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공간
2024년 12월 4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36-38
(2:36) 왕이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2:37)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2:38) 시므이가 왕께 대답하되 이 말씀이 좋사오니 내 주 왕의 말씀대로 종이 그리하겠나이다 하고 이에 날이 오래도록 예루살렘에 머무니라
죽이는 것은 왕의 일이 되는 공간은 참으로 특수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잠언 25:2에 보면,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고 되어 았습니다. 왕은 이 땅에 있어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만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약속의 땅이란 출애굽 정신으로 가득찬 곳입니다. 출애굽 정신이란 가진 권력이 일체 없어 철저하게 애굽인들에게 구박을 받던 히브리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보호 아래서 무사히 애굽에서 탈출했던 그 정신입니다.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 신세에 불과한 그들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더구나 그들은 그냥 여호와 하나님께 보호 받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6) 거룩이라는 말은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거룩하지 않는 것은 추잡고 지저분하다는 말이 됩니다.
너무 더러워서 감히 감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상대자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하게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단순히 생존이 가능한 민족 정도가 아닙니다. 거룩하게 생존이 가능한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이스라엘은 3개월 만에 시내산 밑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 시내산 꼭대기에서 뭘 주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입니다. 이는 ‘왕의 법’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계셨던 겁니다. 그 왕은 자기 백성을 거룩케 하시고자 떠나지 않는 왕이십니다. 바로 이런 정신을 받들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이 진정한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왕의 법 안에서 제사법도 들어있어 이 제사로 인하여 율법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 백성은 거룩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출애굽 정신으로 된 공간이어야 할 약속의 땅은 변질되어 깨끗함 보다 돈 많음이 선망이 대상의 되고 말았습니다. 소위 힘이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끼리의 권력 투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힘을 원하다는 보니 거룩은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평정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왕은 악인들에 대해서 사정봐주지 않고 심판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잠 20:26) 진정한 하나님의 자태는 참으로 거룩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소개하는 이스라엘은 왕은 이런 모습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5-7)
즉 완벽하고 완전한 거룩한 죄를 적게 지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씻어지므로서 완성됩니다. 바로 이런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이 약속의 땅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들은 백성들의 호응도를 의식해서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는데 급급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모델로 하지 않고 세속나라의 왕됨을 모델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방나라의 왕들의 특징은 ‘힘 축적으로 실제적인 통치를 행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압 장군의 성격도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출애굽 정신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 인물이 다윗과 솔롬 초기까지 걸쳐 이스라엘의 실세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솔로몬 왕은 자신의 할 일이 발생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죽이는 겁니다. 요압의 악함은 자신의 힘을 다 빼고 귀순해 온 상대 장군을 두 사람이 살해한 죄입니다. 한 사람은 아브넬이요 다른 한 사람은 아마사입니다. 아브넬은 사울 왕 시대의 장군이요 아마사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 반대 때에 압살롬편에 선 장군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의지하는 권력이 괴멸한 것을 알고 다윗에게 투항하고 귀순한 왕입니다.
즉 다윗의 왕되심의 자리에는 적을 위하여 남겨준 자리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다윗의 원수들, 즉 요압같은 장수는 적에게 자비와 동정을 베풀 여부의 자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사적인 복수심이 발로해서 귀순한 인사를 사정없이 죽였습니다. 요압은 자신이 가진 힘으로 마치 왕인양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정신에 어긋나는 겁니다. 시므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 집안의 유력한 자였던 시므이는 압살론 난에 직면해서 다윗의 모든 권세가 무너지자 그 틈을 타서 사울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벌로 여겼습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 16:5-8)
즉 시므이는 초라한 다윗 앞에서 자신이 가진 힘을 자랑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부탁하기를 시므이의 자세를 주시하라고 하십니다. 결국 시므이는 자기 집의 종이 가출한 것을 통해서 다윗의 보호 권역 밖으로 나가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왕되심을 의식한다는 것은 그 왕의 위세 밑에서 자신의 가진 힘을 부정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요압은 죽을 때도 자기 방식으로 죽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왕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악마의 태도와 같습니다. “브나야가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러 저에게 이르되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브나야가 돌아가서 왕께 고하여 가로되 요압이 이리이리 내게 대답하더이다”(왕상 2:30)
끝까지 왕됨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왕 있음을 알고 자립적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열왕기상 2장 36-38절(왕의 공간) 241204-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2장 36-38절입니다.
열왕기상 2:36-38
“왕이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시므이가 왕께 대답하되 이 말씀이 좋사오니 내 주 왕의 말씀대로 종이 그리하겠나이다 하고 이에 날이 오래도록 예루살렘에 머무니라”
오랫동안 시므이라는 사람이 솔로몬 왕이 시킨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는데 죽었습니다. 자기 종이 가출해서 도망을 치니까 ‘뭐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해서 종 찾으러 나갔다가 감찰관이 그걸 발견하고 “시므이가 왕의 명을 어기고 예루살렘 권역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니까 솔로몬이 “죽여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시므이가 죽었습니다.
이것은 공간 문제를 다루고 있거든요. 오늘 본문 이야기는 사실 세 사람을 언급해야 돼요. 하나는 26절에 아비아달, 제사장입니다. 또 한 사람은 28절의 요압입니다. 또 한 사람은 방금 이야기한 시므이입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아비아달은 파직당하고, 제사장직 못 합니다, 요압과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으로 왕의 임무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왜 왕의 일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권을 대체, 대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언서 25장에 보면 25장 2절에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면 왕은 그것을 구체화해서 실현시키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고 그걸 실시함으로써 왕은 또 하나님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고, 이게 왕의 역할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 요압이 죽는 이유와 시므이가 죽는 이유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요압이 죽는데 그 죽는 것은 솔로몬이 죽였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아버지 다윗이 “요압을 살려두지 말라.” 그렇게 유언처럼 남겼어요. 요압이라는 자가 군대 장관인데 권력이 너무 세었어요. 다윗 자기가 처단 하려고 하니까 국가적으로 많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까봐 걱정이 되어서 못 하고, 솔로몬에게 왕위를 넘기고 난 뒤에 유언처럼 “요압에 대해서는 네가 잘 주시하다가 죽여라.” 이렇게 했습니다.
마침 그 요압이 다윗 편에, 솔로몬 편에 서지 아니하고 아도니야 편에 서서 자연적으로 반란에 가담자가 되어 처단되는 겁니다. 여기서 이 요압이 죽어야 된다면 그 죽는 이유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열왕기상 2장 31, 32절에 “왕이 이르되 저의 말과 같이 하여 저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부친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은 저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여기 두 사람이 왜 또 등장하느냐? 요압에 의해 두 사람이 죽게 되는데 한 사람은 아브넬, 또 한 사람은 아마사라는 사람, 이 두 사람이 죽게 됩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장군인데 다윗에게 귀순한 사람이고, 아마사는 반란 때 압살롬의 장군인데 다윗에게 귀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귀순한 사람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자기보다 선한 사람을 쳐 죽였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기보다 선한 사람을. 32절에 보면 그렇게 나옵니다. “저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곧 이스라엘 군대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 군대장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왜 귀순한 자를 쳐 죽였는가? 그것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굉장히 간편해요. 다윗 때 왕이 누구냐? 다윗이에요. 다윗인데 요압은 다윗을 보면서 왕이라고 생각했죠. 다윗을 왕으로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왕으로 대우받는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나라의 권력을 쥐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에요. 요압은 ‘다윗의 권력이 자기보다 세기 때문에 왕이다. 하지만 나도 못지않게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 쉽게 말해서 ‘너만 왕이냐, 나도 왕 노릇 좀 하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아브넬이라는 사람과 아마사라는 사람은 다윗을 보고 귀순을 했다, 이 말이죠. 다윗을 보고 귀순을 했는데 이 아브넬이라는 사람은 자기 동생 아사헬을 전쟁에서 죽인 사람이에요.
그래서 요압은 ‘네가 다윗의 권력에 의지해서 권력이 너를 보호할 거라고 생각해서 귀순한 모양인데 이 나라는 다윗만 권력 있는 게 아니야. 나도 왕 못지않은 권력이 있어. 넌 내 손에 죽었어.’ 그렇게 해서 ‘내 동생을 죽인 자는 내가 가만두지 않고 죽여 버린다.’(삼하 3:27) 해서 죽인 거예요.
아마사 같은 경우에는 압살롬 반란에 섰던 장군인데 역시 귀순했어요. 귀순했을 때 다윗이 아마사한테 국방부 장관을 맡기려는 태동이 있단 말이죠. 아마사가 권력을 쥐면 요압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서 빼앗기는 게 있기 때문에 ‘이 인간 살려두면 안 되겠다.’ 그래서 죽인 겁니다.(삼하 20:10)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전체 이스라엘에서 원칙이 하나 있어요. 출애굽 정신이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출애굽 정신. 출애굽 정신이라는 것은 뭐냐?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였어요. 쉽게 말해서 가진 힘이 하나도 없어요. 가진 힘이 하나도 없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너희들이 그 속에 노예 생활 하지 말고 내가 너희들을 건져낼게.” 해서 건져낼 때 그들은 아무것도 없이 나왔어요. 하나님만 믿고 나온 겁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하나만 생각하면 돼요. ‘공간’. 어떤 공간이냐? 다시는 돌아갈 리가 없는 공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공간, 다시는 돌아갈 필요가 없는 공간 그거예요. 애굽에서는 힘없는 자가 무시당하고 힘없는 자가 노예 생활하는 그 공간이라면, 하나님 안의 공간은 어떤 공간이냐?
모든 죄를 용서하는 공간입니다. 그것을 생명이라고 하죠, 생명. 출애굽을 보면서 열왕기상을 봐야 돼요. 출애굽을 보면서 ‘출애굽을 할 그때는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왔구나. 요단강 건너왔구나. 약속의 땅에 왔구나. 그러면 이제 끝, 옛날이야기는 옛날이야기로 넘기고 여기에선 이제 왕 하나 모시고 우리 좋은 나라 만들자.’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게 되어 버리면 출애굽 정신이 없어져 버려요.
출애굽 정신이라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특수한 공간인데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는 특수한 공간이에요. 자, 이 공간은, 제가 단서를 붙였습니다, 이 공간은 자기가 가진 힘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 긍휼과 사랑을 생각해서 의지해서 들어온 공간이 출애굽 공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압은 힘이 있어요. 힘이 있다고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열왕기거든요, 열왕기. 열왕기라는 것은 왕들을 나열한 겁니다. 왕들의 공통점이 뭐냐? 자기 딴엔 다 힘들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내가 힘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출애굽 안이라는 독특한 공간에 하나님께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열왕기입니다, 열왕기상, 열왕기하입니다.
그러니까 그 열왕기상에 나오는 첫 번째 왕이 누구냐 하면, 솔로몬왕이거든요. 솔로몬왕이 해야 될 게 뭐냐? 힘이 있다고 그 힘 믿고 자기가 왕처럼 살려는 자를 작살내는 작업을 필히 해야 되는 겁니다. 왜? 출애굽 정신을 이어받은 그 공간 확보를 위해서. 여러분,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성경을 떠나서, 악바리처럼 사는 게 그게 나빠요? 그게 나쁩니까? 한 푼 두 푼 절약해서 돈 모아서 자립하겠다는 것이 그게 그렇게 나쁜 짓이에요?
성경에서 의롭다, 나쁘다, 하는 것은 출애굽 공간 안에 들어 있으면 출애굽기 19장 6절에서는 그걸 거룩하다, 깨끗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출애굽 정신 안에 들어오면 깨끗해요. 흠이 없고 죄 없는 거룩한 내 백성이라고 했어요. 그 대목을 한번 읽어보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 데 옆에 누가 있느냐? 제사장이 있죠. 제사장이 하는 기능이 그들의 모든 죄를 그 공간 안에서, 출애굽 공간 안에서 죄를 없애주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죄를 없애주는 기능을 할 때에 뭔가 죄지은 게 있어야 뭐 없애든지 할 게 아니겠습니까? 죄지은 것도 없는데 없애 준다고 하면 이건 뭐 인격 모독이죠. “내가 뭐 잘 못 했는데 네가 건방지게 내 죄를 사해줘?” 이렇게 되잖아요.
홍해 건너오고 출애굽 한지 3개월 만에 그들이 어디 도착하냐 하면, 시내산에 도착해요. 시내산에 뭔가 하나님에게 준비된 게 있습니다. 저는 이 광야에서 시내산 보면서 옛날 운동회 생각이 나요. 운동회에서 애들 100m 달리기할 때 애들에게 100m라고 하면 상당히 긴 거예요. 100m 달리기할 때 힘들잖아요.
그래서 50m 되는 중간에 물컵하고 엿하고 놓고 먹고 마시고 먹어 가면서 뛰라는 휴게소 같은 거 있죠.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나와서 3개월 만에 시내산 휴게소를 개설하셔서 거기서 만나십니다. 거기서 뭘 주느냐? 거기서 법을 줘요. 법을 주는데 그 법이 왕의 법이에요. 그 법안에 이게 들어있습니다. ‘이제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너의 왕이다.’라는 사실이 왕이 주는 율법과 더불어 그들에게 제공됩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왕이라는 말은, 이건 누가 들어도 백 퍼센트 “내가 지켜줄게. 내가 지켜줄게. 왕 힘 세거든? 따로 너희가 힘을 가질 생각하지 말라. 왕의 힘으로 너희를 보호해 주는 그 공간이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공동체 이스라엘 공간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규정을 한 겁니다. 여러분 그 공간 속에 들어왔어요? 아주 특이한 공간이에요. 특수한 공간입니다. 개인적인 힘을 비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공간이에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이런 뜻이에요. 앞으로 약속의 땅에서 왕이 있는데 따로 자기가 왕 흉내 낸다고 권력 쥐고 재산, 재물 모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서 그 당시 왕이 그 인간을 용납하지 않고 처단하는, 재판하는 그러한 기능을 왕들이 하게 돼요.
오늘 본문에서 시므이라는 사람 아까 본다고 했죠. 시므이라는 사람은 어느 계통이냐 하면, 다윗 이전의 사울 집안 계통입니다. 전임 왕이라고 하죠. 뭐 하나님께선 인정 하지도 않지만 하여튼 전임 왕, 사울 왕 계통인데 이 사람이 전임 왕 계열의 유력 인사가 되어서 돈이 많아요. 돈이 많습니다. 왕 옆에 붙어서 한몫 뜯어낸 거예요.
이 사람이 다윗이 왕 되는 거에 대해서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너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내가 두고 볼 거야.’ 하는 식으로 ‘그래 우리 사울 집안을 엎어 버리고 너희 이새 집안이 왕 되니 좋아? 다윗 집안 반드시 망할 거야. 반드시 망하고 말리라.’ 이런 악감을 가지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그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거든요.
그러니까 이 시므이가 막 아주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사무엘하 16장 3절에서 5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다윗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연하여 저주한다는 것은 ‘에잇 저주받아라.’ 끝, 이게 아니고 “저주받아라……!” 따발총처럼, 저주받아라, 저주받아라…, 연하여, 계속해서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왜? 다윗이 실권했으니까, 뭐 계엄령인가 선포하더니 있는 것도 다 날아가고, 권력이 없어졌어요. 권력이 없어졌어요. 권력이 없어지니까 마음껏 무시해도 되는 거예요. ‘내 그럴 줄 알았어. 감히 우리 사울 집안을 건드리다니 그럴 줄 알았어.’ 하면서 저주하고 그다음에 이렇게 합니다. 다윗 보고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자여 비루한자여 가거라, 가거라”
‘이 비겁하고 추한 자야, 멀리 꺼져버려.’ 이런 뜻이죠. 그것도 그냥 서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따라오면서 “꼴 좋~다!”하고 피난 가는 뒤꽁무니를 따라오면서 계속 저주합니다. 그럴 때 군대 장관이 “저 인간 그냥 죽여 버립시다.” 이렇게 하니까 다윗이 이런 말을 해요. 여호와께서 저희에게 명하신 것이라고. ‘이것은 그 사람이 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할 말씀이 있어서 저주를 하게 하셨다’라고 합니다.
사무엘하 16장 11, 12절에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저주한다, 저주한다, 저주한다. 왜 그렇게 하느냐? 저쪽은 힘이 있고 다윗쪽은 힘이 없어요. 그런데 시므이가 뭘 모르느냐 하면, 이 약속의 땅 이 공간의 특징을 몰라요. 힘없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보호하심이 그 때만 느껴지는 거예요. 자기의 힘이 없을 때, 자립할 힘이 없을 때. 그 원칙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그것도 모자라서 “티끌을 날리더라”(13절) 이런 식으로 했다는 말이지요. 그걸 다윗도 다 봤어요. 하지만 다윗은 “마음껏 저주하라고 해라.” 왜? 저주가 날아오다가 두바퀴 반을 돌아서 결국에는 복으로 다 돌아오니까. “너 저주받아라.” 하는 것을 다윗은 “복 받으세요.”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거예요. 복 받으세요.
이 공간이 바로 특수한 공간이에요.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대리하는 사람이에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땅의 지배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은 이사야 6장 5절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왕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왕을 뵈었음이로다. “제대로 된 왕을 제가 봤습니다.” 그 왕 앞에, 그 거룩한 분 앞에 나는 더럽고, 추접하고, 구역질 나고, 정말 내 것이라고는 조금도 내세울 것이 없는 지저분한 존재인 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발견했어요. 그분은 너무 거룩했어요. 아까 ‘출애굽 원리’라고 했지요. 출애굽 원리는 뭐다?
㉮율법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제사법을 가동한다는 것. 율법 주고, 죄 알고, 제사법 가동해서 같이 합치되고. 그 제사법대로 성전에서 숯불 하나가 슝 하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을 지져버렸더니만 이사야의 모든 죄는 사해졌습니다. 죄를 안 짓는 것이 거룩이 아니고요, 죄사함이 거룩이에요. 이게 출애굽 방식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아이디어로 생각 못 한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죄짓게 하고 일거에 예수님의 피로 씻어주는 것, 그 사람만이 천국 갑니다. 그 사람만이 천국 가요. 이걸 조금 더 이해하기 쉽도록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이런 말씀 나오거든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을 글자로 보지 마시고 이걸 집사님이 하나 만드는 거예요. ‘길’이라는 글자에서 ㄱ(기역)이 있잖아요. 그걸 커다랗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나머지 것들도 커다랗게 만든다면 그것이 문자가 아니고 문자처럼 생긴 하나의 폭을 가진 공간이 되겠지요. 왜 제가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문자대로 지키려고 하지 말고 또는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 문자의 속에 들어가려면 문자 자체가 공간이 되어 있어야 해요.
‘길’이라는 공간 안에 들어가고, ‘진리’라는 공간 안에 들어가고, ‘생명’이라는 공간 안에 들어가서 구원받는 겁니다. 이게 신약이에요. 요한복음 13장 36절에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때 예수님의 말씀은 굉장히 간편해요. “처소 만든다”(요 14:3). 처소, 처소 만든다. 말씀에 의해서 완성된 공간 만든다. 처소 만든다는 거예요.
네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너를, 이 말씀 바깥에 있는 너를 이 말씀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길’이라는 공간 안에, ‘진리’라는 공간 안에, ‘생명’이라는 공간 안에 집어넣어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 말씀을 자꾸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기억력도 나쁜데 다 잊어버리지요. ‘나 말씀 몇 개 지켰다.’ 그러지 마세요.
이걸 알기 쉽게 집사님이 아까 말한 그 글자를 커다랗게 한 번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가로, 세로, 폭을 1미터로 커다랗게요. 하나의 배수관처럼 해서. 트로이 목마 같지요. 한 3미터로 한다면 한 50명은 그렇고, 한 20명은 거기 들어갈지 싶어요. 그러니까 이 출애굽해서 백성들이 3개월 만에 말씀을 받았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자꾸 말씀을 지킨다고 생각하는데 그 율법 자체가 공간화 되어서 확장돼요. 말씀 자체가 확장된다고요.
그 말씀 안에 들어가면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위로 보나, 아래로 보나,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로 보나 이미 그 말씀의 공간 안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말씀이 성취된 공간 안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 들어오게 된 힘이 뭐냐? 그게 바로 왕의 힘이에요. 그게 솔로몬의 힘, 왕의 힘이라고요. 다윗 왕의 힘.
그 다윗 왕을 향하여 욕을 하면서 돌을 던지고 먼지 날리고 해놨어요. 그런데 다윗이 유언하지요. 다윗은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은 것 같아요. 유언을 이렇게 해요. “솔로몬아! 사울 집안의 유력한 시므이가 있다. 나에게 행패 부렸던 그 시므이. 그 사람을 그냥 두지 말고 유념해라.” 인간 안 바뀐다, 그 말이지요. 유념해라.
시므이라는 그 사람이 뭘 모르느냐? ‘지금 가진 것이 있다, 옛날부터 왕족 집안’이라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왕이어야 하는데, 힘은 그쪽에서 주시는 힘인데 그 사람이 스스로 자기만의 어떤 힘을 만들고 그 힘 가지고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는 봐주고 있었는데 혹시 네가 왕 되고 난 뒤에 ‘다윗은 죽었고 이제 슬슬 사울 집안끼리 단합대회 해봐?’ 이럴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럴 때 네가 단도리 잘해라.”
저 같으면 “아버지, 왜 그래야 하는데요?” “너는 왕이잖아.” 숨어 계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식으로 관리해야 할 책임자는 그 현지의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심판하는 사람이니까요. 잠언 말씀 하나 읽었습니다만 다른 곳 20장 26절에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 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
아, 잔인하게 느껴지지요? 타작하는 기계로 사람 위를 확 지나간다, 그 말이지요. 누구에게? 악인에게. 그러니까 왕이 월급이나 받으면서 술이나 먹는 게 아니라 출애굽의 공간에 부합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늘 살펴서 출애굽 원리인 죄와 용서에 대해 합해지지 않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재판하고 심판하는 그 일을 솔로몬 네가 하는데 그중 하나인 시므이를 요주의 인물로 지적한다, 그렇게 된 거예요.
어떻습니까? 이 정도 말씀드리면 그 당시 사람들 마음가짐이 ‘그래. 우리는 군소리 말고 솔로몬 말만 들어야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압에 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어요. 열왕기상 2장에 요압의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30절에 “브나야가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러 저에게 이르되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임금이라는 것은 하나님 임금의 대리자로서 죄를 인정하면 언제든 용서를 해주는데 요압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죽는 순간까지도 내가 죽는 방법을 내가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왕 네가 결정하지 말라.” 그 말이에요. 자, 그 이유가 뭘까요?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까?
요압이 죽어서 어디를 가느냐 하면, 음부에 가요. 음부라 하는 것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그 장소가 음부입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열왕기상 2장 6절에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반드시 죽이라는 말이지요. 이미 다윗도 알아요. 요압은 왕이 백번 바뀌어도 소용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 요압이 꼭 가룟유다 같아요. 하나님의 원수 ‘내 인생 내가 죽는 것은 내가 결정하겠다. 네 손에 내가 죽는 그런 치졸함은 거부하겠다.’ 이게 악마의 마지막 모습이잖아요. 우리 같으면 “내가 왕을 몰라뵈었습니다. 내가 왕을 잘못 선택했습니다. 이제 왕이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그냥 복종하면 되는데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원수는요, 하나님에게 복종 자체를 못 해요.
어떤 사람은 점심도 사주면서 한 번만 교회 와주세요, 부탁하기도 하고 그래서 봉투에 돈 넣어서 교회 오기도 하고 그래도 교회는 나와 주되 안 믿습니다. 믿지를 않아요. 그러면 우리가 물어보지요. “참 아저씨도 고집 세다. 교회를 다니고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아는데 왜 예수를 안 믿습니까?” “안 믿어지네요.”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안 믿어진다는 말이 뭐냐 하면, ‘나는 여태껏 믿어왔던 나 자신의 결정과 나 자신이 갖고 있던 힘을 그냥 믿으래. 자꾸 나보고 예수 믿으라 하지 말라. 나는 그냥 내 식대로 살래.’ 이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가룟유다처럼. 바로 그런 점까지도 이미 다윗이 알고 있고 솔로몬도 그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요압이 다윗을 도와서 이스라엘 통일하고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까? 전쟁 하나는 진짜 끝내주는 사람이지요. 아무리 공을 세운들 그 사람은 꿍꿍이가 따로 있고 딴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나도 이렇게 힘껏 해서 왕 같은 권력 좀 누리자, 왜! 나도 좀 누리면 안 되나?’ 거기에 비해서 아브넬과 아마사는 ‘우리 권력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해? 다윗에게 항복하고 그 밑으로 가야지.’
다윗에게 항복하고 오는 그 아브넬과 아마사를 누가 죽였는가? 요압이 사적인 복수심으로 죽여버렸잖아요. 이런 사건을 열왕기상 2장, 3장에서 나열한다는 것은 딴 이야기가 아니고 이 약속의 땅의 원리원칙은, 정권이 바뀌고 왕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이 특수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원리원칙은 여전하고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끝으로, 만약에 모든 인간이 이 출애굽 정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공간 안에서 주님의 도움, 힘, 사랑으로 용서하심으로 충분해요.’라고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 약속의 땅과 주님은 이별의 순간이 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위로 올라가 버려요. 땅에 있는 성전은 불태워지고 왕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성전은 위로 올라갑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열왕기가 있는 겁니다. 호세아 13장 11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왕을 주시는 이유는 그 왕같은 왕이 이 세상에 과연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왕이 되어 놓으면 권력 쥐고 흔들 생각이나 하지 왕 같은 왕이 있겠어요?
없다는 겁니다. 왕이 없다는 말은 이 세상 자체에 희망 두지 말라는 거예요. ‘저 사람 같으면 왕으로 쓸만하다.’ 혹은 ‘이 사람 같으면 우리한테 잘해줄 것이다.’ 믿지 마세요. 이 세상에 왕은 이미 확정되어 있고 결정 났습니다. 그 분은 누구냐? 우리를 위해 십자가 자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왕이십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왕의 앞에 나올 때 우리의 힘을 빼고 나오셔야 돼요. 왜냐? 왕의 힘 앞에서 나를 삭제하는 것, 나를 제거하는 것, 그게 오롯이 왕의 자비로서만, 사랑으로만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원칙과 하나님의 약속의 땅의 원칙이 이토록 차이나는 것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그들을 약속의 땅에 이끄셔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긍휼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천국 만들고자 했지만 그 속에서 힘자랑, 재주 자랑, 지식 자랑, 권력 자랑하는 자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망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우리도 망해야 마땅한 지저분한, 더러운 인간인 것을 이제는 거룩하신 십자가 앞에서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죄사함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