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다윗의 여인

아빠와 함께 2024. 11. 28. 10:45

다윗의 여인

2024년 11월 27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21-25

(2:21) 가로되 청컨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2:22) 솔로몬 왕이 그 모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 하고
(2:23)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2:24) 나를 세워 내 부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2:25)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저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아버지의 여자였던 아비삭을 솔로몬의 형인 아도니야가 달라고 합니다. 이게 과연 굳이 하나님께 맹세코 죽을 죄인가요? 안 주면 그만이 아닌가요?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근본적으로 다윗의 왕가 자체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솔로몬은 다윗 왕가의 정신에 도전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도니야의 이런 행동이 다윗이 겪였던 왕 직위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의 왕되심의 언약적 취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태도가 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왕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요청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요청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일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생명을 이 지상에 남기시는 일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과실 보호에 집중하십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틈타지 못하도록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시켰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생명 없음’의 현상이 어떤 저주를 낳는지 땅에서 겪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이 땅에서 사는 모든 인간은 ‘생명은 없음’이라는 차원에서 실은 모두 죽은 자입니다. 산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시편 27:13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죽어 마땅한 이 땅에 왠 ‘산 자의 땅’이 생겨나는 걸까요? 산 자들만 따로 모여 사는 땅이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따라서 죽음과 저주 밖에 없는 이 세상에 ‘산 자의 땅’을 따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출발되는 일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다윗 관계에서 ‘산 자의 땅’ 구체적으로 수립됩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찾아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기름을 붓게 합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3)

그런데 이 일이 대단히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엄연히 그 당시 이스라엘에 사울이라는 왕이 있고 사울 왕가가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골리앗과의 전쟁 승리 이후에 사울왕은 노골적으로 다윗 제거에 돌입합니다. 한 나라에 왕이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20에서는 아담의 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산 자의 어미’라고 규정받게 됩니다. 죽음 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아담의 여인을 통해서 생명되시는 분이 출생한다는 겁니다. 바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원리를 적용받게 됩니다. 즉 다윗은 사울왕의 여자로 인하여 죽게 되고 여자로 인하여 살게 됩니다.

사무엘하 12:7-8에서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모든 일의 시작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셨다는 겁니다. 이 일에 ‘다윗의 여인’들이 관여합니다.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이 마음에 들어서 다윗과 혼인하고 싶어했지만 이 혼인으로 인해 다윗은 위험 속으로 떠밀리게 됩니다. 장인인 사울왕이 혼인을 빙자해서 다윗을 죽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과 전쟁하여 남자 양피 100을 가져와서 왕가의 사람다운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 핑계삼아 사울왕은 정치적 적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전쟁에 승리해서 조건을 충족시키자 자기 딸 미갈과 혼인을 시켜주지만 신하들에게 노골적으로 다윗을 죽이겠다는 의사를 드러냅니다.

목숨 부지 하기 힘든 다윗을 구사일생으로 구출시킨 자는 사울의 딸 미갈입니다.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삼상 19:12-13) 결국 다윗은 왕이 된 뒤 다시 만나 미갈을 왕비로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갈은 사울왕가의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언약 앞에 모든 인간은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다윗성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오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의 신하가 되어 하나님께서 친히 왕되심을 찬양을 올리고 춤을 춥니다.

이 모습을 창으로 내다본 미갈은 자존심이 매우 상하게 됩니다. “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여기에 대해서 다윗은 단호하게 미갈에게 다음과 같이 반박합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삼하 6:21-23)

미갈은 살아 있다고 하나 실은 죽은 여인으로 규정받게 됩니다. 다윗의 후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일종이 피해자로서 반란자인 압살롬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욕을 당하게 됩니다. (삼하 16:22) 그러나 난이 평정되고 난 뒤, 다윗은 10명의 후궁에 대한 조치는 이미 죽은 여인으로 취급해서 죽을 때까지 생과부로 만들어 버립니다.(삼하 20:3)

그것은 죽음에서 살아남의 취지에 부합되지 않는 자(압살롬)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서 살아도 더는 산 자로 아닌 자로 전시하는 겁니다. 오늘날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신 이후에 구원된 성도는 매일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죽어 마땅한 증거 수집하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갖는 것과 같은 겁니다.

다윗 입장에서는 더는 동침할 필요가 없는 여인 아비삭을 통해서 ‘다윗 위상의 완료’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감히 자신을 산 자라고 여긴 아도니야는 아비삭의 존재를 자기 소유와 엮어서 생각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당연히 죽어 없어져야 될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현 자리는 자신이 쟁취한 자리가 아니라 다윗 언약이 작동하는 생명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들이 죽어가면서 생명을 생산하는 설비라는 입장이 된 것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열왕기상 2장 22-25절(다윗의 여인) 241125-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2장 22-25절입니다.

열왕기상 2:22-25

“솔로몬왕이 그 모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 하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나를 세워 내 부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저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아도니야가 다윗의 부인 밧세바에게 찾아가서 다윗의 마지막을 지켰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자기 아내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어차피 아비삭이 봉양했던 다윗은 죽었으니까 아비삭이 남잖아요. “남는 것 하나 내 것 하게 해주세요.”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솔로몬이 해석하기를 “그게 바로 살아있는 아도니야가 반드시 죽어야 될 이유입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이 대목을 보는 오늘날 우리들은 납득이 안 돼요. ‘아비삭을 안 주면 그만이지, 아비삭을 달라는 그것 때문에 살아있는 아도니야를 굳이 죽일 필요가 뭐가 있는가?’ “안 돼!” 이러면 끝나잖아요. 아도니야를 살려준다고 해서 아비삭을 빼앗길 리는 없다, 이 말이죠. “아비삭은 안 돼.” 그러면 끝날 문제를 가지고 “너는 반드시 죽어야 돼.”

아비삭 달라는 문제하고 아도니야가 반드시 죽어야 될 이유하고,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잘 연결되지 않죠. 그게 이렇게 하면 연결돼요. 아도니야 본인이 지금 살아있다고 여긴 것이 죽을 이유라는 겁니다. 열왕기상 1장 끝에서 솔로몬이 아도니야에 대해서 자기가 스스로 왕 되겠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 번 봐줬어요. “네 집으로 가라.”

1장 52절에서 53절에 보면 아도니야가 솔로몬 왕을 두려워해서 제단 뿔을 잡고 살려 달라 할 때 솔로몬이 “좋아. 그럼 살려줄게. 대신 너는 얼쩡거리지 말고 집으로 가고 다시는 다윗 왕족이니 뭐니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라.” 하고 돌려보낸 거예요. “솔로몬이 가로되 저가 만일 선한 사람이 될찐대 그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려니와 저의 가운데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저를 제단에서 이끌어 내리니 저가 와서 솔로몬왕께 절하매 솔로몬이 이르기를 네 집으로 가라 하였더라”

돌려보냈는데 열왕기상 2장에 와서, 이걸 기다렸나, 어느 날 뜬금없이 솔로몬한테는 안 되니까 솔로몬 엄마 밧세바에게 가서 “저를 너무 괄시하지 마시고,” ‘괄시’라는 말을 했어요, 16절에. ‘괄시하지 마시고 한 가지 소원만 들어 달라.’고 “가로되 청컨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16절)라고 이야기했어요.

‘뭐 별 욕심 내지 않습니다. 어차피 남는 여잔데 그냥 혼자 있기 뭐 하니까 아비삭만 제 아내 삼게 해 달라.’ 이런 식으로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솔로몬이 발끈하면서 “내가 너 안 죽여 버리면 하나님 앞에 내가 저주받는다. 내가 죽을 지경이다.” 하고 죽였단 말이죠.

대체 솔로몬이 보는 아비삭과 아도니야가 보는 아비삭, 아비삭이라는 남아도는 한 여인을 두고 어떤 견해가 뭐 다르다, 이 정도는 되는데 견해가 다른 정도가 아니고 꼭 죽여야 될 정당성, 도대체 어떤 정당성이 있기에 아도니야를 꼭 죽여야 되는가, 하는 거예요.

그 이유는, 아도니야를 죽이지 않으면 다윗은 어디까지나 다윗에게 있었던 모든 이야기, 하나님이 다윗에게 줬던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일하심은 과거지사가 되고 말아요. 다윗에게 주어진 모든 일은 다윗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동일한 원리로서 작용을 해서 솔로몬에게도 똑같이 그 원리대로 가는데 아도니야는 다윗을 ‘이미 돌아가신 분’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다윗을 이미 돌아가신 분, 과거의 인물 이렇게 되어 버리면 다윗에게 남겨주신 하나님의 일관된 원리 원칙은 지금은 날아가고 없어지게 돼요. 없어지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냐 하면, 현재 주어진 살아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즉 솔로몬, 아도니야, 밧세바 등등 이런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잘 조율해서 이스라엘 나라 이끌면 되잖아, 라는 식이에요.

하나님이 왕인데 아도니야는 하나님이 왕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 ‘솔로몬 네가 재수 좋아서 왕 됐구나. 어디 두고 보자. 나도 왕족에 다리 하나 걸치련다. 왕족 중에 혹시 남는 여자 있나? 아, 아비삭이 있네. 솔로몬 너는 왕 노릇 해라. 나도 아비삭을 아내로 삼아서 네 옆에서 왕족이라는 권세만 좀 누리는 건 좀 봐주세요. 괄시하지 말고.’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솔로몬이 반드시 아도니야라는, 자기 형이죠, 형 아도니야를 반드시 죽여야 될 이유가, 다윗이 왕 되기 전부터 있었던 일, 그리고 왕 되면서 일어났던 모든 하나님의 하늘의 원리 원칙을 다윗이 그냥 쏙쏙 부여받는 데 있어서 아내, 처, 여자의 역할이 굉장히 소중한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솔로몬은 그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냥 남는 여자 하나 데려가는 게 아니고 다윗과 연계되어 있는 그 여인들이 없으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준 일관된 하나님의 왕 되심의 통치 방법이 다 무산돼요. 없어져요.

도대체 다윗과 그 여인들 사이에, 아비삭 말고 선배 여인들, 미갈 나오고, 밧세바 나오고, 또 아비가엘도 있었잖아요. 그 선배 여인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드러내는데 여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느냐? 그걸 솔로몬은 알고 아도니야는 모르고, 단순히 ‘안다, 모른다’가 아니라 ‘넌 반드시 나의 손에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22절 23절에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원리를 내가 안다, 이 말이거든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왕으로 통치하는 방법을 아는데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아도니야를 안 죽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너는 너 있는 위치가 네가 왕이야? 아니면 다윗에 자리에 있어서야?”라고 묻는다는 거예요.

다윗의 자리에 솔로몬이 들어오는 거예요. 다윗의 자리를 솔로몬이 물려받은 게 아니고, 다윗이 받았던, 다윗에 형성된 하나님의 왕 되심의 포지션, 그 자리에 그냥 솔로몬이 끼어든 거예요. 이 말은 ‘다윗은 죽어도 다윗이 왕 되게 하신 하나님의 원리는 살아있다.’ 그 자리에 솔로몬이 들어간 겁니다. 그러니까 솔로몬도 왕 됐다고 자기 마음대로 못 해요. 다윗을 왕 되게 하신 하나님의 원칙대로 안 하면 자기가 잘릴 판이에요. 자기가 죽어 마땅한 겁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를 통해 말씀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은 ‘도대체 다윗이 하나님이 왕 되심을 보여주는 자리에 앉은 자로서 다윗의 여인들은 무슨 역할을,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오늘 본문이 대충 이해가 되실 거예요. 창세기에 보면 창세기 3장 19절에 남자를 다루는 방법과 여자 다루는 방법을 하나님이 따로 구분 지어 놨습니다.

남자는 땅에서 종일토록 수고하고 얼굴에는 땀이 범벅으로 흘러야 너와 네 가족이 밥 빌어먹고 산다, 이런 거예요. 이 모습이 뭐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생명나무 있는 데서 추방하고 난 뒤에 생명이 없는 상태가 어떤 상태냐를 몸소 아담을 통해서 나타내시는데 땀 뻘뻘 흘리면서 그냥 죽을 둥 살 둥 일하다 결국 죽어요.

결국은 죽는 그 체험은, 하나님께서, ‘너에게는 생명이 없음’을 분명히, 확실히 주지시키는 방법입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이렇게 했어요.

이걸 오늘날 복음 안에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건 뭐 모든 남자 여자 다 해당되는데요, “네가 성도야? 네가 성도라면 하나님께서 너를 반드시 이 땅에서 죽이는 이유를 매일 같이 숙제로 써내라.”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성도가 일상 살아가는데 어떻게 살아가느냐? “목사님 제가 어떻게 살아가면 됩니까? 신앙생활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간단해요. 내가 왜 꼭 죽어야 되는지 그것을 매일 같이 알아차려서 노트에 숙제하듯이 이렇게 해서 검사 맡으면 돼요. “이것 때문에 나는 필히 죽어야 됩니다.” 내일 되면? 내일 되면 또 내일의 숙제에요. “이것 때문에 필히 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걸 매일 주님 앞에 내세우면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면 되는 겁니다, 성도가.

성도의 존재,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 할 일이 생긴 것이 여러분 기쁘지 않습니까? ‘내가 왜 꼭 살아야 돼?’ 이게 아니고 반대로 뒤집기 하자, 이 말이죠. 내가 꼭 살아야 될 이유를 찾지 마시고, 내가 반드시 오늘이라도 끝내야 합당하고 마땅한 이유를 우리가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걸 도와주는 게 율법이에요, 말씀이고.

뭐 해야 될 일이 확실하니까 사는 것도 여러분, 이제는 힘겹지 않을 겁니다. 혹시 우울증 계십니까? 오늘부터 치료됐습니다. 죽는 이유를 찾는 거예요, 죽는 이유를. 그런데 20절에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 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나님께서 죽이려면 다 죽이시지 남자, 그 ‘남자라는 이유로’ 또 생각나죠, 남자라는 이유로 땀 질질 흘리면서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 힘 다 빼다가 진짜로 힘 다 빠져서 흙으로 돌아간다면 여자에게는 할 일이 있는데 여자는 산 자를 생산해야 돼요. 산자를 임신해서 배태해야 한다고요. 참, 여자한테는 되게 좋은 일을 맡겨주신 것 같아요. ‘남자는 죽는 이유, 여자는 이왕 죽는 거 생명 얻을 자 임신하고 죽어라.’ 이런 기능을 맡겼다, 이 말이죠.

시편 27편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여기에서 이 용어가, 땅은 땅인데 어떤 땅? ‘산 자들만 옹기종기 집합되는 땅에 있다. 내가 산 자들만 가는 산 자의 땅에 있음이라.’ 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건 뭐 창세기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고는 상당히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못 죽여서 그렇게 안달인데 여기 보니까 산 자의 땅이 또 따로 나와 있어요. 그래서 ‘아, 하나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반드시 죽일 자를 반드시 죽이면서 그 가운데 생명을, 영생을 얻을 자를 생산하는 작업을 하신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되겠습니다.

이걸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네요. 영생 생산 플랜트(설비), 영생을 생산하는 설비, 하나님이 택한 자를 통해서 그런 식으로 다루시는 거예요. 죽어 마땅한데 영생을 주는 거예요. 영생을 생산하도록 하는 겁니다. 특히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언약의 사람이 여자를 통해서 영생, 생명, 영원히 천국 갈 백성들을 어떻게 생산하느냐는 겁니다. 다윗을 통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다윗이 언약을 받았으니까, 언약받은 다윗을 통해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그 보여준 사례를 우리가 이제는 한 번 생각을 해봐야 돼요.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와서 지적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을 죽였던 그 일로 인하여 12장 8절에 뭐라고 하느냐? 나단 선지자가 전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직접 전한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7절에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렇게 하고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사무엘상 16장에서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사울 왕이 다윗 죽이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8절에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왕으로 삼았다, 이러거든요.

이 말씀이 뭐냐 하면, 이 모든 것은 나단 선지자가 한 것도 아니고, 다윗이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게 하셨다, 이 말입니다. 생명을 생산하는 플랜트거든요. 생산 설비에요. 생산 설비인데 여기에 누가 동원되는가? 다윗과 결혼했던 여인들이 여기 동원되게 되어 있어요.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다윗은 여인으로 말미암아 죽고 여인으로 말미암아 살아요.

그런데 아도니야는 뭐가 빠졌느냐 하면, 죽음이 빠졌어요. 다윗의 자리, 다윗이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일관된 뜻에 의해서 살았던 자만 다윗 언약을 이해하고 다윗 언약의 왕이 될 수 있는데 아도니야는 그것이 아니고 ‘나 멀쩡하게 살아있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이미 아내가 있지만 아비삭도 탐이 나요. 왜냐하면 권력의 자투리니까 하나 걸치자는 그 말이지요.

‘날 괄시하지 말고 아비삭을 아내로 주옵소서’(왕상 2:20-21).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고요.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아도니야가 결정적으로 죽어야 할 이유가, 다윗 언약에 계시는 하나님 왕 앞에서, 왕이신 여호와 앞에서 절대적으로 죽어야 할 이유가, 자기가 주도적이에요. 비주도적이 아니고 주도적이에요. 내가 내 식대로 살겠다는 겁니다.

‘나는 지금 살아있고 앞으로도 나는 내 원대로, 내 식대로 마이웨이로 나는 살겠다.’라고 한 거예요. 이런 것은 아도니야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 아도니야는 꼭 죽어야만 하는가? ‘나는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원대로, 내 식대로 산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이렇게 마음껏 해도 안 죽여요.

그런데 아도니야가 그런 주장을 하면서 어디를 건드렸느냐? 죽었다가 살려낸 그 다윗 왕가에 접촉해서 스파크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아도니야가 꼭 죽어야만 ‘다윗 왕가는 인간에게는 없는 영생을 생산한 그 장소가 다윗 언약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도니야의 죽음을 통해서 더욱더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가 있어요. 구체적입니다. 건드릴 것을 건드려야지 잘못 건드려서 지지직, 감전사한 겁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일방적으로 기름을 부었다 했으니 시작을 하나님이 하셨지 다윗은 아닙니다. 다윗은 그냥 양이나 치면서 돌아다니기만 했어요. 시작을 하나님으로부터 한 거예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롬 8:30). 모든 시작을 하나님부터 한 겁니다. 그것 때문에 성도는 이 세상 모든 인간이 다 죽어 있다는 것, 다 시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로소 눈이 반짝 열리면서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각자 태어나서 자라서 유치원 다니고 저녁을 먹느니 마느니 하다가 “EBS 보여줘!” 이런 식으로 할 것 같으면 이것은 죽을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시작을 내가 나한테 주도적으로 일을 해서 내가 산다고 한다면 죽을 이유가 없는데 시작을 하나님으로부터 했다면 하나님은 ‘너는 죽은 인간’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진즉에 죽었어’라는 것을 알도록 다윗을 사울 왕가와 붙여줍니다. 사울 왕이 죽고 난 뒤에 적이 없을 때 다윗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서슬 퍼렇게 사울이 지금 왕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왕인데 이재명이 자기 집에서 “내가 대통령이다!” 한다면 법원에서 가만두겠습니까? 집어넣어 버리겠지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다윗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을 벌였습니까? 이 일이요, 다윗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성도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해당이 돼요. 지금 미국에는 대통령이 있고, 중국에도 주석이 있고, 북한에도 어버이 수령이라는 인간이 있는데 성도는 왕이 따로 있대요. 예수님이 자기 왕이래요. 이게 얼마나 위험한 발언입니까?

그걸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에서 공공연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맞아 죽지요. 후티반군같은 이슬람 세력이 설치는 곳에서 예수님이 왕이라고 해보세요. 시아파 수니파가 있는 그런 데서는 큰일날 일이거든요. 그런데 그 위험한 일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주님이 일으켰어요, 주님이. ‘네가 살았다고 간주해서 남을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진즉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 안목으로 남들 보고 세상을 보라’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가는지, 하나님의 도움이고 은혜고 아무것도 없이 ‘내 인생 내가 개척한다’라는 식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그런 대화만 서로 입을 통해서 뿜어내고 있잖아요. ‘나 이만큼 애써서 이만큼 살았다. 잘 살았지?’ 이런 거요. 그래서 다윗은 명목상 왕인데 실권은 하나도 없어요. 사무엘상 16장에서 당장에 실권은 하나도 없으면서 다만 왕 되었다는 사실만은 압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요것 봐라? 골리앗을 이기고 난 뒤에 인가가 막 올라가네? 사울왕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 백성들 보고 있으니 노골적으로 죽일 수는 없고 죽이는 방법이 뭘까? 우리 집안의 사위로 삼아야 하겠다.’ 그래서 자기 딸을 다윗에게 줍니다. 처음에는 메랍이라는 딸을 다윗에게 주려고 했는데(삼상 18:17) 미갈이라는 사울의 또 다른 딸이 다윗을 사랑해서 ‘다윗과 혼인하겠다’(삼상 18:20)라고 했어요.

사울이 “옳다구나. 그렇다면 혼인해라. 그런데 우리 집안 사위가 되려면 이 정도 용맹은 보여야지.” 해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가져오면 결혼시켜 줄게.” 했는데 사울 생각에 ‘이건 불가능해. 전쟁하다가 죽겠지.’라고 생각한 거예요. “사울이 가로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폐백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삼상 18:25)

다윗은 그저 촌사람인데 권력이 탄탄한 왕가의 사위로 들어간다는 이 말은 뭐냐? 차기 왕이 될 후보감이 된다는 거예요. 온 백성이 사울 왕을 쳐다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게 명분이에요. “그 정도는 용맹해야 우리 왕가의 사위가 될 수 있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나님은 사울 왕가를 왕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 다윗은 왕가도 아닌 사울 왕가가 다윗을 죽여줘야 해요. 그게 영생을 만들어 내는 생산 설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생산 설비. 사울 왕에 속한 여인이 다윗을 죽여줘야 된다고요.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다윗은 너무나 위험한 전쟁에서 양피 일백을 사울 왕에게 바쳐야 해요. 그런데 “난 안 바치고 결혼도 안 하겠습니다.” 할 수가 없어요. 이미 결정된 거예요. 결혼 안 하겠다고 빠질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다윗아! 네가 죽지 아니하면 너는 사울 왕 꼴 난다.” 사울 왕은 자기가 죽음 없이 왕이 된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 진짜 왕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해야 왕이 돼요. 그 원리가 다윗 속에 이미 들어가 있어야 된다고요. 다윗 왕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기 이전에 예수님의 경험을 한 사람이에요. 그것이 시편이에요. 시편의 시가 전부 그 내용이에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뭐냐? 예수님의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경로를 성령을 통해서 성도의 인생으로 이미 확정 지어버릴 때 성도는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내 속에서 생명 나온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내 속에서 영생이 나오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날 죽이려고 하시네.’ 그 말이에요. 그게 같은 말이에요.

다윗이 우리보다 선배니까 먼저 경험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또 살게 되었거든요. 사무엘상 19장 1절에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명령이 간단합니다. 다윗을 죽이라. 그게 사울 역할이에요. 영생 생산 설비의 도구에서 사울의 역할은 다윗을 죽이는 겁니다. 이 때 누가 살리는가? 미갈이 살려요.

19장에 죽 나오는데 미갈이 다윗을 빼돌리고 침상에 우상을 눕혀놓고 마치 다윗이 자고 있는 것처럼 꾸밉니다. 15절에 “사울이 또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채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했는데 16절에 “사자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 우상이 있고 염소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그래서 사울이 딸을 보고 “네가 왜 살려줬느냐?” 하니까 미갈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지요. “강제로 저를 죽이려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남자의 힘을 이겨요?” 이런 식으로 하지요.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삼하 19:17)

그래서 미갈이라는 여자 때문에 다윗이 삽니다. 그런데 이 미갈의 역할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미갈이 다윗의 위상을 죽입니다. 다윗이 왕 되고 난 뒤에 드디어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옵니다. 불가마 들어온다 생각하면 돼요. 진짜 주인공,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분이, 언약궤가 들어오신다.

그 순간 다윗은 그 왕의 신하가 되어서 너무 좋아서 공개적으로 옷을 벗고 힘을 다해서 춤을 추는 거예요. 사무엘하 6장 16절에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또 질문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지금 미갈 본인이 살았다고 생각하느냐, 죽었다고 생각하느냐?’를 물어야 합니다. 미갈은 이미 왕권을 쥐고 자기가 왕비가 되었으니까 이제는 아무 걱정 없이 내가 탄탄하게 살아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미갈의 그것은 바로 사울 쪽의 족보 DNA가 그대로 전달된 겁니다.

나중에 미갈이 다윗 왕을 막 나무랍니다. “왕이 되어서 체신을 구기는 행동을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할 때 이것은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죽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다윗의 자리의 가치가 살아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너 왕 됐네’ 이렇게 보이지요. 지금 다윗은 벌써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왕 되심의 일방적인 조치와 연속적인 은혜 주심과 활동에 의해서 왕 값도 못 하는 내가 왕이 된 거예요.

왜? 하나님의 왕 되심을 그런 식으로 내비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왕 되심의 할 일이 뭐냐? 죽은 자지만 영생 주겠다 하는 그 일이 하나님의 왕 되심이잖아요. 그런데 미갈은 그걸 모르는 거예요. “왜 천하디천한 여자들 앞에서 고귀한 내 남편이 옷을 벗고 체통 없이 행동했습니까?”라고 하니까 다윗이 하는 말이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삼하 6:22, 23)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다는 그 말은 살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이미 저주받아 죽은 모습으로 살아 있다. 사울의 딸 미갈 때문에 다윗이 죽다가 살아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살았을 때는 생명의 은인처럼 생각 되지만 정작 생명이라 하는 것은 목숨 부지가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있을 때 그것이 생명이 되는 거지요. 하나님이 주신 생명.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미갈은 땡, 탈락이 된 거예요. 다윗의 육신의 목숨은 살려줬지만 영원한 생명에 있어서 미갈은 다윗과 틀어지게 된 겁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여인이 밧세바지요. 나단선지자에 의하면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임으로써 율법에서 이미 죽은 목숨이에요.

죽은 목숨인데 그 밧세바가 옆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죽은 목숨 되는 이것조차 하나님의 기획이고 이게 영생생산설비의 작동중의 하나라는 사실, 작동의 순서중 하나라는 사실…’, 솔로몬이 밧세바에서 생산됨으로써 ‘…아, 이 모든 연출과 기획이 주님이 알아서 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람이 그냥 ‘내가 잘못해서 죽었다.’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어 마땅함을 안고 영생을 얻는 겁니다. 영생 얻는 사람의 특징이 그거예요. 내 모든 행동은 내가 저주받는 행동만 나오는데 주님이 그 행동을 추진을 했고 그걸 기획함으로써 그 자체가 영생의 밑거름이 되도록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이런 내용에는 종교가 근처도 못가요. 종교는 맨날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게 종교잖아요.

이건 종교 차이 아니에요. 시작을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시작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들면 이렇습니다. 사무엘하 16장에서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입니다. 아히도벨이라는 모사꾼이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공개적으로 지붕 위에 장막을 치고 관계를 맺으라고 시킵니다. 압살롬이 후궁을 차지했다, 왕의 소유인 여자들을 자기 여자로 만들었다는 말은 백성들 입장에서 ‘이미 권력의 추가 철퍼덕하고 다 넘어갔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백성들은 권력에 약해요. 백성들은 ‘어느 쪽이 힘이 센가?’ 그러면 게임 끝나는 겁니다. 역사의 정의라는 것은 가진 자가 새로 쓰면 그만이에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권력을 쥐면 과거의 모든 것은 정당화되니까요. 그래서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전략대로 따랐습니다. 압살롬의 문제점은 아도니야와 똑같아요.

다윗은 육신적으로 위태했고 그다음에 육신적으로 위태로울뿐만 아니라 자기가 필히 죽어 마땅한 죄인인 것을 경유함으로써 영생은 오롯이 왕 되신 주님이 주셔야 된다는 사실을 아는 자리가 다윗의 자리에요. 그런데 압살롬은 ‘우리 아버지가 재벌이다. 어차피 아버지 돌아가면 재벌노릇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잘 생겼겠다, 신성우처럼 머리도 길겠다, 백성들에게 인기도 있겠다, 풍채 좋겠다, 그리고 재판도 얼마나 잘하는지 “재판하러 따로 가지 마. 내가 재판 해줄게.” 율법도 잘 알고, 재판에 대해서도 잘 아니까, 다시 말해서 차기 대통령, 왕이 되는 데 있어서 결격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살아 있는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가 권력에 따라서 힘의 추가 움직이잖아요. 아히도벨이라는 똑똑한 사람이 그쪽에 붙은 거예요. 그래서 왕이 되려고 한다면 어설프게 ‘왕이 되어 볼까, 말까?’ 하지 말고 아예 다윗의 후궁까지 차지하면서 확실하게 하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압살롬은 요압에 의해서 죽고 다윗이 왕궁에 복귀했을 때 사무엘하 20장 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이 대목을 보면 사람들은 납득이 안돼요, 납득이. 아니 그 여자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반란군에 포로 잡혀서 강제로 동침당한 피해자잖아요, 피해자, 피해자란 말이지요.

무슨 힘이 있어서 데모라도 할 수가 있습니까?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것이 이 여자들이잖아요. 그러면 적어도 인자하고 인자하신 다윗 왕이 후궁들을 불러다 “욕봤지? 인권이 묵살되었잖아. 내가 보상 해주마. 앞으로 더 잘해주마.” 이렇게 되어야 선한 왕이라는 티가 날 텐데 자기가 없는 사이에 반란군 왕에게 당했다고 그 피해자에게 “너희는 죽어!” 하는 식으로 핍박을 가하는 그 언약적 취지가 뭐냐는 겁니다.

왜 그런 조치를 하는가,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아비삭도 마찬가지인데요, 그 후궁들이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이라는 이 왕의 자리, 나와 더불어 함께 후궁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죽음의 역할을 그들에게 맡긴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다윗이라는 존재는 결코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을 모르는 자와 동침했다든지, 연관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저주, 그리고 영생과 반대되는 그 죽음을 그 후궁을 통해서 전시하는 거예요.

살아있는 인간 간의 권력다툼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건방진 죄인과의 권력다툼에서 하나님은 계속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생산하는 설비, 다윗과 밧세바, 그리고 후궁들, 미갈 등 모든 자들이 그 생산설비(플랜트)로 조인트되고 조합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그다음부터는 뭐냐?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내 인생 탓하지 말고 ‘예수님은 도대체 우리의 무슨 죄 때문에 죽었는가?’를 보여주는,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보여주는 생산 설비, 플랜트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위주로 살아가지만 저희들은 비자발적이고 비주도적으로, 왕 되신 주께서 움직이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자기 인생을 탓할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조, 증거로서 다루어지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번제와 응답  (1) 2024.12.12
왕의 공간  (1) 2024.12.04
우연의 존재  (3) 2024.11.21
언약의 마네킹  (0) 2024.11.14
언약의 왕  (0) 2024.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