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솔로몬의 재판

아빠와 함께 2024. 12. 18. 22:13

솔로몬의 재판

2024년 12월 18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3:16-21

(3:16)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3:17)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3:18) 나의 해산한 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3:19)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3:20)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3:21)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잠언 25: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지배받고 통치되는 나라에서의 왕의 자리란 일반 백성의 자리와 큰 격차가 있습니다.

백성의 수준에서는 빈번하게 재판받을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왕의 자리는 재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지상에 펼쳐기만 하는 자리입니다. 즉 언약에 의한 왕의 자리는 왕 자신을 위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자리입니다. 재판이 필요치 않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왕에게 재판을 청한다는 것을 계기로 백성들은 재판이 아예 필요치 않는 왕의 수준으로 세상 보는 안목이 상승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백성 수준에서 재판이 일어난다는 것은 곧 그들이 ‘자기 있음’ 곧 ‘존재’에 매여사는 수준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내 것이니 내가 지키겠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하지만 ‘내 것 의식’에서는 그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사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왜 죽는지 존재 차원에서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있으니까 내것으로 여기고 무작정 지키기만 하면서, 그것을 키우기를 원하면서 평생을 소비하게 됩니다. 같이 살던 여자의 아이가 죽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존재가 갖는 근원적인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고 안일하게 그저 살면 그만일 겁니다.

하지만 멀쩡한 아이가 죽는 사건이 터지니까 비로소 두 어머니들은 자신의 내면의 본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즉 ‘내가 사는 이유는 내가 낳은 자식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이런 모습을 ‘육적이다’고 단언하십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4-16) 즉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재판은 육에 속한 자들에 대해서 육을 능가하는 하늘의 숨겨진 지혜에 어떤 식으로 참여될 수 있는 가를 말하는 재판입니다.

이 방식은 육을 끝까지 밀어 붙여 육의 경계선까지 가보는 겁니다. 오늘 사건에서 두 아이 중에 아직은 살아있는 아이를 앞장 세워, 두 여자는 자신의 운명은 뒤따라 가는 식이 되었습니다. 그 살아있는 아이가 목숨이 엄마들의 목숨을 대변해줍니다. 그 아이에게 일어난 그 일이 곧 두 어머니의 존재 자체가 운명입니다.

솔로몬의 판결은 그 살아있는 아이를 산 채로 ‘둘로 쪼개라!’입니다. 이것은 곧 그 어머니의 목숨이 두 조각 나서 더는 ‘내 것, 내 존재, 내 목숨’이라는 의식이 성립되지 않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존재가 쪼개진다는 것은 존재가 비(非)-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없는 존재’이지만 그 자체로는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15:10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게 되는 현장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은 모든 제물을 새 빼놓고서는 둘로 쪼개게 됩니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이 제물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산 희생제물이 되려고 오신 분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재나 목숨 그 뒤편의 세계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세계는 ‘새 언약’의 세계입니다. 존재 자체가 곧 악(惡)이었던 겁니다. 육신적이였던 겁니다.

따라서 이런 육신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억울한 여자가 솔로몬 왕에 재판을 청구한 이유는 다시 옛적의 자기 존재의 자리로 복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즉 내 자식으로 내 것에 속한 자식으로 돌아올 때만 비로소 나의 존재는 명분과 이유를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에 언약적 왕만이 알고 있는 하늘의 지혜는 전혀 그 여자에게 삽입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재판을 재판을 청구하는 억울한 자의 편에 들지 않습니다. 그 여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여자의 소망 자체에서 그 여자가 벗어나기 위한 재판으로 진행됩니다.

아직도 살아남은 아이를 둘로 쪼개라는 것은 법이 지배하는 세계는 존재를 법으로 쪼개어 결국 무의미하게 될 존재자들이 인간들임을 분명히 일깨워주게 됩니다. 존재 말고 존재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는 ‘내 것’을 인정하는 세계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담는’ 세계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롬 9:21-23)

내 것이 법에 의해서 쪼개져야 하는 이유는 더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정죄함이나 고소당함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이제는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성도는 이미 더는 재판이 없는 왕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벧전 2:9) 동시에 이 세상은 지금도 재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죽으신 바로 십자가 사건이 원고가 되어 자기 것 챙기는 것으로 살려는 자들을 피고로 해서 천국에서 배제 시키는 분류작업이 멈추지 않습니다. 피해자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선물을 듬뿍받은 자로서 매사에 감사와 고마움으로 주님처럼 봉사하는 자세로 살아가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하심만 자신의 내면으로서 보여주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강-열왕기상 3장 16-21절(솔로몬의 재판) 241218-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3장 16-21절입니다.

열왕기상 3:16-21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나의 해산한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두 여자분이 동시에 아기를 낳았는데, 3일 되었습니다. 두 여자분이 한 방에서 같이 살고 있었는데 둘 다 자기 아이를 옆에 두고 잤어요. 그런데 여자 중에 한 사람이 자다가 애를 뭉개서 자기애가 죽었어요. 낳은 지 3일밖에 안 됐으니 둘 다 어린 아기죠. 자기애는 이미 죽었고, 그래서 후딱 아직 살아있는 동거인 여자의 아이를 자기 옆에 딱 가져다 두고 자기가 깔아서 죽인 아이는 옆의 여자에게 옮겨 놓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단 말이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어?’ 자기가 낳은 자식이니 자기가 모를 리가 있습니까? “내 애가 어디 있지?” 자기 애가 저쪽의 여자 쪽에 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경상도 말로 “도!” 그랬죠, 다오. 그러니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내 아이다.”라고 우긴 거예요. “CCTV 깔까?” “까자.” 뭐 CCTV가 있어야 까죠.

그래서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아직 살아있는 그 애의 엄마가 솔로몬에게 재판을 요청했습니다. ‘내 살아있는 아이를 나에게 돌려주고, 죽은 아이는 저 여자에게 돌아가되 거짓말한 처벌을 제대로 해 달라’고 재판을 요청하는 그 장면입니다. 그럴 때 솔로몬이 어떻게 재판을 했는가?

그 재판이 열왕기상 3장 28절 끝까지 다 나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여자가 과연 이게 재판을 요청할 수 있는 거리인가?’ 억울한 건 이해되는데 이게 왕에게 이렇게 내 애 찾게 해달라고 요청할 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일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그런가? 재판이라 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있는 거고, 솔로몬 쪽에, 왕 쪽에는 재판이 없습니다.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백성의 수준은 재판이 필요한 수준에서 그들이 살아가고 있고, 솔로몬 수준은 더 이상 재판 같은 것은 일체 필요치 않습니다. 그 레벨 속에 솔로몬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재판을 할 때 그 두 여자에게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 ‘너도 나처럼 재판 없는 세계에 살아라.’라는 결론이 나와야 이게 지혜로운 솔로몬의 재판이에요.

이딴 일 가지고 나한테 오지 마라, 이 말이에요. 그딴 일 가지고. 잠언서 25장 2절에 보면 왕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느냐?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왕 쪽에서, 왕의 지위에선 재판이 필요가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그렇죠.

‘내 멀쩡한 애를 다른 여자한테 빼앗겼다.’ 그것도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그걸 감수하라, 이 말이죠. 왕의 위치가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을 살핌으로써 백성들의 안목을 왕의 안목까지 높이는 그 역할,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다윗 언약에 속한 하나님의 선택된 왕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아요. 나타난 것은 어느 쪽이냐? 왕과 그리고 거기 더해서 백성들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왕과 백성들, 특히 백성들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건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있고, 왕은 그 사건사건을 재판하고 그걸 해석함으로써 이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일반 민족과 다른 하나님의 뜻으로 지배당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드러내야 될 책임이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솔로몬 왕을 통해서 전달 받아야 되겠죠.

자, 그렇다면 다시 재판으로 돌아가서 지금 이 두 여자가 아기 낳고 같이 살았다. 제가 만약에 솔로몬이라면 두 여자를 다 불러놓고 “저 이렇게 억울합니다.” 그러면 저쪽이 “나는 잘못 없습니다. 자기 애 죽여 놓고 오히려 저한테 덤터기 씌웁니다.” 이렇게 양쪽 말을 다 듣는 거예요.

듣고 난 뒤에 그 두 여자한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들이 이 땅에 사는 이유가 뭡니까? 살아야 할 명분이 있습니까? 굳이 명분이 있어요?” 물으면 두 여자가 뭐라고 하겠어요? “그런 거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되겠죠. “살아야 할 명분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왜 반응을 나타냅니까?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은, 당신이 모르는 그 무엇이 당신 내면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거예요. 애가 하나 깔려 죽은 사건이 없었더라면 두 사람은, 뭐 이렇게 서로 아마 죽고 못 사는 사이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렇게 다툼이라는 게 있을 이유가 없죠. 인간 사회에서 뭔가 다툴 일이 있다는 말은 숨겨진 나의 내면의 본모습이 들켰다는 겁니다. 사건으로 인하여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자기 자녀를 옆에 있는 여자한테 빼앗겼다고 지금 솔로몬에게 고소하고 재판을 청구한 그 여자분에게 제가 묻습니다. 제가 일단 솔로몬이라 치고 묻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당신이 사는 이유가 뭡니까?” 물으면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내가 낳은 자식을 지키는 것이 나의 사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또 묻죠. “그게 답니까?” 그러면 여자는 “이제 와서 보니 그게 답니다.” 그러면 제가 또 묻죠. “나한테 억울하다고 고소한 여인이여! 당신이 나중에 메시아가 왔을 때 성도들이 사는 이유가 당신하고 같다고 생각합니까, 틀린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을 거예요. 그러면 여자가 뭐라고 합니까, “그건 그때고 나는 모르겠고, 그거까지는 생각 안 하고 난 내 때만 생각합니다.”

그러면 제가 솔로몬이 돼서 이렇게 합니다. “여자여, 그게 바로 신약성경에 의하면 육신적이라는 겁니다.” 그게 육신이에요. 내 몸뚱이와 내가 낳은 자식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 그게 바로 신약성경에 의하면, 메시아가 오실 때 의하면 지옥 갈 육신의 생각이에요. “네가 뭘 잘했다고 나한테 재판 걸러 와요, 지금? 뭘 잘했다고. 내 것 빼앗겼다고 지금 당신 나한테 고발했다고. 내 자식 뺏겼다고, 억울하다고.”

옆에 있는 자식 뺏은 여자는, 자기 애 깔아서 죽인 그 여자는 속으로 고소하다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요. ‘참 훌륭한 왕이십니다.’ 책망을 들어도 내가 들어야 하는데 죄짓지도 않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책망을 듣고 있으면 ‘야, 이번 재판으로 뭔가 역전되는 수가 있지 않겠는가?’ 뭐 이번 계엄 선언으로 역전되는 수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들이 있죠.

자, 고소한 여인이 기대한 게 뭐냐 하면 “당신 억울한 거 맞습디다. CCTV 까보니까 당신이 몸부림치다가 죽였네. 내가 뭘 모를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게 왕의 임무인데 모를 줄 알았어? 딱 보니 당신이 죽였네. 애 돌려주고 저 여자는 감옥에 처넣어라! 너는 편안히 살아난 아들과 함께 가고 너한테 범죄 한 여자의 재산까지, 지금 방이 누구 등기로 되어 있죠? 공동 등기 없애고 당신이 혼자 살아라.”

그러면 고발한 억울한 여인은 “참 훌륭하고 현명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지혜롭게 재판을 하십니까? 정말 훌륭한 임금님, 최고예요!” 이렇게 하겠죠. 그러면 그 고소한 여인은 인간이 달라집니까? 바뀝니까? 뭐 달라질 게 있어요?

왕 아래에 있는 백성의 레벨, 수준은 지금 존재해 있단 말이죠. 지금 살아있거든요. 살아있으면서도 뭘 모르냐 하면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뭐 하고 싶은 일 있나요? 당신들 뭘 하고 싶어요?”하고 집사님한테 묻고 싶어요. “집사님 뭘 하고 싶습니까?” 나오는 답변은 뻔해요. “모르겠습니다.”

“모르는데 왜 살죠?” “글쎄요.” 모르는데 살고 있네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뭐 굳이 하려는 것도 없고 그냥 하루하루 숨 쉬고 있으니까 그냥 사는 거지. 그런데 ‘어? 내 애가 저기 있네? 빼앗겼네? 고소해서 되찾아야겠다.’ 그거뿐이에요. 왜 사는지, 그 재판 이겼다고 해도 왜 사는지는 몰라요.

지금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린 이 계시가 하나님의 숨어 있는 계시고, 하나님의 숨어 있는 계시는 나중에 메시아가 오는 것과 관련성이 있어요. 예수님이 오는 것과 관련이 있어요. 왜? 메시아는 숨어 있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거기 때문에 그걸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것이 열왕기상 솔로몬 재판이거든요.

그렇다면 이 솔로몬 재판의 취지는 이 재판을 통해 원상복구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왜 살며, 누구 때문에 살며,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뜻이 있어서 나를, 아무 뜻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살려고 하는 의욕도, 살아가니까 사는 거지 굳이 살아야 되겠다는 계획도 없는 나를 왜 살려주는 지를 본인이 스스로 생각하면 알 도리가 없는데, 하나님의 뜻과 만나게 되면 그 살아가는 이유가 드러나는 거예요. 그게 있어야 목숨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과 관련되어 있는 겁니다, 생명과.

그럼 어떻게 되는가? 목숨을 담보로 제시해서 이 억울한 엄마는 자기 아들의 목숨을 앞장세워 자기 목숨 뒤편으로 가야죠. 자기 존재의 뒤쪽까지 가봐야죠. 끝까지 가봐야죠, 끝까지. 끝까지 가는데 솔로몬이 바로 그 판결을 내린 거예요. 끝까지 가게 해요, 끝까지. 살아있는 애 하나, 그다음에 어른 여자 두 명이에요.

어른 여자 두 명은 살아있는 아이가, 난지 3일 된 그 아이가 하나의 소라고 생각하면 그 두 여인은 아이가 가는 곳을 따라서 소에 끌려가듯이, 아이가 가는 그 길에 같이 딸려 들어가는 형국이에요. 그러면 그 아이가 솔로몬 재판장에 가서 솔로몬의 판결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데 솔로몬은 존재의 뒤쪽에서나 이루어질 판결을 내려요.

“그 아이를 둘로 쪼개라.” 멋진 판결이에요. 정말 최고입니다. 이건 사람의 뜻으로는 그렇게 판결할 수 없어요.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15장 10절에 나옵니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제사드릴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하기를 “모든 제물을 놓되, 둘로 쪼개버려라.” 제물을 두 개로 쪼개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재는 그 존재 자체가 둘로 파쇄되고 파괴되지 아니하면 인간은 이 땅에 왜 태어났으며, 왜 죽으며, 왜 사는지 이유와 면면을 모르게 되어 있는 게 바로 인간 존재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드린 이 제물은 사물이거든요. 제물은 하나의 물체, 물컹물컹한 사물이잖아요.

이 사물이 신약성경 예수님에게 오게 되면 이 쪼개진 제물이, 십자가 달려 죽는 사건을 경험한 그 순간의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산 제물로 받았던 겁니다. 그 죽음을 받아서 새 언약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계약으로 체결한 거예요. 내 살과 내 피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유일하게 통한다는, 내가 이 땅에 하나님 아들로 온 이유, 존재 이유, 행하는 이유, 명분, 그 모든 것은 전부 다 새 언약에 집중되어 있고 새 언약을 겨냥하게 되어 있고,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활동하시고 말씀하신 거예요.

모든 철딱서니 없는 백성들을 제껴두고 예수님 단독으로 아버지를 만난 겁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담보로 해서 하나님의 계약속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는 식으로 자기 목숨에 연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삽니까?” “몰라요.” “하고 싶은 일은?” “없어요.” ‘지금 아이 둘 낳고 하고 싶은 건?’ ‘없어.’ ‘애써서 목숨 걸고 할 거?’ ‘없어.’ “왜 사는데?” “모르겠어.”

그때 사도바울의 편지는 그거예요. 그 수준이 육신이라는 거예요, 육.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어요. 그게 바로 육이에요, 육. 이 신체가 있다고 해서 육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도 육신이에요. 주님께서 솔로몬을 통해서 이 두 여인에게 재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사물화된 자기 존재를 언약화, 솔로몬이 알고 있던 다윗의 언약화로 전환시키는 재판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소크라테스를 아십니까? 소씨 집안인데요.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셔요. 그 사회는 다신(多神)의 세계, 신에게 제사하는 문화거든요. 소크라테스의 모든 가르침을 권력 가진자들이 들어보니 이것은 ‘신에게 의지하지 말고 네 이성으로 알아서 살면 된다’라는 식의 가르침이니까 신을 모독했다는 죄로 소크라테스를 재판에 넘겨서 스스로 사약을 마시라, 그렇게 된 겁니다.

장희빈 죽을 그때에도 코카콜라 마신다고 애 먹었잖아요. 드라마상에서 코카콜라로 사약 마시는 연기한다고. 그런데 문제는 소크라테스가요, 자기가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죽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지금껏 살았는데 사는 이유를 몰라요. 모든 철학자들이 소크라테스의 후배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선임자고 그 나머지가 후배들이에요.

‘신은 저리 가라. 신의 계시 나는 짜증 난다. 내가 어떻게 살고 뭣 때문에 사는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인간의 머리로서, 내 마음으로 정해보겠다.’ 이것이 오늘날 철학이고 그 철학의 뿌리가 과학입니다. 그게 의학이고. 심지어 요새는 그게 행정학이고, 정치학이고 법학이고 다 그래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억울하다고 고소한 여인이 솔로몬이 어떤 법을 알고 있으니까…, 단지 법만 알고 있으면 안 되지요. 권력이라는 것은 법을 어겼을 때 처리하는 강력한 치안의 힘도 갖고 있어야 그게 권력이 되는 건데요, 솔로몬왕이 그 법을 알고 있으니 법대로 하면 내가 유리하다고 해서 고소한 거예요.

자기 아들 깔아 죽인 여자가 고소했습니까? 아니거든요. 억울하다고 여긴 그쪽에서 고소 한 거예요. 솔로몬이 내린 결론이 그겁니다. “법안에서 네가 정당화되는 것은 그만해라. 언제까지 징징거리면서 법에 매달릴래.” 장차 오는 천국은 법이 깨진 그 위에 비로소 나타나는 그 세계에요.

‘하나님 제가 옳았지요? 제가 억울하니 옳은 것 맞지요? 나쁜 짓 한 저 여자가 나쁘지요?’ 상대적으로 저 여자는 나쁘고 나는 옳다는 그러한 것으로 비교되는 세계는 법적인 세계에요. 솔로몬은 법을 능가합니다. 이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 신약성경까지 이어지거든요.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

솔로몬은 재판을 하면서 그 시대에 무슨 취지가 담기는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펼칠 새로운 천국의 모습이 그 재판 속에 녹아들어 갑니다. 녹아 들어간 그 선언이 한 마디로 이거예요. “저 아들 쪼개라.” 아브라함 언약하고 똑같아요. “쪼개버려. 너 법 좋아한다면서?”

억울함에 고소한 여자가 “어젯밤에 저 여자가 애를 깔아뭉개서 죽였습니다. 애 죽은 것을 감추기 위해서 애를 바꿔치기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게 되면 솔로몬이 “그것은 너의 일방적 생각이고 저쪽 말을 안 들어봤잖아. 방금 고소당한 피고 나와라. 방금 원고쪽이 저렇게 우기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때 진짜 애를 깔아뭉갠 그 여자는 연기를 해야 해요. 눈물을 좍 흘리면서 “아, 이 답답한 마음, 방금 그 이야기는 저 여자가 해 놓고는 나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겁니다. 하지만 자기 애를 죽인 저 여자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아무 죄도 없는 나를 고소하겠는가, 싶어서 나는 고소 안 하고, 내 애 하나 죽었다 치고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 여자가 나를 덤터기 씌우면서 고소했을 때, 그동안의 우리 우정이 금이 가고 아프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고소당한 자로서 왔습니다.”

양쪽 입장을 들어보니 둘 다 같은 말을 하네요. “둘 다 억울하네. 그러면 내가 이제부터 공정한 판결을 내리노라. 애를 가져와. 애 쪼개버려. 그래서 하나씩 나눠줘라.” 이게 무슨 세계냐? 법의 세계에요. 승자도 패자도 아무것도 의미 없는 세계, 둘 다 존재에서 시작해서 다시 자기 존재로 돌아오기 때문에 ‘왜 태어났는지, 왜 죽는지, 사는 이유가 뭔지?’ 모르고 그냥 짐승처럼 애 태어나니까 애 키우고, 애가 죽었으니 내 애 어딨느냐 하는 그 자기 내면의 모습, 나는 내 것만 챙긴다는 그 내면의 모습을 사건 터지고 나니 감출 길이 없이 여지없이 드러났지요.

그러니 이 솔로몬 재판은 유명하기 때문에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도 알아요. 솔로몬의 지혜라고 하면서 광고에도 많이 나오잖아요. 이 솔로몬의 재판을 보면서 사람들은 탄복을 하는데 그 탄복이 굉장히 수상해요.

“아, 솔로몬은 인간의 감정에 예리하게 호소했구나. 진짜 엄마라면 ‘저 여자가 애를 갖게 된다 해도 나는 이쯤에서 물러서겠습니다. 자식에 대한 어미의 사랑으로 이제 내 자존심과 체면을 다 버리고 우리 애만 살 수 있다면 내 애가 저 집 애로 넘어간다 해도 감수하겠습니다.’라는 진짜 엄마만이 갖는 그러한 모정을 솔로몬이 미리 간파해서 진짜 애를 쪼개는 것이 아니고 쪼개는 척을 했을 때 상반된 의견을 갖고 있는 두 여자의 표정과 마음가짐을 헤아려서 솔로몬은 판정을 내렸다. 재판은 이렇게 해야 해.”

솔로몬의 재판을 아는 사람들은 전부 다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이 욕을 얻어먹는 거예요. 주님 앞에서 재판한다면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예수님!” “왜?”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따라오너라. 나를 따라와야 영생이 있지.” “그런데 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가라!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장사하라고 하고 너는 나를 따라야지 왜 죽은 자들의 법에 같이 편승하고 있느냐? 아직도 거기서 발 못 뺐어? 그러고도 네가 영생이야? 그러고도 스승인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날 따라오려고 했어? 나를 따른다고 했을 때 네 아버지 죽는 사건이 왜 일어난 줄 알아?”

날 따라오는 제자의 입장에서 네가 전혀 이 스승인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오려는 거예요. 혹시 영생 얻을까 싶어서. 바로 그런 사고방식으로 솔로몬 재판을 이해하고 있다는 그 말이지요. 인간의 심리요? 인간의 심리 같으면 굳이 성령이 오실 이유가 없잖아요. 인간이 알아서 하면 되는데 성령이 왜 옵니까?

로마서 8장 1, 2절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소크라테스고 뭐고 어떤 인간도 솔로몬 재판과 같은 레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도무지 정죄함이 없어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누가 너를 고소하리오. 고소와 정죄할 법 자체가 깨진 거예요. 따라서 ‘내가 지금 나이 이만큼 되어서 애 둘 낳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앞으로 별 계획도 없고…’ 이런 것은 무슨 뜻이냐? 아직 자기 존재에 대해서 변호할 의사가 있다는 말이에요.

존재 자체가 악이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네 존재에서 비존재로 넘어가라 그 말입니다. 존재에서 비존재로 넘어가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는 ‘나는 여기 있다. 뭘 할 것이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여, 저라는 이 존재에 무엇을 담을 겁니까? 무엇을 실을 겁니까?’라는 것이 우리 존재의 이유에요.

두 여자가 있는데 그 두 여자가 어떻게 살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그 두 여자에게서 무엇이 비취느냐, 무엇이 나타나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집어넣어 준 것이 나타나야 하거든요. 그러면 그 여자는 있다가 없어지고 여자는 있다, 가 아니라 무엇이 나타나기 위한 하나의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릇에 대해서 로마서 9장 16절부터 나옵니다. 제가 16절을 읽을 텐데 이 문제에 대해서 이런 상황에서 재판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 보세요.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로마서 9장 16절의 말씀을 고백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법도 적용이 되고 재판이 되겠습니까?

재판이 성립 안 됩니다. 이게 뭐냐? 인간을 사망케 하는 사망의 모든 법에서부터 그 사람을 해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네 행함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해서 하나님이 너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너를 사용한 거예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은 그 여인은 하나님이 그 여인을 개로 사용한 거예요.

개로 사용하든 돼지로 사용하든 무조건 떡을 먹으면 천국이지 볼 것 뭐 있어요. 십자가에 달린 그 강도는, 구원받은 강도는 주께서 사용하셔서 천국 가게 하고, 십자가를 믿지 않는 그 다른 강도는 지옥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저주받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께서 그 사람을 사용한 거예요.

인간은 사용당하기 위해서 피조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찾아와서 ‘네 존재는 네가 알아서 책임지고 살아라.’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의 방법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요, 마귀가 들어왔기 때문에 존재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럴 때 주께서는 “쪼개자, 쪼개자!”

아직 살아 있는 아들을 통해서 두 여자에게 아들이 가는 곳까지 끝까지 가게 하는 거예요. 성경을 볼 때 여러분 끝까지 가세요. 끝 어디까지? 내 존재가 사라지는 곳까지. 나의 이익과 욕심과 탐욕이 다 무의미한 그 순간까지 가자 그 말입니다. 그러면 제대로 묻지요. “주님, 아무 의미도 없는 나를 주께서 어디에 쓰시렵니까?”라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이게 바로 하나님의 숨어 있는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곧 지혜에요. 그러면 우리 존재가 사라지는 그쪽 동네, 존재 뒤편, 목숨 뒤편에 뭐가 있느냐?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그 사랑은 우리가 예상했던 사랑이 아니에요. 고소한 여자가 예상했던 결과도 아닙니다. 내 목숨보다 귀한 아들을 기꺼이 나에게 가해했던, 나에게 몹쓸 짓을 한 여자에게 넘겨줄 수 있는 그것은 본인의 마음이 아니고 바로 하늘의 숨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살아 있는 그 아들의 취지는 억울해서 고소한 엄마의 존재의 알맹이죠. 아직 살아 있으니까요. 어쨌든 살아 있으니까요. 저 여자가 빼앗아 가든 말든 아직 살아 있잖아요. 그런데 진짜 자기 아들을 자다가 뭉개서 죽인 그 여자는 ‘내 존재가 여기 있는데 내 존재의 가치를 위해서 그깟 아들이 계속 살아 있을 이유는 없다. 그 아들 둘로 쪼개져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안 쪼개 지면 그걸로 된 거지 뭐.’ 그게 바로 가해자인 여자였던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든 말든 나는 주식투자 하면 되지 뭐.’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내 존재만 멀쩡하면 되지.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피 흘렸다. 아이고 안됐다. 참 고귀한 분인데. 하지만 그딴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주식투자를 했는데 주식값이 올라야 해.’ 이게 나의 존재의 의미가 되고 명분이 된 거예요.

예수님이 죽든 말든 난 관계없어요. 종교라는 교회에 발을 하나 걸치고는 있지만 언제든지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 믿는 것도 안 중요하고. 내가 중요하니까. 그런데 그 존재는 소크라테스하고 똑같아요. 사는 이유도 모르고,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거저 내 즐길 것, 내 욕망, 마귀가 시키는 대로 그냥 살 뿐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지금도 재판을 계속해요. 예수님이 원고 쪽이 되었어요. 예수님의 피와 살이 찢긴 그 사건이 원고가 되었고 우리는 피고로 전락 되어서 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육신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새언약 속에 들어가는 영적 수준으로 넘어가려면 중간에 뭘 거쳐야 됩니까?

내 존재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내 존재를 지키는 것도 악이고, 따라서 존재를 포기하고 비존재가 되어버리면 어느 누구도 우릴 송소하거나 고소할 자가 아무도 없는 그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주께서 긍휼로 새 창조 했기 때문에, 백프로 주님의 사랑만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그것은 주님께서 의도해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강남강의에서 ‘Tears in Heaven’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언급했어요. 기타리스트인 에릭 클랩톤(Eric Clapton, 1945~)의 노래입니다. <천국의 눈물>이라는 노래에서 “천국에는 눈물이 없겠지”(And I know there'll be no more tears in heaven)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크게 오해했어요. 천국에 눈물이 없는 것은 나에게 혹은 너에게 눈물이 없는 것이 아니고 그 공간자체가 눈물 없는 곳이에요, 공간자체가.

요한계시록 21장 3절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그 공간 자체가 더는 율법이 없는 공간이에요. 율법이 없는 공간. 율법과 사망의 법이 없어진 공간이에요. 존재를 깨면서 율법도 같이 깨졌습니다. 이제는 사랑의 법으로 새롭게 만든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다시는 눈물이나 아픈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이 안 아프니까 그쪽도 안 아프고, 주님이 기쁘니까 그쪽도 같이 기쁜 거예요. 주님의 마음이 그 사람 속에 삽입이 되어 있으니까요. 주님의 마음에 있는 것이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그들에게 그대로 하나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따라서 솔로몬 재판은 하늘의 지혜인데 그 지혜가 뭐냐?

어떻게 하면 육적인 인간, 아버지, 식구, 새끼, 손자, 손녀, 그것밖에 모르는 인간을 어떻게 육신을 벗어나서 왜 저 손자를 주었는지, 왜 남편을 주었고 아내를 주었는지, 왜 내 몸뚱이를 허락했는지, 그것은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저주를 담기 위한 그릇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네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서 새롭게 만든 그릇,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 재판이 지금도 한창 이루어지고 있어요. 한창 이루어지고 있다고요. 따라서 성도는 어떻게 사는가? 주님이 주신 하루하루 목숨이 주의 선물이니까 이 선물 가지고 주님의 사랑, 주님 주신 사랑을 내 육신의 욕망에 맡기지 않고 그 사랑을 나타내는 거예요. 그게 뭐냐? 주님의 희생과 거저 주심을 고맙게 여기고 범사에 감사하는 겁니다.

끝으로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참 기절초풍할 이야기가 나오지요. 2절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는 다 왕같은 제사장이거든요. 왕은 법의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7절에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이 정도 레벨이 되어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라는 말씀의 취지를 알아요. 자기 존재 건사하려고, 자기 존재 빛 내려고, 자기 존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끝까지 자기 존재와 목숨을 붙들고 사는 사람, 이 사람은 주님의 사랑이 들어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한창 진행되는 재판 속에서 우리 자신을 벗어나야 비로소 주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사랑인지를, 큰 선물인 것을 감격하면서 깨닫게 하옵소서. 법에서부터 벗어나고 모든 죄로부터 해방되어 주님과 함께 낙을 누리는 이 큰 복을 이 지상에서 마음껏 감사함으로 펼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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