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29강) 시편19:2(시간의 인격화) 20240624b(강의: 이근호 목사)
【십자가와 주일 성수】p.114할 차례입니다. 십자가와 주일 성수, 무슨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죠.
‘십자가’라 하는 것은 사건이고
‘주일’이라 하는 것은 시간에 관한 것이고요.
‘성수(聖守)’라 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에 관한 건데
이 세 개가 서로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죠. 그래서 이 세 개는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단락이 있는 겁니다.
‘주일을 성수한다’ 이게 말이 안되는 게요. 주일은 시간에 관한 거죠. 시간을 우리가 성수한다? 시간이 웃겠어요. 무슨 시간이 인간에게 놀아나요. 뭐 우리가 여호수아입니까? ‘해야, 잠시 멈춰줄래?’ 뭐 이게 가능해요? 안되죠. 우리 인간이 시간을 따라가는 거지, 시간이 인간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The sound of silence’ 유명한 노래 있죠(1964년, 미국 2인조 그룹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시편 19편에 나온 것.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이 세상은 만물이 서로 통하고 있다는 거예요. 시편 19편에. 침묵의 소리란 뜻을 가져요. 침묵의 소리. 시편 19편 이왕 나왔으니까 한번 보시면 이래요. 이게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거예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낮과 날과 밤과 하늘과 이 세상의 모든 궁창은 사람이 납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고, 하나님의 활동을 표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세상 만물이다 이 말이죠. 인간 너 자신의 행동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기 위함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런 행동을 인간이 방해하고 있더라 이 말입니다. 인간은 나름대로의 행동을 하고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까 고집부리고 있는 거예요. 왜 오늘은 바람이 부냐, 태풍이 오냐, 미세먼지는 많으냐. 인간이 그걸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못되는 거예요.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이걸 시각으로 측정하는데 그 시간에 대해서 인간이 놀아날 뿐이지, 어떻게 잘 거기에 적응하려고 애쓸 뿐이지, 시간을 내가 내 손에 휘어잡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연의 일종이라 이 말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종이다. 자연의 부분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 이 자연이 무너지면 인간도 같이 무너진다. 같이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세상이 끝나면 인간도 같이 끝나는 겁니다. 인간은 자연에 종속되어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에 종속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죠. 하나님은 자연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자연에 종속되지 않는다. 갈릴리 바다가 막 난리를 치고 열두 제자와 예수님을 잡으려고 넘실댈 때 예수님께서 “잠잠해라! 조용히 해.” 하니까 바람과 바다도 잔잔해졌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 8:26)
온난화 문제도 예수님이 꾸짖으면 온난화가 해결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꾸짖을 마음이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진멸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다 없애버리는 게 사랑이기 때문에 온난화에 대해서 주께서 전혀 손댈 마음이 없습니다.
이처럼 서열화를 분명히 해야 돼요. 계급화. 누가 위에 있고 누가 밑에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돼요. 자연 밑에 인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됩니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잖아요. 흙의 운명이라는 거, 그거 뻔하죠. 흙에 속하였으니까 운명도 같이 휩쓸려가는 거예요.
따라서 ‘시간이 인간을 지배한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인간은 시간 밑에서 그냥 겨우겨우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그걸 지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이게 바로 안식일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안식일 때문에.
안식일은 시간을 접어요. 시간을 7일 단위로 접은 거예요. 시간이 이렇게 길게 있다면 이걸 일곱 단위로 접기한 거예요. 차곡차곡 메모지 접듯이 접어버린 거예요. 일월화수목금토까지.
1,2,3,4,5,6,7에서 다시
1,2,3,4,5,6,7. 8이 없어요. 다시
1,2,3,4,5,6,7.
이렇게 7일을 정했단 말이죠. 이걸 누가 정했어요? 안식일은 누가 만들었죠? 인간이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그러니까 ‘시간 위에 숫자 있다.’ 이렇게 보면 돼요. 숫자 위에 하나님 계시다. ‘하나님은 숫자를 통해서 시간을 다스린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에 대해서 인간도 나름대로의 숫자를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 문화에서 숫자, 상형문자, 이렇게 문자가 처음 만들어질 때 숫자나 언어가 만들어진 이유가 남아도는 물자를 계산하기 위해서 언어를 만든 거예요. 소유와 관련되어 있어요.
이번에 밀을 얼마나 생산했더라? 이번에 과수를 했는데 과일이 몇 개 달렸지? 이걸 기억해야 도둑놈이 훔쳐가도 몇 개 남았는지를 알 수 있잖아요. 남아도는 잉여 물자에 대해서 하나둘씩 카운트하는 거예요. 카운트한다는 말은 물건하고 숫자 하나하나를 대응해서 숫자로 바꾸는 겁니다.
하나하나 숫자로 바꾸어서 남아도는 것은 다른 사람의 또 다른 상품, 제품과 교환하기 위해서 숫자가 그다음부터는 번창하기 시작했죠. 그게 영수증이라는 거예요, 영수증. 최초의 언어는 영수증이에요. 물건 받아놓고 물건 안 줬다고 우기고 이러면 안 되잖아요. 영수증은 약속입니다.
상인들끼리 영수증 주고받고 할 때 뭘 남겨야 돼요. 그래서 처음 고대 앗수르에서는 이걸 점토로 했어요. 진흙이 많아서. 그런데 이집트에는 점토가 없고 팽팽하고 매끈한 파피루스가 있었기 때문에 글씨가 그림에서 선으로 바뀐 겁니다. 선(線)으로. 언어상 선이 더 발달된 것처럼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무역하다 보면 무역을 할 때 바다 건너 무역하기 때문에 상선이 필요하죠. 상선을 전문으로 하는 민족이 페니키아라는 거예요. 페니키아에서 현재 영어의 알파벳이 처음 나온 거예요. 그리고 히브리어, 아람어 다 거기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 세계에서의 숫자라 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간을 7로 숫자화 시켰잖아요. 숫자화 시켜놨다는 말은 이제 인간들이 쓰는 숫자와 하나님의 숫자가 이제는 대결구조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7을 고집하고 인간들은 7을 지켜낼 수 있다고 고집하고. 그게 서로 같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빨리 지나가서 가게 문 열기를 바랐던 거예요.
(인간이) 7을 만든 숫자의 의미는 빨리 지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내 이익을 챙기려는 그게 급한 거지만,
주님께서 주는 안식일은 7일에 했던 일이 효과가 있을 경우에만 6일 동안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이에요.
‘안식일을 제대로 못 지키면 있는 것 다 빼앗아버린다’ 이게 하나님 뜻이에요. 왜 뺐는가?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취지에 안 맞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격대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너 같은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 만든 것은 보기에 심히 좋았잖아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만들지도 않은 게 자꾸 생겨나는 거예요.
빈대, 잡초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또 엉겅퀴. 이것은 왜 등장하느냐 하면 저주의 표시로 이게 등장하는 거예요. 모기, 파리 이런 거. 바이러스, 박테리아 이런 거. 박테리아의 원조는 하나님이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RNA 바이러스 이런 거.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고집 부리는 게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내가 양보 못한다. 그게 7입니다.
이걸 쉽게 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거기에 대해 반대하는지를 보겠습니다. 19×19. 옛날에 중국의 순 임금이 바둑이란 게임을 만들었어요. 바둑을 만들 때 어떻게 만들었느냐? 모든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 탁자에 판 위에 보드 위에 전부 다 담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구상한 것이 19×19에요. 19줄, 19줄이에요.
바둑판을 해놓고 제일 중심에 10개의 점이 있는데 그중에 중앙에 점이 하나 있어요. 이것을 우주의 중심이라 해서 천원(天元, zenith)이라 해요. 점을 찍었습니다. 이 바둑판에서 일어난 경우의 수는 몇 가지게요? 이것에 대해 사람들은 수학적으로 계산이 되죠.
한 칸, 즉 가로 2줄 세로 2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우의 수는 몇 가지겠느냐. 총 8가지에요. 돌이 모서리 여기 하나 있다. 두 개 있다. 세 개 있다. 네 개 있다. 이것도 있지만 순서상 오른쪽 위 모서리에 놓느냐 왼쪽 위 모서리에 놓느냐 하는 경우의 수를 다 합치면 8가지가 돼요. 그래서 이걸 2의 3승이라 해서 2×2×2=8이 되는 겁니다.
19×19는, 2의 19승×2의 (19-1)승해서 이게 경우의 수에요. 그러나 이 경우는 동그라미가 몇 개냐 하면 상상도 못하게 많은 거예요, 이게. 그래서 아무리 많은 바둑판을 둬도 똑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거기다 패까지 있어요. 다른 데 한번 두고 놓을 수 있는 패까지 계산하면.
그래서 이세돌과 알파고가 바둑을 했는데 그때는 알파고가 제대로 발달을 안 해가지고 이세돌한테 한 판 졌었지만 그다음부터는 (알파고를)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현재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 세계 1등이 우리나라 신진서거든요, 신진서는 두 점에 도전합니다. 두 점 놓고 현재 알파고한테 도전해서 때론 이겨요. 그 정도로 인간이 발달하죠.
엄청나게 많은 게 있단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이 열아홉 줄 뿐입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경우에 대해서 인간이 어떻게 짐작조차 못하죠. 그러니 인간이 자꾸 숫자를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어서 내게 필요한 것들을 적절하게 미리 대처하겠다는 거예요. 이걸 과학이라고 해요, 과학. 인간의 과학.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과학의 끝은 확률이에요. 확률로 만든 과학, 물리학이 바로 양자물리학이라는 거예요. 양자물리학. 말 잘 들어보세요. 우연히 나올 확률은? 이렇게 돼요. 우연은 그냥 우연인데, 우연히 나올 확률을 계산해서 확률이 더 모아지면 통계학이 돼요, 우연히 나올 확률을 계산해서 미리 대처하겠다는 거예요.
이걸 누구한테 맡기느냐 하면 인공지능한테 맡기는 거예요, 인공지능한테. 테슬라 같은 차에다 이걸 실어버리는 겁니다.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해 차 사고가 적게 날 경우, 이런 걸 대비해서 1단계, 2단계,…5단계까지 하고 시중에 이걸 직접 운행하냐 마냐. 우리나라는 3단계까지 왔는데.
지금 과학이 이걸 하고 있다고요. 인공지능 있는데 아직도 바둑기사가 바둑 두는 것처럼 인간에게 이 세상은 아직까지 할 것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자기 부인이 안돼요. 우리가 따라잡을 대로 한번 따라잡아보자.
이 시간 문제에 대해서 시간은 뭐가 쏟아지는가? 보통 밤에 별이 많으면 뭐라고 하느냐? 별이 쏟아진다 해요. 별이 쏟아지는~ 노래 있잖아요. 해변으로 가요. 별이 쏟아진다는 거예요. 이 시간에서 모든 우연들이 쏟아지니까 이걸 붙잡고 연구를 해보자는 거예요. 과학.
이 과학 중에 물리학이 두드러지지만 이 과학을 응용하는 걸 요새 의학에서도 많이 해요. 짜깁기, 편집. 단백질을 여기다 붙여볼까, 저기다 붙여볼까. 병균 바이러스가 설치니까 치료제 개발을 위해서 여기 한번 붙여봤다가… 여기 붙여서 효과보고 저기 붙여서 효과 있는가 관찰하고. 해서 우연히 딱 맞으면 제약회사에서 떼돈 버는 거죠. 약 개발할 때 단백질 아미노산 촉매를 뭐로 쓰느냐 그 연구를 계속 해요.
바이러스 이거는 너무 작은데 우연이에요.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는 겁니다. 자, 우연을 인간이 다룰 필연으로 바꾼다. 필연이라는 것은 누가 다룬다? 인간이 다룬다. 인간이 다룬다면 이건 인간의 세계에요. 이미 인간이 접수한 세계. 인간이 딱 접수했어요. 마치 나이트클럽 깡패가 접수하듯이 딱 접수한 겁니다.
이렇게 접수하게 되면 이 안에서 인간은 신이 되는 거죠. 인간은 신이 돼요. 신의 맛을 보는 겁니다. 그렇지! 이 맛이지! 신의 맛을 보는 거예요. 정교한 치밀한 인공지능 탑재하고 컴퓨터 계산해서 정확하게 달에 도착, 목성에 도착, 화성에 도착. 실을 바늘구멍 들어가게 하는 그런 정밀함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보다 더 정밀하게 0.01초까지 정밀해야 그 우주선이 목성 표면에 딱 도착할 수 있어요. 그 정도까지 해서 자기가 신이 되는 맛을, 그 쾌감을 즐기는 거예요.
이렇게 우연이 필연이 되게 되면 시간도 우연한 시간에서 필연적으로 미리 내가 장악할 수 있는 미래가 돼요. 내 손에 놀아나는 미래가 된다고요. 미래는 인간이 지금 작업하는 것에 따라서 미래가 확정된다는 것을 목표로 인간은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몇 년 후에 이렇게 되고 몇 년 후에 이렇게 통계적으로 확률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아이디어를 주일 성수에 한번 연결시켜봅시다. 내가 주일을 지키면 구원받을 확률이 높아질까요, 낮아질까요?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일 성수하면. 그러니 인간들은요. 상상을 못했어요. 안식일, 시간이 사람이라는 이 공식(시간=사람)을 그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시간은 우주의 규칙에 관한 것이고 우주의 규칙에 대해 인간은 그 규칙성을 뽑아낼 때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서 시간이 아니라, 인간이 납득되는 간격이 되어야 시간이 돼요. 시간이 간격이 되려면 이것은 항상 규칙적이어야 돼요. 불규칙하면 안돼요. 규칙적이라는 전제하에, 해와 달은 규칙적이라는 전제하에 인간은 그 간격을 캘린더로 정확하게 뽑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자연아, 너는 너 할 일 해라. 너의 흐름을 보고 규칙은 우리가 정한다. 수학적으로 그렇게 정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시편 19편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그다음 3절에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이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언어 없다. 그 다음에 인간 쪽에서 들리는 소리는 없다. 인간 쪽에서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소리가 없는 게 아니고 자기들끼리 통하는 소리는 있다.’ 그 뜻이잖아요. 있는데 그게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는 거예요. 여기 본문에 말씀과.
‘소리가 있다=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들리지는 않지만 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잠언서 8장에 지혜라고 나오지만. 이 세상은 말씀으로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오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으로 모든 세상을 만들었다.
말씀으로 모든 걸 만들었는데, 인간들은 내가 이해를 하고 내가 납득을 해야 그걸 말이라고 언어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한 거예요.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 쌓는 이야기 나오죠. 바벨탑 쌓을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바벨탑 못 쌓게 하는 방법이 뭐냐? 그들끼리 통하는 언어를 주님께서는 통하지 못하게 하도록 각자 의사소통이 안 되도록 만들었어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이 세상을 통합하는 언어가 따로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인간에게 들리지 않는 언어, 말씀, 언약, 그게 이미 존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그 말씀 듣고 싶어요~ 뭐 우리는 그렇게 하잖아요. 우리도 그 말씀 듣고 싶어요.
그 말씀을 아무나 듣는 게 아니고, 가끔씩 누구한테 와요. 누구한테 오느냐 하면 선지자에게 와요. 선지자에게. 열왕기상 22장 15절부터 23절까지 기니까 내가 그걸 압축해서 말씀드리면,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선지자에게 하나님 뜻이 무엇인가를 물었어요.
왕이 물을 때 묻는 대상이 왕이 보기에는 똑같은 그냥 선지자에요. 그러나 묻는 대상을 그들은 잘못 골랐어요. 진짜 선지자와 가짜 선지자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물은 거예요. 그럼 가짜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임금님, 이번에 승리하십니다. 잘 물었어요. 나도 해보니까 승리한다는 계시를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이거는 뭡니까? 가짜 선지자죠.
400명 선지자 중에서 진짜 선지자는 한 명 들어있었어요. 400명 중에서. 그러니까 이건 400대 1이에요. 말은 쉽지만 운동장에 400명 한번 모아보세요. 자기들끼리 왕왕거리면 1명은 목소리도 안 들립니다.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850대 1이에요. 거의 1000명 가까이 되는 중에 엘리야 말이 먹히지를 않아요.
신기한 것은 진짜 선지자가 하는 그 말은 선지자가 말해서 실현되는 게 아니고 이미 실현되었다는 그것을 통보하는 식으로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어제 낮 설교에서 선지자가 바른 말할 때 겁내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어요. 선지자가 그렇게 남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해도 두렵지 않은 이유는 이미 그들은 갇혀있기 때문에. 범인으로 갇혀있어서 빠져나갈 데가 없는 거예요. 왕왕왕거리면서 말해도 그건 전부 다 돌아가는 현실하고 그들의 주장하고 서로 사맛디 아니할 새. 틀리는 거예요. 비현실이에요. 현실적이 아니고 비현실적이에요.
그럼 선지자가 말해서 말한 대로 되는가? 그것도 거짓 선지자에요. 말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이미 되어진 사실을 그냥 통보, 전달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전도할 때는 전도하지 않는 식으로 전도하라는 말이, 제가 말했지만 그런 식이에요. “그거 뭐 너한테 꼭 알려줘야 돼? 뭐 몰라도 돼. 몰라도 되는데, 꼭 알고 싶어? 그러면 아파트 불 나.” 이런 식으로.
불나게 되어 있어요. 우울증 걸린 여자가 해서 불나게 되어 있는데… 그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이러잖아요. 그건 선지자가 어떻게 확률로 때려잡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게 아니에요. 그냥 주께서 알려주는데 미가야 선지자 같은 경우는 “내가 천상회의에 참석했는데 그 회의상 이미 땅땅땅 결론이 나가지고 ‘이번에 왕을 죽이겠다. 이번 전쟁을 통해 죽이자.’ 결론 났어요. 결론 난 것을 나는 그냥 통보했을 뿐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미가야가 한 영을 봤어요. 영. 영이 무슨 영이냐 하면 악한 영, 악마에요. 악마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저 400명 모든 선지자에게 다 들어가서 그들 마음속에 악한 영인 내가 다 들어가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말이 나오도록 내가 조치하겠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못 빠져나오죠. 왜? 악마가 꽉 쥐고 있으니까. 악마가 들어오겠다는데 ‘들어오지 마세요.’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런 말 할 수가 없어요. 일곱 귀신 들어오는데 ‘귀신아, 물러가라’하고 파묘하고 묘지 파야 소용없어요. 이미 들어와 있거든요. 이미.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23절에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었다는 거예요.
시편 42편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건 한번 봐야 돼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 뜻이 뭐에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내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고, 주께서 주는 것을 담아내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그게 제 역할입니다.’ 하는 거예요.
여기서 사슴이 시냇물 찾기를 한다고 또 본인을 여리여리한 사슴 모습으로 상상하지 마세요.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하고 가끔은 이쁜 반점도 있고…이런 거 상상하라고 있는 게 아니고 여기 그냥 목마른 사슴이에요, 목마른 사슴.
제가 젊을 때 본 두꺼운 노래책이 있거든요. 노래책 보면 거기 삽화가 있잖아요. 노래 악보가 있고 위에 작은 삽화가 있는데 삽화에 나온 그림 모두 한결같이 삼각형 머플러를 머리에 쓰고 꼭 저수지 둑 위를 걸어요. 바람은 부는데. 그리고 여자가 바바리를 입었어요. 입었는데 얼굴은 안 보여줘. 머리카락 날리는 것만 보여줘. 그리고 밑에 악보가 쫙 깔려 있어요. 노래하고 삽화하고 어울리는 거죠. 미지의 여자를 생각하라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니까 사슴이란 말이 들어간 걸 보고 자기 자신을 뭐 아주 멋있게 미화하고 있지만, 사실은 바가지 같은 거라고 보면 돼요. 바가지. 빈 바가지. 텅텅 빈 공백이에요. 공백에서 날마다 주님 것으로 채워지는 그것이 지금 내가 존재의 이유가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채워지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수박이나 먹고 이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말씀을 못 먹어서 갈급한 거예요. 말씀이 양식인데. 말씀이 양식이에요.
5절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대목 보면요. 대학교 간사들, 가스펠송하는 밴드 있잖아요. 이 노래 있죠. 애들 선교단체 하는 데에서 부르는 노래. 이 본문 읽고. 이거 외워야 짜장밥 주거든요. 수련회 가서 이걸 외워야.
여기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그 다음에 뭡니까? “찬송하리로다” 이 대목에서 성도가 하나의 자연물이 됩니다. 해와 달과 별이 돼요. 별 하나가 나 하나인가. 너무 또 낭만적인데… 저 꽃잎이 나인가, 이런 거.
인간 자체가 그야말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이게 중요한 이유가요. 성도가 자연의 일부라면 성도가 시간의 일부가 됩니다. 성도 자체가 시간의 일부가 돼요. 그럼 시간, 하나님의 시간은 뭐냐? 안식일이거든요. 아까 제가 일부러 이야기를 안 했는데 안식일 특징이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요. 그래서 접는 것이 가능해요. 1,2,3,4,5,6,7 접어버리고 또 1,2,3,4,5,6,7 접어버리죠.
그러면 성도라 하는 것이 시간의 일부라면 늘 접치죠. 접치게 되어 있다고요. 성도가. 성도=시간의 일부다. 이걸 좀 풀이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시간의 일부다. 그럼 하나님이 주신 시간은 뭐냐? 하나님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의 시간이 예수님이거든요. 왜냐하면 안식일의 주인이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이니까. 그럼 예수님의 일부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성도가 예수님의 지체, 몸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현재 온 우주에 예수님이 한 활동으로 가득 차게 되는 거예요. 가득 찼다면 우리는 그 가득 찬 일의 일부로서 지금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걸 ‘열매’라고 해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가지가 뭘 맺어야 된다? 열매를 맺는다. 또는 ‘추수 때 알곡’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너무나 예속되어 있고 수동적이에요. 일은 주님이 벌여놓고 우리는 주님이 벌인 일의 결과물로 현재 이 공간과 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안식일 준수에요. 안식일 준수. 주일 같은 건 없고요. 안식일 준수에요. 1,2,3,4,5,6,7 할 때 1,2,3,4,5,6일 동안 한 일은 7일에 한 그 일에 대해서 종속되어 있는 거예요. ‘안식일은 언제냐’가 구약이라면 ‘안식일은 누구냐’가 예수님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안식일 때 뭘 하느냐? 민수기 보면 안식일에 주님 앞에 제사를 거나하게 해요. 자, 제사를 또 설명해야 되겠죠. ‘제사란 하나님의 양식’이에요. 음식입니다. 하나님이 드시는 음식이 제사에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제사 안에서 하나님은 식사하십니다.’
그런데 식사할 때 혼자하면 맛이 없잖아요. 식사는 식구끼리 해야 되죠. 제사의 식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천사들도 포함되죠. 이 아들이 데려온 양자들이 있어요. 그게 오늘날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이미 완료된 제사에 합류하게 된 사람들이에요.
이걸 가지고 안동 권씨 제사. 거나하게 벌이죠. 회비 모으고 나랏돈으로 문화공보부에서 예산 내려와서 사당 앞에서 하는 거. 안동에 유명한 서원 있죠. 안동 그 근처에 도산서원. 하여튼 그날 되면 문공부에서 와요. 전국에 있는 안동의 유지는 다 오고요. 도산서원에 다 와요. 내가 대대로 내려오는 안동 권씨 된 게 자랑스러워서.
이게 천국의 요건이에요. 예수님과 한 패밀리, 가족이 되는 거예요. 가족이. 거기서 주님이 식사를 한다니까요. 그 제사 연기를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는 뜻으로 나누어질 때 그게 화목이에요. 화목. 야야 먹어, 먹어. 내가 먹으라 했잖아. 마음껏 먹어. 그게 화목제에요. 하나님이 주신 제사가 마무리되었다는 증거로서 거기에 같이 참여해서 제물을 하나씩 뜯어먹는 그 모임. 화목제입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주께서 죽으심으로 화목제를 이루셨다고 했어요 (3:25). 요한일서에도 나와 있죠. 4장 10절에 화목제물. 화목제물이 되었어요. 그냥 먹어. 내가 준다니까. 내가 주는 것은 영생의 떡이요. 먹어, 먹어. 그게 바로 하나님이 계획한 거예요. 그날이 언제라고요? 1,2,3,4,5,6,7.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의 절기는 안식일입니다. 모든 절기는 노동을 쉬어야 돼요. 모든 일을 쉬는 겁니다.
그러면 1,2,3,4,5,6일 동안 하는 건 뭐냐? 주님께서 그 안식일에 기쁘다는 효과로서 자기 백성을 세상에 보내죠. 옛날에는 농사지었으니까 농사일을 하게 합니다. 농사일을 하게 되면 거기에 수확물이 있을 거잖아요. 그거 들고 또 오는 거예요. 안식일 되면 오는 겁니다. 이게 다 주님 은혜고 주님 덕분입니다. 이렇게 되죠.
그러면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안식일의 확장, 안식일 제도의 확장으로 뭐가 이루어지는가? 그다음부터 모든 언약 속에 그게 다 녹아들어가 있는 거예요. 율법 안에 들어갔죠. 창세기에 있는 안식일이 율법의 안식일로 되죠. 십계명 제4계명에 들어가잖아요.
그리고 다윗언약에 성전 생기죠. 성전 속에 안식일을 정기화시키죠. 매일같이 안식일을 정기화시키는 겁니다. 물론 그땐 안식일이 있었죠. 그리고 에스겔 새 성전에서는 안식일에 왕이 특별히 거기에 참여해서 그때는 제사장 주도하는 게 아니라 임금님 주도로 새 성전 짓는 안식일 그날이 올 것이다, 라고 해요.
그날에 안식일이 새 성전에서 이루어지게 되면 뭐가 나오느냐? 그 성전에서 ‘드디어 성전의 제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기뻐하세요!’ 하면서 나오는 게 있어요. 성전 문에서. 흘러나오는 게 있어요. 성전의 물이 나와요. 성전에서 물이 나와요. 처음에는 얕지만 점점 더 깊어지죠. 이건 스스로 헤엄친다기 보다도 그 물에 잠긴다는 의미가 있어서 헤엄을 못 쳐요. 너무 깊어서.
그러니까 성전이라는 것은 시간의 공간화. 어렵게 이야기해서 시간이 공간적으로 묶였다고 볼 수 있어요. 보이지 않는 시간이 보이는 공간으로 응축되었다. 함축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시간의 공간화, 공간의 인물화. 인물화 된 게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죠. 내가 성전의 주인공이다. 안식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예수님으로 마감됩니다.
요한복음 7장 한번 봅시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꼭 거짓말하는 느낌이 들어서…이게 맞는데. 요한복음 7장 37절,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여기서 시간이 개입됩니다.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 지기 전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죄의 몸으로 왔기 때문에 시간의 저촉을 받아요, 안 받아요? 시간의 저촉을 받아요. 한 때, 두 때, 반 때 저촉을 받고 사흘이라는 기간 다 저촉 받아요. 하지만 십자가의 영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만약 십자가 지시면 성령이 그 다음부턴 계속해서 생수 넘치듯이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거예요. 누구한테? 나의 가족에게.
선악과는 훼손되었고 남아 있는 게 생명나무잖아요. 생명나무를 생명의 떡으로 제공하기 위해서 불이라는 것을 타넘고 주께서 이 땅에 오셨다 이 말이죠. 우리 쪽에서는 못 가요. 주님께서 불을 타넘고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으시는데 그 안에서 주님께서 안식이라는 것을 다 이루면 성사하게 되면 주님의 가족이 되고 가족이 되었다는 뜻으로 그 사람 속에서 성령이 나오는 거예요.
성령을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하여튼 이 존재는 소유 때문에 말썽이에요. 뭐 성령이고 십자가고 전부 다 지가 소유하려고 해요. 소유하는 게 아니고 갖고 노는 거라니까요. 성령이 나오고 복음이 나오는 것이지, 복음을 갖는 게 아니에요. 복음을 갖는다는 것은 아직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한테 전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뭐 있어야 전도를 하지, 자기 것이 없는데 뭘 전도를 해요. 그러나 빌립 집사가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날 때는 성령께서 그렇게 말씀이 터져 나오도록 그 현장을 주선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선교, 전도를 할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결과적으로 ‘아, 그걸 전도라 하는구나.’ ‘이걸 선교라 하는구나.’하고 결과적으로 파악하는 겁니다. 주께서 사용하시니까요.
그러니까 선도, 전교를 하고 난 뒤에 누가 놀래느냐 하면 전도 받은 사람이 놀라는 게 아니고 본인이 놀라죠. 앞으로 나 시키지 마세요. 그렇게 못합니다. 앞으로는 못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질겁할 거예요. 하다보니까 주께서 그런 일을 시켰지, 두 번 다시 하라 하면 다시는 그 일을 못하죠. 그러니까 또 시키는 거죠.
여기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시간이 인간이 되고 인간 속에서 시간이 나오는 거예요. 뒤에 시간은 뭐냐? 다 이루었다가 되죠. 드디어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어요. 오늘이 뭐 2024년 그게 의미가 없다고요. 이 시간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 진 지 2000년 지났는데.” “이틀인데? 이틀밖에 안됐는데.”
위에처럼 말하면 이해하기 곤란하니까 시간을 이렇게 하면 이해하기 쉬워요. 시간1이 인간 속에 왔잖아요. 그러면 시간1 말고 인간 속에 온 시간2는 위로 올라가요. 위로 올라가서 먹구름처럼 밑의 시간까지 전체 다 덮어버려요. 전체 시간이. 아래쪽부터해서 위쪽까지 다 덮어버린다고요. 캠핑카 있죠. 캠핑카 위에 뚜껑 비슷한 게 있어서 앞까지 다 덮잖아요. 운전대까지 다 덮잖아요. 다 덮어버리죠.
그러니까 위에서 보면 앞뒤가 없어요. 옛날에도 다 이루었고 지금도 다 이루었고 앞으로도 그냥 다 이루어진 거예요. 이걸 to부정사로 이야기해서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해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른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에베소서 2장 6절과 7절, 8절을 보면 이미 너희를 하늘 우편에 앉히셨느니라.
이건 캠핑카 지붕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캠핑카 지붕에서. 캠핑카 지붕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차가 있는데 차바퀴가 있고 운전대 있다면 지붕 위에 실려 있는 캠핑도구 있잖아요. 어딜 가도 이게 쏟아져요. 나중에 도착하면 쏟아질 거예요. 그걸 짊어지고 있는 거예요. 다 이루었음을 짊어지고 가는 거예요, 성도는.
다만 그럼 앞으로 뭐하면 됩니까? 우리는 시간에 예속되어 있다니까요. 주님께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뭐합니까’ 라는 그것을 우리가 할 게 아니에요. 우리가 그걸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매일같이 아침에 눈만 뜨면 계획 잡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스케줄 잡는 것부터 시작하죠.
그러면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스케줄 잡으라 해. 목표 잡고 기대 잡으면 하루 종일 위에서 쏟아져서 그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무의미한 게 우리 쪽에서 만들어져야 무의미가 의미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열심히 계획 세우고 열심히 스케줄 짜세요.
이게 계획대로 되어도 의미가 없고요. 안 돼도 의미가 없어요. 시어머니가 요양병원 가면 얼마나 좋겠노. 가니 뭐합니까. 가도 뭐 지금은 좋다 싶지만, 나중엔 아니죠. 그럼 지금 뭐야. 그때가 또 그립네. 뭔가 어떤… 이땐 진짜 탕수육 먹으면 좋겠다. 탕수육 먹고 난 뒤에는 아이, 뭐야 이거. 삼만 사천 원 이거 돈이 아깝다.
사람은 늘 그래요. 시작할 때 계획 잡고 욕망 채웠다고 생각하지만 지나보면 그게 무의미해요. 무의미함을 아는 것은 이미 의미를 알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시간에 예속되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은 주님과 함께 하늘에 있기 때문에 다만 남은 육신가지고 어떻게 주님께서 나 같은 인간을 이 더러운 인간을 어떤 식으로 구원했는가, 더러운 짓, 자기밖에 모르는 우상숭배 짓이 어떤 게 아직도 남아있는가 하는 그 점을 계속해서 지금 주님과 한 가족이 되어가지고 같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선교를 보이는 우리 이름으로 전도를 주께서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주의 증인으로서의 삶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간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참 우리가 시간과 해와 달은 알고 있는데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게 있었습니다. 그래놓고 우리는 해와 달보다 우리가 우수하다고 자부했습니다. 바보같이 엉터리같이 우리 자신만 몰랐던 그 일을 자연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우리가 십자가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사오니 어디를 가도 주와 함께 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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