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01
- 복음과 신학의 차이
24,06,17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부터는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라는 책을 교제로 하겠는데, 대장간에서 2004년도에 이 책이 출판되었으니까, 벌써 20년이나 되었다는 겁니다. 먼저 머리말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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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신론이 없이는 신학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론에서 시작하는 것은 진정한 복음적 신학이 아니라, 철학의 아류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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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인가? 복음인가?
신학은 '신(神)+학(學)' 이란 것인데, 그래서 신론, 즉 신에 대한 정립된 체계가 없다고 하면 신학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당연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신이 있어야 합니까? 복음이 있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이 성립될 수 있는데, 달리 말하면 "인간의 신에 대한 인식이 우선인가? 아니면 복음이 우선인가?"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신명기 29장 28절을 보겠습니다.
(신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
여기에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복음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고, 그리고 그 밑에는 인간들이 있는데, 신명기 29장 29절에서는 그 인간들을 둘로 나눈다는 겁니다. 즉 우리와 우리자손, 그리고 그 외에 모든 인간이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오묘한 일이 이 지상에서는 우리와 우리자손에게만 주어졌는데, 그러니 그 외의 모든 인간에게는 주어지지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오묘함이, 지상에 있는 우리와 우리자손,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인간의 사이를 그만 잘라버린다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 라는 것은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이고, '우리자손'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란 겁니다. 그렇게 오묘한 일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타났다고 하면, 그들이 안 것이 아니고 나타났다는 말이죠.
*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 !!
그런데 그 이스라엘 자손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만 멸망을 당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오묘한 일이 인간을 멸망시킨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사실을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은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오묘함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왜 멸망했는지를 알아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인데, 그들이 우상을 섬겼다는 말이죠. 바알과 아세라 등이 있는데, 그 우상을 요즘 말로 한 글자로 표현하면 '신'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상에서 나온 학문이 곧 신론이 된다는 말이죠. 즉 신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으로 인해서, 그들도 망하고, 그 외의 모든 인간들도 다 망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망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이죠.
* 망하지 않는 복음 !!
그렇다면 망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곧 복음이라는 겁니다. 왜 망하지 않는고 하니, 모든 말씀에 그 안에 응축되어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이사야서 40장 8절에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라고 하는데, 그 말씀의 응축이 곧 복음이라는 겁니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그것이 하나님의 오묘함이고, 그 오묘함이 나타나면 인간들은 감당하지 못해서, 인간들은 그 복음 앞에서 다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멸망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 응축된 분인데,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새끼친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왜 굳이 '새끼친다' 라는 표현을 해야하는고 하니, 오늘날 우리의 몸이 어디서 모델이 되어서 주어졌습니까? 아담의 몸에서 주어졌다는 겁니다. 아담의 몸에서 말이죠.
* 새끼를 치다 !!
다시 말해서, 아담 안에서, 이미 아담의 범죄 속에서 우리를 새끼쳤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고 하니,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서 새끼를 치는 자들이 또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죠.
지금 이게 하나하나 따져보면 전혀 어렵지 않은데, 그렇지요? 우리의 몸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아담에게서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담이 망했다고 하면 우리도 당연히 망해야 하는데, 죽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아담의 몸에서의 인생을 끝나도, 다른 몸이 준비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죽기를 사모해야 할까요? 하지 말아야 할까요? 죽기를 사모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사도바울의 소원이었는데, 그래서 어서 죽어서 주님을 만나보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빌립보서 1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그런데 "죽는 것이 소원이다" 라는 것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이 몸이 복음을 방해한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 복음은, 하나님의 오묘한 것 !!
복음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오묘한 것인데, 그런데 그 복음을 자기 몸이 방해를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육신이 말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게 팩트인데, 우리가 지금 이런 형편에 놓여있다는 것이죠.
이번에 포항에서 트로트 가수인 전유진이 콘서트를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티켓을 구매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일요일이란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 갈 것인지, 콘서트에 갈 것인지 고민이 된다는 겁니다. 너무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까?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말이죠(ㅋㅋ).
* 삼손의 경우에 !!
주님의 오묘함이 인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는데, 삼손의 경우에, 그의 머리카락 속에는 복음이 들어있었는데, 그런데 그게 바깥으로 나올 땐 완력, 즉 강한 힘으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는데, 오묘한 것은 누구에게 속합니까? 여호와께 속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나타날 때는 이스라엘에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인데, 그 사사 속에 오묘함이 스며드는데, 삼손의 경우에는 강한 힘으로 나타나고, 그런데 그 강한 힘은 머리카락에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삼손 스스로 밝혀내었습니까? 밝혀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힘이 있어서 나오기는 나는데, 겉모습을 아무리 살펴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상식적으로 완력은 근육에서 나오는데, 그게 아니란 겁니다. 그래서 "힘이 나오지 않아야 하는데 힘이 나왔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묘하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권사님이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런데 천사들이 입구에 서서 "권사님, 구원의 힙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라고 묻는다고 하면, 그러면 권사님은 뭐라고 하실 건가요? 권사님에게서 그런 힘이 나올 만한 곳이 있습니까? 나온다고 하면 그게 어디냐는 겁니다.
* 오묘함은 어린양의 피에 !!
어제 설교시간에 이야기를 했는데, 도대체 오묘한 일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게 오묘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 땅에서 행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미 다 이루신 피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구원의 능력이 너무나도 심오해서, 사람들은 '어리석다' 라고 판정을 내리고, 예수님을 십자가가 못박아 죽였다는 겁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십자가를 전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오묘한 것이 그 십자가, 즉 복음 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우리의 가치는 우리의 기준으로 따지면 사실 별 것이 없는데, 그래서 허무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오묘함이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무의미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놀랍게도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가치를 지키려고 하면 의미가 없는데, 그런데 오묘한 것이 스며들어서 자기가 어떻게 설명하고 설득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한다고 하면, 우리는 귀하고도 귀한 존재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 즉 복음 때문에 말이죠.
* 복음 외에 다른 것은 전혀 필요치 않아 !!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신론을 따지고 할 때, 구원받은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그들의 입에서 일체 다른 것은 나오지 않고 '피' 복음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다른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이죠.
이 책 전체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말하는 신, 그 신은 곧 우상인데, 그래서 오묘한 것은 밝혀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삼손의 경우에도, 자기 머리카락에 힘이 있었지만, 그만 여자의 넘어가서 머리카락이 다 밀리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렇게 머리카락은 밀렸지만, 그런데 무엇은 뽑아내지 못했습니까? 머리카락의 모근은 건드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삼손이 눈이 뽑히고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도, 모근을 통해서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고 있었다는 말이죠.
이때 삼손은 깨달았는데, 자기가 설치는 게 아니고, 자기에게 심겨진 것이 스스로 재생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힘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가 귀한 존재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여자를 꼬드기고 하던 그 '나'를 하나님께서는 방해물로 여기고 죽여버리신다는 말이죠.
그리고는 제대로 복음이 나타나는 나실인으로, 즉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자의 사명을 삼손 자신이 아닌 하나님 손에서 다 성취하신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제목을 머리카락의 '모근'으로 삼았으면 좋겠는데, 여러분의 머리카락은 다들 안녕하십니까? (ㅋㅋ)
다시 교재를 보겠습니다. 여기에 "그러나 신론에서 시작하는 것은 진정한 복음적 신학이 아니라, 철학의 아류에 불과합니다" 되어있는데, 하여튼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 철학이라는 겁니다. 혼과 영과 육도 그렇고 말이죠.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은 오히려 복음을 방해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오묘한 것을 찾아낼 수가 없다는 말이죠. 오직 성령이 오셔서 알려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죽어야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전제로 해서 알려준다는 말이죠. 그러한 사람은 자기가 바로 복음의 방해꾼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데, 그게 바로 성령이 찾아온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슬프게 들을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슬픔과 기쁨을 초월하는,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상의 기쁨이라는 말이죠.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넘어선다는 겁니다. 행복이 없어도 행복한 것, 그런 상태라는 말이죠.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 최소한 이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여기 교재에 "기존의 신학은 신론과 인간론을 마주 세워놓고 그 가운데서 성경적 개념을 세운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나는 인간 저쪽은 하나님,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저쪽의 세계로 갈 수 있겠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목표로 해서 신학이 구성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신과 인간을 인식하는 그 근거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냐는 말이죠. 그것은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사유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겁니다. 즉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신론이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론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기초로 해서 서로 연결을 하고, 그리고 성경말씀을 차용해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맞다" 라고 하면서 신학교와 교회에서 가르치니, 그것은 정죄를 받아서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돌아오는 것은 '나' 라는 것인데,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 십자가 VS 삼위일체 !!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은 십자가인데, 참으로 심플하다는 말이죠. 인간의 그 어떤 능력도 십자가의 공로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기존의 신학은 십자가가 아닌 삼위일체인데, 이 삼위일체 이론에 십자가를 집어넣으면 될 것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십자가는 삼위일체 이론에 포함될 수 없는데, 오히려 십자가가 삼위일체 이론을 부수어 버린다는 겁니다. 삼위일체가 마치 사람을 구원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비웃는 짓이라는 말이죠.
제가 왜 삼위일체 이론을 언급하는고 하니,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로 공인되면서 로마가 전 시민들을 기독교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 곧 삼위일체 이론이라는 겁니다. 그 이론을 가르쳐서 사람들이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은 것으로 해주겠다고, 교회에서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의 능력의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겁니다. 즉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석을 하면,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것이 과연 중세 때의 이야기입니까? 요즘 교회는 어떻습니까? 도대체 교회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목사의 설교와 그 제도가 어떠하냐는 말이죠. 그들이 "여러분, 교회는 필요치 않습니다. 복음만 믿으면 됩니다" 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옛날 중세 때나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이죠.
"여러분, 지금 고생을 많이 하는데 죽어서는 천국에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는 천국에 보내주는 비밀을 알려드립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좋은 교회에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라고, 기존 교회에서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구원에 환장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 빙긋이 웃는 악마 !!
여기 교재에 "악마는 인간들의 논리적 게임이나 거기에 동원된 지적 장난감들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악마는 기존 교회가 하는 짓거리들을 보고 어떻게 반응을 한다는 겁니까? 싱긋이 웃고 있다는 말이죠.
악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잘 하고 있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이 살려고 하는 것은 다 복음의 방해물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르침을 얻고 하면, 그것은 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바알 종교의 교인이 된다는 것이죠.
여기서 교재의 머리말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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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바는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모든 것을 죄악으로 파악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책의 내용은 중국의 목회자들에게 강의한 것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저의 강의를 녹취하는데 수고하신 박병규 전도사님, 또한 이장우, 서경수, 구득영, 손무성, 이창섭 목사님, 그리고 책이 출간되도록 도와주신 조규현 장로님과 박기삼 사장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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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중국에 초청한 것은 정석훈 목사님이고, 그리고 제법 비용을 들여서 통역을 하실 분을 모시고 왔다는 겁니다. 그게 보통 일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에 전도사님과 여러 목사님들과 장로님이 나오는데, 지금 우리와 계속해서 만남이 이루어지는 분도 있고, 어디에 계신지 모르는 분도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대장간 출판사의 박기삼 사장님은 작년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마지막에는 복음이 아닌 동양철학에 매료가 되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라는 범주보다 동양철학의 범주가 더 크다고 여기고, 거기서 자유롭게 되기를 원했다는 것이죠.
기독교 안에 복음이 있고 그 복음을 알았으니, 이제 다른 종교까지도 섭렵해서 자기가 천국에 가는데 도움을 받고자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모든 것이 죄라는 말이죠.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선 얼마든지 동양철학을 공부하시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야" 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오묘한 것이 온 것이 아니고, 자기가 오묘한 것을 찾아보려고 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게 인간의 지식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만약에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묘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 '신학' 이라는 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용납되는가?
지금부터 제가 하려는 것은 "조직신학, 즉 신학이라는 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용납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보자는 말이죠. 아까 한 것을 다시 해보면, 오묘한 것, 이것은 신명기 29장 29절에 의해서 현재의 모세와 함께 있는 '우리', 그리고 나중에 이스라엘을 이루는 '우리 자손' 이라는 겁니다.
(신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이루게 되는데, 그러니까 주님의 오묘한 것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계속해서 개입했고 활동을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말씀을 통해서 자기 구원에 신경을 쓰는 것은 반칙이고, 그 오묘함이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 속으로 스며들어왔는지, 그것을 살펴보자는 겁니다.
* 주님의 오묘함이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 속에?
그게 잘 나와있는 것이 특히 북이스라엘의 역사인데, 어떻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좀 복잡해지지요? 북이스라엘의 왕이 19명인데, 남쪽의 경우에는 20명인데, 쿠데타를 일으킨 북쪽 아합 왕의 딸인 아달랴를 빼면 역시 19명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에 남북으로 나누어졌는데, 각각 다른 나라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제사장 나라인데, 그것이 출애굽기 19장 6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지만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둘이 될 필요가 있을까요? 율법, 즉 하나님의 오묘함이 나타날 때, 나라는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제일 끝 부분에 나타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여기서 갈라디아서 3장 26절에서 28절을 보겠습니다.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26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고 하는데, 이것을 어제 낮 시간에 잠수정으로 설명을 해드렸지 싶은데 말이죠. 잠수정 자체라는 것인데, 즉 '예수 안' 이라는 하나의 체계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28절 끝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나라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이죠. 그러면 각자를 쳐다봐야 합니까? 그 하나를 쳐다봐야 합니까? 늘 하나만 쳐다보면 되는데, 이게 오묘함의 결실이라는 겁니다.
* 구원은 곧 열매 !!
성경에서, 특히 신약에서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열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표현자체도 참 오묘한데, 열매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바로 열매가 맺힌 것을 따는 식으로 추수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가라지 비유' 라는 것인데, 여기서 추수꾼은 천사들로서, 알곡은 천국으로 보내고 가라지는 지옥으로 보낸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열매로서 추수를 당한다는 겁니다.
(마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게 주님의 구원방식인데, 그러면 이러한 열매 맺힘에 대해서 인간이나 악마가 방해를 놓을 수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열매는 저절로 열리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주님의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우리도 좀 보탬이 되면 좋지 않겠느냐고 하신다면, 즉 말씀도 지키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그렇게 자기가 노력해서 성화가 되면 하나님의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구원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든지 들 수가 있는데, 여러분도 그런 생각이 들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에베소서 4장 8절에 의하면 그게 안 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
여기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인간은 이미 악마에게 사로잡혀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전쟁을 해서, 뱀의 후손의 자손인 우리를 빼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 아무리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하고 봉사를 하고 충성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그 자체가 이미 악마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주인보다 강한 도둑이 와서 주인을 묶어놓고 세간을 가지고 가듯이, 구원도 역시 그러하다는 말이죠.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다시 말해서, 우리를 꽁꽁 묶고 있는 악마를 예수님이 이겼을 때, 비로소 추수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고 봉사한다면서 돌아다닌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사로잡힌 자를 주님이 사로잡아서, 즉 주님이 우리를 전리품으로 가지고 가면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의 열매로서 구원이 된 자들은, 그 다음부터 어떻게 나올까요? 자기 구원을 자랑할까요? 아니면 악마에 속했던 자기를 끄집어 내주신 주님을 자랑할까요? 참으로 간단한 문제인데,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이죠. 그게 사도바울이 보낸 편지의 주된 내용인데, 바로 그 이야기라는 겁니다.
* 지식의 권력에 취해있는 교회 !!
그런데 교회가 십자가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 즉 장사라는 말이죠. 그것을 두고 '지식의 권력' 이라고 하는데, 즉 "내가 아니까 내 밑에 줄 서라" 라는 겁니다.
이 권력을 다른 말로 하면 힘인데, 그 힘이 주는 매력에 목회자를 비롯해서 장로들과 교인들이 다 빠져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소유가 없으면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데, 그래서 소유가 없으면 그 마지막 길은 자살이라는 겁니다.
물론 돈이 없어서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단체에 들어가고 하는 것, 그래서 자기를 죽이는 자살이든 남을 죽이는 살인이든 간에 그 모든 것은 소유에 관한 것이란 말이죠. 소유가 자기 존재의 실제 내용물이라는 겁니다.
계급사회라고 하는 것은 힘에 의해서 계층화가 된 것인데, 그게 인간의 계급사회라는 말이죠. 인간에게 계급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힘이 있는 곳에 줄을 서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계급이라는 사다리가 마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을 알면서 동시에 세상도 같이 알아야 하는데, 이 세상이 어떤 구조로 짜여져 있는지를 말이죠. 이런 것을 모르면 자기가 줄을 서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아니 오히려 잘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면서 !!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자, 그게 바로 왕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면서, 이게 마치 안에 치즈크림이 들어있는 길다란 빵과도 같다는 겁니다. 바게트 빵 안에 치즈크림이 들어있다고 보면 되는데, 그것을 둘로 쪼개면 그러면 1이 되고 2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께선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 삼손의 모근을 재생하신다는 겁니다. 즉 분질러지면서 안에 있는 내용물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다는 말이죠. 그 내용물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다윗언약인데, 다윗의 등불이 계속해서 있는 쪽이 남유다가 되고, 없는 쪽이 북이스라엘이 된다는 겁니다.
*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여로보암, 그러나 !!
이스라엘이 12지파인데, 이 중에서 무려 10지파가 북쪽에 속한다는 말이죠. 언약이고 복음이고 간에, 잘 먹고 잘 사는 쪽으로 붙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북쪽의 여로보암이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말이죠.
솔로몬이 세금도 엄청 때리고 강제노역도 많이 시켰는데, 그래서 여로보암이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세금과 사역면제를 공약으로 내거니, 다들 그쪽으로 몰려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치적 안정을 취하면서 22년이나 다스렸는데,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말이죠. 하지만 성경은 다른 평가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북쪽 10지파에게도 언약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제단이 있는 곳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제단은 북쪽에는 없고 남쪽의 예루살렘에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절기가 되면 자꾸만 이들이 남쪽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니, 그것을 여로보암이 막는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로 제단을 만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산당을 짓고 레위인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는다는 것이죠. 또한 8월 15일을 절기로 정해서 남쪽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는데, 그게 열왕기상 12장 28절에서 33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왕상 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왕상 12: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왕상 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왕상 12:31)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왕상 12:32) 팔월 곧 그 달 십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왕상 12:33)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여로보암이 자기의 힘으로 이렇게 했는데, 계층구조, 즉 사회 힘의 집결체가 국가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백성들이 반대를 했습니까? 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인데, 자기 행복을 보장해주면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자기는 자기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오묘한 것은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원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오묘한 것, 그것이 신약에서는 복음인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언약이었고 말이죠.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다만 자기들에게 밥을 먹여주어야 언약이고 복음이라는 겁니다.
지금부터 북쪽 이스라엘의 19명의 왕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는데, 그러면서 이게 신을 이야기하는 신학인지, 그게 아니라면 오묘한 것이 개입해서 나타나는 역사적인 사실인지, 그것을 한 번 제대로 알아보자는 말이죠.
* 여로보암(1)과 나답(2) 왕 !!
첫 번째 여로보암은 22년을 왕위에 있었는데, 그의 아들 아비야는 병이 들어서 죽고, 다음인 나답이 그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왕조가 형성되는데, 자식이 세습을 하면 그게 왕조라는 말이죠. 그러니 왕조가 오래간다는 것은 그만큼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나라도 안정적이었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답은 왕이 되지 2년 만에 바아사에게 암살되고 마는데, 왕조가 아버지와 아들로서 그만 끝나고 만다는 것이죠. 이것이 1차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데, 북쪽은 총 8번의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남쪽은 아달랴의 쿠데타가 1번 있었고 말이죠.
(왕상 15:25) 유다 왕 아사 제이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왕상 15:26)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왕상 15:27)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저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저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왕상 15:28) 유다 왕 아사 제삼년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왕상 15:29)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 종 실로 사람 아히야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왕상 15:30)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시킨 일을 인함이었더라
그런데 이 나답이 바아사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그냥 한 인간의 욕심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이게 실로 출신의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서 이미 예언이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14장 14절에 나오는데 말이죠.
(왕상 14: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위에 한 왕을 일으키신즉 저가 그 날에 여로보암의 집을 끊어 버리리라 어느 때냐 곧 이제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오묘함이 개입하게 되니, 여로보암의 왕조 자체가 그만 무너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성취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하면 인간의 역사가 누구 손에 달려있다는 겁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삶은 누구 손에 달려있습니까? 역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하루하루의 삶이 말씀대로 된다는 것이죠. 자기가 신학을 공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말씀대로 된다는 겁니다.
* 바아사(3)와 엘라(4) 왕 !!
그 다음의 바아사의 경우에는, 그는 24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그런데 16장에 보면 선지자 예후가 나타나서, 즉 하나님의 오묘함이 개입을 하는데, 선지자 예후가 뭐라고 합니까? 13절에 보면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왕상 16:3)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그렇게 해서 바아사가 15년 동안 왕으로 있다가 죽고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는데, 그는 2년 동안 왕으로 있다가, 왕궁을 지키던 시므리가 일으킨 2차 쿠데타로 암살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16장 7절과 그 이하에 나온다는 말이죠.
(왕상 16:7)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에게 임하사 바아사와 그 집을 꾸짖으심은 저가 여로보암의 집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 손의 소위로 여호와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며 또 그 집을 쳤음이더라 …
(왕상 16:11) 시므리가 왕이 되어 그 위에 오를 때에 바아사의 온 집을 죽이되 남자는 그 족속이든지 그 친구든지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왕상 16:12)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후로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말씀 같이 되었으니
(왕상 16:13) 이는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 아들 엘라의 죄를 인함이라 저희가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그러니 이 세상에서 진짜로 활동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인간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인데, 여기서 신학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개입은 인간을 죽이기 때문에 말이죠. 우리도 결국은 죽게 되는데,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죽음은 아담의 범죄함을 인함이라" 라는 것인데, 그것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교통사고로 죽던지 아니면 늙어서 죽던지, 죽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그것을 북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면 된다는 겁니다.
* 시므리(5) 왕 !!
다섯 번째로 시므리가 왕이 되는데, 그는 7일 동안의 왕이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의 모반소식을 듣고 남쪽 깁브돈의 전쟁터에 나가있던 군사령관 오므리가 말을 돌려서 시므리가 있는 디르사 왕궁으로 오게 되는데, 그것을 보고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만 자살을 하고 만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그를 죽이셨는데, 왜냐하면 그가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 범죄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을 열왕기상 16장 19절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라고, 그렇게 기록해놓고 있다는 겁니다.
(왕상 16:19) 이는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그렇다면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상숭배라는 말이죠. 왜 우상을 섬깁니까? 그것은 백성들이 좋아하기 때문인데, 그러면 백성들은 왜 좋아합니까? 힘이 가지기 위함인데, 힘을 왜 가지려고 합니까? 힘이 있어야 '나' 라는 존재가 성립한다는 겁니다. 왜 존재하려고 합니까? 자기는 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 오므리(6) 왕 !!
이 오므리는 정치를 잘해서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그래서 이 '오므리 왕조'는 제법 오래간다는 겁니다. 그는 1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통치했는데, 그러면서 그는 수도를 불에 타버린 디르사에서 적들을 방어하기에 용이한 사마리아로 옮겼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백성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16장 25절에 보면,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왕상 16:25)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 아합(7) 왕 !!
이 오므리의 아들이 그 유명한 아합 왕인데, 즉 "오므리(12년), 아합(22년), 아하시야(2년), 여호람(12년)", 그렇게 4대가 왕조를 이루는데, 이것을 '오므리 왕조', 혹은 '아합 왕조' 라고 한다는 겁니다. 모두 48년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은 어떻습니까? 30절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아버지보다 더하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악의 경쟁시대에 돌입되었다는 말이죠.
(왕상 16: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물론 백성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는데, 온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도록 했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아무리 우상을 좋아해도 금지시켜야 하는데, 그런데 아합은 거기에 동조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아합의 영부인이 유명한데, 이세벨이라는 겁니다. 사마리아 왕궁에 바알신전을 세웠다는 말이죠.
이 아합은 전쟁터에 나가서 적군이 무심코 쏜 화살에 맞아서 그만 죽고 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는 겁니다. 화살이 아합을 찾아와서 죽였다는 것이죠. 그의 악행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나봇의 포도원 사건도 있고 말이죠.
* 아하사야(8) 왕 !!
그 다음 왕이 아하사야인데, 그는 2년을 왕으로 있다가 그만 난간에서 떨어져서 죽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난간에서 떨어졌을 때,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찾아갔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당시에 이미 온 나라가 우상에게 젖어들었음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을 섬겼을까요? 우상에는 언약이 없는데, 즉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언약이 좋을까요? 지성이면 감천이 좋을까요? 인간들은 당연히 언약이 아닌 후자를 택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행한 대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바알 신인데, 그러니 인간은 당연히 자기가 행한 것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신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 어떤 인간이라도, 자기 행함이 무시당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일의 열매인데, 즉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그 누구라도 구원받을 만한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구원은 그냥 주어진다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자기는 완전히 개무시를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 여호람(9) 왕 !!
이제 아홉 번째로 여호람인데, 아합의 아들로서, 형이 난간에서 떨어져 죽자 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왕인고 하니, 열왕기하 3장 2절에 보면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가 그 아비의 만든 바알의 주상을 제하였음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왕하 3:1) 유다 왕 여호사밧의 십팔년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이 년을 치리하니라
(왕하 3:2)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가 그 아비의 만든 바알의 주상을 제하였음이라
(왕하 3:3) 그러나 저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그도 악을 행하기는 행하였는데, 그의 부모인 아합 왕처럼 악하게 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제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든 기준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오묘한 것이 나타나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바알의 주상만을 제거해도 하나님께서는 덜 악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를 해주신다는 겁니다. 물론 그가 말씀대로 지켜 행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 예후(10) 왕 !!
이것으로 오므리 왕조는 끝이 나고, 그 다음에는 예후 왕조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열왕기하 10장 31절에 보면 그의 평가가 나오는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왕하 10:31)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 예후는 북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인데,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과 전투를 하다가 엘리사가 보낸 소년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고 말머리를 돌려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므리 왕조를 완전히 박살을 내었는데, 바알을 섬기던 선지자들을 다 척결하고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힘을 모으기 위해서 여호와를 이용한 것인데, 이것은 마치 "한국교회는 썩었다. 개혁해야 한다" 라고 하는 목사의 말에 교인들이 속아넘어가는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교인들은 "진짜 주의 종이 왔구나" 라고 하지만, 그것은 전임자를 공격함으로서 자기의 자기를 확고히 하려는 술책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 !!
이 예후가 통치를 시작하면서 예후 왕조를 이루게 되는데, "예후(28년), 여호아하스(17년), 요아스(16년), 여로보암 2세(41년), 스가랴(6개월)", 그렇게 해서 5대를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102년인데, 그러니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를 합치면 150년이 되는데,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두 개의 기둥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 여호아하스(11) 왕 !!
예후 다음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인데, 그도 역시 여로보암의 죄를 좇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징벌로서, 아람의 하사엘과 그의 아들인 벤하닷으로 하여금 북이스라엘을 공격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열왕기하 13장 7절에 보면, "마병 오십과 병거 십 승과 보병 일만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 라고 하는데, 스스로 자립할 수가 있는 힘을 아람군대가 다 빼앗아 버렸다는 말이죠.
(왕하 13:7)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진멸하여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과 병거 십 승과 보병 일만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면 왜 후대의 왕들이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기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역량을, 즉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해서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 그런 것은 하나의 미신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오묘한 것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들은 실질적인 것을 원했다는 말이죠.
* 요아스(12) 왕 !!
그 다음 왕이 요아스인데, 16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때 남쪽도 잠시 요아스였는데, 그러니 마구 복잡하다는 말이죠. 이때도 여전히 아람나라에게 시달리는데, 엘리사가 이때 죽는다는 겁니다.
(왕하 13:10) 유다 왕 요아스의 삼십칠 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육 년을 치리하며
(왕하 13:11)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였더라
* 여로보암 2세(13) 왕 !!
그 다음으로 열 세 번째가 여로보암 2세인데, 그는 42년 동안 제법 오래 통치를 했다는 말이죠. 이때 남과 북을 합치면 그 영토가 다윗과 솔로몬 때만큼 넓어졌는데, 하지만 그도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14장 25절에 보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로 말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 이야기를 요나가 했다는 것인데, 그러니 요나는 지금의 이 시대를 좋게 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 즉 지금의 스페인 쪽으로 가려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만 물에 빠져서 물고기를 통해서 니느웨로 가게 되는데, 그것은 지금의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니느웨보다도 더 엉터리임을 알려준다는 겁니다.
(왕하 14: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 스가랴(14) 왕 !!
그 다음이 스가랴인데, 6개월만에 살룸에 의해서 암살을 당하면서 예후 왕조가 막을 내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5차 쿠데타라는 말이죠. 이 스가랴도 역시 어떠합니까?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라고 하는데, 계속해서 이게 반복되고 있다는 겁니다.
(왕하 15:9) 그 열조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왕하 15:10)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저를 모반하여 백성 앞에서 쳐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살룸(15) 왕 !!
그 다음은 살룸인데, 그는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스가랴를 죽이고 왕이 되었는데, 하지만 자기는 불과 한 달만에 므나헴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게 6차 쿠데타라는 말이죠.
(왕하 15:13) 유다 왕 웃시야 삼십구 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한 달을 치리하니라
(왕하 15:14)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디르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올라가서 야베스의 아들 살룸을 거기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므나헴(16) 왕 !!
그러니 지금 북이스라엘에는 연속적으로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는데,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므나헴이 살룸을 죽이고 왕이 되는데, 그는 10년을 통치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때 백성들이 호응을 해주지 않자, 아이를 가진 여자의 배를 가르는 등 아주 잔인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는 겁니다.
(왕하 15:16)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저희가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치고 그 가운데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
* 브기히야(17) 왕 !!
므나헴은 그렇게 공포정치를 펼쳤는데, 그래도 자기 때에는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고 자기 아들인 브가히야가 무사히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브가히야가 왕이 된지 2년 만에 베가가 반역을 일으키는데, 그게 7차 쿠데타라는 겁니다.
(왕하 15:25) 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 명으로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
이 베가는 20년 동안 통치를 했는데, 그는 그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에 달라붙어 있었다는 말이죠. 물론 그도 다른 왕들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겁니다.
(왕하 15:27) 유다 왕 아사랴 오십이 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을 치리하며
(왕하 15:2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 마지막 호세아(19) 왕 !!
이제 마지막 왕인 호세아인데, 그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말이죠. 그가 왜 마지막 왕이 되는고 하니, 애굽을 의지해서 앗수르에게 조공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앗수르가 와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켜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주전 722년이라는 말이죠.
* 하나님의 오묘함과 이스라엘 역사 !!
이제 이것만 이야기하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오묘함 속에서 이스라엘을 왜 망해야만 했을까요? 왕들은 왜 계속해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열왕기하 17장 13절을 보겠습니다.
(왕하 17: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선지자들로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전하는 자인데, 그렇지요? 그러면 그런 선지자가 "지금 왕이 잘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라고 하겠습니까? 그게 선지자의 역할입니까?
그럴 리가 만무한데,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이야기를 전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오묘함이 오직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선지자들이 하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행복한 나라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오묘한 것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단 하나밖에 없는 언약의 나라, 약속의 나라, 오직 그 나라만을 고집스럽게 전한 자가 바로 선지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왕들이 그런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인간들끼리의 든든한 나라를 따로 만들겠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렇게 하려면 왕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백성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래야만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백성들은 선지자의 말은 듣지 않는데, 그렇게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단결을 했다는 말이죠. 거기에 생각이 하나로 통일이 되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14절과 15절을 보겠습니다.
(왕하 17:14)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그 목을 굳게 하기를 그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저희 열조의 목 같이 하여
(왕하 17:15)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 열조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좇아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하사 본받지 말라 하신 사면 이방 사람을 본받아
*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면서 살아가는가?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인데,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한데, 그렇게 무의미하고 허망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무엇만 욕망하면서 살아갑니까?
모조리 다 허무한 것만을 쫓아서, 누가 어디에 합격하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그런 것에 우리가 현혹되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뉴스를 보면 전부가 다 그런 이야기인데, 그래서 뉴스를 보지 않으려고 다른 곳으로 돌리니 조갑경이 나와서 당뇨병 가족력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것은 아담의 자손이면 다 있는 것인데, 여자 나이 50이 넘으면 세로토닌이라는 행복 호르몬이 없어져서 갱년기가 온다는 겁니다. 그게 결국은 "살 때까지는 악바리로 한 번 살아보자" 라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것이 언약입니까? 아닌데, 비언약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지옥에 살면서 우리도 거기에 푹 빠져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구원은 누구의 솜씨라는 겁니까? 우리도 거기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힌 것은, 홀로 탈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 그 피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도 알고 우리 자신도 알고, 그 세상에 우리가 푹 빠져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러면 그럴수록 십자가의 복음만을 드러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고,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6,28 오후 5시에 마침.
시력은 떨어져도 주님의 오묘함은 더욱 선명해지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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