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21강-좀비의 대화

아빠와 함께 2023. 9. 28. 10:16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21강) 미가3:10(좀비의 대화) 20230925b
(강의:이근호 목사)


66페이지 봅시다. 지금 우리가 [십자가를 아십니까] 기도 대목을 보내고 있습니다. 66페이지 미가 3장 10절에서 11절, 거기 나와 있는데,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바로 다윗언약의 내용이 점점 더 풍성해지고 더 깊어집니다. 그런데 아무리 풍성해지고 깊어질수록 더 뚜렷하게 등장되는 것은 뭐냐 하면 시온이라는 곳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예루살렘이에요. 특정 공간이에요.

기도를 할 때 ‘성전이 있는 곳에서 기도하게 되면 내가 응답할게’ 그러니까 성전이 있다면 이게 하늘이라면 하늘에서 성전을 통해서 바깥으로 뭔가 퍼져 나가는 요소가 있어요. 그게 뭐냐?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의 촉수에 걸려들었다 하면 퍼져 나온 다윗언약의 촉수에 걸려들면 다윗언약의 파이프를 통해서 하늘까지 연결되는 것, 그게 바로 언약구조입니다.

언약구조는 바로 이 세상에 나가서 차별성의 확대, 나는 내 백성만 건지고 다른 것은 건지지 않는다. 아까 첫째 시간 같은 것은 지옥에 특화된 존재와 천국에 특화된 존재, 주님 생각은 딱 그것밖에 없어요. 분류밖에 없어요. 그게 최종적이니까 인생살이는 그냥 임시거처에요. 그냥 기차 타고 지나가는 것, 언뜻언뜻 풍경 보이는 것. 최종적인 것은 지옥 아니면 천국 그것밖에 없는데 전부 다 지옥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언약의 촉수에 걸려라. 언약을 보내줄 테니까 언약의 촉수에 걸려버리면 그 사람은 천국에 특화된, 특화됐다는 말은 천국을 위해서 ‘너는 꼭 그렇게 돼야 돼, 그렇게 살아야 돼’ 확정된 팔자에요. 언약 팔자, 언약에 대한 운명. 그것을 위하여 주께서는 눈에 보이는 도시를 하나 설정했어요. 그게 시온이고 예루살렘입니다. 여기는 뭐가 있느냐 하면 성전이 여기 있어요.

성전의 장소에 대해서는 모리아 산, 그리고 아라우나 타작마당, 다윗 당시에 그렇게 돼 있지요. 그전에 창세기 14장에 보면 바로 멜기세덱 살렘 왕, 예루살렘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에요. 성전에서는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수요일에 전에 했지만 두 가지 속성이 있어요. 하나는 왕의 속성과 제사장 속성, 성경에서 제일 어렵다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거는 강한 사람만 알 수 있고 젖을 먹는 연약한 사람은 모른다고 하고 그걸 뗀 사람은 알 수 있는 그 대목이 멜기세덱 하는 대목이에요. 어느 점에서 이게 이해하기 어렵냐 하면 멜기세덱 이야기가 힘든 이유는 그것 때문에 그래요. 맹세란 것의 이해에요. 맹세는 두 사람이 있어야 맹세가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맹세한다는 것은 사람보고 맹세하는 게 아니고 사람 들으라고 맹세한 것도 아니고요. 하나님이 맹세한 그 맹세, 하나님께서 맹세 받을 사람을 정했다는 그 사실과 두 번째, 그 맹세는 취소되지 않는다는 맹세 이야기, 그 두 가지 맹세는 계속 거짓 없는 두 가지 맹세라 했어요.

맹세할 자를 등장시키는 것, 하나님이 분명히 약속 지킨다는 거예요. 그 약속대로 이 땅에 메시아가 오셨잖아요. 약속 지켰지요. 두 번째 뭡니까? 그분이 그냥 놀려고 오셨습니까? 뭔가 일을 하지요. 그 일이 뭐냐 하면 아버지가 맹세한 것은 자기 선에서 다 이뤄내는 일을 거짓 없으신 하나님께서 이 둘을 이룬 거예요.

세상에 있는 바알 신이라든지 부처, 이런 신들은 뭐냐 하면 거짓 없다, 참되다, 선하다 하는 것은 어느 관점이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 관점으로 보기에 선하고 착하고 바르고 거짓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건 아니고 인간이 거기 끼어들면 안 돼요. 주님 보시기에 아버지가 거짓이 없으신 거예요. 인간은 배제되고요. 주님 보시기에 그런 거예요.

다만 그 맹세가 인간에게는 다행스러운 것이 역사적 사건과 상황으로 역사 속에 실제로 나타났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한테는 별 인기 없겠지만 믿는 사람한테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이거는 최고에요. 최고 정도가 아니고 그게 전부에요.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맹세는 거짓이 없다는 것을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확언될 수 있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제가 이렇게 하면, ‘그 십자가 안 봤는데, 부활한 주님 나한테 안 찾아왔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나한테 찾아올 리가 없지요. 배제된 나한테 왜 찾아옵니까? 찾아오는 게 아니고 나한테 침공하지요. 나는 부활한 것을 봤으면 좋겠다는 뺨을 때리는 거죠. ‘네가 건방지게 그걸 보려고 해.’ ‘봐야 믿지요.’ ‘네가 왜 믿어야 돼, 네가? 내가 묻는 건 그거야. 네가 굳이 믿어서 네가 왜 구원받아야 될 이유를 네가 한 번 대봐라.’ 없지요, 없어요.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을 약을 올리는 거예요. ‘날 데리러 와봐라. 나 여기 숨어있다. 날 찾아봐라.’ ‘너 죽여 삐린다.’ ‘날 잡아봐라.’ ‘잡히면 죽여 삐린다.’ 경상도 남자. 슬로우비디오 일부러 천천히 가는. ‘오늘 잡으면 죽인다.’

언약은 모든 인간의 이해와 믿음을 배제하는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세계 나름대로의 있음과 없음을 이미 굳혀놨어요. 선악체계로 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했기 때문에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있는 것만 있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이 말은 더 나가서 있음을 지켜야 되고 없음을 없앤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있을 흔들리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속히 반역자로서 없어져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을 없앴다는 말은 있음을 더욱더 강화하겠다는 취지였습니다. 정치적 취지일 수도 있고요. 역시 있는 것이 있어야 돼. 왜? 있음 속에 나도 있으니까 있는 것만 있으면 돼, 라고 하는 곳에 인간에 의해서 없어진 그쪽에서 새로운 있음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미리 보여줬어요.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뭐냐 하면 제사장이 있거든요. 이 제사장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왕이 있잖아요. 왕도 없어져요. 그게 호세아 13장에 나오는 데 찾아봅시다. 11절 누가 읽어봐 주시겠습니까?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이게 뭐 이야기에요, “도대체 누가 왕을 달라 했습니까?” “왕 줄게.” “왕 없어도 되는데.” “준다니까 내가.” “왜요?” “내가 화를 냈거든.” “그럼 주세요.” “아니. 준 것 폐해버린다.” “왜 줘놓고 뺐습니까?” “내가 화가 나거든.” 이게 뭐예요, 도대체? 현재 없는데 왕을 줬잖아요. 그럼 왕의 있음은 있음에 포함돼요.

지금 인간들은 있음을 지키려하고 어쨌든 간에 있음은 어떻게 문제가 있더라도 있음은 무조건 있어야 된다, 라고 내가 우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속성을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있다가 없앰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럽게 있다는 사실을 까발려주는 겁니다. 이건 있어도 있다고 더러워서 말 못한다. 정말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는 생각을 주님께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자기 진실을 보여준 거예요.

그 진실을 보여줘서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망해야 돼요. 그러니까 망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망할 자로 우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망함을 받아들이면 돼요. 망함을 받아들이면 그 망함의 요소, 내가 없어지는 요소지요. 왕도 없어지고, 그다음에 제사장은 왜 없어지는가? 왕이 등장하니까 제사장이 없어지는 거예요. 왕이 등장했다는 말은 왕이 제사장보다 더 높은 제사장이 됐다는 뜻입니다. 언제부터? 다윗언약부터.

이걸 이렇게 그림 그릴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왕이 없었어요. 하나님이 직접 왕입니다. 밑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가 처음에 총 몇 지파였습니까? 열세 지파. 요셉 지파가 므낫세, 에브라임 둘로 나눠져요. 땅도 둘로 나눴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땅, 갈릴리 바다와 사해 여기까지 100킬로라 했지요. 사해 꼭대기에서 서쪽으로 가면 예루살렘 지점이에요. 요단강이 이렇게 있는데

이 땅을 열두 지파가 분배받잖아요. 아셀 지파, 스블론, 납달리,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 여기 유다 지파, 시므온 지파, 단 지파 있는데 이들 지파 다 분배해봐야 열두 지파에요. 한 지파가 붕 뜨잖아요. 한 지파는 어디 가느냐? 여기 48군데 건포도 파이에 건포도 꽂힌 것처럼 전체에 다 꽂혀있습니다. 그러면 이건 위에서 보면 이렇게 돼요.

옆에서 보면 이게 땅덩어리라면 위에 뭔가 약간 메가 지파, 더 큰 지파, 더 위에 있는 메타 지파로 레위 지파가 다른 열두 지파를 관장하게 되지요. 그럼 레위 지파는 뭐냐? 하나님이 계시는 거예요. 왕이 있어요, 없어요? 처음에는 왕이 없어요. 처음에는 하나님과 레위 지파가 직접 만납니다. 레위 지파가 하나님 만날 때 다른 지파는 하나님 만나는 장소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너희들은 저리 가라, 저리 가.’

레위 지파가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가 그게 성소거든요. 그럼 성소를 유지하기 위한 유지비용은 어디서 오느냐? 열두 지파가 각 지파가 담당을 해줘야 돼요. 그럼 열두 지파가 담당하는 비용은 어디서 대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열두 지파에게 소산의 생산물을 내게 합니다. 약속의 땅에서. 그 생산물 중에서 십분의 일을 레위 지파 몫으로 떼어주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열두 지파는 자기 돈을 내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맡겨둔 돈 중에서 십분의 일만 레위 지파 주고 나머지 십분의 구는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가 가지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 쪽에서 열두 지파, 레위 지파 먹고 살고 하나님께 드리고 순환되거든요. 만약에 이 순환구조에서 열두 지파가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안 낸다, 안 내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께서? 이 파이프를 끊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에게 밥 먹고 사는 파이프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끊어버리니까 레위 지파가 못 살게 돼서 힘들게 됐지요. 레위 지파가 그만 제사직을 못해요. 왜? 돈을 안 내니까. 그러니까 끊어버리니까 열두 지파가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끊어졌구나. 회개하고 다시 십일조 드려야지, 이렇게 나왔겠어요, 아니면 다른 방도를 취했겠습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다른 방도는 뭐냐? 왕을 달라는 거예요. 왕을 달라는 겁니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왕으로 세웠어요. 하나님이 세웠어요. 왕을 줌으로서 분노해서 사울 왕을 주고, 분노해서 사울 왕을 폐해버린 거예요. 왕을 준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굳이 농사지어서 먹고 살 필요까진 없다. 그럼 뭐냐? 왕이 있음으로 이제부터 장사해서 무역해서 먹고 사는, 이게 특화사업을 특화작물을 만드는 거예요.

특화작물은 먹고 사는 게 아닙니다. 자급자족을 위함이 아니고 다른 나라에 수출할 농산물을 만들기 위해 하는 거예요. 이 작업을 하려면 국가적으로 지원되는 관개시설과 막대한 투자가 있어야 돼요. 축협이 있어야 되고 농협이 있어야 되고 거기에 한국은행에서 자금을 대줘야 돼요. 설비하려면 돈 들고.

왜냐하면 수출한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이런 제품을 우리가 살 것입니다. 이런 제품 만들어놓으면 사고, 이런 제품 하자 있으면 안 삽니다. 이러니까 수출한다는 자체가 누구 말 듣느냐 하면 다른 이방민족의 말을 들어야 돼요. 이방민족의 바이어들이 와야 되겠지요. 이방민족의 말을 들으려면 그쪽과 모든 사상적인 교류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방민족의 바이어들이 이스라엘에 오게 되면 그들이 ‘나는 여호와 안 믿는다. 고향부터 우린 바알 섬겼다’ 하면 그 이방민족의 공주나 간부급들이나 장사꾼들이 평소에 섬길만한 회당이든지 그쪽 신전을 짓도록 나라에서 왕이 허락을 해줘야 되잖아요. 허락해주면 저희끼리만 예배드리고 맙니까, 아니면 전파를 해요? 또 우리 바알 신을 믿으라 해서 전도한다고 돌아다니죠. 중국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그것 아닙니까. 믿으면 한족끼리 믿지 왜 한국 사람이 전도하느냐, 하고 다 잡아가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농경지에서 나온 그걸 잘랐잖아요. 농사해서 못 먹고 사는 거예요. 하나님이 잘랐으니까. 그들은 장사하는 것이 희망 있다는 것을 주변 나라를 통해서 알 수 있단 말이죠. 여호와 안 섬기고 바알을 섬겨도 잘만 살더라. 하늘 황후를 섬겼더니만 여호와 섬길 때보다 더욱더 우리가 번창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가 나무랐어요. 그런 우상 섬기지 말라 하니까 여자들이 하는 말이, ‘남편이 허락 없이 우리가 섬겼겠습니까’ 하고 남편 탓으로 돌려요.

이스라엘의 사회경제구조가 이 구조에요. 하나님의 만나, 말씀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말씀이 중요하지 않고 내 생존이 더 중요한 거예요. 이걸 향하여 율법은 기차를 몰았던 거예요. 기타를 달리게 한 거예요. ‘율법을 네가 지킨다고? 네 꼴이 이런 꼴인데, 네 본색은 밥 먹고 사는 게 전분데 구색 맞춘다고 어딜 율법을 지켜? 네가 말씀을 지키려면 레위 지파를 살려야 되고 살리려면 십일조를 내야지. 안 내는 것 봐.’ 욕심을 낸 거예요.

주께서는 십일조를 할 수 있는 원 토지의 모든 그걸 잘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기적을 믿으라는 거예요. 네 기억, 농사 이렇게 지으면 되고, 믿지 말고 기적을 믿어야 돼요. 베드로가 고기 잡을 때 이렇게 잡아야 된다는 자기 기억을 믿지 말고 베드로는 기적을 만나야 돼요. 기적은 오래 가질 않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그냥 실실 웃지요, 해놓고 5분 뒤에 울고 있는데.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이래 된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왕을 허락해요. 왕을 허락해야 말씀이 점점 더 진전이 일어나는 겁니다. 말씀의 진전. 레위 지파가 다스리는 여기에 사울 왕이 있습니다. 사울 왕을 폐하지요. 사울 왕을 폐할 때에 누구에 의해서 폐하느냐 하면 어른이 아니고 소년 다윗에 의해서 드디어 사울의 왕국이 서서히 어둠이 짙어지도록 만들어버려요.

어두움 하니까 생각나는 게 어제 오후예배 때 요엘 2장 2절, 여호와의 날이 여호와가 등장했다. 얼마나 밝을 것이고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아니죠. 여호와가 왔는데 그 날은 조명시설이 다 날아간 갑자기 정전된 깜깜한 어두움이 가득, 어둡고 깜깜하다는 것은 율법이 완전히 힘을 못 쓰는 그런 세상 모든 악한 것들의 활개 치는 세상, 오직 죽음 찔러 죽이는 그것만 세상, 그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날을 여호와의 날이에요.

여호와께서 시켜서 이스라엘 멸망시키는 날이 여호와의 날인데 그 여호와의 날이 이스라엘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온 지구상으로 다 퍼지게 돼 있어요.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여기서 불꽃이 가만있으면 되는데 이게 튀다보니까 불꽃이 튄 전 세계가 전부 다 불바다가 되는 그 구조로 주께서 몰아가는 거예요. 끝까지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을 이용하는 거예요.

흩어지게 만들어서 전 세계가 흩어진 장소 하나가 바벨론이 되게 만들어요. 짐승의 나라가 되게 만들어요. 구약성경 그렇게 보면 어렵지 않아요.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킴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은 언약적 입장에서 자기 정체가 짐승의 나라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짐승의 나라를 정복한 나라도 두 번째 짐승, 세 번째 짐승, 마지막 짐승이 뭡니까? 네 번째 짐승 로마제국의 잔재들, 로마제국의 부스러기들이 오늘날 219개 나라들이에요, 전부 다.

로마의 특징은 인간의 힘으로 버티는 세계, 그 세계의 원천은 그 당시 최고의 바벨론의 통치방법을 그대로 원칙을 인수인계한 겁니다. 바벨론 통치방법이 어떠냐? 약한 다니엘과 세 친구를 갖고 노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는 거기에 현재 숨어있는 짐승의 권력들이 언약의 백성, 다니엘과 세 친구와 어떻게 맞닥뜨리느냐로 들춰내지요.

권력은 권력을 위해서 권력이 있는 거예요. 따라서 아무리 다니엘이 개인적으로 훌륭하더라도 국가권력의 안정과 확고함을 다지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다니엘과 세 친구는 죽어야 되는 거예요. 죽이는데 다니엘 세 친구 죽었지요. 죽었는데 다니엘 세 친구가 살아 있다는 게 어디서 등장합니까? 불 밖입니까, 불 안입니까?

불 속에서 세 사람이 살아 있었고, 거기에 없었던 존재, 제4의 사나이, 네 번째 사나이, 마치 천사 같은 사나이, 사람의 아들 같은 모습인데 사람은 아니고 사람 같은 분이 네 번째가 같이 다니엘 세 친구와 불 속에서 춤추고 있었어요. 라스트 댄스, 당신과 함께 마지막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 불 밖에 보이게 된 거예요.

사람들은 다니엘 보고 하지요. ‘야, 기적이다!’ 기적은 윤석열이 기적이고, 이재명이가 기적이에요. 그 기적의 확장이 오늘날 정치세계라니까. 힘과 법이라는 조항과 법으로서 조직화된 권력구조, 그게 우리는 지금 기적을 보고 있는 거예요. 지옥에 적합하게, 적당하게 조직된 지옥의 모습을 우리는 지옥 안 가면서 지옥을 보고 있는 겁니다.

지금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사울 왕이 있었다는 이야기죠. 사울 왕이 소년 다윗에게 추방됩니다. 소년 다윗에게 추방되면서 여기서 약간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사울이 왕이 될 때 하나님의 신이 임했는데 이게 한시적이에요.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왕이 되었던 사울 왕이 다윗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신이 뭐로 변하느냐 하면 악신으로 변해요.

다윗 만났다 하면 옆에 창 들고 와서 다윗에게 그냥 던져버렸어요. 다윗이 피하지요. 자기 딸을 줘놓고 사위 삼아놓고 사위 못 죽여서 환장을 해서 자기 딸 미갈이 꾀를 내서 인형으로 이불 덮어서 사울 속였을 때 ‘너 우리와 같은 편 아니냐?’ 다시 말해서 ‘너 나와 같은 편인데 왜 속이느냐?’ 다윗이 힘이 세서 날 억제하고 내뺐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지요.

하나님의 신이 악신으로 변한 거예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동일인인데 어떻게 성신 받은 자가 악신이 될 수 있느냐? 거기 납득할 만한 논리를 제공하세요,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거는 사울 왕으로 설명하면 안 돼요. 짝패라고 짝패. 장갑처럼 짝이 있잖아요. 양말도 짝이 있고.

사울 왕이 만든 자리는 무슨 자리냐 하면 인간이 왕 달라고 해서 만든 자리가 그 자리에요. 그런데 다윗의 등장은 인간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악신의 자리로 규정하겠다는 성신의 통보입니다. 인간이 만들었다는 그 자체가 내가 지시하지도 않은 걸 인간 만든 거예요. 아까 정치적 사회적 구조는 제가 말씀드렸지요.

레위 지파를 우습게보고, ‘너희들은 힘들게 농사짓지도 않고 강냉이나 땅콩 얼마나 힘든데 이런 것 하지도 않고 너희는 예배드린다, 십일조 내라 이건 깡패도 아니고 다 뜯어내고 말이지. 너희 하는 게 뭐가 있다고 십일조 내라 하느냐. 못 준다. 너희 제사하는 것 나도 하겠다.’ 진짜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제사장이 힘세서 하는 게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건 누구나 안 돼요.

그들 레위 지파와 제사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있는 곳에서 일한다는 것은 이건 아무나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용역을 써야 하청 줘야 하는 일이에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보기에는 아무나 하는 것 같아요. 설교? 그것 나도 하겠다. 설교 베껴서. 아나운서? 용팔이가 하면 음성 좋지, 김용팔.

악신을 추방하면서 여기서 다윗에게 그것도 여덟 번째 아들이에요. 이새의 아들 하면서 성령이 임해요. 그러면 다윗이란 존재는 이스라엘에게는 없었습니다. 사울이 왕이기 때문에 다윗 존재는 그냥 미미한 있으나 없으나 한 존재에요. 그리고 형제들도 심지어 아버지 이새도 소년 다윗은 별 의미 없는 거예요. 사무엘이 가서 이름 부를 때 별 의미 없는 걔를 찾아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괄호언약, 비어있어요. 비어있는 언약은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인간이 왕을 달라는 것은 악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왕 자리가 주어지게 돼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이 왕을 달라는 것은 나의 왕 됨을 거부했잖아요. 나의 왕 됨이 사울을 추방하고 나의 왕 됨을 드러내는 자리가 인간의 왕은 잘못이다, 나의 왕 됨이 옳다, 라고 두 개의 복합적인 내용을 품은 자리가 다윗의 자리며 이 다윗의 자리가 뭐냐?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 자리에 있으면서 다윗은 성전을 못 짓습니다. 놀랍게도. 이제 성소는 뭐냐? 왔다리 갔다리 하거든요, 언약궤가. 신명기에 보면 한 자리에 있어야 돼요. 영원한 자리가 마련되고 거기에 하나님이 그 이름이 있을 때 모든 하나님의 일은 마감이 돼요. 끝나요. 그런데 다윗이 보니까 언약궤가 한 때 돌아다니까 모셔야 되겠다는 거예요.

언약궤가 전쟁의 최고 무기, 수소폭탄 열 배나 강렬한 무기 아닙니까. 그 무기가 천대 받고 좋지 않게 있으니까 자기가 모시겠다는 겁니다.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다윗에게 솔로몬이 나타나야 돼요. 문제는 솔로몬이 나타나려면 다윗이 무슨 죄를 범해야 될까요? 간음죄로 모자라요. 간음죄로 안 돼요. 살인죄가 저질러져야 돼요.

다윗이 이 자리에 있을 때는 왕 달라는 것만 나빴어요, 인간들이. 그런데 인간은 왕을 달라는 것이 왜 나쁘냐? 인간 자체가 썩었다는 걸 모르고 그냥 왕 줌으로서 하나님이여 저를 보호하면 안 됩니까? 네가 뭔데? 저 괜찮은 사람이에요. 진짜 괜찮을까? 다윗을 통해서 인간은, 맨날 잊어버린다. 그때 몇 명 죽었어요? 다윗이 인구조사해서. 이왕 한 것 보고 갑시다, 시간 가더라도. 난 이 시간이 아까워. 사무엘하 24장, 일단 칠만 명으로 갑니다(15절).

다윗이 숫자 안 헤아렸으면 안 죽을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숫자 세나 안 세나 죽어야 될 인간들이에요. 죽어야 될 인간을 살린 거예요, 다윗 보고. 그런데 사람들은 왕이여 우리를 안 죽게 해달라고 왕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 인구조사를 고집부리면서 심지어 요압이 말려도 함으로써 결국 들통 난 게 뭐냐? 다윗부터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죽는다한들 왜 죽이십니까, 말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살려내십니까? 죽어도 되는데 왜 살려냅니까, 라는 질문을 그렇게 해야 돼요. 왜 죽이십니까, 하지 말고 남은 자는 왜 살아있습니까, 로 바꿔져야 돼요. 지금 인간들의 제일 큰 문제가 이겁니다. What can I do?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니까요. 그거는 네가 살 자격이 있다고 하는 경우에 나올 거예요. 네가 지금이라도 죽을 수 있는데 오늘 마지막이라고 합시다. 이 이야기가 죽는 일만 남아있는데 뭘 할 수 있어요, 뭘. ‘죽어라, 그냥.’ 그냥 죽으면 끝날 문제에요.

그냥 죽으라는 것이 뭐냐?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대표로 그걸 합니다. 이게 죽고 사는 것은 인구조사와 관계없이 처음부터 이 백성이 죽어 마땅한 백성이구나, 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주께서의 관심사는 언약에 있었지 이 백성에 있었던 게 아니었어요. 그리고 다윗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에게 있었던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인데 못난 나, 살인자, 간음한 자, 못난 나와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의 꽃봉오리로 사용했어요, 다윗을.

꽃봉오리로 사용해서 다윗을 키운 겁니다. 그 꽃봉오리로 올라온 것이 뭐냐 하면 솔로몬이었어요. 그때부터 성전이 있게 됐고 성전이 있음으로서 무슨 의미가 영원한 의미로 가느냐 하면 시온과 예루살렘이 처소가 영원한 처소가 돼요. ①이 처소는 어떻게 됐다? 영원하다. ②이 처소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게 시편에 나와요.

①번 영원한 처소가 된다는 것은 다윗의 죄 때문에 다윗언약을 구축하게 되었고 이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죠. 어느 정도로 영원하냐 하면 한 번 준 성신을 내가 거두지 않고 계속 주겠다는 게 예레미야, 에스겔에 나와요. 그땐 네가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고 영원히 성신이 어디서 나온다? 이 다윗언약에서 나와요.

그런데 아까 호세아 13장 11절 있잖아요. 내가 분노함으로 왕을 주고 분노함으로 왕을 폐했지요. 내가 분노함으로 성전을 주고 분노함으로 성전을 불태워버린 거예요. 남는 것은 뭡니까? 남은 것은 영원한 것은 내가 따로 꼬불쳐놨지. 그게 에스겔 마지막에 나오는 성전 만들기, 여호와삼마.

지금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본인을 자꾸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관심사가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지 나한테 관심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나한테 관심 있다 보니까 어제 오후에도 했지만 인자, 예수님의 이름은 이름이 없어요. 그냥 인자에요. 사람의 아들이에요. 사람의 아들은 이름이 없어요. 예수란 이름은 인간에게 차용한 거고 인자는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으니까 너도 나처럼 이름이 없어야 산다는 거예요. 네 이름이 없다는 거예요. ‘내 네 이름 없앨 거야.’

그런데 이름이 없다는 말이 뭔 뜻이죠?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모든 이름은 존재할 때 붙이거든요. 아담이 지나가는 짐승들 이름 지을 때 다 존재하기 때문에 이름을 붙였고, 대자연은 자기 이름 붙임에 대해서 묵묵히 수용했습니다. 인간이 반응했지요. 선악과 따먹었겠다고. 고분고분하지 않았어요. 악마와 인간만큼은 반발했고 다른 대자연은 탄식하면서도 그 이름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원래 옳은 거예요. 그렇게 해야 돼요.

주의 이름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주의 이름 자체가 이 세상에는 이름이 없는 분이에요. 없어질 분이고 없어질 분으로 오셨고 일시적으로 오셨다가 다시 도로 본래로 없어진 분이에요. 우리 인생도 이 땅에 있을 때 이름이 있지만 없어질 이름이에요. 죽어도 부르다가 죽을 이름이 아니고 그냥 없어질 이름이에요.

잉태한 자기 때문에 이름이 잉태한 자로 이름이 붙지만 아버지의 대를 잇지만 우리는 잉태치 않은 자로 변경되면서 이름도 같이 예수님처럼 이름이 달라져야 되는 거예요. ‘너 이름 뭐고?’ ‘이 땅에 이름 없음. 이게 이 땅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아.’ 나중에 나이 백 살 넘으면 존재하지 않아요. 구십구 세 해서 코로나 걸리면 날아가 없어요. 이름도 없어요.

자꾸 이름을 기념하지 마세요. 주기철이고 손양원이고 안중근이고 유관순이고 하지 마세요. 이미 없어진 거예요. 인간은 없어지라고 이 땅에 있는 겁니다. 다만 없어지는 가운데서 이름만 얻고, 주의 이름만 얻고 나는 없어지고. 그러면 내 몸뚱이는 주의 이름만 걸 맞는 부활의 몸으로 우리가 입을 겁니다. 엘리야와 모세처럼 변화 산상에서.

인간들은 결국 있는 것만 챙기지요. 그게 뭐냐 하면 베드로가 제시한 초막, 예수님을 초막에 살라고 되겠어요, 이게. 베드로가 뭐라 합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거기 살겠어요? 불태워버려야지. 성전이 불타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불타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는다. 왜?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이 대자연 속에 있는 거예요. 지금 대자연이 불타버린다면 마땅히 성전도 불타야 되는 거예요.

그걸 앞당겨서 이스라엘에게 경험케 한 겁니다. 주의 이름이 있는 성전도 불타는구나. 그럼 주의 이름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했을 때 다윗언약에 의하면 주의 이름은 어디 있느냐 하면 너희들 속에 있어요. 에스겔에 나옵니다. 어떤 너희들? 약속의 땅에 있는 너희들? 아니. 포로 잡힌 너희들. 포로 잡힌 너희들 속에 내 이름이 있을 것이라 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애굽이냐, 약속의 땅이냐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백성이 있는 곳에 주의 이름이 함께 있는 거예요. 너희들 가운데 내가 있느니라. 누가복음에 나오는 말씀이에요(17:21).

그러니까 이거는 어렵다는 것을 더 능가해요. 왜냐? 보이지 않는 분을 있다고 상상은 할 수 있어요. 그게 꽤나 인내심을 가져도 언젠가는 ‘아이고 괜히 망상을 하고 있다. 이 망상병 언제 고치나’ 이래서 ‘역시 눈에 보이는 게 다지, 뭐’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상상은 할 수 있으되 그 상상은 눈에 보이는 폭풍에 다 묻히고 마는 겁니다.

‘참 많이 해봤다. 종교생활 많이 해봤는데 교회생활 많이 해봤는데 역시 남는 것은 이 세상에 내 몸뚱이 하나만 남더라.’ 속에는 본심이 그대로 나오는 거예요. 아무리 찬송가, 찬송가 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나한텐 나훈아보다 더……. 청춘을 돌려다오, 본심.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이게 잉태된 값을 하는 거예요. 우리 육신을 우리 믿음이 이겨내질 못하는 겁니다. 내가 자꾸 말씀을 지키려하니까 내가 지킨 말씀은 내 육신한테 항상 막히게 돼 있고 먹히게 돼 있어요. 지식으로만 남다가 나중엔 그 지식마저 다 건망증 걸리고 치매 걸려서 다 날아가게 돼 있어요. 찬송가 몇 장이더라, 다 날아가 버리고 성경 다 날아가 버려요. 수집한 게 아무 소용없어요.

그렇다면 제일 큰 문제, 믿음은 뭐냐? 그 믿음도 내가 조작한 믿음이잖아요. 내 두뇌에 성령에 비례해서 같이 날아가 버리면 이제 믿음조차 없다, 어떻게 할 건데? 보통 문제 아니지요. 강의 끝낼까 여기서. 아니지요, 아니죠. 끝내면 안 돼요. 그게 그동안 우리가 믿음조차 날아간 게 아니고 우리가 방해한 거예요.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니까요. 제 이야기 아닙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다음에 그리하면 네게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너한테 제공하겠다, 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돈을 탐내는 이것이 뭐를 방해한 게 되느냐 하면 지금 그 나라와 의를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믿음으로 천당 가겠다는 내가 주님이 하는 일을 훼방하고 방해해 온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방해를 피하려고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5장에 햇빛 누가 줬지, 비는 누가 줬지, 너 세금 내고 비 받았어, 네가 돈 내고 두 시간만 쬐고 그렇게 살았어? 이게 뭐냐 하면 큰 세계가 있다는. 나는 나 살다보니까 내가 구상한 세계, 내 조직 세계가 작아도 너무 작아요. 너무 작아도 호두껍데기처럼 단단해요.

내 안에서 내가 빠져나올 생각을 안 해요. 마치 나의 요람 같아. 아지트, 토치카. 내 공간만 고집해요. 젊은 애들이 점점 증세가 심해져요. 이 안에서 개와 고양이와 살고 있어. 바깥의 어른들 하지 말라는 거예요. 결혼식 해도 지가 셀프 주례해버리고. 말도 안 되는. 아버지, 엄마가 들러리라. 평생 키워줬는데 들러리로 서고 지가 그날의 주인공이에요.

그래서 주일날 그런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역사를 원하는 게 아니고 전설을 원한다고. 본인이 전설이에요. legend에요. 제가 레전드 되기를 원했어요. 점점 더 심해갑니다. 큰 세계, 주님께서는 큰 세계, 큰 그림, 큰 프레임, 큰 테두리 이것을 말씀을 통해서 침공하지요. 침공하게 되면 그 부활의 능력으로 오기 때문에 택한 백성 성도는 뭔가 깨어져요. 그게 깨진 게 몰락이요, 파괴에요.

‘내가 이미 큰 세계 속에 포함이 됐는데 그것도 모르고 마귀한테 속아서 작은 내 세계를 그렇게 결사적으로 죽기 살기로 내 세계를 고집했구나.’ 오메가3에다, 오메가6에다 좋다는 것 먹어가면서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주님께서는 큰 세계를 위해서 자기를 섬기던 나사로 가정의 나사로 오빠를 대표로 죽여 버리죠. 죽이고 살려내 버립니다. 이게 큰 그림이에요. 작은 그림이 아니고.

이게 뭐냐? 두 가지지요. 하나는 영원함의 큰 그림, 또 하나는 죽어도 사는 것. 그걸 예수님께서 먼저 시범조로 보여줬습니다. 죽으시고 사시고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그리고 이 영원한 것을 하늘에 있지요. 따라서 우리를 뭐로 보느냐? 이 큰 그림 속에서 하나의 나그네로 보는 거예요.

이렇게 보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거리를 무슨 거리인가? 이 거리 내가 적어왔는데 거리 이름이 나와요. 켄싱턴 에비뉴 필라델피아의 마약거리, 3킬로미터 거리에 전부 다 경직되어 마약, 펜타닐 복용하고 모습 나오지요, 동영상. 전부 다 엎어져있는 거예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고 늙은 사람들이고 전부 다 마약중독자 됐어요.

어떤 마약? 세상 것이 마약이 됐습니다. 기독교 가정, 목사 가정 말 안 듣습니다. 먹혀 들어가지도 않아요. 마약에 취해서 다른 맛은 맛으로 보지 않아요. 그리고 젊은 엄마들도 얘를 세상 것으로 우수하게 만들기 위해서 마약을 계속 주입해요. 영어도 마약, 1등해야 되는 마약, 수영, 태권도 그것도 모자라면 캐나다 이민 가서 아버진 돈 벌라 하고 지는 아이 교육시킨다고. 이게 마약이에요, 마약.

전부 다 뼈마디가 류마티스 관절염처럼 경직돼 이러고 있어. 그 모습을 보세요. 켄싱턴 거리, 마약거리 치면 나와요. 좀비들이에요. 오늘 제목을 좀비 거리. 좀비 이야기 아니면 어디에도 뉴스로 안 나와요. 모든 대화가 좀비들끼리 대화가 전체 내용입니다. 이 세상이. 그냥 세상에 갇혀있어요. 벗어난 게 없어요.

쓴 잔을 약으로 줘도 펜타닐은 마셔도 이건 안 마셔요. 쓴 잔을 안 마신다고요. 복음의 십자가를 안 마셔요. 심지어 교회 내에도 마찬가지에요. 복음 전하면 안 듣습니다. 전부 다 애써 자는 척들하고 있어요. 우리교회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세상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예수님의 살과 쓴 잔과 피와 그게 안 들어와요. 다 안다는 거예요. 옛날에 다 해본 알고 믿습니다, 하고 있다고요.

그러나 사실은 뭘 원합니까? 마약을 원해요. 세상 것, 그리고 세상 것이니까 특징은 뭐냐? 쭈그러들어요. 수축해요. 내 세계로, 철저하게 내 세계로. 나만 내 세계 지키니까 말 통하는 개와 고양이만 키우는 거예요, 집에서, 계속해서. 또 개 키우는 사람 뭐라 하겠다. 복음 듣는 사람 중에서 애견센터가 있어요. 그냥 집에서 개 키우는 정도가 아니고.

너무나 작은 생각, 왜 그러냐? 나를 잃으면 모든 전부를 잃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 이름만은 내가 영원히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싶다. 주님의 것은 뭐냐? 영원한 것은 우리가 분노해서 나를 쫓고 분노해서 나를 뺐어간 그 언약의 취지를 우리가 웃으면서 즐겁게 받아들이세요. 나를 없애준 것에 대해서 고맙게, 내가 어떻게 나를 없앱니까? 주께서 나를 없애주면서 없애는 이유까지 알려주면서 우리 이름을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주의 이름으로만 살도록 해준 것에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다시 한 번 보게 하옵소서. 어떻게 세상 것으로 꽁꽁 묶여서 경직되어 살아가는 이 세상 바라보면서 주여 바깥 풍경이 다 지옥인 것을 주와 더불어서 바라볼 수 있는 주와 동행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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