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15강) 신5:26(쓴 잔) 20230925a
(강의:이근호 목사)
1.모세 자리에 합류하라-율법(말씀)과 함께라면 하나님이 함께 있다.
신명기 5장 25절 봅시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그렇게 돼 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줬습니다. 율법을 준 것은, 신명기 5장 25절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특별한 자리에 합류하라고 준 거예요. 이 특별한 자기가 뭐냐 하면 모세 자리에요. 지금 모세만 특별한 자리를 체험했습니다. 시내 산꼭대기에서. 지금 가도 시내 산꼭대기엔 아무도 없지만.
모세가 경험한 그 자리가 모세 당시에는 시내 산꼭대기인데 그걸 앞으로 율법이 점점 더 진척이 되면서 특정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없어지고 율법과 함께라면 하나님이 함께 있다, 라는 원칙이 세워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율법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죠. 말씀과 함께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2.율법과 함께 내려오신 하나님의 이름.-제사법 성전법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시기 위한 장치,구조
그러면 말씀 안에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하는데? 이렇게 하겠지요. 모세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있을 때에 모세는 자기 혼자 그 영광을 만끽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더불어서 모세가 산에 계속 있지 않고 산 밑에 내려왔잖아요. 내려올 때 같이 따라와서 내려온 율법과 같이 동승한 분이 계셔요. 그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럼 율법의 제사법은 율법의 성전법은 누굴 모시기 위함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늘나라의 장치, 구조가 돼요. 하나님은 인간과 같이 할 수 없습니다.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같이 할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같이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겁니다. 함께 할 수 없는데.
이게 명심해야 돼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데,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제시한 만남의 장소를 하나님이 주셨어요. 거기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이름하고는 함께 할 수 있는 장소를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주신 거예요. 그러면 이 이름은 어떤 차이가 나오느냐 하면 애굽에서 사람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과는 같이 할 수 없습니다. 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만나게 되는 바알이라는 신과도 같이 할 수가 없어요.
바알이란 말은 뭐냐? 그냥 신이라는 뜻이에요. 애굽의 신은 뭡니까? 그냥 신이에요. 신은 신인데 하나님의 이름도 신이잖아요. 같이 섞일 수 없는 독특한 신으로만 등장한 거예요. 이것은 애굽의 신, 이방신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만들어낼 수 있는 신이에요. 상상할 수 있는 신이고 추상적인 신입니다.
전능하시고 절대적이고 먹은 게 없고 처음이고 끝까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다 인간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고귀한 용어는 다 퍼부을 수 있는데 문제는 여호와와 그 차이점은 뭐냐? 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신은, 인간들은 그 신을 부르질 않습니다. ‘너는 나와 함께 할 수 없어.’ 이런 내용이 없어요.
오히려 기특하게 여기고 대견하게 여기고, ‘그래 다음에는 돈 안 되는 정화수만 뜨지 말고 요새 비싼 문어 좀 올려봐. 작년 문어를 또 올리면 되냐. 내가 귀신이지만 화난다, 정말. 벌써 삼년 째 똑같은 걸 올리면 안 되잖아. 아무리 문어가 비싸지만.’ 이런 신이 아니에요.
3.인간을 파멸시키는 하나님-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과 만날 수 없다.-쓴 잔
인간을 파멸시키는 겁니다. 그게 25절이에요. ‘죽을 까닭’ 인간을 파멸시키고 파괴시키고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인간을 몰락시키는 하나님. “너, 인간이야?” “예.” “몰락해.” 이런 하나님. 몰락시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이름과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주의 이름을 하려면 이미 산 밑에서 몰락된 이름 말고 산 위까지 올라가서 사십 일 동안 버텼던 모세처럼 이 땅에서는 이미 모세가 올라갔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이 모세가 죽을 줄 알아요. 사십 일 동안 있으니까.
모세는 그걸 못 느끼지만 산 밑에선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우리는 모르겠으니까 우리가 여호와 만들자 해서 우상을 만들었거든요. 우상 만드는 특징이 뭐냐?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내가 안 죽으려고 우상 만들어요. 내가 안 망하려고 우상 만든다고요. 교회 가는 이유가요 자기 안 망하려고 교회 가요. 성당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망하는 대신 주의 이름 부르는 걸로 퉁 치자는 거예요, 교회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이걸로 퉁 치자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인간의 본성 배후에 악마가 숨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가 자꾸 신을 믿으라고 부추깁니다. 신을 믿으라고 하나님 믿으라고 악마가 부추겨줘요. 왜? 어차피 가짜이니까요. 그 가짜가 십자가 지신 분을 연막탄 쏴서 십자가가 안 보이게 만드는 데 그것보다 효과적인 게 없어요. 최고에요. 어제 낮 설교에 그 이야기한 게 재미있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못났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본인이 이야기하는 것은 본인이 용납되는 데 ‘그래 너 못났다’ 하면 이런 씨, 나오죠. 그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중성입니까? ‘너 못났다면서 네가 못났다, 못났다 네 입이 아프니까 내가 대신 이야기해줄게. 너 못난 것 맞다.’ 그 이야기했는데 죽이려고 덤벼들지요.
이게 뭐냐 하면 ‘나는 못났다, 부족하다’ 그렇게 하니까 ‘주님이여 절 못났다고 해줬으니까 잘나게 해주는 걸로 우리 퉁 칩시다’란 뜻이에요. 속일 걸 속여라. 귀신을 속여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몰락될 능력도 몰락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이 몰락되지 않은 인간 속에 들어와서 예수님도 자기도 몰락되고 같이 몰락돼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20장 22절.
주님께서 제자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얘들아 내가 뭐 해줄까?’ 그런 것 안 물어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묻지도 않아요. 일방적이에요. 주님은 진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분이지 ‘뭘 원해, 뭘 해줄꼬’ 이걸 묻지 않습니다. 그냥 밀어붙이는 데 주께서 이미 확정 난 우리 성도에 대한 목적은 뭐냐? 내 잔을 마시는 거예요. 내 쓴 잔을. 22절에,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너희 구하는 것과 내 구하는 것이 다르다 이 말이죠. ‘너희들은 내가 구하는 걸 구해야지, 왜 내 앞에서 얼쩡거리느냐’ 이 말입니다.
제자들에게서의 확실한 변화가 뭐냐? 랍비에서 주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랍비는 뭐냐? 선생님이에요. 한 수 가르칠 훌륭한 분, 많은 지혜를 갖고 있어 우리가 그 지혜를 뽑아내면 나도 덩달아 훌륭하게 되는 랍비로 생각한 거예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 겁니다. 모든 가족을 버리고 재산을 버리고 주님 따라다니고 있다고 본 거예요.
그중에 한 사람이 가룟 유다에요. 가룟 유다도 은근히 노리는 게 있었어요.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이러니까 뭐 대단한 줄 알았지요. 주님이 스승이 몰락하리라는 건 상상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의 제자들 입장에서 풍선으로 본다면 그 풍선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여겼던 거예요. 하늘까지. 그런데 바늘 하나로 완전히 풍선이 바람 다 빠져서 주저앉을 것이라는 것은 그 정도로 내가 믿는 예수님이 나보다 더 허약하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알고 얼마나 충격 받았겠습니까.
그래도 베드로는 칼이 있었잖아요. 단검. ‘덤벼라 인간들아. 우리에게는 검이 있다.’ 그리스도의 군인들이거든요. ‘우리는 단검이 있다.’ 주께서 뭐라 했습니까? ‘그 칼 도로 집어넣어.’ 칼 쓰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칼로 망하지요. 와 이거 그래도 인간은 칼을 의지해요. 제자들이 유대교니까 구약성경을 거의 얼추 알지요. 구약성경에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너희들을 구원함은 칼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 활도 아니고 군사도 아니고 오직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시편에 한두 번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말이 뭔 뜻인지를 몰라요. ‘아아, 주의 이름이니까 메시아,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가 없는 힘을 로마를 이길 수 있는 추가적인 힘을 줌으로서 우리는 로마로부터 해방되어서 우린 여전히 다윗의 자손의 국가로서 이 약속의 땅의 부동산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그들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자기들의 내용을 집어넣어요. 자기가 구하는 것은 주의 이름이란 풍선에다 집어넣고 내가 구하는 것이 더 번창하기를 소원하면서 주의 이름을 그토록 부른 거예요. ‘주여, 주여, 주여’ 어디서? 갈멜산 기도원에서. 어제 나오죠. ‘갈멜산에서 찾아낼 거야.’ 아모스에 나오잖아요. ‘너 갈멜산 올라가도 끄집어낼 거야.’ 그렇게 부르고 싶은 거예요.
왜 주를 부릅니까? 새벽 교회도 아니에요, 새벽 제단을 치면서 왜 부릅니까? 안 망하려고 안 몰락하려고 파괴되지 않으려고 버틸 때까지 버티는 거예요. 그러나 이 자리, 내 이름이 나의 자리가 아니에요. 내 자리는 특별한 자리에 합류해야 됩니다. 그 합류, 당기는 것은 뭐냐? 주의 이름이 담긴 율법이 릴낚시처럼 솔솔 당기면 율법 따라서 주의 이름이 자기 백성 데리고 본래의 자리로 귀환됩니다.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요.
그런데 이게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느냐 하면 십자가 죽기까지 내려가서 그 낚싯대가 그 밑에까지 내려가서 잡아당기거든요. 근데 인간은 자기가 십자가 죽기까지 가기 싫어요. 심지어 갔던 사람도 주님께 욕하고 지옥 간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십자가 죽기까지 동기생으로 죽었는데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한 사람이 있어요. 구원받은 강도.
그러니까 결국은 성경은 뭐냐 하면 자기 발견이에요, 자기 발견. 내가 아는 것 딱 꿍쳐놓고, ‘이건 들어오지 마세요, 손대지 마세요. 내 원하는 걸 주세요.’ 이게 아니고 이건 종교고요. 진짜 율법은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내가 어디까지 망해야 되고 더 중요한 것은 망해야 된다는 것은 주께서 마련한 율법 자리에 의해서는 그게 마땅하다는 거예요.
왜? ‘율법 자리=십자가 자리=주님의 자리’ 십자가 자리가 하나님 자기 자리로 확정했기 때문에 주님 만나려면 십자가로 갈 수밖에 없어요. 십자가 간다고 불구덩이, 흙구덩이에 들어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이 의미 없는 자리까지 내려가는 데, 의미 없는 자리라고 나는 부족하다고 가슴 치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웃지요. ‘진짜 의미 없구나. 주님 있으면 됐지, 정국이 오면 됐지 뭐.’ 방탄소년단 정국이 없는 참석 안 한 팬클럽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 ‘두세 사람이 나와 함께 있다’ 와버리니까 숫자 두세 사람이 문제 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게 너무나 이게 황송해서 이거는 너를 잊어버려라, 하기 전에 벌써 잊어버렸어. 내가 지금 누군지도 잊어버렸어. 내가 어디 있는지도 생각하기도 싫어. 시저분한 것 알아서 뭐하려고. 그게 자유인 거예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느꼈던 것이 누렸던 것이 바로 그겁니다.
죄가 뭐냐? 죄라는 것은 끝까지 자꾸 나를 소환하는 게 죄에요. 내가 어느 정도 수준급인지 자꾸 나를 소환하게 되면 자기가 아까워서 자기를 버릴 수가 없어요. 왜 자꾸 자기를 소환하느냐? 자기 현장성에서 주님이 없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라도 나를 챙겨야지. 내가 나를 지켜내야지. 그래도 뭔가 평생 내 가치 하난 지켜야 나답잖아, 라는 그 본능이 그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4.율법 구조의 침공.-십자가 죽음이라는 독특한 자리에 합류하도록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나를 부수느냐, 나를 몰락시키고, 삭제시키는가?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율법 구조의 침공, 침략하는 것. 낯선 것이 나에게 들어오는 데 무슨 구조냐 하면 율법의 구조로 침범해요. 국어시간처럼 한 마디, 한 마디가 침공하는 게 아니고 율법 구조 자체가 오는 겁니다. 인테리어 업자한테 ‘싱크대는 괜찮은데 위에 선반만 교체해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업자가 와서 ‘바꿔, 바꿔, 싹 다 바꿔.’ 이래하지요. ‘지금 아주머니 같이 싱크대 놔두고 위에 선반 바꾸면 색깔에 전체적인 조화가 안 됩니다. 바꾸려면 싹 다 바꿔야 됩니다.’ 아주 멋진 상술이지요. ‘이가 아픈데 이것 하나만 임플란트…….’ ‘안 됩니다. 균형에 맞추어서.’ 이빨이 타이어도 아니고. ‘이거 세 개 뽑고, 이거 세 개 뽑고 여섯 개 뽑읍시다. 쌈밥 맛있게 튼튼하게 잡수실 수 있어요.’
구조 전체를 다 바꾸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의 구조가 쳐들어온다는 것은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나는 구조를 형성시켜 왔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자기 구조가 있어요. 말씀은 일부 말씀만 해서 부속품 갈아치우듯이 이건 바꾸고, 기도 좀 길게 하고, 헌금은 오천 원 했는데 요새 물가 안 좋으니까 천 원만 하고.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자기 관리, 자기 통제, 통제하면 주인공이 누굽니까? 여전히 내가 주인공. 내가 주인공이면서 내가 나를 지키기에 옳다고 이거는 버틸 수 있다고 여기는 그 구조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몰입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걸 하나님이 모를 수가 있어요. 알지요. 율법을 문자로 지키는 게 아니에요. 구조를 지키기 때문에 율법 하나를 어기면 어떻게 됩니까? 전체 구조가 다 뒤틀어지기 때문에 다 어긴 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을 예수님 제자들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몇 번 용서하면 돼요?’ 이거거든요. 그게 아니고 쓴 잔을 마시라니까 쓴 잔. 그러니까 율법의 구조가 뭐냐? 쓴 잔을 마시도록 촉구하는 구조에요. 여기는 잔으로 돼 있지요.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할 때 예수님이 마시라는 잔이 무슨 잔이냐 하면 예수님이 마셔야 될 잔이에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언약할 때 예수님이 이랬지요. 내 피와 내 살을 먹고 마시지 않고서는 영생이 없다 했지요. 그런데 그 피에 어디에 실립니까? 양푼에 실립니까, 어디에 실립니까? 잔에 실리지요. 그래서 마태복음 26장에 내 잔을 받아라. 내 피가 담긴 잔을 받아라. 그 담긴 피가 모든 율법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이 수혈해서 열두 잔을 나눠주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너무나 물리적이잖아요. 이게 왜 안 되느냐 하면 그건 구조적이 아니에요. 나는 멀쩡하고 거기다 추가해서 예수님 피 하나, 마치 사슴피를 빨대 꽂아 먹는 것처럼 마시면 되는 것, 그런 게 아니에요. 심지어 그런 교단도 있잖아요. 예루살렘 교단인가? 생수 주면서 이거는 축복한 생수기 때문에 물마시면 된다. 물마시면 안 돼요.
왜 안 되는가? 내 구조가 안 바꿔요. 내가 몸에 좋은 것, 건강 위해서 대마종자유 하나 먹는 것밖에 안 된다니까, 이게. 그건 지식이라 했지요, 어제. 그건 지식이에요. 자기는 손대지 말라는 거예요. 내 사는 구조가 뭐냐? 패턴이에요. 내가 사는 패턴. 패턴에 함부로 내 패턴을 헝클지 마라. 참 사람 패턴이란 게 무섭거든요.
아무리 손자 예쁘고(손자들 있지요) 곱다 하지만 가고 난 뒤에 가슴통곡하는 게 패턴 다 깨져버린 거예요. 아침에 기상시간, 저녁에 자는 시간, 그리고 채널권 박탈당했어요. 일제강점기처럼 채널권 다 박탈당했지요. 할아버지 보려 하는데 벌써 딸내미가 <뽀로로> 볼 시간이라 해서 보고 있는 것 빼앗아 앉아 봐라. 할아버지는 바레인 축구 봐야 되는데 붕 떠버렸어요. 그 축구 보고 안 보고 중요한 게 아니고 그다음에 내가 뭘 해야 될지 붕 떠버렸어요, 패턴이 깨져버리니까.
패턴이 뭘 만드느냐 하면 자아라는 추상체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라도 내 패턴, 자아 부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말은 율법을 지킬 때 어떻게 지킨다? 내 패턴은 패턴대로 유지하면서 율법을 지킬 용의가 돼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제자들이 처음에는 스승으로 맞아요. 한 수 배우려고. 나중에는 내가 마시는 이 잔, 홀짝 마시면 된다고? 아니야. 네가 부셔져야 돼. 네 패턴 자체가 나와 더불어서 함께 죽어야 되고 그렇게 죽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살다 죽는 게 아니고 사는 것조차도 주님께서 압수를 해버려요. 침공이니까, 율법의 침공. 압수해서 그 사도 바울, 베드로, 요한의 인생을 십자가 죽음이라는 그 독특한 자리에 합류하도록 주께서 율법의 완성의 위력으로써 자기의 십자가에 같이 지고 가도록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사도들 고생 되게 했겠네, 하면 아까 제가 한 말 또 잊어버린 거예요. 고생을 되게 한 아니고 자아를 삭제당한 채 움직이는 거예요. 자꾸 고생했다 해서 아프리카 가서 굶어죽고 이런 것 생각하지만 그냥 자아가 삭제당한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과격하게 하는가? 왜 인간을 몰락에 이르게 하는가? 그것은 이미 인간세계 자체가 몰락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몰락됐는데 아닌 것처럼 위장하는 그러한 구조가 마귀에 의해서 설정돼 있어요. 망했는데 마치 안 망한 것처럼 죽었는데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런 구조를 형성시켰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지옥에 특화된 존재. 오늘 내가 대전강의 준비하고 있었는데 십자가마을에 어떤 분이 질문을 했지요. 질문이 내 준비한 것과 어떻게 딱 맞아떨어지는지. 답변을 제가 했습니다. 답변이 뭐냐 하면(질문은 여러분 보시고요) 인생 자체가 이게 임시적이에요. 임시처소에요. 기차 타면 풍경 바뀌지요.
5.최종점은 지옥 아니면 천국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풍경이 바뀌어요. 고정된 게 없고 그냥 스쳐지나가는 곳이에요. 우리 인생 자체가 눈에 보이는 세상 자체가. 그러면 최종점은 어디냐? 최종점은 지옥 아니면 천국이죠. 주님의 목적은 딱 하나에요. 지옥 아니면 천국이에요. 이게 영원히 고정된 거예요. 아주 단호합니다. 여기에 어떤 주님에게 압력 넣을 생각하지 마세요. 단호해요. 지옥 아니면 천국입니다.
그러면 우리네 인생은 뭐냐? 지옥에 특화된 자와 천국에 특화된 자, 두 종류밖에 없지요. 그런데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모조리 다 지옥에 특화된 자에요. 왜? 여기 아까 본 것처럼 우리가 죽을 까닭 정도로 모세 혼자만 모세가 시내산 올라갈 때 멀리서 보면 모세가 어디에 기어 들어가느냐 하면 불붙는 화산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부럽다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그냥 죽으러 가는 거예요.
근데 죽으러 갈 때 우리는 거부감을 나타냈지요. 하지만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낯선 죽음의 자리까지 율법이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아주 친절하게. 내가 뭘 했다, 내가 뭘 안 했다 자체가 의미가 없는 자리로 내가 있으나마나한 자리로. 그러니까 우리는 아까 몰락이라 했는데 삭제, 내가 삭제당하는 거예요.
인간은 스스로 삭제 못합니다. 왜냐하면 삭제하려고 애써도 자기의 나다움 구조 자체가 갇혀있기 때문에 이 구조를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구조 자체를 벗어날 수 없다면 구조 자체를 덮치는 구조, 그게 아까 이야기한 쓴 잔입니다. 쓴 잔을 예수님이 먼저 마셨잖아요.
이 말은 예수님의 구조가 우리 구조보다 우선적이어야 한다는. 내 구조와 주님의 구조를 늘 견주어 볼 줄 알아야 돼요. 내 구조는 나를 지키는 구조고 주님 구조는 방탄소년단 구조, 굳이 내 구조가 필요치 않는 내 구조를 삭제시키는, ‘가져가, 가져가. 그 고물덩어리 가져가’ 하고 내가 ‘저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가져가, 그 말도 하지 마. 그냥 가져가.’ 내 구조로서 충분한 거예요.
6.구조 맞추는 기회가 우리 인생살이-왜 인간은 지옥 갈 수밖에 없나를 보여주는 기차
이것 좀 고치면 내가 훌륭하다. ‘부분, 부분 고치지 마. 완전하게 다 뜯어고쳐.’ 그래야 균형이 맞춰져요. 주님의 구조로 다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 구조 맞추는 기회가 찬스가 뭐냐 하면 우리 인생살이입니다. 인생살이 없으면 큰일 날 뻔했지요. 인생살이 가운데서 내 구조는 이런데 주님의 구조는 이렇다, 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그 당시에는 율법을 통해서 이제는 알아야 되겠지요.
그럼 제가 아까 기차 타면 풍경 바뀌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차를 탔습니다. 애굽 역에서 시작해서 미지의 역으로, 그냥 약속의 땅이라고 던져놨는데 그 약속의 땅은 어딘지 몰라요. 아브라함언약에는 약속의 땅이 이방민족이 있는 땅이 아니고 이방민족의 죄가 숙성되는 땅이라 했어요. 어느 지점의 땅이 아니고 이방민족의 죄가 숙성하는 state 그 상태의 땅이 약속의 땅이에요.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기차를 타되 기차의 풍경들이 주께서 어떤 풍경들을 보여주느냐 하면 왜 이 세상은 지옥에 특화돼 있고 왜 이 세상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죄를 짓고 있느냐를 바깥 풍경으로 보여주는 기차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기다 태운 거예요. 이런 수학여행이 없습니다.
‘그것마저 죄가 되는구나. 저것이 더럽다는 거구나. 저게 추잡하다는 거구나. 저게 역겹다는 거구나.’ 이걸 보게 하시는 거예요. 물론 주의 이름이 동행하시면서 쭉 하는 거예요. 그렇게 동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낯설고 새로운 체험을 합니다. 뭐냐 하면 전쟁에 나설 때 칼 들고 활 들고 말 타고 병거 타고 전쟁하잖아요. 그게 역겹다는 거예요.
인간의 기존 패턴, 인간의 구조에서는 납득이 될 수 없지요. 율법을 내가 납득해서 지킬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율법은 내가 지킬 게 하나도 없는 이유가 율법의 취지를 모르기 때문에 지켰다고 해도 주님 입장, 율법 주신 입장에서는 그건 지킨 게 아니에요. 어차피 못 지킨 거예요. 나는 내 식을 고집부리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누굴 하나 만나도 백 가지를 생각하게 돼요. 그 백 가지가 어디서 나온 거예요? 내 삶의 패턴과 구조에서 나와요. 왜 만나는데, 만나서 무슨 이야기하는데, 만나고 난 뒤에 나한테 손해되는 것은, 내게 이익 되는 건 뭔데? 혹시 내 패턴과 구조가 망가지면 그다음에 또 만나자고 하면 어떡하지? 만나서 돈 빌려 달라하면 어떡하지? 만나기 전까진 그런 생각 안 들어요. 만나자 하는 순간 그다음부터는 뭘 지켜야 되느냐 하면 신약에 나옵니다. 로마서 10장.
내가 스크래치 손상되면 어떡하지? 누굴 만나든. 그래서 상견례가 힘든 거예요. 만나고 난 뒤에 우리 없던 걸로 합시다. 당신 딸이면 우리 아들과 도저히 성사 안 됩니다. 내가 혼수 돌려줄게요. 내가 말 한 번 잘못해서 딸이 아빠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고 원망하면 두고두고 이십 년, 사십 년 동안 죽을 때까지 원망하면 나 어떡하지? 이거는 누구를 만나도 이런 일이 안 일어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창세기 봅시다. 아브라함이 뭐라고 하는지, 창세기 29장인가? 인간의 만남은 구조와 구조의 만남이거든요. 29장이 아니고요 24장 12절을 누가 읽어볼까요?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여기 보세요, 단어. ‘순적히’ 얼마나 반가운 단어입니까. 교인들 기도할 때 이 단어 하나로 핵심부분을 집어넣으면 은혜로운 기도 되잖아요. 주여 순적히, 모든 일을 순적히. 순수히 무탈, 아무 탈 없이. 다시 말해서 이걸 언약으로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순적히는 뭡니까? 내가 살던 패턴과 구조에 스크래치 흠집나지 않기를. 이게 바로 그동안 이 구조 안에서 나는 다치면 안 된다는 것이 꾸준히 그만큼 부풀어있었던 거예요. 그만큼 키워서 있었던 거예요.
7.풍선처럼 부풀은 나의 의-바늘로 찌를 필요가 있다=쓴 잔
우리가 의도한 게 아니에요. 그냥 살다보면 내 안에 풍선처럼 배 나온 것처럼 나의 의가 가득하게 부풀어있었던 겁니다. 바늘로 찌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쓴 잔입니다. 주께서는 천국에 특화된 성도를 위해서 지옥에 특화된 육신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천국에 특화됨으로 바꾸려면 말씀으로 십자가의 말씀, 율법이 다 이루면 뾰족하게 되거든요. 그게 십자가 끝부분이에요. 비유입니다.
바늘로 콱 찌르는 네가 또 네 의를 지켰구나, 콕 찌르는 거예요. 모든 만남은 찌르기에요. 이건 가슴 뜯어내는 거고. 만남은 ‘너 파충류지, 가짜지. 어디 인간 탈을 썼어’ 뜯어내는 거예요. ‘짐승이 안에 들어있구먼’ 그게 바로 십자가의 말씀이 해주는 거예요. 우리 구조가 ‘앞으로 내가 짐승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그런 소리 나오면 안 돼요.
우린 구조적으로 갇혀있는 거예요. 악마의 구조에 갇혀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맨날 내 의만 찾고 나만 챙기는 그것을 이건 고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떡 없어 떡 달라 하다가 그것도 원망, 물 떨어져 물 달라 했는데 그것도 원망, 도대체 이 기차가 어떤 기차인지 우리가 생각도 못한 기차에 실어버린 거예요.
왜? 우린 애굽에서 지옥에 특화된 존재인 것을 본인이 그렇게 심도 있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나다’ 이렇게 생각했지 자기방어하기 바빴지 ‘내가 나는 나라 하는 이건 잘못된 거야’ 그럼 내가 나한테 묻지요. 그게 잘못됐다면 어떻게 고칠 건데? 고칠 대안 있습니까? 대안 없어요. 나는 나다. 그래서? 달리 살아보지? 어떻게 달리 살아봅니까?
어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주님께서 일을 하실 어떻게 일을 하느냐 하면 디모데후서 3장에 마지막 때에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뭐 사람들 보면 주께서 나한테 주의하라 하는구나. 돈 사랑하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뭐냐 하면 우리가 돈 사랑과 나 사랑은 구조적으로 구조화된 거예요. 이것 뜯어내면 딴 건 멀쩡합니까? 아니에요.
8.결과-말씀에 관심-내가 옛 구조,옛 부대,옛 술에 불과함을 알게 됨
우린 이걸 받아들이면 이걸 가지고 돈 사랑하는 걸 느끼게 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자기 사랑하는 걸 느끼게 하면 돼요. 느껴봤자 몇 분 가지도 않지만 그다음 내일 되면 또 느끼게 하는 일이 또 발생될 거예요.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우리 자신을 몰락시키는 거예요. 몰락이라 해서 자꾸 가난하고 망가지고 아프고 자빠지고, 그걸 말하지 마시고요 엎어지고 자빠지고 아프고 그런 게 아니고 나 같은 것 생각할 필요 없어도 된 상관없다는 생각이에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되는데 이게 천국에 특화된 건데 우리는 뭐냐 하면
■말씀 지킨 나에 관심 있어요. 이게 지옥에 특화된 거예요. 이건 아주 한 끗 차이인데 구분 못하지만 우리가 구분 못하는 걸 주께서는 구별해내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와서 주께 돌아가는데 우리한테는 관심도 없어요.
우리는 배제돼야 되고 삭제돼야 되는데 말씀에 관심 있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 줬고 우리에게 들어온 말씀을 스스로 완성시키는 쪽에서 내 잔을 마시라 이 말이에요. 피 담긴 쓴 잔을 마셔라. 그러니까 결국 너희는 마실 수밖에 없어, 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자꾸 내 그거를 끼어들려는 반칙을 범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단호하게 말씀이 말씀 지키는 나를 저주할 수밖에 없는 거죠. 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 지라. 이렇게 너 자신을 부인하라 말이죠. 베드로 그 소리 안 했다가 주님한테 사탄아 물러가란 소리까지 들었잖아요.
성도는 압니다. 새롭지 아니하면 성도는 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새롭다는 게 뭐냐 하면 기존 구조를 또 말씀이 십자가 복음이 다녀갈 때 새로움이 나오게 돼 있어요. 돌고 돌리고 또 돌리고 계속 말씀이 돌아와서 또 나로 하여금 나를 즐거이 부정하게 가볍게 부정하게 만들고 또 돌아오는 거예요.
이런 작업에 말씀이 동원되는데 특히 바리새인 나오지요. 바리새인이 누굽니까? 바로 나와 같은 구조의 동기생 아닙니까. 바리새인이 하는 짓을 우리가 바리새인만큼 성경을 몰라서 그렇지 알면 바리새인 다 되게 돼 있어요. ‘너 모르지. 나 안다.’ 이게 바리새인이잖아요. 그러니 그 바리새인을 뺑뺑이 돌리는 거예요, 말씀으로. 계속 말씀으로 돌리게 되면, 그러니까 새 술이 돌려버리면 내가 옛 구조, 옛 부대, 옛 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 이제는 뭘 하느냐 하면 점점 더 율법의 완성 단계로 우릴 이끌어가지요. 31절 봅시다. “너는 여기 내 곁에 섰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모세가 그런 이야기할 때 여기서 제가 묻습니다.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바뀝니까, 안 바뀝니까? 안 바뀌는 것처럼 와서 계속해서 내용이 바뀝니다. 왜냐하면 어느 쪽에 바뀌느냐 하면 우리 인간 쪽에서 바뀌어요.
인간이 얄팍하거든요. 간사하거든요. 안 지켰는데 지켰다 하니까 더 동일한 단어로 내용이 현실을 만들어요. 환경을 만든다고요. 환경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말씀 자체가 환경을 계속해서 변화시켜버립니다. 그 주어진 환경은 말씀이 말씀되게 드러나기 위해서 환경을 준다고요. ‘말씀 지켰는데요? 양 잡아 드렸잖아요. 소 잡아 드렸잖아요. 우리 절기 다 지켰습니다.’ 그렇게 주장하거든요.
여러분 선지자들이 바알 섬겼다고 했을 때에 말라기도 그런 게 나오는데 제가 언제 여호와를 버렸습니까, 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여호와를 버린 적이 없어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자기 역사를 버린다는 것은 인간에게 역사를 왜 버려요. 애굽에서 홍해 건너온 역사를 왜 버립니까. 여호와를 안 버렸어요.
안 버렸는데 자꾸 주님께서 네가 나를 버렸다고 이야기하거든요. 하나님을 믿고 왕을 달라 할 때 사무엘상 8장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왕을 달라는 게 너희는 나를 버린 것이다, 라고 사무엘 통해서 그런 이야기할 때 듣는 백성은 기가 찬 거예요. 왜 확대 해석하십니까, 하나님. 자기들 보기엔 확대 해석이에요.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정된 왕이 있으면 왕이 없는 것보다 더 낫지 아니합니까, 이런 거예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왕을 달라는 게 왜 율법에 위반되느냐 하면 인간은 본인이 몰랐어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정치적 행위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정치적 행위에요. 정치적 행위를 다른 말로 하면 권력행위, 다른 말로 하면 서열매기기 행위라는 것, 내가 행동 하나를 해도 서열매기기 행위에요.
‘이게 지난 번 차와 맛이 덜 진한 같아’ 이게 무슨 행위냐 하면 이게 바로 정치적 행위에요. ‘지난 번 만났을 때와 표정이 안 좋으네’ 이게 정치적 행위에요. 인간의 구조가 되려면 권력이 있어야 구조가 돼요. 권력 없는 것은 남의 구조에 항상 짓눌리게 돼 있다고. 열중쉬어. 신발 벗어서 네가 소나 키워. 막 패는 것 있잖아요. 여자 축산조합장이 뉴스에 나왔지요. 술 먹고.
남자 직원 둘을 열중쉬어, 해놓고 ‘너 같은 것은 소나 키워.’ 소를 키우는 것은 개그에 나오는 건데 왜 맞고 있지요? 정답은 그 맞는 직원의 자기 구조가 있어요. 여기 잘리면 갈 데가 없어. 자기 삶의 패턴이 있어요. 때리는 육십 먹은 여자조합장도 구조가 있지만 자기 구조가 있어요. 조합장은 뭘 알아요? 네 구조는 내 구조 안에 예속돼 있어. 이게 세상입니다. 김정은이 좋아서 붙어있어요, 전부 다? 왜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인데 그 교회 내의 성직자 구조는 은혜롭지 못하지요?
전도사가 월급 못 받았다고 고소하니까 대법원이 교회에게 전도사 월급 주라고 얼마 전에 판결났어요. 왜? 전도사가 노동자니까. 전도사가 노동자라 하는 것은요 교회 역사에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도사는 봉사직이지 월급쟁이가 아닙니다. 근데 지금 전도사 노동조합까지 있다고요. 조금 있으면 목사 노동조합 나올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노동조합 있다는 말은 교회를 영업업체, 영업구조로 만들었을 때 그게 의미가 있어요. 노동에 대한 대가. 왜? 장사하는 데니까.
율법은 쓴 잔을 만들어내요. 죽음 구조에요. 죽음 구조에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집어넣는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죠. 죽음 구조니까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보다 월등하게 강한 권력이 있는 힘이 있는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토착민을 미리 구경토록 했습니다. 백성들은 난리 났습니다. 백성들은 율법 지킬 생각은 안 하고 지 살 궁리를 해서 사막을 힘들게 살아왔잖아요. 율법을 지키고자가 아니라 자기 살 궁리.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목숨을 지켜주는 분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게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게 주의 확고한 뜻이에요. 자기 목숨을 살리고자 하는 것은 지옥에 특화된 사람이고 말씀이 말씀대로 지켜지면 전 괜찮아요, 하는 게 천국에 특화된 사람이에요. 지옥에 특화된 자가 천국에 특화된 자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뭘 주느냐? 쓴 잔을 주는 거예요. 잔을 마시게 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 잔을 마시게 하는 거예요. 또 쓴 잔 하니까 너무 써, 하지 마시고요 즐겁게 기쁘게 이제 비로소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는 그러한 쓴 잔, 백 잔 마실 수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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