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18강-자기부인

아빠와 함께 2023. 5. 31. 09:43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8강) 창20:2(자기 부인) 20230529b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십자가를 아십니까] 58페이지 해보겠습니다. 지금 [십자가를 아십니까], 기도 항목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도 항목의 핵심은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했는가가 중요하거든요. 요한복음 10장에 어제 말씀드린 것 같이 아버지가 나를 아는 것처럼 양도 목자를 알고 목자가 양을 안다.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아는 그 연결 고리는 먼저 아버지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표준이 확정이 돼버렸어요. 그 관계 말고 다른 적용되는 건 없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연결돼 있는 그것을 언약관계라 해요. 약속관계. 언약관계는 언제 형성되느냐? 창세전에 형성됐어요. 창세전에 의미가 뭐냐 하면 아무것도 없을 때 오직 약속, 다른 말로 언약이죠. 아무것도 없을 때에 약속만 있었어요. 약속 당사자인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약속만 덜렁 있었고 나머진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창조될 때는 약속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말은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됐다와 같은 말이에요.

골로새서 1장 16절, 세상에 보이는 보이지 않는 것 악마까지, 중요한 건 악마까지, 골로새서 1장 16절, 보이는 권세와 보이지 않는 권세 모든 것도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허락한 거예요. 주 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창조란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창조 작업을 하셨습니다.

하셨는데 그 창조된 우리 인간들은 창세전에 우리가 있기 전에 있던 계획에 대해서 접근이 불가능했어요.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언약에 접근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접근 불가능한 겁니다. impossible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온전히 계획을 해서 하나님이 실천이 되기 때문에 인간이 그 내용을 미리 당겨서 알아선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만이 아시는 계획을 하나님만이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피조물에게 어떤 사태가 이어져야 되느냐 하면 주의 말씀에 위반하는 사태가 일어나줘야 돼요. 위반하는 사태가 일어나서 십자가를 메시아를 죽이는/살해하는 사태까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욱더 모든 영광을 주께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이 확인될 수가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비로소 의가 더해져요. 그 말은 죄가 없는 곳에는 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의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 되지 않고서는 천국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지옥이 만들어져서 어느 누구도 그 지옥에서 못 벗어나야 천국이 나타나게 돼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피조물이 자기가 알아서 천국 가고 하나님 일에 참여했다는 소릴 못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그렇다면 우리 주제가 뭐냐? 기도지요. 기도의 온전한 기도는 이 원리로 하게 되면 무엇과 만나야 돼요? 기도의 위반과 만나야 되지요. 위반 사실에 관해서 주께서는 기도 내용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위반하는 게 기도의 내용이 되는 거예요.

창세기 20장 2절 봅시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사라가 누구에요? 자기 아내입니까, 누이동생입니까? 아내지요. 결혼해 놓고 아내를 누이라 여동생이라 하면 안 되잖아요. 친 여동생도 아니고요. 자기 아내잖아요. 그리고 자기 집에 있을 때 동생이라 합니까, 아내라 합니까? 아내잖아요.

그런데 외부적으로 타자, 타인을 만났을 때 갑자기 뭐라 합니까?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라 했다 이 말이죠. 이거는 위반이에요. 그런데 지금 이 공식에 의하면 위반이 있어야 뭐가 성립된다? 기도가 돼요. 위반하는 쪽은 인간이 저지르고 위반한 쪽이 기도하는데 위반한 당사자가 기도해요. 주께서 기도 응답이 돼버려요. 이 세상에 위반 안 할 사람 아무도 없지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으려면 이렇게 믿어야 된다는 하나의 표준모델이 아브라함이죠. 로마서 4장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은혜로 된 것이다. ‘은혜’가 또 등장합니다. 은혜가 등장하면서 로마서 4장에서 주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일체 행함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니다, 이래 나와요.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는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왜 구원받았는가?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러면 행함을 포기하고 은혜 받았다가 되려면 중간에 행함의 연속이 끊어졌다는 말인데 그러면 행함이 끊어진 지점을 뭐라고 부르느냐? 로마서 4장에 보면 그걸 믿음이라고 이야기해요. 행함이 끊어질 때는 어떻게 끊어지는가? 위반으로 끊어져요. 아브라함이 약속의 자식 낳으라하니까 누구와 했어요? 하갈과 해서 이스마엘 낳았잖아요. 그건 위반이에요. 주께서 인정 안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일들을 꼭 아브라함이 해야 그게 믿음의 사람 돼요. 그래야 은혜가 달라붙어요. 여러분 보니까 은혜가 많이 달라붙었어. 전부 다 은혜라. 얼마나 위반들 했으면 은혜가 달라붙겠어요. 에브리데이 매일같이 위반이에요. 매일같이 아파트 앞에 우유만 오는 게 아니에요. 매일같이 은혜가 오는 거예요. 왜? 뻔히 아니까.

위반을 통해서 신앙인은 본인의 주체에서 탈락이 되는 겁니다. 내가 신앙인 되는 데서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에 보면 행한 것 없이 의롭다 하는 자가 받을 복이여, 라고 행복이라고 돼 있어요. 그것을 우리는 위반 전문 위반 담당이에요.

그렇다면 여기 대원칙을 성경 전체를 다 포함해서 세워볼게요. 주님께서 구원조건을 이렇게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인가 여러분들 많이 아시는 무슨 말씀이냐 하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그다음에 뭐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했지요. 자기를 왜 부인해야 돼요? 자기 자신을 왜 부정해야 되지요? 여기 자기가 뭐냐 하면 위반 덩어리에요.

벌써 내가 바르게 사는 게 아니고 나는 바르게 살지 못하는 그 자가 나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돼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십자가는 죽는다는 거예요. 나는 죽어 마땅함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를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질 십자가를 선택한 거예요.

그래서 어제 십자가로부터 말미암아 십자가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집었던 주님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데 같이 그냥 들러리로 합류된 거예요. 합류되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 하는데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받는데 머리를 당기니까 지체가 달려 들어오는 거죠.

어쨌든 표준은 자기를 부인하고, 입니다. 이미 자기는 시작이 위반부터 시작하니까요. 그걸 예수님은 죄의 몸이라 하지요. 위반부터 시작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표준이 자기를 부인한다면 이게 우리 성도에게 감사하고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가 굳이 부자 안 되도 괜찮아요. 부자 안 되도 자기를 부인하는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 제대로 못한다 해도 괜찮아요. 왜? 그게 자기 부인과 상관없기 때문에. 몸이 점점 말라간다. 이것도 괜찮아요. 어디 계시나. 몸이 점점 야위어 가신다. 괜찮아요. 왜? 자기 부인하는데 구원받는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자기 부인만 하면 되니까. 물론 너무 부인해서 더 마르면 곤란하고.

못 살아도 상관없고 잘 살아도 상관없어요. 이것도 기쁜 소식이에요. 잘 살아도 상관없어요. 우리한테 해당되지 않지만. 돈 많아도 상관없어요. 자기 부인하면 되니까. 이 자기 부인은 우리가 사실은 안 됩니다. 왜냐?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란 이 말씀 자체가 그리고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한 이것이 행하라는 말씀으로 했잖아요.

행함은 다시 도로 어디로 탱하고 용수철이 있어서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내가 했음으로 돌아가 버려요. 나 부인했어, 나 구원받을 거야 이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 부인한 나를 또 부인해야 돼요. 부인이 몇 명인지 모르겠어. 자기를 부인하고 부인한 또 자기가 부인해야 돼요. 이게 불교의 딜레마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좀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게 안 되니까. 그 잔인한 방법이 아주 세밀하고 극미하게 묘사한 단편소설이 있어요. 적나라하게 묘사한 소설, 자기를 부인하는 이게 프란츠 카프카라는 사람, 체코 사람이에요. 독일에서 살았지만 체코 사람, 작가가 쓴 <유형지에서>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유형지에서>의 내용은 여기 기계가 나오는데 이 기계가 사형시키는 기계에요. 기계구조는 써레와 침대와 그다음에 제도기라는 게 있는데 제도기는 장치에요. 톱니바퀴 장치를 말합니다. 이 세 가지로 돼 있는데 등장인물은 집행관 장교 하나, 모험가 하나 나오고, 그다음에 사병 하나 나오고, 플러스 사형수 딱 네 명 나와요.

장교가 말이 많아. 계속 자랑하는데 전임 사령관이 고안해서 만든 사형시키는 기계가 너무 좋다는 겁니다. 열두 시간 작동된다는 겁니다.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느냐 하면 죄를 지은 종이를 기계 속에 집어넣으면 써레가 입력을 해서 기계가 동작을 해서 옷을 다 벗긴 사형수 몸에다가 죄목을 바늘로 문신을 새기는 방법으로 죽이는 기계. 말로 너 이제 죽는다가 아니라 아예 몸에다가 그 자기의 죽을 이유를 박아 넣는 거예요. 그런 기계를 발명한 어떤 유형지, 유형지란 멀리 떨어져있는 장소지요. 처형장소란 이름의 유형지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법을 우리에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율법을 가지고 우리 몸에다가 새겨버립니다. 새기면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해서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만들어요. 말씀을 새기는 거예요. 정나미가 떨어지면서 좋은 점이 뭐냐 하면 문자로 돼 있는 책이 우리 몸에 새겨진다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말씀의 사람이 되면서 우리 몸에서 뿜뿜 뿜어져 나오는 모든 것은 위반만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철저하게 죄인 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을 왜 그렇게 하느냐? 바리새인들이 정기적으로 금식했어요. 왜 금식하는지 아시지요. 여러분 뻔히 아시잖아요. 왜 금식하겠습니까?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데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 금식해요. 금식의 날. 지금도 교회에서 3월말 4월 되면 금식하지요. 일주일 실컷 금식하고 금요일에 피자 먹고 보충하고. 그동안 너무너무 참았다, 갈급했다 해서 맛있는 것 다 먹고 금식한 보상 받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을 자기가 행함을 실천에 옮겨서 자기가 말씀의 사람이 되고자 시도한 거예요. 말씀은 거룩하다. 그 거룩한 말씀을 내 것으로 책에서 문자로 돼 있는 것이 내 몸으로 되면 나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말씀으로 완성되는 천국에 또는 구원의 나라에 갈 수 있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게 뭐라고요? 유대인들이죠. 유대인들은 인간을 대표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정도까지 할 수 있지요.

주께서 그 방법 그대로 사용합니다. 말씀이 들어오되 왜 지옥 갈 수밖에 없고 왜 저주받아야 합당한가를 주께서는 말씀 실천을 통해서 확인시켜주는 거예요. 그러면 말, 말씀이죠. 말씀에 대해서 실천을 하게 되면 두 가지의 결과를 낳습니다. 말씀을 실천에 옮김으로서 한쪽은 어디 가고? 한쪽은 지옥 가고 한쪽은 천국 가는 거예요.

그럼 율법 없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지옥 가느냐? 본인에게도 말씀이 주어졌어요. 그게 뭐냐? 양심이라는 겁니다. 양심의 내용은 어디서 왔는가? 타인의 잔소리에서 왔어요. 나 말고 타인, 어릴 때는 부모의 잔소리, 친구의 잔소리, 교회의 잔소리, 목사의 잔소리, 위에서의 잔소리, 이런 잔소리들이 뭉쳐져서 나의 양심을 형성하는 겁니다.

이런 잔소리를 들으면 양심은 뭐냐 있느냐? 선악구조가 기다리고 있어요. 선악구조가 기다린다는 말은 선과 악을 자꾸 분류하려는 의도가 우리 안에 있는 거예요. 이건 나쁜 거고 이건 옳은 거고. 그래서 이웃이 하지 말라하면 “아, 나쁜 거구나.” 하라 하는 것은 해야 되는 선이 되는 거예요. “오줌을 바지에 싸지 말고 화장실에 가서 오줌 누어야지.” 그러면 뭐 하지 말고, “오줌을 바지에 누는 것은 나쁜 거구나. 화장실에 가서 누는 것은 선이구나.” 어릴 때부터 선과 악의 분류에 대해서 이미 자생적으로 스킬 기술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느 날 보니까 맨날 오줌 싸다가 “엄마, 화장실 어딨어?”라고 묻기만 해도 엄마는 얼굴이 환하게 펴져서 “드디어 네가 내 짐을 덜어주는구나. 나 이제 놀러가도 되겠다.” 그동안 일일이 다한다고 지 놀고 싶어도 못 놀았는데 이제 친구 만나도 되겠어. 카페에서 늦게 와도 되겠어. 혼자 자립하니까 “내가 참 사람 하나 잘 키웠다. 우에 화장실을 구분할 줄 알지?” 그럴 때 오늘 너 맛있게 이야기해, 보상이에요, 보상체제.

그러니까 이 세상은 선과 악으로 체제를 갖추고 있고 선할 때는 뭘 주고? 보상을 해주고, 나쁠 때는 체벌이 주어지는 세계로 선악체계로 형성돼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자아가 굳어졌는데 무슨 수로 자기를 부인합니까? 자기를 부인할 방도가 없지요. 자기를 부인하면 또 보상 내놓으라 하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된 거예요. 왜냐? 자기를 부인한 자체가 이게 안 좋기 때문에 부인하려는 거예요. 너 잘못되었어, 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내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내가 잘한 짓이 돼버린다니까, 이게. 얼마나 훌륭했으면 내가 스스로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 됐느냐? 지가 자기 모습 보고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니까요. 참 환장해요, 환장해. 인간 자체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선악체계가 인간과 태초부터 안 맞아서 그래요. 코드가 맞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따먹지 말라 한 겁니다. 다 생각이 주께서 계획이 다 있었던 거예요. “따먹지 마라. 그것 너하고 안 어울려.” “그럼 나는요?” “너는 어린애잖아. 주는 것만 먹어 그냥. 주는 것만 먹고 싸고 그냥 사는 거야.” 네가 하지 말라는 말 자체가 너한테는 일체 필요 없는 존재로 내가 인간을 만들어 놨다 이 말이죠.

하라, 하지 말라 듣는 순간부터 인간은 하지 말라는 의식 때문에 자기 행동에 대해서 수치를 느끼고 부끄럽게 된 거예요. 자기 몸에 어떤 히스테리적인 반응이 오기 시작한 거예요. 움직이잖아요. 히스테리적인 반응이에요. 누가 때렸습니까? 지가 자기 방어하는 거예요. 이미 인간은 망가졌어요. 망가졌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 지면 내가 있는 천국에 갈 것이다. 그런 언질을 던졌다는 말은 결국 인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텅텅 비겠네요. 인간으로선 할 수 없기 때문에 천국에는 아예 인간이 한 명도 없는 게 마당하지 않느냐, 원인과 결과가 맞아떨어지지 않느냐? ‘인간이 하지 못하다’와 ‘천국에 인간이 있다’가 이게 모순되는 말이 아니에요. 오히려 이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인간이 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천국이 인간의 나라만 아니 되면 되는 거예요. 천국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면 돼요.

그럼 인간 자리에 뭘 집어넣습니까? 천국은 무슨 나라? 천국은 하나님 나라가 되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나를 위한 나라가 아니면 돼요. 노인 위한 나라는 없어요. 유명한 상 받은 영화가 있거든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코맥 매카시 원작, 에단 코엔/조엘 코엔 감독, 2007. 제80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등 주요 상을 휩쓸었다.)

늙은 보안관이 퇴직하려 하는데 나라꼴이 엉망이라서 “내가 왕년에 말이야 이런 범죄자들 가만 안 뒀어. 그런데 내가 퇴직할 즈음에 보안관으로서 양심상 참지 못할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 거야. 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구나.” 그런 뜻이에요. 자기는 이제 은퇴해야 되고 나라는 점점 더 무질서하게 되는 그 탄식.

근데 애초부터 인간을 위한 나라는 없습니다. 이건 애초부터 에덴동산이 인간을 위한 나라가, 인간을 위한 공간과 장소가 아니었던 거예요. 근데 인간들이 마귀와 결탁해서 네 나라 네가 만들면 된다고 해서 세운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이죠. 갑자기 정치적 발언하면 안 되는데. 그게 문재인이고 윤석열이잖아요. 지금 균형 맞추기 위해서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할 일 없는 노인네들이 맨날 그것 보고 싸움 붙이는데, 케이블이고 티비조선부터 해서 15번 안 본다. 좌파다 안 본다 하고 왔다 갔다. 하루 종일 할 일 없으니 티비만 돌아보는 거예요. 훈련 받기를 내 나라가 없다는 자기 부인하라고 주께서 인생을 살게 했는데 자기 즐기면서 인생을 활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죽어서 어디 간다고요? 천국? 천국은 네 나라 아닌데? 왜 평소에 훈련을 연습을 안 했어요. 나를 위한 것은 어떤 것도 없다. 나를 나라는 없다. 이 몸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왜 이런 훈련을, 그런 것을 왜 안 받았어요?

그러니까 이 나라가 점점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지옥으로 가는 게 아니고 이미 지옥인데 점점 지옥 됨이 윤곽이 뚜렷해지기 시작하지요.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 보면 전부 다 젊은 사람 문제점이 뭐냐? 전부 다 자기 위함이에요. 자기 위함이니까 뭐가 안 됩니까? 자기 부인이 안 돼요. 내가 죄인입니다, 이게 안 돼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위함이에요.

자기 위함을 남들이 안 알아주니까 스스로 자기에게 나는 나를 위함이라고 티를 내야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 동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술, 담배, 마약, 남자들 차 바꾸기, 여자들 명품구입, 남녀 합해서 아파트 바꾸기. 지금 모든 사회적 범죄의 원인은 뭐냐? 내가 술을 먹어도 된다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범죄가. 술 해서 남자 만나서 남자가 때려죽이고 싶고. 전부 다 술, 담배, 허세덩어리, 허풍과 허세. 허세와 허풍이 왜 있어야 됩니까? 나를 위함이 흡족하지 않기 때문에. 이 사회가 나를 충분히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전세계약 했는데 떼였어요. 이건 지가 잘못한 거죠. 지가 잘못했는데 왜 나라에 데모합니까? 지 전셋돈 떼였는데 나라가 왜 해줘야 돼요? 나라가 사회주의입니까? 이건 정치적 발언 아니에요. 문제 큰 거예요. 문제 대단한 거예요.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제도를 바꾸란 말이 아니고요. 전세제도 바꾸란 그런 말이 아니고 지금 자기 위함을 어떤 보상을 받음으로 덮는다는 거예요. 전에 이야기했지만 전에 강남에서 말조심해서 했지만 여기선 보니까 조심할 것도 없고 그냥 할게요.

병원에 책임자가 누굽니까? 의사지요. 그럼 의사 밑에 뭡니까? 간호사 있는 게 아니고 간호원들이 있지요. 난 간호사 싫어요. 간호원이에요. 옛날식이라. 나 때는 간호원이었어요. 의사 밑에 간호사, 그다음에 물리치료사 있잖아요. 이게 명칭이 물리치료 받는데 옆에 붙였느냐 하면 물리치료사라 하지 말고 선생님으로 불러주세요, 하거든요. 한 번 보세요.

지금 체제가 책임자가 의사입니다. 그럼 골격으로 봐서 머리가 있고 척추가 있잖아요. 척추가 따로 독립해버리면 머리는 주저앉아요. 지시를 받아야 돼요. 지시 받는 쪽이 빠져나가면 뼈가 탈골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학교에서 교장선생님 지시를 받아야 되잖아요. 교사가 지가 교장 하겠다는데 안 해주만 교사들 파업하겠다는 거예요.

지금 제도를 문제,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고생하는지 그걸 묻는 게 아니고 제가 말한 것은 제도에, 그러니까 기존 제도가 옳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을 드러내는 겁니까? 모조리 다 자기 위함인데 옛날부터 자기 위함이지만 이걸 참았어요. 저거 더러운 의사, 나를 가지고, 참았는데 노골적으로 자기 위함으로 이게 탈골되듯이 튀어나와도 이걸 긍정해달라는 거예요.

동성애는 원래 정신병자고요 정신병자의 자유 함이 그리워서 나도 정신병자하는 것처럼 취미단체가 등장해요. 동성애는 정신병자고 취미가 되는 거예요. 보다 더 깊은 쾌락을 위해서. 동성애자가 옛날에 있었어요, 없었어요? 정신병자가 옛날에도 많았어요. 많았지만 사회적으로 뭐를 지우기 위해서? 남녀가 하나로 결혼해서 부부가 된다는 이 대외적인 질서를 위해서 동성애 해도 그냥 정신병자로 무시했지요.

그래서 동성애자들끼리 연애하든 관계없어요. 그냥 계속 무시하면 돼요. 그런데 언제부터 나라에 돈 달래요. 정식 부부에 주어지는 모든 국가의 특혜를 우리에게 달라는, 돈 달라는 것부터 시작되는, 문제는 돈이라는. 자기 위함에 필요한 돈을 달라는 거예요. 그냥 연애해. 하다가 지가 알아서 재미없으면 헤어져요. 왜? 취미기 때문에, 오락이기 때문에. 짜릿한 것 있잖아요. 안 해본 것, 그게 오락이에요. 자기 게임일 수도 있고.

나 꽃꽂이한다. 돈 둬, 나라보고. 지 취미 생활하는데? 꽃꽂이 누가 하지 말라해? 해. 네 돈 가지고 해. 동성애 네 돈으로 해. 그러나 결혼은 안 돼. 결혼으로 인정하면 안 되지요. 인권이 어떻고, 유럽에서 다 선진국은 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제도를 어떻게 바꾸라는 게 아니고 옛날 제도가 낫다가 아닙니다.

내 때는 낫다가 아니고 옛날에는 자기 위함이 이렇게 노골화되고 자랑스럽게 되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못 사는 때는 희생과 희생의 가치가 나 잘났다보다 우위에 있던 사회기 때문에. 나는 허세부리지 않고 허풍부리지 않고 능력대로 소박하게 산다, 이것이 대우받던 칭찬받던 사회였어요. 그런데 이제는 자기 위반을 돈으로 바꾸려는 그런 노골적인 자기 위함의 세계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자녀들에게 술, 담배, 마약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것 손절해야 돼요. 완전히 관계 끊어야 됩니다. 술. 뭐 16세는 어른이다. 경험해야지. 경험해서 모르면 끊겠지. 인간은 그런 게 아니에요. 술, 담배 근처도 가지 말아야 돼요. 왜냐하면 술, 담배가 그냥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장소가 아니고 허세 배틀하는 장소기 때문에, 허세 쩌는 자리거든요. 자기 위함을 뽐내는 자리에요.

정신머리가 자기 위했다는 그것을 혼자서 간직하는 게 아니고 그걸 뽐내서 못 보여서 환장한 동네가 그 동네에요. “목사님, 세상이 그런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로 그게 복음이에요. 이런 일이 있다고 탄식하고 한탄할 게 아니고 누가 이 일을 일으켰습니까? 주께서 조장했지요.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마지막 때에 자기를 부인할 자가 과연 있겠는가? 다른 말로 할까요? 마지막 때에 자기의 허세부리지 않고 있는 체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 수 있느냐?

자, 이제부터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 허세부리지 않고 있는 것도 하잖게 있는 것도 고마워 어쩔 줄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을 주께서 이 지옥 속에서 천국 백성을 만들 듯이 만들어냅니다.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부르짖음으로 만들어내요. 그것이 59페이지에 나옵니다. 중간에 보겠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출애굽기 2장 23~25절. 여기 부르짖었다는 말이 나오죠. 가만있으면 부르짖습니까? 아니지요. 압박이 들어오지요. 압박이 뭐냐? 고역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신약에 오면 달리 표현했어요. 두 사람 롯과 욥. 소돔과 고모라에 롯 등장하잖아요. 그리고 욥. 둘 다 한 자씩인데 이 사람들은 가만히 그냥 편하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롯과 욥을 가만두지 않았어요. 그래서 욥 고난이 그 주변에 있는 상황, 소돔과 고모라의 상황 보고 탄식했다 했어요. 개판이라도 너무 개판이거든요. 왜? 그 세계가 자기를 위하는데 완전히 환장했어요.

지금 여러분들 자녀의 세대가 자기 뽐내는데 환장한 사람들이에요. 옷을 빨아서 입는다든지 기워서 입는 그게 없고 전부 다 갖다 버리는 세대에요. 이것은 내 때는 안 그랬다 하거든요. 지금은 빨리 돈으로 갈아 치우는, 휴대폰도 그렇게 쓸 만한데 갈아치워요. 하여튼 세대차 나서 이해를 못해주네, 하는데 이해를 못해줘서 나쁜 게 아니고 근원적으로 자기를 위한다는 자체가 이게 지옥 갈 일인 것을 그들은 아무도 부모로부터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왜? 내가 자식한테 내가 부모한테 얻은 게 없어서 환장해서 “나는 내 자식 키우면 보란 듯이 남한테 기죽지 않게 키울 거야.” 이런 각오로 자식을 키웠으니까 그 징벌은 지가 다 받은 거예요. 자식에게 뭘 남겨야 됩니까? 자기를 부인하라, 이걸 남겨야 되는데 기죽지 말라. “너 맞고 왔나? 두 번 때려라.” 이러고.

야아, 마음속에 표준이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살아야 될 기준이 부모부터 안 정해졌어요. 그저 부모부터 못 배운 서러움, 돈 없는 그 한 맺힘을 자식한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미친 듯이 자식에게 해달라는 데로 다 해줘버립니다. 그 결과는 자살이에요. 앤트밀, 따라 자살해요. 장애자가 못 먹어서 장애자 없어요. 장애자한테 요새 고아한테 너무너무 나라에서 잘해줘요. 선진국 정도로 잘해줘요. 그런데 걔들은 항상 불만입니다. 왜? 자기 위함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기 때문에 자존심 상해서 사회에 대해서 분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심보라는 것이 자신이 타인에게 분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겸손한 체하는 게 인간이거든요. 그게 자기 속임이에요. 인간의 심리는 그동안 자신이 속아왔다는 점을 감추기 위해서 타인을 속인다. 인간은 처음부터 뭐가 표준인지 몰라요. 모르니까 이 사람 말 듣고 저 사람 말 듣는데 그냥 듣지 않고 본성이 작동해서 들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남들이 나를 인정해줄까, 날 알아줄까, 날 우대해줄까. 쉽게 이야기해서 누가 날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말벗이 되고 내 이야기 들어주고, 외롭지 않게 해주면 좋겠다. 이것은 아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무엇과 정반대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와 반대지요. 교회 가는 것도 외로워서 가는 거예요. 말동무하기 위해서.

지금 여러분 이렇게 있지만 한 사람 나왔다. 그 사람 다음에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심심해서 싫어요. 못 생겨도 자기 부인만 되면 천국 가는데 잘 생기고 싶어요. 그런데 그걸 본인이 속이고 싶어. 난 잘 생기고 돈 많은 부자 되고 싶다는 것, 혼자 살면 부자인 영감 만나고 싶다는, 말 큰일 날 뻔했다. 부자인데 연하 만나고 싶다. 이걸 속이고 싶어서 복음으로 땜질하고 있는 거예요. 복음으로, 자기 부인으로.

그래서 십자가마을 사람들이 저한테 묻는 게 있어요. “목사님, 기도할 게 없습니다.” 기도할 게 없는 게 압박감이 들어와서 그렇지요. 기도는 부르짖으면서 되는 거예요. 자기 계획이 실패로 끝났을 때 끝날까봐 더 이상 나를 위할 게 나한테 전혀 남아있지 않을까봐 허겁지겁 부르짖는 거예요.

“주님, 너무 막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알아서 망한다 했는데 진짜 주께서 망하게 해주면 내가 알아서 망하는 게 없지 않습니까? 내가 당황스럽습니다. 내가 물러설 데가 없네요. 진짜 예수 안 믿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협박조로 나갈 때 비로소 그 사람의 부르짖음이라 하는 것은 기도내용을 문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마음 자체가 다급함, 절망, 내가 할 도리는 다 했는데 끝났어. 다시 말해서 더 이상 나를 위할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 주께서 자기 부인하는 바닥을 줘요. 밑바닥을 줘버립니다.

그래서 여기서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서 할 때 자기는 창세기 20장에 보면 좀 재미나요. 자기는 그냥 내 아내? 내 아내 아니야. 여보, 우리끼리만 알자. 여기서 사촌 누이니까 사촌 누이동생이라 하자. 하나님 앞에 거짓말한 게 아니잖아, 해서 저희끼리 했는데 그게 그렇게 아브라함이 놓친 게 있어요. 자기가 선지자,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다는 걸 놓친 거예요. 본인의 처신에 따라서 어떤 결과가 주어진다고 생각했지 함께 있는 주님이 주님은 주님 쪽으로 따로 일한다는 것을 놓쳐버린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선 일을 크게 만들었어요. “누이동생이에요? 나이 구십치고는 예쁜데.” 그때는 구십이 할머니가 안 됐던 때에요. 한참이었던 거예요. “나이가 어떻게?” “구십.” “한참이네. 이야 한참 예쁠 때네.” 이래서 마침 저하고 결혼합시다, 하고 했는데 아브라함은 지가 한 말은 있고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이건 지 속으로 하는 말이고 그쪽에선 나그네니까 자기편이 한 사람도 없잖아요. 죽여 버릴 수 있는 문제에요.

기계, 사람 죽이는 기계는 그쪽이 권력을 갖고 있으니까 자기는 죽음의 대상이 되지요. 살아남기 위해서 속였으니까 계속 속이는 채로 일이 어떻게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했는데 해결을 어떻게 했는가? 20장 6절에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다시 말해서 그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3절에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뭐한다? 죽으리라.

참 이런 말씀 어렵습니다. 실제로 아비멜렉이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하나님의 뜻은 죽음이에요. 그런데 아비멜렉은 죽는 이유를 압니까, 모릅니까? 요것조것 따져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그래서 아까 <유형지>나 또는 카프카의 단편소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실컷 이 땅에서 매질당하고 죽음당한 뒤에 죄를 몰라요. 고소당했는데 고소 죄목을 몰라요. 죄 없이 사형당하는 인간군상을 묘사한 거예요.

이 세상이 전부 다 죽잖아요. 이걸 사형이라면 벌 받아서 죽는다면 그다음에 그 벌은 뭔지 그다음에 제시할 게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미 유럽은 기독교를 버렸어요. 성경 다 버렸어요. 인권으로 먹고사는 동네에요. 그럴 때 성경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다시 말해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그 말씀을 하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는 그런 잔소리는 듣지도 않아요. 듣지도 않으면서 해결책은 없어요. 왜 죽는지도 몰라요. 말을 지독히 안 들어요, 하여튼.

그때 필요한 것은 선지자지요. 아브라함. 아브라함 지도 잘난 것 뭐 있어요. 거짓말쟁이지요. 근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함께 있습니다. 함께 있음이 붙여주면 죽는다. 그럴 때 기도를 누가 하느냐 하면 기도를 아비멜렉부터 시작해서 압력이 가해져요, 아브라함에게. “너 선지자 맞지, 너 주의 종 맞지? 주의 종인데 왜 거짓말했어? 네가 그토록 용기가 없나?”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꾸지람을 이방민족이 하게 합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너 선지자잖아. 우린 죽게 생겼어. 네 잘못 때문에 네 실수 때문에.” “그럼 내가 어떻게 할꼬?” “기도해. 기도해, 기도해~~” 기도하라고 압박을 함으로써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내가 나의 실존이 누군가를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 관계처럼 이 땅에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삽입시킨 대상자가 됐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재확인시키고,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현실로 실제로 계속 확대된다는 사실에 놀라버리지요.

나는 숨기면 숨길 수 있는 생각하거든요. 현실은 세상에 맡겨져 있고 하나님이여 우리끼리 잘합시다. 나 천당 보내주세요. 이렇게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나를 보내서 현실 자체가 주님의 언약의 적용범위 속에 포함을 시킨 거예요. 이게 바로 신약에 나오는 우리가 뭐냐 라면 성도를 가지고 소자에요, 소자. 변변치 못하고 나쁜 짓은 다하고 자기 과시나 하고 자기 허세부리는 소자, 이 소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장악해버리는 겁니다. 주님 자신의 전쟁터로 삼아버리죠. 보잘 것 없는 소자, 보잘 것 없는 우리 자신을 내세워서.

우리 자신이 지닌 의미를 우리 자신이 모독하고 비난한 거예요. 말씀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그 말씀을 시답지 않게 여긴 거예요. 내 자존심 때문에. 그저 타인들의 의식이 너무 강렬해서 남들 앞에 속이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럼 결론적으로 어떻게 하느냐? 실은 내가 이미 구원받았데. 너 동창회 술 한 잔 해라. 한 잔 해, 한 잔 해. 내가 교회 다니는 것도 모르고 저쪽에서.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나 연약해서 분위기 깨면 안 된다 싶어서, 분위기 깨면 그다음에 관계가 끊어지고, 내가 돈 빌릴 사람 저기 있는데 다음에 돈 안 빌려줄 게 뻔하기 때문에 한 잔 했어요.

한 잔 했는데 그다음에 지붕이 내려앉아서 술 한 잔한 인간들 멀어졌어요. 그러니까 그쪽에 죽어가면서 119 심폐소생 받으면서, “누구냐 너?” “실은 나 구원받은 사람이야.” “진즉 이야기하지.” 지금 말을 해도 이게 있을 법한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이런 상황을 예상 밖의 일을 터뜨려버려요. 아무것도 없는 우리를 통해서.

그럴 때 뭡니까? 이게 기도가 된 거예요. 저쪽에서 압력이 가해서 주여, 이건 저로선 손쓸 수 없습니다. 주께서 알아서 해주세요. 이게 기도 내용이에요, 결국. 내가 누구며 그들이 누구며 주님이 누구신가를 이것을 다시 한 번 처음 사랑의 자리, 아무것도 아닌 것을 구원했던 그 십자가 자리까지 나를 멱살 쥐고 다시 오게 만들어서 그 십자가 바라보고 기도케 하시는 거예요.

네가 구원된 것은 너를 부인해서가 아니라 부인하지도 못한 인간을 십자가로서 대신 부인하게 해서 너를 구원했다. 이제부터 이미 구원된 입장에서 자기를 부인하란 뜻이 무슨 뜻인지를 너를 통해서 이 현실 속에서 살아 있을 동안에 내가 활용하겠다, 라는 주님의 지시와주님의 인도하심을 다시 한 번 우리가 느끼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이 시편 23편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다음에 뭡니까? 부족함이 없다. 나를 부인하는데 있어서 현실이 짜 맞춰가는 데 놀랍게 짜 맞추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를 부인하는 그 선에 이르게 하는 상황에 대해서 조금도 빠짐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부족함이 없는 상황 속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르짖으니까 그들을 어떻게 했어요? 그들을 애굽에서 빠져나갔지요. 이게 또 마지막 중요한 거죠. 부르짖었더니 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켰습니까, 아니면 분리시켰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자유시민 되게 했습니까, 나가라 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나가라 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누가 불만이에요? 기도할 때 은근히 노렸던 그 응답이 아니고 나가, 이렇게 됐거든요. 나가리 된 거예요.

나가는 것이 왜 그렇게 두렵습니까? 자기의 자아의 모든 내용의 기억이 자기의 성장과정이 애굽이란 토대에서 축적된 거거든요. 아는 사람, 친한 친구, 동창회 전부 다 애굽 생활에 푹 젖은 자가 지금 내가 정든 여기서 그만큼 정들었고 이만큼 살만한데 나가라 하니까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되잖아요. 그 미지의 세계 어찌 살라고. 주께서는 너를 보낸 하나님이 같이 동행해줄게. 그 동행, 무서운 말입니다. 너는 이제 남을 속이려는 속임수에서 더 이상 속일 게 없게 만들겠어.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나의 피를 증거할 수 있다는 주께서 진리가 날마다 우리에게 작열하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도를 시작하게 하신 분이 주님인 것을 이젠 알았사오니 이미 응답도 우리 자신이 주의 응답인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대전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귀경유  (0) 2023.06.28
6.25설교 질문  (0) 2023.06.28
비켜라  (0) 2023.05.31
십자가17강-확실성과 진리  (0) 2023.04.26
신나는 몰락  (0)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