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신하
2024년 12월 25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4:1-7
(4:1) 솔로몬 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4:2) 그의 신하들은 이러하니라 사독의 아들 아사리아는 제사장이요
(4:3) 시사의 아들 엘리호렙과 아히야는 서기관이요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요
(4:4)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군대장관이요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요
왕은 하나님의 영화로다.
(4:5) 나단의 아들 아사리아는 관리장이요 나단의 아들 사붓은 대신이니 왕의 벗이요
(4:6) 아히살은 궁내대신이요 압다의 아들 아도니람은 감역관이더라
(4:7) 솔로몬이 또 온 이스라엘 위에 열두 관장을 두매 그 사람들이 왕과 왕실을 위하여 식물을 예비하되 각기 일 년에 한 달씩 식물을 예비하였으니
솔로몬 때에 와서 이스라엘은 비로소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지혜’에 의한 압도적 통치의 결과입니다. 솔로몬은 사적인 적에 대한 복수를 하나님에게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지혜 밑에서 모든 자가 포섭되기를 원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왕이 나의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원했던 겁니다. 시편 89: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속하였음이니이다” 곧 왕의 통치가 하나님의 통치가 되도록 해서 백성들은 그저 하나님과 왕의 관계에 철저히 의존되는 삶을 원한 겁니다.
이는 계약적 왕은 결코 백성들의 투표나 요구에 의해서 세워진 자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서의 참된 이스라엘은 왕과 하나님의 계약에 철저히 종속되어서 백성들이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만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왕이 있다”는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은 각자 자기에게 왕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는 왕은 자신의 라이벌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왕에게 질투를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왕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들어븥어 있는 자세로서 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지만 솔로몬 시대도 역시 신약시대가 아니라 구약시대입니다. 약속의 땅 위에 나타난 왕국은 비록 실체는 갖고 있어도 어디까지나 천국의 모형에 해당됩니다.
진짜 천국은 구약의 모형적 왕국이 무너져야 등장됩니다. 따라서 구약적 왕국은 진짜 영원한 천국을 가리는 천과 같습니다. 이 천은 결국 아래로 미끌어져야 제대로 된 천국이 등장합니다. 솔로몬 왕국의 구성은 군사직이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사직이 먼저 나옵니다. 이는 사무엘하 20:23-26에 나오는 다윗의 내각과 차이나는 점입니다.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장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이 되고 아도니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 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니라” 이는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받은 지혜가 제사직의 취지를 직접 반영하는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제사장계열을 지켜내는 데서 국가 안정화가 유지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과 연관되는 자리는 서열상 위로 두고 땅과 관련된 직책은 그 아래로 잇게 했습니다. 장차 올 천국과 연속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인간 왕은 역시 종말에나 나타날 하늘의 왕에 비해서 커튼에 해당됩니다.
시편 2:2-4과 시편 2:12에 보면, 천국의 본질이 예시되어 있습니다.
(시2:2-4)“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시2:12)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하늘의 지혜가 최종적인 완성되는 시점에 이르면 천국은 단 한 분의 하늘의 왕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이때 백성들은 기존의 ‘나’에서 새로운 ‘나’로 바뀌게 됩니다. 이 관계 전이에 개입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2:26-29에 보면, “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하늘에서 보내준 왕이심을 발견한 시므온은 다음과 같이 심경을 털어놓습니다.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즉 자신의 왕됨을 포기하고 하늘의 왕의 신하로 알게 된 자는 더는 걱정이나 염려나 책임감이나 사태 수습에서 오늘 불안감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왕이 친히 해내신 그 업적의 결과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하됨 자체가 왕이 하신 결과물인 겁니다.
이런 현상이 나오도록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더는 최종 가치와 권한을 자기 선으로 가져올 필요가 없이 도리어 자기를 뚫고 예수님에게 가버리게 됨을 알게 된 겁니다. 성령의 개입으로 자신이 알던 옛사람에 머물지 않고 자기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나’가 결과적으로 생긴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신약의 성도는 마치 궁실에 붙은 타일처럼 요지부동 딱 들어붙어 있는 자가 됩니다. 그 들숙날숙의 윤곽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소관입니다. 그 예가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입니다. 천국을 지배하는 지혜는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자가 ‘옳지 않는 청지기’입니다.
그는 마치 골판지 조형물처럼 주님에 의해서 강제로 부각된 존재가 됩니다. 기존의 자기를 정립시켜 준 직장을 이 불의한 청지기는 더는 미련두지 않고 자기 살 조치를 하게 됩니다. 직장에 손해를 입히는 참으로 불의한 사람 맞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지혜나 의로움이나 착함으로 살아온 상황 안에서 기어이 버티지 않습니다.
포기할 것은 주저없이 포기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자신에게 장착된 의로움을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의도가 결코 지혜가 아님을 지적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누가복음 19:5에는 역시 불의하다고 소문난 세리가 나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집에 들어갑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시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같이 구원된 사람끼리의 관계는 어떠할까요? 구원된 자는 저주받게 된 자를 비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왕되시는 예수님의 결정이라고 인정합니다. 기름준비해서 신랑을 맞이하게 된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마 25:10) 기름없이 어리석은 처녀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기나 그들이 같은 처지에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심판을 통과해서 천국에 들어간 것은 주님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우리들이 언제 주를 위해 살았습니까?”(마 25:38) 그렇습니다. 왕국의 신하들은 모든 결정을 다 주님에게 맡긴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자신에게 최종 권한이나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열왕기상 4장 1-7절(왕국의 신하) 241225-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4장 1-7절입니다.
열왕기상 4:1-7
“솔로몬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그의 신하들은 이러하니라 사독의 아들 아사리아는 제사장이요 시사의 아들 엘리호렙과 아히야는 서기관이요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요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군대장관이요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요 나단의 아들 아사리아는 관리장이요 나단의 아들 사붓은 대신이니 왕의 벗이요 아히살은 궁내대신이요 압다의 아들 아도니람은 감역관이더라 솔로몬이 또 온 이스라엘 위에 열 두 관장을 두매 그 사람들이 왕과 왕실을 위하여 식물을 예비하되 각기 일년에 한달씩 식물을 예비하였으니”
솔로몬의 내각이 발표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이 내각은 사무엘하 20장 23절에 나오는 다윗의 내각과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내각에서는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군사력과 전쟁에 관한 관리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내각에서는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물론 군대 장관이 있지만 그것은 서열상 좀 뒤처집니다. 그만큼 이제는 나라가 평정되었다, 평화롭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내각구성을 보게 되면 “아히야는 서시관이요”, 서기관이란 왕의 비서실장을 말합니다. “여호사밧은 사관이요”, 이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기록관이고, “브나야는 군대장관” 국방을 담당하는 장관이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이고요. “나단의 아들 아사리아는 관리장이요”, 관리장이라 하는 것은 모든 공무원들을 관리하는 지금의 내무 장관 같은 자리입니다.
그다음에 “나단의 아들 사붓은 대신이니 왕의 벗이요 아히살은 궁내 대신이요” 사붓은 국무총리에 해당하고요, 궁내 대신은 왕이 있는 궁궐을 관리하는 사람, 왕실의 총무를 이야기 합니다. “압다의 아들 아도니람은 감역관이더라”, 감역관이라는 것은 노예들,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겁니다. “온 이스라엘 위에 열두 관장을 두매”, 지방마다 열두 관리를 두었고 그들이 일 년에 한 달씩 왕에게 음식물을 제공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이 내각을 정했는데 누가 보더라도 얼추 국가 같은 형태를 갖췄다고 생각이 되지요. 그런데 이 국가형태를 갖춘 구약의 솔로몬 시대는 장차 신약에 오게 되면 그 국가형태는 소멸되어야 해요. 왜냐하면 신약 때 나타나는 하나님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 미리 모형으로 한시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약속의 땅에 왕국이 먼저 만들어진 겁니다.
그래서 먼저 만들어진 이 왕국이 무너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구성한 영원한 천국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솔로몬을 통해서 그 시대에 장차 올 천국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두 번째는 인간으로 구성된 땅에 세워진 솔로몬 왕국이 어떤 한계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인간이 만들어낸 국가형태는 어차피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애초부터 잘하지’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있다가도 없어지는 거예요. 마치 동상 제막식 할 때 동상을 처음에는 안 보여주잖아요. 커튼 같은 것으로 가려 놓고 안 보여주다가 팡파르 울릴 때 싹 커튼을 치우고 되면 “아, 이거구나!” 하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베일, 하나의 차단막 역할을 하는 것이 인간의 국가형식입니다.
요즘의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너질 나라에 살면서 우리는 빨리, 어서 무너질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야 하지요. 그런데 무너질 때 주의할 것은 바로 우리 자신도 무너져야 할 그 베일의 일부로 이미 가담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 왕국에서 두 가지, 첫 번째 제가 말씀드린 것은 솔로몬 왕국이 장차 올 천국의 성격을 미리 보여준다는 겁니다.
어떤 성격을 보여주는가? 솔로몬이 기도할 때 개인적인 원수에 복수하기를 기도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솔로몬이 기도한 것은 뭐냐?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특별한 지혜가 나에게 주어지게 되면 솔로몬 왕에게 불만이 있는 모든 이들, 인간 대 인간의 사적인 감정이 그 지혜의 강압성의 통제를 받아서 하나님의 지혜에 다 사라지고 묻혀버리는 효과가 있기를 기도한 거예요.
“사적으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보자. 그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지혜 앞에 모두가 포섭이 될 때 그게 하나님이 주는 평화로움이다.” 그 지혜의 평화로움으로써 통치하기를 솔로몬이 기도한 겁니다. 그래서 응답을 받았고요. 그렇게 될 때 솔로몬 왕은 요새처럼 국민이 투표해서 뽑은 것은 아니거든요.
국민이 투표해서 뽑은 왕이 아니기 때문에 백성들은 솔로몬과 하나님이 밀착되어 있는 그 지혜에 전폭적으로 바싹 달라붙어야 해요.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달라붙어야 합니다. 그리되면 개인적인 어떤 가치나 존재감, 독자적인 자기 생각, 이것은 솔로몬이 지혜 앞에서는 의미 없습니다. 그것은 큰일 날 이야기지요.
시편 89편 18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우리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속하였음이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는데 그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요. 그러나 보이는 형식이 뭐냐? 왕으로 나타나는데 그 이스라엘 왕은 바로 우리의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다.
왕이 허락되어 있다는 말은…, 중요합니다. 왕이 허락되어 있다는 말은 ‘나 이제 혼자 안 살래’하는 느긋함을 말합니다. 왕이 없는 자는 매 순간 싸워야 직성이 풀려요. 왜냐하면 모든 뜻이 자기 판단에서 멈추니까, 내 판단이 최종적인 판단이 되었으니까 늘 판정을 해도 불안불안 하다고요.
직원을 뽑는데 ‘저 사람 뽑아야지.’ 그것은 왕의 지시를 안 받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지혜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최종 결정을 자기로 스톱시켜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뽑아놓았다 할지라도 저 뽑아놓은 사람이 직장에 와서 저지레를 하고 나중에 경리보다 횡령이라도 하면 그 책임은 뽑은 사람이 뒤집어쓴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 속은 알 수 없으니 불안불안 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혼자 살게 되면 아무리 돈이 많고, 넉넉하고, 남 보기에 아무리 부러움 속에서 산다고 해도 늘 안에는 알 수 없는 투쟁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투쟁 같은 것이 바깥으로 나올 때는 타인에 대한 미움과 싸움으로 나오지요. 자기가 한 자기결정을 자기가 못 믿는 겁니다.
어제 24일에 경기도 양주시에서 독일 고급차가 외진데 서 있었어요. 그 안에 남자는 운전석에 있었고, 여성과 함께 11세 아들과 4살짜리 딸은 뒤에 타고 있었고요. 번개탄 피워서 일가족이 다 죽었습니다. 유서에는 수억의 빛이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백프로 그 사람에게는 왕이 없어요.
왕이 없으니까 누가 왕이냐? 본인이 매 순간 결정을 해야 할 왕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신하들은 땡잡은 겁니다. 신하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에게 걱정할 권리가 없다는 것, 자기가 죽을 권리도 없다는 것, 자기에게 살 권리도 없다는 것, 자기가 생각할 권리도 없다는 것, 잘잘못을 판정할 권한도 없다는 것, 이익을 챙기거나 손실을 구분할 권한도 없고, 사태를 수습할 권한도 없습니다. 책임도 없습니다. 이게 바로 신하의 자리에요. 신났지요, 신났어!
양주시의 그 자살한 일가족, 그것도 국산차가 아니고 독일제 고급차를 타고 그 안에서 죽는 이유가 뭐냐? 그동안 욕망이 그 일가족을 자살로 이끈 겁니다. 자기의 욕망을 어느 인간이 이깁니까? 못 이기지요. 욕망을 못 이긴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살 권한도 없고, 살 가치도 없어요. 그런데 신하들이 아주 신바람 난 것은, 독자적인 자기의 가치가 솔로몬 앞에서 일체없음을 기꺼이 감사하면서 딱 들러붙어 있는 거예요.
마치 솔로몬 궁궐 벽의 타일처럼 붙어 있는 거예요. 타일처럼 딱 들러붙어요. 한번 붙었다 하면 떨어지지도 않아요. 이걸 시편 84편에서는 소원이 있는데 제비나 참새의 집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딱 붙어 있는 거예요.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시 84:1-3)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된 왕에게 들러붙어 있다는 그것, 하나님의 백성의 소원은 오직 그것 뿐이어야 해요. 다른 소원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저 하나님의 천국에 타일처럼 붙어 있는 그것. 사태수습할 권한도 없다니까요. 그런 책임도 없어요. 걱정과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하는데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 성경에 나오지요.
누가복음 2장 28, 29절 “시므온이 아기(예수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세상에!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아기 예수 만나기를 소원했다가 만난 거예요. 26절에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하고요, 27절에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28절에는 “아기(예수님)를 안고” 29절에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코스예요, 구원받는 자의 코스라니까요. 성령이 임하면 감사할 것만 있고 찬송할 것만 있지 더는 염려와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령께서 독자적인 나와, 그리고 왕 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나 사이에 성령이 개입해 버리면 독자적으로 결정해야 하고 독자적으로 인생을 살아야 할 나를 왕에게 달라붙어 있는 그런 나로 전이시키고 바꾸시는데 중간에 성령이 개입하는 거예요.
그 성령이 오늘 본문에서는 솔로몬의 통치의 지혜입니다. 그걸 왕의 언약이라 해요. 솔로몬이 받았던 그 하나님의 언약이 백성들에게 끼어들면 백성들은 이제는 하나님과 왕 사이에 있던 그 관계의 효력으로 그들은 밥 먹고 사는 거예요. 백성과 신하들도 다 빠지고 하나님과 왕 사이에 있는 그 계약, 그 언약으로 인하여 그들은 사는 겁니다.
왜 그런가? 계약대로, 언약대로 왕이 있다는 말은 자동적으로 나라가 있다는 뜻이에요. 왕을 살린다는 말은 나라를 살린다는 말이에요. 그 말이 신약에 오게 되면 뭐냐? 예수님 죽었잖아요. 유대인의 왕으로 죽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으면 나라도 없는 거고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면 하나님의 천국은 있습니다, 있는 거예요.
왕이 있으면 그 나라와 신하와 백성은 저절로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주님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고 어떤 일을 하시는가’에 관심 두면 되지, ‘내가 뭘 해서 밥 빌어먹느냐, 사업하다 빚져서 독일 차 안에서…’ 자꾸 이런 걱정을 하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군에서 제대는 했는데 취직은 또 어디로 하나?’
왕에 붙어 있다면 왕이 그 위치를 배분을 해요. 배당을 해준다고요. 너는 궁내 대신, 너는 왕의 친구, 너는 지방의 관리, 너는 기록하는 자, 각각 그 왕의 궁전 벽의 타일 색깔이 다르듯이 주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는데 그 능력은 뭐냐?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조건하에 우리에게 위치를 부여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왕이시고 그 왕 됨을 드러내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왕 밑의 이 직원들이 도대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사는지 그건 신약으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신약의 누가복음 16장을 보시고 여러분, 잠시 놀라야 돼요.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여기 어떤 청지기가, 어떤 회사의 직원이 나오는데 그 직원이 사장이 쫓아낼 것 같으니까 혼자 걱정을 하다가 ‘야, 참 내가 직장을 그만두면 뭘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이렇게 된 거예요.
‘땅을 파자니’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귀농하려니 손에 흙 들어가는 게 싫어서 난 그 짓은 못하겠다, 이 말이죠. 빌어먹으려고 하니까, 최저 생계비 이런 거 받으려고 하니까 “멀쩡한 자가 그냥 노냐?” 이런 소리 듣기 싫다, 이렇죠.
그래서 어떻게 하냐 하면 재빨리, 아직 쫓겨나기 전에 회계 장부를 조작해요. 회계 장부를 조작해서 그 회사에 큰 재정적 불이익을 남겨줍니다. 그러나 어차피 쫓겨날 직장이니까 ‘난 모르겠고, 나만 살면 그만이다.’ 주님께서 예를 그렇게 들면서 그 인간에 대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옳지 않은 청지기’라는 말을 한 거예요.
옳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이걸 ‘불의한 청지기’라는 말로 이 예수님의 비유를 제목 달아 설명하는 겁니다. 옳지 않은 거예요. 이 옳지 않은 자가 어떤 자냐? 굉장히 충실해요. 어디에 충실한가? 기존에 있는 자기 자리를 포기하는데 충실해요.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기 때문에 직장에 있는 내가 나임을 이제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새로운 살길을 찾아 나가는, 그런데 그 방법이 굉장히 옳지 않은 방법을 사용해서 기존에 자리 자기 위치를 아주 아쌀하게 접어버리고 ‘잘 먹고 잘살아라.’ 하고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청지기를 두고 “정말 지혜롭지 않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정말 지혜롭다는 거예요. 저는 이 청지기의 비유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골판지 조형물’. 골판지 조형물 특징이, 잡아당기면 나오고 밀면 밀리는 거예요. 골판지가 종이인데 너무 연약해요. 연약해서 외부에서 푹 치면 푹 들어가고, 잡아당기면 앞으로 푹 나오고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주어진 환경에 이 불의한 청지기는 저항하는 것이 아니고, ‘환경을 잘 탄다’라고 이야기할까, 예수님은 이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 하시면서 “인간은 미약하고 환경 따라서 저항할 수 없고 어떤 자기 권리나 가치를 내세울 수 없다.” 그것을 ‘지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누가복음 16장에서. “이 지혜 있는 질이 나쁜 청지기를 보아라.” 이 말이죠.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보통 상식에 지혜라고 하는 것은 내 독자적으로 착하고 바르고 정의롭게 사는 것을 지혜라고 인간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의로움과 선함과 착함으로 이 힘든 환경을 이겨 보리라.’라고 하는데, 이러한 결정은 어디까지나 독자적인 거예요.
항상 기존의 나, 기존의 나를 계속해서 강하게 붙들고, 그걸 못 놓고, 거기서 분리되지 못하고 그 나를 내 식대로 억지로 끌고 갈 때 바로 사람들은 내 선함과 착함에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라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공격하는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착한데 아주 도가 튼 사람들이거든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라고 주님께서 그렇게 규정을 했기 때문에요.
그런데 그걸 겨냥해서 들으라는 듯이 불의한 청지기를 딱 대면서 불의한 청지기가 천국 간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게? 우리 다 나쁜 짓 해야 천국 간다는 거예요? 무슨 뜻입니까? 내 인생을 쥐었다, 폈다, 하시는 분은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골판지 같은 존재다, 이 말이죠.
자체적인 가치? 어떤 권한, 권리 같은 건 애당초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솔로몬의 신하들처럼. 아까 말씀 다시 해보겠습니다. 솔로몬의 국가 형성, 이건 사실 가짜입니다. 진짜 천국이 아니에요. 진짜 천국 오기 전에 하나님과 계약이 성립된 왕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허락해서 그 왕 배후의 하나님의 천국의 지혜가 왕에게 도달되면 백성들은 일제히 자기의 권한이나 책임, 권리 이런 걸 아쌀하게 포기하고 그냥 바보 등신같이 왕만 쳐다보고 있으면 그게 천국의 관계다, 이 말이죠. 천국 백성의 바른 자세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하면 “누가 그걸 믿습니까?” 이렇게 하거든요? 요한복음 5장 38절에 보면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38절 “그 말씀이” 이걸 뭘로 바꾸냐 하면, 하늘의 왕입니다, 왕, “왕의 말씀이 너희 속에 하나님 왕의 말씀으로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왕을 믿지 아니함이라.”
다시 말해서 “너는 왜 예수님의 신하가 될 생각이 없냐?” 이 말입니다. “네가 왜 자꾸 왕이라고 생각하느냐? ‘모든 가치는 최종적으로 나에게 도달해야 그게 가치 있다.’ 왜 자꾸 혼자 살라고 하느냐?” 이 말이에요, 혼자! 참, 이 혼자 사는 문제는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혹시나 하고 역시나, 교회 나와도 결국 모든 결정 모든 자기의 미래를 혼자 결정해요.
이렇게 되면요, 계약이 없다는 말과 같고, 이 말은 성령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종을 이제 편안히 놓아주시는구나.” 우리가 언제쯤 이런 말 해 봤습니까? 앞으로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뭐 대통령이 세 번 네 번 바뀌든지, 대통령이 됐다가 자살을 하든지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세상의 왕들은 가짜라니까요. 가짜에 너무 관심 두지 말고, 가짜에 너무 휘둘리지 맙시다. 다 마귀가 설정한 거 아닙니까, 설정한 세트 아닙니까, 이 세상은!
마귀가 왜 그런 국가 조직을 설정했겠어요? 가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가리기 위해서. 진짜 왕이 엄연히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처음부터 ‘왕으로서 안 죽었다’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왕이 되시는 분이 이 땅에서 죽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인생 세계는 가짜라는 뜻이에요, 가짜. 가짜가 진짜를 죽인 거예요.
우리도 이 땅에서 가짜로 태어났는데 주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아, 내가 가짜네.’ 그걸 성령에 의해서 알게 된 겁니다. 가짜가 진짜로 행세하니 인생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요. 너무나 무거운 거예요, 이게. 얼마나 무거웠으면 자기만 혼자 안 죽고 일가족, 네 살 먹은 애랑 열한 살 먹은 애까지 다 죽겠습니까? 너무 무거워서, 혼자 살려고 하니까.
어디 성령이 시켰던가요? 자살하라고? 독일 차 안에서? 어떤 사람이 “그 독일 차 팔아서 빚 갚지.” 독일 차 팔아서 빚 갚을 수 있었으면 벌써 갚았죠.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정리합시다. ‘혼자 살면 인생을 감당하지 못한다.’ 감당 못 하니까 어떻게 하느냐? 그 분노를 바깥으로 터트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는 게 꼭 남하고 붙들고 싸워야 직성이 풀리죠. 맨날 케이블 TV 보면서 좌파, 우파, 싸워야 약간 위로가 돼요. 왜? 혼자 살기 때문에. 자기의 그 감당 못 하는 인생을 TV 프로그램으로 감추기 위해서, 예능 프로로 감추고, 어떤 문학으로 감추고, 예술로 감추고, 직장 생활로 감추고. 하, 참, 왕을 죽여버린 세상에서 우리가 무슨…, 굳이 여기서 낙을 볼 이유가 없습니다. 하늘의 왕을 죽였잖아요, 하늘의 왕을.
마치 성경은 이런 시대를 예상이나 한 것처럼 시편 2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2-3절). 이미 악마도 알아요. 악마도 안다고요. 마귀는 귀신이니까 알죠. 메시아, 왕이 오셔서 가짜 나라 사라지고 그 사라진 현장에 천국이 세워진다는 거 마귀도 알아요.
알기 때문에 왕이 이 땅에 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저지하고, 일단 왔으면 죽여버리는 것으로 이미 인간들은 마음을 맞췄습니다. 그러니까 그 점에 대해서 시편 2편 7절에서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해놓고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이미 이 원리, 이 방정식은 끝났어요. ‘E=mc²’ 이것만 방정식이 아니고요,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 끝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천국 가는 기차에 늘 말씀이 차장이 되어서 표 검사해요. 행선지가 동일한지, 아니면 지옥 가면서 이 차에 탔는지. “나가!” 보내버리죠.
자, 그러면 이러한 왕의 지혜가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주어졌다는데 뭐? 우리 뭐 가지고 있어요? 주어졌다는데 뭘 갖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주어졌다는 것을 갖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으로 표현하느냐 하면, 옷으로 표현해요. 기존에 옛날 나는 육신 자체가 옷인데 이제는 여기에 새로운 옷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 갈라디아서 3장 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성령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옷을 장착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제가 옛날에 어떤 집사님 집에 심방을 갔어요. 그 때는 법원 근처에 사셨지요. 그 댁에 안마기가 있는데 전신 안마기에요.
안마기가 나를 조여요. 내 몸에 맞게, 내 체형에 맞게 조절해요. 아, 그때 시원해서 뼈마디 날아가는 줄 알았어요. 그때 안마기 했지요, 점심때는 떡만둣국 먹었지요. 이미 그 집사님은 이쪽으로 이사를 왔습니다만. 하나님의 옷이 꽉꽉, 안마기처럼 우리를 꽉 조여서 주님의 옷 안에 갇히게 만들어요.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 난 이미 죽었고요, 입고 있는 그 옷이 살아서 행선지를 “이 세상은 가짜고, 진짜로 가자!” 하는 쪽으로 가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이 먼저 그 성령이 오셔서 어떻게…, 맞춤옷이죠. 그 맞춤옷에 맞춤 백성을 어떤 식으로 만드시는지는 누가복음 19장 5절에 보면 삭개오라는 사람이 나와요. 삭개오 나오는데 19장 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주님이 친히 심방 오실 때 전에 알던 삭개오가 새로운 삭개오로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왕의 신하, 다시 말해서 주님의 신하가 된 거예요. 천국 백성의 신하가 된 겁니다. 주님께서 갖고 있던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그대로 옷으로 덮친 거예요. 성령이 덮쳤다는 말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냥 덮쳐서 거기에 맞춘 새로운 백성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새로운 백성으로.
이제 끝으로, 이 새로운 백성이 만들어질 때 우리가 이제 궁금한 게 ‘백성들과 백성들 사이는 어떤 관계냐?’ 그 점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을 설명하는데 세 가지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했어요.
첫 번째 비유는, 열 처녀 비유라고 합니다. 신랑은 하나인데 처녀가 10명인데 표 검사해서 다섯 명 탈락했죠. 그러면 신랑 하나에 다섯 명 처녀, 처녀 다섯 명이 합격했습니다. 패스했어요.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 다섯 명 처녀끼리는 어떤 관계냐, 하는 거예요.
그 점은 두 번째 예에 나옵니다. ‘달란트 비유’라고 알고 있는데 그 달란트 비유에서 열 달란트 받은 사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있어요. 여기서 우리는 무엇에 주목해야 하느냐? 열 달란트 받은 사람과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하나로 묶고, 그다음에 주인한테 심히 책망을 받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바깥 어두운 데서 심판받아라.” 하고 추방된 그 사람을 2대 1로 묶을 때, 곧 두 사람과 한 사람을 볼 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을 열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직원이 공격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합격한 다섯 처녀가 나머지 다섯 처녀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사실, 비난하지 않았어요. 이게 천국 모습입니다. 모든 인간은 똑같아요. 그 누구도 가짜입니다. 가짜라는 말은, 왕이 없이 본인이 왕 행세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근성 자체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께서 크리스마스 밤에 선물 주고 갔거든요. 그런데 아침에 삐졌어요. 왜? 내가 원하는 선물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건 뭐 어린아이부터 이미 왕이라. 본인이 왕이예요. 본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어린아이한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걸리면 십자가에 죽습니다.
이게 인간의 타고난 악마성입니다. 결정을 해도 내가 결정하고, 인생 설계 내가 하고, 모든 계획, 프로젝트는 내가 잡는다. 그러니까 어떻게? 싸우죠. 맨날 인생 자체가 게임입니다. 지면 자살, 이기면 출세. 그거 인생 피곤해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이 자기 집에 거하겠다는 그런 것도 없고,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 그런 것도 없고, 태어날 때 지옥 가는 육신 옷 한 벌, 단벌 신사, 신사도 아니에요, 그 옷 한 벌밖에 없어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하는데 그 피 묻은 옷, 네 죄를 용서하는 피 묻은 옷, 그 옷만 자랑한다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게 뭐 대숩니까? 어차피 가짜잖아요, 어차피 가짜.
마태복음 세 번째 비유, 이건 뭐 아주 천국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천국 백성, 이리 오너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다. 내가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돌보았다.” 쉽게 하면 “내가 옷 벗었을 때 옷을 입혔잖아.”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 간 백성들이 하는 말이 “언제요?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이게 오른편에, 다시 말해서 천국에 와서 한 이야기에요. 오른편에 와서, 이미 천국에 도달 해놓고 하는 이야기라고요.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그거 주님이 하셨잖아요. 주님이 홀로 하셨잖아요. 왜? 주님은 왕이시니까요. 우리는 왕의 딱 들러붙어 있는 하나의 새겨진 문신처럼, 왕의 궁전의 타일처럼, 솔로몬의 신하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혜택, 왕과 하나님의 단독적인 그 계약의 효과를 그냥 그저 누릴 뿐입니다.” 여러분 이게 천국이 아니고 뭡니까? 그 천국 생활 미리,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왜? 천국 기차는 이미 출발했기 때문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의 방향이, 이 가짜 세상 말고 진짜 천국을 향하고 있음에 너무나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이 모든 공로가 유일하게 기름 부으신 예수님의 공로인 것을 늘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