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16강) 신5:27(반석의 상처) 20231023a
(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5장 26절,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그 당시 백성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 자기들 사이에 중개인을 원했던 겁니다. 그 이유가 모세가 이미 불붙는 산 위에서 내려왔잖아요. 내려왔으면 ‘모세는 견뎠다’ 이 말이거든요. 자기들은 못 견디고. 하나님은 안 나타나고 불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불 속에서 뭐가 나와요? 음성이 나오고요, 불 속에서. 음성 들으려면 어딜 가야 돼요? 불 속에 들어가야 되는데 우리 육신을 가진 인간 치고 불 속에 들어가면 타죽지 말이 안 되잖아요. 음성이고 뭐고 타죽기 마련이란 말이죠.
우리 육신은 그런데 모세는 40일 동안 경험을 했잖아요. 불 속에서 나왔다. 모세도 불 속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도 불 속에서 나오고.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입장에서는 하나님과 직접 대하는 걸 감당 못하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불 속에서 일단 나왔던 모세를 한 단계 거쳐서 우리가 말씀을 듣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여기서 하나의 공식 나오지요. ‘계명은 우리 인간에게 나올 때 다른 중간 인간을 거쳐서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공식이 하나 성립되는 겁니다. 신명기에선 모세가 중간 인간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증언하기를 우리 인간이 직접 계명을 접근하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선 어렵다,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이 증언하는 겁니다.
계명이 인간에게 직접 오지 못하고, 인간이 계명을 직접 못 만난다면, 중간을 거친다면 모세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이 문제. 모세가 천년만년 사는 것 아니잖아요. 모세가 죽어버리면 뭐가 날아가요? 중간 전달매개자가 없어지지요. 매개자가 없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 없이 직접 와버리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40일 동안 있어도 멀쩡했던 그 인간이 날아간 상태에서 과연 계명이 우리한테 무사히 도달할 수 있느냐는 그 문제가 남는 겁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돼요? 모세가 해결해야 됩니까, 듣는 인간이 해결해야 돼요, 아니면 계명 쪽에서 해결해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계명을 인간에게 계속 주시겠다는 의도가 있는 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 백성에게 계명을 계속 주겠다는 뜻이 있는 한 이 문제, 계명과 인간이 직접 만나지 못하는 그 문제 해결은 하나님 쪽에서 해결이 돼야 되겠지요, 그렇지요?
방금 중요한 몇 가지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직접 하나님의 계명을 만날 수가 없다.’ 성경책 본다고 그게 하나님 만나게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책은 볼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 있는 계명을 직접 만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감당 못하겠다는 느낌이 와야 돼요.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는 하나님을 감당 못한다와 같은 뜻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 못한다.’ 똑같은 말로 받아들여야 돼요.
받아들이는 동시에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중간 인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에 성공했던 그 인물이 말씀을 전한다는 그 하나의 목적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도 접촉이 가능한, 하나님과 같이 있음도 가능하고, 인간과 접촉해도 우리 인간이 다치지 않는 쪽, 그러한 중간 인물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했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고린도후서 3장에서 모세가 시내 산 나올 때 그냥 나오지 않고 얼굴에 수건을 덮었다고 했지요. 수건이 뭐냐? 계명에서 나오는 영광을 인간이 감당 못하니까 계명에서 나오는 영광, 불같은 영광, 그것을 감소시켜주는 기능을 통해서 계명이 계명대로 전달되면서도 인간이 계명을 마중 나올 수 있도록,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그 기능이죠.
그런데 그 수건이 모세 때였는데 그러면 신약에서 예수님이 왔을 때, 예수님의 영, 성령이 왔을 때 같은 뜻이에요. 수건이 벗겨졌다고 돼요. 그럼 여기서 나오는 질문은 뭡니까? 그 중간에는 어떻게 되지요? 모세도 늙어죽었고, 수건 쓸 일도 없고, 예수님이 와야 그 수건이 벗겨진다는 데 예수님 오시기 전 그 중간에는 인간들이 계명을 어떻게 받았느냐? 그리고 그 계명이 그냥 책으로 읽을 수 있는 게 아니고 25절에 보면,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그러니까 이 계명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냥 읽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려 달려드는 불과 동반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불이 우리를 태워 죽인다는 말은 다시 계명이 우리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계명을 지키고 자시고 듣기도 전에 불이 계명이 와서 우리를 죽이려고 덤벼든다 이 말이죠.
그러면 모세는 왜 안 죽었는가? 일반인들은 계명이 불로서 죽이는 데 모세는 왜 안 죽이는가? 모세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모세가 안 죽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모세에게는 죽음조차 이기는 무엇, 뭔가 미지의 X가 있다고 생각해야 돼요. 물론 신약적 의미론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이에요. 모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잖아요. 민수기에 나오지요. 모세뿐만 아니고 칠십인 장로도 신이 임했으니까.
신이 임하면 왜 안 죽지?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안 죽었다. 도대체 하나님의 신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불 속에서도 안 죽는 것처럼 모세가 살 수 있는가? 질문을 다시 하라 했지요. 안 죽는 게 아니고 모세 죽음조차 극복할 수 있는, 모세를 죽일 수도 있지만 무엇 때문에 안 죽는 거예요? 계명 전달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 사명이 살아 있는 한 모세는 안 죽게 돼있어요.
나중에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을 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모세가 제대로 전달을 못하기 때문에 죽였지요. 반석을 그냥 가리켜야 되는데 두 번 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반석을 가리키라고 모세한테 하나님이 지시한 적이 없어요. 첫 번째는 그랬지만 두 번째는 안 그랬다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밉상 받는 것은 질책 받는 것은 지 성질이 나온 거예요. 지 성깔대로. ‘이 백성들아 못 알아보는 거야? 아직도 몰라? 자꾸 나한테 원망해대지 마! 그때 너희들이 단물 먹었잖아.’ 성질냈다가 보니까 성질이 반석에 그대로 묻혀버린 거예요. 가리키는 게 아니고 반석이 깨진 거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모세가 백성들의 원망에 압박을 받아서 백성들의 원망이 모세에게 압력을 줘서 모세가 성질을 내거든요. 백성들의 원망이 모세에게 전달되었고, 모세가 그걸 받아서 분노가 일어났고, 그 분노가 반석을 깼습니다. 그러니까 이 반석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반석이 깨짐으로 말미암아 반석에 상처가 난 거예요.
반석이 그리스도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예요.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이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사도 바울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버렸어요.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4절) 한 반석의 물을 마신 것은 한 그리스도한테 우리가 생명을 받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비유가 되는 거예요.
비유라고 할 때 우리 인간세계에서 비유라 하는 것은 현실적이 아닌데 언어적 유희, 언어적으로 꾸며낸 거라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비유는 실제 일어난 일이에요. 실제 존재했고, 실제 활동하고 움직이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일인데 신약에 오면 그게 모형이 되고, 그림자가 되고, 비유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을 인식한다는 게 얼마나 오류가 많은지 몰라요. 내가 나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규정한다는 것, 그거 엉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지 인간들이 어떻게 보느냐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반석에 상처가 난 거예요. 이럴 때 우리가 반석이 깨진 것, ‘상처 난 반석’(괜찮네), 상처 난 반석을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계명이 더 깊어졌다, 이러면 돼요. 모세는 메시아다, 메시아 아니다, 어느 쪽입니까? 메시아 아니지요. 메시아 아니면 죄인이다, 의인이다? 죄인이죠. 그러면 죄인인 모세를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살려줘서 같은 죄인들 그룹인 이스라엘에게 전달케 한 거예요.
모세가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온전한 의인이라고 할 수 없지요. 모세 본인도 온전하다고 생각 안 했을 거예요. 그런데 백성들이 원망하니까 원망과 부딪침에서 모세가 성질을 같이 내버렸단 말이죠. 이 말은 뭐냐? 계명이 요구하는 메시아에서 모세는 아니다가 판명되면서 계명은 더욱더 깊은 자리까지 내려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겁니다.
모세와 예수님 사이에서 모세는 수건을 덮었는데 예수님이 와야 수건이 벗겨졌다는 것, 그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계명이 놀지 않고 쉬지 않고 점점 더 그 깊이를 더해가는 겁니다. 무엇을 향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숨어있는 죄를 향하여. 그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도대체 죄가 어디까지 뻗어져 있고 어디까지 박혀 있는가를 계명의 성장과 더불어서 계명의 주입이죠. 계명의 투입과 동시에 죄는 더욱더 깊어지고, 깊어지고, 깊어지는 거예요.
계명 없을 때 있는 죄도 있어요. 모세 이전에 계명 없을 때 죄가 있지만 계명을 줌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심화되는 죄, 계명이 마치 땅 뚫는 기계 있잖아요, 착암기. 또는 채굴할 때 뚫는 것. 계명이 제공됨으로써 더욱더 뚫어져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죄를 지을 때마다 새로운 계명이 여기서 추가되어 더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계명이 옴으로서 인간은 계명 지킨다고 나설 거고, 계명을 없앨 인간들이 아니고 계명이 있는 상태에서 그들의 죄는 더욱더 깊어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드디어 시작점이 됐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말씀이 없을 때는 이거는 죄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말씀이 오고부터 ‘그것도 죄야, 이것마저 죄인 거야’ 되는 거예요.
성전에서 예배드린다. 이것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죄 아닌 줄 알았어요.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가 죄 아닌 것처럼. 그러나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이사야 1장에 나오지요. 아주 심한 욕을 먹었습니다. ‘이딴 걸 나한테 가져왔느냐? 너희들이 나한테 찬양을 해? 손들고 기도를 해? 예배를 드렸다고? 그딴 것 해봐야 내 마당만 더럽힌다.’고 했어요.
그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이사야를 통해서 이런 욕을 얻어먹는 이유에 대해서 도무지 황당하지요. 왜 우린 이런 욕을 얻어먹느냐 말이죠. 성의껏 다했는데. 왜 하나님은 하나님 생각만 하고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는 우리의 나름 순수함을 왜 밟는 이유가 뭔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신약에 오면 밝혀지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계명을 받을 때 순수하게 계명을 받는 게 아니고 자기 구원 얻기 위해서 계명을 받은 거예요. 계명을 해설할 때 자기 살기 위해서. 그러면 성질부리는 자를 천국 넣어줍니까, 안 넣어줍니까? 안 넣어주지요. 성질부리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안 넣어주지요. 그러면 계명을 받았으니까 성질부린 것은 부린 거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은 가상히 봐줘야 되지 않습니까, 인간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되면서 계명이 어떻게 더 심화되느냐 하면 처음에는 이 계명이 다른 주변나라를 공격하는 도구가 돼요.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승리한다’ 이런 거요. 주변나라와 비교해서 네가 굉장히 특화되고 차이 나는 존재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는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주변나라가 문제가 아니고 썩어 들어갑니다.
그래서 나중에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둘로 완전히 쪼개진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파괴되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하나가 돼야 복이에요, 야곱에 의하면. 그런데 둘로 두 지파와 열 지파로 나눠졌다는 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끝난 거예요. 합해지지 못하고.
지금 이야기한 것을 글로 쓰면 이렇습니다. 여기서부터 시간이 이렇게 흘러간다고 봅시다. 여기서부터 계명을 주고 그다음에 모세 주었지요. 쭉쭉 간단 말이죠. 그런데 그 가운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윗 때 하나님이 왕을 줍니다. 모세는 계명 때문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역시 다윗도 계명 때문에 왕으로 있는 거예요.
모세 때는 분명히 왕이 필요 없다 했어요. 여호와가 왕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데 다윗이란 왕이 등장했다는 말은 이 중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인간들이 계명 있으면 되는데 그들은 뭘 요구했느냐 하면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된다고 요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 계명만으로 부족했다는 거예요.
계명만으로 왜 부족을 느끼느냐? 그걸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율법이 있고 규례가 있고 그걸로 오케이입니다, 라는 생각을 왜 못하지요, 못한 이유가 뭡니까? 중요한 문제에요. 계명 있는 걸로 족하면 안 됩니까? 제사 있고 그러면 되잖아요. 왜 왕을 달라 했어요. 사사기에 보면 그들이 왕이 없음으로 그다음에 나오는 말, ‘자기 소견’이죠.
그러니까 계명 앞에서 모세 때 계명 줬다는 걸 잊어버렸어요. 계명만 살면 되는데 모세의 계명 받을 때는 ‘우리는 불에서 타죽을 일이 있습니까? 중간 인간을 주시면 우리는 계명으로 족합니다.’ 이렇게 나왔던 그들이 이제는 계명으로 족한 게 아니고 자아 챙기는 쪽으로 나간 거예요. 자기 자신을 챙기는 데로 나갔어요.
예를 들면 이 문장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글부터 정리하고요. ‘계명만 살린다.’ 계명 살리기 위해서 누가 죽어야 했습니까? 모세가 시내 산, 화산 속에 들어갔지요. 사실은 모세는 죽은 거예요. 살아서 오는 게 이상한 일이에요. 이거는 예상하지 않아야 되고, 산 밑의 사람들 누구도 예상 못했어요. 모세는 죽은 걸로 간주했어요. 죽었는데 살아왔어요.
살아온 이유가 모세는 계명 때문에 살아온 거예요. 내가 주가 아니고 계명이 주가 되는 거예요, 말씀이. 아하, 정말 얼마나 소중한 겁니까? 처음에 그들은 소중한 걸 알았어요. 왜? 모세 살아온 걸 보고 소중한 걸 알았어요. 우리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점차 어떻게 되느냐 하면 계명을 살리겠다는 주님의 취지는 날아가 버리고, 계명 덕분에 내가 살아야 되겠다. 계명 덕분에 내가 행복해져야 되겠다.
내 행복한 것으로 계명은 좋은 계명이고 나쁜 계명이라는 것을 내가 증명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일단 나는 챙기고, 잘 챙기면 역시 계명 주신 하나님은 좋은 분이야, 라는 식으로 내가 납득이 되는 쪽으로 계명을 추후 증명을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내 쪽에서 검사하는 거예요. 계명이 실효성이 있는지, 없는지. 나 잘 되고 행복하면 그건 좋은 하나님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지 의심을 낳게 하는, 꼭 믿어야 될 필요가 없는 하나님으로 결정짓는 것, 그러니까 계명 사느냐, 날 살리느냐 경쟁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다음 문장을 적어볼 테니까 여러분, 이게 뭔 뜻인가 보세요. ‘나는 무엇인가?’ 저것 포도는 아니고, 머루는 무엇인가, 컵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닙니다. 머루, 컵은 그냥 사물이죠. 질문하는 자 인간이고, 질문 받는 건 그냥 사물이고, 물건이고, 물질이고 그렇지요. 아담이 처음 이를 지을 때 아담이 아담 보고 이름 지었습니까? 아니지요.
아담이 다른 동물들, 짐승들 이름 지었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담의 한계인 것을 아담이 알고 있어야 되었어요. 내 이름은 내가 지을 수 없다는 것, 이렇게 질문하면 안 된다는 것, ‘내가 누구냐’를 질문하면 안 된다는 것. 왜냐하면 질문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내가 누구냐’고 질문하면 안 된다. ‘하나님, 저 누굽니까?’라는 질문조차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나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은 이름 안에 내가 누군지 명확하게 나와 있어요. ‘너는 아담’이라 했어요. 그런데 인간은 뭘 몰랐느냐 하면 아담이란 말 속에 흙이 있다는 사실을 인간이 범죄 하기 전까진 몰랐어요. 죄 짓고 난 뒤에는 ‘아담이 흙이구나. 그러면 나의 본래의 자리가 흙이구나.’ 그러면 흙이 아닌 것처럼 여기면서는 ‘나는 누굽니까’ 하는 그 질문 자체가 이게 되바라진 질문이구나. ‘하나님, 저 흙이죠.’ 이러면 될 걸 ‘나는 누구입니까?’ ‘네가 정녕 너를 몰라?’ 이런 대꾸가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그냥 흙으로 돌아갈 일만 있는 겁니다. 참 쉽지요. 우리는 그냥 요양병원 거쳐서 흙으로 가면 돼요. 흙으로 갈 때 시신 분해해주지요, 꽃 장식해주지요, 이십오만 원만 주면 고인 인사 다해주지요. 고인이 아니죠, 개니까. 개님 가시는 길에 편히 갈 수 있도록 개 보람상조에서 다해주잖아요. 이십오만 원인데 오만 원은 개 대행비용. 대행자, 모세 역할 하는….
‘나는 누구인가’를 철학에서는, 철학이라 하지만 인간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여기 나는 뭐냐 하면 과거로부터 기억된 나로 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자아라 해요. 자아는 반드시 과거가 누적된 압축된 게 나에요. 과거의 기억이.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부인할 수 없어요. 왜? 과거에 누적된 게 있기 때문에 다시 과거로 와서 되돌릴 수 없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너를 버리고 네가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는 말은, 자아가 구원을 천국을 막는다는 뜻이에요. 네가 천국 가고자 하지만 가고자 하는 네가 가로막고 틀어막고 있단 말이죠. 천국을 가로막고 천국 아닌 곳에 내가 들어가는 천국은 있기, 없기? 없기. 하나님은 그런 천국을 주신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천국은 죽으니까 들어갈 수 없지요.
우리가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누가 와서 나를 내 잘못을 극복하는 게 아니고 다른 이름으로 바뀐다는 의미에요. 내 이름으로 살다가 주의 이름으로 바뀌잖아요. 그러면 내 이름은 나의 과거가, 과거도 골라낸 경험이에요. 세상 과거를 어떻게 알아요. 자기 필요한 그것만 기억한 그것이 나의 이름이 되었다면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주님의 과거, 주님이 하신 일이 우리를 천국에 보내십니다.
그럼 누가 걸리적거리겠어요? 내 기억, ‘나 이 정도야’ 하는 그것이 걸리적거리겠지요. 그걸 성경에선 뭐냐? ‘자기 의’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설교했지만 자기 의를 넣어주는 그런 천국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세상에 자기 의를 넣어주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을 간 사람은 모두 한결 같은 공통점이 있어요. ‘주님이 일 다하셨잖아요’란 고백을 해요.
그중에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같이 등장했잖아요.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이야기한 내용이 그거에요. 여태껏 주님이 창세전에 선택해서 나로 태어나게 한 것에서 모든 일거수일투족 우리의 죄 용서까지 주님 혼자 다하셨잖아요, 라는 고백을 내놓는 거예요. 그걸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거예요. 무슨 이름이요? 주의 이름.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매순간 밟는다? 나의 이름. 과거가 누적된 나의 이름을 밟아버리죠. 그래서 내 뜻대로 안 해주는 거예요.
내 뜻대로 안 해준다 하면 가만있으면 되는데 사람들은 이래하잖아요. 주의 뜻대로 갈아치우기 다해버려요. 간, 쓸개 다 빼고 모조리. 그러니까 내 것이 남아 있다, 내 것이 얼마다가 아니라 말을 바꾸는 거예요. 주님의 것이 몇 개 들었다. 쓸개, 간 다 빼버리고 몇 개 남지도 않았는데 주님의 교체 들어가는 거예요. 이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 작업을 오늘날 누가 하느냐 하면 바로 성령께서. 성령께서 바빠요, 되게 바쁘신 분이에요. 왜 바쁘냐 하면 매순간 우리 하는 일을 책망하고 밟아야 되니까. ‘아니거든. 그거 아니거든.’ ‘주의 영광을 위하여…’ ‘영광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거 영광 아니거든.’ ‘주의 이름을 위해서…’ ‘네가 하는 이름 아니거든.’
매순간 성도로 하여금 내가 괜찮은 것을 기회 받고 주님한테 응답받는 게 아니고 일은 주께서 다해놓고 되돌아보니까 ‘아아, 모든 게 주의 선물이었구나’ 하는 것을 항상 되돌아보는 거예요. KTX 탈 때 앞으로 타는 것 말고 뒤로 타면 진행방향과 반대방향의 풍경이 다가오듯이 우리는 항상 주께서 만들어놓은 것을 뒤쪽에서 바라보는 식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사람, 성도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바라보게 한 거예요.
그 바라봄 중에서 뭐냐? ‘다 이루었다’도 포함되거든요. 그러니까 십자가라는 것이 엿가락이라면 그걸 쭉쭉 늘어뜨린 것이 십자가에요. 십자가란 다 이루었음을 늘어뜨렸으니까 다 이루었음이 한 장소에 있는 것도 다 이루어졌고, 그걸 볼때기 잡아당기듯이 당겨 봐도 그게 다 이루었음의 부분이 확장된 것뿐이고 어느 구석 하나, 내 인생의 어느 것 하나 미완성이 없고, 모자람이 없고, 부족함이 없고 완결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내 인생 앞으로 어떤 인생 됩니까? 그거는 주님께 맡겨야 되지요. 앞의 일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과거의 기억나는 나고, ‘무엇입니까’를 인간의 철학에서는 이렇게 해요. ‘타자와 차이 나는 독자적인 존재는 어떤 모습입니까?’ 나는 남이 아닌 것, 남이 가진 것 말고 남이 갖고 있는 몸, 육신 말고, 나는 남과 다른 분리된 육신을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런 뜻이에요. ‘나는 무엇입니까?’ 남과 섞이지 않은 것, 독보적인 나는 진정 어떤 나입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벌써 질문 자체가 싸가지가 하나도 없지요.
로마서 5장에서 아담 안의 모든 사람이 확장된 거예요. 아담이 지은 죄, 그리고 죄 지은 육신, 모친의 죄 중에서 우리가 태어났다. 시편 51편,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절) 아담이 그냥 쭉쭉 늘어난 것뿐이에요. 근데 뭐라고 봅니까? 독자적인 것, 너 말고 나는 누굽니까, 묻는 자체가 이거는 마귀적이에요. 악마적입니다. 철학하는 사람이 변변한 직업이 없어. 할 일 없으니 맨날 이런…….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 오기 전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또는 모세 다음에 왕이 오기 그전에 사사기에 나오지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자아가 드디어 커지기 시작했어요. 자기 식대로 소견대로 살아가니까. 그래서 그걸로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버리고 왕과 일대일로 언약을 맺을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전체 계명의 완전성 돼야 복을 받을 테니까. 율법을 다 지켜야 복 받잖아요. 그걸 놓고 한 판 왕과 승부에 나선, 하나님의 복을 줄 수 있는 중간 인간, 아까는 모세 같은 존재로 하나님께선 다윗 왕에게 성신을 부어서 하게 한 겁니다. 왕을 세운 거예요.
그래서 세운 언약이 무슨 언약? 다윗언약. 다윗언약이 어떤 언약이냐? 왕 하나 잘 만나면 팔자가 바뀌는 언약이에요. 그 왕이 다윗의 자손이거든요. 그래서 소경된 자, 문둥병자가 뭐라고 외칩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내가 내세울 건 없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까 긍휼은 베풀지 있지 않습니까. 왕이 하신 공로에 입각해서 우리한테 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는 거예요.
철저하게 자기 이름이 아니고 왕 이름으로 왕의 것을 받는다는 것은 받아 챙기라는 뜻이 아니고 왕에게 복속된다는 의미에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단독적으로 내가 내세울 것 없으면 끽소리도 하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과 왕 사이 중간에 다윗의 자손 메시아, 기름 부은 자, 그걸 주라 해요. 주 그리스도, 거기에 완전히 종속된 그것을 복으로 간주하는 사람, 이게 웬 행운인가, 땡잡았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게 바로 그 조건 하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준 거예요. 그만큼 뭡니까? 개인은 왜 안 된다? 자아가 그만큼 커진 거예요.
제가 여러분에게 복사한 것 드렸지요. 앞에 노래 두 개 해놨는데 <무정부르스>(박건호 작사, 김영광 작곡) 가사 참 잘 썼어요. 이 노래를 왜 했는가? 그 이유가 있어요. 일단 노래 한 번 들어보시고, 여러분 잘 모르실 거예요. 교회만 다녔으니 이 노래 알 리가 있나. 교회만 다니고 기도만 하니 이런 노래 알 수가 없지요. 떼창까진 할 필욘 없습니다. 가사를 보세요.
이제는 애원해도 소용없겠지
변해 버린 당신이기에 (갑자기 은혜가 확 밀려오지 않습니까?)
내 곁에 있어 달라 말도 못하고
떠나야 할 이 마음
추억 같은
불빛들이
흐느껴 우는 이 밤에
상처만 남겨 두고
떠나 갈 길을
무엇하러 왔던가
잠깐 여기서 봅시다. 자아가 등장하면 내가 살기를 욕망하지요. 그러면 무엇이 죽습니까? 계명이 죽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왜 말씀을 안 보고 말씀에 관심 없느냐 하면 뭐가 그만큼 커진 거예요? 자아가 커진 거예요. 여기에 제가 가사만 보면 되지만 가락까지 해서 자꾸 옛날 생각나게 만드느냐 하면 얼마나 이게 찌질이입니까? 이 사람 노래 잘 불러요. 찌질이의 극치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여자 하나 갔다고 그다음에 지금 견딜 수 없어서 특히 1절 가사에, “추억 같은 불빛들이 흐느껴 우는 이 밤에”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동일한 밤이고, 동일한 가로등 있더라도 불빛 있더라도 그걸 내 내면의 마음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그게 흐느껴 우는 것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찌질이처럼 자기가 감정적으로 슬퍼지면 세상 자체가 자기 자신의 느낌과 동화돼버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요. 자아가 그런 거예요. 그다음 2절, 안 들을 수가 없어.
자꾸만 바라보면 미워지겠지
믿어 왔던 당신이기에
쏟아져 흐르는 눈물 가슴에 안고
돌아서는 이 발길
사랑했던
기억들이
갈 길을 막아서지만 (하여튼 처절하게 부른다, 정말)
추억이 아름답게
남아 있을 때
미련 없이 가야지
참 은혜롭다. 자, 이것 보세요. 지금 애인이 떠나서 슬프지만 속히 뭐로 빨리 상태를 원형으로 돌리려하느냐 하면, ‘그래 가거라. 미련 없이 보내줄게’ 하지만 이유가 뭐냐? 너와 좋았던 추억이 내게 아름답게 남아 있을 때 아름다운 그 기억이 있는 그것을 지금 아주 거뜬하게 이 어려움을 느꼈던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찬미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 거예요. 이 노래 들어보니까 평소에 모든 인간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말씀을 걱정해요? 지금 누구 걱정하고 있습니까? 자기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님의 마지막 불 심판, 지옥 가도 마땅한 거예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줄 때 무엇과 했어요? 무서운 불이 왔잖아요. 이스라엘도 처음에는 자기보다 뭘 더 생각했어요? 계명이 중요한 걸 알았지요.
그런데 점점 더 약속의 땅에 살면서 배부르니까 그다음에 뭐가 올라왔다고요? 자아성이 올라오는 데 바로 자아성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추억을 아름답게, ‘추억이 아름답게 남아 있을 때 미련 없이 나는 내 갈 길로 가야지, 이게 사나이의 의젓함이 아니냐’ 그래서 뭐, 왜 사는데? 사는 이유도 없어요, 그냥. 내 추억 아름답다, 그것 되새기면서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이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오세요’ 통하지도 않아요. 지 추억에 푹 빠졌는데 뭘 교회 다니고 예수 믿어요. 교회 다녀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다녀도 지 아름다운 추억을 또 지가 ‘교회까지 왔다, 하나님까지 믿는다, 나는 얼마나 대단한 존재냐’ 그것 증거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런 자아성이 이제 사단 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왜 하느냐? 오늘날 사람들이 왜 말씀에 시큰등하느냐? 자아한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관심사에요. 결국 핵심은 뭐냐? 관심사. 관심사를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준 게 왕을 줬잖아요. 나중에 다윗 왕 세대에서도 시큰등 관심 없어요. 예수님, 메시아에 대해서 관심 없어요. 왜? 지난 자기 과거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열중한다고. 이런 노래, 주께서 허락하신 걸 감사합니다. 또 오늘 강의 다 잊어버리고 이 노래만 백 번 듣겠다.
2절에 쏟아져 흐르는 눈물 가슴에 안았잖아요. 감당 못해서. 자기한테 뭐가 있지요? 상처지요. 자기 상처는 생각하고 아까 무슨 상처는 생각 안 해요? 깨어진 반석의 상처는 생각 안 해요. 배후에서 누가 이 짓했겠어요? 마귀가 이 짓한 거예요. 그런데 마귀가 그 짓할 때 그 마귀를 누가 허락했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주님의 상처로 하여금 모든 진리를 끝장내기 위해서. 내 상처 안에 들어온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
모든 계명은 어떻게 지키는가? 주님의 상처 속에 들어가면 계명은 다 지킨 거예요. 주님의 상처에 들어가면 내 상처는 어떻게 됩니까? 내 상처는 시시하고 그거는 교만한 거죠. ‘그것도 상처냐? 그것도 상처야? 너 선악과 따먹은 건 생각 안 하고 따먹을 때 하나님 마음의 상처는 생각 안 하고 따먹고 난 뒤의 니 상처만 생각하냐?’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두 번째 한 게 있어요. 그 두 번째가 <등대지기> 방법입니다. 이것도 이왕 나온 것 들어봐야지요. 여러분들이 보시면서 <무정부르스>, <등대지기> 둘 다 문제 있는데 어디서 문제 있는지를 찾아낼 줄 알아야 돼요.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 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이거는 1절만 해도 됩니다. 여기서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이라고 돼 있지요. 유대인들은 계명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면 계명 자체를 지켜요. 계명을 지킨다고요. 마치 등대지가가 굳건한 등대가 있어야 배가 파선하지 않기 때문에 좌초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 목숨 하나보다고 등대를 지키겠다는 계명 자체를 지키겠다고 굳건한 마음으로 계명 자체를 숭고히 여기고 그걸 지킬 때 여기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 이게 유대교,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교의 마음은 뭐냐? 모세 율법을 경건하게 사수하는 거예요.
이게 계명 지키는 방법이에요.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방법, 교회 교인들이 아니고 교회 목사들이 하는 방법. 어떻습니까? 이것 계명 지키는 것 맞습니까? 아까 첫 번째 노래에서는 뭡니까? 지금 관심사가 계명 자체에 아예 관심 없고 자기 아름다운 것, 자기 자아 지키는 거잖아요. 나는 나답게 지키는 것.
두 번째는 뭐냐? <등대지기>는 ‘나의 소명은, 나의 사명은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다.’ 그게 지키는 겁니까? 보초 서듯이 그러면 지켜지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느 게 더 나빠요? 등대지기가 더 나쁘지요. 앞의 무정부르스는 자기가 파괴되잖아요. 등대지기는 자진해서 파괴해요. 내가 나를 파괴한다고요.
내가 나를 스스로 부정해가면서 뭘 지킨다?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교입니까? 유대교. 그 주도자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모세 율법만 주장하고 미쳐있는 우리를 왜 예수 당신이 뭔데 욕하느냐? 예수님 하신 말씀이, 모세가 들었으면 모세가 봤으면 너희들부터 심판한다 했어요.
어떤 주인이 먼 타국에 가고 하인들에게 달란트를 주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이 뭐했습니까? 그걸 지켰지요. 주인의 것을 이것만 지키면 아무도 나한테 이것 지킴으로서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을 쓴 거예요. 그러나 충성된 종은 자기를 지킬 생각이 없어요. 오히려 주께서 주신 그 자체가 나를 어떻게 깨뜨리느냐와 연관해서 생각한다고요. 등대지기는 등대를 지킴으로서 자기의 존재 의미를 자기가 챙기는 거예요. 그러나 말씀은 그렇게 지키는 게 아니에요. 말씀은 등대지기도 못 지키고, 무정부르스도 못 지키고, 말씀은 오직 주님만이 지킬 수 있습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