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22강) 히10:29(순교) 20231023b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68페이지 중간에 보면, [순교 당하고, 또 순교 당한다.] 그렇게 돼 있고,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다.”(히11:38) 순교라는 것은 파괴되는 거예요. ‘나’가 파괴되는 것은 바로 죽음이죠. 순교가 되려면 내가 스스로 나를 파괴하는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또는 약속에 의해서, 또는 같은 말로 언약에 의해서, 언약의 완성은 복음이니까 복음에 의해서 파괴되는 것을 순교라고 하고, 그 순교자들의 집합체를 천국이라 합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말씀과 그다음에 파괴된다는 것은 육신의 파괴 이전에 자아가 말씀과의 만남에서 파괴될 때 이게 순교가 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자아가 말씀 완성에 훼방되고 방해되고 모독적인 요소가 좌우로부터 독소가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독소는 딴 게 아니죠.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독소가 되는 거예요. ‘나도 좀 안다’ 이 말이에요. ‘나도 성경 해석할 줄 알고 좀 안다.’
그걸 왜 아는데, 물어보면 이것 알아서 안만큼 반듯하게 살아야지. 반듯하게 사는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반듯하게 사는 것이 누굴 욕되게 하느냐 하면 언약의 피를 욕되게 하는 겁니다. 이게 히브리서에 나오는데 성경 찾아볼게요. 히브리서 10장 29절,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성령을 욕되게 하는.
성령은 본인이 한 일은 없어요. 누가 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그것을 성령이 그대로 쟁반에 담아서 우리에게 하나의 기준으로서 들이미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왔다 할 때 성령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거기에 대한 답변은 성령이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를 알면 금방 알 수 있지요. 성령이 오지 않았을 때의 태도가 사도행전 8장 18절에서 20절에 나옵니다.
성령이 오지 않았을 때의 행위 그 뒤에 많습니다만 보게 되면,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이래 돼 있어요.
이 말씀에 대해서 베드로의 말이 옳다고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어떤 입장부터 출발해야 되느냐 하면 시몬의 입장부터 먼저 출발하겠다는 거예요. 시몬이 성령 받겠다는 것이 장사하려고 성령 받으려하겠습니까? 아니지요. 시몬은 성령을 받고 싶은 거예요.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걸로 장사하려고 한 게 아니고 그냥 성령을 받고 싶은 거예요. 성령을 받고 싶어 한다는 말은, 성령이 탐이 난다는 뜻이에요. 성령을 탐을 내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시몬은 뭘 모르냐 하면 성령이 올 때 자신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왜냐하면 성령은 성령 본인의 일이 없어요. 예수님이 인간들의 죄로 인하여 파괴된 그걸 그대로 우리에게 들이대거든요. 너도 이 파괴에 참여하라고 성령께서 주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가 성령 받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전부 다. 그냥 성령이 왔어요. 성령 오라고 기도한다고 오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지 사도되려고 한 적 있어요? 없지요. 처음에 예수님에게 베드로를 선택할 때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아이고 감사합니다’ 했습니까, ‘나를 떠나소서’ 했어요? 나를 떠나소서, 라고 했지요. 저 같은 것은 거룩한 주님의 일에 합당치 않다는. 그 합당치 않다 할 때 ‘네가 아는 합당치 않다’의 수준을 더 깊이 해줄게.
그래서 베드로로 결국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하는 합당치 않음을 보여주시는 멋진 경험을 하게 하신 거예요. 네가 생각하는 ‘나는 합당치 않다’를 넘어서서 진짜 합당치 않은 거예요. 누가? 베드로가. 진짜로. 장모가 죽었는데 살아났지요. 물 위를 걸었지요. 오병이어에 참여했지요. 너는 반석이라 해서 제자 중에 수제자 만들었지요.
좋은 것 다 해줬는데 나온 결과는 뭐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나는 저분 저주한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했잖아요. 정말 합당치 않지요.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합당치 않는 존재임을 알리기 위해서 성령께서 그다음부터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활동해요. 이러니까 너는 구원받거나 천국 가거나 성령 받거나 예수 믿을 자격이 안 돼, 라는 것을 되풀이해서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순교 이야기할 때 제일 거짓적인 순교가 뭐냐? ‘주를 위해서 죽겠나이다’ 이것 가장 가짜 순교입니다. 그야말로 ‘들어와, 들어와. 그래 나 순교할게’ 이건 쑈입니다. 어디 영화 찍습니까? 본인이 연출하고 있어요. 순교라고 할 때 제 나름대로 쉽다고 생각하는 표현은 이겁니다. 비행기 안의 탑승객이에요.
비행기 타기 전까지는 지 몸으로 화장실 왔다 갔다 하고 자기 마음대로 술 먹고 할 수 있어요. 일단 비행기 탑승하게 되면 안전벨트 다 해야 돼요. 뜰 때 휴대폰 보면 안 되고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야 돼요. 그게 비행기 안의 규칙이에요. 이 규칙은 탑승객 본인들이 동의해서 만든 게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거예요. ‘꼼짝 마라’입니다. 설치고 하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평소에는 내가 주인이에요. 그러나 비행기 탑승하는 순간 비행기 안의 새로운 공간의 규칙에 지배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령 안이고, 예수 안이고, 기도 안이에요. 기도를 하는 게 아니고 성령 안에서 하라 했잖아요. 에베소서도 그렇게 사도 서신에 기도할 때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에도 나와요. 성령으로 기도하라. 비행기 안에서 기도하라, 이 말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기도하면 뭐가 있느냐? 이미 비행기 안에 들어있다는 자체가 주님의 기도의 응답으로 티켓 얻게 되었고 탑승하게 된 겁니다. 그 티켓을 뭐냐 하면 일종의 자격증 같은 거예요. 천국의 자격증 같은 것, 예수님 안이.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께 창세전에 선택된 자에게만 성령이 와요. 선택되지 않은 자에겐 성령이 오지 않습니다. 그게 고린도후서에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1장 보겠습니다. 1장 22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도장 찍었다, 사인했다. ‘얘 천국 가’ 사인했다는 뜻으로 인치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버린 거예요. 사인은 예수님의 이름이 사인됐다는 성령이 우리 안에 하나의 사인처럼 새겨져 있는 셈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부터는 그 사람의 모든 인생은 20절 봅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19절 끝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주님의 인 치심을 받고 주님께서 보증으로 성령을 집어넣어준 사람은 그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합당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에요, 모든 일이. 이것은 성도가 자기평가를 차단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는 끊임없이 어떻게 하느냐? 자기에 대해서 쉴 새 없이 평가해요. 이것은 나쁘다, 이것은 좋다 하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나온 지식이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할 권한도 우리에게 없어요. 없는데 우리는 수시로 나를 평가해요. 잘했다, 못했다, 잘했다, 못했다. 그러면 성령께서 가만두겠어요? 바로 그 판단을 파괴시키지요.
이제 비교해봅시다. 성령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①성령이 없는 사람의 평소 태도, 이것은 뭐냐 하면 훈련하기입니다. training하기. 세상의 어떤 일도 훈련하기 나름이다. 배우고 익히고 훈련하면 다 최고는 아니더라도 얼추 유사하게 따라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 이게 인간세계에서 통합니다. 열심히 하면 최고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다. 가능성이죠. 희망, 보람.
그런데 주 안에서는 뭘 파괴합니까? 훈련하기를 파괴합니다. 훈련해도 소용없게 만들어요. 그러면 우리는 육신이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 데려가고 육신에 머물게 하는 이유는 성령 받기 전의 삶과 늘 비교하고 대조해야 거기서 그리스도의 공로만 나오게 돼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육신에서 더러운 육적인 것이 안 나오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구원받은 내가 복음의 중심이 돼요. 예수님이 중심이 아니고 구원받은 내가 중심이 된다고요. ‘나 이제 살았어. 부활의 영이 있기 때문에 늘 새 창조야. 새 삶이야.’ 이런 식으로.
그러면 누가 좋은 거예요? 예수님이 좋은 거예요, 예수님 덕분에 사는 내가 좋은 거예요? 내가 좋지요. 파괴될 게 없지요. 더 돈독하게 됐고, 더 성숙하게 됐고, 더 유능하게 됐고, 이제는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자아상이 된 겁니다. 제가 그냥 쉽게 이상적인 자아상이라 했는데 이상적인 자아상과 사회에 나가면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형이 있어요. 이걸 이상적인 자아상을 ‘이상자아’ 라 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자아이상’ 이라 합니다.
이상적인 자아상 내가 원하는 것은 놀면서 밥 잘 먹고 잘 사는 것.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형은 돈 잘 벌어오는 것. ‘너 최고다. 다른 사람은 자동차 두 달 만에 한 대 파는데 너는 자동차를 한 달에 열 대나 파냐? 우리 영업소에서 네가 최고다.’ 가장 능력 있는 사회인이 돼요. 칭찬이 늘어나죠. ‘너는 남들이 요구하는 남들이 원하는 사람이다.’
이걸 두 자로 뭐냐? ‘영웅’이에요. 임영웅이도 좋고, 이영웅도 좋고. 이게 영웅이에요, 영웅. 인간사회는 무슨 중심으로 나갑니까? 영웅 중심이에요. 영웅이 추장이 되고, 추장이 커서 족장이 되고, 족장이 커서 발전하면 뭐가 되느냐? 이게 왕이 되는 거예요. 왕의 이미지는 영웅이미지에요. 나라를 구할 영웅.
트롯 가요계를 구할 영웅은 임영웅이. 침체된 탁구를 키우는 영웅은 신유빈이고. 배드민턴을 키우는 영웅은 안세영이고. 한때 여자 골프를 세운 영웅은 누굽니까? 박세리죠. 높이뛰기 영웅은 우상혁이고. 전부 다 이 사회는 영웅이 빛을 내요. 한국의 팝 가요를 넓힌 것은 BTS, 군에 가면 안 된다. 이 세상은 영웅 중심의 사회에요.
그 영웅 중심의 사회가 왜 그러냐? 영웅이라 하는 것은 능력이 특출하지만 이게 훈련함에 따라서 영웅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키울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 인간사회 그 자체로 영웅을 키울 수 있기 때문에 이 자체가 뭐가 문제냐, 뭐가 하자냐? 열심히 노력할게. 말씀 열심히 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되잖아. 그러면 복 주잖아. 이건 뭡니까? 교회의 영웅이에요.
교회에서 원하는 교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 교회 부흥하고 교회를 키우는 데 도움 되는 사람, 그 사람을 위하여 교회가 합심하여 철야하고 새벽기도하고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기도하면서 열심히 매진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파괴시킬 분을 찾질 않아요. 교회 안이 천국 안입니까? 아니거든요. 예수님 안은 순교될 사람들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다시 사도행전 8장에 돌아가서 봅시다. 돈을 줬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양식 같은 돈을 제시했다는 것은 시몬 입장을 생각해보세요. 시몬 입장을 왜 생각하느냐? 지금 우리가 우리 육신이 시몬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안에 잠복돼 있다니까요. 성령으로 장사하고 돈 벌겠다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하는 일이 너무 훌륭하고 착한 일이니까 저게 성령 없이는 안 되니까 내가 좋은 목적을 위해서, 좋은 목표를 위해서 성령 달라는 게 뭐가 나쁘냐 이 말이죠.
사도행전 8장 17절에,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고 돼 있지요. 물어봅니다. 성령을 누가 주셨습니까? 사도가 성령 줍니까, 주님이 성령 줍니까? 주님이 성령 주지요. 그런데 남들 보기에 뭐가 보입니까? 사도가 안수했다는 그걸로 인하여 마치 자동적으로 성령이 온 것처럼 보이지요.
그렇게 보이는 것은 우리 모든 육신 속에 그게 납득이 되는 그것만이 납득이 된다는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에 한 거예요. 사도가 안수하매 성령 받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도 사도한테 가서 머리 들이밀고 성령 달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성령 옵니까?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성령 준 적이 없다.’ 방금 안수했는데 성령 준 적이 없다.
사도행전 3장 16절에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 사람들은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한테 안수하매 걸었다는 걸 분명히 자기 눈으로 봤어요. 인간은 뭘 믿습니까? 자기 눈을 봐요. 자기 관찰을 봐요. 자기가 납득될 수 있는 걸 믿는다고요. 걷고 난 뒤에 사도에게 하는 말이, ‘당신의 경험과 열성으로 낫게 했습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누가 봐도 그런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여기서 사도가 엉뚱한 소리합니다. ‘내가 한 게 아닌데.’
정리해봅시다. 지금 우리가 순교자인지, 아닌지 그걸 따져보는 거예요. 동일한 현상, 동일한 현실 속에서 동일한 사건이 나왔을 때 이 사건이 두 개를 유발하지요. 하나는 성령 없는 세계의 실상을 보여주고, 두 번째는 성령 안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동일한 현상과 현실과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뭡니까?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 성도잖아요. 그럼 성도는 ②번만 알겠어요, ①번도 알겠어요? 둘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왜? ②번만 알면 ‘나는 구원받았네’ 이래 돼요. 갑자기 자기 구원받을 것을 증거하는 증인돼요. 나 천당 가는 걸 증거하는 증인된다고요.
그런데 둘 다 받아버리면 절대로 나는 ①번에서 ②번이 될 수 없었는데 중간에 누굽니까? 성령 주신 분이 따로 계심으로 인하여 성령 받는다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서 모든 내게 속한 나가 아니라 주님에 속한 나인 것을 그 현장에서 또 다시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이 자체가 현상이고 사건이기 때문에 종교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사건과 현상과 현실이 우리를 구원해주는 거죠.
그러면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던 말씀은 여기 어디 있지요? 사건과 현상과 현실만 있다면 말씀은 어디 있습니까? 말씀은 어떻게 있느냐? 인간의 눈에 보이잖아요. 동일한 현상이니까 보이죠. 말씀은 보이는 이 세계와 그다음에 보이지 않는 완성자 사이에 연결돼 있습니다. 이게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예수님 안 보이잖아요.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지금 보이는 세상에 관여하고 있는 거예요.
이 연결이 뭐냐? 모든 율례와 법도와 말씀의 완성체로 완성관계로 연결돼 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뭡니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다 나오지요. 세상 끝 날까지, 눈에 보이죠. 눈에 보이는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니까 ‘내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안 보이는 분이 세상 속에 함께 있는 거예요.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는데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해보면서 이 사실을 풀어 가봅시다. 어떤 자가 순교자인지를 계속해서 제가 모색하고 있습니다. 질문은 이겁니다. 교회 앞 횡단보도 길에서 받은 질문인데,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 했는데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질문이 왜 중요하냐 하면 그 당시 예수님을 따라왔던 많은 제자들 있잖아요. 오천 명 다 따라온 건 않았을 거고 오병이어 먹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이 의문점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들이 답변을 내리기를 이거는 우리가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저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분이 아니다. 우리가 얻고 싶은 답변과 핀트가 안 맞는 분이라 해서 한 사람도 남지 않고, 하여튼 단결도 잘해. 왔다가 한 사람도 남기지 않다 다 가버렸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그 말씀이죠.
처음엔 아는 척하고 오병이어 때 하나님의 메시아라고 했는데, 그러나 그들은 본인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왔잖아요. 마치 훈련하듯이. 열심히 따라붙으면 구원받는 것처럼. 그런데 주님께서 기어이 떼어내십니다. 열심히 따라붙고 훈련하고 노력하고 성경공부해서 구원받는 것은 없어요. 없을 때는 떼어내는 것이 주님 앞에서 상책이에요. 갈 사람은 가라 이 말이죠. 갈 테면 가라 뒤돌아보지 말고. 그냥 떼어내 주는 게 최고에요.
떠나가면서 저 사람은 우리가 함께 할 사람이 아니라고 가버렸지요. 그런데 횡단보도 그 사람은 이래 질문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 거예요. 이 질문을 여러분에게 합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는 말이 뭔 뜻입니까? 설마 예수님 눕혀놓고 부엌칼로 식인종처럼 살을 도려내고 피를 벌겋게 해서 살과 피를 먹어라, 이건 아니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같은 인간 말을 사용하신 주님께서 인간 말을 인간에게 했단 말이죠.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 ‘내 살과 피를 떡으로 바꾸어라, 포도주로 바꾸어라’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누구 피 흘리는 것 구경하라, 십자가 바라보아라’ 이것 아니란 말이죠. 구경하면 구원받고, 이게 아니고 ‘먹어라’ 했다고요. 구경하면 받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 구경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지금은 전쟁 중이라 못 가지만 지금도 십자가 메고 가는 사람 있어요. 골고다 체험 학습한다고. 나는 걸어가서 슬픔의 길 올라가면서 손바닥 댔다는 그런 것 만지고 교회까지 올라가면 끝인데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그 당시 제자들은 내 살과 내 피를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성령 받고 난 뒤에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육신 대 육신의 연결로 본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예수님의 육신에서 나왔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준 게 살이 아니고 그건 떡이었고, 피가 아니고 포도주로 받았잖아요. 그걸 살과 떡 먹었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다, 제자들이. 왜냐? 그 떡 먹고 어떻게 했습니까? 도망쳤으니까 배신했으니까 그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럼 뭐냐? 예수님의 육신에서 나왔던 살과 피가 지금 제자들에게 육신이 있잖아요. 뭐가 전달되었습니까? 성령이 전달되었어요. 성령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만 성령의 내용을 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버지와의 언약의 내용을 다 충족시켰기 때문에 성령이 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예수님이라면, 내가 한 일이 저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이 되려면 아버지께서 완전하다는 허락이 나와야 그게 가능해요.
그런데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냐 하면 예수님 자신에게 성령을 주신 아버지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주신 아버지께서 예수님 하는 일이, 십자가 죽으심이 다 이루었다면 그다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성령을 받은 예수님이 다 이루었으면 예수님을 그냥 두면 안 돼요. 어디 두느냐? 성령이 내려왔던 그 자리에 올라가요. 그 자리에 올라가야 성령을 선물로 줄 수가 있어요. 선물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준다고요. 훈련이 아니고 애써서 주는 게 아니고 성령을 그냥 줄 수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성령을 줬다는 말은 성령을 했던 그분이 추가적으로 더 보탤 게 없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제자들 제치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흘리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언약이 완성되느냐, 미완성이냐 결정되는 겁니다. 이 점이 중요해요. 예수님이 살과 피를 흘렸는데 완성됐어요, 완성 안 됐어요? 아버지께서 새 언약 완성자로 받았지요.
제자들 떡 먹는 것과 아무 상관없어요. 제자들은 들러리고 중요한 건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흘림으로써 아버지께서 흡족하게 완성이 됐잖아요. 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역할을 다한 거예요.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제자들이 살과 피를 먹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제자들이 살과 피를 안 먹는다 하면 제자들은 아직 미완료 상태기 때문에 구원을 못 받은 상태에요.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뭘 주느냐? 완성된 것을 주는 겁니다. 그 완성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아버지와 아들하고 계약 완성되었다, ‘예’가 완료가 되었다는 사실이에요.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는 그 말씀조차도 완성이 되어서 그게 내용으로 포장이 된 채 성령을 통해서 새벽배송이 되는 거예요, 제자들에게.
그렇게 되게 되면 제자들은 공짜로 뭐가 되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체결로 이루어지는 영원한 복락이 제자들이 거기에 공짜로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들어설 때 자격도 바꿔요. 뭐냐 하면 율법의 종, 저주의 종이 뭐로 바뀌느냐? 아들로 바뀝니다. 이게 율법에 의하면 상속자라 해요. 맏이의 효과를 톡톡히 보는 겁니다. 맏이 하나 잘 되어서 자기가 덤으로 맏이가 누리는 복에 양자로 그냥 다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누가 방해하겠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 7절, 초등학문이 등장해요. 초등학문이 지금은 많이 분화되었어요. 초등학문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과학, 철학, 예술, 종교, 정치 이런 것들. 특히 예술이 이게 교묘해요. 예술 좀 하는 신부들이 있어요. 건축, 음악, 종교도 마찬가지고. 정치, 철학, 과학 이게 전부 다 초등학문에 속합니다.
왜 그럴까요? 각자 이들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영웅이 있습니다. 영웅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인간의 가능성, 인간이 훈련하면 얼추 그중에 하나 될 수 있는 가능성, 희망을 없애지 않는 것이 영웅주의고, 영웅주의로 이 사회가 구성되는 겁니다. 과학, 철학, 예술, 종교, 정치. 여기 하나 보탠다면 철학과 성경이 결합된 게 뭐냐 하면 신학, 언어연구 이런 것 있잖아요. 그게 기호학인데 언어와 기호학과 철학의 결합이 신학이 돼버린 거예요.
이딴 것들이 왜 쓸모없느냐 하면 이게 계속 인간에게 가능성을 유발해요, 열어줘요. 열심히 하면 한 만큼 알아진다는 가능성을 줘요. 보세요. 내가 열심히 하면 더 잘된다는 말은, 내가 아주 망가지진 않았다는 의식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나는 아예 희망도 없는 그런 인간은 아니라는 그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지금은 약간의 불씨는 남아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신학을 공부하면 더욱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초등학문에 하나 더 보탠다면 순교, 종교에서 말하는 순교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언제 끊겼습니까? 켜세요. 다 이루었기 때문에 괜찮아요. 아무 상관없습니다. …… 제가 편집해서 갖다 붙이면 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초등학문에 인간의 순교까지 그것을 집어넣어야 돼요. 왜냐하면 순교가 나쁜 건 아닌데 순교를 예상한 게 나빠요. 순교를 지금 이 상태보다 더 함양된 신앙이 좋은 상태로 예상한다는 그 자체가 내가 아주 망가지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순교를 내가 예상한다는 것은 지금 상태로 하나님께서 별로 안 좋아할 거라고, 지금 상태가 내가 모자란다는 말은 뭘 전제로 하느냐 하면 내가 처음부터 아예 안 되는 존재, 그 정도는 아닐 것이라는 그걸 자기 자신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없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성령 없는 사람의 특징은 ‘역사주의’입니다. 역사주의라 하는 것은 나 자신을 역사로 보는 거예요. 내가 전에는 이것도 몰랐고, 점점 더 향상된 모습을 지금 와서 그걸 살필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역사주의, 교회라 하면 교회역사주의, 세상의 모든 문명과 학문, 철학과 예술의 발전상, ‘봐 인간이 이렇게 발전했잖아. 이 발전한 의미와 가치를 우리가 맹탕으로 보면 안 되잖아’라는 주의에요.
역사주의의 이러한 잘못은 뭐냐?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이미 다 이루었잖아요. 그러면 누가 이루었어요? 예수님 플러스 누가 거들어서 이뤘습니까, 예수님 홀로 이뤘습니까? 목자를 치니 양들이 어떻게 됩니까? 흩어졌지요. 남아 있는 것은 목자 예수님밖에 없지요. 목자 혼자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는데 아버지가 거기에 대해서 만족했어요, 불만족했어요? ‘너만 구원받으면 돼, 다른 사람은 구원 안 해도 돼?’ 이렇게 불만족했습니까? 예수님 홀로 만족했습니까? 만족했지요. 그럼 그다음부터 종말이에요. 모든 건 종말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아까 촬영 잘되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니고 ‘은혜다’ 이래 생각하시고. 갑자기 감사가 밀려오네.) 12장 31절부터 3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느냐 하면, 성령은 마지막 때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오신 분이 성령이기 때문에 그래요. 추가할 게 남아 있지 않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아무리 애쓰고 경건하게 훈련해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끝났어요.
성령님이 제시하는 기준은 예수 믿고 바르게살기가 기준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끝이에요. 이게 성령의 역사에요. 그러면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끝이 아니에요. 아직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실 게 남아 있기에 끝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자에 대해서 욕하고 해도 그거는 사하심을 받아요. 용서를 받는다고요.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이 세상 오는 세상이 끝나버렸어요. 끝났기 때문에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2)
마치 예수님보다 성령이 더 중요한 것처럼 여기지만 그게 아니고 성령께서는 예수님 하신 일 마무리 지었다는 그걸로 이제는 성령께서 본격적으로 할 일이 생긴 거예요. 예수님 공로에 어떤 것도 이 땅 초등학문들이 더 보태는 일을 없다 이 말이에요. 죄의 종이 아들 되는 것은 예수님의 성령뿐입니다. 아들이 아닌 자는 종이지 상속자가 아니에요. 갈라디아서에 나오잖아요.
갈라디아서 4장 3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우리가 어렸을 때는 초등학문 안에 있는 거예요. 초등학문에 뭐가 포함되겠습니까? 율법을 이해하는 인간 학문, 신학도 포함되겠지요. 탈무드 같은 것.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5절)
그러면 우리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스스로 속량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훈련한다고 됩니까, 경건하다고 됩니까? 안 되지요. 안 되는 것을 누구만 했습니까? 오직 아드님이 했지요. 그다음 6절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왜 보내십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아들이 하신 그것만 받아주겠다는 뜻으로 아들의 영을 보낸 거예요. 아들이 하신 것만 있으라고 아들의 영을 보낸 거예요. 그때부터 뭐가 됐어요? 이미 종이 아니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으니, 7절에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천국을 상속받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어떻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처한 초등학문에 돌아가서 스스로 종노릇하려 하느냐? 그러면 이 말씀 보고 우리는 안 할게요, 하면 안 돼요. 우리의 육신이 이 말씀 그대로 카피가 되어서 우리 안에 갈라디아서 4장 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요.
그러면 우리는 뭘 하느냐 하면 나는 어느 쪽이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부분이 초등학문에 종노릇하는 부분이고, 어떤 것이 성령으로 모든 것이 아들 된 것이냐를 우리 육신을 통해서 갈라디아서 4장을 보여주는 인생을 살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순교입니다. 뭐 칼에 찔리고 난리하는 그것 아니지요. 순교는 뭐냐? 성령 받은 사람 자체가 순교입니다.
그러면 성령 안 받은 사람과 성령 받은 사람의 차이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겪었던 아픔을 몰라요. 동일한 죄 있는 육신인데 예수님 육신은 사람들에게 욕 되게 얻어먹은 육신이에요. 그리고 예수님 보고 욕했던 육신은 누구였느냐?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이 자기 육신으로 납득이 안 된다고 깨닫고 못한다고 다 가버리고 예수님의 육신에 아픔을 줬지요.
성령 받은 제자들은 이제는 살과 피를 먹게 됐는데 그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자기 육신 속에 예수님이 육신으로 겪었던 경험을 함께 성령을 통해서 경험케 되는 것, 이 상태가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현장성, 또는 현실성, 또는 사건성이에요.
아까 카메라 전기 안 들어와서 불 꺼졌잖아요. 불 꺼지면 지옥 갑니까? 모든 일어나는 사건은 내가 예상한 일들이 깔끔하게 마무리돼야 한다는 그 생각, 그것 누구 생각입니까? 성령 받지 않은 우리 생각이지요. 왜? 우리가 그걸 예상하고 기대했기 때문에,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이 그 육신 때문에 주께서 살과 피를 흘려야 됐단 말이죠.
이렇게 우리가 아직도 주신 목숨으로 모여 있는 것도 어제 내가 애써서 흑염소 먹고 감기 안 걸리고 오는, 그게 아니고 흑염소 먹더라도 먹게 하신 것도 주님이고, 주의 뜻에 의해서 이렇게 모인 거예요. 의자 들고 오진 않았잖아요. 모든 것이 주님께서 그렇게 되돌아서 ‘주가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언약이기 때문에.
누구 언약? 숨어있는 아버지의 언약이 바로 그 언약, 우리와 상대 안 하고 주의 이름과 상대하는 언약, 그게 주의 뜻이었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데 자꾸 하나님 보여 달라고. ‘지금 너희가 보고 있잖아. 하는 일이 아버지 일이야.’ 지금 보여주고 있다고요. 그런데 인간은 그걸 못 믿는 이유가, 자기의 육신적 요소가 자꾸 거기다가 해석을 붙이고 거기서 분석을 하고 내가 납득되는, 니 납득되는 식은 다 차단시키지요.
그래야 살과 피가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 없다? 없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내 살과 피 안 먹어도 구원받아’ 이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한 적이 없지요.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저’란 말 집어넣는 이게 모독 같아.
어떤 사람도 살과 피 없이 구원되는 사람이 없어요. 뭐 복음 전한다고 감기 안 걸린다고? 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오직 예수님 살과 피만 됐다는 걸 전하기 위해서 복음 전하고 강의하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아직 목숨 부지하고 있는 겁니다. 카메라 막 꺼지고. 아무 상관없어요. 심지어 어떤 일이 벌어져도 주께서 그 벌어진 일에 그 안에 주님의 살과 피를 발굴하고 찾아내도록 성령께서 작동할 줄로 믿습니다. 이게 바로 순교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믿음이 있어야 순교한다는 데 그 믿음이 우리가 생각한 믿음이 예수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있음으로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먹고 마시는 것이 곧 순교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