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하나님-왕이시여!

아빠와 함께 2024. 3. 5. 20:50

[24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41 - 왕이시여!

24,02,19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멜기세덱, 앞서 온 메시야 !!

오늘은 교재 192페이지를 하겠는데, 여기에 멜기세덱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이야기는 많은 들었는데, 그런데 막상 여기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고 하면 결코 만만치가 않다는 것이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으니까, 그야말로 뚝 떨어졌다는 겁니다.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그러니 홀연히 등장한 그야말로 유령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멜기세덱인데,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앞서 온 메시야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앞서 온 메시야, 즉 메시야의 속성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메시야가 아닌 자, 그가 바로 멜기세덱이라는 겁니다.

* 왕 같은 제사장 !!

장차 오실 예수님의 속성을 그대로 다 가지고 있는데, 그 속성이 무엇인고 하니,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라는 말이죠. 즉 왕 같은 제사장, 그게 곧 멜기세덱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왕인데 어떻게 제사장이 될 수 있는지, 그것조차 일반인들은 납득하기 곤란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왕은 왕이고 제사장인데, 하는 일이 오히려 정반대라는 겁니다.

왕이 하는 일은 통치, 지배, 혹은 다스림인데, 그래서 왕은 결국 심판을 하는데, 그런데 그냥 하는 게 아니고 진노를 가지고 심판을 한다는 말이죠. 왕이 그렇게 진노함으로 심판을 한다는 것이 잠언서에 보면 나오는데, 여기에서 잠언서 20장 2절을 보겠습니다.

(잠 20:2)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

여기에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왜 왕을 화나게 하지 말라고 합니까?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조건 중의 하나가, 자기가 착실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아닌 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런 왕을 화내지 않는 조건 하에서 생명이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있는데, 잠언서 25장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잠 25: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잠 25:3)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 진노로서 심판하는 왕 !!

여기에 보면 하나님과 왕이 서로가 동업자와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죠. 이 땅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쪽이고, 나타나는 쪽은 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합쳐보면, 지상에 나타난 왕과 같은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인고 하니, 앞에서 왕의 조건을 이야기했는데, 즉 통치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진노로서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물론 요즘은 사람들이 왕을 무서워지지 않는데,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가 있는데, "왕이 무섭습니까? 가볍습니까?" 라고 말이죠. 가볍다는 것은 편하다는 의미인데, 즉 왕이 있다고 한다면, 그 왕이 두렵고 무서운지, 아니면 마치 동료처럼 편하냐는 겁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우리의 마음은 어느 쪽인가요? 우리는 가볍게 느껴진다는 말이죠.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 백성들이 왕의 모가지를 쳤다는 겁니다. 왕을 단두대에 올렸는데, 또한 왕비까지 모가지가 날아갔다는 말이죠. 그때의 왕이 루이16세이고, 왕비가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겁니다.

그때부터 왕이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는데, 그것을 두고 '민주주의'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러한 민주주의 시대에 아직도 우리는 성경을 보고 있는데,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왕인데, 그러면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은, "나의 왕을 믿습니다" 라는 것과도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정작 우리는 왕에 대한 마음가짐을 전혀 갖추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말씀대로 왕을 믿고자 해도, 왕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라는 것이 빈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성경에 있으니 그대로 내뱉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 왜 왕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왜 왕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라는 것인데, 이런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들은 왜 왕을 무서워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왕의 사생활, 왕의 여자관계, 그런 것을 드라마로 만든다는 것을 왕실에서는 그야말로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김정은의 사생활을 까발리면 어떻게 됩니까? 단두대로 가야한다는 말이죠. 왕에 대해서 경외감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네가 왕이야? 나는 너에 대해서 다 알아" 라고 하면서 삐딱하게 나온다면, 일가친척이라도 처형감이란 겁니다. 그래서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이 죽었다는 것이죠. 일반 백성들처럼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까 본 때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죠.

그게 공포정치인데, 이런 공포정치가 역사를 보면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탈리아 남부에 마피아의 본거지가 있는데, 시칠리아 섬이 그 대표적인 곳이란 말이죠.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가 등장해서 그 마피아를 박살내었는데, 그런데 그 뒤에 나폴리를 중심으로 해서 다시 등장한다는 겁니다. 센 놈은 더욱 센 놈이 와서 작살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민주주의가 되니까 그 싹을 제대로 잘라내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그렇구나" 라고 하면서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왜 그렇게 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시대에 왜 왕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지를 말이죠. 왕을 염두에 두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것과 엄청난 괴리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을 한번 살펴보자는 겁니다.

* 민주주의, '내가 나를 키운다' !!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내가 나를 키운다" 라는 것인데, 이게 민주주의라는 말이죠. 어릴 때부터 인간은 부모로부터 키움을 받는데, 그러다가 유투브를 동원하고 해서 인간은 자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자아성' 이라고 하는데,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구축되는지, 그것을 관찰하면서 시작을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의식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라는 것인데, 밥을 먹는다고 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개에게 사료를 준다고 해서 자아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인고 하니, 개와 인간의 차이점은 교육이라는 겁니다. 물론 개도 교육을 시키면 되겠지만, 그것은 주인에게 꼼짝도 못하는 교육이라는 말이죠.

* 교육은 가정에서 !!

그러면 인간 교육은 무엇인고 하니, 부모가 자식에게 교육을 시킬 때, 혹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교육을 시킬 때는,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종속이 목적이 아니고 스스로 자립을 하는 것, 그게 목적이라는 겁니다. 스스로의 자립, 그것이 교육의 목적이라는 말이죠.

만약에 가정이 그런 자립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이가 20살이 되면 사회에서는 자립한 인간으로 대우를 해주게 되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는 자립할 능력이 없으니, 그 사회가 맡겨주는 임무와 직책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립할 능력이 있고 없음을 어디서 알 수 있는고 하니, 그게 학교라는 말이죠. 학교에서 자립할 능력을 갖추게 되면 다른 학생들에게 부러움을 사게 되고, 반면에 자립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그만 왕따를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학교폭력의 대상도 되고 말이죠. 그러면 그게 학교의 책임입니까? 부모의 책임입니까? 이게 부모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환자가 병원에 왔는데, 그런데 그만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누구의 책임일까요? 물론 병원에서 의사가 잘못 했을 수도 있지만, 그럴 때는 병원책임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아프게 된 것이 병원의 책임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두어도 죽는데,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려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아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이교육의 책임은 가정이지 학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에 교사가 있다고 편을 드는 것이 아닌데(ㅋㅋ), 교사이기 이전에 부모라는 말이죠. 민주주의 시대가 되니 다들 그만 이상해지고 말았는데, 모든 것이 가정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그게 잠언서라는 말이죠.

* 먼저 아버지라는 왕부터 !!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잠언서에서는 아버지가 왕인데, 나라의 왕을 섬기기 이전에 가정에서 아버지를 왕으로 섬기는 것부터 훈련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가정보다 더 큰 단위의 국가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방금 살펴본 잠언서 25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살피는 것은 왕의 몫인데, 그러면 이스라엘의 왕이 자기 마음대로 합니까? 그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왕으로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어떤 존재가 있는고 하니, 왕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왕은 분노함으로서 심판을 하는데, 즉 다스린다는 말이죠. 왕의 말을 잘 들으면 생명을 얻고, 그렇지 않으면 계시에 의해서 처단이 된다는 겁니다.

* 보이지 않는 왕을 보이는 왕이 어떻게 섬겼는가?

여기서 정리해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자기를 키우는데, 여기에 보이지 않는 왕,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보이는 왕이 나타나는데, 잠언서에서는 그가 솔로몬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어떻게 왕을 섬겨야 하는고 하니, 그것은 간단하게 드러난다는 말이죠.

그것은 곧 "보이지 않는 왕을 보이는 왕이 어떻게 섬겼는가?" 라는 것인데,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왕인 솔로몬이 어떻게 섬겼느냐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다윗이 어떻게 섬겼느냐는 말이죠.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는 것은 어떤 언약에 의해서 알려지는고 하니, 모세언약을 통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다윗언약을 통해서 이 땅에 구체화가 된다는 겁니다.

물론 모세언약인 신명기에도 약간의 흔적은 있는데, 즉 "왕은 여자를 많이 두지 말고, 율법을 가까이 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다윗시대라는 겁니다. 그리고 왕이 있으면 그 왕을 모실 거처가 있어야 하는데, 왕이 그 거주지를 두고 '성전'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성도의 마음이 곧 성전이 되는데, 그렇다면 그 성전은 자기를 모시는 곳입니까? 하나님을 모시는 곳입니까? 하나님의 모시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다음 질문에 들어가는데,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모셔야 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나의 왕으로!"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자기의 왕으로 모시는 자가 곧 성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옛날에 부흥사들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여러분의 몸이 성전이니까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니 담배를 피우면 안 됩니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구체적으로 한다고 해서, 그런 것이 성전이 아니라는 말이죠. 성전은 자기를 섬기는 곳이 아니고, 왕을 섬기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 몸이 성전이라는 것, 즉 왕을 섬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땅에 태양이 하나이듯이 왕은 하나인데, 그러니 하나님이 왕이라는 것은 자기는 왕이 아니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면 다윗, 혹은 솔로몬이 하나님을 섬길 때, 과연 어떤 태도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겼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역대상에 나오는데, 29장 10절에서 21절을 보겠습니다.

(대상 29:10)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대상 29:11)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대상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대상 29: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대상 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대상 29:16)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대상 29: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대상 29:18) 우리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하시고 그 마음을 예비하여 주께로 돌아오게 하옵시며
(대상 29:19) 또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 주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시고 내가 위하여 예비한 것으로 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대상 29:20) 다윗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매 회중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고 머리를 숙여 여호와와 왕에게 절하고
(대상 29:21) 이튿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번제를 드리니 수송아지가 일천이요 수양이 일천이요 어린 양이 일천이요 또 그 전제라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

* 기도란, 왕이란 인식이 선행되어야 !!

내용이 조금 많은데, 이게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라는 말이죠. 먼저 말씀을 드리지만, 복음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는 분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복음을 알고 나서 기도를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기도는 무엇인고 하니, 왕이란 인식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키우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에게 곧 왕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다른 왕을 인정하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간섭을 받고 통제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평소의 버릇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통제하면서 살아왔다는 말이죠.

다시 이야기를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이 다 자기가 자기를 키우는데, 그래서 자립을 하면 박수를 쳐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천재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아니는 이른 나이에 스스로 설 수 있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동일한 의미로 "우리 아이는 사회성이 있고 똑똑해서, 그 어디를 가도 자기가 먹을 것은 다 챙깁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엄마가 보기에 이 아이는 자기에게는 자기가 왕입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존재가 이 세상에서는 호응을 받는다는 겁니다.

* 하나님 나라 = 왕 + 백성 !!

그런데 어떤 부모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 아이는 정말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자기가 아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이런 아이는 거의 없는데, 그래도 그런 자식이 있다고 하면, 그 부모의 마음이 과연 어떠하겠느냐는 겁니다.

"내 자식을 그만 하나님에게 빼앗겼구나" 라고 하면서 섭섭한 마음이 드는데, 그러면 그 부모는 그만 하나님 앞에서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 나라의 구조는 왕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그것으로서 끝이라는 겁니다. 왕이 되신 하나님은 천사라는 피조물과 더불어서 그들에게 섬김을 받고 있고, 그 섬김에 백성들은 참여하는 식으로 완료가 된다는 말이죠.

굉장히 간단한데, 그런데 천국에 간다고 하면서도 "나는 왕으로서 살고 싶다" 라고 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남아있다고 하면, 그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민주주의 시대의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윗도 그렇고 인간은 모두가 다 자기가 왕인데, '나' 외의 최고의 숭배대상은 없다는 말이죠. 자기를 섬기기 위해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역대상 29장에서 다윗이 한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게 되면, 평소에 우리의 마음가짐이 그야말로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즉 천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이 다윗의 기도내용을 통해서 모두 다 들통이 난다는 말이죠.

여기 11절에 보면,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겁니까?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을 진짜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했습니까? 이 땅에서의 이스라엘 왕인 다윗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표준이고 모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거기서 어긋나면, 그것은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역대상 29장에 보면, 다윗이 기도하면서 초반부터 뭐라고 합니까? "이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다윗의 기도이고, 그 시작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일단 시편 50편을 보겠는데, 9절에서 12절입니다.

(시 50: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시 50: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시 50:11)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시 50: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 고맙습니다 !!

여기 9절에서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라는 겁니까? 주님의 것인데, 그러면 기도는 무엇이라는 겁니까? 우리는 "고맙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누구처럼 '고맙소' 라고 하면 곤란하고(ㅋㅋ), 아무튼 "어제도 주님의 것으로 살았고, 오늘도 주님의 것으로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것으로부터 자기 것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기도할 것이 없다고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나의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기도할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겁니다. 이제는 채워졌으니 아쉬울 것이 없다는 것인데, 하지만 자기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평소에 자기가 독립을 하려고 환장을 했는데, 그런데 그런 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고 천국에까지 가려고 하니,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것을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하는 이상, 천국에는 가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 성도는, 왕을 드러내는 기능인 !!

예를 들어서, 남편이 죽었다고 하면 섭섭한데, 하지만 그 남편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내가 죽어도 역시 그러한데, 그 아내도 주님의 것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냉철하게 생각을 해보자는 겁니다. 이 세상은 자기 홀로 있는 세상이 아닌데, 왕이 버젓이 있다고 하면, 그 감추어진 왕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왕의 기능, 그것이 성도의 기능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성도를 두고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민주주의 세계인데, 자기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이런 세상에서 왕에게 껌벅 죽는 재미, 그런 재미로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라는 말이죠.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 왕의 패밀리 !!

자기의 뒷배가 왕이라는 것, 그런 왕의 든든함, 그러면 성도는 왕자가 된다는 겁니다. 조선시대에서는 정실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를 대군이라고 불렀는데, 후궁에서 태어나면 군이라고 했고 말이죠. 그것을 시편 16편 3절에서는,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시 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왕의 가족이고 패밀리인데, 그러니 그 피가 보통 피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 왕에게 있는 모든 즐거움이 그대로 성도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이 한 때는 죄인들이었다는 말이죠. 죄만 짓는 자들이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패밀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는데, 그래서 그야말로 말문이 막혀서 말을 못할 수는 있는데, 기도조차도 말이죠. 죄인 나부랭이인 주제에 천국의 식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냥 지옥으로 가야할, 진흙으로 돌아가야 할 주제에, 그런데 감히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 왕이 나를 키운다 !!

이것을 그냥 "하나님이 지배하신다" 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왕이 되어주시고, 그분이 친히 책임을 져주시고 통치하신다는 그 관계, 그러한 관계 하나 만으로도, 우리는 이 땅에서 달리 할 말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감사만 나올 뿐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관계는 왕이 주시는 관계이기 때문에 결코 끊어지지가 않는데, 그래서 성도의 경우에는 "내가 나를 키운다" 라는 문장을 "왕이 나를 키운다" 라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런데 바꾸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능력이고 효력이라는 말이죠.

"내가 나를 키운다" 라고 하면, 자기는 늘 자기 안에 사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왕이 나를 키운다" 라고 하면, 자기는 늘 왕궁 안에 산다는 겁니다. 이 왕궁을 신약에서는 '예수 안' 이라고 하는데, 혹은 성령 안, 십자가 안, 그렇게 표현을 한다는 말이죠.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 안에 있었는데, 그래서 죽을 때 활짝 웃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보이는 것을 그대로 전달했는데, 즉 "저것 봐,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시잖아"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자 그것을 듣지 않으려고 유대인들은 귀를 막았는데, 그리고는 돌을 더 큰 것으로 바꾸어서 던져서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그 소리를 멈추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에는, 돌은 돌대로 날아오고 보이는 것은 보이고, 그것을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예수 안이고 성령 안인데,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은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한 달에 몇 십만원 씩을 주고 값비싼 팩을 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다만 제비뽑기를 하는 식으로, '뽑을 뿐' !!

물론 대구에 국회의원 단수 공천을 받은 것도 아닌데(ㅋㅋ), 정치라는 것이 물론 왕을 뽑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왕이 전혀 왕답지가 못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들이 뽑는 왕이기 때문에, 그러한 왕, 즉 대통령이 있어도, 그것은 자기 뽑기 때문에, "내가 왕이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자기들의 뜻대로 해주지 않으면 탄핵을 통해서 끌어내릴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인데, 그러니 민주주의는 "내가 나를 키운다" 라는 것을 극대화한 정치형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키운다" 라는 것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민주주의라는 것은 성경에 없는데, 그것은 마귀가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제직회를 하면서 민주적으로 하자고 하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죠. 제직회는 모든 결정을 말씀대로 해야하는데, 그러니 과반수가 어떻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냥 임의로 선택하면 된다는 말이죠. 인간들은 감추어진 것을 모르니, 제비뽑기를 하는 식으로 뽑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가룟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가 뽑듯이 말이죠.

(행 1: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그러니 그냥 뽑는 것인데,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분이 일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이는 인간의 선택은 무시를 당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제비뽑기라는 말이죠. 즉 "내 뜻은 주의 뜻에 의해서 완전히 무시를 당해야 하는구나"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왜 내가 기도한 대로 응답이 되지 않습니까?" 라는 소리를 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오히려 자기 기도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히 여겨야 한다는 말이죠. "아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라고 하면서, 그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계기로 여기면 된다는 겁니다.

*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다시 역대상 29장으로 돌아와서, 여기 14절에 보면,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즐겁게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을 해주셨습니까? 도대체 이런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는, 그런 뜻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라고 하는데, 즉 "내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니, 내 생명을 주님께 드릴 준비가 되어있을 뿐입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곧 다윗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가짐이고 마음의 자세라는 겁니다.

(대상 29: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 성도의 '하나님 섬김' !!

그리고 15절을 보면,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라고 하는데, 마치 인생이 레이싱을 하는 자동차와도 같다는 말이죠.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았는데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것으로 머무름이 없는 자, 그것이 바로 왕 앞에 있는 성도의 존재성이라는 것이죠.

(대상 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머물면 자기 것이 되는데, 그런데 그런 머무름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누구이며, 또 자기 것이 무엇인지, 그런 것을 알 이유도 없이 그냥 지나가 버린다는 말이죠. 물리학에서 머무르면 입자가 되지만 빨리 지나가면 파동이 되는데, 여기에서 입자라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것이고, 반면에 파동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날마다 어떻게 살아가는고 하니, 자기를 누구라고 하면 그것이 허상이 되고 환타지가 되는데, 그런데 그 환타지를 통해서 무엇을 아는고 하니, 자기가 존재하는 게 아니고, 존재하는 것은 유일한 왕이신 하나님, 그분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의 하나님 섬김이라는 말이죠.

* 아는 것이 힘이다 !!

민주주의 교육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는데, 매일같이 교육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는 손해를 보면 안 돼. 남들에게 지면 안 돼. 그러니 너의 실력을 키워야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보다 뛰어나야, 그래서 뭔가를 소유하고 있어야, 이런 생존경쟁에서 넘어지지 않고 우뚝 설 수가 있어. 그래야 너 스스로 설 수가 있어" 라는 것인데, 그것을 계속해서 학교와 가정에서 가르친다는 겁니다. 자식이 일찍 자립하면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형태라는 말이죠.

여기에 왕은 없는데, 즉 부모의 마음가짐이나 자식의 마음가짐이나 누구를 섬긴다는 것은 전혀 없고, 오직 자기를 자기를 섬기는 것에 꽂혀서 미쳐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키우는 것을 어떤 학자가 아주 압축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바로 '정신병자' 라는 말이죠. 이 세상에 정신병자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 정신병자, 그리고 멜기세덱 !!

그러니 정신병의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데 있어서 그것이 만만치 않아서 병이 드는 것, 그게 바로 정신병이라는 말이죠. 자기를 지키는 것에 세상이 도와주지 않으니, 거기에 대한 분노로서 그만 정신이 혼란해진다는 겁니다. 즉 자기에 대한 분노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정신병자가 정신병자를 진단하고 서로 친하고 지내고 한다는 겁니다. 정신병자와 정신병자 사이에 혼담이 오고가고 한다는 말이죠. 상견례를 하면, 처녀총각도 정신병자이지만, 사돈들끼리도 다 정신병자라는 겁니다. 정신병자들이 한복을 입고 온다는 말이죠. 실제로 상견례를 해보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르는데, 청심환을 먹고 가야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면 정신병자들밖에 없습니까? 그게 아닌데, 정신병자가 아닌 자가 있는데, 그게 바로 멜기세덱이라는 말이죠. 이 땅에서 아비도 없고 자식도 없는데, 영원한 곳에는 있지만 이 땅에는 없다는 겁니다. 사실은 이름도 없는데, 이름 없음의 그 이름이 멜기세덱이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멜기세덱은 위치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창세기 14장에 살렘의 왕이라고, 즉 위치와 직책이라는 말이죠.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이게 절묘한지 모르는데, 이름에는 자신의 이름이 담겨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고향은 흙인데, 즉 대지라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이 대지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런데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피를 흘림으로서, 그렇게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아벨을 누가 죽였지요? 그가 가인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게 절묘하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 땅의 주인을 살인자로, 즉 이 세상을 살인자의 세계로 변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이 땅의 왕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죠. 이 땅에서의 왕이 누구인고 하니, 신약에 보면 그게 마귀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구약적으로, 이렇게 미리 실시하신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살인자를 죽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죽을 자는 누구라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즉 천국과 연결된 자들만의 죽음이 돋보이도록 하는, 그런 세상이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벨이 죽고,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사가랴 선지자가 죽고, 그리고 마지막에 하늘에서는 오신 예수님이 죽었다는 겁니다.

* 멜기세덱, 지상에는 없는 의의 왕 !!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인데, 그런데 이 살렘이란 도시는 없다는 말이죠. 없는 도시의 왕인데, 지상에는 없는 의의 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시편에 보면 그 살렘의 거처가 나오는데, 그것이 곧 하늘이라는 말이죠. 즉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다는 겁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이방인 여부스 사람의 땅인데, 그런데 다윗이 정복하면서 그게 다윗성이 되고, 예루살렘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다윗언약이 사라지면서 예루살렘은 불에 타버리고, 예루살렘은 다윗언약이 완성하는 그 동네, 즉 천국인데, 그 천국에 영원한 도성인 예루살렘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보면,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이죠.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살펴보자는 겁니다. 22절에서 24절을 누가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히 12: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 둘로 나누어진 세계 !!

아벨의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위와 아래로, 그렇게 둘로 나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아래의 땅은 살인자의 손에 넘겨준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제사를 드렸던 자를 죽여버린 자인 가인에게 말이죠. 즉 이 세상은 하나님과 연결된 자가 눈에 띄면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는 마귀가 죽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죽이시는데, 그래서 골로새서 3장 2절과 3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성령이 없는 자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러면 이것을 전체적으로 통합을 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겠는데, 즉 "성령이 없는 자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라는 겁니다. 아까 이미 답이 나왔었는데, 그렇지요. 오랜만에 참석하셔서 정답을 맞추셨는데(ㅋㅋ), 성령이 없는 자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세상에서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고 하면, 그러면 성령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습니까? 성령이 있는 사람도 자기를 위해서 사는데, 그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성령이 없는 자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데, 그게 마감재인데,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있는 자는 여기에 구멍을 뚫게 되는데, 즉 자기를 위해서 사는데, 거기에 주님의 피로서 구멍을 내서 그 구멍에 들어오게 되면,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 그 전체가 죄였음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성령이 있는 사람은 성령이 없는 사람과 똑같이 사는데, 그것이 어떻다는 겁니까? "이것이 바로 내가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나의 죄였구나" 라고,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는데, 매일의 삶이 자기를 위해서 산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세 쌍둥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이 죄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그것은 훌륭한 엄마입니다" 라고 하면 성령이 없는 자이고, "그것도 죄입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성령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세 쌍둥이는 엄마의 손길이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데, 그래도 그렇게 키우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감히 들어올 수 없는 다른 영역 안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의 하나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는 것, 그것이 곧 성령을 받은 자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두고 '성전'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이라는 겁니다.

* 나그네 생활 !!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존재한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다윗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에서 더 나가버렸다는 말이죠. 이것을 '나그네 생활' 이라고 하는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쓱' 하고 지나간다는 겁니다. 머무름이 없다는 말이죠.

주님이 자기를 이곳으로 가게 했고, 그러기 위해서 자기로 하여금 범죄케 했다는 겁니다. 즉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다윗은 그런 자기 때문에 누군가가 대신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시편 51편인데, 즉 "나 때문에 우리야 장군이 죽었구나. 그런데 내가 죽인 그 우리야 장군이 나를 살리는 우리야 장군이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시 51: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그러므로 다윗언약은 다윗이 받았지만, 그런데 그 다윗언약의 실제내용에는 누가 담겨있는고 하니까, 죄 많은 자기 손에 죽었던 우리야 장군이 담겨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전을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짓는 것이 아니고,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낳은 자식, 즉 솔로몬을 차기 책임자로 해서, 그렇게 넘긴다는 말이죠.

그래야 자기가 계속해서 죄인이 되는데, 즉 자기 때문에 죽은 자의 기념관, 그게 성전이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야 장군이 그렇게 죽은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즉 자기 중심의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때문에 누군가를 죽게 하시는 하나님인데, 성령을 받은 자는 그분을 하나님으로서 인식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살아가는 것, 즉 자기 존재를 옹호해주는 하나님은 우상이고 마귀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고, 그것 자체를 죄라고 규정하고 지적해주는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바로 그 하늘나라에 우리가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는 맛이 없는 8,000원짜리 국밥을 먹어도 되는데, 죄인인 주체에 그 정도 대우면 괜찮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ㅋㅋ)

그러니 사람들은 매사에 성령이 없는 것으로 출발을 하지만, 여기에서 진짜 성령을 받은 자는 "아하, 이 세상의 돌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전혀 아니구나"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 멜기세덱 = 왕 + 제사장 !!

여기 교재 192페이지에 보면, '4.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이라고 되어있고, "멜기세덱, 그는 이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자이다"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의 위치가 어디인고 하니까, 이 멜기세덱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말이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천국으로 오면, 여기서 멜기세덱이 보여주는 것은, 왕과 제사장 역할인데, 그 두 가지를 다 보여준다는 겁니다.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멜기세덱의 정체는 우리가 알 수 없는데, 그런데 존재는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존재를 이 지상으로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는 토대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참으로 희한한 인물인데, 즉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라는 것인데, 그야말로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 멜기세덱과 예수님 !!

그러면 이 분이 장차 오실 누구를 닮았습니까?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계시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아버지는 없다는 말이죠. 아버지가 없는데,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의도적으로 일을 할까요? 그것은 기존의 아버지로 인해서 태어난 자들은 가인의 세계에 속한 자들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 가인이 이 땅의 왕 !!

가인은 이 땅의 왕인데,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가인처럼 되려고 애를 쓴다는 말이죠. 즉 "내 앞 길을 막는 자는 누구든지 죽여버리겠다" 라는 행위의 정당성이라는 겁니다. "네가 내 앞 길을 막았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 그러니 내가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할까?"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이 정당화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인데, 왜 그렇습니까? "죽는 너보다 살아야 하는 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그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미안하다" 라고 해놓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상대방의 뒤통수를 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서울강의에서 그런 말을 했지 싶은데, "인간은 결혼 전에도 솔로고, 결혼 후에도 솔로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각자도생이라고 하는데, 어차피 인간은 자기를 버릴 수가 없는데, 그런 팔자를 타고 태어났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감추느냐는 것만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죠.

* 다시, 성령이 없는 자는 어떤 자인가?

다시 반복해서 질문을 하겠는데, "성령이 없는 자는 어떤 자인가?" 라는 것인데, 그런 사람은 거짓과 위선으로 둘둘 말고 말아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것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감히 질문을 해보면, 물론 제가 전혀 그런 자격은 없지만 말이죠.

"교회가 망한다. 그래도 나도 망한다" 라고 하면, 이것을 과연 받아드릴 수가 있을까요? "1번, 받아들인다. 2번, 받아들이지 못한다" 라고 하면, 우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교회가 망하면, 자기는 따로 나가서 살면 된다는 말이죠.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같이 망하느냐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교회와 세상에 있는 교회가 정반대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 세상의 교회는 친목단체인데, 일종의 동호회라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목을 맬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물론 교회가 잘 되면 좋은데, 그만큼 취미생활이 늘어나니 말이죠.

그런데 교회가 망해버리면, 그것은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망해도 자기는 망하지 않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교회는 무슨 용도라는 겁니까? 위선과 거짓을, 즉 자기가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우는 용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자기의 마지막 피난처가 가정인데, 그것을 그만 교회로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가 몇 개입니까? 세상 교회는 가짜인데, 즉 위장용이라는 말이죠. 그냥 다녀주는 것이지, 절박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문을 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가 없는 진짜가 있는데, 그게 가정이든 무엇이든 있는데, 그것을 주님께서는 교회로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성령이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조치를 취해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해주십니까?

그것이 곧 역대상 29장의 다윗의 기도인데, "주여, 교회는 주의 것입니다" 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 식구, 내 가정, 이 모든 것도 나의 것이 아니고 오로지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즉 "내 가정과 내가 가진 것으로 나를 포장하거나 덮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달리 말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왕이지, 다른 것은 달리 필요하지 않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왕만 있으면 족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왕이 주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다시 돌려드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도 왕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역대상 29장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본래 모습을 숨기고 감추고 싶어서, 그런 빌미를 찾아다니는 것과도 동일하다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진짜 교회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인데, 그게 바로 성령의 관계라는 겁니다.

여기서 에베소서 2장을 보겠는데, 20절에서 22절입니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가정과 교회 !!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 사회에서는 그것을 혼인관계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혼인관계가 되면 성전이 됩니까? 그것은 아닌데, 그러면 남편과 아내에게 성령이 오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가정이 아니고 무엇이 됩니까? 하나님의 성전, 즉 교회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남편이 아내에게, 혹은 아내가 남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렇게 되면 역대상 29장의 다윗의 기도내용대로, 그렇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주고 받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여보, 양말을 벗었으면 좀 바로 하고, 그리고 서랍은 열었으면 좀 닫아놓고, 그리고 변기에 오줌을 눌 때 좀 흘리지 말고,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주의 것이니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잔소리를 해도 뒤에 '주의 것'을 붙이면 되는데, 그러면 남편은 "내가 지금 노는 게 아니잖아? 내가 그것까지 신경을 쓸 수 없어. 왜냐하면 나는 지금 주의 일을 하니까"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 것까지 다 일일이 신경을 써야한다고 하면, 차라리 내가 살림을 살 게. 그러면 당신이 나가서 돈을 벌어라. 그러니 나는 지금 주의 일에 바빠" 라고 나오면 된다는 말이죠.

이렇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주고 받는 다정한(?) 대화 속에서 역대상 29장의 다윗언약이 피어난다는 겁니다. 즉 "우리는 둘 다 존재가 아니고, 그러니 머무름이란 없다" 라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오직 주시는 주님만 존재하는 것이지, 다만 우리는 받을 뿐이고, 또한 그분에게 합류될 뿐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 주님께 돌려드린다" 라는 것을 빼버리고, "제발 좀 똑바로 해라" 라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잔소리를 하는 목적, 그리고 그 잔소리를 방어하는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에이 씨, 이 가정이 내 것이지 네 것이야?" 라는 것인데, 물론 속으로 말이죠(ㅋㅋ).

그러니 인간은 결혼 후에도 솔로인데, 자기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많이 참는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너는 내 존재를 강화해주기 위해서 나에게 시집을 왔어"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왕을 섬기는 태도가 전혀 아니고, "내가 왕이다" 라는 것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는 티를 확 낸다는 겁니다. 그럴 때 "과연 성령을 모습이 그런 모습일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그 주도권에 자기에게 있음을 감추기 위해서, 교회에 다면서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라고, 위선적이고 거짓되게 말을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기도가 동원이 되는데, 그렇게 자신을 포장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왕 되신 분께서 거기에 속아넘어가겠습니까? 어떤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여전히 활동을 하시는 주님인데, 그러니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말이죠.

누가복음 19장에 '열 므나' 비유가 나오는데, 12절에서 27절을 보겠습니다.

(눅 19: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눅 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눅 19: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눅 19: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눅 19: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눅 19:17)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눅 19: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눅 19: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눅 19: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눅 19: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눅 19: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눅 19: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눅 19: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눅 19: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눅 19: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눅 19: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여기 27절에 보면 주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라고 하는데, 이게 열 므나 비유의 결론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왕이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그 왕이 이 땅에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이 땅의 왕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가인이 지상의 왕이라는 말이죠. 즉 보이지 않는 사탄의 보이는 형세가 곧 가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이 세상의 왕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여기게 한다는 말이죠.

* 사울 왕 VS 다윗 왕 !!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사울 왕이 망한 것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여겼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사울의 위치에 있었다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극이나 옛날 드라마를 보면, 왕들은 모두들 나라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니, 그때부터 사울 왕이 미쳐버렸다는 말이죠. 그것을 성경에서는 "악신이 들렸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창을 들고 어떻게 합니까? 자기도 자기를 관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악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데, 그러니 사울 왕을 통해서 악신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윗이 보이니, 사울 왕은 그만 창을 들고 다윗을 향해서 던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창에 꽂혀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사울 왕의 뜻이 아니고, 사울 왕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악마의 정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윗을 죽이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다윗을 왜 죽이려고 합니까?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다윗은 이미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것도 몰래 말이죠. 이 세상은 총선과 대선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성신과 악신에 의해서 흘러가고 있다는 겁니다.

(삼상 16:12)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 왕의 나타난 표상이 곧 성도 !!

성령을 받은 사람은 여기에 대해서 감을 잡아야 하는데, 받지 않은 사람은 그게 위선용이지만 말이죠. 이 땅에서 주도권을 가지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러면 주도권을 누가 가져야 한다는 겁니까? 주도권을 가진 왕이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왕의 나타난 표상이 성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귀한 존재인데, 즉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말이죠.

그것이 누가복음 19장의 열 므나 비유인데, 그런데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뭐라고 합니까? 무슨 치한 동료도 아니고, 그야말로 만만하게 보고 귀싸대기를 때리고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는 왕이라는 의식이 없는데, 기도하면 응답을 해주어야하는 씨다바리 정도로 여긴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자기에게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가 주인이고 왕이라는 의미인데, 그런데 이미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어떻다는 겁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 예수님이 왕인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가 누가복음 19장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하는고 하니까, 예수님의 왕 되심을 원하지 않는 자들을 드러내는 절차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즉 "너, 이리 와봐. 네가 나를 왕으로 인정하는지 하지 않는지, 그것을 절차를 두고 파악하겠다" 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테스트를 하시는데, 그 테스트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열 므나 비유' 라는 인데, 그러면 그 테스트를 누구에게 할까요? 주님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테스트를 하실 때, 우리는 당연히 그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 누가복음 19장 27절에 나오듯이, "주님의 왕 되심을 원하지 않는다" 라고, 그렇게 판정이 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어떤 과정과 절차를 밟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느냐는 말이죠. 그 판정의 결과는 딱 두 가지인데, 즉 "예수님이 왕인가? 아닌가?" 라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왕이 무엇인데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 주님의 것 따로, 내 것 따로 !!

이 누가복음 19장을 보게 되면, 물론 사람들은 "저는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합니다" 라고 하는데, 매를 맞기 이전에 순순히 항복을 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악한 종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가 하는 말을 살펴보자는 말이죠.

여기 20절과 21절을 보면,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로 발각을 당한 자라는 말이죠.

여러분은 이런 고백을 보고, 예수님과 같은 안목으로, 즉 "너는 딱 보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구나. 그러니 죽어 마땅해" 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너는 예수님을 무서워할 줄도 아네. 믿음이 참 좋구나" 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어느 쪽이냐는 겁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고, 그냥 아무런 생각도 없습니까? (ㅋㅋ)

성경이 얼마나 세밀하고 친절한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계속해서 감추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인간은 "나는 왕이다" 라는 것으로 끝이 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잔소리는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것으로 이미 자기 인생은 결론을 내었다는 말이죠.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뭐라고 하면 "예~, 예~" 라고 하면서 잘 들어주는데, 그게 악한 종이라는 겁니다.

주인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그래서 그 주인에게 농땡이를 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나옵니까? 조심조심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주인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는데, 그런데 자기 것은 따로 챙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악한 종의 잘못은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의 것 따로, 내 것 따로", 그렇게 구분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 악한 종, '조심조심' !!

그것이 누가복음 19장의 열 므나 비유인데, 주인이 준 것을 곱게 수건으로 싸서, 그렇게 따로 구분을 했다는 말이죠. 즉 주인의 것이 자기 것 안으로 침투가 되지 않도록, 그런 인생을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착한 종이 아니고, 악한 종의 태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가 망가지면 안 가면 되지. 내 가정은 따로 있어" 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면, 그 교회는 자기 위장용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런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고, "일요일에 가는 것은 교회이고, 평소에 내가 있는 곳은 집이다" 라고 구분하는 것, 바로 그 '우리 집' 이라는 것에 주님의 것이 침투했는지, 그것을 주님께서는 물으신다는 말이죠.

현재 모든 인간들은 자기 집의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고 하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생 일구어낸 자기의 가정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TV 하나 침대 하나, 그 모든 것을 자기가 힘들게 고생해가면서 장만했는데,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자기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귀한데, 그래서 남에게 주기가 아까운데, 심지어 자식에게라도 말이죠. 왜냐하면 그런 자기 소유, 즉 '그것들' 속에서 자기 자아가 형성되어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너는 누구야?" 라고 하면, "우리 집에 무엇이 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을 확정짓는 환경을 자기가 그렇게 조성했기 때문이란 말이죠. 교회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 착한 종, '합류되면 끝' !!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은, '착한 종'은 과연 어떠하냐는 겁니다. 착한 종은 역대상 29장의 말씀처럼,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가정과 그 모든 것들이 누구의 것인고 하니, 주님의 것인데, 즉 주님께로부터 왔으니 주님께 드리고, 자기는 나그네의 인생을 살면서 주님께 합류가 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자기에게 있는 TV, 침대, 피아노, 혹은 안마의자까지, 그 모든 것들은 주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즉 주님이 주신 므나, 달란트, 혹은 선물이라는 것이죠. 즉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자기 속으로 들어왔다는 겁니다. 주님의 것이 말이죠.

그러면 착한 종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남기면 됩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의 것이군요" 라고 하면서, 주인이 왔을 때 그러한 고백을 하면 된다는 겁니다. 즉 "주님이 한 므나를 주셨는데, 이렇게 열 므나를 또 남기게 하셨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그런 과정 속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자기의 것이라고 빼돌릴 수가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주님이 한 므나를 주셨는데, 다섯 므나를 또 남기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한 므나를 남기던 두 므나를 남기던, 얼마나 남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한 므나를 주셨는데, 한 므나를 또 남겼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오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악한 종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주인의 것이다" 라고 나오는데, 그것은 자기 것을 따로 챙겨놓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23절에 보면 주인이 뭐라고 합니까?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라고, 즉 "차라리 은행에 두고 이자라도 받지? 뭐했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바꾸어 말하면 "너는 네 것에 신경을 쓴다고, 나의 것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를 않았구나" 라는, 그런 뜻이라는 겁니다. 왕은 '모든 것' 이라는 의미인데, 그래서 시편 50편에서 "모든 것은 주의 것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역대상 29장에서도 그렇고 말이죠.

*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그러면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물어보겠는데,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라는 겁니다. 주의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마귀에게 속해서 자기 것을 따로 챙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와서 침투를 해버리면, 주님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던 것에 대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죄를 누가 씻어주셨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 피로 씻어주셨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인간 말종을 말씀의 완성자이신 주님이 오셔서 피를 흘리심으로, 그 피는 생명인데, 즉 생명으로 바꿔치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고마운 일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바로 그 주님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감사함, 그것이 곧 천국의 왕족, 왕의 패밀리라는 것인데,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보면 멜기세덱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물론 이 땅에서 보면 존재가 없는데, 즉 하늘로 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늘로 가면서 우리가 보여주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왕이신데, 이 땅에 오셔서 희생자의 모습으로, 그게 곧 제사장인데, 즉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왕과 제사장, 그 두 개의 속성을 성도가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오늘날 멜기세덱과 같은 입장에 놓여있고,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독한 우리의 악마성, 그야말로 우리는 거짓으로 둘둘 말아서 살아가고 있는 위선자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새삼 감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왕이 계시고, 그리고 우리는 백성이라는 것을, 그 관계가 어떠한지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깨닫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2,22 오후 3시에 마침.

섬길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매일 깨닫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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