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02 - 사망의 몸
24,07,01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오늘은 교재 12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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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와 배가 있는데, 이 사과와 배를 나눕니다. 세분화를 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섞일 수 없 것인데, 즉 섞이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과는 사과고 배는 배라는 겁니다. 조직신학에 계시론과 신론이 있는데, 이것을 세분화를 한다는 것은 섞이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사과를 배가 섞이면 안 되듯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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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와 배 !!
그러면 제가 여기서 물어보겠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계시론과 신론이 나누어져서 오셨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하나가 되어 오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신이고 계시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것을 두 개로 쪼개서 본다는 겁니다. 마치 계시론에 필요한 예수님이 있고, 그리고 신론에 필요한 예수님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이죠. 마치 사과와 배를 구분하듯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구원하시려고 하는 예수님의 생각과 사람들의 생각이 초반부터 맞지를 않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이것을 따지고 저것을 따져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예수님 한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들은 저기에 천국이 있다고 하면, 이모와 저모를 따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모와 저모는 다르다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따져서, 그리고 그것을 종합해서 자기를 천국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하지만 정작 천국에서 오신 예수님은 따지지 않고 "나를 믿어라" 라고 하시는데,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 잠시만요. 우리 인간 쪽에서 분석을 좀 하겠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참으로 하는 짓이 고약하다는 말이죠.
왜 분석을 합니까? 자기들이 분석을 해서, 믿을 만한 하면 믿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천국에 보내는데 있어서 후보들이 많다는 것이죠. 부처도 있고, 알라 신도 있고, 그렇게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는 겁니다.
옛날부터 시어머니가 믿던 종교를 따라서 제사를 지내면서, 그렇게 훈련을 받아왔기 때문에, 어느 날 친구가 와서 "교회에 갈래?" 라고 하면, "가만히 있어봐라. 내가 좀 따져보고 갈 게"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가 교회에 가면 집안에서 어떻게 나올지 따져보고, 혹은 자기가 부처보다도 예수를 믿으면 자기 자식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따져보고, 그렇게 모든 것을 따져보고, 믿을 만하면 믿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 "인간은 진짜만 믿겠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인간은 마귀에게 속아넘어간다는 말이죠. 진짜만 믿겠다고 나오니까, 그래서 자꾸만 진짜배기를 찾아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마귀만 신바람이 난다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냥 오셨는데, 그런데 마귀는 그 예수님을 차단해서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는데, 그게 마귀의 집요함이라는 겁니다. "그래, 따져봐야지. 이모저모 따져봐야지. 어느 쪽이 천국으로 갈 수 있는지 따져봐야지" 라고 하는데, 그래서 인간은 "내가 야무지게 진짜만 믿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 예수님은 인간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내가 진짜야" 라고 했을까요? 제가 강의시작부터 어려운 문제를 내었는데, 즉 "예수님은 인간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가?"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그것은 바로 "네가 할 수 있는 것, 네가 해낼 수 있는 것, 그것은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즉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받아주지 않는 것이 천국이라면, 그렇다면 누가 한 것만을 받아준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하셔서 제공된 것,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는 것이 수월하다는 말이죠.
*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가지고 오지 말라 !!
그런데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를 했지만, "이것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이게 나에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라고, 그것을 계속해서 따진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의 뜻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그렇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말이죠.
* 요나 선지자 !!
요나 선지자의 경우에, 어제 낮 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쳤을 때, 그런데 누구에게 걸렸는고 하니, 같이 배를 타고 있던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들에게 들통이 났다는 겁니다.
갑자기 바다에 풍랑이 일고 배가 흔들리니 선장이 하는 말이,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는가? 우리 각자 믿는 신에게 기도하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각자가 기도를 하는데, 이구동성으로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살려줘요, 뽀빠이(Popeye) !!
제가 어릴 때 아주 재미있게 본 미국에 들어온 만화영화가 있었는데, 아직도 그 대사가 기억이 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뽀빠이, 살려줘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다들 알지 싶은데 말이죠.
이 '뽀빠이' 라는 만화영화에는 뽀빠이와 올리브, 그리고 브루터스가 등장하는데, 브루터스가 둘의 사이를 방해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올리브를 괴롭히는데, 그러면 얼굴은 작고 몸은 호리호리한 여지인 올리브가 남자친구인 뽀빠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뽀빠이는 힘이 별로 없는데, 올리버가 도움을 요청하면 캔에 든 시금치를 먹고 팔에 알통이 생기면서 변신을 한다는 말이죠. 특히 주먹부분이 엄청나게 커지면서 브루터스에게 한 방 먹이면서 올리버를 쟁취하는데, 그런 에피소드가 계속해서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할 때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인데, 즉 "뽀빠이, 살려줘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새벽기도 시간에 나와서 다들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우리 가정 살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바로 이것인데, 각자 자기 신에게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드디어 잠을 자고 있는 요나가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때 배에서 제비뽑기를 하는데, 이 사태의 원인 제공자를 찾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자 요나가 뽑히게 되고, 그래서 기도하던 자들이 요나를 추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네가 믿는 신은 무슨 신이야? 너의 고향은 어디야? 왜 이 배를 타게 되었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자 요나가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을 피해서 이 배를 탔는데,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자기를 체포하기 위해서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면서 배를 흔들게 되었다고, 자기 입으로 이실직고를 한다는 말이죠.
* 요나 씨, 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주세요 !!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그 덤탱이를 누구에게 씌우는고 하니, 갑자기 그들이 공손모드에 돌입해서, "요나야, 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주면 안 되겠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다 죽을 수는 없고, 누구 하나 희생제물이 필요한데, 요나 당신이 당첨이 되었으니, 우리 이제 여기서 헤어집시다. 물론 우리는 당신이 저 성난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무척이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희생물을 강요한다는 것은, 자기는 희생물이 될까요?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희생물이란 것은, 자기는 희생되지 않고, 그 희생물 덕분에 자기가 살겠다는 태도라는 말이죠. 그것을 이방 인간들이 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지요?
거기에 대한 답이 딱 나왔는데,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좀 희생을 해주시고, 우리는 그 예수님 덕분에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가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을 교인들이 예수님에게 요구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과연 복음을 아는 자의 특징일까요? 너무나 이기주의인데, 참으로 야비하다는 말이죠. 요나에게 한 짓과 똑같은데, 그러면 그들이 요나가 죽어서 바다의 풍랑은 잠잠해졌지만, 과연 천국에 갔을까요?
물론 자기 집으로는 무사히 갔겠지만, 천국에는 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나를 물에 던지는, 바로 그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사고방식이란 말이죠. 자기는 희생제물이 될 수 없고, 자기를 대신해서 누군가가 희생이 되면, 자기는 그 덕을 좀 보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 요나의 희생과 인간의 한계 !!
바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인간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었는데, 그러니 우리는 성경말씀을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야비하고 비겁한지, 그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요나의 희생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정답은 이미 나왔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제 아무리 노력하고, 백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해도, 어디까지라는 겁니까? 하나님에게 스스로 저주를 받는 일은 우리 인간이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물론 그 대신에, 교회에 다니고 성경공부를 하고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는 것, 그것만은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심이라는 말이죠.
*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 !!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았는데, 즉 버림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문제를 염두에 두고, 천사의 도움을 받아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3번이나 하셨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이 저주를 저에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그 뒤에 뭐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마 26: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마 26: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렇게 "아버지의 뜻대로 저주가 임하게 하옵소서" 라는 것을 '비자발성' 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감당하실 수가 있었다는 말이죠. 이게 비자발적이지만,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이게 자발성으로 전환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자고 있었는데,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축으로 해서 둘로 극명하게 나누어진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제가 다시 묻겠는데, 천국에 가는 것은 누구의 공로입니까? 예수님의 공로인데, 그것은 무엇을 전제로 합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일체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받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제 교재 13페이지에 나오는 취지를 여러분이 알 수가 있지 싶은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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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기독교밖에는 모릅니다. 목사님이 가르쳐준 기독교와 자기가 가진 종교성이 결합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해도 자기는 보편적인 종교성에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성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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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부모가 가르쳤고 시댁에서 가르쳤던 종교를 교회에 나가서도 그대로 믿겠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요나를 바닷 속으로 집어던졌던, 바로 그 비겁함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각자 자기 신에게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마음껏 발했다는 말이죠. 교회에 다녀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 환경을 답습한 것인데, 즉 "나는 이런 식으로 자라왔다" 라는 겁니다.
* 신나는 장터의 삶 !!
그렇게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에는 또 어떤 것이 있는지,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대구에 아직 5일장이 서는 곳이 있는데, 불로동 같은 곳에는 선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그런 장날에 가게 되면, 과연 여러분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5일장에 가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라고 합니까? 그렇지는 않다는 겁니다. 아주 신이 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제가 불로동 5일장에 가서 파는 것들이 무엇인지 적어보았는데, 물론 전부 다는 아니겠지만 말이죠. "볶음땅콩, 고추튀김, 참외, 수박, 삶은 옥수수, 고디(다슬기), 찌짐, 빈대떡, 식혜, 꽈배기, 만두" 등등, 그런 것들을 판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나는 못해"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갑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마음껏 고른다는 말이죠. 그리고 거기에 임영웅이 노래까지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이렇게 장터에서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24시간 일상생활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일상생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너무나 잘하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 그것을 누가 못하느냐는 말이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쩔쩔매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아주 신이 났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돈만 있으면 매일 장터에 가서 맛있는 것을 사먹고 싶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가보니, 자꾸만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는 아는 것 같지만,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우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24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우리의 평소 삶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꽉꽉 채워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확실한 것'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 장터인가? 교회인가?
그렇게 24시간 장터생활을 하다가 주일에 교회에 가서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면, 그것을 당연히 확실한 것으로, 즉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죠.
그러니 회에 가는 것과 장터에 가는 것이 똑같이 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둘 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이란 겁니다. 그렇게 전환이 되고 말았는데, 하지만 천국에 가는 것은 어떻다고 했습니까?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할 수 없는 것, 이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시는 것인데, 그게 요나에게 임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요나는 비자발성인데,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바다 속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바다 속에는 거대한 물고기가 준비되어있었다는 겁니다.
일단 그것을 고래라고 치고, 왜 그렇게 고래가 준비되었을까요? 사람은 바닷물 그 어디에 빠져도 죽고 마는데, 요나는 이미 죽은 자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요나가 어디서 죽는고 하니, 고래 뱃속에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요나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 그것을 요나는 죽음 속에 있으면서, 그 요나가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데, 그래서 고래가 요나를 바깥으로 내뱉어버린다는 말이죠.
* 요나의 표적 !!
그래서 요나는 죽은 자로서, "이 세상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라는 것을 토해져서 외쳐야 될 선지자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요나를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여기서 마태복음 16장 4절을 보겠습니다.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구약의 요나를 호출하시는데, 이 세상이 시커먼 바다와 같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데,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죽었지만 그 죽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자는, 물고기 속의 요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바로 그 요나의 입장이 곧 예수님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인데, 예수님은 곧 돌아가신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돌아가시지만,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나를 믿지 않으면, 너희들은 지옥에 간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유일한 분으로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 오직 예수님만이 진짜를 !!
그래서 다른 인간들은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요나가 물고기 속에 들어간 것처럼 십자가의 그 저주 속으로 들어가서, 이 세상의 진짜가 무엇인지, 진짜 현실이 어떠한지, 그것을 제대로 이야기하는 분은 예수님만이 유일하다는 말이죠. 요나 때는 요나밖에 없었는데, 그게 바로 요나의 표적이라는 겁니다.
기적은 인간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표적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즉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는 것" 인데, 그래서 주님이 천국에 갈 수 있는 힘으로 부여하는 것은 기적이 아닌 표적이라는 말이죠.
자기는 비겁쟁이라서 할 수 없는데, 하지만 그런 우리 자신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그것을 증거케 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그 일에 여러분이 초대된 것을 일단 축하드리는데, 이것은 강제소환이기 때문에 축하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데 말이죠.
* 나에게 있어, 나의 죽음보다도 더 확실한 것은 없다 !!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마디로 정리를 하면, "나에게 있어 나의 죽음보다도 더 확실한 것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를 제외하고 전체를 보면, 가장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장날에 가서 찌짐을 사서 맛있게 먹더라도, 그렇게 확실한 것을 해도 죽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시장에서 돈을 주고 찌짐을 사서 먹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진짜다" 라고 외쳤던 그 사람이, 수박도 한 덩이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차에 바쳐서 죽었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진짜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시장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서 먹고 또한 집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 확실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죽음을 품고 살아가면서, 그 죽음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간다고 하는 것, 그것보다도 더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 과연 무엇이 진짜인가?
그러니 주님이 우리를 부르기 이전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하는데, 즉 "내가 나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헌금을 받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이 불확실하기 때문인데, 죽음을 품고 있는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그래서 오직 그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면 착하고 성실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는데, 마치 무슨 경쟁을 벌이는 것 같다는 것이죠.
* 다음 달에 꽃꽂이를 하실 분이 계십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설교가 아니라 광고시간을 기다리는데, "다음 달에 꽃꽂이를 하실 분이 계십니까? 주차담당 봉사자를 모집합니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교인들은 설교는 잊어버리고 이런 광고만 기억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죠.
그러니 목사는 그런 틈을 주면 안 되는데, 교인들이 할 수 없는 것으로 곧 바로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살아있는 것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왜 광고시간에 누가 병원에 입원해있으니 기도해달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얼른 죽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있지만 말이죠.
여러분이 지금까지 교회에 다녔던 것을 기억해보시면, 전부가 다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까? "선교비가 예상보다 빨리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서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 그런 것은 우리 인간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장터에서 물건을 사는 것과도 전혀 다르지 않은데,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교인이 아니고 성도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구약 때는 ?
이제부터 좀 어려워지는데,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도대체 누가 한다는 겁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신다고 답변을 준비하고 있을 텐데,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구약 때는 누가 했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미가엘' 인데, 즉 천사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구약은 인간이 대상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대상인데, 그 이유는 이 이스라엘에게만 뭔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이 이스라엘이라는 인간들과 같이 결합이 되면서,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딱 집어서 그들을 샘플로 해서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그 율법이 인간현실에 어떤 영향력과 변화를 일으키는지, 그것을 테스트해 나가는 것이 곧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단군의 자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오직 이스라엘만이 관련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율법에 의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그것을 파악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파악하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내용, 즉 하나님의 뜻을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말이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은 망했는데, 율법을 받아놓고도 그 율법의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서 망했다는 겁니다.
* 미가엘 천사의 경우에 !!
그러면 미가엘 천사 이야기를 해보면, 구약 때 천사가 왜 이스라엘에게 나타났느냐는 말이죠. 이스라엘이 망했는데, 미가엘 천사는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망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말씀, 혹은 언약, 율법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이스라엘은 망했지만,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취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성취가 되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율법이 이방나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니, 이방나라는 여기에 일체 관여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했으니 망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망쳐지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바로 여기에 미가엘 천사가 투입되는데, 구약 때에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다니엘서 12장을 보겠는데, 1절입니다.
(단 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여기에 대군 미가엘이 등장하는데, 야곱의 경우에도 천사를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창세기 32장에 나오는데, 1절과 2절입니다.
(창 3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창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 하나님의 군대 !!
천사들이 한 두 명이 아니고 무리인데, 그 기능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군대라는 겁니다. 군대는 그 임무가 전쟁인데, 미가엘의 경우에도 대군의 총사령관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천사들 중에서 전쟁을 하는 최고의 우두머리 천사가 미가엘이고, 창세기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군대, 즉 '마하나임'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 계속해서 "우리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으로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신약에 와서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희생물이 되심으로서, 그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해내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중간에 전쟁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전쟁이고 하니까, "하나님의 언약으로 맺어진 백성은 주님이 책임진다" 라는 것을 위한 전쟁이라는 말이죠.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이렇게 이스라엘이 있는데, 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이 되는데,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언약을 지켜주는 군대가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그만 망해버렸으니 언약을 지켜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늘의 군대가 언약을 가지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지켜준다는 겁니다.
*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 !!
그게 전쟁인데, 그러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쪽은 이스라엘의 적인 동시에, 언약의 적인 동시에, 하늘나라 군대의 적이 된다는 것이죠. 이 적들이 바로 이방민족인데, 구약 때가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이방민족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없다는 겁니다.
요나의 경우에는 죽어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다는 말이죠. 물고기로 인해서 살아났는데, 그렇다면 그게 요나로 인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까? 요나가 선지자로서 해야할 임무가 있는데, 그 언약 때문에 요나가 살아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개인적 이스라엘이 아닌 집단적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군대를 동원시키는데, 그게 다니엘서에 오게 되면 미가엘이라는 겁니다. 야곱의 경우에는 그것이 마하나임이었고 말이죠.
이스라엘은 망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이방나라의 힘이 그만 이스라엘을 쪼개서 점령을 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미가엘은 무엇인고 하니, 쪼개진 언약의 일부를 가지고 있는 자기 백성을, 이방나라의 힘을 뚫고서 언약대로 건져내는 일을 미가엘 천사가 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다니엘서 10장을 보겠는데, 10절에서 14절입니다.
(단 10:10)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단 10:11) 내게 이르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매
(단 10:12)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 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단 10:13)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단 10:14)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
* 영적 전쟁 !!
여기 13절에 미가엘이 나오는데, 그러면 이 미가엘이 인간의 전쟁에 관여를 한다는 겁니까? 관여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관여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전쟁을 하시는데, 그 전쟁은 천사가 관여한 것처럼 영적전쟁이 된다는 말이죠.
이 영적전쟁의 특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인데, 자기가 장날에 물건을 사듯이 할 수가 있는 것, 교회에서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 그렇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영적전쟁에 하늘의 천사가 투입되는데, 그러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보시고, "네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너의 솜씨를 뽐내지 말라"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여기서 마가복음 6장을 보겠는데, 49절과 50절입니다.
(막 6:49)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막 6: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이게 밤에 일어난 일인데, 그래서 밤과 바다를 합치면 '밤바다'가 된다는 겁니다. 밤바다라고 하면 우리는 여수 밤바다인데(ㅋㅋ), 그런데 여기는 갈릴리 밤바다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밤바다를 어떤 모르는 자가 걷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두 글자로 '유령' 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인간들이 유령을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유령이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래서 그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동원한다는 말이죠.
그게 '파묘' 라는 것인데, 묘지를 파내서 이장을 한다든지, 혹은 천만원을 들여서 무당에게 굿을 하게 한다든지, 또는 부적을 몸에 지닌다든지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영적전쟁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 !!
이게 중요한데, 이제 남은 시간에 우리가 할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이 과학적으로 아무리 연구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불안한데, 그것은 돈이 해결할 수 없는데, 즉 과학으로도 안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 인간 속에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방주연' 이라는 여자 가수가 1972년에 발표한 노래가 있는데, 그게 '당신의 마음' 이라는 겁니다. 다들 들어보면 아는 노래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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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마음(방주연) ]
바닷가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코와 입 그리고 눈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밑에 점하나
입가에 미소까지 그렸지만은
아 - 아 - 아 - 아
마지막 한가지 못 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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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귀 턱밑에 점 하나, 그리고 입가에 미소까지 다 그렸지만, 마지막 한가지 그리지 못한 것은 당신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 마음이 문제인데, 인간은 자기 마음도 전혀 모른다는 말이죠. 물론 "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라고 하는데, 그래서 시장에 가서는 물건도 사고 찌짐도 먹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 17장 9절을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라고 하는데, 그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버릴 수도 없는데, 그게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죠.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우리는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하지만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잠언서 16장 32절에 보면,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성을 빼앗는 것이 옛날의 전쟁방식인데, 또한 오늘날 식당을 하면서 옆집과 경쟁해서 돈을 더 벌려고 하는 것도 모두 다 전쟁이라는 말이죠. 그게 바로 생존전쟁인데, 그래서 옆 가게를 인수해서 확장을 하게 되면, '승리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데, 그런데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어떻다는 겁니까? 전쟁을 해서 성을 빼앗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는 말이죠. 또한 그 다음인 33절에도 보면, 뭐라고 합니까?
(잠 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여기에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꾸어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은 내가 가지고 갈 게"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이 관리하시겠다는 것인데, 고맙게도 우리 자신에게 맡겨놓지 않는다는 말이죠.
* 내 마음은 나의 관리대상이 아니기에 !!
우리 인간의 마음은 자기의 관리대상이 아닌데, 즉 관리가 안 되는 것이 아니고, 관리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이 참 중요한데, 즉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라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닙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좌절할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아닙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화를 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은 모두 다 자기 것이라고 여기니 말이죠.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 대목을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서 17절에서 19절을 보겠습니다.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여기 17절에서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있다는 겁니까? 자기 속에 죄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유가, 그게 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즉 죄가 자기 주인이었다는 겁니다.
또한 18절에서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라고 하는데, 자기가 원해서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한다"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갈 때까지 가버렸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것을 받아서 구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 속에 죄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죄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교양을 쌓아도, 또한 사업에 성공해서 남들에게 칭찬을 받아도 어떻다는 겁니까?
아무리 그렇게 성공과 출세과도를 달렸다고 해도, 하나님도 알고 자기도 아는데, 그리고 성도도 안다는 겁니다. 즉 "네가 아무리 성공을 해도, 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죠.
* 냄비 속에 들어있는 쥐새끼 한 마리 !!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예를 든 적이 있는데, 뚜껑이 있는 냄비가 하나 놓여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자꾸 움직인다는 겁니다. 주위에는 아무리 봐도 아무도 없는데 말이죠. 참으로 희한한 일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나중에 냄비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 쥐가 한 마리 들어있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럴 싸하게 내세우는 것은 냄비고 그 뚜껑인데, 그런데 막상 그 뚜껑을 열어보면 그 안에 쥐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했을까요? 여러분은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24절과 25절을 보겠습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나에게 대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나는 나에게 손을 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이것은 노력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닌데,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근원적으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입장에 놓여있지 않다는 말이죠.
* 사망의 몸 !!
아무리 50년을 교회에 다니고 복음을 알아도 소용이 없는데, 목사가 되어서 개척교회를 아무리 많이 세워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다음에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하는데, 만약에 우리 인간에게 명찰이 있다고 하면, 그게 '사망의 몸' 이라는 겁니다. 김 사망의 몸, 박 사망의 몸, 이 사망의 몸,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방에 가면 레지가 있는데, 혹은 마담이라고 하는데, 그 마담이 뭐라고 합니까? "여기에 최 사장님이 계십니까?"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최 사망의 몸이 계십니까?" 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전부가 다 사망의 몸이라는 것이죠.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아서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한계를 알았다는 것인데, 그게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오직 성령을 받아야만 알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한계라는 말이죠. 즉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함 속에는 죄가 섞여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아니 자기에서는 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사망의 몸인데,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스스로 안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자기를 사망의 몸이라고 지적을 해주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곧 구원으로 보았는데, 그래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를 사망의 몸이라고 지적한 분만이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인데, 오직 그분만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누구라는 겁니까?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그렇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 명찰은 '사망의 몸' 이란 것인데, 여기서 목줄을 해서 예수님이 등장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니 천사처럼, 구원은 영적전쟁이라는 말이죠. 미가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천사처럼 계시는 예수님이 자기를 사망의 몸이라고 가르쳐준 것은, 그것은 이미 언약적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뒤돌아보면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성령을 받은 자와 예수님의 관계인데,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런 관계는 다 사라지고, 사망의 몸이 그만 잘난 몸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 덕분에 내가 잘났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려고 한다면 로마서 7장 24절과 25절을 지워야 한다는 말이죠.
로마서 7장 24절의, 이 사망의 몸과 같은 짝을 이루어야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하면서, 주님께 감사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사가 아니고 노력이 되고 애씀이 된다는 말이죠. 악착같이 구원을 받으려고 발악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는 만족함이 나오지 않는데, 성경을 이용해서 자기가 천국에 가려고 하는데, 거기서 무슨 만족함이 나오겠느냐는 것이죠. 늘 결핍을 느끼는데, 그래서 "내 마음아, 너는 성령을 받았잖아. 그러니 알아서 주께 영광을 돌리고, 바르게 살아야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가 자기 마음을 계속해서 관리하려는 것인데, 그러면 마귀는 그야말로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천국에 가지도 못하는데 간다고 환상을 집어넣어 놓았으니, 그것은 완전히 자기 밥이라는 말이죠.
환상이라는 것은 'if' 인데, 즉 "만약에 ~이라면" 라고 하는, 그게 환상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내가 그 많은 돈을 번다고 하면, 내 자식이 잘 된다고 하면" 라는 것인데, 당연히 그 뒤에는 "나는 얼마나 좋을까?" 라고 하는데, 그게 환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환상은 '나' 라는 것을 도저히 놓을 수가 없는데, 그렇게 자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여전히 부질없는 노력을 하고 있을 때,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그것은 환상뿐이라는 겁니다.
* 환상은 누가 조장하는가?
그렇다면 이런 환상을 누가 조장하겠습니까? 이번 수련회에서 신명기를 할 텐데, 그때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싶다는 말이죠. 환상은 누가 조장하는고 하니, 여러분에게는 제가 특별히 이야기를 해드리겠는데, 주위에 있는 가까운 타인이 조장을 한다는 겁니다.
"네가 그렇게 공부해서 되겠어? 그렇게 벌어서 밥이라도 먹을 수 있겠어?" 라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자꾸 듣게 되면 자기가 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그래, 내가 보란 듯이 성공해야지" 라고 하는데, 자꾸만 타인은 부추기고 자기 마음은 자기가 장악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데, 자기가 자기 목줄을 매어서 자기 손에 들고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이고 뭐고 필요치 않는데, 그래서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불만이 터져 나오는데, "주님, 정말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제가 망해야 속이 시원하십니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은 자라고 했는데, 그렇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했던 많은 이야기 중에서 하나를 살펴보겠는데, 그는 과연 어떻게 살았느냐는 겁니다. 그게 빌립보서 4장 5절에 나오는데, 제가 칠판에 적어보겠습니다.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에 보면, 사도바울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라고 하는데,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관용하게 됩니까? 자기의 재산이 적어도 4,500억 정도가 되면, 그러면 관용이 될까요? 그렇습니까?
이 관용이란 것은, 자기 마음에서 죄만 나오기 때문에 자기 마음의 관리를 도저히 자기가 할 수가 없고, 오직 주님을 증거하는 용도로서만 쓰여진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을 주님께 넘겨진 자라고 하는데, 그런 자에게서만 관용이 나온다는 겁니다.
* 어느 여인의 관용 !!
여러분도 마음이 관용해지기를 원하지요? 그 방법을 제가 알려드릴까요? 그것이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데,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통째로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겨드렸다는 겁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바리새인이 뭐라고 합니까?
지금 예수님의 발을 만진 그 여자가 얼마나 질이 나쁜지를 왜 모르느냐고 하면서, 그 여인의 행위를 비난한다는 말이죠. 그들의 율법해석에 의하면, 질이 나쁜 자가 만지면 같이 오염이 된다는 것이 있는데, 즉 깨끗한 것은 깨끗한 것끼리 어울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시는데,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가 있다는 말이죠. 사실 50데나리온도 엄청난 금액인데, 500이면 그 10배라는 겁니다. 그런데 둘 다 탕감을 해주었는데, 그러면 누가 더 고마워하겠습니까? 당연히 500데나리온 쪽이라는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은 이 여인이 한 일을 지적하면서,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관용은 어디서 생기는고 하니, 철저하게 자기가 사망으로 몸이라는 것이 유지되는, 그런 자에게만 관용이 주어진다는 말이죠.
* A : 당신의 발을 밟았습니다.
* B : 그럴 수도 있지 뭐.
* A : 누가 당신에게 욕을 합니다.
* B : 욕을 할 수도 있지 뭐.
* A : 당신의 집이 홀라당 불에 다 탔습니다.
* B : 불에 탈 수도 있지 뭐.
예수님의 죄사함으로 인해서, 자기 모든 재산을 다 털어서 산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왕창 부어버린, 그래서 "나는 예수님만으로 족해요" 라고 하는, 바로 그런 여자가 어떻다는 겁니까? 사람들에게는 손가락을 받았지만, 예수님에게서 칭찬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을 때는, 이미 우리의 몸에는 이미 우리 자신이 관리할 수 없는 더러운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너는 정말 대단해요" 라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죠.
(눅 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창세기 6장 5절에 보면, 이미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시는데 있어서,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꿰뚫어보고 계신다는 것이죠.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여기서 시편 65편 3절을 보겠습니다.
(시 65:3)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다윗은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라고 하는데, 즉 죄가 자기보다 더욱 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고, 오직 주님이 오셔서 알아서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책임한 이야기가 아니고, 정말로 그러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시편 90편을 보겠는데, 6절에서 8절입니다.
(시 90: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시 90: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 90: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 인간이 소멸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시편 90편을 보면, 제목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라고 되어있는데, 이번 수련회에서 신명기를 할 것인데, 그 주제가 바로 이 주제이란 말이죠. 이것이 신명기에도 나오는데, 즉 "인간은 소멸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이 소멸해야만 하는 이유라는 말이죠.
여기 7절에 보면,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그것이 곧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이 전혀 다룰 수 없는 이 마음의 문제 때문에, 그래서 육체가 소멸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썩었기 때문에 육체도 썩어간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마음만 고쳐지면 육체도 고쳐진다는 것인데, 즉 새로운 몸으로 부활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원칙이 얼마나 간결하고 담백하고 명백하냐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러니 썩은 마음으로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썩은 마음으로 시작한 예수가 어떻게 진짜 예수이겠느냐는 겁니다. 가짜 예수라는 말이죠.
* 사망의 몸에 합당한 몸 !!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해보면,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았는데, 그가 로마서 7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는 성령을 통해서 알았는데, 자기 몸이 사망의 몸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사망의 몸에 합당하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인데, 자기가 연구해서 알아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마음이 엉터리인데, 거기서 무슨 진리가 나오느냐는 말이죠. 거기에서는 자기 의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자기가 개발한 것인지, 아니면 성령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 그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 명쾌하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없는 사람이라면, 결국 자기 믿음을 자랑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소멸이 되어야만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썩었다는 것을 주님에게 들켰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의 은밀한 죄를 모두 다 들추어내게 해서, "너는 이미 들켰어. 너의 마음이 썩었다는 것을 내가 안다" 라고, 이 시편 90편을 우리의 일상에서 매일같이 반복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매일 까불면서 살아가는데, 그것을 우리 자신도 안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와 심판 속으로 !!
그런데 주님은 이 죄를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와 심판 속으로 우리를 통과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간편화한 것이, 우리를 언제나 십자가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인데,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버림받음이고, 그 속에 우리도 같이 놓이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에 대해서, 즉 거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 얼마나 화를 내고 있는지 알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 아들도 저주를 하시는데, 그게 하나님의 본심임을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 나가서 관용하게 되는데, 즉 모든 것을 용납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그의 일상적인 삶은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잘 나와있는데, 11절에서 13절입니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자기가 부자인지 가난한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하실 일은 모두 해내신다는 겁니다. 자기를 통해서 주님이 해야할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반드시 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감사하고 있고, 또한 기뻐하고 있다는 겁니다.
* 지금 가장 최적의 상태 !!
그러니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지금 여러분이 그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최적의 상태라는 말이죠. 더 모자람도 없고 더 남는 것도 없는데, 적절하게 우리를 이끄신다는 겁니다. 자기가 사망의 몸이고, 그리고 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데 있어서, 가장 적절한 상황이 바로 지금의 상황이라는 말이죠.
시편 90편을 조금만 더 설명하고 마치겠는데, 9절에서 12절입니다.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시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기 10절에 보면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라고 하는데, 이미 강건함의 레벨에 들어선 분들이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도, 우리가 내세울 것은 수고와 슬픔뿐인데, 그게 신속히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언젠가는 죽고, 그 죽는 이유가 자기가 품고 있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분노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면서 그게 기쁨으로 바꿔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몸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교체하려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 교체되는 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야 하는데, 그 영체가 바로 교체될 우리의 몸, 즉 우리의 육체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우리가 죽는다는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결혼식장이 아닌 장례식장에서 축가를 불러야 하는데, "주님, 저도 죽일 것이죠? 그렇죠?"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죽을 날을 손꼽아 기다려야 하는데, 그게 사도바울의 소망이었고, 또한 저와 여러분의 소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형편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그동안 저희들 뭔가 착각하면서, 환상 속에서 살지 않았는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진짜 진실인 십자가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는 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그런 주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7,9 오후 8시에 마침.
리셋이 아닌, 최적화의 삶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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