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우연의 존재

아빠와 함께 2024. 11. 21. 19:08

우연의 존재 

2024년 11월 20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10-12

(2:10)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 자서 다윗 성에 장사되니
(2:11)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을 치리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치리하였더라
(2:12) 솔로몬이 그 아비 다윗의 위에 앉으니 그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

다윗은 진즉에 죽은 자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 12:13)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위반한 자는 필히 죽어야 합니다. 이미 이때 다윗은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죽지 않음’이 됩니다. 이로서 다윗이 스스로를 ‘필연적인 존재’ 생각하는 것에 차질이 일어납니다. 즉 “나는 누가 뭐라도 필연적으로 여기 있고, 여태껏 있어왔고 앞으로는 나는 나로서 반드시 있게 될 것이다”는 그 필연성은 율법 위반자로 이제 끝이 난 겁니다. 자신을 필연적 존재로 본 것으로 인해 가리워지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치 ‘우연처럼 출현하는 필연적 존재’입니다. 필연적인 율법에 걸려서 필연적으로 죽어서 ‘필연적 사망존재’가 되어야 될 자신이 그 필연성으로 납득되지 못하는 우연적 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그것은 바로 ‘죄사함’입니다. 이 ‘죄사함’으로 인하여 죽지 않는 존재가 된 겁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다윗의 예언을 통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5-27)

다윗은 자신이 이미 죽어 마땅함을 안 상태에서 그는 자신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필연적 죽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그저 ‘우연적 죽음’에 불과합니다. 있다가고 당연히 없어질 그런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자기 안에, 나말고 다른 필연적인 분의 죽음과 부활이 따로 있고 자신은 그분과 함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 세계의 율법의 세계이며 다윗은 자신의 죄를 통해서 이 ‘율법 안’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겁니다. 그런데 율법의 세계에는 죄로 인한 심판으로 시작하지만 이런 심판을 통해서 ‘죄사함’이 자신을 가다리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필연적 존재로 여기면서 자신의 육신적 죽음을 죽음의 전부라고 여겼던 것이 실은 결과적인 죽음이며 진정한 필연적 죽음은 ‘대신 죽음’으로 나타남을 알았던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언약) 안에는 ‘죄사함’과 그리고 사랑의 결실도 들어 있었던 겁니다. 이런 내용은 자신의 마땅한 ‘율법 위반’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는 율법 안에 들어 있는 죄사함과 사랑을 드러내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리에 스스로 필연적 존재라고 자부하는 다윗은 여지없이 죄인으로 들추어내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물러받은 솔로몬도 그가 하나님에게 받았던 모든 부귀,영화를 가지고 유감없이 죄 짓는 것에 소모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다윗이 알았던 ‘율법 안’, 혹은 ‘언약 안’의 필연성에 가담되는 모습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필연적으로 자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여기면 여기에 오만이 발생됩니다. 인간이 자신을 ‘산’ 존재라고 자부하면 이는 곧 ‘교만의 응축체’로 살아가는 겁니다. 시편 73에 보면, 자신을 살아 마땅한 필연적 존재로 간주한 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시 73:2-9)

마음에 만족스러운데 자신을 허무한 우연적 존재라고 여기겠습니까? 매사가 잘된 것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필연적 존재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즉 육체적 죽음 이전에 율법에 의해서 먼저 죽는 죽음을 겪여야 인간은 우연적 존재에서 ‘필연적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참으로 제대로 죽는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 죽는 겁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죄사함’이 뭔지 ‘하나님의 사랑’이 뭔지를 모릅니다. 죽어야 될 다윗을 위해 대신 죽은 그 갓난 아기의 취지는 동일한 부인인 밧세바와의 동침에서 생긴 새로운 자녀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삼하 12:24-25)

만약에 율법에 의해서 선행적 죽음이 맞이하지 못한다면 계속 그 인간은 법 안에 뭐가 있는지 기웃거릴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얼마나 필연적으로 우수하고 의로운 존재며 살아 마땅한 존재인지를 법에 의해서 인정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법정 앞에서 서서 법원 문지기보고 집요하게 “들어가세요”라는 말을 듣는 방식으로 법의 세계 속어가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법정 문지기로부터 정당하게 출입을 허락받았다는 이 자체를 필연적 정의로 여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광야 시절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성향을 그대로 다 보여주었습니다. 자신들은 절대로 죽어서도 안 될 존재라면서 이 사실을 법으로부터 확정해주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그들이 먹어야 될 것은 애굽에서 먹던 음식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출 16:15-17) 그들 백성들이 원했던 양식은 이런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어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민 11:4-7)

그들은 자신들을 계속 필연적으로 살아야 될 자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죽음 양식’ 곧 자신을 필연적으로 여기는 자에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양식을 주셨던 겁니다. 과연 만나를 먹은 첫 홍해 집단은 광야 40년을 통해서 거의 다 죽었습니다. 진정한 은혜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알리는 방식으로 먼저 찾아와 죽이신다는 데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제대로 죽으신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우연적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강-열왕기상 2장 10-12절(우연의 존재) 241120-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2장 10-12절입니다.

열왕기상 2:10-12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자서 다윗성에 장사되니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십년이라 헤브론에서 칠년을 치리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을 치리하였더라 솔로몬이 그 아비 다윗의 위에 앉으니 그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

솔로몬의 나라가 견고하게 된 그 바탕에는 다윗이 있었고, 그리고 그 다윗이 죽었는데 다윗을 장사한 그 성 이름이 ‘다윗성’이라고 되어 있어요. ‘다윗성에 장사했다.’ 그러면 솔로몬이 나라를 굳건히 하는 그 토대는 다윗성이 되고 그 다윗성에 다윗의 시신이 묻히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자서”라고 알려졌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윗은 진작 죽어야 될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준 바에 의하면 사무엘하 12장 13절에서 다윗이 나단 선지자에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다.”라고 이야기했고 그걸 보고 선지자가 다윗에게 대답하는데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는 말씀이 나와요.

“당신이 죄를 범했는데 죽지 아니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 말은, 당신이 죄를 범한 것은 확실하고 죄를 범한 게 확실하다면 당신이 그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도 확실하게 적용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범한 자는 곧 죽어야 될 자, 이것이 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끼리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서로 봐주기’ 이런 게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서 약속의 땅에 살기 때문에 범죄 한 자는 필히 죽는다는 것이 율법으로서도 합당합니다. 그러면 죄를 지었기에 이미 산 자라고 할 수 없고 죽은 자가 적절한데 여기에 뭐가 투입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으니 당신이 죽지 아니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죄 사함이 없었더라면 당신은 벌써 이미 죽은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죄를 사했기 때문에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는 것은 죄 사함인데 제대로 죄 사했다는 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당신은 죄 사한 게 맞다는 증거로서 밧세바와 당신 사이의 아이가 죽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죽어야 될 것은 당신인데 당신의 죄를 사했습니다. 죄를 사했다는 증거를 제가 보여드릴까요? 당신 대신 죽어야 될 당신과 밧세바 사이의, 죄와 죄인들의 열매된 아이가 죽기 때문에 당신은 당장은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이가 죽는 것을 다윗이 기억하는 순간 하나님의 죄사함 조치가 없었더라면 나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확실하게 다가오면서 계속 자기 인생을 질질 끌고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윗 자신에게 죄 사했다는 그 이야기를 언급하신다는 말은, 나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현상,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니까, 이스라엘 왕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이 일으키겠다는 그러한 시범조로 다윗에게 일어난 거예요. ‘죄를 범했지만 사함이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임해서 그들에겐 더 이상 죄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이 원리가 이스라엘의 다윗 왕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원리가 됩니다.

그걸 조금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사무엘하 12장 6절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기르는 양이 한 마리밖에 없어 식구처럼 여기는 하인이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손님 대접한다고 그 많은 자기 양 놔두고 굳이 하나밖에 없는 하인의 귀한 양을 잡았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왕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입각해서 그 백성에게 판결을 내린다면 당신은 어떤 판결문을 쓸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다윗이 그 이야기를 듣고 6절에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이렇게 했어요. 그리고 5절에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은 이스라엘 내에서 율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한다.’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율법을 위반했다는 게 뭐? ‘율법에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자기 것 아낀다고 하나밖에 없다는 걸 불쌍히 여기지 않고 빼앗는 그것은 율법 정신에 위반되니까 그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하고, 그리고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야 된다.’라고 이야기했어요.

다윗 본인의 입에서 율법 정신 가운데 처벌도 처벌이지만 ‘율법을 지켰다, 안 지켰다’의 기준에 ‘불쌍히 여겼다, 안 여겼다’가 율법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을 왕으로서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그 사람이다!” 그렇게 해 버렸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이야기를 제가 왜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줬다는 것은 하나님의 죄 사함의 배경에 죄지은 자를 사해준다는 그 차원이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긴다는 율법 정신에 입각해서 죄지은 다윗을 사해준 거예요.

그러면 그 사해줬다는 근거가 뭐냐? 너 대신 누군가 죽었다는 말이죠. 너 대신 누가 죽고, 죽고 난 뒤에 아들이 죽었다는 뜻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율법적으로. 그러면 죄 사함을 위해서 두 가지의 현실이 실제로 일어나야 돼요. 하나는, 누가 돌아가신 것과 또 하나는 뭐냐? 누가 돌아가셨다는 그 자리, 죄 사함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는 또 하나의 경우가 발생돼야 되죠.

밧세바하고 다윗의 관계에서의 애는 이미 죽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죽은 애를 낳은 그 밧세바를 아내로 삼게 해서 다시 아들을 낳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사무엘 하 12장 24절에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그러니까 솔로몬의 자리는요, 솔로몬 본인이 왕 되고 싶은 자리가 아니에요. 솔로몬 자리는 없습니다. 솔로몬 자리는 없고 다윗이 죽어 마땅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율법 완성, 다윗에게 언약의 완성이 사랑으로 등장했는데 그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무슨 왕이냐? 바로 솔로몬 왕이에요. 솔로몬이 ‘여디디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그러면 솔로몬 입장에서 다윗이 죽고 난 뒤에 ‘돌아가신 건 돌아가신 거고 이젠 내 나라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러니까 솔로몬 자리란 다윗의 죽음에서 연장되어서 나온, 다윗의 죽음에서 발생된 사랑의 자리인데 솔로몬이 ‘돌아가신 것은 돌아가신 것이고 이제 내 나라’라는 식으로 되어 버리면 솔로몬은 이름뿐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 된 자가 되지 못해요.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에 들어가는 자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들어가려면 이렇게 하면 돼요. 솔로몬이 하나님께 받은 모든 부귀영화를 자기가 죽을 죄를 짓는 데에 다 사용하는 거예요, 자기 부귀영화를. 뭐 그것은 쉽죠. 가진 게 많으니까 뭐 하는 족족 죄가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더 간추려 이야기하면 솔로몬은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죽기 위해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돼요. 내가 죽기 위해서 이것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죽기 위해서 뭐 갖고 있습니까? 아파트 갖고 있어요? 뭐 개도 죽기 위해서 갖고 있고, 차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가지고 뭘 했느냐? 죄짓는 데 써먹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는데 무슨 여자가 1000명이나 됐겠습니까? 그러면 인간은 왜 가지면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

시편 73편에 약간의 힌트라고 할 수 있는 게 나옵니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3절) 오만한 자가 뭐냐? 4-5절에 오만한 자의 조건이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이게 바로 거창하게 존재하는 모습이거든요. 부러움을 살 만한 존재, ‘살아 있음’이거든요.

그 ‘살아 있음’이 탄탄하게 살아있는 하나의 모델 같은 것이 이런 겁니다. 비실비실해서 살아 있는 것은 ‘이게 죽은 거야, 산 거야?’ 구분도 안 되지만 당당하게 살아있는 것, 그래서 모든 사람의 여망이고, 희망이고, 목표가 되는 것. 그래서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교만이 함축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교만이 함축되어 있는 것.

자, 그렇다면 솔로몬은 다윗이 죽었기 때문에 발생 된 자식이에요. 다윗이 죄짓기 위해서 투입된 여인, 밧세바죠, 죄짓기 위해서 투입된 그 여인이 없었으면 나타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판이에요. 죄짓기 위해서 있었던 여인과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던 다윗, 한쪽은 언약이 있고 하나는 죄짓기 위해 있었던 그런 여인 밧세바, 그 사이에서 그 다윗 언약의 자식으로서 솔로몬이 나타난 거예요.

그러면 전에 있는 다윗, 죄짓기 위한 다윗의 입장에서 이 솔로몬은 나타날 수 없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 세상 사람들은 언약이 없기 때문에 내가 있어서 내가 여자하고 결혼해서 애 낳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연한 걸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필연적 존재로 본다.’ 필연적으로 내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솔로몬은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출생했기 때문에, 복잡하게 출생했기 때문에 필연이 아니고 우연적 존재에요. 그래서 필연에서 우연으로 바뀌어야 솔로몬이 구원받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필연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도 있고, 한 달 전도 있고, 일 년 전도 있고, 지금 내가 있고, 내일도 내가 있을 것이다.’ 이거 연결시키면 ‘필연적으로 있고, 필연적으로 있고, 필연적으로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연적 존재는 내가 있어야 한다고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어야 될 필연적 이유가 없는 것을 가지고 우연적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굳이 여기 있어야 될 이유가 상실된 자,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여기 있어야 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오늘 있는 게 아니고 이건 내 뜻이 아니고 다른 분의 뜻에 의해 있어버릴 때 우연적 존재가 된다, 이 말입니다.

필연적인 내가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겠지, 이런 인간이 우연적 존재가 되지를 못해요. 못합니다. 왜? 본인은 죽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다윗 언약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다윗 언약 속으로 못 들어가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천국은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요. 그래서 다윗 언약이라는 게 그만큼 우리에게도 중요해요.

다윗은 분명히 죄짓기 전에는 자기가 필연적 존재에요. ‘나는 왕답다. 왕을 할 수 있다.’ 자기가 우연적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없었는데 죄짓고 난 뒤에 나단 선지자가 와서 하는 말이 “당신은 죽어야 돼. 당신은 죄지었기 때문에 필히 죽어야 돼.” 이건 필연적이죠. “그런데 죄 사함으로 인하여 당신은 죽지 않아.” 이건 죄지은 당사자가 요청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우연히 발생된 죄 사함이 자기를 덮친 겁니다. 죄 사함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구원받는 것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연이에요.

그 우연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밧세바와 죄지을 때 그리고 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가 죽을 때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개입해 봐야 “아이고 하나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계속해서 자기를 죄 안 지은 필연적 존재로서 간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율법 속으로 집어넣어 버려요. 율법 속에 집어넣으면, 제가 아까 여러 번 말씀드린 것이 율법에서는 죄지으면 죽어야 돼요. 죄지으면 죽어야 됩니다. 모든 필연적 존재가 죄를 지었다. 그러면 필연적 존재는 이제 마감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 율법 속에 들어가보니 ‘자기는 진즉에 이미 죽었다.’가 돼요. 필연적으로는 죽었다, 가 되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함의 증거를 위해서 자기는 죽어야 되는데 사함을 받아버린 거예요. 죽어야 되는데. 그래서 율법 속에 뭐가 있는가?

율법 속에 죽음이 있고, 그 죽음 안에 하나님의 용서도 있고, 구원도 있고, 천국도 있고 다 그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율법 앞에서 율법 속으로 들어가면서 자기는 죄인으로서 당연히 마땅히 죽어야 하고, 드디어 율법에 준비된 죽음 안에 들어가 보니까 거기에 ‘죄사함’이라는 것이 있더라는 말이지요, 죄사함. 죄사함이 있고 거기에 ‘대신 죽으심’이 있더라는 겁니다, 대신 죽으심.

그리고 거기에 ‘나는 너를 용서하는 자’라는 증거물까지 거기에 마련되어 있는 거예요. 참 이게 굉장히 …, 인간이 필연적 존재가 될 때 우연에 접근을 못 하는데 율법이 와서 죄짓게 해서 잡아당겨 버리니까 자기가 경험하고 싶지 않더라도 율법 안에서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필연적인 죽음 안에 우연적인 사랑이 나를 기다리고 나를 불렀고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죄사함 받았다는 사실이 나타나는 겁니다. 솔로몬도 이제 그 뒤를 따라가는 거지요.

그러면 율법 안에서 죄에 대한 죽음 속에 들어간다. 이것은 율법이 주어진 이유가 …,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 늙어 죽었어요. 육신의 죽음 말고 선행하는 죽음에 들어가야 육신이 죽고 난 뒤에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 육신의 죽음에 선행하는 죽음이 하나님의 계시, 율법에 의한 죽음을 먼저 맛봐야 한다는 것, 체험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설교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사도행전 2장 24절부터 약간 긴데 한 번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살아 있을 때)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시편 16편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에 의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두 개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 자기를 지금 살아생전에 사용하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으면 끝.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는 인간들은 이게 끝이에요.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계시를 앞당겨 받았어요. 앞당겨 받아서 “나는 죽지만 나와 함께 있는 그분이 죽어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다면 나도 그분 덕분에 내가 무덤에서 썩지 않고 거기서 다시 산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이게 필연밖에 모르는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접근 불가, 무슨 말이지 못 알아듣는 그 계시를 다윗은 왕의 입장에서 그리고 선지자 입장에서 미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사도행전 2장 29절에서 설명을 이렇게 해요.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관광객들에게 다윗의 묘를 보여주고 저도 봤어요. 물론 가짜지만. ‘다윗의 묘가 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사람들아! 예수 믿을 생각부터 먼저 하지 말고 다윗의 묘부터 먼저 가라.’ 그 말이에요. 다윗의 묘가 뭐냐? 바로 율법속으로 들어가라 그 말입니다.

 

율법 속으로 들어가면 어떤 인간도 자기를 ‘나는 필연적으로 죽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태어난 필연적 존재’임을 인식하게 될 거예요.
이게 법의 기능이에요, 법의 기능.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 보면 율법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들이 언제까지 육체의 필연성에 너희의 자아를 실을 것인가? 이제는 성령이라는 우연적인 거기에 너희를 실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령안에 내가 있다고 시작을 해놓고는 어떻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바르게 살았어요’ 하는 식의 그쪽으로 왜 자꾸 가느냐?” 이 말이지요. 자신의 필연성을 왜 못 놓느냐, 그 말입니다.

왜 굳이 내가 필연적 존재가 되어야 하지요? 내가 꼭 이것을 해야 하고, 내가 꼭 잘 되어야 하고, 그것은 이미 죽은 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거예요. 이미 죽었으면 입 다물고 있어야 해요. 죽었으니까요.

 

20세기 초 체코슬로바키아에 유명한 문학 작가가 있어요. 그 사람은 한강보다 더 유명해요.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노벨상도 못 받았어요. 결핵으로 죽었고요. 그 사람의 『법 앞에서』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갈 때 무심코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항상 법의 기초해서 모든 행동과 생각이 나온다는 것을 소설로서 표현한 거예요. 어떤 촌의 소시민이 법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지기가 있거든요. 문지기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값진 것을 써 가면서 “이거 받으시고 여기 들어가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문지기가 하는 말이 “그냥 들어가세요.” “아닙니다. 그냥은 아니고 당신이 나보고 ‘이제 들어가세요’ 할 때 그때에야 들어가겠습니다.” 문지기가 “그냥 들어가시라니까요, 그냥! 당신이 결정해서 이 법 속으로, 이 재판정 속으로 들어가세요.” “아닙니다. 당신의 허락이 떨어져야 나는 들어가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사람은 행동 하나하나에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행동하는 거예요. 그것도 법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거예요. 그리고 문지기에게 묻습니다. “이 법안에 또 뭐가 있습니까?” 자꾸 법안에 뭐가 있냐고 묻는 이유가 ‘법안에 있는 것이 뭔지 내가 알 때 비로소 나는 법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정받는 존재가 된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냥 하면 되는데 남들이 내 행동을 옳다 하겠는가, 아니면 나쁘다고 하겠는가? 이미 인간 속에 법적인 의식, 선악적체제가 감추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행동 하나하나를 겁나 해요. 겁을 집어먹고 행동해요. 그리고 뭐가 궁금해도 이게 법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를 먼저 내세워서 자꾸 따져보려고 합니다.

서울에서 사는 어떤 중년 남자에게 누가 광고지를 하나 주고 갔어요. 광고지에 보니 “선유도 관광합니다. 가격은 2만 2천 원. 차편과 뱃삯, 식사 세 끼 제공합니다.” 이걸 다 해주는데 겨우 2만 원. 이걸 보고 그 남자가 궁금해 미치는 거예요. 안 가려고 했는데 궁금해서 미치겠으니 한 번 가보는 거예요.

인간은 이미 자기가 필연적 존재인데 그냥 필연적 존재가 아니에요. 정당하고 의롭고 바르게 사는 필연적 존재라는 것이 감춰져 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아는 나는 항상 의롭고 바르게 사는데 자기가 보기에 납득이 안 되는 어떤 새로운 법칙이 나오면 그게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갔는데 온 동네 노인들 한 차 싣고 가다가 2시간 후에 식사가 나왔습니다. 찰밥에 반찬까지 나왔어요.

그래서 가이드 아줌마 보고 “이게 진짜 2만 원에 다 되는 겁니까?” “다 됩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 운전사 수고비 5천 원은 추가됩니다.” 2만 2천 원에 5천 원이 벌써 추가 됐지요. 가면서 패키지 상품 파는 곳을 세 군데 들르는데 여러분도 다 아실 거예요. “이것은 공장에서 바로 왔기에 싸게 해주고 광고비 없이 사장이 직접 판촉을 하기에 반값에 드립니다.” 그런데 그 반값이 열 배에요. 반값인데 열 배입니다.

선유도까지 진짜 가고 거기서 갈매기 모이도 줬어요. 그걸 유튜브로 다 보여줬는데요. 자기는 계속 인내하고 참은 거예요. 그 대형 버스 안에 있으면서 그 새로운 사회공동체, 낯선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은 물건들 다 사는데 안 사고 있으니 그 모임의 법에 위반되니 졸지에 자기는 나쁜 사람이 되고 만 거예요. 그런데 자기는 정말 참고참고 또 참아서 돌아올 때 젤리 세 봉지 만 원 주고 산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 샀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듯이 법은 인간이 얼마나 의로워지려고 하는지 그 악마적 심보를 노리고 법을 줬고요, 그 법을 준 이상은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 전제로 인하여 인간은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스스로! “아이고, 선지자님! 저 죄지었습니다. 말씀하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고백하겠습니다.” 절대로 그러지 않아요.

딱 지적하니까 “그런 사람이 바로 당신이야!”라고 지적하니까 비로소 다윗은 알았거든요. 여기서 다윗이 놀란 것은 자기가 죄지었다, 내가 나쁜 짓 했다, 내가 좋아한 그 여자의 남편을 내가 살인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왜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왔느냐? 그 말입니다. 나를 목 졸라 죽이든, 밟아 죽이든 그것은 문제 거리도 안 돼요.

그것은 정말 시답지도 않은 문제인데 실제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두 번째, 살아계신 그 하나님이 나를 지적하기 위해서 찾아왔다는 그것, 이것은 천번 만번을 죄지어도 그 기쁨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바꿀 수가 없어요. 무슨 그런 횡재를 했어요? “너 죽었어!”라고 찾아오는 그 찾아옴, 너 죽었어, 죽었어, 만 번을 해도 고맙습니다.

왜? 내가 필연적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일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필연에서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내가 이제 드디어 진짜 필연 앞에서 그 필연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주님의 우연적 존재, 있다가 없어져도 마땅한 안개 같은 존재로 밝혀지는 것, 이것이 바로 다윗이 안 죽고 살았던 이유입니다.

진즉에 죽어야 하는데 안 죽은 이유는 주님만이 필연적 존재가 주님만이 스스로 계신 분이고 어떤 인간도 그분을 위한, 있다가도 없어지는 우연적 존재, 쓰이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 다윗을 통해서 이제는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솔로만의 막강하고 단단한 제국, 그 나라는 하나님의 필연 앞에서는 언젠가는 그대로 없어지고 무너져야 될 우연적 존재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그 언약 속에서 죄 용서할 때 첫째는, ‘대신 죽으심’이고 두 번째는 ‘사랑의 증표’, 이 두 개를 하나로 묶어서 오늘날 십자가로서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다윗의 이러한 고백은 이미 이스라엘에서 있었던 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왔을 때 그들은 애굽에서 자기들이 먹던 음식을 원했어요. 그것을 하나님이 광야에서 준비해 주실 줄 알았어요. 찹쌀 도시락, 이런 것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들이 애굽에서 먹던 양식을 준 게 아니고 그들이 모르는 양식을 줬어요. 그래서 출애굽기 16장 14-15절에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자기들이 먹어본 적도 없는 만나를 준 것은 ‘이걸 먹고 죽으라.’라는 거예요. 네 육신이 늙어 죽는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먼저 죽어야 네가 살 수가 있다는 겁니다. 너를 죽이라고 먹는 양식이 만나에요. 왜? 이것은 진짜 필연적인 문제 내려주신 그 양식이기 때문에, 그분만이 양식이기 때문에 그 만나를 먹으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같이 체험해야 될 양식이거든요.

‘네가 그냥 늙어 죽지 말고 내 십자가 죽음에 참여하면 그것이 복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취지를 모르고 “맨날 만나야, 맨날 만나!” 그래서 그들은 모세 말고 다른 지도자로 바꿀 생각을 해서 ‘Back to the Egypt!’ 애굽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어요.

민수기 11장 5절에 그들이 불평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여기에 짬뽕, 탕수육도 포함시키면 되지요. 햄버거, 피자 등등. 그런 것을 못 먹어서 우리 정력이 쇠했는데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들은 자기가 애굽에 있을 때도 필연적 존재였고, ‘나는 마땅히 살아야 해. 죽으면 안 돼.’ 이걸 유지하면서 광야에 살다 보니까 만나를 준 이유를 모르고 ‘우리는 마땅히 살아야 해. 계속 살아야 해.’라고 하면서 “우리가 먹던 음식 내놔라!” 한 거예요. 우리가 먹던 음식. 민수기 20장 5-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석류, 수박, 참외 안 주는 이유가, ‘하나님과 같이 죽어야 산다.’라는 거예요. ‘너는 지금 산 존재가 아니고 죽은 존재’라는 겁니다. 죽은 존재가 자꾸 살았다고 하니까 정작 영생을 얻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줘서 율법 앞에서 일단 죽게 만들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율법 앞에서 죽게 만들어서 ‘아, 내가 늙어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죄지어서 죽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한 그 순간 율법안에서 뭐가 나오는가? 대신 죽으심과, 그리고 죄사함과 하나님이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 자신이 했던 일을 너희에게 나타낸다, 라는 사랑도 같이 느끼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늙어 죽지만 다윗이 죽기 전에 먼저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죽었기 때문에 지금 다윗은 자기 무덤에서 부활되는 거예요. 그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죄를 알고 그 죄를 알게 한 그것이 살아계신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용서했기에 “너 죄인이야!”라고 해주는 그것보다 더 큰 생명,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은 사람은 죽었다, 가 아니라 사실은 살아 있는 우리가 이미 벌써 죽은 채로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왜 사는지?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하나님이 하신 일이 우리를 살렸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살려주심을 깨닫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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