 해서 믿어야 이게 아니라 예수님 십자가 달린 분의 영이에요. 그러면 그 십자가 영의 출발점은 뭡니까? 너를 우리로 하여금 어디다가 데려가요 부활로 데려갑니까? 새 생명 데려가요? 아니에요. 어디로 가요? 십자가로 데려가게 되면 내가 십자가 전에 알았던 모든 죄라는 것 의라는 것이 마귀가 나한테 강제로 집어넣어준 가짜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어떻게 내가 바르게 사는가 이런 것은 다 날아갑니다. 그걸 뭐라고 하냐? 처소가 돼요. 우리는 육신이 내 몸이라고 하는데 이 몸의 개념 어떤 국소적인 어떤 지점이 처소가 돼요. 장소가 처소가 된다. 이거예요. 장소보다 처소가 좀 넓어 보이죠. 왜냐하면, 처소에는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같이 있어요. 옛날에는 이게 처소를 신약에서도 성전이라고 하는데 성전은 옛날엔 2가지가 있었어요.

뭐냐하면, 이스라엘 뜰과 그 다음에 무슨 뜰? 이방인의 뜰이 있었어요. 이방인들은 아무리 해도 이스라엘 보고 있는 목격하는 성전까지 나갈 수가 없어 가지고 성전의 이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땅 끝까지 온 유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그럼 이런 경우에는 성전이 이 지상 공간이라는 제한을 벗어났다는 뜻이거든요. 벗어나려면 예수님 뭘 해야 됩니까? 땅에 있어야 돼요? 어떻게 위로 올라가야 되겠죠. 그게 뭡니까? 승천이죠. 예수님이 승천하면서 어디까지 갔는가? 하나님 우편까지 앉아버렸어요. 하나님 우편까지 125층 136층 쭉쭉 올라가면 어디까지 엘리베이터가 멈추느냐 하면은 하나님 우편에 멈춰요 우편에서 멈춰 버리면. 우편에서 뭐가 오느냐 하면 슈슈슈 스파이더맨 거미줄이 거기서 쭉쭉 빠져나와요. 거미줄의 특징은 뭐냐? 한번 이마에 닿았다 하면 릴 낚시 잡아 땡기는 거예요. 쏘아댄 장소로 끌려오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어디 앉힙니까? 하늘에 앉히십니다. 여러분 뭐 사도 바울만 좋겠다. 삼층천 올라가고, 아니에요. 사도 바울만 올라간 게 아니라니깐요. 그 삼층천에 다 올라가 있어요. 골로새서에 보면 뭡니까? 우리의 생명 어디에 있다. 하늘에 있다. 하늘 어디? 하늘 화장실이에요? 입구에? 매표소에? 아닙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어요. 왜? 성령이 거기서 나왔기 때문에. 성령이 거기서 나왔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이미 이걸 예언을 해놨어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뭐라고 되어있느냐? 성령을 처소라 또는 다른 말로 하면 거처라고 돼 있죠.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요한복음 14장 같이 보겠습니다. 14장 20절에 "그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몇 분 나옵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여기 등장한 숫자가 몇 명이에요? 아버지 있고 아들 있고 너희 셋 있죠. 그러면 성령은 어디에 있죠. 성령은 어디에 있느냐? 23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이 날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가서" 뭐를 같이 한다? 거처. 성령은 받쳐줘요 보혜사라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도 그걸 아우르는 거처로서 성령이 오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에게 성령이 왔다는 것은 그 거처 안에 성령님만 계신 게 아니고 누구 있다? 아버지도 계시고 예수님도 계시는 곳에 우리가 예 초대 정도가 아니고 택함 받아서 거기에 가게 되는 겁니다 성령 받으면. 그러면 성령 받은 특징이 뭡니까? 모든 일어나는 일 모든 존재 내 있음 뭐 닭 뭐 병아리 그 뭐 어떤 모든 존재 해 달 별 모든 일어나는 일과 모든 존재를 십자가를 경유해서 이해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경유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이 새 언약에 경유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해하면서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 육신은 마땅히 십자가 뭡니까? 예수님이 아버지께 버림받은 사건이 십자가 아닙니까 우리는 마땅히 내가 아는 거 내 존재부터 아버지께 버림 받아 마땅하단 말이죠. 그러면 신약 성경에 나온 사도 바울의 모든 편지에는 뭐가 들어있어요? 왜 너는 율법 지켰다는 너는 도덕적 체계에 있다는 너는 왜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마땅한가 그것을 사도 바울 편지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는 그 차원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사도에게 준 성령으로 준 편지 내용이기 때문에 그 수준이 어느 수준이냐 하면은 산성설교 수준입니다. 산성설교는 어떤 내용이 어떻습니까?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불가능만 골라서 돼 있죠.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편지의 내용은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하죠. 불가능한데 네가 불가능한 것을 성령 안에서 너는 그게 다 이루었다 가능한 한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버렸어요. 말씀이 주인이 되어서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말씀을 떠날 수 없어요. 왜 거처를 같이 하니까 주님이 주님을 떠날 수가 없어요. 거처를 같이 하니까요.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의 영이시니 주위의 영이 계신 곳에는" 뭐가 있습니까? "자유함이 있느니라" 다시 말해서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더 이상 나한테 안 매이고 오직 주님한테 철저하게 예속되는 것을 자유라고 해요. 철저하게 예속되는 것,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마태복음 8장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신약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네가 한 것이 바로 내가 한 것이다로 바뀌죠 네가 한 것이 바로 내가 너한테 강제로 시킨 거고, 내 힘으로 네가 그 일을 해냈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빌립보서 3장에서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뭐가 빠졌어요? 도덕적 책임감이 있을 자리가 없지요 왜? 도덕적 책임감은 죄 그 자체기 때문에 그게 나의 의를 유도하는 악마의 미혹거리이기 때문에 악마의 미혹거리. 도덕적으로 나를 평가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이 없지요? 죄인이 무슨 죄를 규정을 합니까? 판사가 재판해야지 피고와 피고 재판하는 경우 있습니까? 없지요. 지금 이 모든 인간들이 자기가 피고이면서도 자기가 재판을 본인이 하고 있습니다. 왜 강남에서 차를 7중이나 박았느냐? 심신미약. 정신 신경안정제를 먹어서 심신미약을 어쩌라고? 만약 우리가 그렇게 약물 이상하게 먹고 차 박으면 우린 뭐라 합니까? 우린 뭐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러면? 심신미약, 그러니 저를 죽이시옵소서 이래야지요. 근데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심신미약, 살려주이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차이점이에요.


여러분 한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 밀폐된 공간에 불이 났어요.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기 문장을 하나 쓰겠어요. 진짜 문제 내고 싶다. 밀폐된 공간에 완전 닫힌 공간에 불이 났다 그러면 거기에 적당한 다음 문장은 수능은 안 나옵니다마는.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이게 자유 아닙니까? 이것보다 더 자유가 있겠어요. 실습은 하지 마세요. 차 타고 가는데 뒤에서 박아버려갖고 공중에 한 3미터 올라왔다 그 순간이 무슨 순간입니까? 톰과 제리의 순간입니까? 절벽에서 떨어진 순간 지금이 비로소 네가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 내 육신은 고쳐도 자유 이게 구원의 날이네요. 구원의 순간. 이런 사람이 누구냐 빌립 집사였고 그보다 더 유명한 사람은 스데반 집사였습니다.


바로 성령 받은 그 사례를 그 다음부터 쭉 나열합니다. 예수님 봤다. 부활 봤다. 아닙니다. 그걸로 아니에요. 구원 아니에요. 뭘 받아야 돼요. 성령이 와야 된다고 로마서 8장 10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라" 뭐 성령을 받으란 말입니까?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고. 내 너한테 갔지? 이 뜻이에요. 갔지? 확인해 봐. 그런 뜻이에요. 말씀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확인용입니다. 아 이런 일조차도 감사거리구나 이것 가지고 내가 비난하거나 내가 절망하거나 낙담할 문제가 아니고 매 순간이 무슨 날? 매 순간이 구원의 날이에요. 오늘 이 밤은 무슨 날? 즐거운 구원의 날이에요.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성전이란 이름에 주와 함께 처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주도권을 주님이 쥐시고 우리에게 매일같이 이런 것을 유발시키는 하나의 처소 공간으로 여러분들 기꺼이 주님이 일하신 공간으로 제공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누구 흉내 냈고 누구 말을 경청했습니까? 나보다 믿음 좋고 뭔가 일이 잘 풀리는 사람 본받고 싶어 하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사람에게 매 맞아 죽은 그 주님이 부러워하진 않았습니까? 우리가 어느 정도로 죄인인 것을 성령이 오셔서 말씀 가지고 오셔서 날마다 지적해 줄 때 우리는 모든 일이 감사하고 그 어떤 일도 다 주 안에서 다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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