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비켜라

아빠와 함께 2023. 5. 31. 09:42

주일설교 요약

 

주일 낮 설교 다 할 필욘 없고요. 정리해야 되는 것, 정리해야 될 것을 새삼스럽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어떤 것이 정리되기 힘든 거냐 하면 이겁니다. 인간의 자아는 시간 속에서 형성됩니다. 지금 주일 낮 설교 정리하는 거예요. 우리 공부하는 것 아니고 주일 낮 설교 중에서 중요한 것을 제가 정리해드리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는 시간 속에서 형성돼요. 이 말은 시간이 인간을 변화시켜 나간다. 시간의 인간을 변화시킨다. 시간을 다른 말로 환경이죠. 환경이 인간 속에서 변화된다. 왜냐하면 자아라 하는 것은 환경에 민감하게 적응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아는 환경에 민감하게 적응하고, 환경이란 것은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고, 이 변화가 일어나는 이걸 두 자로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해 뜰 때 해 뜨고, 달 뜰 때 달뜨고, 별 뜰 때 별이 떠야 돼요. 그래야 우리 자아가 안정성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이 자아는 환경에 패턴에 같이 휩쓸려서 환경과 동일한 패턴이 될 때 자아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겁니다. 정리해볼게요. 인간의 행복이란 주변의 패턴에 제대로 적응하는 것, 이게 행복이에요.

병원에 가기 전의 행복은 병원에 안 가는 게 행복이죠. 일단 병원에 입원했으면 그 병원이란 환경에 제대로 맞춰나갈 때 가장 편안함과 행복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행복이란 어떤 기준, 표준을 이게 행복이다, 찾는 것 자체가 잘못이에요. 네가 주어지고 네가 포지션을 갖고 있는 지점이 있는 그곳에서 얼마든지 패턴에 맞춰나가면 행복해질 수 있어요.

패턴이라고 했는데요. 패턴을 다른 말로 하면 그냥 리듬이에요. 삶의 리듬입니다. 삶의 리듬을 과학적으로 표현한다면 패턴, 리듬을 현대물리학으로 표현한다면 에너지 파동의 합류되는 것. 올라갈 때 같이 올라가주고 내려갈 때 같이 내려가 주고. 그래서 이 패턴, 리듬, 자아의 특징은 줏대가 없다. 아무 줏대가 없어요. 줏대가 있기는 있는데 그때그때 달라요. 이게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러니까 자아의 특징은 줏대가 없고 그때그때 리듬 따라서 환경 따라서 바뀌면 되니까 자아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면, 자아에게는 진리라는 게 없습니다. 진리는 골치 아파요. 진리는 진리가 아니고 옛날 패턴에서 나왔던 고집을 진리라 하죠. ‘남편은 하늘이다’ 이건 뭡니까? 가부장적인 남편이란 옛날 패턴이에요. 자기 옛날 자아가 있었던 환경에서 맞춰나갔던 패턴을 지금 그것이 남자들이 총각 때 가정에서 그런 패턴을 얻었잖아요.

그럼 결혼해서 패턴을 아내 리듬과 흥정에 나서야 되는데, 양보할 건 하고 흥정에 정치적으로 나서야 되는데 우리 집에선 남편은 하늘이라고 배웠다고 그냥 밀어붙이니까 거기서 뭐냐 하면 일단 신혼 초에 기 싸움에 들어가는 거예요. 기 싸움에 여자도 한 기하잖아요. 상당히 소극적이지만 한 기한단 말이죠. 초반에 기 싸움이, 어떤 사람은 신혼여행 가서 이혼한 사람도 있고. 기 싸움 할 때 여자들의 마지막 무기는 이거에요. “이러려면 우리 헤어져.” 당신 패턴 있듯이 나도 내 패턴 있다 이 말이죠.

이 패턴을 서로 조화가 안 돼요. 그때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동력이 하나 생겨요. 그게 뭐냐? 애가 생겨요.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는 그야말로 제로에서 나온 거예요. 패턴이 하나도 없고요 애는 자기 본능이 자기 환경이에요. 당연한 것은 애는 자아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내 배 째라, 에요. 어른이 잠을 잘 시간인지 아무 관심 없어요. 자기가 배고플 때 그냥 배고프다고 울음으로 외치고 자기가 잠 잘 때 잠 재워달라고 땡강 부리고. 이게 바로 자아입니다.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 모든 것이 시간에서 나온 거예요. 지금 제가 방금 설명한 이 모든 것만 여러분들이 제대로 정리해도 인간의 행복에 대한 추구, 그걸 욕구지요. 행복의 욕구를 어쭙잖은 성경지식이나 어쭙잖은 유교교훈이나 그러한 정치적 윤리도덕으로서는 내 본능을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 파악하셔야 돼요.

북한에 살아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 김정은한테 고개 숙이면 되니까. 패턴에 난 공산당이 좋아요, 하면 얼마든지 거기서 성공할 수 있어요. 북한에도. 그래서 손예진도 북한의 장교와 결혼했잖아요. <사랑의 불시착>에서.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거예요. 뭐만 버리면 됩니까? 진리라는 것, 정의라는 것만 버리면 돼요. 진리, 정의 이런 것은 개나 줘버려라. 진리, 정의, 복음 이런 것은 개나 줘버리란 말이죠.

아이고, 그래도 신앙생활 할 때 진리, 복음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교회 자체가 진리, 복음 다 개나 줘버린 단체에요. 교회는 교회가 환경이에요. 예수, 성령 이거는 전부 다 구색 맞추기고요. 중요한 것은 교회란 부동산이 최고에요. 교인들이 바친 헌금이 집대성돼 있는. 헌금이 모이면 뭐 된다? 부동산 값 오른다. 그것 외에는 교회란 게 다른 의미는 없어요. 빨리 팔고 다른 데 터 잡고 교인들 헌금 우려내는 그러한 수단 도구로 하면 되고요.

사실은 주일 낮 설교에서 이런 것을 다 염두에 둬야 되는데 이걸 어떻게 다 설명을 해요. 평소에 강의로 보충해야지요. 이걸 싹 지우고 언급한 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의 자아는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 이렇게 된 거예요. 인간의 자아는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걸 모를까요, 알까요? 아는데 주님께선 어떻게 여기를 공격하느냐 하면 미래에서 과거로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이 미래가 인간이 생각한 미래가 아니에요. 같지 않아요. 이 미래는 최후의 심판 사건입니다. 이 미래가 최후의 사건이라 하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보장하느냐?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 안에서 주께서 다 이루었다 했지요.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은 더 이상 시간이 흐를 필요가 없다. 이 땅이 시간이 진척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다 이뤘으니까.

원래 시간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에서 나와서 예수의 몸으로 가거든요. 그런데 예수의 몸이 시간을 통해서 무슨 고백을 합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까 이제는 십자가 속에서는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없어요. 없고 시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몸이 있을 때 인간의 몸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기 때문에 자기 몸이 있고 자기 자식이 생겨나면 아직도 시간은 작동되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거는 이미 진짜 시간의 완료가 돼버린 상태에서 인간 시간은 마치 헛돈다하지요. 바퀴가 헛되는 것, 앞으로 진전 안 하고 뭔가 진전하는 것처럼 발전하는 것처럼 오인하는 세상, 그게 이 땅에서의 내 세월, 인생 이런 거예요. 제자리 뛰기 하면서 내 나이가 얼만데, 이러고 있다고. 본인이 제자리 뛰기 했는데.

연극에서 오십 년 사는 것, 사십 년 사는 것 무슨 의미 있어요? 그냥 성경 말씀대로 시편 39편입니까? 오므리면 없어질 한 줌인데, 오므리면 한 줌이잖아요. 펼치면 뭔가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냥 스카이콩콩처럼 그냥 뛰는 거예요. 계속 그 자리에 뛰는 거예요. 진리 없으니까 우리의 행복도 이게 허무지요. 진리가 없는데 그냥 적응하는, 내가 태어난 것에 대해서 적응하면서 그게 진리를 논할 가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진리란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내 몸 하나 있을 뿐이죠.

다 이루었다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이 들어 있잖아요. 그럼 심판은 뭐냐 하면 예수의 몸과 우리 몸을 비교하는 걸 심판이라 합니다. 쉽게 말해서 “피고, 너 나처럼 살았어?” 이게 심판이에요. “피고, 너는 주기철 목사처럼 살았어?” 아니에요. 옆에 인간 붙일 필요 없어요. 왜 심판이 주님과 비교되느냐 하면, 피고가 재판관과 비교되느냐 하면 심판하신 주님이 선수로 뛰었거든요. 이 땅에.

배구할 때 심판은 폴대 옆에 섰잖아요. 선수는 코트에서 김연경 선수는 열심히 뛰잖아요. 주께서 “내가 할게, 내가 선수할 게.” 주님이 선수해서 선수가 지키는 하나님의 율법은 이런 거다, 하고 손수 보여주시고 자신의 사망이죠, 죽음이죠. 다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심판대로 간 거예요. 그래서 불러내는 거예요. “너, 나처럼 살았어?” 그게 뭐냐 하면 최후의 심판의 순간입니다. 그게 미래에요.

이 미래가 미래로 흘러가는 우리 몸에 들이닥치게 됩니다. 딱 들이닥치게 되면 그다음에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가 참조로 해야 될 환경 말고 다른 공간이 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요.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나 이렇게 해서 행복해야지. 이걸 진리로 여겨야지. 복음으로 여겨야지.” 그래서 결국 목적은 내가 편하게 살아야지, 나만 안 다투고 가정에 불화 없이 편하게 살아야지 하는 이런 모든 것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낮에 설교하면서 앤트밀(Ant Mill) 이야기했어요. 개미가 집단자살 하는 현상이죠. 뺑뺑이 그냥 뺑뺑이 돌리는데 이게 수십만인지 수만인지 분간이 안 되는데 어떤 건 최고 둘레가 370미터, 끝에 있는 개미가 한 바퀴 도는데 2시간 30분, 나중에 탈진해서 다 죽어요. 죽는 것도 모르고 그냥 여기서 페로몬이라는 호르몬이 오니까 뒤에 꽁무니 따라 가는 거예요.

후배가 선배 되는 길로 가는 거예요. 선배는 더 선배, 선배는 더 선배……. 이게 블랙홀처럼 죽음의 홀로 빠져 들어가는 거예요. 개미의 집단자살 장면. 앤트밀, 밀이란 소용돌이란 뜻이에요. 개미의 소용돌이. 그러면 여기 중심에 누가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 있어요. 죽기를 무서워하는 페로몬이 악마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냥 다른 것은 없어요. 따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문제를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미래가 현재로 온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미래가 현재로 와도 이건 시간구조 속에서 설명한 거고 성경에서 실제로 설명한 것은 위에서 아래로 와요. 악마는 말합니다. 이 인간 세상 우리가 장악하고 있는데 당신이 왜 우리가 장악한 인간 세상에 끼어듭니까?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라고 귀신이 예수님에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요. 우리끼리 좀 맡겨주면 안 되겠습니까? 왜 끼어드느냐 말이죠. 상관없지 않습니까?

악마의 말은 틀린 말이 없어요. 상관이 없어요. 없는데 그중에 이 세상 안에 주님이 상관하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 백성.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세상을 심판하러 왔어요. 세상을 심판하는 가운데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에서 만드는 게 아니고, 위에선 이미 결정됐고 만들기는 아래에서 마귀 속에서 만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제가 어제 이야기했던 여호와에서 여호와가 나오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 여호와와 이 여호와가 같은 여호와로 생각했지요. 아론부터해서 백성들은. 그런데 여호와 주님께서는 네 속의 가짜 여호와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주의 백성은 뭐냐? 주의 백성은 자신의 행복, 저거 그냥 사는 게 남는 거다. 그것도 말썽 없이 사는 게 남는 거다. 말썽 없이 인생 끝내는 것이 이게 진리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말썽 없이 무탈하게 탈 없이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해요. 마귀가 지배해도 그런 건 관심 없고 내 몸 하나 살고 싶은 겁니다. 주님께선 찾아와서 우리 속에서 가짜 자아 있잖아요. 요걸 뽑아내버려요. 이걸 끄집어낸다고요. 끄집어내면 전에 있던 나는 건전하고 괜찮은 나가 되지요. 그런데 끄집어낸 나는 뭐냐? 숯 덩어리에서 끄집어낸 거예요.

죄인 그 자체로 끄집어낼 때 그 끄집어낸 이 자가 바로 주께서 만들어낸 구원된 천국의 백성입니다. 시커멓게 나오지요. 온통 죄인 중의 뭐다? 나는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잘난 체하는 인간 속에서 죄인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끄집어내는 방법은 무슨 방법이냐? 제자들과 예수님 마지막 언약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예수님의 찢겨진 살과 피, 특히 피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게 포도주잖아요. 포도주니까 어디서 나오겠어요? 포도나무에서 나온 거죠.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 자신을 뭐라고 하느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래서 주님께서는 피에서 나온 그 피와 연결된 사람, 이 방식으로서 주님께선 우리를 죽이는데 보내는데 우리의 죽음이란 어디 안에 들어 있느냐 하면 포도주 안에 피 안에 들어 있는 죽음을 죽은 자로 끄집어냄으로써 예수님이 흘린 이 피로 인하여 예수님 몸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되는 겁니다. 이 몸의 일부가 확장되어서 천국이 되는 거죠.

마귀가 이 사실을 알고 가만있겠어요, 가만있지 않겠어요? 발악을 합니다. 극구 저항하게 만들죠. 어제 낮 설교에서 저항하게 만드는 게 뭐냐 하면 자기 의. 콘도르이친에 대해선 관절이 먼저 반응한다. 그렇게 이야기했듯이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내가 나의 의를 삭제하지 않고 그걸 키우기 위해서 적응한 환경이기 때문에 진짜 내 몸이 갖고 싶은 것은 나의 의가 안 다치고 싶어요. 나의 깨끗함과 순수함이 이게 먼저 반응하는 거예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면.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면 자기 의가 반응하는데 이건 뭐냐 하면 자기 의로 어떤 사태에 대해서 먼저 해석을 해요. 이번 일이 나의 의로움에 손상이 갈까, 아니면 나를 더 의롭고 멋있고 참 깨끗하고 순결하게 일 처리했다고 칭찬이 먼저 올까를 고려해서 그 일을 해석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옛날 옛날이야기지만 조용필이 초반기 대히트 칠 때 인기 있을 때에 바람을 피웠어요. 그때 부인이 바람 피웠다고 이야기하니까 조용필이 한 처신은 뭐냐 하면 그 당시 조용필이 살던 아파트가 굉장히 비쌌습니다. 그 당시에 3억인데 지금은 50억이 넘지요. 쿨하게 줘버려요. 이게 무슨 처신일까요? 그 아파트는 그 당시에 어지간한 사람은 못 살아요. 너무 좋은 아파트라서. 나 한데 그냥 바깥에 비바람 맞을 테니까 쿨하게 대외적으로 팬들에게 난 이 정도로 아내를 사랑한 사람이라고 줘버린 거예요.

자, 조용필이 일 처리 어떻게 했습니까? 뭘 먼저 생각했지요? 자기 의를 먼저 생각한 거예요. 그걸 자기 이미지 관리. 오늘 주일 낮 설교 요약 끝.

 

대전-신명기(12강) 민21:22(비켜라) 20230529a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신명기 5장 11절,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 언어가 주어졌습니다. 주님의 지시가 언어형태로 주어진 거예요. 그냥 기적을 베푼 게 아니고. 해가 햇빛을 비춘다, 달이 조수간만을 한다, 이게 혜택을 준 게 아니고, 단비를 내린다, 이게 아니고 직접 언어로 등장한 거예요.

직접 언어로 등장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이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세계에 참견하고 나도 내 언어를 가지고 들어가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멀리 있을 때는 하나님은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의 성의껏, 정성껏 다 바치면 돼요. 그런데 태양이 그 자리에 있으면 우리는 태양이 눈부신 건 알지만 위협적이진 않잖아요. 그런데 태양이 지금 지구와 빛의 속도로 8분 17초 걸린다는 데 이걸 만약에 중간 쯤 왔다 해보세요. 다 타죽습니다. 그냥 계시지 다가오면 곤란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계명을, 돌 판을, 율법을 주기 전부터 이미 이 세상에 대해서 은혜를 주셨고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다 하셨어요. 그냥 고 자리에 그런 위치를 견지하고 유지하시면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우리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패턴으로 적응하는 거예요. 적응하고 하나님께 공로로 돌리고 고마운 건 고맙다고 제사 드리면서 고런 식으로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데 하나님 쪽에서 무빙, 움직였단 말이죠, 우린 가만있는데.

그럼 지시가 더 두꺼워지겠지요. 지시가 더 날카로워지겠지요. 그리고 지시 내리는 칼날이 더 아프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모든 민족을 제치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접근하는 겁니다. 마치 외계인이 다른 나라 제치고 뉴욕에 등장한다든지 외딴 어떤 사막에 등장함으로 사건이 터진다든지, FBI 동원하고 그런 영화들 많지 않습니까.

특수한 민족을 겨냥해서 오는 거예요.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나님이 뭘 겨냥해서 오는지를 그 위치, 최종 지점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몰랐던 겁니다. 여기 십계명이 있잖아요.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마라부터 열 가지의 계명을 돌 판으로 물체로 만든 언어를 담은 돌 판을 주셨다는 이것이 이러한 주님 쪽의 접근 시도, 가만있는 데 다가오는 거예요. 심판주가.

그럴 때 그 엄습하는 공포감, 이건 몸 둘 바를 모릅니다. 그런데 그 다가오시는 분의 최종 도착지점이 어딘지를 이스라엘은 오해했어요. 어디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자기 몸에 도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말하는 자가 음성만 들리고 베일의 커튼 뒤에서 어떤 연극대사만 들리고 연극의 당사자는 나타나지 않고 그럴 때 관중들은 말씀하시는 주인공이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겠지요.

무대는 있는데 무대는 텅 비어있고 말씀만 있을 때 그럴 때 어떤 지시가 날아오면 그 지시에 관중들은 자기한테 저 배우가 지시한다고 생각하겠지요. 자기 몸에 지시가 내려졌다고 이스라엘은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정답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몸에서 벗어난 죄를 묻기 위해서 십계명 준 거예요.

우리 몸에서 벗어난 죄. 몸에서 벗어난 죄가 이게 중요시되는 이유가 우리 인간들 선악체제가 선악이니까 선과 악이 있잖아요. 그럼 인간들은 악마한테 속아서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선한 것도 내 몸이 선하게 하면 선이 되고, 내 몸이 악하게 하면 악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선악이 출처가 뭐냐 하면 내 몸이 하기 나름이라고 본 겁니다. 내가 나쁜 짓하면 악이 되고 내가 착한 짓하면 선이 된다는 인식을 악마로부터 그렇게 배운 거예요.

어떤 사람 성경 백독한 사람 있을 거예요. 백독한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왜 보느냐? 바르게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지시에 따라서 거룩하기 위해서 내가 본다는 거예요. 그다음 것은 묻지 마세요. 말이 안 통합니다. 그다음 걸 물으려면 이렇게 해야 돼요. 어느 대목에서 지켜서 거룩하게 되셨습니까, 물어보세요. 말하기 난처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내 몸으로 행동을 실천에 옮겨서 선을 얻고 거룩과 경건을 얻겠다면 성경 말씀에 우리의 허점을 지적하는 그 말씀 있잖아요. 그 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천하 자식이나 버려라, 이런 건 보지도 않잖아요. 그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아버지 장례식 할 때 참석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참석했잖아요. 그러면 주님 말씀에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도록 하란 말에 위반되지요. 그 사람에게 언제 물 위를 걸은 적 있는지 물어보세요.

그리고 나무가 뽑혀서 바다 빠지라하는 것을 지금까지 살면서 열댓 번 했는지 물어보세요. 그리고 성경 말씀 아닌데 해서 속여서 물어보세요.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일곱 번 속였는데 몇 번 용서하겠습니까? 아닌 데로 이야기하고.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신 적이 있습니까? 남을 미워한 적 있습니까? “사람인 이상 미워할 수 있지.” 살인자에요, 살인자입니다.

“지금 남편 번 걸 어느 은행에 넣습니까?” “우리은행에 넣습니다.” “하늘에 넣어야지. 하늘에 돈을 쌓아야지, 왜 우리은행에 넣어.” “마음 가난한 걸로 집에 돈 없는 걸 대체할 수 있어요?” 물어보세요. “내 심령이 가난한 것이 집에 돈 없는 것을 충분히 위로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어보세요. “견뎌야지요.” “그럼 더 힘들 게 해볼까요,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빌어먹을 때까지 한 번 해볼까요?” 마음 가난한 것이 돈 없는 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그런 자신감, 언제까지 자신감 유지하는지. 없어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이 언어, 주님 가까운 지시는 몸에서 벗어난 죄가 뭐냐 하면 악마가 존재하는 악마를 겨냥해서 이 십계명을 주신 겁니다. 여러분 이 한 마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숙제가 나한테 준 숙제가 아니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십계명만 그럴까요, 성경 전체가 그럴까요? 성경 전체가 우리한테 준 숙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전에 창세기에서 분명히 했어요.

악을 해서 네가 나쁜 게 아니고 선에 관심 있는 자체가 악이라는 사실을 네가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나 선해야 돼, 바르게 살아야 돼, 라는 인식 자체가 그게 악에서 나온 거예요. 악마가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 선해야 돼, 라고 주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바르게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네 뒤에 악마 있다, 악마를 염두에 두고 그 이야기한 거예요.

“야, 인간들아 이스라엘 백성들아 거룩하게 살아.” “예.” “네가 왜 대답해, 네가. 비켜. 네 뒤에 악마가 이야기해야지.” 악마가 바르게 살 수 있습니까? 악마는 처음부터 진노의 피조물이에요. 본질상. 악마가 안 되는 것을 아시고 겨냥해서 말씀 주신 거예요. 때려죽어도 악마는 못해요. 나 외에 다른 신은 못 섬깁니다. 왜? 본인이 신이기 때문에.

뒤에 악마 있는 것도 모르고 말씀 가지고 인간 모가지 쥐고 목사가 교인들 붙들고, “똑바로 안 사니까 집안 꼴이, 자식이 가출하지. 사 대가 저주받지.” 이런 식으로 협박 공갈했고, 목사가 협박 공갈하기 전에 이미 본인들이 마귀로부터 협박 공갈을 받으니까 목사가 설교를 그렇게 해도 그게 동의가 되네요. 납득이 되는 거예요, 납득이. 진짜 복음 알면 성령이 있으면 어떻게 돼요? 누가 이야기한 유명한 말 있잖아요. “어이가 없네.” 이래 되거든요.

어이가 없네, 이래 돼야 되는데 납득이 되네. “맞아. 주의 종이 하는 말이 하나 틀린 말이 없어. 그래 애가 가출하는 것이 내가 평소에 십일조 두 번 빼먹고, 아이고 주여…….” 천주교 문자 나오는데, 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니 탓 아니야. 그게 니 탓 아니거든요. 목사도 마귀 들렸고 교인도 마귀 들려서 전부 다 뭐냐? 마귀가 배후에서 똑같이 시켰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가 불행한 것이 내 탓이라는 거예요.

주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가 불행을 논하지 말라.” 말씀을 주신 것은 이겁니다. “길을 비켜라.” 말씀 되신 주님이 자기 자리 찾아가기 위해서 주의 몸,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 찾아가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하나의 길을 비켜야 돼요. 민수기 21장 21절, 22절 누가 읽어보세요.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물도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당신의 지경에서 다 나가기까지 왕의 대로로만 통행하리이다”

통행, 통과만 하는 거예요. 통과만 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아모리 왕 시혼이 뭐라고 뒤에 나오느냐 하면 나 너거들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예요. 자, 여러분들이 콜라 병이든지 병 있잖아요. 콜라병, 맥주병, 유리병. 유리병과 파이프의 차이점이 뭡니까? 파이프나 터널의 차이점이 뭐예요? 유리병은 통과하는데 뒤에 막혀있지요. 그 자체적으로서 어떤 종단점이 있어요. 끝점이 있어요. 그런데 파이프는 바람이 분다든지 연기가 나면 통과하지요. 터널도 마찬가지죠. 막혀서 무슨 터널이겠어요, 뚫려야 터널이죠.

주님께서는 말씀이 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하는 거예요. “아 말씀 지키면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주께서 언어를 가지고 방금 제가 한 그걸 이야기했거든요. 이 말씀을 지킴으로써 내 백성이 되리라. 거룩한 백성이 되면 내가 너를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그 말씀을 지키는 종단점으로 본인의 몸을 설정해버렸어요.

여기 나오는 아모리 족속이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둘 다 인간이거든요. 똑같은 인간이니까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시킨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는 저들과 같이 이방민족과 달라.” 다르다고 해도 어느 점에서 다른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민수기 21장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24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칼날로 그들을 쳐서 파하고 그 땅을 아르논부터 얍복까지 점령하여 암몬 자손에게까지 미치니 암몬 자손의 경계는 견고하더라” 이렇게 돼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아모리 족속을 뚫어버렸지요. 칼로 쳐버렸다 이 말이죠. 뚫어버렸으니까 막힌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막힌 게 없지요. 그러면 거기에 이스라엘이, “어디서 우리의 가는 길을 막아. 어딜 까불고 있어.” 하고 뚫어버린 거예요. 뚫어버리니까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의 길이 뚫렸다고 생각했지요. 막혔다고 뚫렸으니까 내 길이 막혔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그거는 오산이었습니다. 그 뒤에 이스라엘의 길이 뚫린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약속이 뚫린 거예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어 나르는 기관차 또는 하나의 열차 같은 존재인데 자신이 열차가 아니고 모든 말씀은 나한테 복 주기 위해서 한 거라고 오해를 한 겁니다.

그 오해를 민수기 22장에 보면 모압이 나타나는데 그 모압의 왕의 이름이 교회 안 다니는 애들도 잘 알아요. 왕 이름이 뭐냐 하면 발락이에요. 독일대표팀 축구선수 이름이 발락이거든요. 발락이 나서서 자기가 유리병 역할을 합니다. 막힌 역할을 하지요. 막힌 역할을 하면서 우리 토지를 통과 못한다고 버티고 나온 거예요.

이제 통과 못하는 정도가 아니고 쳐라, 선제공격을 한 거예요. 칠 때 하도 이스라엘이 유명하니까 거침없이 진격해서 들어오니까 걱정이 돼서 너만 신이 있느냐 우리는 신이 없느냐, 이런 식으로 반격에 나섰는데 그 신을 부르려면 선지자가 필요하잖아요. 그 선지자 이름이 뭐냐? 발람 선지자지요.

발람 선지자에게 뇌물 줘서 저주케 하지요.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족속의 때는 칼날로 쳐버리되 왜 모압 칠 때는 발람 선지자를 굳이 등장시키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제가 방금 설명했어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다? 이 자체가 엄청난 오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사용할 뿐인데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뜻에 최종 마감재로 여긴 거예요.

어떤 하나님의 말씀 지키면 복을 받는 그 복은 다 모조리, 모조리 이스라엘에게 쏟아져 담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영원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간의 자기 위주죠. 자기 위주의 태도로 주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다 해석을 해왔단 겁니다, 이스라엘이. 오늘날 교회가 교인들이 해석하는 해석과 똑같지요. 날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거예요.

그런 문구가 어떤 문구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고 저주의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 왜? 성경에 한두 군데 나오는 게 아니니까. 내 선을 위해서 믿을만한 걸 믿어서 착하다는 걸 믿는 거예요. 보니까 사랑의 하나님이에요. 그것도 긍휼의 하나님, 이걸 놓칠 리가 없지요.

매의 눈으로 찾아서 그런 것만 골라, 골라 마트에서 물건 담듯이 고르는 것 있잖아요. 좋은 것,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먹9:27) 이런 것 있잖아요. 나한테 유리한 것, 현재 내 행동에 하자가 없는 것, 내가 교회 잘 다니고 신앙 좋다는 걸 남한테 대외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구절만 다 뽑는 거예요.

그걸 제대로 하는 데가 네비게이토와 또 성경 외우는 데 있어요. 네비게이토와 여호와증인들, 신천지, 안산홍인가 있잖아요. 그 단체가 뭐냐 하면 너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말씀만 뽑아서 줘요. 특히 여호와증인 같은 경우에.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다시 처음에 돌아봅니다. 몸을 통해서 벗어난 죄를 묻는다. 우리의 몸을 통해서 사용하시되 그 몸을 피해가는 거예요. 몸을 주되 몸을 피해가는 거예요. 벗어난 죄를 묻는 겁니다.

그러면 몸의 한계를 이스라엘이 알아야 되지요. 내 몸은 무슨 한계 있습니까? 너는 모든 주위에 있는 것은 네가 이익 보는, 네가 선하고 의롭다는 그쪽으로 전부 다 긁어모았잖아. 그게 우리 몸의 한계에요. 그걸 피해가는 방법은 동원 되는 게 이겁니다. 짐승이 등장해요. 당나귀, 나귀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로 마주치기 전에 발람 선지자가 무엇과 마주쳤는가? 자기가 부리던 나귀와 먼저 마주쳐서 나귀 쪽에 누가 음성을 주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귀에게 입을 여사 주의 말씀을 주십니다. 따라서 여기서 공식 하나 만듭시다.

[말씀은 우리의 죄를 지적함이다.] 모든 말씀은 우리의 뭘 지적한다? 죈데 죄 이걸 다른 말로 합시다. 숨어있는 죄. 숨어있는 죄, 다섯 자로 너무 길잖아요. 이걸 두 자로 줄이겠습니다. 비밀. 비밀입니다. 인간은 자기 속에 비밀을 만들면서 의미를 바깥으로 쏘아대고 발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은 너희들이 몰라야 될 비밀이 나는 간직하고 있다, 이런 뜻이에요.

그 비밀은. 사람이 비밀이 있음으로써 바깥에 비로소 존재해야 될 의미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뻔히 알지요. 그러면 주의 십계명은 뭘 노리고 드론 공격하겠어요? 뭘 노리겠습니까? 이 비밀을 공격하는 거예요. 이 비밀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이건 고급언어지만 여러분들은 감당할 수 있어서 씁니다. 빵꾸. 아주 상당히 고급언어입니다. 우리의 엄밀하게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양말 빵꾸나듯이 빵꾸 내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뭐냐 하면 I am nonsense 나는 의미 없는 존재에요. 이게 뭐냐 하면 누구든지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는 겁니다. 어제 오후 설교인지 낮 설교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오훕니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모든 말씀은 공격이니까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 못 간다, 보지를 못한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말씀 듣는 순간 니고데모가 자기가 꼬깃꼬깃 감춰놓은 비밀이 탄로나버렸어요.

하늘나라를 가야 되는데 주께서 조건 하나, 조건이 들어왔지요.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 했는데 니고데모는 그 조건을 바꿨어요. 다시 태어나면 하늘나라 간다로 바꿨어요. 하여튼 말귀를 독하게 못 알아들어요. 왜? 항상 자기 이미지 관리가 기본이기 때문에. 주님의 조건은 안 된다고 주는 조건인데 이걸 되는 쪽으로 하면, 지가 머리를 굴려보는 거예요.

그리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엄마 뱃속에 들어갔을 때, 제가 오후 설교했지만,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자기가 지금 살아 있어요, 안 살아 있어요? 살아 있지요. 살았다는 것은 내가 의미 있게 움직인다는 뜻이지요. 의미 있다, 의미 있다, 의미 있다, 엄마 뱃속에 들어가 있다, 엄마 뱃속에도 의미 있다, 나왔다, 의미 있다. 다시 말해서 엄마 뱃속에서 나와도 삭제되지 않는 게 있어요. 나는 들어가 있을 때도 살아 있고, 나올 때도 살아 있다. 그것 주장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한테 욕 되게 얻어먹었습니다. 심한 욕을 얻어먹었어요. “너 뭐야?” “저 유대인 선생인데요.” “선생이면서도 네가 이 땅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을 그렇게 모르겠느냐?” 의미 없는 인간은 이미 의미를 갖고 오신 주님 앞에서 산 인간이 아니고 죽은 인간이에요. 죽은 존재에요. 이걸 모르는 거예요. 주께서 산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고 죽어있는 인간을 그냥 죽었다고 이야기하실 뿐이에요. 주님이 우리를 구박하는 것도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어요.

난센스, 의미 없는 거예요. 네가 재벌이든 뭘 해도 아무 의미가 없어, 우리는 이 땅에서. 처음부터 흙으로 와서 흙으로 가는데 무슨 의미 있겠습니까. 의미 없습니다. 의미 없는데 뒤에 우리 배후가 마귀가 너를 너답게 하는 가치 있는 뭐 하나는 네가 남한테 알리지 말고 비밀스럽게 뭘 간직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시켜서 비밀을 줘서 비밀의 내용은 선악 그거에요. 그래도 나는 착하다, 이런 거죠.

그럼 예를 들겠습니다. 이 비밀과 의미 어떤 관계인지 영화의 한 대목에서 잘 알 수 있는데요. 이거에요. 누구냐 너? 십오 년 동안 군만두만 먹인 너는 누구냐? 최민식이 나왔던 영화 있잖아요. <올드보이> 유명한 대사잖아요. “누구냐 너?” 자, 나가 있지요. 여관에 갇혀서 십오 년 동안 군만두 먹은 사람은 바깥에 누구냐를 뭐로 본다? 나의 적으로 보지요. 모든 타인은 일단은 적입니다.

악수하는 게 서양에서 나온 예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내 손에 칼을 들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과 결투할 마음이 없다는 뜻에서 빈손을 내미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뭘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내가 뭐를 지키고 있는지 본인은 몰라요. 뭔가 한 가지 비밀은 있는데 그냥 지키고 싶어요.

그 비밀에 너 뭐 지키고 싶어? 나다움. 나다움이 뭔데? 나의 자긍심. 자긍심 내용이 뭔데? 자존감. 자존감?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네 안의 자긍심, 자존감, 자아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데? 나는 어떤 경우라도 의롭다, 그거에요. 나는 의롭다, 에요. 내가 사람 열 명 죽이고 교도소 가고 사형 언도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의롭다, 에요. 의롭다는 말은 다른 말로 나는 정의롭다, 에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니가 거룩하게 되어라, 정의로워라 하는 말은요 이게 성경의 말은 그렇게 말한 주님이 우리한테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우린 이미 의로워요. 선악을 알았다는 자체가 우린 악을 버리고 선으로 가겠다는 자체가 이미 우리는 내장돼 있는 확고한 의로운 자에요. 의로운 자고 거룩한 자고 경건의 자질과 possibility 가능성 있는 잔데 그게 자꾸 의롭다, 의롭다 하니까 좋아 하나님 뜻이라는 데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 우리가 맞춰드려야지. 그다음부터 본격적으로 경건생활하고 있는 거예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데 한 결 같이 합심해서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온 교회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선악을 지식 자체가 죽을죄인 것을 인정을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인정 못하느냐? 그것만 있으니까. 마지막 남는 것은 나의 의로움, 그것 하나 있으니까. 나의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우린 얼마나 남에게 양보를 하고 심지어 자기희생을 하고, 남의 나라 전쟁에 가서 나는 군인이다, 의로운 전쟁에 가담하는 게 마땅하지 월급 없어도 가겠다. 가고. 내 자식 지키는 게 부모의 마땅한 희생이 되고, 남의 자식 말고 지 자식 지킨다고 희생하고요.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독일 광부로 돈 벌러 가고 여자는 뱃속의 애가 낳아 키웠는데 나중에 날아온 것은 뭐냐 하면 댁의 아저씨 죽었습니다, 라는 사망통고 받았을 때 여자가 애 하나 키우려고 부천 그 동네에 시장에서 시래기 국 팔면서 애 도망가니까 팔 묶고 젖 먹여가면서 애 그렇게 키운 거예요. <수상한 그녀>에 나오는 <하얀 나비> 노래에 보면 그 대목이 나와요. 불쌍해서 눈물이 나 죽겠어. 이십 대 초반에 애 하나 키운다고. 그렇게 키웠거든요. 그게 그래서 구원받습니까? 그래서 구원받아요? 희생적인 모성애로 구원받습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비교해도 예수님과 비교해야 되는데 맨날 짐승하고 비교해. 짐승보다 낫다는 거예요. 짐승과 비교하려면 마귀와 비교하고 뱀하고 비교해라. 뱀이 우리보다 더 지혜롭고 뛰어나요. 뱀보다 못해요. 가장 뱀에 가까운 사람은 성경에선 네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뱀의 자식이에요. 악마의 자식.

바리새인보다 의가 뛰어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날고뛰어도 바리새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럼 정통 바리새인들이 지금도 유대교에 예루살렘 근처에 모여 살거든요. 펭귄 복 입고 시커먼 옷 입고 돌아다녀요. 아이고, 보면 덥지도 않은가. 무슨 그런 짓을 하는지 머리 기르고 신명기 말씀대로 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비밀을 가질 자격이 안 됩니다. 문제는 이스라엘도 그렇고 모든 인간이 뭔가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의 정체를 몰라요. 최초의 사건 선악과 따먹을 때 악마가 유혹했다는 그 유혹이 자기의 최고 가장 깊숙한 중심에 아직도 유혹자로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몸을 지녔기 때문에 영을 상대를 못해요. 악마란 영을 이기질 못해서 하수인으로 그냥 행세할 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도 말씀을 마귀 들린 인간의 표상으로서 그냥 말씀과 만나는 겁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주게 되면 그들은 십계명을 실어 나르는 하나의 열차가 되죠. 그런데 자꾸 이상하다, 이상해. 저 이방민족과 우리가 다를 바 없는데 왜 우리는 진즉에 안 잘리고 계속해서 역사가 이어져나가지, 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마태복음 22장 보겠습니다. 22장 마지막에 41절부터 빨리 읽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바리새인 제가 언급했지요. 악마의 정신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악마로 살면 이렇게 산다고 보여주는 자칭 경건하고 거룩한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상투적인 말은 이겁니다. “나는 저들과 같지 않다.” 자기의 의로움을 위해서 주변에 자기보다 못되게 나쁘게 사는 자들을 의도적으로 포진해서 자기 이미지를 옆에다 둘러치게 하는 거예요.

천하에 나쁜 인간, 저런 미친 인간. 나르는 비행기 문을 열다니, 이런 것 있잖아요. 이런 포진된 인간들이 뉴스 시간에 막 나오는 거예요. 이 뉴스를 보는 사람마다 그때부터 뭐가 되느냐 하면 힘든 인생을 힘 있는 버텨내는 힘이 돼요. 내가 망해도 아직 망하진 않았구나. 내가 못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보다 못된 인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막가는 집안, 아들이 아버질 죽였네. 우리 집안은 그 정도는 아니라서 괜찮은 집안, 자식 하나 교육 잘 시켰구나. 포진하는 것,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본인의 비밀에 아무 내용은 없어요. 자기보다 선악지식은 발휘되고 있고 안의 내용은 뭔지는 본인이 몰라요. 그러니까 자기가 선하는 지향성은 있고 악한 자를 불러다가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는 차별화를 통해서 자기 의롭다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그러한 일로 하루하루를 everyday 매일 살아가는 자들, 바리새인들입니다. 멋있는 보람으로 사는 재미.

그런 바리새인에게 뭐라고 묻느냐 하면 주께서 드론 날리죠. 이렇게 묻습니다. 성경해석이 날아갑니다. 그 동원된 해석이 뭐냐 하면 거기에 다윗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편 110편을 거론합니다. 42절부터 짧은 거니까 읽어볼게요.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자, 그리스도는 누구 자손이냐 할 때 바리새인들이 답변할 때 어디에 근거해서 답변했습니까? 성경에 근거해서 답변했지요. 성경 빠삭하다, 잘 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잘 알지? 그럼 물을게. 해석 들어갈게.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여기서 예수님께선 시편 110편에 있는 “주께서 내 주에게” 여기 주가 몇 명 등장합니까? 두 명 등장하지요. 이거는 그동안 바리새인들이 유보시켜놓은 말씀이에요. 유보를 시켰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감히 성경해석 못하는 대목이 성경에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주께서 내 주에게. 그런데 시편 110편은 그렇게 안 돼 있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해석을 집어넣은 표현대로 성경 말씀을 변경시켜서 이야기하셨는데 여기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대목이에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 이 대목에서 여호와가 누구냐는 거예요. 앞의 여호와가? 그 뒤에 주에게, 주님이죠. 어떻게 주님이 주님이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들 머리로서 해석하는 건 뭐냐? 주님은 하늘에 계시고 하늘에 계신 주님 말고 땅에 내려온 주님이 따로 이 땅에 오시는데 그 주님이 메시아다, 이렇게 해석하면 되겠지요. 인간들 입장에서. 그 정도 해석은 바리새인들도 할 줄 알아요. 어쨌든 성경해석은 해야 되니까.

그다음에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이 도저히 인간 속에 소위 비밀이 있고 인간은 비밀을 간직하는 조건 하에 나는 의로운 인간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는 스스로 만든 조건을 쥐고 있는 사람 같으면 도저히 해석이 안 되는 해석이 나와 버려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마22:45) 이 대목입니다.

이에 46절에,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누가 대답 못했다고? 바리새인들이. 바리새인들이 대답 못하면 어떤 사람도 대답 못합니다. 바리새인 아래 있으니까, 지식이.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예수님께 묻는 자도 없어요. 뭐지? 예수님께서 먼저 공격한 대목이거든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공격할 때에 언젠가 대전에서 이 대목을 강의한 느낌 드는데 하다보니까.

어느 단어를 주목하셔야 되느냐 하면 ‘그의 자손’이에요. 주님의 자손이 주님 된다, 이게 성립되느냐 하는 거예요. 주님의 자손이 주님 되려면 이게 시간 선으로 직선이 되면 안 되고요. 직선이 꼬부라져야 돼요. 꼬부라져서 시작점과 끝점이 뱀 똬리 튼 것처럼 하나로 만나야 돼요. 그러나 이것은 뱀은 꼴 수 있지만 이미 시작한 것은 과거에 날아갔잖아요. 과거가 현재와 만나는 것은 인간의 인식 속에서는 이건 성사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거에요. 선악지식의 표출 또는 표현방식은 시간을 따라서 점점 더 선한 쪽으로 의로운 쪽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선악지식은 꼬부라진 시간을 계산하는 게 아니고 그냥 계속해서 미래의 화려한 미래를 꿈꾸면서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지금보다 더 나아지겠지, 갈수록 더 나아진다는 시간의 의식에 의지해서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선악지식이 갖고 있던 한계고 그것이 인간의 비밀스러움 속에 담겨있었던 겁니다. 주께서 그걸 표적을 공격한 거예요.

주님께서 주장하는 것을 뭐냐 하면 말씀은 너희들 찾아가는 게 아니고 말씀은 말씀 주신 주님이 말씀 자신을 향하여 주신 말씀이 말씀이에요. 그래서 다 이룬 거예요. 주께서 다 이룬 것. 말씀은 주님이 주께 찾아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에게는 의미가 있습니까, 없어야 돼요? 인간에겐 의미가 없어야 돼요.

인간에게 의미가 없던 시절은 어린아이 시절밖에 없어요. 어린아이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몸에서 벗어난 본능, 배고플 때 울고 잠 안 잔다고 칭얼거리고. 너도 옛날에 그런 적 있었지 어릴 때. 우리는 오래돼서 잊어버렸지만 너는 아직까지 기억 날 거야. 어린아이의 특징은 그냥 땡강 부리는 것밖에 없어요. 몸에서 벗어난 거예요. 어린아이에게 몸이 있다는 것은 발악하고 땡강 부리고 횡포부리는 그러한 원천이 되겠지요.

몸 자체에서 어떤 의미를 끄집어낸다? 못 끄집어내요. 바르게 살고 그런 것 없어요. 어린아이는 몸보다 본능이 더 세니까. 타고난 부모의 죄성이 더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게 어린아이 시절이거든요. “저거 누구 닮았노?” 누구 닮기는 자기들 닮았지 누굴 닮았겠어요. “이게 어디서 튀어나와서 이 모양이냐?” 어디서 튀어나오긴 바람 피워서 다른 아이 하나 건졌어요? DNA 친자확인해볼까,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마귀가 준 선악지식으로 이걸 덮어놓고 자아의 의미로 대외적으로 사회활동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진짜 덮어놓은 진짜 말썽꾸러기는 어디 있느냐? 비밀이란 공간에다 눌러놨어요. 이게 꿈에는 튀어나와요. 제멋대로 꿈에는 튀어나오는 데 우리는 의식적으로 윤리도덕으로 이걸 꾹 누르면서 우리는 선악적으로 악을 버리고 선한 쪽으로 나름대로 괜찮은 존재인 것을 인정하는 식으로 그렇게 나온 겁니다.

자, 그러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는 주님의 지시의 변천사가 돼요. 역사, 연대기. 주님의 지시가 어떻게 더 깊숙이, 깊숙이 가시가 되어서 인간이 모르는 비밀에 접근해가는 경로가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처음의 이스라엘은 이방나라로 비교했잖아요. 신나게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을 편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나게. 어디까지? 약속의 땅에 갈 때까지.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또 오해하기를 땅 없는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기 좋은 토지를 줬다고 젖과 꿀이 흐르는 토지를 줬다고 또 오해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 들어갔잖아요. 기적적으로 들어갔으니까 이제는 챙길 것 다 챙겼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뭘 버리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할 수밖에 없어요. 왜?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산다는 말은 그만큼 내가 지금 정당하고 존재하는 게 의롭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반영해주고 있다는 증거로 본 거예요. 우리가 워낙 착하니까 젖과 꿀이 흐른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지시가 움직임이 거기서 멈추겠습니까, 더더더 하고 진격하고 나가겠습니까? 나가겠지요. “비켜라, 이놈아!” 옛날에 이방민족들한테 비켜라 이것들아 한 것처럼 약속의 땅 이후에는 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보고 비키라고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신명기 5장 봅시다. 신명기 5장 말씀이 이렇게 빨리 진도 나갈 줄 생각 못했어요. 5장 11절,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고 돼 있지요.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 11절 그죠? 그다음에 12절, 안식일 나왔습니다. 그다음에 15절, 애굽 땅을 기억해서 안식일 지키라. 16절, 부모 공경하라. 17절, 살인하지 말라. 18절, 간음하지 말라. 19절, 도적질하지 말라. 20절에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21절에 탐내지 말라.

이 말씀의 해석은 순식간에 다 풀려버렸어요. 뭐냐 하면 비켜라. 주께서 이 말씀의 위반자로서 이스라엘로 확인시키는 일들을 벌입니다. 이거는 2계명 위반, 2계명 위반, 4계명 안식일 위반, 그다음에 살인하지 말라, 5계명, 6계명, 7계명, 8계명, 9계명 그걸 위반하게끔 하는 사태가 약속의 땅에 먹고사는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이 십계명을 철저하게 위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조건들이 달라붙는 땅이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십계명 해석 끝, 끝났지요. 어떻게? 환경 더불어 위반. 내가 나쁜 생각 위반이 아니고 환경과 더불어 위반. 나는 살인 안 해야지. 안 할 수가 안 하고는 못 베기는 만드는 환경이 와요. 환경이 온다고요.

“오늘 나 못 참는다. 너 죽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네가 떼어먹어? 내가 그렇게 성질 급한 게 아닌데 성질이 확 올라오네. 오늘 죽었다. 연장 챙겨라, 가자.” “여보, 참아라.” “못 참아, 못 참아.” 이런 것도 있고. 아내와 손잡고 가는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술 먹고 아내 희롱할 때 옆에 마침 우연히 마침 삽이 하나 있네. 누가 갖다놨어요? 우리 주님이 갖다놓은 것. 오늘 삽한테 찍혀봐라. 왜 삽이 거기 있느냐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 아셔야 될 게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을 조장한 분은 누구다? 주님이 조장한 거예요. 왜?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살아도 아무 탈 없이 남한테 욕 한 번 안 하고 그냥 곱게 보람상조에 의뢰해서 죽어도 지옥입니다. 죄인입니다. 주께서는 말씀 자체 환경이 너와 함께 있다는 걸 인식하는 이게 성도에요. 그게 받아지는 게 성도입니다.

이게 나를 지목하고 지적하는 엄청난 나를 죄인 되게 하는 상황과 더불어서 나는 짧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어요. 마음속으로 간음하는 것도 간음죄고 남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고. 주께서 최종적 변천사에서 마지막 변천사가 종말이거든요.

종말이 오게 되면 부자 된다는 것은 부자를 추구하는 것, 부자 된다는 자체가 어디 간다? 천국에 못 들어가요. 우리 한국에서 추리닝만 입어도 아프리카에선 중산층이라니까. 상대적으로 가난, 부자 그것 의미 없습니다. 말씀은 네가 어떤 경우라도 돈이 없더라도 부자 되고 싶어 하는 마음 있는 이상 그건 천국 못 가요.

따라서 이 상황이 주께서 주의 자손, 주님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보고 비키라는 거예요. 비킬 줄 알 때 그게 바로 어린아이 같은, 앞에 지나가고 우린 연도에 비켜서야 돼요. 세례 요한처럼. 우린 외치고 주께서 오신다, 하고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나를 보지 않고 내 엄밀한 비밀 같은 것 없어요. 나 말고 주님 오시는 그 자체를 새로운 비밀로 교체가 되는 겁니다. 내 비밀 아니고 저 비밀, 다 이루었다함이 비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첫째 시간 제목은 비켜라. 길을 비키세요. 길을 비켜야 돼요. 우리는 항상 여기, 저 말고. 바르게 살래? 아니야, 여기. 늘 비킴으로서 나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내게 없고 오직 주께서 하신 일, 다 이루신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대전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6.25설교 질문  (0) 2023.06.28
십자가18강-자기부인  (0) 2023.05.31
십자가17강-확실성과 진리  (0) 2023.04.26
신나는 몰락  (0) 2023.04.26
십자가16강-투명성  (0) 2023.03.29