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번제와 응답

아빠와 함께 2024. 12. 12. 08:43

번제와 응답

2024년 12월 11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3:5-10

(3: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3: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3: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3: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3: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솔로몬이 한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추가적인 사실을 첨가해서 응답하십니다. 이는 기도하는 전에 솔로몬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으로 솔로몬과 그 후예들을 다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 내용을 칭찬하십니다. 이는 ’자기를 위함‘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를 위함‘이 빠져 있는 내용으로 응답을 하셨다는 말은 이 기도 응답을 솔로몬이 주도적으로 자기 것으로 소지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즉 결코 솔로몬이 자기를 지키기 위한 용도로 기도 응답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고 응답받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줄곧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인정해주시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솔로몬의 기도를 계기로 해서 새로운 원칙이 수립되었음을 뜻합니다. 그 내용이 열왕기상 3:14에 나옵니다.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만약에 솔로몬이 기도 응답에 부합되지 못하면 응답 실현 차원에서 솔로몬은 부정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솔로몬이 1천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자신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과 연결된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과 다윗에게 맺은 맹세 자체가 일관성을 가지고 맹세를 이루게 되신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시작한 기도의 응답은 인간에게 돌아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기도는 그 응답도 인간을 거쳐 주님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은 이 맹세 성취의 기능으로 활용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응답은 인간의 부정성을 경유해서 완전에 이릅니다.

히브리서 7:20-21에 보면,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던진 맹세를 이루는 데 있어 인간들을 가담하게 하시는 이유는, 그들에 의해서 결코 맹세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부각해서 오로지 모든 공적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져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인간에게 대해서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번제에 대해서는 이미 다윗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인간에 의해서 성취되는 맹세가 없는 이유는 인간 육신의 한계 때문입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인간의 육신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장례식장에서 우는 것은 이제 더는 자기와 놀아줄 사람을 잃은 자기 상실감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흙으로 환원되는 운명과 성질을 지녔기에 하나님쪽에서 제시한 그 어떤 구원의 조건도 인간에게는 들어붙지 않는 조건이 됩니다. 마치 아무리 턱걸이 달인이라도 결국 지면으로 당기는 중력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철봉을 놓고 도로 땅에 내려와야 하는 것처럼 흙으로 환원되어야 될 육신의 힘을 인간은 당해내지 못합니다.

육신은 마음의 고향을 찾아갑니다. 나와 일치된 나를 갖추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늙어가는 육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릴 때 나다움을 구성한 주변의 식구나 친구나 일가친척이나 풍경들은 세월 따라 흔적없이 다 날아가고 현장에 없습니다. 아무리 복음의 말씀을 대해서 그것은 육신의 새로운 시작점이 되지를 못하고 그리운 과거 노선 안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모든 신앙적 도전은 실패로 끝납니다. 육신의 본능은 이렇습니다. “나와 닮거나 같지 않은 것은 다 싫다!” 육신은 한시로 자신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탕자 비유는 이런 점에서 육신의 한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비유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며 가진 돈을 다 쓰고 도로 빈털터리로 아버지집으로 되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어는 인간도 자신이 만든 자기 자리를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한시도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로지 일관되게 자기 만을 신봉하기에 로마서 8:7의 말씀이 정확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렇다면 솔로몬의 기도 응답은 결국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솔로몬이 기도 응답 받을 때 결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을 하게 될 줄은 상상치도 못했습니다. 1천 번제의 응답은 요한복음 3:13-14에 나오는 방식으로 성사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주장은 ‘애굽으로 돌아가자’입니다. 자기 주제에 ’약속의 땅‘은 관계없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냥 그동안 살던 대로 살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뱀을 그들 가운데 금속으로 고정시켰습니다. 이는 인간 육신의 한계를 계속 확정지으면서 그들과 동행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불뱀이 되셔서 인간 육신의 한계를 최종 지으셨습니다. 마치 아담은 반드시 흙으로 환원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맹세에 이중성이 있습니다. 창세기 3:20에 보면, “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으로 환원된 육신도 있다는 겁니다. 그 육신이 바로 예수님의 육신입니다.

이 육신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이 성령으로 인해서 한 분의 지혜로 모든 백성을 한 나라의 백성으로 모을 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열왕기상 3장 4-10절(번제와 응답) 24121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3장 4-10절입니다.

열왕기상 3:4-10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솔로몬이 번제를 크게 쏘죠. 한 턱 크게 쏘면서, 번제를 드리면서 기도한 그 내용은 중요한 것이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돌아가신 아비 다윗의 자리에 제가 끼어들게 되었습니다.’라는 그 한 가지 하고요, ‘하나님과 다윗이 만나는 자리에 감히 내가 끼어들었습니다.’ 그 내용 하나고요.

또 하나는 “종은 작은 아이라” 그 당시 솔로몬의 나이가 한 스무 살밖에 안 됐으니까 뭐 나이도 적겠지만 “종은 작은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한 사람으로서 뽑아 세워서 하나님과 다윗이 만났던 그 자리에 제가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1과 2를 합쳐 이걸 종합하면 ‘이거 내 자리 아닙니다.’라는 뜻이에요. ‘내 자리는 아닌데 하나님께서 거기다가 나를 집어넣었으니까, 전에 다윗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로 인하여 이 자리가 마련되었사오니 이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주신 지혜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이게 기도 내용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는 게 나오는데요, 11절부터 응답을 하십니다. 응답할 때 하나님의 응답 내용이 묘합니다. 이중성을 갖고 있어요. ‘이런 것들은 구하지 아니했다’라는 말씀을 해요. 부정적인 것을 하나님 쪽에서 먼저 제시했어요. 이런 것을 구하지 아니했다, 무엇을 구하지 아니했는가? 자기의 수명이 길어지기를 구하지 아니했고, 자기의 제물이 많아지기를 구하지 아니했고, 내 쪽에서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기를 구하지 아니했다, 이 말이죠.

구하지 아니할 때 그 세 가지 전체를 합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11절에 “자기를 위하여”가 들어가 있어요. 자기를 위해서 수명이 늘어나기를 구하지 아니했고, 자기를 위해서 재물이 많아지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날 괴롭히는 원수가 빨리 망하기를 구하지 아니했단 말이죠. 이게 하나님의 응답 안에 들어있어요.

하나님의 응답 안에 들어있다는 말은, 네가 이런 것들을 구하지 아니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육신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육신으로 간주한다는 말은 육신에 어떤 조건을 갖다 붙여도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천번제가 아니라 일만번제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 번제를 드리는 당사자가 육신을 갖고 있잖아요.

육신을 갖고 있으면 육신을 갖고 있는 그 인간이 일천번제, 일만번제, 십만번제, 백만번제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 번제 드렸다고 응답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번제는 뭐냐? 육신과 하나님의 조건이 결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그 번제에 주어진 의미입니다.

시편 51편 16, 17절에 보면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아버지 다윗이 전에 고백한 게 있어요.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번제를 안 받으시는가?

다윗은 ‘그걸 만약에 하나님이 원했더라면 그것을 기쁘게 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원치 않는 이유가 있다.’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인간의 육신 자체가 고장났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 자체가 죄 덩어리이기 때문에 죄 덩어리가 드리는 어떤 번제나 제사도 주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안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가 뭔지를 다윗은 알았어요. 번제를 드리는 게 아니고, 제사를 드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나의 상한 심령이라 했습니다. 나의 상한 심령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번제다, 이 말입니다, 번제, 제사고. 그러면 인간 쪽에서 준비할 것은 딱 정해졌죠? ‘상한 심령’ 인간은 왜 내가 드린 건 하나님께서 안 받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이제부터 그 이유를 너에게 알려주마.” 이게 기도의 응답이에요. 이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솔로몬이 기도해서 응답받아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게 아니에요. 보통 육신을 가진 인간들의 기도 특징이 그거예요. 내가 기도를 시작해서 그 응답은 내게로 도로 회수가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 기도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제사의 한계고.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뭐냐? 기도를 하나님 쪽에서 하고, 그리고 인간이 상한 심령 되는 것이 그 기도의 응답이고, 상한 심령 되었다는 하나님의 응답이 완료될 때 그 상한 심령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이 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스스로 응답받는 그런 순환 논리가 하나님 쪽에서 제시되는 겁니다. 그 순환 경로에 다윗이 걸려들었고 솔로몬이 지금 걸려든 거예요.

하나님이 기도하고, 응답은 현재 못나기 짝이 없는 우리 자신이 응답이에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히브리서 7장으로 이야기하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 20절에 보면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게 히브리서 7장이고 히브리서 6장에 같은 내용이 나와 있는데요, 하나님이 일을 할 때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맹세를 제시하고, 그 맹세에 합당한 자와 합당하지 않은 자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합당한 자를 보내셔서 ‘왜 인간들은 하나님의 맹세를 지키는데 합당하지 않고 일치되지 않는가’를 보여주는 식으로 하나님의 자기 일을 마무리 짓고 성취 시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 성도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되 우리가 맹세의 주체가 아닌 것을 알게 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거예요. 이해가 되실 줄 믿습니다. 안 되면 한 말씀 더 드리겠어요. 욥기가 나오잖아요. 욥기는 욥의 육신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욥의 육신이 갖고 있는 그 기능을 구원하는 거예요. 욥의 육신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욥의 기능을 구원하는 겁니다.

욥의 기능은 뭐냐? 친구들을 위해서 자기가 제사장,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것, 친구 세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중보기능을 하는 거예요. 그 기능을 욥을 통해서 하나님이 뽑아내심으로서 욥에게 다가갔던 하나님의 자기 맹세를 욥을 통해서 스스로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바입니다. 방금 욥을 언급했지만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성취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성취시킨다는데, 그 성취 시키는 전체 스케줄이 나와 있는 것이 창세기 3장 19절 20절에 나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건 아담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아담은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데 흙이니까 흙으로 환원되어야 될 기능입니다. 인간은 아담, 흙이라는 뜻이에요. 인간은 흙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와서 선악과 따먹고 까불락 거리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처음 일로 환원시키기 위해서 그 까불락거리는 아담을 흙으로 도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뭐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데 인간입장에서는 “왜 태어나서 살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죽이십니까? 이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네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너 뭘 기대했어? 네가 지금 엉뚱한 것을 기대했냐?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게 그게 뭐가 이상해?”

그건 당연한 거죠. 왜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에요, 장례식에서.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장례식 있죠,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장례식에서. 누이동생들이 울고, 주위 친척들 울고, 유대인들 울고요, 그거 보고 주님도 우시고, 이게 뭐 하는 시츄에이션이에요? 뭐예요, 이게? 사람이 장례식에서 우는 이유는요, 같이 놀아줄 사람 없고 이야기할 사람 없어서 우는 거예요. ‘나 너 없이는 이제 재미없어서 못 살겠다.’ 이런 겁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의 맹세에 걸려든 거예요. 맹세에 걸려들었기 때문에 솔로몬은 반드시 타락해야 돼요. 그러한 경향이 열왕기상 3장 13, 14절에 나오는데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이렇게 했단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이 여기서 멈춰야 돼요. “아이고, 기도 잘했어. 네가 제대로 기도했어. 따라서 네가 기도한 대로 아버지한테 줬던 그 맹세를 너에게 유지 시킬게.” 솔로몬 입장에서 들을 이야기를 다 들었어요. ‘하나님께서 나를 제대로 된 왕으로 봐주시는구나.’하고 끝나야 되는데 뭔가 뒷부분이 찜찜해요.

14절이 문제입니다.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이게 무슨 뉘앙스를 주느냐 하면요,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일천번제 드리고 기도 제대로 해서 나에게 제대로 된 응답 받았으니까 넌 앞으로 어떤 일을 해도 아무 문제 없어.” 이렇게 마무리 짓는 게 아니고, 응답받은 건 응답 받은 거고, 이건 시작이고요 ‘이제부터 그 응답 받은 데로 네가 똑바로 안 살면 너도 마찬가지로 똑같아.’ 이런 뜻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솔로몬이 응답을 소유하는 게 아니고 응답이 솔로몬을 소유하는 겁니다. 응답을 응답답게 하기 위해서. 그럼 응답을 응답답게 하기 위해서 ‘결국 솔로몬은 다윗의 길을 걷지 아니하고 엇길로 갔더라.’ 이런 내용이 당연히 뻔하게 뒤에 등장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세상에서 절에 다니고 교회도 안 나오다가 어느 날 우리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 이 말이죠. “이제부터 나는 세상보다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잘했어. OK!” 이러면 끝날 문제를 “이제부터 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너도 잘려.” 그러면 내가 칭찬받은 것은 뭐가 되어버려요? 칭찬받은 것이 마감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칭찬해 줬다는 말은 이제부터 내가 너를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메시지도 하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의 복음이 좀 어려워서 다른 목사 복음 전하는 것을 좀 들어보면 어떻겠습니까?” 하는 아주 순진한 생각을 해요. “들으세요. 듣는데 이거 하나 주의하시기 바랍니다.혹시 어떤 목사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여러분 구원받고 싶습니까? 천국 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복음을 알고 믿고 복음을 소유하시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라고 가르치거든 그것은 복음이 아닌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런 목사 찾는 교인들의 욕망, 욕심이에요. 그러면 복음은 뭐냐? 처음에 올 때는 ‘하나님이여, 복음을 내가 알고 싶습니다. 왜? 복음을 알아야 내가 죽어도 천국 가니까요.’라는 마음으로 왔더라도 진짜 복음을 들어 버리면 내가 복음을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거꾸로 복음이 나를 이용 한다는 것, 나를 복음 앞에 제거 한다는 것, 그럴 때 당신은 복음을 제대로 아는 겁니다. 솔로몬하고 똑같아요. 솔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솔로몬을 통해서 배울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육신의 끝은 어디냐? 육신의 한도, 이걸 배워야 해요. 지난번에 전도서 할 때 했잖아요. 공부도 많이 하고, 하나님이 줘서 지혜도 많고, 재판도 잘하고, 하나님께서 총명한 마음을 받았지만, 그래서 그 총명한 마음과 숱한 지혜를 받고 많은 부귀를 누렸지만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이것이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겁니다.

육신의 한계 때문에 그래요. 육신이 한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이 육신의 한도는 신약성경에서 끝장을 봐요. 대표적인 것을 하나 뽑으라면 누가복음 15장의 예를 들겠습니다. 11, 12절에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서 먼 타국에 가서 허비하는 이야기거든요. 그리고 탕자가 빈털터리가 되어서 다시 아버지께 돌아오는 이야기잖아요. 이 본문이 무엇을 뜻하느냐? 인간은 어느 누구도 아버지 집을 떠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아버지 집 자체가 없어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 집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성경 공부하고 복음을 들어도 곧장 어디로 도로 떨어지느냐 하면, 자기의 육신의 고향으로 떨어져요, 육신의 고향으로. “나의 살던 고향은 육신의 고향~” 육신의 고향이 그리워요. 인간이 상실된 것, 어릴 때는 진짜 나다웠는데 어릴 때의 그 나다웠던 그곳으로 회귀하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 가끔은 어릴 때 철없이 놀던 고향마을, 고향집에 가보고 싶지 않습니까. 포근함을 느끼고 싶지요. 자기의 육신에 대한 친근함이 그동안 배우고 달달 외우고 했던 그 복음에 대해서 고백했던 모든 것을 무효화시킵니다. 나의 육신의 친근함이. 어떤 복음도, 어떤 귀한 진리도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게 만들고, 나를 새사람이 되지 못하게 만들어요.

우리는 탕자가 된 적이 없습니다. 왜? 한순간도 내 육신에서 발을 뗀 적이 없기 때문에. 50년 복음 알고 결국 도로 자기 육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 육신의 끈질김, 아주 끈질깁니다. 남자들 턱걸이 많이 하잖아요. 백 한 번, 백 두 번…, 했다. 그 턱걸이 계속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잘해도 중력을 못 이깁니다. 철봉에서 내려와야 해요.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아무리 복음을 연구하고, 십자가를 분석하고 공부해도 결국은 육신이 잡아끄는 이 중력, 마귀의 손아귀의 힘을, 그 장력을 누가 이깁니까? 사람들은 복음을 연구하고, 성경을 외우고 하면서 새로운 시작점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시작점은 어느새 과거 노선으로 굴러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떠나가는 자기의 여자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아무리 슬프고 불행해도 내가 너를 지켜줄게’라는 뜻을 전하면서 “이 밤의 끝은 내가 잡고 있을 테니”라고 해요. <솔리드>라는 가수가 그렇게 노래해요. 이 밤의 끝은 내가 잡아준다고. 그러나 그것은 육신이 된 내가, 흙이 된 내가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분명한 원칙을 세웠어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복음 가지고 까불지 말고 네가 육신이니 육신으로 돌아가라고. 인간의 끝을 인간이 쥐락펴락 못합니다. 왜? 이중성 때문에. 그 이중성 속에 솔로몬이 들어온 거예요. 그곳이 다윗의 자리였던 겁니다. 언약의 자리에 이중성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솔로몬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 그 이중성을 모르고 ‘내가 육신적으로 제대로 된 기도 응답을 받았으니 제대로 된 이스라엘 왕으로 잘 살면 하나님께 칭찬받을 것이다.’라고 단언했습니다. 그것은 이중성이 아니에요. 단일성이 되어버려요.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이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 죄 덩어리를 받는다는 그 사실을 솔로몬은 이해를 못 하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 되었으니 줄곧 좋은 관계 되리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전도서 초반에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그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겁니다.

로마서 8장 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할 수도 없음이라.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복음을 지키지를 못해요, 인간은. 복음이 그 사람을 활용하고 이용해야 하지 내가 복음을 간수를 못합니다. 흙인 주제에 흙으로 환원되어야 해요.

그런데 성경은 애초부터 이중성으로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을 아까 말씀드렸는데 20절을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그 남편 되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이야기를 했는데 20절에서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기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입니다. 육신은 생명에 갈 수가 없어요. 그러나 생명은 육신을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생명한테 이용당하세요. 이용당하면 어떻게 되는가? 왜 내가 흙일 수밖에 없고, 왜 내 힘으로 복음 믿고, 복음 소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는 이유를 이 육신을 가지고 남은 생애를 철저하게 경험해 봐야 됩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겁니다. 일천번제를 솔로몬이 드릴 때 솔로몬의 그 일천번제를 하나님이 무시하느냐? 무시 안 했기에 기도에 응답을 했잖아요. 그러면 그 기도의 응답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솔로몬도 육신이기 때문에 유지하거나 관리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솔로몬에게 기도 응답을 했다는 말은 솔로몬이 아니고, 솔로몬의 자리, 바로 다윗의 자리에 오실 그 메시아가 솔로몬의 응답을 완성시킬 겁니다.

일천번제의 응답을 솔로몬의 노선을 따라 오실 분이 완성을 시킨다면 그 완성의 모습은 뭘까? 뭘 가지고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걸 우리가 알아야 되지요. 그걸 알아야 ‘솔로몬은 왜 필히 실패해야 하는가, 왜 초반의 응답대로 되지를 못하는가?’ 그걸 알 수 있거든요.

장차 메시아의 응답의 모습은 요한복음 3장 14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일어난 그 일을 예수님은 자신의 사건으로 합류시켜 완성을 시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일천번제를 어떤 식으로 완성 시키는가? 그 완성을 위해서 하늘에 계신 분이 일부러 땅에까지 내려오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땅에서 기다리는 자는 누구냐? 육신들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육신들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이야기를 단출하게 줄여서 하면 이렇습니다. “내 주제에 무슨 약속의 땅이냐? 치워라. 살던 대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내 주제에 무슨 복음이고 천국이고, 열심히 해 봐야 나중에 결국 힘 빠지고 맥 빠져서 이게 안 된다는 것이 갈수록 강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모든 신학적 도전이 다 실패로 끝나는 겁니다.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자들이 우글거리는 그 광야에,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그 자리에 모세와 더불어 우리 주님이 먼저 계셨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지요.

왜?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하시는데 그 주의 이름이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함께 있다고 보자는 말이지요. 원망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서 물려 죽게 했습니다. 불뱀에 무슨 시건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시키는대로 움직일 뿐이지요. 불뱀이 와서 물게 하니 죽은 자가 굉장히 많았다고 되어 있어요. 민수기 21장 6절에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도 물려 죽게 될 거예요. 그럴 때 중보자 역할을 하는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민수기 21장 7절에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자, 여기서 ‘육신의 위력, 육신의 진가 이런 것은 다 드러났습니다.’하는 뜻이에요. 육신의 한도가 뭐냐가 다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불뱀에 물려 죽는 그것으로 육신의 한계가 다 드러난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한계가 뭐냐? 그 뱀을 안 떠나게 만드는 것이 육신의 한계를 더욱더 그 극단까지 몰아세우는 방법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뱀을 고정용 뱀으로 만드는 겁니다. 뱀이 떠나가는 것이 아니고 뱀 앞에서 우리는 죽어 마땅함을 알려주는 그런 상징물을 만들어요.

그게 놋뱀입니다. 그 놋뱀은 놋으로 만든 딱딱한 금속체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는 그 놋뱀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라는 인물이에요. 하나님의 번제, 맹세의 완성은 십자가에 달린 분이 제사를 통해서 툭 튀어나올 때 그 제사가 응답받는 거예요.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참으로 합당합니다, 라는 고백을 내세울 수 밖에 없어요.

그런 고백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다는 낌새 같은 것, 노림수는 부리지 말고요. 육신이라 하는 것은 감기약 먹은 것 같아요. 조제된 감기약 먹으면 자꾸 잠이 오지요. 깔아지잖아요. 제가 시범을 보이자면 “주여, 십자가 …” 이러는데 고개가 푹 떨어지면서 잠이 와버려요. 육신의 한계 때문에. “십자가 피로…” 말 떨어지기 무섭게 ‘왜 잠이 오지?’

그래서 예수님 고백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지금. 백날 고백해 봐야 그 고백 자체도 육신의 한계에 속하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의 한도는 끝까지 자기를 닮지 않으면 다 싫어해요. 아까 고향 이야기하다 만 것 같은데요. 옛 고향이 그리워 거기 가보면 어른들 이미 다 돌아가셨어요. 그때의 친구들도 없어요. 다 자기 나이대가 되어서 영감이 되어 있어요. 재미도 하나 없어요.

어릴 때 날 닮은 존재가 왜 없느냐는 거예요, 나를 닮은 존재. 나를 닮지 않는다면 이것은 내 마음에, 내 성에 차지 않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환상이라 합니다. 인간은 세상에 살면서 계속 과거 노선의 어릴 때 환상 때문에 계속 환상을 만들어내요. 내가 어릴 때 봤던 풍경도 안 보이고, 내가 어릴 때 있었던 들판 대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고요. 재미 하나도 없어요.

사는 게 재미가 없는 이유가 내가 보고 싶은 풍경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도 하나도 없고요. 그게 육신의 속마음인데 거기에 복음 얹는다고 복음이 기쁨으로 대체 되겠어요? 속마음은 옛날의 그 나다운 나로 돌아가고 싶은 게 그게 한결같고 그게 강렬한데 성경 지식이 그 강렬함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아까 말한 대로 인간은 아버지 집을 떠난 적도 없어요. 처음부터 자기 집에서 한발 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전혀 상관없지요. 자, 주님께서 뱀을 들어서 우리가 육신 되게 해 놓고, 그다음에 뭘 하느냐? 그 다 이루었다, 함이 어떻게 적용되는가?

끝으로 고린도전서 12장 4-6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오늘 본문 열왕기상 3장에 나오는, 솔로몬에게 준 하나님의 응답의 상황과 동일해요.

솔로몬의 기도 응답의 상황이 뭐냐? 열왕기상 3장 9절에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다시 말해서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인데,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뽑혀서 왕이 되었는데 지나 내나 똑같은데, 백성들도 술 먹고 대통령도 술 먹고, 똑같은 주제에 내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가르칩니까?’ 그렇게 되거든요.

하나님께서는 같은 육신이 육신을 가르치게 하지 않고 육신을 육신 되게 하신, 극단까지 흙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그 저주, 그 저주를 분명히 하신 그 육신에서 나온 성령이 많은 백성들에게 동일한 마음을 허락하신 그게 고린도전서 12장입니다. 성령을 주셨어요. 성령이 새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고, 동일한 그 예수님의 마음이 모든 각 사람에게 있을 때 그들은 한 임금,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을 섬기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라서 다윗에게 준 언약이 완성되는 겁니다.

기도 응답은 일단 솔로몬이 받았으되 그 응답의 연속성과 최종 완성은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성령을 진두지휘하지 않고 결국 우리는 생명으로 환원되는 거예요. 육신인데 생명으로 환원되는 것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왔는데 부활의 영이 되는 그 코스를 밟았고 그 코스가 그대로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으로 죽고 영으로 다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자체가 주님의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7장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주님의 기도가 지금도 쉬지 않고 우리 안에서 작동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이 주님이 시작한 일인데 우리가 따로 시작한 일이 없게 해 주옵소서. 우리는 주님이 시작한 일에 말려들어서 욥처럼 주님께서 하시는 생명의 기능이 날로 발현되고 나타나는 종으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241211)요약 열왕기상 3장 4-10절(번제와 응답)

어제 솔로몬의 기도 응답. 보통 교회에서는 일천번제 강조하죠. 천 번을 반복하라. 새벽기도 나올 때마다 돈 천원 내라 이 말이거든요. 천 번 내면 복 이루어진다는 건데 기도 응답에 관한 문제에요. 중요한 것은 기도 응답받은 그것이 꿈이라는 거예요. 꿈속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꿈속의 솔로몬하고 꿈 바깥의 솔로몬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겠죠. 꿈속의 솔로몬은 다윗 언약의 자리에 들어선 솔로몬, 꿈 깨고 난 솔로몬은 여전히 육신에 속한 솔로몬. 어제 육신 이야기를 제가 강조했습니다.

그럼 육신적인 솔로몬은 꿈속의 솔로몬과 어떤 연관성을 갖느냐? 솔로몬이 지혜롭게 통치하고 뭐 이렇게 해도 육신적 한계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면 자기를 위한 통치가 되어버려요. 자기를 위한 통치가.

그런데 꿈속의 하나님의 응답은 일방적인 응답이에요. 솔로몬이 요구하지도 않은 내용을 섞으셨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원하지 않는 그 재물과 목숨 연장과 원수가 망하는 것, 네가 그런 걸 원하지 않아서 참 좋았다.”라고 하시거든요. 그런데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요. “너 지금 육신적으로 그거 되게 좋아하고 있잖아.”라는 것을 언급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취직하려고 서류를 작성할 때 “저는 회사에 말단 직원으로 청소나 뭐 제일 말단 일해도 괜찮습니다.”라고 서류를 냈는데, “너는 상무를 원하지 않고 전무를 원하지 않고 정책 실장을 원하지 않아서, 너를 위해서 어떤 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너는 들어오자마자 내가 사장 자리 줄게.” 이런 거예요. 참…….

솔로몬 본인이 본인을 평가한 것보다 오버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오버해가지고 ‘나는 아니니이다’라는 솔로몬 이미지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응답을 줘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기도해서 받은 응답은 자기에게 돌아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적 기도는요, 하나님께서 기도를 시작해서 응답의 부분으로 그 사람을 사용하고 다시 그 모든, 안 되는 걸 되게 했다는 식으로 공로를 하나님 자신이 가져가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응답을 할 때, “너는 네가 지금껏 본 왕 중에서 네가 최고고, 앞으로 너 만한 왕, 그렇게 영화롭게 복을 누리는 왕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거든요. 하면서 어제 수요일도 이야기했지만 그다음에 중요한 게 있어요. “만일 네가 다윗의 언약대로 지킨다면, 만일 네가 아버지 다윗에게 준 언약을 지킨다면, 율례와 법도를 지킨다면”이라는 말이 나왔다고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거는 네가 지금 응답받았다고 깨춤 추다가는 넌 잘린다는 뜻이에요, 그게. 그래서 제가 어제 수요일에 했죠. 인간은 어떤 시작점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작점을 인간에게 허락한 적이 없다. ‘오늘부터 내가 주님과 1일로 친다. 나 오늘부터 성도의 시작이다.’ 그건 니 생각이고.

인간이 생각하는 출발점은 없습니다. 왜? 흙에서 왔으니 어디로 가야 돼요? 흙으로 가는 것이 합당하니이다. 이거는 합당한 거예요. 흙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에요. 여자도 남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같은 흙으로 만들었으니까 돌아가야 되는 거고요.

여자에게 준 이 생명, 산 자의 어미. 생명이라는 그것은 주님이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을 통해 합세한, 어제 그걸 이중성이라 했어요, 합세한 주님의 자기 기도 응답으로서 그 생명이 주어지는 거예요.

히브리서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맹세’라고 하는 겁니다. 맹세. 하나님의 일은 뭐 없이 안 된다? 맹세 없이 안 된다(7:20). 누가 누구한테 던진 맹세?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하는 맹세(6:13). 맹세 없이 일이 되질 않아요. “너는 맹세에 걸려들었어.” 이런 뜻이에요. 너는 맹세에 걸려들었어. 그건 네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네가 들어온 자리가 다윗의 자리가 아니고 다윗 언약의 자리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 언약의 자리에.

그러면 다윗 언약의 자리에 들어온 것과 솔로몬이 그냥 다윗 자리에 들어온 것과 차이점은 어떤 차이냐? 일천번제를 드렸잖아요. 거창한 번제, 제물 천을 동원한 번제를 드렸잖아요. 그런데 시편 51편 16절에 보면 번제를 주께서 요구했지만 다윗이 우리아와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번제는 희생물을 다 태우는 제사가 번제에요. 희생물을 다 태워요.

그러니까 희생했다는 사람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희생한 자가 희생도 하고 희생하고 난 뒤에 뭔가 영광을 누리는 게 아니고 소멸되는 거예요. 희생의 극단으로 희생이 끝까지 희생으로 밀어붙여서 아예 이 땅에서 없어져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 때 그 번제는 받아요.

내가 이 땅에 더 살고자 하는 인간이 아무리 번제해봐야 그 번제는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아요. 따라서 다윗의 입장에서 살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번제에 대해서, "희생자를 희생자 되게 한 주범자로 저를 좀 끼워주면 안됩니까?” 하는 거예요. 그게 상한 심령이에요. 상한 심령. 우리아 죽는데 “누가 죽였어?” “제가 죽였어요!”하고 기쁘게 손들고 나섭니다.

주인의 탁자에서 떨어지는 떡이지만, “주인에 속한 아들들만 먹는 떡이 굴러 떨어졌을 때 개도 그 떡을 좀 먹으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을 먹었으니까 주인의 상에 참여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하고 묻는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심정이에요.

아, 하나님께서는 이 번제라는 자기 맹세에 다윗을 걸려들게 하셨구나. 그 다음 차례는 솔로몬이 걸려든 거예요. 다윗이 다윗 자리에서 다윗 언약의 자리로 옮길 때 상한 심령으로 들어간 것처럼, 이제 솔로몬은 솔로몬에서 다윗 언약으로 가려면 이왕 솔로몬은 다윗 자리에 들어왔으니까 솔로몬은 어떻게 돼요? 희생자를 희생자 되게 만드는 범죄자 위치에 들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결국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내게 준 모든 지혜와 부귀영화가 나한테 어떤 역할을 했는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역할을 하라고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인생 끝내면서 고백합니다. 그리고 전도서 12장에 나오는, 인간의 신체구조가 중력을 못 이겨서 주저앉는 그 모든 모습이 바로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 듣고 어떤 사람은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담에서 하와가 나왔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가 여자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여자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남자인 아담이 생명을 얻게 돼요. 이런 수가 있습니다. 말려든다는 것, 그것도 흙으로 죽어가는 게 말려든다는 것이 이렇게 복이 될 줄이야. 이게 주님의 사랑일 줄이야. 어떻게 누가 알았겠습니까?

솔로몬이 받았던 그 과정이 꿈이었거든요. 꿈을 통해서. 지난 수요일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감추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나타난 것은 왕의 일이라 했죠(잠 25:2). 원래 계획을 만드는 계획 담당자이신 하나님은 숨어계시고 그것을 지상에 꿈같은 것으로 드러내면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은 왕의 일입니다.

심판하는 데에 필요한 진리를 달라고 솔로몬은 실제 일천번제 드리면서 기도한 거예요. 솔로몬이 노린 것은 그거에요. 일천번제 드렸으니까 거하게 썼으니까 거하게 보상이 올 것이다. 그 보상이 뭐냐? 이 백성들을 지혜롭게 다스릴 수 있는 게 올 것이다. 그런데 지혜의 소유자는 누구다? 내가 되어야 된다. 이렇게 하거든요. 자기는 백성 중 한 사람이지만 왕의 자리니까.

그러한 응답의 완성은 바로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이 오게 되면 누가 누구에게 지시를 하는 게 아니고 알아서 주님의 지시를 받고 사는 사람이 될 때 그 사람이 각자 받은 지시는 다 다르고 인생의 경로는 다 다를지라도 하나같이 한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나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당신 경로로 죄를 알고 나는 내 경로로 죄를 알아서 주님이 희생되는 데에 있어서 우리의 죄 때문에 희생되었습니다.”를 고백하는 것.

그게 히브리서 7장 25절(“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에 나오는, 지금도 하늘에서 주님이 기도하는 기도의 응답으로 그 구체적인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의 육신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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